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교고쿠 나쓰히코]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일루젼 2024. 4. 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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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교고쿠 나쓰히코 / 금정
출판 : 비채
출간 : 2009.07.28


       

 

긴 꿈을, 꾸었다 깨었다.

 

일본에는 유독 백(百)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은 느낌이다. 백귀야행, 백물어 등등. 

조금 더 찾아본다면 우리나라에도 수와 관련된 것들이 꽤 있을 테고, 백일기도나 백일치성 등이 있긴 하지만 어쩐지 백(百)보다는 삼(三)이 더 친숙한 느낌.  

 

이번에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천천히 리뷰해보려 한다. 국내에는 세 개의 이야기, 총 네 권이 번역 출간되어 있는데 순서대로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 <후 항설백물어> 상/하 권이다. 각 이야기마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지만 공통적인 등장인물로는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모모스케'가 있다. 마타이치와 오긴, 고헤이 등은 <후 항설백물어>에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모모스케의 회상을 통해 생생하게 활약하니 역시 공통 인물로 볼 수 있겠다. 

 

발췌문의 분량이 상당한 관계로 각 이야기 별로 리뷰하기로 결정했지만, 역시 각 권을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첫 권인 <항설백물어>의 시작은 비가 내리는 어느 산길이다.

그칠 길이 보이지 않는 비를 피해 들어간 오두막.

어두컴컴한 곳에서 축축하게 젖은 옷깃을 여미며 모여 앉은 낯선 이들. 

 

책을 펼친 독자들 역시 어느새 그 틈에 앉아 이들과 함께 시작된 백물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때로는 모모스케가 되어, 때로는 마타이치나 오긴이 되어.

그리고 어느새 이야기는 멈추고, 이야기를 따라가던 이는 자신만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항설> 시리즈를 읽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고,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여운에 잠겨 보냈다.

 

여름밤, 누적지근한 공기를 벌리며 하얗게 한 줄기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모깃불의 연기. 

어디선가 희미하게 '짤랑'하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기분.

 

그런 몽롱하면서도 흐릿한 기분으로, 지난해 가을 -늦여름에 가깝던 나날들- 을 마타이치와 함께 떠돌았다. 

 

<항설> 시리즈는 '괴이'를 부정한다. 저자는 마타이치의 입을 빌어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런 것은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인간의 힘으로 '부여된' '꾸며진' '서사'.

믿고 싶은 이들에게 믿고 싶은 것들을 보여주어 꾸게 만드는 백일몽. 

 

그러나 네 권 중 단 하나의 이야기, <후 항설백물어>의 <붉은 가오리>만큼은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기이한' 섬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괴이는 없을지 몰라도 기이가 실존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인간은 결국 어느 정도에서 멈추느냐의 차이일 뿐 누구나 기이를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끝까지 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제각각의 생각을 품은 독자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항설백물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속에는 역시 자신만의 길을 걷는 이들이 때로는 자신을, 때로는 타인을 괴이 안으로 끌어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백가지 이야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백물어>는, 백 개의 이야기를 채울 때까지 이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수백 개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위로받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돌아선다. 

 

'짤랑'.

 

꿈은 깨지 않는다. 

꿈속의 꿈, 

깨어도 여전히 꿈. 

 

"어행봉위."

 


   

 

- 에치고 지방에 시오리 고개라는 험준한 곳이 있다.
일대에 너도밤나무 거목이 빽빽해서 한낮에도 어두운 비경이다. 먼 옛날,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도읍에서 쫓겨난 후지와라 사부로후사토시가 오제로 향하다가 이 너도밤나무 숲에서 길을 잃어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신비한 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나뭇가지를 꺾으며 일행을 산꼭대기까지 인도했다는 고사가 있는 까닭에 시오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 그 고개보다 더 깊숙이 들어선 곳.
장대비로 부옇게 물든 심산의 오솔길을 그저 총총히 나아가는 삿갓승의 모습이 있었다.
이 승려, 법명은 엔카이라고 한다. 엔카이는 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쳐내며 그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엔카이는 망연히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거세게 내린 비로 산골짜기의 개울이 콸콸 넘쳐나고 있었다.
맑은 청류였을 시내도 지금은 상류의 진흙과 모래가 뒤섞여 이미 탁류라고 이를 수밖에 없었다.

 

- 험준한 산길이다. 되돌아가면 산속에서 밤을 맞게 된다.
이제 와서 돌아간다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그렇다면 건널 수밖에 없다. 이 개울을 건너기만 하면 절까지 이르는 거리는 지척에 불과하니 아마 한나절도 걸리지 않을 터. 산으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고개를 넘어도 이틀, 고개를 우회하면 나흘은 걸리는 거리이다. 이 샛길로 간다면 하루로 족하다. 해 저물기 전에 강을 가로지르면 심야에는 산 어귀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엔카이는 그러한 심산으로 걸음을 재촉해왔던 것이다. 

- 몸 구석구석까지 급격하게 피로감이 차오른다.
'실수했군.'
딱히 서둘러야 할 여행도 아니었으므로 가능한 한 무난한 길로갔어야 했다. 그나마 가도를 따라왔다면 이처럼 오도 가도 못할 상황에 빠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새벽녘부터 구름의 형세가 심상치 않아, 엔카이는 오늘 아침 출발 직전까지도 그리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발이 저절로 산으로 향했다. 짐승들이나 다니는 오솔길이라 고생스럽기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즐겨 다녀 몸에 익은 길이었기 때문이리라. 이 근방의 산은 엔카이에게 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익숙함이 화를 자초했다. 기후를 잘못 읽은 것이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굵은 빗방울이다.
바람이 잠잠한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익숙한 길이라지만 여기에 바람까지 세차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으리라.

-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사내가 서 있었다. 흠뻑 젖은 그 사내 보아하니 엔카이와 마찬가지로 승려 차림이다.
그러나 옷은 먹빛으로 물들이지 않고 순백이었다. 가슴에는 시주함을 늘어뜨리고 삭발머리를 흰 목면 행자두건(頭巾)으로 싸매었다. 야마부시나 순례승, 아니, 부적을 파는 걸승 부류이리라. 

- "오두막이라..."
이 근방에 오두막이 있었던가.
엔카이의 기억에는 없다.

- 듣고 보니 오두막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 스님 좋을 대로 하시구려."
사내는 엔카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진흙을 튀기며 비탈을 내려오더니, 엔카이를 지나쳐서는 꼿꼿한 걸음걸이로 하류를 향했다. 엔카이는 어깨너머로 그 사내의 뒷모습을 쫓다가 삿갓을 들어올리고서 다리가 있을, 혹은 다리가 있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힘을 주어봤으나 연무로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의 비 내리는 하늘은 더욱 어둡다.
밤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빗발은 잦아들 기미도 없다.

- 엔카이는 발길을 돌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사내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몹시도 발이 빠른 사내다. 아니, 이런 폭우 아닌가.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겠지. 
이정표도 잃었고, 시야도 나쁘며, 발조차 뜻대로 내딛을 수 없다. 과연 그 오두막이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콸콸대는 탁류 소리에 이끌리듯 나아간다.
그 수밖에 없을 테지. 그런데.
빗소리와 개울소리가 뒤섞인다.

- 엔카이는 몸에 힘이 빠져 잠시 주저앉았다.
왠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비를 매개로 엔카이는 산이나 대기와 일체화한다. 
그때 세계가 엔카이의 내부로 흘러들어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는 엔카이의 몸을 흐르는 혈류의 율동과 동조해 토막토막 단절되었다. 
쏴, 쏴, 쏴, 쏴, 쏴, 쏴, 쏴, 쏴.
'이곳은. 이 장소는.'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모든 것은... 모든 것은 이곳에서부터.
 
- 엔카이는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일까.
한층 더 거세어진 빗발이 삿갓 끝자락에 막을 쳐 엔카이를 바깥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고 있었다.

- 정말 오두막 같은 게 있었던가? 그러한 의심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그 오두막은 엔카이의 관념 속에 뚜렷이 서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벗어나 방울져 내리는 무수한 물방울에 의해 이미 산의 풍경과 융합해버린 엔카이로서는 바깥 세계와 내부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엔카이는 무심히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뭐지?'
천천히 돌아본다.
예상 밖의 많은 시선에 엔카이는 한순간 움찔했다.
화로를 둘러싸고 열 명 남짓 되는 남녀가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아까 보았던 백장속(百裝束) 사내가 앉아 있다. 사내는 엔카이를 바라보며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오셨구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웃었다.
행자두건을 푼 머리에는 흠뻑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다. 상투를 틀 만한 길이는 아니다. 삭발한 머리가 자란 것일 테지. 

- 사내는 살갑게 손짓을 하며 일동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농부로 보이는 자가 몇 명, 등짐장수가 몇 명.
벽 쪽에는 흰 살결에 얼굴 갸름한 세련된 여인이 기대듯 옆으로 앉아 있다.
화려한 남보랏빛 기모노와 풀색 겉옷이 오두막 안의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행 채비로도 보이지 않는 차림새다. 여인은 갸름한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던졌다. 
그 옆에 움츠리고 있는 이는 십중팔구 상인, 연령은 쉰이나 예순 줄, 정갈한 차림새로 보아 나름대로 이름 깨나 알려진 상점의 주인쯤 되려나. 짐작컨대 에도 사람이다. 
그 옆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사내가 정좌하고 있다. 여행 차림이기는 하나 무심한 행동거지가 일반 백성으로는 보이지 않고, 장인의 부류도 아닌 듯싶다. 물론 무사도 아니다. 엔카이의 모습을 보고서도 동요하는 기척 하나 없이 그저 표표하게 붓통 뚜껑만 딸각딸각 여닫고 있다. 
 
- 엔카이는 눈길을 돌린다.
이 노인은 보고 싶지 않다.
표정을 알 수가 없다. 말도 분명 통하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다. 그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사양할 것 없소."
백장속 사내는 훤히 내다보는 듯한 강한 시선으로 엔카이를 응시하며, 반면 한층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엔카이가 무언가 대답하려는 것을 가로막듯 사내는 말을 이었다.

- 악천후는 한밤에 이르러서도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그저 어둡기만 한 오두막 안, 화로의 숯 터지는 소리만이 불쑥 생각이라도 난 듯 몇 번을 울려 퍼져 엔카이의 고막을 때렸다. 미미한 숯불 정도로는 젖은 옷이 마를 리도 만무해, 옷은 온몸에 쩍 달라붙어 있었다.
그 불쾌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리가 화기애애해진 것은 그로부터 반각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 엔카이도 어느새 둥그렇게 둘러앉은 자리에 섞여 있었다. '이러한 밤은 길기 마련. 이참에 한번, 에도에서 유행하는 백 가지 괴담이나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하고 처음 말을 꺼낸 이는 아마도 어행사였으리라.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잡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분위기였음은 분명했던 것이다.

- 나야 이렇게 보시다시피 부평초마냥 정처 없이 돌며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까요, 당연히 여기저기 떠돌다 보면 무서운 이야기나 기이한 소문도 이래저래 듣지요.
네? 내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냐고요?
보다시피 인형사, 산묘회지요.
산묘라. 참, 산묘는 사람을 홀린답니다. 알고들 계시려나? 예, 족제비, 오소리, 여우에 너구리. 인간을 홀리는 짐승은 많고도 많지만요, 산모도 홀린답니다. 
거짓말이라고요? 천만의 말씀. 집에서 기르는 괭이도 흘리는걸요. 그 왜, 괭이는 기르기 시작할 때 기한을 말하지 않으면 해코지를 한다든가, 나이를 먹으면 둔갑을 한다지 않습니까? 
그래, 네코마타라고 하던가요.
 
- 왜, 시신이 나왔을 때 옷을 뒤집어 입히고 이불 위에 빗자루며 국자를 올려두고 머리맡에는 식칼 같은 걸 두잖아요. 그게 바로 마물 괭이를 막는 방법인 거지요. 예에, 병풍을 거꾸로 세워두는 것도 바로 그거고요. 다 괭이가 죽은 이 곁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모르고 계셨나요, 오라버니? 저기 계신 스님은 알고 계실걸요. 예에, 암요. 어머나, 스님은 고양이를 싫어하시나? 
 
- 나한테는 두 살 터울인 언니가 있었지요.
 
- 살결이 희면 일곱 가지 결점이 가려진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새하얀 살결이었지요. 음식을 먹으면 목에 고스란히 비쳐 보일 정도... 라고 하면야 당연히 과장이지만요. 예? 나도 그렇다고요? 어머나, 세상에. 언니는 나처럼 되다 만 미인이 아니었답니다. 청초한 용모라 고을 안에 이만한 미인이 없을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동생인 나에게도 일단 자랑거리였고, 좀 더 자라면 나도 언니처럼 될 거야,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요. 뭐, 결국 요 모양으로낙착되고 말았지만 말이죠. 
예? 예. 동경했었답니다, 나는 언니를.

- 그런 언니가요,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음, 그 이야기가 정해졌던 때가 한여름 무렵이었나.
상대는 이웃 고을의 큰 부자. 예, 높으신 나리들이 이용하는 역원(驛院)의 후계자였나 촌장의 맏아들이었나 그랬는데, 이름이 아마 요자에몬이라고 했었던가. 
 

- 언니가 나체로 달빛을 받으며 노래 부르고 있는 모습을 봤다더라.
언니의 남자는 산묘라더라.
예, 그 소문을 듣고 나는 떠올렸지요.
그때 혼을 빼앗긴 게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도 그런 소문이 퍼졌답니다.

- 결국 부모님도 단념하고 말았어요. 음식을 아무리 가져다 날라도 이미 먹지 못하게 돼버린 듯했으니까요. '마물에게 혼을 빼앗겼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죽은 셈 치자.' 그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도 들렸었지요. 
하지만 나는 끝내 단념할 수가 없었어요.

- 소문대로 전부 언니가 홀로 연극을 하는 것이었답니다.
남자 음색과 여자 음색을 나누어 쓰며, 뭔가를 묻고 대답하며 이야기를 하더군요. 거의 인간의 말이 아니었지만요. 그러다가 격렬하게 몸을 떨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 그 후 며칠이 지나서 언니가 죽었습니다. 아사로 말이지요. 그럴 수밖에요. 뼈와 거죽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시신 주위에는 산묘의 털이.... 예에, 많이도 떨어져 있었답니다.
 
- 인형사 오긴이 풀어낸 긴 이야기가 끝났다.
수수께끼 작가 모모스케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모모스케는 여러 지방의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하는 것을 더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좀 특이한 사내다. 세상에는 별 희한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참으로 많은 것이다. 작가 지망생인 모모스케는 그러한 이야기를 모아 언젠가 백가지 괴담집을 개판(開版) 할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연이라곤 하지만 이 자리에 끼어들었으니, 적어도 모모스케에게는 행운이었다. 어행사 차림의 사내가 괴담이나 하며 밤을 새우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절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불운을 저주했으나, 이리 되고 보니 악천후에도 감사를 해야 될 듯싶다. 
 
- 괴담이란, 기교만으로는 타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용모와 소지품으로 보아 기다유부시를 부르며 인형을 움직이는 인형사라는 점은 알아맞힐 수 있었으나, 어디로 가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모스케도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섭지는 않으나 기묘한 이야기였다.
우선 산묘가 사람을 홀린다는 이야기, 모모스케는 알지 못했다. 모모스케가 아는 한, 고양이에게 붙어 있는 구전과 미신 종류는 거의 기후에 관한 것이다. 세수를 하면 날씨가 맑아진다든가, 흐려진다든가. 그런 속담 같은 구전이라면 모모스케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출산에 관련된 길흉이다. 요괴고양이나 네코마타가 등장하는 피비린내 나는 괴담도 곳곳에서 자주 듣지만, 대부분은 복수담일 때가 많다. 나베시마 고양이 소동과 별 차이가 없다. 

-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행사도 뚫어지게 승려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심할 수 없는 소악당이로군.
넉살도 좋고 요령도 좋아 어딘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듯한 분위기를 지녔지만 그 이면에 이 어행사 -마타이치라는 이름인듯- 는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어 쉽사리 신뢰할수는 없겠다, 모모스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승려 -이 이는 엔카이라는 이름이다- 는 오긴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의 언니는 정말로 리쿠라는 이름이었소?"
 
-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쌀이라도 이는 듯한..." 이라고 말했다.
"쌀이라기보다 겨... 아니, 그건 아니군. 팥이라든가."
"팥..."
엔카이가 경련하듯 말했다.

- 모모스케에게는 들렸다.
아니,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모스케는 "분명히 들렸다"고 단언했다.

- 그러자 농부나 등짐장수까지 "그건 팥이다. 틀림없이 그것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모스케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과연 몇 사람에게나 들렸을까. 빗줄기가 잦아들었다지만 그친 것은 아니다. 개울물 소리도 들리고, 산 특유의 소리도 있게 마련이다. 팥 이는 소리가 날 만한 까닭도 없다.
그러니 설혹 그 자들에게 들렸다고 해도, 모모스케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뿐이리라. 부화뇌동이라 할지 뭐라 할지,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다. 어행사는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스럽게도 실로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대체 뭘까? 이런 산속, 이런 시간에, 그것도 비가 오시는 가운데 팥을 이는 얼간이가 있을 리 없을 텐데, 환청이라 치기에는 모두가 들었고, 스님도 들으셨지요?"

- "아이참, 그 소리는 아즈키도키바바지."
오긴은 그렇게 말했다.
어행사가 대꾸했다.
"그 아즈키도키바바라는 건 대체 뭐야? 네 할마마마는 이런 깊은 산속에 사나보지? 정월도 아닌데 뭐하러 팥을 일어? 아니면 무슨 경사라도 있나? 오호라, 이 계집, 세쓰 출신이라고 허풍을 떨더니만, 정체는 이 산의 족제비나 뭐 그런 게 아닌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시지, 이 머저리" 라고 거칠게 내뱉고서, 오긴은 앞을 바라보았다.
"아즈키도키바바는 요괴야. 이런 산속에서 누가 그런 곡식을 일겠어? 내일은 강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나 쓰라고."

- 어행사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모모스케가 대답했다.
"그건 말이오, 어행사, 아즈키도키나 아즈키아라이라는 요괴는 계곡이나 다리 아래에서 곡물을 이는 듯한 소리를 내는 형체 없는 요괴인데, 이 소리를 들으면 물에 빠지는 일이 많다고들 하지요."
어행사는 코웃음을 쳤다.
"흐흥. 선생, 선생은 책인가 뭔가를 쓰신다든가 쓰셨다든가 하던 분 아니십니까요? 그런 분이 어째 미신을 이야기하시는구먼. 소생처럼 배움이 없는 걸식승의 얘기라면 또 몰라도, 학식 높은 작가 나리나 되시는 분께서 그렇게 허황된 이야기를 하시면 곤란합지요. 모두가 믿어버린다고요."

- "촌뜨기의 미신입죠" 하고 어행사는 말했다.
"잘 들으십시오. 아즈키아라이란 다듬이벌레를 말하는 겁니다. 그놈들은 장지문 종이에 터를 잡고 사각사각 큰 소리를 내거든요. 그것을 팥 이는 소리에 비유한 거지요. 그리고 팥 이는 영감인지 팥 삶는 할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인간이 이 깊은 산속에 있을 리 없잖소이까. 아니, 아니, 그런 거짓부렁, 에도에서는 안 통합니다. 형체가 없다니,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 일동에게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백 가지 괴담을 하자고 운을 떼었던 주제에 꽤나 현실적인 이치를 따지는 사내라고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뚜렷이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모모스케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만, 어행사. 이것은 고금동서, 지역을 불문하고 어떤 곳에 가나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 뭐, 소인도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꺼려집니다만, 아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에 예에 세간에서 말하는 수전노였죠. 지금이야 무얼 그리 욕심내고 무얼 그리 아까워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일어서면 다다미 반장, 누우면 다다미 한 장. 사람은 자신이 거할 장소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건만, 참 어찌 그랬는지. 그 무렵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 어느 누구의 얼굴을 보든 모두가 내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봤던 게지요.  
예, 예, 소인에게 대를 이을 손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가게의 점원 가운데 누가 되리라고들 여겼지요. 뭐, 그럴 생각으로 있었습니다. 허나 그 무렵의 소인은... 예에, 그랬을 테지요?
돈 계산을 잘하면 잘하는 대로 욕심이 많을 것이다, 꼼꼼하면 꼼꼼한 대로 요령이 나쁠 것이다, 결점만 눈에 들어와서 말입니다. 몹시도 마땅치가 않았지요. 예, 그래선 아니 되는데 말입니다.

- 말은 그리 했습니다만, 뭐, 소인도 사소한 일은 누구에게든 맡길수밖에 없었지요. 그리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다쓰고로라는 녀석이 그 무렵 행수였습니다.
 
- "그렇소. 소승이오! 바로 나요!"
엔카이는 그렇게 버럭 고함을 내지른 후, 엉엉 통곡하듯 소리를 지르고 벽을 치고 바닥을 차며 날뛰더니 곧 잠잠해졌다.

- 졸졸졸. 개울물 소리가 들린다.
주룩주룩. 빗소리도 들린다.
쑤와아아. 산이 울고 있다.
쏴락.
쏴락.
쏴락.
팥 이는 아즈키아라이.

- "백 가지 괴담... 마지막까지 이르려면 아직 시간이 있건만."

어행사 마타이치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모모스케는 놓치지 않았다.
엔카이의 절규가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인지 개울소리인지에 섞여서 들렸다. 그것은 협곡에 울려 퍼지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에서 반복되는 것인지, 짧게 간헐적으로 모모스케의 귀에 남았다. 
 
- "준비 됐습니까, 선생?" 하고 모모스케에게 한마디를 던진 후 에잇, 하고 힘을 주어 물에서 시신을 들어올렸다. 모모스케는 차가운 다리를 들어, 축축하고도 물컹한 덩어리를 바위에 뉘였다. 
어행사는 품에서 요령을 꺼내 짤랑 하고 울린 후 한 마디,
"어행봉위(御行奉僞)!"
라고 말했다.

- 입이라도 맞춘 듯 전원이 머리를 숙였다.
산새가 울었다.

- 어행사가 말했다.
"역시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결말은 바라던 바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것도 무언가의 계시라고 생각할 수밖에."
고헤이는 낮은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한 후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울고 있는 듯했다.

- 도쿠에몬이 말을 이었다.
"뭐, 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이란 말도 말짱 거짓은 아니군. 이 자식도 지금은 착실히 수행을 쌓고 있었던 듯하니 자백을 하면 용서해주자고 마타 씨와 이야기를 끝냈건만..."

- "자, 잠깐만요, 당신들은 대체...?"
모모스케가 의아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어행사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이 엔카이라는 사내 출가하기 전에는 다쓰고로라는 이름의 파락호였는데, 이 산을 근거지로 강도나 산적처럼 악랄한 짓을 일삼았더랍니다."
 
- 어행사는 웃었다.
"빗추야... 그런 가게는 없습니다. 이 영감은 말이지요, 신탁자 지혜이라는 이름인데, 아, 소악당입니다."
소악당에게 소악당이란 소리를 듣기는 싫다고, 어젯밤 도쿠에몬이라고 자칭했던 초로의 사내가 말했다. 말투가 달라졌다.
"이 녀석도 지금이야 이런 땡중 냄새 물씬 나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라는 별명을 가졌던 희대의 거짓말쟁이, 에도 최고의 허풍꾼 사내였소이다." 
"무, 무슨 뜻입니까?"
모모스케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어행사,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는 복잡한 표정으로 모모스케를 보더니 약간 머뭇거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이 다쓰고로는 딱 십 년 전, 이 고헤이 영감의 금지옥엽 딸을 짝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리쿠 씨는 혼사를 앞두고 있었지요. 그러자 이 자식이 억지로 욕심을 채우려고 하필이면 혼례일 밤에 리쿠씨를 납치, 이 오두막에 감금하고선 이레 날 이레 밤을 능욕했던겁니다."  
"리쿠... 그건 오긴 씨의 언니... 아아, 당신도."
오긴은 요염하게 웃었다.
"난 에도에서 태어났답니다. 보면 아실 텐데. 이렇게 세련된 촌뜨기는 없지요. 예, 리쿠란 사람은 여기 고헤이 씨의 따님이었죠. 뭐, 어제 얘기한 대로 정말이지 아름다운 아가씨였던 모양이지만, 산묘가 아닌 산적한테 콱 물어 뜯겨서 그만..."

- "그럼 어젯밤 이야기는...?"
역시 원전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화를 교묘하게 바꾼 우화였던 것이다.
 
-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야스케 씨까지 살해해버린 겁니다."
고헤이는 으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타이치는 애잔함이 담긴 시선을 고헤이에게 던졌다.
"이 엔카이라는 사내는 고헤이 영감님의 자식을 둘이나 죽인 사내입니다. 영감님이 여러모로 조사해서 아무래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증거가 없었지요. 그래서 연극 한 판을 벌인 겁니다. 엔카이는 며칠 전 절의 용무로 에도로 출타했어요. 그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 덫을 놓자 싶어 줄곧 미행하고 있었는데, 어제의 비가 멍석을 깔아준 거지요." 

- 마타이치는 그렇게 말하고선 일어섰다.
"그 비는 리쿠 씨와 야스케 씨가 내렸을 테지."
지헤이도 일어선다. 오긴도 뒤를 따랐다.

"그럼 어젯밤 일은 모두 당신들이 깔아둔 덫..."

그렇다면 그 얼마나 교묘한 덫인가.

- 혼례일 밤에 사라진다. 오두막에 갇혀서 죽는다. 팥을 정확히 알아맞힌다. 한솥밥을 먹는 자가 팥을 일고 있는 사이에 살해한다.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인데 부품만은 같다. 그 얼개부터 다른 이야기임에도 고유명사를 포함하는 세부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 사정을 모르는 자로서는 전혀 맥락을 알 수가 없다.

 

- <아즈키아라이>

 

- 가이 지방에 유메야마(夢山)라는 이름의 산이 있다. 
단풍의 붉은빛과 솔의 푸른빛, 그림자와 빛과 안개와 구름, 그 형형색색의 빛깔이 혼연일체가 되어 산속인지 꿈속인지 실로 몽롱하고 모호하니, 우러르는 자 보는 자 한결같이 아득하게 피안을 감득(感得)하고, 들어서는 자 걷는 자 그저 현기를 느끼노라면 살아 있으면서 황천길로 흘러든 듯한 기분에 빠진다. 낮이라 짙은 어둠만 없을 뿐, 여기저기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는 까닭에 유메야마라고 불리는 것이다.

- 그 기슭.
그저 울창하게 나무들이 무성한 울숲이 있다.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삼림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작다.
그 이름, 여우숲이라고 한다. 중간쯤에는 자그마한 무덤이 있고, 무엇을 모신 것인지 몰라도 역시 자그마한 사당이 서 있다.

- 숲은 축축했다.
그러나 야사쿠는 메말라 있었다.
까칠하게 메말라 있었다.

- 잠시 엉덩이를 내려놓자 일어서는 일이 몹시도 성가시게 느껴졌다. 야사쿠는 지치고 고달팠던 것이다. 엉덩이 밑은 풀인지 흙인지, 딱딱한 듯 부드러운 듯 축축하게 젖은 감촉이었고, 평소라면 불쾌했을 그 서늘한 감촉이 무척이나 아늑했다. 
그러자 야사쿠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빠졌다. 이제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있고 싶었다.

- '무엇이 무엇이 어디에서...'
무엇이 어디에서 어긋나버린 것일까.

- 그것은 종이 여우탈이었다.
사당 옆으로 이번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비쳐 보일 듯이 희고 고운 얼굴이다.
갸름하니 초리가 발그스름한 눈매를 하현달처럼 만들고서, 선명한 연지를 바른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여자는 웃고 있다. 

'사람인가.'

- 야사쿠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여자는 낡은 사당 바로 뒤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놀라게 해버렸네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 일어서더니 사당 옆쪽으로 나와 전신을 드러냈다.

화려한 남보랏빛 기모노에 풀색 겉옷.
오려서 붙인 듯, 풍경과 동떨어진 모습이다.
인근 마을에 사는 자 같지도 않고 행장(行裝)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 '그렇다면 역시...'
섬뜩하다. 그럴 리 없다. 여우일 리도 너구리일 리도 없다.

금수가 둔갑하여 사람을 속이다니, 야사쿠는 그런 망언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니, 그것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별안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화들짝 놀랐을 뿐이다. 그런 것이다.
알았음에도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그런데 산길에 접어들자 어디서 어떻게 멀어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갈 길이 달랐던 거지 싶어서 저 사당 뒤에서 쉬고 있었는데 눈에 익은 이녁이 훌쩍 나타나더라 그런거지요."
'에도에서.'
사실일까. 야사쿠는 미심쩍었다. 야사쿠의 걸음은 상당히 빨랐다. 과연 여자의 다리로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낯빛을 보니 아직도 못 믿겠다는 얼굴이네요."

여자는 가느다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잡아먹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난 보다시피 인형사, 하찮은 산묘회인 걸요. 도깨비도 뱀도 아니라고요."
그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무슨 속셈으로... 혹시.'
야사쿠는 더욱 미심쩍었다. 보아하니 봉행소(奉行所)나 팔주회의 수하는 아닐 듯싶다. 그러나 화도개방의 도신은 시정(市井)의 하민을 심복 수하로 거느리며 밀정으로 삼고 있다고 들었다. 여자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 동요하는 야사쿠의 모습을 보고 알아챘을 것이다. 오긴은 유쾌한 듯 무덤에 발을 올려놓았다.
"나리도 참 어이없는 얼간이이시오. 고집을 버리고 문득 어떤의심이 스친다 해도 내색을 않는다면 귀신이라 한들 그 심기를 살피는 일 따윈 하려야 할 수가 없을 겁니다. 하물며 나야 보시다시피 별 볼일 없는 물건. 이녁의 모습을 보고 넘겨짚어 아는 척을 했을 뿐이지요. 맞았다고 한들 당연지사 우연이라고요." 
 
- "남정네 상대로 시건방진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요물이란 있지 않을까 의심할 때는 반드시 나타나고, 없다고 여기면 결코 아니 나오는 법. 두렵다고 생각하면 낡은 우산도 혀를 내뽑은 채 손짓을 할 테고, 고목에 걸린 헌 짚신도 삿갓 안을 들여다보겠지요. 세간에서 요괴로 불리는 무리는 모조리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니, 당연히 스스로 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그야 그럴 것이다. 그런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야사쿠에게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의심할 만한 이유도 두려워할 만한 까닭도 있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으리라.
의심암귀(疑心暗鬼)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

- "그렇지요"하고 웃음을 띤 채 돌아보는 오긴의 얼굴은 아주 다정했으며, 눈에도 부정한 빛은 없었다. 당연히 그러할 터. 모든 것이 좀 전에 여우를 보았을 때와 똑같다. 상대의 눈에 무언가 요기가 어렸다면 그것은 자신의 떳떳치 못한 구석 때문이다. 이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 '그것은 진실이다. 허나.'
"그것 참, 가슴이 찔리겠군요." 여자가 말했다.

- "나는 예전... 여우의 생가죽을 벗길 때 가엾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이거면 얼마다, 많이 벌었군, 그리 생각했지. 어미여우든 새끼여우든 인정사정없이 잡아선 죽이고, 잡아선 죽이며 살았구먼. 그러니 겁보라기보다 비도(非道)가 지나쳤다는 것일 테지."
지나친 비도. 
"하지만 이미 그만두었잖수."
오긴은 사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가엾게 여겼기에 그만둔 거 아니오. 불쌍하다고 생각했기에 접은 것이지. 아니 그러시오."

- '그렇지 않다.'
"별 이유 없소. 어떤 스님이 나의 난획을 꾸짖으며 일갈하시더라고, 살생의 죄는 내세에 해를 끼친다. 그리 말씀하시기에... 뭐, 마음이 기운 게요.”
'거짓이다.'
그 말은 거짓이다. 야사쿠는 그렇게 어진 사내가 아니다. 그것은 야사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사냥을 그만둔 까닭은, 그것은...

- "거침없이 말씀하시는데, 듣고 보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구나, 그리 생각이 들더라고. 꼬집어 말해주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내였어."
"말해서 알아들었으면 충분하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 "잘 들으시오, 나리." 오긴은 정색하고 말하며, 그 하얀 얼굴을 야사쿠에게 향했다.
"짐승이란 허를 노리는 법. 허점이 없는 자에게는 마가 낄 리 없다 이겁니다. 그런 틈을 보이면 진짜로 둔갑해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조심하시기를." 오긴은 그렇게 말하고 허리의 인롱에서 환약을 꺼내 야사쿠의 손에 쥐어주었다.
 
- 야사쿠는 어질어질 유메야마의 꿈에 집어 삼켜져, 여우숲 사당앞의 이슬에 젖은 풀고사리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정신을 잃었다.
 
- 이미 자신의 손처럼 길이 든 연장이다.
야사쿠가 잡은 여우의 생가죽이 비싸게 팔렸던 이유.
그것은 가죽에 흠이 없었기 때문.
총상도 칼자국도 없었다. 곰기름으로 조린 쥐를 미끼로.
생포한 여우는 모두 이 망치로...

- 아아. 그날과 똑같다.
피. 
승려 차림의 사내는 천천히 뒤로 쓰러져 간다.
바람에 펄럭 부풀어 오르는 법의.
철그렁 하고 내동댕이쳐지는 석장.
풀썩 소리를 내며 먹빛 천이 펼쳐졌다.
 
- 짤랑. 요령 소리.
야사쿠는 뒤돌아보았다.
'여우.'
사당 뒤로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그럴 리 없다.

- 뾰족한 귀 기다란 꼬리. 하얀 얼굴.
"여, 여우인가!"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행자두건의 목면 매듭이 짐승의 귀처럼 보였을 뿐이다. 뒤로 늘어뜨린 천 자락이 꼬리로 보였을 뿐이다. 매끈한 사내의 백면(白面)이 여우 낯짝으로 보였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것은 백장속의 사내였다.
가슴에 커다란 시주함을 받들고 있다.
'인간인 척하기는. 다시는 아니 속는다.'

- 사내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길로 야사쿠를, 그리고 아마도 야사
쿠 뒤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 "어허, 잠깐, 소생은 보시다시피 액막이, 귀신 쫓기, 흉살(凶煞)풀이, 주술 부적을 뿌리고 다니는 걸식 어행사입니다요. 요괴나 마물 족속이라면 이러한 것은 가지고 있지도 않을 터인데."
사내는 가슴에 늘어뜨린 시주함에서 호부(護符)를 한 움큼 꺼내 뿌렸다. 종이는 팔락팔락 춤추다가 몇 장이 야사쿠의 발치로 떨어졌다.
야사쿠는 그것을 짓밟았다.
"시끄러워! 더는 안 속는다."

- "그래, 나는 홀렸던 것이야. 오 년이란 세월은 흐르지도 않았을 테지. 모조리 거짓일 테지. 축생치고는 제법이야. 아주 치밀하게 일을 꾸몄군 그래!"
야사쿠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사내... 흰여우는 움직이지 않는다.

-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지헤이는 화가 난 듯 말했다.
"뭐,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렇기는 한데, 일단 이 자식은 악행에 관한 한은 비상하게 냄새를 잘 맡거든. 이 자식은 아마도 야사쿠라는 사냥꾼이 상당한 명수라는 것을, 아니, 그보다 야사쿠가 살인자로서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는 점을 한눈에 간파했던 거지." 

- 살인에 과연 재능의 유무가 있는 것일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술이 아니리라.

- 도적뿐 아니라, 그 누구든 승적에 없는 자가 쉽사리 승려로 변신할 수 있을까.
모모스케가 그 말을 꺼내자 마타이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야 경우에 따라 달라집죠" 하고 대답했다.
 
- "선생 말대로 이 인간이 죽든가 야사쿠가 죽는길 말고는 끝을 낼 방법이 없는 것이야. 우리는 피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어쩔 도리가 없어. 야사쿠가 도와 씨를 해치고만 단계에서 우리는 이미 패한 거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건, 이 일의 의도는 일종의 보복인 겁니까? 아니면 본보기입니까? 아니, 당사자끼리 죽고 죽이도록, 천심(天心)을 대신하여 내리는 처형입니까? 물론 이 이조도 야사쿠 씨도 오라를 받으면 책형과 효수는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죽지 않아도 언젠가 관헌에서 심판을 내렸을 테지요. 그러니..."
"그건 오해인뎁쇼." 마타이치가 말했다. 
"우리는 관헌의 개도 아니고 의적도 아니지요. 사람을 심판한다든가, 악을 벌한다는 대의명분과는 연이 없으니까요. 악당이니 죽어도 된다는 별 시답잖은 핑계거리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죠." 

- 거기서 마타이치는 말을 끊었다.
"심판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지 않소. 아니 그렇습니까, 선생?"
마타이치는 유메야마를 우러르듯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후 슬프군, 하고 말했다.
그리고 모모스케를 보며 슬프지 않습니까, 하고 확답을 받듯 거듭 말했다.


- <하쿠조스>


- 이즈 지방에 도모에가후치라는 깊은 못이 있다.
깊은 산속, 차고 맑은 물이 솟는 수원과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수면은 도저히 잔잔하다고 하기 어려우며, 일렁일렁 파도가 일고굼실굼실 소용돌이가 쳐서 짐승뿐 아니라 나는 새마저 집어삼킬 것 같았다. 
못의 한가운데에는 지옥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산면(山面)의 적토가 녹아든 불그스름한 물줄기와 거무튀튀하게 묵은 빗물, 맑고 투명한 샘물이 서로 섞이는 일 없이 못의 중심을 향해 소용돌이쳐, 그야말로 세 마리 올챙이가 꼬리에 꼬리를 문 듯한 문양처럼 보이는 까닭에 도모에가후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 그 도모에가후치 기슭에 조촐하게 판자지붕을 인 오두막이 있다.
누가 언제 무슨 까닭으로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이 아쿠고로라는 사내, 화승총을 들면 폴짝거리는 토끼의 붉은 눈을 명중시키고 활을 들면 하늘을 노니는 매마저 쏘아 맞힌다는 천하무쌍의 솜씨에, 월등한 과인지력으로 사람의 키만한 바윗돌을 가벼이 움직이고 산도(刀) 한 자루로 거목을 넘어뜨린다는 등, 그 평판이 먼 고을까지 들릴 정도였다.
용모도 그 별명처럼 악귀인지 범인지 모를 흉악한 면상으로, 키만 그리 크지 않을 뿐 억센 털로 뒤덮인 두툼한 살은 돌처럼 단단해, 설령 허를 노려 칼부림으로 덤벼본들 무딘 날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으리라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사냥꾼인지 나무꾼인지 모를 풍채로 산적이었다거나 강도단의 두목이었다거나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도 모르며, 과연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술을 몹시 좋아해 연중 내내 말술을 퍼마시고 한 달에 몇 번쯤 마을로 내려와 노름을 하고 닥치는 대로 여자를 탐했다. 

- 무시무시한 사내이긴 했으나 도박장에서의 아쿠고로는 입이 힘한 노름꾼들에 비하면 훨씬 과묵하여, 이기면 좋아하고 지면 시무룩해질 뿐 취해서 주정을 늘어놓는 일도 없고 난동을 피우거나 억지를 부리는 적도 없이 참으로 깔끔하게 놀았다. 어디서 나는지 돈 하나는 넉넉했는데, 그런 까닭에 무언가를 담보로 패를 쥐는 일도 없이 그저 있는 돈을 다 털어 놀고, 가진 돈이 떨어지면 물러갔다. 어떠한 때라도 노름만은 끊을 수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 문제는 여자였다.
아쿠고로의 엽색(獵色)은 심상치가 않았다.

- 납치된 처녀는 대부분 사흘쯤 지나면 돌아왔으나, 돌아오지 않는 자도 있고, 돌아온 처녀도 거의 만신창이에 숨도 끊어질 듯 말듯, 정신을 놓았거나 눈이 멀어 있기도 했다. 때문에 돌아왔다 한들 대부분의 처녀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목을 매거나 몸을 던져 세상을 뜨고 마는 것이다. 
내놔라 돌려달라 하며 들이닥친들 아무 소용도 없다.  

- 상관이 없으니 그저 단순한 살인자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자와 아이라도 청을 받으면 벤다. 마타주로는 좌우지간 사람만 벨 수 있다면 족한, 그런 사내였다.
아무런 주저도 없다.

- 마타주로의 검은 일합을 펼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저 죽이는 일에만 뛰어난 살인검이다. 그 살기 넘치는 칼놀림은 어떤 유파의 것과도 다르다. 이른바 자기류인 것이다. 아니, 자기류라기보다 오히려 천성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상대의 기량을 가늠하기 전에 이미 손이 움직이고 있고, 그다음 순간 상대의 숨통은 끊어져 있다. 맞닥뜨리자마자 횡으로 후려치는 일섬(一閃)은 상대의 목을 갈라 머리마저 떨어뜨린다고 한다. 
참수인이란 별명이 붙은 연유다.

- 타고난 천성으로 그러한 칼놀림을 이미 체득하게 된 마타주로이니 당연히 도(道)로서의 검이 몸에 익을 리 없다. 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마타주로는 몇몇 도장에서 파문당했다. 그처럼 짐승 같은 검은 살인 외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 검술이 아닌 살인술이므로 마타주로는 애초부터 검술사로서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 그럼에도 마타주로는 에도에 있었던 무렵, 호위무사 일이나 도장 격파를 거듭함으로써 간신히 제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뽑으면 베기 위하여 벤다. 이것은 업이다.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어려웠다. 베고 싶어서, 죽이고 싶어서, 마타주로는 베고 또 베었다.
분별없이 벨 때마다 점점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만 갔다. 그러자 어느새, 당연한 듯이 마타주로는 사람 베기를 생업으로 삼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밤의 세계에서 참수인 마타시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 그러하기에...
그러하기에 마타주로는 무익한 살생이란 말을 뱉은 놈의 정신머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살생에는 무익도 유익도 없다. 살인은 어떤 경우라도 살인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문을 위해, 명예를 위해, 정의를 위해, 의리와 인정을 위해, 그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임에 틀림없다. 어떤 이유가 있을지라도 살인은 무조건 금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이것은 괜찮고 저것은 나쁘다는 말 따위를 해봐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 "오호라. 한창 일을 치르는 중이면 감시도 할 수가 없을 테지.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손녀는 그 색에 동한 산원숭이 밑에 깔려있다는 얘기로군. 흠, 그럼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할까."
마타주로는 소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노인은 당황하여 마타주로를 보았다.
"그, 그럴 수가. 무사님... 어, 어서."
"내게 지시하지 마시오. 붙어서 씨근대는 중에 덮치면 당신 손녀의 목까지 날아가버려. 그래도 좋은가."

- "흥, 악귀인지 범인지 그런 악한에게 더럽혀졌는데 그래도 산채로 되찾고 싶은 건가. 돌아와 봤자 그 흠집 난 물건, 소용도 없을 텐데, 색시로 받아줄 데도 없겠고."
노인은 원숭이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고헤이... 라고 했던가."
"예, 예에."
"당신, 내가 무섭지 않나."
"그건..."
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어제 일이다.
마타주로는 열흘 전쯤 고개에서 건진 유랑가녀(流浪歌女)가 보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숙박촌 외곽의 허름한 밥집에 들어섰던 것이다. 계집을 동반하면 노중(路中)의 위장이 된다. 그래서 마타주로는 곧잘 여행하는 여자를 속였다. 거치적거릴 때는 죽이면 그뿐, 그렇게 생각하자 낚는 것도 편하게 느껴졌다. 허나, 들어간 가게는 어지러웠고 한가운데에는 실성한 듯 넋이 나간 노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타주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노인, 즉 뒤에서 떨고 있는 영감은 뛰어와 매달렸고, 엎드려 빌며 눈물로 애원했던 것이다.
무사님, 무사님, 부탁이 있습니다요.

- 그나저나...
'거슬리는 물소리로군.'
여자를 안고 있는 듯한 기척도 없다.
"영감, 이야기에 거짓은 없겠지."

- 마타주로는 비탈을 내려갔다.
'죽여주마.'
죽여주마. 죽여주마. 죽여주마.
살의가 솟구친다. 살육의 열락은 순간의 흥분에 있다.
근육의 수축과 해방, 그 간격과 기세.
서서히 고조되어 찰나의 순간 정점에 달하며 모든 것이 끝난다. 비탈 끝에 내려섰다. 한 발을 내딛는 그 보폭이 생사를 가른다. 그러하기에 진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 '있다.'

망념이다. 덧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망념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오호라.'
경계하느라 기척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인가.

- "우습게 보다간 매운 맛을 보게 될걸. 피라미는 썩 비키시지."

당돌한, 그러면서도 촉촉한 목소리가 내실까지 도달했다.
그리하여 그 여자, 유랑가녀 오긴은 내실까지 들어온 것이다.
비쳐 보일 듯 새하얀 살결이다. 갸름한 눈매. 그 눈가가 발그스름하다. 미쳐 날뛰던 고산타는 그 자리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의 등장에 한순간이지만 이성을 잃었다. 여자는 고산타를 보자 꽃봉오리처럼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 "참으로 정중한 응대로군요. 허나 저는 이곳의 두목 한 분께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랫것들은 잠시 물려주실 수 없을까요."

"뭐가 어째!" 하고 짖으며 부하 하나가 비수를 뽑았다. 여자는 샤미센을 스윽 치켜들었다.
"어머나,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하긴 뭐,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만요. 그렇다 해도 여러분은 주먹세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흑달마 일가잖아요. 저기 계시는 분은 지옥의 도깨비도 맨발로 내뺀다는 고산타 두목 아니신가요. 설령 내가 도적이라 한들 계집 하나 상대로 이기지 못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자에겐 빈틈이 없었다.
 
- "귀호와 마타시게, 두 놈을 다 해치우는 건 어떠신지요."

오긴은 속삭이듯 말했다.
오호라, 그것이 너의 목적이었구나 싶어 고산타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오긴은 고산타의 손을 빌어 자신의 원수를 처단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고산타는 바싹 다가선 계집의 하얀 얼굴을 응시하며 그리 뜻대로 풀릴 것 같으냐고 말했다.
오긴은 갸름한 눈을 가늘게 뜨며 "풀릴 겁니다, 틀림없이"라고 지껄였다.

- "마타시게라는 사내는 말이지요, 분명 강하기는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다 발도술 같은 것이라서요. 맞닥뜨리는 순간의 일격만 피할 수 있다면 어려움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랍니다. 어떤가요, 두목?"
'칠십 냥이라.'
고산타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검술 따위는 어차피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 고산타의 생각이었다. 이 태평세월에 칼을 뽑는 자란 무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협객인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죽도를 휘둘렀다 해도, 사람을 벤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일인지를 무사 대부분은 모를 수밖에 없다. 허나 고산타 일당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실천은 이론을 능가한다. 마타시게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무사의 칼놀림이라면 쉽게 피할 수 있다. 그 반대로 무사 쪽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공격에는 한없이 약한 것이다.  

- "참, 그렇지. 두목, 이를테면 귀호와 참수인을 맞붙여 이긴 쪽을 두목이 처치한다는 것은 어떠신지요."
오긴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 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그것도 실로 고산타의 기호에 맞아떨어지는, 주도면밀하고도 비겁한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 문을 열고 조금 지나, 오두막 구석에 그 아쿠고로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아연했다.
설마 정말로 그 거친 사내가 죽었을 줄이야. 다도코로 주나이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나이는 사고(思考)를 거듭했다.
분명, 아쿠고로는 그 백장속 사내가 말한 대로 죽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처럼 비천한 자의 간언(諫言)을 덥석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 '그 사내.'
역시 베었어야 했나. 허나.
'객사에선 베지 못한다.'
그렇다면 뒤쫓아 가서 어떻게 해서든 없애버렸어야 했다고 주나이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근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고작해야 떠돌이 걸승이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한들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터.
'허나.'

- 그 사내가 주나이를 찾아온 것은 해시를 지났을 즈음이었다.
한 달 만에 온 이즈였다.
그러므로 그 시각, 주나이는 이미 느긋하게 탕에 몸을 담그고 밤술도 거나하게 즐긴 후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여름이라 하기에는 아직 일렀어도 조금 후덥지근했다. 그래서 장지문을 조금 열어둔 채 주나이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 짤랑.
방울 소리가 들렸다.
철 이른 풍경(風磬)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짤랑, 하고 소리가 났다.
가깝다. 주나이는 몸을 일으켰다.
장지문이 스윽 열렸다.
"웬 놈이냐!" 

 

-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곳에서 실례이옵니다만, 어허, 소생은 백파(白波)가 아니올습니다."
창으로 들어온 것은 머리를 행자두건으로 싸맨 백장속 사내였다.목에 시주함을 걸고 손에는 요령을 들고 있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지니지 않은, 한눈에도 무방비로 보이는가벼운 차림이었다. 이런 풍모의 도적이야 없을 테지. 그래서 주나이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인간이 아닌 겐가...'

그렇게 물었다. 사내는 당돌하게 씨익 웃더니, "보시다시피 걸식 어행사입지요" 라고 말했다.

- 어행사라면 제마 주술 부적을 팔고 다니는 승려 차림의 걸인을 이른다.
보아하니 그러한 차림새이기는 했다.

- 주나이는 일어섰다.
이 어행사, 입으로는 모른다고 하나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이대로 살려두어도 될 것인가. 지금 당장... 
짤랑.
사내는 요령을 울렸다.
"잠행임에도 그 차림새, 신분이 낮은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죠. 지나치게 무도한 처사를 일삼으시면 아무리 높은 분이라도 천벌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신령도 부처도 없으나 원한이 사무치면 요괴도 생기고, 눈물이 응어리지면 귀신도 생기지요. 아무쪼록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사내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주나이는 일각이 족히 지나도록 사고를 거듭했으나 결국은 낭패였다.

- "아, 그러니까, 도라... 아니, 아쿠고로라고. 아쿠고로는 처음부터 죽은 척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마타주로가 흑달마를 베는 그 찰나를 노린다는 계획이었지. 아쿠고로는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마타시게는 누이가 고용살이 하러간 곳의 식솔을 몰살한 원수라고.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그때도 생각했다더구먼. 그리고 마타시게 정도의 실력자를 쓰러뜨릴 사내는 달리 없지. 마타시게의 목은 날아가서 그대로 못에..."

 

- '춤추는 목.'

모모스케는 이미 나무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도모에가후치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진상 따위, 모르는 것이 나았다...

 

- <마이쿠비>


- 똑같이 근면하게 일해도 평생 운이 따르지 않는 자도 많이 있으며, 아무리 삼가고 바르게 살아도 이 세상에서는 언제 어느 때 어떠한 재앙이 들이닥칠지 알 수가 없다. 나이 먹고서 식솔에 둘러싸여 건실하고 정정하게 살 수 있는 것이 그저 행복임을 시바에몬이라는 영감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 그런 성실성 하나가 장점인 듯한 시바에몬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영감, 멋을 아는 풍류인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시골 농사꾼치고는 학식이 있었고, 어디서 익혔는지 읽고 쓰기도 무척 능했으며, 인품도 온후했기에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 어깨에 탈이 조금 나서 은퇴한 이후로는 오로지 문인묵객(文人墨客) 흉내를 내며 하루 온종일 마루에서 차를 마시거나 시(詩) 한 수를 지으며 유유자적 살고 있었다. 에도나 교토의 객이 마을을 방문할 적마다 크게 기뻐하며 집으로 불러들여 대접하고는 문화나 풍속 견문담을 즐겨 들었다. 요미혼과 에조시 류도 많이 구하여 이 또한 자주 읽었다. 아들도 손자도 자신을 본받아 착실하고, 증손도 태어났으니 이 세상에 걱정거리란 무엇 하나 없다... 시바에몬은 그러한 얼굴로 살고 있었다.
닮고 싶다, 시바에몬 영감처럼 늙고 싶다고 누구나 입을 모아 말했다.

- "다시 수사해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만약 여기서 이대로 사건이 매듭지어지면, 그래서 혹여 그 살인귀가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은 평생 오라를 받을 일이 없을 터이지. 그리 되면 손녀가 고이 잠들지 못하오. 진범이 벌을 받기 전에는 손녀가 성불하지 못할 게요."
관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이르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시바에몬, 그대의 의견은 실로 지극히 타당하네. 우리 또한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손녀를 잃은 그대의 심중을 헤아려보면 연민의 정을 억누르기 어렵다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시게, 시바에몬. 만약 진범이 교토 지방에서 흘러 들어온 살인귀가 아니라면, 그때는 그대가 사는 이 마을의 백성 중에 진범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세." 

- 시바에몬은 숨이 멎는 듯했다.
인형극을 보러온 자들은 모두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원래 작은 마을이니 외지인이 들어오면 금세 알게 된다. 축제가 있는 밤에는 대처와 가까운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오지만, 그래봐야 머릿수란 뻔한 것. 섞여 있는 이는 모두 다 어디어디의 누구누구로 정체가 확실한 자들뿐. 어차피 괭이는 들어도 날붙이는 들지 못하는 자들뿐이다. 
그 외에는 인형극을 하는 이치무라 극단 사람들밖에 없다.
이치무라 극단은 이미 십 년 전부터 여름마다 가설극장을 세우는 친숙한 극단이다. 단장인 마쓰노스케는 번주(藩主) 님도 배알하고 있다는, 이른바 공인받은 연기자였다.

- 의심할 여지는 없다.
진범은 그 속에 있지 않다.
아니,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지인과 혈족을 의심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손녀를 죽인 악귀축생은 외부에서 들어와 외부로 달아난 것이 틀림없다. 마을 안에 있지 않다면 그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이리라. 살인귀든 마물이든 관리에게 맡길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시바에몬은 충분히 납득했기에 깊숙이 머리 숙여 비례를 사죄했다. 관리는 그 주름진 얼굴을 보고 천망회회소이불실이라고 했으니 진범은 반드시 죗값을 치를 것이라고 차분히 달래듯 고한 다음, '부디 낙담하지 말고 어서 기운을 차리도록 하라' 며 말을 맺었다.
 
- 도쿠시마 번주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인형사 이치무라 마쓰노스케의 저택에 괴이한 일이 발생한 것은 역시 가을 문턱 즈음이었다.
인형고(人形庫)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라.
처녀 인형이 혼자 걸어 다니더라.
머리가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라.

- 딱히 기이할 것은 없다.
인형에게 생명은 없다. 그러나 정기(精氣)는 있다.
인형 장인이 만들어 넣는 것인지 인형사가 불어넣는 것인지 씌는 것인지 생겨나는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 정기는 있다. 그러니 인형을 몇 년이나 대하고 있으면 이것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 오히려 생소할 듯 싶은, 그런 기분이 들게 되기 마련이다.

- 이를테면,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놀리고 있노라면 차츰 자신이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지 인형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어느 쪽이라도 무방할 것 같은 경지에 이른다. 
그 선까지 가지 않으면 참된 꾼이 아니다.

- 이를테면, 처녀인형을 놀린다고 치자. 놀리는 마쓰노스케는 물론 처녀가 아니다. 그러나 인형은 의심할 바 없이 처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형이 갖추지 못한 점은 움직이는 힘뿐인 것이다. 처녀로서의 혼은 이미 그 형상에 있다. 그러므로 힘을 내고 있는 것은 마쓰노스케이지만, 조종하고 있는 것은 인형이라는 얘기가 된다. 인형극이란 인형을 이용해 조종자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형이 연극을 하기 위해 조종자의 힘을 빌리고 있을뿐이다. 주역은 인형인 것이다. 

 

- 불사(佛師)가 조각을 하면 단순한 나무도막이 영험한 불상이 되지 않는가. 불상은 나무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부처의 모습을 띠면 영험을 보인다. 혼은 형상에 깃드는 것이다.
인형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복덕이야 없겠으나 말하고 우는 정도는 한다. 모종의 힘이 더해지면 걷기도 하리라. 
딱히 기이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 마쓰노스케가 우울한 이유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 여름부터 어언 석 달, 마쓰노스케 저택의 별채에는 어떤 분이 몸을 숨기고 계신 것이다. 그분이 어느 곳의 뉘신지, 어찌하여 이아와지라는 변경에 은둔하고 계시는지, 마쓰노스케는 일절 듣지 못했다. 단지 '존귀한 분이니 아무쪼록 무례와 비례를 범하는 일 없이 성심성의를 다해 모시도록 하라' 는 명을 받았을 뿐이다.
명령을 내린 이는 단슈(淡州)의 지배자 이나다 구로베였다.
 
-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번주 하치스카 공은 인형극에 매우 깊은 이해심을 가진 듯했다.그러나 성대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물론 성대도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마쓰노스케가 감지하기에 성대는 오히려 인형극 따위는 귀족의 도락일 뿐이라며 뒤에서는 얼굴을 찌푸릴 듯한, 그런 구석을 갖고 있었다. 아와에는 쪽(藍)이며 소금 같은 재원이 있으나, ...
 
-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도자에몬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서늘한 음색의 여자 목소리였다. 마쓰노스케가 놀라서 쳐다보니, 장지문 너머엔 하녀인 오긴이 앉아 있었다.
 
- 도자에몬은 몸이 굳어 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저 아이, 보시다시피 시골내기 같지 않게 말쑥한 용모이나, 그래 봐야 따지고 보면 관동의 인형사 딸로 이름은 오긴이라고 하지요. 외양은 세련되어 보이지만 그저 착실한 게 장점인 시골처녀입니다. 며칠 전에도 밤에는 인형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을 정도이지요."

- 다시 말해 지금 군담(軍談)을 펼치고 있는 것이 너구리다. 너구리라...
간베는 팔짱을 꼈다.
소문에 따르면 그 너구리는 실로 멋스럽고 달통한 데다 풍류인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 까닭에 평소부터 그러한 면을 무척이나 동경하고 있던 시바에몬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된 것이리라.

- 분명.
그 너구리로 자처하는 노인은 잡배(雜俳), 광가(狂歌) 등에도 조예가 깊고 서화 골동류에도 무척이나 박식했다. 악기와 춤 또한 상당히 능했으며 색도(色道)에도 열성을 쏟았던지 화류계의 지식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극을 즐기는 듯, 에도와 오사카에서 선보인 고금의 연극은 거의 다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그 보람이 있어, 오사카 일대에서는 시바에몬이 아닌 시바이몬 너구리로 불린다며 큰소리쳤다 한다. 
듣고 또 들어도 바닥나지 않는 그 갖가지 매력적인 이야기에 시바에몬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보고 들은 일처럼 마음 설렜던 것이다. 궁벽스러운 시골의 호호야 눈에는 그 신비한 노인이 백삼십 년을 살았다는 말도 말짱 거짓은 아닌 것처럼 비쳤으리라.

 

- 아니, 그 무렵 시바에몬은 이미 시바에몬 너구리가 진짜 너구리임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식솔들 또한 시바에몬 너구리의 그 표표하고도 차분한 행동거지나 우직한 응대에 차츰 말려들어, 어느새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너구리이든 사람이든 더는 상관이 없게 된 듯하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그 말이 맞을 테지'하고, 분위기 상 시바에몬 너구리는 실제 너구리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던 것이다. 


- 그리하여, 소문은 점점 퍼져나갔다.
 

- 줄거리는 재미있고 인형도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형극 자체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굳이 인형을 조종할 바에야 인간이 분장하여 연기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이나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다고 한다.
'뒤에 있는 대잡이가 거치적거린다. 흑의가 거치적거린다. 아니 보인다는 것이 암묵적 약속이라 우긴들, 실상은 그곳에 있다. 실제로 보이고 있지 않느냐.'

- 이나다의 주장은 이러하다. 원래 움직일 리 없는 나무 인형 따위를 억지로 움직이려 용을 쓰니 그렇게 묘한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대잡이든 흑의든 스스로 분장하여 자신이 연기를 하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닌가. 얼굴이 변변치 못하면 가면을 쓰면 되고, 반대로 인형을 감상하고 싶다면 그저 두고 바라보면 된다. 그 편이 더 찬찬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멈추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섭리가 아닌가. 
이나다는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보편타당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그에 관해서 주위의 동의는 좀처럼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애당초 풍류를 모르는 사내인 것이다.
허나, 그것은 한편으로 인지(人智)를 초월한, 이치가 통하지 않는 신비를 강하게 원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리라.
 
- 그래서 이나다는 서둘러 간베를 불러들여 아와지 시바에몬 너구리의 풍문에 대해 탐문하고 그 진위 여부를 똑똑히 확인하라고 통고한 것이다. 만약 소문이 허위라면 반드시 그 가면을 벗겨 세상사의 이치를 천하에 내보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치를 내보이라고 한들...
어떻게 해야 할지.

- 간베는 당혹스러웠다.
이나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자유지만, 이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윗분의 의향이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며 쳐들어가봤자 이 일만큼은 어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일단 시바에 너구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잡아들여 몰아세웠는데 만약 사람이라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진실로 너구리라면 나리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 
득도 없지만 해도 없다. 그런 소문은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다. 남의 소문도 오래가야 며칠, 가만히 있어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헤집어봐야 손해만 볼 뿐이다. 

- 순식간의 일이었다.
간베는 시바에몬 너구리의 그때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열린 동공과 부푼 코. 그것은 진실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던 것이다.
이히익! 엄청난 쇳소리로 절규하며 시바에몬 너구리는 뒹굴다시피 마당으로 나갔다.

-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단말마는 사람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시바에몬은 고함을 질러 집안사람들을 불렀고, 너구리를 뒤쫓아 뜰로 나갔다. 간베는 칼에 손을 댄 채로 방안에 멈춰서 있었다. 개를 베려고 했던 것이다.
'이미 늦었나.'


- 역시 너구리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시바에몬이 입을 막은 채 비틀거리며 서 있다. 두 마리 개가 낮게 으르렁대며 어슬렁거리고 있다. 상자를 실은 짐수레 앞에는 안색이 창백해진 모모스케가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땅바닥에는 커다란 너구리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 스모토 성 외곽에 있는 이치무라 마쓰노스케 극단의 상설무대에 도쿠시마 번주인 하치스카 공이 잠행으로 방문한 것은 가을도 깊어진 시월 중반의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왕림에 마쓰노스케는 당황했다.
잠행이란 단지 공무가 아니라는 것일 뿐, 영주 나리쯤 되면 수행 사무라이가 줄줄이 따라붙고 으리으리한 가마를 타고 온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성대 이나다 구로베까지 동행했으므로, 잠행이어야 할 행차는 당연지사 이목을 끌었다. 

 

- 스모토 성에 입성하실 때 불현듯 마음이 내키셨다고 하는데, 갑작스레 '영주 나리 인형극 희망' 이라는 소리를 들어봐야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황감하기 그지없다고 한 것은 좋았지만, 마쓰노스케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대라고 해도 영주 나리의 눈에 들 만큼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저택 뒤편의 부지 내에 세운, 거의 연습용에 가까운 허술한 것이다. 애당초 영주의 행차를 받아들일 준비 따위는 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실수는 일절 용납되지 않으니 참으로 죽을 맛인 것이다. 
길 청소와 관람석 정비부터 식사 마련까지, 그야말로 동분서주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며, 평소 푸념 따위 하지 않는 마쓰노스케도 한 마디 투덜거렸다고 한다. 

- 부지의 둘레에 진막(陣幕)을 치고, 특별히 마련한 붉은 양탄자 관람석 중앙에는 금 병풍을 둘렀다. 그 앞에 도쿠시마 번주가 위엄있게 앉고, 그 옆에는 스모토 성 성대가 자리했다. 좌우로 사무라이가 줄줄이 열좌(列坐)했으니, 경호 사무라이에 하인과 허드레꾼까지 포함하면 백 명 남짓한 사람이 찾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뿐 아니라, 이 고장 일반 백성도 보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인형극은 사무라이만의 것이 아니라는 자비로운 번주님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만전의 경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쓰노스케가 인형극을 연기하고 있는 그때에...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 벌어졌다.
 
-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 사무라이가 너구리... 였다는 결론이다.
번주는 이나다로부터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이어 마쓰노스케, 간베, 시바에몬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다음, 사무라이의 시신까지 직접 검분했다. 
시신은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이나다는 송장을 보고서 몇 번이나 실신할 것 같았다고 한다.
아마도 죽은 사무라이가 진짜라면 그것은 경악할 일이리라. 그럼에도 이나다는 너구리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망언을 전혀 믿지 못하는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설령 탈 없이 지나가려면 그것이 너구리인 편이 낫다고 할지라도. 
간베와 시바에몬은 송장이 언젠가 반드시 본성을 드러내어 너구리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아와는 너구리의 본고장이라지.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자랑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송장이 언젠가 너구리로 변할 것이라 한다면, 변할 때까지 기다려보지 않겠는가? 한 달을 두어보고, 그리 해도 송장이 사람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때 다시 전의하는 것이 좋으리라."

- 연극을 좋아하는 번주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쓰노스케 이하 세 사람은 전전긍긍하며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송장은 매장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덧문짝에 뉘어져, 엄중한 경호 아래 마쓰노스케 저택의 별채에 안치되었다.

-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송장은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너구리의 환술이었다. 둔갑했다고 생각한것은 홀렸던 것뿐인가... 너구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시바에몬마저 그리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두려워 떨고 있었던 점에 관해서는 성대 이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나다는 할복할 각오였다고 한다. 

- 그리고 스무 닷새 후.
송장은 홀연히 너구리 모습을 드러내었다.
  
- 해(亥)월 모일, 단슈 스모토에서 도쿠시마 번주, 인형극을 관람하실 제, 교토에서 사람을 베고 다니던 조지로라는 이름의 젊은 사무라이, 실성하여 관람석으로 뛰어들어 행패를 벌이고 맹견에게 물어 뜯기어 죽었는데, 그 송장, 사후 스무닷새를 지나 너구리의 모습으로 변하니 뭇사람들이 크게 놀라다. 그 조지로라는 젊은 사무라이, 너구리가 둔갑한 마물이라면... 
본인은 어드메에 있는 것이뇨...

- 이자나기 사당의 뒤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
막 만들어진 봉분이 있다.
그 주위에 땀을 닦는 네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한 명은 행장 차림의 젊은이, 곰곰궁리 모모스케, 곧 야마오카 모모스케이다.
또 한 명은 산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남보랏빛 기모노에풀색 겉옷을 입은 젊은 여인. 이치무라 가의 말쑥한 하녀, 산묘회 오긴이다.
그 옆으로는 항라 백장속에 시주함을 걸고 머리는 행자두건으로 싸맨 떠돌이 어행사. 요괴 로쿠에몬 너구리,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가 있다.
마지막 한 명은 세로줄무늬 기모노에 갈색 하오리를 걸친 자그마한 노인, 신탁자 지헤이. 그렇다. 바로 시바에몬 너구리, 그 인물이다.

웅크리고 있던 지헤이는 손에 든 삽으로 봉분 주위를 두드리더니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오긴이 짊어진 급(笈)에 꽂혀 있던 피안화(彼岸花)를 뽑아 살며시 놓았다. 
짤랑, 마타이치가 요령을 울린다.
"어행봉위!"
모모스케가 합장하며 묵도를 올렸다.
 
- "고칠 길이 없었던 걸까."
"낫지 않을 거요. 나으면 낫는 대로 또 괴롭지. 해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도 받을 수 없지. 여자아이를 머리부터 쪼겠는데, 제정신으로 있으라고 하는 게 무리지." 
마타이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지" 하며 지헤이는 허리를 폈다.

- "이 인간은 오와리에서 왔어. 오와리라 하면 어삼가(御三家). 그다음은 말하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롭지."
 
- 오긴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모모스케의 입을 막았다.
"눈치가 없으셔, 글쟁이 선생. 이 몹쓸 병 걸린 너구리는 말이지, 마쓰다이라 조지로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라고. 선대 쇼군께서 들놀이에 나서셨을 때 농가 처녀에게 손을 대어 낳은 자식이라고들 하지만, 뭐, 사실은 모르는 거지, 마타 씨?" 
음, 하고 마타이치는 말했다.
"부모가 누구든, 집안이 어떻든, 그런 거야 상관없지. 사실이야 알지도 못하고, 알아본들 자신이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심히 번거로운 내력이 어른거리면 뒤틀려버리는 일도 있기 마련이지. 이놈의 부모는... 뭐, 신분이 낮은 분이야 아니겠지만, 그분인지 어떤지는 몰라. 허나, 이 녀석은 그렇게 생각했지. 굳게 믿고 있었어. 추종자 무리가 이 녀석을 내세워 단물을 빨려고 했다고. 이용하려 했던 거지." 

- "어차피 악몽인 거지.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있나. 욕심에 눈이 먼 추종자들이야 치켜세울 만큼 세우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손을 놔버리지."
쿠웅, 하고 지헤이는 떨어지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이 녀석의 뭔가가 뒤틀려버린 거라고. 자신이 쇼군이 될 수 없는 것은 천한 모친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 여겨, 몸을 숨기고 있던 모친을 찾아내서 베어버렸어. 그 후로는 패악을 거듭했지. 이 녀석은 강제로 꿈을 꾸게 되었고, 줄곧 그 꿈속에서 살았어. 높으신 분들께야 이미 짐이지. 그야말로 혹이라고."

- "조지로는 미쳐 날뛰며 흉행을 거듭했고, 오사카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붙잡혔지. 허나, 아무런 손도 쓸 수가 없었지. 이 녀석은 이걸 가지고 있었거든."
마타이치는 시주함에서 서찰을 한 통 꺼냈다.
접시꽃 문장이 박혀 있었다.
"보, 보증문서입니까? 그렇다면..."
"진짜인지 어떤지는 몰라. 하지만 이건 사무라이들에게는 특히 더 각별한 것이지. 이걸 마주하게 되면, 녀석들에게는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것조차 허용되질 않는다고." 

- 마타이치는 보증문서를 쫙쫙 찢더니, 더 잘게 찢은 다음 휙 날려버렸다.
종이 조각이 팔락팔락 춤추었다.
"내용은 보지 않았어.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물건이니까. 게다가 이런 물건, 만들려고 들면 언제든 만들어내니까."

- "이봐, 어행사. 이만큼 죽자고 뛰었는데 삯은 도대체 얼마나 되나? 잔돈푼이면 용서하지 않겠어. 나는 밑천이 들었거든. 생포한 너구리를 후다닥 길들이고, 붉은 개도 두 마리 길들이고, 스스로 너구리인 척하고, 게다가 엽사한테서 막 잡은 너구리를 통째로 두마리나 샀다고. 알겠나? 적은 액수는 듣지도 않겠어. 앞으로 한바탕 늘어진 팔자로 살도록 해줄 수 있겠지?" 
마타이치는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모모스케는 늘 보여주는 악당들의 교묘한 솜씨에 그저 감탄한듯 고개를 저었다.

- 편한 역할이었지, 하고 마타이치가 말했다.
지헤이가 닥치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이봐, 마타, 말은 잘한다. 그러는 네놈은 사무라이의 침소에 숨어들어서 웅얼웅얼 경을 읊었을 뿐이지 않나? 그딴 건 바보라도 한다고."
"무슨 허튼 소리, 당신이야말로 타고난 너구리 영감이잖소. 본모습으로 놀았으니 불만은 없을걸?"

 

- "어이, 마타이치! 애당초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의뢰를 받아들인 건 바로 너라고. 뭘 그리 뒤에서 꼼지락거릴 일이 많나? 시체 하나 바꿔치는 데 며칠이나 걸리는 거냐고."
송장은 썩어가지, 간이 콩알만해졌었어, 라고 지헤이는 말했다.

"닷새만 더 지났으면 그 노인장도 관리도 사형에 처해졌을 거다. 복수하기 위해 유족을 죽이면 어쩌자는 건지."
이건 복수가 아니우, 하고 마타이치가 대답했다.


- "이봐, 마타. 웬만하면 자백해. 잔머리 모사꾼한테 부탁한 자가 누구야?"
마타이치는 싱긋이 웃었다. 모모스케가 말한다.
"부탁한 사람은 신분이 높은 분이군요. 마타이치 씨."
"선생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번주는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날 스모토 성에 들어가시면서 갑자기 인형극을 청하셨다는 것은 이상하지요. 시신이 변한 날도..."

 

- 뭐, 자세히 묻지 말아주십쇼, 하고 마타이치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의뢰 상대는 사정이 있어 밝히지 못하겠소. 하지만 이건 살인귀에 대한 복수가 아니오. 이 세상에서 사람 하나를 지워달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지워달라는 의뢰였어. 살아있으면 비극이 계속되고, 죽으면 죽는 대로 우는 자가 있지. 그러니 시체도 남아선 안 되고, 죽었다고 알려져서도 안 되는 작업, 판도 커질 수밖에. 어쩌면 죽이지 않고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번거로운 너구리 덫까지 생각해냈건만, 이 녀석은 이미 구제불능이었어."


- 마타이치는 슬퍼 보이는 눈으로 봉분을 보더니, "정말 선대 쇼군의 혈육이라 해도, 어차피 너구리의 후예임에는 틀림이 없지"하고 말을 맺었다.
짤랑 요령이 울렸다.


- <시바에몬 너구리>


- 가가 지방에 오시오가우라라는 해변이 있다.
오른쪽으로 아마고젠 곳, 왼쪽으로 멀리 가사 곶에 임해 있는, 지극히 조용하고 풍광 수려한 모래사장이다. 거친 바다를 등지고 해변에 서서 멀리 시선을 던지면, 살포시 두 자락으로 나뉜 사구(沙丘)가 꼭 낙타가 엎드린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로 들어가 일직선으로 쭉쭉 걸어가면 이윽고 바다 내음도 파도 소리도 사라지고 길 한쪽으로 울창하게 잡목이 우거지는데, 그 쉼없이 이어지는 그늘을 벗어날 즈음 봇돌을 촘촘히 얹은 커다란 너와집과 맞닥뜨린다. 
팔백 평이 넘는 광대한 부지 정면에 내림 열 간(間)은 족히 될 듯한 으리으리한 본채가 떡하니 서 있고, 그 밖에도 아래가 빈 이층 높이의 광이 네 개 정도에 마구간이 몇 동이나 줄지어 있다. 대체 얼마나 거부가 사는 집일까 하고, 그 앞을 지나는 나그네는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 그도 그럴 것이...
그 저택에 살고 있는 자는 부자가 그리도 많다는 가가 지방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갑부로, 마정(馬政) 관리도 한 수 위로 여긴다는, 일명 시오노우라의 우마카이 초자, 바로 그 인물이다.

- 기르는 말의 수는 총이말, 공골말, 구렁말, 부루말, 월라말, 설아마(雪阿馬)에 태마(駄馬)와 명마까지 삼백여 필이 훌쩍 넘고, 본채 이층의 하인방을 메우고 있는 안살림을 돕는 이 또한 워낙 많아 주인조차도 그 얼굴을 다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 하니, 정말이지 대단한 지체가 아닐 수 없다.


- 이 정도의 부는 도저히 당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마카이 초자는 지금이야 그 이름대로 말을 키우고 길들이며 팔아치우는 말장수이기는 하지만, 선대까지는 이른바 부농이어서 단순히 시오노 초자라 불렸다고 한다. 
그 부자의 사위가 말 다루기에 능했으므로 선대의 부를 이용해 말 장사를 시작, 그 부를 두 배 세 배로 불린 것이다. 현재의 주인이 되고서 창고가 셋이나 늘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마카이 초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주인 이름은 이대 초지로라고 한다.
 
- 이 초지로, 근본을 따지면 딱 이십 년 전쯤 여윈 말 한 필을 이끌고 비실거리며 이 땅에 흘러들어온 마도위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의 이름은 오토마쓰, 또는 야조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 이름이 맞는지 아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이 땅에 눌러앉은 그 무렵에는 또 다른 이름을 자처했다는 자도 있으므로, 어찌 되었건 날 때부터의 이름은 아니리라. 태어난 고향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신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귀인지도 모를 타관바치가 과연 어떠한 연줄을 잡았는지, 어떤 자비심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떠돌이 마도위는 선대 초지로 곁에 몸을 두었다.

 

- 그러나 이 사내 근본이 착실했는지 노는 재주가 없는 벽창호였는지, 사위로 들어가 초지로라는 이름을 이어받고 난 후에도 거들먹대거나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유흥에 돈을 낭비하는 일도 없이, 전과 똑같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했다. 게다가 그저 부지런한 것만이 아니라 아무래도 장사에 재주가 있었던 듯, 한 해에 창고 하나, 다섯 해에 창고 둘과 본채까지 신축할 정도로 부귀를 얻었다. 단 오 년 만에 시오노 초자 이대는 우마카이 초자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갑부에게는 왕왕 악독한 수전노라는 평판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 초지로는 어떻게 된 까닭인지 아주 씀씀이가 좋고 신심도 깊어보시도 곧잘 베풀었다. 일대 말꾼들의 우두머리로서 그 신망 또한 두터워 의지하는 자도 존경하는 자도 많았다.

- 특히 매월 열엿샛날이 올 때마다 우마카이 초자의 떡 보시라고 하여, 온 고을의 가난한 자를 긁어모아 먹어라 마셔라 거하게 베풀었던 것이다. 이 보시의 소문은 먼 지방까지 퍼질 정도였다. 그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굶주린 자, 궁한 자가 해변까지 줄을 이어 그야말로 문전성시처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것이 딸과 아내, 그리고 장인에 대한 공양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 전해 듣기로, 십이 년 전 정월 열엿새 야부이리 날, 장인이었던 선대 초지로와 아내, 그리고 당시 여섯 살배기였던 딸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산적 떼거리에게 습격당했다고도 하고, 둔갑요괴 부류에게 저주를 받았다고도 한다. 십이 년이라고 하면 짧은 듯도 하지만 또 길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흐려진지 오래라, 진실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초지로가 아주 옛날, 한꺼번에 가족 전부를 잃었다는 것만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 초지로의 슬픔은 깊었던 듯하다. 이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범부였다면 억울한 불행에 화를 내거나 하늘을 원망하며 세상을 한탄해도 충분할 지경이었을 테지만, 초지로는 달랐다. '불행과 재앙이 들이닥쳤어도 자신의 평소 품행이 나빴던 것이 틀림없다. 상인이라고는 하나 오로지 벌기만 했을 뿐, 세상에 대한 감사가 부족했기에 그러한 재앙이 들이닥쳤다'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겸허한 사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쌓는 것은 죄업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 그렇다면 감사와 자비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사재를 쾌척하자. 초지로는 그러한 뜻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이후로 우마카이 초자는 번 돈을 풀어 다리를 놓거나 길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떡 보시는 십이 년간 다달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삼가 근신하고, 아무리 슬픔이 깊을지라도 이런 일은 좀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 그 때문인지 초지로를 생불이다 보살이다 하며 상찬하고 받드는 자도 적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마카이 초자에게 예를 다하면 복을 받는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이 광대한 저택 앞을 스치는 자는 문전에서 일단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린 후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 다만.
그럼에도 초지로가 부자인 것은 틀림없었고, 아무리 성인군자의 면모를 발휘한다고 해도 성공한 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으레 따르기 마련이므로 험담을 하는 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이 우마카이 초자, 조금은 의아한 면도 있었다.

- 이만한 부를 이루어놓으면 으레 별의별 소문이 떠도는 법이다. 허나 어찌되었든 초지로에 대한 험담을 주절대는 자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비교할 바 없는 재력 덕분일 수도 있고, 매우 뛰어난 장사 솜씨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적대하는 자가 지극히 적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마카이 초자는 그런 사내라고 한다.
 
- "장치가 되어 있는 무대는 거의 없소이다. 그보다 마타 씨. 오긴은 뭐하고 있수? 이번엔 도움 못 받는 건가."
"산묘회는 인형 머리가 상해서 머리 장인에게 갔어.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터라 이번에는 빠졌지. 어떠한 작업인지 모르지만 여자는 없어." 
"그런가. 그거 참 섭섭하군." 

도쿠지로는 곰방대에 담배를 채운다.
"오랜만에 그 인형 놀림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 아이, 재주도 볼만하지만 그 요염한 눈매가 아주 죽여주거든."

- 마타이치는 그렇게 험담을 뱉으며 무대의 곡예를 곁눈으로 보고선 재주가 용하다며 중얼거렸다.
"방하(放下)란 선종 스님이 말하는 방하라는 것하고 다른 겐가? 스님이 말하는 그건 뭔가를 버린다는 의미이겠지? 먹고살기 바쁜 광대가 뭔가를 버린다니 납득이 안 되는구먼. 아니면 저렇게다 던지기 때문에 방하라고 하나?" 
"그렇지 않수다, 마타 씨."

도쿠지로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 선종 스님의 설교에서 온 것은 맞을 테지. 우리가 지금이야 방하사라고 불리지만, 옛날에는 방하승(放下僧)이라고 해서 스님이었던 모양이더군."
"그럼 당신도 중인 거요? 소생과 같구려."

마타이치가 그렇게 말하며 싱글거리자 도쿠지로도 웃는다.

- "뭐, 방하라는 게 원래는 원악(猿樂)이라오. 칼이나 구슬을 저런 식으로 손으로 가지고 놀면서. 손재주인 거야. 이게 원악에서 전악(田楽)이 되었다는 모양이더라고. 그 후에 우리가 하는 환술 부류로 합쳐져서 대도예(大道藝)가 된 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종 승려라기보다 대륙에서 건너온 거라고. 원악이라고 하면 또 하타노 가와가쓰를 꼽지."
"그 탄마술이라는 것도 대륙에서 건너왔나?" 

마타이치가 묻는다.
"그건 내가 연구한 거고."

도쿠지로가 말했다.

- "마술이란 입마고복(入馬鼓復)이라고 해서, 이렇게 말의 입으로 스윽 들어가 궁뎅이 구멍으로 빠져나오는 환술이지. 원래는 대륙의 산악잡희인 모양이야. 말이 원체 커다란 녀석이잖아. 커다란 녀석 안에 작은 게 들어가니 재미가 떨어지지. 그래서 나는 그걸 조금 비틀어서..."
"그래서 탄마술인 건가? 교토에선 꽤나 짭짤했겠군. 그 명성이 에도까지 들려오던걸. 대체 어디의 누가 그런 걸 생각해냈나 궁금했는데 시오야 초지라는 낯선 이름을 쓰고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설마 그 초지가 과심거사의 환생이라고 칭송 자자한 주판꾼, 네 구슬 도쿠지로였을 줄은 이 마타이치도 생각지 못했다네." 

- 흥, 하고 마타이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성가신 이야기는 거절이야."
그러지 마시고, 하며 도쿠지로는 평상 위에 놓아두었던 주판을 딱 하고 튕겼다. 마타이치는 곧장 손을 뻗어 도쿠지로의 팔을 움켜잡았다.
"어허, 잠깐."
매섭게 노려본다.
"당신의 주판은 너무 위험해서 안 돼. 어떤 술법이 걸려 있는지 모를 물건이니 말이야. 금낭 같은 걸 슬쩍해버리면 나로선 완전히 망조 드는 게지."
마타이치는 귀를 막고 뒤에 놓여 있던 자신의 시주함을 손으로 더듬어 꼭 껴안았다.
"듣자하니 그 주판알을 튕기는 것만으로 금고 자물쇠까지 열린다던데. 서투른 도적보다 상대하기가 더 나빠. 무섭다 무서워."
도쿠지로는 주판을 허리춤에 꽂고 싱글싱글 웃으며 "그만하셔"라고 말했다.
"미륵삼천인 댁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네. 나야말로 그 세치 혀에 홀랑 넘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것 아닌가. 뭐,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게. 앞으로 사반각만 지나면 이번 일의 장본인이 돌아올 테니."  

- "철들 무렵부터 오로지 죽어라 일만 시켰던 모양이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속아 팔리면서 전전하기만 했을 뿐. 어디서나 심한 대우만 받고. 그래서..."
"거둬들인 건가." 

마타이치가 말했다.

- "저건 불을 먹고 잡고 부는 곡예야."
마타이치는 틈새로 내다본다.
머리가 크고 키가 작은 사내는 단상에서 샤미센 음색에 맞추어 종잇조각들에 잇따라 불을 붙여 우걱우걱 먹고 있다. 그러다 화르륵,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뜨겁겠다. 저건 속임수가 있나?"
"없을 거요. 요령이 있을 뿐이지. 아까 그 칼놀리기는 단련의 산물이라 수련이 필요하고."

- "당신의 환술은 어느 쪽이지? 요령? 연습? 아니면 장치?"
"뭐, 착각이라 할까."
도쿠지로는 그렇게 말하며 주판을 튕겼다.
오가 지방에서는 마법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사내다.

 

- "마타 씨는 그 혀끝으로 다른 이를 홀리지 않소. 말로 속이지 않소이까. 나야 이 주판알로 속이는 거지."
따닥.
흠, 하고 마타이치는 감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한 소리를 낸 다음, 의아한 얼굴로 말 궁둥이를 가볍게 쳤다.

"뭐, 모르는 바도 아니지. 세상사는 말한 대로 되는 법이니까. 말을 한 자가 이기는 거야. 빨간색을 흰색이라고 얼버무리는 거야 간단한 일이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을 삼킨다고 떠들어봐야, 이건 삼키지 못해."

- 마타이치는 슬금슬금 기다가 곧 일어서서는 무대 옆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단상은 어두웠다. 그때까지 불이 밝혀져 있었던 사방등도 제등도 꺼져 있고, 도쿠지로 앞에 있는 촛대만이 불안한 빛을 발하고 있다.
도쿠지로는 촛대에서 초를 들어, 기묘한 박자의 반주에 따라 천천히 그것을 움직였다. 뒤쪽은 검은 천으로 바뀌었다.  


- 따닥.
자라락.
관람석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그렇지, 그건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는 다루지 못하지. 아주 타고난 마도위였어. 말을 위한 제문도 얼마나 잘 읊는데. 낭랑하게 읊거든.
어?
아아, 말 매매 건이 결정이 되면 소젠님께 기도를 올리지. 소젠님이라 함은 말의 신이신데, 말이 건강하도록, 말이 일을 잘하도록, 건강하게 헌신하라고 소망을 담아 비는 게지. 

 

- 으음. ... 여기 대좌에 오시어 삼가 뵈옵고 비옵나니, 에비스, 대흑천, 복록수(福祿壽), 칠복신 내려서시고, 대신(大神)은 아마노사카호코의 신이시니. 거룩하신 천조대신, 천지신명, 대일여래님, 소젠님, 마두관음님, 백락천님, 오늘 하늘이 내리신 경사에 축문을 올리나이다. 
그다음에 말의 복을 이야기하지.
이게 말이지, 서투른 마도위 우두머리는 영 모양새가 안 난다고. 아아. 오토마쓰... 아니, 초지로 씨는 솜씨가 좋았어. 

- "그나저나 용케 알아냈는걸. 그 당시에는 몰랐을 텐데."
"거두어들인 약장수로서야 그런 일을 캐내볼 이유가 없지 않나. 게다가 확인하려고 해도 확인할 길이 없을 테고." 
"그러게." 

지헤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 "사실, 눈에 띄지 않았소." 

마타이치는 일어선다.
"책장수 헤이하치가 우연히 작년에 가가노토를 돌았는데 말이지. 해서 그 저택에도 출입했다더라고. 도쿠 녀석은 그래 봬도 만만찮은 책사거든. 얕볼 수 없지."
"뭐, 얕보지는 않지. 어떤 경우든 제 잇속은 챙기는 놈인 줄이야 알았지만, 결국 여행지에서 거둔 처자가 아까 말한 그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는 갑부 양반의 딸이었다는 얘기잖나." 

- "이봐, 어행사. 넌 어쩔 생각이야? 그 오초를 데리고 가면 되는 이야기 아닌가?"
"아니."
마타이치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헤이도 떫은 표정을 짓는다.
"참말로 갑갑한 놈일세.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냐고, 이 사람아. 여기는 뭐야, 그 십이 년 전에 초지로 일가가 습격당한 장소인가?"
맞소, 하고 짧게 대답한 어행사는 시주함에서 부적을 꺼내 절벽에서 뿌렸다.
 
- "이래저래 이야기를 모았는데, 녀석은 열흘 전에 말 한 마리를 잡았어. 쓸모도 없고 이제 와서 팔리지도 않을 늙은 말이었지만 죽여버린 거라고. 최근, 놈의 말이 잘 팔린다더구먼. 그래서 말이 마구간에서 죽지 않는 거라고."
"모르겠구먼. 그래서?"
"초지로의 얼굴도 보고 왔지."
"상처는?" 

지헤이가 묻는다.
"그런 건 없어. 목소리도 나오고 겁에 질리지도 않았어. 소문은 전부 거짓인 거지. 다만, 초지로는 병을 앓고 있었어." 
  
- 그 초지로가 신심이 두텁다고? 농담 작작하시오, 손님. 무슨 신심이 두터운데?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지만 말이지, 그따위 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아. 말을 말로 생각하지 않는, 그저 악식(惡食)이나 하는 놈이라고, 초지로란 놈은 말이지. 
음? '초' 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초지로란 말은 꺼내지도 마쇼, 메스꺼우니까.

- 그래도 말이지, 그건 물건 취급이야. 마도위가 말한테 할 짓이 아니라고.
우리처럼 말 다루는 마부는 말이지, 말을 짐승으로 생각하지 않거든. 그렇게 생각하면 말하고 잘 지낼 수가 없다고.
인마일체, 어디든 다 그럴 거라고.

 

- 에도에서 오신 분은 모를걸. 말을 기르는 백성은 말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지 않소. 나요? 원래 무쓰 출신이지. 북쪽이지만, 본채 안에 마구간이 있수다. 봉당에서 바로 이어지지. 내 마구간이라고 하는데, 정월에 다는 장식도 차별하지 않수다. 마구간에는 소젠님이 거하시거든. 정월에는 맛코모치라고 해서 말의 떡도 만들고, 집안에 할배가 있고 할매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말도 있지 않소. 그렇게 키우는 거지. 
마도위라면 훨씬 더 말하고 가깝지.

- 말을 다루는 것도 그래서 험하게 하지 않는다고, 팔고 사는 것도 그래, 물건이 아니라니까.
이 녀석들, 말이란 놈은 일하고 또 일하고 죽어라 일만 하다가 죽어. 길이란 길마다 걷고 또 걷다가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는 거지, 우리 마부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말은 웬만한 짐승하고는다르거든. 죽으면 고이 제를 지내지 않소? 정성들여 묻어서 말이지. 암, 친구가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지. 어떻게 내버려둘 수가 있겠어. 공양을 해야지. 
그러니 우리는 데리고 있던 말이 길에서 쓰러지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가져다 축생탑을 세워서 제를 올려, 정성들여서. 아, 왜, 가도를 가다보면 갈라지는 길마다 서 있지 않더이까? 그게 바로 그거요.
그건 말 공양이지. 원래 유서나 유래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우리처럼 말 다루는 자들한테 마두관음님은 말의 신령님이라고. 소젠님하고 똑같지.

- 사족을 못 쓴다고 들었수다.
너무하지 않소?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안 먹지.
손님, 말 먹어본 적 있소? 말뿐만 아니라, 에도 사람은 짐승고기를 먹소? 안 먹지 않소. 홍모인이 아니니까 거의 먹지 않지. 산촌 백성이야 곰이다 사슴이다 잡아서 먹지만 말이오. 짐승 고기를 먹는 건 비천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불심 있는 자는요. 그런 비린 것은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고. 
 
- 그러니 중개인이라면 또 몰라도 마바리꾼 사이의 평판은 나쁘지. 그건 퇴마(頹馬)가 씌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퇴마 모르나?
퇴마란 말이지, 악한 바람을 뜻해. 말이 걸리는 병 같은 건데, 뭐랄까, 돌풍이 화악 불어와 갈래길 같은 데서 맞닥뜨리지. 끌고가던 말이 그 바람을 맞으면 이렇게 부들부들 떨고 오른쪽으로 빙글 돌아가는데, 세 번을 돌면 죽어. 
얼마나 무서운데.
사람은 괜찮아. 말만 죽지.
이건 말이지, 바람 속에 등에 같은 벌레가 있어서 말의 코로 들어갔다가 똥구멍으로 빠져나온다고도 해. 콧속에 들어가 있으면 갈기가 바짝 선다고. 이렇게 빳빳하게 선다니까. 세 번 돌면 궁둥이에서 빠져나가는 거지. 그건 빠져나가면 말은 아주 시리코다마가 빠진 것처럼 허리부터 주저앉으며 풀썩 쓰러진다고.
나도 소싯적에 한 번 당했던 적이 있어. 벌레는 안 보였지만 말이지. 말은 죽어버렸어.
좋은 말이었는데. 뭔가? 꼼꼼하게 기록까지 하고. 퇴마를 피하는 방법? 별 걸 다 알려고 드는 손님일세.

- 이보시오, 퇴마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말의 귀를 잘라서... 뭐, 이건 임시방편이지만, 오른쪽으로 돌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왼쪽으로 돌린다고 하더구먼. 그럼 벌레는 편치가 않으니까 당황해서는 말한테서 나간다고들 하지. 나야 젊었으니까 몰랐지만서도. 
이 등에가 말이지, 보는 사람에 따라선 작은 여자라고 하더구먼. 히나 인형처럼 빨간 때때옷에 금으로 된 장신구를 두르고, 콩알만큼 작은 말을 타고서 팔랑팔랑 날아온다지. 
뭐? 요괴?
음, 요괴라고 할까.
듣기로는 이건 말가죽 벗기는 일꾼의 딸이라고 하더군.

- 그래, 가죽 벗기는 일꾼, 우리 마바리꾼도 전혀 제대로 된 대접은 받지 못하지만, 가죽 벗기는 일꾼이란 완전히 사람 취급을 못받지 않소? 그야 그들도 분명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지. 뭐, 천하다고 생각되는 거라고. 
에도란 곳은 그나마 좀 나아. 오골오골 먼지뭉치처럼 사람이 있으니까. 신분이고 개코고 뭐고 없지. 직공도 유랑민 무리도 거들먹댄다지 않소. 하지만 이 근방처럼 촌티로 둘둘 싸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 깡촌은 말이야, 편치가 않지. 아주 독해, 더럽다, 냄새난다, 옆에 오지 마라 등등. 자신의 지체가 높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사무라이가 백성을 내려다보듯이 한다 이거야. 아니, 더 끔찍하려나. 일반 백성들도 놈들을 내려다본다고.
말보다도 아래야.
에도도 마찬가지라고?
뭐,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도 잘난 척은 못하겠어. 마음속으로는 내려다보고 있었을지도 몰라. 손님도 그렇지 않소?

- 참말로 희한한 걸 물으시네, 손님.
그 백정의 딸이 멸시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애끓이다가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지. 그리고 죽고 나서 퇴마로 다시 태어난 거야.
그리해서 말을 죽이는 요마가 된 거지. 말이 없어지면 가죽 벗기는 직업도 없어질 것이라 생각해서 말을 잡아 죽였다는 말도 있고, 말이 죽으면 가죽 벗기는 일이 늘어나니까 생활이 편해질 거라는 생각에 말을 죽였다는 말도 있지. 
어찌됐든 슬픈 이야기야.

- 우마카이 초자의 저택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매우 청명한 저녁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떡 보시날이라, 저택의 부지고 문전이고 발 닿는곳마다 여기저기에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엄청난 무리가 백 명도 넘게 들이닥쳐 떡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 저택도 마을도 상당히 혼잡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사람의 얼굴이 흐릿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자라락, 낯선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 어제오늘 이 땅을 막 밟은 이런 나그네의 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혹시 건강하시다면 그 행자는 당치도 않게 수상한 자, 단순한 사기꾼이겠습니다만, 만약, 저어, 배를 앓고 계신다든가..."
"그, 그 행자는 대체 뭐라고 한 것인가?"
헤이스케가 별안간 큰소리를 낸 탓인지, 모모스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정말 병환중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 "아니, 됐소이다. 그 자가 말한 그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모모스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 자는 이렇게, 저택을 둘러보더니 말이지요, 어두운 얼굴로 '이거 참 큰일이군' 하고..."
"큰일?"
"예에, 이 땅은 저주를 받았다, 분노한 말의 영이 떠돌고 있다, 그러더군요. 마두관음께 제를 올리지도 않고, 설상가상으로 그 고기를 먹고, 결국에는 살아있는 말까지 잡다니..."

- 초지로는 십이 년 전의 그 사건 이후로 무슨 까닭인지 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증오하는 행동을 보이는 적이 있다. 마상에 있던 가족이 참살되었기 때문이다, 헤이스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듯했다. 초지로는 생활 이후로 죽은 말의 고기를 즐겨 먹게 되었다. 말이 죽으면 소금이나 된장에 절여 보존해서 매일 밤 먹었다. 

- 그러나 최근에는 말고기 조달이 어려워졌다.
쓸모없는 말이나 병에 걸린 말도 속여서 팔아치우게 되었으므로 죽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보유하고 있는 말도 여행 중 타지에서 죽는 비율이 많아지고 있었다.
헤이스케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말꾼들은 공들여 키우는 말이 예쁜 것이다.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때문에 말꾼들은 죽을 것 같은 말이 있으면 일부러 먼 곳까지 데려가 노상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여행지에서 매장하게 된다. 말 시체를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 공양을 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 "글쎄요. 너무 기이한 소리를 하기에 있을 수 없는 말을 해 트집을 잡고 금품을 뜯어내는 사기꾼이나 협박꾼 부류인가,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행자는 그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휙 가버리더군요. 저도 뭐, 남의 집안 사정이기도 하니 주제 넘는 말은 안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고 또 쓰여서..."
모모스케는 면목 없다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헤이스케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태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그 행자는 영험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알려준 것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아니,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행자라는 분은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
쫓을 것인가. 쫓아가야 하리라.
"서쪽으로."

모모스케가 대답했다.
 
- 오산도 돌아왔다. 그러니 지금밖에 없는 것이다.
신령님이나 부처님이 자신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헤이스케는 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불미스러운 행동을 반드시 속죄하라는 계시다. 매듭짓지 못한 과거를 청산하라. 이것은 그러한 계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하늘이 헤이스케에게 내려준 마지막 기회가 틀림없다. 

- 분명 그런 인물이 지나갔다고 했다.
거짓은 아니다.
헤이스케는 엉덩이를 걷고 겉옷을 벗어던졌다.
지금 헤이스케는 우마카이 초자의 청지기가 아니다. 단지 하인일 뿐이다.


- 짤랑.
"그렇게 정색을 하시고 나오시니 난감하군요. 소행은 법력이 있는 고승도 아니고, 음양술을 쓰는 술사도 아닙지요. 부적이나 뿌리고 다니는 한낱 어행사일 뿐." 
사내는 "자, 일어서시지요" 하고 말한 후 정중하게 절을 하고 헤이스케를 피해 걷기 시작했다. 헤이스케는 그 다리에 매달렸다.
"기다려주시길 기다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힘을 빌려주십시오. 우리 주인님의 목숨을... 이것이 저의..."
"보은이라고 하시는 건가."

- 이웃한 방에는 오산이 뉘어져 있다.
헤이스케는 마른침을 삼켰다.
말이 온다고는 하지만 평소에는 기척뿐이다. 모습을 본 자는 없다. 그러나 이 모양새라면 어디에서 무엇이 온다고 해도 훤히 다보이게 된다. 대체 어떠한 것이 찾아올 것인가. 

- 다각다각다각.
복도를 달리는 소리와 함께 정말로 말이, 실체를 가진 거대한 푸른 말이 나타났다.
일동은 크게 놀라 간이 콩알만 해졌고, 너무나도 기이한 일에 전원이 말을 잃었다.
초롱을 든 마타이치가 스윽 일어섰다.

- "어행봉위!"
짤랑.
초지로는, 아니, 핫키마루는 단말마의 비명을 짜내더니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기절했다.
그것은 마치 말이 숨을 거두는 듯한 목소리였다.
파라락.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쓰러진 핫키마루의 입에서 검푸른 덩어리가 스르르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서서히 말의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푸른 말은 작게 울부짖더니 그대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 <시오노 초지>


- 북 시나가와슈쿠 입구에 야나기야(柳屋)라는 숙소가 있다.
야나기야는 숙소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곳으로, 무려 십대를 이어져 내려왔다. 여관은 크고 훌륭했고, 장소 면에서도 더할 나위 없었으며, 드나드는 손님의 풍모도 좋아 매우 번성했다.
그 건물 주위에는 강기슭도 물가도 아닌데 버드나무가 많이 군생하고 있고, 특히 여관의 안뜰 연못가에는 한층 더 큰 수양버들이 서 있다. 그것이 야나기야라는 옥호의 유래가 된 것이다. 크기는 본채 지붕을 훌쩍 넘고 밑동의 굵기는 어른 셋도 다 안지 못할 만큼 커서 신목이다, 영목이다, 베면 저주가 내린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아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옛 일이기는 하지만 베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도 있었다든가 없었다든가 하는 전승이 있고, 모습도 기기묘묘함의 극치였으므로 흠을 내기는커녕 손을 대는 자도 그리 없었던 모양이다. 

- 야나기야가 서 있는 대지는 금기의 땅이었다. 야나기야는 그 불길한 전설의 땅에 저주의 버드나무를 품에 안듯이 세워진 것이다. 넓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베고 말고를 논하기전에, 보통은 그러한 장소에서 장사를 하려는 생각을 않으리라. 그러나.
야나기야의 창업자는 미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마가 끼기라도 한 것인지,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사악한 장소에 여관을 세우고 장사를 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한다. 
십대 전의 일이라고 하니 아직 가치신슈쿠도 가케차야도 미즈차야도 없었던, 신군이 그 땅 시나가와마치를 도카이도는 제일숙(第一宿)으로 정했던 그 시기였을 것이다. 

- 소에몬은 원래 오와리 출신 상인이었다고 한다.
훌쩍 이 땅을 찾아와 저주받은 버들을 보자마자 단숨에 눈을 빼앗겨버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일설에 소에몬은 버들의 정령에게 반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소에몬은 시나가와에서 만난 오류라는 이름의 여자를 아내로 삼고, 부부가 같이 여관을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분명 오래된 나무는 곧잘 사람으로 둔갑한다고 한다. 특히 버들은 대부분 여자로 화생(化生)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에도뿐만 아니라 멀리 조선과 대륙에도 많이 퍼져 있다. 무엇보다 여인으로 변하여 사람과 연을 맺은 버들의 이야기는 조루리로 완성되기까지 했다. 교토에 있는 연화왕원(蓮華王院)의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 마룻대에 쓰인 버들 역시 여자로 둔갑하여 사람과 연을 맺고 아이까지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루리는 결국 지어낸 이야기이다. 아무리 옛일이라고 해도 옛날이야기나 야담을 무턱대고 신뢰할 자는 그리 없을 것이다. 유언비어로는 들을지언정, 지금 이 시대에 정말로 나무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이야기를 믿을 자는 없으리라. 처의 이름이 '류(柳)' 라는 것도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나서 믿기 어렵기는 하리라. 
 
- 창업자 소에몬은 시나가와가 숙박지로서 발전할 거라 내다보고 밑천을 마련해 여관을 세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실제로 야나기야는 숙박촌 입구에 서 있어서, 여관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입지조건이다. 상인이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인다. 게다가 미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거목 한 그루를 계속 내버려두는 일도 어리석은 짓이다. 

- 필경, 소에몬도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주로 점철된 풍문을 이용하자고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이게 저주받은 버들이다. 버들 정령의 자손이다' 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풍문도 오히려 평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소에몬 본인이 흘린 소문이었을지 모른다. 나쁜 소문일수록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달리 본다면 좋은 선전도 됐으리라. 
언젠가 진위 여부가 밝혀지더라도 여관의 옥호가 그 거대한 버드나무에서 따온 것은 틀림없고, 어찌되었든 저주받은 버들 거목을 품에 안은 여관이었기 때문에 야나기야가 평판을 얻었다는 것도 틀림없으리라. 

- 철거한 것은 하필이면 소에몬으로부터 십대 후의 자손, 지금의 야나기야 주인이라고 한다.
지금 야나기야의 주인, 이름은 기치베라고 한다.
기치베는 학식이 상당하여 원래 뜰에 있던 사당에 신심을 가지는 일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딱 십 년 전 남 시나가와의 천체황신당(千體荒神堂), 이른바 시나가와 황신(荒神)의 설법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신심을 싹 바꿔버렸다고 한다.
무언가에 씐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처님이나 성인을 숭상한다면 몰라도 고작해야 나무, 그것도 예전에는 저주받을 우려가 있다고 전해지던 수상쩍은 물건을 숭배하다니 어불성설!"
기치베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월 이십칠일 황신님의 제삿날에 뜯어말리는 식솔들의 손을 뿌리치고 뜰의 사당을 부수고 호마불로 태워버렸다고 한다.

- 생각하기에 따라 이만한 흉사의 연속은 명백한 저주로 받아들여도 전혀 지장이 없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당을 부순 것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더구나 부순 본인의 몸에만 그 불행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손을 끊어버리겠다는 버들의 의지가 아닐까. 기치베가 신목의 분노를 살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불길한 저주가 발동되어 아이를 죽이고 처를 죽인 것은 아닌가. 적어도 미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 실제로 저주라고 하는 자도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만큼 불행이 여러 번 거듭되면 설령 불씨가 없더라도 연기 정도는 피어날 것이다. 좋지 않은 소문도 적지 않게 흘러들었던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기치베가 신심을 이래저래 닥치는 대로 바꾸는 것도 어쩌면 아이나 처의 공양을 위해서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 그러나.
정작 본인인 기치베는 신심은 있었어도, 한시에 정통한 식자이기도 한 까닭에 미신은 완고하게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반복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자신의 정진이 부족한 탓이다. 결코 뜰의 수목 때문 따위는 아니다."

기치베는 이렇게 공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처럼 의연한 태도는 나쁜 소문을 이겨냈다.
흡사가 계속 이어져도 '야나기야의 주인은 여복이 없다. 자손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안됐다' 라는 식으로, 일반적인 불행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장사가 잘 풀려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번영하는 것에 반항하는 자는 역시 적었던 것이다.

- "세상은 참 좁아, 오긴."

백장속으로 몸을 감싼 사내는 그렇게말하고서는 손에 든 백목면을 수건 삼아 최근 밀어올린 알머리를 쭉 쓰다듬었다. 그 목면은 좀 전까지 자신의 알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행자두건이었다.
사내는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다.

- "어디 보자. 우연히 맞닥뜨린 여자가 네 소꿉친구에, 그 소꿉친구가 방랑의 끝에 여관의 메시모리온나가 되고, 그 메시모리온나가 그 기치베의 다섯 번째 마누라로 낙점되었다. 그 말이렷다?" 
"맞아."
산묘회 오긴은 그렇게 대답한 후 장지문을 스윽 열고, 격자에 팔꿈치를 걸고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화려한 남보랏빛 기모노와 풀색 겉옷. 비칠 듯 새하얀 살결과 갸름하니 요염한 눈, 산묘회란 길거리 인형사를 말하는 것이다.
 
- 오긴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위치에서는 정면의 여관 지붕기와와 지붕보다 높은 버드나무가 보일 터다.
야나기야의 정면에 있는 작은 여관, 미요시야의 이층이다.
"그나저나 정말 커다란 버드나무인걸." 

오긴이 말했다.
"얘기를 피하지 마. 어쩔 셈이야, 오긴."

마타이치가 말했다.

"어쩌긴, 뭘."

- 마타이치는 각반을 풀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막 도착했던 것이다.
"이번 이야기의 출처는 너니까. 그만두려면 이쪽은 상관없어. 돈도 돌려주지."
"마타 씨야말로 무슨 소리야."
오긴은 그렇게 말하고 장지문을 닫았다.
"이대로 둘 수는 없잖아."
샤미센 소리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다.

- "들어보니 그... 야에 씨? 야에 씨라는 이는 고생이 아주 심했을 텐데.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이제야 잡은 행복이다, 그런 이야기 아닌가?"
"맞아."
오긴은 눈을 감고 하얀 목덜미를 쭉 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마타이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너한테 규중처녀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웃기잖아. 우는 아이도 입 다물게 만드는 산묘회 오긴 누님께도 그렇게 촌스러운 시절이 있었단 말이지." 
"사람 무시하네. 유감이지만 난 옛날부터 세련됐었다고. 게다가 그 얘기를 하려면 때가 묻지 않았다든가, 청초하다든가, 좀 더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 촌스럽다든가, 웃긴다든가, 말발이 달리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 어행사 놈아."

흥, 하고 어행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농담 아니야. 따박따박 말하는 것은 오히려 너라고, 산묘회. 그 시건방진 말을 해 제치는 입이 없었다면 말이지, 나도 조금은 널 보는 눈이 달랐을 거야. 내가 보건대 남을 우습게 보는 그 말투는 오 년이나 십 년 사이에 붙은 게 아니야. 조막만할 때부터 너란 여자는 그랬을 게 틀림없지."
"뭐야? 하여간 여전히 입만 청산유수고 여자를 보는 눈이 없네. 난 말이지, 사랑스러운 미녀라고 평판이 자자했던 처녀였어. 야에는 나보다 딱 한 살 아래였고, 착하고 좋은 아이였어. 춤 솜씨도 괜찮았고 말이지. 그런데..."
오긴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 "뭐..."
마타이치는 백목면을 펼치고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뭐, 재난이란 소나기 같은 거라서 별안간 들이닥치는 법이니까. 피하려고 한들 피할 수도 없지. 언젠가 나나 너나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거야. 일단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된 걸로 칠 수밖에는 없겠지."
"그래, 살아 있는 게 뭣보다 좋지. 살아 있으니까 팔자가 펴지기도 하고."

- 마타이치는 행장 차림을 완전히 풀고 책상다리를 하고는 "출신은 문제가 되지 않잖아?" 라고 물었다.
"야에가 지금이야 신분이 비천한 창기지만 근본을 따지자면 상인의 딸 근본부터 유녀도 아니고, 농사꾼 딸도 아니라고."
"그렇겠지.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 그 야에 씨는 메시모리온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기치베는 죽었다 깨도 여관의 주인이야. 자기 집의 메시모리온나한테 손을 댄다고 한들 몇 년이나 일을 해온 시답잖은 여자는 건드리지도 않겠지." 

- "그래, 잘 들어, 오긴. 스마야가 망한 것은 칠 년 전이야. 그 삼년 후에 모친이 죽었어. 그럼 야에 씨가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은 겨우 사 년 전이잖아. 게다가 모친의 유지를 이어서 얼마간은 몸 팔 생각은 없었다고 하고, 밤에 손님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에도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틀림없이 메시모리온나가 된 것은 이 시나가와가..."
"처음이라는 거야?"
"그렇지, 도카이도의 첫 숙박지는 여기라고."
"그럼 야에는 야나기야가 처음..."
"아마 그럴걸. 숫처녀였는지 어땠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손님을 받거나 하는 일은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분명 하지 않았을거야. 기치베는 아마 야에 씨를 받아들일 때부터 눈독을 들였을게 틀림없어."
"결국 메시모리온나로 거두어 놓고서는 돌봐준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
그게 분명해, 하고 마타이치는 말했다.
"자신이 반해 고용한 거라면 다른 남자 품에 주거나 할 리가 없지. 야에 씨의 손님이라는 건 기치베뿐이었을걸? 그럼 아무런 지장도 없다는 얘기지. 하지만 오긴,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는 거야. 분명히 야에 씨는 지금 행복하겠지. 하지만 네가 그 오몬인가 하는 여자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며 어행사는 심각한 얼굴로 오긴을 바라보았다.

- "오몬 씨의 말은 사실이야. 그 사람은 지옥을 봤다고. 믿을 수없는 경험을 한 거야. 다만,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밖에 몰라.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겠지.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오긴의 그 말에 마타이치는 몸을 움츠렸다.
"기치베란 사내는..."
"오몬 씨가 말한 대로의 인간이겠지. 그런 일, 그리 쉽사리 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하지만 증거가 없다, 그런 얘기지?"
"그것을 찾아내러 온 거잖아."

 

- 마타이치는 몸을 한층 더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찾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혼례일까지는 이제 사흘밖에 없어. 내가 하는 말은 그런 얘기야. 시간이 부족하다고. 기치베 놈이 오몬 씨가 말하는 대로의 남자라면 쉽사리 꼬리를 드러내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지. 그렇다고 진위도 밝혀지지 않은 일을 시집가려고 하는 새색시한테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은 없어, 마타 씨. 그냥생각하면 그런 놈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냐고. 믿지 않는다면 말해봐야 소용이 없어. 그러니 그저 트집에 지나지 않는 거지."
"그야 그렇지만... 그럼 어쩔 거야?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혼례를 포기하게 만들 건가? 진실은 차치하더라도 위험을 피할 생각이라면 그게 가장 좋아. 뭣하면 내가 문제가 없도록 이번 혼사를 파탄내주지." 

- 이 마타이치라는 사내, 겉모습은 승려 차림의 어행사이지만 세치 혀로 천 냥 빚을 갚는, 마치 입에서 태어난 것 같은 소악당이다. 속이고 후려치고 사기치고 모함하는 것은 특기 중의 특기. 때문에 잔머리 모사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인연을 끊는 중신애비는 그중에서도 자신 있는 특기이다. 분명 이 사내에게는 여자 한 명을 홀랑 넘기는 것도, 혼담을 깨버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와같으리라.

- "혼례가 성사된 다음에는 늦지. 혼례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해. 그렇다면 간단하지. 작업이고 덫이고 필요 없어."
"그럼 안 돼." 

오긴이 제지했다.

- "아이한테는 죄가 없을 게 아니냐고. 모처럼 얻은 아이를 없애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그렇다고 여자 혼자 내던져지면 길바닥에서 헤매게 돼. 아기 업고 손님을 받을 수도 없을 테고. 마타씨, 그 정도는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오긴은 가느다란 목을 갸웃거리며 마타이치를 바라보았다.
마타이치는 의아한 표정을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잖아. 결국 상관하지 않는 편이 나아. 오긴,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는 몸을 빼자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뭐야, 평소의 마타 씨답지 않네.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잖아."
오긴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야에는 행복해지고, 오몬 씨의 부탁도 완수한다. 그래야 잔머리 모사꾼 아니겠어?"

- "저쪽을 챙기자니 이쪽이 운다. 결국 쌍방 어느 쪽도 챙기지 못한다는 촌스러운 소리는 누구나 다 늘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챙기지 못할 쌍방을 챙겼을 때 비로소 잔머리 모사꾼이잖아. 그러기 위해 큰 돈 처들이고 있는 거고. 받은 돈값만큼은 일을 해줘."
"되게 시끄럽군. 말발 센 인간이 대체 누군지 모르겠다니까."

마타이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목면을 자신의 머리에 솜씨 좋게 둘렀다. 그리고 옆에 두었던 시주함을 끌어당겨 목에 걸고 힘차게 일어섰다.

- "어디 가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슬쩍 근처에 가서 장사라도 하는 수밖에. 다행히 곰곰궁리 선생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작업을 한다고 해도 이래저래 사전준비가 필요한 거라고. 일단 단나사에 인사하러가서 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이 영험하기 그지없는 고마운 부적이라도 뿌리고 옵지요."
마타이치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주함 속에서 괴물 그림이 찍힌 부적을 한 장 꺼내 허공에 뿌렸다.

- 아름다운 소나무였지.
아주 옛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공이 그 앞을 지날 때 말이지, 이 이이모리마쓰에 달이 걸리는 것을 보시고 그 지극한 아름다움을 극찬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소나무였어. 
이 소나무의 잎을 밥에 넣어서 지으면 태워먹을 염려가 없다는 얘기도 있었지. 내 고향에서도 넣어서 지었어.
옛 생각이 나는구먼.


- 그런데 이 이이모리마쓰를 베려고 하는 자가 있었어.
내가 어렸을 적 일인데, 이렇게 도끼로 찍었더니 갑자기 피가 뿜어나왔다지. 나무꾼은 깜짝 놀랐어. 그런데 상처에서 뱀이 한 마리 기어 나와서 나무꾼에게 덤벼들었다더구먼.
뭐?
난 못 봤어. 난 나무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나무꾼에 대해선 알고 있지. 그놈은 그 후에 정말 죽어버렸거든. 이이모리마쓰에 흔적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검은 피가 굳은 것이 계속 남아 있었으니. 
그러한 것은 있다니까.
나무도 살아 있으니 말이지.

- 재앙을 부르면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닐 테지.
맞아, 그렇지. 그곳은 원래 사람이 살 만한 장소가 아니었어.
그렇지. 버드나무가 있는 곳 말이지. 야나기야는 그곳에 억지로 여관을 세운 게야. 결국 공간을 빌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빌리고 있다면 감사를 드려야만 할 텐데. 그것이 도리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말이지. 감사하고, 인사하고, 소중하게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아니 그런가. 

- 그 기치베는 사물의 이치는 알지 몰라도 그런 도리만은 전혀 챙기지 않거든. 나무의 신성(神性)이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아. 나무는 나무다. 나무를 베는 것이 두려우면 집은 어떻게 짓겠나. 국자도 깎지 못한다. 그렇게 설을 풀어. 
뭐, 그것도 도리라고 하면 도리겠지만,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우리는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있고 장작을 때어 음식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네, 그래도 말이지, 마음의 문제 아닌가? 
그렇지. 마음의 문제라고.
산천초목 어떠한 것에도 불성이 있다고 스님도 말씀하셨어.
그러니 나무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은 발칙하기 짝이 없는 게지. 고맙다는 생각은 못할지언정 소홀히 다루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느냐고.
수목이 있기에 집도 지을 수 있고 음식도 할 수 있으며 국도 뜰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자인 게지.

- 십년 전에 버들 사당을 부술 때 말이지.
그건 다시없을 광경이었다고 들었어.
그래도 뭐랄까, 신심이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지. 아미타불님이나 관음님을 지극 정성으로 믿는다면 설령 버들이 저주를 내려도 믿고 있는 신불이 보호해주시겠지. 신령님이나 부처님은 고마우신 분이니 믿어서 나쁜 것은 없다 이거야. 
그러한 신심을 관철하기 위해 나무를 베었다든가 사당을 폐했다든가 하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어. 나도 말이지. 

- 아닐세, 아니야.
황신님에 대한 신심 따위는 말만 그런 것이야.
마음의 방황이었을까. 채 반년도 가지 못했을걸.
맞아. 금세 그만두어버렸어.
그러니까 그런 어중간한 신심은 가져봐야 오히려 나쁜 일만 생겨.

- 예? 물론 버드나무에 화를 낸 거지요.
그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이가 죽은 것은 버드나무 때문이잖아요. 그 일로 마음을 끓이던 마누라에 하녀까지 죽어버렸어요.
모든 불행의 원흉은 버드나무인 게지요.
조석으로 신주를 올리고 백중이나 정월에 성찬을 올리면서 그렇게 성대하게 모셨는데, 그 결과가 그런 앙갚음이었으니까요. 화가 날만도 하지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든가, 기분의 문제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런 것은 믿어버리면 설명이 되지 않지요.
왜냐면 선조 대대로 아무 일도 없다가 갑자기 불행한 일이 터진 겁니다. 버드나무의 축복이라든가 저주라든가, 그런 걸 믿어버리면 어째서 그런 재앙이 나한테 쏟아지는지 설명이 안 된다고요. 

- 뭐가 이쁘다고 처자의 원수에게 합장을 해야만 하는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바보는 없고말고요. 그래도 주위의 노인네들은 버들님의 저주다, 더 소중하게 하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생길 거라고 얼러대는 겁니다. 그래서 기치베 씨는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다른 사람 편에 들은 평판 자자한 황신을 믿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사당을 부수고 호마에 넣어버렸어요. 아주 화가 났던 거죠. 원망도 많았고. 오도쿠 씨의 혈흔은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치베 씨, 사당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겁니다. 괴로운 기억이요. 그래서... 

- 그 후로도, 아무리 열심히 다른 신들을 믿어도 그 분한 마음은 씻어낼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치베 씨는 잇달아 신심을 바꾸었어요.
그렇죠.
그러니 순서가 거꾸로인 거죠.
신심을 바꾸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게 아니죠. 버들을 소홀하게 대접해서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닌 겁니다. 맨 처음에 사고가 있었고, 그 결과, 기치베 씨가 신심을 바꾼 거니까요. 

- 기치베와 야에의 혼례는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무엇 하나 모자람 없이 치러졌다.
걱정하고 있었던 친척들과의 약간의 다툼, 즉, 야에의 근본을 둘러싼 분란도 야에의 과거를 안다는 사내가 나타난 덕분에 일단은 원만하게 수습되었고,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축하연은 실로 조용히 치러졌던 것이었다. 
친척들이 근심하고 있었던 원인은 야에가 천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도, 주종(主從)의 혼례라서 소문이 안 좋게 날까 염려하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기치베가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설령 천한 자라 해도 야나기야 역시 사무라이의 신분이 아닌 양민에 불과할 뿐, 큰 신경을 쓸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야에가 야나기야의 돈을 노린 악당이라면... 
이는 별개의 이야기가 된다. 

- 야에가 단순한 메시모리온나였다면 친척들도 이 정도로 신중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품은 것도 있다. 창기나 게이샤 부류라면 돈을 주고 그 업에서 몸을 빼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야에는 메시모리온나도 게이샤도 아니고, 단순히 전락한 거상의 딸이라는 줄거리였다. 이것이 의심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야에의 신분을 보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 그러나 옛날에 야에의 아버지인 스마야 겐지로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내, 교바시에 산다는 작가 야마오카 모모스케가 나타난 덕분에 의심은 일거에 풀렸던 것이었다.
애당초 야에는 모모스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모스케가 말하는 야에의 과거는 하나하나 야애가 하는 이야기와 일치했고, 조사해보니 모모스케의 신분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그와 더불어 우연히 소문을 듣고 왔다는 야에의 소꿉친구이며 네즈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 자처하는 오긴이라는 여자까지 나타났다. 오긴에 대해서는 야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이 여자 역시 야에가 스마야의 딸이라는 것을 증언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야에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드디어 야나기야의 안주인이 되었다.
하얀 혼례복을 입는 일은 평생 없으리라 생각했었다며 야에는 홍루(紅淚)를 흘렸고, 열석했던 사람들 역시 그 청초한 눈물에 마음이 움직여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있었던 친척들까지도 따라서 눈물을 글썽거렸을 정도이다. 이는 실로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며. 

- 그 혼례에서 손을 꼽아 이틀 째 밤의 일이었다.
맨 처음 본 것은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였다.
심야에 뜰의 버드나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드디어 나왔나 하고 생각한 것은 기치베의 죽마고우이자 야나기야의 맞은편에 있는 산지야의 젊은 주인 산고로였다.
이 산고로, 남들보다 배는 겁이 많은 성격인데, 겁쟁이임에도 불구하고 구경거리를 좋아하기도 하는 어이없는 사내였다. 산고로는 소문을 듣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어 야나기야로 향했다. 
산고로는 기치베를 넌지시 떠보았으나, 기치베는 젊은 시절부터 지극히 합리적인 종류의 인간이라 미신이라면 철저하게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해서인지, 아무래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나 산고로는 바지런하게 일하는 새댁 야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일단 산고로는 친구의 처자가 잇따라 흉사를 겪는 모습을 벌써 네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불행이 아니었다. 자살, 가출, 발광병사 등,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불행이었던 것이다. 

 - 이대로 괜찮을 것인가.
산고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착한 사람인 것이다.
 
- "버드나무 정령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당신, 자신의 할머니가 은행나무였다든가 삼나무였다는 말을 들으면 믿겠습니까?"
"그야 믿지 않겠지요. 그래서 뭐, 화상의 말로는 말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든 원흉은 첫 아이였던 신키치가 죽었던 일일 것이라고."

 

- "저주라니, 그것도 조상 공양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 얘기가 어디 있답디까? 도대체가 조상이 버드나무라면 죽은 아이도 그 피를 이어받은 게 되지 않습니까? 버드나무는 자신의 귀여운 자손을 죽인답디까? 그건 이치가 맞지 않는 이야기네요. 게다가 자꾸 공양 공양 그러는데, 애당초 버드나무는 저기에 기운차게 살아서 무성하지 않습니까? 보시에 아주 눈이 멀었나보군요, 그 스님."
"진정하시고." 

모모스케가 산고로를 달랬다.

- "그 기치베라는 사람은 말이죠, 평판대로 사물의 이치도 알고, 학식도 있고, 상재도 있었어요. 인간관계도 좋고 여자에게 상냥한 미남이지요. 아이도 몹시 좋아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첫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는 정말이지 기뻐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데, 뭡니까?"
"그건 태어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건 말이죠, 나중에 기치베 자신이 오몬 씨에게 고백한 말이라고 합니다만, 아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치베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 "이성적으로는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만, 억누를 수 없는 검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던 모양이에요. 일반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요. 기치베 자신도 믿지 못했던 듯하니까요."
 
- "병이야."

오긴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병으로 생각하기 어렵지. 사람이란 행동에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니까. 첫 아이, 오도쿠 씨가 낳은 아이를 왜 그렇게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기치베는 이래저래 번민하고 고뇌했어. 아, 왜 안 그렇겠어? 귀엽고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는 아이였을 텐데, 얼굴을 볼 때마다 죽이고 싶어지니까. 이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이유를?”
"그래, 그 기치베라는 사람은 번민한 끝에 나중에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여서 그걸로 납득을 했던 거야."

- "그래서 버들의 저주로 꾸민 겁니까?"
"저주라기보다, 애초에는 사고로 꾸밀 생각이었겠죠. 버드나무는 단순한 흉기였던 거니까... 버드나무가 저절로 감겨들었다는 식으로 꾸몄죠. 하녀는 몰래 바다로 흘려보냈고요. 사고라는 것으로 해버리면 책임을 느낀 하녀가 자해하는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 <야나기온나>


- 교토 서쪽에 가타비라가쓰지라는 갈림길이 있다.
동으로는 우즈마사, 북으로는 히로사와에 이르고, 북동으로는 아타고토기와로 빠지며 서로는 사가시노로 이어지는 사통팔달한 도로의 갈림길이기는 하나, 그래도 어딘가 오갈 데 없는 감상이 피어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 아니라 길의 끝 같은 풍취의 갈림길이다.

- 그도 그럴 터.
갈림길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면 그 앞은 인간들이 덧없는 생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가는 곳, 무덤이다. 염불사 팔천 석탑 아래에 잠든 무연불과 오구라 산기슭에서 바스러져 모래가 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자가 거하는 그야말로 이 세상의 끝인 것이다.

한 옛날.
사가천황의 황비 다치바나노 가치코, 세간에서 말하는 단림황후가 몸을 뉘었을 때의 일. 고요히 나아가던 장례행렬이 이 땅, 이 갈림길에 접어든 그 순간 일진광풍이 불고 관을 덮은 비단천이 펄럭 날아가 떨어진 곳이 이 장소로,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신심이 두터웠던 황후께선 사가노베에 비구니들을 위한 단림사를 세우셨던 분이기에 인연이 있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후가 승하하시기 전에 "내 시신은 제도 지내지 말고 묻지도 말고, 갈림길에 버리고 들판에 내놓으라"고 하셨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 황비의 시신을 하필이면 길바닥에 버려두다니 무슨 연유냐고 묻는다면, 그 유지야말로 무상(無常)이라는 두 글자를 체현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멈추는 일이 없는 것처럼 인생도 인체도 그저 허무할 뿐.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 생명이 있었을 때의 황후는 비할 바 없이 아리따운 여인으로 많은 자가 떠받들었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마음이 아니 움직이는 자가 없어 음험한 마음을 품는 자 역시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에 사십구재 동안 그 시신을 들판에 내놓아 비를 맞히고 그 변모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연심에 휘둘려 불심을 잊었던 어리석은 자도 세상의 무상함을 깨우칠 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황후의 두터운 신심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 전해진다.

- 당나라 승려 의공의 간청으로 일본에 첫 선원이 건립되니, 고귀한 불법자인 황후가 아니라면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말씀이었으리라.
그 썩어가는 모습, 바스러져 사라져가는 모습, 금수에게 먹히는모습은 색에 번민하고 향에 이끌리는 무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 옥체를 버린 곳이 가타비라가쓰지였다는 것이다. 

- 가타비라는 죽은 이에게 입히는 흰옷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만.
옥체가 스러진 후에도 어찌 된 일인지 이 가타비라가쓰지에 가끔 여자의 시신이 홀연히 나타나 개와 까마귀에게 먹히는 모습이 목격된다고 한다.

- 갈림길이 무상을 느낀 것인가.
무상이 갈림길에 물든 것인가.
정녕 이 세상이 무상하다면, 같은 상이 세월을 지나 보인다는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 일. 이는 부처님께 깊이 귀의한 황후의 공덕에 반하는 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요괴 여우나 요괴 너구리들의 못된 장난질이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환각이나 백일몽의 부류이리라.
어찌되었든 먼 과거의 일이다.

- 그 이름은 히에이 산 칠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무동사 계곡 옥천스님 요괴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물론 별명도 포함한 이름이다. 본명과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승려 차림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 히에이 산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오쓰 근방에 터를 잡고 있는 무뢰한이다. 

- "영험한 그림인데 말이지."

옥천 스님이 말했다.
"이거 모야부네 녀석한테 부탁받아 내가 아주 유명한 문적(門跡)에게 머리를 숙이고 큰돈까지 들여 빌려온 것이니 더럽히지 말아주었으면 싶은데."
"이미 더러워져 있잖나."

마타이치가 쏘아붙였다.

 

- "그보다, 모야부네 녀석은 잘 지내나?"
"그 녀석이야 여전하지. 이제 곧 여기로 오는데, 그 전까지 이걸 잔머리 모사꾼한테 보여 두라고 부탁받았다고."

- "어떤가?"

옥천 스님이 목을 내밀며 말했다.
"어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이렇게 색기라곤 전혀 없는 그림을 보여 봐야 아무런 공덕도 쌓이지가 않는다고, 에도에서도 잔인한 그림이 유행하고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추잡하지는 않아. 흐늘흐늘 문드러진 활인형(活人形) 쪽이 훨씬 더 매력이 있겠구먼."
마타이치는 얼굴을 찌푸렸다.

 

- 그림족자에는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살아있는 것은 맨 처음 한 장뿐이다.
두 번째 그림에서 여자는 임종, 그리고 그 이후의 그림은 그 시신이 썩어들어 가는 모습을 극명하게 좇고 있다.
모두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한 그림이다.

속세에서 구상시 그림족자(九相詩繪卷), 오노노 코마치 상흔화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요컨대 사후에 인체가 흙과 재로 돌아가기까지, 아홉 개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 것이다.

- "이런 것이 영험이 있단 말인가?"

마타이치가 물었다.
"영험이 있고말고. 이건 세상의 무상을 설법하고 있는 게야."
"무정하구만. 꽃마저 부끄러워할 미인이 그저 썩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다니, 무자비도 분수가 있어야지. 일단 이것은 하루나 며칠만의 일이 아니지 않나. 이렇게 오랜 시간 방치해두다니, 제정신은 아니야. 성급한 에도 사람에겐 안 맞아." 

"아니, 무자비하기는커녕 다 깊은 뜻이 있는 것일세. 잘 들어, 마타 씨. 이건 세상이란 변화하는 거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그림이야. 아무리 생전에 아름다웠던 여자라도 죽으면 썩는다. 부풀고, 구더기가 들끓고, 개한테 먹혀 뼈만 남는다는 얘기라고.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움도 추하게 바뀐다. 미추는 같은 것이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따위는 없다. 색은 변하는 것이니 그처럼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그림이지."
"흥."
마타이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 "그런 거야 나도 백 번도 더 잘 알고 있어. 이봐, 불제자. 너, 중이 되려다 만 지 몇 년이나 지났나? 비린 것 먹으며 살고 있는 것치고는 아주 중 냄새 솔솔 풍기는 소릴 하는구먼. 색은 변하고 향기는 옅어지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그런 건 당연하지. 모르는 녀석이 바보일 뿐. 이렇게 불쾌한 건 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라고. 한순간의 꿈이란 걸 알면서 반하고, 알면서 매달리지. 그게 멋이라는 것 아닌가. 너한테 에도의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싶구먼."
마타이치는 손가락으로 맨 처음 그림을 가리킨다.
"이 한 장으로 이미 족하다는 이야기야. 에도 토박이한테 나머지는 필요 없는 것. 여기서부터 뒤는...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낫다고. 보여주게 되면 누설인 거지.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는 무대 뒤를 엿보는 것이나 다름없어. 거짓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랄 생각이 없다면 귀신의 집 같은 걸로 돈벌이를 하는 이들은 죄다 굶어죽으라는 소리지. 그건 촌스런 짓이야. 하코네 저 너머에서나 할 짓이라고." 
"여기는 하코네보다 더 서쪽이잖나. 뭔 소리를 주절대는 거야?"하며 옥천 스님은 웃었다. 

- "이봐, 마타 씨, 이런 유의 그림은 구상도라고 한단 말이지. 구상시라는 한시가 있는데 그걸 그림으로 만든 거라고. 아주 오래된 거라서 자네가 얘기하는 멋이고 촌티도 없는 거라고. 연지에 분, 푸른 먹으로 백피를 채색할 뿐. 남녀의 음락, 서로의 역겨운 몸을 안는다는 그거 말이야. 잘 들어, 사람은 죽으면 아홉 가지 상을 보여. 그 첫 그림은 생전(生前)의 상이지." 
옥천 스님은 마타이치가 말한 그림을 가리켰다.
"봐, 꽃처럼 색향을 자랑하는 미인이지. 네 말대로 이 정도면 반하고 말고. 펑, 하고 펼쳐진 불꽃놀이의 꽃이야. 하지만 말이지, 어떠한 미인도 죽으면..."


- 옥천 스님은 다음으로 그 옆의 하얀 천을 쓴 채 거적에 뉘어져 있는 여자 그림을 가리켰다.
"이게 죽은 직후의 그림. 뭐, 죽었으니 안색은 나빠. 병으로 죽었다면 생전부터 쇠약해져 있었을 테고, 그래도 이 정도면 자고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지."
"죽은 직후라면 다르지 않겠지."
"그렇지. '은애하는 옛 벗은 여전히 머물러 있건만, 혼은 사라져 어디로 가느뇨' 라는 구절이지. 생전의 모습이 있으니 이거 차마 등 돌릴 수가 없는 거잖아. 그렇잖아?" 
"미련이 남았다는 건가?"
마타이치가 그렇게 말하자 불제자는 "맞아. 미련이지. 집착이지." 라고 말했다.

- "집착이 있는 거겠지. 아무리 봐도 살아있을 때와 같은 얼굴인걸.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는 것뿐이야. 마타씨, 자네 아까 여기서부터 뒤는 필요 없다고 했지."
"필요 없어." 

어행사가 말했다.
"죽었으면 묻으면 될 일이지."
"그렇게 하지도 못해. 자고 있을 때와 똑같잖아. 이걸 보고 있으면 사모의 정을 좀처럼 끊기가 어렵다고. 다시 살아나서 눈을 떠달라고 생각하겠지."

옥천 스님이 말했다.
"그러니 묻어야지."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어때?"

- 불제자는 그 옆의 그림을 다시 가리켰다.
부풀어 있다. 살결도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다.
얼굴 모양도 완전히 변해서 원래의 용모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때? 이건 팽창(膨脹)의 상이라네. 죽으면 부풀어 오르잖아. 내장은 썩고, 수족은 굳어서 이렇게 나무막대기처럼 되지. 홍안이 어둡게 변하여 고운 빛을 잃고 검은머리가 먼저 쇠하여 초근에 얽히누나. 또한 오장육부가 흘러내려 관에 남으니... 뭐, 이렇게 되는 거지."
"보고 싶지 않군." 어행사가 말했다.
"그렇지? 그렇다니까. 좋아하고 반해서 애태우고 사모하던 상대라도 이렇게 되면 끝장인 게야. 어때?"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 전부터 사양한다고 말을 했잖아. 비린내 나는 불제자의 설법 따위는 듣기 싫다고."
그렇겠지. 그렇겠지 하고 옥천 스님은 웃었다.

- "모야부네가 오기 전까지 잠깐 동안 이 옥천의 영험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는 게 어때? 어이구, 그렇게 얼굴 구기지 말고. 이게 다음상, 혈도(血塗)의 상인데..." 
불제자는 다음 그림을 가리켰다. 피부색은 점점 더 검어지고 살결은 여기저기 터지기 시작했다. 안구도 흘러나와 있다. 더 보기가 힘들 정도다.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무너지고 색이 변이하는 정도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도다. 썩은 살결, 모조리 흩어지는 검푸른 얼굴, 농혈이 흐르는 부패한 내장이라는 거야. 사람은 고결한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몸이란 부정한 것이니까. 이 상에 이르러 그 부정함이 얼굴을 내미는 거라고. 이어서 이것이 방란(昉亂)의 상이지." 
이미 인체라고 말하기 어렵다.
구더기가 끓고 있다.
"구더기 온몸에 크게 들끓고 파리떼 살 위를 날아다니니... 이제는 역겨움 그 외의 무엇도 아니야. 바람이 악취를 이삼 리나 나르지. 부정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몸이야. 이건 사람에게는 불길할 뿐인 것이지만, 반면 금수에게는 좋은 먹잇감일세."

- 옥천 스님은 두루마리를 스르르 펼쳐 숨겨져 있던 그림을 가리켰다.
개 같은 짐승이나 까마귀, 매 등이 시신에 떼로 몰려들어 부패한 사체를 뜯고 있는 그림이다.
"담식(噉食)의 상이라고 하지. 굶주린 개 울부짖고 게걸스러운 까마귀 군집하니... 먹이지 뭐.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흔적도 없어. 하지만 개를 꼴사납다고 생각해선 안 돼. 이것이 개한테는 당연한 일이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 승려 차림의 소악당은 그림족자를 더 펼쳤다.
"자, 이번엔 청어(靑瘀)의 상이야. 그림족자에 따라선 이것이 먼저 나올 때도 있지만, 이 그림족자는 이 순서대로지. 한번 봐. 얼굴은 이미 해골이야. 살도, 남은 가죽도 거의 없어. 이 다음은 이제 뼈밖에 없다고."

- 불제자는 두루마리를 끝까지 스르르르 펼친다.
"이건 골산(骨散)의 상이지. 백골이라고. 거죽을 덮고 있어야 남녀의 구분이 되는 법. 이렇게 되어버리면 남자도 여자도, 하물며 미인도 추녀도 없어. 마지막은 고분(古墳)의 상이야. 뼈도 흩어져버려서 이제 남은 것은 먼지와 재뿐. 오온(五蘊)은 애당초 모두 허무한 것. 무엇으로 평생 이 몸을 사랑하랴. 어때, 잔머리꾼. 조금은 엄숙한 기분이 되셨나?" 

 

- 시끄러워. 얼른 치워, 하고 마타이치는 말한다. 
"운우지정을 나눈 상대가 하룻밤 지나고 나니 늙은 할망구였다는 거나 똑같아. 역겨운 심경이지. 도대체가 기름기 쪽 빠진 고덕(高德)한 법사의 설법을 들었다면 그런 마음도 들겠지만, 너처럼 주색에 빠져 퉁퉁 불은 몸뚱이한테 들어봐야 꿈자리만 사납지 않겠어?"
"입은 여전히 험하구먼."
"유감스럽게도 장점이라곤 그거 하나여서." 

어행사가 대답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마타 씨, 어째 안색이 영 안 좋구먼. 정말 속이 메스꺼워진 거 아닌가?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는걸. 설마하니 바다와 산에 천 년씩 살아온 미륵삼천 잔머리 모사꾼이 요깟 그림에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니까."
"여자의 송장이 싫을 뿐이야. 특히 지저분한 건 사양이라고. 맨처음 말한 그대로 인간의 본성이 더럽고 추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진흙인지 똥인지 모를 지저분한 것이 거죽 뒤집어쓰고 때때옷 입고 열심히 깨끗한 척하며 살고 있는 거 아니냐고. 벗기고 쪼개서 정체를 드러내봐야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다고."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타이치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족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마타 씨, 하고 옥천 스님이 묻는다.
어어, 하고 어행사가 대답한다.
어두운 눈빛이다.

 

- "참말로 왜 그러나, 마타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영 기운이 없어 뵈네. 나와 함께 교토를 휩쓸고 다니던 시절엔 그런 눈빛 하지 않았잖은가. 게다가 그 차림새, 신심 모르는 모사꾼이 어행사 시늉을 하고 다니다니, 이 몸도 눈을 의심했다고."
내버려 둬, 하고 마타이치가 말했다.
"뭐여, 고향이라도 그리워진 건가? 참으로 희한하이. 양친이라도 돌아가신 건가?"
쯧 하고 마타이치는 혀를 찼다.
"모사꾼에게 부모는 없어. 난 말이지, 땡중, 사실대로 말하면 에도 사람도 아니야. 부슈에서 태어난 농사꾼 자식이라고. 아버지라는 사람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구제불능의 술고래여서 여덟살 때 죽어버렸어. 모친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남자하고 도망갔지. 그야말로 천애고아라고."

- "오호."
옥천 스님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청산유수 모사꾼이 신상 이야기를 하다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랬구먼. 난 또 에도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뭐, 앞으로 내 쪽에서 부탁할 일도 있을 테니, 뭔가 할 말이 있다면 하시게나."
"시답잖은 일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이야기해봐."

- 여자가 말이지, 하고 마타이치가 말하니 여자가 뭐 어쨌는데, 하고 불제자가 묻는다.
"벌써 몇 년도 더 됐는데, 에도에서 말이지, 기억에 남는 여자를 만났어. 여자라기보다 노파였나. 여하튼 이 여자가 말이지, 못말릴 정도로 색에 미쳐 있었어. 사내 없이는 하룻밤도 지낼 수 없는 여자야. 나이를 먹어서 두 번 다시 눈길을 받지 못할 정도로 늙어빠졌는데도 검버섯에 분칠하고 갈라진 입술에 연지 찍어 바르고, 더러워.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워. 그런 괴물이 밤마다 사내의 소매를 끌었더란 말이지."
"사내 사냥인가."
"맞아, 그 여자, 꿈을 꾸고 있더라고."
"꿈이라니?"
"자신은 젊다. 젊고 아름답다는 꿈. 자신의 진짜 모습은 더러운 노파이고, 추한 괴물이라는 현실을 그 여자는 외면했어. 아니, 외면하며 살고 있었던 거라고."
서글프구먼, 하고 불제자는 두툼한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그렇지. 나는 말이지, 그 여자 손에 이끌려서..."
거기서 마타이치는 입을 다물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마타 씨. 결국은 산 건가?"

"안지는 않았어. 난 그 여자한테 현실을 보여줬어."

"꿈에서 깨웠다. 그런 소리인가?"

 

- 그랬더니 그 여자가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하고 마타이치는 물었다.
"글쎄, 낙담했든가, 망신스러워했든가, 후회했든가."

"죽었어. 목을 매달고."
"죽었나."
"그래, 딱 이 그림처럼 부풀어서 침 흘리며 죽었더라고."

옥천 스님은 입을 다문 채 마타이치가 가리키는 그림을 보았다.
팽창의 상이다.
이렇게 죽었다고, 하고 마타이치는 되풀이했다.

- "그렇구만... 하지만 마타 씨."
"알아버리면 살아 있지 못할걸."
마타이치는 한층 더 어두운 눈빛을 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서글퍼. 그 노파만이 아니라고. 너도 나도, 인간은 모두 같아.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면서 가까스로 살고 있는 거라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있지 못해. 더럽고 악취 풍기는 자신의 본성을 알면서도 속이고 어르면서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꿈같은 게 아닐까.
마타이치는 그렇게 말했다.
"무리하게 쥐어흔들고, 찬물 끼얹고, 볼때기 때려서 눈을 뜨게 해봐야 좋을 것 없어. 이 세상은 모두 거짓투성이야. 그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니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거야. 그렇다고 눈을 떠서 진짜 현실을 보게 되면 괴로워서 살아가지 못해. 사람은 약해. 그러니까 거짓을 거짓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것밖에 길이 없는 거라고. 연기 피우고 안개 속에 숨으며 환상을 보고, 그래서 만사가 원만하게 수습되는 거라고. 그렇지 않나?"

 

- 마타이치는 거기까지 말하고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덩치 큰 승려도 고개를 돌렸다.
사당 입구에 깔끔한 차림새를 한 작은 사내와 꽃을 담은 키를 머리에 인 여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먼, 모사꾼."
그것은 모야부네 린조였다.

- 모야부네 린조. 표면적으로는 지전(紙廛)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소악당이다.
모야부네(靄船) 연무를 헤치고 산으로 오르는 배를 말한다. 백중이 되면 비와호에서 히에이 산에 이르는 사카모토 고개를 망자가 배를 타고 오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도 히에이 산 칠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이 사내의 손에 걸리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채로, 마치 안개 속이라도 걸어가듯 속아 넘어가 시키는대로 농락당한다는 데에서 유래된 별명이다.
원래는 조정을 섬기는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 "마타이치, 의형제의 술잔까지 나눈 이 몸에게 서찰 한 통도 ..."

- "바쁜 몸이라고."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한 다음 린조는 사당 안으로 들어가 "참, 소개하지"라고 말하며 등 뒤의 여자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무명천을 접어 쓰고 검은 겉옷에 두터운 어깨끈. 세 폭 앞치마에 고상한 빛깔의 염색을 한 좁은 오비...
교토의 꽃장수 시라카와메의 차림이다.
"이쪽은 요카와의 오류라고 하는데, 이 년 전쯤부터 손잡고 있는 한 식구지. 이쪽이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라고 하는데, 내가 에도에 있었을 무렵의 동료야."
잘 부탁한다며 오류는 눈인사를 했다.
얼굴선이 우아한 여자다. 린조와 오류는 문을 닫고 그림족자 옆에 앉았다.

- "봤나, 마타이치.”
"어, 봤어. 하지만 봤을 뿐이야. 이건 대체 무슨 수수께끼 놀이야?"
"그게 말이지... 일단 설명을 할까?"
 
- 마타이치는 욕을 하더니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손 떼겠어."
"기다리시게. 성급하면 손해야. 에도 사람은 이래서 탈이라니까. 멋이 어떻고 저떻고 위세만 당당하지, 실속은 전혀 없지. 죽을 맛인데 참고 있는 것뿐이잖나. 에도와 교토, 어디가 더 윤택한지 입성을 보면 척 알 수 있을 텐데. 허세 부리지 말고 실속을 차리라고, 실속을."
"시끄러워, 린조. 조금 좋은 옷 입었다고 우쭐대지 말라고. 돈이든 금이든 처먹다 쓰러지는 것도 꽤나 볼품없긴 마찬가지야. 물론 나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 하지만 그냥 가난뱅이가 아니라고. 너 같은 구두쇠는 평생 경험하지 못할 돈 씀씀이를 알고 있을 뿐이지. 돈이란 모으기 위해 있는 게 아니야." 
"하여간 입 하나는 청산유수구먼, 마타."
린조는 피식 웃으며 마타이치를 끌어당겼다.
"차림새는 변했지만 알맹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군 그래. 아무 말 말고 일단 앉게. 자네가 돈으로 움직이는 사내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 "버려지기는 했지만 오키누는 살해당한 게 아니야."
"뭐?"
"오키누는 자살했어."

린조가 말했다.
"목을 맸어. 그건 틀림없지. 매화나무에서 대롱거리는 모습을 몇 사람이나 봤으니. 급히 내리려다가 잘 안 되니 조력을 청하러갔는데 그 사이에 사라진 게야. 갈림길에 내팽개쳐졌을 당시에도 밧줄이 그대로 감겨 있었다지."

- "내키고 자시고 간에, 얘기를 줄줄이 다 들어도 맥락이 전혀 안잡힌다고. 대체 뭘 어떻게 도우라는 건데? 설마 범인을 찾으라는얘기는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 범인은 대략 좁혀져 있는 상태거든."
"그럼 봉행소에 찌르면 될 일 아닌가. 오라 받고, 그것으로 끝인 거지."
마타이치는 북을 치는 시늉을 했다. 린조는 미간에 주름을 그리면서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게 아니겠는가 하고 말했다.

- "적어도 오사카에서는 평판이 자자했지요."

모모스케가 대답했다.
"하지만 세상은 좁습니다. 설마, 서관(書館) 이치몬지 어르신이 마타이치 씨의 지인일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저는 에도 서관의 소개로 개판 상담을 하러 왔을 뿐이지만요."
"이치몬지 너구리 영감에게는 나도 신세를 지고 있지요."
불제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탈 중간에 멈춰 섰다. 짐이 무거운 것이리라.

- "하지만 소문이란 참 빠르군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예, 제가 맨 처음 들었던 것은 단림황후의 망령이 나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은 그냥 듣고 넘길 수 없죠.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담과 기담을 수집하고 있는 자이니까요."
들었습니다, 하고 불제자는 덩굴바구니를 고쳐 메며 물었다.

"백 가지 괴담집을 쓰고 계신다면서요? 특이한 분이라고 마타씨도 그러더군요."
"뭐, 특이하지요. 그 사람과 알고 난 이후로는 특히 더. 하지만 저에 관해선 됐습니다. 여하튼 교토에 와서 돌아다니며 물어보니 아무래도 상황이 좀 달라요. 그곳에 버려진 네 여자들이 번갈아서 둔갑해 나온다고 합디다. 어떤 때는 게이샤, 또 어떤 때는 꽃장수, 그리고 요릿집 하녀에 무가의 부인..." 

- "뭐, 한 건 한 건 간격이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네 건 중에 두 건은 아무래도 살인은 아니고요. 여하튼 범인의 윤곽도 잡히지 않고 하니 봉행소로서도 이대로는 체면이 서지 않겠지요. 그러니 딱히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묘한 이야기이지만, 장소를 생각하면 이건 그다지 특별한 사건도 아니지요." 
"장소... 말입니까."
그렇지요, 하고 옥천 스님이 대답했다.
"이곳 교토라는 곳은 말이지요, 사방이 죄다 시신으로 둘러싸여있거든요."
"시신? 묘지가 있다는 건가요?"
"묘지가 아니라 시신 말입니다."

 

- 옥천 스님은 고개를 들어 빙 둘러보는 몸짓을 했다.

"저 산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지요. 구라마도 그렇고 히에이 산도... 이건 뭐, 귀문(鬼門)을 막는 부적이지요. 다른 산도 그래요. 게다가 히라노, 기타노, 무라사키노, 우에노에 오기노 우치노, 렌다이노 등등, 들판이 엄청 많지요. 이것이 그냥 들판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당신, 후나오카 산의 센본 염마당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고 모모스케는 대답했다. 절과 신사는 가능한 한 둘러보는 사내이다.
"후나오카 산이라고 하면, 그건 형장(刑場)이죠. 게다가 그 센본도오리 말이죠, 주작대로가 뻗어는 있지만, 그것도 원래는 센본소도바라고 했어요. 그 우치노라는 곳은 아주 옛날, 시신을 버리는 곳이었어요." 

 

- "버렸다?"
"예, 렌다이노 쪽은 지금도 무덤이고, 지금이야 묘석을 세우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냥 버려두고 가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리고 동산(東山) 삼십육봉 중 아미다 봉의 언덕 일대, 그곳은 도리베노라고 해서요, 역시 장송의 토지지요." 
"기요미즈데라 맞은편... 육도진황사 주변 말입니까?"
"그렇지요. 그곳도 명계의 입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쪽."
불제자의 몸이 서쪽을 향했다.
"오구라 산 아다시노지요. 아다시노 염불사의 천등공양, 그건 본 적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하고 모모스케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건 말이지요, 서글픕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요. 무상하지요. 그 스산한 석탑은 옛날부터 쭉 그곳에서 스러져간 셀 수 없는 시신의 공양이지요. 이 도읍은 몇 번이나 불태워지고 몇번이나 황폐해졌어요. 시신은 모두 도읍 주위에 버려졌지요. 가타비라가쓰지 앞의 아다시노는 죽은 이를 버리는 장소였어요." 

- "버린다...  장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고요?"

"도리베노는 말이지요, 불태웠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다시노는 버렸죠. 풍장이지요."

"풍장... 이라고요?"
"그렇지요. 지금이야 그런 것이 없지만 옛날부터 얼마 전까지 그 주변에는 썩어가는 시신이 지천에 널려 있었을 터입니다. 구상도는, 그건 상상도가 아니지요. 실제로 이 주변에서는 일상 풍경이었던 겁니다."

- 거기서 소악당은 그야말로 진짜 승려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아다시노의 이슬이 사라지듯 사람 목숨 또한 허무하며, 도리베노 산의 연기, 피어오르기만 하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다 하면 그것 또한 정취 없는 일일지니" 라고 읊었다. 쓰레즈레구사로군요, 하고 모모스케가 응대했다.

- "그러니 무상(無常)의 땅인 오구라 산 방면으로 가는 입구이기도 한 가타비라가쓰지라면 그러한 환각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맞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존재지요. 그리고 죽어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시대가 바뀌면 옛날이라는 것은 흐릿해져 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바뀌어도 땅은 변하지 않아요. 건물이 무너지고 나무들은 말라가도 이 대지는 남아 있지요. 그렇다면 사람은 잊어도 땅은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처럼 끔찍한 기억이 흠뻑 물들어 있는 땅이니까..."

 

- "안 나와요, 안 나와."

옥천 스님은 어느새 소악당의 얼굴로 돌아가서 말했다.
"휴도로라는 건 연극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그쪽이 온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진짜로 만난 적은 없지요? 그러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있어도 상관없지요. 오히려 있어주길 바라는 것이 인정이라 할까요. 이런 오래된 고을에 살고 있으면 말이지요, 그런 마음이 들게 된다니까요. 가타비라가쓰지 주변은 특히 더 그래요. 그러니 마타 씨의 작업도 부자연스럽게 된 게 아닐까요. 저는 어쩌면 진짜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답니다." 
 
- "하지만 오류라고 하는 여자, 그게 아주 대단한 배우였어요. 벌써 보름 이상 나가 있지만 전혀 들키지 않았지요. 둔갑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만큼 계속하면 위험할 텐데요. 아무리 잘 분장한들 살아 있는 자인지 죽은 자인지의 구별 정도는 할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모스케가 알고 있는 마타이치의 작업은 언제나 주도면밀하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모모스케는 생각하고 있다. 나 정도가 마타이치의 심산 같은 걸 알 수 있을 턱이 없지만, 보름이나 유령 흉내를 계속하고 있다면 이것은 너무 위험하다. 길게 끌수록 허점이 생긴다. 마타이치답지 않은 방식이라고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 하지만 옥천 스님은 굳은 표정으로 그건 절대 들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요, 나도 놀랐어요. 그거, 일부러 썩은 물을 얼굴에 발라 파리를 불러들이고, 구더기가 기어 다니도록 하고, 짐승의 썩은 살을 배에 붙여서 개한테 먹이는 것이지요. 철저하기 그지없어요. 나오는 시간은 봉마시(逢魔時)이니 위험해서 다가갈 엄두도 못 내지요. 게다가 속이 메스꺼워서라도 접근하려 하지 않을 거고요.”
"그나저나 진의를 알 수가 없군요. 그런 일을 계속해서 어쩔 셈일까요? 그 장소에서 사람을 쫓아내려는 걸까요? 저로선... 뭐, 언제나 그렇긴 하지만, 전혀 모르겠습니다.”
 
- "그렇죠. 다만, 이 범인은 웬만한 수에 넘어갈 상대는 아닌 듯한 기분도 드는데 말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잖습니까. 이를테면, 뭐, 우발적으로 ..."
 
- "그렇다고 합디다. 먼저 간 부인이 소사대의 무슨 높은 분 따님이었답니다. 그 요리키의 인품도 좋았고, 이 사람들이 또 아주 금슬 좋았던,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더군요. 만약 이게 다른 요리키였다면 '무사 된 자가 처의 시신을 도둑 맞다니 무문의 수치! 하물며 그런 수치를 당하고도 도적을 찾아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매일 매일 통곡이나 하며 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매섭게 꾸짖은 다음 폐문칩거의 명을 내리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가지는 않았다?"
"가지 않았지요. 사랑하는 반려자의 시신에 치욕을 입은 고뇌. 남은 사람의 고통은 가늠할 길이 없고,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누르기 어렵다... 는 명목인 거죠. 휴직 취급이라고 합디다. 뭐, 부인의 아버지가 요직에 있다는 것이 상당히 작용했겠지만, 그래도 사위가 장인의 마음에 그 정도로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무른 처우였는데 다른 자도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은, 뭐, 인덕이라는것일 테고요."

- "역시 동기는 그 요리키에 대한 보복 아니었을까요?"
"그럴까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질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부인을 죽였다면 그나마 알만해도, 시신을 훔친다는 것은 이해가 영... 과연 그런 짓을 위해 잇따라 사람을 죽였을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분명 요리키는 당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직위에서 내쫓긴 것도 아니고, 녹을 깎인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주위에서는 동정을 사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두번째 이후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자지요." 

- 옥천 스님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여기가 가타비라가쓰지입니다"라고 말했다.

- 갈림길은 어두컴컴했다.
줄지어 선 집들은 모두 문을 닫고 있다.
그곳은 이미 산 자가 사는 장소가 아니었다.

 

- 풍경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햇빛 가리개도 울타리도 포렴도 기와도 어디에나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마치 황천의 정경이 겹쳐진 것처럼, 그곳은 음습했다. 바람은 잠잠하고, 기운은 탁했으며, 매미소리도 멈추고, 여름밤은 그저 무덥고 농밀하게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 그런데 한곳에 기운이 응집되었다.
그곳만 갑자기 어둠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시신이 나타났다.


-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유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검푸르게 부풀어 올라 피부는 보랏빛으로 문드러지고, 파리가 들끓고 있다. 입가와 눈가의 점막에는 구더기가 꾀어 걸쭉하고 탁한 점액이 눌어붙어 있다. 물론 그 시신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목에는 투실투실한 노끈이 둘러져 있다. 밧줄이 걸린 부분의 피부는 한층 더 검게 변색되었고, 목 자체도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다. 눈동자는 탁하고, 반쯤 열린 입속은 시커맸으며 그 안에 생명의 숨결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악취도 대단했다. 누구나 눈을 가리고 코와 입을 막으며 총총히 사라져 갈 추한 몰골이다.  
사반각 동안 그것은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 이윽고 밤의 장막이 느릿느릿 시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니, 시신 속에서 솟구쳐 나온 어둠이 죽음의 악취와 함께 주변으로 확산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람과 마물의 구별이 되지 않는 봉마시가 찾아왔다. 소리는 없었다. 오구라 산의 망자들이 쑥덕대는 것인지, 소리없는 목소리가 깊고 깊게 갈림길에 울려 퍼질 뿐이다.

- 갑작스럽게.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사무라이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죽음의 악취를, 마치 맛을 보는 것처럼 가슴 가득 들이마시고 있는 것이다.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정도로 강력한 악취다.

- 넌, 너는 그런 말을 했으나...
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아니한다.
아무리 문드러지고 썩는다 해도 나는...
나는.
너를.

- 짤랑.
요령이 울렸다.
사무라이는 뭔가에 겁을 먹은 듯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두운 갈림길에 선명하게 떠오르듯이 백장속 사내가 서 있었다.
행자두건에 시주함을 목에 건 어행사 마타이치다.

- "사랑스럽습니까."
마타이치는 말했다.
"사랑스럽다는 마음이로군요."
"그, 그대는..."
"소행은 피안과 차안의 경계에 살며 명부의 끝자락을 오가는 걸식 어행사이옵니다."
"어행사이신가."

- 오키누, 오키누, 하며 사무라이는 시신에 얼굴을 비벼댔다.
"내가 이토록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리워하고 있는데."
"오키누는 신분이, 신분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사무라이와 꽃장수는 분명 신분이 다르지요."
"신분이 다르다 한들 사람은 사람 마음이 통하지 않을 리도 없을 터. 설령 부부가 되지 못한다 해도 서로 아끼고 보듬어주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오키누는 남자가 여자를 그리는 마음 따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지 뭔가."
"어차피 색향에 미혹된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올렸겠지요."
"그렇다. 인정을 베풀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처럼 그저 한때에 불과한 바람에 희롱당하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그렇게 말하지 뭔가. 내가 이토록 그리워한다고 하거늘."


- 사무라이는 썩은 살에 뺨을 비빈다. 파리가 일제히 흩어졌다.
"자, 보라. 나는 진심이다. 그 무엇보다 진지하지. 알았나 알아주었는가, 오키누여. 오키누여."
"오키누는...그 옛적 단림황후처럼 몸으로 깨우치게 한 것이군요.”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니다. 오키누는, 오키누는 나를 의심했다. 색에 눈이 어둡고 향에 미혹된 나의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그런 말을 했다. 거짓이다. 거짓이다. 나의 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허나 이로써 알았을 터. 나는..."
사무라이는 시체의 썩은 물을 마신다.
"나의 마음은 진실하다. 설령 어떠한 모습이 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 터. 그토록 말을 했는데, 그럼에도 오키누는 신뢰하지 않았다. 믿어주지 않았다. 허나 이제는 알았을 터..."

- "쉽사리 믿지 못하겠지요. 나리 자신도 의심하고 계셨겠지요."
"그렇다. 나도 의심했다. 단림황후의 고사대로 이 세상이 무상함을 안다면 집착도 떠나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은 분명 무상할 것이다. 만물은 변하고, 단 한 순간도 같은 때, 같은 형상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다르지. 그렇지 않은가, 어행사." 
사무라이는 썩은 물과 벌레로 더렵혀진 얼굴을 어행사에게 향했다.

 

- "유감스럽게도 소인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기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백장속이 말을 받았다.
"이른바 신념, 진리, 이상, 그처럼 형상을 지니지 않은 것은 세상이 바뀐다 해도 변치 않는다."
"그렇습니까."
"그럴 것이다. 모든 형상이 무상하다는 것도 섭리. 색즉시공이라 외치는 것도 섭리.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 해도,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섭리 그 자체는 불변의 것. 그렇다면 정애와 사모의 마음 또한 불변의 것이 아니겠는가."
"유감스러우나, 부모 없고 머물 곳도 없는 팔자로 태어났다면 그 또한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모를게다, 정녕 모를게다, 하고 사무라이는 중얼거리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 "나도 처음에는 의심했다. 그러나... 그러나..."
"부인에 대한 마음... 입니까?"

어행사가 물었다.
"그렇다. 나는 처를 사랑했다. 정녕 사랑했다. 마음 속 깊이 사랑했다. 그것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처가 죽어도 그 마음은 변치 않는다. 그것을 미련, 집착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시험에 드신 것이로군요."
어행사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사무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시험에 들었다. 자신이 반한 것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확인한 것이다. 앉고 서는 행동거지에 반했다면 목숨이 꺼지는 순간 끊어낼 수 있으리라. 겉모습, 외양에 반했다면 썩으면 끊어낼 수 있으리라. 영혼에 얽매여 있었다면 경야 자리가 지나면 마음도 가라앉으리라. 허나."
"허나, 나리는."
흐흐흐, 하고 사무라이는 웃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나는 진실로 처를 사랑하고 그리고 있었던 게다!"
"허나, 도중에 두려워지셨겠지요."

어행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서."

- "죄가 큰 분이십니다."
"무엇이?"
어행사는 요령을 스윽 치켜들었다.
사무라이는 비틀거리다 자세를 다잡는다.

 

- "주색에 빠진 세상의 사내들을 보라. 여인을 색의 도구로밖에아니 보고 있지 않은가. 색향에 취해 미추를 가치로 바꾸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야 사람의 도리를 세울 수 있겠는가. 그것이 인륜에 맞는 것인가. 추한 자는 열등한 것인가. 가난한 자는 열등한 것인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은 그러한 겉모습의, 언젠가는 변해버려 무로 돌아갈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아니할 터." 
"그렇지 않겠지요."
사무라이가 계속해서 말한다.
"설령 추하게 썩어가도, 설령 뼈가 되어 흩어진다 해도 변치 않는 마음이야말로 참인 것이다. 살아있는 자도 죽은 자도 상관없지. 나의 마음은 참이다. 순수한 진실의 마음인 것이다. 그 증거로나는 세 번을 거듭했고, 네 번째 역시..."

- 어행사는 요령을 치켜든 채 다시 앞으로 나온다.
"그대는 나와 처의 연분을, 나와 오키누의 인연을 비웃는 건가? 우롱하는 겐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행사가 말한다. 그리고...
"인연이란 산 자 속에만 있는 법. 죽은 이에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 "무, 무슨 소리."
"죽은 자는 물질일 뿐입니다. 그러니 썩지요. 백골은 진토로 변해가는 부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혼도 없고 마음도 없지요. 나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분명 생사의 경계란 어이없는 것입니다. 미추의 차이도 남녀의 차이도 사사로운 일일 것입니다. 허나." 

- "요모쓰히라사카의 이야기를 아시는지?"
어행사는 그렇게 물었다.
"불의 신을 낳고서 죽은 이자나미 신을 좇아 황천국에 내려선 이자나기 신의 이야기입니다."

- "잘 알고 있다. 옛 신은 명계에 내려서 나라 만들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온 몸에 구더기가 들끓고 머리에는 오이카즈치, 가슴에는 호노이카즈치, 배에는 구로이카즈치, 음부에는 호토이카즈치, 왼손에는 와카이카즈치, 오른손에는 쓰치이카즈치, 왼발에는 나리이카즈치, 오른발에는 후시이카즈치와 같은 벼락의 신이 거하여, 겁을 먹고 허둥지둥 도망쳐 돌아온다. 그런 이야기일 터."

"그렇습니다. 이자나기신은 황천의 추녀, 황천군, 광주 뇌신(雷神)을 피해 도망쳐 돌아와 명계로 이어지는 길, 요모쓰히라사카를 천인석으로 막았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럼, 나리..."

어행사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어찌하여 이자나기 신은 도망쳐 돌아온 것일까요."

- "훗."
사무라이는 웃었다.
"진실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설령 구더기가 들끓는다 해도, 성격이 천만 번 변한다 해도 처는 처. 형상에만 얽매어 있었기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더욱이 도망쳐 돌아오다니,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신이라면 해서는 안 될 행위일 터. 나는..."
사무라이는 다시 어행사에게 등을 돌리고 시신에 엎드려 그 봉발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러한 변심은 아니 한다."
"어리석군요."

- "좋아하고 있다. 모습은 이래도 진실로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망념(妄念)."
"뭐, 뭣이?"
사무라이는 녹아내린 시신에 볼을 가져다댄 채로 어행사를 노려보았다.
"몇 번이고 말씀을 올립니다만, 이러한 시체는 그저 물질이옵니다. 그토록 물질에 얽매이는 것은 망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터! 죽은 자는 이미 그곳에 없습니다." 


- "천만에. 있다! 이것은 오키누다. 오키누였던 물질이 아니라, 오키누 그 자체다. 썩어 녹아내리긴 했으나,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냐! 이것이 오키누다. 여,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그러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한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겠다. 설령 영혼이 빠져나갔다 해도 이것이 오키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안 속는다. 안 속는다!"
"어리석은 분. 어리석은..."

어행사는 웃었다.
"사람에게 혼백 따위는 없소!"
"뭣이!"
"더욱이 명계라는 것은 없소이다!"

- 짤랑.
요령 소리.

- "살아있는 몸 그 자체가 혼백이옵니다. 명부는 바로 살아남은 자의 심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죽은 자는 신속히 당신의 마음속으로 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자의 존엄을 세우지 못할 터. 천인석이란 이 현세와 당신의 마음 사이에 놓인 바위. 그것을 멋대로 치워서는 당신이 버티어갈 수 없게 될 뿐이옵니다. 당신의 일방적인 망집으로 요모쓰히라사카를 지난다면 여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자신 속에 있고, 현세로는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그렇기에 시신은 물질이라 마음먹는 것이 법도인 게지요."

- "허, 허나 나는... 시신도 싫어할 수가 없다. 멀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멀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행사는 엄한 목소리를 발했다.
"이자나기 신이 도망쳐 돌아온 것은 추한 처가 싫었기 때문이아닙니다."
"그,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사무라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이자나기 신은 쫓겨서 돌아온 것입니다. 신은 금기를 깨셨소. 그리고 죽은 처, 이자나미 신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 "예, 분노한 것은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만 이자나미 신입니다."

"어, 어째서?"
"보지 말라고 했는데 보았기 때문이지요."

- "사람은 살아있기에 사람. 그것은 신 역시 마찬가지. 죽은 후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 것은 예의 법도를 모르는 자. 자신이 추하게 썩어가는 것이 가장 싫은 것은 죽은 자 자신. 그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야말로 진실로 사랑했던 당신이었을 터."
"아,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그런 것도 알지 못하셨습니까, 나리, 방약무인도 정도가 있습니다. 그 오키누도, 시즈노도, 도쿠도, 그리고 부인도 분노로 슬퍼하고 계십니다!"

- 정말입니다. 어행사는 요령을 사무라이의 코앞에 들이댄다.

"거짓이라 하신다면 물어보는 게 좋겠지요."
"묻는다?"


- 사무라이는 어행사에게 얼굴을 향한 채
서서히 시선을 시신에 떨어뜨렸다.
썩은 여자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그 문드러진 입술을 부들거렸다.
그리고 한마디.
내게 치욕을 입히지 말라, 하고 말했다.

- "어행봉위!"
짤랑.

- 그 후, 몹시도 기묘한 뒤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 그때까지 야마오카 모모스케는 옥천 스님과 함께 나무 뒤에 숨어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 스님은 사무라이가 쓰러지자 재빨리 촛불을 켜고 갈림길로 뛰어나갔다. 모모스케는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불제자의 말에 따르면, 여하튼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옥천 스님 자신은 소상한 설명을 일절 듣지 못했던 모양이나, 좌우지간 갈림길을 찾아온 자가 죽어 쓰러지게 되면 즉시 움직이라, 마타이치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모모스케 또한 아무 언질도 듣지 못해 그저 묵묵히 거들기만 할 뿐이었다.
불제자가 지고 있었던 덩굴바구니에는 놀랍게도 사내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어떤 자의 시신인지, 왜 불제자가 그러한 것을 지고 있었는지, 설명은 없었다.

- 마타이치는 앞으로 고꾸라져 죽어 있는 사무라이를 일으켜 세우고 그 손가락을 펼쳐서는 쥐고 있던 단도를 빼내고, 그 대신 칼집에서 뽑은 대도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어행사는 사무라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단도 자루를 그 누구인지도 모를 시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싸우다 죽은 모양새를 만든 것이다.

 

- 모모스케가 가장 놀랐던 점은 여자의 시체가 진짜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썩은 시체였다. 옥천 스님에게 질리도록 들은 연유도 있어서, 모모스케는 그것이 오류의 변장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류는 오늘 하루만 시체 바로 곁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그 한마디는 아마 오류가 했던 말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그 무렵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어 있었고, 가타비라가쓰지는 코를 베어가도 모를 정도의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해도, 무엇을 말한다고 해도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모모스케에게 그것은 시신의 말로 받아들여졌다. 아마 죽은 사무라이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 이튿날 아침.
교토 거리에서는 큰 소동이 일었다.
그리고 모모스케는 계략의 의도를 반쯤 이해했다. 거리에 흐르는 소문을 연결하자 가까스로 마타이치가 그린 그림이 보인 것이다.

- 집념의 요리키와 연쇄 시체투기 사건의 범인은 서로를 칼로 베고 함께 쓰러졌다.
그러한 구도였던 것이다. 분명히 누가 보아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 모모스케는 그래도 조달할 수 있었던 것만도 대단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뒷세계에서 사는 자들이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설마 범인을 만들어 내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불제자가 말했다.
"마타 씨가 생각하는 것은 모르겠습디다. 그 여자도 어차피 비슷한 것이겠지요. 그건 분명 보름 전에 작업에 들어간 날부터 준비해뒀을 겁니다. 오류가 찾아온 행려 시신일 듯 싶은데." 

- "하지만 과연 괜찮을까요?"
모모스케는 시신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옥천 스님도 그 점을 알아챈 듯 "뭐, 나도 처음에 주저했지요" 하고 말했다.

- "괜찮을 거요. 마타 씨가 그러지 않습니까. 시체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못해먹는다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마타 씨는 결단을 내리고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사내의 시체도 여자의 시체도 찜찜한 점이 없는 자로는 생각이 안 되니까요. 뭐, 악당이었을 겁니다. 어디서 무얼 하다가 길바닥에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험한 대접을 받으며 무연불이 되기밖에 더했겠소. 마지막 한순간에 다른 이의 도움이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할 수밖에."

- '과연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하고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그걸 물으려 모모스케가 고개를 들자, 옥천 스님은 이마의 땀을 닦고 "여어, 오류로군" 하고 말했다. 모모스케가 돌아보자 동백나무 아래에 오류가 서 있었다.
찬찬히 뜯어봐도 청초한 마을처녀로밖에는 안 보이는 차림새다. 성인 남자를 가지고 놀고, 어디에선지 모르게 시체를 조달해오고, 더구나 시신으로 변장해 사람들을 속일만한 짓을 할 소악당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비쳐 보일 정도로 햐얀 살결의 처자는 생긋 웃으며 모모스케에게 눈인사를 했다.

- "그런 듯합니다."

오류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부인은 도리베노에서 화장하기로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요리키 나리, 부인이 불에 태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듯해요. 그래서..."
"그럼 시신을 훔친 것은 남편 자신이?"
그랬었구먼, 하고 옥천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그랬지요. 사사야마 씨는 부인의 망해를 저택 뒤편 움막에 감추고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예뻐했다고 합니다."

-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상해가니, 그리하면 마음도 떠날까,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단림황후의 고사에 견주어 세상의 무상함을 몸으로 처절하게 느끼면 인륜을 벗어난 자신의 악행도 잦아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 "싫어지지 않았던 게로군."
"그런 듯하더군요."

오류는 씁쓸하게 말했다.
"썩고 문드러져도, 사사야마 씨는 부인이 싫어지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자 그런 자신이 두려워져서 완전히 썩어버린 부인의 유골을 갈림길에 버렸다고 합니다." 

- "어째서 죽인 겁니까?"

모모스케가 물었다.
"시험해본 겁니다."

"시험... 해봤다니?"
"부인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게이샤 따위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요. 시즈노 씨에게 기울고 있는 마음은 거짓이다, 이것은 색향에 미혹 당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확인하기 위해 몸값을 치르고..." 


- 오류는 불제자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람은 가지각색이지요. 사사야마 씨는 결국, 또 두려워져서 유체를 갈림길에 버렸어요. 그리고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그 요리키 나리도 광인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요."

- 정과 무관하다고.
"오키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사야마 씨가 범인이란 것, 그와 동시에 사사야마 씨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고뇌 끝에..."

- "항의하려는 뜻이었을까요."

모모스케가 물었다.
"살아서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부인에게 면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고요. 죽으면 단념하리라. 그렇게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때 이미 사사야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군요. 죽어도 썩어도, 자신의 애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로군."

- "소사대의 장인은 어렴풋이 알아차리고는 있었지요. 하지만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더욱이 함부로 파헤친들 무슨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위가 성실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사실은 착한 인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게다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모든 것은 죽은 자신의 딸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범인이 요리키라면 봉행소의 권위가 실추되지요. 방치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야부네에게 의뢰한 것입니다. 범인인지 아닌지 확인해주게. 범인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말려주게. 다만 소문나지 않게 해주게..."
"그래서 그 작업이 필요했던 거였군."

- "그 정도라면 나름 큰 공이지. 범행도 막을 수 있고. 하지만 할복할지 어떨지는 몰랐던 일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에도 최고의 모사꾼인 거지요."

오류가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할복시킬 생각은 없었던 듯하지만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수단은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 거기서 오류는 사당 안을 흘낏 들여다보았다.
"어행사 님은 어찌하고 있는지... 조금은 기운을 되찾았을까요."
"마타이치 씨가 어떻게 됐습니까?"
모모스케는 당황해서 물었다.
"그 이후로 계속 우울한 모양이에요."
"마타이치 씨가?"
모모스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사당 안을 살펴보았다. 광륜이 없어진 아미타불 앞에 행자두건이 놓여 있다. 옆에는 시주함이 팽개쳐져 있다.

- "마타이치 씨, 저기..."
"선생이시오?" 

잔머리 모사꾼은 패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는지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딱히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모모스케 쪽을 본 마타이치는 약간 해쓱해진 얼굴이었다.

- 마타이치는 툭 던지듯 말했다.
"슬프군요. 인간이란 존재는."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소생은..."
"뭡니까?"
"소생은... 선생, 그 요리키의... 그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마타이치는 이 말을 하고는 짤랑, 요령을 울렸다.

 

- <가타비라가쓰지>



  

 


 

 

개인적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곡 

 

死神舞踊

사신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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