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 268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91643260 2007-08-17 |
이정명.
국문학과를 나왔고 직장인 남성이라는 것 외의 자신의 프로필은 일절 밝히지 않은 작가.
그런데도 소위 '대박'을 터트린 작품이 벌써 둘.
홀로 삿된 소리를 조금 풀자면,
개인적으로 이정명과 정은궐을 떠올리면 마치 단원과 혜원을 보는 듯 하다.
물론- 김홍도와 신윤복에 대기에는 장르도 장르거니와 다소, 음, 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그러하다.
양념처럼 '배경이 그러하다' 정도만 사용되어왔던 '역사', 그리고 '시대상'을 (특히 대중소설에서는) 메인으로 이용한 대범함도,
딱 좋을 정도의 균형감각도.
팩션 대중소설 작가라는 다소 흔치 않은 분류 (가 되는 것도 사실 좀 웃기지만) 속에 단 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튀는 두 작가.
그리고 남성적인 문체, 짜맞춰지는 퍼즐과 살인과 수수께끼의 이정명.
그에 비해 무척 여성적이고, 유쾌하고 발랄한, 때로 가슴 에린 사랑 노래의 정은궐.
잘 어우러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혼자 잠시 했다.
이정명이라는 작가를 "뿌리 깊은 나무"에서 처음 인식했다.
("바람의 화원"이란 작품도 알고는 있었지만 읽지 않았었고, 작가가 같다는 것도 몰랐었다)
발표 순서는 사실 "뿌리 깊은 나무"가 앞서는데 둘 다 읽어본 바로- 나는 "뿌리 깊은 나무" 쪽에 더 마음을 준다. (이하 뿌나)
농도가 다르다는 것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뿌나'에 드러난 세종과 정기준으로 대표되는 양반 세력들의 사상의 부딪침, 곳곳에 숨겨져있던 장치, 속도감이 강렬한 문체!
단 두 작품을 읽은 것이라 딱 집어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뿌나' 쪽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구상 기간이 더 길었던 것일까?)
'바람의 화원' 같은 경우는 그 흐름을 훨씬 느리게 굽이 굽이 돌려 유려하고 완곡한 느낌으로 많이 바꾸었으나, 그리 하기 위해 곳곳에 심은 큰 바위가 다소 인위적이었다는 점이 아쉽다.
적록색맹은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은데, 관련 사료가 있는 것일까? 적긴 해도 김홍도 역시 색을 쓴 그림을 꽤 그렸다. 다만 신윤복에 대한 의심은 솔직히 그럴 법 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그리 했겠지만 단원의 작품을 지나치게 한정시킨 것도 다소 아쉽고...
그러나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 나름의 섬세함, 익숙했으되 미처 보지 못했던 그림의 세밀한 부분들에 대한 재조명 등은 놀라울 정도이고 시간을 들여 읽어볼 만하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요즘 이런 저런 것들을 읽고 있다보니 문장이...... 허허)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바람의 화원'은 수채화나 수묵화처럼 엷게 번져가는 농담이 아름다운 글이므로 그 자체로 충분히 읽어볼 만한 소설이며 나 역시 꽤 즐겁게 읽었다는 이야기다.
즐거웠다.
[발췌]
# 붓을 놓은지 이미 오래, 마음만 빈 화폭 위를 서성인다. 흰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르치려 했으나 가르치지 못한 얼굴, 뛰어넘으려 했으나 결국 뛰어넘지 못했던 얼굴, 쓰다듬고 싶었으나 쓰다듬지 못했던 얼굴, 잊으려 했으나 결코 잊지 못한 얼굴....
# 그러나, 내가 별이었다면 그는 밤하늘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그 빛은 차라리 재앙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바로 그 자신에게도. 뜨겁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재앙,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어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재앙, 그리고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재앙.
그를 본 순간 나는 눈이 멀었다. 그라는 뜨거움은 내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불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를 넘어서려 했으나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내가 딛고서지 못한 단 한 사람, 내가 이루지 못한 단 하나의 꿈이었다.
# 아이들은 모두가 무언의 공모자들이었다. 뛰어난 동료를 인정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평범해지기를 원했다.
# 새의 깃털을 뽑아도 새는 날기를 멈추지 않네
줄이 끊어진다고 가락이 멈출 것인가
잠을 깬다고 꿈조차 사라질 것인가
#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난 천재들의 운명이란 무엇일까. 같은 운명이지만 서로 싸워야 하고, 서로를 아끼지만 서로를 넘어야 하는 모순된 존재가 아닐까. 서로 격정적으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일까. 서로가 각자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서로가 경쟁자가 되어 함께 더 높은 경지를 개척할 수는 없는 것일까.
# 들리는 가락에 하나의 얼굴이 일렁이며 떠올랐다. 칼로 도려낸 듯 반듯하고 선명한 얼굴. 무슨 말을 하려 하면 가뭇없이 사라지는 얼굴. 곁에 있을 땐 애써 눈길을 피했지만 떠나가면 내내 떠올리던 그 얼굴...
그런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여리고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남자. 거드름을 피우지 않아도 모두가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남자. 결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어떤 불호령보다도 강하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남자.
확실히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 섬세한 얼굴이지만, 어떤 크고 억센 남자들보다 강한 눈빛을 가진 남자. 그의 마음은 세심하면서도 차디찼다.
# 窓外三更細雨時 창밖에 가는 비 내리는 삼경
兩人心事兩人知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歡情未洽天裝曉 보내는 정 아쉽기만 한데 하늘은 밝아오네
更把羅衫問後期 다시금 옷자락 붙잡고 뒷날의 기약만을 묻네
- 金命元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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