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집 3

일루젼 2024. 4. 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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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햇살과나무꾼

빌헬름 페데르센 / 카이 닐센 / 해리 클라크 / 아서 래컴 / 고든 프레드릭 브라운
출판 : 시공주니어 
출간 : 2011.11.20


       

마음이 산란할 때는 동화를 읽는 편이다. (이 책을 읽은 건 작년 가을의 일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어른이 쓴 이야기'라는 아이러니가 좋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주 소비층과 생산층이 이렇게까지 확연하게 분리되어 있는 문화 영역이 또 있을까?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의 영역 또한 향유층 중 일부는 직접 창작 활동을 즐긴다. 그러나 동화는 언제나 '어른', 적어도 '청소년'이 '유아동'에게 시혜를 베푸는 형태로 제공된다. 

 

이는 아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일까? 

그것들을 '어른이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은 형태로' 다듬어야만 인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의 꿈'을 '동화'라고 부르는 셈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엿보기 위해서. 

           

   


   

 

카이 닐센 <옷깃>

 

    

 

- 19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을 금지했고, 아이들은 대신 길거리에서 성냥이나 신문을 팔며 노동을 했다. 당시에는 미성년 노동이 흔한 상황이었다. <성냥팔이 소녀> 속 주인공도 성냥을 팔며 먹고사는 가난한 아이로 등장한다. 안데르센이 하루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한 안데르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난 세기 동안 명망 있는 작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 18세기말에서 19세기는 낭만주의 문학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안데르센은 합리적, 이성적, 논리적, 현실적인 것들과 거리를 두고 감성적, 감각적, 비현실적인 것들을 찾아 신비로운 분위기로 담아내는 낭만주의 문학에 영감을 받았다. 이에 따라 환상과 낭만,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며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당시의 주류와 문학사적 흐름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색깔을 담은 낭만주의 문학을 만들어 냈다. 작품 안에 '어린이'를 넣었고, 사람들의 일상어를 익살스러운 구어체로 바꾸었다. 

- 안데르센 번역가 팻 쇼 이베르센은 '안데르센은 대부분의 낭만주의 작가와는 달리 자신의 상상력을 엄격히 규제했다. 낭만주의자들이 독특하고 기괴한 것에 매료되었던 반면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었다'고 전한다. 안데르센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완성한 것이다.

 

 


 

 

- 코펜하겐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둑 가까이에 창이 많은 커다란 붉은색 건물이 있습니다. 창문마다 봉선화와 풍나무 화분이 놓여 있지만, 창문 너머는 볼품이 없습니다. 이곳은 가난한 노인들이 사는 양로원입니다. 

-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 땅이 자꾸만 밑으로 꺼지자 사람들은 꽃과 장난감으로 아이를 구덩이로 꾀어 아이가 먹고 놀고 있을 때 묻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둑은 단단해지고 이내 아름다운 잔디로 뒤덮였다지요. 지금 저 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그 전설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알고 있다면, 그때 그 아이가 땅 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겠지요. 풀잎에 맺힌 이슬은 뜨거운 눈물처럼 보였을 테고요. 아이들은 옛날에 적군이 마을을 포위했을 때 이 둑으로 말을 몰고 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깨끗이 죽겠다고 맹세했던 덴마크 왕의 이야기도 모릅니다. 그때 남자들과 여자들이 뛰쳐나와 눈 쌓인 둑 바깥쪽을 기어오르는 흰 옷의 적들에게 펄펄 끓는 물을 쏟아부었던 일도요.  

 

- 마음껏 놀려무나, 여자아이들아! 은총으로 가득한 시간은 금세가 버린단다! 견신례를 받을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구나. 너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걷고 있고, 어머니는 네 하얀 드레스를 마련하느라 꽤 큰돈을 썼겠지. 비록 물려받은 커다란 헌 옷을 고친 것일 테지만! 너는 바닥까지 치렁거리는 빨간 어깨걸이도 두르고 있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네 어깨걸이가 어른 것이었음을 눈치채겠지. 너는 예쁜 드레스와 하느님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 둑 위를 한가로이 거니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암울한 날들과 함께 세월은 흘러간단다. 하지만 젊은 마음까지 잃지는 않지. 

 

- 그 나무는 해마다 새잎과 새 가지를 틔우지만 사람의 마음은 새싹을 틔울 수 없단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북쪽 나라보다 더 많은 먹구름이 흘러가지, 가엾은 여자아이야! 네 신랑과 함께 지낸 신혼 방은 관으로 바뀌고, 너는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양로원 작은 방의 창턱에 놓인 봉선화 화분 너머로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구나. 바로 눈앞에서 네 인생이 되풀이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구나. 

- 이것이 할머니의 눈앞에 펼쳐지는 인생살이지요. 햇살 가득한 둑 위에서는 발그레한 뺨에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이 하늘을 나는 조그만 새들처럼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있습니다.

 

- <양로원 창가에서>

 

- 가로등은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밀랍 양초가 없으면 겨우 얻은 내 능력도 아무 쓸모가 없어! 이 집은 너무 가난해서 고래 기름이랑 동물 기름 양초뿐인걸. 그걸로는 아무것도 못 해!" 

- 어느 날 타다 남은 밀랍 양초 동강 한 다발이 지하실로 들어왔어요. 큰 동강들은 불을 밝히는 데 썼고, 작은 동강들은 할머니가 바느질할 때 실에 칠했어요. 이렇게 밀랍 양초가 많이 생겼는데도 가로등의 몸 안에 작은 동강 하나 밝혀 주지 않았답니다.


- 가로등이 말했어요.
"난 신비한 능력을 얻고도 이렇게 멍하니 있어야 하는 걸까? 내 속엔 없는 게 없어. 하지만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 줄 길이 없는걸. 나는 이 흰 벽을 아름다운 벽걸이든 깊은 숲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어. 어휴, 그런데 저 두 사람은 그걸 몰라, 모른다고!" 

-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은 바로 늙은 야경꾼 할아버지의 생일이었는데, 할머니가 가로등 옆에 가서 빙긋 웃으며 말했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축하 조명을 장식해야겠다!"
가로등은 함석으로 만든 머리를 짤가닥거렸어요.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드디어 저 부부를 위해 촛불을 밝힐 수 있어!'

- 그런데 할머니는 밀랍 양초가 아닌 고래 기름으로 불을 밝혔어요. 가로등은 밤새도록 환히 타올랐어요. 하지만 별이 준 선물, 선물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선물은 영영 묻히게 되리라는 걸 가로등은 알았죠. 가로등은 꿈을 꾸었어요. 가로등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면 꿈꾸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 꿈속에서 늙은 부부는 세상을 떠났고, 가로등은 주물공장에서 녹게 되었어요. 그래서 가로등은 시청의 '36인 위원회' 앞에서 조사를 받을 때만큼이나 불안했죠. 물론 마음만 먹으면 자기 몸에 녹을 만들어 퍼석퍼석한 먼지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어요. 이윽고 가로등은 주물 가마 속에 들어가 밀랍 양초를 꽂는 훌륭한 주물 촛대가 되었어요. 그 촛대는 천사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꽃다발 한가운데 밀랍 양초를 꽂게 되어 있었죠. 촛대는 어느 방의 초록빛 책상 위에 놓였어요. 그 방은 아주 아늑했고 책들이 가득했어요. 벽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었고요. 그곳은 어느 시인의 방이었답니다. 이윽고 시인이 생각하고 쓰는 모든 것이 주위에 펼쳐졌어요. 방은 처음에 깊고 어두컴컴한 숲이 되었다가,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황새가 거드름을 피우며 걷고 있는 풀밭이 되었어요. 그러다가는 파도치는 넓은 바다를 달리는 배의 갑판이 되었죠! 

- 늙은 가로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어요.
"나한테 이런 능력이 숨어 있었다니! 하마터면 녹여 달라고 할뻔했잖아! 하지만 저 부부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 돼. 저 부부는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해. 저 두 사람은 나를 자식처럼 생각해. 늘 나를 닦아 주고 기름을 부어 주며 아껴 주는걸. 나를 '빈 회의' 그림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긴다고!"

- 이때부터 늙은 가로등은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느긋해졌답니다. 마음씨 고운 늙은 가로등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죠.


- <늙은 가로등>

 

- 마을 변두리 연못에서 무슨 소동이 벌어졌나 싶을지 모르지만, 딱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기분 좋게 물에 떠 있던 오리와 물속에 머리를 박고 있던 오리들(오리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도 물에 떠 있을 수 있죠)이 한꺼번에 물가로 올라간 것뿐이에요. 축축한 땅에 오리 발자국이 찍히고 오리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어요. 수면도 세차게 일렁였고요. 방금 전까지는 물가의 나무며 덤불, 구멍투성이 박공지붕과 제비집이 있는 오래된 농가, 특히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물 위에 가지를 늘어뜨린 담벼락의 장미 나무가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에 고스란히 비쳐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어요. 물론 전부 거꾸로 비치긴 했지만요.

 

- 그런데 수면이 일렁거리자 각각의 그림이 서로 뒤섞이더니 끝내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날아오른 오리 몸에서 떨어진 깃털 두 개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갑자기 바람이라도 부는 듯 빨리 움직였어요. 하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고 깃털은 금세 멈추었지요. 수면이 다시 거울처럼 잔잔해졌어요. 이윽고 제비 집이 있는 박공지붕이 수면에 뚜렷이 비치고 장미꽃도 보이기 시작했어요. 물에 비친 장미 한 송이 한 송이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장미꽃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어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보드라운 꽃잎 속까지 햇살이 비치면 장미꽃은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죠. 그럴 때 장미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우리가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 된답니다. 

- "산다는 건 정말 즐거워! 내 소원은 딱 하나, 해님한테 뽀뽀하는 거야. 저렇게 밝고 따뜻하잖아. 그래, 저 물속에 있는 장미한테도 뽀뽀해 주고 싶어. 저 장미들은 우릴 꼭 닮았거든. 그 아래 둥지 속에 있는 귀여운 새들한테도 뽀뽀해 주고 싶어. 참, 우리 위에도 몇 마리 있었지. 머리를 내밀고 귀여운 소리로 짹짹 울고 있어. 아직 엄마, 아빠처럼 깃털이 다 자라진 않았구나.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좋은 이웃뿐이야. 아, 산다는 건 정말 멋져!"

- 위아래에 있는 새들은(물론 아래에 있는 새는 물에 비친 그림자였지만) 새끼 참새였어요. 아빠도 엄마도 참새였고요. 이 참새들은 작년에 제비가 버리고 간 둥지를 보금자리 삼아 살고 있었죠. 새끼 참새가 연못에 떠다니는 오리 깃털을 보고 물었어요.

"저기 헤엄치는 건 새끼 오리예요?"

엄마 참새가 대답했어요.
"뭘 물을 때는 먼저 생각을 좀 하렴. 저게 깃털인 걸 보면 모르겠니? 저건 내가 입고 있고 너희도 곧 입게 될 살아 있는 옷이야. 하지만 우리 옷이 훨씬 더 부드럽지. 저 깃털을 우리 집에 가져다 놓는 게 좋겠구나. 틀림없이 따뜻할 거야. 그건 그렇고, 오리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놀랐을까? 물속에 뭐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래, 나 때문은 아닐 거야. 아까 너희한테 말할 때 '짹짹!' 소리가 꽤 크긴 했지만! 저 멍청한 장미꽃들은 알고 있어야 되지만, 보나 마나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무튼 그저 자기네 얼굴이나 보고, 자기네 냄새나 맡고 있다니까. 어유, 저런 이웃은 딱 질색이야, 정말." 

- 장미꽃이 말했어요.
"위쪽의 귀여운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릴 들어 봐요. 벌써 노래를 하려고 해요. 아직은 못 하지만 곧 하게 되겠죠. 그럼 얼마나 즐거울까! 저렇게 명랑한 이웃이 있어서 정말 기뻐요."

- 그때 말 두 마리가 물을 먹으려고 달려왔어요. 한 말에는 농부의 아들이 타고 있었는데, 옷을 벗고 검은 모자만 쓰고 있었어요. 챙이 넓은 커다란 모자였죠. 아이는 작은 새처럼 휘파람을 불며 연못 한복판으로 말을 몰고 들어갔어요.  

 

- "바로 그게 꽃의 일생이야. 그야말로 눈과 코를 위해 사는 거지. 어때, 너희도 잘 알았지!"

- 해 질 녘이 되자 후덥지근한 연못 위에서 모기가 춤을 추고 구름이 새빨갛게 물들었어요. 나이팅게일은 장미꽃을 찾아와 아름다운 것은 따뜻한 햇빛 같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노래해 주었어요. 하지만 장미꽃은 나이팅게일이 스스로를 노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정말 그랬는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장미꽃은 나이팅게일이 자기들에게 노래를 바친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다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으며 새끼 참새들도 다 자라면 나이팅게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 새끼 참새들이 말했어요.
"난 저 노래가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아. 그런데 딱 하나 모르는 게 있어, 아름다운 게 뭐야?"
그러자 엄마 참새가 대답했어요.
"쓸데없는 거란다! 그냥 겉모습 같은 거지. 맞은편에 비둘기 가족이 사는 저택이 있는데, 저택 사람들이 날마다 마당에 콩이나 곡식 낱알을 뿌려 준단다. 나도 가끔 같이 먹는데, 너희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지! 그 저택에는 목이 초록색이고 머리에 관을 쓴 새 두 마리가 있단다. 그 새가 꼬리를 펼치면 커다란 수레바퀴만 해지는데, 어찌나 알록달록한지 눈이 팽팽 돌 지경이야. 그 새 이름은 공작인데, 아름답다는 건 그런 새한테 쓰는 말이지. 하지만 깃털을 조금만 뽑아 버리면 우리랑 별로 다르지 않단다. 그 새가 몸집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면 내가 깃털을 잡아 뜯었을 거야." 
아직 깃털이 다 나지 않은 가장 어린 새끼 참새가 말했어요.
"나도 잡아 뜯을 거야!"

- 농가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고, 건강하고 부지런했죠. 집 안도 늘 깨끗했고요. 일요일 아침, 젊은 아내는 밖에서 가장 예쁜 장미꽃을 한 다발 꺾어와 컵에 꽂아 옷장 위에 얹어 두었어요.
"덕분에 일요일다워졌는걸!"
남편은 이렇게 말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입맞춤을 했죠. 이어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성가집을 읽었어요. 햇빛이 창으로 들어와 싱싱한 장미꽃과 젊은 부부를 따스하게 비추어 주었답니다. 

- "저 모습도 이젠 지겨워!"
둥지에서 방을 들여다보던 엄마 참새는 그렇게 말하고 포르르 날아가 버렸어요.

- 한 비둘기가 다른 비둘기에게 말했어요.
"저기, 가슴 깃을 부풀린 비둘기 좀 봐요! 얼마나 게걸스레 콩을 먹는지! 게다가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먹고 있다고요! 꾸루루, 꾸루루! 저 꼴 좀 봐요, 볏은 다 떨어지고! 저 못생기고 밉살맞은 동물 좀 보라고요! 꾸루루, 꾸루루!"
그러자 비둘기들의 눈이 일제히 심술궂은 붉은빛으로 반짝였어요.
"한데 모여! 한데 모여! 저 작은 잿빛 새! 저 작은 잿빛 새! 꾸루루, 꾸루루, 꾸루루!"

- 이런 수다가 끝도 없이 이어졌어요. 아마 천년이 지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겠죠.  

 

- <이웃>

 

- 아, 말이 달린다! 달려! 번쩍거리는 근사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꼬마 투크를 앞자리에 앉히고 갑옷에 달린 깃털 장식을 나부끼며 말을 달리고 있었어. 기사는 숲을 빠져나가 보르딩보르(발레마르 왕 시대에 번성한 도시)라는 옛 도시로 말을 몰았어. 그곳은 크고 번화했는데, 높은 탑들이 왕의 성 위로 솟아 있고 창으로 흘러나온 불빛은 멀리까지 비치고 있었지. 성에서는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했고, 발레마르 왕(신성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던 덴마크를 독립시키고 발레마르 왕조를 세웠다)도 아름다운 궁녀들과 함께 춤을 추었어.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르자, 도시와 왕의 성이 가라앉고 높은 탑들도 차례차례 가라앉았어. 나중에는 성이 있던 언덕 위에 탑 하나만 달랑 남아 있을 뿐이었지. 마을은 작고 초라해졌고. 학생들이 책을 옆에 끼고 와 "인구는 2천 명!" 하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 꼬마 투크는 침대에 누워 있었어. 꿈을 꾸는지 깨어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지. 그런데 꼬마 투크 옆에 누군가 서 있었어. 그 사람이 "투크, 투크!" 하고 불렀어. 워낙 작아서 해군학교 학생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뱃사람이지 뭐야.

- "또 나는 익살스러운 시인(코르쇠르 출신의 작가 '바게센'을 가리킨다)도 낳았어요. 시인들이 다 익살스러운 건 아닌데 말이죠. 나는 세계를 한 바퀴 도는 배를 띄우려고도 했어요. 뭐, 실제로 하진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요. 보세요, 나한테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난답니다. 시의 문 옆에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 있거든요!" 

- 꼬마 투크는 붉고 푸른 장미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단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물 맑은 피오르드 해안의 푸른 절벽이 보였지. 절벽 꼭대기에는 높은 뾰족탑 두 개가 솟아있는 오래된 큰 성당이 있었어. 절벽에서는 샘물 몇 줄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금관을 쓴 늙은 왕이 있었어. 그 사람은 샘의 로아르 왕이지. 그곳은 지금의 로스킬레(셸란 섬 동부에 있는 옛 도시로, 로스킬레는 '로아르의 샘'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성당에 덴마크 왕과 왕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근대 의회의 기초가 된 신분제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이고 말이야. 역대 덴마크 왕과 왕비들이 이 절벽 윗길을 지나 오래된 성당 안으로 손을 맞잡고 들어갔어. 하나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지.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샘물이 일렁거렸어. 꼬마 투크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보고 듣고 있었단다. 

- "꾸악꾸악. 주둥이로 들어갔다가 다시 주둥이로 나와야 하잖아! 꾸악꾸악! 옛날에는 병 밑바닥에 팔딱대는 메기가 살았지만 지금은 발그레한 뺨의 팔팔한 학생들뿐이야! 다들 그리스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고 있지. 꾸악꾸악!"


- 하지만 투크는 이번에도 잠을 자면서 꿈 비슷한 걸 꾸었어. 푸른 눈에 곱슬곱슬한 금발인 어린 여동생 구스타베가 순식간에 꽃다운 처녀가 되었지. 게다가 날개 없이도 날 수 있었어. 그래서 둘은 셸란의 초록 숲과 푸른 호수 위를 날아갔단다.


- "들어 봐, 꼬마 투크! 닭 울음소리야! 꼬꼬댁 꼬꼬! 닭들이 쾨게 마을에서 날아올랐어. 꼬마야, 너는 커다란 양계장을 갖게 될 거야. 이제 배를 곯는 일은 없어! 앵무새도 맞히게(덴마크에서 '앵무새를 맞히다'는 말은 '운이 좋다', '재수가 좋다'라는 뜻이다) 해줄게! 너는 부자로 행복하게 살 거야. 너의 집은 발레마르 왕의 탑처럼 높고 프레스퇴 마을 모퉁이에 있는 것과 같은 대리석 조각상들로 꾸며질 거야. 어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이름은 유명해져서 코르쇠르 항을 떠난 배처럼 온 세상을 돌아다니게 될 거라고. 로스킬레 마을에서 로아르 왕이 "신분제 회의가 열렸던 곳이라는 것도 기억해 둬!"라고 말씀하셨지? 너는 거기서 똑똑하고 야무지게 말할 거야, 꼬마 투크. 그리고 나중에 무덤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 거야.”

- 그러고는 잠이 깼어. 벌써 환한 아침이었지. 꼬마 투크는 꿈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게 더 나아. 인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서는 안 되니까.
꼬마 투크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책을 읽었어. 읽는 족족 아주 잘 외워졌단다. 그때 빨래 할머니가 문 안으로 얼굴을 디밀고는 꼬마 투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어제는 고마웠다, 친절한 꼬마야! 하느님은 네가 꾼 좋은 꿈들을 모두 이루어 주실 거야!"
꼬마 투크는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어. 하지만 하느님은 모두 훤히 알고 계신단다.


- <꼬마 투크>

 

-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그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별로 흔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선생도 흔해 빠진 인간은 아니잖습니까? 선생도 알다시피 저는 어릴 때부터 줄곧 선생의 발자취를 밟아 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저는 당장 제 길을 걷기 시작했죠. 저는 지금 더없이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답니다. 그래요, 선생도 언젠가는 죽을 테니까요! 또 이 나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고향이란 늘 그리운 법 아닙니까? 선생한테 다른 그림자가 생긴 건 알고 있어요. 제가 그 그림자나 선생께 빚진 게 있나요? 있다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 "세상에, 이럴 수가! 정말 너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옛날 그림자가 인간이 되어 다시 돌아오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림자가 말했습니다.
"자, 얼마면 되는지 말씀하시죠! 저는 아무한테도 빚지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럼 얘기하죠."
그러고는 학자의 발밑에 푸들처럼 누워 있는 새 그림자의 팔을 에나멜 가죽 구둣발로 꾹 밟았습니다. 아마도 시건방진 마음에서거나 새 그림자를 자기한테 붙이고 싶어서였겠죠. 누워 있는 새 그림자는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얌전하게 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의 몸이 되어 독립할 수 있는지 궁금했으니까요. 

- 그림자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맞은편 집에 누가 살고 있었을 것 같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바로 시였어요! 저는 그 집에서 3주 동안 머물렀어요. 그리고 그 3주 사이에 사람들이 3천 년에 걸쳐 시로 노래하거나 책으로 쓴 것을 모조리 읽은 것과 똑같은 효과를 봤죠. 절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걸 봤어요. 모든 걸 알고 있다고요!"  
학자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시였단 말이지! 흐음, 역시. 시는 가끔씩 대도시에 숨어 살지! 그래, 시였군! 음, 나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를 봤어. 하지만 그때는 어찌나 졸리던지! 시는 발코니에 서서 오로라처럼 빛나고 있었어. 자, 계속 이야기해 봐!"

-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림자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저는 살이 많이 붙었답니다. 누구나 그래야겠지만, 선생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군요. 그러다가 병에 걸리겠어요. 여행을 하세요. 저도 올여름에 여행을 떠날 생각인데,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길동무가 꼭 있었으면 하거든요. 혹시 내 그림자로서 따라올 생각이 있나요? 선생과 함께라면 저도 아주 기쁠 거예요. 여비는 제가 대겠습니다!" 
학자는 발끈했습니다.
"말이 너무 지나치군요!"
그림자가 말했습니다.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여행은 틀림없이 선생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어때요, 내 그림자가 되는 게? 여비는 모두 공짜예요!"
학자가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세상은 그런 법이고 언제까지나 그럴 테죠!"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고 가 버렸습니다.

- 그 뒤로도 학자는 일이 풀리지 않았고 늘 걱정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보통 사람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마침내 학자는 정말로 병이 들고 말았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선생은 꼭 그림자 같아요!"
학자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마침 자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 이윽고 그림자가 다시 찾아와 말했습니다.
"온천에 가셔야겠어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오랜 친구인 제가 데려다 드리죠. 여비는 제가 댈 테니 선생은 여행기를 써서 저를 즐겁게 해 주세요. 사실 저는 온천에 꼭 가고 싶어요. 수염이 잘 자라지 않아서요. 이것도 병이겠죠. 수염은 꼭 길러야 한다고요! 잘 생각해 보고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세요. 길동무처럼 함께 여행해요!" 

-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림자는 주인이 되고, 주인은 그림자가 되어서요. 두 사람은 늘 함께 마차를 타고 함께 말을 몰고 함께 걸었습니다. 그때그때 해의 위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고 나란히 서기도 했죠. 그림자는 늘 잊지 않고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학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워낙 마음씨가 곱고 온순한 사람이었으니까요. 

- 어느 날 학자가 그림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길동무가 되었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 형제의 인연을 맺고 서로 말을 놓고 지내는 게 어떨까요? 그러면 한결 더 친해질 텐데요." 
이제는 완전히 주인 행세를 하는 그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아주 솔직하고 친절한 말이야! 그렇다면 나도 솔직하고 친절하게 말하지. 학자니까 잘 알겠지만, 인간의 본성은 참으로 묘해. 어떤 사람은 회색 종이에는 손도 안 대려고 하지. 만지면 속이 메스껍다나? 또 어떤 사람은 손톱으로 유리창을 긁는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지. 그런데 선생이 나한테 '너'라고 할 때마다 나도 그런 기분이 들거든. 지난날 내가 선생 옆에서 지낼 때처럼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라고. 선생도 알겠지만 이건 느낌이지 자랑이 아니야. 선생은 결코 나를 '너'라고 부를 수 없지만, 나는 선생을 '너'라고 부르겠어. 그러면 선생 생각의 절반은 이뤄지는 셈이니까!" 

- 이렇게 해서 그림자는 옛 주인을 '너'라고 불렀답니다.
학자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 나 보고는 '너'라고 부르지 말라면서 자기는 나를 '너'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지요.

- 두 사람은 어느 온천에 닿았습니다. 그곳에는 외국인이 많이 와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름다운 공주도 있었습니다. 공주는 모든 것이 너무 잘 보이는 게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불안했답니다. 

 

- <그림자>

 

- 방울을 돋보기로 살펴보고 있었어요. 아이고, 물방울 속에 뭐가 이렇게 우글우글, 득실득실하는지! 수없이 많은 작은 생물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서로를 끌어당겨 잡아먹고 있었어요. 

- "정말 끔찍하군! 어떻게 하면 이 녀석들이 제 할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노인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법밖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녀석들이 좀 더 또렷하게 보이도록 색을 입혀야겠어!"

 

- 노인은 물방울에 붉은 포도주 같은 액체를 조금 떨어뜨렸어요. 그런데 붉은 포도주처럼 보였던 건 사실 한 방울에 2 스킬링(덴마크의 옛 화폐 단위)이나 하는 최고급 마녀의 피였어요. 이윽고 이상한 생물들의 몸이 죄다 장밋빛으로 변했어요. 그러자 물방울은 마치 사나운 벌거숭이가 들끓는 동네 같아졌답니다.

- "대체 그게 뭔가?"
이 마법사는 이름이 없었는데, 그것이 이 마법사의 장점이었어요.
우글득실 선생이 대답했어요.
"음, 뭔지 알아맞히면 이걸 자네한테 주겠네! 하지만 쉽지 않을 걸세."

- 이름 없는 마법사는 돋보기로 물방울을 들여다보았어요. 정말로 온 동네 사람이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죠.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들이받고 꼬집고 잡아당기고 물어뜯고 할퀴는 모습이었어요. 맨 밑에 있던 사람은 맨 위에 올라서려 했고 맨 위에 있던 사람은 맨 밑으로 끌려 내려갔죠. 

 

- "뭐야, 저 녀석! 나보다 다리가 길잖아! 쳇! 잘라 버려! 저쪽에 있는 녀석, 귀 뒤에 조그만 혹이 있군. 별것 아닌 작은 혹이지만 아프다고! 좋아, 좀 더 아프게 해 줘야겠어!"
그러면서 다들 한꺼번에 그 사람한테 덤벼들어 잡아 뜯더니 작은 혹을 핑계 삼아 몽땅 먹어 치우지 뭐예요. 한 사람은 젊은 아가씨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어요. 그 사람은 오로지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랐죠. 하지만 그 아가씨도 다른 사람들 앞으로 끌려 나왔어요. 그러자 모두들 우르르 달려들어 그 아가씨를 할퀴고 잡아 뜯더니 끝내는 먹어 치워 버렸답니다! 

- 이름 없는 마법사가 말했어요.
"아주 흥미롭구먼!"
우글득실 선생이 물었어요.
"아무렴. 그런데 자네는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 어떤가, 알아맞힐 수 있겠나?"
이름 없는 마법사가 대답했어요.
"척 보면 알지! 코펜하겐 아니면 어딘가의 대도시겠지. 그곳 인간들은 죄다 이 모양이니까! 이건 어딘가의 대도시가 분명해!"

우글득실 선생이 말했죠.
"틀렸어, 이건 웅덩이의 물이라네!"


- <물방울>

 

- 이 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초록 잎은 누가 뭐래도 우엉 잎일 거예요. 아이들이 우엉 잎을 배에 두르면 꼭 앞치마처럼 보여요. 비 올 때 머리에 쓰면 우산이 되죠. 우엉 잎은 그렇게나 크답니다. 우엉은 절대로 한 포기만 자라는 법이 없어요. 우엉이 한 포기라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여러 포기가 함께 자라는 걸 볼 수 있죠.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 아름다운 우엉은 모두 달팽이의 먹이예요. 옛날에 신분 높은 사람들이 프리카세(고기에 버터를 발라 살짝 구운 뒤, 채소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프랑스 요리)에 쓰던 커다란 흰 달팽이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달팽이를 먹고 "음, 기막힌 맛이군!" 하고 감탄했어요. 정말로 맛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 달팽이가 우엉 잎을 먹고살았기 때문에 밭에다 우엉을 심게 되었죠. 

- 어느 곳에 오래된 저택이 있었어요. 그 저택 사람들은 더는 달팽이를 먹지 않았어요. 달팽이가 죄다 죽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우엉은 죽기는커녕 자꾸자꾸 불어났어요. 나중에는 길이란 길, 꽃밭이란 꽃밭을 죄다 뒤덮어 손도 쓸 수 없게 되었죠. 아예 우엉 숲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어요. 드문드문 사과나무와 살구나무가 서 있지 않았다면 그곳이 정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을 거예요. 어디를 둘러봐도 우엉뿐인 그곳에는 무지무지 나이 많은 달팽이 딱 두 마리가 살아남아 있었어요.

- 이 달팽이들은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예전에는 달팽이가 아주 많았다는 것과 자기네는 다른 나라에서 온 달팽이 가족이라는 것, 우엉 숲이 달팽이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이 달팽이들은 숲 밖으로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다만 바깥세상에는 저택이란 게 있고, 다들 거기서 거무스름하게 요리되어 은 쟁반에 올려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어요. 게다가 요리되어 은 쟁반에 올려지는 게 어떤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고요. 어쨌든 아주 멋지고 품위 있는 일이겠죠. 풍뎅이나 두꺼비, 지렁이한테 물어봤지만 아무도 설명해 주지 못했어요. 아무도 요리되어 은 쟁반에 놓여 본 적이 없으니까요. 

- 늙은 흰 달팽이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숲은 자기들을 위해 있고, 저택은 자기들이 요리되어 은 쟁반에 놓이기 위해 있었으니까요.

 

- <행복한 가족>

 

- "두 눈을 내 보내 준다면, 건너편 기슭에 있는 커다란 온실로 당신을 데려다주겠소. 죽음의 신은 거기에 살면서 꽃과 나무를 돌보는데, 그 꽃과 나무 하나하나가 인간의 생명이오!"
"아, 우리 아이를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내놓겠어요!"
어머니는 울면서 그렇게 말하고 더 많은 눈물을 쏟아 냈습니다. 그러자 두 눈이 흘러나와 호수 밑에 가라앉더니 아름다운 진주가 되었습니다. 호수는 어머니를 그네에 태우듯이 휙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를 건너편 기슭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기슭에는 아주 이상한 집이 있었습니다. 길이가 몇 킬로미터나 되어서 집이라기보다는 숲과 동굴이 있는 산 같았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눈을 눈물에 흘려보내 버렸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 "어디에 가면 우리 아이를 데려간 죽음의 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죽음의 신의 커다란 온실을 돌보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죽음의 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오. 그런데 아주머니는 여길 어떻게 찾았소? 누가 도와줬나?"

- "나는 당신의 아이를 몰라. 더구나 당신은 앞도 안 보이는구먼. 아무튼 어젯밤에 나무와 꽃이 엄청 시들어 버렸으니 곧 죽음의 신이 와서 바꿔 심을 거요. 당신도 알다시피 사람은 누구나 생명의 나무나 생명의 꽃을 갖고 태어난다오. 겉보기에는 다른 풀이나 나무와 똑같지만 생명의 나무와 꽃에서는 고동 소리가 들리지. 물론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도! 그 소리를 듣고 찾아봐요. 자기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당신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가르쳐 주면, 나한테 뭘 해 줄 거요?"
가엾은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저는 드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흥, 그런 건 필요 없으니 당신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주구려. 당신도 자기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는 건 알 거요. 나도 그런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오. 대신에 내 흰머리를 가져요. 뭐, 이것도 꽤 쓸 만하니까."

-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바라는 게 그것이라면 기꺼이 드리겠어요."
어머니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주고 할머니의 흰머리를 받았습니다. 

- 두 사람은 죽음의 신의 커다란 온실로 들어갔습니다. 온실에는 꽃과 나무가 뒤섞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종처럼 생긴 유리 덮개가 덮인 가녀린 히아신스도 있었고 줄기가 굵고 튼튼해 보이는 작약도 있었습니다. 갖가지 물풀도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주 싱싱했지만 어떤 것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병든 물풀에는 물범이 친친 감겨 있거나 줄기에 검은 가재가 착 들러붙어있기도 했습니다. 또 아름다운 종려나무와 떡갈나무와 플라타너스도 있었습니다. 파슬리와 꽃이 한창 핀 백리향도 있었고요. 나무와 꽃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인간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중국과 그린란드를 비롯한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지요. 커다란 나무들이 조그만 화분에 심겨 있기도 했는데, 화분이 너무 비좁아서 금방이라도 쪼개질 것 같았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꽃들이 이끼가 덮인 기름진 땅에서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기도 했습니다.

- 가엾은 어머니는 아무리 키 작은 풀도 일일이 몸을 낮추고 그 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몇백만 개나 되는 나무와 풀꽃 중에서 마침내 자기 아이의 심장 소리를 찾아냈습니다.
"이거예요!"
어머니가 소리치며 작고 푸른 사프란 꽃 위로 손을 뻗었습니다.

- "자, 너의 눈을 돌려주겠다. 호수 바닥에 뭔가 밝게 빛나는 것이 있기에 건져 왔느니라. 네 눈인 줄은 몰랐구나. 자, 받아라. 전보다 훨씬 맑아졌을 테니 그 눈으로 옆에 있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아라. 네가 방금 뽑으려고 했던 꽃 두 송이의 이름을 말해주마. 그러면 그 꽃의 앞날과 그 사람의 일생이 우물에 비쳐, 네가 어떤 꽃을 망가뜨리려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우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복을 받은 한 생명이 온 세상에 행복과 기쁨을 퍼뜨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없이 흐뭇한 광경이었지요. 하지만 또 다른 생명에는 슬픔과 괴로움, 두려움과 불행만이 가득했습니다.
죽음의 신이 말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의 뜻이니라."


-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저 두 송이 중 어느 것이 불행의 꽃이고 어느 것이 행복의 꽃인가요?"
죽음의 신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대답해 줄 수 없다. 단, 둘 중 하나가 네 아이의 꽃이란 것은 가르쳐 주마. 네가 본 것은 바로 네 아이의 운명이며 네 아이의 미래니라!"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습니다.
"어느 쪽이 제 아이입니까? 제발 가르쳐 주세요! 죄 없는 아이를 살려 주세요! 제발 이 모든 불행을 겪지 않게 해 주세요. 아니, 데려가세요! 하느님의 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제 눈물도, 제 소원도, 제가 한 말과 행동도 모두 잊어 주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아이를 돌려 달라는 거냐, 아니면 네가 모르는 나라로 아이를 데려가라는 거냐?"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이 닳도록 비비며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하느님! 제 소원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제발 들어주지 마세요. 하느님의 뜻보다 옳은 것은 없습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마세요! 제발!"

- 이윽고 어머니는 고개를 푹 꺾고 가슴에 파묻었습니다.
죽음의 신은 어머니의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 <어느 어머니 이야기>

 

- 하지만 양말대님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죠. 
옷깃이 다시 말했어요.
"아가씨는 장식 띠가 틀림없어요! 몸에 두르는 장식 띠 말이에요! 난 다 알아요, 아가씨는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적인 분이라는 걸!" 
양말대님이 말했어요.
"제발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제가 언제 당신더러 말을 걸어도 된다고 했나요?"
옷깃이 대꾸했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처럼 예쁜 분에게는 당연한 거죠!"
"자꾸 다가오지 마세요! 당신은 아무래도 남자 같군요!"

"이래 봬도 나는 훌륭한 신사예요. 나는 장화 벗는 도구와 빗을 갖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장화 벗는 도구와 빗을 가진 건 옷깃의 주인이었으니까요. 옷깃이 허풍을 떤 거죠.

- 옷깃은 가장자리가 조금 닳아 있었어요. 그래서 가위가 다가와 닳은 부분을 자르려고 했어요.
그러자 옷깃이 말했어요.
"오! 당신은 최고의 무용수가 틀림없어요. 다리를 그렇게 쭉뻗을 수 있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처음이에요. 아무도 당신 흉내를 낼 수 없을 거예요."
가위가 대꾸했어요. 
"그건 나도 잘 알아요." 
 
- "이렇게 되면 빗한테 청혼하는 수밖에 없군, 귀여운 아가씨, 이가 유난히 가지런하군요! 아가씨는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빗이 대답했어요.
"물론이죠. 모르셨어요? 난 장화 벗는 도구와 약혼한 몸이라고요."
옷깃이 말했어요.
"뭐요, 약혼을 했다고요!"
옷깃은 더는 청혼할 상대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을 업신여기게 되었죠.

- 세월이 한참 지나, 옷깃은 종이 공장의 상자 속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곳에는 다 해진 헝겊 쪼가리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비싼 것은 비싼 것끼리 싸구려는 싸구려끼리 모여 있었죠. 다들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어요. 특히 옷깃은 누구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았죠. 옷깃은 못 말리는 허풍쟁이였으니까요!

- "나는 애인이 셀 수 없이 많았어! 여자들은 나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지. 이래 봬도 나는 훌륭한 신사였거든, 풀 먹인 신사! 나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장화 벗는 도구와 빗이 있었어. 아,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당신들이 봤어야 하는데. 반듯이 접혀서 누워 있던 나를 말이야! 나는 첫사랑을 결코 잊지 못할 거야. 내 첫사랑은 더없이 우아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운 장식 띠였어. 나 때문에 빨래통에까지 뛰어들었다니까! 아, 그래, 과부도 있었어. 굉장히 뜨거운 여자였지만, 내가 상대해 주지 않자 새카맣게 타 버렸지! 다음엔 최고의 무용수였어. 그 여자한테 받은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지. 정말 불같은 여자였어! 나중에는 내 빗마저 나한테 반해서 애태우다가 이가 몽땅 빠져 버렸지 뭐야! 나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양말대님, 아니, 빨래통까지 따라온 장식 띠야. 지금껏 양심에 거리낄 짓을 많이 했으니 나는 이제 흰 종이가 되어야 해!" 

- 옷깃은 정말로 흰 종이가 되었어요. 다른 누더기들도 모두 흰 종이가 되었고요. 옷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흰 종이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찍혀 있는 종이라고요. 이게 다 옷깃이 터무니없는 허풍을 떤 벌이죠.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 둬야 해요. 언젠가 우리도 다 해진 헝겊 쪼가리 바구니에 들어 있다가 흰 종이가 되어 자기 이야기, 그것도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몽땅 찍혀 여기저기 다니며 떠벌려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이 옷깃처럼 말이에요.  

- <옷깃>

 

- 아마 꽃이 한창이었어요. 아름다운 푸른 꽃은 나방 날개만큼, 아니 그보다 더 보드라웠어요. 해님은 햇살을 비춰 주고 구름은 비를 뿌려 주었어요. 그건 아이가 목욕을 마치고 엄마한테 입맞춤을 받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러면 아이들은 훨씬 더 예뻐지죠. 마찬가지로 아마도 점점 더 예뻐졌답니다.  

- 아마가 말했어요.
"다들 나보고 아주 잘 자랐대. 그리고 이렇게 크고 훌륭하게 자랐으니까 틀림없이 고급 아마 천이 될 거래! 아, 나는 정말 행복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난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이제 곧 쓸모 있는 물건이 될 거야! 해님은 내게 힘을 주고, 구름은 맛있는 비를 뿌려 생기를 줘. 나는 누구보다 행복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 아마는 고통을 느끼며 생각했어요.
'나는 정말 행복했어! 지금까지 누렸던 행복에 만족해야 돼. 만족해야 한다고! 아아!'
아마는 베틀에 걸렸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아마는 마침내 크고 아름다운 아마천이 되었어요. 밭에서 뽑힌 아마가 모여 한 장의 천이 된 거예요. 
"와, 정말 굉장해!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는 행운이 늘 함께하나 봐. 울타리의 말은 옳았어."

- "하지만 노래는 끝나지 않아! 이제부터 시작인걸! 정말 멋진 일이야! 물론 좀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이렇게 쓸모 있는 물건이 됐잖아?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이렇게 튼튼하고 부드럽고 새하얗고 긴걸! 그저 꽃이나 피어 있던 시절 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어. 그 무렵엔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어. 나는 비가 올 때 말고는 물도 마시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은 돌봐 주는 사람이 어엿이 있어. 아침마다 하녀가 와서 나를 뒤집어 주고 저녁에는 물뿌리개로 목욕까지 시켜 주는걸."  

 

- "뚝딱, 뚝딱, 뚝딱, 뚝딱! 노래는 끝났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작디작은 것들이 입을 모아 말했죠.

"노래는 결코 끝나지 않아! 이 사실이 무엇보다 가장 근사한 점이지! 난 그걸 잘 알아. 그러니까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아이들은 그 말을 듣지 못했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아이들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잖아요?


 - <아마> 

 

- 낙원의 뜰 지혜의 나무 밑에 장미 덤불이 있었어요. 거기서 맨 처음 핀 장미꽃에서 새 한 마리가 태어났답니다. 그 새는 빛살처럼 날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띠었으며 고운 소리로 노래했지요. 그런데 이브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딴 벌로 아담과 함께 낙원에서 쫓겨날 때, 천사의 불꽃 칼에서 불똥이 튀어 새 둥지에 불이 붙고 말았어요. 새는 불에 타 죽었지만 새빨간 알 속에서 새로운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어요. 바로 이 새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불사조랍니다. 

- 전설에 따르면, 불사조는 아라비아에 둥지를 틀고 백 년에 한 번씩 그 둥지에서 스스로 불타 죽어요. 그러고 나면 새빨간 알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불사조가 날아오르지요. 이 새는 우리 주위를 날아다녀요.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곱디고운 노래를 부르며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요. 어머니가 아기의 요람 옆에 앉아 있으면, 이 새는 베갯머리에 앉아 날개를 펼쳐서 아기 머리에 후광을 만들지요. 또 소박한 사람의 방을 지나갈 때도 있어요. 그러면 그 방으로 햇살이 들이비치고 낡은 장롱에서 제비꽃 향기가 풍긴답니다. 

- 하지만 불사조는 아라비아에만 있지 않아요. 얼음 땅 라플란드(유럽의 가장 북쪽 지역으로 북극권에 속한다)의 하늘에 걸린 오로라 속에서도 날갯짓하고, 그린란드의 짧은 여름 동안에 피는 노란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기도 하지요.  
 
- 낙원의 새여! 백 년마다 불꽃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불꽃 속에서 죽는 새여! 네 모습은 금테 액자에 끼워져 부잣집 거실에 걸려 있구나.

하지만 너는 때때로 홀로 외로이 날아다니는구나. 전설 속의 새, 아라비아의 신령스러운 새, 불사조여. 
낙원의 뜰 지혜의 나무 아래서 맨 처음 핀 장미꽃 속에서 네가 태어났을 때, 하느님은 네게 입 맞추시고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셨네. 

'시'라는 이름을.

 

- <불사조>

 

- 정원의 사과나무들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렸어요. 초록 잎이 나기 전에 서둘러 꽃을 피우려고요. 뒤뜰에는 새끼 오리들이 모두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고, 고양이는 한구석에 앉아 햇살을 한껏 받으며 앞발을 핥고 있었죠. 밭으로 눈을 돌리면 곡식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어요. 작은 새들은 꼭 성대한 축제 날처럼 흥겹게 지저귀고요.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으니까 축제 날 같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교회 종이 울리고, 나들이옷을 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교회에 갔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즐거운 일뿐이었답니다. 이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에는 누구든지 이렇게 말할 거예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없이 큰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 그런데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설교단 앞에서 큰 소리로 꾸짖으며 설교를 하고 있었어요. 목사님은 사람들이 도통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니 하느님이 분명 벌을 내리실 거라고 했어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불길에 휩싸여 있을 거라고요. 목사님은 이런 말도 했어요. 그 사람들의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불길도 꺼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안식이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설교였죠. 게다가 목사님 말은 진짜 같았어요. 목사님은 지옥이란 온 세상의 더러움이 흘러들어 역겨운 냄새가 나는 구덩이로, 뜨거운 유황 불꽃만 너울거리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죄인들은 바닥 없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 거라고 했죠.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이야기였지만, 목사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렸답니다.

-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작은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비쳤어요. 작은 꽃들은 저마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 같았죠.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한없이 은혜로우시네." 그래요, 교회 밖은 목사님이 말한 세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답니다.

- "아, 그렇게 쉬운 방법으로 당신을 도울 수 있다니! 하기야 당신은 마음이 순수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니까!"
죽은 아내가 말했어요.
"자, 저를 따라오세요! 우리는 허락을 받았어요. 저와 같이 있으면 당신은 마음먹은 대로 어디든 날아갈 수 있어요.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가장 비밀스러운 마음속까지도 날아갈 수 있지요. 단,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고통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야 해요. 그것도 첫닭이 울기 전에요." 

- 두 사람은 생각의 날개를 타고 날아간 듯 눈 깜짝할 사이에 큰 도시에 닿았어요. 집집마다 벽에 빛나는 불의 문자로 죄명이 쓰여 있었어요. 교만, 탐욕, 과음, 정욕을 비롯한 일곱 색깔 죄의 무지개였지요.

- "아, 저기요, 저기! 저 집이 틀림없어! 저기에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죄인이 살고 있소."
두 사람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문 앞에 멈춰 섰어요. 널찍한 계단은 꽃과 융단으로 꾸며져 있었고, 넓고 화려한 방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어요. 보는 비단과 벨벳 옷을 입고 은장식이 박힌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지요. 

- 하느님은 은혜이며 사랑이시랍니다. 목사님의 손이 떨렸어요. 감히 손을 뻗어 죄인의 머리카락을 뽑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목사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어요. 그 눈물은 지옥의 영원한 불길을 꺼뜨리는 은혜와 사랑의 물이었답니다. 
그때 닭이 울었어요.
"은혜로우신 하느님! 부디 죽은 아내가 무덤 속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소서! 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러자 죽은 아내가 말했어요.
"저는 방금 안식을 얻었어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두고 당신이 내뱉은 가시 돋친 말과 당신의 비관적인 신앙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오게 했지요. 부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세요.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하느님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지옥 불과 싸워 이겨 그 불을 끌 수 있답니다!" 

 

- 그때 누군가 목사님에게 입맞춤을 했어요. 동시에 주위가 밝아졌어요. 하느님의 환한 빛이 방 안으로 비쳐 들었어요. 목사님의 부인이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온화하게 목사님을 깨우고 있었지요. 하느님이 보여 주신 꿈에서. 

- <어떤 이야기>

 

- "성당이 헐릴 때 성당의 설교단과 기념비 같은 것과 함께 팔려 나간 거라고!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중 몇 개를 사들여 잘게 부숴서 길바닥에 깔았지만 저 돌만은 줄곧 안마당에 놓아두셨지." 
맏이가 말했어요.
"저게 묘비였다는 건 척 보면 알아요. 아직도 모래시계랑 천사 모습 일부가 보이잖아요. 하지만 묘비명은 거의 다 닳아서 프레벤이라는 이름이랑 대문자 S, 그보다 조금 밑에 있는 마르테라는 이름밖에 읽을 수가 없어요. 그 이상은 도저히 모르겠어요. 비를 맞거나 물에 젖었을 때에나 글씨가 또렷하게 보이는걸요." 

- "사람들은 그 부부한테 금화가 한 궤짝도 넘게 있을 거라고 했지만, 부부는 늘 올이 거친 싸구려 옷을 입을 정도로 검소했단다. 단, 속옷은 눈부시게 새하얀 색이었지. 프레벤 씨와 마르테 씨는 친절한 노부부였단다! 두 사람은 현관의 높직한 돌계단 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있곤 했어.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늙은 보리수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었지. 그 집 앞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부부가 건네는 상냥한 눈인사에 마음이 즐거워졌어. 두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몰라.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베풀었지. 게다가 그 노부부의 자비심에는 분별력과 참된 기독교 정신이 깃들어 있었어." 

- "그런데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어. 노인이 이야기에 푹 빠져 점점 생기를 되찾는 것 같았거든. 노인은 뺨을 붉히며 약혼식 날 이야기를 했어. 약혼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여러 번 순진한 속임수를 썼는지도 말이야. 드디어 결혼식날 이야기가 나오자 노인은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지. 하지만 현실에서 늙은 부인은 죽어서 옆방에 누워 있고, 자신도 할아버지가 되어 희망에 넘쳤던 옛날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어! 그래, 인생이란 그런 거란다! 그 시절에는 나도 코흘리개 꼬마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나이를 먹어 프레벤 스바네 씨 같은 노인이 되어 버렸잖니!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하지!" 

 

- <오래된 묘비>

 

- 하지만 새하얀 겨울 할아버지는 여전히 남쪽을 바라보며 지긋이 앉아 있었어요. 눈 융단이 천천히 꺼지고 여기저기서 풀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죠.  

- "봄이 온다!" 하는 소리가 들로, 밭으로, 짙은 갈색 숲 속으로 퍼져 나갔어요. 숲의 나무줄기에서는 벌써 싱싱한 초록색 이끼가 빛나고 있었죠. 그때 남쪽에서 새해의 첫 황새 두 마리가 날아왔어요. 황새의 등에는 귀여운 사내아이와 여자아이가 타고 있었어요. 두 아이는 땅바닥에 입 맞추며 인사를 했어요. 두 아이가 발을 디딜 때마다 눈 밑에서 새하얀 꽃이 피어났어요. 둘은 손을 맞잡고 얼음 할아버지인 '겨울'에게 다가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 번 더 인사했어요. 그 순간 세 사람의 모습은 물론이고 주위의 경치까지 죄다 사라져 버렸어요. 모든 것이 축축하고 짙은 안개에 싸여 컴컴해져 버렸기 때문이죠. 이윽고 공기가 움직였어요. 바람이 불어와 엄청난 기세로 안개를 몰아내고 따사롭게 해가 비치기 시작했어요. 겨울 할아버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사랑스러운 봄의 아이들이 한 해의 왕좌에 앉아 있었답니다. 

- 그사이에도 두 아이는 쑥쑥 자랐어요.
머리 위로 보슬비가 떨어졌지만 둘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빗방울과 기쁨의 눈물방울이 뒤섞여 있었거든요. 신랑 신부가 입맞춤을 했어요. 그 순간 숲의 나무들이 한꺼번에 싹을 활짝 틔웠어요. 이윽고 해가 솟아오르자 온 숲은 초록빛에 감싸였답니다!

- 지붕처럼 드리운 산뜻한 푸른 가지 아래서 신랑 신부가 손을 맞잡고 거닐었어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초록빛과 뒤섞여 갖가지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냈어요. 티 없이 깨끗한 어린잎은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어요. 맑은 시냇물과 개울물이 벨벳 같은 골풀 사이사이로, 색색의 작은 돌 위로 졸졸졸 흘러갔어요.
온 자연이 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넘쳐흐르리라!"

 


- 며칠이 흐르고 몇 주가 흘러 어느덧 더위가 몰려왔어요. 뜨거운 공기가 노랗게 익어 가는 밀밭 사이를 누비고 다녔어요. 숲 속에서는 북쪽 나라의 하얀 수련이 거울 같은 호수 위에 크고 푸른 잎사귀를 펼쳤죠. 그러자 물고기들이 그늘을 찾아 수련 잎 밑으로 모여들었어요. 숲의 바람이 미치지 않는 시골집 벽에는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며 활짝 핀 장미 꽃잎까지 달구었어요. 벚나무에는 햇빛에 익은 물기 많은 검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죠.

 

- 그곳에 여름의 아름다운 아내가 앉아 있었어요. 우리는 이 사람의 어릴 때 모습도 보았고 신부 때 모습도 보았어요. 여름의 아내는 산줄기처럼 굽이치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푸른 먹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어요. 먹구름은 세 방향에서 몰려와 점점 커졌어요. 바다가 화석처럼 굳어서 뒤집혀 있는 것 같은 구름이 점점 더 낮게 드리우자, 온 숲은 마법에 걸린 듯 고요해졌어요. 바람이 딱 멎고 새들도 노래를 그쳤어요. 온 자연이 터질 듯한 기대감으로 가득했죠. 한편 도시의 거리와 골목에서는 마차나 말을 타고 가던 사람과 걸어가던 사람들이 너나없이 허둥지둥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어요. 

 

- 어느덧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어요. 줄기와 이파리에 진주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어요. 새는 노래하고 물고기는 물 위로 튀어 오르고 모기들은 춤을 추었어요. 먼바다에서 짠 바닷물을 흠뻑 맞고 있는 바위 위에 여름이 앉아 있었어요. 여름은 어느새 늠름하고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죠. 머리카락이 물에 흠뻑 젖은 여름은 이제 막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기운을 되찾아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었어요. 주위의 모든 자연도 기운을 되찾아 싱싱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워졌어요. 그야말로 여름이었죠. 뜨겁고 아름다운 여름.

- 토끼풀로 뒤덮인 들판에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어요. 꿀벌 떼가 먼 옛날의 신성한 곳 주위에서 웅웅 거리고 있었어요. 비에 씻겨 햇살에 반짝이는 돌 제단은 검은딸기 줄기에 뒤덮여 있었고요. 여왕벌이 무리를 이끌고 날아와 밀랍과 벌꿀을 만들었어요. 여름과 그의 건강한 아내만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죠. 제단에는 자연이 둘에게 바친 공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답니다.

- 해 질 녘 하늘이 금빛으로 빛났어요. 그 빛은 어떤 성당의 둥근 지붕보다 밝았어요. 새벽녘까지는 달빛이 하늘을 환히 비추었어요. 그야말로 여름이었죠.

- 그해의 마지막 나비가 차가운 공기 속을 팔랑팔랑 날고 있을 뿐이었죠.
이윽고 축축한 안개가 내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과 어둡고 기나긴 밤이 찾아왔어요. 해의 왕은 머리카락이 눈처럼 희었어요. 하지만 해의 왕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어요. 그저 구름이 눈을 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얇은 덮개처럼 눈이 온들판을 뒤덮고 있었거든요.

- "탄생의 종이 울리고 있구나! 머지않아 새해의 왕과 왕비가 태어나겠지. 나도 이제 내 아내처럼 쉬어야겠어! 저 빛나는 별의 세계에서 말이야!"
눈 덮인 초록빛 전나무 숲에서, 크리스마스의 천사가 축제 때 쓸 어린 전나무를 봉헌하고 있었어요.
지난 이삼 주 사이에 눈처럼 하얀 노인이 되어 버린 해의 왕이 말했어요.
"이 어린 초록빛 나무들이 서 있을 방에 기쁨이 넘치기를! 이제 휴식 시간이 머지않았구나. 새해의 부부에게 이 왕관과 홀을 물려주어야겠어."

- 크리스마스의 천사가 말했어요.
"하지만 올해는 여전히 당신이 다스리고 있어요. 아직 쉬면 안 돼요! 부디 어린 씨앗들을 따뜻한 눈으로 덮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다스리는 동안 누군가 당신보다 더 존경을 받더라도 부디 참으세요. 세상에서 잊혀져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고요. 봄이 오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예요." 

- 겨울이 물었어요.
"봄은 언제 오지?"
"황새가 돌아올 때요!"
 

- 그때 이번에도 도시 참새들이 찾아와 물었어요.
"저기 저 할아버지는 누구예요?"
그 옆에는 이번에도 까마귀가 앉아 있었어요. 지난해 그 까마귀의 아들인지도 모르죠. 뭐, 누구든 상관없지만요.  


- <한 해의 이야기>

 

- 우리 삶에서 가장 신성한 날은 죽는 날입니다. 최후의 날이지요. 성스러운 날이자 큰 변화가 있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내는 엄숙하고 위대한 마지막 날을, 여러분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 어느 곳에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의 말을 위해 싸우는 전사이자 질투심 많은 신을 섬기는 질투심 많은 종이었습니다. 어느 날 죽음의 천사가 이 사람의 머리맡에 찾아왔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엄숙하고 경건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 죽음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때가 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 사람의 발을 건드리자 발이 차가워졌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이마도 만지고, 심장도 만졌습니다. 그러자 심장이 터져 버리고 그 사람의 영혼은 죽음의 천사를 따라나섰지요.

- 조금 전 죽음의 천사가 발과 이마와 심장을 만지던 단 몇 초 사이에, 죽은 사람의 머리 위로는 자신이 평생 동안 했던 모든 일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쳐 지나갔습니다. 마치 아찔한 골짜기를 흘끗 내려다보기만 하고도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단숨에 알게 되는 것처럼,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온 우주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그 순간 죄를 지은 사람은 끝없는 공간 속으로 꼼짝없이 가라앉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고 벌벌 떨지만, 신앙심 깊은 사람은 고개 들어 신을 바라보며 "주여,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고 아이처럼 온몸을 맡긴답니다. 


- 하지만 방금 죽은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는 올곧은 신앙심을 가졌고 종교의 율법도 엄격하게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영원한 파멸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불과 칼이 있었다면 기꺼이 그 사람들의 육신을 벌주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은 이미 그런 꼴을 당했고 영원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은 천국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은총이, 자신에게 약속된 은총이 천국의 문을 열어 줄 거라고요. 

- 그 사람의 영혼은 죽음의 천사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 한번 더 침대를 돌아보았습니다. 티끌로 돌아간 자신의 몸이 새하얀 천에 싸여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제 인연이 끊어진 자아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영혼은 날아가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어딘가 넓은 방 같기도 하고 숲 속 같기도 한 곳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자연을 고풍스러운 프랑스식 정원의 나무처럼 가지를 치고 잡아당기고 한데 묶고 줄줄이 늘어 세워 정교하게 꾸며 놓은 것 같은 곳이었지요. 그곳에서는 가장무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벨벳과 황금을 둘렀다고 해서 고귀하거나 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차림새가 허름하다고 해서 신분이 낮거나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히 뭔가 색다른 가장무도회였습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저마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뭔가를 옷 속에 감추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의 것은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서로서로 옷을 찢어 대고 있었지요. 찢어진 옷 속에서 동물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한쪽에는 이빨을 드러낸 원숭이가, 또 한쪽에는 못생긴 숫염소가 보였고 미끈거리는 뱀과 생기 없는 물고기 따위도 보였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저마다 지니고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동물들이지요. 우리 자신은 펄쩍거리며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이 동물을 옷 안에 단단히 가둬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은 그 옷을 찢으며 "자, 봐요! 보라고요! 이게 이 남자의 모습이에요. 이게 이 여자의 모습이라고요!" 하고 소리칩니다. 그렇게 서로의 비열한 마음을 들춰낸답니다.

- 영혼이 날아가며 물었습니다.
"제 안에는 어떤 동물이 있을까요?"
그러자 죽음의 천사가 앞쪽에 보이는 거만한 사내를 가리켰습니다. 그 사내의 머리 둘레에 화려한 빛이 번쩍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내는 품속에 동물의 다리, 그러니까 공작 다리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빛인 줄 알았던 것은 그 새의 얼룩덜룩한 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조금 더 앞으로 가자 커다란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기분 나쁜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죽음의 여행자여,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라는 뜻이었습니다. 커다란 새들은 모두 이 영혼이 살아 있는 동안 품었던 나쁜 생각과 욕망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이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하고 영혼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순간 귀에 익은 소리에 영혼은 소름이 오싹 끼쳤습니다. 나쁜 생각과 욕망들이 지금 여기에 증인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요.

 

- "우리의 몸과 나쁜 본성 속에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깃들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나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이 세상에 나쁜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다고요!" 
영혼은 그렇게 말하며 한시라도 빨리 기분 나쁜 소리에서 벗어나려고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커다란 검은 새들은 둥그런 원을 그리고 날면서 온 세상에 들리도록 쉴 새 없이 소리쳤습니다. 영혼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암사슴처럼 뛰었습니다. 그런데 발을 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부싯돌에 찔려 발이 아팠습니다. 
"뾰족한 돌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났죠? 낙엽처럼 온 바닥에 깔려 있군요!"
"이 돌 하나하나는 네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다. 그 말 때문에 네 이웃들은 네 발에 입은 상처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를 입었어."
영혼이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너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영혼이 말했습니다.
"저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율법과 복음을 지켰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요!"

- 이윽고 죽음의 천사와 영혼이 천국의 문 앞에 닿았습니다. 천국의 문을 지키는 천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인가? 너의 신앙을 말하라. 그리고 네가 세상에서 행한 일로써 그 신앙을 나타내 보아라."
"저는 모든 계율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제 자신을 낮추었으며 영원한 파멸의 길로 빠지는 악과 악인을 미워하고 꾸짖었습니다. 제게 힘이 있다면 불과 칼로써 그들에게 죄를 묻고 싶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마호메트의 신봉자(이슬람교도를 가리킨다. 이슬람교도는 엄격한 종교 의례와 법률을 따른다)구나!"

-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네가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느냐. 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친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의 후손이냐? 이스라엘의 질투심 많은 신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신이니라. 그러니 너도 그 이스라엘의 아들이 아니냐!"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네 신앙과 행동을 보아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구나. 기독교는 화해와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종교다!"

 

- 바로 그 순간 끝없는 하늘에 "자비!"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영혼은 성스러운 환한 빛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리는 강한 빛이었습니다. 영혼은 날카로운 칼을 피하듯 뒤로 펄쩍 물러났습니다. 그때 음악 소리가 부드럽고 은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소리였지요. 영혼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점점 더 낮게 엎드렸습니다. 천국의 빛이 구석구석 스며들자, 영혼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거만함과 엄격함과 죄의 무게였지요. 영혼은 그것을 아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제가 살면서 행한 좋은 일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한 일이지만 나쁜 일은 모조리 제 스스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영혼은 천국의 순수한 빛에 눈이 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조그마해져서 깊디깊게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 <최후의 날에>

 

-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한 암탉이 이 이야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마을 변두리에서 말했어요.
"그 끔찍한 일은 닭장에서 벌어졌어요! 오늘 밤은 혼자 못 잘 것 같아요. 이렇게 다 같이 홰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암탉은 그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이야기를 들은 다른 암탉들은 털을 곤두세웠고 수탉들은 볏을 축 늘어뜨렸어요. 정말이라고요!

- 그러자 암탉이 말했어요.
"어머, 깃털 하나가 떨어졌네! 하지만 난 깃털을 쫄수록 더 아름다워지는걸!"
물론 이 말은 농담이었어요. 이 암탉은 성격이 아주 쾌활했거든요.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암탉이었고요. 이윽고 그 암탉은 잠이 들었어요. 

- 주위는 깜깜했고, 암탉들은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잠을 자고 있었어요. 아까 그 암탉 바로 옆에 있는 암탉만 빼고요. 이 암탉은 무슨 말을 듣든 못 들은 척했어요. 그래야 평화롭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옆에 있는 암탉한테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기요! 금방 그 말 들었어요?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 중에 멋을 부리려고 깃털을 잡아 뜯는 암탉이 하나 있어요. 내가 수탉이라면 그런 암탉은 경멸했을 거예요!"

- "암탉 한 마리가 아니 두 마리라는 말도 있지만, 다른 암탉과 똑같아 보이기 싫어서, 그리고 수탉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깃털을 모조리 뽑아 버렸대요. 그건 위험한 짓이에요.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 하긴, 그래서 두 마리다 죽었다더라고요!" 
이번에는 수탉이 판자 울타리 위로 날아올라 졸린 눈으로 울어 젖혔죠.
"일어나! 일어나! 암탉 세 마리가 수탉 한 마리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셋 다 죽고 말았어! 다들 제 깃털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더군. 끔찍한 얘기지. 이런 얘긴 혼자만 알고 있으면 안 돼. 동네방네 알려야 해!"

- 그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닭장에서 닭장으로 전해져, 마침내 원래 그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닭장으로 되돌아왔답니다.
되돌아온 이야기는 이랬어요.
"암탉 다섯 마리가 수탉 한 마리를 사랑했는데, 암탉들이 저마다 사랑 때문에 얼마나 야위었는지 보여 주려고 자기 깃털을 몽땅 뽑아 버렸대요! 그리고 서로 마구 쪼아 대다 끝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죽었다지 뭐예요! 이건 집안의 수치이자 웃음거리일 뿐 아니라 주인한테도 큰 손해라고요!" 

- 깃털 하나를 잃은 암탉은 이것이 자기 이야기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더구나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암탉이라서 이렇게 말했죠.
"난 그런 암탉들을 경멸해요!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암탉이 아주 흔하죠! 그런 일은 모르는 척 넘어가면 안 돼요! 난 이 얘기가 신문에 나도록 힘써 보겠어요. 그러면 온 나라에 퍼질 거예요. 그 암탉과 식구들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요!"

- 그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신문에 나고 책으로도 만들어졌어요. 이처럼 작은 깃털 하나도 암탉 다섯 마리가 될 수 있답니다! 정말이라고요!

 

- <정말이라고요!>

 

- 발트해와 북해 사이에 오래된 백조 둥지가 있습니다. 그 둥지는 덴마크라고 불렸지요. 그곳에서 수많은 백조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 백조들의 이름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 먼 옛날 백조 한 무리가 이곳을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 지방의 푸른 평원에 내려앉았습니다. 이곳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 백조 무리는 랑고바르드족(고대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 568년 북이탈리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워 774년 프랑크 왕국에 멸망될 때까지 다스렸다. 롬바르드족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렸답니다. 빛나는 깃털에 믿음직스러운 눈을 한 또 다른 무리는 비잔티움(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지금은 이스탄불로 불린다)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의자 주위에 내려앉아 커다란 날개를 방패처럼 펼치고 황제를 보호했습니다. 이들은 바랴그인(바이킹족의 한 갈래로, 러시아에서 흑해 지방으로 내려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근위대가 되었다)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 프랑스 해안에서는 피에 굶주린 백조 무리를 두려워하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북쪽 나라에서 날개 밑에 불을 가지고 내려온 무리지요.
사람들은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이 난폭한 노르만족(프랑스 북부에 자리 잡았던 바이킹족과 그 후예들을 가리킨다)으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영국의 드넓은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푸른 들판에 삼중 왕관을 쓴 덴마크 백조(덴마크의 크누드 왕을 가리킨다. 11세기 초,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과 노르웨이와 덴마크 왕을 겸했다)가 온 나라에 황금 홀을 뻗고 서 있었습니다.
포메른 해안(유럽 북동부의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는 이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백조(발레마르 대왕을 가리킨다. 벤드족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가 십자 깃발(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덴마크 국기)과 칼집에서 뽑아 든 칼을 휘두르며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 여러분은 그건 다 오래전 옛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힘센 백조들이 둥지에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드넓은 하늘에 빛이 번쩍이며 온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백조가 힘찬 날갯짓으로 자욱한 안개를 사방으로 흩었습니다. 그러자 밤하늘이 지구와 가까워진 듯 한결 뚜렷이 보였지요. 그 백조는 튀코 브라헤(16세기에 활동한 덴마크의 유명한 천문학자 1546~1601)였답니다. 

- 그때 우리는 백조 무리가 당당하게 날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백조(덴마크의 시인이자 문학가인 욀렌슐레게르를 가리킨다. 19세기 전반기에 주로 활동했으며 북유럽의 신화와 덴마크의 민족 영웅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1779~1850)는 날개로 황금 하프 줄을 퉁겼습니다. 그 소리가 북쪽 나라에 널리 울려 퍼지자, 노르웨이의 바위산이 태고의 햇빛을 받아 한층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 숲은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북유럽의 신들과 영웅들과 고귀한 여인들은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모습을 드러냈지요. 

- 우리는 또 다른 백조(19세기 초에 활동한 덴마크 최고의 조각가 토르발센을 가리킨다)가 날개로 대리석 바위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대리석은 금세 부서졌고 안에 갇혀 있던 '아름다움'이 대낮의 환한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 웅장한 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높이 쳐들었습니다.

- 또 한 백조(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로 생각의 실, 곧 전신기를 발명한 인물은 외르스테드가 아니다)는 '생각의 실'을 잣고 있습니다. 그 실은 온 세상의 나라와 나라를 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입에서 나온 말은 번개처럼 빠르게 나라와 나라를 날아다니지요.

- 몇백 년이 흐른다 해도 백조는 끊임없이 둥지를 떠나 날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은 백조의 모습을 보고 백조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언젠가 진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마지막 백조다! 백조 둥지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노래다!"


- <백조 둥지>

 

- 이 무덤에는 지독한 구두쇠 부인이 잠들어 있어요. 이 부인은 사는 내내 한밤중에 일어나 야옹야옹 울곤 했어요. 이웃들이 자기가 고양이를 기른다고 믿게 하려고요. 그만큼 구두쇠였답니다.

- 또 여기에는 훌륭한 가문의 아가씨가 잠들어 있어요. 아가씨는 모임에서 항상 '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네!'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이것이 그 아가씨 평생의 유일한 진실이었답니다!

- 여기엔 한 과부가 잠들어 있어요. 입으로는 백조의 노래를 불렀지만, 마음속에 '담즙'(히포크라테스가 분류한 네 가지 기질 가운데 하나. 자극에 빠르게 반응하고 화를 잘 내며 성미가 급한 기질)을 지닌 여자였죠. 이 여자는 이웃의 흠을 들춰내려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녔어요. 지난날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도랑 덮개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경찰 친구'와 비슷한 셈이죠. 


- <낙천적인 기질> 

 

- 기품 있고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런데 둘은 어쩌다가 부부가 되었을까요? 음, 이 바쁜 세상에 그 얘길 다 하자면 너무 길답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어요. 더구나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인걸요. 

- 늙은 부부가 말했어요.
"이 버드나무는 우리 가족의 나무예요!"
그리고 자식들한테 버드나무를 언제까지나 소중히 가꿔야 한다고 일렀어요. 물론 머리 나쁜 자식한테도요.
그 뒤로 백 년이 흘렀어요.

-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되었어요. 연못은 어느덧 늪으로 변해 버렸고, 오래된 저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얼마 남지 않은 돌벽 옆에 폭이 좁고 기다란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 옛날 깊은 연못의 자취랍니다. 그 옆에는 늙은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어요. 바로 옛날 그 가족의 나무였죠. 이 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에 서서,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있었어요. 물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밑둥치에서 꼭대기까지 쩍 갈라지고 폭풍에 약간 비틀리기는 했지만,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죠.  

- 이야기는 금세 '귀족'과 '평민' 이야기로 옮아갔어요. 그런데 목사님 아들은 도통 평민 같지 않았어요.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열을 올렸거든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남부러울 것 없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박차'를 가진 셈이니까요. 일류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는 가문의 이름을 가진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귀족은 고귀함을 뜻해요. 그건 뭐랄까, 가치를 인정받은 금화라고 할 수 있죠. '귀족은 죄다 쓸모없고 어리석으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수록 더 빛난다.'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고 많은 시인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상류층 사람들 중에도 감동적일 만큼 성품이 고상한 사람이 있어요. 언젠가 우리 어머니한테 들었죠. 물론 저도 그런 예를 많이 알고 있지만요." 

- "어머니는 어느 지체 높은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아마 우리 할머니가 그 집 안주인의 유모였기 때문일 거예요. 어머니는 지체 높은 늙은 주인과 한방에 있었는데, 웬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안뜰로 들어서더래요. 그 할머니는 일요일마다 그 집에 찾아와 돈을 조금씩 얻어 갔죠. 늙은 주인은 '저런, 가엾기도 하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하고 말하더니, 우리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갔어요. 일흔이 넘은 늙은 귀족이 가엾은 할머니를 위해 몸소 계단을 내려간 거예요. 얼마 안 되는 돈을 얻으러 힘들게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에요. 물론 이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헌금(신약성경 <마가복음> 12장 41~44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헌금의 액수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할 때 곧잘 인용된다)처럼 진심에서,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어요. 이 시대의 시인은 바로 이런 것들을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행동에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주고 달래 주는 힘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단지 혈통이 좋고 족보도 있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아라비아 말처럼 뒷발로 서서 히이잉 하고 울거나 자기가 들어간 방에 평민이 있다고 '여기에 길바닥 패거리가 있었군!'하고 빈정거리는 순간, 귀족의 고귀함은 썩어 버려요. 테스피스(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비극 시인. 비극의 창시자이며 연극에서 처음으로 가면을 사용했다)의 가면이 되어 버리죠. 그런 사람은 놀림감이 되고 비웃음을 살 뿐이에요."

- <모든 것은 제자리에!>

 

- 어느 곳에 진짜 학생이 있었어요. 이 학생은 다락방에 사는 빈털터리였죠. 진짜 식료품 가게 주인도 있었어요. 식료품 가게 주인은 번듯한 방에 사는 집주인이었어요. 난쟁이 요정은 이 사람 집에 붙어살았어요. 크리스마스이브 때마다 큼직한 버터 덩어리가 떠 있는 죽 한 접시를 얻어먹으려고요! 이건 식료품 가게 주인이 아니면 줄 수 없죠. 그래서 꼬마 요정은 식료품 가게에서 지냈어요. 게다가 그곳은 배울 게 많은 곳이었답니다.  

- 어느 날 저녁 학생이 양초와 치즈를 사러 가게 뒷문으로 들어왔어요. 학생한테는 심부름꾼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온 거예요. 학생은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돈을 치렀어요. 가게 주인 부부는 학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 인사를 했고요. 주인아주머니는 인사 말고도 잘하는 게 있었어요. 말솜씨가 무척 좋았죠! 아무튼 학생도 잘 자라고 인사하고 돌아가려다가 우뚝 멈춰 서서 치즈를 싼 종이의 글씨를 읽기 시작했어요. 오래된 책에서 찢은 그 종이에는 시가 가득 적혀 있었어요. 그건 아무렇게나 찢어 버려도 될 만큼 하찮은 책이 아니었죠.

- 가게 주인이 말했어요.
"그런 종잇조각이라면 얼마든지 있다네! 어떤 아주머니한테 커피콩을 조금 주고 받은 책이지. 8 스킬링(덴마크의 옛 화폐 단위)만 내면 나머지를 몽땅 주겠네!"
학생이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치즈 대신 그걸 살게요. 저는 버터 빵만 있어도 되니까요. 이 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건 벌 받을 짓이에요. 아저씨는 빈틈없고 현실적인 분이죠. 하지만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저 낡은 통과 다를 게 없어요!"
학생의 말투는 무례했어요. 특히 통한테는요. 물론 식료품 가게 주인은 웃었고 학생도 웃었어요. 어차피 농담으로 한 말이니까요. 하지만 난쟁이 요정은 몹시 화가 났어요. 집주인이자 고급버터를 파는 식료품 가게 주인한테 잘도 그런 말을 내뱉는구나 싶었죠.

- 난쟁이 요정은 통에 입을 붙였어요. 통에는 날짜 지난 신문이 들어 있었죠.
"너 정말 시가 뭔지 몰라?"
통이 대답했어요.
"흥, 내가 왜 몰라? 늘 신문 아래 칸에 실려 있어서 가끔 잘려나가는 거잖아! 그건 내가 학생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을걸! 물론 주인아저씨한테 비한다면 나는 한낱 보잘것없는 통이지만!"

- "좋아, 학생한테 알려 주자!"
난쟁이 요정은 당장 집 뒤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 학생의 다락방으로 갔어요. 방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어요.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학생은 아래층 가게에서 산 너덜너덜한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건 그렇고, 방이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요! 책 속에서 밝은 빛 한 줄기가 뻗어 나와 점점 굵어지더니 높이 솟아올라 커다란 나무가 되었어요. 나무는 학생의 머리 위로 가지를 뻗었어요. 초록 잎은 하나같이 싱그러웠고,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어요. 눈동자가 새까맣게 반짝이는 소녀도 있었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신비롭게 빛나는 소녀도 있었죠. 또 가지에 열린 열매 하나하나는 빛나는 별이었어요. 게다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음악 소리까지 울려 퍼졌답니다. 

- 이렇게 멋진 광경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어요. 난쟁이 요정은 까치발로 선 채 촛불이 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방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이윽고 학생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어요. 하지만 난쟁이 요정은 그대로 서 있었어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래가 여전히 들렸거든요. 잠든 학생한테 그 노래는 달콤한 자장가였죠. 
난쟁이 요정이 말했어요.
"여긴 정말 멋진 곳이야! 이런 곳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학생집에 붙어사는 것도 괜찮겠는데?"

- 그리고 곰곰이 따져 보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어요.
"하지만 학생 집에는 죽이 없는걸!"

- 헌 신문을 넣어 두는 통이 신문 앞면에 쓰인 글씨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나서 뒷면에 쓰인 걸 읽으려고 몸을 돌리던 참이었거든요. 난쟁이 요정은 곧장 아주머니한테 입을 돌려주었어요. 하지만 그 뒤로 금고건 불쏘시개건 할 것 없이 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다 통의 말을 따르게 되었죠. 더구나 통을 얼마나 믿고 존경했던지, 나중에는 밤에 주인아저씨가 읽는 신문의 미술 기사와 연극 기사도 모두 헌신문을 넣어 두는 통에서 나온다고 철석같이 믿을 정도였답니다. 

- 하지만 난쟁이 요정은 이제 더는 저녁마다 가게에서 들려오는 지혜롭고 양식 있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다락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기가 무섭게 튼튼한 닻줄에 걸려 올라가듯 무심결에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가 열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요. 난쟁이 요정은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마치 하느님이 폭풍을 타고 거친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죠. 난쟁이 요정은 그만 울음을 터뜨렸어요. 왜 울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 속에는 뭐랄까, 기쁨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어요. 학생과 함께 저 나무 밑에 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죠. 난쟁이 요정이 찬 바닥에 서 있는 동안 쌀쌀한 가을바람이 들창으로 불어 닥쳐 무지무지 추웠어요. 하지만 난쟁이 요정은 다락방 불이 꺼지고 노랫가락이 바람에 흩어져 버리기 전까지는 추위도 느끼지 못했어요. 

- 하지만 불이 꺼지고 마음이 가라앉자, 그래요, 난쟁이 요정은 이렇게 말했죠.
"나를 둘로 나누는 거야! 식료품 가게와 인연을 딱 끊을 순 없어. 죽을 먹어야 하니까!"
정말 인간적이지 않나요? 우리 같아도 식료품 가게로 가겠죠. 죽을 먹기 위해서.

 

- <식료품 가게의 난쟁이 요정>


- 그렇고 말고요, 천 년 뒤에는 사람들이 증기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 넓은 바다를 건널 거예요! 아메리카 대륙의 젊은이들이 유서 깊은 유럽을 찾아올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남아시아의 찬란했던 유적을 보러 가듯이, 오래된 유럽의 기념물과 그때쯤이면 폐허가 되어 있을 도시들을 보러 오겠죠. 
천 년 뒤에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 템스 강(영국의 런던 시내를 흐르는 강)과 도나우 강(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를 거쳐 흐른다)과 라인 강(스위스에서 독일과 네덜란드를 가로질러 북해로 흘러드는 강)은 그때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겠죠. 몽블랑(알프스 산맥에 속한 산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을 따라 뻗어 있다)은 꼭대기에 눈을 이고 우뚝 솟아 있고, 오로라는 북쪽 나라들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티끌이 되어 사라져요. 오늘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도 잊혀질 거예요. 지금 이 언덕 밑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처럼요. 이제 이 언덕은 부유한 밀가루 상인의 땅이 되었고, 밀가루 상인은 여기에 긴 의자를 마련해 물결치는 밀밭을 바라보며 앉아 있곤 하죠.

- 유럽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아일랜드의 바닷가죠. 하지만 여행객들은 아직 자고 있어요. 영국의 하늘 위를 지날 때 깨워 달라고 했거든요. 여행객들이 처음 밟을 유럽 땅은 영국이에요. 교양 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셰익스피어의 나라라고 부르죠. 다른 사람들은 정치의 나라, 기계의 나라라고 부르고요.
 
- 여행은 영국에서 해저 터널을 지나 프랑스로, 샤를 대제(프랑스의 기반이 된 프랑크 왕국의 왕. 768년에 왕위에 올라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서유럽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했다)와 나폴레옹의 나라 프랑스로 이어집니다. 몰리에르(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학자들은 먼 옛날의 고전파나 낭만파 이야기를 꺼내죠. 그리고 유럽의 분화구인 파리가 낳은, 우리 세대는 알지 못하는 영웅과 시인과 학자들을 한껏 칭찬하겠죠. 

- 비행선은 콜럼버스가 배를 띄운 나라, 코르테스(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멕시코를 정복한 사람)가 태어난 나라, 칼데론(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이 음악 같은 시구로 희곡을 읊조린 나라, 스페인을 날고 있습니다. 검은 눈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은 여전히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죠. 지금도 불려지는 옛 노래는 엘 시드(스페인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많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한다)와 알람브라 궁전(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을 이야기합니다. 

- 이번에는 하늘을 날아 바다 저편 이탈리아로, 영원한 도시 로마의 나라로! 하지만 영원한 도시는 사라지고 캄파냐(로마 주변의 평야 지대)는 사막이 되어 버렸어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던 자리에는 돌담의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 있군요. 사람들은 그 돌담마저 진짜 성당의 것이었는지 의심하고 있네요.

- 이제 그리스로,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있는 호화로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래야 그리스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죠. 다음은 보스포루스(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로, 거기서 한두 시간 쉬고 나서 지난날 비잔티움(보스포루스 해협 서해안에 있던 고대 도시,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다가 지금은 이스탄불로 불린다)이 있던 곳으로 갑니다. 가난한 어부들이 그물을 펼치고 있군요. 터키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 이곳에는 하렘(이슬람 나라에서 여자들이 외부와 격리되어 살던 곳으로, 보통 궁궐의 후궁이나 가정에서 부인들이 거주하던 방을 가리킨다)이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 하늘의 여행객들은 도나우 강을 따라 지난날 번영했던 도시들의 유적과, 현재의 우리는 전혀 모르는 도시들 위를 날아갑니다. 그러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생겨날, 기념물이 풍부한 곳 여기저기에 내려앉았다가는 또 금세 날아오르죠.

- 눈 아래 독일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난날 철도와 운하가 그물처럼 펼쳐져 있던 나라, 루터가 설교하고 괴테가 노래하고 모차르트가 음악계를 주름잡던 나라! 위대한 이름이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름들도 있죠. 


- <천 년 뒤에는>

 

- 쾨게 마을 주변은 몹시 삭막한 곳입니다. 마을 자체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있지만 좀 더 아름다웠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마을이 온통 드넓은 벌판으로 둘러싸여 있고 숲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은 한 곳에 자리 잡고 살면 거기서 뭐든 좋은 점을 찾아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더라도 전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는 법이지요! 쾨게 마을 변두리에는 바다로 흘러드는 시내를 따라 작고 소박한 뜰이 연이어 있어서 여름철이면 더없이 근사했습니다.  
 

- 하지만 진열대에 가득 쌓인 꿀 과자에서는 더없이 좋은 냄새가 풍겼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장이 서는 내내 과자 장수가 늘 크누드네 집에 머무른다는 점이었습니다. 덕분에 크누드는 가끔 꿀 과자를 얻어먹었고 요하네한테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나는 건 과자 장수 아저씨가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무엇으로도, 심지어 꿀 과자로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요, 어느 날 밤 아저씨는 바로 그 꿀 과자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두 아이에게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죠. 그럼 우리도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짧은 이야기니까요. 

- "과자 가게에 꿀 과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단다. 하나는 모자를 쓴 젊은이 모양이었고, 또 하나는 모자는 안 썼지만 머리에 조그맣게 금박이 칠해진 아가씨 모양이었지. 둘 다 얼굴이 앞쪽에 있었어. 그러니까 거길 봐야지 뒤쪽을 보면 안 돼. 뒤쪽은 사람 같은 데가 하나도 없으니까. 젊은이는 왼쪽 가슴에 씁쓸한 아몬드를 달고 있었어. 바로 심장이었지. 아가씨는 온몸이 그냥 꿀 과자였고, 둘은 본보기로 만들어져 가게 진열대 위에 나란히 놓여있었어. 워낙 오랫동안 같이 있다 보니 정이 들어 버렸지. 하지만 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면 고백을 해야 한단다."


- "아가씨는 생각했어.
'이런 말은 남자가 먼저 하는 거야.'
하지만 젊은이가 자기 사랑을 받아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기도 했지."


- "젊은이는 훨씬 더 엉뚱한 생각을 했어. 남자는 원래 그런 법이거든. 젊은이는 꿈속에서 개구쟁이 꼬마가 되어 은화 네 닢을 주고 아가씨를 사 먹어 버렸단다."

- "몇 주일이나 진열대 위에 놓여 있다 보니, 둘은 바싹 말라 버렸어. 아가씨는 마음이 점점 더 섬세하고 여성스러워졌지.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 사람과 나란히 진열대에 놓여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어!' 하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둘로 톡 쪼개져 버렸어."

- "젊은이는 생각했지.
'내가 사랑한다는 걸 알았으면, 좀 더 오래 살았을 텐데!'"

- 과자 장수 아저씨가 말을 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란다. 봐, 이게 그 두 사람이야! 둘의 인생도 그렇고 마음에만 담아 둬서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도 그렇고, 참 기구하지 않니? 자, 받아라!"
과자 장수 아저씨는 요하네한테는 멀쩡한 젊은이를, 크누드한테는 쪼개진 아가씨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사랑 이야기에 깊이 감동받아 도저히 과자를 먹을 수 없었답니다. 

- 다음 날 두 아이는 과자를 들고 쾨게 교회 묘지로 갔습니다. 교회 벽은 아름다운 송악 덩굴에 뒤덮여,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근사한 양탄자가 걸려 있는 것 같았죠. 두 아이는 햇볕을 담뿍 받고 있는 덩굴잎 위에 꿀 과자를 얹어 놓고 다른 아이들에게 꿀 과자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마음에만 담아 둔 사랑 이야기를요.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어하며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꿀 과자를 바라보니 덩치 크고 심술궂은 사내아이가 쪼개진 아가씨를 꿀꺽 삼켜 버리지 뭐예요. 크누드와 요하네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가엾은 젊은이를 먹어 버렸습니다. 젊은이를 외톨이로 남겨 둘 수 없어서였겠죠. 그래도 그 이야기만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답니다. 

-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웃은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요하네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코펜하겐으로 나가 재혼도 하고 직장도 구하게 되었거든요. 아버지는 거기서 배달부로 일하기로 했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었지요. 이웃은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답니다. 어른들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편지를 주고받자고 약속했습니다.

- 그 뒤로 크누드는 구둣방에 일을 배우러 들어갔습니다. 다 큰 사내아이가 언제까지나 빈둥빈둥 놀 수는 없으니까요. 이윽고 크누드는 견신례(기독교의 행사 가운데 하나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더 깊은 믿음과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베푸는 의식)를 받았습니다. 견신례 날 크누드는 요하네가 있는 코펜하겐에 얼마나 가고 싶었던지요! 하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크누드는 쾨게에서 겨우 35 킬로미터 떨어진 코펜하겐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쾨게 만 너머로 코펜하겐의 탑들이 보이고, 견신례를 받던 날에는 성모 교회의 황금 십자가가 반짝이는 모습까지 또렷이 보였는데도요. 

- 요하네는 좋은 목소리 덕분에 큰 행운을 잡았습니다.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를 하게 된 거죠. 얼마 전에는 돈도 좀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중 1 리그스 달러(덴마크의 옛 화폐 단위)를 쾨게에 있는 그리운 이웃에게 크리스마스이브 선물로 보낸다며, 부디 요하네를 위해 건배해 달라고도 했고요. 더구나 맨 마지막 말은 요하네가 직접 편지 끄트머리에 적어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크누드 오빠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라는 말이었죠. 

- 구두 직공이 될 날이 가까워질수록 크누드는 자기가 요하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언젠가 요하네를 아내로 맞게 될 거라고 점점 더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면 절로 웃음이 나서 실을 쫙쫙 잡아당기고 가죽을 밟고 있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답니다. 실수로 송곳에 손가락을 찔리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크누드는 절대로 그 꿀 과자들처럼 입을 꾹 닫고 있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래요, 그 꿀 과자 이야기는 크누드에게 좋은 교훈이 되었지요.  

- 헤어질 때 요하네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가끔씩 우리 생각도 할 거지? 우리,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자꾸나!"
이렇게 해서 다음 일요일에도 찾아올 구실이 생겼습니다. 물론 크누드도 그럴 생각이었고요.

- 크누드는 밤마다 일이 끝나면 불빛 아래 남아 있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시내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요하네가 사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요하네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죠. 방에는 거의 날마다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한 번은 요하네의 얼굴 그림자가 커튼에 뚜렷이 비쳤습니다. 그런 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구둣방의 안주인은 크누드가 밤이면 밤마다 '싸돌아다닌다'고 못마땅해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죠. 
하지만 주인은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원래 그런 법이지!"

- 크누드는 생각했습니다.
'일요일에는 만날 수 있어. 그러면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고, 내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할 거야! 지금은 한낱 가난한 구두 직공이지만,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가게를 차릴 거야. 독립된 내 가게를 차릴 거라고. 그래, 가서 분명히 말할 거야! 말하지 않으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꿀 과자한테 배웠잖아!'

- 일요일이 되자 크누드는 집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크누드는 몹시 운이 나빴습니다. 요하네의 가족은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요하네가 크누드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오빠, 극장에 가 본 적 있어? 한번 와! 난 수요일에 노래를 불러. 오빠가 온다면 표 보내 줄게. 우리 아빠가 오빠네 구둣방 주소 아니까."

- 아, 친절한 요하네! 수요일 낮에 봉투가 도착했습니다. 봉투 속에 편지 같은 건 없었고 표만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크누드는 난생처음으로 극장에 갔습니다. 가서 뭘 봤을까요? 물론 요하네죠.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요하네. 요하네는 낯선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연극이었습니다. 진짜로 결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크누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아니라면 굳이 표를 보내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았겠지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크누드도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 임금님도 요하네가 마음에 들었는지 요하네를 보고 웃었습니다. 아, 크누드는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요하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요하네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었습니다. 꿀 과자 아가씨가 속으로 생각했듯이, 그런 말은 남자가 먼저 해야겠지요. 그 꿀 과자 이야기에는 정말로 많은 진실이 담겨 있었답니다.

- 일요일이 되자 크누드는 곧장 요하네를 찾아갔습니다. 성찬식(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성도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다)에라도 갈 때처럼 엄숙한 기분이었죠. 때마침 혼자 집에 있던 요하네가 크누드를 맞아 주었습니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죠.
요하네가 말했습니다.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아빠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오빠한테 좀 갔다 오라고. 하지만 오늘 밤엔 오빠가 꼭 올 것 같았어. 사실, 할 얘기가 있어. 나, 이번 금요일에 프랑스로 떠나게 됐어. 거기서 공부해야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거든!" 
크누드는 방 안이 온통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비록 울지는 않았지만 크누드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요하네도 그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 "크누드 오빠, 오빤 정말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야!"
이 말을 듣자 크누드도 굳어진 혀가 겨우 풀렸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요하네를 사랑하는지 털어놓고 부디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요하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습니다. 요하네는 크누드의 손을 놓더니 슬프고도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크누드 오빠, 우리 서로 불행해지지 말자! 난 언제까지나 오빠가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여동생이야. 그 이상은 안 돼!"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으로 크누드의 달아오른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벅찬 일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거야. 우리 스스로가 그러려고 노력한다면 말이야!"

- 그러면서 크누드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자기가 멀리 떠나게 된 것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요.
요하네가 말을 이었습니다.
"오빤 아직 어려! 하지만 어린 시절 버드나무 아래서 놀던 때처럼 착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줘!"
크누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크누드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한 가닥 실 같았습니다.

- "달빛이 비치면 마음은 멀리 덴마크로!"
하지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 달빛이 아니라 그 늙은 버드나무였습니다.
크누드는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그건 버드나무한테, 그리고 꽃 핀 딱총나무한테 물어보세요. 크누드는 일을 그만두고 뉘른베르크를 떠나 다시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 크누드는 아무한테도 요하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마음속에 슬픔을 묻어 두었지요. 크누드는 오래된 꿀 과자 이야기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꿀 과자 젊은이가 왜 왼쪽 가슴에 씁쓸한 아몬드를 붙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크누드 자신이 가슴으로 씁쓸한 맛을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반면 늘 상냥하게 웃음 짓던 요하네는 뼛속까지 꿀 과자였습니다. 문득 크누드는 배낭의 가죽 끈이 가슴을 옥죄는 것 같았습니다. 숨 쉬기조차 힘들어 끈을 느슨하게 풀어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크누드는 세상이 절반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마음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 크누드는 높은 산들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다시 커지고 닫혀 있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북받쳤습니다. 알프스 산들은 지구의 접혀 있는 날개 같았습니다. 지구가 검은 숲과 세찬 물줄기와 구름과 눈 덮인 벌판 같은 갖가지 무늬가 있는 저 거대한 날개를 펼친다면!
크누드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지구는 그 거대한 날개를 펼쳐 하느님 곁으로 날아가겠지. 그리고 하느님의 밝은 빛을 받아 비눗방울처럼 터져 버릴 거야! 아, 차라리 마지막 심판의 날이 왔으면 좋겠어!"

- 산꼭대기는 붉은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숲 사이로 초록빛 호수가 보였을 때, 크누드는 쾨게 만의 바닷가가 생각났습니다. 슬프긴 했지만 이제 더는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라인 강의 강물은 거대한 파도처럼 굽이치며 흐르다, 부서져서 새하얗게 빛나는 구름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구름은 마치 여기서 태어나는 것 같았죠. 구름 위에서 무지개가 하늘하늘한 리본처럼 아른거리고 있었습니다. 크누드는 문득 쾨게 마을의 물레방아가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도 물은 굽이쳐 흐르다 부서졌습니다. 

- 크누드는 가끔씩 대리석으로 지은 대성당 지붕에 올라갈 때가 가장 즐거웠습니다. 새하얀 성당은 꼭 고향의 눈으로 만든 것 같았습니다. 지붕의 조각상과 뾰족탑, 천장 없는 복도도 모두 고향의 눈으로 만든 것 같았죠. 모퉁이와 탑 꼭대기와 반원 모양의 문에 새겨진 하얀 조각상들이 크누드를 보고 웃어 주었습니다. 머리 위에는 새파란 하늘이, 발아래에는 드넓게 펼쳐진 롬바르디아 평원과 마을이 보였습니다. 멀리 북쪽에는 높은 산들이 만년설을 이고 있었습니다. 크누드는 붉은 벽에 송악 덩굴이 휘감겨 있던 쾨게 교회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크누드는 바로 여기, 알프스 산 뒤편에 묻히기로 마음먹었답니다.
 
- 이윽고 음악이 아름답고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곳은 코펜하겐의 극장보다 훨씬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코펜하겐 극장에는 요하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 이건 마법일까요? 막이 오르자, 요하네가 금과 비단으로 꾸민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채 무대에 서 있지 않겠습니까? 요하네의 노래 솜씨는 하느님의 천사만큼 훌륭했습니다. 이윽고 요하네가 무대 앞쪽으로 나와 요하네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요하네는 크누드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분명 꿈이 아니었습니다! 극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요하네에게 환호를 보내고 꽃과 꽃목걸이를 무대로 던졌습니다. 요하네는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는 몇 번이나 앙코르를 받고 다시 나왔지요. 

- 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요하네의 마차를 둘러싸고 끌고 갔습니다. 크누드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맨 앞에서 마차를 끌었습니다. 마차가 요하네가 머물고 있는 불이 환히 켜진 집에 닿았습니다. 크누드는 마차 문 바로 옆에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요하네가 나왔습니다. 불빛이 아름다운 요하네의 얼굴을 똑바로 비추었습니다. 요하네는 웃음을 머금고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깊이 감동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지요. 크누드는 요하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요하네도 크누드를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크누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가슴에 별 훈장을 단 신사가 요하네에게 팔을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 크누드는 집으로 돌아가 배낭을 꾸렸습니다. 고향의 딱총나무와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 그 버드나무 아래로! 사람은 단 한 시간 만에 평생을 다 살아 버릴 수도 있답니다!

- 크누드는 산으로 떠났습니다. 산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몸은 벌써 녹초가 되었는데도 마을이나 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누드는 오로지 북쪽으로,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머리 위에서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했습니다. 별은 깊은 골짜기 저 아래서도 반짝였습니다. 마치 발밑까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죠. 크누드는 자기가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래쪽에 별이 점점 더 많아지고 밝아지더니 나중에는 언뜻언뜻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 둘은 크누드에게 말했습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우리 혀가 풀렸어요! 당신은 우리에게 속마음을 솔직히 말해야 하고, 생각만으로는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걸 가르쳐 주었어요. 덕분에 우리는 결실을 맺었어요. 우린 결혼하기로 했답니다."  
그러고는 손을 맞잡고 쾨게의 거리를 걸어갔습니다. 이제는 뒷면도 나무랄 데 없이 모양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둘은 곧장 쾨게 교회로 갔습니다. 크누드와 요하네도 손을 잡고 뒤따랐지요. 교회 벽은 여전히 아름다운 송악 이파리로 덮여 있었습니다. 교회의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고 꿀 과자 한 쌍이 오르간 소리가 울리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 "주인님들 먼저! 꿀 과자 신랑 신부는 그 뒤에!"
그러면서 크누드와 요하네를 위해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크누드와 요하네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하네가 크누드의 얼굴 위로 자기 얼굴을 기울였습니다. 요하네의 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크누드의 뜨거운 사랑에 요하네 마음속의 얼음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차가운 눈물이 크누드의 불타는 뺨 위로 똑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크누드는 눈을 떴습니다. 크누드는 추운 겨울 저녁, 낯선 나라의 늙은 버드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구름이 크누드의 얼굴에 차가운 싸락눈을 후둑후둑 뿌리고 있었습니다.
"아, 내 평생 가장 즐거웠어! 하지만 그건 꿈이었지. 하느님, 부디 한 번만 더 이 꿈을 꾸게 해 주세요!"
크누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 새벽녘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누드의 발등에 눈이 쌓였습니다. 크누드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보러 가다가 웬 젊은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 버드나무 아래에서. 


- <버드나무 아래서>

 

- 세탁부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어요.
"찬물에 너무 오래 있었어요! 게다가 아침부터 물 한 잔, 빵 한 조각 못 먹었거든요. 몸에 열이 나요! 오, 주님! 부디 집까지 돌아갈 힘을 주세요! 아, 가엾은 우리 아이!"
그러면서 세탁부는 울었어요.

- 절름발이 마렌이 도움을 얻으러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시장님은 손님들과 함께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시장님이 말했어요.
"저 여자는 세탁부예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군요. 쓸모없는 여자죠! 저 여자의 아들이 안 됐지 뭡니까! 나는 그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아이 어머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자랍니다!"


- 세탁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어요. 그리고 부축을 받아 초라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어요.
친절한 마렌이 맥주에 버터와 설탕을 넣어 따뜻하게 데워 주었어요. 이것이 가장 잘 듣는 약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러고는 빨래터로 돌아가 빨래를 헹궜어요. 

 

- <쓸모없는 여자>

 

- 어느 곳에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행복한 집이었지요. 주인이고 하인이고 친구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기쁘고 흐뭇했습니다. 오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거든요. 어머니와 아들은 둘 다 건강했답니다. 

- 방 안의 등불은 반쯤 가려져 있고, 창에는 고급 비단으로 만든 묵직한 커튼이 빈틈없이 쳐져 있었습니다. 바닥에 깔린 융단은 이끼처럼 부드럽고 두툼했고요. 이 모든 것이 졸음으로, 잠으로, 편안한 휴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밤새 어머니와 아기 곁을 지키던 유모도 그만 졸음에 겨워 꾸벅거렸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행복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 침대 머리맡에 그 집의 수호신이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기의 머리 위에는 반짝이는 별이 수없이 박힌 그물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별 하나하나는 행복의 진주였습니다. 인생의 착한 요정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저마다 선물한 것이지요. 거기에는 건강과 돈, 행복과 사랑, 말하자면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바라는 것이 빠짐없이 반짝이고 있었답니다. 

- 수호신이 말했습니다.
"이제 선물이 다 온 모양이군요."
바로 옆에서 "아뇨!"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기의 수호천사가 한 말이었죠.
"아직 선물을 들고 오지 않은 요정이 딱 하나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들고 오겠죠. 몇 년 뒤에라도요. 아무튼 마지막 진주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 "올 거예요. 언젠가 반드시요. 그 요정의 진주는 목걸이를 만들 때 꼭 필요하니까요."


- "그 요정은 어디 사나요? 집이 어디지요? 가르쳐 주세요! 제가 가서 그 진주를 받아 오겠습니다."
아기의 수호천사가 말했어요.
"굳이 그러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죠.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요정은 한 곳에 살지 않아요. 황제의 궁전에서 살기도 하고 더없이 가난한 농사꾼의 집에서 살기도 하죠. 하지만 어떤 집에서든 늘 흔적을 남겨요. 누구한테나 선물을 한다는 뜻이죠. 온 세상이든 달랑 장난감 하나든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갓난아기한테도 반드시 찾아올 거예요. 수호신님은 시간이 많다고 낭비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군요. 좋아요, 함께 진주를 가지러 가죠. 이 부잣집에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 진주를요!"  

 

- 수호신과 수호천사는 손을 잡고 그 요정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곳은 컴컴한 복도와 텅 빈 방들이 있는 커다란 집이었습니다.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습니다. 한쪽 벽의 창문이 모두 열려 있어서 쌀쌀한 바람이 들어와 길게 늘어진 흰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바닥 한복판에 뚜껑을 덮지 않은 관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관 속에는 한창나이인 젊은 여자가 뉘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름답고 싱싱한 장미꽃에 파묻혀, 가지런히 포갠 아름다운 손과 죽어서도 아름다운 기품 있는 얼굴만 보였습니다. 여자의 얼굴에는 하느님께 바쳐진 영혼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하고 엄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 죽은 여자 대신 이 집을 다스리는 새어머니인 슬픔이었습니다. 슬픔이 타는 듯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습니다. 눈물방울은 진주가 되어 무지갯빛으로 반짝였습니다. 천사가 손에 쥐자 진주는 일곱 가지 빛을 띠며 별처럼 빛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슬픔의 진주,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마지막 진주랍니다! 이 진주의 빛 덕분에 다른 진주들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지요. 이 무지갯빛을 보세요. 이것은 이 세상과 천국을 이어주는 다리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날 때마다 천국에서는 우리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친구가 한 명씩 늘어나지요. 이 땅에 밤이 오면 우리는 별 너머 모든 것의 끝을 우러러봅니다. 슬픔의 진주를 잘 보세요. 이 속에는 우리를 멀리 데려다주는 프시케 (그리스어로 영혼이라는 뜻이며, 주로 나비로 표현된다)의 날개가 있답니다." 

 

- <마지막 진주>

 

- 커다란 배 두 척이 북극으로 떠났습니다. 땅과 바다의 경계를 찾아내고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지요. 뱃사람들은 벌써 꼬박 일 년 동안이나 안개와 얼음 사이를 나아가며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마침내 겨울이 되자 해는 아예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이제 기나긴 밤이 몇 달씩 이어지겠지요. 주위는 온통 얼음으로 둘러싸였고 배 두 척은 얼음에 굳게 갇혀 버렸습니다. 언 바다에 눈이 수북이 쌓여 뱃사람들이 그 눈으로 벌집 모양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선사시대의 거석만큼 큰 집도 있고, 겨우 두서너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작은 집도 있었습니다.

 

- 북극의 밤은 어둡지 않았습니다. 오로라가 붉고 푸르게 빛났으니까요. 오로라는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멋진 불꽃놀이 같았습니다. 눈도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북극의 밤은 오래도록 빛나는 황혼입니다. 밤이 특히 밝을 때는 원주민 무리가 찾아옵니다. 털가죽 옷을 입고 얼음으로 만든 썰매를 타고 다니는 신기한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털가죽을 가득 싣고 왔습니다. 뱃사람들은 따뜻한 털가죽을 사들여 눈집 바닥에 깔거나 이불로 썼습니다. 그사이에도 집 밖은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추운 한겨울도 이렇게까지 춥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 젊은이가 잠자리에 들면 성스러운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라 위로가 되었답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있을지라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구약성경 <시편> 139장 9~10절 참조)."

- 젊은이가 이 진실의 말과 신앙에 위로받으며 눈을 감자 잠과 꿈이 찾아왔습니다. 꿈속에서 영혼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영혼은 육체가 쉬는 동안에도 깨어 움직입니다. 젊은 뱃사람의 귓가에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그리운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젊은 뱃사람은 그 노랫가락이 마치 따뜻한 여름 바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밝은 빛이 눈으로 된 둥근 천장을 뚫고 들어오기라도 하는 듯 머리 위가 환해졌습니다. 젊은 뱃사람이 고개를 들어 보니, 벽도 천장도 아닌 천사 어깨에 달린 커다란 날개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요. 젊은이는 환하고 부드러운 천사의 얼굴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천사가 백합꽃 속에서 솟아오르듯이 성경책 속에서 나와 두 팔을 활짝 벌렸습니다. 그러자 눈집의 벽이 옅은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지고, 고향의 푸른 풀밭과 ...

 




- 어린 독자에게도 인생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가.

 

- 프랑스의 교육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인 폴 아자르는 자신의 명저 <책, 어린이, 어른>에서 안데르센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성을 가려내려고 몰두하는 동화작가, 인생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생명이 없는 물건에게까지 살아갈 용기를 주려고 한 안데르센. 안데르센은 추위에 떨면서도 세상은 언제나 따뜻한 곳이라고 떠벌리는 위선자는 아니다. 그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악의 문제, 생존의 문제들을 대담하게 내놓는다. 그러나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살아갈 용기를 잃지는 않는다. 그는 나아가 진실을 더 깊이 알고자 하며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을 반만 알고 있을 때이다.' 

- 폴 아자르의 말처럼, 안데르센은 어린 독자들에게 인생의 진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고 냉혹한 현실을 과감하게 보여 준다.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가슴 아픈 진실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린이 문학에 대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라는 환상을 품었던 이들에게는 몹시 거북하고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안데르센 문학이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빛을 발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문학에 담겨 있는 인생의 진실 덕분이다. 

-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 <성냥팔이 소녀>도 안데르센의 이러한 세계관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1846년 덴마크 국민 달력 Dansk Folkekalender for 1846>(1845)에 처음 실렸다가, 나중에 <새로운 동화 : 두 번째 권 - 두 번째 모음집 Nye Eventyr. Andet Bind. Anden Samling>(1848)에 <낡은 집>, <물방울>, <행복한 가족>, <어느 어머니 이야기>, <옷깃>과 함께 수록되었다. 안데르센의 회고에 따르면, 외국으로 여행을 가다가 덴마크 윌란 반도 남부에 있는 그로스텐 궁에서 출판업자가 보낸 편지를 받고 쓴 작품이다. 출판업자의 편지는 봉투 속의 판화 세 점 가운데 하나를 골라 달력에 실을 짧은 이야기를 써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안데르센은 그중 누추한 옷을 입은 소녀가 성냥을 한 움큼 쥐고 있는 요한 토마스 룬뷔의 판화를 골랐다. 그러고는 하루 만에 이 이야기를 쓰고 이튿날 아침 손질했다고 한다. 

- <성냥팔이 소녀>에는 안데르센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관한 추억이 담겨 있는데, 안데르센은 자서전에서 '어머니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거지처럼 동냥을 하러 다녔다. 한 번은 동냥질이 너무 하기 싫어 다리 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을 다룬 이 이야기 속에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힘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연민이 깃들어 있다.

- <성 둑에서 바라본 풍경화>는 <양로원 창가에서>와 함께 <게아 Gæa> 1847년 판에 실린 <코펜하겐의 두 풍경 To Billeder fra Kjobenhavn>(1846)에 나오는 작품이다. <코펜하겐의 두 풍경>에 나오는 두 편의 이야기는 기존의 안데르센 동화와 달리 짧은 시처럼 쓰여진 장편(掌篇)으로, 간결한 문장과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성 둑에서 바라본 풍경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이야기에 나오는 성은 코펜하겐에 있는 요새 카스텔레트 Kastellet'를 가리키는 듯하다. 1659년 스웨덴이 코펜하겐을 점령했다가 물러가자, 덴마크는 도시와 항구를 철통같이 방어하기 위해 교회, 감옥, 장교와 사병들의 막사 등이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해자로 둘러싸여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이 요새는 1725년부터 국사범 형무소로 쓰였는데, 그때 수감자들이 감방에서 '구멍'을 통해 예배를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안데르센은 특유의 관찰력과 상상력으로 음울한 성과 그 성안에 갇힌 죄수의 고뇌를 마치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그림자>는 안데르센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재키 울슐라거는 <안데르센 평 Hans Christian Andersen : the Life of a Storyteller>에서 '자아파괴에 관한 악마적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출신 독일 작가 샤미소(1781~1838)의 소설 <페터 슐레밀의 이상한 이야기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의 영향을 받아쓴 작품이다. 실제로 본문에 이 소설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나온다. 그림자를 잃은 사내 이야기는 이미 있다는 것이다. 페터 슐레밀은 악마한테 그림자를 팔았다가 다시 자연에 관한 연구로 구원받지만, 안데르센의 주인공은 그림자에게 굴복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 저명한 판타지 작가 어슐러 K. 르 귄은 저서 <밤의 언어 The Languageof the Night -Essays on Fantasy and Science Fiction>에서 안데르센의 주인공은 문명화된 갖가지 측면을 의미하고 그림자는 문명화된 성인이 억압해야 하는 모든 것, 곧 '우리 마음의 내면에 있는 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형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 그러므로 안데르센이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림자란 우리 자신의 일부이며 결코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의식적인 삶에서 그림자가 적게 드러나는 사람일수록 더욱 검고 진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데, 학자가 자신의 그림자(자아의 어두운 면)를 외면하고 스스로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어 버림으로써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그림자>는 안데르센의 자화상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안데르센은 자서전을 마무리하던 1846년 6월의 어느 일기에 '저녁때 내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두고 저자 재키 울슐라거는 (이 무렵 안데르센은) 결정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표면상으로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일에 줄곧 매달렸다. 사실로 치장한 환상인 자서전, 그리고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그린 자화상이지만 환상이란 틀로 주조된 동화 <그림자>가 바로 그것이었다고 서술했다. 

- 실제로 안데르센의 일기를 보면 런던 같은 대도시의 화려함과 심한 빈부 격차 등을 목격하면서 도시의 각박한 삶에 대해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830년에 안데르센은 친구 루드비 레쇠에게 식물학자 닐스 호프만 방의 시골 저택에서 휴가를 보내며 겪었던 일을 편지로 썼는데, 유리 슬라이드 위의 물방울에 '생물이 가득한 세상이 펼쳐져 있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돋보기는 요즘의 현미경으로 추정된다.

- 안데르센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인 <어느 어머니 이야기>는 매우 어둡고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머릿속에 이야기가 '특별한 계기도 없이 불쑥 떠올랐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로, 죽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죽음의 신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고통과 심정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온갖 고생 끝에 죽음의 신을 찾아가 아이를 돌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죽음의 신은 결국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가 버리는데, 이 마지막 부분이 초고에서는 해피엔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곧 죽음의 신이 아이를 돌려받고 싶은지 아니면 어머니가 모르는 나라로 아이를 데려가기를 바라는지 묻는 대목에서, 안데르센은 원래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주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깊이를 위해 마지막 문장을 '죽음의 신은 어머니의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로 바꾸었다. 

 

- <옷깃>은 허풍이 심한 옷깃의 구애담을 경쾌하게 다룬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옷깃은 양말대님, 다리미, 가위, 빗 등 모든 여인들에게 거절당하다가 결국 종이 공장의 헝겊 쪼가리 상자 안에서 엉터리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옷깃으로서의 삶을 마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야기가 적힌 종이로 변하는데, 이 익살스러운 이야기에 대해 재키 울슐라거는 '안데르센은 이를 통해 영국에서의 성공을 뽐내는 자신을 자꾸만 트집 잡는 덴마크 신문을 조롱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신에 대해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게 농담을 하며 익살스러운 우화를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안데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리보르 보이그트, 루이세 콜린, 예니 린드 등 여러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 때문에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옷깃을 안데르센의 자화상으로 보기도 한다. 

- 어린이문학 연구가 마리아 타타르는 <불사조>를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 작품으로 꼽으며, 이 작품이 성경 이야기에 스칸디나비아 민속과 고대 신화를 결합하여 불꽃 속에서 죽어 가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고 평했다. 불사조는 여러 문화권에서 죽음, 부활, 불멸 등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예술의 본보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 여행기 <스웨덴에서>에 실렸던 <어떤 이야기>는 목사가 주인공으로 <최후의 날에>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면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라는 목사의 가혹한 말이 마음에 걸린 아내는 죽어서 남편을 찾아온다. 둘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고통받을 죄인의 머리카락 한 올'을 찾아 나서지만,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한 영원히 고통받을 사람의 머리카락을 찾을 수 없다. 눈물을 쏟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진실을 말한다.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하느님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지옥불과 싸워 이겨 그 불을 끌 수 있답니다!' 하느님의 일부란 '사랑'으로, 아름다운 문장과 빠른 전개로 '신의 무한한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할머니>는 죽은 사람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점이나 관 속의 고인이 베고 누운 책에 추억이 깃들어 있다는 점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없는 책>과 비슷하다. 죽은 이의 책 속에 있는 많은 꽃들은 어떤 이야기도 뚜렷하게 말해주지 않지만, 말이 없다는 점 때문에 죽은 이의 지나온 시간과 추억을 더욱 애잔하게 돌아보게 한다. 이야기 속에 '말 없는 책'이라는 공백을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추억과 상상과 연민으로 그 공백을 채우게 한다.

- 안데르센은 자서전에서 '주변의 자연 풍경과 사물을 시적인 감성으로 곰곰이 살펴보기만 하면,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시다'라고 이야기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충만한 시인의 마음으로 쓰여진 이 글은 서로의 처지는 달라도 저마다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안데르센의 눈으로 보자면, 모두가 하나같이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 안데르센은 뉘하운에서 겨울을 지내며 새 이야기책을 써서 1852년 봄과 11월에 출판했는데, 이 책들은 처음으로 <동화 Eventyr>가 아닌 <이야기 Historier>로 불리었다. 재키 울슐라거에 따르면, 이때 안데르센은 '모든 연령층과 국가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던' 초기 작품의 고전적 형식과 우화적 장치를 내던졌다. 대신에 마법도 초자연적 요소도 거의 없는, 어른들을 위한 단편 소설을 시도했다.

- 안데르센은 예리한 통찰력과 아름답고 정교한 묘사로 인간이 발명한 달력으로는 알 수 없는 자연적인 계절의 순환과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1월은 인간의 달력에 따른 새해일 뿐 자연의 섭리에서 보면 한 해의 시작은 봄으로, 아이들을 물어다 주는 황새가 새해의 왕과 왕비(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물어다 줄 때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된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아이(봄)는 청년(여름)이 되고, 중년(가을)을 지나 마지막에는 노인(겨울)이 되며, 한 해의 왕과 왕비는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를 글로 쓴 듯한 작품으로, 계절에 대한 안데르센의 감수성과 직관력, 각 계절의 특성에 따른 화려하고 현란한 묘사가 돋보인다. 
 
- <최후의 날에>는 영혼의 불멸에 관한 종교적인 이야기로, 안데르센 동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이다. 안데르센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신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신처럼 죄인을 가혹하게 심판하는 무서운 신이 아니라 '사랑의 신'이다. 이 자비로운 신은 <성냥팔이 소녀>나 <천사>에서처럼 살아서 고통받은 사람들은 죽어서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어떤 이야기>에서처럼 아무리 악한 사람도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신은 언제나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신이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신앙'을 가졌을 때이다.

- <정말이라고요!>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터무니없이 부풀려지는 과정을 풍자한 이야기이다. 유머가 돋보이는 유쾌한 우화로, 깃털 하나가 암탉 다섯 마리가 되는 모습을 통해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살이 붙고 과장이 일어나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소문의 당사자가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같이 욕을 하는 장면이 아이러니하다. 

- 개의 죽음과 그 개의 무덤을 구경하고 싶어 하지만 볼 수 없는 소녀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린이 문학 연구가 마리아 타타르에 따르면 이야기 속의 여자 아이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가난 때문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소외되어 있지만, 멀리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보자면 '아름다움과 젊음, 가난, 고난이 아우러진 미학적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안데르센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모든 것은 제자리에!>는 안데르센이 시인 틸레로부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날려 버리는 피리 이야기를 동화로 써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말속에 이미 전체 구상이 담겨 있'어서 썼다는 작품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뒤바뀌는 사태가 벌어진다. 동화 연구가 잭 자이프스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일어난 시민혁명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 '이따금 상류 계층에 대한 비판을 입 밖에 냈으며, 귀족 계급의 주도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주도권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부들과 중간 계급 사람들은 귀족들을 누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 때문에 '정치 판타지' 또는 '사회 혁명 판타지'라는 평을 듣는다. 높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 <식료품 가게의 난쟁이 요정>은 물질과 정신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난쟁이 요정 이야기이다. 동화 연구가 잭 자이프스에 따르면, 이 작품 역시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일어난 혁명에 영향을 받아 쓴 작품으로, 이상을 위해 싸울지 빵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혁명가들에 대한 은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생이 사는 다락방은 몹시 가난한 공간이지만 또한 높은 곳으로, 시가 있고 아름다운 정신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죽'이 없다. 결국 난쟁이 요정은 이상은 다락방에 두고 몸은 죽이 있는 식료품 가게에서 살기로 하는데, 명백한 타협이지만 안데르센은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난쟁이 요정은 스칸디나비아 민간전승에서 종종 흰 수염을 기르고 빨간 모자를 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자신이 사는 집의 안전과 번영을 지키는 요정으로 알려져 있다. 

- 1850년과 1851년에 안데르센은 서인도 제도에 가 있던 친구 헨리에테 불프에게 일련의 공상을 적어 보냈다. 황새를 통해 하늘로 우편을 보낸다는 생각과 자기처럼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로 여행하는 생각 등이 그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천 년 뒤에는>이 발표되었는데,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1873)보다 20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그로부터 50년 뒤, 놀랍게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발명했고, 이후 비행기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의 젊은이'들이 '8일 만에 유럽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비행기와 항공 여행의 시대를 정확히 내다본 셈이다. 여행을 즐겨했던 안데르센의 폭넓은 경험과 날카로운 직관이 어우러져 빚어낸 한 편의 즐거운 공상 이야기로, 해저 전선이나 비행기 등 문명의 발달 자체보다 그로 인한 여행의 즐거움과 교류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 <버드나무 아래서>는 안데르센 스스로 '내 삶의 이야기가 몇 페이지 실려 있다'고 고백했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다. 안데르센은 남매처럼 자란 루이세라는 여성과 오페라 가수로 유명한 예니 린드를 사랑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버드나무 아래서>에 나오는 크누드와 요하네처럼, 안데르센은 현실에서 은인인 요나스 콜린의 막내딸 루이세와 남매처럼 자랐지만, 루이세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안데르센에게 마음이 없었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 예니 린드 역시 안데르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오토 골트슈미트와 결혼했고, 안데르센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이 '쓸쓸한 자화상' 같은 이야기를 발표했다. 실연 당시 안데르센은 곳곳을 여행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는데, <버드나무 아래서>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크누드의 모습을 통해 그때의 아픔과 외로움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요하네에게 버려진 뒤 정처 없이 떠돌던 크누드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도시 뉘른베르크는, 안데르센의 말에 따르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장엄한 도시로, 안데르센이 여행 중에 느낀 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 <한 꼬투리에서 나온 완두콩 다섯 알>은 <쓸모없는 여자>와 함께 <1853년 덴마크의 국민 달력 Folkekalender for Danmark 1853>(1852)에 실렸던 이야기이다. 안데르센에 따르면 '어린 시절 집에서 나만의 꽃밭으로 작은 나무 상자에 흙을 담아 골파와 완두콩 한 알을 심었던 추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품이다. 어느 병든 여자아이의 집 창가에 떨어진 완두콩이 아이의 희망과 기쁨이 된다는 이 따뜻한 이야기는 병든 어린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천사>와 닮았다.  

- <천국에서 떨어진 이파리>는 <시인의 백일몽 A Poet's Day Dreams>(1853)에 실렸던 이야기이다. 이 책은 1846년에서 1852년 사이에 발표된 동화 가운데 20편을 엮은 영어판 동화집이다. <쓸모없는 여자>, <한 꼬투리에서 나온 완두콩 다섯 알>, <버드나무 아래서> 등이 수록되었는데, <천국에서 떨어진 이파리>는 <마지막 진주>와 함께 영국에서 먼저 발표되었다. 천국에서 떨어진 이 신기한 이파리의 본질을 알아본 것은 가난하고 순수한 여자아이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세속의 눈이 아닌 순수한 마음의 눈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 <쓸모없는 여자>는 안데르센이 가난한 세탁부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이다. 어린 날 안데르센의 어머니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세탁부에게 이웃들이 손가락질하자 '그렇게 심하게 몰아세우지 마. 가엾게도 그 사람은 차가운 물속에서 뼈 빠지게 일하잖니. 며칠이나 따뜻한 밥을 먹지 못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몸을 데우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물론 좋은 일은 아니지.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고생을 많이 했대. 그래도 정직한 사람이고, 자기 아이는 늘 깔끔하고 단정하게 입힌다니까' 하고 감쌌다고 한다.

 

- 이 말들이 어린 안데르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년 뒤 안데르센은 사람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남을 이해할 수도, 쉽게 비난할 수도 있음을 깨닫고,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쓸모없는 여자>를 썼다고 한다. 당시 노동계급의 가난하고 힘든 현실이 깃든 이야기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추운 날 차가운 물속에서 힘들게 빨래하는 세탁부들의 고통과 애환이 그려져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세탁부의 결혼식 날'은 안데르센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 <마지막 진주>는 탄생의 기쁨에 죽음을 연관시켜 삶의 참된 의미를 노래한 작품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은 요정은 슬픔의 요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마지막 진주(슬픔의 진주)를 선사한다. 이 마지막 진주의 무지갯빛은 '이 세상과 천국을 이어주는 다리'로, 이 빛 덕분에 다른 진주도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안데르센은 곧잘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죽음도 인생의 일부로 여긴다.

- <두 아가씨>는 1854년 덴마크의 <국민 달력 Folkekalender for Danmark. 1854>(1853)에 처음 발표되었다. <짜깁기 바늘>이나 <옷깃>처럼 정교한 의인화 기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폴 아자르의 표현을 빌리면 안데르센은 '무생물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의 왕'답게 바늘, 옷깃, 다리미 등에 이어 달구와 손수레까지 의인화시켰다. 이 글이 쓰여진 1850년대는 수많은 도구와 기계가 발명되고 사회가 빠르게 변하던 시대로, 인간의 의식이나 사물의 이름도 많이 변했다. '아가씨 maiden'라고 부르는 도구는 땅을 다질 때 쓰는 일종의 달구 같은 것인데, 위쪽이 가늘고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원통형의 몸에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다는 본문의 묘사로 보아, 아마도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모습과 비슷해서 '아가씨'라고 불렸던 게 아닐까 추측된다. 

 




- 빌헬름 페데르센(Vilhelm Pedersen, 1820~1859)

안데르센이 발굴한 덴마크 화가로, 안데르센 동화에 처음 삽화를 그렸다. 안데르센은 그를 '천재 화가'라고 격찬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그의 그림은 '안데르센 동화 그림의 정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로렌츠 프릴리크(Lorenz Frolich)가 안데르센 동화에 삽화를 그렸다.

<성냥팔이 소녀>, <그림자>, <행복한 가족>, <불사조>,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 카이 닐센(Kay Nielsen, 1886~1957)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아서 래컴(Arthur Rackham), 에드먼드 뒤락(Edmund Dulac)과 함께 일러스트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옛이야기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그림자>, <어느 어머니 이야기>, <옷깃>

- 해리 클라크(Harry Clarke, 1889~1931)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스테인드글라스 아티스트로 명성을 떨쳤으며, 스테인드글라스 모양을 응용한 정교한 흑백 삽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낡은 집>

- 아서 래컴(Arthur Rackham, 1867~1939)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900년 <그림동화집>의 삽화에 그림을 그리면서 명성을 얻었다. 요정, 거인, 악령, 도깨비 등이 가득한 신비한 세계를 그만의 독창적인 이미지로 구현해 많은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크리스마스 캐럴>, <한여름 밤의 꿈>, <모든 것은 제자리에!> 등 수많은 명작의 삽화를 그렸다. 
 
- 고든 프레드릭 브라운(Gordon Frederick Browne, 1858~1932)

영국 밴스테드에서 태어났다. 신문, 잡지를 포함해 어린이책 삽화가로 활동했다. 펜과 잉크를 응용한 많은 작품으로 사랑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 오고 있다.

<쓸모없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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