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한강
출판 : 창비
출간 : 2007.10.30
<내 남자>를 다시 읽었을 때, <채식주의자> 또한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찌저찌 다시금 그녀의 책을 읽고, 해를 넘겨 당시의 생각들을 적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스펙트럼'이다.
양극단을 제외한 어디 즈음-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대개 그즈음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지점은 동시에 가장 몰개성한 지점이며,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0.01과 0.011과 0.009는 모두 다른 것이므로. 내가 나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순간 그것과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은 모두 비정상이 되어 버리므로.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자신이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고 여기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읽힐 글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들에는 도덕적 잣대 보다 미학적 관점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들은 개개인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을 본다.
채식이 선하고 옳고 지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일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
육식 또는 잡식주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채식주의의 기괴함과 마땅히 그 기괴함에 가해져야 할 폭력을 본다.
사랑과 애정이란 명목 하에 상대를 나의 지배 하에 두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그것이 가지는 폭력을 본다.
나는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만-,
<채식주의자>는 동물적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몽고반점>은 그 반대 지점에 위치한다.
채식주의랄까, 식물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동물적인 특성들의 기괴함. 식물이 가질 수 있는 폭력성.
식물계에서 자가수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딱히 피하거나 금지하지 않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혈연관계가 아니므로 근친이라고 볼 수 없는 그 행위는, 예술의 연장선인가 미친 짓인가.
상대가 이상해 보일 때, 상대에게 나 역시 이상해 보일 거라는 걸 이해하는 감수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몽고반점>은 식물적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점은 영혜의 남편과 그녀의 형부다.
각자는 나름의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지만, 가지지 못한 배우자의 자매를 욕망한다.
영혜의 언니는 더 여성스럽고 눈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배우자에게는 매력이 덜하게 느껴지고 동생의 배우자에게는 매력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영혜는 그와 반대다.
영혜의 형부는 현실을 등한시하고 예술과 이상만을 꿈꾸는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 가정을 꾸리고 또 살아내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삶을 살았다.
(영혜의 남편 또한 그런 결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에게 삶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결과'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살아가고 있다기보다는 지나가고 있다.)
이는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데-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처럼 그려졌던 영혜의 언니.
그녀가 네 인물 중 가장 극렬하게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는 점 -버티고 견디고 그저 존재함으로써, 다시 말해 이미 죽어있음으로써 - 이 인상적이다.
<나무 불꽃>은 인간다움에 관한 이야기일까, 식물이 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일까.
식물을 꿈꾸는 인간의 동물성에 관한 이야기일까.
무언가를 잇는 중간이란, 경계에 서 있기에 더 고된 것일까.
나는 이 이야기가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혜의 언니는, 이 이후에도 여전히, 그 무엇도 놓지 못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려 -버텨내려- 할 것임을 알기에.
결국 '가장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조차 그것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세 편의 이야기는 아래의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무엇이 '이상'인가?"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은가,
적절한가 그렇지 못한가,
이런 질문보다는
어떤 것이 동물적인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은가
어째서 우리는 내가 아닌 타인의 선택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하는가
등을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글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영예와, 그를 통한 재조명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했으면- 하고 바라본다.
-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 할 필요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으며, 패션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위축될 까닭도 없었다. 이십 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 노력해도 근육이 붙지 않는 가느다란 다리와 팔뚝,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 그녀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조무래기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자라서는 넉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며, 내 대단찮은 능력을 귀하게 여겨주는 작은 회사에서 내세울 것 없는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쁘다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
- 내 기대에 걸맞게 그녀는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냈다. 아침마다 여섯 시에 일어나 밥과 국, 생선 한토막을 준비해 차려주었고, 처녀시절부터 해온 아르바이트로 적으나마 가계에 보탬도 주었다. 일 년간 다닌 적이 있다는 컴퓨터그래픽 학원의 보조강사로 일했고, 출판만화의 말풍선에 대사를 쳐넣는 하청일을 받아 집에서 작업했다.
- 아내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은 드물었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았다. 어쩌다 함께 있는 휴일에 어딘가로 외출하기를 청하지도 않았다. 내가 오후 내내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뒹구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마도 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양으로 -아내의 취미라 할 만한 것은 기껏 책 읽기 정도였는데, 그 책들이란 대부분 표지를 열어보기도 싫을 만큼 따분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끼니때에만 문을 열고 나와 말없이 음식을 만들었다. 사실, 그런 아내와 산다는 게 그다지 재미있는 일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동료나 친구들의 휴대폰을 울려대는 아내들, 주기적으로 바가지를 긁어 요란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한다는 아내들이 피곤하게 느껴지던 터였으므로 나는 감사히 여겼다.
- 오직 한 가지 아내에게 남다르다고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짧고 민숭민숭했던 연애시절, 우연히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가 스웨터 아래로 브래지어 끈이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조금 흥분했었다. 혹 그녀가 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잠시 새로운 눈으로 그녀의 태도를 관찰했다. 관찰의 결과는, 그녀가 신호 따위를 전혀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신호가 아니라면, 게으름이나 무신경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볼품없는 그녀의 가슴에 노브라란 사실 어울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두툼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하고 다녔다면 친구들에게 보일 때 내 체면이 섰을 것이다.
- 결혼한 뒤 아내는 집에서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여름철에 잠깐 외출할 때면 동그랗게 돌출된 젖꼭지의 윤곽이 드러날까 봐 할 수 없이 브래지어를 했지만, 일분 안에 호크를 풀어버렸다. 옅은 색의 얇은 상의나 약간 끼는 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풀린 호크가 역력히 드러나는데도 그녀는 괘념하지 않았다. 내가 나무라자, 그녀는 찌는 듯한 더위에 조끼를 겹쳐 입는 것으로 브래지어를 대신했다. 답답해서,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서 견딜 수 없다고 아내는 변명했다. 나야 브래지어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의 착용감이 얼마나 숨 막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여자들이 그녀만큼 브래지어를 싫어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으므로, 그녀의 과민함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올해로 결혼 오 년 차에 접어들었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지난해 가을 이 집을 분양받기까지 임신을 미뤄왔으니, 슬슬 아빠 소리를 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난 이월 어느 새벽 아내가 잠옷바람으로 부엌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나는 우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 나는 오싹한 추위를 느끼며 아내가 있는 쪽을 보았다. 잠과 취기가 가셨다. 아내는 꼼짝 않고 서서 냉장고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옆얼굴의 표정을 식별할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가 섬뜩했다. 그녀의 숱 많은, 염색하지 않은 검은 머리는 부스스하게 부풀어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흰 잠옷치마는 언제나처럼 끝부분이 약간 위로 말려 있었다.
- 뭔가 말로만 듣던 몽유병인가.
나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아내의 옆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왜 그래? 뭐야 지금."
내가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뜻밖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안방에서 나오는 것, 질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까지 모두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가끔 그녀가 심야드라마에 열중해 있을 때, 내가 귀가하는 기척을 듣고 있으면서 무시했던 것과 같이. 그러나 새벽 네시의 캄캄한 부엌, 사백리터 냉장고의 희끄무레한 문 앞에서 몰입할 만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몇 시야, 대체."
그녀는 나에게서 몸을 돌려, 문이 열려 있는 안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문턱을 넘자 팔을 뒤로 뻗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혼자 어두운 부엌에 남아 그녀의 흰 뒷모습을 삼킨 방문을 바라보았다.
-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어젯밤과 똑같이 나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녀는 계속해서 고기 꾸러미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토막 난 닭, 적게 잡아도 이십만 원어치는 될 바다장어를.
"당신 제정신이야? 이걸 왜 다 버리는 거야?"
나는 비닐봉지를 헤치고 달려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뜻밖에 아내의 손목 힘은 완강해, 내 얼굴이 더워지도록 힘을 주고서야 비닐봉지를 놓게 할 수 있었다. 발개진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주무르며, 아내는 평상시와 똑같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꿈을 꿨어."
다시 그 얘기였다.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아내는 나를 마주 보았다.
- "와이셔츠 다려놓은 거 없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욕실 앞의 빨래통을 뒤져 어제 던져놓은 셔츠를 찾았다. 다행히 구김이 많지 않았다. 넥타이를 머플러처럼 걸치고, 양말을 신고, 수첩과 지갑을 챙기는 동안에도 아내는 부엌에서 나와보지 않았다. 결혼 오 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아내의 뒷바라지와 배웅 없이 출근해야 하는 것이었다.
"미쳤군. 완전히 맛이 갔어."
- 꿈을 꿨어,라고 아내는 두 번 말했다. 달리는 차창 너머, 터널의 어둠 위로 그녀의 얼굴이 스쳐갔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얼굴은 낯설었다. 그러나 거래처 사람에게 둘러댈 변명과 오늘 소개할 시안을 삼십 분 안에 정리해 내야 했으므로, 더 이상 아내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어, 부서 바뀌고 몇 달 동안 하루도 열두 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잖아,라고 잠깐 속으로 뇌까렸을 뿐이었다.
-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 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봄이 올 때까지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풀만 먹게 되긴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녀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그녀가 더 이상 나와 섹스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늘 군말 없이 내 몸의 요구에 응하는 편이었고, 때로는 먼저 내 몸을 더듬어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손이 어깨에 닿기만 해도 조용히 몸을 피했다. 언젠가 나는 이유를 물었다.
"뭐가 문제야?"
"피곤해."
"그러니 고기를 먹으라고,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없지.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사실은."
"뭐?"
"냄새가 나서 그래.”
"냄새?"
"고기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냄새가 나."
- 나는 가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혹시 이것이 초기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로만 듣던 편집증이나 망상, 신경쇠약 따위로 이어질 시초라면.
그러나 그녀가 어떤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말수가 적었고 집 안을 잘 정돈했다. 주말이면 나물 두어 가지를 무쳤고, 고기 대신 버섯을 넣어 잡채를 만들기도 했다. 채식이 유행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유난히 얼굴이 멍하고 무엇인가에 짓눌린 것처럼 보이는 아침에 내가 까닭을 물으면 "꿈을 꿨어"라고 대답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꿈이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다시 어두운 숲 속의 헛간,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대한 얘기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
- 좋지 않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소도시에서 목재소와 구멍가게를 하는 장인장모, 사람 좋은 처형과 처남 부부를 보더라도 정신적 일탈의 혈통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녀의 집안사람들을 떠올리면, 자욱한 연기와 마늘 타는 냄새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소주잔이 오가며 고깃기름이 타들어가는 동안 여자들은 부엌에서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식구가 장인이 특히 육회를 즐겼고, 장모는 손수 활어회를 뜰 줄 알았으며, 처형과 아내는 커다랗고 네모진 정육점용 칼을 휘둘러 닭 한 마리를 잘게 토막 낼 줄 아는 여자들이었다. 바퀴벌레 몇 마리쯤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 "영혜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장모의 음성에 걱정이 어렸다. 평소에 장모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둘째 딸이지만, 자식은 자식인 모양이었다.
"고기를 안 먹는답니다."
"뭐라고?"
"고기를 전혀 안 먹고 풀만 먹고 삽니다. 여러 달 됐어요."
-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수첩을 뒤져 처형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살배기 처조카 녀석이 "여보세요" 고함치며 받았다.
"엄마 좀 바꿔라.”
아내와 닮았지만 아내보다 눈이 커서 예쁜, 무엇보다 아내보다 여자다운 데가 있는 처형이 곧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여보세요?"
콧소리를 섞어 내는 처형과의 통화는 언제나 나에게 약간의 성적인 긴장감을 주었다. 나는 좀 전과 같은 방법으로 아내의 채식을 알려, 좀 전과 똑같은 경악과 사죄, 다짐을 받아낸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막내처남의 전화번호를 누를까 하다가 지나친 것 같아 그만두었다.
-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그럼 그걸 감춰준 사람은 누굴까. 그건 분명히 나나 당신이 아닌데... 삽이었어. 그것만은 확실해. 커다란 흙삽으로 머릴 쳐서 죽였어. 둔중한 울림, 금속과 머리가 부딪치던 순간의 탄성(彈性)... 어둠 속에서 고꾸라지던 그림자가 생생해.
이번 꿈이 처음이 아니야. 무수히 꿨던 꿈이야. 술에 취하면 예전에 취했을 때 기억이 나는 것처럼, 꿈속에서 지난 꿈 생각이 나. 수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였어. 가물가물한, 잡히지 않는...
하지만 소름 끼치게 확고한 느낌으로 기억돼.
-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 처갓집 형제들은 선물을 부치고 전화를 드리는 것으로 장모의 생일을 넘기곤 했다. 그런데 마침 오월 초에 처형네가 평수를 넓혀 이사를 했으니, 집구경도 할 겸 장인 내외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유월 둘째 일요일의 모임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처가의 큰 행사가 되는 셈이었다. 누구도 공공연히 말하진 않았으나, 아내에 대한 가족들의 질책이 그날로 준비돼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 정작 아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내가 나와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계속 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숫제 청바지 차림으로 잤다- 우리는 아직 겉보기에 정상적인 부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가 여위어가고 있다는 것, 새벽에 내가 알람시계를 더듬어 끄고 몸을 일으켜보면 어둠 속에서 눈을 치켜뜬 그녀가 꼿꼿한 자세로 누워 있다는 것이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회사에서 주선한 외식 후 사람들은 한동안 나를 미심쩍게 대했으나, 내가 성사시킨 프로젝트가 괄목할 만한 수입을 거둬내자 모든 것이 묻혀지는 듯했다.
- 이대로, 좀 이상한 여자와 산다 해도 나쁠 것 없겠다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냥 남인 듯이. 아니, 밥을 차려주고 집을 청소해 주는 누이, 혹은 파출부 같은 존재로서라도. 그러나 한창나이에, 무덤덤했다곤 하나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남자에게 장기간의 금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 나는 손윗동서가 부러웠다. 미대를 나와 작가라고 행세하긴 하지만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서였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지만, 벌지 않고 쓰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다. 처형이 팔을 걷어붙였으니 동서는 이제 평생 예술이나 하며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처형은 예전의 아내처럼 음식솜씨가 좋다. 딱 부러지게 차려놓은 점심상을 보니 나는 새삼스레 허기를 느꼈다. 적당히 살이 붙은 처형의 몸매, 사근사근한 말씨, 커다랗게 쌍꺼풀진 눈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잃고 살아왔을지 모를 많은 것들을 아쉬워했다.
- 아내는 집이 좋다느니, 음식을 차리느라 애썼다느니 하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밥과 김치를 먹었다. 그것 외에는 그녀가 먹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계란을 원료로 한 마요네즈도 먹지 않으므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샐러드에조차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 가슴 뭉클한 부정(父情)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허공에서 조용히 떨고 있는 장인의 젓가락을 아내는 한 손으로 밀어냈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 쥐었다.
-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나는 머뭇거리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뺨에서 피가 비칠 만큼 아내는 세게 맞았다. 그녀는 그제야 평정이 깨진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 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고기 안 먹고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처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 "아버지, 왜 이러세요."
처형이 장인의 오른팔을 잡았다. 장인은 이제 젓가락을 내던지고, 손으로 탕수육을 들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가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는 것을 처남이 붙잡아 바로 세웠다.
"누나, 그냥 좋게 먹어. 누나가 받아서 먹어."
- 처형이 장인을 잡은 팔힘보다 처남이 아내를 잡은 팔힘이 셌으므로, 장인은 처형을 뿌리치고 탕수육을 아내의 입에 갖다 댔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내는 신음소리를 냈다.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면 그것이 들어올까 봐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 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 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비켜!"
아내는 몸을 웅크려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교자상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 들었다.
"여, 영혜야."
장모의 끊어질 듯한 음성이 살벌한 정적 위에 떨리는 금을 그었다. 아이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아내는 칼을 치켜들었다.
-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흰 접시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무릎을 접고 주저앉은 아내에게서 칼을 뺏은 것은, 그때까지 줄곧 방관하고 앉아 있던 동서였다.
- "억지로 고기를 먹이겠다는 것도 심하지만, 그렇게 안 먹을 건 또 뭐예요? 그리고 칼을 왜 들어요... 나 태어나서 그런 거 처음 봤어요. 다음부터 형님 얼굴을 어떻게 봐."
처형이 아내를 지키는 동안, 나는 동서의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 가까운 사우나에 갔다. 검게 굳은 피가 샤워기의 미지근한 물줄기에 씻겨나갔다. 의심을 품은 시선들이 나를 흘끔거렸다. 구역질이 났다. 이 모든 상황이 징그러웠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놀람이나 당혹감보다 강하게, 아내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 처형이 돌아간 뒤 이인용 병실에는 장파열로 입원한 여고생과 그 부모, 나와 아내만 남았다. 그들이 나를 흘끔거리는 것을,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쑥덕거리는 것을 의식하며 나는 아내의 머리맡을 지켰다. 이 긴 일요일이 곧 끝나고 월요일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이 여자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내일은 처형이 자리를 지킬 테고 모레면 아내는 퇴원할 것이다. 퇴원이란, 이 이상하고 무서운 여자와 내가 단둘이 한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아냐? 이걸 버려? 니에미 애비 피땀이 어린 돈이다. 네가 그러고도 내 딸이냐?"
허리를 굽힌 채 문간에 선 아내를, 역류하여 링거액 주머니 속에 흘러드는 그녀의 붉은 피를 나는 보았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장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낮은 울음으로 잦아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마치 낯선 여자의 울음을 바라보듯이, 그래서 그것을 지나쳐가듯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가슴까지 담요를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그제야 나는 진홍색 피가 반나마 담긴 링거액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 한 번만, 단 한 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 얼핏 든 잠에 꿈을 꾸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칼을 배에 꽂아 힘껏 가른 뒤 길고 구불구불한 내장을 꺼냈다.
<채식주의자>
- 그는 공연장 밖의 홀을 가로질러가며,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공연포스터를 일별했다. 시내 서점에서 우연히 저 포스터를 발견하고 그는 몸을 떨었었다. 방금 끝난 마지막 공연을 행여 놓칠까 봐 불안해하며 서둘러 전화예약을 했다. 포스터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붉고 푸른 꽃과 줄기, 무성한 잎사귀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두려웠고, 흥분했으며, 압도되었다. 일 년여 전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 안무가에게서 흘러나온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꿈꾸어왔던 대로 그 이미지가 펼쳐질 것인가.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그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만큼 긴장해 있었다.
- 그러나 아니었다. 홀에 들어찬, 화려하고 외향적으로 보이는 무용계 사람들을 피해 그는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몇 분 전까지 극장을 가득 채웠던 전자음악, 현란한 의상, 과장된 노출과 성적 몸짓들 속에 그가 찾던 것은 없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
- 일요일 오후의 지하철은 한산했다. 포스터와 같은 사진이 표지에 인쇄된 프로그램을 들고 그는 출입문 가까이 섰다. 집에는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다. 휴일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아내의 희망을 알면서, 그는 이 공연을 위해 한나절을 바쳤다. 소득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다시 환멸을 맛보았다는 것,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꿈꾸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끄집어내 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일본작가 Y의 설치작품에서 유사한 비디오작업을 보았을 때와 같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난교의 장면을 담은 그 테이프에는 나신 가득 알록달록한 물감칠을 한 여남은 명의 남녀가 역시 사이키델릭 한 음악 속에서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물밖에 던져진 목마른 물고기들처럼 그들은 쉴 새 없이 퍼덕거렸다. 물론 그 자신에게도 그런 갈증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은 아니었다.
- 어느 틈에 지하철은 그가 사는 아파트촌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깨에 멘 가방에 공연프로그램을 쑤셔 넣었다. 점퍼 주머니에 두 주먹을 찔러 넣고, 차창에 비친 객실 내의 풍경을 보았다. 빠지기 시작한 머리털을 야구모자로, 제법 늘어진 아랫배를 점퍼로 가린 중년의 남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 마침 작업실 문은 잠겨 있었다. 일요일 오후는 거의 유일하게 그 혼자서 작업실을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업 메세나운동의 일환으로 K그룹에서 본사건물 지하 이층에 제공한 이 여덟 평의 공간에서는 네 명의 비디오작가들이 컴퓨터 하나씩을 붙들고 작업했다. 고가의 장비들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지만, 혼자일 때에만 몰입이 되는 그의 예민한 성격으로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 가방을 열어 좀 전의 공연프로그램과 스케치북, 그리고 마스터테이프를 꺼냈다. 그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까지 라벨에 적어놓은 그 테이프에는 십여 년간 그가 해온 비디오작업의 원본이 모두 들어 있었다. 마지막 작품을 완성해 이 테이프에 저장한 것이 벌써 이년 전의 일이었다. 이년이라면 치명적으로 긴 휴식은 아니지만, 내면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공백이었다.
- 그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공연포스터와는 분위기나 터치가 전혀 다르나 발상 자체는 동일한 스케치들이 수십 장에 걸쳐 그려져 있었다. 벌거벗은 남녀의 나신들에는 부드럽고 둥근 꽃잎들이 화려하게 바디페인팅되어 있었고, 그들의 교합된 자세는 다소 적나라했다. 긴장된 근육을 느끼게 하는 허벅지, 꽉 조인 엉덩이. 무용수와 같은 깡마른 상체들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도발적인 춘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몸은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상황의 자극적인 요소를 상쇄할 만큼 다부졌고 고요했다.
- 한순간 이 이미지는 그에게로 왔다. 일 년여의 고갈상태가 어떻게든 끝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던, 에너지가 조금씩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던 지난겨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파격적인 이미지이리라고 그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전까지 그가 해왔던 작업은 다분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모되고 찢긴 인간의 일상을 3D그래픽과 사실적 다큐 화면으로 구성했던 그에게, 관능적인, 다만 관능적일 뿐인 이 이미지는 흡사 괴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 그것은 그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 일요일 오후 그에게 아들을 목욕시켜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들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서 안고 나온 뒤, 아내가 아들에게 팬티를 입히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몽고반점이 제법 크게 남아 있군. 대체 언제나 없어지는 거지?" 하고 묻지 않았다면. 아내가 "글쎄. 나도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영혜는 뭐, 스무 살까지도 남아 있었는걸" 하고 뜻 없이 말하지 않았다면. "스무 살?" 하는 그의 물음에 "웅... 그냥, 엄지손가락만 하게, 파랗게. 그때까지 있었으니 아마 지금도 있을 거야"라는 아내의 대답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은 바로 그 순간 그를 충격했다.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벌거벗은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교합하는 장면은 불가해할 만큼 정확하고 뚜렷한 인과관계로 묶여 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 그의 스케치 속의 여자는 얼굴이 잘려 있을 뿐 처제였다. 아니, 처제여야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처제의 알몸을 상상해 처음 그리고, 작고 푸른 꽃잎 같은 점을 엉덩이 가운데 찍으며 그는 가벼운 전율과 함께 발기를 경험했었다. 그것은 결혼한 이후, 특히 삼십 대 중반을 지나서는 거의 처음 느끼는, 대상이 분명한 강렬한 성욕이었다. 그렇다면, 여자의 목을 조르듯 껴안고 좌위로 삽입하고 있는 얼굴 없는 남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 그는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왔다. 어떻게 이 이미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것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작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전시와 영화, 공연 따위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이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 어떻게 이 이미지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 그는 백일몽처럼 궁리하곤 했다. 그림 그리는 친구의 작업실을 빌려 조명을 설치하고, 바디페인팅 물감과 바닥에 깔 흰 시트를 준비하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가장 중요한, 처제를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처제가 아닌 다른 여자로 대체할 수 없을까를 두고 오래 번민하다가 문득 그에게 떠오른 것은, 어떻게 그가 포르노그래피를, 명백하기 짝이 없는 포르노그래피를 연출해 찍을 수 있겠는가 하는 뒤늦은 의문이었다. 처제가 아니라 어떤 여자라도 그것에 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액을 지불해 전문배우를 고용한다? 백번 양보해 촬영을 해내더라도, 그것을 과연 전시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으로 화를 겪을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지만, 음란물을 제작한 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며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으므로, 자신에게 무한정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실감한 적이 없었다.
-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 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 번에 그가 이뤄온 -대단찮은 것이었으나- 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 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J가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간 동안,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듬성듬성 정수리가 드러난 것이 신경 쓰여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오래 억눌러온 고함 같은 것이 기침처럼 터져 나올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그는 허둥지둥 가방에 물건들을 쓸어 넣은 뒤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J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빨리해 비상계단 반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엘리베이터의 출입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충혈된 자신의 두 눈이 마치 눈물을 흘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가 작업실에서 눈물 따위를 흘린 기억은 없었다. 그러자 그 벌겋게 금이 간 눈을 향해 그는 침을 뱉고 싶어졌다. 수염이 거뭇거뭇한 두 뺨을 피가 비칠 때까지 후려치고, 욕망으로 부풀어 오른 추한 입술을 구둣발로 짓이기고 싶었다.
- "늦었네요."
아내는 서운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를 맞았다. 아들은 그를 반기는 둥 마는 둥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 포클레인에 다시 열중했다.
대학가에서 화장품가게를 운영하는 아내는 아이를 낳은 뒤 일을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밤에 카운터만 챙겼으나, 지난해부터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자 다시 가게일을 직접 꾸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늘 고단해했지만, 아내는 천성적으로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다. 그에게 일요일 하루만 시간을 비워달라는 것은 아내의 거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나도 좀 쉬고 싶어요. 당신에게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아내의 수고를 덜어줄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마디 불평도 없이 안팎의 살림을 혼자 해내는 아내가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이즈음, 아내를 볼 때마다 겹쳐 떠오르는 처제의 얼굴 때문에 그의 마음은 집에서는 한순간도 편치 않았다.
- 그는 서름서름한 눈길로 아내의 지친 남편에 대해 얼마간 체념한 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 초입에 했다는 쌍꺼풀 수술이 자연스럽게 되어 아내의 눈매는 깊고 뚜렷했다. 갸름한 얼굴선이며 목선도 고운 편이었다. 모르긴 해도 처녀 때 두 평 반으로 시작한 화장품가게가 해가 다르게 성업한 것은 아내의 서글서글한 인상 덕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무엇인가가 그의 취향을 살짝 비껴가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목구비며 체격이며 사려 깊은 성격까지 오래전부터 그가 찾아온 여자의 이미지였는데, 무엇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 딱히 짚어내지 못한 채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안 것은 처음 처제를 소개받은 가족모임에서였다.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처제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드는구나, 자매이고 닮은 부분이 많은데도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스쳐가듯 했을 뿐이었다.
- 마음의 혼돈으로 인한 피로를 느끼며 그는 욕실문을 열었다. 불을 켠 순간 아내의 혼잣말이 귀에 꽂혔다.
"가뜩이나 영혜 때문에 마음이 아리는데 당신은 종일 연락도 없고, 애는 감기 때문에 나한테서 떨어지지도 않고..."
한숨소리에 이어 아내는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니, 와서 약 먹으라니까."
오라고 해도 아이가 한참 뜸을 들이곤 하는 것을 알고, 아내는 천천히 가루약을 숟가락에 털어 붓고 딸기색 시럽에 개었다. 그는 욕실문을 닫고 나와 아내에게 물었다.
"처제한테 왜, 무슨 일이 또 있어?"
"결국 이혼서류 접수시켰다잖아요. 정서방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야속해요. 그러고 보면 부부란 게 참 허무해."
- "내가..."
그는 말을 더듬었다.
"내가 한번 처제를 만나볼까?"
아내의 얼굴이 반짝 생기를 띠었다.
- 자신에게 그런 결단력과 순발력이 있다는 것에 놀라며 주차장을 향해 내처 달렸다.
혼절한 그녀가 응급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순간, 그는 무엇인가가 탁 하고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설명해 낼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리려 했고, 그 사람의 피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셨고, 그의 땀과 뒤섞인 그것은 차츰 갈색으로 꾸덕꾸덕 말라갔다.
-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다. 그때에는 좀 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문득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 "나를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대의 피해자는 나라는 걸 세상사람들이 다 압니다."
동서의 말이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아내와 달리 중립을 지켰다. 아내는 정식 이혼만은 미루고 경과를 지켜보자며 동서에게 애원했으나, 동서는 냉담했다.
- 유난히 이마가 좁고 하관이 빨라 강퍅해 보이는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동서의 얼굴을 지워내며, 그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처제, 대답해 봐. 무슨 말이든 해봐."
끊어야 하나, 생각했을 때 그는 숨을 놓았다.
"물이 끓어요."
처제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무게가 없었다. 음울하지 않았고, 병자처럼 멍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밝거나 경쾌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경계에 가 있는 사람의 덤덤한 음성이었다.
-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그전에 그는 조금도 처제에게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제가 그의 집에 있는 동안 보였던 행동들을 기억할 때 그의 몸에서 치밀어 오르는 관능은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벌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 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보습, 반쯤 벌린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다.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한 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
이제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 곡식과 나물과 날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동맥에서 넘쳐 나온 피가 그의 흰 셔츠를 흠뻑 적시고 꾸덕꾸덕 짙은 팥죽색으로 굳게 했다는 것은 그의 운명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물기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알몸으로, 자신도 조금 놀란 듯 그녀는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끌어다 자신의 몸을 가렸다. 부끄럽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라, 으레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하니까,라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그녀가 등을 보이지도 않은 채 태연히 옷을 입는 동안 당연히 그는 시선을 돌리거나 서둘러 밖으로 나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자리에 붙박여 서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채식을 시작했을 때처럼 비쩍 마르지 않았다. 병원에서부터 차츰 체중이 불었고, 그의 집에서도 잘 먹은 덕분에 그녀의 가슴은 말랑말랑하게 살집이 붙어 있었다. 허리는 놀랄 만큼 가파른 곡선으로 오목하게 휘어 있었고 많지 않은 숱의 체모,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선 역시 볼륨감이 부족하다는 것 외에는 군더더기 없이 매혹적이었다. 성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가만히 바라보고 싶어지는 몸이었다. 막상 그녀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보지 못했다는 자각은 그녀가 옷을 모두 추슬러 입은 뒤에야 그에게 왔다.
- "혼자 있을 땐, 그냥 이게 편해서요."
그렇다면, 그는 환하게 비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녀는 늘 집 안에서 옷을 벗고 지낸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좀 전에 그녀의 알몸을 보았을 때는 오히려 괜찮았던 몸이 당혹스럽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야구모자를 벗어 들었다. 발기된 상태를 감추기 위해 바닥에 엉거주춤 앉았다.
-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다시 일자리 알아보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혼자서 골몰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해서, 백화점 같은 데 다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주엔 면접도 봤어요."
"그래?"
그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평생 저 모양으로, 매일같이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생계를 의탁하며 사는 아내를 형님이라면 견딜 수 있겠어요?"라고 언젠가 동서는 그와의 통화에서 술 취한 음성으로 말했다. 동서의 짐작은 틀렸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 "잠깐 걸으면서 얘기 좀 하지."
"형부가 말한 거 잘 생각해 볼게요.”
"아니, 그것 말고... 내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는 그녀의 망설이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이 고통스러운 욕망과 충동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내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 "아이스크림 좋아해?"
그녀는 새침한 애인처럼 반쯤 웃었다.
둘은 아이스크림점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나무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혀로 핥는 그녀를 그는 말없이 건너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혀와 그의 몸이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그녀의 혀끝이 내밀어질 때마다 전기자극을 받는 것처럼 움찔움찔 떨곤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방법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 오후의 적요한 햇살이 흰 시트를 반짝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말하려 한 찰나, 그녀는 두 팔을 들어 스웨터를 벗었다. 안에 입은 흰 반소매 티셔츠를 벗자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등이 드러났다. 낡은 청바지를 벗자 두 개의 흰 엉덩이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한참 만에야 그는 몽고반점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그녀의 알몸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처음 모델을 하는 사람 같지 않게, 처제와 형부라는 관계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녀의 침착한 태도는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손목을 그은 다음날 상체를 벌거벗은 채 병원 분수대 앞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폐쇄병동에 입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것을, 병원에서도 수시로 옷을 벗고 햇볕을 쬐려 해 퇴원이 늦춰졌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 그는 캠코더를 삼각대에 고정시키고 다리 길이를 조정했다. 그녀의 엎드린 몸을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도록 위치를 잡은 뒤 팔레트와 붓을 집어 들었다. 바디페인팅 작업부터 테이프에 담을 생각이었다.
먼저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목덜미에서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대신 그 푸르스름한 점 주변으로 그보다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지게 했다.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 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 "가만히 있기만 했는걸요. 바닥이 따뜻했어요."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 그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제 동서라고 부를 필요도 없게 된 그녀의 옛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 외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 그녀의 몸을 탐했을 거란 상상만으로 그는 일종의 수치를 느꼈다.
- 가득 만발한 꽃들과 몽고반점 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침묵의 조화.
렌더링의 지루한 기다림과 오랜만에 싸우며, 담배 한 갑을 바닥내며 그는 작업에 매달렸다. 마침내 완성된 작품의 러닝타임은 4분 55초였다. 엎드린 그녀의 몸에 바디페인팅하는 그의 손으로 시작해 몽고반점으로 페이드아웃되었다가, 그늘져 거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는, 사막 같은 그녀의 얼굴이 비친 뒤 다시 페이드아웃되었다.
- 밤샘 뒤의 피로, 몸 곳곳에 모래알이 박힌 듯 깔깔한 느낌, 모든 것이 낯설게 보이는 이물감을 오랜만에 경험하며 그는 마스터테이프의 라벨에 검은 펜으로 적었다. '몽고반점 1 - 밤의 꽃과 낮의 꽃'.
그러자 그가 차마 시도하지 못한 것, 가능하다면 '몽고반점 2'라는 제목이 붙여질 이미지, 실은 그것만이 전부였던 이미지가 어떤 그리운 사람의 얼굴처럼 절실하게 그의 눈을 가렸다.
진공공간과 같은 침묵 속에서 몸에 꽃을 그린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 몸의 몰입과 그에 따른 솔직한 몸짓.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성기 자체를 클로즈업하기도 하며 진행되는 화면. 적나라하나 그 적나라함으로 인하여, 그 극한으로 인하여 도리어 고요히 정화되는 지점.
- 그는 마스터테이프를 손아귀에 넣은 채 만지작거리다가 생각했다. 만일 처제와 함께 찍을 남자를 골라야 한다면 그 자신은 안된다. 그는 자신의 주름진 배와 튀어나온 옆구리살, 무너지는 엉덩이와 허벅지의 선을 알고 있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가까운 찜질방으로 향했다. 카운터에서 내준 흰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환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는 안된다. 그렇다면 누구? 누구에게 그녀와 섹스하게 할 것인가. 이것은 에로영화 따위가 아니므로, 섹스하는 시늉만 잡아서는 안된다. 정말로 삽입하도록 해, 그 교합된 성기를 담아낼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누가 그것을 승낙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처제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는 자신이 어떤 경계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 J의 눈과 목소리에는 그가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분명한 호감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죠? 이건 뭐랄까... 무슨 거인 같은 게 선배를 번쩍 들어 올려서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놓은 것 같군요. ... 이 색채라니!"
젊은 J 특유의 감상적이고 호들갑스러운 표현이 거슬리긴 했으나, 그 말은 맞았다.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물론 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그의 안에서 터져 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돼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 나는 어두웠다,라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그는 영원히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 견디기에만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 "안돼 보여.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 한 번도 형한테서 그런 느낌 받은 적 없었는데."
P는 그에게 다가와 셔츠의 윗단추를 마저 채워주었다.
"키스 한 번은 해주겠지. 이 야밤에 날 불러냈으니."
P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수백 번의 입맞춤의 기억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것이 추억 때문인지, 우정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곧 그가 넘으려는 경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 "어떻게 이게 아직 엉덩이에 남아 있는 거지?"
"모르겠어요. 난 남들도 모두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목욕탕에 가보니까... 나 혼자만 갖고 있었어."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 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 "...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꿈? 아, 얼굴... 그래, 얼굴이라고 했지."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말했다.
"무슨 얼굴이지? 누구의 얼굴이야?"
"...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조금도 지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박명 속에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 그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햇빛이 밝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짐승의 갈기처럼 흐트러졌고, 시트는 구겨진 채 그녀의 하체를 휘감고 있었다. 맵고 시큰한 냄새, 달콤하면서도 역하고 씁쓸한 냄새에 섞여, 갓난아이의 몸에서 나는 배냇내 같은 그녀의 체취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몇 시쯤 되었나. 그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후 한 시였다. 새벽 여섯 시쯤 잠들었으니, 꼬박 일곱 시간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단 팬티와 바지를 입고, 장비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조명과 삼각대를 챙겼다. 그런데 캠코더가 보이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뒤 넘어지거나 하지 않도록 현관 쪽에 따로 두었던 기억이 ...
<몽고반점>
- 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 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 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 듯 거세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딱히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다만 목선이 고운 편이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옅은 화장을 했으며, 흰 반소매 블라우스는 구김 없이 청결하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그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 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 닷새째 아이가 아팠으니 그녀 역시 닷새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큰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다. 긴급상황에 대비해 미리 가방에 의료보험증과 지우의 옷가지를 넣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홉 시가 되어가던 참이었다.
찾으셨다구요.
정말 다행이네요.
면회는 예정대로 다음 주에 갈게요.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피로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영혜가 발견된 산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 직접 본 것도 아닌 그 모습이 어떻게 그토록 명확한 풍경으로 떠올랐는지 그녀는 알 수 없다. 코를 쌕쌕거리는 아이의 이마에 밤새 물수건을 얹으며, 깜박깜박 기절하듯 잠에 떨어지기도 하며, 그녀는 혼령처럼 어른거리는 빗속의 숲을 보았다. 검은 비, 검은 숲. 흠뻑 젖은, 희끄무레한 환자복. 젖은 머리칼 캄캄한 산비탈. 귀신처럼 우뚝 선, 어둠과 물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영혜. 마침내 새벽이 되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을 때 그녀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안도했고, 안방을 나가 거실 베란다로 드는 푸르스름한 박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영혜는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고, 고기를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동생을 보고 가면 되는 것 아닐까.
영혜는 그녀보다 네 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 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 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발뒤꿈치에 새카만 때가 끼어 있고 여름이면 콧잔등에 땀띠가 빨긋하게 돋던 여동생이 성장하여 결혼하는 것을 그녀는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의 말수가 적어진 것이 내심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 역시 신중한 성격이긴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 밝고 싹싹한 편인 데 반해, 영혜의 심중은 어느 때건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너무 어려워 때로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 엄마 계신 J읍까지 혼자 안고 갈 수 있겠어? 운전이야 형부가 하겠지만... 힘들 것 같으면 내가 같이 갈까?
고맙게도 그렇게 살가운 제안을 해주었지만, 그때 영혜의 입가에 어린 조용한 미소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 앞에서 그녀는 대답을 잃었다.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어서였을까.
- 그녀는 터널에 들어선다. 날씨 탓에 터널의 내부는 평소보다 어둡다. 그녀는 우산을 접는다. 커다랗게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벽면 가운데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커다란 얼룩무늬나방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그녀는 잠시 멈춰 그 날갯짓을 올려다본다. 캄캄한 천장에 자리를 옮겨 잡은 나방은 관찰자를 의식한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남편은 저렇게 날개가 있는 것들을 즐겨 찍었다. 새, 나비, 비행기부터 나방이나 파리에 이르기까지. 작업 내용과 그다지 관련돼 보이지 않는 그것들의 비행장면은 그러잖아도 미술에 문외한인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저 장면은 왜 들어간 거예요,라고 그녀는 물은 적이 있었다. 무너진 다리와 장례식의 오열장면 끝에 느닷없이 새의 검은 그림자가 2초쯤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을 때였다.
그냥, 이라고 그는 그때 대답했다.
그냥 저런 걸 넣게 돼. 넣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
그러고는 익숙한 침묵이었다.
-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에 싸여 있던 남편의 실체를 과연 그녀는 만난 적이 있었을까. 그의 작업이 그것을 보여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분량의 비디오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는데, 사실 그녀는 그를 알기 전에 그런 미술분야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 처음 그를 만난 늦은 오후를 그녀는 기억한다. 수수깡처럼 마른 몸에 며칠째 수염을 깎지 않은 얼굴의 그는 한눈에도 무거워 보이는 캠코더가방을 둘러메고 그녀의 가게를 찾았다. 애프터셰이빙 로션을 찾으며 유리진열대에 두 팔을 내려놓는 그는 지쳐 보였다. 유리진열대가 그와 함께 무너져버릴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연애경험이 거의 없었던 그녀가 그에게 "점심은 드셨어요?"라고 서글서글하게 물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는 조금 놀란 듯, 그러나 놀람을 표시할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피로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게문을 잠그고 나가 그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은 것은, 물론 그녀 역시 그날 점심을 걸러서였기도 했지만, 그의 독특한 무방비상태가 그녀까지 경계를 풀게 했기 때문이었다.
-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 자신의 애정을 확신하지 못한 것과 같이,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역시 그녀는 확신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상생활에 워낙 서투르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따금 느끼기는 했다.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늘 친절했고, 한 번도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이따금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 아마도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은 그가 찍은 이미지들이거나, 그가 찍을 이미지들뿐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그의 전시회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놀랐는데,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해 보이던 이 남자가 이렇게 많은 곳을 캠코더와 함께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이 민감한 장소에서 그가 치렀을 협상, 때로 보여야 했을 용기와 뱃심, 끈덕진 인내를 그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그의 열정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열정 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 꼭 한번, 집에서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우가 돌을 넘겨 발을 떼어놓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캠코더를 꺼내든 그는 햇빛이 드는 거실 가운데를 위태위태하게 걷는 지우를 찍었다. 지우가 그녀에게 와락 안기는 장면, 그녀가 지우의 정수리에 입 맞추는 장면도 찍었다. 알 수 없는 생명의 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는 말했다.
지우가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영화처럼 발자국에서 꽃이 피어나도록 애니메이션을 넣을까? 아니,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게 낫겠어. 아, 그러려면 풀밭에서 다시 찍는 게 좋겠어.
그는 그녀에게 캠코더의 작동법을 알려주고, 방금 찍은 장면들을 재생해 보여주며 열띤 어조로 말했다.
애도 당신도 흰옷을 입어야 돼. 아니, 아니야. 오히려 아주 남루한 옷을 입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게 더 좋겠어. 가난한 모자의 소풍, 아기의 서투른 발걸음마다 기적처럼 날아오르는 색색의 나비 떼...
- 그러나 그들은 풀밭에 가지 않았고, 지우는 곧 자라 더 이상 서투르게 걷지 않았다. 아이의 발걸음에서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비디오는 오로지 그녀의 상상 속에 남았다.
- 이따금 새벽에 깬 그녀는 불 켜진 욕실에 들어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가, 물을 받지 않은 욕조 속에 옷을 입은 채 웅크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아빠 있어?
그가 떠난 뒤 지우는 그녀에게 묻곤 했는데, 그 질문은 그가 떠나지 않았을 때에도 아이가 아침마다 던졌던 것이었다.
없어라고 그녀는 짧게 대답하곤 했다. 소리 나지 않는 말로 그녀는 덧붙였다.
아무도 없어. 너랑 엄마만 있는 거야. 언제까지나 그럴 거야.
- 빗속의 병사(病舍)들은 고적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 있다. 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 영혜의 병실이 있는 별관건물의 삼층을 어림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매점과 면회실로 통하는 원무과 쪽 입구로 걸어 들어간다.
- 원무과의 여직원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그녀는 물이 흐르는 우산을 접어 묶은 뒤 목제 긴 의자에 앉는다. 의사가 상담실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언제나처럼 고개를 돌려 병원 안뜰의 느티나무를 내다본다. 수령이 사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이다.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펼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 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비에 잠긴 오늘은 할 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동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잔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형상 위로 귀신처럼 겹쳐지는 영혜의 모습을 그녀는 조용히 쏘아본다.
- 그녀가 마침내 더 이상의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는 시각은 새벽 세 시경이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반찬을 만들고, 구석구석 집안을 정리해 보지만 시계바늘은 육중한 추라도 매단 듯 좀처럼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그의 방에 들어가 그가 남겨놓고 간 음반을 듣거나, 예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에 손을 짚고 방 안을 빙빙 돌기도 하며,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웅크려 누워 처음으로 그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아마 그에게는 옷을 벗을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샤워기의 온도를 조절해 목욕을 할 힘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우묵하고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서른두 평의 아파트 안에서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 영혜가 소리 없이 걸어와 그녀 곁에 선 것은 그때였다.
여기서도 나무들이 보이네.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곁에 선 영혜의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직 잎을 다 떨구지 않은 낙엽송들 위로 부서지는 청명한 초겨울 햇살만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위로하듯 평온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혜는 그녀를 불렀다.
언니.
-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물었다.
- ...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 까르륵,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 없어. 물이 필요한데.
- 그때 이십 대의 남자 환자 하나가 그녀의 등뒤에 바싹 붙어선다. 병원에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녀는 불안해진다. 환자들은 사람과 사람의 육체가 지켜야 할 적당한 간격을 무시하고, 시선을 둘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을 무시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멍한 시선의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의료진이 아닐까 착각될 만큼 명료한 시선을 가진 환자들도 많다. 한때 그녀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간호사 선생님, 도대체 저 사람 왜 그냥 놔두는 거예요. 계속 날 때리잖아요.
앙칼진 목소리의 삼십 대 여자 환자가 수간호사에게 소리친다. 저 환자의 피해망상은 올 때마다 더 심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다시 목례로 인사한다.
- 영혜의 얼굴은 몹시 말랐고, 빗지 않은 머리카락이 거친 해초다발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밥을 먹어야지. 고기 먹는 게 싫어서 안 먹는 건 이해한다 치자. 왜 다른 것까지 안 먹겠다고 해.
영혜가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목말라. 물 줘. 그녀는 로비에 나가 물을 가지고 왔다. 물을 마신 뒤 영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치.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영혜의 여윈 얼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 시간은 흐른다.
그녀에게 주어진 삼십 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창밖으로는 어느 결에 비가 잦아들고 있다. 방충망에 맺힌 빗방울이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비는 얼마 전에 잠시 그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영혜의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가방을 열고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밀폐용기들을 꺼낸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영혜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다가, 첫 번째로 가장 작은 사각용기 뚜껑을 연다. 향긋한 냄새가 습기 찬 병실의 공기에 퍼진다.
영혜야, 복숭아야. 통조림 황도복숭아. 너 이거 좋아하잖아. 정말 복숭아가 나오는 철에도 이걸 사 먹었잖아, 애들처럼.
그녀는 물컹한 복숭아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영혜의 코에 가까이 댄다.
냄새 맡아봐... 먹고 싶지 않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 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 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비록 그가 하는 일은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그의 집안 분위기를 그녀는 좋아했다. 그의 말투, 그의 취향, 그의 미각과 잠자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노력했다. 처음의 얼마 동안은 여느 부부들처럼 그와 크고 작은 언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체념할 수 있는 것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 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 구 개월쯤 전, 꼭 한번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정 가까운 시각이었다. 먼 지방인지 동전 넘어가는 소리의 간격이 짧았다.
지우가 보고 싶어.
낮고 긴장한, 애써 침착을 가장한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무딘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꼭 한 번만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을까?
그다운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고백도, 용서를 빈다는 애원도 생략한 채, 단지 아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떨림과 수치심을 숨기고 침대에 올랐을 때, 중년의 남자 의사는 차가운 복강경을 질 속 깊이 밀어 넣고는 질벽에 붙은 혀 같은 폴립을 떼어냈다. 날카로운 통증에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던 거군요. 깨끗이 떼어냈으니 며칠간 출혈이 더 심해졌다가 멎을 겁니다. 난소엔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염려했던 큰 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왕십리역의 승강장에 섰을 때 그녀의 다리가 허전거린 것은 방금 시술한 자리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굉음과 함께 기차가 플랫폼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는 더듬더듬 철제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그러고 난 아침 식탁에서 무심코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어지거나,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지곤 했다는 것을.
- 그가 잠들고 나자 안방은 고요했다. 모로 누운 아이의 몸을 바로 누이며, 그녀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부자의 옆얼굴이 가련하게 닮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것도 문제 될 것 없었다.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언제까지나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었다.
잠은 깨끗이 달아났지만, 대신 육중한 피로감이 그녀의 목덜미를 짓눌러왔다. 온몸의 습기가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렇게 건조된 육신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둥글게 돌고 있는 시계 초침을 눈으로 따라가며 호흡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 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 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그녀는 맨발에 샌들을 꿰어 신었다. 육중한 현관문을 밀어 열고 나갔다. 오 층의 계단을 걸어내려 갔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거대한 아파트 건물은 두어 점의 불빛만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파트 뒤편의 쪽문을 지나 뒷산으로, 어둡고 좁다란 길을 밟아 올랐다.
검푸른 어둠 때문에 뒷산은 평소보다 깊게 느껴졌다. 새벽부터 약수를 뜨러 다니는 부지런한 노인들도 아직 잠든 시각이었다. 고개를 수그린 채 그녀는 걷고, 또 걸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묵묵히 문질렀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그녀는 의자로 돌아온다. 마지막 남은 밀폐용기의 뚜껑을 연다. 동생의 빳빳한 손을 억지로 끌어 매끄러운 자두들의 껍질을 어루만지게 한다. 앙상한 손가락들을 둥글게 말아, 그중 하나를 쥐게 한다.
자두 역시 영혜가 좋아하는 과일이었던 것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언젠가 어린 영혜가 씹지 않고 입 안에서 굴리며 감촉이 좋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영혜의 손은 반응이 없다. 영혜의 얇아진 손톱이 마치 종이 같다고 그녀는 느낀다.
- 그러나 아이의 단내 나는 작은 몸뚱이가 곁에 눕고, 아직 죄 지어보지 않은 어린 얼굴이 곤한 잠에 들고 나면 어김없이 밤은 다시 시작된다.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 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 ...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 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 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나무 불꽃>
해설 | 열정은 수난이다
허윤진
하얀 집의 붉은 벽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푸른색 홍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더없이 투명했다. 자상(刺傷) 앞에서 얼어붙었던 그녀의 시선은 다시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녀가 흘린 붉은 피 속에 서 있다. 평온한 흰색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열기와 혼돈으로 정신을 잃은 자는 나뿐이다. 그녀는 단출한 점심을 먹으면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나도 배가 고프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세계의 저편으로 잠시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의 껍데기를 붙든 채 그녀의 정지된 의식을 지켜보았다는 죄로 나는 여기에 있다. 세계의 뒷면을 보고 들은 충격은 온전히 나만의 것. 타인에게 일정량 이상의 열기를 품었던 죄로 나는 그녀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내 시간의 파편으로 간직해야 한다.
평화롭게 잠든 그녀의 머리맡을 지키며, 나는 그녀가 타인에 대한 윤리의식의 대가로 치러야 했을 굴종과 수모를 떠올렸다. 세계의 경계에서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영혜와 달리, 언니로 아내로 엄마로 처형으로 딸로 복무해야 했던 그녀의 삶을 떠올렸다.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소설은 의식의 퓨즈가 서서히 끊어지는 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읽힐 수도 있지만, 의식의 퓨즈를 끊고 싶어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이를 중심으로 지체된다고 읽힐 수도 있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담즙을 세계의 이면에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는가.
잠에서 깨어났던 그녀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이 방에 연결된 옆방으로 들어간다.
작가의 말
10년 전의 이른 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10년 전의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이 세 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제자리에 차례를 맞추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
길었던 매듭이 지어지는 느낌이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컴퓨터 대신 손으로 썼다. 손가락의 관절들이 아팠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눈이 맑은 여학생 Y가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해주었다. 인쇄를 해오면 여백을 이용해 고치고, 그것을 다시 타이핑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의 반복은 인내를 요했다.
하지만 그나마 손으로 쓸 수 있을 때가 좋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백지 한 장을 채우기 전에 손목이 아파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음성인식컴퓨터? 손끝을 대면 전기자극으로 작동되는 키보드를 주문 제작하는 일?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나는 지쳐버렸다.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두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렇게 2년 가까운 자포자기의 시간을 보낸 뒤였다. '<진기명기> 같은 프로에 나가도 되겠다'고 동생이 말할 만큼 익숙해지자 혼자 힘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나무 불꽃>은 그렇게 썼다.
다시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다행히 이 글은 노트북 컴퓨터의 키보드를 열 손가락으로 두드려 쓰고 있다. 만의 하나 다시 손을 앓게 되더라도 예전처럼 부대끼지는 않을 것이다. 단련된다는 것, 감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리석고 캄캄했던 어느 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가로수 밑동에 손을 짚은 적이 있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
이젠 여학생이 아닐 Y에게, 병원을 취재할 수 있게 해 준 분들께, 비디오 작업의 세부를 가르쳐준 분들께, 도움을 베풀어준 분들, 굳건히 지켜보아준 이들께, 창비 편집부의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07년 가을
韓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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