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청예
출판 : 팩토리나인
출간 : 22.11.09
갑자기 잉크에 빠져고 말았다.
원래도 문구류는 좋아했지만, 악필인 편이라 필기구는 모으기만 했지 제대로 써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파이롯트의 이로시주쿠.
세일러의 시키오리.
글입다의 펄 잉크.
곧바로 펜까지 점프하기엔 부담스러워서, 펜은 적당한 선에서 가지고 놀(?) 생각이다.
지금까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카쿠노 마도로미 F닙. 뽑기가 잘 된 건지 무척 부드럽고 흐름도 좋다.
색분리 잉크나 펄 잉크를 써보고 싶긴 한데, 내 취향은 EF닙이라... 가장 적절한 타협점이 카쿠노다.
라미 사파리를 몇 차례 사망시키고 만년필은 나와는 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다.
펠리칸으로 넘어가기 전에 프레피+세일러 카트리지, 진하오20/마존 A2+파이롯트 카트리지, 트위스비 고 B닙+글입다 잉크 등 재미난 조합들을 실컷 즐겨보려 한다. (참고로 모두 호환된다)
음. 다 쓸 수는 있을까. 그건 미래의 나에게 맡기도록 하자.
앤솔러지 작품들을 읽으며 알게 된 작가, 청예.
제6회 한국과학문화상 수상 작가라는 걸 알게 되어 조금 놀랐었다. 아주 간발의 차로 몇 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물망초 식당>은 앤솔러지 작품을 통해 상상했던 청예 작가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작품이었다. 훨씬 따뜻하고, 반듯한 이야기.
<연옥당> 생각도 났는데, '음식에 기억과 사연을 담아 풀어낸다'는 형식이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인 문망초가 기한 내에 식당을 물려받을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가,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어두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음, 개인적으로는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해도 좋을 법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연들에 담긴 고민, 그 고민을 마주하는 이들의 온도,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모습들이 약간은 간지러웠다.
팍팍한 삶이 힘겨울 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글을 찾는 이들이 있고 염세적이거나 기이한 글을 찾는 이들이 있다.
전자이신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자신의 평온함을 나누고 싶은 분들께도.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청예'는 아니었지만, 아직 많은 작품을 읽어본 것이 아니니-
어느 쪽이 '새로운' 면인지는 판단 불가다.
제이허빈의 물망초 블루가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즐거웠다.
- 엄마가 드디어 계약서를 내밀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검정 볼펜을 달칵거리며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방금 막 프린트된 종이에는 아직 열감이 남아 있다.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져 새하얗게 빛나는 단면, 그 위에 출력된 검정 글씨를 빤히 바라봤다. 엄마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돈되어 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의 문장들을 읽어보니 짧게 웃음이 나왔다.
- 참 엄마다운 계약서였다. 친딸에게 이렇게까지 까탈을 부릴 필요가 있나. 별다른 조건 없이 식당을 넘길 거라고 기대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야무진 욕심을 품었던 내가 우습기도 하고 한결같은 엄마가 어찌 보면 귀엽기도 했다. 실력으로 당당히 인정받아 보라는 거겠지? 하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계약서 조항이 의아했다.
- 당신이 그랬죠, 스무 살 넘어가면 절대 함부로 서명하면 안 된다고. 서명란에 이름을 기입하기 전에 계약서를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 모습에 엄마도 모전여전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나만큼이나 간결하게 웃었다. 우리 모녀는 숨소리가 반쯤 섞인 웃음을 서로 교환한 후에야 눈을 맞추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 모든 실패 조건을 깔끔히 보완하는 성공 조건이란 의외로 단순하다. 금귀비 정찬은 일대일 맞춤 코스 요리를 제공한다. 한식, 양식, 일식, 중식 무엇이든 상관없다. 예약자를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요리를 만들어낸다. 대신에 100%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므로 방문을 원하는 손님은 까다로운 양식에 맞게 내용을 작성해야 한다. 선호하는 맛과 향, 최근 겪었던 일, 식사 시간으로 당신이 찾고 싶은 가치, 어린 시절 당신을 즐겁게 했던 음식, 극복하고 싶은 기억이나 상처 등 꽤 복잡하고 번거로운 질문을 던진다. 예약자가 기꺼이 과정을 감수해야 식당은 오직 그만을 위한 코스 요리를 제공한다.
- 한마디로 이곳은 감성케어 시간을 판매하는 곳이다. 식당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주는 것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식은 계란찜을 애피타이저로 내놓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손님 성향을 최대한 반영하여 최선의 의미를 담아낸 결과이리라. 덕분에 가격은 더럽게 비싸다. 오너의 딸인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신에 100% 신뢰 가능한 정성과 노력을 약속한다. 이게 식당의 가치, 아니 우리의 가치다. 그럼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사람들은 금귀비 정찬에서 요리와 더불어, 다른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 같다.
- 이윽고 도착한 두 번째 물음, 택배 물건들도 다 가져다 놨냐는 말에도 짧게 응수했다.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원래 멀티가 안 되는 성격이라 감자를 골라내며 오늘 있었던 일을 충분히 브리핑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집중력이 흐트러져 감자 한 덩이를 놓치고 말았다. 엄마가 놓친 녀석을 주워 들고는 옆으로 바짝 다가와 마저 물음을 이어갔다.
"처음 가보니 어때? 할 만 하겠어? 손님은 어떻게 모셔올 거고?"
나는 한동안 입을 꾹 닫고 있다가 건조한 대답을 뱉었다.
"엄마, 나 이것 좀 하고."
"참나."
서운하다는 말을 축약한 짧은 감탄사를 던지고서야 방해꾼이 부엌을 떠났다.
- 그가 대화에 참여해 준 게 다행이다.
"고치고 싶은 편식이 있긴 해서 왔거든요. 정말 사장님이 고칠 수 있을지..."
"심리적 편식이라면 제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알레르기를 고치는 의사는 아니지만, 음식으로 마음을 보듬는 요리사는 될 수 있을 거예요."
자신 있게 말을 하고서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이비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의 표정은 다행히도 평온했다. 그래서 더욱 긴장이 되는 건 왜일까.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와 고정된 입꼬리에서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는, 나같이 허술한 사람이 친해지기엔 다소 어려운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정적이고 절제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알고 싶어졌다. 첫 번째 손님이자 무언가를 편식하는 당신, 내가 꼭 고쳐주겠어. 부동의 얼굴에서 피어날 변화를 보고 싶다.
-꼴깍. 침을 삼키는 시간이 1초도 되지 않았다. 찰나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어려운 웃어른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기분이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뭐라도 말을 해줬으면 ...
- 매정하기보다는 굉장히 선을 지키는 듯했다. 손님이 아닌 비즈니스 상대와 대화를 나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 모습은 격식을 갖추는 사람이 내게 베푸는 배려였다. 억지로 공감을 쥐어짜지 않게끔 자리를 피해 주려는 어른이었다.
"그때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공간이 조금 썰렁하니 난방을 부탁드립니다."
찌르면 퍼런 피 나오겠다. 약점을 말하느라 잠시 흐트러진 모습을 재정비하여 각 잡힌 도시인으로 돌아간 그가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 "저기요."
한마디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이 떠올라서 그를 부른 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고 있는 얼굴에선 의문이 보였다. 어, 일단 불렀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 머리가 치열히 돌아갔으나 눈과 입이 머리의 신호만 기다리며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지체할수록 그의 얼굴을 더 오래 감상해야만 했다.
"선생님 이름... 안 가르쳐주셨는데요."
- 아, 생각이랑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버렸다. 이름을 물어보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진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는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긴장했나 보다. 우물쭈물하며 바라보기엔 꽤나 호감형인 그의 얼굴 탓이었다. 나는 준수하게 생긴 사람을 보면 으레 긴장했다.
"제 이름은 변유현입니다."
그는 굉장히 납득이 되는 질문이라는 듯 매우 미안해하며 순순히 이름을 뱉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하, 네." 하고 추임새를 넣고선 식당 문을 열어주었다. 그와 짧은 목례를 나누었다.
- [아이가 김치를 못 먹으면 물에 헹궈서 주세요.]
잘 교육받은 성인에게 적용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김치를 아주 잘게 썰어 밥과 볶아주세요.]
이 정도로 성인 남성을 속일 순 없으리라. 찾아본 김치 편식 대응법이 대부분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것들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척척박사들만 모아놨다는 인터넷이지만 내 비즈니스에는 무용했다.
- 돌파구는 오히려 책 속에 있었다. 심리적 편식을 깊이 알기 위해 정신심리학 관련 서적을 찾아 읽은 게 도움이 됐다.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는데, 편식이란 음식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었다. 맛과 식감, 재료 특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면 편식자는 음식이 아닌, 그 음식에 얽힌 기억을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책은 거부감을 공포 혹은 두려움이라 기술하였다. 유현 씨가 김치를 향해 표현하는 거부감도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어떻게 없앨지가 관건이었다. 책도 그건 알려주지 못하더라.
- "방금 나간 검정 셔츠 남자."
유현 씨 인상착의였다.
"웃고 있더라고."
- 나는 하얗고 보드라운 언덕을 손 하나로 폭 감쌌다. 애정을 담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착하게 쓰다듬어지는 둥근 머리였다. 녀석이 편안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와 너 그리고 유현 씨에게 모두 좋은 밤이구나. 선명한 확신이었다.
바람개비가 돌고 있었다.
- '정말로 약속할 수 있겠어? 힘든 길일 텐데.'
'아냐, 할 수 있어. 약속!'
'좋아, 아빠랑 약속이다. 꿈을 가진다는 건 마음에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를 심는 일이란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돌아가게 할 수 없어. 부디 네가 살아가며 좋은 바람을 만나고 또 너른 땅을 찾길 바란다.'
- 아빠가 해준 요리에는 구석구석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우리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나는 또다시 그리움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다 간 시간이 참 짧았다. 사랑으로 혀끝에 녹였던 수천 번의 소금과 설탕은 독이 됐다. 평소 위가 약했던 아빠는 위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 모든 요리 비결을 엄마에게 전수해 주었다. 엄마는 주방에서 매일 눈물만 흘리는 제자가 됐다.
- 마치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듯, 엄마가 아빠에게서 받아낸 요리 실력과 아빠의 생명이 반비례했다. 모든 수업이 끝났을 때 내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던 그의 마지막 말은 "금귀비, 문망초, 사랑하는 꽃밭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것이었다. 나는 평생 그 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우리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 정원사였던 그가 떠나고 금귀비 정찬은 한동안 문을 열지 못했다. 모녀는 참 많이도 울었다.
- 밝은 해가 난폭히 쏟아졌던 금귀비 정찬에는 아빠의 사랑이 깃들지 않은 게 없었다. 키가 작은 꼬마 화분, 가게 입구에 놓인 붉은 화초, 계산대에 놓여 있던 선인장마저도 꽃을 피웠다. 잔인했다. 우리는 그가 남긴 꽃밭에서 유일하게 시든 존재가 되기 싫었다. 눈물을 털고 일어나 다시 가게 문을 열었다. 엄마와 내가 고군분투하는 오늘은 모두 아빠가 만들어준 선물이다. 그러니 나는 꼭 계약에 성공하여 금귀비 정찬을 이어갈 거다.
- 딤섬은 중화권에서 분식으로 통한다. 가벼이 먹기 좋다는 이유 때문인데 사실 역사는 그렇지 않다. 중국어로 딤섬은 '디엔신(點心)'으로,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대접하는 사람이 딤섬 한 점으로 손님 마음까지 닿도록 성의를 녹여내 만든 음식이다. 그래서 딤섬은 얼핏 보면 잘 빚은 만두 같아 보이지만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고 모양까지 예쁘다. 간단히 만두류로 치환될 수도 있었으나 3,000년 역사를 초월하여 딤섬 자체로 존재해 왔다. 왕을 대접하는 궁중 요리부터 서민의 삶까지, 딤섬은 누구에게든지 대접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책에서 얻은 힌트였다.
-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나는 딤섬 형태 중 완자를 떠올렸다. 생선 살은 고기와 달리 기름기가 적어 잘 뭉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만두를 빚으면 피 안에서 쉽게 바스러져 식감이 좋지 않다. 반죽해 생선가스로 만들 순 있지만, 신선로와 어울리지 않는다. 완자라면 괜찮다. 꽁치 살이 반죽에 골고루 섞인 채로 익혀진다. 비린내를 숨기고자 완자를 시래기로 한 번 말았다. 삼삼한맛을 살리면서 비린내가 줄어든다. 이것을 야채와 된장 육수로 오래 끓인다. 그 후 실고추와 계란지단, 배추, 감자, 무 등을 함께 끓여내 탕의 구색을 더한다. 이른바 꽁치 완자 신선탕이다.
- 우리 사이를 채운 작은 파동은 슬픔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게 만식이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가족이었다. 지인이 키우던 개가 새끼를 너무 많이 낳아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구경 삼아 찾아가 본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 그에겐 태어나 처음이었던 개, 만식에겐 태어나 처음이었던 사람, 둘은 함께하는 시간이 쌓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개와 사람이 아닌, '가족'으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그게 문제였다고 했다.
"개라면 좋은 사료 먹고, 너른 마당에서 뛰어놀며 커야 하겠지요. 나는 그걸 못했습니다. 퇴근하면 늘 TV 켜놓고 만식이랑 저녁을 먹었는데 사람이 먹는 음식도 만식이가 먹고 싶다 하면 사료 옆에 덜어줬고, 간식도 개수를 세지 않고 먹고 싶어 하는 만큼 줬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아무리 나가고 싶어 해도 달래서 감기 안 걸리게 실내에 뒀어야 했는데 넙죽넙죽 다 나갔지요. 나는 그렇게 키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만식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잘 따라줘서요. 정말로 녀석이 행복하게끔 키워주면 그게 잘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어요."
- 만식을 향한 애정이 죄책감으로 바뀐 건 애견 동호회 사람들의 칼날 같은 말들 때문이었다. 만식이가 죽은 뒤 그는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동호회 커뮤니티에 사진과 함께 글을 작성했고 큰 비난을 받았다. 개는 가급적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어선 안 되며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각별한 관리가 필요한 편이다. 대체로 그런 관리들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기에 형편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일 수도 있다. 그 역시도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만식이 친구를 사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동호회 활동이 만식에게는 강아지 친구들을 만들어줬으나, 반대로 그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됐다. 동호회 회원들은 여태껏 그렇게 강아지를 키워왔냐며 만식의 죽음을 그의 탓으로 몰아갔다.
- 동호회 회원들의 평가에는 견주에 대한 평가가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한 교묘한 공격이 뒤섞여 있었다. 만식에게 나눠줬던 자신의 식사는 독극물로, 추운 겨울 함께 나갔던 산책은 노견에 대한 학대로 뒤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만식을 사랑했던 점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모든 사랑이 다 잘못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죄인이 된 건 그 순간부터였다.
- "만식이가 살아생전 제일 좋아했던 음식이 닭 수제비였습니다. 제가 참 많이 해주기도 했고요. 시장 가면 생닭이 7천 원밖에 안 합니다. 수제비로 끓여 먹으면 우리 둘이 이틀은 먹었지요. 그게 만식이를 해코지하는 줄도 모르고 참 뭐가 그리 맛있다고 자주 먹었을까요? 수제비 글자만 보아도 가슴이 막 답답합니다. 포장마차에서 남들이 먹는 걸 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뜁니다. 꼭 누가 나를 잡으러 올 것 같아요. 만식이요, 정말 동호회 사람들 말처럼 내가 죽인 걸지도 모릅니다. 내가 현명하게 키우지 못해서 더 오래 못 살았나 봐요. 더 잘해줬더라면, 좋은 것만 먹였더라면... 내가 죄인입니다."
-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마음은 멀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 마음은 분명 엄마의 것과 결이 닮아 있었다. 자신이 부족하여 망자의 걸음을 재촉했다는 슬픔은 ...
- 그녀는 종종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지 않은 방향으로 운전했다. 불안함에 힐끔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지름길로 가는 거야, 걱정 마."
"아이, 그럼, 알지, 그렇겠지."
"날 좀 믿어라. 조금 돌아간다고 한들 큰일 나지도 않아."
- 하긴 자기 할머니 집에 가는 길인데 나보다도 얘가 더 잘 알겠지. 동희가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은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 게 조금은 미안해졌다. 그냥 별생각 말고 믿어도 될 텐데. 조금 돌아간다 한들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라는 그녀의 마인드가 나와는 달랐다. 여유는 어디에서 챙겨야 하는 걸까. 꼼꼼하게 준비한 백팩을 다시 뒤적거렸으나 어디에도 여유는 없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재료를 준비한 적이 없었다. 앞만 보고 묵묵히 나아가면 되는 상황임에도 자꾸만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잘 해내지 못하면 모든 게 망쳐질지도 모르니까. 잘하고 있는 와중에도 더 잘 해내야만 하니까. 어째 아까부터 계속 같은 트랙 위를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 "오야, 들었다. 저기서 일단 밀가루부터 치대라."
할머니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부엌 구석이었다. 할머니 저 나름 한 식당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인데요. 가치를 항변하고 싶었으나 나는 군말 없이 주섬주섬 넓은 스테인리스 볼에 밀가루와 소금 한 꼬집을 넣어 구석으로 향했다. 이곳의 주인은 내가 대들어 볼 법한 상대가 아닌 슈퍼 베테랑이었으니.
- 계량컵에 담은 물을 밀가루에 부으려는 순간 할머니가 나를 말렸다.
"하이고 아가, 물을 한꺼번에 다 붓지 말고 좀 치대면서 부어라!"
"아, 네네."
"식용유도 살짝 둘러서 치대라."
"식용유요?"
"수제비 반죽을 할 때 식용유를 닭똥만큼 넣으면 찰기가 생긴다. 니 몰랐재?"
나를 혼내려고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 목소리만 듣고는 구분이 안 되었다. 음성이 꽤 괄괄하신 덕에 얼굴을 보지 않으면 꼼짝없이 주눅 들기 좋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가 한 점도 없었다. 할머니는 수납함에서 식용유를 꺼내와 조금 두르시고는 본인의 손으로 시범을 보이셨다.
- 할머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래서?" 하고 다음 문장을 채근하셨다. 그럼 나는 그 세 글자에 안도하여 다음 말을 이어갔다.
꽤나 긴 사연을 읊는 동안 밀가루는 어느새 되직한 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내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우셨지만, 절대 부엌을 나서지 않는 할머니에게서 안정감을 느꼈다.
- "잘 치댔네. 인자 육수 끓이자. 그동안 반죽은 냉장고에 넣고 한 시간 동안 가만히 두면 된다."
정작 할머니는 이야기를 다 듣고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가 안쓰럽다거나 혹은 잘못했다거나 아무런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셨다. 커다란 쇠 냄비에 물을 한가득 담아 끓이실 뿐이었다.
"닭 육수를 끓이더라도 다시마랑 멸치는 미리 넣어둬야 감칠맛이 난다."
"네."
- "제법이네?"
할머니는 내 솜씨가 의외라는 표정을 보여주셨다. 덕분에 나는 어깨가 올라가 정해뒀던 분량보다 조금 더 썰어보았다. 인정받는다는 건 언제 겪어도 즐거운 일이었다.
"닭 담그고 밑간 재료 넣고 40분 끓인 다음에 감자 넣고 호박 넣어. 밀가루는 맨 마지막에 넣어라."
- "닭이 익으면 뼈를 전부 발라내야 해. 뼈째로 삶았어도 먹을 때는 살만 내놓는 게 정성이야."
"그럼 고무장갑은 왜..."
"뜨겁잖아."
아아. 뒤늦게 장갑의 용도가 파악됐다. 뜨거운 재료를 손질할 때 고무장갑을 끼고 손질한 적은 없었다. 뜨거우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 식혔다.
"고기는 식혔다가 다시 익히면 맛이 없어. 그리고 원래 정성이란 귀찮은 법이다."
- "부엌에서 말씀드린 분이요?"
"그래, 한번 오라고 해. 개들 보면서 수제비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해."
조용히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싹 비운 밥그릇을 두고 자신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백구와 황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늘 사람이 먹는 거나 이렇게 섞어주고 나도 잘해주질 못한다. 시골 노인네라고 편하게 키우는 거지. 자식 같은 애들인데 미안할 때가 많아. 근데 이 개들은 나를 원망하지 않아. 항상 좋다고 꼬리 흔들고 만날 날 보면 뛰어들고 그래. 내가 이 개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밥 잘 챙겨주고 털 잘 빗겨주고 항상 예뻐해 주는 일 뿐이야.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 그러니 그 아저씨, 너무 자책하지 말라 해라. 사람마다 해줄 수 있는 건 다르다. 진심으로 아껴줬으면 상대도 다 안다."
- 몰랐던 점 두 개가 발견됐다. 첫째, 부엌에서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모두 경청해 주셨다. 데면데면하게 반응하셨어도 사실은 이야기를 꼭꼭 씹어 삼키고 계셨던 거다. 둘째, 사연자에게 끓여줄 닭 수제비가 비로소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진심으로 아껴줬으면 상대도 모두 알고 있다는 말. 나 역시 동의하는 말이었다.
- "왜요?"
글쎄 왜냐니. 그야 당신이 손님이고 난 요리사니까? 여기는 물망초 식당이고 이게 내 의무니까? 그녀의 "왜요?" 두 글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유 없이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을 향해서 그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방어 본능이었다. 날카로운 되물음으로 나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본인을 보호하고 싶은 것이리라.
타인에게 응원과 격려를 받아보지 못했을 그녀라면,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의도가 미심쩍은 작위로 느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손을 잘 타지 않은 들개가 먹이를 챙겨준 인간을 얼떨결에 물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다, 밝은 빛을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눈을 감게 된다. 그녀에게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응원이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
- 제니 씨가 이번에는 낙원 씨를 노려보았다. 내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보탰다. 오늘을 위해 몇 날 며칠 합을 맞춘 뮤지컬 배우처럼.
"보나 왕비는 폴란드의 르네상스에 크게 기여한 인물인데요. 그 왕비가 폴란드에 보급한 야채 종자 중 하나가 브로콜리예요. 브로콜리는 훌륭한 어른이 선택한 우수한 종자이죠."
"상징성이 있는 채소네요."
"파프리카도 밀리지 않아요. 파프리카를 이용한 요리 중대표적인 것으로는 굴라시가 있어요. 헝가리 대사 부부가 한국인을 위해 대접했던 헝가리 전통식이랍니다. 재료 하나하나에 나름의 사연이 있어요. 그러므로 음식을 먹는다는 건, 사연을 먹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저 맛으로만 판단한다면 놓치게 돼요."
- 우리는 사전에 연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도 통하는 듯이 일제히 포크를 들어 구운 채소를 한 점씩 먹었다. 파프리카는 씹을수록 단맛이 났다. 브로콜리는 풍성한 모양 덕에 씹는 맛이 살아 있다. 꼬득꼬득 씹을 때마다 구운 채소 특유의 따뜻한 즙이 흘러나왔다. 입 안이 금세 촉촉해졌다. 후추와 허브를 나름대로 배합하여 만든 시즈닝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다. 채소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밋밋함만 잡아줄 정도였다. 여태껏 만든 채소 요리 중, 최고로 정정당당한 풍미였다.
- [믿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편식 습관이 있어 덕분에 어제 회식 자리에서 김치전을 먹어봤습니다. 쑥스럽지만 처음 먹어보는 김치전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세상에는 저 같은 사람도 있답니다. 편식 습관이 고민이신 분들에게 이 식당을 추천합니다.]
- 다녀간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근황을 알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김치전도 먹을 수 있다는 유현 씨에게 고마웠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요리를 해냈던 거다. 식당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밤에도 별이 있었다. 반짝이는 하얀 빛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저 잘하고 있어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 장문의 댓글을 작성하며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 손님으로 와주어 내가 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유현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번듯한 당신의 삶에 좋은 기억으로 남게 돼 영광, 용기를 잃지 말고 어떤 음식이라도 도전, 서화동 근처에 김치 수제비를 맛있게 하는 곳이 있는데 여기도 추천, 온갖 멘트 홍수 속에서 고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야 할 것 같았다. 많은 마음을 감히 담아내기 어려웠다.
- 잘 들어가고 있는지 낙원 씨에게 묻고 싶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끝내 꺼내지 않았다. 댓글을 다는 일보다 쉬운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 지원자들의 사연을 꼼꼼히 읽었다. 저마다 음식 하나와 얽힌 나쁜 기억이 있었다. 상처, 실패, 두려움, 부정. 우리는 이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 어른이 됐구나. 특정한 음식에 지난 과거를 투영해 미워하면서 견뎌왔다. 넘어져 생긴 상처가 두려워 다시 걷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식에도 죄가 없다.
- 다만, 책임 소재를 밝혀내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은 할 수 있다. 나쁜 기억을 훌훌 털고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과정을 돕기 위해 물망초 식당 문을 열었다. 식당을 운영하며 배운 것은 결국 사람의 슬픔을 보듬는 일,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일이었다.
- 애초에 우리는 싸웠던 적이 없으니 화해를 할 일도 없었다. 잘못한 사람이 명확히 존재하는 소통 오류였을 뿐이다. 당연히 책임은 내 쪽에 있다.
-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동희는 좀처럼 화를 쉽게 내는 성격이 아니었고 나 역시 화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동희는 필요에 따라 직설적인 말을 했다. 나는 쓸데없이 자존심이 셌기에 그 말에 토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토라졌다고 말하기가 참 자존심 상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상태로 어림잡아 일주일을 지냈다. "매점 갈래?" 하고 참다못한 동희가 먼저 말을 걸면 어물쩍 넘어가는 관계였다.
- 어른이 된 이후로는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진 적이 없었다. 이젠 매점 핑계도 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진심을 엿보는 것이 아닌, 나의 진심을 보여주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렀던 나다. 괜히 성질을 부려서 미안하단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낙원 씨가 좋게 좋게 끝내라며 눈치 없이 굴고 있던 터라 그를 질책하는 정도로만 겨우 분위기를 이어갔다. 부족한 내 모습을 극복하고 싶다. 손님들을 어른으로 바꿔주기 전에,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 내가 늘 솔직해지지 못했던 이유는, 솔직함이 공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함은 언제나 용기라는 비싼 값을 요구했다. 나는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대신 지불받았고 빚처럼 미안함을 쌓았다. 청산하고 싶은 감정의 두께가 두터웠다.
- 동희가 머뭇거리다 목소리에 조금 힘을 실어 말했다.
"죽은 음식으로 전하는 위로래."
그녀가 내게 파뿌리를 갈아 넣은 죽을 해줬던 이유는 자신이 배앓이를 했을 때 어머니가 똑같은 죽을 해줬던 적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내게 치유를 대접하려는 마음에 주저가 없었다고 한다. 먹고 나아 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엄마에게 선뜻 내밀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치유란 무엇일까.
-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엄마는 죽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기 몸살로 학교를 가지 못할 만큼 아팠을 때 먹었던 죽이 생각났다. 계란을 얇게 풀어 쌀과 함께 익힌 것이었는데 다진파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다. 소금 대신 간장으로 간을 맞췄다. 이것만 먹으면 심심할 거라며 오이냉국과 함께 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죽에 들어 있는 재료라곤 계란, 파, 간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던 와중에 맛본 계란죽은 특별했다. 음식을 먹느라 열이 오를 만하면 오이냉국으로 입 안을 달랬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 그 후로 몸이 아플 때마다 내심 엄마표 계란죽을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로부터 대접받은 마지막 죽이자 치유였다.
- [백미는 흰 도화지와 같다. 어떤 물로 밥을 짓느냐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유럽에서는 토마토나 올리브유를 첨가해 풍미를 더하기도 하고 반대로 아시아 특정 지방에선 찻잎을 넣어 향긋함을 보태기도...]
- '쌀'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집어 올리니 가장 먼저 백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는 여러 요리 스타일 중에서도 특히 한식을 사랑했다. 한식의 근간은 결국 잘 지은 밥이므로 이것을 완수하기 위한 고민이 많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아빠가 나를 위해 단촛물로 밥을 지어준 기억이 있다. 소풍 때 먹었던 유부초밥 맛이 좋아 백반은 먹지 않겠다고 떼를 썼던 탓이다. 옅은 노란빛이 도는 밥 한 끼가 온통 유부초밥 맛이었다. 한 숟갈 크게 맛을 보고 나서야 방긋 웃으면서 식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 [... 흰 도화지에는 무슨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다. 백미도 그러하다. 밥을 지을 때부터 손님의 취향을 살펴야 한다.]
- 쌀이라는 목차 하나에 적힌 것은 역시나 아빠만의 애정이었다. 다시금 그가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였는지를 되새김질했다. 색색의 찬들에 밀려 주목조차 받지 못할 밥 한 공기에 아빠는 애정을 투여했다. 나를 위해 자신도 억지로 단촛물 밥을 먹으면서까지 상대방을 존중했다. 고작 밥 하나에도 무한한 배려를 더할 수 있구나. 죽은 단조로운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웠다. 손가락으로 더듬듯이 기록을 훑었다. 오래돼 바스락거리는 종이 재질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이 글을 썼을 작가를 떠올려봤다.
- 아빠는 내 눈높이에서 손수 과정을 보여주며 입 안에 한 숟가락씩 넣어주셨다. 직접 맛을 보고 설명을 듣는 것이 많은 시행착오를 순식간에 대체했다. 처음 만들어보면서도 내가 선호하는 식감을 위해선 3분 미만으로 끓이되 계란은 마지막에 풀어야 한다는 걸 터득했다. 아빠는 라면을 끓일 때 면을 한 번 끓여 물을 버리라고 가르쳐주었다. 튀김 면발에 엉켜 있던 기름기가 모두 제거돼 전체 기름 양이 줄고 위에 부담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스프는 귀퉁이를 손으로 살짝 꼬집어그 부분만큼은 남기고 넣어야 짜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다진 마늘과 식초 한 방울이 스프 빈자리를 채워 독특한 맛을 만들었다. 라면의 얼굴을 한 색다른 면 요리가 완성됐다.
- 음식의 정체를 알기 위해 둘 다 고개를 박았다. 먹음직스러운 노란빛이었다. 빛을 반사해 반질거리는 표면이 탐스러웠다. 푸딩인 걸까, 숟가락으로 살짝 표면을 긁었다. 나보다 먼저 맛을 본 낙원 씨가 감탄했다.
"차왕무시네요."
- 그렇네, 확실히 재미있어.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지고 말이야. 보통 계란찜과는 다른 식감이었다. 계란이란 푹 익히면 보드랍고, 덜 익히면 그저 액체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액체도 고체도 아닌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식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리사는 얼마나 많은 까탈스러운 조건을 충족시켰을까. 그 번거로움이란, 단언컨대 정성. 그렇다면 차왕무시는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닐까. 계란으로 고급 요리라. 순간 이 음식을 죽에도 적용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피어올랐다. 결국 오늘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 "제가 만약 금귀비 정찬 오너가 된다면 그때도 제 식당에 와줄 건가요?"
"그럼요, 꼭 초대해 주세요."
당신에겐 참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때로는 그가 정말 '낙원'처럼 느껴졌다. 낯선 온도의 바람이 불어와 내 마음의 바람개비를 돌아가게 했다. 분명 나의 낙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일 텐데.
단둘이 식당 밖에서 뭔가를 먹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왠지 오늘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 과정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또 두터운 인연이 됐다. 정말로 나는 사랑을 배웠나 보다. 생각해 보면, 이미 엄마는 처음부터 진짜 임무를 말해주었다.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 나는 엄마와의 계약을 비로소 완성했다. 모두 물려주겠노라 말하는 엄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남겼다. 무한한 감사와 존경 그리고 당신 덕분에 배운 사랑!
- 잘해야만 한다는, 잘 해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봄날의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엄마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는, 여태껏 내가 갈망했던 답이 모두 담겨 있었다. 퇴근길에 바라보는 하늘이 애틋하기만 했다. 까만 어둠 속 빛나는 별이 유독 환하게 보였다. 아픈 상처가 있는 사람들도 누군가의 애정으로 작은 빛을 찾아낼 수 있다. 요리사는 그들을 치유하는 의사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사랑을 지침 삼아 많은 사람들의 별을 찾아주고 싶다. 우리의 과거가 지난할수록, 더욱 환히 빛날 내일을 위하여.
- 가로등이 반복되는 길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토록 너른 땅이 밝은 불로 채워졌다. 썩 괜찮은 첫 퇴근. 마음의 바람개비가 유독 팽팽 돌아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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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망초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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