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FLOW

일루젼 2012. 7. 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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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 6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최인수 옮김/한울림어린이(한울림)

반양장본 | 544쪽 | 225*155 | ISBN(13) : 9788958270096

2004-07-05

 

 

 

후반부가 조금 아쉬운 책.

전반기에 두근두근한 전개와 궁금증이 생기게 만들던 아이디어가 끝으로 갈수록 다소 지지부진하게 변질되었다.

 

아, 이 책은 소설이 아니고 한 학자의 이론을 현 생활에 접목시켜나게 하려 했던 책이다.

 

요약정리하자면, 사람은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는 'flow' 상태- 즉 흐름에 실린 상태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1분이 1시간 같기도 하고 반대로 1시간이 1분 같기도 하다는 것.

 

그때야말로 집중력과 창조력, 이해력이 극도에 다다른 상태이므로 의식적으로 플로우 상태로 들어가자는 이야기.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해보자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뭐랄까 순간적으로 아무런 다른 잡념없이

'이거 하고, 이거 하고, 그 다음 이거, 이거 처리하고, 이것까지. 완료.'

하고 시계를 보면 겨우 10분이 지나있기도 하고.

 

책을 읽다보면 잠시 잠깐 읽은 것 같은데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동물들을 항시 플로우 상태로 보았으며, 진정한 플로우는 '자'를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은 '자'가 다시 강조되는 상태라고 보았는데.

그 점에 있어서 나와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단 한 가지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들어오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인지한다는 점에서는 틀림없이 유사할 수 있으나 동물들의 상태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낸 상태라기보다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구현된 결과라고 생각하며, 그에 더해 침팬지들 같은 유인원들은 항시 flow 상태가 아니다.

 

즉 flow라는 것은 지성을 가진 생물체가 의도적으로 한 곳에 집중력을 쏟아부어 만들어지는 상태인데-

 

더 후반에서는 미개인들의 내적 평화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혹평하는 등, 다소 통일되지 못했다고 할 지.

은근한 편견이 있다고 할지.

그 응용에 있어서도 뭐. 흠.

 

후반부에서는 주로 '어떤 상태가 플로우인가'를 놓고 이런 저런 예시를 들며 저자 본인의 생각을 펼치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간 것 같다. 또 아무리 예시가 달라도 결론은 '이럴 때 이런 것이 플로우다!'이기 때문에 반복됨에서 오는 지루함도 있고.

 

이 부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발췌]

 

#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이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1 가량은 의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다. 이 '소중한' 여가 시간조차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신을 전혀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 미국인들은 여가 시간의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으로 써버린다. 텔레비전을 볼 때 시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너무나 뻔하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사고 능력, 기억 능력, 우리의 의지 등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집중력, 사고의 명확성, 자신감 등이 매우 낮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 외에 대다수 사람들의 여가 활동도 역시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거나, 사람들과 노닥거린다거나, 창밖을 멍하니 쳐다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 우리의 의식 상에 떠오르는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주의인 까닭에, 또한 기억, 사고, 느낌,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의를 심리 에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주의를 에너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도한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주의가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 프랑스의 심리인류학자 카이유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임ㅡ넓은 의미로 모든 종류의 놀이 활동ㅡ을 각 활동이 제공하는 경험에 따라 네 개의 큰 범주로 나누었다. 우선 '아곤(agon)'은 경쟁을 하는 게임이다. 대부분의 스포츠와 체육 활동이 이에 속한다. '알레아(alea)'는 주사위부터 빙고에 이르기까지 '확률' 또는 '요행'을 바라는 게임을 말한다. '일링크(ilinx)' 또는 '버티고(vertigo)'는 일상적인 지각을 변형시켜 의식을 바꾸는 활동을 말한다. 회전 목마, 스카이 다이빙 등이 여기에 속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대안적 현실이 창조되는 활동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춤, 연극, 예술 관련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 그러나 기억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의 삶은 지극히 메마른 것이 될 수 있다. 20세기 초의 교육 개혁가들은 이런 가능성을 간과해 버렸다. 그들은 연구 결과를 인용해, '기계적 암기'가 정보를 저장하고 습득하기에 효율적 방법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들의 노력 덕택에 기계적 암기법이 학교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기억을 하는 이유가 단지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개혁가들의주장이 정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의 통제를 최소한 문제 해결 능력만큼 중요한 것이라 판단한다면, 복잡한 양식의 정보를 암기한다는 것은 결코 헛수고라 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신이 그렇지 않은 정신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성과 기계적 암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를 들어, 가장 독창적이었던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음악, 시 또는 역사적 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외우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내적 상징 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간결한 의사 소통을 중시하며, 그밖의 것들은 하찮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심이나 지식을 갖고 잇는 협소한 화젯거리를 벗어나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 중에서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토마스 쿤은 또한 '정상'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지식의 변형이나 진리의 발견, 혹은 삶의 조건의 개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은, 자신이 연구만 잘하면 다른 어떤 사람도 지금껏 풀지 못했던, 혹은 잘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 이와 같은 대리적 참여는 시간을 낭비하는 데서 오는 공허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달래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이것을 실질적 도전에 투자되는 주의력과 비교할 수 없다. ...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기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 문화, 심지어는 고급 문화까지도 모두 우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 반면 우리에게는 사생활도 중요하며, 가끔씩은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우리는 곧 우울해지곤 한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당면한 도전도 없으며 별다른 할 일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고독감으로 인해 심하지는 않지만 감각을 못 느끼는 듯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을 참아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어떠한 임무도 성취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가 혼자 남게 되었을 때라도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고독 속에서 기쁨을 느기는 사람은 야수나 신(God), 둘 중 하나이다.' - 베이컨

 

 

# 무조건 적인 수용과 사랑은 자녀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부모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들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위협한다면, 그 자녀가 가진 아이들 특유의 명랑함이 점차 만성적 불안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안녕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느끼는 아이는 두려움 없이 마음 놓고 세상을 탐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녀는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심리 에너지의 일부를 할당해야 하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그만큼 줄게 된다. 이와 같은 어릴 적의 정서적 안정이 장차 자녀들이 자기 목적의 성격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건 중의 하나가 된다. 정서적 안정 없이는 자의식을 버릴 수가 없으므로 플로우를 경험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는 과정은,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하려 애쓰는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독창성이 결여된 화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마음을 미리 정한 후 끝가지 본래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반면, 창의성이 풍부한 화가는 같은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느낌은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그림을 게속 수정해 나가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만일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잘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며, 캔버스 위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게 마련이다. 반면, 완성된 그림이 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 둔 고정 관념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무시해 버리는 화가의 그림은 진부한 작품이 되고 만다 .

 

 

#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상호 작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역설적인 결과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아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인 사람은 심리 에너지를 자신이 포함된 체계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인과 체게간의 결합으로 인해 자아가 복합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편이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은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시종일관 한결같은 의미를 갖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최소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이후부터,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은 존재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우연과 비인간적인 요인들이 우리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써 왔다. 모든 사람에게 적요오디며, 자연과 인간 경험의 날줄과 씨줄 속에 내재한 어떤 지고한 목표가 있다는 의미에서라면, 우리 인생에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곧 인생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와 문명의 많은 부분은,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와 후손드를 위해 목적 의식을 창조해 내려고 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형성되었다. 인생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이러한 사실을 체념을 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 생존 요구가 집요하게 이어질 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가족이나 더 넓은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투자할 만한 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이익 추구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회사, 지역 사회 혹은 국가의 안위가 주된 의미를 부여해 주게 되는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반성적 개인주의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정된 소수만이 보편적인 가치와의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단계들은 실제로 반드시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의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행복한 미개인'의 전설은 보다 세분화된 문화에서 온 방문자들이 눈에는 부럽게 비치는ㅡ문자가 없는 부족들이 외적 위협을 받지 않을 때면 흔히 보여주는 평온함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이루어진ㅡ 것이다. 그러나 그 전설이 전적으로 다 진실은 아니다. 배가 고프거나 아플 때도 '미개인'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더 자주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적 진보가 뒤떨어진 민족들이 갖는 내적 조화는 제한된 선택과 안정적 생존 기술로 대표되는 그들 생활의 한 긍정적 단면일 따름이다.

 

 

#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번도 어떤 목표에 집중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주변 사회의 목적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없는 사람드이 대다수였다. 토요일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이들 대상의 무의미한 감각주의적 쇼는 위와 같은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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