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허새로미]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일루젼 2022. 6. 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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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새로미
출판 : 봄알람 
출간 : 2021.02.28 


       

이중적으로 읽히는 제목과 강렬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와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양쪽으로 해석이 되는 문장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일지 궁금해서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제로 읽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저자의 다른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에도 관심이 가 곧 읽어볼 예정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는 문장들인데도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참 힘이 들었다.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었는데 첫째로는 저자가 겪어온 삶의 고통이 안쓰러웠고, 둘째로는 나 역시도 공감하는 아픔들이 건드려졌고, 셋째로는 상상할 수 없는 낯섦이 느껴졌다. 때때로 나는 내가 겪어온 시간들 중의 일부가 다수와는 조금 달랐음을 인정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목소리를 느낀다.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수혜를 입고 있어서일까 감각하지 못해서일까.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을 '하고 싶지 않아'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선택지로 만들려면 어떤 노력이, 그리고 어떤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얼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얼굴들을 생각한다. 그 수없음 속에 하나 하나의 답이 담겨 있는 걸까 아득해하다가 문득 거울을 본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냥 사람들의 사회. 회색분자인 나는 내가 그런 사회를 살고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에는,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겠다. 

 


   

    

-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날씬하고, 돋보이는 사람. 물건을 사러 가면 엄마는 항상 그냥 한번 보러 왔다는 듯이, 은혜를 베푼다는 듯이 마뜩잖게 가게를 둘러보곤 했다. 아주 맘에 드는 물건이라도 파는 사람 애가 닳도록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에, 가까이 다가서야 들릴 정도로 "그걸로 줘요" 한마디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누가 자기를 필요로 하면 단박에 알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절대 주지 않고 언제까지고 유예하는 법을 알았고 마침내 그걸 내줄 때는 지치지 않고 재차 자신의 관대함을 강조했다.

 

- 내가 집을 나오기 직전 아빠에게 들은, 최후의 버튼을 누른 마지막 한마디는 "너 피해의식 있다"였다. 나는 이 단어가 여자들에게 어떤 감정적 족쇄를 채우고 상처를 무효로 만드는지 책도 한 권 쓸 수 있다. '너에게 피해의식이 있다'는 건 피해를 지우는 말이다. 아주 흔하게 너 미쳤다는, 예민하다는, 별스럽다는, 까다롭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내면을 파헤치면 '아무것도 되묻지 말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뜻의 말이다.  

 

- 그러나 나는 나의 결핍이 곧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피해를, 나의 슬픔을, 나의 역경을 고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그때, 도박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때린 적도 없건만 내 옷차림이나 성적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주문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듣던 그때, 바로 그때 지금 내가 아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덜 죽고 싶었을까.

 

-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 결정을 내리기까지 혼자 온갖 괴로움과 걱정에 몸부림치느라 스스로를 지옥에 몰아넣는 것도 나였고, 결정이 난 후에는 절대 돌아보지 않을뿐더러 내 이전 인생에 뭐가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기까지 하는 것도 나였다. 이제 나는 앞으로 무얼 할지, 오늘 뭘 먹을지, 오늘 오후에 어딜 가볼지, 저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거였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한 달의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걱정을 그만두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지금 해보는 데에 온정신을 쏟기로 결정했다. 

 

- 언젠가는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지, 보호자가 자원을 통제해서 나를 학대하는 방법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해야지, 내 돈으로 먹고 노는 인간들을 벌줘야지, 나에게 속죄하게 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자식들이 나에게 보상하게 만들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내 자식의 돈을 쓰는 여자에게도 벌을 줘야지, 돈을 받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존경을 얻어내야지... 누구도 이런 것들을 견디면서 제정신으로 오래 생존하지는 못한다.  

 

- 곁에 없다고 깨달아야만 서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어려운 것에 나는 더 이상 에너지를 쓸 수 없었다. 그걸 엄마에게 계속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단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이유 없이 부서지거나 변형되지 않고 편안히 존재할 수 있는 것들로 삶을 꾸리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고부터 나는 가족과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건 공상과학 소설만큼이나 불가능한 얘기라고 했지만, 누구나 그렇게 삶과 죽음과 타액을 공유하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 달라붙고 상처 내고 동일시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거라 했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안 그럴 수 있다면 안 그러는 게 좋은 것이다. 내게는 그게 정말이지 훨씬 나은 것이다. 

 

-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 해로운 관계를 알아보아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깨우쳤다 하더라도 가까운 사람들이 판단력을 흐려놓는 케이스도 허다하다. 그래도 가족이잖니,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잖아, 동생이잖아, 언니한테 어떻게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완벽한 사람이 어딨어, 라며 '둥글게 살기'를 종용하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듣게 된다. 가능하면 그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 "내가 카톡 대답을 열두 시간 이상 안 하면 꼭 우리 집에 와서 확인해 줘."
가팔랐던 복층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어느 날 아침 비몽사몽 한 와중에 두 계단을 한꺼번에 내려서면서 중심을 잃어 제대로 넘어질 뻔한 날 나는 단체 채팅방에 그렇게 적었다. 

(리뷰자 주 : 나는 일주일이었다.)

 

-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예전을 그리워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았고 삶에의 통제력이 하나도 없던 청소년기나 20대로부터 멀어질수록 행복 지수가 높아진다고 느꼈다. "나이 먹으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흐르는 세월을 적극 지지하던 나였다. 그런데 외출 자제가 권고되고 해외여행은 꿈에서나 혹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수상한 시절 탓인지 문득 20년 전의 모든 것이 그립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 어느 시절에나 스스로 아웃사이더고 미운 오리 새끼였다 생각했지만 마치 지금을 사는 나를 내가 탈출할 수 없는 것처럼, 싫은 것 투성이었던 이십 년 전 나의 세상도 나의 일부였던 거다. 이십 분짜리 시트콤으로 시작된 향수병은 급기야 '그땐 지금보다 모든 게 나았는데'라는 착각으로 슬그머니 나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 벌어진 입을 다묾과 동시에 나는 열차에서 뛰어나왔다. 열차 출발 전 그 노인과 가스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철 문마다 붙어 있던 핫라인에 전화하니 담당자는 당황하며 다음 역에서 찾아 하차 조치하겠다고 했다. 대구에서 지하철 화재로 백 명이 넘게 죽은 처참한 사건이 있고 천 년이나 지난 것도 아닌데, 이 열차 안에 탄 사람 대부분이 그 비극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 가스통을 든 노인이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역내에 들어와 전철을 타고 그것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고 무서웠다. 나중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황당함에 동의해달라'는 의미로 핏대를 올리며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여섯 명은, 정말 한 명도 예외 없이 "할아버지가 그럴 수도 있지, 전철에서 누가 화기를 켤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고 나를 또다시 유난스러운 자로 만들었다. 

 

-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는데, 세상이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잔인한 데에는 나도 기여를 했을 텐데, 어제 태어난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나는 여기와 완전히 분리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서 이젠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된 하나를 해결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는 원칙을 갖고 살면서는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인생의 단계 단계를 순조롭게 밟아가지 못할 거였다.  

 

- 원룸이나마 내가 고른 집에서, 이만 원짜리지만 내가 조립한 가구를 들이고 내 방식대로 동선을 구성하고 배치한 집에 사는 나는 의외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기가 막힌 감각을 발휘하지는 못해도 내가 안락하게 느낄 정도의 집을 만들 줄 알았다. 내가 한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책장 하나, 이불 한 채도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없었던 모부의 집에서 항상 치우지 않고 게으르고 지저분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너는 병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도 간단한 물건을 가지고 적절하게 살림을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 공간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오랜 무기력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야 깨달았던 것이다.

 

-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을 때, 타인에게 나의 무게를 너무 맡기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과 나 사이에 물리적, 정신적인 거리를 두는 것은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좋은 전략이라 나는 믿는다. 헤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중심을 잡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다. 

 

-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분명히 사과하고 무엇보다 상대에게 충분한 거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나를 빨리 용서하라고 닦달하지 않고, 혹은 어떻게 하면 좀 과장을 보태 전부 내 책임은 아닌 것처럼 만들까, 어떻게 하면 불쌍하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비열한 트릭을 쓰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 나의 과오를 마주하기로. 반대의 경우라면 화가 났을 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최소 하루 침묵의 시간을 갖기로.  

 

- 미미와 나는 우리가 십 년 후에도 여전히 친구라면 그리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면 개들이 뛰어놀 만한 큰 마당이 딸린 집을 함께 얻어 살 생각을 하고 있다. 이미 살림을 합치자고 했다가 그만둬버린 입장이니 미미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어렴풋한 미래 계획에는 파주나 양평이나 또 어디든 개들이 마음껏 뛰고 땅을 파헤칠 수 있는 넓은 이층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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