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겨울 외] 요즘 사는 맛 - 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작가들의 일상 속 음식 이야기

일루젼 2022. 12. 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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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겨울 / 김현민 / 김혼비 / 디에디트 / 박서련 / 박정민 / 손현 / 요조 / 임진아 / 천선란 / 최민석 / 핫펠트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22.02.18 


       

며칠 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나는 정말 매운 맛을 좋아하는 걸까?'

 

매운 요리를 잘 먹고,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며칠간 생식에 가까운 채식을 하다가 문득 내가 필요로 했던 건 매운 '맛'이 아니라 '통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각의 일종이다. 거기서 고추 향이나 추가된 양념들의 맛을 함께 느끼다 보니 일종의 '맛'으로 인지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내가 필요로 한 게 '그 요리'가 아닌 '매운 맛'이었다면, 그건 내가 약간의 자기 학대를 원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까 하는 지점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매운 게 땡긴다는 말은, 그 스트레스를 중화해 줄 다른 고통이 필요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고. 

 

혈관 확장, 혈액 순환, 땀 배출 같은 부가 현상들이 필요하다면 운동이나 반신욕 같은 더 건전한 대안(혹은 고통)들이 존재한다. 추워서라면 맵지 않은 뜨거운 음식들을 먹는다는 대안이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이 한 번 멀리 멀리 안드로메다로 흘러가 버리면 거기서 다시 돌아오는 데는 몇 광년(수면 혹은 약간의 알콜)이 필요해지는데, 하루 종일 먹는 이야기를 읽었더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다양한 맛들이 머릿속에서 초신성 폭발 중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 이럴 때 필요한 건 알콜이다. 

 

한번 폭주하기 시작한 의식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낮술도 밤술도 좋아하는데, 이 시간에 마시는 술은 '낮술'일까 '밤술'일까. 고구마소주가 먹고 싶은데 집에 없다. 가장 비슷한 건 과실주인 '와인'일까 곡주인 '맥주'일까 증류주인 '법주'일까. (아마도 법주) 안타깝게도 보리소주나 그냥 소주는 없는 상태다. 앗 그런데 왜 감자소주는 없지? 곧바로 검색. 있구나! 내가 몰랐구나! 감자소주 궁금하다! 

 

<요즘 사는 맛>은 대략적으로 이런 흐름의 '먹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에세이 앤솔러지다. 각각의 저자들이 풀어놓는 '요즘 즐겨 먹는 것들', '먹을 거리에 얽힌 일화', '자신이 가진 식(食) 가치관' 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도 잊고 있던 다양한 맛과 기억, 감각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어제는 무엇을 먹었는지?

그건 어떤 맛이었고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

 

그래서 오늘은, '어떤 맛'을 느끼고 싶은지?    

 


   

- 어쩐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마토와 낯을 조금 가리는 것 같다. 1인당 연간 100킬로그램 이상을 소비하는 그리스나 50킬로그램 정도를 소비하는 포르투갈, 이탈리아에 비교하면 소비량이 귀여운 수준이다. 2018년 기준으로 6.7킬로그램이라고 한다. 식문화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농업관측본부의 조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마토를 생으로 먹거나 갈아서 주스로 먹는다고 한다. 나는 이 조사 결과를 보자마자 절규하지 않을 수없었다. 안 돼! 토마토가 얼마나 맛있는데 생으로만 먹다니! 

 

- 내가 요리에 제일 자주 쓰는 토마토는 캄파리 토마토로, 완숙 토마토를 구하기 힘든 철에도 마트에서 구할 수 있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에 풍미가 좋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보통 이 캄파리 토마토가 구비되어 있다. 

 

- 그럼 도대체 토마토로 뭘 해 먹기에 이렇게 토마토에 진심인가? 자주 해 먹는 토마토 요리를 몇 개 소개해보겠다. 가장 멋진 점은 전부 다 엄청나게 쉬운 요리라는 것이다.

 

<밑반찬: 토마토 마리네이드>

 

- 캄파리 토마토를 비롯한 중간 크기의 붉은 계열 토마토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 요리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토마토 마리네이드가 김치나 장아찌처럼 구비되어 있다. 실제로 식초가 들어가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한 번 만들어두면 밑반찬처럼 먹을 수 있다. 파스타면 삶아서 소스처럼 섞어 먹을 수도 있고, 빵에 올려 먹거나 샌드위치로 해 먹어도 되고, 에그 스크램블에 뿌려 먹어도 되고, 문어숙회나 연어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을 수도 있다(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문어숙회와 바질 페스토,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대접했더니 '합정 인근의 잘 나가는 와인바 안주 맛'이라며 싹 해치웠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토마토에 십자로 칼집을 내어 살짝 데친 후 껍질을 벗기고, 큰 통에 담은 뒤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레몬즙, 꿀을 3:11:1 비율로 넣는다. 양파를 잔뜩 썰어 넣는다. 끝.

 

- 반나절 정도 숙성시킨 후부터 꺼내 먹으면 된다. 바질을 함께 넣으면 더 좋고, 발사믹 식초와 레몬즙은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감량하면 된다. 나는 화이트 와인 식초도 좀 넣는 편이다. 양파는 많이 넣지 않으면 나중에 추가하게 될 것이다. 넉넉히 넣자. 

 

<겨울: 토마토 수프> 

 

- 겨울에 뜨끈한 국물이 당길 때 한 가지 옵션을 더해보자. 짜고 매운 계열의 국물들과 달리 몸에 무리를 적게 주면서도 속이 든든한 토마토 수프가 있다. 한 솥 끓여두면 빵을 함께 찍어 먹어도 되고 파스타 면을 삶아서 넣어도 되고 포슬한 감자와 감칠맛 나는 고기를 함께 건져 먹어도 된다. 서양권에서는 만드는 방식과 이름이 조금씩 다른 토마토 수프들이 있다. 헝가리의 굴라쉬, 이탈리아의 미네스트로네, 러시아의 보르쉬 등등. 그러다 보니 만드는 방법이 워낙 다양하지만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리뷰자 주 : 나는 에그인헬, 즉 샥슈카도 좋아한다. 예시 중에서는 미네스트로네가 굴라쉬보다 조금 더 맑은 맛이라 더 좋아한다.)

 

- 팬에 올리브 오일을 충분히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는다(어떤 요리든 마늘을 넣으면 급격히 한식 맛이 나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이다). 고기와 양파를 넣고 볶다가(요새는 고기를 안 먹고 있어 고기는 생략한다) 토마토를 썰어 넣고 같이 볶는다. 토마토를 으깨가며 맛을 끌어낸 뒤 물을 부어 끓이다가 소금과 후추 혹은 치킨스톡으로 간한다. 끝. 

 

- 그때 처음 애용하던 치즈는 콜비잭 치즈와 페퍼잭 치즈였는데, 콜비잭 치즈는 미국 특산 치즈인 콜비 치즈와 몬터레이 잭을 섞은 치즈로 맥앤치즈나 오지 치즈 프라이, 수제 햄버거, 그릴드 샌드위치에 넣으면 짜릿한 미국 맛이 난다. 짭조름하면서도 풍미가 강하고 기름기가 많아 맛있게 먹고 살찌기 딱 좋다. 페퍼잭 치즈는 몬터레이 잭에 할라피뇨와 허브가 살짝 들어간 치즈로 콜비잭보다 전반적으로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톡톡 올라오는 고추 향이 매력적이다. 보통 마트에서 파는 흔한 슬라이스 치즈에서 약간의 변화를 줘보고 싶을 때 시도하기 좋은 치즈들이다. 

(리뷰자 주 : 콜비잭은 내 입맛에는 너무 짜다...)

 

- 유럽의 치즈들도 이때 함께 시도해보기 시작했는데, 숭덩숭덩 구멍이 나 있어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생긴 에멘탈 치즈나 숙성된 향이 매력적인 고다 치즈, 샌드위치에 넣기 좋은 에담 치즈, 샐러드에 넣기 좋은 페타 치즈도 애용하는 치즈 리스트에 올랐다. 모두 와인과 함께 하기에도 좋은 치즈들인데, 내가 살던 곳이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에서 멀지 않아(그래 봤자 차로 세 시간은 걸리지만) 와인을 자주 마시게 되어 생긴 취향이다. 특히 고다 치즈는 숙성 정도에 따라 풍미가 다양한데, 살짝 숙성된 고다 치즈는 감칠맛이 뛰어나 샌드위치에 사과와 함께 넣으면 아주 맛있고, 많이 숙성된 고다 치즈는 단단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나 조금씩 뚝뚝 떼어가며 와인과 먹는 맛이 있다. 응축된 맛이 입 안에서 고소하게 퍼지는 것이 일품이다. 치즈가 맛있어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는 부작용이 있다. 꿀꺽. 

(리뷰자 주 : 에멘탈 치즈를 가장 좋아했는데 최근에는 입맛이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풍미가 강하고 식감은 부드러운 치즈들이 더 좋아졌다.)

 

- 앞의 토마토 편에서 슬쩍 드러났듯이 지금 나의 식습관은 주로 서양 음식에 맞춰져 있는데, 그러다 보니 그라나파다노나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둘 중 하나는 꼭 덩어리째로 냉장고에 구비하고 있다. 보통 우리가 '파마산 치즈'라고 부르는 피자 시킬 때 오는 그 치즈의 원조 할머니집 정도 된다. 놀랍게도 그 파마산 가루에는 진짜 치즈가 함유되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원조집을 경험해보면 풍부함에 놀랄 것이다. 요리 위에 갈아서 뿌려주면 간과 풍미를 더해주는 감칠맛의 제왕들이다. 앞에서 소개한 음식들(토마토 마리네이드, 토마토 수프, 가스파초) 모두와 잘 어울린다. 나는 보통 요리 자체에 간을 살짝 덜 하고, 다다익선이라는 마음으로 지칠 때까지 이 치즈들을 요리 위에 갈고 갈고 또 간다. 

 

- 나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 날에는 브리 치즈나 카망베르 치즈를 사다가 6등분 해서 마른 팬에 살짝 굽는다. 치즈가 살짝 녹으면 접시에 옮겨 담고 그 위에 견과류를 얹고 꿀을 뿌린다. 먹는다. 감탄한다. 와인을 딴다. 천국! 애용하는 치즈 사이트에서 알게 된 방법인데 몇 년째 우울한 날의 특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일요일 낮이고, 나는 냉장고에 있는 뮌스터 치즈와 미몰레뜨 치즈, 그라나파다노 치즈를 뚝뚝 떼어가며 낮술을 하고 싶은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 있다. 그거면 돌아오는 한 주도 조금 더 힘을 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 힘내서 오늘 하루도, 치즈. 

 

- 요거트는 소스로 쓰기도 좋다. 알려져 있듯 샐러드나 양고기 요리에 자주 쓰인다. 나 역시 여름이 되면 꼭 만드는 소스가 있는데, 이 소스만 있으면 빵이며 채소며 감자며 연어며 끝없이 먹을 수 있다. 그리스의 '차지키 소스'다. 그릭 요거트에 다진 마늘과 다진 오이, 올리브 오일, 레몬즙, 소금, 후추를 섞는 소스로, 오이의 아삭함과 마늘의 알싸함, 올리브 오일의 부드러움, 요거트의 산뜻함이 중독적이다. 진짜 맛있다. 친구네 집에 집들이를 가서 연어회를 찍어 먹으려고 이 소스를 만들었다가 500밀리리터짜리 요거트 한 통으로 만든 소스를 둘이서 다 먹었다. 연어는 진즉에 다 먹고 나중에는 이 소스만 숟가락으로 퍼먹으면서 '이야. 우리가 이걸 다 먹는구나', '거봐, 맛있을 거라고 했지' 했던 기억이 난다.

(리뷰자 주 : 먹어본 적이 없다... 세상엔 맛있는 게 너무 많다!) 

 

- 김겨울

 

 

-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요리를 즐기는 유형과 차라리 설거지를 택하는 유형, 난 명백한 후자다. 믿을 수 없겠지만, 설거지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말하면 설거지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가 벌레가 귀엽다고 할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제정신이야?" 

 

-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한다. 요리보다 설거지가 나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요리가 식탁에 오를 때의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그 시간은 암묵적인 품평의 순간이다. 음식이 먹는 사람 입에 맞으면 다행이지만, 보통 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 리액션을 쥐어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같이 예리한 사람은 그 찰나를 알아채버린단 말이다. 작위적인 식탁 리액션만큼 보는 쪽이나 하는 쪽 모두에게 곤혹스러운 것도 없다. 리액션에 취약한 나는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차라리 직접 요리하지 말고 배달 음식을 시켜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순간도 더러 있었다. 

 

- 우리는 광주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까지 거기서 살았다. 식재료가 풍성한 고장이라 각종 산해진미를 어렵지 않게 맛보며 입맛을 무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우리의 '테이스트'는 식도락가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또래에 비해 좀 '하드'한 축이었는데, 다른 애들이 떡볶이에 상추 튀김을 먹으러 다닐 때 홍어 삼합이나 돼지 보쌈, 오리 백숙 맛집 따위를 찾아다녔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먹어본 우설의 촉촉한 식감에 대해 열을 올려 대화를 나눈 것도 생각난다.

(리뷰자 주 : 나는 홍어무침이나 삼합은 좋아했지만 우설은 so so...)  

 

-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신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여전히 혀끝에 감도는 감칠맛 때문인지, 주영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기억해줘서인지,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봐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몸도 마음도 충만한 기분이었다. 기름진 접시가 뽀드득 소리를 낼 무렵에는 나의 지론이 더욱 선명해졌다. 남이 해준 밥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 나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를 볼 때 마냥 신기했다. 어떻게 아무도 초대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식혜를 만들고 빵을 구울 수 있을까. 재료를 다듬고 밥을 짓는 저 지루한 시간을 견디면서 어찌 저토록 느긋할 수 있을까. 

 

- 나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꽤 드문데, 손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는 날이 곧 대청소 날이 되어 버린다. 찬장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가물거리는 가장 예쁘고 비싼 접시를 꺼내어 닦고,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는 테이블 매트도 준비한다. 컵이나 커트러리도 그날의 메뉴에 어울리는 것으로 센스 있게 골라둔다. 마지막 단계는 꽃. 손님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집 앞 꽃집으로 뛰어가 가장 싱싱한 얼굴들을 데려온다. 그러고 나면 벌써부터 기진맥진해진다. 손님들을 보내고 그릇을 씻으면서 생각한다. 왜 나는 나한테는 이렇게 극진하지 않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사라졌나?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틀어져버린 걸까. 

 

- 김현민

 

 

- 시리얼 종류에 따라 고소해지거나 달콤해진 우유를 꿀꺽꿀꺽 들이키는 마지막 단계까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우와! 아침부터 과자 먹어!'라는 느낌이 나를 신나고 들뜨게 했다. 평소에는 순순하게 허락되지 않는 과자를 허락하지 않는 장본인인 엄마 쪽에서 먼저, 간식도 아니고 '밥'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서 먹으라고 주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커다란 횡재에는 일견 수상쩍은 데가 있어서 나는 시리얼을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굉장히 조심했다. 엄마가 이것이 '과자'라는 사실에 눈을 떠서는 안 된다, 엄연한 '밥'으로서 계속 바라봐야 한다, 이런 초조함이 늘 있었던 것 같다.

 

- 그밖에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의 눈빛이었다. 그는 늘 나를 세상 쓸모없고 성가신 사람 보듯 바라봤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들은 차곡차곡 내 눈 안으로도 들어와서 언젠가부터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 매일매일 규정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라는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그저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만 남는다는 것을. 나에게조차 나는 성가시고 하찮았다.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 회사에 온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회사 바깥의 삶도 제때 뽑아내지 못한 일상의 잡초들이 마구 자라 정글이 되었고, 정글의 법칙 역시 매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관공서에 들러 처리해야 할 잡일들이 밀리고 밀려 나중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큰일이 되었고, 번번이 놓친 친구들의 메시지나 전화는 마음의 빚이 되어 쌓였으며, 계절 옷 정리를 하지 못해 여전히 겨울인 옷장은 열어볼 때마다 찬바람이 이는 것처럼 우울했다. 특히 부서 이동 이후 현격히 줄어든 만남의 횟수 때문에 거의 매주 다투곤 했던 애인의 날 선 비난은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일을 가속시켰다. 며칠째 잠도 잘 못 잔 나에게 밤새 통화하자거나 어디 놀러 가자는 야속한 제안을 하는 애인을 달래는 일에 지쳐만 갔고, ... 

 

- "넌 그냥 앉아서 네가 곧 먹을 음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나 읽고 있어!" 
화면엔 J의 블로그가 띄워져 있었다. 3년 차 블로거인 J가 '요리과정 샷'을 하나하나 찍어 올린 최신 글의 제목은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이었다. 익숙한 라면 봉지가 얼핏 보이는 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성 라면에 추가로 채소 고기를 듬뿍 넣은 요리'일 거라고 예상했다. 가끔씩 블로그 같은 데에서 보는 라면에 꽃게와 해산물을 잔뜩 넣어 끓이거나 자장라면에 채소들을 추가로 넣고 계란을 얹어 완성한 요리에 가까운 그런 라면 완벽한 오해였다. 

 

- "나 좀 쩔지! 너 이거 먹으면 기운 확 날걸?" 
의기양양한 J의 말과 함께 사골 육수에 기존의 라면을 합친 사리곰탕면이 식탁에 놓였다. 뽀얀 국물에 가려 면발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그전에 뿌연 눈물에 가려 국물도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이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 한입 두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국물이 흘러들어오면 눈물이 흘러나가며 내 눈에 옮아있던 날 선 눈빛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J의 사리곰탕면이 새겨 넣은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누군가가 이틀을 꼬박 바쳐 요리한 음식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잊지 마'.

 

-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 커피 이야기를 하니 프랑스에서 맥도날드에 들어갔다가 가장 기본적인 커피인 '카페 알롱제'부터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 누아젯, 카푸치노 등 커피 종류만 예닐곱 가지가 있어 "역시!"라고 감탄하며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프랑스 맥도날드에서 진짜 좋았던 건 맥주를 팔았던 것! 토질과 수질이 달라 나라마다 햄버거를 구성하는 빵, 채소, 고기의 식감과 질감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햄버거라도 맛이 조금씩 다르고, 그 나라에만 있는 햄버거 메뉴가 또 따로 있어 햄버거 고르는 재미도 쏠쏠한데, 거기에 맥주가 더해지니 거의 천하무적이었다. 온갖 베리에이션으로 조합해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맥도널드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에는 오랫동안 몸에 밴 집단적 습관을 거스르는 나른한 쾌감도 있어 그 후에도 프랑스에 갈 때면 한 번씩은 꼭 '맥맥'을 즐겼다(맥주와 함께 와인도 팔지만 맥커피나 맥비어에 비해 맥와인은 현저히 아쉬운 맛이라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 이렇게 맥도날드를 찾아다니는 재미를 2014년과 2016년에 여행한 아이슬란드에서는 누리지 못했다. 내 잘못은 아니다. 아이슬란드에 맥도날드가 없었으니까. 맥도날드에 가보려고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정보라서 이 또한 맥도널드가 선사한 재미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여행해본 곳 중에 가장 독특하고 이국적인, 아니, 이국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다른 행성 같았던 아이슬란드의 이미지를 '無-맥도날드'가 완성했다. 

 

- 2019년, 영국 BBC와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아이슬란드의 히요르투르 스마라손 씨와 '10년째 썩지 않은 햄버거'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스마라손 씨는 10년 전 금융위기로 아이슬란드에서 맥도날드가 폐업을 결정했을 때 마지막 날 마지막 손님 중 한 명으로 가서 산 치즈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먹는 대신, '맥도날드 음식은 썩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 중간에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을 잠시 거쳤다가 다시 돌아온 치즈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그는 유리 상자 안에 넣고 몇 년 더 기다린 후 10년째인 2019년에 개봉하는 영상을 찍어 공개했다. 그것들은 스마라손 씨 표현대로 "언제나 그렇듯 신선"했고, 지금은 아이슬란드 남부의 한 호스텔에 "Hello! 나는 2009년 아이슬란드에서 판매된 마지막 치즈버거야"라는 팻말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스마라손 씨가 여전히 정기적으로 햄버거의 상태를 확인하러 그 호스텔에 방문하곤 한다는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 이것을 보도하는 한 백인 남성 기자가 교통 근접성이 떨어지는 이 호스텔에 오직 햄버거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관광객도 있다며 세상엔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는 듯 웃었을 때 나는 뜨끔했다. 영상을 보는 내내 그 호스텔에서 꼭 하루 자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햄버거를 방문하는 스마라손 씨도 만나보고 싶고 말이다. 

 

- 아아, 한동안 잘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쓰다 보니 가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강하게 인다. 나라별 맥도날드 여행의 마지막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치즈버거와 한 공간에서 자는 것으로 장식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맥도날드 최후의 날에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남겨 최고의 굿즈로 만들어낸 스마라손 씨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 김혼비

 

 

- 평양냉면이 소위 '미식가들의 음식'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냉면집에 가면 꼭 한두 테이블에는 평냉 초보와 평냉 좀 먹어본 사람이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식초는 넣지 마라", "이건 국물 본연의 맛을 즐기는 음식이다", "면을 흐트러뜨리기 전에 먼저 국물 맛부터 봐야지" 같은 '면스플레인'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던 때였다. 일단 요즘 유행하는 건 모두 정복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 나는 서울의 평냉 투어를 떠나기로 했다.

(리뷰자 주 : 그러고 보니, 나는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내 그릇에 식초를 냅다 부었던 상대에게 강하게 분노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부먹파다.) 

 

- 글 쓰는 사람에게 추억팔이란 숙명 같은 일이다. 원고 마감을 위해서는 삶의 어떤 시점이든지 기꺼이 곱씹을 준비가 되어 있는걸. 특히나 헤어진 애인과의 이야기 같은 건 가장 꺼내 쓰기 좋은 조미료와도 같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자'라고 마음먹으니, 퍼뜩 그 메뉴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였더라. 스물한 살인지, 스물두 살인지. 아무튼 15년은 지난 기억이다. 

 

- K가 날 데려간 곳은 어떤 후줄근한 건물 7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왜 이런 이상한 곳에 데려가나 싶었는데, 정말 멋진 루프탑이 숨어 있었다. 이태원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이고 저 멀리 이슬람 사원까지 보였다. 완벽할 만큼 이국적인 장소였다.

 

- 첫 번째 음식이 나왔다. 동그란 그릇 안에 담긴 무슨 수프라고 했다. 미처 녹지 않은 두꺼운 치즈가 둥둥 떠 있었다. 수저로 휘저어보니, 갈색의 맑은 국물이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수프는 크림을 넣어 되직하게 끓여낸 음식을 의미했는데, 그건 마치 간장을 많이 넣은 소고기 뭇국 같아 보였다. 후루룩 먹어보니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감칠맛이었다. 달고 짭짤한 국물이 입에 맞지 않을 리가 없었다. 치즈가 서서히 녹아내려서 함께 떠먹을 수 있었다. 수프 안에 잘게 썬 양파와 바게트 한두 조각이 들어 있었다. 빵을 물에 적셔 먹다니 정말 이상한 메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후루룩 후루룩 퍼먹다 그릇이 비어갈 때쯤 깨달았다. 이거 맛있는데? 

(리뷰자 주 : 나는 레스쁘아의 어니언 수프.) 

 

- 애석하게도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그 음식이 '프렌치 어니언 수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엔 그런 음식을 파는 곳도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접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몇 년이 흐르고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아, 그때 먹었던 게 프랑스 요리였구나" 하고 깨닫게 됐던 것이다. 

 

- 대구의 3대 치킨은 뉴욕통닭, 원주통닭, 진주통닭이다. 공교롭게도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집에 다른 도시명만 들어간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중에서도 넘버원으로 손꼽히는 곳은 바로 뉴욕통닭. 이곳은 하루 판매할 양을 정해놓고 재료가 소진되면 영업을 종료하기 때문에 오후만 되어도 먹기 힘들다. 시그니처 메뉴는 양념치킨과 찜닭이다(대구의 치킨집에서는 보통 찜닭을 함께 판다). 양념치킨은 물엿의 비율이 높은지 닭강정처럼 딱딱한 튀김옷이 특징이다. 경도가 판금갑옷 수준으로, 웬만한 닭강정보다도 더 딱딱하다. 뼈 있는 닭강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색적이지만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담한다. 다음 날 또 먹고 싶어질 거다. 

 

- 이 외에도 소개하고 싶은 곳이 차고 넘친다. 대구가 발상지인 볶음우동과 중화비빔밥, 봄과 여름에만 장사를 하고 가을, 겨울에는 여행을 다니느라 문을 닫는 부산 안면옥의 평양냉면도 매력적이다. 주토피아는 서울에서도 쉽게 맛보기 힘든 까노토 스타일의 피자를 선보이는 핏제리아다. 까노토란 피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도우가 큰 스타일이다(이탈리아어로 '구명보트'라는 뜻).  

 

- 디에디트(에디터 M, 에디터 H, 에디터 B)

 

 

-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싶다. 비싼 돈 주고 들어온 전셋집에서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최선을 다해 안 나가고 싶다. 앞으로 펼쳐질 이 집의 역사에서 '최장시간 칩거 세대주' 기록만큼은 뺏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열정적으로, 성의 있게, 온 힘을 다해서 안 나가고 싶다. 

 

- 가끔은 사치가 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본식과 후식을 동시에 주문하는데, 우연치 않게 두 명의 라이더가 동시에 집에 도착할 때도 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한식 주방장과 디저트 주방장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주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순간 찾아오는 포만감만으로 한 끼 식사는 뚝딱이다. 

 

- 물론 두 명의 라이더가 엘리베이터에 동시에 타서 같은 층수를 누르는 순간 느낄 당혹감, 해당 층에 도착할 때까지 제발 호수만은 달랐으면 하는 헛된 기대감,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듯이 같은 호수로 향하는 어색한 발걸음, 문을 열고 방긋 웃는 30대 노총각을 보며 느낄 '이 해맑은 돼지 새끼는 도대체 뭐지' 하는 허탈함,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느껴야 할 알 수 없는 동질감, 서로의 바이크에 오르면서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뇌를 조여 오는 압도적 딜레마,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우오아에오(수고하세요)'. 그 모든 것에 송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잘 차려진 밥상머리에서 난 그저 해맑은 돼지가 되고야 만다. 

 

- 이런 하잘 것 없는 시간 낭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다. 엄마가 누누이 당부하는 '배달음식 금지', '누워 있기 금지', '헛소리 금지'를 다 어기면서 묘한 해방감에 젖는다. 이제 난 어른이라는 긍지도 느껴진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내일은 세상의 중심에서 "해물찜 소자 덜 맵게 낙지 추가"를 외칠 차례다. 

 

- 일이든 여행이든 외국으로 나갈 때마다 몸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차이는 그 나라의 색깔과 음식이다. 색깔의 경우 영화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데, 한국, 일본, 미국, 유럽 영화의 화면은 확연히 다르다. 감독의 의도 혹은 기술적 차이가 물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각 나라가 가진 색감과 광량이 달라서 영화의 룩 자체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색깔만큼 다른 것이 음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단무지'와 '다꽝'의 맛이 어딘지 모르게 확연히 다른 것으로 보아 확실히 그렇다.

 

- 해외를 나가게 되면 그 나라의 음식을 집중적으로 먹어보는 버릇이 있다... 고 하기에는 그 나라의 음식을 집중적으로 먹지 않으면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이냐는 반문이 든다. 남들도 다 그럴 텐데 무슨 미식가처럼 말하는 게 좀 재수가 왕재수다. 좌우지간 그 나라의 음식을 먹는 데 나름 애를 쓰는 편이라는 이야기다.  

 

- 하지만 유럽으로 가면 얘기는 조금 다르다. 언젠가 이태원의 유럽 음식점에 들른 적이 있는데, 심지어 서빙을 하시는 직원들이 모두 외국인이었던 독특한 가게였다. 그들은 매우 친절했고, 독일식 족발이라는 '슈바인학센'은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맛있었다. 

 

- 박정민

 

 

- 오믈렛과의 인연은 2010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 중 들른 피렌체의 어느 식당에서 별 기대 없이 주문한 메뉴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달걀 요리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고?' 접시 위에 놓인 노란색의 음식 안에는 양송이버섯과 모차렐라 치즈가 전부였는데 부드러우면서 짭조름했다. 다음 날 아침도 같은 메뉴로 한 번 더 먹었다. 이때 맛본 음식이 양송이 프리타타(frittata)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 프리타타는 달걀 푼 것에 채소, 육류, 치즈, 파스타 등의 재료를 넣어 만든 이탈리아식 오믈렛이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의 인생 요리가 됐다. 그때 그 맛을 재현하기 위해 오믈렛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달걀옷에 소금을 넣으면 더 탄탄해지고, 소금 대신 설탕을 넣으면 케이크처럼 폭신폭신해진다고 한다. 달걀에 한 줌의 설탕을 넣고 우유랑 섞었더니 연노랑 빛이 되었고, 거기에 토핑을 넣어 약불이나 중불에서 10분 정도 익혔다. 오! 부드러워. 싱겁지만 담백해! 나는 이 요리에 이름을 붙였다. 이른바 '효니오믈렛'. 해시태그(#hyonnieomelette)도 만들었다. 

 

- 뭐든 실천이 중요하다. 유명 요리사의 레시피나 요리 만화책이 간접 도움을 주었지만, 앞서 말한 카우치서핑 때 결정적으로 이 요리를 반복 숙달할 수 있었다. 그중 몇몇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모두 재료 본연의 맛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들이다. 

 

- 스위스 모르쥬에서 머문 오래된 저택 뒷마당에는 집주인이 풀어놓은 닭이 있었다. 주인은 달걀 껍데기에 수확한 날짜를 연필로 적어 공용 주방에 놓았고, 이틀이 지나면 먹어도 된다고 했다. 진한 노란빛의 달걀로 만든 오믈렛은 그 풍미부터 달랐던 기억이 난다. 토마토는 산 페르민 축제로 유명한 스페인의 팜플로나가 정말 좋았다. 주로 사이드 메뉴로 곁들여 먹었는데, 그때 내가 맛본 토마토는 소형 단호박에 가까운 모양의 에어룸(Heirloom) 토마토였다. 치즈는 프랑스 파리에서 다채롭게 구할 수 있어서 무엇을 넣을지 행복한 고민을 했다. 에멘탈이나 고다 치즈처럼 상대적으로 수분이 적은 치즈를 토핑으로 곁들여도 괜찮았다. 한편 모차렐라 치즈보다 맛있고 비싼 부라타 치즈는 토핑으로 사용하기에는 수분이 너무 많이 나와서 샐러드로 먹는 게 낫다. 

 

- 돌이켜보면 오믈렛 서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문화권의 호스트를 위해 오믈렛을 만들었다. 한두 번 정도는 김치볶음밥이나 라면 같은 한국 음식을 해줘도 됐을 텐데 왜 오믈렛에 집착했을까? 아마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감사를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마트에서 사기 간편한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고, 채식주의자도 먹을 수 있고, 영양 면에서나 눈으로 보기에도 괜찮고. 

 

- 어느 봄날, 17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 끝자락에 있는 한옥 게스트하우스 '무검산방'에 도착했다. 원래 낯선 남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인을 통해 특별히 숙식을 허락받은 곳이었다. 

 

- 주인장은 그날 저녁으로 갓 찐 연잎밥과 두부된장찌개, 지리산에서 채취한 나물들을 내왔다. 뜨끈한 연잎을 펼치니 밤과 대추, 영양찰밥이 들어 있었다. 이 맛을 보려고 모터사이클 진동을 견디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여기까지 내려왔나? 꿀맛인 건 차치하고, 이곳은 속세가 아닌 것 같았다. 

 

- 맛있는 음식만큼 인상적이었던 건, 주인장이 귀촌하게 된 사연과 이곳이 속한 산내면 마을공동체의 독특한 분위기였다.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으로 분류되며, 산으로 둘러싸여 이름도 산내(山內)다. 지리산 뱀사골 계곡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듬해 열린 '실상사 귀농학교'를 통해 새로운 대안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고, 2017년 기준으로 산내면에 사는 2000명 중 약 400 명 이상이 귀농, 귀촌 인구다. 공동체의 주요한 가치는 자립과 자치. 도시에서 젊은 사람들이 이따금 내려온다고 한다. 주인장은 시골살이의 장점 중 하나로 '선의를 서로 잘 보여줄 수 있는 삶'을 꼽았다. 

 

- "저는 이제 도시로 안 돌아갈 것 같아요. 여기서는 연봉 500만 원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거든요. 교육이든 살림이든 농사든 서로가 가진 재능을 품앗이하기도 하고요." 주인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 당시 도시 생활에 지쳐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고민하던 내게 이날 식사는 큰 화두를 던졌다. 이미 자기만의 답안지를 과감히 실천해 살고 있는 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형과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삶의 다른 길'을 정말로 갈 수 있느냐는 화두로 제법 팽팽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정말로 연소득이 500만 원만 되어도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 살 수 있겠어? 만약 예기치 못하게 누군가 큰 병에 걸리거나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나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형의 논리를 당해낼 순 없었다. 

 

-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주인장은 속 시끄러운 둘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접 구운 쿠키를 커피와 함께 주셨다. 설탕과 버터를 보통 레시피의 절반만 넣어 구운 쿠키라고 덧붙였다. 그리 달지 않고 적당히 고소한 쿠키, 향긋한 풍미의 커피를 먹으며 법정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 스님이 백장 선사에게 묻습니다.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백장 선사가 머물던 산 이름을 백장산 또는 대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홀로 대응봉에 앉는다'고 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든, 절의 후원에서 일을 거들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에 있든 언제 어디서나 홀로 우뚝 자신의 존재 속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 법정스님, <일기일회>

- 시골에서 살든, 도시에서 살든 제각각의 고충이 있지 않을까. 시골 생활에 너무 환상을 가질 필요도 없고, 도시 생활을 너무 못마땅해할 필요도 없을 거다. 

 

- 주인장이 직접 구워주던 쿠키가 영화 <매트릭스>의 오라클이 네오에게 건네던 그 쿠키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럼 연잎밥은 진짜 현실을 각성하게끔 하는 빨간약일까? 한 번은 연잎밥을 어떻게 만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주인장이 웃으며 답했다. "호호, 그건 기성품이에요. 인터넷에서 다 팔아요." 그래, 연잎밥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 그걸 대하는 내 마음이 중요하지.

 

- 처음부터 커플의 팀워크가 좋았던 건 아니다. 요리 밑작업을 하는 동안 나오는 찌꺼기 처리나 그릇 설거지, 불을 사용하는 순서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 다름의 영역이 꼭 부엌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쓰레기통에 씌운 비닐을 흰색으로 하느냐 검은색으로 하느냐로 다퉜고, 화장실에 거는 수건으로 티격태격했다. 못난 것들을 굳이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려는 아내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하지만, 그때는 그런 행동들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전시장에서 마주친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고도로 계산되고 치밀하게 짜인 아름다움의 결과물인지 그땐 몰랐다. 

 

- 둘 다 먹는 걸 좋아하는데, 만드는 영역에서 이렇게 퍼포먼스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어깨너머로 관찰해보니 아내에겐 메뉴 기획, 새로운 메뉴에 대한 학습과 응용, 제철 음식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음식을 (망칠) 용기가 있었다. 쉴 때도 유튜브로 요리 공부를 하고 여러 인플루언서의 레시피에 영감을 받아 뭔가를 시도해본다. 냉장고를 살피고 고민한 뒤 냉털 요리를 뚝딱 하기도 한다. 결국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였다. 

 

- 일본의 공학박사 고야베 이쿠코는 <컬렉티브 하우스: 언제나 함께하고 언제든 혼자일 수 있는 집>을 통해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와의 대담을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우에노는 가족의 최소 정의로 '공동 식사 공동체'를 언급하며 불, 즉 화로를 공유해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공동성의 기본이 함께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공동 조리는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의견이었다. 한편 고야베는 함께 먹는 것보다 좀 더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공동 조리라고 말했다. 그는 공동 조리는 중층적으로 기능하는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고, 이것이 셀프워크(selfwork)의 핵심이라 덧붙였다.  

 

- 실제로 엄마의 음식이나 레시피를 주제로 식당을 내거나 책을 쓴 사람들도 있다. 2013년 한남동에 문을 연 한식당 '빠르크(Parc)'는 박모과 대표의 어머니 허정희 여사의 레시피를 기반으로 한 메뉴를 선보인다. 박 대표는 자신의 어머니를 '타고난 요리사이자 행사 많은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소개한다. 2020년 홍제동에서 시작해 2021년 상반기 성수동에 선보였던 '금자씨 부엌'도 좋은 사례다. 엄마의 집밥에 숨어 있는 브랜딩을 발견한 딸 손하빈이 어머니 장금자 여사와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로, 장금자 씨의 팬층이 생길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다시 돌아봐도 엄마에게 가장 감사하는 것은 엄마가 내게 해 준 맛난 음식, 좋은 옷, 좋은 교육, 다양한 경험 같은 여러 혜택보다도, 인생의 매 순간 나이 따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즐겁게 산 엄마 자신의 삶 그 자체이다. '엄마'라는 단어에 흔히 따라붙는 '희생'과 '헌신' 같은 단어나 괜스레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 같은 감정에 앞서, 내 노년도 엄마의 그것처럼 즐겁고 다채로울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해 줬다는 사실에, 또 엄마를 떠올리면 미안함보다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앞선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하고 감사한다. - 홍보라, <맥시멀리스트 이수산나호순의 인생 레시피> (보따리) 중

- 손현

 

 

- 내가 어떻게 3년간 채식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해볼 텐데, 어쩌면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허, 이렇게도 허투루 채식 생활을 할 수 있구나. 야, 이게 채식 생활이면 나도 하겠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며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야, 나도 하겠다.' 당신이 날 비웃으며 꼭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 자기 삶에 뜻 없이 이런저런 제약을 걸어 일부러 약간 불편하게 살아보는 재미를 다들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손으로 젓가락질 해보기일 텐데 실제로 나는 이 불편한 재미를 거쳐 양손으로 젓가락질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외에도 겨울에 보일러 안 틀고 버텨보기, 냉장고 없이 살아보기, 수건 한 장으로 한 달 버텨보기, 뭐 이런 걸 재미 삼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비건 생활을 약간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고 한두 달 정도 지속했었다. 이 기간 동안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비건 요리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뭐가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울과 제주의 다양한 비건 음식점을 돌아다녀보았다.

(리뷰자 주 : 왼손으로 글씨 쓰기는 도전해봤는데, 젓가락질이라니... 호기심 호승심 이 치솟는다.) 

 

- 내 의도대로 무척 불편하고, 동시에 신기한 경험이었다. 분명히 내 식생활을 제한하고 있는 중인데 오히려 식생활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쳇바퀴처럼 먹던 것만 먹으며 돌아가던 고리타분한 내 식세계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아찔하게 미지의 영역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 몇 가지 구황작물과 상추, 청양고추, 그리고 횟집에 가면 주는 당근과 오이가 즐길 줄 아는 채소의 전부였던 나는 하나하나 못 먹던 채소들도 먹을 줄 알게 되었다. 흥미로운 걸 죄다 입으로 가져가고 보는 아가처럼 나는 처음 보는 식물들, 안 먹어본 채소들을 일단 다 입으로 가져가 집어넣어 보았다. 맛있는 건 맛있는 대로(고들빼기, 민들레, 연근), 맛없는 건 없는 대로(셀러리, 미나리) 재미있었다. 

 

- 특별히 채식 생활에 생각이 없더라도 재미 삼아 비건 생활을 짧게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이 기간을 거친 뒤 예전으로 돌아가 고기를 먹는 생활을 다시 하게 되어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있고, 그건 남은 인생 내내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 그렇게 짧은 비건 생활을 거쳐 느슨한 채식 생활로 돌아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찾아왔다. 그것은 감사함이었다. 무슨 종교도 아니고 뜬금없이 웬 감사함이냐 싶은데 정말 그런 기분이 우르르 몰려왔다. 비건 놀이를 하며 먹지 못했던 하나하나의 익숙한 식재료가 그렇게 새롭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생선도, 계란 프라이도, 된장찌개에 들어간 바지락도 너무 맛있어서,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버터 범벅 크루아상이 내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되게 감격스러웠다.

 

- 그렇게 한동안 매 끼니를 굽신굽신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먹다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이 정도로도 내가 먹을 건 과분하게 많다는 것을. 이 정도의 식생활로도 앞으로 충분히 행복하겠다는 사실을. 나는 그냥 이 세계에 눌러앉았다.

 

- 여기서부터 '묽은 채식주의자'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하니까 집중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채식주의자가 되면 이제 고기와는 영영 안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입장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깨끗하게 이별한 채식주의자들도 많다.) 나는 채식 생활을 나다운 묽음으로 커스터마이징 했다. 집에서는 다소 엄격한 비건 지향식을 섭취하다가도 나는 종종 의도치 않게 고기를 먹었다. 부모님 댁에 가서 여전히 내 채식 생활을 못 미더워하는 엄마가 슬그머니 넣은 김치찌개 속 돼지고기를 보면, 단체로 피자를 먹게 되었는데 그게 불고기 피자였다거나, 일행이 자기 반찬으로 나온 장조림을 남기면, 고기가 안 들어가는 줄 알고 볶음밥을 시켰는데 밥알 사이에 다진 고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 그러면 나는 웬 떡이냐 하고 먹었다. 나는 효녀이고, 당장의 허기가 일단은 중요하고, 남이 먹다 남긴 고기는 음식쓰레기가 되는 것보다 내가 먹어주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때마다 정말 맛있는 별식을 한 주먹 먹는 횡재를 만난, 츄르를 먹는 고양이가 된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을 느낀다. 

 

- 나는 묽은 사람인 동시에 아주 미숙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 미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자기 신념에 너무 몰입하여 엄격해지면 자신의 무결함에 도취되기 쉽다. 나는 내가 채식 생활에 진지해질수록 자꾸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라고 말하는 엄마가, 자꾸 인스타에 삼겹살 사진을 올리는 친구가 야속하고 미워질까 봐 겁이 났다. 서둘러 치팅데이를 만든 것은 그즈음이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치팅데이의 두 번째 장점이다. 1년에 한 번씩 나는 육식을 사랑하던 내 기원에 다녀온다. 동시에 내 신념을 자진해서 일부 더럽힘으로써(!) 내가 어쭙잖은 무결함의 도취로 가는 길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미연에 막는다. 

 

- 고기를 안 먹으면서 잘 살아보기 위해 고기를 가끔 맛있게 먹는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채식을 실천해보고 싶은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그들에게 나의 허투루 된 채식 생활이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맞춰서 얼마든지 나보다 더 묽게, 혹은 더 진하게 커스터마이징 하며 각자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채식주의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치팅데이가 1년에 한 번은 너무 적다고 여겨진다면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도 좋다.

 

- 마치 채식주의자 라이센스라도 있다는 듯, 그런 건 진정한 채식주의자가 아니라고 누군가 조롱하거나 비난하더라도 조금도 신경 쓰지 말기를 바란다. 이 일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먹는 끼니라는 것을 통해 조금 더 지구에 이로운 선택을 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당신 자신에게만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주인공은 당신뿐이다.

 

- 얼마 뒤 만난 또 다른 전 애인이 평양냉면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순전히 삼세번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그를 따라 세 번째 평양냉면을 먹었다. 그때에도 나는 그 깊다는 맛을 영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이런저런 사람들과 평양냉면 집에 갈 때마다 바로 이전에 먹었던 평양냉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맛의 뒤편을 조금씩 포착해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평양냉면의 맛도 거기에서 머물고 말았지만 만약 계속 꾸준히 먹어왔더라면 지금쯤 나 역시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으레 갖고 있는 부심에 빠져 함흥냉면파, 칡냉면파 사람들을 은밀히 무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뷰자 주 : 아, 그렇구나. 냉면을 먹을 수가 없구나. 나는 평냉 함냉을 골고루 좋아하지만 그리 즐기지는 않았으므로 크게 아쉽지는 않... 지는 않다. 이제는 문을 닫은 을지면옥의 평냉과 우래옥의 함냉 평냉은 좀 그리울 것 같다.) 

 

- 커피 역시 맛있음을 차츰 학습해 나가는 종류의 마실 거리다. 나는 중간에 배움을 멈춘 평양냉면과 달리 지금까지 착실하게 커피를 공부해왔다. 그런데, 과연 나는 그동안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나에게 커피는 '커피'일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했다. 나에게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커피 마심'인 것 같다는 생각. 

(리뷰자 주 : 앗! 조금 결이 다르지만, 나 역시 최근 내가 마시고 싶은 것이 반드시 '커피'여야 하는지 '물이나 술이 아닌 따뜻한 향미의 액체'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었다. 어쩌면 어떤 날은 차로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문. 아직은 커피를 완전히 포기하기는 힘들겠지만 꼭 커피여야만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다른 선택지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책에 따르면 커피는 세계적으로 하루에 25억 잔씩 소비된다. 상상되지도 않는 이 엄청난 수요를 맞추기 위해 커피가 자라는 적도 주변의 열대 우림은 계속해서 커피 농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계 열대 우림의 절반 정도가 이미 사라졌고 지금도 매년 한반도 면적 크기의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는 바람에 연평균 15~24도의 온도에서 자라는 커피의 재배지 역시 이동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기껏 일군 농장을 두고 또 다른 농장을 개발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적도 인근의 땅들이 죄다 커피 경작지로 바뀌며 생태계가 파괴되고 동물이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들며 공우석 교수는 이런 무거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커피와 코로나19가 과연 서로 관계가 없을까요?" 바이러스가 어느 동물에게서 나왔든 그것은 생태 파괴로 서식지를 잃은 결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이런 상황을 읽게 된 이상 나는 앞으로 죄책감 없이 '커피 마심'을 향유할 순 없을 것이다. 이는 것이 힘이라고 누가 그랬을까?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는 것은 고통이라고. 

 

- 요즈음 나는 '커피 마심'과 '커피'를 분리해 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원두와 그라인더를 찾는 대신 큰 물병에 끓인 물을 붓고 보리차 티백을 담근다.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밥그릇과 물그릇을 바꾸어주는 등 다른 일을 하며 잠을 쫓는다. 그러고는 그 사이 우러난 따끈한 보리차를 소파에 앉아 후후 불어 마신다. 텀블러에는 작두콩차를 넣어 다니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할 때에는 도라지차를 마시는 것으로 '커피 마심'을 대신하고 있다. 아직 쉽지 않다. 뇌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중이며 나는 툭하면 꾸벅꾸벅 존다. 안절부절과 꾸벅꾸벅 사이에는 이런 생각들이 있다. 이 보리차는 어디에서 왔을까. 고양이의 밥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이 작두콩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도라지차를 아무 걱정 없이 마셔도 괜찮은 것일까. 

 

- 2021년 연말에서 2022년 새해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에는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읽었다. 제목에 대한 부연이 책에 등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 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오델이 말하는 '다른 무언가'는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다. 즉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 이 책은 언젠가부터 우리의 삶을 독점하고 있는 소셜미디어의 관심 경제에서 빠져나와 진짜로 보고 진짜로 만지고 진짜로 느끼는 우리의 삶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가 제안하는 몇 가지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저항하기, 당장 거리로 나가 동네를, 자연을, 미술관을 관찰해보기, 친구와 길고 사려 깊은 대화를 나누기 등이다.  

 

- 제니 오델은 특히 관심 경제 안에서 사라지는 시간적, 공간적 맥락을 우려하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내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대상이 나 자신이든, 친구든, 누구든 간에 대화에는 명확한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대화는 애초에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리뷰자 주 : 이 주장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우려하는 현상에 관해서는 주의깊게 관찰 중이다.) 

 

- 요조

 

 

- 내가 원하는 여유는 그 종류도 가지가지인데, 코로 깊게 호흡하면서 입으로 맛을 느끼며 앞으로의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음식물을 씹는 시간이 가장 대표적이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간도 좋지만, 그 자리에 커피 한잔이 놓인다면, 그 옆에 당장 먹고 싶은 빵 하나가 그릇 위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면, 계절에 어울리는 수프 한 그릇이 김을 내고 있다면, 그제야 "바로 지금!" 하고 외치는 기쁨이 자리한다.  

 

- "역시 음식에 진심인 좋은 분." 
최근 먹은 아침 사진을 게시한 것뿐인데 좋은 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나 먹는 것에 진심인 건 맞다. 음식에 진심인 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일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깨어 있는 동안 대부분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먹으면서도 먹는 이야기를 하는 건 몸 상태가 최상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사실 이런 나를 알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아침밥이란 혼자 살면서 나의 하루를 온전히 나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기쁨이었다. 그제야 손에 잡게 된, 내가 가장 알고 싶은 나의 시간이었다. 

 

- 꽤 오래 나에게는 없던 시간이다. 아침밥의 매력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나는 아침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나를 일으킨 것이 지난날의 내 선호를 들어주는 아침밥이 될 줄은, 퍼지게 잠을 자던 나는 알지 못했겠지. 살수록 나를 모른다는 건, 어쩌면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방향을 아직은 눈치 채지 못한 게 아닐까. 또한 아직은 모르기에 나에 대해서 내가 먼저 질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 멍한 아침 테이블은 낮이 되면 결코 느낄 수 없고, 한밤의 맥주 테이블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내가 택했던 아침의 잠들은 그 나름대로 모두 맛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달콤했으니까. 

 

- 지금은 오늘자 나를 하루씩 조금씩 알아가기로 했다. 늦은 게 있다면 이 마음가짐이 너무 늦었다. 나는 늦은 만큼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서 이제야 나를 너무나 좋아하기 시작했다. 살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너무 좋다. 구운 버섯을 씹으며 내일은 발사믹 비네거를 뿌려서 구워보자고 중얼거린다. 먹는 기쁨은 이렇게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쌓여 간다. 

 

- 그런 기분을 느꼈던 건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작은 커피점이었다. 아침으로 먹을 만한 샌드위치와 다양한 커피, 그리고 근사한 생김새의 파르페가 갖춰진 곳이다. 나는 멜론 파르페를 먹었고, 맛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표현했다. 
"생크림과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다가 멜론을 잘라 함께 입에 넣는다. 이따금씩 포크를 이용해서 큰 멜론 덩어리를 입에 넣으며 찬 기운과 함께 당도를 느낀다. 아이스크림 밑에는 한번 더 생크림이 존재하고, 유리잔 바닥이 보이기 직전에는 마지막 멜론 조각과 함께 옐로 멜론 셔벗의 등장. 맨 밑이 왜 붉은가 했더니 옐로 셔벗이었다. 한 방 먹었다. 그 덕에 멜론 고유의 힘을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진행시킨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어도 첫맛의 진함을 유지하기란 어려운데, 같지만 조금 다른 당도들이 순서에 맞게 입에 들어오니 감탄 또한 쉴 틈이 없다. 먹는 사람의 시간을 상상하며 만든 게 분명해. '내가 먹는다면 이렇게 먹어야 행복할 거야'라는 만든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 멜론 파르페의 맛에 대한 긴 문장은 한마디로 줄이면 "아주 잘 만든 멜론 파르페가 맛있었다"가 된다. 하지만 맛있다는 짧은 감정으로는 순간의 감탄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 맛있는 걸 먹을 때면 '맛있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과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모두들 자신에게 딱 맞는 감탄사와 감탄의 기운을 갖고 있다. 밥이야 매일 먹고 있고, 그렇기에 더 없이도 평범한 일과이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게 맛을 느끼는 감각이 매일 늘어난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발달하는 개인의 면모들이 나는 아주 귀엽다. 

 

- 게다가 아빠는 자신을 무척이나 미감이 높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 가게, 그냥 평범해 보였는데, 아주 맛이 묘하더라니까. 진짜 묘했어."

 

- 즉, 나를 묘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음식이었다는 뜻이다. 살면서 맛있는 걸 이렇게나 많이 먹은 나를 감히 갸우뚱하게 만든, 기대하지 않았던 나를 뒤흔들 줄 아는, 전에 없던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한 맛이라는 표현. 아빠는 맛있다는 기분을 이렇게 좁혔구나, 하고 이해한 후로는 나도 종종 '묘하다'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이 케이크, 날 묘하게 만들어" 하면서. 

 

- 한 방 먹었다는 표현은 역시 아빠의 딸다운 표현일까. 이마를 툭 치면서 어이없어하며 한방 먹었다는 말은, 좀 먹을 줄 아는 사람으로서 누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니까. 잘 몰랐기에 맛있다는 것, 내가 모르는 이런 맛이 얼마만큼 남아 있는지 모른다는 것. 나는 계속해서 한방 먹은 기분을 겪고 싶다. 맛있다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면 또 한 번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 너무 오랜만에 말아보는 하이볼이라 조금 긴장했는지, 블로그와 O튜브 영상을 몇 개나 찾아보았다. 여러 레시피들의 공통된 방법을 숙지하고서 안주부터 만들었다. 하이볼은 만들자마자 마셔야 맛있으니까 당장 만들고 싶더라도 참는다. 

 

- O튜브 영상을 보기 전에 불리기 시작한 미역과 냉장고에 몇 개 안 남아 있던 토마토, 원래는 냉면에 올려 먹으려고 샀던 오이를 썰어 한 그릇에 가지런히 모아둔다. 그 위에 간장, 식초, 참기름, 참깨를 섞은 간단 소스를 부어주면 끝. '간식참참' 소스는 짧은 밤에 곁들이는 안주 맛으로 아주 탁월하다. 토마토와 이 소스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먹어보면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기울이며 음미하고 싶어진다. 토마토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들어 안는 맛이랄까. 

 

- 하이볼을 만드는 과정 중에서 얼음을 가득 담은 컵에 과즙과 위스키를 넣고 긴 칵테일 스푼으로 휘휘 저어주는 과정이 좋다. 컵에 칵테일 스푼을 꽂아두고 스푼을 따라서 토닉워터를 부어주며 탄산을 조심히 컵 안에 담는 과정은 또 얼마나 경쾌한지. 이때의 소리는 당장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준다. 나는 혼밥만큼 혼술도 사랑하는 사람이라, 열중하며 준비한 술상을 테이블로 옮길 때 가장 신난 얼굴이 된다.  

 

- 이런 대화는 걱정의 가면을 뒤집어쓴 일회용 대화 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심은 그렇게 소비하는 게 아니라고 계단을 마저 오르면서 생각했고, 나의 집 현관을 닫으며 남은 생각을 딱 잘라냈다. 하지만 쉽게 잘라지지 않았다. 문 앞에 택배 상자와 배달 음식을 놓아둬도 아무렇지 않은 이 안전한 도시는, 그렇기에 너무나 많은 이의 시선을 받고 있다. 도무지 기운이 차려지지 않던 주말 점심, 동네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해 놓고 몇 분 가량 현관 앞에 뒀던 게 생각났다. 도시의 현관 앞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상태 메시지가 되는 걸까. 

- 개인의 고집은 우선 자신만을 향할 때 건강함을 발휘한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플라스틱 용기를 덜 쓰는 가게를 고른다거나, 택배를 주문하기 전에 동네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해 본다거나, 아이스박스에 오는 냉동식품을 덜 주문한다거나,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든 방울토마토보다는 종이 박스에 담긴 완숙토마토를 먹는다거나, 새벽 배송을 이용하더라도 재사용 가방을 구매해서 이용한다거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단단하게 한계를 좁히는 건 얼마나 건강한가. 나를 기준 삼아서 타인을 바라보는 순간, 나를 향하던 건강한 움직임 또한 괴로운 선택이 되고 만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지켜내자고 다짐하는 나날 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택배로 주문해야만 하는 배달음식에 손을 빌려야 하는 먹은 걸 바로 치울 힘이 없는, 냉장고의 재료들이 썩고 있어도 제대로 처리하기 힘든 날 말이다. 모두의 상태 기본 값이 딱 맞아떨어질 수는 없으니, 가능한 사람이 부지런히 옳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가 오늘 조금 덜 힘을 내더라도 이 세상이 그나마 괜찮을 수 있도록. 

-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서, 오늘의 밥상을 건강하게 선택할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덜 부끄럽다는 걸.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날, 너무 좌절하지 말자고 고개를 숙여 다짐한다. 

- 하루씩 하루씩 잘 살아내는 일은, 이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나 고요하고 버겁게 자리한다. 내가 정한 고집을 건강하게 지속하면서도 나의 상태를 잘 살피며 나에게 맞는 한 그릇을 떠올릴 때, 먹는 기쁨은 건강하게 지속되지 않을까.

 

- 노력하지만 애쓰지 않기. 점심 뚜껑을 열어 맛볼 때마다 만나는 내 마음가짐이다. 

 

- 임진아

 

 

- 배도 적당히 부른 멀리서부터 달콤한 냄새를 풍겨 사람들을 현혹하는 와플을 찬양해 보려 한다. 와플의 역사를 읊자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유서가 깊으며, 종류 역시 다양하다. 한동안 유행했던 벨기에 와플부터 브뤼셀 와플, 우리에게 익숙한 아메리칸 와플과 이색적인 홍콩 와플, 그리고 바삭하고 얇은 스트로프바펄(stroopwafel, 얇은 와플 사이에 시럽을 바른 네덜란드풍 와플)까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지역별로, 나라별로 편차가 커서 여행을 자주 다녔던 때는 와플로 그 나라의 특징을 기억할 정도였다. 

 

- 조금 과장하자면, 입은 고장 난 수도처럼 침을 흘리며 턱 빠진 사람처럼 벌어진다. 면까지 무대에 오르면 이 짧은 공연은 막바지로 향하는데, 이때 허를 찔리는 반전이 나온다. 바로, 볶음국수에 물을 붓는 것. 처음엔 '아니, 기껏 볶은 면에 왜 물을 붓는 거야?!'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그 물이 증발하며 면과 재료에 수분을 더해주고, 면끼리 달라붙지 않게 하고, 찰기도 더해준다는 걸 깨달으니, 이번엔 또 다른 감탄이 나왔다. '말라가는 제 창의력에도 단비를 내려주세요. 제발!' 

 

- 팟타이는 이렇게 7분 남짓 조리하면 뚝딱 나오는 효율적인 음식이다. 미리 준비해둔 재료와 소스를 조금씩만 바꾸면, 다른 메뉴 역시 이런 방식으로 요리해낼 수 있다. 바로, 이 모든 재료와 소스가 '최상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씩 바꾼다 해도 그 조합의 강력한 맛이 훼손되지 않는다. 석 달 내내 그 조합에 감탄했다. '글쟁이로서, 저런 비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하고. 그 조합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매일 글을 쓴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처럼, 나만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고,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으니까', 그가 말한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바로 진정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니까'.  

 

- 최민석 

 

 

- 최근에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한남동으로 이사 온 게 아닐까 한다. 타고난 귀차니즘으로 요리라는 건 웬만한 이벤트가 아니면 건들지 않고, 차를 타고 30분 이상 갈 거 같으면 잘 나가지 않으며, 질리긴 또 엄청 잘 질려서 같은 음식을 이틀 연속 먹지 않는 까다로움을 갖춘 피곤한 스타일인 나를 꽤 만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교동 회사까지 대략 30분, 한남동 작업실 5분, 내 사랑 진미평양냉면도 25분 컷이면 충분하다. 서울 안에서라면 어디든 아주 멀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 사실 처음 이사하면서는 굳은 다짐을 했었다. 새 집에서는 건강하게 살자. 배달 음식 줄이고 되도록이면 해 먹고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습관을 가져보자. 배민도 지우고 한가득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 그게 참 희한하다. 나는 추위를 엄청 심하게 탄다. 여름에도 에어컨 트는 걸 꺼리고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도 패딩을 껴입으며 정말 한여름이 아니면 항상 전기장판을 켜고 잠에 든다. 쪄죽따(쪄죽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하면 따뜻한 걸로 마신다. 오죽하면 매니저들도 묻지 않고 일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 올 정도다. 그래도, 냉면은 못 참지. 

 

- 냉면은 함흥파와 평양파로 나뉜다고들 하나 나는 부질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가진 매력이 전혀 다른데 왜 한 가지를 고수해야 하는가. 오늘 함냉을 먹으면 내일은 평냉을 먹으면 될 것을.

 

-  "한두 번 먹어봤어요. 솔직히 제 취향은 아니에요." 
"하하하. 내가 맛있게 먹는 방법 알려줄게요."
그녀는 겨자를 손에 들었다. '어? 평양냉면은 식초, 겨자 안 뿌리는 거 아닌가?' 하고 갸우뚱하던 찰나, 반찬으로 나온 무절임 위에 겨자를 한 바퀴 둘렀다. 식초도 조금 둘러 무에 맛이 배어나게끔 섞었다. 
"이걸 면이랑 같이 먹어요. 육수에는 넣지 말구요." 

- 오오, 육수 맛을 해치지 않고 식초, 겨자 맛을 추가할 수 있다니. 신박했다. 톡 쏘는 맛이 추가된 무와 면발을 함께 먹으니 질리지가 않았고, 육수는 개운했다. 겨자 넣은 무는 제육과도, 만두와도 잘 어울렸다.

 

- 면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또 하나의 비법이 있었다. 육수에 고춧가루를 살짝 추가하는 것. 슬슬 물리던 국물이 칼칼하게 업그레이드되었다. 완벽한 피날레였다. 

 

- 그 후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평냉이 당겼고, 거의 전도사가 되어 지인들을 데려갔다. 전수받은 비법도 함께했다. 반은 좋아했고, 잘 모르겠다고 한 나머지 반도 서너 번을 넘기자 빠져들었다. 맛에 재미를 붙이자 다른 집 평양냉면도 궁금해졌다. 

 

-  물론 나는 평냉도 양념 맛으로 먹는다. 겨자 넣은 무를 면 위에 올리고, 쌈장 찍은 마늘을 얹어 먹는다. 전통 보수 평냉파는 내 방식에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 "평냉은 그렇게 먹는 게 아니야. 그대로의 맛을 느껴야지"라고.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맛있으면 장땡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두고 맛의 고수가 되기 위해 도를 닦고 싶지는 않다. 또한 평냉은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에게 이 비법을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양념 중독자인 나도 빠진 음식이거늘, 당신도 분명 좋아하게 될 거다.

 

- 이렇듯 냉면에 있어 나는 온건 중도파라 할 수 있는데, 모든 냉면을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 강렬하다. 배가 금방 꺼져서 냉면이 싫다면 갈비찜을 함께 먹길 추천, 찬 음식이 싫다면 갈비탕 추가를 추천한다. 물냉 먹을지 비냉을 먹을지 고민된다면 비냉 시켜서 육수를 추가해 반을 먹고 나머지는 육수를 부어 먹길 추천한다. 고깃집에선 비냉에 파채를 넣어 함께 비비면 훨씬 맛있다.  

 

- 현재 시각 오전 3시 20분. 여전히 무언가를 입에 넣기엔 좋은 시간이 아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 눈뜨자마자 냉면을 먹으러 가야겠어. 지금은 이태원 동아냉면이 당기지만, 내일 아침엔 어떨지 모르겠다.

 

- 평소 같으면 맛있는 거라도 잔뜩 먹고 소주라도 한잔 기울이며 털어냈겠지만, 곧 있을 뮤직비디오 촬영에 급속 다이어트 중인 지금은 안 될 일이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이 우울함이 다이어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출의 대부분이 식비인, 먹는 것에 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엥겔지수 최고치인 내가 튀긴 음식, 술, 맵단짠의 자극적인 음식을 끊고 저녁을 닭가슴살로 대체하고 있으니... 배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 자꾸 짜증이 나는가 보다 한 거다. 미리미리 관리 좀 할걸 하고 자책하며 또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그럼에도 먹고 싶은 음식들이 자꾸 떠올라 슬펐다.   

 

- 먹고 싶은 건 끊임없이 떠올랐고, 점점 구체적으로, 심지어 창의적으로 변해 갔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하지도 않을 요리들을 떠올리며 레시피를 수집했다. 촬영만 끝나면 당장 해 먹겠다고 다짐했지만 분명 몇 달은 잊어버리고 배달시켜 먹겠지.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는 먹방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지?' 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던 영상들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거구나. 백만, 천만을 훌쩍 넘는 조회 수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 냉동실 한편에 자리한 치즈케이크가 '한 조각 정도는 괜찮잖아? 나 거의 치즈야~'하고 속삭였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기분이 저기압이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 저기압. 잠깐만. 그거 뭐였지, 되게 좋은 명언 있었는데.

아.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였나? 

 

- 그렇다. 어느 현인께서 말씀하셨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는 것이라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백질이다. 

 

- 족발, 보쌈이 눈에 띄었다. 3초 만에 안 된다는 답변이 (뇌에서) 왔다. 그치, 같이 오는 막국수라든가, 김치 같은 건 버릴 수도 없으니. 회도 보였다. 회는 진짜 살이 안 찐다. 그러나 회는 고기가 아니다. 어쩐지 먹어도 허전할 것만 같은 기분. 아, 육회! 소고기지만 양념이 안(혹은 적게) 되어 있고 날계란이 식감을 살려주며 과일인 배를 얹어 먹는 그것! 특별히 딸려 오는 음식도 없고 그 자체로 뱃속을 든든히 채워줄 단 하나의 음식.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리뷰자 주 : 음. 뭉티기나 육회낙지탕탕을 정말 좋아했다. 프렌치렉도.) 

 

- 어느 집이 맛있을까 꼼꼼히 리뷰를 뒤졌다. 고기가 신선한 곳, 이왕이면 1인분이 배달되는 곳을 찾고 싶어 하나하나 훑어보다 보니 육회와 연어를 같이 먹고 싶어졌고, 육회 비빔밥도 먹고 싶어졌고, 낙지볶음, 골뱅이 소면도 먹고 싶어졌다. 

 

- "이거 진짜, 뻘짓이네."

그랬다. 이거 진짜, 뻘짓이었다. '뻘짓 하고 있네'라든가 '뻘짓 좀 하지 말고' 등의 표현을 수없이 듣고 쓰며 자랐음에도 '뻘짓'이 진정 무얼 뜻하는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뻘에서 뭐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채 하염없이 호미질, 혹은 삽질을 하는 모습을 우리 선조들은 '뻘짓'이라 칭하고 비웃었던 것이다(라고 당시엔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 정말 이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여기저기 파봐도 도통 뭐가 나오질 않으니 힘도 안 나고. 뭐랄까, 가성비가 떨어지는 행위였다. 금속 탐지기나 수맥 탐지기처럼 뭘 감지하고 쫓고 이런 게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 아니, 그냥 조개 사 먹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자라나는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 내가 사람 구경하며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 친구는 벌써 몇 개의 조개를 캤다. 백합이라고 했다. 바구니에 담긴 서너 개의 조개가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나도 한 개의 조개라도 내 손으로 캐 보고 싶어졌다. 방법을 모를 땐 그냥 한 곳을 계속 파는 거다.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파고, 파고, 또 파다 보니 호미에 턱 걸리는 게 있었다. 백합이었다.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나도 아까 그 꼬마처럼 멋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첫 수확이었다.  

 

- 그렇게 우리는 대략 20개 정도의 조개를 모아 숙소로 돌아갔다. 친구가 준비한 고기와 각종 해산물로 바비큐를 해 먹고, 수영장에서 마음껏 놀고, 다시 바다로 나가 석양을 바라보았다. 출출해진 새벽엔 해감한 조개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휴가였다.  

-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뻘짓을 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노력은 쉽게 뻘짓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뻘짓 없는 세상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즐겁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 뻘짓이 뭘 캐낼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하고 싶은 뻘짓이 많아졌다. 

 

- 핫펠트


 

 

 
요즘 사는 맛
“오늘도 내일도 맛있게 먹는다. 달콤하고 상큼하고 고소한 인생을 위해!”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는 먹는 기쁨, 함께하는 설렘, 나누는 즐거움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 가운데 가장 손쉽게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먹는 일’ 아닐까? 누군가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알아가고 나에 대해 알려주는 친목의 장이자 교류의 도구가 된다. 혼자 밥을 먹는 일도 마찬가지다. 대충 때우는 끼니가 되기도 하고 정성껏 차린 한 상이 되기도 하는 혼자만의 식탁을 보면 그날의 내가 어떤 모습인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열두 명의 작가들이 들려주는 일상 속 음식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요즘 사는 맛』에는 이처럼 함께 할 때는 설레는 인사와 대화가 되고 헤어질 때는 따뜻한 추억과 그리움이 되는 다양한 한 끼들이 가득하다. 특히나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하는 소소한 일상이 그리운 요즘, 이 책은 마치 이야기 속 작가들이 차린 식탁에 마주 앉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별것 아닌 것을 별것이 되게 하고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맛있는 한 그릇의 힘을 만나보자.
저자
김겨울, 김현민, 김혼비, 디에디트, 박서련, 박정민 손현 요조 임진아 천선란 최민석 핫펠트
출판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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