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엄기호
출판 : 따비
출간 : 2017.07.13
해를 넘기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 시기를 넘기지 않고 발견된 것 같다. 한동안 '23년'이라고 표기할 때마다 낯섦을 느끼겠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익숙해지고 다시 '24년'에 낯섦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공부 공부>는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상황과 상대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괴롭게 읽었다. 저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자'로 잡고 있기 때문인지 스승이라는 존재에 대한 미화가 강한 편이었다.
저자의 단상들은 날카롭고 일리가 있었으나, 그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과정에서는 보다 범위와 정의를 정제하는 작업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읽는 동안 다소 '교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그 단어가 가지는 가장 강한 의미로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독자를 '학생'으로 상정하고 가르치는 듯한, 그리고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바가 절대적이라는 듯한 어조와 그에 비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은 개념들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졌을 뿐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배운 자'가 아닌 '배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 대상은 10대로 한정되지 않는다. 평생의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배움'을 수행하며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단련해나가야 한다면, 그 각 단계마다 적절한 스승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우리 사회가 배운 자와 배우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며 늙어가는' 이가 없었다면, 현시대의 우리에게 저자가 말하는 의미대로의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 또한 인간이고, 어떠한 의미로 그는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이지 '배우는' 일의 전문가는 아니므로, 나는 '스승'이란 개념에 저자가 부여한 절대적-이어보이는- 권위를 더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가 주장하는 배움은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자기 성찰과 배려에 가까운 개념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만인을 스승으로 삼아 생활할 때 더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개념이다. 그렇게 접근할 때 모든 이들은 모든 타인 혹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게 되며, '언제나' 배울 수 있게 된다.
라고 반박해보지만, 아무래도 저자가 '바꾸고 싶다'라고 말한 교육은 기본적으로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읽힌다. 그렇게 한정할 경우 저자의 주장과 개념에는 무리가 없다. 아직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에도 벅찬 시기에 보다 전문적인 시각에서 그들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영역의 공부를 적절한 방식으로 추천해줄 수 있는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스승'이 존재할 수 있다. 학부모 -였거나, 이거나, 일 예정인-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며 자신의 교육관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공부'란 공통적인 기본 소양의 토대 위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건전한 자기 성찰을 쌓아올리고, 거기서부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하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적응과 성찰'의 '기술'에 가깝다고 본다. 외부 상황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빠른 판단으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도 있으려면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하고, 거기서부터 진정한 배움과 자유가 시작된다.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벽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기반을 얻는 것이다.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고 '나'이기에 가능한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공부'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정의와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읽어두는 선에서 그칠 것 같다.
끝.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공부를 통해 성장하며 살아온 '범생이'였다. 우연한 기회에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했고, 그때 고통의 현장에서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곁에 서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경험을 했다. 공부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을 듣는 연습이자 그들을 말의 세계로 초대하는 이중의 일이라고 믿고 있다. 학생들이 "배울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신비와 기쁨을 계속 누리며 살고 싶어 한다.
- 오랫동안 공부는 해서 무엇하고 글은 써서 무엇하며 강의는 해서 무엇하나 하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아무나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였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많은 사람이 괴로워했다.
- 공부의 열매는 기쁨이다.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기쁨이며, 보태는 기쁨이며, 견디고 성장하는 기쁨이다. 그 슬픔의 시대에 여전히 이 기쁨이 가능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생존조차 불가능해 보이던 시대였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이 기적을 통해 그 슬픔의 시대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정말 감사하다.
- 공부를 왜 할까? 고등학교를 다니던 30년 전이라면, 나는 분명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대학원을 다니던 20년 전이라면, 세상을 잘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인권운동의 언저리에 있으며 온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10여 년 전이라면, 공부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여전히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돌보기 위해서다.
- 공부를 하면서 위기의식이 생겼다. 정확하게는 대다수 사람이 처한 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나라에서 내가 제대로 늙을 수 있을까 하는 공포다. 나이가 드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나이를 먹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젊을 때는 몰랐던 이 공포가 주변에 노년에 접어드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롭지 않게 늙을 수 있을까? 폭력적이지 않게 늙을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남을 괴롭히지 않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서 늙을 수 있을까?
- 이런 질문이 떠오른 다음에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또한 아쉽게도, 이 질문에는 좌파와 우파가 없었다.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으로 간 노인들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랬다. 세상을 바꾸고 주변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고통스럽다고 토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에 대해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사람조차 그랬다. 겉으로는 고통이 인간 삶의 본질이라고 말하지만 그 고통을 대면하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공부를 많이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도 없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자기가 공부한 것을 말할 때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지식이 주는 기쁨을 누렸고 여전히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일상 앞에서는 멈춰 서 있었다. 세상에 관한 명료한 해석과 자기 앎에 대한 환희에 찬 확신이 있었으나, 그들의 그 말은 자기 삶 앞에서는 해석의 언어로도, 실천의 언어로도 무능했다.
- 젊다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도 않았다. 지금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단지 점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경험'도 그 이전 세대보다 많다. 배낭여행이니 해외 연수니 해서, 문화적 취향 등이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 수많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는 건 별로 기쁘지 않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그 수많은 '능력'을 쌓느라 자기를 돌볼 여지가 없다.
- '제대로 늙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나서 살펴본 한국 사회에서의 삶은 이처럼 끔찍했다. 이 질문으로 우려하는 상황이 대다수 사람의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늙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사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다들 감당하지 못할 상처를 부여잡고 우울해하거나 화가 나 있다. 그런 상황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저 자신을 괴롭히며 살고 있다.
-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위기의식을 더욱 가지게 된 것은 공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공부가 현실과의 대면을 유예하는 알리바이 구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타석에 들어서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 말이다.
- 한 학생이 이렇게 표현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틈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다. 보이는 것은 많은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은 없다. 이러니 늘 당황해하고, 당황한 만큼 속상해서 화를 낸다. 자기의 무능과 무기력을 계속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쌓았는데 무능력만 확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다시 능력을 쌓고자 '공부'로 후퇴하는데, 그것은 '다룰 줄 알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서 이 악순환은 반복된다.
- 수업 시간에도 종종 부딪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르치는 개념 중에 '장치와 배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설명하면 무슨 뜻인지는 곧 안다. 그래서 반복해서 설명하면 짜증을 내는 학생도 많다. 이미 그 의미를 아는데 왜 반복하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두 개념을 가지고 어떤 현상을 설명하라고 하면 당황해한다. 개념을 알기는 하지만 다룰 줄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에는 반복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이때도 머리로는 수긍하는데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쫓기듯 해치우는 공부를 하느라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 모두가 앉아서 천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앉아서는 천 리를 보고 서서는 만 리를 내다본다. 그러나 정작 길을 걸으면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자기 삶을 다루는 데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남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기술은 기가 막히게 발달했지만 자기를 돌보는 언어와 기예는 없다. 자기 계발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하며 능력을 쌓고 있지만, 계발한다는 자기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무얼 계발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계발만 하고 있으니, 그 계발은 자기 자신을 파헤치는 삽질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삽질의 노고와 피곤함에 분통만 터질 뿐이다.
- 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천하로부터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길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천하와 화해하느라 자기를 잃어버렸다.
- 자기 자신과 화해하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누군지 모르는데 화해할 수는 없다. 또한,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어디에서 자신과 분열되어 있는지 봐야 한다. 어디서 만나야 할지 모르는데 화해할 수는 없다. 자기와 화해하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면, 자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세상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거기에 맞춰도 겨우 살아남을까 말까 한 지경이니, 자기가 아니라 세상에 집중해야 한다.
- 그러나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아니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통해 주인에게 반항할 수 있었던 더글러스는 이 선택을 거부한다. 그는 주인이 "생존의 길"이라고 불렀던 것이 사실은 죽음의 길이라고 말한다. 당분간은 주인의 자비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 같지만, 그 채찍에 순종하는 순간 그의 목숨은 주인의 변덕에 의해 어느 때라도 죽을 수 있는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는 게 아니라 둘 다 죽음의 길에 불과하다. 그는 대신 자유의 길을 택한다.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게 자유의 길이었다.
-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이 이야기는 공부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공부는 언제나 자유와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며 해방의 길이어야 한다. 자기에 집중하고 자기와 화해하다 굶어 죽거나 세상에 순응하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하는 것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다.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공부를 멈출 수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의 적은 오만이고 교만이었다.
- 이 책에서 나는 이것을 '한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할 줄 아는 것과 할 줄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계를 알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서 세상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물론 그 한계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한계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스럽게 그 너머를 보며 성장을 도모한다. 그렇기에 나는 한계를 아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라고 말할 것이다.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한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배움을 위한 용기를 낼 수 있다. 자기가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가르쳐줄 사람에게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드러낸다.
- 그건 내 공부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그 공부의 목적인 신분 상승의 단위가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다.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신분 상승이라는 욕망은 있었지만 그 욕망의 주체는 '가족'이었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욕망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나를 위해 고생하는 부모님을 위해서였다. 나를 책임지는 부모님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부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가장 좋은 길이었다. 또한, 그 당시의 교육은 바로 그 '책임'을 강화하는 기제였다. 나라에 책임을 다하는 국민이 되는 '충'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했다. 그렇게 책임을 다하는 존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 책임을 다하는 것이 곧 '선'이라고 배운 세대의 특징이 있다. 이들은 일이 되게 해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불법이나 탈법도 불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 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여기에 압축적 근대화까지 결합되어, 이들은 최대한 빨리 일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선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말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공부의 목적은 행복이며 공부를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행복'의 핵심에 꿈, 즉 욕망이 있다. 나는 이때가 비로소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출현한 시기라고 본다. 개인이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이 꿈을 묻고 발견하고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에 관해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대체 언제 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열여덟 살 이전에 꿈을 찾고 발견하고 준비하는 것, 이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다. 한번 진로를 정한 다음에는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일단 길을 정하고 나면 끝까지 가야 한다. 꿈이 가변적이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다.
-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것을 열여덟 살 이전에 다 끝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수정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열여덟 살 이전에 득도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수정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 그게 득도가 아니면 무엇이 득도이겠는가.
-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 이런 만능감이 가장 문제가 되는 분야가 '연애'다. 연애란 나 혼자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일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과의 일이다. 당연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모든 것을 늘 자기 의지와 노력대로 통제하던 이들은 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거나 스토킹, 데이트 폭력 같은 범죄까지 일으키곤 한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 있습니까?"
-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계급 구조의 고착화는 공간을 분할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형편과 가치관이 비슷한 같은 계급이 같은 동네에 산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이 서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수준을 가로지르며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먼저, 학교 자체가 경제적 수준에 따라 '분리'되어 있다. 그 결과, 부모의 '친구 집단'이 곧 아이의 '또래집단'이 되는 현상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엄마 친구의 자식이 곧 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입김으로부터 독립된 그들만의 세계가 출현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아이들 세계와 부모들 세계의 경계가 같고, 또한 부모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되었다. 부모들의 친구 집단과 아이들의 또래집단이 동조화하자 아이들은 쉽게 부모들의 언어와 가치, 그리고 판단을 자기들의 언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이 부류의 학생들은 부모가 좋고 나쁘고, 강압적이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 부모에게 주눅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부모는 하나같이 '고상'하고 '합리적'이다. 또한, 지적이며 우아하다. 반면, 자기는 그 정도의 우아함도, 지적 능력도, 교양도, 합리성도 갖고 있지 않다. 부모만큼 잘될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부모가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주눅 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가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자식이 느끼는 열패감의 원인인 것이다.
- 이 중에서 이들을 가장 주눅 들게 하는 것은 부모의 합리성이다. 이런 부모의 특징이 말로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말발이 센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자 그대로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차분하고 끈질기게' 말로 묻고 말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세상을 만들어온 방식이다.
- 그래서 사달이 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말로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한다는 뜻이다. 천박하다고 생각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무시한다. 바로 이 점을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자기는 말로 부모를 상대하지 못하고 말로써 부모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문을 닫아버린다. 말을 잘못했다가 자기가 어떤 경멸과 모욕의 시선을 받을지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모의 말의 세계, 합리성의 세계에서 자기가 인정받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부모는 자신이 아이들을 평화롭게, 평등하게,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비폭력적으로 대했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말 못 하는 자'를 경멸하며 그걸 드러내면서 살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말 못 하는 것에 대한 경멸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비참함을 주는지 모른다. 자기는 절대 아이를 그렇게 대한적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이를 그렇게 대하지는 않았지요. 다만 그게 선생님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에요. 아이는 그걸 봅니다."
- 사실 나도 이걸 잘 몰랐다. 나야말로 말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말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내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경멸하게 된 것도 8할은 이 '말이 똥이 된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나는, 말을 잘하는 자, 말의 힘을 믿는 자들의 그 '말'이,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하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때로는 내가 학생들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며 노골적으로 한심해하고 경멸했다. 또한, 수업 시간에 잘난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동료를 얼마나 경멸하고 깔보는지도 많이 보았다.
- 사실 우리는 삶에서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삶이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 내가 강력히 반대하는 것은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교육'을 강조하는 쪽이다. 나 역시 공부가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말이 대단히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말은 시간적으로는 '지금 당장' 아니면 '곧'을 의미한다. 지금 당장 혹은 곧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실제적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제적 도움'이라는 목적은 공부의 '쓸모'를 대단히 좁게 해석해 다른 쓸모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 공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쓸모를 '지금 당장' '곧'이라는 말에 종속시켜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즉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자격증을 따거나 어학 점수를 올리거나 무슨무슨 대회에 끊임없이 나가서 상장을 받아와야 한다. ... 즉, 시간에 쫓기는 공부가 되는 것이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습관과 몸을 가진 사람이 배움을 지속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 배움을 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은 미래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많은 사회과학자는 사람이 한 가지 기술을 배워 그걸 죽을 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아무리 노동의 안정성을 높인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생에서 직업이든 뭐든 최소한 세 번은 바꾸며 살게 되리라고 말한다. 세 번의 전환은 있는 것이다. 이 전환을 위기로 겪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배움의 기술'이다. 요새 흔히 하는 말로는 '공부한 사람'에서 '공부하는 사람'으로, 더 나아가 내가 하는 말로는 '공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전환을 위기로 겪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다.
- 그런데 공부의 목적을 '단기화' 해버리고 나면 어떤 내용을 빨리 습득함과 동시에 공부가 끝나버린다. 공부는 그저 지겨운 것이기에 '해치워야 하는 것'이 된다. 단기적인 목표에 맞춰 '공부를 끝내버리는 교육'을 통해서는 '지적 쾌감'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몸'을 만들지 못한다. 이런 교육은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은커녕 실제적인 위협이 된다.
- 물론 공부는 지겹고 재미없다. 나는 이 점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다는 건 아주 일부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대부분의 공부는, 재미없지만 견디는 과정이다. 이 견디는 과정을 통해 공부하는 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공부의 목적을 단기화해 버리면 공부하는 몸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단시간에 목표를 달성하고 공부를 그만두는 몸이 만들어진다.
- 물론 이 말이, 공부는 재미없으니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까지 공부를 시키는 방식은 그랬다. 견디다 보면 공부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견디는 것'만 강조한 공부는 실패했다.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공부는 견디는 것임을 강조했던 이들의 말과 달리, 거기서 '공부의 묘미'나 '지적 쾌감'을 느끼는 학생은 극소수였다. 이런 점에서 견디기만 강조하는 교육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 그러나 이런 일은 '실제적'이라는 이름으로 단기적인 목표에 맞추는 공부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 공부의 목적과 과정을 단기화해 버리면,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공부만이 주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배운 사람'으로 끝난다.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가 배운 것을 일회용으로 써먹기만 한다. 그러다 그 배운 내용의 효용이 다하면 그 사람은 정말 큰 위기를 맞는다. 전환할 수 있는 그 어떤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겹고 재미없는 공부의 와중에도 어떻게 배움을 지속하는지, 그렇게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지적 쾌감의 구조와 과정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다.
- 더구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전환'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지 살펴보고 그 요구에 맞게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어내는 공부가 오히려 쓸모없다고 여기게 된다.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전환은 지금 상태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이익이 될 수가 없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손해가 된다. 이익을 중심에 두면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전환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후폭풍은 이미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 그들에게 어떤 것이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한다. 미래에 살아남을 직업이 무엇이고 그 직업을 얻기 위해 어떤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말해달라는 것이다. 코딩이든 통계학이든 '과목'을 꼭 집어서 말해달라고 한다. 4차 산업에 맞는 것이든 전통적인 것이든 이 직업은 살아남는다고 말해달라고 한다.
- 과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면 불안해한다. 이게 내가 하지현 선생과 함께 말한 공부중독의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무엇이 실제적인지 내가 정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 사회가 실제적이라고 말한 그 틀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멘붕’에 빠져서 헤매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어떤 시스템에 들어가서 당장의 성과가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어야 한다.
-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 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 물론, 핵심은 발휘했다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분 상승처럼 기댈 제도적 안정성도 없고, 자아실현처럼 내면적인 만족감을 가질 수도 없는 게 성공이다. 말로는 '하고 싶은 일'을 추구했다며 내면적 동기와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결과, 즉 성과를 전면화한 것이 '성공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성공의 이유를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것으로 역추산함으로써 모두가 다 성공할 때까지 미친 듯이 '노오력'하고 살 것을 강요하는 게 바로 이 '성공 이데올로기'이며, 그래서 신분 상승이나 자아실현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자기를 착취하게 만든다.
- 다른 하나의 길은 먹고사는 일, 즉 직업은 최대한 안정적인 것으로 구하고 '하고 싶은 일'은 소비를 통해 하는 것이다.
- 누군가가 무엇을 포기할 때, 그 사람이 포기한 것은 '그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흔한 비유로, 씨앗이 나무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은 씨앗의 본성을 포기하는 일이기에 비극적이다. 따라서 씨앗은 자신을 나무의 잠재적 상태로 바라봐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성장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나온 말이 바로 '무한한 잠재력'이다. "포기는 이르다. 너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어라."
- 그런데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말이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 사람이 포기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잠재적인 형태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 씨앗이 나무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성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 이런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과를 남겨 자신의 잠재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 자를 무한대로 늘려야 하고, 이 '오' 자는 잠재력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인 '무한한'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원래 성경에서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말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태워버려야 한다"라는 말이 성과주의에 의해 완전히 악용되는 것이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은,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 살아남지 못해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슬프게도, 무기력해야만 그나마 자기를 덜 파괴하며 연명할 수 있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힘에 부치는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자기를 덜 망가뜨리는 생존전략이 된 것이다.
-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 이것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삶에서, 자기를 보전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삶으로 전환할 역량을 키우는 데 중심에 두자는 제안이다. 이를 위해서 '배운 자'가 아니라 '배울 줄 아는 자'를 양성하는 교육, 즉 '배움의 기예'를 배움의 중심에 놓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전환의 역량을 키우는 교육'을 위한 '교육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다음 장에서부터 이것을 '자기 배려'라는 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2015년 서울의 하자센터에서 열린 '창의 서밋'에 참가했을 때들은 이야기다. 제주도에 있는 '해녀 학교'에서 온 분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그 학교에서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이 자기 숨의 길이라고 했다. 물질을 하는 사람이 자기 숨의 길이를 알아야 물속에서 자기를 망각하고 만용을 부리다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녀가 되고 싶은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게 '자기 숨의 길이'라는 것이다.
-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숨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숨의 길이다.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 두 번째로는 물속에서 자기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나 매혹된 대상에 넋을 잃는다. 물속에 들어가서 내 숨의 길이를 잊은 채 물속의 황홀한 풍경이든 전복 잡이든 무엇에 정신이 나가버리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해 사람이 놓지 말아야 하는 게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며 패배자로 살아가라는 말과 다름없이 들린다. 또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능력과 가진 것에서 차이가 있으니 그 차이를 인정하고 위계를 받아들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라는 말에 솔깃해하면서도 묘한 반발감과 거부감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 이런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이 "숨의 길이를 안다"가 아니라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안다"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계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이 한계는 비교하고 돌파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내가 1분 동안 참을 수 있는 반면 내 옆 사람이 2분 동안 참을 수 있다면 나는 부족한 존재다. 따라서 내 숨의 길이가 2분이 될 때까지 무한정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계를 아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이 되면서 위축된다.
- 반면,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숨의 길이를 모른 채 물속에 뛰어들었다면, 내가 자신을 잘 몰라서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서, 자신에 관한 모름에서 앎으로 이동한 데 초점이 맞춰진다. 아는 것이 나를 살리고 돌보게 한다. 여기서는 앎이 곧 실천이다. 알아야만 비로소 나를 보호할 수 있다. 한계를 아는 것은 자기를 살리는 실천이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인 '1분의 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된다. 한계가 극복이 아닌 다룸의 대상이라는 말은 한계를 수동적이고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계가 다룸의 대상이 될 때 사람은 무리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재능이 다른 만큼이나 한계도 다르다는 사실이고, 각자가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자기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중요하다는 점이다.
- 자신의 한계를 극복의 대상으로 볼 때,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탁월함은 '나'에게 있지 않다. 삶의 가치는 '나'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에 있다. 숨의 길이가 1분이냐 5분이냐가 내 삶의 가치를 결정한다. 반면 자신의 한계, 즉 숨의 길이를 '다룸'의 문제로 보면, 삶의 가치와 의미는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이나 5분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다루는 탁월함의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탁월함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다루는 기예'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
- 한편, 자기 한계를 인정한다는 말은 자기 능력에 미리 선을 긋고 노력하지 말라거나 주제 파악하고 찌그러져 살라는 뜻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 극복이 아니라 다룸의 문제가 되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늘 잠정적이다. 지금은 내 능력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먼저 집중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을 능수능란하게 잘 활용할 수 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며, 넘어갈 용기와 자신도 생긴다.
- 지금의 교육은 바로 이 점을 역전시켜 놓았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겁을 먹고 잔뜩 위축된다. 뭔가를 해보아야 자기 한계를 알 수 있는데, 하는 순간 알게 되는 한계는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탁월함을 줄 세우는 순간부터 숨의 길이가 가장 긴 한 사람 말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된다. 그러니 자기가 꼭대기가 될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게 내가 몇 차례 강조한 무기력이다.
- 한계를 아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길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현대의 교육과정에서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란 자기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경계를 확실하게 알아가는 과정이다. 전문가는, '전문'이라는 말 그대로 자신이 한 분야의 전문가이지 모든 것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사람들이 보기에는 육아와 교육이 인접하고 비슷한 것이겠지만,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둘은 '다른' 분야이며 내가 전문적 견해를 제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런 경우 공부한 사람의 대답은 똑같다. "모른다."
- 이런 점에서 보면, 한계를 무엇으로, 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가지고 그가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전문가인 척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는 것 모르는 것 없이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늘 만난다. 연애 문제에서 정치, 심지어 4차 산업혁명이며 우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르는 게 없다. 이들이야말로 위험한 사람이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이 무지한 자들이 세상을 망친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의사가 환자를 위험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 이런 점에서 전문가란 그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지혜 중의 지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무지 중의 무지는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는, 적어도 그 분야에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 특히 지금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에서는 약간의 검색만으로도 다 알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남의 이야기, 전문가의 이야기를 대충 보고 베껴서 가져오면서도 그것이 자기 의견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의 견해를 마치 자기가 생각해서 도출해낸 의견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얄팍하게 알고 있다 보니 오히려 이들은 이런 말을 '확정적'으로 사용한다. 그럴싸한 말에 현혹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을 선동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논의를 깊이 있게 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얄팍하게 아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면 환호하면서 그걸 신주단지 받들 듯이 맹신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알게 된 것 그 하나가 온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면 좋은 것 중의 하나가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생각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둘을 구별 짓고 각각에 맞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함에도, 모든 것을 단순화하여 명쾌하고 확정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얄팍한 앎으로 복잡한 문제를 만나면, 그 배후에 자기가 믿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음모론은 이런 앎의 필연적 결과다. 앎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넘어간다. 이것이 이 시대의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비전문가는 자기가 전문하지 않은 영역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전문가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전문가에게 열심히 물어볼 수 있다. 물어보는 것을 통해서 전문가들의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다른 이야기들을 비교하면서 새로운 의문과 질문을 만들어가며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전문가들이 '논의'를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한 방법이다.
- 이런 시대의 자기를 배려하는 기예는 '보호와 안전의 개인화'로 흐를 위험이 크다. 모든 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이게 아버지의 자기 배려 기예의 한계였다. 아버지는 한계를 개인의 기예 문제로만 파악하는 것의 한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기를 보호할 다른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개인의 기예와 태도의 문제로 삼지 말고 사회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한계를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재능의 차이를 남과 비교하면 비극이 되지만 자기에 집중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의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능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을 자기에 관한 앎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과 비교해 위계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것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그 결과, 꼭대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재능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해 놓은 것이다.
- 앞에서 이야기한 '숨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1분의 길이 밖에 없는 나는 미역이나 따야 하느냐는 말은, 1분이라는 숨의 길이는 재능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1분 따위는 재능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럼 어느 정도가 되어야 '재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숨의 길이가 2분인 사람에게 물으면 그것도 재능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어디부터인가? 그것은 일등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일등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는 재능으로 인정되고, 나머지는 재능이 아니다. 이처럼 재능의 문제에서 여지없이 작동하는 게 바로 일등주의다.
- 과거에도 재능은 명성과 관련되어 성과주의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재능에 관한 성과주의적 발상의 특징은, 먹고사는 문제인 직업을 사회적 자존감의 문제와 연결해놓았다는 것이다. 1부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직업을 통해서만 사회적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 사회적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 사회적 자존감이라면, 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이 사회에서 자존감을 갖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만을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회에 참여하며 사회의 부가 증식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업이 없다는 것은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전업주부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사회적 자존감이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엄청나게 많은 노동을 하지만 그 노동은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 둘째, 돈 버는 것을 통해 '가장'이 될 수 있고 가족 내에서 존재감을 획득할 수 있다. 사실 이게 지난 시기 남성 중심주의의 근원이었다. 남성만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해 놓은 상태에서 남성이 돈을 벌어 집으로 온다. 그는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사람이고, 그게 그의 사회적 자존감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중요한 재능은 여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남성 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 그래서 중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간에 포기해버려서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초기에 성과를 내며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잘하는 사람만 자기 한계를 알 때까지 해볼 수 있고, 나머지 모두는 자기 한계를 모르는 채로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도 상위권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재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자는 더 잘 알게 되고 모르는 자는 아예 모르는 상황이 반복된다.
-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답은 '충분히 해보았을 때'다.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 일등주의가 가진 악영향은 바로 이 '충분히'를 두 가지 지점에서 방해한다는 것이다. 첫째, 일등이 안 될 것 같으면 충분히 해보기도 전에 미리 포기하게 해서 한계를 아예 알 수 없게 만든다. 둘째, 일등이 되지 못할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충분히 해봤으면서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기기만이 일어날 수 있다. 일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속인다. 그리고 무리수를 두며 또다시 무리한다.
- 그러므로 이런 자기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욕망의 문제다. 자기를 배려하는 것은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과 자기 욕망을 동일시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바가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곧 나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나를 배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는 힘'이다.
- 두 번째는 탁월함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탁월함을 '숨의 길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숨의 길이를 다루는 정도, 즉 다룸의 기예로 판단하는 것이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인지 5분인지를 가지고 탁월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이라면 5분이라는 숨의 길이는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기예와는 무관한 재능이다.
-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 숨의 길이가 탁월하게 긴 사람이 있다. 이런 재능은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다. 나와 함께 <공부 중독>을 쓴 하지현 선생은 재능이 영어로 gifted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이 재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능은 인간의 힘으로 계발하거나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내 재능과 다른 사람의 재능을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런 재능은, 그것을 받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 또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로 감사하게 사용하며 그 열매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게 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 나는 숭산 스님의 이 화두를 이야기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발견해볼 것을 권유한다. 금방 알아듣고 찾아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문자 그대로 '오직 부딪칠 뿐'인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나처럼 질문을 통해서, 즉 말로써가 아니라 부딪쳐서 배우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 '하는 것'에서 '겪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는 '하는 건'을 늘 '겪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기에 부딪침을 통해 훌륭히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 또, '오직 따를 뿐'인 사람도 있었다. 남이 가르치는 대로 따를 뿐이라고 하면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따르는 것을 통해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이었다. 혼자 부딪치고 묻는 게 아니라 자기보다 뛰어난 이를 만나 그의 말을 따라가면서, 그는 금방 스승을 따라잡았다. 그게 그의 배우는 방법이고, 세상을 대하는 배움의 태도다.
- 따라서 공부하는 태도가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위험한 판단이다. 오히려 가장 나쁜 배움의 태도가 자기 배움의 방식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배우는 것이며,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좋은 태도는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잘 알고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자만이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자기 태도를 알아야 공연히 헛된 힘을 쓰며 무리하다 배움에 지치는 것을 막고 성장을 도모하며 배움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사성이 없다면 내 삶에 '자기'라고 부를 것이 없어진다.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도모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이렇게 자기의 성장을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 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발생적인 배움에만 의지하며 성장을 그저 우연하고 운명적인 것으로 만드는 까닭은,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이 말을 가장 잘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이들은 요리사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도구가 있고,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한두 번은 도구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쾌감을 누려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유를 맛본 사람들이기에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안다.
- 반대로, 다룰 줄 아는 도구가 없는 사람은 이 말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낀다. 다룰 줄 아는 도구가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부자유를 구체적으로 느껴본 적이 없으며 부자유의 무게에 짓눌려본 적도 없다. 부자유가 추상적이기에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추상적이어서,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여본 적도 없다.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꿈꾸는 자유는 그저 '내 맘대로 하고 싶다'라는 공허한 바람에 불과하다. 활용이 없는 자유, 다툼이 없는 자유를 꿈꾸지만, 이런 자유는 불가능하다. 이런 자유를 꿈꾸는 한 그는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저 불만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 자연법칙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경우와 달리 사회생활이나 예술의 경우, 사람은 법칙을 지키고 활용하는 것을 넘어, 법칙을 위반하면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문학이다. 문학이 문법을 활용하는 방식은 지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기기도 하는 것이다. 문법은 말을 주고받으며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법칙이다. 그러나 이 법칙대로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법칙을 어기는 것을 통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언어와 말하기 방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위반을 통해 새로운 말과 말하기 방법을 창조하기 위해서도 문법을 알아야 한다. 내가 어기려고 하는 문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만 그것을 어김으로써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요리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어김을 통해 새로운 효과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반복해서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겼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은 요행수로 걸린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앎을 통해서만 반복적으로 재생될 수 있다. 자유의 기예이자 토대로서의 삶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그 결과, 이렇게 익힘의 과정 없이 배우기만 한 존재는 자기 한계를 알지 못하고 만능감에 빠진다. 머릿속으로는 저 산도 옮길 수 있고 지금이라도 당장 기발한 아이디어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능감이다. 사실 익힘이란 이 만능감이 깨지는 과정이다. 익힘이 가진 육화라는 물질성이 관념의 만능감을 깨뜨리고 자기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깨닫게 해 자유를 향한 '연마'의 과정으로 이끈다.
- 그러나 익힘의 과정이 부재하므로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어진다. 대신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오로지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기예의 문제를 조건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배움을 넘어 익힘을 통해서만 연마되는 기예가 늘 리 없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 교육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여기서 우리가 다시 짚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익힘의 과정이 즐거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내가 뭔가를 익힐 때도 그랬다.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익히는 과정에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부자유다. 이 부자유의 경험이 기쁨을 주기보다 좌절감을 갖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익힘의 과정은 그 자체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익힘의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부 마지막에서 나는 자기에 집중해서 자신이 배울 때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히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A라는 기술을 익힐 때, 그 과정에서 A의 기술뿐만 아니라 배움과 익힘의 기술도 같이 향상된다. 그러나 A라는 기술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내가 익히고 있는 배움 자체의 기술, 익힘 자체의 기예는 간과하고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익힘의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익히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때, 내 몸에 익혀지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배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우리는 익힘을 통해 능수능란함에 도달할 수 있다. 지루함을 견디는 힘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기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통해 배움이 다음 단계에 이른다고 해도,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배움의 중요한 목적은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고 그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돌볼 수 있다.
- 나아가,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특히 지금처럼 배움을 미끼로 사람을 착취하는 사회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자기 배려가 없는 견딤은 자기 계발과 같이 기만적인 자기 착취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미 충분히 착취당했다.
- 자기에게 집중할 때 사람은 익힘의 지루한 과정에서도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역량이 증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배우고 익히는 법 자체의 특질을 발견하는 것을 비롯해 자기에 관한 앎에 도달하고, 그 앎으로부터 (다음의 앎을) 좀 더 수월한 것으로 만들거나 불가능한 것에서는 물러나는 등 배움과 익힘의 기예 자체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기술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결코 보이지 않는 배움의 기술이다.
- 이 배움의 기술 역시 머리가 아니라 몸의 문제다. 듀이는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했다.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 글을 쓰는 이는 아름다운 문체를 보면 반한다. 이론을 공부하는 이는 논리 정연한 이론을 보면 반한다. 기계를 만지는 이는 빈틈없이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정교한 메커니즘을 보면 반한다. 컴퓨터를 만지는 이들은 아무리 낡은 컴퓨터라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군더더기 없이 최적화해놓은 것을 보면 반한다. 대충 옷을 걸친 것 같은데도 재질과 색,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멋진 스타일을 연출할 때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반한다. 그러나 멋짐/아름다움은 그 기술에 관해 잘 아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비전문가도 매혹한다.
-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공'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계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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