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경진 외] 데프콘 3부 한미전쟁 1-5

일루젼 2024. 4. 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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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
출간 : 1999.11.10


   

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
출간 : 1999.11.10


     

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
출간 : 1999.12.30


     

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
출간 : 2000.02.10


     

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
출간 : 2000.02.25


       

 

24년도 3분의 1이 지나가고 있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날이다.

최근에는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나누어 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인지했지만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음식이건, 조건이건, 감정이건. 

 

무언가로 인해 기분이 나빠졌다는 말은 사실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의 기분을 선택했다는 걸 -그런 기분이 들도록 만드는 생각을 받아들였다는 걸- 인정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저 매 순간 모든 사람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나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이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동일한 자기복제의 세계에 홀로 남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들은 <데프콘>의 마지막 시리즈, 3부 한미 전쟁 편이다. 연재 당시부터 완간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어째서 미국과의 전쟁을 가정하느냐, 반미주의자냐,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등의 논란에 휩싸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저자들에게 짧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난 1부 한중 전쟁과 2부 한일 전쟁, 그리고 이번 3부 한미 전쟁은 연속된 시간 선상에서 전개된다. 한 번의 전쟁만으로도 깊은 상흔을 입기 마련. 사실 이미 상당한 누적 피해를 입었을 한국군의 전력 상황을 고려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장면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한민족 간에도,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 다른 생각들로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가. <데프콘> 3부는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위기의식과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패배 의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곡예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미 정이 든 주요 인물들이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가도, 동시에 그것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상대 진영 인물에게 연민 혹은 증오를 느끼게 된다. '나의 편'이란 무엇을 경계로 구분지어지는가? 절대적인 단죄란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칼을 휘두르는 이는 완전무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가? 

 

웹툰 <송곳>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전쟁에, 싸움에, 다툼에서 선과 악을 가르려 하고 편을 가르려 하는 본능을 억누르기란 어렵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나 또는 누군가의 목숨, 가치, 미래를.

 

감사히 읽었다.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이어질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사투에도 감사드리며.

일상 속에 숨겨진 충돌과 적의에도 감사를 보내며.

 


   

 

- 드디어 전쟁소설 데프콘 시리즈의 마지막 편, 한미전쟁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데프콘 1부가 1996년 말에 나온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외환위기를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해 여야 간에 정권이 교체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2000년대입니다.  

 

- 데프콘 3부는 통일한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데프콘 1, 2부처럼 "한국이 주변 강대국과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과 리얼한 전투, 그리고 처절한 전투에 참가한 인간 군상들의 뒤틀려버린 인생들에 대한 묘사 위주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 소설에서 통일한국과 싸우는 대상이 현재의 우방인 미국이 된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미국은 현재 가장 강한 나라이며, 가장 다양한 무기체계를 보유하고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상대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기본 전제하에 만약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이 한국을 공격하면 이라크나 유고처럼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칩니다. 그래서 데프콘 3부 한미전쟁은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한 시도입니다. 혹시라도 있을 외세의 부당한 침략에 우리는 당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데프콘 3부는 반미감정을 자극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다만 약소국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볼 때 강대국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약소국 국민들에게 어떻게 부당하게 대했나 살펴보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이 소설의 의미로 삼고자 합니다.


 

- 아직까지는 저 멍청한 구축함은, 미국 해군에서는 프리깃으로 분류할 만한 저 작은 한국 구축함은 이 잠수함의 존재도 모른 채 천천히 북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에스테베스 중령이 다시 작도 판독기에 몰입했다. 
 

- 작년에 발생한 한국과 일본과의 전쟁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정치적·경제적, 특히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특히 동경 130도 선, 북위 34도 선을 중심으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선포하는 등 미국의 압력은 노골적이었다. 

- 동경 130도면 포항 동쪽 구룡포에서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북위 34도는 거문도가 있는 위도이다. 영해이든 아니든 한국해군 함정과 공군 전투기들은 그 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한국이 평화선을 침범하면 미국은 그것을 동북아의 평화를 깨뜨리는 침략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 "곧 육지에서 12해리 거리까지 접근합니다." 
항해사관 데이비드 벤험 대위가 작도판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씨익 웃으며 함장에게 경고했다. '미국이 인정하는 한국 영해'에 들어가려는 함장을 제지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확인해 두겠다는 의도였다. 함장이 슬쩍 뒤돌아보며 미소로 답했다. 최악의 경우 한국 영해 안쪽에서 한국 해군 함정이나 초계기에 잠수함이 발각되더라도 얼마든지 그들을 따돌리고 빠져나올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테베스 중령은 한국 해군에게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해도상으로는 육지에 상당히 근접했지만 수심은 500미터 정도로 충분했다. 해수의 온도 변화가 심한 동해에서 심도를 잘 이용하면 해수면에서 평면적인 운동밖에 하지 못하는 수상함정에 비해 잠수함이 훨씬 유리했다. 그는 예전에 핵잠수함 SSN 759 '제퍼슨 시티'에 탑승했었다. 그때 나진에서 프놈펜까지 육지에서 50km 안쪽으로 계속 항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해군 함정, 또는 초계기도 그의 배를 포착하지 못했다. 

- '게다가 저 배의 대잠헬기는 격납고에 잘 모셔진 상태지.'
함장은 잠수함 승무원 입장에서 대잠헬리콥터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잠헬기는 구축함이 커버할 수 없는 장거리 수색력과 타격력을 갖는다. 그리고 슈퍼 링스에서 물속 깊이까지 내려가는 디핑 소나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대양에서는 잠수함이 대잠헬기로부터 숨을 곳은 별로 없었다. 

- 4월 13일 09 : 50 강원도 삼척 남동쪽 19km 해상 
한국 해군 구축함 을지문덕의 항해 함교에서 소리 없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부함장 석진호 중령이 바다 표면을 망원경으로 살피며 담담하게 함장에게 보고했다. 
"저 바보가 결국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온 코스 그대로 일직선으로 따라오는 멍청이라니..."
"설마 원자로가 용융되지는 않겠지. 여기서 원자로가 녹으면 차이나 신드롬이 아니라 아메리카 신드롬이 되겠군. 후후!"

- 통신장교가 함대사령부에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기뢰에 접촉했다는 보고를 하는 동안에 부함장이 먼저 현실로 돌아왔다.
"방사능에 의한 해양오염보다는 역시 앞으로 일을 걱정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이 억지를 쓸 것 같아 걱정됩니다."
"설마 한국 영해 훨씬 안쪽인데 그런 억지를 쓰겠어?"
함장이 미국 잠수함을 기뢰밭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영해를 지켜야 하는 해군 함장으로서 외국 잠수함이 영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 눈 뻔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잠수함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이미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전쟁 때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북평항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기뢰밭 위로 을지문덕함을 몰았다. 수중심도가 조정된 기뢰이기 때문에 수상전투함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었다. 이 해역에 있는 청진급 고속정은 이 기뢰원을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 예상대로 그 미국 잠수함은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러나 이제 함장은 소매에 굵은 금색띠를 두른 제복을 입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용기 있고 지혜가 있더라도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군사적 위기를 촉발시킨 장교를 제독으로 승진시킬 정부는 없을 것이다. 

- "일전에 우리 영해 근처에서 러시아 핵잠이 고장나 부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러시아 수상함대가 막강한 위세로 무력시위하면서 잠수함을 빼갔습니다. 만약 저놈이 완전히 침몰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때처럼... 앗! 저길 보십시오. 부상합니다!"

- 부함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망원경을 돌리며 함장이 욕설을 퍼부었다. 바다표면이 하얗게 부풀어 오르더니 시커먼 쇳덩어리가 떠올랐다.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떠오른 것은 역시 미국 잠수함이었다.

- 미국 공격형 원자력잠수함이 피해를 입더라도 수중항주를 통해 간신히 영해 밖으로 빠져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셈이니 사건은 묻혀 버릴 수 있다. 해군 사관들이 술자리에서 쉬쉬하며 속닥거리다가 한바탕 통쾌하게 웃을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침몰해 버리면 도리어 별 문제가 없다. 깊은 동해바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침몰한 잠수함이나 그 잔해가 동해 해저에서 천천히 흐르는 해류를 따라 움직이면 해상에서 그 잠수함을 발견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수색한답시고 한국 영해를 헤집고 다닐 수도 없었다. 자국 잠수함이 한국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미국이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잠수함이 기관이 정지한 채 부상해서 표류하면 골치 아파진다. 예전에 독도 근해에서 러시아함대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 입은 잠수함을 구하려고 미국 함대가 떼로 몰려올 것이 뻔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한국이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한국 영해 밖. 그것도 미국이 억지 주장하는 평화선 밖에서 한국 해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 이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지만, 미국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국제정치에서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발단인 통킹만 사건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을 알고 있는 함장은 실로 난감했다. 

 

- "제기랄! 제지시켜! 어이~ 카메라병! 360도 회전 촬영하고 태양 위치를 확실히 담아두도록!" 

 

- "위험해. 해군이 너무 위험한 장난을 쳤어."
상황판을 훑어보던 조장호 대령이 파란색 항공대 장교용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김종구 대위가 해군 제1전투항공단장인 조장호 대령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상황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미국이 우릴 공격하겠습니까?"
"글쎄. 그동안 그 설마가 여러 나라 잡았지..."

 

- 한국과 일본의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이 한국 정부에 바라는 요구조건은 너무 가혹했다. 만주에 주둔 중인 한국군을 철수시키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한국 정부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국 정부는 다른 방안을 모색했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 임정빈 대령이 보고 있는 KNTDS(한국형 전술자료 분배체계)의 모니터는 더 복잡했다. 수십 개의 도형이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강릉 상공의 E-2C가 함대사령부를 경유해 보내온 데이터 때문이었다. 모니터 동쪽 하늘은 미국 항공모함에서 연속 발진하는 항공기들로 온통 메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에 표시된 식별부호들은 모두 아래가 터진 반원형 가운데에 점이 찍힌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 "저놈들을 당장 적성기로 선포해 달라고 해!"
임정빈 대령이 신경질적으로 통신하사에게 명령했다. 지금 디스플레이에서는 미 해군 항공기들의 항공궤적 심벌이 밑이 열린 반원 안에 점이 찍힌 모양, 즉 우군기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함대사령부의 KNTDS 종합체계에서 미 해군 항공기들을 우군으로 평가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수십 년 간 우호국이었던 미국 항공기에 한국 군인들이 습관적으로 부여해 온 식별부호였다. 

- 잠시 후 반원이 밑변이 터진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임정빈 대령이 더욱 짜증을 냈다. 그것은 을지문덕에게 접근하는 항공기들을 우군이나 적대국의 항공기가 아니라 미식별 항공기로 평가했다는 뜻이었다.

 

- 동그라미는 아군, 사각형은 미식별, 마름모는 적성국 표시이다. 그리고 위아래가 연결된 완전한 도형은 수상목표, 아래가 트인 것은 항공기, 위가 트인 것은 잠수함을 뜻한다. 항공기들 동쪽에 있는 10여 개의 동그라미도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함대사령부는 미 해군 전투기들처럼 미 항모전투단 소속 군함들도 미식별로 분류한 것이다. 을지문덕함 동쪽에는 온통 사각형 부호표시들 뿐이었다. 하지만 청진급 고속정을 빼고는 이 해역에 한국군의 것은 없었다. 한국 해군 지휘부는 미국과의 우발사태를 우려하여 함대나 전투기를 파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부함장 석진호 중령이 투덜거렸다. 

 

- "항모는 에이브라함 링컨인지 칼 빈슨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탐장이 다른 전탐병과 의논한 다음에 함장에게 보고했다. 미국 군함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잡아도 이것이 어느 배의 것인지 파악할 만한 충분한 데이터가 한국 해군에는 없었다. 
"칼 빈슨이야. F-14D 꼬리날개에 검은 사자하고 NH라는 마크가 붙어 있는 걸 아까 함교에서 봤거든."

- 화재진압을 위해 승무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잠시 후 불이 난 곳을 향해 소방호스에서 바닷물이 쏘아져 나갔다.
임정빈 대령은 화재를 진압하고 승무원들을 구조하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확인되지도 않은 내용을 방송했다.
"곧 아군 전투기들이 올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 4월 13일 11 : 20 울릉도 백운동, 한국 해군 제1전투항공단
"을지문덕함으로부터 긴급구조 신호가 왔다."
조장호 대령이 관제탑과 연결된 전화 수화기를 내리면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조종사 대기실 상황판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고 있던 김종구 대위는 드디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됐다며 아찔한 기분이었다. 미국을 상대로 전투를 하기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군인인 이상 밥값은 해야 했다. 

- "하지만 상부에서는 을지문덕함이 죽는 걸 그냥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라고 했다."
"그럴 수가!"
조종사들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조장호 대령이 그다음에 한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다음 목표는 우리가 있는 울릉도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국에 대항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맙소사! 앉아서 죽으란 겁니까?"
 

- 김종구 대위가 항의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국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종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군인이지만 지금은 싸우고 싶어도 마음대로 싸울 수 없었다. 그것은 심각한 모순이었다. 

 

- "대통령님! 안녕하셨습니까?"
양석민 국방장관이 거수경례를 하려다가 말았다. 공군사관학교를 포함해 30년의 군생활이 아직 몸에 배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그랬소만, 앞으로는 그렇지 못할 것 같구려."
"지금 다시 대통령님께 여쭙겠습니다. 을지문덕함은 포기하시겠습니까?"

 

- "구축함을 포기하든 말든, 일단 승무원들을 살려야 합니다. 승무원들만 살리겠습니까, 아니면 구축함도 살리시겠습니까?"
"양 장관은 한국이 미국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들을 물리칠 수 있소?"

 

- "그럼 항복이 최선이오? 그렇다면 항복하겠소."
대통령은 그 중요한 사안을 너무도 간단히 결정했다. 그러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미국과 싸워 무사할 나라는 지구상에 없었다. 여진구 수석과 비서실장이 놀라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국방장관이 한 말은 싸늘한 충격이었다.
"미국이 항복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단순한 우발전이나 지역적 분쟁이 아닙니다. 그놈들이 단단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 국방장관 말에 따르면 전쟁도 불가능하고 항복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홍지영은 '그럼 날더러 어떡하란 말이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대통령인 그가 해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였다. 
"그렇습니다. 이번 일에 대처하는 순발력을 보십시오. 움직인 것은 미 함대와 항모항공단뿐만이 아닙니다. 1개 해병원정단이 이동을 시작했고 미 본토에서 수송기들이 대거 발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와이 부근 해상에 대기 중이던 고속수송선단이 한반도 쪽으로 급속항진 중이라고 합니다." 
"고속수송선단에는 전쟁물자가 비축되어 있습니다."
여진구 수석이 설명했다. 잠시 후 대통령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렇다면 상륙전까지? 아! 이젠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 "적당한 선에서 맞아줘야 할 겁니다."
양석민 장관이 전혀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적당한 선이 어느 정도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 "이동에 걸리는 시간보다는 병력소집과 편성, 훈련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립니다. 걸프전의 경우 90일 정도가 소요됐지만 요즘은 약간 더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작정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더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뒤로 갈수록 양석민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럼 전쟁은 두세 달 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실망하기에 충분한 말만 골라서 했다.
"동해에 있는 항모전단만으로도 한국 전 해공군 전력에 맞먹습니다. 선전포고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서울에 순항미사일이 날아올 겁니다. 그리고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제2사단도 이틀 만에 한국에 올 수 있습니다."
"선전포고는 미 의회의 전권사항이지만 일단 대통령이 개전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 미국은 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데 쓸데없이 의회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전쟁을 선전포고 없이 치러왔다. 홍지영은 지금 당장이라도 토마호크 미사일이 이곳을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국방장관이 당장 시급한 문제를 다시 꺼냈다.
"을지문덕함은 어떡하시겠습니까?"
잠시 주저하던 대통령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통령으로서 모든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군인도 당연히 국민이었다.
"우리 영해 안에서 우리 전투함이 위험에 처했소. 보호하시오!" 

- 4월 13일 12 : 10 강원도 삼척 남동쪽 15km 해상
임정빈 대령은 화재진압 지휘를 부함장에게 맡기고 다시 전투정보실로 내려왔다. 동료 수병들의 처참한 죽음을 본 함장은 무척 허탈했다. 불에 타고 갈가리 찢긴 시신들이 지금도 갑판 가득 늘어져 있었다. 특히 기관장의 죽음이 함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미사일이 폭발한 후 기관장은 빠져나오지 못한 수병들을 구하려고 불타는 기관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2차 폭발이 일어나 기관장이 휩쓸렸다. 헬기격납고에 있던 대잠헬기가 폭발해 화염과 파편이 바로 앞에 있는 기관구획을 덮친 것이다. 

- "적기들이 전개하고 있습니다! 거리 90km. 공격하려나 봅니다!"

포술장은 함에 접근하는 미 해군 전투기들을 서슴없이 적이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을지문덕함의 승무원들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는지 수병들은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다. 미국은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얼토당토 없이 강한 적이었다. 
"기다려! 적은 확인을 위해 접근할 것이다."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접근하는 미 해군 전투기들을 하나라도 더 잡기 위해 최대한 끌어들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 승무원의 죽음을 각오한 가혹한 명령이었다.

- "국방부에서 명령입니다! 예인선을 보내고 공중엄호하겠답니다. 자위권 발동을 허가한답니다!"
통신하사가 목이 메어 외치자 여기저기 탄성이 울렸다. 그러나 함장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런! 톰캣에 제공호로 맞설 셈이야?" 
"아닙니다! F-16입니다. 20여 대를 이쪽으로 보내겠답니다!"

"좋아! 그럼 딱 한 번만 막아내면 되겠군!"
함장은 F-16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한국 공군의 F-16 전투기 조종사들은 지난 전쟁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다.

- "이번엔 더 접근하겠지. 설마..."

함장은 그 기분 나쁜 F/A-18을 한 대라도 직접 잡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아까처럼 멀리서 하픈을 발사하고 도망가버리면 복수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함장은 물론 전 승무원들이 어쩌면 이번 공격에 을지문덕함과 운명을 함께할 수도 있었다. 
"적 편대, 거리 60km! 부채꼴로 완전히 펼쳐졌습니다!"
임 대령이 힐끗 KNTDS 디스플레이를 살폈다. 을지문덕함을 중심으로 남쪽에서 북쪽까지 21기의 미 해군 전투기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F/A-18들은 30도 각도마다 2기씩 위치하고, F-14 전투기들은 4대씩 편대를 지어 북쪽에 4대, 남쪽에 4대가 해안선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톰캣 한 대는 정찰용인지 상공에 머물렀다.

 

- "아직인가?"
"예! 적은 아직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습니다."
함장의 짤막한 질문에 전탐 선임하사가 답했다. 

 

- 김종구가 R-27T 미사일 2발을 날렸다. 나토 코드 알라모-B였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한국 공군 전투비행단과 해군 전투항공대는 더 이상 'FOX1'이나 'FOX2'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군은 미사일을 거리별로, 유도방식별로 번호를 붙였다. 레이더 경보가 울리고, 김종구 대위의 기체가 능동형 미사일의 목표가 되었음을 알렸다. F/A-18에서 발사한 암람 공대공미사일이었다. 미사일들이 서로 교차했다. 한국과 미국 해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다시 피할 차례가 되었다.  

 

- 4월 13일 12 : 20 강원도 삼척 남동쪽 15km 해상
"2기 추가 요격! 0-9-0부터 1-8-0까지 하픈 6기가 남았습니다. 평균거리 12km!"
전투정보실에서 환성이 울렸다. 을지문덕의 미사일 요격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머지 스탠더드 2발이 하픈 2발을 명중시킨 것이다. 이제 을지문덕함에 남은 것은 시 스패로와 근접방어무기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처럼 한다면 어떻게든 요격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함장 임정빈 대령은 잘하면 구축함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북쪽에서 한국 공군의 F-16 전투기들이 하픈 몇 발을 요격해 준 덕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광개토대왕급과 달리 을지문덕이 스탠더드 수직발사 미사일 시스템으로 개장한 때문이었다. 함수에 16개가 탑재된 수직발사기 각각에는 스탠더드 한 발, 또는 ...

 

- 이승재가 한숨을 쉬었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 전쟁을 걸어온다면 한국제 K-1A1 전차나 소수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제 T-80 전차로는 미국 M1 계열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120밀리 포에 맞아도 끄떡없는 그 엄청난 방호력을 가진 그런 괴물들과 싸울 생각을 하니 저번 전쟁에서 전차 포수로 참전했던 이승재는 현기증이 일었다. 

 

- 그 기록이 지금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태백산맥 뒤에 뭐가 있는지 몰라 미 해군 전투기들은 한국 전투기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북한 공군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항모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전투기들이 순항미사일을 요격할 여유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 [토마호크의 유도방식은 TAINS다. 지형 확인식이니까 미사일이 태백산맥을 넘어가면 요격이 힘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다에서 모조리 잡아야 한다.] 
TAINS는 Tercom Aided Navigation Syatem의 약자인데, Tercom은 또한 terrain contour matching의 약자이다. 이것은 목표까지의 지형을 미사일의 컴퓨터가 기억한 자료와 일일이 대조하면서 순항미사일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 김종구 대위는 언젠가 정동진에서 본 일출을 기억했다. 탁 트인 바다에서 시뻘건 불덩어리가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광경이란! 충격을 받은 그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같이 온 여자친구가 놀라서 그를 흔들었지만 비명은 일출이 끝날 때까지 멈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경포대 가는 길의 벚꽃이었다. 영동지방의 푸른 봄하늘에 눈 내리듯 온 천지에 하얗게 날리는 벚꽃. 차를 몰고 그 길을 달리니 영화 '엑스칼리버'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벚꽃잎이 휘날리는 길을 말 탄 기사들이 달리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흐린 하늘과 달리 경포대의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 조장호 대령의 경고가 편대무선망을 울렸다. 순항미사일은 태백산맥을 넘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김종구가 조종간을 당기고 러더를 힘차게 밟았다. 캐노피 아래로 갈색 산맥과 푸른 바다가 점점 작아지며, 반대로 넓어지고 있었다. 순항미사일은 이미 까만 점으로만 보였다. 

 

- 지형확인 유도방식으로 순항하려면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지형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김종구는 인공위성은 기본적으로 첩보위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미국은 유사시에 대비해 한국 지형을 샅샅이 조사했을 것이다.

 

- 미국은 한국 지역에 대한 군사위성 정보를 한국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스파이 사건으로 양국의 관계가 불편해진 로버트 김 사건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미국은 기술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댔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지금 그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 한국 해군 전투항공대 소속 수호이-33, 그리고 공군 소속 F-16 전투기 조종사들은 급속히 상승하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들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들을 뒤에서 추적하여 기관포로 격추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기관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데다가 순항미사일의 탄두가 너무 커서 전투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따라붙은 F-16 전투기들이 사이드와인더를 발사해 순항미사일 몇 기를 더 격추시켰다. 그 와중에 목표를 잃은 사이더와인더가 강릉 남동쪽 피래산 정상 부근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 대통령은 죽기로 각오한 사람 같았다. 미국이 목표를 대통령 집무실로 정한 바에야 그들의 목표는 뚜렷한 것 같았다. 홍지영은 혼자 죽더라도 결코 온 국민을 미국이란 강국과의 전쟁에 내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그 사실을 발표하고 즉시 미국에 항복하시오."

"3천억 달러나 되는 전쟁배상금을 일본에 내란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내더라도 어차피 미국은 우리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제발 내려가십시오!" 
비서실장이 간곡히 만류하자 홍지영이 고개를 젓더니 다시 창문 앞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내가 목표라지 않소? 다른 분들은 빨리 내려가시오."

- "대통령님 목숨이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화가 난 비서실장이 양석민 국방장관을 노려보았다.
"이곳이 목표지 대통령님이 목표는 아닙니다. 미국이 20분이라는, 피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줬습니다. 단지 이곳도 공격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김영호 비서실장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 느릿느릿 말하는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양석민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한국을 깨기로 작정한 이상, 이번 미사일 공격에 대통령님이 돌아가시든 말든 미국 입장에서는 상관없을 겁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기를 꺾고 군사력을 줄이겠다는 의도이지, 대통령님을 전략목표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 훌륭한 무기시스템들은 주로 민간인 학살에 책임 있는 국가나 외국 침략경력이 많은 국가인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얼마 전 이 무기의 도입과정에서 실제 발사시험을 거쳤는데, 원산에서 발사한 스커드-C형 미사일을 거의 동쪽 해상에서 정확하게 요격하는 것을 직접 보고 김준원 중위가 놀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고고도로 날아오는 탄도탄이라면 몰라도 한국 같은 산악지형에서 순항미사일을 요격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초저고도로 계곡을 타고 날아오는 순항미사일을 요격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공미사일 시스템의 명중률을 떠나서, 목표탐지가 거의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일부 수입한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 PAC-2는 이번 요격작전에 아예 참여하지도 못했다. 한국은 군수산업체에게 매우 골치 아픈 지형이었다. 

 

- 순항미사일을 요격하려면 그것들의 위치를 계속 추적해야 한다. 그런데 공중조기경보기나 정찰기들이 총동원됐지만 미사일들은 대부분 추적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그래서 순항미사일이 이쪽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전혀 다른 코스를 잡아 서울을 폭격할 수 있었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데도 그의 포대는 전혀 필요 없는 곳만 지키는 헛일만 하다가 말 수도 있는 것이다. 

 

- 교전레이더에 목표가 포착되기도 전에 김준원 중위가 단추를 눌렀다. Buk의 개량형인 우랄 지대공시스템에서 초탄이 발사되었다. 짧은 꼬리날개 4개가 달린 미사일이 흰 연기를 뿜으며 날아갔다. Buk 계열은 스트랩 다운 방식의 관성유도에 지령 유도를 복합할 수 있기 때문에 포착 전에도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 대외관계협의회(CFR)는 1921년, 폐쇄적인 먼로주의 아래에서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국익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외교전문가, 은행가, 기업가, 변호사 등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국제주의의 진작 및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1921년 뉴욕에서 창립되었다. 이 협의회는 창립 이후 현재까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 관련 싱크탱크로 손꼽힌다. 헨리 키신저와 50년대에 미 중앙정보국을 맡았던 알렌 레스, 클린턴 행정부에서 정무차관을 역임한 피터 타노프 등 미국 행정부에서 국무부와 중앙정보국을 이끈 인물들의 다수가 대외관계협의회에서 배출됐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유엔 및 브레튼우즈 체제를 이끌어내는 등 이 단체에서 제안한 많은 정책이 미국 정부에 의해 채택됐다.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를 발행하기도 하는 대외관계협의회는 제2의 국무부라는 별명을 넘어 '진짜 미 국무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실존단체이다.

- "오시는 길에 뉴스를 통해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3시간 전에 미합중국 잠수함 샤이엔이 '일! 본! 해!'에서 피격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먼저 전해드립니다." 
로드는 Sea of Japan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일본인들이 20세기 초까지 동해를 한국의 바다라는 뜻에서 동해(東海)나 조선해라고 부른 경우가 상당수 있는 반면에, 현재 미국인 가운데서는 동해를 한국 근해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발간한 백과사전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조차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는 줄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미국에게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중대한 이익이 걸려 있고 미국의 언론 보도에 한국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는 일본은 '심리적 지도'로 따지면 한국보다 수백 배는 크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작고 볼품없는 나라로 알고 있는 볼리비아, 모리타니, 말리 등이 최소한 남한 면적의 10배 이상이나 되는 넓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실제 크기와 심리적 크기는 전혀 다른 척도이다. 
"차로 오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잠수함은 어떻게 되었소? 그리고 피격된 위치는 정확히 어딥니까?"

 

- 경제분과를 맡고 있는 폴 맥브라이드는 그것이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TV 보도에 따르면 잠수함이 부상한 위치는 한국 정부의 공식발표와 미국 정부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상식과 달리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잠수함은 기관이 멈췄습니다. 부상자가 네 명 발생했다고 하는데 치명적인 중상은 아니랍니다. 사고 해역은 한국 정부가 주장하기로는 해안선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이들에게 한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단지 일방적인 주장이나 변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포스터 로드 주장이 이른바 '사실'을 이야기했다. 

 

- "미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그곳은 북위 37도 15분, 동경 130도 2분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국제연합이 선포한 평화선 안쪽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행정부의 공식 브리핑은 두 시간 후에 있답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번 사건의 유일한 증거물인 핵잠수함을 그 위치까지 예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국 사회의 최상층부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들인 협의회 정회원들이 한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곳에서는 한국이 나치독일보다 훨씬 잔인하고 이라크보다 말이 더 안 통하는 국가로 갑자기 변모했다. 1992년 이후 계속됐던 북한 핵위기 때 북한의 대화제의를 묵살하고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던 것은 CIA 같은 정보기관, 그리고 언론과 각종 정치 관련 연구재단들이었다. 보수적인 미국의 여론주도층은 근래 들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는 분위기였다. 특히 대외관계협의회는 '카터센터' 같은 온건한 민간단체와는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 "국민들이 입을 피해가 걱정스럽습니다."
양석민의 반어법이었다. 장관은 아직 군인이었고, 국방장관이었다. 민간인 피해도 우려되지만 무수히 죽어 나갈 젊은이들 생각에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생명을 위협받을 것이다. 총탄은 어린 병사와 나이 든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 4월 13일 14 : 05 경기도 구리시
'우리나라는 끝이다.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
차영진 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TV 보도는 1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화면에는 서울이 폭격당해 곳곳에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여단 참모장과 32 전차대대장은 넋을 잃은 채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통일한국군 제5기갑여단 여단장실은 한동안 TV에서 나오는 폭음만 메아리쳤다. 

- "아무래도... 재편성 작업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참모장 오성환 대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차영진은 잠시 얼굴이 붉어졌다. 잊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차영진은 작년에 일본 본토에서 있었던 일본 육상자위대 기갑부대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작전 실패 탓도 아니고 상대방인 일본 육상자위대의 90식 전차가 유별나게 우수해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봐도 별로 불리하지도 않은 전투에서 패한 것이다.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일본에 상륙한 한국군은 도쿄를 내주고 일패도지하게 되었다. 질서 정연한 퇴각으로 다행히 일본군에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원정군에 참여한 제5기갑여단은 단 한 대의 전차도 건지지 못했다. 전차는 항구 주변에서 파괴하고 전차병들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 그나마 살아 돌아온 인원이 훨씬 더 적을 정도로 참패였다. 

- 귀국한 다음 차영진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불명예제대하는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스스로 예편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이름만 남은 제5기갑여단을 재편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 부대를 재편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고문이었다. 
제5기갑여단은 재편성 작업이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전차는 채 1개 대대 분량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장비가 부족했다. 그리고 훈련된 인원도 턱없이 부족했다.

 

-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한국을 '안정화'시켜야 합니다. 문제는 수단입니다. 외교적 해결을 위해 노력을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선택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결정합시다." 
"그렇게 빙빙 돌려서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국무부에서 이미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을 토마호크로 폭격할 때, 아니 그전에 우리 잠수함을 한국 영해에서 구출할 때 대통령 각하 명령도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이미 모두 다 아는 이야기이니 우리 툭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 "만약 국무부 의견대로 군사적 수단을 선택한다면 국방성으로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나저나 국무부 쪽에선 어째서 외교적인 해결을 이렇게도 빨리 포기하려고 합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나는 그 점이 궁금합니다."
이들에게 미 해군이 토마호크로 서울을 폭격한 것이나 한국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문제는 언제든지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도 있고, 그것을 핑계 삼아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할 때였다. 

 

- "천만에요. 우리는 좀 더 온건한 수단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이 제2의 이란, 제2의 이라크화가 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외무장관이 없는 미국에서는 국무장관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미 국무부가 지금까지 온건한 수단이랍시고 동원한 것은 통상 단절과 한국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공세적 압력뿐이었다. 특히 전쟁배상금 지급 문제는 수취인이 될 일본 정부에서도 미국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현재의 극동 국제질서를 아무런 이의 없이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극동지역의 지역강국으로 등장한 한국을 일본을 대신한 새로운 제1급 안보 파트너로 고려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받아들이기에 한국인은 너무 예측 불가능합니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말은 미국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보특보가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북한의 계속되는 무책임한 도발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과 짜증 나는 줄다리기를 해오면서 그것이 북한 사람 특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예측 불가능성은 북한 사람 특유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특유의 것입니다."

- 한국이 통일되기 전에 한국인에 대해 그런 말을 한 미국 정치인은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은 그만큼 미국에 대해서만은 항상 고분고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종 간의 성격 차이는 같은 문화권의 개인적 차이보다 적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말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고, 안보보좌관이 우려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 "견제하려고 할 경우 중국이나 일본은 미국을 격렬히 증오할 것입니다. 중앙정보국에서는 우리가 장차 통제하기 힘든 국력을 가질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한국을 대상으로 '안정화'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적인 아시아 평화의 토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보다 더 대규모의 전쟁, 또는 서로 상대방의 확증말살을 위한 무제한적인 핵전쟁을 염두에 두고 CIA 국장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공격하면 일본과 중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또한 일본과 중국의 군비확대를 막아 장기적으로는 동아시아 각국이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수 있었다. 즉 미국의 국익을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에 대해 미국의 정책결정 담당자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것은 곧 대통령 각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안보보좌관이 국방장관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국방장관, 군 경력이 전혀 없는 그는 이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대하더라도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 "신속한 해결이 한국을 '안정화시키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단 미국의 봉쇄가 시작되면 러시아의 군수물자가 한국으로 유입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막아야 합니다. 지상군의 과도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초기에 어느 정도 공군력으로 한국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에는 저도 찬성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으론 부족합니다. 저는 가능한 신속히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이 사태해결의 최선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상군을 동원한다는 사실을 한국이 알면 한국이 미국의 의지를 신속하게 수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말을 시작할 때와는 달리 제프리 보좌관이 어린아이 달래듯 차분히 말했다. 국방장관 브리언트는 한국이 미국의 의지를 수용하는 게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윌리엄 제프리 보좌관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절대 전쟁 초기에 미국에 항복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보좌관은 자신의 어깨에 수백만 미국 노동자와 투자자들의 희망이 걸려 있음을 뿌듯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 장관이 알기로도 한국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에 항복의사를 전달해 왔다. 그러나 미국 고위 정치가와 관료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한국정부의 항복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기를 꺼렸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미국은 차근차근 한국과의 전면전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가고 있었다. 

- "천만에요. 우리도 할 일이 많습니다. 베트남을 비롯한 아세안 회원국들, 그리고 인도와 몽골 등 한국을 지지하는 국가 혹은 단체들을 고립시켜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유엔에 가입신청을 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도 말입니다. 우리는 중국의 확장정책에 흔들리고 있는 일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유럽은 이번에는 일제히 일본과 중국을 지지하고 있군요. 프랑스 같은 3류 국가가 사사건건 우리 발목을 잡아서 귀찮았는데 이번엔 오히려 우리에게 강경대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차영진은 깜짝 놀랐다. 역시 장인섭 중령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있었다. 차영진은 능구렁이 같은 이종식 차수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한국이 미국의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것처럼, 차영진도 이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설마 핵사이트는 아니겠죠?"
핵사이트란 핵미사일 발사기지 또는 저장고나 생산공장, 핵전쟁을 지휘하는 미 전략사령부, 또는 그 인터넷 사이트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차영진이 대답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음... 물론이지."

 

- "일본이나 중국의 로비 탓도 있을 거야. 그들의 로비망은 한국과는 하늘과 땅 차이지. 바보 같은 한국인들! 한국인들은 자기들 주장을 남들에게 설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 "나도 이번 결론이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전쟁이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대안이라곤 생각지 않네. 하지만 국가안보회의 구성원은 물론 언론, 국회, 싱크탱크 할 것 없이 여론주도층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어. 신속하게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전제 하에 작전을 짜주게. 3일 이내로 대략적인 작전계획을 내가 받아볼 수 있겠나?"
로버트 케인 대장이 앞자리를 힐끔거렸다. 운전사와 장관 비서의 뒷머리가 도청방지용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3일이라면 동원할 수 있는 부대 목록과 기본적인 작전개시 날짜 정도만 뽑을 수 있을 겁니다. 상륙 작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지상군 작전을 위해선 시간이 제법 걸릴 겁니다."

- 미국 합참의장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지시와 통제하에 각 통합군에 전략지시를 하달하고 감독할 수 있다. 그러나 통합군 사령부를 직접 지휘하고 명령할 권한은 없다. 즉, 합참의장은 미군 현역장교 중 최고 선임자이지만 군 운영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문민통제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미군 조직 내에서 총사령관인 대통령의 참모 역할로 그 권한이 제한된다는 뜻이다. 각군 최고 지휘관을 사령관이 아닌 참모총장으로 칭하는 것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군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합동참모회의에서 참모총장들과 상의를 하고 추천을 하겠습니다. 다만 장관께서 제 개인적 의견을 물으신다면 USARPAC 사령관인 고든 홀더(Gordon Holder) 대장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과거 한국에 주둔했던 제2사단에서 사단장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지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고급 지휘관입니다. 더구나 일본에 근무한 적도 있어 일본에도 친구들이 많습니다." 
합참의장이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적임자를 추천했다. 합동참모회의에서 투표를 하는 만장일치로 결정하든 그 결정을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이 무조건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합동참모회의는 합참의장과 차장, 각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으로 구성되는 회의기구이다. 

 

- "USARPAC이라면 태평양 육군이고, 태평양통합사령부의 육군구성군을 말하는 거겠지?"
은행 중역으로 30여 년간 근무하다가 지난번 대통령 선거 직후 국방장관이 된 스탠리 브리언트는 군 경력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현역장교가 전역 후 10년이 경과해야 국방장관으로 임명될 수 있기 때문에 군장성 출신 국방장관이 거의 없다. 그리고 미군의 조직과 지휘계통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래서 장관은 조직표를 기억해 내면서 합참의장에게 확인했다. 
"물론입니다. 홀더 대장은 주한미군이 철수한 지금 아시아 - 태평양 지역에 주재하고 있는 유일한 육군 사성장군입니다."

- 미군은 대서양사령부 등 지역별 통합사령부가 있고 우주사령부 등 기능별 통합사령부가 있다. 그런데 각 통합사령부 예하에는 각 군 구성군사령부가 존재한다. 홀더 대장은 태평양사령부 예하 육군 구성군사령부 사령관인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주한미군 사령부는 태평양 사령부 소속이면서도 주한 미군 소속 육군인 미 8군은 태평양 육군 구성군 사령부에 소속되지 않았다. 사정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행정조직과 작전조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군 구성군 사령관은 최소 4개에서 6개까지 다른 사령관직을 겸한다. 국방장관은 조직도를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 "음. 그럼 나도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생각되는군. 참모총장들과 협의할 때 내 뜻도 자네 뜻과 같다는 점을 강조해 주게. 나는 홀더 대장이 지휘하는 걸로 알겠네. 아! 한 가지만 더 묻겠네. 자네는 하와이의 태평양통합사령관이 홀더 대장의 상관으로서 이번 작전을 총괄지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그 질문은 현지에 파견될 해공군을 홀더 대장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둘 것인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합참의장을 장관의 승용차로 불러들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래. 그걸 묻고 있는 걸세. 해군과 공군을 태평양통합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이 좋겠나, 아니면 연합임무부대를 편성해서 해공군도 홀더 대장의 직접적인 작전통제하에 두는 것이 좋겠나?" 

- 하늘의 마도로스 황인호는 댈러스에 머물 때마다 셰이 집에서 묵었다. 그동안 전혀 몰랐는데 셰이가 평일에는 대학원생이고 주말에는 주 방위군, 그것도 편한 행정병이나 의무병이 아니라 전차병이란 사실에 황인호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사실 주 방위군에는 1개 여단에 여군이 5백여 명씩이나 있으니 셰이가 주 방위군이라 해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주 방위군은 1년에 14일 연속 근무하거나 주말마다 근무하는 등 근무방식이 매우 다양하다. 

- "당신 케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 아니면 중화항공(CAL)?"

"아니."
황인호는 옷걸이에 걸린 제복을 힐끗 보았다. 금줄을 두른 항공사 기장 복장. 다행히 미국인들이 국적을 구별하기 어려운 아시아나 항공 복장이었다. 태극무늬가 인상적인 대한항공(KAL) 제복을 입었다면 단박에 들통났을 것이다. 황인호는 아시아나 항공에 근무하게 된 것과, 명찰에 김, 이, 박이 아닌 황이라는 성이 쓰여 있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으니 시민들의 신고 때문에라도 한국인은 이제 거리를 나다니기 힘들 것이다. 처음부터 셰이에게 중국인이라고 속인 것이 황인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여자가 찰싹 달라붙을 경우에 대비해 평소에 중국인이라고 거짓말하고 다녔다. 동료들은 그 거짓말을 황인호의 평소 사생활에 비춰볼 때 유일한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아시아나 항공, 중국의 신흥 항공사야."

- 사무장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이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여객기는 댈러스-포트워스 공항에 억류되고 부기장과 댈러스 공항에 파견된 항공사 직원들이 모두 체포됐다는 것이다. 한국 본사로부터 아직 어떤 지시도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 그는 요즘도 황량한 사막 달빛 아래에서 뛰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는 성난 화염을 피해 정호근은 밤새도록 뛰어다녔다. 그리고 갑자기 오른발이 미치도록 가려워서 꿈에서 깨어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다리를 긁을라치면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침대 시트만 있었다. 정호근은 그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얼마 전까지는 오른쪽 발 이곳저곳이 가려워 미칠 뻔하기도 했다. 없어진 신체 부위가 가려울 때는 도무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그런 일이 부쩍 줄었다.  

 

- "짐작하고 있는 바 그대로일세. 국방장관과 각군 참모총장, 그리고 나는 의견일치를 보았네. 바로 자네가 최적임자일세." 
지금 상황에서 태평양통합사령부 육군구성군 사령관 고든 홀더 대장을 부른 이유는 누가 봐도 뻔했다. 하와이에 있던 홀더 대장을 구태여 이곳 펜타곤까지 부른 건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서로 공감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평양통합사령관이 아닌 저를 부르시는 것으로 봐서 작전 초기에 지상군을 투입하려는 거군요."
"역시 자네 짐작대로일세."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방장관과 달리 이들은 직업군인이었다. 홀더 대장이 케인 대장을 가만히 보며 입을 열었다.
"전쟁 외의 다른 수단은 없는 겁니까? 한국의 옛 친구들과 전장에서 마주칠까 겁나는군요."
"이봐, 고든! 자네는 관료나 정치인이 아닐세. 우린 군인이야. 우리는 명령을 따라야 해. 대통령과 국가 최고지휘부의 결론이 안보각서로 문서화되었네."
교과서적인 질문과 대답이었다. 두 사람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상대방의 말이 서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너무 쉬운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른 점도 별로 없었다. 이것이 케인 대장이 홀더 대장을 적임자로 지명한 이유였다.
이런 논의가 계속돼 봤자 별로 의미 없다고 깨달은 로버트 케인 대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당근을 제시했다.
"그리고, 자네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네. 자네 사령부는 이제 태평양통합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게 됐네." 

 

- [젠장! 알았어. 동쪽에 있는 놈을 자네에게 맡기지. 동쪽 섬은 대충 때릴 테니까, 실컷 놀아 봐. 대신 맥주 한 잔 사는 거 잊지 말라구.]
두 사람은 적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무는 임무였고, 가능하면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베럴슨은 땅을 밟고 적을 만나는 긴장감을 느끼고 싶었다. 베럴슨 중령이 힘 있게 대답하며 무전을 끊었다.  

 

- 4월 18일 12 : 40 독도, 동도
"온다, 아직 대기."
원영석 중위가 망원경을 내리고 소대원들을 다독였다. 한국군 제1해병상륙사단 소속 해병대원들은 각자 바위틈에 숨어 헬기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도 북동쪽의 간이접안시설 뒤쪽, 바로 이곳이 그들이 죽을 자리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바빠진 한국군 지휘부는 이곳을 잠깐 잊은 모양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아무런 지원도 없을 것이라고 원영석 중위가 예상한 대로, 역시 공중지원은 없었다. 그리고 무전기에 대고 상부에 우는소리를 해봤자 오늘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적에게 항복하라는 명령보다는 훨씬 낫다고 원영석 중위는 생각했다. 

- 사실 저항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 영토를 남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해병대원의 자존심은 항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병대원들에게는 죽을지언정 패배란 있을 수 없다고 원영석 중위는 배웠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 "미사일 발사!"
러시아어로 바늘이란 뜻인 이글라(Igla) 휴대용 미사일이 동쪽 하늘로 날아갔다. 명중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미사일 부사수 박상병은 벌써 2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미사일 사수와 부사수는 사단에서 파견 나온 대원들이지만 다른 소대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 베럴슨은 하이먼 중령이 걱정되었다. 공격대의 헬기 3대를 잃고 그 자신은 상처 입은 기체에 탔으니 처참한 기분일 것이다. 
베럴슨은 갑자기 하이먼(hymen)이 무슨 뜻인지 떠올렸다. 아일랜드나 독일에서는 귀족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영어에서 하이먼은 '처녀막'이란 뜻과 '혼인의 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이먼의 헬기에 로터 블레이드가 깊숙이 박혔으니, 처녀막이 깨진 셈이다. 

 

- 베럴슨이 상륙함을 무선으로 불렀다. 31해병원정대(MEU)장에게 간단히 피해상황을 보고하고 폭격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정대장 명령은, 상륙함으로 돌아오지 말고 현장에서 대기하라는 것이다. 베럴슨이 깜짝 놀라 무전기를 응시했다. 그 작은 돌섬이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지 이해되지 않았다. 

 

- 그가 아는 미군은 돈으로 처바른 첨단 군사체계, 그것이었다. 월급 많이 받는 비싼 군인들이 비싼 장비와 인원의 지원을 받아 비싼 무기로 싸우는 미국이다. 이번 전쟁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했다. 그는 정말 죽기 싫었다.
브리핑실에서는 교육이 한창이었다. 미 해군 항공기들의 육안식별법, 미 7함대 전투함들의 대공능력과 공격방법, 이번에 미국과 전쟁이 나면서 갑작스레 바뀐 IFF와 암호체계에 관한 교육이 주된 내용이었다.  

- "미군 긴급전개군이 움직였다. 미국 서부에서 출발한 수송기들이 일본과 오키나와에 속속 착륙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 전에 하와이에서 출발한 고속수송선단은 일본 근해에 도착했음이 방금 확인됐다." 

장내가 잠시 술렁거렸다.
조장호 대령의 결론은, 미국이 이번 전쟁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전쟁은 더 이상 국지전이 아니다. 당분간 동해에 포진한 미국 항모전단과 오키나와로부터 발진하는 항공기만 상대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1주일 이내에 대규모 상륙부대가 부산이나 동해안 어느 지점에 상륙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 "북한 사람들을 믿지 말아 주십시오, 대통령님."
권대현 대장이 밑도 끝도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대통령 홍지영이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저들도 우리 통일한국의 국민이며 군인들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들은 미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왔습니다. 6·25 때 미국 때문에 한국을 적화통일시키지 못하고 북한 전역이 잿더미가 됐으니 철천지원수겠지요. 90년대의 식량부족사태도 미국 탓으로 돌린 사람들입니다."

- "미국하고 전쟁이 진행되더라도 실제로 북한에는 거의 피해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리적 여건 때문에 미국의 진공로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공로와 거의 흡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서울로 삼는다면 말입니다.
미국의 예상 진공로가 몇백 년 전에 왜군이 취한 진공로와 비슷하다는 것은 홍지영 대통령 같은 국외자에게는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반도의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미국이 다른 길을 선택하기 어려웠다. 동해안은 태백산맥 때문에 어렵고 서해안과 남해안은 수많은 섬들과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상륙하기 곤란하다.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경부고속도로만 한 공격축선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경부선은 5백 년 전 왜군의 주 진공로와 거의 일치한다. 

 

- "물론 우리는 미국에 협조해야 합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말도 앙이 되는 조건이구만!"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는 듯 최호 원수의 노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자주국가로 향해 가는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붙잡아두기 위해 미국이 이번 모의를 배후조종한 모양이었다. 차영진은 한국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나라인가 하는 수십 년도 더 된 명제를 자문했다. 지금 동해에는 미군의 2개 항공모함전투단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낮에는 미 해군 전투기들이 한국 영공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침입했다가 이탈하곤 했다. 밤에는 거의 매일 스텔스 폭격기들이 한국의 대공경계망을 헤집고 다니며 전략목표에 폭탄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었다. 차영진은 아찔했다.  
 
- 차영진은 한국사를 더럽힌 두 번의 쿠데타와 1997년 말에 발생한 IMF사태라는 의미불명의 외환위기는 중남미에서 비슷한 예를 다수 발견할 수 있듯이 사실상 그 본질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특정 국가가 충분히 민주화되거나 부유한 자주독립국가가 되어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차영진은 그 내용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아마도 어느 미국인이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난하며 한 말이었다.

(리뷰자 주 : 아마 존 퍼킨스의 <경제 저격수의 고백>일 것이다.)

- "이걸 언론사에 보내고 인터넷과 PC통신에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일이 전화하거나 인편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파일로 만들어 게시판에 올리면 됩니다. 현재 상황을 생생하게 그대로 음성으로 전하는 겁니다." 
디지털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무한복제성이다. 원본을 아무리 많이 복사하거나 복사물을 재복사해도 데이터가 손상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전할 때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즉시성 덕택이다. 이들이 인터넷과 PC통신을 이용해서 이 사실을 폭로하면 당장 전 국민에게 쿠데타 음모를 알릴 수 있었다. 
장인섭은 잠시 머뭇거렸다. 80년대 후반에 필리핀에서는 맨손으로 나선 국민의 힘으로 쿠데타를 진압했다. 구 소련이 해체될 때도 피플 파워가 엄청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장인섭은 비무장한 시민에게 발포하는 군대가 더 많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꼭 한국에서만 벌어진 비극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러다 민간인들이 다치면 어떡하나?"
"반란은 비무장 민간인이 막아야 합니다. 5.16 때와 80년도에도 진압군이 출동했지만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잖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무리 봐도 우리가 너무 불리합니다." 
장인섭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명색이 여단이지만 1개 대대에도 못 미치는 이 부대가 출동해 봤자 대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은 현실적으로 보아 전투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한때는 한솥밥을 먹은 부대장들끼리의 협상과 설득이 중요한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출동한 진압군의 위세를 보여야 대치상황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상당기간 후퇴할 것이다. 

- 지휘장갑차에 올라탄 장인섭은 만약 언론사들이 그 기회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면 어떡하나 내심 불안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언론이라면 현재 상황을 사실 그대로 전하기보다는 수도를 장악한 반란군 쪽에 붙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태생적 한계가 분명한 언론 스스로가 그동안의 행동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국민은 친일언론, 독재정권에 아부한 언론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그것은 어쩌면 국민의 책임일지도 몰랐다. 
 
- 4월 25일 00:52 서울 중구 삼각동
시카고 외환시장에서 원화 선물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역외 외환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10시 넘어서부터 시작된 원화의 초강세 현상은 이 시간 들어서는 거의 폭등 수준이었다. 사설 외환 딜러 김창훈은 모니터를 통해 시시각각 폭등하는 국제원화시세를 보면서 화면 한켠에 창을 띄워 한국 관련 외신을 검색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상 상황을 알리는 어떠한 뉴스나 징후도 없었다. 
김창훈은 며칠 전부터 원화 매수 포지션을 취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익을 본다는 것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원화의 대미 달러 환율이 그가 예상한 목표치, 즉 바닥을 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요즘 같은 때 원화가 강세를 보인다니 김창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곧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와 한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요즘도 밤마다 스텔스 폭격기가 해안도시를 폭격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의 전쟁을 앞두고 원화가 폭락하긴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폭등할 이유는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뭔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김창훈은 생각했다.

- 김창훈은 음성파일을 들으며 그것을 텍스트로 변환시켰다. 음성파일이 자동적으로 글로 전환돼서 김창훈은 그 내용을 짧은 시간에 훑어볼 수 있었다. 

- 김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어설프게 알기로도 권대현 대장은 결코 쿠데타를 주도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음성파일에서 젊은 군인이 산타클로스가 왜 빨간 옷을 입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길게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세상엔 사람도 가지가지고,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중언부언하지 싶었다.
김창훈이 다시 원화 선물시세를 확인했다. 원화 가치는 계속 급등하고 있었다. 다시 외신을 확인하니 역시나 한국 쿠데타 발생소식이 주요 뉴스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설마 투기자본이 한국의 쿠데타 소식을 미리 알고 원화를 매수했을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 김창훈이 잠시 달러화 시세를 검색했다. 원화 가치가 달러화에 비해 전쟁위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면 이제 아무 일도 없는 셈이 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만큼 후퇴하겠지만 미국과의 전쟁위기는 해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달러화도 다른 통화에 비해 시세가 오르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큰 움직임을 보면 틀림없이 약간이라도 오르는 추세가 분명했다. 거래량도 점점 많아졌다. 뭔가 이상했다. 김창훈은 이런 움직임이 달러를 대량 매집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파악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파악한 김창훈은 아찔했다. 원화가 상승하는 것을 빼면 달러강세 현상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와 흡사한 양상이었다. 외화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의 움직임은 마치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처럼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한국에서 쿠데타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을 공격할까? 원화폭등은 쿠데타 발생 보도가 전파되는 동안에만 일어날 단기적인 투기현상일 뿐인가?' 

- 지금 외환시장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참여한 자들끼리 치열한 정보전과 머리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돈 놓고 돈 먹기이지만 여기서는 정보획득과 사건의 분석 및 판단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정보를 남보다 먼저 획득해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 김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중남미에서 쿠데타를 사주한 적이 많았다. 물론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부대를 파병한 적도 꽤 있었다. 금융시장의 움직임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이번에는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혼란을 이용해 한국을 쉽사리 공격하는 작전을 미국이 세운 모양이라고 김창훈은 판단했다. 
 
- 비록 전차 주포를 발포하도록 명령했지만 직접 쏘지 않아 손을 피로 더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강민우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포수에게 미안한 감정과 함께 경멸스런 감정이 솟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그곳에 있던 강민우 또래 젊은이 2명은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죽어갔다. 고통도 없이 죽어 그나마 나았겠지만, 죽어간 이들이 어떤 인생과 꿈과 고뇌와 사랑을 안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강민우도 그 사람들의 인생항로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강민우는 지방대학에 다니던 중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고 입영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입영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그는 1년이나 기다려 입대했는데, 졸업 후 취직은커녕 당장 제대 후 복학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국 일병 때 3사, 당시 이름은 육군 제3사관학교에 입교해서 지금은 장교가 되었다. 군대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꽤 있지만, 강민우는 군대가 싫었다. 사회인들이 군발이라고 놀리든 말든 그런 인식 같은 건 상관없었다. 철저한 상명하복과 꽉 짜인 일과표, 그리고 입으면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껴입을수록 더 추운 군복이 더더욱 싫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조직이 싫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꽉 막힌 나이 든 하사관들이 특히 싫었다. 가능하면 빨리 제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하면 친구들처럼 실업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금융자산을 대량 보유한 부유층은 IMF를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근로자, 그리고 근로자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취직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구제금융기의 쓰라린 상처를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겨둬야 했다. 육군 중위로 제대하면 취직하기도 힘들었다. 옛날처럼 장교 출신자를 우대하는 곳도 별로 없었다. 결국 강민우는 싫으면서도 장기복무를 신청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런 꼴을 눈뜨고 보게 되었다. 강민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파주에 주둔한 9사단 일부 병력은 제5기갑여단으로부터 타전된 급보를 받고 자유로를 통해 시속 40km를 상회하는 속도로 서울을 향해 쾌속 진군했다. 4차선 오른쪽 2개 차선을 차지한 전차와 장갑차들의 행렬에 놀란 승용차들은 헌병들의 통제하에 신평 IC를 통해 서울외곽순환도로로 빠져나갔다. 2개 전차중대와 1개 기계화 대대로 이뤄진 9사단 선두 병력이 처음 만난 적은 통일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행주 인터체인지를 점령하고 있던 52사단 병력이었다. 이들은 9사단 병력의 접근을 발견하고 경고를 발하지도 않은 채 먼저 공격해 왔다. 


- 지금까지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지휘관들끼리 협상을 벌이는 일반적인 양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52사단 병력은 기관총과 휴대용 대전차무기로 9사단 병력에 무작정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보병은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기계화부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적이 아니었다. 이 사실이 바로 전투를 신속히 결정짓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 강민우의 헤드셋은 비명과 폭음으로 가득 찼다. 강민우는 비명이 들려오는 통신망을 당장 꺼버리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바로 옆에 죽음이 있었고, 시시각각 다가왔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강민우는 영화 '씬 레드 라인'에서 "우리는 천국으로 간다. 살아서 지옥에 있었으니까"라는 것과 비슷한 대사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았다. 그것도 아군과 끝도 없이 계속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 한솥밥 먹던 아군끼리 싸워야 하는 그런 끔찍한 지옥에 빠질 것 같았다. 

- 상대방은 너무 강했다. 그러나 9사단이 여기서 발이 묶이거나 꾸물거릴 수는 없었다. 신림사거리에서 민간인들이 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오래였다.

 

-  주포가 발사되자 후진하던 전차가 크게 울렁거렸다. 강민우는 목표 선정과 발포를 포수에게 도맡기고 포탄을 장전했다. 쓰러진 장전수 배를 발로 짓밟아 미안했지만 전차 포탑 내부 공간이 워낙 좁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체 전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소대 3호차가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3호차, 그리고 중대장 차와 교신이 끊긴 건 이미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진압군이야! 우린 충정부대란 말야!"
강민우 스스로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군부반란을 막기 위해 지정된 충정부대가 오히려 반란군 편에 있었던 전례가 있었다. 

 

- 4월 25일 02 : 05 서울 동작구 흑석동
5기갑여단 차량들은 지하도를 빠져나와 국립묘지 앞에서 우회전했다. 전차와 장갑차, 트럭 다 합해서 50대도 안 되는 숫자였지만 일렬로 세워 놓고 달리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었다. 조용한 밤이라서 전차가 달리는 굉음도 평소보다 훨씬 컸다. 
"어? 이쪽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장전수 안상순 일병이 M60 기관총에 팔을 얹은 채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역사 아래로 달리는 도로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대대장님이 사당동 쪽으로 간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 "이쪽은 흑석동 방향입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다들 저쪽으로 가잖아? 쟤들도 저쪽으로 가라고 하고."
최창운 하사가 교통통제반을 턱으로 가리켰다. 깃발과 플래시를 든 병사 몇이 차량행렬을 서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사당동 저쪽인데..."
"야! 윗놈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냐? 그래. 내는 모른다, 니는 아나?"
"확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만둬. 아까 무선통제 신호가 왔어."
안상순 일병이 최 하사 말처럼 대대장으로부터 무선통제 신호가 왔나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최 하사가 소대장 차로부터 무선으로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고, 그전에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두세 번 툭툭 치는 것을 본 것 같다는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 "이번 일에 시민들은 절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차영진은 회의실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쉰 목소리로 말하는 권 대장 혼자만이 눈에 확 들어왔다. 권 대장의 노기에 찬 목소리에 차영진은 잠시 찔끔했다. 차영진도 결코 시민들이 나서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이 나서지 않으면 쿠데타를 진압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필리핀보다 못한 후진 나라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군은 국민에게 총부리를 돌린 적이 있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호랑이라는 별명이 걸맞게 권 대장의 눈길은 매서웠다. 차영진은 그 끔찍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권대현 대장을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계속 비극이 반복될 뿐이다!"
차영진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을 광주 망월동 묘역 전시관에서 본 기억이 났다. 묘지는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에 비해 무척 좁아 방문객들에게 서글픈 감정을 자아내지만, 대신 따뜻하고 조용한 곳으로 기억했다. 차영진은 그곳에서 들은 산새 소리를 떠올렸다. 그만큼 외로운 곳이다. 
"그래도 역사는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에서 우리 국민들이 배운 교훈이 이번 반란 사건에 많이 작용할 것입니다. 국민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차영진은 내심 무척 부끄러웠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위기 때 오히려 국민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 차영진이 몰아붙였다. 두 사람의 눈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난 시민들에게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어떤 멍충이가 바보 같은 명령을 내릴지도 몰라! 신림사거리에서 이미 시민 한 사람이 깔려 죽었다. 그리고 시위대는 이성을 잃었어. 이제 무슨 일이 생길지..." 

- 권대현 대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허탈해진 차영진이 시선을 허공에 띄웠다. 권대현의 독백이 이어졌다.
"난... 자네를 당장 쏴 죽이고 싶어..."

- 4월 25일 02 : 15 서울 관악구 신림동
땅! 따당!
신림사거리에서 총소리 빼고 모든 소리는 일순 숨죽였다. 쓰러진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은 물론 숨어 엎드린 자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군대가, 국민의 군대가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대부분 젊고 용기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김창훈은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김창훈이 엎드린 보도블록 주변에 계속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 괌에서 출격한 B-52 폭격기들은 공중발사를 마치고 이미 멀리 도망가버린 후였다. 폭격기들은 한반도 상공에 떠 있던 E-2C의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먼 거리에서 순항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미 해군 전투기들도 임무를 마쳤다는 듯 남동쪽으로 돌아갔다. 하늘에는 새까맣게 몰려오는 공대지미사일의 대군만 남았다. 오랜만에 이뤄진 미 공군과 해군 전투기의 합동작전은 이렇게 해군기만 일방적인 손실을 입은 채 끝났다. 그러나 아직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파도를 스치듯 낮게 날아오는 미사일의 진로로 미루어 목표는 진해항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국 해군의 주력 함대는 이미 진해를 떠난 지 오래였다. 

- 한국 해군의 주력 신형 구축함들도 미군의 폭격을 피해 진해항을 떠났다. 서해함대와 남해함대의 주력 함정들도 모두 동해 북쪽 바다에 몰려가 있었다. 동·서·남해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는 비운을 맞지 않으려는 한국 해군은 전투함들을 집중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해군항에는 아직 상당수의 소형 전투함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한국 해군의 모항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해군 작전사령부와 보급거점이 있는 진해항은 한반도 상륙전을 예정하고 있는 미군에게 지금도 놓칠 수 없는 목표였다. 

 

- 포병이 숫자를 부르는 방식은 일반과 조금 다르다. 좌표 숫자는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통일 전까지는 1포대를 알파(A), 2포대를 브라보(B) 포대로 부르는 식이었다. 
 
- 교전레이더에 연결된 컴퓨터는 2포대가 요격할 미사일들의 코스를 파악해 포대 예하 발사대 4개에 자동적으로 목표를 분배했다. 피아식별 모드는 생략했으므로 2포대가 담당한 공역에서는 무차별로 요격할 수 있게 되었다. 목표 탐지에서 발사준비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사관 2명은 레이더 스크린을 보면서 각 목표에 할당된 미사일이 발사되면 추적할 준비를 마쳤다. 최적발사 시간까지 약 50초가 남았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이제 이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의 명중률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한국 해군 최대의 군항인 진해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 작년 말에 급조된 공군 제262 방공대대는 올해 초 러시아로부터 긴급수입한 개량형 S-300 PMU-1 시스템을 갖춘 6개 포대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나토명으로는 그럼블, 또는 SA-10C이라는 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Buk-M2, 나토명으로 SA-11 Gadfly라고 불리는 우랄이 더 신뢰성이 있겠지만 그것은 서울 인근에 배치된 극히 일부방공대대가 보유한 신형 미사일이었다. 한국군 방공포병이 보유한 주력 지대공미사일은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패트리어트 시스템, 그것도 미군이 보유한 기종에 비해 성능이 뒤떨어지는 PAC-2 개량형이 주력이었다. 그나마 패트리어트도 도입 대수가 적어 아직도 호크와 나이키로 무장한 방공대대도 많았다.

- 그리고 한국군에서는 대규모 숙군이 있었다. 쿠데타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장성 몇 명은 체포되고 비밀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가담 정도가 가벼운 것으로 알려진 몇몇 장성은 군복을 벗었다. 그들 대부분은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면 한 자리 차지하려고 맹목적으로 쿠데타에 가담했던 사람들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순수한 우국충정으로 가담한 장성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진의를 알기는 힘들어 이들도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수도방위사령관 등 몇몇 장성들은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다. 차영진이 파악하기로 가장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자가 수도방위사령관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권대현 대장만 나쁜 사람이 되었다. 더구나 쿠데타 과정 중에 죽어간 사람들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죽고 나서 국가유공자 표창을 받아 봤자 무슨 의미란 말인가?'

차영진은 죽어간 군인과 민간인들 때문에 괴로웠다. 결국은 자중지란이었고, 차영진이 보기에는 전혀 의미 없는 희생이었다. 

- 차영진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차영진은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도 미국이 한국을 칠 게 뻔하다는 것을 대통령도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어찌 됐든 쿠데타는 무의미했다. 
"물론, 나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막고 싶었소. 하지만 모든 외교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소. 미국은 우리나라를 치기로 작정했소."

- "내 임기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무척 슬프오."
대통령 말처럼 운이 없을 수도 있었다. 차영진은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미국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을까 자문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 온갖 후안무치한 일도 불사했다. 지금까지 제3세계에서 일어난 쿠데타와 내전, 요인 암살 사건 상당수를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CIA의 공작에 의해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켰다. 약소국은 유엔총회에서 미국을 향해 비난연설하는 것 말고는 미국을 제지할 어떠한 기회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장군도 알다시피 우린 미국을 막을 힘이 없어요. 우리나라는 잔인한 미국의 첨단무기 실험장이 되고 말 거요."
대통령이 자조하는 소리를 들으며 차영진은 몇 년 전에 읽은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해군력 증강을 외치는 일부 주장에 대해 정부 고위관리가 한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주적이 북한인만큼 해군과 공군은 미국 7함대에 의존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 육군 출신인 국방장관이나 정치인들이 갖는 일반적 편견이었다. 그동안 미국에 의존한 덕에 이제 미국을 적으로 돌린 지금 나라를 지킬 방법이 없었다. 

- "항복하면 되잖습니까?"
입안이 바짝 마른 차영진이 우는 얼굴로 대통령에게 말했다. 역시 대통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국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주미 스위스 대사를 통해 미 국무부에 다시 항복의사를 전달했지만 조건이 또 달라졌소. 일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미국에도 전쟁배상금을 달라는 겁니다."
"그깟 돈 달라는 대로 주면 되지 않습니까? 힘들어지더라도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홍지영 대통령이 차영진 말에 코웃음 쳤다.
"그 금액이 얼만지 아시오? 우리 국민이 10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안 먹고 모아야 할 돈이요. 그리고 미국이 점령한 독도를 일본에 주겠다는 것도 항복조건에 새로 붙었소. 장군 같으면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까지 그런 부담을 지울 수 있느냔 말이오. 아! 우리가 살 길이 없어요..."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결국 미국이 바라는 것은 금전적 대가가 아니었다. 새로 붙은 까다로운 항복조건도 미국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진정 원하는 것은 전쟁이었다. 한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기 전에는,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차영진은 아마도 미국 무기상들이 충분한 이익을 얻기 전까지는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는 맞고만 있지는 않기로 했소."
차영진은 대통령의 말과 표정에서 분노와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차영진도 그의 분노에 공감했다. 그러나 한국은 힘이 없다.
"우리나라가 엉망이 되는 만큼 미국 국민도, 미국 영토도 전쟁의 참화에서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국에 알려주기로 했소. 미국이 21세기의 로마일 수는 없소!" 

 

- 이종식 차수의 뜻은 분명해졌다. 설마 하던 차영진이 놀라 눈을 더 크게 떴다. 잠시 숨을 고른 차영진이 항의하듯 외쳤다.
"병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잖습니까?"

"무엇이든 방법은 있는 법이오. 기리고, 방법이야 동지가 연구해야 하디 않갔소? 전쟁영웅 동지." 
이 차수가 차영진을 전쟁영웅이라고 부른 것은 결코 비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고 해도 자칫했다가는 미국으로부터 더 심한 보복을 받을 수 있었다. 차영진은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미 본토는 독립 후 단 한 번도 침공받지 않았습니다. 본토가 침략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미 국민들이 똘똘 뭉치고 한국에 더 잔인한 보복을 가해온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동안 미국이 참가한 전쟁들을 보면, 본토가 공격받지 않았어도 그들은 충분히 잔인했소."
 
- 5월 7일 14 : 30 경남 사천
활주로에 KT-2 훈련기가 사뿐히 착륙하고 있었다. 김승규 중위가 숨을 가다듬으며 착륙절차를 암기하는 머리비행을 계속했다. 그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오늘은 김승규 중위가 고등 전투비행교육을 받은 이래 최악의 비행이었다. 2인승 KT-2 뒷좌석에 탄 비행교관이 그렇게 계기비행을 하라고 일렀건만 소용이 없었다. 구름과 바다가 일으키는 착시현상 때문에 김승규가 조종하는 비행기는 자꾸 옆으로 기울어지고 고도는 계속 낮아졌다. 구름이란 게 절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은 김승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허드(HUD)만 계속 확인하면 됐겠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써먹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사격훈련 때는 자칫하면 어선에 발포할 뻔했고, 동료기와 충돌할 뻔한 적도 있었다. 
[잘리고 싶어? 녹색 마후라가 그렇게 좋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비행교관 장준호 대위의 호통이 계속 이어졌다. 음란비디오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빨간 마후라'는 원래 한국 공군 조종사들이 나오는 영화 제목이다. 공군에서 지상근무하는 장교들은 빨간 마후라를 착용하지 않는다. 

- 중국 및 일본과의 전쟁 때문에 공군에서는 조종사 부족난이 심각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이 조성하고 있는 전쟁 분위기도 군 수뇌부가 조바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상부에서는 빨리 조종사 훈련을 마치라고 독촉이 심했다. 하지만 공군본부에서는 정상적인 교육과 훈련을 강조했다. 대신에 훈련의 강도가 훨씬 강해졌다. 조종사들이 훈련에 임하는 자세도 예전과 전혀 달라졌다. 훈련을 얼마나 제대로 받느냐에 따라 전투에 투입됐을 때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 ...

 

- 더 불편한 것은, 스스로의 존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껄끄러웠다. 특히 한일석은 심적으로 무척 불편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내가 부대를 이끌고 건너가게 생겼소."
차영진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도 분명 1급 군사기밀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통화를 감청할지도 모른다. 차영진은 아마 당연히 감청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차영진은 실제로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이래저래 차영진은 사방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 어려운 싸움이 될 거예요.]
역시 이혜숙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싸움 붙기도 어렵겠소. 어떻게 가야겠소?"
[당당히 정규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야 해요.]
모범답안이긴 했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차영진이 고개를 들어 벽면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았다. 미국이 접한 국경선이라고는 북쪽으로 캐나다, 남쪽으로 멕시코밖에 없다. 동양인이 캐나다에 가면 눈에 띄기 쉽다. 그렇다면 일단 멕시코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북부에서 병력을 집결한 다음 국경을 넘으란 거요?" 
[예. 아직 시간은 많아요. 대신 일찍 출발해야 할 거예요.]

그녀는 한반도 봉쇄를 예상한 것일까. 미군이 병력을 수송해서 상륙전을 펼칠 때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있었다.

 

- 5월 8일 10:05 광주
'이제 격돌이다. 도망가지 못한다.'
데미파토스는 청동갑옷과 방패, 창의 엄청난 무게에 비틀거리면서도 대열을 맞춰 적의 방진으로 돌진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창의 숲보다 옆에서 헉헉대며 뛰는 동료들의 숨소리가 더 신경 쓰인다. 그가 믿을 사람은 오직 오른쪽에 있는 동료뿐이다. 그 동료의 방패가 데미파토스의 오른쪽 가슴과 어깨를 지켜주는 것이다. 
 
- 드디어 제1전열끼리 맞부딪친다. 방패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계곡을 울린다. 제2열에 있는 데미파토스는 앞에 선 동료의 등을 향해 몸을 던져 방패로 민다. 곧 뒷줄의 동료들이 그를 밀어붙인다. 모두들 힘을 다해 앞으로 밀면서 오른손에 든 창으로 적의 방패들 사이를 뚫고 찌를 곳을 찾는다. 


- 제1전열에서 몇몇이 쓰러진다. 창에 찔린 중장보병들보다는 힘에 밀려 넘어지는 사람이 더 많다. 제2전열의 적 보병들이 무너진 틈을 비집고 쏟아져 들어온다. 아군 대열의 틈이 걷잡을 수없이 넓혀진다. 
급기야 뒷열의 동료들 가운데 도망치는 자가 생긴다. 적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던 중장보병들도 급변한 아군 분위기에 신경을 쓰이는지 자꾸 뒷걸음질 친다. 결국 대오가 무너지고 모두들 투구와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한다.

- 적 중장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신분이 낮은 적 경장보병과 귀족 기마병들이 전투에 지치고 무거운 갑옷 때문에 비틀거리는 아군 중장보병들을 쉽사리 따라잡아 일방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패배한 중장보병들은 절대로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 전투 시에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기병과 경장보병들이 전세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죽음의 사자로 돌변한 것이다. 
모두들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갑자기 적이 추격을 멈추고 승리의 함성을 지른다. 패배한 아군은 도주를 멈추고 잠시 제자리에서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살아남은 자들이 전사자를 수습하려고 전투지였던 평지로 서서히 돌아온다. 승리자들이 전승기념비를 세우는 동안 패자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전사자들을 매장한다. 

- "좋았어! 거기까지다."
왼손에 흰 장갑을 낀 교관이 마이크에 대고 외치자 30여 명의 피교육생들이 시뮬레이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젊은이들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이들은 광주 근처에 있는 육군 기계화학교에서 교수부장으로부터 가상 전술 시뮬레이터를 통해 전사(戰史) 교육 특강을 받는 중이었다. 
"역사상 대부분의 전투에서 발생한 결과도 귀관들이 이번 시뮬레이션에서 경험한 바와 같다. 한 군대에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손해는 교전 중이 아니라 그 군대의 패주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사에서 배운 손실비율 100 대 1 같은 그런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발생하는 결정적 원인이다." 

- "하지만 전세를 돌이키기도 힘든데 무작정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한일석이 대뜸 대답하려다 꾹 참았다. 아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기마 유목민족이 정착민들을 유린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들 정복자들이 결코 물자가 풍부한 점령지에 영구히 정착하지 못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아직 순서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는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패주 중에도 아군의 전열을 유지함으로써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뭔가?"
"공격해 올 경우 상대방도 손해를 감수하라는 엄포입니다, 장군님!"
이철재 대위가 건들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한일석이 씩 웃었다.
"그렇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자가 죽음을 이기는 법이다. 또한, 아테네의 공처가들은 그 정도로 용감했다는 과시이기도 하지."

- 중국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군이 남긴 M-1 계열 전차를 기반으로 급조된 제2기갑사단은 전쟁 중에도 교육과 훈련을 병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새로운 전차에 대해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다. 예비역이었다가 현역으로 복귀한 인원도 많고 전차라고는 생전 처음 타보는 하사관과 사병들도 많았다. 그래서 부대원들은 아직도 교대로 육군 기계화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차영진의 걱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한국군 2기갑사단이 보유한 M-1A1과 미국이 주력으로 삼는 M-1A2는 화력과 방호력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미국제 M-1 전차는 원래의 M-1과 개량형 M-1A1, 장갑강화형인 M-1A1 HA, 그리고 전자장비가 개량된 M-1A2 등 몇 가지 변종이 있다. M-1은 일반적인 3세대 전차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점점 개량되면서 M-1A2는 현재까지 무적의 전차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제 보병이 휴대용 대전차미사일로 미국 전차를 잡을 방법은 거의 없었다.  

-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M-1A1 후기형과 M-1A2의 차이는 별로 없어. 전면장갑의 경우 거의 대등하지. 포탄의 공격 방식이 약간 다르기도 하지만... 그리고 다른 건 전자장비 일부라는데, 그건 여기서 해결할 수 있네. 우리도 M-1A2를 몇 대 보유하고 있으니까." 
"다행입니다."
차영진은 미국에 도착하면 미국 전차를 탈취해서 쓸 생각이었다. 드넓은 미국 땅에서 전차가 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 전차를 보병으로 공격해 잡을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기보 애들도 여기에 M-2하고 M-3가 있으니까 해결은 돼. 하지만 현지에서 M-1A2를 구할 수 있을까?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이동하고, 미 본토에는 M-1A1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 차영진이 반색을 했다. 미 육군이 꾸준히 주력 전차를 개량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M-1A2는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미국은 M-1A2를 신규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M-1A1을 개량하는 데 치중했다. 그런데 이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M-2와 M-3는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라고 불리는 보병용 전투차량이다. K200을 비롯한 일반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들은 하차하여 전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반면에 보병전투차는 차량 자체의 화력과 방호력이 강하고 보병도 승차 상태에서 충분히 전투를 치를 수 있다. 
"같은 조건이라면 그나마 우리가 유리합니다."
차영진이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일석 준장이 차영진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 자넨 좋겠네. 여기 남는 사람들은 어려운 M-1A2를 상대해야 할 텐데 말야."
차영진이 한일석의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처음의 껄끄러웠던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 "그런데 미국 전차를 탈취해서 싸우겠다는 거지?"
"물론입니다. 가져갈 방법이 없잖습니까?"
한일석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전차 50대를 화물선에 싣고 미국으로 가는 방법을 상상했다. 전혀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될 수 없었다. 


- 한일석이 서류철을 차영진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전차대대와 기계화보병대대의 편제표였다. 표는 대대장부터 말단 장전수까지 완벽한 편제로 갖춰져 있었다. 한일석은 차영진이 올 줄 알고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덤터기 씌울 수 있겠다며 안심한 차영진이 서류를 살폈다. 이 중요한 작전의 설명에 필요한 보고서는 A4 용지에 컬러로 프린트한 단 두 장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작전 투입인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의 원활한 작전을 위해서는 각 병과에서 차출한 총 1개 여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먼저 공수특전단에서 1개 대대, 인민군 경보병 여단에서 1개 대대, 통일한국군 제2기갑사단에서 전차와 정예 기계화보병 각 1개 대대, 헬기 조종사와 정비사를 포함한 1개 항공대대, 그리고 공군에서 1개 방공대대를 차출해 주십시오. 그리고 F-15 전투기를 몰 수 있는 조종사도 10여 명쯤 필요합니다. 나머지 필요한 인원은 서면으로 다시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참석자들은 차영진이 말하는 동원규모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차영진이 나직하게 설명했다.
"이들은 자살부대가 아닙니다. 가능하면 살아서 우리나라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입니다. 물론 많을수록 좋겠지만 아무리 무정부상태의 멕시코라고 해도 침투하고 이동하기에 용이하지 않을 겁니다."

 

- 김온은 잠시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소규모 게릴라전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러나 차영진의 그동안 행적을 보아 헬기와 전차를 미국까지 끌고 가겠다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들 부대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전차 등 중장비는 미군 기지를 급습해 현지에서 조달할 것이 뻔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공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실패하면 망신만 당하고 만다. 어쨌든 그것은 차영진의 일이었다.  

- 5월 13일 16 : 55 독도 남동쪽 40km 해상
"좋은 날씨야. 전쟁하기 딱 좋은 날씨야."
기함 블루 리지의 항해함교에서 망원경으로 바다를 둘러본 미 7함대 사령관 스티븐슨 중장이 중얼거렸다. 연푸른 하늘에는 분홍색 구름이 점점이 떠다니고 바다에는 적당히 파도가 쳤다. 멀리 낙조를 배경으로 항공모함 칼 빈슨에서 대잠헬기 한 대가 황급히 떠올라 북쪽을 향했다. 거대한 항모의 흰 항적 뒤로 조그만 프리깃의 하얀 레이돔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전쟁하기에 좋은 날짜이기도 합니다. 13일에 금요일, 그것도 지금은 즐루 타임, 현지 시간 모두 같은 날짜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불행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상륙함 블루 리지의 함장 그렉 던스턴 대령이 제독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즐루 타임(Zulu Time)은 시간대를 넘나드는 핵잠수함 등에서 사용하는 그리니치 표준시간대이다.

- 19세기에 영국 정부는 뱃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미신을 불식하고자 13일의 금요일에 13자가 배이름으로 들어간 배를 진수시켰다. 선장 이름은 프라이데이였다. 그러나 이 배는 출항한 후 영원히 귀항하지 못해 뱃사람들의 미신은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 "MPS-3은 일본에 며칠쯤 도착하나?"
MPS-3은 사전배치선단 제3전대다. MPS는 해상 사전배치전대라는 뜻으로, 각 MPS는 1개 MEF (해병 원정군)분의 장비와 보급품을 갖추고 세계 곳곳에 배치되어 상륙부대의 전개시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역할이다. 무거운 장비를 주둔지에 두고 병력은 몸만 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MPS-3은 이틀 전에 괌에서 출발했다. 한국과의 전면전이 예정되어 차근차근 준비가 진행되는 지금 사전배치선이 급히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사세보에 내일 정오쯤 도착합니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완전히 거덜 나서 항구가 널찍하다고 합니다."
7함대 작전참모 루이스 굿윌 대령이 웃으며 보고했다. 스티븐슨 제독은 굿윌 대령이 분명 일본을 비웃은 것이라고 느꼈다. 제독이 고개를 돌려 드넓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 쟤들 왜 저래?”
아까부터 항공모함 칼 빈슨에서는 바이킹 대잠초계기들이 연이어 이륙하고 있었다. 스티븐슨 제독이 망원경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예? 예․예...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께 전달하겠습니다."

함장 던스턴 대령이 전화를 끊고 7함대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제독님! 0-1-7에 잠수함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뭐야? 적함인가?”
"그렇습니다. 그 해역은 초계기 관할입니다."

- 해군은 작전해역을 몇 개로 나눠서 수상함, 잠수함, 대잠초계기에게 각각 분담시킨다. 민간 항공기의 고도와 항로를 구분하는 것처럼 해군도 적 잠수함을 탐지하고 우군 간의 교전을 방지하기 위해 수중 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잠수함이 담당하지 않는 해역에 잠수함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적함으로 판단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 "위치는 정확히 파악됐나?"
스티븐슨 제독은 괜한 질문을 했다고 자책했다. 잠수함의 위치가 파악됐다면 벌써 잡았을 것이다. 항모에서 추가로 대잠초계기들이 이륙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함교의 전술디스플레이에는 TF(task force)-72 소속 대잠함정들이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대지휘부를 전율케 할 만한 대답이 함장 입에서 쏟아졌다. 
"함대 외곽에서 분명한 신호음을 발한 후 심해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30해리가 안 되는 거리입니다."
"맙소사! 한국의 209가 분명한가? 혹시 러시아 공격핵잠일 수도 있지 않나?"
"일반적인 독일제 통상형 잠수함, 209급이 내는 탐신음이 아니라 그것이 업그레이드된 한국형 잠수함이 내는 탐신음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건 분명히 탐신음이라고 합니다." 
"뭐? 그럼 스스로..."

- 전혀 뜻밖이었다. 함교를 가득 메운 사령부 요원들은 한국 잠수함이 낸 소음이 추진음이나 다른 소음이 아니고 액티브 탐신음이라는 말에 기가 질렸다. 잠수함은 함대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다음에도 7함대가 눈치채지 못하자 경고를 발하고 사라진 것이다. 
함대 외곽을 방어하는 공격용 핵잠수함들과 초계기, 그리고 구축함과 프리깃함들의 두터운 방어벽을 뚫고 들어온 한국 잠수함은 7함대에 강력한 심리적 타격을 가한 다음 그렇게 유유히 사라졌다. 시간이 가도 한국 잠수함을 포착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 스티븐슨 제독은 점점 초조해졌다. 한국 공군이 한꺼번에 함대를 공격해도 막을 자신이 있었다. 한국 해군 함정들이 총동원되어 공격해도 7함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잠수함은 달랐다. 작전중인 미국 항모와 부딪친 구 소련핵잠수함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망망대해에 숨어 있는 잠수함을 찾아내는 일은 극히 어렵다. 게다가 최근 개발된 한국형 잠수함이라면 서방세계에서는 최고로 알려진 잠수함이었다.

- 미국이 한국을 확실하게 공격하기 전까지는 강력한 미국의 상징이기도 한 항모부대를 한국 잠수함이 공격하기는 힘들었다. 지금 미국은 한국에 적당한 벌을 가하는 시기였다. 주로 순항미사일과 항공기에 의한 이 공격에서 한국인들의 인명피해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잠수함이 괜히 항모부대를 공격했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처절한 보복에 직면하게 될 수 있었다. 한국군 입장에서는 적당히 두들겨 맞더라도 꾹 참고 견디어 미국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희망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도 한국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 만약 그 한국 잠수함이 미국 함대를 공격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외곽 방어를 담당한 초계기와 프리깃의 방어망은 이미 뚫었으니 병력을 잔뜩 실은 수송함에 어뢰나 하픈을 몇 발 발사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대잠방어력이 약한 수송함이 침몰하며 수백 명 내지 1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을 수도 있었다. 스티븐슨도 진땀을 흘리며 전술 디스플레이를 주시했다.

 

 

- 5월 13일 17 : 50 독도 남동쪽 25km 해상
"미제 직승비행기 놈들은?"
"점점 북쪽으로 움직이며 탐신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계속 주시하라우야."
음탐실에서 돌아온 최승호 상좌가 해도를 살피며 이를 악다물었다. 한국 해군 잠수함 최윤덕은 한 시간 전에 미 제7함대의 대잠초계망을 뚫고 들어왔다. 잠수함은 탐신음을 발한 다음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대 쪽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다. 위험한 줄은 알지만 현재 한국군 입장에서 미 7함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잠수함밖에 없었다. 최윤덕함은 미국 함대의 탐지를 피해 간신히 이곳 해역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공격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 부장 곽일준 소령이 웃으며 함장을 말렸다. 몇 달째 모셔 보니 함장은 북한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호전적인 인물도, 흥분해서 일을 그르칠 사람도 아니었다. 곽일준이 보기에 함장이 의도하는 것은 분명했다. 당분간 미 함대를 직접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잠수함 하나로 동해를 들쑤시고 다녀서 미 함대의 행동권을 제약하겠다는 의도였다.  
독도가 점령당한 지금 한국군 지휘부 입장에서는 당장 울릉도가 걱정됐다. 그래서 해군에서는 최윤덕함을 출동시켰다. 최윤덕함이 활발하게 움직이자 과연 미 7함대는 점점 남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수함이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막강한 미 7함대도 한국 잠수함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 "조국이 폭격을 받는데 이거이 전쟁도 아니고 반반하게 메이야."
"곧 명령이 내려올 겁니다. 대단한 미제 놈들입니다. 우리나라가 저 정도 해군을 갖추기란 거의 불가능하겠습니다."
부장이 해도에 표시된 미 제7함대의 함정들을 확인하며 부러운 듯 말했다. 현재 확인된 미 해군의 대형 항공모함은 칼 빈슨과 칸스틸레이션(Constellation)이었다. 항모가 또 한 척 있는데 거리가 멀고 잡음이 많이 끼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미 해군 항공모함은 두 척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잠수함사령부에서 정보가 오면 어떤 항모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상륙함은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약간 후방에 떨어진 상륙함대의 중심에 있는 것은 7함대의 기함인 블루 리지가 분명했다. 잠수함 발사 하픈을 날리면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을 것 같아 함장은 더욱 아쉬웠다. 해도를 살펴본 최승호 상좌가 부함장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 "동지, 닭알낟가리하고 있구만기래요."
함장의 말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공상을 뜻한다. 이미 북한 말에 익숙해진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예. 어쩔 수 없죠. 우린 미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니니까요."

"혹 모르디요. 고구려나 백제는 될 수 있는지."
고구려는 중원을 노렸던 만주의 패자였고, 백제는 영토가 만주와 화북지방 일부, 대만과 베트남에 이르는 대해상 제국이었다. 일반적으로 국사책에 나오는, 좁은 한반도 안에서 세 나라가 아옹다옹했다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 곽일준 소령은 함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잠시 전율했다. 어떻게 들으면 주변국에 대한 침략을 부추기는 호전적인 언사였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을 영향권 아래에 둔 지금의 통일한국은 고구려나 백제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이 한국의 통일을 그토록 방해했고, 냉전 이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건방진 한국을 징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통일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고 중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일본의 콧대를 꺾은 통일한국의 힘이 드러난 지금, 미국은 자국 주도하의 국제평화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군사력으로 외국에 강요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 미국 국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 굴욕감을 느낀다면 식민지와 다를 바 없었다. 

 

- 버지니아급 공격잠수함은 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의 후계 잠수함이다. 냉전이 끝난 후 미 해군은 시 울프급 같은 고비용의 잠수함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자 생산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버지니아급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의 카머헤머허 같은 특수전 전용 잠수함을 개발하는 대신 버지니아급의 일반 공격형 잠수함에 특수전용 모듈을 부착해 투입하기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 잠수함이 한국 인근 해역에 있다는 것은 미국이 한국에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특수공작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군의 중요 기지나 전략목표를 타격할 네이비 실(Navy SEAL)이나 해병대 포스리컨(Force Recon) 등 특수부대원들이 한국 근해에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지금 미국 입장에서 전쟁의 명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에 이라크나 리비아에게 했던 것처럼 미운 놈은 기회를 잡아 두들겨 패면 되는 것이다. 한 번 찍힌 놈은 무슨 짓을 하든 미움받는 것처럼 말이다.
 
- "목표지점에서 대기 중입니다."
굿윌이 펜으로 지도상의 한 점을 짚었다. 부산과 진해 사이,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 바로 남동쪽 해저에 현재 특수부대원을 가득 실은 잠수함 한 척이 숨 쉬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 그 잠수함은 해안에 바짝 접근해서 대기 중이었다. 3년 전에 입수한 한국 연해해저지도와 보름 전에 촬영된 해당 해역 정밀 위성사진이 그 잠수함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실수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특수전 사령부도 열심히 뛰는구먼. 좋아! 한밤중에 해병대 친구들이 한바탕 휘젓고 빠져나오면 재미있겠어. 회수에 신경 쓰도록!" 
스티븐슨이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령관은 실패를 모르는 해병대가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특공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잔뜩 기대했다. 증거만 남기지 않으면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여지도 별로 없었다.

- 미국은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특수작전을 행했지만 발각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만 잡히지 않으면 변명거리도 많았다. 총을 쏘는 것은 미 특수부대지만 항상 그랬듯이 그 나라 반정부 게릴라의 소행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지니아의 함장은 신중하기로 이름 높은 베테랑 함장이었다. 섣불리 증거를 남길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입니다. 한국은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지금은 한국이 꾹 참고 있지만 화가 난 나머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 제독은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이며, 미국에 감히 맞서거나 까불면 당연히 엉덩이를 두들겨 패야 한다고 믿었다. 학생이나 아이들에 대한 체벌로서 가해지는 볼기짝 때리기(spanking)는 분명히 성적인 의미가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 갈대를 수상식물로 오해를 많이 하는데, 갈대는 분명히 육상식물이다. 갈대가 발휘하는 오염물질 정화기능도 수중의 오염물질이 아니라 육지의 그것에 집중된다. 갈대는 갯벌이나 모래톱을 기준으로 바다 쪽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육지 쪽에서도 자란다. 토양성분 구성상 육지인 갈대밭과 바닷물 사이에 갯벌이나 모래톱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며 물속에 떠다니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것은 갈대가 아니라 잘피라는 식물이다. 농어 등 각종 어류를 포함한 수생동물의 산란장 구실을 하며 치어를 키우는 곳이 잘피밭이다. 

- 갈대밭과 갯벌, 그리고 잘피밭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갈대가 죽으면 미생물이 이를 분해하고, 이것은 게의 먹이가 된다. 게나 조개 등 갯벌에서 나는 생산물을 에너지양만으로 따졌을 때에도 그 생산성은 논밭의 20배가 넘고, 갯벌과 잘피밭은 산란장 구실을 함으로써 바다 생태계에 엄청난 자원을 공급한다. 환경적인 영향은 돈으로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크다.

- 이 세 가지가 협동하여 육지에서 떠내려오는 오염물질을 정화하고 바다에 먹이 피라미드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중요한 이런 갯벌을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주인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토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메워서 농지나 공장부지로 활용했다. 시화호나 목포 인근지역에 대한 대재앙은 이기적인 목적의 환경파괴가 전체 생태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 함장이 심도계로 달려갔다. 이 상태라면 사령탑 일부분이 물 위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바로 위에는 한국 해군의 대잠헬기가 잠수함을 노리고 있었다. 스캇 대령이 다시 잠망경으로 달려갔다.
"아앗! 염병할!"
잠망경을 돌리던 스캇 대령이 비명을 지르며 접안구에서 눈을 떼었다. 대잠헬기가 강력한 서치라이트를 사령탑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댄! 어서 스프링필드를 불러!"
함장이 잠망경을 내리며 외쳤다. 부함장 대니얼 잭슨 소령이 통신실로 뛰어갔다.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잠수함 스프링필드는 버지니아를 호위하기 위해 5km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위 잠수함 스프링필드가 달려온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잠수함을 위협하는 적은 수상함정뿐만 아니라 대잠헬기도 있기 때문이었다. 

 

- "추진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자력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구조함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항해장교 제임스 루이스 소령이 최악의 상황이 왔음을 알렸다. 버지니아가 자체 추진력을 상실한 이상 아무리 많은 미군의 군함과 전투기가 도와주러 몰려와도 소용없게 되었다. 
"빌어먹을!"

 

- 잠망경을 잡은 앤드루 스캇 대령이 바깥 상황을 다시 살폈다. 대잠헬기는 여전히 상공을 날아다녔다. 그런데 한국 초계함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잠수함을 향해 함포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함장은 한국 대잠헬기가 즉시 잠수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수함을 나포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함장이 통신실로 통하는 마이크를 잡았다. 
"핵잠수함을 한국에 넘겨줄 수는 없어! TF74에 연락해!"
부함장이 통신실에서 뛰어나오다가 다시 통신실로 돌아갔다. 현재 제7 잠수함전단이 태평양함대의 잠수함 전력인 TF74로 지정되어 있고, 기항지는 일본 요코스카이다.

- 5월 14일 02 : 52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포 서쪽 해상
한국 해군 P-3C 대잠초계기가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났다. 바다는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초계함에서 바닷물 위로 서치라이트를 비춰대고 헬기가 새하얗게 빛나는 조명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초계기 조종사는 대잠헬기로부터 연락받은 대로 낙동강 하구상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기장의 눈에 낙동강 하구의 작은 모래톱이 들어왔다. 그곳 바로 위에 대잠헬기가 떠 있었다. 기장이 전술통제사와 통하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알았다, 링스 원! 방금 링스 원의 위치를 육안 확인했다. 우리가 맡겠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

 

- 5월 14일 02 : 55 서울 금천구 시흥2동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해군이 부산 근처에서 미국 잠수함을 나포했습니다. 잠수함은 낙동강 하구 대마등이라는 섬에 좌초했다가 잡혔답니다."
인사군수참모부장 심현식 해군 중장이 다시 보고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았다. 통일참모본부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승무원들을 생포했다는 뜻입니까?"
작전기획참모부장 한기수 대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심현식 중장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아닙니다. 계속된 위협사격에도 불구하고 승조원들은 잠수함 내에 남아 있습니다. 미국 잠수함은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미제놈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갔구만요..."
전략기획참모부장 박정석 상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때 당직사령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대통령께서 오셨습니다."

- 이종식 차수를 포함한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 홍지영은 자다 깼는지 평상복 차림으로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대통령은 4월 이후 이틀에 한 번꼴로 통일참모본부에서 자고 갔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그 미국 잠수함을 풀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잠수함은 분명 영해 안으로 들어온 적함이었다. 대통령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일 수도 있었다.
"그 잠수함은 낙동강 하구언에 접근하다가 좌초됐습니다. 선전포고를 한 적성국의 군함이 우리 영해 훨씬 안쪽으로 침입한 겁니다, 대통령님."
심현식 중장이 대통령의 의중을 다시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풀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이 밀물인데도 좌초됐다면, 그 잠수함은 자력으로 탈출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산 인근은 동해와 가깝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차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단 1미터라도 잠수함이 탈출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불행한 미국 잠수함은 스스로 탈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 "우리에게 잠수함 구난함이 있지 않습니까?"
한기수 대장이 심현식 중장에게 물었다. 가능하면 미국과의 충돌을 어떻게든 피하는 편이 좋았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미국의 선전포고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었다.
"청해진함은 동해 북부 해역에 있습니다. 우리보다 미국 구조함이 그 해역에 빨리 도착할 겁니다."
심현식 중장이 한숨을 쉬었다. 미국의 구조함이 혼자만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막강한 미 해군 함대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구 상공이 미군 항공기로 뒤덮일 것이다. 그럼 한국 공군기들이 요격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오?"
한기수 대장이 다시 추궁하듯 물었다. 심현식 중장은 다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기럼 우리는 모른 척하는 겁네다. 미군이 그 잠수함을 구조해가든 말든..."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종식 차수가 나섰다. 그러나 그 직후 심현식 중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외쳤다.
"급보입니다! 잠수함이 수중에서 한 척 더 발견됐답니다. 지금 아군 초계기가 공격 직전입니다!"
"공격을 멈추시오!"

- 5월 14일 03 : 02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호도 남쪽 해저
[칸, 소나. 대잠초계기가 1-7-8로 선회했습니다!]
"뭐야? 왜?"
소나팀의 보고에 의아해진 앤드루 스캇 대령이 물었다. 한국 대잠헬기가 틀림없이 버지니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대잠초계기가 남쪽으로 다시 돌아갔다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맙소사! 스프링필드도 걸렸군!"
스캇 대령은 동료함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다소나마 여유를 찾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료함의 불행을 기회로 지금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 끝내 일은 이렇게 되었다. 미국 잠수함을 발견하자마자 공격했으면 벌써 격침시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국 대잠헬기와 진주함은 끝내 특전잠수함을 공격하지 않았고, 단종상 소령은 새로운 잠수함을 발견하고도 상부에 보고를 먼저 했다. 결국 한국군 수뇌부, 정확히 말하면 한국 대통령은 미국 잠수함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
단종상 소령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선전포고까지 한 미국의 잠수함이 영해 깊숙이 침입해 왔는데도 그들을 응징할 힘이 없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미군이 얌전히 잠수함을 구조하고 돌아가기만 하면 좋겠는데, 과연 미국이 한국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 줄지도 의심스러웠다. 

- [타코, IFT입니다. 광개토함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잠초계기 후방에 탑승한 전자기기 정비원과 기내무장사는 관측수를 겸하고 있다. 구축함 광개토대왕함과 진주함은 한동안 잠수함에서 멀찍이 물러서 있다가 지금은 아예 진해항으로 귀항하고 있었다.
"우리도 멀찌감치 물러선다. 기장! 3백5십공으로."
단종상 소령이 디스플레이를 살피며 명령했다. 미군 전투기들이 이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한국 공군기들도 서서히 북쪽으로 물러났다. 한국 해군의 P-3C 대잠초계기는 상공을 한 바퀴 선회했다. 궁지에 몰린 미국 잠수함 두 척이 숨어 있는 얕은 바다였다. 초계기는 진해 북쪽을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 5월 14일 05 : 50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 북동쪽 3km
"식별신호를 보내라우야!"
장태석 중장이 신호수에게 지시했다. 해상에서의 식별신호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오사급 고속정은 탐조등 불빛으로 국제공통 해상식별 신호를 보냈다. 탐조등의 불빛이 점멸하면서 상대에게 국기를 게양하도록 요구했다.
[J·K (국기를 게양하라!)]
짧은 알파벳의 연결문은 국제적으로 규약 된 코드였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20여 초를 기다린 신호수가 다시 반복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신호수가 다음 문장을 보냈다.
[N·H·I·J·P·O (너의 국적을 제시하라!)]
"응답이 없습네다."

- 미국 함정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영해를 침범한 주제에 응답도 거부하고 있었다. 신호수가 잇달아 점멸신호기를 조작했다.
[I·J·G (언제 어디서 출항했나?)]
[L·D·O (목적항구는 어디인가?)]
"사령관님, 아무런 반응이 없습네다. 응답을 고의로 거부하는 것 같습네다!"
장태석 중장이 슬슬 긴장되는지 손을 비벼댔다. 차라리 응답을 안 하는 쪽이 오히려 다루기 편했다. 장태석은 이미 결심이 선 까닭이었다.

- "미확인선박을 의아선박으로 선포하라우야! 식별기호 스컹크 알파! 강제조치를 발동하라우야!"
장태석 중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응답이 없는 선박은 이제 국제절차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만 했다.
- [K (정지하라!)]
하지만 미 해군 구축함들은 잠수함을 예인하며 남쪽으로 항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단호한 최후통첩의 신호 불빛을 날리기 시작했다.
- [O·L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그때였다. 미 해군 구축함에서 점멸신호 대신 연기가 치솟았다.
"놈들이 함포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장재영 대위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구축함 두 척에서 계속 섬광이 피어오르며 고속정 주위로 함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협사격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날아든 127mm 함포탄이 선두를 달리던 고속정들에게 떨어졌다.
"간나새끼들! 그래 응답이 함포탄이간!"

- 맨 앞을 질주하던 김진급 고속정 한 척이 함포탄에 직격 당했다. 고속정은 함수 부분이 반쪽으로 쪼개지며 화염에 휩싸였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김진급 고속정은 피격 충격으로 수면 위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김진급 고속정은 마치 장난감을 팽개친 것처럼 물 위에서 몇 바퀴 회전한 다음 요란하게 폭발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장태석 중장이 이를 박박 갈았다.
"종간나이들! 우리가 구조작전을 도와주겠다는데 공격한다 이거이디, 간나새끼들! 미사일 발사 준비!"

- 물론 장태석 중장이 미국 잠수함의 구조작업을 도와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과 통일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분명히 미국 해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장태석이 고속정단을 몰고 나온 것은 반드시 미 해군을 공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물론 기회를 봐서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 구축함들은 영해를 침범한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고속정단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것도 위협사격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명중탄을 날려 장태석의 부하들을 수장시킨 것이다. 치열한 일본 해상자위대와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부하들이었다.
장태석은 미국 함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리고 선제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차라리 좋은 핑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발사하라우야!"
순간 십여 척의 고속정으로부터 일제히 시 스쿠아 미사일이 검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레이더 유도를 맡은 참수리급 고속정에서 미국 구축함에로 전파빔이 쏘아졌다. 
미국 군함들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명중률은 확실했다. 지난 한일전쟁에서도 시 스쿠아를 탑재한 통일한국 해군 고속정들이 혁혁한 전과를 세웠지만 15km에 불과한 사정거리가 문제였었다. 접근하기도 전에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저고도로 접근하는 소형 대함미사일을 발견한 오브라이언과 커싱이 그제서야 서둘러 대응을 시작했다. 함미에 장착된 마크-29시 스패로 8연장 발사기가 대함미사일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느릿느릿 돌아갔다. 배후에 처져 있던 이지스 구축함 커티스 윌버도 스탠더드 미사일을 쏘아 올리기 시작했다.

 

- "사령관 동지! 보시라요! 지대공 미사일입네다!"
장재영 대위가 가리킨 방향으로 흰색 연기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진해 동쪽 고지에 배치된 방공포대에서 미 해군기를 향해 지대공미사일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고속정단을 향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던 미 해군 전투기들이 일제히 회피기동을 시작했다.

"아!"
장태석은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채프를 투하하며 도망가던 미군 전투기 한 대가 공중에서 폭발해 산산조각 났다. 불붙은 파편이 바다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장태석 중장은 박정석 상장을 떠올렸다. 너무 고마워서 장태석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공군이나 다른 해군 함정으로부터 지원을 일체 받을 수 없는 외로운 공격이라고 다짐했건만 방공대대가 미해군기의 위협을 차단해주고 있었다.

- 이제 오브라이언과 커싱에서 붉은색 예광탄 줄기들이 시 스쿠아 미사일로 뻗었다. 20mm 팰렁스 근접방어화기가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구경이 작은 시 스쿠아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 스쿠아 몇 발이 기관포탄의 화망에 걸려 폭발했지만 나머지 7발이 각각 오브라이언과 커싱을 향해 나뉘었다. 미사일이 명중하기 직전이었다. 
그 직후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폭죽 같은 것이 100여 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SRBOC 마크 36 채프/플레어 투사기가 발사된 것이었다. 전파방해를 위한 알루미늄 차단막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 "하픈 접근 중입니다!"
"이런!"
쌍안경을 들고 희희낙락하던 장태석 중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함대방공 능력이 최강인 미국 해군이 보여주는 모처럼만의 교과서 같은 대응방법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놓치는 것이 아쉬웠다. 장태석은 그래도 미국 해군이 응급한 순간에도 머리는 쓸 줄 안다고 탄복했다.
미 해군은 시 스쿠아 대함미사일을 일일이 요격하는 것보다는 레이더 유도함을 격침시키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미 액티브 레이더 유도방식의 시 스쿠아 미사일은 레이더 유도가 중단되면 미사일도 목표를 상실한다. 

- 날아온 하픈 미사일은 여섯 발이었다. 그리고 그중 네 발이 레이더를 유도하는 참수리급 고속정 두 척으로 향했다. 그러나 뒤늦게 발사된 하픈이 시 스쿠아가 목표에 명중하는 것보다 먼저 참수리급 고속정을 명중시킬 수는 없었다. 장태석 중장의 고속정 전대에는 레이더 유도함이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서 또 다른 한 척의 예비함이 레이더를 켜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존재를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장태석 중장이 두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이 표적이 된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수리급 고속정들은 유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 35kg의 소형 탄두이지만 세 발이 잇달아 폭발하자 오브라이언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커싱에도 두 발이 정확히 명중했다.
"황구 편대 공격하라우야!"
마지막 청소부가 나설 때였다. 함포 세례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인민군 해군의 P-6급 어뢰정이 속도를 높였다. 이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자 미국 함정들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함포가 불을 뿜어대자 어뢰정 한 척이 산산조각 나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구식 어뢰정이 현대식 대형 군함에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는 일은 현대 해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됐다! 이제 삼십육계야! 전 함정에 퇴각을 전파하라!"
장태석 중장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장태석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장재영 대위의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알갔습네다. 전 함정 퇴각하라우야!"
이제 만사 제쳐두고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태석의 고속정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었다. 사정거리가 짧고 항해성능이 나쁜 고속정대가 미국의 대형 군함들을 상대로 벌인 전과치곤 너무나 뛰어난 성과였다. 

- 아직 연안은 한국 해군의 차지였다. 미국 해군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이다. 한국 해안까지 친절하게 방문해 준 미국 군함들이 이 좁은 해역에서 전투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태석은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 전 고속정이 다시 가덕도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순간 배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P-6급 어뢰정에서 발사한 533mm 중어뢰의 위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뢰가 오브라이언의 함 중앙에 명중하자 수면 위로 200미터까지 물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7천 톤급 구축함은 반 동강이 나버렸다. 몽둥이로 후려쳐서 반 동강을 낸 것처럼 양쪽으로 쪼개진 구축함 오브라이언은 순식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버지니아에서도 무시무시한 폭발이 이어졌다. 불운한 미국 핵잠수함은 동료들까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무력하게 침몰해 갔다.

- 상공에서는 불꽃 튀는 공중전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대공포대의 지원을 받은 한국 전투기들이 천천히 미군 전투기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한국 공군의 F-16 전투기들이 적극적으로 미군기들을 추적하며 그동안의 무료한 긴장감을 남김없이 해소했다. 
살아남은 미 해군 함정들은 부리나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커싱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 5월 14일 06 : 05 서울 금천구 시흥2동
"맙소사!" 

대통령 홍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통령님! 장태석 중장을 군법재판에 회부해야 합니다!"
인사군수참모부장 심현식 중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심현식의 또 다른 임무는 대통령과 통일참모본부의 명령을 한국 해군에게 전달하고 해군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통일참모본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무시기 말씀을! 미제놈들이 선제공격을 가하디 않았소? 우린 정당한 자위권 행사했을 뿐이외다!"
김평국 정보참모부장이 목청을 드높였다. 그러나 심현식 중장은 김평국 중장을 무시하고 박정석 해군 상장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퍼부었다.
"당신 어찌 그럴 수 있소? 아까 웬일로 슬슬 눈치 보며 자리를 뜬다 했더니, 그 사이에 통신실에 다녀왔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박정석 상장은 심현식 중장을 외면한 채 지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인민군 장령들은 흥분한 심현식 중장을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고속정단에는 한국 해군 고속정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이 인민군 고속정이었고 지휘권자도 인민군 장태석 중장이었다. 

 

- "나는 장태석 동지에게 미국 함대를 공격해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소."
"그럼 방공포대에 그런 명령을 내렸소? 당신은 공군 담당도 아니고, 게다가 장군은 한국 공군에 대한 지휘권이 없지 않소?"
통신전자참모부장 이호석 중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박정석에게 물었다. 이호석 중장은 통참 내부에서 한국 공군을 대표하지만 지휘권은 없었다. 그런데 부산 근처의 방공포대에서 미 해군 전투기들을 향해 미사일을 날린 것이다. 
"나는 침략자 미제 전투기들이 우리 고속정단을 공격할 경우, 대공포대가 보호해 달라고 했을 뿐이오. 인민군 해군이 지휘권을 가진 고속정단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보호요청을 한 게 잘못됐소?"
"그럼 통참에서 정식으로 의제를 제기했어야 옳았지 않소? 왜 슬그머니 도둑질하는 것처럼 통신실에서 그랬소? 의장님 명령이라고 거짓말한 건 아니오?”
"동무! 도둑이라니, 말조심하라!"
"반말하지 마시오!"
남북한 출신 참모들이 편을 갈라 말다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친위 쿠데타를 기도했던 한국군에 대한 의구심이 쌓여 있는 인민군들은 이번만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서로에 대해 그동안 쌓인 불만도 많았다. 그때 이종식 차수가 나섰다.
"지금까지 문제가 많았습네다. 기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입네다."

- "미국 군함을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이호석이 아니라 양석민 국방장관의 말이었다. 양석민은 원래 통참의 일원이었고, 한국 공군 출신이었다.
"가덕도에 있던 대함미사일 사이트는 며칠 전에 폭격으로 날아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오늘 같은 경우에 대비한 준비였군요. 그리고 우리 공군기들은 현재 공대공무장입니다. 대함공격을 하려면 폭장을 바꿔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동원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조금 전에 미 함대를 공격했던 고속정단은 넓은 바다로 나가면 일방적으로 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남쪽에는 미 해군 함대와 전투기들이 우글거리며 한국 전투기들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를 확대하기는 곤란했다.

- 홍지영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모니터에 집중하며 상처 입은 미해군 함대를 공격할 수단을 찾던 참모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홍지영 대통령은 원탁 위에 손을 짚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오늘 실망이 큽니다. 이제 돌이킬 방법은 전혀 없게 되었소. 어쨌건 앞으로는 제 '명령'을 확실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부터는 명령체계를 어지럽히는 장군은 용서하지 않겠소. 우리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싸움에 대비해야 합니다."

- 5월 20일 23 : 10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내래 이제 지쳤소. 도장이나 찍어주시라요."
정호근이 서류 몇 장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TV만 보던 이은경이 고개를 돌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이혼 서류요."
정호근은 이은경을 외면한 채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이은경이 서류를 찬찬히 읽어나갔다. 어떤 구절에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 콜롬비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커피이다. 커피는 콜롬비아 공식 수출액의 무려 50%를 차지한다. 물론 비공식 수출액 1위는 코카인이다. 미국에서 밀수입되는 코카인의 75%가 콜롬비아에서 생산된다. 이 나라를 커피나 조금 생산하고 메데인 카르텔이라는 마약 조직의 테러로 시끄러운 남미 고산지대의 작은 나라로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콜롬비아는 한반도 면적의 5배나 되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 1819년,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군이 스페인군을 격파했을 때,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는 한 나라였다. 한국전쟁 때는 4천여 명이 참전했다. 인구는 3천2백만이다. 1990년에는 대통령 후보 2명과 정당 당수가 마약조직의 암살로 폭사했다.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경찰 1명당 300만 페소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사살당했다.
1994년 월드컵 경기에서 자살골을 넣은 축구선수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팀이 예선에서 탈락하고 귀국하자 광분한 축구팬에 의해 메데인에서 사살당했다. 그런데 콜롬비아 사람들은 메데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1994년에 당선된 에르네스토 삼페르 대통령은 마약중개상들과 싸워 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마약중개상과 연계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콜롬비아로 가던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는 중단되었다. 

- 내전이 격화되자 메데인 카르텔을 비롯한 마약조직들도 자체무장을 강화했다. 그리고 그동안 반정부군의 방해로 인해 선거를 치르지 못했던 지역 주민들도 자체 무장을 강화했다. 결국 낙천적인 콜롬비아 사람들은 어느새 서부개척시대의 총잡이들처럼 일상생활에서도 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 그런데 정부군이나 다수파인 콜롬비아혁명군, 소수파인 민족해방군 모두 마약조직에게서 거둔 세금으로 운영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돈은 미국에서 나오고, 미국은 그 이유 때문에 콜롬비아에 대한 관심을 줄이지 않았다. 미국 대외정책 가운데 제3세계에서 펼치는 가장 중요한 정책인 '비밀전쟁'은 보통 저강도전쟁이나 반게릴라활동 등으로 완곡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비밀전쟁이나 직접적 군사행동의 필요성에 대해 미국 국민에게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1983년의 그라나다 침공 때, 유럽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인구 십만 명의 그라나다가 미국의 유럽지원을 막을 위협이 된다는 핑계를 든 것은 코미디였다. 니카라과의 공산 게릴라들이 멕시코를 넘어 차로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텍사스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치선전은 상식 있는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할 때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소련의 침략 외에 든 이유 가운데 가장 웃기는 것은, 호치민이 베트남에서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상륙할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호치민이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이것은 실로 웃기는 코미디였다. 

 

- 미국이 앞마당인 중남미에 꾸준히 개입하는 이유는 달러 경제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이 지역에 미국이 영향력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결코 자주적인 정치, 경제 및 사회적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나라가 국민들에게 인기 있는 사회개혁이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면, 미국은 항상 CIA를 통해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정당성이 없는 군사정권은 필연적으로 부정부패와 빈익빈부익부, 미국에의 의존도를 심화시키고 국가경제를 파멸로 몰아갔다. 경제가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이때서야 군부정권이 퇴진하고 민간정권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경제상황은 몇몇 강대국, 특히 미국이 배후에서 결정권을 휘두르는 IMF나 세계은행의 원조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이후였다. 그리고 이들 세계금융기구는 대폭적인 복지예산 삭감과 자본시장 완전 개방 등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다. 결국 국가재산이 헐값에 외국자본에 팔려나갔다. 

- IMF는 이미 수십 년 전에도 마지막 해결사로 등장했었다. 외환유동성 위기로 표현되는 IMF 구제금융사태는 비단 아시아, 특히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한국의 경우 북한과 대치하는 동안은 미국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한국의 위치로 선정한 주변국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일본 같은 중간국의 위치를 넘보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북한이 붕괴되거나 통일이 된 다음에는 한국의 역량보다는 미국의 선택이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비밀전쟁을 위한 자금은 미국 의회가 심의하는 정부예산을 배정받지 않고 CIA가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마약거래는 이윤이 가장 많이 남는 장사이다. 그래서 미제 무기를 싣고 온 수송기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마약을 가득 싣고 미 공군 활주로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담배로 인해 사망하는 미국인이 한 해에 약 30만 명, 술로 인해 죽는 미국인이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사용자가 6천만 명이나 되지만 그것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전혀 없는 마리화나를 주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훨씬 더 위험하지만 감추기 쉬운 코카인 같은 마약을 사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 미국과 마약, 중남미 군사정권, 그리고 IMF와 세계자본은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조철준은 우선 프라울러부터 격추시키기로 결심했다. 프라울러가 전파방해를 계속하는 한 날아오는 순항미사일에 대한 정확한 요격은 힘들기 때문이다. 
"전파침묵 상태를 해제한다. 우선 저 도둑놈부터 없애버리자!"

"알겠습니다."
발사관제용 콘솔 앞에 서있던 엄주석이 대답하면서 발사버튼을 덮은 유리커버를 벗겼다. 스탠바이 상태에 있던 포대의 교전레이더가 전파를 쏘기 시작하자 훨씬 더 정밀한 화면이 나타났다. 그런데 포대가 발신한 전파는 프라울러에게 수신됐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발사!"

- 폭음과 함께 발사관 뚜껑이 날아간 다음 1.9톤짜리 46N6E 미사일이 25미터 상공으로 튀어 올랐다. 로켓 모터가 불을 뿜자 미사일은 70도에 가까운 각도로 고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때문에 미사일은 순식간에 밝은 점이 되어 저 멀리 사라졌다. 3초의 시간간격을 두고 다른 미사일 한 발이 더 발사됐다. 

 - 채프를 잇달아 뿌리며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프라울러 두 대의 궤적을 보며 조철준이 나직하게 비웃었다. EA-6B 프라울러는 속도가 마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프라울러는 동체 아래에 다섯 개의 전자전 포드와 연료탱크를 잔뜩 달고 있어 기동성이 형편없었다. 반면에 그들을 노리고 날아가는 46NE 미사일은 이미 최고속도인 마하 6에 달해 있었다.

 

- "매그넘 코드 수신!"
"뭐얏?"
이종현이 외치자 지휘소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특히 조철준이 더 놀랐다.
매그넘 코드는 미군기가 대 레이더 미사일을 발사할 때 내는 신호였다. 대 레이더 미사일을 발사하니 아군 레이더나 전파발신 장비들은 주의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류정식이 레이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뒤에 서 있는 조철준에게 말했다.
"미사일을 레이더에 포착했습니다! 고도가 아주 낮습니다. 거리 25킬로미터! 네 발입니다. 항공기 두 대가 방금 막 수평선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빠릅니다. 전투기 같습니다." 
"영악한 놈들!"
조철준이 분한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프라울러는 미끼였나 보군. 그래! 미끼라면 물어주마. 갈기갈기 물어뜯어 주마."

- 그것은 콜드 샷(cold shot)이었다. 항모에서 이함할 때 캐터펄트가 충분한 출력을 내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비행기가 이륙에 필요한 속도를 얻지 못한 채 캐터펄트에서 퉁겨지면 그대로 바닷물속에 처박히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한일전쟁에서 어뢰에 피격당했던 항모 이순신함은 울산과 청진에서 대규모 수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가 잦았다. 전력 계통에서 일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경우, 특히 캐터펄트 계통이면 문제가 심각하다. 비행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야 할 캐터펄트가 충분한 힘을 얻지 못하면 단지 비행기를 바다로 밀어내는 흉기가 되는 것이다. 수호이 전투기의 추력이 우수했던 까닭에 김종구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스팀 캐터펄트를 사용하는 미국 항공모함에서도 종종 콜드 샷에 의한 사고가 발생한다. 

 

- "총원 전투배치, 심도 150으로 급속잠항!"
이억기함의 전방 밸러스트 탱크로 해수가 유입되자 함수가 무거워지며 잠수함이 아래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이승렬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난간을 움켜쥐고 적색조명으로 어두운 사령실에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조타를 맡은 승무원들, 밸러스트 조종을 맡은 잠항관과 요원들, 음탐실의 요원들 모두 각자 계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어색했다. 부자연스런 침묵이 사령실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이승렬 중령이 함내 전구역으로 이어지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함장이다. 우리 해군 전투기와 미 해군 전투기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것은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다. 현재 우리 해군의 전투함들도 미 해군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중이다. 이억기함은 정식 교전명령을 접수했으며, 이제 우리는 미 해군을 상대로 전투에 돌입하게 됐다." 
승조원들은 숨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하던 것이 드디어 시작된 것뿐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예상된 일이다. 이제 제군들의 희생과 협조를 국가가 필요로 할 때가 온 것이다. 제군들은 각자 맡은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기 바라며, 함장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주기 바란다. 함장은 쉽게 죽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이다."

- 말을 마친 이승렬 중령이 마이크를 내리고 부장에게 통신문을 건넸다. 이승렬은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심도계를 바라보며 이승렬 중령은 전면교전 시의 세부작전수칙을 떠올리며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했다.

 

- 이제 이억기함은 연료와 무기를 재보급받을 수도 없고, 기지로 귀환할 수도 없었다. 잠수함지휘소에서도 더 이상의 명령은 계획에도 없었다. 교전명령과 동시에 이억기함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으며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고독한 잠수함전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8월 1일 09 : 48 울릉도 북동쪽 155km
함대 방공진형으로 급히 산개한 이순신전단 소속 구축함들에서 미사일이 치솟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신채호함이었다. KDX-3 계획으로 건조된 신채호함은 한국 해군이 보유한 구축함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공능력을 자랑했다. 동급함으로 김구함이 있었으나 지난 한일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하고 이제 신채호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신채호함의 함수와 함미에 장착된 수직발사기가 열리며 붉은색 화염과 함께 스탠더드 함대공미사일이 치솟았다. 스탠더드 미사일들이 하얀색 연기를 뿜으며 계속 하늘 높이 상승했다.  

 

- 동해와 남해 외곽에 배치된 미 항모 여섯 척 가운데 단 한 척만이 이순신전단을 잡기 위해 투입됐다. 나머지 다섯 척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이곳에 미 항모는 단 한 척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함의 함재기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호위함들의 함대공 미사일도 보유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칸스털레이션의 일차 공격을 겨우 막아냈을 뿐이었다. 
김동완 대령은 전단장의 명령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지막 승부수였다. 이제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항구로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한국 해군은 결코 다시 바다로 나올 수는 없었다. 항구에 묶인 채 적 전투기의 표적이 되어 폭탄세례를 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군으로서는 너무 비참한 최후였다. 해군이라면 모름지기 푸른 파도를 벗 삼아 최후를 맞고 싶은 법이다. 조국을 침공하는 적에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이 군인의 운명이라면, 거친 바다에서 죽는 것이 특히 해군의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해군은 도망치는 대신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미국 항모전투단에 한 방 먹여야 했다. 

- 새로운 침로로 이순신함을 변침하고 나서 김동완 대령이 한편으로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목에 걸기엔 조금 무거운 펜던트였다. 그 안에는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김동완 대령은 그것을 꺼내지는 않았다. 
공군 조종사들은 위험한 비행에 대비해서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유품을 기지에 남겨두고 출격한다. 그리고 그것은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군은 달랐다. 해군은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하지만 모든 것은 배에 남겨둔다. 배가 바로 해군의 무덤이었다. 

 

- "30노트 45분입니다. 전속력을 낸다면..."
맥케이브가 전속력이라고 하자 부함장은 의아한 듯 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순신 전단이 최고속도로 남하 중이기 때문에 호위함들의 소나도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산타페를 탐지할 확률은 매우 희박했지만 언제 어디서건 은밀성을 최고로 중요시하는 잠수함의 승무원으로서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배짱이 필요한 일이었다. 
"좋아. 전속력까지는 필요 없고, 25노트로 이동한다."
부함장의 주저하는 듯한 눈빛을 읽은 맥케이브 중령은 속력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내심으로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하들에게 자신의 조급함을 내보이기는 싫었다.

- 8월 1일 12 : 10 울릉도 북동쪽 36km
"미안하다. 자네에게 큰 부탁을 하는군."
정희원 대령이 김준호 소령에게 손을 건넸다. 김준호의 손을 움켜쥔 정희원 대령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귀환이 불가능한 작전이라는 것은 김준호 소령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연약한 마음이 마지막 순간을 괴롭혔다.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전에 빨리 대잠헬리콥터에 오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
김준호는 함장에게 마지막으로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고는 비행갑판으로 뛰어나갔다. 최고속도로 내달리는 광개토대왕함의 비행갑판은 엄청난 요동에 더해서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광개토대왕함의 스크루가 밀어내는 힘이 커다란 물보라와 항적을 만들어내고 그 물보라가 함미의 비행갑판에까지 흩날리는 것이다. 

- "휴우! 흠뻑 젖었군요."
비행복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부기장이 씩 웃었다. 재빨리 헬멧을 쓴 부기장이 체크리스트를 들고 마지막 점검항목을 읽어 내려가자 김준호 소령이 꼼꼼하게 복창하며 이륙점검을 끝마쳤다. 모든 것이 이상 없었다. 무장파일런에 장착한 청상어 어뢰 두 발과 폭뢰 두 발의 연결상태는 재차 점검했다. 든든했다. 모든 것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김준호 소령이 비행갑판에 서 있는 이함유도 요원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 고속으로 항주 중인 구축함에서 이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퍼 링스 대잠헬리콥터의 주 로터가 회전하며 이함에 필요한 가속을 시작했다. 그러자 바닥에 고정된 헬기 자체의 진동에 광개토대왕함의 진동까지 더해져 기체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김준호 소령이 이함유도요원의 신호에 맞춰 스로틀 레버를 당겼다. 강철 케이블이 풀리면서 수퍼 링스 헬리콥터가 비행 갑판 위에서 조금씩 상승했다. 바닥에 지지할 곳이 없어지자 수퍼 링스는 실에 매달린 연처럼 갑자기 좌우로 요동하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 무선 침묵을 유지하고 초저공으로 비행한다."
김준호 소령이 기내마이크로 부기장과 대잠요원들에게 통보했다. 이제 더 이상 광개토대왕함과 교신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 해면상 5미터로 아슬아슬하게 비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리고 미군의 조기경계기라면 아무리 낮게 비행하더라도 조만간 탐지해 낼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한 만큼 탐지되기까지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우뚝 솟은 울릉도가 보였다. 해안 절벽 위로 솟은 성인봉은 구름에 완전히 감싸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을 그곳에 오래 둘 수는 없었다. 초저공비행에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언제 바다에 처박힐지 몰랐다.

- "소나 디핑(dipping)! 시간이 없다. 바로 액티브로 탐신한다."

"알겠습니다. 액티브 탐신!"
김준호 소령은 서둘렀다. 원래는 수온센서를 먼저 투하해서 온도를 파악하고 디핑 소나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온도층과 음파의 탐지에 장애가 되는 변수들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모자랐다. 

 

- "부장, 어뢰 발사 후에 공격 소나를 쓰는 것은 어떻겠나?"
"함장님, 그렇게 하면 우리 위치가 노출될 텐데요."
김창규 소령은 함장의 갑작스런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잠수함은 조용히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굳이 공격 소나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억기함은 미군 잠수함이 한국 대잠헬기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동안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억기함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데 부족한 정보는 없었다. 

 

- "그렇지만 이순신전단에게도 경고를 줄 수 있을 거야. 대응할 기회를 주자고. 어쩌면 이순신전단의 구축함들이 애스록으로 지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 문무대왕급 구축함들이 애스록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사정거리는 충분합니다."
이승렬 중령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김창규 소령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이승렬 중령이 굳이 부하에게 자신의 의견을 검토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혹시나 위험할지 모르는 결정에 대한 이중적인 점검이었다.
"좋아. 그럼 어뢰를 발사한 후 공격 소나를 2회 사용한다. 그리고 작전관!"
"옛! 함장님!"
"공격 소나에서 얻은 데이터로 놈들의 위치 데이터를 확실히 보정해 둔다. 자칫 유선유도를 차단할 수도 있으니까 어뢰에 목표데이터를 계속 갱신해야 된다." 

 

- 순신함이 격침되면 돌아갈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윤도선 소장이 이제 마지막 명령을 내릴 차례였다. 

 

- 8월 1일 13 : 49 울릉도 남동쪽 160km
"초신과 밸리 포지에서 요격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해군의 남은 전투함 6척이 모두 발사해도 대함미사일 숫자는 겨우 48발에 불과했다. 이지스 순양함 초신과 밸리 포지 외에도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이 2척이나 포진된 칸스털레이션전단의 방공능력은 막강했다. 페이지스 소장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대공전투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신과 밸리 포지에서 발사한 스탠더드 미사일들은 순차적으로 하픈을 8발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 척에서 동시에 4개의 목표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칸스털레이션 전단에 소속된 직위 순양함 초신(Chosin)은 한국전 때의 지명이다. 초신은 일본식 발음이었고, 장진호(長津湖)를 뜻한다. 미국인들은 한국 지명을 그렇게 일본식으로 제멋대로 읽었다. 장진호 전투, 한국전에서 미 해병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중공군을 저지했던 격전지였다. 

 

- "아! 이순신함이..."
김종구 대위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애기를 찾았다. 그러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곳곳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이순신전단이었다. 성한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검은 연기가 하늘 끝까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흘수선을 표시한 붉은색 선저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이순신함은 우현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리고 구명정인 듯 주변에 작은 점들이 가득했다. 검은 연기가 다시 커지면서 노란색 화염이 이순신함을 감쌌다. 마지막 폭발이었다. 

- 믿을 수 없었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함정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5만 톤에 가까운 배가 빨려 들어간 자리에 생겨난 강한 소용돌이 구멍은 가까운 곳에서 허우적거리던 생존자들까지 함께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제 김종구 대위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 바다가 시야에 가득히 들어오면서 희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지난 두 번의 전쟁기간 동안 불리한 가운데서도 대단한 활약을 해왔던 한국 해군은 오늘 사실상 궤멸했다. 이제 당분간은, 어쩌면 영원히 다시는 위용찬 한국 해군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도 봉쇄작전이 아니라 상륙작전에 이은 지상전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상전은 제한적인 봉쇄작전이나 폭격과 달리 엄청난 파괴력이 있다. 이제 곧 전 국토가 전화에 휘말리는 것이다.

- "상륙이 예상되는 지역은 어디고, 그 시간은 언제입니까?"
"대통령님."
양석민 국방장관이 나섰다. 통일참모본부와 정보사단에서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설명했다. 초조해진 대통령이 위안거리를 찾았지만 안심이 될 만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군의 동원태세와 움직임을 감안하면 상륙작전 시기는 8월 3일 또는 4일 새벽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미 지상군이 움직이는 데에는 엄청난 물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큰 항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륙 예정지가 될 수 있습니다만, 아마도 부산 인근이 아닌가 합니다."
대한민국 제2의 대도시 부산은 일본 땅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항구도 크고 서울로 통하는 도로망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부산은 미국이 원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목포의 잠수함 통신센터가 폭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긴급 시에 박위함이나 다른 잠수함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잠수함 통신센터는 장파를 발신한다. 장파를 이용하면 잠수함이 수면 아래에 있을 때도 긴급명령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잠수함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는 것은 아니었다. 잠수함이 부상하거나 잠망경 심도에서 마스트를 내놓으면 위성통신이나 항공기를 통해 어떻게든 연락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잠수함들이 잠항시에는 긴급명령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 8월 1일 07 : 20 멕시코 마카모로스 [한국시간 8월 1일 23 : 20]
멕시코 북동부 끝에 자리 잡은 마타모로스(Matamoros)는 멕시코만에서 미국에 접한 국경도시이다. 리오그란데강 하구 건너편에는 미국 땅 브라운즈빌(Brownsville)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멕시코로부터 유입되는 불법입국자를 막기 위한 철조망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 미주원정군 사령관 차영진 준장은 모텔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벌어진 한국과 미국 해군의 전투에 대한 자세한 보도가 이어졌다. 틀림없이 미국 해군정찰기가 촬영했겠지만, 한국 해군의 중형 항모 이순신함과 호위함들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장렬한 최후로군요."
오성환 대령이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TV를 보고 소감을 말했다. 한국 해군 함대가 최선을 다해 싸웠더라도 어떻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물량을 앞세운 미 해군 함대 앞에서 한국 해군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 그러나 차영진은 전쟁 후를 대비해서 해군 함대를 아예 항구에 정박시키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끊임없는 공격에 전투함은 결국 모두 잃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숙련된 해군 승조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돈과 기술,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있으면 군함을 다시 건조할 수 있지만 인력 양성에는 그 몇 배가 들어도 전쟁 전의 수준으로 복구하기는 어렵다. 

-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눈이 벌건 오성윤 대위가 분노를 삭이며 방문을 닫았다. 미국 지상군과 공군의 부대배치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한국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해커 오성윤이었다.
"상부에서는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걸까요?"
"아마도... 본격적인 상륙전이 있기 전까지는 작전이 시작되지 않을 겁니다."
오성환 대령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차영진이 대답했다. 미국 해군이 한국 해군 함대를 전멸시킨 것은 바로 미군에 의한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지상전부터는 본격적인 전면전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지휘부는 아직도 한반도 봉쇄작전의 연장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오성환 대령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직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나 보군요."

- 8월 1일 10 : 30 샌디에이고 북서쪽 270km [한국시간 8월 2일 01 : 30]
김철진 소령이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장보고급 잠수함 박위함과 해군 작전사령부에 있는 잠수함 작전권자가 실시한 가장 최근의 교신은 벌써 꼬박 16시간이나 지났다. 그리고 박위함은 두 시간 전에 작전사령부와 반드시 교신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잠수함 ESM 마스트에 수신된 전파는 없었다. 잠수함 작전권자는 잠수함부대의 총지휘관을 뜻한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동 명령과 함께 구체적인 전투상황이 벌써 하달되었을 것이다.
"잠수함 지휘소가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닐까요?"
김철진 소령은 답답한 나머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서승원 중령 쪽으로 다가갔다. 잠수함과 지휘소 간의 통신상황에서 지상 지휘소의 통신이 끊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 잠수함 쪽에서 잠항하는 등 통신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양쪽의 교신이 중단되는 상황은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정시간이 지났는데도 작전사령부의 잠수함 지휘소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서승원 중령이 입을 열었다.
"통신부이 사출을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내용은 어떻게 합니까?"

- "올가미에서 북극곰으로, 접수 후 즉각 회신 요망. 회신이 없을 시 단독 교전을 수행하겠음."
낮게 깔린 서승원의 목소리는 메마르게 느껴졌다. 김철진이 메모를 멈춘 채 서승원 중령을 다시 쳐다봤다. 함장이 말한 내용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가 놀란 것은 교전을 결심한 함장 때문이었다. 

- 육군이나 공군의 지하벙커와 달리 해군의 잠수함 지휘소는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 그것은 잠수함으로 명령을 전파하기 위한 통신시설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었다. 물속으로 파장이 긴 전파를 쏘아 보내려면 수십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는 초장파 발신용 안테나 시설이 필요하다. 그것은 미군의 감시망을 피해 산속에 숨겨둘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다. 명령이 없다는 것은 그 시설이 파괴된 것을 뜻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그토록 피했건만 이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 그는 부하들이 긴장을 벗어나야만 잠수함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신중하고 예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머와 장난기가 가득한 서승원에게서 미소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 올덴도르프는 지금 대마도 인근 해역으로 수송함정들을 전진배치시키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구축함과 프리깃을 합쳐 모두 다섯 척의 전투함으로 구성된 태평양함대 수상함 부대 소속 제23 구축함전대이다. 제23 구축함전대는 단지 행정적인 조직일 뿐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함정전체가 기동단대(Task Unit)라 부르는 임무조직으로 그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올덴도르프가 바로 그 임무부대의 기함이었다. 
"남쪽에 배치된 함정을 이곳으로 이동시키면 어떻겠나."
"함장님. 대잠경계망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남쪽 방어선이 뚫리겠지만 현재 상황이 너무 급박하네."
폴 셈코 대령도 부함장의 우려가 염려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무더기로 몰려드는 한국 해군의 고속정대였다.

- 셈코 대령이 전술상황판을 가리키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일반적인 대잠경계진형은 호위함정을 원 모양으로 주위에 배치하는 원형진(圓形陣)이다. 잠수함이 어느 방향에서 위협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진을 유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했다. 

- 부함장이 남쪽에 배치된 구축함 피츠제럴드(Fitzgerald)와 존 영(John Young)을 가리켰다. 피츠제럴드는 막강한 방공능력을 자랑하는 이지스 구축함이고 존 영은 대잠작전능력이 뛰어난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이다. 셈코 대령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함장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8월 2일 03 : 24 대마도 서쪽 27km
"방위 이백사십공(2-4-0)! 새로운 음문입니다. 추적번호 37을 부여합니다."
"그건 새로 나타난 놈이 아니다. 단지 정지해 있던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 뿐이야."
음탐장의 보고에 이승렬 중령은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거제도 인근해역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대마도 해역에 봉쇄진을 펼치고 있던 미 해군 수상전투단의 구축함과 프리깃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그래... 운이 좋군."
부장 김창규 소령의 의견에 이승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차분하려고 했지만 그도 위험천만했던 일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 대마도에서 부산 쪽으로 이어지는 서수도(西水道)는 폭이 불과 50km에 지나지 않는다. 폭 좁은 해협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폭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이승렬이 반대편인 동수도 대신 서수도를 선택해서 통과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서수도의 수심이 동수도보다 훨씬 깊었다. 그리고 부산 인근이기 때문에 미 해군 함정들도 대잠경계보다는 대공경계에 훨씬 신경을 쓸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동수도 쪽은 대마도에서 일본으로 이어진 수중고정소나망(SOSUS)이 배치돼 있었다.  

- 한국 해군 잠수함 이억기의 사령실이 잠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음탐요원들이 소나의 작동모드를 이리저리 바꾸는 중에 나는 스위치와 키보드 조작 소리만이 사령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모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라 음탐요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령실의 다른 요원들도 침묵을 지켰다. 

 

- 김창규 소령이 목덜미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억기함으로부터 불과 10km 안에서 진을 치고 있던 구축함을 벌써 두 척이나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만약 미국 전투함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억기함은 꼼짝없이 덫에 걸려들고 말았을 것이다. 
김창규는 함내가 무척 더워졌다고 느꼈다. 이억기함이 수면으로 부상해서 디젤엔진을 가동하지 못한 지도 벌써 이틀이 꼬박 지났던 것이다. 함내 공기 중 이산화탄소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함장은 예비 압축공기와 전력을 아끼고 있었다. 게다가 급박한 상황에 대비해 연료전지 시스템은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 함장의 명령에 김창규 소령이 복창했다. 이제 서둘러 움직일 때였다. 미 해군이 다시 봉쇄위치로 돌아오면 그때는 대한해협을 돌파하기 힘들 것이다. 잠시 모자를 벗고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이승렬 중령이 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두 놈을 잡으면 왜 안 되는 거지?"
그것은 씁쓰레한 반문이었다. 김창규 소령이 함장의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공격하는 즉시 우리가 공격받을 겁니다. 함장님."
"우리가 격침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공격을 못 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이승렬 중령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과연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가 회의가 들고 있었다. 항공모함이나 상륙함들, 그리고 보급함이 최고 우선시되는 목표였다.

- 그러나 미 해군의 대잠방어선이 너무도 견고했다. 게다가 항모와 상륙함은 강력한 대잠방어망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공격하기도 전에 이억기함이 최후를 맞을 수 있었다. 이승렬은 차라리 지금 남동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구축함 두 척을 잡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승렬은 공격결정을 못 내리는 자신이 용기가 없어서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 "저희는 함장님께서 공격결정을 내리신다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말을 꺼냈던 김창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함장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억기함이 최후를 맞을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놈들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여줘야 합니다. 함장님...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 부장 말이 맞다."
이승렬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해군의 항모 이순신의 최후는 그만큼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미해군과 전력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지, 한국 해군이 무능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지금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평소 같은 3직제라니, 김창규는 함장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일세. 우리가 하루 이틀 전쟁하는 게 아니잖나. 피곤한 남자는 힘을 쓸 수 없지. 안 그래? 놈들의 봉쇄선 바깥쪽에서 뒤를 친다!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항모 한 척은 반드시 우리가 꼭 잡고 만다. 부장!"
"넷! 알겠습니다! 함장님!"
이승렬이 미소를 지으며 해도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그제서야 김창규 소령도 따라서 굳은 표정을 풀었다. 

 

- 그것은 구명대를 쓰고 허우적거리는 수병들이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구명보트 위에도 부상자가 대부분인 생존자들이 빼곡하게 누워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구명보트에 탈 수는 없었다. 보트에 타지 못한 수병들이 보트에 둘러쳐진 밧줄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함장님!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저대로 내버려 두면 저들은 모두... 죽을 겁니다."
김창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들을 구조해 줄 한국 해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억기함에서도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이승렬이 이를 꽉 문 채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 "잠망경 내린다.”
"함장님..."
"잠망경 내려!"
"알겠습니다. 함장님."
머뭇거리던 김창규 소령이 패널을 조작해서 잠망경을 내렸다. 그런데 물 위에 떠 있는 생존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억기함의 잠망경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오랫동안 악몽으로 나타날 것 같았다. 그리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질 줄은 예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함장의 목소리가 김창규의 상념을 깼다. 
"항법 보정은 마쳤나?"
"예. 완료했습니다. 함장님. 로란을 썼습니다."

- 잠수함이 관성항법으로만 계속 항주하면 거리와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가 발생한다. 통상적으로는 GPS 위성항법을 쓰지만 미국이 언제 이 지역의 GPS 코드를 변경할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지상전파 기지국에서 사용하는 민간용 로란 항법을 사용하는 편이 안심할 수 있었다. 

 

- 사실 이승렬 중령도 마음속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일부러 항법체계를 점검하는 척했지만 함장도 물 밖에서 보았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힘들었다. 김창규 소령의 시선이 함장의 손을 향했다. 함장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 채로 덜 덜 떨리고 있었다. 

 

- "기래, 박 상장 동지. 말씀해보시라요. 동지가 가면 이곳 통참에선 누가 해군 작전에 대해 대통령님을 보좌할 것이오? 이곳에서의 지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네까?"
"내래 장태석이가 죽었다고 분해서 이러는 게 아닙네다, 차수동지!" 
박정석 상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종식 차수가 침착하게 박정석 상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정석 상장이 긴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차수 동지. 여기엔 심 중장이 계십네다. 심 중장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장령, 앙이, 해군 제독이십네다."
박정석 상장이 언쟁 도중에 갑자기 자기를 지목하자 심현식 중장이 약간 불쾌하다는 듯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

- 박정석이 사사건건 한국 해군의 심현식 중장과 갈등을 빚어왔지만 결코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남한과 북한, 서로 다른 체계의 군대조직이 하나로 뭉치면서 불거져 나온 무수한 문제들이 이 두 사람을 매양 싸우게 했던 것이지 결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수 동지! 이제 통일한국에 남은 전력은 남반부 해군의 잠수함 전력뿐입네다. 우리 인민군의 잠수함들은 미국 해군에 맞서는 것이 불가능합네다."
"기래서, 박 상장 동지가 여기서 할 일이 없다는 말씀입네까?"

"그것 때문만이 아닙네다. 이제 우리 군에서 미제에 부산 상륙을 막을 력량은 기뢰전 능력밖에는 없습네다. 제게 총지휘권을 맡겨주시라요. 이 부탁은 차수 동지께만 드리는 게 아니라 심 중장동지께도 드리는 것입네다." 
 
- 박정석이 머리를 숙이기까지 하자 이종식 차수가 혀를 찼다. 그러나 남북한 간의 지휘권에 관련된 문제는 이종식 차수도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종식 차수도 박정석 상장이 통참보다는 일선에서 더욱 필요한 상황이 될 만큼 상황이 돌변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기는 곤란했다. 이종식 차수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저는 박정석 상장께서 중책을 맡아주시는 것에 동의합니다. 박상장께서는 이미 지난번 중국과의 전쟁 때 남포로 상륙하려는 중국 해군 항모전단을 기뢰전으로 봉쇄하신 바 있습니다. 박정석 상장께서 다시 한번 좋은 성과를 거둬주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심 중장 동지..."
무슨 말이 나올까 전전긍긍하던 박정석 상장이 막상 심현식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자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단지 의견을 달리 한 까닭에 지난 한중, 한일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계속 대립해 왔던 심현식과 박정석 사이에 신뢰의 눈길이 오가고 있었다.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심현식 중장이 약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심현식은 이기고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다.
 
- 이종식 차수가 박정석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미군과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윤도선 소장과 장태석 중장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장군들, 그리고 부하들이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국민들은 얼마나 죽을지 몰랐다. 이종식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 8월 2일 14 : 24 부산 남동쪽 32km
"망할 놈들! 엄청나게도 많이 깔아놨군." 
조셉 모블리(Joseph Mobley) 대령이 기뢰처분 구역에서 엄청난폭발이 연속 일어나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가 소해 임무부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지금 모블리 대령이 승선한 함정은 인천(Inchon)함이었다. 미 해군 소속으로, 1950년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붙여진 인천함은 2만 톤이 넘는 대형 군함이다. 원래 헬리콥터상륙함이었지만 개조작업을 거쳐 지금은 소해헬리콥터를 탑재하는기뢰전모함으로 변경되었다. 

- "해상자위대의 시 드래건입니다. 착함허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왔군. 재급유하는 즉시 바로 띄워보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 온 것처럼 모블리 중령이 반가워했다. 게다가 새벽에 한국 해군의 고속정대가 기습공격을 하는 바람에소해작업이 몇 시간 동안 중단됐었기 때문에 시간도 촉박하던 참이었다.
"해상자위대로부터 출동한 소해헬기는 4대입니다. 소해함들은 오늘 19시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 파나마 운하가 한국의 공격으로 파괴된 다음 가장 고충이 컸던것이 미 해군의 소해부대였다. 미 해군의 소해함정 중 태평양에 배치된 소해함은 단 두 척밖에 없다. 태평양함대의 규모가 대서양함대와 동등한 것으로 볼 때 태평양에 배치된 소해함이 이렇게 적은 것은 바로 일본의 막강한 소해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과 전쟁을 치른 뒤였기 때문에 소해함의 파견을 반대했다. 덕분에 미 해군은 대서양함대에 배치된 소해함들을 모두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파나마 운하의 붕괴로 소해함들이 남아메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바람에 무려 한 달 가까이 투입시기가 늦어졌던 것이다. 

- 인천함의 주갑판에서 비행대기중이던 MH-53E 시 드래건 헬리콥터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시 드래건 소해헬기가 착륙하도록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시 드래건 소해헬기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형 헬리콥터이다. 동체에 수톤에 이르는 각종 소해기구를 연결하여 수면 위를 비행하며 물 속의 기뢰를 제거하기 때문에 소해함보다 훨씬 안전하게 소해를 할 수 있다. 거대한 시 드래건 두 대가 급유를 마친 다음 북쪽을 향했다.
 
- 8월 2일 15 : 18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황령산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님."
갑자기 사령관이 바뀐다는 통보에 어리둥절했던 유경용 대령이지만 신임 사령관이 박정석 상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반색했다. 한국 해군 소해부대에서 잔뼈가 굵은 유경용 대령은 한중전쟁 당시 남포 기뢰전에 참가해서 박정석 상장과도 안면이 두터웠다. 

 

- 박정석 상장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쳤다. 헬리콥터를 타고 오는 도중에 공군기의 엄호를 받았으나 미 해군 전투기의 공세에 쫓겨 박정석은 결국 헬리콥터에서 내려야 했다. 공군의 조기경계기가 호위전투기를 대동한 헬리콥터가 남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좌시할 리가 없었다. 박정석이 탄 UH-60 헬리콥터를 호위하던 F-5 전투기 한 대는 호넷에서 발사한 암람 공대공미사일을 대신 맞으며 격추되었다. 헬기는 즉각 도로에 착륙하고 근처를 달리던 승용차를 빌려 탔다. 그리고 부산 북부 상공에서는 잠시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 "조종기회원은 마지막까지 살려두어야 합네다. 이런! 기런데 방법이..."
박정석 상장도 곤혹스러웠다. 조종기뢰는 스스로 폭발하는 일반 기뢰와 달리 유선으로 연결되어 육지의 지휘소에서 직접 폭파시킬 수 있는 기뢰였다. 일반 기뢰와 달리 소해함의 유인장비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데 따라서는 위력적인 기뢰가 바로 조종기뢰였다. 영어로는 controlled mine, 일본식 명칭은 관제기뢰(管制機雷)이다. 그러나 조종기뢰원도 적의 정밀수색에 노출되면 무용지물이었다. 박 상장도 기뢰전에는 대가였지만 세계 최고전력을 갖춘 미군과 일본이 힘을 모아 소해작전에 투입되고 있었다. 어렵게 부설한기뢰를 적의 소해함으로부터 최대한 살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방법이 별로 없었다. 

- "유 대령. 우선 소해함을 잡읍세다."
"넷? 무슨 말씀인지?"
유경용 대령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뢰전의 정석은 소해함들로부터 최대한 기뢰를 잔존시켜서 후속하는 적의 주력 전투함과 상륙함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석 상장은 전혀 의외의 말을 하고 있었다. 
"청소부를 겁낼 것이 아니라 청소부를 직접 잡자는 것이외다. 소해함에 피해를 입혀 소해작전이 지연되면 놈들은 움직일 수 없습네다. 아, 이런! 이곳에 재부설을 합세다!" 
박정석 상장이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판으로 다가가서 그가 가리킨 곳은 2차 기뢰원 남쪽으로, 이미 미 해군 소해부대에 돌파당한 3차 기뢰원과의 사이였다. 
"하지만 부설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뢰부설함이 그곳까지 가기도 전에 격침당하고 말 겁니다."
"그것은 내래 알아서 하겠수다. 유 대령은 이곳에 부설할 기뢰들을 21시까지 준비하시오. 가능하갔습네까?"

- "아! 심 중장 동지! 내래 박정석이외다. 부탁이 있소이다. 한국해군 특수전단을 제게 하루만 주시라요. 설명할 시간이 없습네다. 기리고 이종식 차수 동지께 제29 해상저격여단을 기뢰전 사령부로 배속시켜 달라고 전해주시라요!"
몇 차례 대화가 오간 끝에 박정석 상장이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유경용 대령은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도 곧 박정석 상장이 원하는 작전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 한국 해군의 특수전 전단은 바로 UDT/SEAL의 특수작전부대와 해난구조를 전담하는 SSU였다. 특히 SSU는 심해잠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박정석 상장이 세운 작전에 동원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해상이든 수중이든 특수작전에 한해서는 세계 최고수준의 부대였다. 게다가 박정석 상장은 인민군 해군 최고의 특수부대인 해상저격여단까지 주문한 것이다. 
  
- 8월 2일 21 : 32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이상 없다. 출발한다!"
김상규 대위가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선두 정찰조가 이상 없음을 알려온 것이다. 이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면 각 팀장이 장비한 스쿠버폰(Scuba-phone)에 의지하지 않고는 교신이 불가능했다. 

- 박무진 중사와 그 옆으로 팀원 여덟 명이 모두 달라붙어 수중추진기를 물 속으로 잡아끌었다. 모래 위에 깊숙한 골이 패일 정도로 무거워서 팀원들이 한참 땀을 쏟았다. 넓적한 판자 모양에 양쪽으로 추진기가 장착된 수중추진기 자체의 무게는 가볍다. 그러나 그 위에는 중량이 300kg에 가까운 K-752 최신형 침저기뢰 두 개가 실려 있었다. 장정 아홉 명이 낑낑댈 만한 무게였다. 
박무진 중사가 수중추진기의 부력조절기를 작동시켰다. 기뢰 두 발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부력탱크에 공기를 최대한 집어넣어야 했다. 그러자 수중추진기는 간신히 중성부력 상태에 이르러 수중에 둥둥 뜬 상태로 만들어졌다. 

- 팀장 김상규 대위가 머리에 둘러 쓴 스쿠버폰의 송신버튼을 딸깍거렸다. 이제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고주파를 사용하는 스쿠버폰은 수중에서 1,200 미터 거리까지 음성으로 교신할 수 있다. 그러나 김상규 대위는 출력을 최대한 낮췄다. 이쪽의 교신이 미군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이 화물운반용 수중추진기에 올라타고 나머지 요원들은 인원 수송용 비클의 손잡이를 쥐었다. 추진기가 작동하자 한국 해군 EOD (폭발물처리반) 요원들은 추진기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수중추진기는 속도가 느리다. 겨우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목표지점까지 이동하려면 세 시간은 족히 필요했다. 그래서 그 거리까지 산소통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검은 수면 위로 잠수용수중호흡기, 애쿼렁(Aqua-lung)의 막대기들이 솟았다. 

- 8월 3일 01 : 58 부산 남동쪽 8km
깜깜한 어둠 속으로 여섯 명의 검은 그림자가 해저바닥을 더듬었다. 앞에 선 잠수부 두 명이 길쭉한 막대기를 해저면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뭔가를 수색했다.
[딥 식스! 섹터 7-2 브라보는 완료됐다.]
"O.K. 섹터 찰리로 이동한다."

 

- 마틴 메이어(Martin Mayer) 상사가 소형 폭약을 꺼내들고 작은 수중 플래시로 기뢰를 비쳤다. 부설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검회색의 그 기뢰는 표면이 매끈한 편이었다.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뢰가 침저기뢰인데, 거의 대부분이 감응기뢰이기 때문에 손으로 건드리거나 해서 폭발하는 경우는 없다. 메이어는 폭약의 시한신관을 세 시간 후로 맞췄다. 그런 다음 기뢰 아래쪽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폭약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긁어온 모래흙을 밀어 폭약이 조수에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속에서 기뢰를 수색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UDT 요원으로서는 가장 지루하고 힘든 임무였지만 EOD에게 모두 맡기기에는 폭발물처리반의 인원이 너무 부족했다. 
 

- 소해범위가 수심이 낮은 해역으로 확장되면 죽어라고 고생해야 하는 것이 수중침투 요원들이었다. 소해함과 소해헬기에서 무인소해로봇을 투입할 수도 있지만 잠수부가 들어갈 수 있는 수심이라면 사람이 직접 들어가는 쪽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었다. 
 
- [딥 식스, 딥 레드다. 섹터 7-2 찰리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딥 레드, 뭔지 확인하라!"
레드 팀장은 웬일인지 잔뜩 긴장된 목소리였다. 메이어 상사가 반사적으로 확인을 요구했지만 아마도 지나가는 상어를 발견했을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열대의 바다와 달리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무서운 백상어가 없었다. 가끔 한국 서해안에서 백상어에 의한 피해가 보고되긴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라고 작전브리핑 때 들었다. 

- 흔히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두 발 때문에 항복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종전 직전까지 일본 근해에 부설된 기뢰는 무려25,000발에 달한다. B-29 폭격기까지 동원된 대규모 기뢰부설 작전으로 일본의 항구는 운용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중국과 한국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다. 일본은 이미 각종 원자재와 식량의 수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유지할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필요 이상으로 보이는 일본의 소해전력은 기뢰로 철저히 봉쇄당했던 과거의 기억이 그만큼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 실팀을 작전에서 빼겠다는 특수전사령부의 결정을 어떻게든 돌려보려던 모블리도 실팀이 전멸했다는 말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실은 인원은 얼마 안 되지만 훈련비용이 아주 비싸게 먹힌 놈들이었다. 특수전사령부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이제 실팀은 작전에서 완전히 빠지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마지막 기뢰원인데... 제기랄!"
모블리가 허탈한 표정으로 상황판을 노려보았다. 이제 실팀은 소해작전에서 물러나고 본연의 임무인 상륙준비작전에 투입된다. 소해부대 지휘관 입장에서는 몹시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때는 일본에 해상자위대가 조직되기 전인데다 일본이 패망 후 연합군과 맺은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되기 이전이었다. 국가주권이 회복되기도 전에 일본 소해정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던 것이다.
박정석 상장은 패전국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명분을 생각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 당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원산에 두 번째 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소해전력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인민군이 인천에 대규모 기뢰를 부설하지 못한 것은 소련으로부터 제공된 기뢰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기뢰는 원산항 외곽에 5천 개가 넘게 부설됐고, 그래서 미국이 부랴부랴 일본을 끌어들인 것이다. 당시 미국 극동사령부 해군부장이 지시한 명령문은 연합군 일반명령 2호에 근거한 것이었다. 패전국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근해와 한반도 근해에 많은 양의 기뢰를 부설했는데 이 기뢰를 제거하라는 명령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원산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부설한 기뢰가 있을 리 없었다. 

- 소해함을 겨냥한 기뢰부설은 대성공이었다. 한국 해군의 신형 K-752 기뢰는 고밀도의 음향센서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음향 외에도 선체가 내는 자기장을 잡아내는 마그네틱 기폭장치, 그리고 수압의 변화를 감지하는 압력센서가 다중으로 결합된 복합감응기뢰였다. 
하나의 기뢰에 여러 가지 센서를 부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해함이 사용하는 기만장치에 반응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소해함들은 음향이나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소해구를 통해 허위신호를 보내 기뢰가 마치 진짜 목표 함정을 포착한 것처럼 착각하게만들어 폭파시킨다. 그러나 박정석 상장이 내린 명령은 다른 감응센서를 무시하고 소해함들이 사용하는 특정대역의 고주파 소나에만 반응하도록 기폭장치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기뢰의 기폭센서가 소해함이 액티브 탐신할 때마다 반응했다. 

- "절대 부산을 내줄 수 없소."
"물론입니다!"
박정석 상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경용 대령도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미국의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부산을 지킬 수 있는것은 기뢰뿐이었다. 

- 미군이 기만작전도 펼치지 않고 부산항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미군은 전차운반이 가능한 상륙 호버크래프트(LCAC)에다 30노트가 넘는 고속 상륙장갑차(AAAV)까지 갖췄기 때문에 어느 해안이든 마음대로 상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 수천 명에 불과한 상륙 제1과 부대에 한정된 수송능력일 뿐이었다. 미 육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고 각종 전차, 야포 등의 기계화장비들, 그리고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하역하려면 항만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전쟁은 항만으로 모든 병력과 물자가 하역한 다음이 진짜 시작이었다. 

- 8월 3일 13 : 31 부산 남동쪽 28km
"소해함 피해가 일곱 척이나 됩니다. 기뢰원을 전면 재수색할 때까지 소해함 투입을 중지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소해할 때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부디 전체 작전을 며칠 연기해 주십시오." 
조셉 모블리 대령이 통신기를 붙잡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기뢰원이 엉망진창으로 변했는데 소해함을 계속 투입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피해는 일본 해상자위대 쪽이 더 컸다. 하쓰시마급 소해함 네 척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미 해군이 일차 소해를 맡았고 해상자위대가 두 번째로 반복소해를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기뢰가 재부설된 지역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된 섹터 6과 7구역이었다. MH-53 소해헬리콥터가 수차례 반복 소해를 했으나 한국 해군의 기뢰들은 소해헬리콥터의 유인장치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인소해정도 마찬가지였다. 

- 소해함 두 척을 더 잃고 나서 모블리 대령이 허겁지겁 함대사령부에 작전 유보를 요청했다. 모블리는 상륙작전 전체의 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모블리는 상부로부터 싸늘한 질책만 들어야 했다. 모블리 대령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돌격소해입니까?"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8월 3일 13 : 48 부산진구 황령산
"소해함들이 다시 투입되고 있습니다."
유경용 대령이 멀티비전에 시선을 못박은 채 급박하게 보고했다. 이렇게 빨리 소해함이 재투입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상대가 미국이라 더 이상했다.
"돌격소해를 하려는 것입네다."
박정석 상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피해를 입은 미 해군 소해함들이 작전을 포기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미국 소해부대가 죽음을 무릅쓴 돌격소해를 선택한 이상 그 기대는 접어두어야 했다. 

 

- "아무래도 미군은 내일을 상륙일로 잡은 것 같소."
박정석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모한 소해작전은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미 해군 소해함들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지만 사실 부산항 내항에 부설된 기뢰는 많지 않았다. 미 해군의 봉쇄작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부산항은 통일한국 최대의 수출입 항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항에 기뢰를 부설하는 것은 통일한국으로서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한 작전이었다. 미해군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양면의 칼날과 같았다. 부산항의 항구로서의 능력을 파괴하면 그만큼 미군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울러 통일한국경제의 젖줄을 스스로 끊는 꼴이었다. 

- "상륙 호버크래프트가 맞습니다. 사령관님."
"근데 무엇을 하려는 거요? 백주에 정면상륙이라도 하겠다는 겁네까?"
"아닙니다. 저건 소해키트를 장착한 호버크래프트입니다."
유경용 대령도 호버크래프트를 이용한 소해 프로그램을 추진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LCAC 네 척이 순식간에 소해함들을 제치고 선두로 앞서나갔다.
"설마! 소해함과 동등한 능력을 갖고 있습네까?"
박정석 상장이 호버크래프트를 불안한 표정으로 노려 보았다.

- "호버크래프트에서 소해함과 같은 소나를 쓰는 것 같습니다. 기뢰들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알아차렸구만."
박정석 상장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기뢰들은 호버크래프트의 100여 미터 뒤쪽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그 정도 거리에서는 기뢰들이 호버크래프트에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 "조종기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유경용 대령이 박정석에게 물었다. 이제 남은 수단은 지휘소에서 직접 폭발을 조종할 수 있는 조종기뢰뿐이었다. 그러나 박정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종기뢰는 미군 상륙함들에게 써야 합네다."
소해함에 탐지될 염려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해함을 잡는 것은 무의미했다. 박정석 상장이 피로한 눈을 손으로 부볐다. 미군의 부산 상륙이 기정사실이 된 이상 이제는 상륙부대를 잡아야 했다. 박정석 상장은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 8월 3일 22 : 15 쓰시마 북방 40마일 해상
F117A 파일럿 제이 캠벨 소령은 다시 한 번 계기판을 확인했다. 야간작전용 고글을 통해 보이는 조종실 내부는 온통 초록빛 세상이었다.
어두운 바다 위를 오래 날다보면 종종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것이 바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은 백두산 천지에서만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이것을 비행착각이라고 한다. 비행착각에 빠지면 3,000톤이 넘는 구축함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다. 

 

- 오늘밤은 구름이 끼어 적당히 참조할 만한 지형지물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계기판을 확인하는 작업이 더욱 중요했다. 캠벨도 초보 조종사 적부터 비행교관들로부터 계기비행을 하라는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본성을 어기기는 어려웠다. 눈으로 보고 조종하는 육안비행이 인간의 본능에 훨씬 더 가까웠다.  

- 오늘밤 캠벨 소령에게 배정된 목표물은 부산시 동쪽 외곽에 위치한 대우정밀 부산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한국군이 사용하는 소총이나 기관포 등을 만드는 곳이다. 산 뒤쪽에 바짝 붙어 지어져 몇 차례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해도 제대로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다. 그래서 캠벨의 F117A 나이트 호크가 동원된 것이다.   

- 화면 아래쪽에 자막이 나왔다. 미 해군 특수부대인 SEAL 대원들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군이 미군 포로들을 고문한 것이 아니라 TV에 나오지 않기 위해 포로들이 스스로 자해했을 가능성이 컸다. 걸프전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도 스스로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는 TV 앞에 끌려나왔고, 이것을 본 미국인들 사이에 분노 여론이 끓어올랐다.
 
- 노획품을 보여주는 화면에서 캠벨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레이저 유도폭탄을 조준하는 장치가 있었다. 해군이 SEAL을 투입해 레이저 유도폭탄으로 그 공장을 파괴하려다 실패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임무가 캠벨에게 넘어온 것이다.

 

- 캠벨이 몰고 있는 나이트 호크의 폭탄창에는 GBU27 레이저 유도폭탄 두 발이 실려 있었다. GBU27은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물에 대해 관통 효과가 높은 BLU109 철갑폭탄에 레이저 유도장치와 조종날개를 결합한 것이다. 캠벨과 약간 거리를 두고 뒤에서 날아오고 있는 다른 나이트 호크에도 같은 폭탄이 실려 있었다. 캠벨이 먼저 들어가 폭탄을 투하하는 사이 뒤따라오던 동료는 표적에 레이저를 비춰줄 것이다.

- 이 나이트 호크는 조종성이 아주 나빠 기동할 때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조금만 무리한 기동을 해도 금방 실속상태에 빠진다. 일단 실속에 들어가면 기체를 원상태대로 회복시키는 것은 아주 어렵다. 생긴 모양에서 유래한 '하늘을 나는 다리미'라는 별명답게 조금만 실수해도 곧장 묵직한 다리미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방향을 북쪽으로 바꾼 캠벨은 고도를 구름이 끝나는 20,000피트까지 급격히 낮췄다. 잠시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불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차례 머리를 흔든 다음 폭격준비에 들어갔다. 

 

- 8월 4일 04 : 43 부산 남쪽 28km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별들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과 달리 아직도 시커먼 바다 위로 수많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배수량이 수만 톤에 이르는 거함 수십 척이 부산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선두를 달리는 두 척은 미 해군이 새롭게 취역시킨 산 안토니오급 도크형 상륙함이었다. 발전형 시 스패로 함대공미사일 체계를 탑재한 산 안토니오급 상륙함은 대함미사일의 위협에 대해 스스로 대처할 능력이 있었다. 대공방어능력은 오히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을 능가할 정도로, 웬만한 구축함이나 프리깃 이상의 대공 방어능력을 지닌 산 안토니오급은 상륙작전에서 최선단에 서는 상륙함이었다. 

- 다른 상륙함을 뒤로 하고 4km 가까이 앞서나간 산 안토니오급 상륙함이 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선회했다. 선체 후미에 거대한 도크가 열리고 그 안에서 수륙양용장갑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 해병대의 최신형 상륙장갑차 AAAV였다. 질서정연한 개미 떼처럼 장갑차들이 2열로 상륙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닷물에 뛰어들자마자 강력한 워터제트 추진기를 가동하며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였다. AAAV가 탑재한 2,600마력짜리 디젤엔진은 한국군이 보유한K-1 전차보다 두 배나 더 강력한 엔진이다. 머리 부분에 수면 활주를 용이하게 해주는 안정판이 펼쳐지자 AAAV는 천천히 동료 장갑차들을 기다리며 대열을 유지했다.  
이들은 미 해병 제7 연대의 최정예 선봉부대인 제3상륙돌격장갑차 대대였다. 곧 주파통제관(wave commander)이라 불리는 지휘관의 지시 아래 대열을 맞춘 제3 상륙돌격장갑차 대대의 AAAV들이 일제히 굉음을 울리며 해안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먼저 해안에서 상륙부대를 공중으로부터 엄호할 해리어 IⅡ 수직이착륙기와 AH-1W 수퍼 코브라 공격헬기들이 비행갑판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벨로 우드(Belleau Wood)와 와스프(Wasp), 펠라우(Peleliu), 타라와(Tarawa), 에섹스(Essex), 바탄(Bataan) 등은 모두 미국이 그 동안 치러온 수많은 격전지에서 이름을 딴 강습상륙함들이었다. 이들 태평양함대 소속 강습상륙함 모두가 출동했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함대 소속 강습상륙함 두 척까지 가세했다. 미 해군과 해병대가 이렇게 많은 강습상륙함을 집결시킨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이 탑재한 수직이착륙기와 공격헬기, 그리고 수송헬기를 합하면 모두 3백여 대에 가까웠다. 

- 병력수송만을 전담한 벨로 우드와 타라와에는 다른 강습상륙함갑판의 항공기와 다르게 생긴 항공기들이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송헬리콥터는 아니었다. 비스듬히 꺾인 각도로 두 개의 거대한 프로펠러가 날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굵직한 주날개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미 해병대에 새롭게 배치된 틸트 로터(Tilt Rotor) 항공기인 MV-22 오스프리(Osprey)였다. 이착륙은 헬리콥터처럼 수직으로 하지만 일단 이륙한 후에는 프로펠러의 각도를 90도로 꺾으며 고정익 항공기처럼 고속으로 비행하는 독특한 항공기였다. 

- 영도구에 위치한 고신대학은 부산항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위치에 있다. 만약 한국군 부대가 매복했다면 부산항으로 진입하게 될 상륙함들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미 해병대로서는 반드시 장악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 이어서 강습상륙함의 후미에 장착된 램프가 열리고 도크에서 호버크래프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일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제1파로 해안에 접근하는 상륙돌격장갑차들은 묵직한 외양과 달리 실은 경장갑이어서 방호력과 화력 모두 부족했다. 오스프리로 강하하는 보병대대원들도 경무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초반에 가한 충격을 이어받아 더욱 강력한 중장갑과 화력으로 해안을 휩쓸 부대가 바로 LCAC 상륙 호버크래프트였다.  
제7 해병연대 제1 전차대대의 M-1A1 중전차들이 귀한 손님처럼 LCAC의 널찍한 화물캐빈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중량이 무거운 M-1A1 전차는 LCAC에 기껏 한 대밖에 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해안에 무사히 당도하기만 하면 이들은 거의 무적이었다.  

- 이윽고 제3 경장갑정찰대대의 LAV 장갑차들도 LCAC에 곱게 실린 채로 도크형 상륙함을 빠져나왔다. 무게가 훨씬 가벼운 LAV 장갑차는 LCAC마다 4대씩 탑재되어 있었다. LCAC들이 프로펠러를 맹렬히 회전시키자 하얀 물거품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시속 40노트의 속도로 질주하는 LCAC에 탑재된 M-1A1 전차 포신이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태세로 해운대 해변을 향했다. 

-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상륙전단 소속 함정들 뒤로 또다른 LCAC 30여 척이 수평선 위로 몰려오고 있었다. 애당초 LCAC를 모두 상륙함에 탑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시모노세키에 집결해 있던 해병 제3사단 소속의 또 다른 전차대대였다. 이들은 아예 일본 본토에서 직접 발진했다. 
 
- 누군가 뒤늦게 고함을 질렀다. 이성호의 귀에 익숙한 제트엔진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짙은 회색전투기 두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F-16 전투기들이었다. F-16정비병이었던 이성호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성호가 K2 소총으로 재빨리 대공사격자세를 취했다. 두 차례 전쟁 이후 한국군 현역병들은 소총을 모두 K2로 바꿨다. K2를 든 예비군들도 이젠 흔히 볼 수 있었다. 소구경 소총탄은 현대적인 전투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 어렵다. 그러나 조종사를 겁먹게 할 수는 있다. 또 대공사격을 하는 병사들에게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줘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 천마 미사일 진지 근처에서 폭발이 몇 차례 더 일어났다. 레이더만 전문적으로 공격한다는 HARM이 틀림없었다. 천마의 레이더와 발사대는 HARM이 뿌린 막대기형 파편에 너덜너덜하게 변해 회색 연기를 내뿜었다. 이제 기지에 남은 것은 몇 안 되는 휴대용 미사일 미스트랄뿐이었다. 이성호와 김성철은 순식간에 허무하게 당해버린 대공진지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예전에 한때 유행하던 광고처럼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수송기들이 점점 다가왔다. 그런데 다가오는 C-130 수송기 두대는 동체 측면에 막대기 같은 것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성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 수송기들은 단순한 수송기가 아니라 지상제압 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AC-130H 스펙터 건십이었다. 
기지 대공포대에서 12.7mm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러나 스펙터는 어지럽게 솟구치는 예광탄의 그물 속으로 거리낌없이 들어왔다. 기체 아래에 두껍게 두른 방탄 장갑판을 단단히 믿는 게 틀림없었다. 

- "미친놈이 아니야. 저놈은 발칸포 2문, 40밀리포 1문, 105밀리포 1문을 싣고 다니는 날아다니는 요새다. 아래쪽은 장갑판으로 도배를 했을걸? 캘리버 50 따위로는 씨알도 안 먹혀."
이성호의 말에 김성철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펙터는 엄청난 화력을 지상에 퍼붓기 시작했. 20mm, 40mm, 105mm 포탄이 잇달아 지상으로 쏟아지자 잠시 후 하늘로 치솟던 대공기관총 탄막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렸다. 기지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 이성호의 진지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진지에 있던 염 준위가 빨간 확성기를 손에 들고 병사들에게 경고했다.
[바닥에 내릴 때까지 쏘지 마라! 허공에다 실탄 낭비하는 놈들은 내가 콱 조지뻘끼다! 발바닥이 닿으면 그때 쏘는 기라. 조정간이 반자동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봐라!]
낙하산으로 강하하면 착지 직후 몇 초 간은 충격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다는 사실을 기지를 방어하는 공군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염 준위는 긴장해 있는 병사들이 그 사실을 잠시라도 망각할까 봐다시 일깨워준 것이다. 

- 최초로 강하한 미군 병사는 활주로 한가운데 정확하게 착지했다. 그 미군은 교범대로 착지 순간 몸을 몇 바퀴 굴려 충격을 줄였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한국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총탄이 계속 쏟아져 축늘어진 몸이 꿈틀거렸다. 그 미군 공수부대원은 몸에 총알구멍이 너무 많아 저승에 가더라도 다른 동료들이 알아보기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다. 
미군들은 활주로 남쪽지역에 집중적으로 떨어졌다. 이성호와 김성철은 처음에는 신중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 미군들이 무더기로 떨어지자 누구를 먼저 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월남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보듯이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다. 죽든지 부상을 입든지, 아니면 다행히 살아남더라도 크나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 8월 2일에 있었던 여수 여천공단의 제철, 화학산업시설에 대한폭격에서 엄청난 양의 유독물질이 바다와 대기중으로 유출되었다. 여수, 순천, 광양 일대의 수십만 시민들이 그 유독물질 때문에심한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단지 일시적인 고통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다에 유입된 극독물이 갯벌에 쌓이고 어패류에 축적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자연과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었다. 무지막지한 환경재앙이었다. 
  
- 윤덕수를 처음 만났을 때 어느 부대 출신이냐고 송진호가 물었다. 윤덕수는 정보부대 출신이라고 짧게 대답하곤 말을 얼버무렸다. 송진호도 군인인지라 아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정보부대 출신답게 윤덕수는 확실히 아는 것이 많았다.

- 류 중사를 따라온 민간인들은 평소 해운대 주변에서 활동하던 어깨들이었다. 모두들 똑같이 오른 팔뚝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새긴 문신이 아주 인상 깊었다. 전과 때문에 병역미필인 이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탄약 추진이나 부상병 후송 등을 수행하는 임무에 투입되기로 지정되어 있었다. 우람한 체구와 근육을 자랑하는 어깨들은 밤의 유흥가에서와 달리 잔뜩 겁먹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 "탄약은?"
"어젯밤 지급받은 그대로입니다."
"좋아! 각 진지마다 배당된 수량은 두 발이다. 아껴 써라. 곧 전투가 벌어질 거 같으니까, 잘 싸우고. 몸조심해!"

- 송진호는 다가오는 연막의 제일 앞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아직 생긴 모양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달려오는 그 엄청난 속도만으로도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속 25노트로 물위를 달릴 수 있는 상륙돌격장갑차를 보유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 미국뿐이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안으로 달려오는 상륙돌격장갑차 상부에서 하얀 연막이 계속 뿜어지고 있었다. 선두 일부 차량을 제외한 후속부대는 선도부대가 만든 자욱한 연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해운대 앞바다를 온통 하얗게 뒤덮으며 다가오는 거대한 연막 덩어리에 압도된 송진호는 할 말을 잊었다. 

- "저놈들 양식장 그물에 걸리지 않을까요?"
송진호는 해운대 앞바다에 몇 겹으로 설치된 양식 그물들을 보며 윤덕수에게 물었다. 윤덕수의 대답은 송진호의 기대와는 달랐다.

"저놈아들은 보통 배들하고 추진기가 달라서 그물에 잘 안 걸린다."
늘 태평이던 윤덕수의 목소리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 "뒈지겠다! 시팔!"
갑자기 옆에 있던 윤덕수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재빨리 탄약과 총을 챙기기 시작했다. 의아해진 송진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살고 싶으믄 잔말 말고 따라온나."
"진지 이탈하면 안 됩니다!"
"죽고 싶으믄 계속 거어 있어라, 임마!"
윤덕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조선비치호텔 쪽으로 나있는 교통호를 달려갔다. 송진호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결국 장비를 챙겨 윤덕수를 따라갔다. 조선비치호텔 담장에 도달한 송진호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봤다. 불길에 휩싸인 상륙돌격장갑차 한 대가 크게 커브를 그리며 대형을 벗어나고 있었다. 토우 미사일에 당한 모양이었다. 그 복수로 수십 대의 미 해병대 장갑차들이 동백공원을 향해 일제히 기관포를 발사했다. 
자꾸 일어서려고 하는 송진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윤덕수가 말했다.
"중화기는 적 포탄을 자석같이 끌어 땡기니깐, 옆에 있다가는 뒈지기 십상인기라."

- 진지 주변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해송 가지들이 기관포탄에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진지가 엉망으로 터져 나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진지 안에 있었다면 포탄의 파편에 벌집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여기 있으면 죽겠다는 생각이 든 송진호가 몸을 움직이자 윤덕수가 다리를 잡았다. 
"어데로 가는데?"
"호텔 안으로 안 들어갈 겁니까?"
"그냥 여 있어라. 살고 싶으믄. 이 자리가 명당인기라. 내 짱박히는 솜씨를 몬 믿겠나?"
윤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텔을 향해 로켓탄이 날아왔다. 해운대 해안을 내려다보는 조선비치호텔의 아래층은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졌다. 커피숍과 식당으로 만들어진 이곳에 로켓탄수십 발이 작렬하자 유리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 수퍼 코브라 헬리콥터들이 객실을 향해 20mm 기관포를 퍼붓기 시작했다. 조선비치호텔은 해운대 해안선을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국군이 이 호텔에 중화기를 설치한다면 해안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제압사격은 아주 철저하고도 잔혹했다.

-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붉은색 신호탄이 해안선 여기 저기서 발사되었다. 그것을 신호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한국군의 화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해안 곳곳에서 소총의 발사섬광이 번쩍였다. 90mm 무반동총과 106mm 무반동포가 상륙돌격장갑차들을 노리고 발사되었다. 빠른 속도로 아래위로 출렁거리며 다가오는 상륙돌격장갑차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빗나가는 포탄들이 많았다. 그리고 기껏 명중시켜도 치명상을 입히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 위 여기저기 물기둥이 연달아 치솟아 올랐다. 


- 발사할 때 발생하는 엄청난 폭풍으로 90mm 무반동총과 106mm 무반동포의 위치는 이미 노출되었다. 미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들이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다. 30mm 기관포를 직격탄으로 얻어맞은 무반동포 탑재 지프가 순식간에 폭발을 일으켰다. 한국군 중화기 진지들을 어렵지 않게 제압한 미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들은 한국군 진지를 향해 30mm 부스마스터 II 기관포를 쏘아댔다. 동백공원의 한국군 진지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던그 지옥 같은 일제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 "햇병아리들아! 저기 남쪽 하늘을 봐라. 82공수사단 녀석들이 우리 공로를 가로채려고 날아오고 있다."
위튼이 활주로 남쪽 하늘을 가리켰다. 피즈 상병의 시선이 남쪽으로 돌아갔다. 눈에 몇 대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회색 C-130 수송기들이 착륙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주공이라고 할 수 있는 82공수사단 선봉대였다. 
"저놈들에게 공로를 뺏기고 싶은가?"

"아닙니다!"
젊은 레인저 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관제탑을 점령하러 간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가서 레인저 깃발을 꽂는 거야. 알겠나?"

- 허큘리스 수송기들은 동체에 기관총탄을 맞으면서도 그대로 강행착륙했다. 속도를 줄인 수송기가 후방 트랩 도어와 기체 측면문을 동시에 열었다. A자 두 개를 붙인 형태의 부대마크를 단 공수부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미 제18 공수군단 예하 제82공수사단 1여단 2대대 병사들이었다. 82공수사단은 일명 All Americ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오늘날 미군은 미국 내 수십 개 주에서 모인 다양한 인종의 병사들이 함께 근무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82사단처럼 여러 주 출신이 함께 근무하는 부대가 없었다. 그래서 별칭으로 All Americ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 82공수사단은 2차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활약했고, 미군이 가는 곳이라면 항상 제일 먼저 달려가는 선봉대 역할을 해온 정예부대였다. 그리고 공수사단은 일반적인 다른 사단 예하 여단들과 달리 여러 연대 예하 대대들을 뒤섞어 편성하지 않고 1개 연대 예하대대 3개만으로 여단을 편성한다. 예를 들어 제4 기계화보병사단의 경우 3여단은 8보병연대 1대대, 12보병연대 1대대, 68기갑연대 1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비해 82사단 1여단은 제504 낙하산보병연대 1, 2, 3대대 총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 활주로상에는 아직 일부 레인저들이 한국군의 화력에 밀려 꼼짝 못하고 묶여 있었다. 그들에게 40mm 유탄발사기를 장착한 82공수사단의 장갑형 험비는 구세주였다. 장갑형 험비에게는 한국군의 M-60 기관총이 먹히지 않았다. 한국군 기관총 사수가 관통 불가능한 차체 부분을 쏴대는 사이 장갑형 험비가 유탄을 퍼부어 기관총 진지를 제압해버렸다. 
진지를 제압한 장갑형 험비들은 두세 대씩 조를 짠 뒤 활주로 옆풀밭을 가로질러 관제탑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82공수사단 1여단 병사들과 75레인저연대 1대대 병사들이 한데 뒤섞여 따라갔다. 

 

- 유경용 대령이 혀를 내둘렀다. 선두에 선 상륙함 두 척은 뉴포트(Newport)급 상륙함이었다. 만재배수량 8,500여 톤의 뉴포트급 상륙함은 각종 장갑차, 트럭, 그리고 전차를 2,000톤이나 탑재할 수 있다. 특히 하부갑판에는 M-1A1 전차 20여 대가 수납된다. 제대로 명중시키기만 하면 기계화대대 1개 정도는 그대로 수장시킬 수 있었다. 로로(RoRo)선은 각종 전차와 장갑차, 트럭 등을 싣고 직접 항구에 접안해서 하역할 수 있는 수송선이다. 탑재된 차량들은 스스로 배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므로 신속하게 하역을 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저 로로선을 먼저 보내버리시요. 가루로 만들어버리시오!"
박정석 상장이 나직하지만 강하게 명령했다. 박정석은 로로선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만재톤수가 5만 톤은 족히 됨직한 그 로로선은 당당하게 부산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소해가 완벽하게 마쳐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형 수송함이 들어오는 일은 무모하다 못해 한국 해군을 깔보는 행동이었다. 마치 박정석 자신이 수모를 당한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발사반! 로로에 두 발, 나머지는 뉴포트급 상륙함을 조준하라!"

- 러시아는 어찌된 셈인지 한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아낸 이후 한국에 스퀄을 더 이상 수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컬은 자체유도 기능이 없는 어뢰였다. 시속 200노트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어뢰는 그 속도 때문에 적합한 유도장치가 미처 개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근거리라면 상관없었다. 200노트의 초고속은 표적이 미처 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 스크루로 추진되는 일반 어뢰의 최고속도는 60~70노트이다. 미국 해군 잠수함이 사용하는 어뢰인 마크48 ADCAP도 최고속도는 65노트 정도에 불과하다. 대기중과는 달리 물 속에서는 마찰저항이 큰데다 일정 속도 이상에서는 스크루가 와류에 싸여 헛돌면서 생기는 추력 손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퀄은 스크루 대신 고체연료 로켓을 사용하는 어뢰였다. 어뢰가 아니라 오히려 수중 로켓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렸다. 물과의 마찰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체로켓 분출구의 일부가 어뢰의 머리 쪽을 향해 있고, 스퀄은 추진중에 이곳으로도 강한 압력의 가스를 뿜어낸다. 이렇게 하면 어뢰 본체와 물 사이에 기포막이 형성되고 스퀄은 물 속에 뚫린 공기의 터널을 비행하듯이 초고속을 내는 것이다.  

- 어뢰가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던 박정석이 나머지 조종기뢰들을 대기시켰다. 스퀄이 명중하고 나면 나머지 기뢰들도 폭발시킬 작정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조종기뢰원은 발각되면 우회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뉴포트급 상륙함과 로로선에서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남아 있던 30여 발의 기뢰가 일제히 폭발했다. 부산항 앞에서 엄청난 물기둥이 줄줄이 치솟아올랐다. 로로선의 뒤를 따르던 소해함 두 척과 도크형 상륙함 한 척이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유경용 대령과 사령실 요원들이 일제히 환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박정석 상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손에 쥔 마지막 카드를 다 써버린 셈이었다. 

- 8월 4일 08 : 31 부산 남동쪽 14km
"맙소사! 프레스노 래신이 한 방에 날아가다니! 대단하군. 200노트짜리 어뢰라니..."
설마 했지만 엄청난 위력 앞에서 모블리 대령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스퀄을 얻어맞은 뉴포트급 상륙함 두 척은 단박에 침몰해버렸다. 그리고 두 발을 얻어맞은 로로선 캘러헌(Callaghan)은 선체 하부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골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부산항의 수심이 20여 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해저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은 캘러헌의 함교뿐이었다. 
"포트 매킨리가 조종기뢰를 얻어맞았습니다. 우현 쪽으로 침수가 심하다고 합니다만 접안시킬 수는 있답니다. 그리고 오스프리가 접근중에 기뢰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치명상은 아닙니다."
모블리 대령이 고개를 끄떡였다. 도크형 상륙함 포트 매킨리는 다행히 침몰하지 않았다.

- "조종기뢰원은 다 파악됐나?" 
"그렇습니다. 소해함들이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있지만 더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뢰의 폭발 밀도로 볼 때 동시에 터뜨린 것같습니다."
모블리 대령은 이제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수송함 세 척이 당했지만 그 속에는 함교에 있던 수병 몇 명을 빼고는 병력도, 장비도, 아무것도 없었다. 프레스노(Fresno)와 래신(Racine)은뉴포트급 전차상륙함이다. 그러나 퇴역한 지 오래 됐고, 그나마 예비역에서도 해제된 장기보관함이었다. 
"좋아.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해안으로부터의 산발적인 공격은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근접항공지원은 부산항 내항을 소해하는 우리 함정을 위해 최우선으로 배당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항으로 상륙함들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하역을 마치는가에 달려 있었다. 부산항 시가지와 부두 곳곳에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적 해안을 눈앞에 두고 소해작전을 펼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청소의 마지막 단계였다. 모블리 대령은 해군과 해병항공대가 제대로활약하기만을 기대했다.

- 8월 4일 09 : 54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황령산 
"이제 퇴각하셔야 합니다. 사령관님!" 
요원들이 빠져나간 텅 빈 지휘실에서 유경용 대령이 박정석 상장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사령관은 요지부동이었다. 미 해군 수송함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내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침몰한 수송함 세 척을 구조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박정석 상장이 묘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침몰선 주위에 구조선이 왜 없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해답은 뻔했지만 박정석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피땀 흘려가며 지켜온 조종기뢰원이었다. 허망한 결과가 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사령관님! 미군 포위망이 좁혀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다가는 포로가 되고 맙니다!"

- 유경용 대령이 애원조로 거듭 박정석을 재촉했다. 그러나 사령관의 시선은 모니터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래 남갔소. 유 대령 동지는 부하들을 수습해서 어서 퇴각하시라요."
"사령관님!"
박정석이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편안해 보였다.

- "쉬고 싶으신 겁니까? 사령관님."
"뭐요?"
유경용 대령은 박정석 상장을 힐난하고 있었다. 상관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 어투에는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것을 못 알아차릴 박정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정석은 애써 외면했다. 
 
- "이곳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 사령관님의 태도는 국가의 위기를 방관하는 중대한 직무유기입니다. 저는 지휘관으로서 제 상급자인 사령관님이 미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면 사령관님을 사살하겠습니다."
유경용 대령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운지 말을 더듬거렸다. 박정석 상장의 시선이 유경의 두 눈을 향했다. 아주 잠깐 동안 사령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표정은 점점 굳어지며 일그러졌다. 부릅뜬 박정석 상장의 두 눈이반짝이더니 곧 양 볼로 두 줄기 투명한 눈물을 쏟아냈다. 

 

- 표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늘어났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점점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현재까지 발사된 탄도탄 수는 총 26발입니다."
"어느 놈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영리한 녀석이군."
화면을 보던 도런 준장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궤도 특성이 각각 다른 두 미사일이 시간차를 두고 발사되었지만 낙하지역으로예상되는 낙동강 하구 지역에는 거의 동시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공격하는 한국군 입장에서는 최대한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지만 방어하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모든 능력을 한순간에 총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도런 준장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도런 준장의 휘하에는 이지스 순양함과 구축함이 열두 척이나 있고 모두 TMD 능력을가진 최신형 이지스함들이었다. 

- 전역미사일 방어계획(TMD)은 북한이나 이란, 이라크 등 반미국가들이 탄도탄 제조능력을 갖춤으로서 해외에 전개된 미군과 친미국가들이 받을지 모르는 위협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되었다. 그간 숱한 시험사격 실패로 계획 자체가 위험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군수업체들이 강력한 로비로 무마해 결국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자동 대응 모드로 전환하라!"
도 준장의 명령에 오퍼레이터가 복창하면서 콘솔을 조작했다. 이제 지휘하는 도런 준장도, 장비를 가동시키는 오퍼레이터들도 한발 물러나 관전하는 입장이 되었다. 전투는 컴퓨터가 하고 있었다. 

- 이지스 구축함 윈스턴 처칠에서 스탠더드 SM-3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개발 당시에 SM-2 블록 IVA라는 코드였으나 완전한 신형미사일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형식명이 부여된 것이다. 전방 발사관에서 잇달아 발사된 SM-3 미사일이 내뿜는 화염과연기 때문에 윈스턴 처칠의 함교에서는 밖을 내다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모든 위험이 레이더로 관측되는 처칠함에서 굳이 바깥을 볼 필요는 없었다. 발사된 스탠더드 미사일들이 까마득한 고공을 향해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끝없이 솟구쳤다. 


- 이지스함은 일단 미사일을 발사해 놓고 나서 대응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스탠더드 미사일이 상승하는 사이 지휘함 윈스턴 처칠의 수퍼 컴퓨터가 각 함정들의 위치와 노동미사일의 궤도를 파악한 다음 요격에 적합한 함정을 추려냈다. 이지스함은 자기가 발사한 미사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함정이 발사한 미사일도 관제할 수 있다. 처칠함의 수퍼 컴퓨터는 접근하는 노동미사일의 위협 정도를 평가하고 순식간에 공격 순서를 결정한 다음 각각 할당된 목표를향해 스탠더드 미사일을 유도했다.

 

- 스탠더드 SM-3 미사일은 SM-2와는 완전히 별개의 미사일이다. 대기권 외로 날아드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때는 세미 액티브 유도방식이 필요 없었다. 스탠더드 SM-3 미사일은 오직 목표지시기에 의지한 지령유도 방식으로 노동미사일을 향했다. 1단 로켓 부스터가 잠시 후 떨어져나가자 본체는 더욱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사 후 약 110초가 지나자 2단 로켓이 분리되고 3단 로켓이 점화되었다. 

 

- 3단 로켓이 점화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사일 제일 앞부분에 위치한 KKV의 적외선 탐지장치를 덮고 있던 노즈 콘(Nose cone)이 떨어져 나가면서 적외선 시커가 표적을 찾기 시작했다. KKV는 충돌에너지 운반체로서 kinetic energy vehicle의 약자이다. KKV는 표적을 탐지하는 데 적외선 탐지장치를 사용한다. 그런데 미사일이 대기권 내를 고속으로 비행할 때는 목표탐지가 불가능하다. 적외선 시커가 배경 하늘과 목표의 온도차를 정밀하게 감지해야 하는데 공기에 의해 적외선 시커가 심하게 가열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공으로 올라가면 공기가 희박해져 공기에 의한 가열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KKV 앞부분에 장착된 적외선 시커가 목표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SM-3 미사일의 앞부분인 LEAP 본체가 검은 우주를 날았다. LEAP는 Light-weight ExoAtmospeheric Projectile의 약자이다. SM-3 미사일에서 부스터가 떨어지고 2단 로켓이 떨어진 다음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LEAP이고, 추진이나 궤도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KKV는 LEAP를 파괴방식으로 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LEAP는 마지막 유도단계에서 각 미사일이 독립적으로 표적을 찾기 때문에 서로 중복된 표적을 공격하지 않도록 중간 유도 단계에서부터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과정은 모두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 발사 후 약 150초가 지나자 LEAP 탄두가 분리되었다. 정밀한 자세제어 모터로 탄도탄의 낙하궤도와 탄두의 비행궤도를 일치시킨 KKV는 초속 2.7km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로 노동미사일을 향해 날아갔다. 노동미사일 역시 비슷한 속도로 정면에서 날아왔다. 
지상 135킬로미터 상공에서 KKV는 노동미사일의 탄체 중심부를 그대로 관통해 들어가 후방으로 뚫고 나왔다. 순간 그 엄청난 충격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한 노동미사일의 탄두가 폭발하고 미사일 본체는 산산조각이 났다. 

 

- 8월 4일 17 : 15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
"윤 선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이렇게 도망만 다닌다고 문제가 해결될 거 같습니까?"
등뒤에서 들려온 말에 윤덕수가 발걸음을 멈추며 되돌아섰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한차례 훔친 윤덕수는 그 동안 꾹 다문 입술을 열었다. 송진호가 비난의 눈초리를 그에게 퍼붓고 있었다. 
"뭐가 부끄럽노? 남들이 머라 칸다고 해서 내가 눈썹이라도 까딱할 줄 아나? 그런 새끼들은 남 비난할 줄만 알지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놈들이다. 입만 산 놈들이 나중에 딴소리하는 기라. 나는 그래도 할 만큼 하고 도망댕긴다. 전쟁에서는 살아남는 놈이 장땡인기라. 죽은 놈만 억울하제." 

- 길벗슨 하시는 눈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한국군은 길가의 육교란 육교는 모두 쓰러뜨려 미군 전차대의 진격을 방해했다.
도로 위에 쓰러진 육교의 높이는 전차가 타고 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쓰러진 육교를 넘어갈 때 M-1A1전차의 취약부분인 포탑 상부와 차체 하부가 전방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때 사방에서 대전차로켓탄이 날아왔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전차의 하부장갑과 상부장갑은 의외로 얇다. 이 부분에 대전차병기를 맞을 경우 격파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찰리 중대의 M-1A1 2대가 포탑 상부와 차체 아래쪽에 한국군의 대전차로켓을 맞고 격파당했다. 

- 해병대원들로부터 안전하다는 통고를 받은 다음에야 길벗슨 하사는 전차를 천천히 전진시켰다. 육중한 전차는 터빈 소리를 높이면서 천천히 쓰러진 육교 위로 올라섰다. 막 내려가려는 순간 M-1A1의 포수 조준경에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길벗슨이 급히 초점을 맞췄다. 250미터 정도 떨어진 길모퉁이에 나타난 납작한 전차 형상은 시뮬레이터 훈련 때 자주 봤던 한국군 K-1 전차의 바로 그것이었다. 길벗슨과 포수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이 터졌다. 
"전차다!"

- 폭발음과 함께 길벗슨의 전차 포탑 후방에서 엄청난 폭풍이 하늘로 솟구쳤다. 강렬한 폭음이 승무원들의 청각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다. 해치가 열려 있어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길벗슨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충격에 하론 소화기가 자동으로 작동했다. 하얀 기체가 전차 내부에 가득 찼다. 분자식이 CF3Br인 하론은 원래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 그래서 하론 가스가 분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흰색 색소를 첨가한다. 하론은 이산화탄소의 세 배나 되는 강력한 소화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공기보다 다섯 배 무거워 구석구석 잘 침투하며 찌꺼기가 남지 않기 때문에 민감한 전자장비 등에서 발생한 불을 끄기에 적합하다. 


- 길벗슨은 충격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본능적으로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아직 차내에서는 하론 가스의 분출이 계속되고 있었다.
길벗슨은 포탑 후방부의 탄약적재공간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방에서 날아온 포탄이 아니라 후방에서 날아온 포탄에 맞은 것이다. M-1A1 전차 탄약적재 공간이 폭발하면 포탑 내부와 연결되는 문이 자동적으로 폐쇄된다. 그래서 탄약이 폭발해도 승무원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 한국군은 지금까지 근접신관이 장착된 포탄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해병대를 따라다니는 일부 장갑차량은 근접신관을 무력화시키는 AN/VLQ-11 Shortstop 전자방호장비를 차체 위에 장착하고 있었다. 이 장비는 강력한 전파를 발신해 날아오는 포탄에 장착된 근접신관을 조기에 작동시킨다. 예를 들면 원래 지상 10미터 정도에서 폭발하도록 조정된 탄두인데도 전자방호장비 주변에서는 수백 미터 고공에서 폭발하게 된다. 포격의 효과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다. 

 


 

 

- 8월 4일 17 : 10 멕시코 마타모로스 [한국시간 8월 5일 09 : 10] 
허름한 교외 모텔이지만 TV는 제대로 나왔다. 미국 위성TV 뉴스 채널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한국에서의 전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전투기가 한국군 방어선에 폭탄을 퍼붓는 장면과 이지스함이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장면은 이미 지나갔다. 지금은 종합적인 전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부산 지도에서 미국이 점령한 곳은 파란색, 한국군이 방어하는구역은 빨간색, 접전중인 지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전자오락 같았다. 오성환 대령이 씁쓸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주 박살났습니다."
소파에 앉은 차영진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성윤 대위가 탁자 위에 노트북 컴퓨터를 펼친 채 인터넷에 접속해 뭔가를 찾고 있었다.
원래 명령은 매시 정각 5분 전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성윤이 조금 전에 이미 아무것도 없다고 확인했지만 차영진은 그 사이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성윤은 10분 만에 세 번째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홱 돌린 오성윤의 음성이 잔뜩 떨렸다. 
"떴습니다!"
차영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에 뜬 것은 미국 미식축구팀, 마이애미 돌핀스의 공식사이트였다. 아직 본격적인 시즌 전이라 그런지 다른 스포츠 사이트에 비해 썰렁한 편이었다. 그런데팬 페이지(Fan page)에 올라온 여러 글들 가운데 특이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 Captain Morgan. 캡틴 드레이크처럼 17세기에 카리브해를 주름잡았던 영국 해적이며, 파나마 시를 초토화시켰던 인물이다. 계속된 영국 해적의 출몰 때문에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수탈한 산물을멀리 남미대륙 끝을 돌아 본국으로 운송해야 했다. 오성윤이 캡틴 모건이라는 별명으로 올린 사람의 글을 클릭했다. 그런데 영어로 된 그 글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다른 미식축구팀을 일방적으로 깔보는, 팬 페이지에 흔히 올라오는 글이었다. 그 글에는 가벼운 욕설이 섞여 있고, 맨 마지막 문장은 쉬프트 키를 안 눌렀는지 느낌표를 써야 할 곳에 숫자 1로 잘못 찍힌 경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온통 오타 투성이라서 정신 산만한 사람이나 어린애가 올린 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성윤이 노트북의 터치 패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각 문장 마지막 단어의 끝 글자를 마우스 포인트로 콕콕 찍었다. 'TONGAEA ACT1'이었다.
 
- 차영진은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보았다. 통일참모본부에서 미주원정군, 즉 America Expedition Army에 보내는 제 1명령이라는 뜻이었다. 통일참모본부는 대담하게도 미국 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차영진의 미주원정군에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암호명을 쓰지도 않고 그대로 약자를 썼다. 차영진은 원래 통신에서 영어 약자를 쓰는 것에 반대했다. 미국이 쉽게 알아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한글이나 다른 문자를 쓸 경우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커지는 문제가 생긴다.
"드디어 빈집털이 작전의 개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오성환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ACT1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미국 진공을 명령하는 암호문이었다. 그러나 차영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성환 대령은 차영진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 그러나 한국군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국군 보병들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대공미사일 팀을 매복시킨 것이다. 휴대용 미사일은 스팅어와 미스트랄, 스타버스트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발사 가능한 것은 모조리 투입되었다. 근처에 배치된 사격조는 최소한 2개 팀이 넘었다. 그러나 극심한 전파방해 때문인지 서로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다. 숨어 있다가 미군 저격수에게 들켜 총을 맞고 죽었는지도 몰랐다. 


- 황동문은 한 손에 쌍안경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긴 고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 수통에 든 물을 빨아 마셨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통을 높이 들어 물을 마시는 것은 날 쏴달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위장포로 덮여 있었지만 수통 속에 든 물은 어느새 뜨끈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물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 금방 쪼르륵 소리가 나면서 더 이상 빨리지 않았다. 황동문이 물고 있던 빨대를 내뱉은 다음 계속 주변 건물들을 살폈다. 눈 아래 멀리 보이는 빌딩들 사이로 잠시 미군 보병이나 전차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금방 사라졌다. 

 

- 모습을 조금이라도 노출시키면 언제 어느 곳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랐다. 미군 저격수들은 자기들이 점령한 빌딩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한국군 병사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명중시켰다. 특히 기관총 사수나 대전차로켓 사수 같은 중화기를 담당하는 병사들은 저격 목표 1순위였다. 박격포를 유도하는 관측병도 곧잘 저격당했다. 대로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폭발음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이어졌다. 

- 땀이 고여 가려운 사타구니를 벅벅 긁던 황동문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쌍안경을 돌렸다. 쌍안경 안에 잡힌 헬리콥터는 아파치였다. 편대를 이룬 아파치 네 대가 저 멀리 자성대 공원 방면에서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시가전 화력지원이 임무인 모양인지 대전차용 무장인 헬파이어 미사일은 보이지 않았다. 공격헬기의 날개 아래에 로켓탄만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러나 황동문에게는 그게 더 무서웠다. 

 

- "온다! 아파치다!"
"준비됐습니다!”
황동문의 고함에 옥상 저편에서 회색 위장포를 뒤집어쓰고 있던 스타버스트 사수 이태진 하사가 악을 쓰며 대답했다. 위장포속이 찜통 같아서 그 동안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 여러 대가 제대로 대형을 만들어 날아가는 공격 헬리콥터들을 함부로 공격하다가는 한 대도 잡지 못하고 이쪽이 당할 수가 있다. 서로 간의 팀워크를 강조하는 미군 공격헬기들은 철저히 동료 헬리콥터의 엄호 아래 움직인다. 헬리콥터 한 대에만 신경 쓰다가는 등뒤로 돌아오는 다른 헬리콥터에 당하기 일쑤였다.  
황동문은 미군 아파치들이 편대를 풀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평화시장 건물 근처에 이르자 아파치들이 두 대씩 두 개로 분리되면서 한 개 편대가 전포동 산기슭을 향해 날아갔다. 나머지 두 대는 범천 로터리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 "표적은 이제 효성빌딩을 넘어가는 저놈! 뒤에 처진 놈이다. 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타버스트 미사일이 발사관을 빠져나왔다. 스타버스트는 조준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적외선 유도방식과 달리 즉시 발사가 가능한 레이저 유도방식 미사일이다. 레이저 유도방식은 적외선 유도방식에 비해 목표로부터 시도되는 각종 방해에 더 강하다. 그러나 사수가 끝까지 레이저를 조준해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만큼 발사 후 즉시 도주할 수 있는 적외선 유도방식에 비해 사수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 발사된 스타버스트가 옅은 회색 연기를 뿜으며 아파치의 조종석 부분에서 반사되는 레이저를 따라 날아갔다. 표적이 된 아파치는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듯, 급선회하며 반쯤 부서진 빌딩들 사이로 숨으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짧았다. 급선회하는 아파치의 조종석에 스타버스트가 작렬했다. 미사일을 맞은 아파치는 근처에 있는 금성제분 공장 지붕으로 추락하면서 불기둥을 위로 뿜어올렸다.

- 8월 5일 15 : 20 부산광역시 동래구
오후가 되자 거리 전체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과 군데군데 구멍이 팬 아스팔트 도로가 햇빛에 뜨겁게 달아올라 열기를 내뿜었다. 그 위에 미군 헬기와 전투기들이 내는 요란한 소음이 부산 전체를 마치 한여름의 도로 공사장처럼 만들어놓았다. 
미군은 도시의 열기를 충분히 활용했다. 공격 선봉을 맡은 미군 아파치 헬리콥터들은 뜨거운 건물 지붕이나 벽에 바짝 붙어 비행했다. 그래서 한국군이 발사한 휴대용 열추적 미사일이 헬기를 포착해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온천 2동 일대에서 대공미사일 팀 두 개가 거둔 전과는 미스트랄 다섯 발을 쏴서 아파치 한 대를 불시착시킨 것이 전부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발견하면 곧바로 쏴버릴 수 있는 구식 중기관총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다. 

- 12.7밀리 중기관총은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이 상당히 우수하다. 그 장점을 살려 1982년 벌어진 포클랜드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은 12.7 밀리 중기관총을 저격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당시 포클랜드의 고원지대에는 제대로 된 엄폐물이 없었다. 또 아르헨티나군이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헬리콥터를 이용해 병력을 투입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군은 까마득한 고원 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군 진지를 향해 완전히 노출된 채로 전진해야 했다. 
그런 영국군을 향해 아르헨티나군은 중기관총을 한 발씩 쏴서 저지시켰다. 제대로 맞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근처에 총탄이 한 발만 떨어져도 공격하던 영국군 전체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기 때문에 진격을 저지시키는 효과는 충분했다. 

- 진선엽의 중기관총 팀은 계단 바로 옆집으로 들어갔다. 피난간집인데 미리 문을 부숴놓아 제3예비진지로 예정된 곳이었다. 세 사람은 가구들을 모아 거실 창가에 쌓기 시작했다. 중기관총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총탄은 막을 수 없지만 제대로만 쌓으면 5.56밀리 구경 소총탄 정도는 막을 수가 있다. 병사들이 이불, 침대 매트리스, 소파, 쿠션 등을 가리지 않고 마구 쌓았다.

- 창 밖으로 보이는 온천천 건너편 수안동에서 총소리와 폭음이 계속 울렸다. 그쪽은 중대가 담당하는 지역이었다. 박격포탄이 낙하할 때 생기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전차포 소리로 짐작되는 강렬한 포성도 이따금씩 들렸다. 안락로터리 일대까지 진출한 미군과 방어하는 한국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장소에는 헬리콥터가 나타나지 않았다. 또 헬리콥터가 나타난 장소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군은 포와헬리콥터를 철저히 분리시켜 운용했다. 한국군 역시 헬리콥터를 운용한다면 그런 원칙을 지켰을 것이다. 

- 거대도시가 단 이틀 만에 미군 수중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모두들도 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미군은 아직 부대 전개를 마치지 않았다. 실제로 전투 투입이 가능한 부대는 해병대와 육군을 모두 합쳐 2개 사단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지상군 부대는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몇 개 군단에 해당하는 부산지역 예비군들과 현역병사들이 미군의 공세에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어이없이 무너졌다. 

- 이종식 차수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한쪽 벽에는 대구지역의 제1야전군 사령관 조영식 대장이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력과 통신 시설이 엉망이 되었지만 군용으로 만들어진 특수 광케이블망은 아직 건재했다. 그 회선을 이용해 지금 통참과 제1야전군 사이에서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장 내에 있는 장성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종식 차수가 화면에 나온 조영식 대장을 바라봤다.
 
-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이 100%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장악 당했기 때문에 적시에 예비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대상륙작전의 핵심전력인 기갑여단 역시 상륙지점에 가까이 있었습니다만, 아주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공습으로 사실상 전멸당했습니다.] 
속이 타는지 조영식 대장이 탁자에 놓인 물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대상륙작전의 핵심이 될 기갑여단의 위치 선정을 두고 통참과 1야전군 사령부는 두 달 전부터 갑론을박을 벌였다. 1야전군 사령부는 해안선에 전진배치하겠다고 했고 통참에서는 해안 후방지역에 배치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양자 모두 이론적으로 틀린 것은 없었다. 기갑부대를 해안지대에 배치하면 적을 해상이나 해안에서 미리 격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사전에 위치가 탐지되어 적이 상륙도 하기 전에 무력화될 가능성도 컸다. 그런데 후방배치 역시 제공권이 넘어간 상황에서는 이동 중에 도로에서 격파당할 가능성이 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방어측인 독일군의 기갑부대 위치 선정문제에서 롬멜이 꼭 옳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 남부지역을 담당하는 1야전군 예하에는 2개 기갑여단과 보병사단 소속 전차대대 등 총 500여 대에 이르는 전차가 있었다. 그중에 부산 인근에 배치된 전차는 2개 기갑여단을 포함해 총 300대가 넘었다. 그 정도라면 미군을 해안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사전에 계획한 대로만 된다면 역사상 그 어떤 전쟁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 조영식 대장은 100여 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한 기갑여단을 각각기장과 김해 일대에 배치했다. 부산 시내에는 전차 100여 대를 동시에 수용할 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장은 해운대와 거리가 가까웠다. 그리고 기장 해안이 미군의 상륙예상지역 중 하나여서 해안선에서 대응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상륙전이 임박해서 기갑여단이 해운대 해안을 향해 기동하기 시작할 때쯤엔 대부분의 기동로가 미군에 의해 막혀 있었다. 도로 주변주요 고지들은 미군 헬리콥터 기동부대가 점령하고 대전차 무기를 깔아두고 있었다. 차량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좁은 산길 주변에도 시한장치가 붙은 대전차 지뢰가 대량으로 살포되어 있었다. 움직임을 철저히 제한당한 한국군 기갑여단 은미군 공격용 헬리콥터와 근접지원기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격파되었다. 

- [지휘통신체계 역시 외부의 방해와 공격에 취약했습니다. 우리 지휘통신망에 미군이 끼여들어 허위정보와 가짜 명령을 퍼뜨리는 바람에 일선 부대에 심각한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회의실 내에 있는 장성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통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폭격에 근근히 유지되는 통참의 지휘통신망 역시 시도때도 없이 국적 불명의 해커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다.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보안장치로 겨우겨우 막아내고는 있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 뚫려버릴지 모를 상황이었다. 

 

- "가장 부족한 것은 뭐요?"
조영식 대장이 입을 닫자 이종식 차수가 질문을 던졌다.
[적 지상지원 항공부대를 봉쇄할 수 있을 만한 방공전력, 그리고 적 전차를 저지할 만한 강력한 대전차무기입니다. 병력은 충분합니다만, 적에게 효과가 있는 무기는 크게 부족합니다.] 

- 조영식 대장이 다시 물컵을 들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장내의 누구도 조영식 대장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들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영식 대장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비행기가 발명된 이후 제공권을 상대에게 완전히 빼앗긴 채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베트남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트남 역시 미군이 스스로 팔다리를 옭아매는 이상한 전쟁원칙을 지킨 탓에 가능했다.

 

- 그러나 1990년에 벌어진 걸프전에서는 야전군을 항공전력만으로 거의 무력화시켰다. 1999년의 유고 공습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공전력만으로 끝장을 봤다. 항공전력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 빈 잔을 내려놓은 조영식 대장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장병들은 한두 번 정도는 용감하게 미군에게 저항을 합니다.그러나 그 어떤 공격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조영식 대장은 말을 거듭할수록 점점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일선의 야전군사령관으로서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부대가 없다는 데대한 무력감이 평정을 잃게 만든 것 같았다. 

- [방금 지휘소 근처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습니다. 주 회선이 파괴되어 예비회선으로 바꿨습니다.]
조영식 대장은 의외로 침착한 모습이었다. 이종식 차수는 길게 이야기를 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이쪽에서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조금 전 화면으로 이미 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파악했다. 지금은 야전군 사령관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이종식은 전에 체첸 대통령이 이동전화 통화중에 위치가 노출되어 러시아군의 폭격에 죽은 것을 떠올렸다.
"통참에서 만족할 만한 지원을 못해주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오. 조 대장 동지가 어떤 상황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소. 그 누구도 장군의 지휘에 대해 비난할 사람은 없습네다. 다만, 이 땅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최선을 다해달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소. 더 이상 긴 이야기는 못할 테니 이만 합시다." 
 
- "심현식 중장 동지! 어드렇게 되고 있습네까?"
박정석 상장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심현식은 무척 쑥스러운지 대답을 망설였다.
"그게... 예. 작전은 이미 개시됐습니다."
다른 참모들도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 큰 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작전이었다. 인민군식 전술같아 심현식이 망설였는데 박정석이 휘하 병력을 내주면서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심현식은 그것이 더 창피했다.  
 
- 8월 5일 17 : 12 전남 여수시 금오도 서쪽 3km
"응답이 없습니다.”
통신관의 보고를 접으며 이승렬이 힘에 겨운 듯 잠망경에 기대섰다. 서쪽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잠수함지휘권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응답은커녕 잠수함지휘권자와의 통신 자체가 되지 않았다. 남해도를 경계로 대한해협 쪽으로는 미 해군의 압도적인 대잠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방어선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남해바다는 미 해군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이억기함은 쫓기듯이 계속 서쪽으로 밀려나야 했다. 한국 해군 잠수함 승무원으로서 실로 분통 터질 일이었다. 

 

- "음탐실입니다. 방위 백구십오(1-9-5)도, 미식별 접촉물입니다! 추정거리 5천 미터, 아니! 하나가 아닙니다.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전관, 공격대기해!"
이승렬 중령이 바짝 긴장했다. 언제 어디서 미 해군 구축함이 달려들지 몰랐다. 사방이 미 해군 전투함에다가 대잠초계기 천지였다. 그리고 다도해 섬그늘 어딘가에는 미국 핵잠수함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수중 노이즈입니다. 잠수함입니다!"
"제기랄! 양키 공격원잠들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작전관, 급속발사 준비!"
"옛! 알겠습니다!"

- 뜻밖이었다. 지금 이억기함이 숨어 있는 금오도 해상은 양식어장이 밀집한 지역이라 자칫 어구에 휘말려 좌초될 수도 있었다. 미군의 대형 공격원잠이라면 이억기함보다 훨씬 제약이 많았다. 실제로 근해에서 잠수함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어선과 그물이다. 스크루에 그물이 감겨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수천 톤짜리 대형 잠수함도 당장 행동불능에 빠진다. 특히 상대가 대형 트롤어선인 경우,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내는 저인망을 잠수함이 피해 다녀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벌어진다. 

 

-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미식별 접촉물을 탐지했습니다!"
“젠장! 뭐가 이렇게 많아!"
이승렬 중령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공격해도 시원찮았지만 상대방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함장님. 이상합니다. 공격원잠들은 저렇게 떼지어 다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음탐장! 음문은 분석됐나?"
부장 김창규 소령이 함장에게 말하다 말고 음탐장에게 질문했다. 음문을 확인할 수 있으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음탐장이 여러 개의 음문을 동시에 분석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구역에 출현하는 모든 잠수함은 우군이 아닐세. 자칫 선수를 놓쳤다간 우리가 당한다."

- 수중에서 잠수함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피아(彼我)를 식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쪽이 상대방을 식별하느라고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적 잠수함이 어뢰를 먼저 발사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나라 해군이든 잠수함을 작전 배치할 때는 구역을 명확히 지정하고 해당 잠수함이 그 구역 내에서만 작전하도록 전술을 짜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해역으로 출현하는 잠수함은 모두 적 잠수함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 그 개념이 바로 수중공간관리(Water Space Management)이다. 그런데 한 구역 내에 있는 잠수함에게 이렇게 호전적인 작전권을 부여하면 우군과 오인공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구역에 절대로 두 척 이상의 잠수함을 배치하지 않으며, 잠수함이 이동할 때도 같은 시간에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한다. 만약 불가피할 경우에는 잠수함 두 척의 운행심도를 다르게 해서 우군간에 교전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수도 있다. 전시에 잠수함이 마주치면 먼저 발견한 쪽이 공격하는 것이 당연했다. 

-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이승렬이 점점 또렷해지는 휘점들을 노려보았다. 그때 음탐장이 끼여들었다.
"함장님. 전기모터로 추진중인 것 같습니다. 매우 조용한 편입니다. 원잠의 추진 특성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 우군이란 말인가?"
이승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군이 통과한다는 보고를 전혀 받지 못했던 까닭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지금 잠수함지휘권자와의 통신이 여의치 못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아군일 수도 있었다. 

 

- "함장님. 음문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목표 2는 돌고래급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척은 상어급입니다."
"뭐야? 돌고래급이라고?"
돌고래급은 한국 해군이 209급 잠수함인 장보고급을 들여오기 이전에 비밀리에 운용했던 소형 잠수정이었다. 배수량은 불과 175톤에 불과하고 주로 특수작전에 사용된다. 

- "작전관! 공격을 취소한다. 우군 잠수함이다."
"동쪽으로 저렇게 떼거지로 몰려가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저러다간 다 죽을 겁니다."
김창규 소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 잠수함대가 미 해군의 대잠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닷속에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잠수함들이 계속 줄을 잇고 있었다. 
"그래. 맞아. 저들은 죽으러 가는 거라네."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지원을 해야 합니다."
김창규 소령이 소리를 높였다. 그도 돌고래급 잠수함에서 초임장교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주력 잠수함인 이억기함을 놔두고 구식에 무장도 없는 돌고래급과 상어급만 사지로 뛰어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좋았어. 부장의 뜻이 갸륵하군. 걱정하지 말게. 로미오급 공격잠수함이 붙어 있으니깐. 그리고 우리에게도 엄호 명령이 떨어졌다네."
이승렬이 네 겹으로 명령문을 접었다. 이동중인 잠수함은 모두 열 척이 넘었다. 이제 이억기함도 천천히 움직일 때였다. 지금까지처럼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 크레시 스트리트(Crecy Street)도 조용했다. 이 거리의 308번지는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엄청나게 큰 탄약창이야."
전용준 준위가 관광버스 옆자리에 앉은 선종서 준위를 향해 중얼거렸다. 전용준에게 병참기지는 다 무기고나 탄약창이었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미 육군 소속 디포(depot)는 헬리콥터를 정비하는 곳이었다. 미 육군에서 유일하게 헬리콥터 분해와 수리를 할 수 있는 정비창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이곳을 이용하는 것은 육군에 국한되지 않고 해군과 공군, 해병대도 함께 이용하고 있다. 

- 중대장이 자동소총을 어깨에 걸친 채 버스 앞의 출입문으로 천천히 내렸다. 보병들이 그를 따라서 우르르 내려갔다. 헬기 조종사 복장을 갖춘 전용준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 끼고있는 K1 자동소총이 어색했다.
"몇천 명이나 근무한다는데 이 병력 갖고 될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경비가 허술하네요."
20대 후반인 선종서 준위가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덜덜 떨었다. 그러나 전용준은 느긋했다. 한국군 보병들이 넓은 잔디밭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정비창과 막사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인가인원 3,186명에 현재 인원 2,773명이라니까. 그놈들이 다 군발이인 줄 알아?"
"군 시설이니까 다 군인 아닙니까?"
선종서는 총을 겨눈 미군 3천 명에 둘러싸인 한국군 150명이 손을 들고 무릎을 꿇는 장면을 상상했는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군발이는 겨우 12명이야. 그것도 인가인원이고, 지금은 6명밖에 없대."

- "짜식! 기가 살았군. 경비야 군속이 하겠지. 너는 옛날에 미군기지 정문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군지 못 봤어?"
"한국 사람 같긴 했습니다만."
선종서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용준은 소총을 아예 어깨에 매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직 총소리 한 방 나지 않았다. 미군의 저항은 전혀 없었다. 기지 내 군데군데 군복을 입은 비무장한 백인들이 놀라 손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게 다 군속이야. 권총도 안 찬 저놈들처럼 말야. 본국인 여기는 경비가 더 형편없다구." 
"세상에! 군인이 경비를 군속한테 맡겨요?"
"빨리 뛰어! 뭐해? 소풍 왔어?"

- 8월 5일 09 : 10 미국 텍사스 브라운즈빌 [한국시간 8월 5일 23 : 10]
높이 치켜올린 바리케이드에서 드리워진 새까만 그림자가 하얀선을 가로질렀다. 선명한 그림자에 시선이 간 차영진 준장이 문득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태양이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빛을 내리쬐었다. 등뒤에서는 거대한 리오그란데강이 쿵쾅거리며 마지막 남은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30km만 더 가면 멕시코만이었다. 그곳은 대서양의 일부였다. 차영진은 푸른 바다를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천히 옮긴 오른발이 하얀 페인트로 칠한 빗금을 넘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차영진은 선글라스를 꼈는데도 잠시 눈을 뜰 수 없었다. 다리 북쪽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언론사 기자들이었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인 리오그란데강 하구를 가로지르는 교각은 중립지대였다.  

 

- 기자들을 밀어내며 차영진에게 지나치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뒤쪽에서 접근하려고 자꾸 밀치는 바람에 차영진은다시 멕시코 국경선 너머로 쫓겨날 지경이었다.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관찰자여야 할 기자들이 지금은 너무 흥분해서 자칫하면 본분을 망각하고 사건에 개입할 판이었다. 

- 차영진은 사상 최초로 미국 본토를 지상군으로 직접 공격하려는 적군의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이 정도 병력이라면 미국 정부와 미국민이 느낄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소수 특수부대나 질서 없는 도둑떼가 아니라 당당한 통일한국군의 정규군이었다. 기자들은 특종을 취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해 겁을 먹는다든지 적에 대한 적대감 따위를 느낀다든지 할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차영진과 이함태에게 미소를 가득 띠며 대답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 오성환 대령은 초조하게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기자들의 짐검사는 이미 마쳤지만 혹시나 미국 정부기관에서 보낸 암살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빠른 감이 있었다. 멕시코국경일대의 소문에 의혹을 품은 미국이 국경 너머로 보낸 첩보원은 단 여덟 명에 불과했다. 

 

- 오성환 대령이 염려했지만 언론사 기자들을 모은 것은 대성공이었다. 미국 국경지대에서 5년 간 200여 명을 살해해 암매장했다는 혐의를 받아온 멕시코 마약카르텔의 두목이 브라운즈빌을 통해 미국으로 압송된다는 제보를 오성윤이 인터넷을 통해 각 언론사에 보냈다. 물론 허위제보였다. 그러나 이 거짓말로 단번에 100여 명이 넘는 많은 기자들을 모았다. 기자들은 제보를 한 지 단 20분 만에 이곳에 몰려들었다.  

- 그러나 경찰차를 따라온 자들은 좀 달랐다. 험상궂게 생긴 자들도 많았다. 대부분 허우대가 좋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이들은 분명히 민간인 복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총기를 다루는 품이 한때는 정규 군인이었던 것 같았다. 

 

- 작전은 성공이었다. 활주로에 커다란 구멍 두 개가 뚫렸는데 그 넓이가 각각 200평방미터는 족히 되었다. 미리 대비하지 못한 해군항공대 기지는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주기장 땡볕에 세워둔 전투기 20여 대가 클러스터탄 단 몇 발에 불덩이가 되어 타올랐다.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강윤택이 겪어온 비행장 폭격 임무에 비해 이곳은 저항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 머스탱 아일랜드 북단에서 서쪽에는 잉글사이드라는 항구가 있다. 그런데 그곳은 미국 대서양함대의 기항지 가운데 하나였다. 출격 전에 원정군 사령부로부터 받은 정보에 따르면 그곳에는 이지스 순양함 한 척이 정박하고 있다고 했다.

- [대대장님! 무기는 뭘 씁니까?]
"당연히 클러스터탄이지. 기관포하고 사이드 와인더 말고 우리가 가진 게 뭐 더 있나?"
국창호의 흥분된 질문에 강윤택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텍사스 내륙지대에 위치한 공군기지에 공대함미사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활주로 파괴폭탄은 이미 사용해버렸다. 강윤택이 전투기를 선회시켜 순양함과 나란히 방향을 잡았다. 고도를 낮춘 강윤택의 전투기가 수평비행에 들어갔다. 진주만 습격의 완전한 재판이었다. 클러스터 폭탄이 낙하하다가 공중에서 둘로 갈라졌다. 자탄 200여 개가 공중에 확 퍼졌다.

- 요크타운 전투는 독립전쟁 때 미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였다. 1781년 영국군은 해상으로부터의 지원과 뉴욕으로부터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버지니아 요크타운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식민지군이 치열하게 포위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해상에서는 프랑스함대가 영국함대를 패주시켰다. 결국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그로 인해 미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요크타운은 미국 해군의 대형 함정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태평양전쟁 때의 항공모함 이름으로 쓰였고, 그것이 격침된다음에도 새롭게 건조된 에섹스급 항모 이름이 되었다.  

 

- 요크타운은 이지스 순양함이 진수되기 시작했을 때 타이컨디로거에 이어 두 번째 이지스함에 이름이 붙었다. 현재 요크타운은 다른 초기형 이지스 순양함들 몇 척과 함께 멕시코만의 마약단속 임무에 투입되고 있었다.

- [헬기입니다! 헬기가 떼로 떴습니다!]

국창호 대위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강윤택 중령이 서쪽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헬기 50여 대가 새까맣게 대열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방향은 남서쪽, 킹스빌 해군항공대 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이미 한국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 [투하! 투하!]
시호크 23에서 어뢰를 투하했다는 보고였다. 슈미트는 소나팀의 작업을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어뢰는 정확히 착수됐습니다. 탐신을 시작했습니다."
함장이 다가오자 소나 오퍼레이터가 보고했다. 이제 플레처의 소나도 상황을 탐지할 수 있었다. 상어급 잠수함의 머리 위로 떨어진 마크 50 대잠 경어뢰 두 발은 나선형으로 몇 바퀴 회전한 다음 바로 상어급으로 쏜살같이 접근했다.

- 마크 50 경어뢰는 화학연료를 산화시켜 증기터빈을 작동하는 독특한 추진기를 사용한다. 그래서 창고기(Barracuda)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상어급 잠수함을 포착한 마크 50 어뢰가 공격모드로 전환되자 액티브 음파를 쏘아대며 돌진했다.
[명중했다! 명중했다! 그런데 어뢰를 다 썼다. 시호크 24를 빨리 지원해주기 바란다.]
"알았다. 시호크 23은 남은 놈을 정확히 추적하라. 곧 시호크 24가 도착한다."
슈미트는 다른 함정들이 몰려오기 전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공을 나누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전쟁이란 군인에게는 다시없을 중요한 기회였다. 이럴 때 최대한 공훈을 쌓아놓아야 진급할 때 유리했다. 
 

- 8월 5일 23 : 39 경남 거제시 거제도 남서쪽 7km
"닉시 작동 개시!"
어뢰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에 놀란 슈미트 중령이 아연실색하며 외쳤다. 전투정보실이 쩌렁쩌렁 울리고 나서야 함장은 스스로가 지나치게 흥분한 꼴을 부하들에게 보였음을 깨달았다. SLQ-25 닉시는 구축함 플레처의 함미부분에 장착된 어뢰기만 장치이다. 함정의 추진체계에서 발생한 소음과 비슷한 음향을 내기 때문에 어뢰의 추적프로세서가 닉시를 군함으로 오인하게끔 하는 방식이다. 
"어뢰, 도합 4발! 두 발은 본함으로! 두 발은 파이프를 향합니다!" 
오퍼레이터가 긴박하게 보고했다. 구축함 파이프(Fife)도 어뢰가 접근하는 것을 깨닫고는 급격한 회피기동에 돌입하고 있었다. 파이프 역시 플레처와 같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이다. 

- 어느새 닉시 예인장치가 200미터 가까이 풀려나갔다. 구축함에서 멀찍이 거리가 떨어지자 닉시가 강력한 기만음향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한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어뢰가 닉시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뭐야? 음향 출력을 더 높여!"
어뢰를 추적하던 소나 오퍼레이터가 잔뜩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함장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 사이 좋게 두 발씩 나뉘어진 어뢰는 플레처와 파이프를 향해 거리를 점점 좁혀나갔다. 


- 그런데 어뢰는 플레처와 파이프의 진행 방향 앞쪽을 가로막듯이 다가서고 있었다. 만약 어뢰가 닉시나 구축함의 음향을 추적했더라면 뒤쪽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뢰는 파이프의 예상경로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움직였다. 함장이 소나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작은 점들을 보며 경악했다. 
"이건 북한제 고물 잠수함이 아니야. 한국형 209급이 지금 유선 유도를 사용하고 있는 거다. 제기랄! 애스록으로 대응한다. 준비!"

"함장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함장이 서둘렀지만 부함장과 음탐장이 합창하듯 보고했다.
"젠장! 추정위치로라도 빨리 발사해! 어떻게든 일단 유선 유도를 중단시켜야 해!"
슈미트가 윽박지르듯 명령했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한국 잠수함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애스록을 발사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공중수색 레이더를 담당한 전탐하사가 경고를 발했다. 
"함장님! 거리 5km. 방위 2-6-0! 수면에 고속 비행물체입니다!"

"뭐야?"
"ESM! ESM 확인! 레이더 방사를 시작했습니다. 레이더파 파악합니다. 우악! 하픈입니다!"

- 원군이 와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 통일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기 위해 기자들 상당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일부는 텍사스 방위군과의 전투를 기대한 듯 양군을 번갈아 카메라를 돌려댔다. 특히 사령관 격인 차영진은 각종 카메라의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차영진은 계속 가슴을 쭉 펴고 당당히 서 있어야 했다. 이것이 비록 연기에 불과할지라도 차영진은 꼭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노인처럼 구부정하게 서 있으면 미국 국민들이 한국군을 우습게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실시한 기자회견은 지금 TV에 방영되고 있거나, 아니면 곧 방영될 것이다. 조금 전에 오성윤 대위가 위성TV에서 한국군이 미국 국경을 넘는 장면이 방영됐다고 알려왔다. 
차영진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 미군 전투기가 날아올지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 핵미사일은 날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 오성환 대령은 아직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몰려든 미국인들은 말이 총을 든 무장세력이지 전력은 형편없었다. 합해서 100명 조금 넘는 미국인들은 한국군 1개 분대만 내보내도 충분히 내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민간인들을 상대로 유혈사태를 빚을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코퍼스 크리스티 헬기정비창을 습격한 한국군들이 제대로 일을 해냈느냐는 것이었다. 차영진이 혀를 찼다. 그도 내심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더 기다려 봅시다. 킹스빌 해군비행장을 점령했다고 연락이 왔으니까 말입니다." 
"헬기 정비창이란 게, 무기나 연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경비는 형편없다지만 그런 게 오히려 더 문젭니다." 

- 현재 지상부대와의 연락은 인공위성 통신을 통해 어느 정도 되지만 전투기나 헬기와는 통신이 불가능했다. 요행히 미국 정비창의 헬기를 탈취했다고 해도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미군 전투기라도 뜬다면, 아니면 주변 지대공미사일 기지에서 미사일을 날린다면, 통일한국군 미주원정군의 계획은 첫날부터 틀어질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자칫하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드넓은 미국 땅에서 발로 걸어다니다가는 얼마 가지도 않아 모두 사냥당하고 말 것이다. 그럼 한국으로서는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테고, 원정군을 파견 안 하느니만 못하다. 

- "브라보!"
텍사스 방위군들이 총을 흔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상공에서 선회하는 공격헬기 옆에 붙은 국적 표시는 분명 미국 것이었다. 오성환 대령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가까이 접근한 블랙 호크 헬기 옆에 기다랗게 튀어나온 기관총이 보였다. 기관총의 총구가 지상을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투두두두듯!
"엎드리십시오!"
오성환 대령이 몸을 날려 차영진을 덮었다.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영진이 눈을 감았다. 끝장이었다. 여기 남아 있는 원정군 병사들에게 헬기를 잡을 만한 중화기나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제 일방적으로 살육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일만 남았다. 

- 차영진이 정신을 차리자 먼저 오성환 대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차영진이 살짝 실눈을 떴다. 부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혹시나 미국 헬기들이 한국군을 생포할 의도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평소 같으면 전차 수십 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굴러다니며 훈련에 여념이 없을 텐데 지금은 아주 조용했다. 몇 차례 폭격을 당한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훈련중인 부대들이 대부분 이미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M-1 전차와 M-2 보병전투차 훈련생들이 모습을감췄다. 그리고 K-1 전차와 K200 장갑차 과정 훈련생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남은 것은 T-80U 전차와 BMP-3 보병전투차 과정뿐이었다. 

 

- "젠장! 죽어도 물 밖에서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씨팔! 이 깡통속에서 앉아 있다가 맥없이 수장되긴 싫단 말입니다."
"나도 무섭다구.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니까 자네가 좀 참게."
김상규 대위가 느릿하게 말하며 박무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조그마한 공간에 갇혀 적함으로부터 공격받는다는 느낌이, 그 공포가 어떤지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고래의 승조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조함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포 속에서도 꿋꿋이 함정을 몰아가는 승무원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김상규 대위는 이제 함정요원들을 더 이상 놀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특수부대 요원들이 함정요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느끼는 우월의식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된 엘리트 의식이었고, 오늘에야 비로소 잠수정 승조원들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대낮같이 불을 밝힌 부두에서는 이런 야심한 시각에도 많은 미군 병사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두에 설치된 크레인이 거대한 6만 톤급 수송함에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하역하고 근처에서는 호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트럭들이 끊임없이 부두에 드나들고 있었다.

김상규 대위가 시간을 확인했다. 예정된 공격 시간이 20분이나 넘었지만 다른 부두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어디선가 불이라도 나거나 총성이 들리면 아군이 활동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산항은 미군들이 작업하는 기계소리만 요란했다. 
"다른 팀은 결국 하나도 못 온 건가?"
"예. 아마도 전부 다..."
박무진 중사가 주변을 살피며 힘없이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 김상규 대위가 방수포에서 꺼낸 무기를 점검하면서 경비상황을 살폈다. 항만소방서에서 비춘 탐조등 불빛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 그리고 부산항 내에서도 경비는 삼엄했다. 각 부두마다 배치된 서치라이트 불빛이 끊임없이 바다 위를 훑었다. 그 위에 대잠헬기 2대까지 가세해 바다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김상규 대위는 물 속에도 미군의 SEAL 팀이 매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어쩌면 여기까지 살아온 한국군침투팀 일부가 그들에게 당했을지도 몰랐다. 

- 김상규 대위가 신음을 흘렸다. 외곽경비가 너무 엄중해 경비망을 뚫고 잠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상태라면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려 한두 군데에서 성공하더라도 한꺼번에 많은 성과를 올리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가져온 로켓탄을 쏠 수도 있지만 어디가 폭탄 야적장인지 모르기 때문에 연쇄폭발을 일으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어둠 속 어디선가 이들을 저격총의 망원렌즈 안에 잡아놓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감시카메라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경비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이들이 살아서 돌아가긴 애초에 틀린 일이었다. 

- "저걸 폭격하거나 포격지원을 요청하면..."
"그럼 얼마나 좋겠냐? 근데 저놈들이 아군 야포 사거리 내에서 물자를 하역하겠어?"
김상규가 투덜거렸다. 이 적은 인원과 폭탄으로 저 많은 물자를 어떻게 부수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박무진이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럼 아군이 부산에서 야포 사거리 밖으로 밀려났다는 뜻입니까?"
"당삼이지. 그러니 우리가 왔지. 그리고 우리는 무전기도 없잖아?"

- 이들은 부산항에 대한 한국군의 지대지미사일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국군 지휘부가 첨단무기를 아끼고 머 리숫자로 때운다고 이들이 투덜거렸지만, 지휘부가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을 놔두고 다른 방법을 선택할 리는 없었다. 어느 상륙작전에서든 상륙물자에 대한 소수 적 부대의 기습공격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철저히 준비한다. 어수선한 행정상륙초기에는 기습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습은 주로 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역상륙작전처럼 완전한 국면 전환을 노린 작전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 부대 단독으로 기습 작전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들 소부대는 작전의 성공여부를 불문하고 전멸하기 십상이다. 김상규 대위의 팀은 그런 역할을 임무로 부여받았고, 여기까지 살아서 왔다. 그러나 아직 살아남은 것일 뿐이었다.

 

- 자살행위나 다름없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폭격으로 많은 교량이 파괴되어 전차 수송트럭이 움직일 만한 길은 몇 개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군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 "조심하십쇼! 저는 지금 고글을 끼고 있습니다!"
홍준기 하사가 라이터를 내밀자 운전병이 큰소리로 경고했다. 고글을 끼게 되면 빛에 아주 민감해진다. 라이터 불빛은 비록 보이는 시간은 짧지만 고글을 낀 운전병의 눈을 순간적으로 캄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괜찮아. 터보 라이터야."
포수 홍준기 하사가 운전병을 안심시킨 다음 이상학이 내민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라 홍준기가 손으로 라이터를 가렸다.   

 

- 8월 6일 04 : 05 경남 진해시
미 육군 제2기갑기병연대 폭스트롯 중대는 진해 시가지를 향해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전진했다. 연대 소속 헬리콥터가 상공을 엄호하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찰스 라슨 하사는 일렬 종대로 달리는 험비 대열의 선두에서 3번째 차량에 타고 있었다. 2라슨 하사가 소속된 2기갑기병연대는 원래 주 장비가 M-1A1 에이브럼스 전차인 전차부대였다. 1991년에 발발한 걸프전에서 2기갑기병연대는 73 Easting 지역에서 이라크의 타워 카르나 기계화사단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그런데 걸프전 이후 2기갑기병연대는 장비를 미군의 지프라고할 수 있는 장갑형 험비로 바꿨다. 지역분쟁이 발생할 경우 신속한 군사력 투입을 위해서는 항공수송이 가능한 가벼운 차량이 좋았기 때문이다. 

 

- 미 육군에서 기갑기병연대는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된다. 군단의 전위부대로서 전방에서 위력정찰 임무를 수행하거나 측방을 엄호한다. 후퇴시에는 후방 엄호를 맡기도 한다. 그런 다양한 임무에 맞게끔 헬리콥터와 지상부대가 적당하게 혼성 편제되어 있었다.

 

- 2기갑기병연대는 미 육군 18공수군단의 최선봉이었다. 18공수군단은 예하에 82공수사단, 101 공중강습사단, 10산악사단, 3기계화보병사단이 있으며, 직할부대로 군단포병이나 항공여단 외에 2기갑기병연대를 두고 있다. 라슨의 2대대는 한국 해군의 본거지인 진해시 중심부를 향해 전진했다. 왼쪽은 바다였다. 바다 방향에서의 위협은 없기 때문에 험비에 장착된 모든 화기들은 총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부산에서 해안을 통해 진해로 통하는 2번 국도는 2차선 정도로좁았다. M-1A1 전차 같은 덩치 큰 차량이 가다가 한 대라도 주저앉으면 후속부대의 진로까지 막아버릴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미군 지휘부는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는 가볍고 속도가 빠른 험비가 더 적당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2기갑기병연대의 주력은 구경 7.62 밀리 탄에 견딜 수 있는 장갑판을 장착한 M-1114 장갑형 험비였다. 각 중대에 배치된 토우 탑재형 험비도 정면 유리창과 앞쪽 문짝은 그 정도 방탄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가지 모델 외에 스팅어 8발과 12.7 밀리 중기관총을 장착한 자주대공미사일차 어벤저도 섞여 있었다. 

- 강한 섬광 때문에 야시경의 보호장치가 작동하면서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빌어먹을!"
라슨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뺨에 묻은 것을 닦아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이상한 냄새가 났다.  
 
- 길 오른쪽에 나가 있던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총구 화염을 향해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의 총에는 예광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아 라슨은 아직도 한국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예광탄은 야간에 아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미군은 보병들에게 사용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 어벤저는 험비에 4연장 스팅어 발사대 2기와 간단한 사격통제장비, 그리고 12.7밀리 중기관총을 장착한 대공미사일 시스템이다. 어벤저에 탑재된 기관총에는 다른 것과는 달리 예광탄이 장전되어 있다. 그리고 어벤저에는 AN/VLR-1 전방 적외선 감시장비가 장치되어 있었다. 이 장비는 일반 보병들이 사용하는 야시경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한국군의 매복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낸 어벤저가 예광탄으로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 투투퉁! 투투퉁! 
라슨은 세 발씩 끊어 쏴서 착탄을 확인했다. 어벤저의 기관총예광탄이 두 탄착점 사이에 들어가자 라슨은 사각을 약간 수정해 유탄발사기로 집중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매복한 숲에서 연달아 불꽃이 피어났다. 한국군도 이에 질세라 엄청난 화력으로 반격해왔다. 눈앞 숲속에서 마치 전기용접이라도 하듯이 발사섬광이 번쩍거렸다. 

 

- 몸이 뒤흔들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폭음이 들렸다.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니 뒤에 있던 어벤저가 로켓탄을 맞고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에 미사일 발사대가 차체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장전되어 있던 스팅어 네 발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사격 중지! 스팅어가 발사되었다!]
무전을 타고 들리는 중대장의 고함소리가 귓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스팅어의 추적장치는 너무 민감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열원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초기모델과 달리 개량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에 눈부신 빛덩어리들이 쫙 뿌려졌다. 화력지원을 위해 날아오다 갑자기 발사된 스팅어에 기겁한 OH58D 카이오와 헬리콥터가 뿌린 플레어였다. 하늘로 솟아오른 스팅어 두 발은 플레어를 지나면서 폭발하여 불꽃을 사방에 퍼뜨렸다. 자칫 미군 미사일에 미군 헬리콥터가 날아갈 뻔했다. 

- 라슨이 타고 있는 장갑형 험비 M-1114는 7.62밀리 총탄에 견딜 수 있는 방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날아온 총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체 옆구리를 관통해 운전석과 엔진 부분을 휩쓸었다. 충격에 구멍 뚫린 보닛이 덜컹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 사방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동쪽으로 넓은 배핀 만(Baffin Bay)의 시퍼런 바닷물에 눈이 부셨다. 
차영진은 공습경보가 울리자마자 헬기로 뛰어왔다. 처음 헬리콥터가 이륙할 때는 무척 불안하고 불쾌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카우보이들처럼 말을 타고 달리면, 밤에는 화톳불 피우고 커피를 마시면... 차영진이 고개를 저었다. 

- 기지 상공을 초계하던 전투기에서 알려준 정보로는 순항미사일이 파드레이 아일랜드(Padre Island) 너머에서 날아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미 해군 대서양함대의 군함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바다에서 가까운 해군항공대 기지를 점령해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군이 충분히 대비한 공격이기도 했다.

- 차영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까지 헬기들은 콘크리트 주기장이 아니라 풀밭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미 해군이 한국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뜻이었다. 
"첩보위성이 움직였다는 증거입니다."
오성환 대령이 주먹을 쥐며 공연히 흥분했다. 차영진은 조금 전에 이륙한 F-16 전투기 10여 대가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국 해군항공대 기지답게 하픈 대함미사일은 충분한 재고가 있었다. 지금 전투기들은 그것을 발사하려는 것이다. 


- "적함의 위치는 어떻게 압니까? 멀리 있다면 전투기 레이더로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그리고 이지스함에서 함대공미사일을 발사하면..."
차영진은 이지스함의 위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최근 며칠동안 멕시코의 모텔에서 TV를 통해 지겹게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산에서 탄도미사일을 요격하고 동해에서 한국 해군 함대를 전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지스 순양함들이었다. 이지스함이 발사하는 스탠더드 미사일은 대함미사일뿐만 아니라 전투기도 요격할 수 있다. 차영진은 가까스로 미국에 도착한 조종사들이 혹시나 죽을까 봐, 그리고 간신히 얻은 전투기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 "대서양에는 작전중인 미국 항공모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헬기에는 해상수색 레이더가 있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설명을 시작했다. 미군은 너무 많은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배치했다. 지중해와 걸프만에 배치된 각 한 척씩을 빼면 대서양함대 소속 항공모함은 노포크에 정박하고 있는 루스벨트가 유일했다. 그러나 이 항모는 곧 뉴포트뉴스에서 핵연료를 재장전하고 전면개수를 받을 예정이기 때문에 최소한 앞으로 1년동안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시 호크 대잠헬기의 해상수색 레이더는 거의 300km까지 탐지한다. 한국군이 미 공군 비행장에서 탈취한 F-16C의 AN/APG-68 레이더도 탐지거리는 그 정도이며, 하방감시 능력도 있다. 전투기가 공대함미사일 하픈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은, 파도가 치는 거친 바다에서 적함을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레이더를 탑재했다는 뜻이다. 
"전투기들이 저공비행으로 접근해 이지스함의 스탠더드 사정거리 밖에서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미 해군 전투기들이 없으니 안전한 임무입니다."

- 전투기와 이지스함의 일대일 싸움은 전투기가 손해 보는 장사가 결코 아니다. 사정거리가 긴 하픈으로 전투기가 공격하고 돌아가버리면 이지스함은 방어밖에 할 것이 없는 것이다. 

- 미국 함대가 해안에서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거리에서 토마호크 공격을 가했다니 차영진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거리 타격력을 가진 토마호크라면 바다 멀리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공격했어도 됐을 것이다. 차영진이 곰곰 생각하느라 인상을 찌푸리자 오성환 대령이 싱긋 웃었다. 
"저 뱃놈들은 지킬 것이 하도 많아서 그렇습니다. 코퍼스 크리스티도 그렇고 가까이 있는 휴스턴도 지켜야 하니까요." 

 

- 코퍼스 크리스티와 휴스턴은 미 해군의 기항지들이며 동시에 해군항공대 기지가 있는 곳들이었다. 휴스턴의 엘링턴 해군항공대 기지는 킹스빌에서 300km쯤 떨어져 있다. 미 공군은 텍사스 남부를 점령한 한국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 가까운 샌 안토니오의 켈리 공군기지는 자주포를 탈취한 한국군에게 호되게 포격을 당해 가동불능이었다. 주방위군 제149전투비행단 예하의 살아남은 전투기들은 허둥지둥 빈 몸으로 빠져나와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리고 포트 워스(Fort Worth)는 여기서 너무 멀었다. 항속거리가 짧은 F-16 전투기가 장장 600km를 날아와 폭격을 하고 돌아갈수는 없었다. 항공대 기지 세 곳을 폭격당한 미 해군 항공대도 당장 이쪽으로 돌릴 전력이 없었다. 일순간일 뿐이겠지만 텍사스 남부 일대에서는 뜻밖에 한국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8월 5일 15 : 25 대서양 멕시코만 [한국시간 8월 6일 05 : 25]
이지스 순양함 타이컨디로거가 속도를 올리며 선회했다. 함미에서 새하얀 항적이 뿜어나오며 바다 위에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대잠헬리콥터 시 호크의 부기장 제임스 스퍼먼 대위는 하픈 공대함미사일이 날아오는 서쪽을 응시했다. 거리는 23km 정도였다. 
"영악한 것들!"
기장이 투덜거렸다. 한국군이 탈취한 F-16 전투기들은 하픈 공대함미사일 20여 발을 거의 일렬로 발사했다. 이 말은, 함대 입장에서 보면 미사일이 거의 같은 방위에서 줄을 지어 날아온다는 뜻이었다. 이지스의 레이더에서 보면 앞 미사일에 가려 뒤에서 따라오는 하픈의 움직임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사일이 날아오는 동안 순양함이 움직였기 때문에 하픈의 숫자나 진로 정도는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응방법과 시간이 문제였다.  

 

- 이승렬 중령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직까지는 참을 만했지만 스노팅을 오래도록 안 했기 때문에 함내 공기는 더욱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억기함의 연료전지 시스템에 연결된 추진용 산소탱크가 있기 때문에 승조원들의 호흡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승렬은 지금 이 상태에서 질식사로라도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십 번 반복된 긴장 속에서 이제는 제발 좀 쉬고 싶었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폭뢰를 기다리며 간을 바싹바싹 졸이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젠 그 한도를 넘어버렸다. 졸음이 목구멍으로 넘어올 정도였다.


- "액화산소를 쓰면 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함장님."
"그래. 두 달이라... 좋지."
이승렬 중령이 힘겹게 대꾸했다. 두 달이라는 기간을 떠올리기도 전부터 숨이 막혀왔다. 연료전지에 연결된 추진용 산소탱크에는 수십 입방미터의 액체산소가 충전되어 있었다. 그 정도 양의 산소라면 승무원들이 호흡하는 데는 충분했다. 게다가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발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배터리가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 텍사스 방위군 병사들이나 악명 높은 극우 민병대원들이 한국군을 기습하기 위해 쫓아다녔지만 그들은 항상 한발씩 늦었다. 그들은 지금쯤 체이스 필드의 폐허 위에서 넋을 잃고 있을 것이다. 차영진은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비록 미군기지를 털어 그 장비를 사용하고 있지만 항상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다들 한국으로 떠나 텅 빈 텍사스 남부를 무혈점령했다고 비난하는 미국인들은 스스로의 도덕성을 의심해야 했다. 차영진은 그 점에서는 떳떳했다. 그러나 만약 무장이 형편없는 민병대와 싸웠다가는 당장에 세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을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이긴 하지만 차영진은 결코 민간인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전쟁이 뭔지 모르고 영웅심리와 군중심리에 떠밀려 총을 들고 설치는 민병대원들은 단지 유치한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 댈러스가 텍사스 북부의 교통중심지라면 샌 안토니오는 텍사스 남부의 교통결절점이다. 주간고속도로 3개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도로가 샌 안토니오에 연결된다. 텍사스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할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앨러모 요새(the Alamo)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군 미주원정군이 서부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그런데 샌 안토니오는 다른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이 도시에는 미 공군 기지가 네 곳이나 있었다. 원래 근교에 있었는데 도시가 확장되면서 시내가 되어버렸다. 켈리, 래클랜드, 랜돌프, 그리고 브룩스 공군기지 등이다. 

- "지금까지는 잘됐습니다. 앞으로도 잘될 겁니다."
차영진이 오성환 대령을 위로했다. 걱정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대신에 모든 것을 꼼꼼히 챙기니 차영진이 믿을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차영진이 참모로서 화끈한 행동파적 천재인 장인섭 중령보다는 차분하고 주도면밀한 오성환 대령을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 2~3일 간 완전 마비된다. 산업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미국이 심각한 동맥경화를 앓는 것이다. 원정군 사령부 참모들도 작전이 성공하면 미국의 산업과 미국인들의 심리에 미치는 충격이 엄청날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차영진이 주저하는 이유가 있었다. 1942년에 일본이 진주만 기습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지만 미국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결국은 미국민의 단결을 이끌어내어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이번 작전이 미국 시민들에게 크나큰 불편을 안겨준다면 득 보다 실이 클 수가 있었다. 이 심리전이 성공하려면 미 국민들이 전쟁을 지겹게 느끼도록,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 지나칠 경우에는 미국민들의 분노를 한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 한국인들은 매일같이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에 집을 잃거나 심지어 생명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위기는 없었다. 고작 TV를 통해 즐기는 오락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전쟁의 비인간성과 불편함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번 작전의 요체이지만, 그들이 너무 큰 불편을 겪어 한국을 증오하도록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작전의 한계였다.  
차영진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적성국 국민들의 불편까지 고려해서 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이 따위 전쟁이 있을까 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참고할 만한 정확한 모범답안도 없었다. 

- 오성윤이 화면에 창을 세 개나 띄우고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들은 오성환 대령이 갸웃거렸다. 오 대령의 표정을 보고 오성윤이 간단히 설명했다.
"1-112 전차대대는 112기갑연대 1대대라는 뜻입니다."
"아니! 왜 그게2여단이야? 112기갑연대 1대대는 댈러스의 3여단 아닌가?" 
미군의 부대편제는 대부분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하도 복잡해서 외국인은 미군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정보량이 너무 많아 간명한 파악을 더욱 어렵게 하기도 한다. 오성윤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바뀐 겁니다."
미군 편제를 파악하기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렇듯 편제가 자주 바뀌는 것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군 미주원정군의 다음 스파링 파트너는 49기갑사단 2여단으로 정해졌다. 이제 문제는 언제 어디서 싸우느냐였다.  
 

- "TV와 인터넷 덕택에 정보수집 활동이 아주 쉬워졌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49사단 2여단의 현재 위치를 상황판에 기입하며 차영진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차영진은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한국군의 위치도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 8월 7일 23 : 40 경주시 안강읍
구병산 천문대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국립공원 바로 남쪽에 자리 잡은 구병산 산자락에 있다. 자정이 가까워졌지만 천문대 주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상 3층으로 지어진 돔 건물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망원경이나 쌍안경을 들고 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간간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빠는 별이 그렇게 좋아?"
천문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작은 나무 아래였다. 잔디밭에 앉아 별 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윤주희가 무릎을 베고 누운 이경호에게 물었다. 밤하늘을 살피던 이경호의 눈이 윤주희의 크고 맑은 눈과 마주쳤다. 이경호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번져갔다. 조용히 손을 가져가 윤주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을 매만졌다. 

 

- "응. 별자리 관측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해 본 고대 국가들의 위치에 대해서 한번 써보고 싶어."
"고대 국가들의 위치라구?"
윤주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응. 삼국의 천문기록을 보면, 가끔 이상한 기록들이 있거든. 중국대륙 쪽이 아니면 관측하기 어려운 그런 기록이 제법 있어. 주로 일식현상이고, 삼국이 중국 측 기록을 일방적으로 베꼈다는 비판이 학계의 통설이긴 하지만 말야. 나는 일식 말고 별자리 관측기록을 중심으로 한번 정리해서 분석해보고 싶어." 
 
- 이경호는 정부로부터 받은 약간의 보상금과 은행에 남아 있던 예금을 모두 피폭자 치료재단에 기증했다. 그리고 상사 계급장을 달고 군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경호는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해 그 여름밤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은하수를 살피던 이경호의 눈이 한 군데서 멈췄다. 은하수 강을 유유히 날고 있는 백조자리였다. T자 혹은 +자 모양으로 보이는 백조자리는 여름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들로 이뤄져 있다. 잠시 그 별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떠올려보았다. 밝게 빛나는 별들 사이에서 윤주희가 수줍게 미소 짓고 있던 모습이 잠깐 보이는 듯했다. 

- 갑자기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잠시 몽상에 빠져 있던 이경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귀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경호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만주에서 중국군 특수부대원들과 전투를 벌일 때는 저격수 한 명을 해치우기 위해 사흘 동안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결국 중국군 저격수가 먼저 움직였고, 승리는 이경호에게 돌아갔다. 기본적인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들은 때로는 10미터 이동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기도 한다. 금방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 이경호가 노리는 것은 미군 특수부대, 특히 그중에서도 경주 방면으로 진격해 오는 미 해병대의 최선봉인 포스 리컨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 리컨은 해병특수수색대로 해병대의 귀와 눈(Corp's Eyes and Ears)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 별명처럼 포스 리컨은 미 해병대가 싸우는 최전선에서 16킬로미터 이상 적진 깊숙이 들어가 각종 정찰임무를 수행한다. 미군이 정밀 유도병기와 감시수단을 다양하게 보유했다 해도 상대방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파악하고 공격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늘이나 우주에서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 땅으로 걸어가 직접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을 줄이는 것이 포스 리컨 같은 특수부대원들이다. 이경호는 그것을 방해하고 제거하기 위해 몇 시간째 이 축축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 약 50미터 구간을 따라 살상지대가 교묘하게 겹쳐지도록 설치한 클레모어 여섯 개가 동시에 터졌다. 진지 주변으로 흙먼지와 부러진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폭풍이 가라앉자마자 이경호와 다른 대원들이 수류탄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이탈했다. 다시 큰 폭음이 여러 차례 들린 다음 주변은 예전의 조용함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벌레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 공포를 이기지 못한 병사 한 명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진지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수십 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젊은 병사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 미군은 미클릭(MICLIC)이라는 지뢰지대 돌파용 장비를 일부 전차에 달고 나왔다. 미클릭은 긴 케이블에 폭약을 매달아 로켓으로 발사하는 장비다. 지뢰지대 위에 케이블이 걸쳐지면 거기에 매달린 강력한 폭약들을 한꺼번에 폭파시켜 그 압력으로 주변에 있는 지뢰들을 터뜨린다.

- 미국 전차와 장갑차들이 계속 한국군 진지를 향해 포화를 퍼붓는 사이 교량전차가 접근했다. 교량전차가 위에 싣고 온 철판을 펴기 시작했다. 곧 커다란 전차호 위로 20미터가 넘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 교량 위를 M-1A1 전차들이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전차가 지금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선택은 항복이냐, 후퇴냐 뿐이다. 명령을 내려달라!"
[망할! 곧 연막탄 사격이 시작된다. 그때까지 버틴 후 물러나라!]
 
- "곧 연막차장이 시작된다. 소대원들을 데리고 뒤쪽 와룡사 계곡을 통해 빠져나가자."
"부상병들은 어떡합니까?"
"미군이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소대장의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선임하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시 후 중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난의 화살이 되어 고재관 중위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동료를 버려두고 가란 말씀입니까?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봐, 선임하사!"
고재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고재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넨 실전에 참가해 봤다면서 그렇게 사리판단을 못하나?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죽는다면 나중에 우리가 적에게 그만큼 복수를 해주면 되는 거야. 우선은 소대의 남은 전투력을 최대한 온전하게 보존하는 거라고. 장교가 하사관에게 이런 것까지 다 해명을 해야 하나?" 
고재관이 소총을 챙기며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미군은 항복하는 부상병들을 죽이지 않아. 남은 부상병들은 우리가 떠난 다음 즉시 백기를 올리도록 해."
 
- "2차 대전 당시에, 당신들은 일본을 폭격할 때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선제 기습공격을 당해 온 국민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 때도 당신들은 일본의 유서 깊은 문화재가 있는 도시에 대한 폭격은 자제했습니다. 그때 그 수준의 자제심을 가져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입니까? 우리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보다 더 악질적인 적대국이란 말입니까?" 
필링 대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해병들을 해치려는 한국군이 있는 곳은 어떤 곳이든지 포탄이 날아갈 거라는 것일세. 아까도 말했지만, 어떤 문화재도 우리 해병대원들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네!"

- "경주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납니다. 로마가 번영하고 있을 때 이곳은 이미 신라왕국의 수도였고,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을 정복할 때, 이곳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삼대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입니다." 

"이봐! 중위!" 
필링이 중간에 말을 끊으려 했지만 이 중위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한국인들은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아낍니다. 경주는 한국인들에게 정신적인 고향이나 같은 곳입니다. 그런 도시를 모조리 파괴한다면 당신들은 한국군이 아닌 한국인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겁니다.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 자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대합니까?"

필링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막상 반박할 만한 말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짧은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전통과 역사에 약했다. 작전참모가 연대장의 곤혹스런 상황을 눈치채고 재빨리 해병대원 두 명을 불렀다. 
"이봐! 이 자를 끌고 가!"

-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페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소대원들에게 자기 목숨을 맡겨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전기에서 누가 총을 쐈냐고 중대장이 악을 썼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험비에서 곡괭이와 삽을 험비에서 내리며 로페즈가 외쳤다. 
"이 생쥐 녀석들아! 삽을 들어라! 이제 너희들이 살 집을 만들 시간이다."

- 8월 8일 00 : 10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 [한국시간 8월 8일 14 : 10]
차영진은 조금 전에 기자회견을 끝내고 임시 숙소로 쓰는 켈리공군기지 의무실로 돌아왔다. 차영진은 오성환 대령을 비롯한 본부요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언론을 통한 심리전은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자평이었다. 한국군은 전투기와 전차 등 민간인들이 보기에 인상적인 병기를 주로 사용하며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면서도 기자와 시민들에게는 우호적으로 대한 것이 미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오성환 대령의 결론이었다. 
"미국에서는 뭐든 강한 것이 환영받습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강하게 보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조심스런 말투로 차영진 준장에게 주문했다. 차영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 모든 것은 연출과 각본에 의해 이뤄졌다. 미국이 한국을 침공했기 때문에 반대로 한국군이 미국 땅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한 것이 주요 회견 내용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회견내용과 별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회견 도중에 오성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오성윤이 경악한 표정의 차영진과 잠시 대화하는 동안 궁금해진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 울먹이던 오성윤이 노트북 컴퓨터를 연결한 대형 화면에 띄운 것은 인터넷 방송의 메인 화면이었다. 곧이어 폭격을 당한 유아원의 화재 현장이 생중계되었다. 불타는 건물 안으로 소방관들이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어쩔 줄 모르며 건물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부인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새까맣게 타버린 아이들의 주검이 흔들리는 화면 속에 담겨져 있었다. 기자들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가 회견장에 가득 찼다. 화면 속은 울음바다였다. 까무러치는 부인을 다른 여자가 껴안고 울부짖었다.
"한국에서 외신으로 내보내봤자 미국 방송에는 절대 방영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이 학교를 폭격했다는 이라크 주장을 정치선전이라고 일축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오성환 대령이 한숨을 쉬었다. 유아원 폭격장면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성윤의 연기와 달리 몇 시간 전에 발생해서 미리 알고 있던 사건이었다. 한국 방송국들이 송고한 화면을 미국 방송국들은 미국 정부의 말만 믿고 한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단신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그러나 차영진의 기자회견장에서 발표된 영상은 수많은 미국 방송국에서 특종으로 내보냈다.
잠시 후 차영진은 왜 한국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지 자세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설명했다. 모든 것이 오성환 대령이 연출한 그대로였다.  

- "그런데 아무래도... 화장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
기자회견 전에 코디네이터 겸 스타일리스트가 차영진의 얼굴을 단장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은 끔찍했다. 차영진은 그때 거울을 보고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화면을 잘 받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차영진은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어떻게 무명의 케네디에게 참패했는지 오성환 대령으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들어야 했다. 차영진은 내용이 중요하지 TV에 비치는 이미지가 왜 중요하냐고 투덜댔지만 오성환 대령의 논리와 설득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차영진이 기자회견에 나설 때 입는 넥타이 색깔에서부터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출되었다. 차영진이 미국에 와서, 아니 오기 전부터 주로 한 일은 연설문을 외우고 오성환 대령 앞에서 리허설을 하는 것이었다.

- 아직은 차영진이 직접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이 사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차영진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고 예하 부대장들을 믿는 스타일이었다. 아직까지는 다들 잘해오고 있었다.

- "그런데 사령관님. 앞으로 대규모 공개 기자회견은 되도록이면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저격에 노출되기가 쉽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권고하는 투로 말하자 차영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기자회견 일시와 장소부터 내용까지 다 오성환 대령의 손을 통했다. 오 대령이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내용일 것이다. 암살에는 총기나 다른 대인용 무기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 의한 체첸 대통령 암살작전에는 인공위성 통신 감청장비와 전투기가 동원됐다. 미군이 속속들이 아는 미국 공군기지 안에서 차영진이 숨어 봤자였다. 게다가 기자들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오늘은 교묘하게 기자들을 따돌렸지만 차영진의 숙소가 노출되는 날에는 당장 순항미사일이나 레이저 유도 폭탄을 껴안을 각오를 해야 했다. 

- 기자들은 총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기자들의 직업의식도 이유가 되겠지만 전투 중이 아닐 때는 한국군이라도 민간인을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차영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경비병들이 제대로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부대를 따라다니는 기자들이 자그마치 200명이 넘습니다. 퓰리처상을 타려고 눈이 시뻘게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제대로 통제가 될 리가 없습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오성환 대령이 차영진에게 정답을 말하길 채근했다. 힌트가 이렇게 확실한데 틀릴 학생은 없었다. 

- "기지 사령관실이 순항미사일 공격을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왔던 전화가 그 통보였습니다. 피해가 없을 것 같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단 한 발인 것으로 봐서 암살용, 아니면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려는 신경전 같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차영진과 본부요원들은 켈리 공군기지 사령관실을 들렀다가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한국군 병사들이 경비를 서는 사령관실 앞까지 기자들이 와서 촬영을 했으니 그 정보가 미군에게 전해졌음이 틀림없었다. 3분 전에 샌 안토니오 상공을 초계중이던 F-16 전투기가 미사일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이 기지 경비대에 통보되고, 기지 경비대는 사령관실 앞에 경비 서던 네 명을 대피시키는 것으로 모든 대응을 마쳤다. 결과적으로 미국 미사일이 미국의 군사시설을 부순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국군이 샌 안토니오의 켈리 공군기지를 점령한 이후 거의 매시간마다 날아오는 미사일이었다. 그런 파상공격에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미군은 묘하게도 기지 내에 기자들이 있으면 공격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샌 안토니오의 시장께서 사령관님을 만나 뵙고자 한답니다. 자! 장교클럽으로 가실까요?"
차영진이 오성환 대령의 말을 듣고 같이 일어섰다. 장교클럽으로 가는 지프차를 타고 가면서 차영진은 아무래도 이 똑똑한 참모장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어서 일단은 편해서 좋았다.

- 차영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는 오성환의 각본 그대로였다. 소개 순서와 악수를 청하는 순서에 따라 누가 높은지 밝혀지는 법이다. 군인으로서 민간인 시장에 대해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차영진이 확실히 고자세를 취했다. 
 
- 시장이 자기 이름을 정정하며 인사를 건넸다. 시장은 혈기왕성한 40대 정치인답게 말쑥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자랑했다.

- "시민 절반이 피난을 떠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력과 수돗물까지 공급이 끊겨 시민생활에 불편이 큽니다. 그리고 여기 오면서도 봤지만 도시에 쉴 새 없이 미사일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이 위태롭다는 말씀입니다. 군대가 좀 더 시 외곽으로 이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피점령민 입장에서는 곤란한 말일 텐데도 시장은 당당하고도 시원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한국군이나 미군이라는 용어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샌 안토니오의 시민들은 이번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 공연히 피해를 입고 있다는 주장 같았다. 그리고 시장의 말은 군대가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나무람에 다름없었다. 만약 이곳에 주둔한 군대가 미군이라면 당연히 그런 요구를 좀 더 당당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은 사실상 점령군이나 다름없었다.
"시장께서는 2차 대전을 소재로 다룬 영화를 별로 못 보신 모양입니다."
차영진이 시장을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시장은 잠시 당황하다가 억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변화가 재미있어서 차영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 차영진은 악독한 점령군이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천편일률적인 영화들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악역은 항상 독일군이 맡았다. 차영진은 시장이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한국군이 독일군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말이 더 충격적일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옆에서는 오성환 대령이 잔뜩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은 각본과 달랐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오성환의 각본이었다. 그러나 차영진은 시장에게 강한 면모를 보여주며 휘어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미군은 텍사스주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승리한 한국군이 샌 안토니오를 점령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까?" 

- "시장께서 좀 더 협조적이시길 당부드립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차영진이 단호하게 시장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뜻이 담긴 협박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차영진이 가장하고 싶은 말을 했다.
"미국이라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 8월 8일 15:55 경남 밀양시
택! 택! 택!
경운기 두 대가 빠른 속도로 산길을 질주했다. 그런데 경운기 트레일러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은 농부가 아니라 한국군들이었다. 경운기 적재함 바닥에 덮여 있는 주황색 비닐 천 틈새로 박격포 포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씨발! 총에 맞아 죽기 전에 쪽팔려서 심장마비로 먼저 죽겠습니더!"
선두에서 경운기를 몰던 박상식 병장이 투덜거렸다. 박 병장 말에 공감했는지 병사들은 적재함을 꽉 잡은 채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았다.

- 경운기는 조동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시속 20킬로미터는 충분히 넘는 것 같았다. 4륜 구동으로 개조한 경운기라서 웬만한 경사는 기어 변속 없이 곧바로 치고 올라갔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고속 3단으로 달려가는 경운기의 진동은 담이 큰 편이라고 자부하는 조동식조차 약간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시골 출신인 박상식은 가파르고 커브가 심한 산길을 거의 예술적이라 할 정도의 절묘한 솜씨로 달려갔다. 경운기 특유의 강한 진동과 요란한 엔진소리 때문에 속도감은 만점이었다. 조동식은 마치 으슥한 숲 속에서 볼일을 볼 때처럼 쪼그리고 앉아 운전석 등받침을 꽉 쥐었다. 
  
- 병사들이 적재함에서 81 밀리 박격포를 내려 조립하는 사이 조동식은 지도와 나침반을 펼쳐놓고 위치를 파악했다. 지도를 보며 계산기를 두들기기는 오랜만이라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미군은 전쟁 직전부터 상용 GPS에도 장난을 쳤다. 값비싼 인공위성도 미국이 전쟁에 동원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 지휘부에서는 GPS 사용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 잠시 후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초탄이 발사되었다. 박격포탄은 눈이 좋은 사람은 떨어지는 포탄을 보고 미리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다.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피하는 사람의 동작이 빨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린 포탄 속도 때문에 탄착 수정지시는 한참 뒤에 들렸다.

- 8월 8일 19 : 37 경북 청도군
존 라이언 대위는 어느 방향에서 공격받더라도 반격을 할 수 있게 각 소대 전차들을 네 대씩 한 방향으로 보게 배치했다. 대대 전투지원반 소속 유조트럭이 와서 각 소대별로 전차 네 대에 동시에 연료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소모되는 것은 탄약이 아니라 연료였다. 라이언은 M-1 계열 전차의 ATG-1500 가스 터빈엔진이 연비가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속성능이 탁월하고 소음이 적어 그 약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 그런데 탁 트인 중동이나 중부 유럽의 평원과 달리 이 한국 땅은 온 사방이 산이었다. 언제 어느 산골짜기에서 한국군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네 시간마다 기동을 멈추고 연료를 보급받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였다. 만일 한국군 포병이 이쪽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방어력을 가진 M-1A2 에이브럼스 전차지만 포병의 DPICM탄 사격에는 취약했다. DPICM탄은 장갑을 관통하는 능력을 지닌 자탄 수십 발을 내장한 포탄이다. 

- 전차는 땅 위에서 움직이는 장비이기 때문에 무게에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모든 부분을 다 튼튼하게 만들 수는 없다. 차체 후방이나 상부처럼 2차원적인 전투에서 쉽게 노출이 안 되는 곳은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아주 약하다. 최대 80밀리에 달하는 장갑관통능력을 지닌 DPICM탄이 엔진 부분을 강타할 경우 M-1A2 전차는 그대로 정지하고 만다. 

- 라이언은 해치를 열고 나와 태양을 찾았다.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살피는 라이언의 눈에 주변을 맴돌고 있는 아파치 헬리콥터 편대가 보였다. 보급 중인 전차들이 습격을 받지 않도록 엄호해 주는 수호신들이었다.
 

- 열상관측장비를 마을 쪽으로 돌렸다. M-1A1과는 달리 M-1A2에는 전차장용 열상관측장비가 열상조준경과 독립적으로 장비되어 있다. 그래서 포탑을 일일이 돌릴 필요 없이 주변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했다. 포수는 전차장이 지정해 주는 교전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만일 기존에 지정된 표적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갑자기 나타났을 경우 전차장은 즉시 포수의 조준을 해제시키고 강제로 새로운 표적을 조준하도록 할 수 있었다. 

- 8월 8일 16:23 샌디에이고 북서쪽 82km [한국시간 8월 9일 07 : 23]
"잠망경 올려!"
담당 하사가 버튼을 누르자 잠망경통에서 하얀 기둥이 천장으로 쑤욱 올라갔다. 서승원 중령이 잽싸게 잠망경을 회전시켰다. 잠수함이 수면 가까이 상승하면서 박위함이 거세게 흔들렸다. 서승원은 물론이고 다른 승조원들도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고요한 심해를 떠나 수면으로 올라오자 박위함은 폭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냘픈 존재일 뿐이었다. 서승원 중령이 잠망경을 쥐고 몇 차례 회전한 다음에야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수면에는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미 해군의 전투함은 보이지 않았다. 거친 파도가 만들어낸 배경소음 때문에 소나의 효율도 좋지 않았다. 수면이 거칠고 시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칫 위협을 놓칠 수도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 아니라 바로 죽음이었다.
"수면 이상 없다. ESM 보고하라!"
서승원 중령이 잠망경을 부장 김철진 소령에게 인계하고 전탐관에게 다가갔다.
"해상, 공중, 모두 이상 없습니다."
"좋아. 스노클 올려!"
전탐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서승원 중령이 스노클 마스트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샌디에이고로 잠입하기 전에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해상상황이 몹시 나빴지만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스노클 마스트가 올라가고 기관실에서 디젤엔진을 가동한 듯 둔중한 기관음이 선체를 울려댔다. 

- 스노클을 너무 높이 올리면 자칫 레이더에 탐지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낮은 높이로 내리면 바닷물이 스노클 마스트로 스며들게 된다. 물론 박위함의 스노클 마스트는 해수가 유입되지 않도록 자동 폐쇄장치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갑자기 스노클 마스트가 폐쇄되면 그것은 엔진의 흡기구와 배기구를 동시에 막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 과거의 잠수함들, 특히 U-보트 같은 잠수함은 수상을 항해하는 경우가 잠수하는 시간보다 많았다. 그래서 선체의 설계도 함수를 뾰족하게 세우고 수상함과 비슷한 외형을 가졌다. 그러나 박위함과 같은 현대의 잠수함들은 수중항주에 더 적합하게 설계된다. 그래서 외형은 어뢰나 물방울 같은 둥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거친 수면 위에서 이와 같은 선형은 항해성능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 아무리 나쁜 기상상황이라도 그것은 바닷속 수십 미터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깊은 수심은 외부 환경과는 상관없이 항상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잠수함 승무원들은 거친 파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아무리 바다와 친한 해군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멀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조타수가 입을 감싸 쥐자 김철진 소령이 잽싸게 조타석으로 다가갔다. 조타수를 밀어내고 부함장이 직접 키를 잡았다. 함정의 요동에 따라 김철진이 열심히 키를 움직였지만 박위함의 작은 선체는 거센 파도에 맥없이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 8월 9일 15 : 40 경북 경주시 건천읍
AV8B 해리어II 공격기 두 대가 지나간 다음 몇십 초가 지났다. 잠시 아무 일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그 흔한 폭발음 하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너머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일명 열운(熱雲) 병기라 불리는 기화폭탄이었다. 
"엄청나군."
폴 리즌 대위가 쌍안경을 목에 걸고 맨눈으로 불기둥을 바라봤다. 불기둥은 핵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버섯구름을 축소시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폭발지점에서 수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 기화폭탄은 휘발성 폭발물을 공기 중에 살포한 뒤 폭발시키는 무기다. 주성분은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의 산화물이다. 폭탄이 투하되면 일차로 폭발하면서 내장하고 있던 가연성 가스를 대기 중에 살포한다. 이 폭발성 가스는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땅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가스가 충분히 퍼진 다음 신관이 작동하면서 가스에 불을 붙인다. 그때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열과 함께 200kg/cm² 이상의 압력을 가진 폭풍이 발생한다. 이 정도의 폭발압력은 지면은 물론 땅속에 매설된 지뢰들마저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 기화폭탄은 이런 직접적인 피해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부수적인 피해를 끼친다. 폭발 순간에 산소를 대량으로 소모하기 때문에 주변에 밀폐된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산소부족으로 질식하게 된다. 또 폭발할 때 발생하는 강한 충격파와 폭음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게 된다. 걸프전 당시 기화폭탄 공격을 받은 이라크 군인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가 있었다. 

- 리즌 대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알기로 미군이 한국 땅에서 한국군에게 직접 기화폭탄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폴은 한국군 역시 기화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기화폭탄은 핵무기는 아니지만 핵에 버금가는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무기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더 한층 잔혹하고 파괴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리즌 대위의 몸이 갑자기 부르르 떨렸다. 
 

- 쩔그럭!
옥종환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군번줄 여섯 개를 내려다봤다. 폭격을 당하고 전사한 부하들의 군번줄이었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철판 표면에 씌어진 이름과 혈액형, 군번을 보자 죽은 부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옥종환은 그 군번줄들을 심장과 제일 가까운 상의 왼쪽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 중대 선두가 드디어 금호 3교 다리 위로 올라섰다. 옥종환은 중대의 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교량의 통과 하중 문제로 차간 간격을 상당히 넓게 잡았기 때문에 시간당 건널 수 있는 전차 숫자는 적었다. 중대 선봉이 교량 건너편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방공 사이렌이 울렸다.
[브라보 제로다. 전차들은 차간 거리를 좁혀 빨리 다리를 건너라. 어서!]
대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에 울렸다. 대대장은 이미 강건너편에 도착해 이쪽을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옥종환의 전차는 이제 겨우 다리의 3분의 1 정도밖에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해치밖으로 몸을 내민 옥종환이 K6 중기관총을 붙잡고 남쪽 하늘을 살폈다. 장전수도 M60 기관총으로 하늘을 겨눴다. 

- 차내에서는 해병대원들이 아예 윗통을 벗고 장전작업을 하고 있었다. 포에서 나오는 열과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열이 합쳐져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대포 소리 때문에 귀신들이 다 도망가겠다."
포차장이 좁은 차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엄청난 포성에 적응이 되어 있어 웬만큼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는다. 땀과 그을음이 엉켜 얼굴이 시커멓게 된 해병대원 다섯 명이 그 말을 듣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 알파 포대의 목표물은 대구 남쪽에 있는 냉천 골프장이었다. 골프장은 넓고 평탄해서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쓰기 좋은 곳이다. 알파 포대는 골프장을 사용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해 지뢰살포탄(FASCAM)을 발사하고 있었다. 

- 포탄에 내장된 지뢰는 일정한 시간을 비행한 다음 탄체에서 분리된다. 각각의 지뢰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안에 작은 스프링과 6미터 길이의 인계철선이 감겨 있다. 그 인계철선이 지면으로 낙하하는 도중에 스프링의 힘으로 밖으로 풀려나와 주변의 각종 장애물에 걸쳐지게 된다. 주변에 거미줄처럼 걸쳐진 인계철선에 뭔가 닿으면 즉시 지뢰가 작동하면서 지면 위 1.2미터 높이로 튀어올라 폭발한다.  

- 다시 매복에 들어가면 아무 짓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영상 관측장비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포대원들이 달아오른 포신에 재빨리 방열커버를 씌웠다. 그리고 적외선 차단효과가 있는 위장포를 대공포에 덮어씌웠다. 수없이 훈련받은 인민군들이 이 작업을 마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 눈을 대충 비빈 조영식 대장이 책상 옆에 마련된 야전용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번병이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대충 얼굴을 닦은 뒤 작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눈에는 시뻘건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새치 하나 없던 검은 머리카락은 불과 일주일 만에 거의 반백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늙어버린 얼굴을 보고 조영식 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거울 속의 모습이 전혀 딴사람 같았다.

 

- 조영식 대장과 참모들이 있는 지휘소는 구미시 원평동에 위치한 어느 은행건물 지하실이었다. 대구시 외곽에 있던 주지휘소는 개전 당일 밤 스텔스 폭격기에 폭격당했다. 핵무기에 직접 명중되지 않는 이상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주지휘소는 레이저 유도폭탄 세 발을 연속으로 맞고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렸다. 지휘소 요원 수백 명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하에 그대로 묻혔다. 

- 미군의 폭격도 문제였지만 지독한 전파방해는 더 큰 문제였다. 야전군 지휘소에서 군단 지휘소로, 또 군단 지휘소에서 사단 지휘소로 이어지는 각 통신단계마다 미군 전자전 부대들이 끼어들어 집요하게 교신을 방해하고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미군은 전파방해 외에도 HARM 미사일을 사용하는 적극적이고 물리적인 전자전을 계속 가했다. 통신용 안테나가 일정 시간 이상 가동될 때는 가차 없이 미사일이 날아와 안테나를 부숴버렸다. 1야전군이 부산 및 경남지역 방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 8월 10일 01 : 58 대구광역시 중구
"56기갑여단과 416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참모장이 전문을 들고 급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참모장의 귀밖에 안 차는 작은 키에 머리가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삼성장군이 전문을 받아 읽었다. 12군단장 이재춘 중장이었다. 
"101 공중강습사단 위치는 파악되었나?"
"산성산 인근에서 격추된 적 헬리콥터 잔해를 분석한 결과 101사단 소속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력부대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 사단 직할 헬리콥터만 수백 대가 넘는 미군 101공중강습사단은 방어작전에 가장 위협이 되는 부대였다. 101공중강습사단은 분쟁이 발생하면 82공수사단과 함께 가장 먼저 일선에 배치되는 미 육군의 최정예 부대다.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씩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이니 당연히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대 마크를 갈아치우고 다른 부대들 사이에 끼여 있을지도 몰라."
"그놈들 자부심이 강하기로 소문났는데 쉽게 부대마크를 바꾸겠습니까?"
참모장이 대꾸했지만 이재춘 중장이 바로 일축했다.
"내가 그놈들 군단장이라면 당연히 바꿀 거야.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그건 그렇고, 병력 상황은 어떤가?"

 

- "군단 병력은 약 97% 수준입니다. 계속된 폭격과 통신불통으로 사기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군단 보충대대는 수성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충병 조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의무지원은 지원자들로 구성된 노무부대가 부상병 후송을 맡고 318과 320 두 개 야전병원이 의무지원을 담당합니다. 시내에 있는 개인의원과 종합병원 의사들, 그리고 의대생들이 야전병원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재춘 중장은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한국군에게 병력 부족 문제는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너 배로 증원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군단의 실제 전력이 그만큼 늘어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재춘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 이재춘 중장이 감탄했다. 민간인 소개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사참모는 민간인 소개 예정지 할당과 수송수단 동원, 교통통제, 홍보 등등 소개작전에 필수적인 많은 일을 맡아 기대 이상으로 해낸 것이다. 이제 안심하고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 "수고했다. 참! 급수장 복구상황은 어떤가? 아직 멀었나?"
지난 자정 무렵 미군 전폭기가 대구 시내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급수 시설을 폭격해 완전히 파괴했다. 만약 항전이 길어지면 물 부족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 뻔했다. 인간은 물 없이는 사흘 이상 버티기 어렵다. 더구나 지금은 땀이 많이 흐르는 여름이었다. 물 부족은 탄약 부족보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대답하는 군수참모의 얼굴이 어두웠다.
"현재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만, 전력이 부족한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 미군은 각종 전력시설에 흑연폭탄이란 이름이 붙은 CBU94 폭탄 공격을 가했다. CBU94에는 미세한 탄소 필라멘트가 잔뜩 감긴 음료수 캔 크기의 자탄 수백 개가 들어있다. 폭탄이 투하되면 자탄이 분리된 다음 적정 고도에서 내장된 탄소 필라멘트를 일제히 풀어낸다. 탄소는 전기가 잘 통하는 도체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가는 탄소 필라멘트들이 바람을 타고 둥둥 떠다니다 고압 송전선에 걸리면 단락사고를 일으켜 순식간에 송전망을 마비시킨다.
"장비를 총동원해 빠른 시간 내에 재가동시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치열한 폭격 때문에 계속 늦어지고 있습니다."
 
- "여명을 기해, 우리 12군단은 미 8군단에 대반격을 감행한다."

참모들은 말이 없었지만 모두 당황하는 표정들이었다.
반격이라니! 부산에서 15군단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경북지역까지 계속 밀려온 탓에 1야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일부 참모들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실패할 경우, 그나마 남은 전력이 완전히 바닥나서 구미 이남 지역에서 야전군 전체가 궤멸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소백산맥까지 공백상태나 다름없게 되고, 통참에서 내린 지침도 위반하게 됩니다." 
작전참모는 통일참모본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거론했다. 통참의지침은 미군의 진격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리고 피해를 최대한 강요해 미군 선봉을 조기에 소모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재춘 중장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그나마 남은 반격 기회도 못 잡는다."

- 이동천이 소속된 121 독립보병연대는 대구 방어전에서 중구와 북구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의 구성은 특이했다.

121 독립보병연대가 만들어진 것은 통일 이후였다. 원래는 부대 규모가 훨씬 작았다. 그런데 통일이 진행되면서 남북한 군대가 교차 주둔하게 되었다. 대구 인근에 인민군 6사단과 416 해군육전여단이 주둔하면서부터 121 보병연대도 그에 맞춰 확대개편되었다. 후방 깊숙한 곳에 대규모 인민군 부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한국 정부가 내심으로는 상당히 불안해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보병연대라고 하지만 연대 직할로 포병대대와 전차중대를 가지고 있어 여단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렸다. 그러나 이 부대는 무슨 이유에선지 예전 명칭을 그대로 고수했다. 대부분의 훈련이 시가전을 염두에 두고 이뤄져 특수부대와 일반 보병의 중간 성격을 띤 독특한 부대이기도 했다. 121 독립보병연대의 임무는 누가 보더라도 뻔했다. 만일 416해군 육전여단과 인민군 6사단이 한국 정부에 대해 위협적인 행동을 할 경우 다른 주력부대가 올 때까지 대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남북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 폭발섬광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전차들은 차체 위에 동그란 포탑을 얹고 있었다. 기다란 포신 중간에는 포탄을 발사할 때 생기는 가스를 배출하는 배연기가 달려 있었다. 이것들은 러시아제 T-62 전차를 개조한 인민군의 주력전차 천리마였다. 30대가 넘는 천리마 전차들이 한정리를 향해 어두운 새벽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 장충현이 열성적으로 지도한 탓에 대대 각 전차들의 대공방어태세는 완벽한 편이었다. 각 차량 상부에는 어김없이 대공기관총을 잡은 승무원들이 상체를 드러내고 각자 할당된 하늘을 감시하고 있었다. 장충현이 이토록 공격헬리콥터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게 된 것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전쟁 당시에 장충현은 중국군 대전차 공격헬리콥터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전차의 천적은 단연 대전차 헬리콥터였다. 제대로 위치를 잡은 대전차 헬리콥터 단 한 대에 중대급 전차부대가 격파당할 수도 있는 세상이었다. 방심하면 한순간에 부대가 전멸당한다. 

- 장충현이 양쪽 능선을 다시 살폈다가 천천히 부대 전체를 둘러보았다. 지휘장갑차 뒤에는 화성포를 탑재한 장갑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화성포, 화승포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화성포는 장충현에게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대열의 전방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서 달리는 ZSU-23-4 실카 자주대공포도 지금처럼 기동중일 때는 공격헬리콥터에 대항할 수 없었다.  
 
- 8월 10일 04 : 40 경상북도 달성군
탄막이 갑자기 사라졌다. 화력지원을 해주던 한국군 포병대가 폭격을 받았거나 대포병 사격을 당한 모양이었다. 장충현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화력지원이 끊겼다고 해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선봉인 기갑정찰중대의 PT-76 경전차를 포함해 총 40여 대에 이르는 전차들이 계속 남서방향에 있는 고속도로를 향해 진격했다.  


- 장충현은 불안한 듯 동쪽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은 빠른 속도로 훤하게 밝아왔다. 야간전투 장비가 부족한 인민군 전차들이 그나마 제대로 전투를 하려면 훤한 낮이 좋다는 사실을 장충현은 잘 알고 있었다. 낮이라면 대공무기인 화성포와 실카 자주대공포로 적당히 미군 항공기들을 저지시킬 수 있다. 

 

- 몇 시간 전에 마주친 북한군 전차와 실루엣이 확실히 틀렸다. 리즌의 중대가 전멸시킨 인민군 전차들은 포탑이 거북이 등처럼 둥글게 생겼다. 예전의 자유진영의 일부 전차나 현재 현역에서 활약하는 대부분의 공산권 전차들 포탑은 둥글게 생겼다. 그래서 달걀형 포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미국의 M-1 계열 전차는 포탑이 각이 진 형태다. 북한군의 달걀형 포탑이 달린 전차나 한국군이 보유한 M-48 전차 등과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군의 K-1 계열 전차도 M-1과 비슷하게 각이 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상륙 이후 미군 전차들이 주로 상대해 온 것은 미군 전차와 구별하기 어려운 K-1 전차였다.

- 리즌은 상대 전차들이 포탑을 자기 중대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하들에게 신중히 대응할 것을 지시했다. 상대가 포탄을 발사해 이쪽이 먼저 맞더라도 대응사격으로 상대를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여유였다. 
"아직 쏘지 마! 아군일지도 몰라."
리즌이 중대 통신망에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앞에 보이는 전차들이 경산에서 북상하던 미 육군 1군단 소속 기갑부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 지역은 미 육군 1군단과 제3해병원정군의 전투지경선 부근이었다. 피아식별이 잘 안 되면 아군끼리 오인사격을 벌일 가능성이 컸다. 

- M-1A1 전차에는 열화우라늄(Depleted Uranium) 탄심을 사용한 철갑탄을 사용한다. 핵무기 제조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텅스텐보다 가격이 훨씬 싸다. 그리고 무겁기 때문에 관통력도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열화우라늄은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농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핵탄두에 사용되는 우라늄과 원자력 발전용으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그 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성분은 같다. 천연 우라늄에는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우라늄238이 대부분이고 실제 연료로 쓰일 수 있는 우라늄235는 0.7%밖에 되지 않는다. 아주 양이 적은 U235를 추출하기 위해 UF6을 이용한 확산법을 쓴다. 이 확산을 통한 농축공정이 끝나면 U235 농도가 현저히 감소된 UF6이 고스란히 남는다. 이것을 환원시켜 금속 우라늄으로 만들어 낸 것이 이른바 열화우라늄, DU다. 

- DU로 만들어진 철갑탄심은 100% DU가 아니라 티타늄 등 다른 여러 금속을 섞어 합금을 만든 것이다. DU가 가지는 방사능은 아주 약하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DU에 있는 것이 아니라 DU가 포함된 탄심이 표적에 충돌할 때 생기는 부산물이다. 

- DU는 금속으로서 아주 불안정한 물질이다. 스스로 산화하려는 성질이 아주 강해서 표적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빌어 산화우라늄, UO를 만들어낸다. 이 물질은 인체에 치명적인 맹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차가 포탄에 맞아 탄약고가 날아갈 경우, 미군 전차병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는다. 

- 미군은 1860년대에 벌어졌던 남북전쟁 이후로 약 150년 간 자국에서 전쟁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자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데다 가격이 텅스텐제 탄심에 비해 싸기 때문에, 미군은 거리낌 없이 열화우라늄을 무기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군대는 해외작전을 주로 하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텅스텐으로 만들어진 탄심을 사용한다.

- 아군끼리 전투를 벌이게 되면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진다. 그리고 오인사격을 한 부대는 그다음부터는 절대 과감한 공격을 할 수 없다.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전투를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 병사들은 포격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포격을 멈췄다가 불시에 다시 집중사격을 퍼붓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함부로 엄폐 진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 나타난 헬리콥터는 아파치 네 대였다. 김문용은 어젯밤 두 번씩이나 상대한 적이 있어 금방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과는 달리 아파치 헬리콥터는 고지 정상에서 약 1,500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휴대용 미사일의 유효사거리는 보통 3~4킬로미터 정도다. 추진력을 제공하는 로켓모터가 짧은 시간에 모두 연소되고 나면 그 이후는 미사일이 관성으로만 비행한다. 그래서 유효사거리 범위를 벗어나면 기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최대사거리가 제원상으로는 5~6킬로미터에 이르지만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급격한 기동력의 감소 때문이다. 

- 인민군이 사용하는 화성포의 적외선 센서는 한국군 일부가 보유한 SA-18 이글라보다 더 구형이었다. 그래서 플레어 속에서 좌우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아파치를 제대로 명중시키기는 힘들었다.

- 8월 10일 07:40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
자욱한 연막과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포탄 때문에 불과 1.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산성산 정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앞산에 떨어지는 연막탄은 특수하게 만들어진 연막탄인지 한국군에서 빌린 고성능 열상장비로도 연막 저편을 볼 수 없었다. 
"죽갔구만! 이기 대체 어이된 거이가?"
앞산 정상 근처에 마련된 관측진지에서 산성산을 바라보던 포병 관측군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산성산에 배치된 방공포병 병력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것이다.

- 그때 무전기가 직직거리기 시작했다. 무전기에서 길게 세 번, 그리고 짧게 세 번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인민군 장교는 잘 알고 있었다. 진지가 점령당하기 직전 상황이란 뜻이었다. 산성산의 방공포병은 지금 아군에게 진내 사격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관측군관은 잠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인민군 포병군관이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유선전화기를 들었다. 유선전화기는 산 아래사격지휘소와 연결되어 있었다. 

- 전화기 저편에서 한참 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방사포 1개 대대가 일제사격을 퍼붓는 것이라 준비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가지에서의 사격은 탁 트인 개활지에서와 달리 발사대에서 분출되는 화염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관측군관이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머리 위를 뭔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굳어진 군관의 얼굴이 그제야 약간 풀렸다. 그 직후에 갑자기 스피커 볼륨을 0으로 맞춘 듯 모든 소음이 한순간 사라졌다. 군관이 멍한 표정으로 산성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바로 엄청난 폭음과 진동이 고막을 강타했다. 약 1.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지만 그 엄청난 충격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약 10초 가까이 유지되던 폭발음과 진동은 처음 들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졌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8월 9일 17 : 15 미국 샌디에이고 서쪽 2km [한국시간 8월 10일 09 : 15]
"개자식! 만사태평이군."
잠망경을 들여다보던 서승원 중령이 이죽거렸다. 부두에 접안한 대형 로로(RoRo) 선들 안으로 기계화장비들이 끊임없이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두에는 아직도 수많은 군용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Roll in/Roll out'을 뜻하는 로로선은 차량에 화물을 탑재한 채로 배에 적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수송선이다. 하치장에 가득 찬 트럭들과 개미떼처럼 줄지어 배로 올라가는 장갑차들을 바라보는 서승원 중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마지막으로 남은 자항식 기뢰(mobile mine) 여덟 발이 기뢰 컨테이너에서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일반 침저기뢰는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자항식 기뢰는 본체에 소형 추진기가 결합되어 있어서 박위함이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부설할 수 있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자항식 기뢰는 어뢰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어뢰처럼 목표를 빠른 속도로 추적하는 것은 아니다. 자항식 기뢰는 느리고 단지 원거리까지 부설할 수 있는 기뢰일 뿐이다. 

- 마지막 기뢰가 빠져나가고 그동안 박위함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기뢰 컨테이너가 선체에서 이탈해 천천히 해저로 가라앉았다. 그것을 확인한 서승원 중령이 갑작스럽게 명령했다.
"지금 공격한다. 어뢰실, 공격 준비해!"
함장의 공격명령에 김철진 중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뢰를 방금 부설한 마당에 바로 어뢰공격을 실시하라는 명령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거리가 가까운 것이 아닙니까? 함장님. 회피로를 감안하면 거리를 더 띄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뢰가 활성화되는 시간은?"
김철진의 질문을 막으며 서승원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30분 후입니다."
"좋았어. 20분 간만 공격한다."
서승원은 김철진의 반론을 묵살하고 다시 잠망경으로 눈을 가져갔다.

- 김철진이 다시 한번 이의를 제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거리가 가깝다는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기왕 수송선들을 잡으려면 화물을 모두 실은 상태에서 잡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훨씬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장은 지금 공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다. 어차피 만재상태에서 이동 중일 때는 강력한 대잠호위망이 따라붙을 걸세."
"그러나 우리 목표는 배보다 화물이 아닙니까? 함장님."

- "부장은 전쟁이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지?"
"글쎄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김철진이 당혹스러워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 지를 생각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었다. 전투에 임하는 군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었다. 
"기껏해야 한 달일걸? 미국이 그전에 물러나거나 아니면 우리나라가 항복하거나. 오히려 결론은 간단하네. 지금 빈 배를 공격하는 거나 군사물자를 만재한 배를 공격하는 거나 차이가 거의 없다는 뜻이네. 어차피 새로 수송선을 동원하더라도 한국에 도달하기까지는 20일 가까이 소요될 거야." 
말을 마친 서승원은 김철진이 붙들고 있던 공격잠망경을 나꿔챘다. 그 역시 한국이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점검해 보아도 다른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 김철진의 머릿속이 몇 가지 계산을 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지금 상태의 공격성공률과 만재한 수송선에 대한 공격성공률, 그리고 당장 공격할 경우 미군의 수송이 지연되는 시간을 빠르게 계산했다. 물론 거기에는 박위함이 살아남을 확률도 꼭 포함시켜야 했다. 곧 김철진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끄떡거렸다. 
"이제 이해됐나? 표적지시는 내가 직접 하겠다. 부장은 어뢰공격을 지휘하게."

 - 서승원 중령이 표적을 지정하면서 잠망경 손잡이에 부착된 트리거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당겼다. SERO 15형 공격잠망경의 대물렌즈 옆에 장착된 레이저 거리계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레이저를 뿜어냈다. 


- 민간 수송선으로 보이는 두 척의 로로선으로 올라가는 차량들은 분명히 군용 차량과 M2 브래들리 장갑차였다. 그것은 군사해상수송사령부(MSC)에서 징발한 민간선박이었다. 그러나 군용 물자를 적재한 이상 그것은 군함이나 마찬가지였다. 
"목표 21, 방위 공팔십이 (0-8-2)! 거리 2,450! 목표 23, 방위 공팔십오(0-8-5)! 거리 2,730! 확인했습니다!"
김철진 소령이 시원스런 목소리로 보고했다. 서승원 중령이 십자눈금에 목표함정을 지정하는 것과 동시에 박위함의 ISUS-83 전투시스템에는 어뢰공격에 필요한 방위와 거리가 자동으로 표시되었다. 
"백상어를 사용한다! 각각 두 발씩 먹여준다!"

- 백상어(White Shark)는 국방과학연구소와 LG정밀이 개발한 순수 국산 어뢰이다. 1998년에 개발이 완료된 백상어 어뢰는 유선유도 기능은 없지만 강력한 파괴력과 정밀한 유도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백상어는 거대한 수송선을 표적으로 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번에는 기뢰를 부설하지 못한 항만 안쪽 깊숙한 해군전용 부두에 가득히 모여 있는 수송선들이 표적이었다. 잠망경에 낯선 물체 하나가 잡히자 서승원이 배율을 당겼다. 페리급 프리깃 두 척이 모여있었다. 

- 무선유도 방식의 백상어 어뢰는 추적개시점에 당도할 때까지는 관성좌표만을 이용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자체 추적소나를 가동해서 목표를 추적한다. 한꺼번에 다수의 목표를 공격할 때는 표적 하나에 어뢰 여러 발이 몰리지 않게끔 추적 개시점을 정확히 잡는 것이 중요했다. 박위함의 함수에서 백상어 어뢰 네 발이 차례대로 빠져나온 다음 입력된 위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 코스트 가드(Coast Guard) 소속인 그들은, 해군과 공동경비작전을 펼치면서 이제 늘어질 대로 늘어질 지경이었다. 미국의 코스트가드는 해군과 계급체계도 뿐더러 전시에는 해군의 하부조직으로 들어가 서로 긴밀하게 공동작전을 펼친다. 먼로(Munro)함 옆으로 O. H. 페리급 프리깃 루벤 제임스가 서서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코스트 가드가 보유한 함정 가운데가장 큰 해밀턴(Hamilton)급에 속하는 먼로함은 해군의 루벤 제임스함과 견주어도 그다지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샌디에이고 항만은 수송선들로 붐비고 있었고 귀항해서 접안할 부두도 부족했다. 함즈 중위는 페리급 승무원들이 빨리 상륙하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 "레이저 폭탄이었나? 와! 그게 다리 하나를 멋지게 날려버리더군, 대단했지?"
"그거 말인가? 매일 보는 장면인데 뭐 새로울 게 있다고 그래."
함즈 중위는 로버트 서튼(Robert Sutton)이 감탄사를 연발하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항상 그래왔듯이 관련 없는 자들에게는 재미있는 스포츠 중계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함즈나 서튼의 일가친척 중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가족이 없었다.

- 8월 9일 17:38 샌디에이고 서쪽 2km [한국시간 8월 10일 09:38]
"방위 백팔십공! 고속추진 노이즈입니다. 두 개입니다!"

"뭐야?"
음탐장이 급박하게 소리치자 서승원 중령이 잽싸게 잠망경을 남쪽으로 돌렸다. 느긋하게 수송함들을 격침시키던 중에 갑자기 배후에 무엇이 나타난 것이다. 

- "젠장! 프리깃 두 척이다. 잠망경 내려! 긴급공격 준비!"
서승원 중령이 허겁지겁 잠망경을 내리며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본 실루엣 중 하나는 분명히 페리급 프리깃이었다.
"함장님! 하픈을 쏘는 게 어떻습니까? 시간이 부족합니다."
"좋아. 하픈을 쏜다! 발사관 7번 8번 발사 준비!"

- 작은 윤곽이었지만 서승원은 그 배들의 함종까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척은 해군 함정이 아니었다. 함수 부분에 해군과 동일한 76밀리 자동속사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얀색 도장이 그 함정이 코스트 가드 소속 초계함임을 알려주었다. 서승원이 작전관에게 서둘러 확인을 시켰다. 
"한 놈은 프리깃이 아니다. 대잠무장이 없는 초계함이야. 하픈 두 발 모두 페리급을 조준한다!"

- 긴급공격에서는 반응 시간을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조금이라도 어물거렸다가는 이쪽이 먼저 당한다.

- "기관 전속!"
"함장님! 소서스에 위치가 파악될 겁니다."
김철진이 항만 입구에 부설된 수중고정소나망(SOSUS)의 존재를 함장에게 환기시켰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박위함은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나갈 수는 없었다. 

 

- 밀수선박이나 마약운반 선박을 감시하는 먼로는 레이더는 당연히 있지만 소나가 없었다.
함즈는 멍청한 잠수함 한 척이 감히 샌디에이고 내항까지 들어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샌디에이고 내항에 정박했던 코스트 가드 함정 한 척과 해군의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한 척이 맹렬한 속도로 반대쪽 포위망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 그 미친 잠수함은 도망갈 길이 없었다. 아마 한국 잠수함일 거라고 추측하면서도 함즈는 이 먼 거리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할 것이었다. 포위망을 좀 더 좁힌 다음에는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에서 애스록 대잠미사일을 무더기로 쏠 예정이었다. 한국 잠수함은 이제 곧 처참할 정도로 많이 얻어맞고 박살 날 것이다. 

- "젠장할! 저건 대함미사일이다! 우현 전타!"
함장에게 다시 보고할 시간은 없었다. 함교 당직인 함즈 중위가 지금 조함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먼로함이 급격한 회피기동에 들어갔다. 미사일이 시가지가 아니라 먼로함으로 접근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먼로함의 함미 갑판에는 해군 전투함과 같은 벌컨 팰렁스 근접방어체계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함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장비였다. 코스트 가드의 소속 함정 치고 먼로함은 상당히 정교한 무장체계를 탑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미사일은 근거리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페리급 프리깃에서 함포 사격이 시작되고 곧이어 스탠더드 SM-1 함대공미사일이 치솟았다.

- "미사일은 우리가 목표가 아닙니다. 모두 루벤 제임스를 향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젠장!"
감시원이 보고하자 함즈 중위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한편으로 드는 안도감과 함께 먼로함이 잠수함에게 위협이 안 되는 것을 파악한 잠수함 함장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 채프가 쏘아졌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루벤 제임스에 쇄도하던 하픈 대함미사일은 약간 상승한 다음 함수 부분을 올라타고 함교구조물 정면에 박혔다. 그 직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미사일이 폭발했다.  

- 반신반의하자 함장이 음탐장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서승원 중령이 먼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음탐장에게 담뱃갑째 건넸다.
"와아아!"
잠시 머뭇거리던 사령실 요원들이 일제히 환성을 내지르며 음탐장에게 달려들었다. 전날 스노클 항해 중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에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아, 참! 기관실과 어뢰실에도 알려야지. 흠흠! 함장이다. 지금부터 10분에 한해서 전 함정에 흡연을 허락한다. 반복한다. 10분이다. 그동안 밀린 담배를 빨리 피우기 바란다."

- "전과를 파악했나? 부장."
서승원이 만족스러운 듯 담배 한 모금을 김철진 얼굴에 장난스럽게 내뿜었다. 김철진이 콜록거리며 보고했다.
"수송함 세 척, 프리깃 두 척을 어뢰로 격침시켰습니다. 하픈으로 프리깃 한 척을 더 잡았습니다. 그리고 구축함 한 척과 초계함 두 척은 기뢰에 격침됐습니다. 기뢰에 대한 피해는 좀 더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음탐실에서 음문 분석을 잘해두라고 하게. 이제 격침을 확인하려면 소리로 듣는 수밖엔 없으니까. 젠장! 작전은 그리 큰 성공은 아니군. 전투함 격침 비율이 너무 많아."

- 김철진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서승원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한국에서 싸우는 전우들을 생각한다면 서승원 입장에서는 수송함을 더 많이 잡았어야 했다. 잠수함 함장으로서 구축함, 프리깃과 정면승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수송함을 격침시키는 것이 더욱 급했다. 

- "어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겠군."
"그렇습니다. 이제 두 발 남았습니다. 재보급을 받아야 합니다."
김철진 소령도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어뢰 두 발이라면 선단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였고 만약 공격을 받는다면 대응하기에도 모자랐다. 그런데 다시 재보급을 받으려면 코스트 가드와 미해군의 초계범위를 벗어나는 원양까지 나가야 했다. 샌디에이고항을 발칵 뒤집어놓은 마당이었다. 이제부터는 미해군의 경계태세가 당연히 한층 높아질 것이다. 박위함이 미국 연안까지 침투한 것이 드러난 이상 이제 미 해군의 대잠세력들이 몽땅 이곳에 몰려들 것이다. 사실 성공을 자축할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김철진의 인상이 다시 어두워지자 서승원이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휴식을 취하자구. 부장!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야.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구. 알겠나?"
 

- "근접항공지원은 그날 바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키팅은 1991년 벌어진 걸프전을 떠올렸다. 최첨단무기의 경연장처럼 인식된 그 전쟁 역시 미군이 제대로 전쟁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군사평론가들 입장에서 Air Land Battle이 아니라 Air Land Operation이란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 말은 새로운 작전술을 개발해 두고도 정작 전쟁을 수행할 때는 2차 대전 당시부터 해오던 방식 그대로 항공기들이 후방차단 작전에만 치중했다는 말이었다. 항공기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치밀한 대공포화도 피하고 전과도 많이 올려 좋겠지만 지상군 입장에서는 체감이 안 되는 지원이었다.

 

- 미군이 그때까지 바르샤바 조약군을 상대로 준비한 Air Land Battle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육군이 단순히 공군의 협조를 받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육군 군단장이 전술공군을 사실상 통제하는 것에 가까운 권한이 주어져야 했다. 그러나 정작 걸프전에서는 해군 따로, 공군 따로, 육군 따로 전투를 벌였다. 육군이 '우리에게 좀 더 많은 근접항공지원을!'이라고 노래를 불러대도 공군은 여전히 전통적인 임무인 후방차단작전에 더 주력했다. 해병대는 해병대대로 적을 견제, 고착하라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해병대 특유의 돌격정신으로 이라크군의 정면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그 때문에 이라크군이 너무 일찍 철수해서 모든 작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이라크군을 해병대가 붙들어놓는 사이 육군이 우회해서 퇴로를 막는다는 구상이었지만, 포위망을 완성해놓고 보니 그 속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 8월 10일 17 : 32 대구광역시 남구 산성산
꽈웅!
"우아아악!"
포탄 한 발이 원래 예정된 곳에서 조금 못 미쳐 낙하했다. 그래서 이동하는 포탄 낙하지점을 따라 전진하던 한국군 해병대 거의 한 개 분대 병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맨 오른쪽에서 달리던 소총수 한 명만이 살아남아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포탄 구덩이를 응시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씨발탱이들! 똑바로 좀 쏘지!"
바닥에 엎드려 있던 김성훈 병장이 포병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군 포격에 아군이 날아간 것은 김 병장이 본 것만도 벌써 세 번째였다. 언제 그의 차례가 될지 몰랐다. 

- 포 사격은 거리가 멀수록 오차가 커진다. 특히 최대 사거리 부근에서는 오차가 수백 미터에 이른다. 그리고 이렇게 찌는 듯 무더운 날씨에는 공기층이 불안정해서 포탄의 탄도를 더욱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두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오차가 훨씬 커진다. 그래서 가끔 포탄이 포병의 의도보다 더 멀리 날아가기도 하고 훨씬 가까운 곳에 떨어지기도 한다. 포탄이 아군 머리 위에 떨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군의 경우 일반적으로 아군 위치에서 600미터 이내에 대한 지원포격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 미군의 교리를 수용한 한국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성훈이 참가한 이 역습은 아군 포탄에 아군이 희생되는 것을 감수하고 진행된 것이었다. 아군 포격에 벌써 수십 명이 날아갔어도 포격중지 명령 따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군 측의 방어가 워낙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 기관총과 유탄발사기의 집중사격에 걸리면 한 개 소대가 전멸하는 건 순식간이다. 특히 고지전투에서는 기관총 단 한 정만 살아남아도 공격자 전체가 발이 묶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상대의 저지사격을 피하기 위해 아군 포병 탄막에 바짝 붙을 경우 아군 포탄에 날아갈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아군 포병이 쳐주는 탄막에 바짝 붙어 전진하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는 힘들다. 언제 포탄이 머리 위에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초인적인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적 총탄에 맞아 죽지 않으려면 탄막을 따라 최대한 바짝 붙어 전진해야 했다. 

- 강윤택 중령이 조종간 위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전투기가 조금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더니 하얀 연기를 뿜으며 미사일이 쏘아져 나갔다.
"발사를 마친 기체는 빨리 저공으로! 곧 지상에서 패트리어트가 날아올 거다."
강윤택이 땅에 꽂히듯 수직으로 강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봤던 휴게소의 대공포대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고속도로 주변의 야산에서 미사일이 먼저 날아왔다. 미사일 경보장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기갑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대공포대가 따라다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왜 오스틴 쪽이 아니라 휴스턴 쪽에 대공포대의 보호를 받는 기갑부대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휴스턴 쪽에는 미군 기갑부대가 1개 여단이나 있는데도 방공망이 부실해 샌 안토니오로 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강윤택은 아무래도 한국군이 점령한 샌 안토니오는 사방으로 포위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괜히 샌 안토니오를 떠나 섣불리 움직였다가 개활지에서 미군 기갑부대의 대규모 공격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도시에서 농성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미사일부터 피하고 볼 일이었다. 패트리어트는 급속도로 접근해 왔다. 

- "골뱅이 짱이다. 팰메토 인근 고속도로 휴게소에 패트리어트 포대를 대동한 기갑부대 약 1개 대대가 전개되어 있다. 즉각 타격하라! 반복한다. 팰메토 휴게소에서 늦잠 자는 적 기갑부대를 당장 때려잡아라. 대기 중인 도르레 편대에 AGM-154를 장착시켜 당장 출격시켜!" 
강윤택은 공군기지 탄약고에 가득한 폭탄들을 떠올렸다. JSOW(Joint Stand-Off Weapon)라고도 불리는 AGM-154 공대지 미사일 가운데 A형은 대기갑 및 대인용 다목적 탄두이고, 이것은 클러스터탄이다. 이 미사일 뒤에 추진기를 달고 발사하면 사거리가 200km까지 연장된다. 한국군 전투기들은 안전한 샌 안토니오 상공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옆으로 뭔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강윤택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으나 조종간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미사일이 전투기 위로 휙 지나갔다. 미사일 발사대의 레이더에서 전투기가 잡히지 않으니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을 유도할 수 없었다. 솟아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 밝은 빛이 새벽하늘에 생겨났다. 

- "베리타스 체크."
강윤택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한 번씩 더 호출에 응했다. 이것은 미군의 통신감청에 대비해 전투기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 "좋다. 전원 귀환한다. 지상폭격은 다른 편대가 담당한다."
강윤택은 고속도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코스를 잡아 샌 안토니오로 향했다. 며칠 쉴 때는 좋았는데 이렇게 되니까 마음 한구석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돌아가면 차영진 준장에게 아무래도 이사 가는 편이 좋다고 건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 육군은 사방에서 샌 안토니오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 바깥은 다시 캄캄한 세상이 되었다. 해병들은 각자 진지로 뛰어들었다. 김성훈은 잠시 클레이모어 격발기를 확인한 다음 야시경을 착용하고 산 아래쪽 경사지를 살폈다. 야시경으로 보는 세상은 온통 초록 일색이었다. 산 남쪽 경사면을 살핀 김성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풀이 모두 사라진 땅바닥 곳곳에 쓰레기장에 널린 비닐봉지처럼 굴러다니는 물체는 모두 시체였다.
 
- 잘 보이지 않는 아래쪽 경사면에서 불덩어리 몇 개가 굵은 줄을 이끌고 하늘로 치솟았다. 긴 케이블을 끌고 날던 불덩어리는 진지 뒤에 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날아오는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불덩어리는 전 참호선에 걸쳐 대략 70미터당 하나꼴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지뢰지대 개척장비 아닙니까?"
"뭐? 그 무거운 걸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와?"
어둠 속에서 들려온 손상태 일병 말에 김성훈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지뢰지대 개척장비는 보통 트레일러에 싣고 다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국육군이 쓰는 K532 같은 다관절 수송차량을 쓰면 웬만큼 험한 지형 ... 

 

-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한 장면 같군."
정비격납고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와 거대한 불길을 배경으로 리즌 대위가 중얼거렸다. 불길이 이글거리며 리즌 대위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 막상 기지 내로 돌입하자 해병대 전차중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M-1A1 전차에 탑재된 120밀리 전차포는 공군의 각종 정밀장비에 필요 이상으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리즌의 중대원들은 기지에 돌입하기 전에 한국군 장갑차량이 아닌 기지시설물에 대해서는 절대 전차포를 사용하지 말 것을 이미 명령받았다. 한국군 보병들과의 전투는 25밀리 기관포를 장착한 LAV25가 맡고 있었다. 전차의 역할은 스스로 표적이 되어 매복 중인 한국군의 위치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무전 통신망에서는 중대원들이 장갑차들의 방패막이가 되어버린 신세에 몹시 투덜거렸다. 

- 리즌 대위는 포탑을 좌우로 선회시켰다. 열상조준경으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한국군을 찾는 작업은 이렇게 조금 번거로웠다. 눈앞에 보이는 창고 모양의 건물 주변을 약 10초간 수색했지만 눈에 띄는 물체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포탑을 돌리는데 건물 왼쪽 모퉁이에 쌓인 상자 사이에서 하얀 사람 모양의 흔적이 보였다. 
"격납고 왼쪽 모퉁이에 한국군 보병 셋 발견, 멍청한 녀석들이군!"
열영상조준경 화면에는 차갑게 식은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쪼그려 앉은 한국군 보병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병사들은 대전차로켓으로 보이는 막대기 모양의 물체를 들고 있었다. 

- 군복에는 적외선 방출을 억제하는 코팅이 되어 있다. 이 코팅이 잘된 군복은 흔적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지만 주변 환경에 대해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군은 군복에 줄을 세우기 위해 다리미질을 해대는 통에 그 코팅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정보장교에게서 들었다. 리즌이 보기에 한국군은 겉멋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러나 멋을 부리는 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전장인 여기서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겉멋 조금 부린 것에 비해서는 너무 가혹한 대가였지만 그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법칙이었다. 알렉산더의 군대와 싸운 페르시아 코끼리병은 그 잘난 얼굴에 상처를 입지 않으려다가 결국은 몰살당했다.  

 

- 8월 10일 15:50 미국 텍사스 포트 스탁튼 [한국 시간 8월 11일 05 : 50]
"포트 스탁튼(Fort Stockton)입니다. 도시를 우회하고 있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해치를 닫으며 들어왔다. 지휘장갑차 안에서 지도를 살피던 차영진이 웃으며 오성환 대령을 맞았다.
"10시간에 480km를 달렸습니다."
차영진이 웃으며 말했지만 걱정되는 것이 분명했다. 전투가 거의 없어서 그렇지 역사상 전무후무한 진격속도였다. 훈련이나 평시 이동이라도 기갑부대를 이렇게 빨리 움직인 전례가 없었다. 오성환 대령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아직 끄떡없습니다. 전차 몇 대가 퍼질 만한데도 잔 고장 말고는 다들 큰 문제는 없습니다."

- 출발 직전에는 원정군에게 가장 큰 문제가 연료 보급이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휴게소와 도로변 마을에서 쉽게 연료를 보급받을 수 있었다. 미군은 주유소를 폐쇄하거나 한국군이 연료를 못쓰도록 연료에 불순물을 첨가할 겨를이 없었다. 

- 차영진은 텍사스의 두꺼비는 몇 년씩 살아도 수영을 배우지 못한다는 농담이 떠올랐다.
"이제 곧 산맥이군요. 주로 2천 미터급입니다."
차영진이 다시 걱정스레 지도를 살폈다. 기갑부대에게 고산지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지형이었다. 만약 소규모 미군부대가 매복하거나 도로를 파괴하면 한국군은 꼼짝 못 하고 결국 미 공군의 대대적인 공습에 끝장나는 것이다.  

- 현재 한국군의 헬기들은 고속도로 주변 몇몇 휴게소를 기착지로 삼고 있어 그런 문제가 생겨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전투기들이 문제였다. 물론 고속도로에 설치된 구조물을 치우고 긴급 활주로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앞으로 산맥 여러 개가 있지만 다들 소규모이고, 고개만 넘으면 도로는 금방 직선으로 바뀐다. 그러나 전투기를 정비하고 연료를 보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헬기에 분승한 특전사 요원들이 엘파소 공항을 점령했다. 공항 북쪽에 미 육군 항공대 기지가 있었지만 단 한 번의 폭격에 초토화되었다.

- 만약 한국군 주력이 산맥 사이에 갇혀 있으면 샌 안토니오든 엘파소든 모두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미군 입장에서는 활주로를 점령할 필요 없이 파괴하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결국 활주로를 잃은 공군이나, 대공방어망이 없는 기갑부대나 최후는 마찬가지로 파멸이었다.
 
- "공격헬기들이 철저히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교량은 이미 공중기동보병이 점령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오성환 대령이 지도를 주욱 훑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지점은 없었다. 출발 전에 이미 꼼꼼하게 검토했고 한국군은 정확한 시간에 도로교차점과 교량을 확보했다. 수송헬기와 공중기동보병들은 오늘 하루에도 천 킬로미터 이상씩 날아다녔다. 차영진도 오성환 대령의 치밀함을 아는지라 고개만 끄떡였다. 
 

- "자넨 한국에서 숱하게 죽어가는 동료들 생각도 안 하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종서 준위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분노를 실은 로켓탄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연속 날아갔다. 도로 주변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조용하던 길이 지옥으로 변했다. 대부분 엘파소 시민인 텍사스 방위군 제9연대 본부요원들과 지원중대원들을 태운 차량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수퍼 코브라가 파괴된 차량 행렬의 상공을 지나쳤다. 트럭에서 기어 나오는 자들이 몇 있었지만 대부분 중상을 입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행렬 중간의 검은색 버스는 유리창 밖으로 시뻘건 불길을 내뿜었다. 

 

- 전용준 준위는 그제야 사령관이 신신당부한 말이 떠올랐다. 차영진 준장은 텍사스 방위군은 민간인들이니 이들이 공격해 오더라도 위협만 가해서 쫓아버리라고 명령했었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몇 가지 변명거리를 떠올렸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령관이 그렇게 강조했지만 이쪽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의 목숨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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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변에 살포된 지뢰들을 쓸어버리려고 기화폭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냄새를 잘 기억하십시오. 아주 위험한 냄샙니다."

포병관측장교 진수봉 중위가 말을 마치자 최영주 대위가 다가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화장품 냄새 비슷한데요? 이 냄새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쯤은 나도 본능적으로 알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통신병과 중대 지휘부 요원들이 킥킥대며 웃었다. 진수봉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지난 두 번의 전쟁 기간 동안 전투병과 분야에서 여군의 진출이 부쩍 늘어났다. 보병이나 기갑 같은 최일선 병과는 아직 드물었지만 포병은 다른 병과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최영주는 여군장교와 함께 작전을 진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 2,000년 새해 벽두에 합병한 거대 인터넷미디어 그룹인 'AOL 타임 터너'사의 자회사, CNN 방송이었다. 김민석 하사는 아메리카 온라인을 통해 CNN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화면은 불타는 트럭과 버스 안에서 타 죽은 미국인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간에 코브라 공격헬기가 공격할 듯 방송차로 다가왔다가 그냥 휙 지나가는 모습도 잡혔다. 영어가 좀 되는 김민석이 짤막하게 해설을 달았다.
"한국군이 엘파소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텍사스 방위군 병력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계속 떠들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민간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겁니다." 
"총 들고 쏴대는 놈들이 민간인이야? 그럼 우린 경찰이라고 하지 뭐."
이상훈 중위가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그때 화면이 바뀌고 캄캄한 어둠을 배경으로 차량 전조등의 불빛이 가득했다. 그 위로 날아다니는 불빛 몇 개가 보였다. 

- 미 공군 제4 전투비행단 333 비행대대 프랭크 디런 소령은 15,000피트 상공에서 지상에서 격렬하게 치러지는 야간전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캄캄한 밤중이라면 오히려 적과 아군이 더 잘 구분된다. 낮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이 보여 피아를 구분하기가 더 힘들다. 반면에 밤이 되면 피아식별장치가 뿜어내는 희미한 불빛밖에 안 보인다. 작은 불빛이 반짝이는 표적은 아군이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적군, 즉 한국군이었다. 미군 차량들은 차체 위에 건전지로 작동하는 소형 표시기(Beacon)를 장착하고 있었다. 이 불빛은 수평 위치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서는 잘 보인다. 야간투시장치에 잘 반응하는 주파수 대역의 불빛을 내기 때문이다. 

- AN/AAQ-13 항법 포드에서 내보내는 전방 지형의 적외선 영상이 대형 HUD에 나타났다. 헤드업 디스플레이 화면 구석에 작은 숫자로 표시된 속도계는 450노트 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비행고도가 충분히 높았기 때문에 걸프전 당시 저공비행을 해야 했던 선배 조종사들처럼 빨대구멍으로 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디런이 탄 스트라이크 이글은 대구 부근에 있는 제일 높은 산보다 5배 정도 더 높은 고도를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이글 네 대로 구성된 디런의 편대는 일본 혼슈 북부미자와 공군기지를 이륙해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얼마 전 미해병대가 건들거리며 쳐들어갔다가 큰 희생을 치른 다케시마라는 바위섬 상공을 지나서 영일만으로 들어간 편대는 다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영천 상공을 지나 대구로 접근했다. 

- 오늘밤 디런 편대의 암호는 팍스 킬러(Fox killer)였다. 편대에 맡겨진 임무는 미군에 의해 팍스라는 코드네임이 붙은 고가치 표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디런은 이륙 직전 브리핑에서야 비로소 팍스가 대구지역에 있는 한국군 제12군단 지휘소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암호명 팍스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미군 한국원정군이 깊은 관심을 보인 표적 가운데 하나였다. 팍스는 그동안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전투가 격화되자 점점 자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 [깨끗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후방석에 앉은 무기체계장교(WSO) 케네스 피셔 대위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협이 될 만한 전파를 분석해 표시하는 작은 6인치 다기능 디스플레이에는 지대공미사일이나 대공포의 추적 레이더가 사용하는 주파수가 감지되지 않았다.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기경보용 레이더 전파만 잡혔다. 그 전파는 당연히 미군 것이었다. 

- "방심하지 마! 언제 한국 녀석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

디런은 안심할 수 없었다. 한국 공군은 소백산맥 근처 저공에서 맴돌다가 기습적으로 산 너머로 튀어나와 미사일을 발사하고 달아나는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항공 게릴라전이라 이름 지어진 이전법은 30년 전 베트남 공군이 종종 쓰던 방법이었다. F-22 랩터가 폭격무장을 한 전폭기들을 엄호해 주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 숫자가 적어 충분한 호위능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미 공군 전체에서 실전 배치된 랩터는 단 36대뿐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에 배치된 수량은 겨우 24대에 불과했다. 처음 실전 배치되는 최신 전투기들이 모두 그렇듯 랩터는 정비나 유지보수가 어려워 악평이 자자했다. 공중전 성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랩터를 띄우기 위해서 들어가는 노력과 돈은 제작사가 선전한 것보다 훨씬 비싸게 먹혔다. 

그래서 운 좋은 공격편대는 랩터의 엄호를 받을 수 있지만 운 나쁜 편대는 한국 전투기를 만나면 무거운 폭탄을 분리시키고 공중전에 들어가야 했다. 어제도 구미 근방에서 남하하는 한국 지상군을 공격하던 F-16 전투기 두 대가 한국 공군의 습격을 받고 격추당했다.

- 디런은 윙맨에게 경고를 하고 기수를 약간 틀었다. 디런과 윙맨은 팍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4,700파운드짜리 GBU28 폭탄을 두 발씩 장착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종간이 상당히 무거웠다. GBU28 레이저 유도폭탄은 8인치 자주포의 포신을 가공해 만든 BLU113 폭탄에 레이저 유도장치를 결합시킨 폭탄이었다. 다룰 때 주의할 점은, 이 폭탄은 8인치 포탄이 아니라 포신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폭탄은 맨땅의 경우 지하 30미터까지 파고들고 철근 콘크리트는 6.7미터나 관통한다. 특히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관통 시험에서는 6.7미터짜리 구조물을 관통한 다음 약 800미터나 더 전진한 후 멈췄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 "12군단 사령부가 당했답니다! 지휘소가 폭격에 날아갔다고 합니다."
"뭐라구?"
조영식 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모들의 얼굴도 하얗게 굳어졌다. 불안한 듯 천장을 힐끔거리는 참모도 있었다.

- "대구 북서지역에서 예비로 돌릴 만한 병력이 있는가?"

조영식 대장의 질문에 참모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유가 없습니다. 21사단과 해병 1사단이 있습니다만, 미군 기계화부대 선봉이 벌써 성주 일대에 진입했습니다. 30번 국도 선에서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데, 압력이 강해 오래 버티긴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59사단 하나만 남기고 24사단을 빼서 낙동강 서쪽으로 투입할 수도 없는 일. 제대로 장비도 못 갖춘 예비군들을 미군기계화부대 앞으로 내모는 건 반인간적 범죄행위야." 
조영식 대장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소총수들끼리 벌이는 전투라면 예비군을 투입할 수도 있었다. 예비군이 체력은 딸리지만 이른바 짬밥이 있는 만큼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화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단순히 사람 숫자만 앞세운 예비군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예비군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미군 전차의 궤도에 간단히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유일한 대응책은 똑같이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제1야전군에는 그럴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 결단은 빠르고 확실할수록 좋았다. 아군 병력 보전과 적의 진격속도 감소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는 없었다. 하나를 원한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조영식 대장이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12 군단에서 인민군 416육전여단의 지휘권을 인수해, 인민군 6사단 잔여 병력을 합쳐서 그들에게 칠곡 방어를 맡기고, 해병 1사단은 뒤로 빼라. 후퇴시켜!" 

- "사령관님! 그것은 인민군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참모장이 벌떡 일어났다. 끊임없는 전투로 전력이 소모된 인민군 병력을 방패막이로 삼아 한국군 주력이 후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골자였다. 참모장은 한국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인민군들에게 어떻게 그런 가혹한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영식 대장은 차갑게 참모장에게 쏘아붙였다. 

- "전투를 계속하려면, 전력은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인민군은 지금 죽을지 모르지만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어 있어! 그 차이는 길어야 며칠이다. 우리만 살자고 인민군을 죽음으로 떠미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어설픈 인도주의자 흉내는 내지 마라, 참모장!"

 

- 애버내디는 이 전투기들이 다시 출격하면 한국 전투기들은 큰 피해를 입고 남동쪽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들 미군 조종사들이 아무리 훈련이 부족한 예비역이라도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역전의 한국 조종사들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제49기갑사단이 어느새 한국군 지상군 주력의 뒤를 따라잡고 있었다. 그리고 제35보병사단이 급거 남하하는 중이었다. 한국군은 포위 섬멸되거나 멕시코로 도망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전쟁에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애버내디는 생각했다. 

- "
얼굴을 안 보면 믿을 수가 있어야지. 됐어!"
애버내디 대령이 차갑게 내뱉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투비행단에는 오늘 내내 한국군 전투기나 전차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빗발쳤다.  그러나 99%가 거짓말이었다. 애버내디가 신고내용을 믿고 급하게 이륙시킨 전투기들이 발견한 것은 드넓은 사막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실로 빗발치는 거짓 정보는 혹시 한국군의 의도된 정보전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백인 남자와 인텔리 같은 외모의 흑인이 신고한 내용도 대부분 가짜였다는 사실이 애버내디에게는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덕택에 데이비스 만샌으로 가야 할 전투기들이 엉뚱한 곳만 헤맸다. 애버내디 대령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 "피아식별장치 응답은?”
"IFF는 분명히 아군입니다. 그러나 그쪽으로 오기로 한 아군기는 없습니다!"
문제는 미군 전투기를 한국군이 탈취했다는 사실이었다. 피아식별장치는 생각만큼 쉽게 바꿀 수 없다.

 

- 인디언 말로 '검은 산기슭의 샘'이라는 뜻인 애리조나는 투손(Tucson)부터 서쪽으로는 넓은 사막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애리조나 남서부는 소노라(Sonora)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고 피닉스도 원래는 소노라 사막의 오아시스에 불과했다. 기갑부대인 한국군에게는 조금 유리한 지형이지만 기계화된 미군으로서도 손해 볼 게 별로 없었다. 
 
- 미군 카이오와 헬리콥터의 메인 로터 위에는 열영상 조준장치가 붙어 있다. 열영상 조준장비는 각 물체들 간의 미세한 온도차를 감지해 어두운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비가 그친 후 땅바닥이 차갑게 식자 이 장비가 무서운 성능을 발휘했다. 개인호에 숨어 있는 한국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 잠시 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포격이 한국군 매복지를 강타했다. 도로 주변 매복지와 대공 진지가 쑥밭이 되었다. 5분간 지옥 같은 포격이 끝나자 카이오와가 아파치들을 불러들였다. 흩어져 있던 아파치들이 살육을 위한 잔치에 몰려들었다. 아파치 편대 선두가 송산리와 금암리 사이 회랑지대로 들어왔다. 북풍이 불었기 때문에 한국군에게는 헬리콥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포격에 살아남은 한국군을 아파치들이 기관포로 하나씩 저격하기 시작했다. 30밀리 기관포는 웬만한 장갑차들을 일격에 격파한다. 뼈와 살로 이뤄진 사람 몸뚱이는 단 한 발에 산산조각 낼 수 있다. 단 몇 분 만에 아파치들은 살아남은 한국군 대전차 팀을 거의 몰살시켰다. 휴대용 대공미사일 몇 발이 발사됐지만 아파치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 패트릭 머니메이커 소령이 진땀을 뻘뻘 흘렸다. 조금 전에 미군전차부대가 폭격당하는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이었다. 미사일이 사방에서 저공으로 날아와 기갑부대를 밀착 지원했던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 시스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방어력이 막강하다는 M-1A1 전차의 상면장갑이 뻥뻥 뚫리 불길이 치솟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머니메이커 소령은 한국 전투기들이 걸핏하면 AGM-154 추진기장착식 미사일을 발사해 미칠 지경이었다. 추진기 장착식은 최근에 개발되어 아직 전군에 공급된 무기체계가 아니었다. 발사훈련을 받은 조종사도 드문 편이었다. 그런데 해군항공대 보급창을 턴 한국군은 물 쓰듯 그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국군으로서는 효과만점이겠지만, 한국군을 추격해야 하는 미군 기갑부대에게는 쥐약이었다.

- "뭐야? 자네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린가? 이걸 보게! 자네가 최선을 다한다는 공군에서 보낸 자료야. 총 소티 수가 한국군이 더 많다는 게 말이나 되나?" 
뉴섬 준장이 머니메이커 소령에게 보고서를 집어던졌다. 머니메이커 소령도 읽어본 내용이었다. 작전에 동원된 전투기 대수는 미군이 훨씬 많았지만 총 출격회수는 한국군이 더 많았다. 한국군 전투기들은 1개 대대밖에 안 되는 적은 숫자이지만 훨씬 자주 이륙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한국군 지상군이 당한 것보다 미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신에 한국군 전투기의 피로도는 급속히 높아지고 정비사도 죽을 맛일 것이다.  

- 그동안 한국에서의 전황이 차지했던 TV 뉴스 프로그램의 머리기사는 어느새 미 본토 남부지방이 장식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미군이 패전했다는 내용과 오늘은 미국 남부 어느 도시가 한국군에게 점령당했다는 기사였다. 미국 대통령도 매 시간마다 애리조나의 전황을 보고 받는다고 알려졌다. 

- 위튼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언제 헬리콥터 밖으로 던져질지 몰랐다. 실제로 위튼은 고참 중사 시절 사람을 헬리콥터 밖으로 던져버린 일이 있었다. 그는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같이 훈련하던 그린베레 대원 두 명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리고 악어들이 바글거리는 플로리다 늪지대에 던져버렸다. 그를 아낀 상급자 덕분에 위튼은 군법회의까지 가지는 않았다. 뜻밖에 간단한 징계만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소문이 쫙 퍼져 위튼 앞에서는 모두들 말조심을 하게 되었다.

- 위튼은 김해공항에서 있었던 영웅적인 행위로 의회명예훈장이 내정되어 있었다. 의회명예훈장은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훈장으로는 최고의 것이다. 그러나 위튼은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상사님! 의회명예훈장을 타실 텐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선전도구가 되는 걸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선전도구라뇨?"
엉뚱한 위튼의 대답에 피즈가 다시 물었다.

"이 멍청아! 현장에 가본 적도 없는 멍청한 작전장교들 덕분에 앞길이 창창한 젊은 놈 수십이 죽고 수백이 다쳤어. 내가 받는 그 훈장은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윗대가리들이 그다지 멍청한 놈들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거란 말이야. 알겠어? 죽은 전우들 피값으로 차지하는 명예란 말이다!"

- "오우~ 크라이스트!"
공병이 위생병을 구출해야 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할릿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린 할릿은 남은 중대원들로 구조대를 편성했다. 이제는 지뢰지대 돌파가 문제가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중대원들을 빨리 지뢰밭에서 꺼내야 했다. 

- "말하지 말게! 곧 헬리콥터가 도착해. 자넨 살 수 있어!"
"아닙니다. 전 죽어요.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 우리가 바보였습니다. 전면은 미군 방식처럼 보였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니 러시아 식으로 섞어놨습니다." 
지뢰전문가라고 자부하던 스티브 상사가 어이없게 지뢰에 당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스티브 상사는 할릿의 얼굴에 피가 튈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해댔다. 
 
- 8월 12일 23 : 15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 [한국시간 8월 13일 14 : 15]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는 한밤중에도 너무나 뜨거웠다. 그늘에서 기온을 재는 백엽상 온도계가 대낮에는 섭씨 40도를 넘나 든다면 할 말 다한 셈이다. 기온은 밤에도 떨어지지 않아 섭씨 25도를 웃도는 밤이 많다. 대신 겨울에는 건조하고 따뜻해 피한지로 인기가 높다.

하루 내내 태양열이 내리 활주로는 밤인데도 엄청나게 더웠다. 황인호 중령은 웃통을 벗어 제치고 야자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있었다. 달 없는 밤에 쏟아지는 별빛 사이로 유성이 흘러갔다.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나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 "지원은 없습니까? 이러다간 우린 전멸당합니다!"
마빈이 위튼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중기관총은 장전된 실탄을 다 소모해 버렸다. 예비탄이 있겠지만 잔해 더미에 깔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빈은 40밀리 유탄을 쏴서 한국군의 발을 몇 번 묶었다. 그러나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위튼이 다시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이봐! 알파 위스키! 3분 넘게 걸린다면 차라리 오지 마라! 그전에 우린 모두 시체가 되어 있을 거다. 우린 지금 완전히 포위되어 있단 말이다. 실탄도 얼마 없다." 

 

- 추재국이 나뭇가지라고 생각한 것은 작은 활이었다. 이은경이 시위를 팽팽히 당기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추재국이 다시 보니 그 활은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정통 조선식 국궁이었다. 추재국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팀장님은 석궁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목표가 가까울 때나 쓰는 거고. 단궁이란 게 관리하기 워낙 복잡하거든."

- 국궁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관리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국궁은 활시위를 벗기면 반대로 둥글게 말린다. 그렇게 하는 것을 활을 부린다 했다. 이은경은 그것을 천에 싸서 배낭에 보관했다. 습기 찬 곳에서는 활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단궁이라 불리는 복합궁이 그렇다. 그래서 습도가 높은 파나마 열대우림이나 일본, 서유럽에서는 복합궁 대신 일반적으로 커다란 장궁을 쓴다. 여러 가지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 소형 복합궁은 드넓고 건조한 몽골 초원에서나 쓰는 무기였다. 

- 풀숲에 숨으면 들킬 염려가 없지만 이렇게 확 트인 곳에서는 시력이 좋은 원주민들 눈에 띌 우려가 있었다. 파나마 같은 곳에서 동양인은 너무나 간단히 구별된다. 

- "대전회통에서는, 무과시험 활쏘기에서 과녁 거리가 240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조총은 겨우 100보야."
사람의 한 걸음을 뜻하는 보(步)라는 단위는 여러 가지 척도가 있어 일률적으로 얼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대강 90cm에서 120cm 정도로 추산하는 경우가 많다. 무과시험 활쏘기에서의 사거리가 240보라는 것은 유효사정거리를 뜻한다. 
"마을은 여기서 최소한 500미터는 떨어져 있는데요?"
추재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은경의 기억이 옳다 해도 척도를 어떻게 따지든 원주민 마을은 사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추재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은경이 들고 있는 화살은 보통 화살의 절반 크기에 불과했다. 화살을 얹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길 수도 없을 정도로 짧았다. 

- "이게 있으니까 괜찮아."
이은경이 기다란 막대기를 허리에서 꺼내 들어 활에 재었다. 원래는 가느다란 원통인데 거의 반으로 쪼갠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위치마다 세심하게 다듬은 흔적이 역력했다. 이은경이 작은 화살을 그것에 넣은 다음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이것을 통아라고 한다. 작은 화살은 애기살이지. 편전이라고도 부른다. 간단한 원리지만 이 두 가지 때문에 사정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다. 천 보나 날아간다는 말도 있지만, 힘이 엄청 좋아야 가능하겠지." 
 
- "너도 앉아.”
바위 위에 앉은 이은경이 다시 화살을 날렸다. 유럽이나 일본식 장궁과 달리 원래 말 탄 자세 그대로 쏘도록 진화한 단궁은 이렇게 앉아서도 쏠 수 있었다. 쌍안경을 잡은 추재국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은경의 활이 무서웠다. 

- "저놈들이... 우리가 50미터나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편전을 단순히 사정거리가 길다는 것만으로 위력적인 무기라고 여기면 안 된다. 원래 화살 자체가 그리 멀리 날아가지도 않는다. 게다가 편전 같은 작은 화살이 날아오면 누구나 적이 가까운 거리에서 쏘았다고 오판하기 쉽다. 그래서 이쪽은 위치를 들키지 않고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피면 변경의 무관들에게 편전 사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조정에서 자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편전은 조선시대 최상층 관료들도 그 비밀을 적에게 넘기기 싫어할 정도로 강력한 비밀무기였다.

 

- 화살이 꽂힌 방향을 보면 그것을 쏜 방향은 즉각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를 제대로 추산하지 못했다. 
땅바닥에 엎드린 미군 병사들의 등짝에 차례로 화살이 박혔다. 엄폐물 뒤에 숨어도 소용이 없었다. 활은 기본적으로 곡사무기이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미군 병사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꼼짝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창을 들고 설치던 원주민들은 화살이 하늘에서 쏟아진다며 겁에 질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 "적이 본격적인 공중강습을 기도하고 있지만 주변에 있는 한국군은 우리뿐이다. 위기는 곧 기회야. 오늘을 놈들 인생에서 제일 끔찍한 날로 기억하도록 만들자. 진 중위. 확실히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얼굴이 땀에 젖은 진수봉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블랙호크와 치누크로 이뤄진 수송헬리콥터 부대가 땅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착륙지점을 표시한 연막이 헬리콥터가 일으킨 바람에 흩어졌다. 색깔 여러 개가 섞인 연막은 암호화된 코드를 표시한다. 적이 아군으로 위장해 헬리콥터를 유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 블랙호크는 반경 30미터의 안전지대가, 더 대형인 치누크는 35미터 정도의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지점에 여러 대가 동시에 착륙하면 적의 포격에 대량으로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보통은 두 대 혹은 세 대씩 나눠 착륙한다. 대충 계산하면 180x60미터 구획이나 140x70미터 구획이 만들어진다.  

- 첫 번째로 헬리콥터 한대가 착륙했다. 바퀴가 땅바닥에 닿자마자 병사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착륙한 헬리콥터는 30초 이상 지상에 머물지 않는다. 언제 포탄을 뒤집어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재빨리 줄을 지어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 "결정을 도와드리기 위해 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채은석 중사가 피에 젖은 손으로 수류탄을 들었다. 안전핀이 뽑혀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옆에 있던 진수봉이 채 중사의 손을 움켜쥐었다.
"채 중사! 무슨 짓이야!" 

- 그러나 두 표적 간의 중요도 차이는 단어의 차이 이상으로 아주 컸다. 그런데 이번 임무에서는 특이하게도 예비표적이 없었다. 한 차례 공격만 성공하면 곧바로 기지로 돌아가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캠벨은 마음이 별로 가볍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계속 레이더 경보 발신기 화면을 확인했다. 포착된 전파들은 모두 장거리 조기경보용 레이더에서 발신된 것들이었다. 당연히 미군의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미사일이나 대공포의 추적 레이더 전파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한국군이 스텔스기를 추적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에 캠벨은 감사했다. 

- 스텔스기를 탐지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스텔스기에 반사되는 전파가 주변의 반사 전파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의 반사전파들을 적절한 장치로 걸러낼 수만 있다면 스텔스기는 레이더에 쉽게 잡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 그 수많은 잡신호들 속에서 스텔스기가 반사하는 특정한 신호를 가려내는 것은 보통 기술과 경험으로는 달성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는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스텔스기에 당한 국가들이 대부분 러시아식 방공망을 구축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캠벨은 최근 러시아가 한국과 너무 밀착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컴퓨터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 스텔스기 탐지 기술은 민간 컴퓨터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 때문에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구형 레이더도 신호처리 부분을 개량하면 신형이나 다름없는, 오히려 스텔스기 탐지에는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적절히 네트워크로 통합되면 무서운 성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전파를 발신하는 모든 것을 대 전파원(Anti-Radiation) 미사일로 날려버리면 된다. 그러나 신호를 발신하는 것이 모두 레이더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군도 바보가 아니었다. 한국군은 레이더를 빈번하게 이동시키고 기만장치를 많이 사용했다. 미국이 아무리 부자나라라 하지만 모든 전파원에 미사일을 쏟아부을 정도로 돈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 미 공군은 소백산맥 북쪽 지역의 방공망을 제압하기 위해 전투기들을 몇 차례 투입시켰다. 그러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오히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요격기들 때문에 피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군 전투기들이 도사리고 있는 이 지역을 비교적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항공기는 스텔스기인 F-117A 나이트 호크와 F-22 랩터 두 기종뿐이었다.

- 박쥐는 청주 부근에 전개된 레이더 사이트의 암호였다. 각 사이트에서 수집된 정보는 광케이블이나 마이크로웨이브 통신망을 통해 이곳 제2중앙관제소로 집중된다. 각 레이더의 정보가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화면에 하나로 표시되는 것이다. 박쥐가 돌리는 레이더는 구식이었다. 창고에 보관된 지 10년이다 되어가는 구식장비였다. 그러던 것이 계속되는 미군의 방공망제압작전에 레이더가 상당수 파괴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 구식은 아니었다. 레이더의 신호처리장치 부분을 개량해 탐지능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러시아 엔지니어들이 이 레이더의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한국군 정비사들이 깜짝 놀랐다는 말도 들렸다. 레이더 개량작업을 한 러시아 엔지니어들은 스텔스기까지 잡아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 그러나 그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자주 엉뚱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아직 세밀한 부분에서 조정이 제대로 안 된 탓에 허위 표적이 자주 떴다. 그래서 관제사와 요격기 파일럿을 허탈하게 만든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다른 레이더 역시 마찬가지다. 대형 레이더가 설치되면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동안 계속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한다. 관제사와 정비사가 어느 정도 레이더 특성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 소대장은 계속 주의할 것을 지시했다. 박주헌은 도랑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동서고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장에 선 사람은 항상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 예측을 잘한 자는 승리했고, 그렇지 못한 자는 패배했다. 혹시 미군 전차의 거대한 포신이 이쪽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몸 전체가 땀으로 젖어갔다. 

- "야! 차 똑바로 몰아!"
박주헌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 전방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섬광이 번쩍거린 지 1초도 지나기 전에 차체를 뭔가가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미군 전차가 먼저 쏜 것이다. 포탄을 맞은 충격으로 열상 조준경 화면이 깜빡였다. 
"맞았어요! 우린 죽습니다!"
장전수 이시우가 주저앉아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새꺄! 아가리 닥치라!"
문창규가 고함을 빽 질렀다. 전차는 실내가 좁아 승무원들 간에 감정 전달이 아주 빠르다. 한 사람이라도 공포에 질리게 되면 다른 승무원들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문창규의 서슬 퍼런 고함에 이시우가 입을 다물었다. 

- 빗속에서 기다리는 1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언덕 너머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접신관을 장착한 포탄인지 허공에서 엄청난 섬광이 번쩍였다. 포탄은 정확하게 여섯 발씩 세 번 터졌다. 첫 번째 포탄이 떨어지자 3소대가 경부선 철도에 바짝 붙어 전진했다. 
박주헌의 소대도 일제히 언덕 위로 연막탄을 발사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연막이 제대로 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일부나마 그 방향으로 시선을 잡아둘 수 있다면 이 계획은 성공이었다. 
  

- "전방에 적 전차!"
불과 3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미군 전차 두 대가 보였다. 그 전차들은 포도밭 속에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낑낑대고 있었다. 포도밭은 시멘트 지주와 철사줄이 얽혀 있어 간단한 대전차 장애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군은 캄캄한 밤이라 그곳이 포도밭인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조준경의 빨간 십자선이 M-1A2 전차의 포탑 아랫부분에 멈추는 순간 120밀리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강한 반동에 54톤짜리 전차가 움찔거렸다. 포탄을 맞은 미군 전차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몇 초가 흐른 다음 포탑 후방의 탄약고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 [여기는 오뚜기 3, 오뚜기 1은 당했다. 놈들은 특수탄을 쓴다. 머리 위를 조심하라! 언덕 뒤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마라!]
"젠장! 스태프에 당했구나."

- STAFF는 포탄 앞부분에 레이더 탐색기를 단 전차포탄이다. 포에서 발사되면 십자형 날개가 펴지고 전방에 있는 소형 레이더가 작동한다. 레이더가 표적을 탐지하면 표적 머리 위로 날아가면서 아래를 향해 탄두를 폭발시킨다. 전차의 포탑 상면은 장갑이 얇기 때문에 정면보다 훨씬 쉽게 뚫린다. 지금처럼 언덕 뒤쪽에 숨어있는 전차를 격파하기에 아주 유용한 무기다.
 
- 박주헌은 그제야 문창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격파된 척하고 있다가 미군 전차들이 뒤통수를 보일 때 기습하려는 것이다.
"너그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해치를 모두 열자 빗물이 차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승무원들의 옷이 삽시간에 젖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박주헌은 포수용 조준경이 안 젖도록 군복을 벗어 그것을 가렸다.
 

- 포탑 후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해치가 모조리 열린 데다 포신까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영락없이 격파된 모습이었기 때문에 미군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문창규가 해치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포탑 돌리라!"
엔진이 정지됐지만 배터리로 충분히 포탑을 돌릴 수 있었다. 빠르게 돌아간 포탑이 제일 후미를 따라가는 M-1A2의 뒤통수를 노렸다.
 
- 8월 15일 07 : 11 샌프란시스코 서쪽 1,210km [한국시간 8월 15일 23 : 11]
박위함으로 물자가 전달되기 시작했다. 정태원 대령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사다리를 내려왔다. 박위함으로 건너가려는 것이다. 정태원 대령은 둔중한 체구답지 않게 날렵한 솜씨로 주정에서 잠수함으로 건너뛰었다. 
"조심하십시오, 선배님. 안 그래도 노친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어쩌시려고요?"
어느새 사령탑 위로 올라온 서승원 중령이 아래를 내려보며 정태원 대령을 반갑게 맞았다. 서로가 면도도 못한 채 거무튀튀한 산적 꼴이었다. 신사 중의 신사라고 할 수 있는 깨끗한 해군 장교 이미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야간에 보급하는 것이 좋지 않았겠습니까?”
크레인으로 옮겨지는 어뢰를 쳐다보며 서승원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연료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급유가 진행 중이었고 식료품과 식수도 마찬가지였다. 양쪽 함정의 승무원들이 줄지어 서서 통조림 박스를 능숙하게 전달해 나갔다. 그러나 어뢰실 요원들은 장전 크레인과 힘겨운 씨름 중이었다. 어뢰 보급에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서승원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야간이라면 작업시간이 네 배 이상 걸리지. 사고가 날 수도 있네. 그렇다고 불을 밝힐 수도 없잖나. 요즘 적 항공초계 빈도가 계속 늘고 있네. 차라리 훤한 새벽이 적당한 시간이야.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 정태원 대령이 대답하자 서승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쪽에서는 레이더를 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항해용으로 사용하는 수상레이더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미군이나 코스트 가드 소속의 초계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만약 대공레이더를 사용했다간 군함이라는 정체가 바로 폭로되고 만다. 민간선박은 대공레이더를 탑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태원 대령 말대로 눈으로라도 미리 위협을 알 수 있는 새벽시간이 좋을지도 몰랐다. 미국은 서머타임이 시행 중이고 이곳은 미 서해안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이 시간에 겨우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정태원 대령이 담배를 한 모금 빨며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 초계기가 들이닥칠지 몰랐다. 만약 초계기에서 레이더를 사용한다면 이쪽에서 먼저 위협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레이더를 끄고 초계활동을 할 경우도 고려해야 했다. 맑은 하늘이라 시계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마스트 꼭대기마다 배치된 견시수들이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대공경계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원 대령이 내뿜은 담배연기는 한숨과 함께 길게 이어졌다. 
"정보사단에서 정보망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한국을 향하는 선단의 새로운 항로를 아직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세. 그리고 선단에 호위도 엄청나게 달라붙을 테고 말이야."
정태원은 겨우 한 척뿐인 잠수함으로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걱정된 것이다. 박위함과 같이 속도가 느린 디젤 잠수함은 한 번 포위망에 갇히면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이곳은 대양이라서 한반도 근해처럼 복잡한 수중지형을 이용한 은폐가 불가능했다.  

- "미군의 탄약 소요가 예상보다 훨씬 늘어나고 있다는 정보야. 수송 최우선 순위를 탄약으로 돌렸다는 정보가 있거든. 곧 한국을 향해 수송 선단 하나가 또 출발할 걸세. 자네에게는 위험한 임무이지만 이걸 꼭 잡아내야 하네."
"선배님. 적의 호위함들이 많이 달려드는 것은 겁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선단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승원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선단을 공격하는 것보다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박위함 혼자서는 선단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서승원 중령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탄약물자가 선적되는 샌 디에고 군항으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위함이 샌 디에고를 공격한 이후 대잠경계가 몇 배로 강화되었다. 서승원은 지난번 8월 9일의 공격에서 수송선단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게 더욱 아쉬웠다. 그때는 잠수함에 달려드는 미국 수상함정들을 상대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그때 못한 일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서승원이 어뢰반 요원들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어느새 연료와 식수 보급은 다 끝나고 굵직한 호스가 주입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뢰 보급은 이제 겨우 반이 넘었을 뿐이었다. 어뢰는 6발, 게다가 하픈은 아직 한 발도 적재하지 못했다. 지금은 승조원들이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어뢰를 적재하고 있었다. 이것들까지 잠수함 안으로 탑재되면 모두 10발이 되는 셈이다.

- 함수 부분의 어뢰발사관의 외부덮개를 열고 거꾸로 어뢰를 탑재하는 방식의 209급 잠수함은 그 복잡한 방법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209급 잠수함인 박위함이 이렇듯 복잡한 어뢰탑재 방식을 쓰는 것은 비좁은 공간에 어뢰를 최대한 많이 탑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 "저희야 위험이 닥치면 숨을 수라도 있지만 선배님이 걱정입니다. 놈들에게 발각당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외롭고 힘든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태원 대령도 마찬가지였다. 서승원이 걱정스런 눈길로 정태원 대령을 바라보았다. 정태원은 빙긋 웃고 있었다.
"경보! 경보! 2시 방향에 항공기입니다! 2시 방향에 항공기!"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견시수가 북서쪽 하늘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러댔다. 거리가 멀어 어떤 항공기인지 식별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간 여객기는 아니었다. 여객기들은 이렇듯 눈으로 볼 수 있게 낮은 고도를 비행하지 않는다.

 

- 8월 15일 08 : 04 샌프란시스코 서쪽 1,080km [한국시간 8월 16일 00:04]
"코스트 가드 소속 초계기에서 부상한 상태의 잠수함을 발견했답니다. 부상한 잠수함과 어선이 함께 붙어 있다고 합니다."
부함장이 통신지를 건네며 간단히 요약해 보고했다. 부캐넌 대령이 찬찬히 내용을 훑었다.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영악한 놈들! 어선으로 위장시켜 보급을 하다니!"
리처드 부캐넌(Richard Buchanan) 대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태평양에 배치된 미 해군 함정들을 일주일 동안이나 숨바꼭질시킨 장본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잠수함 한 척 때문에 한국에 배치된 7함대 소속 전투함까지도 동태평양 지역으로 다시 배치되었다. 
 
- 부캐넌 대령이 전투정보실이 쩌렁거리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곧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인 폴 F. 포스터(Paul F. Foster)함이 폭발적인 가속력을 받아 북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같은 전대 소속의 구축함, 그리고 프리깃들이 포스터함 뒤를 따라 일제히 속도를 높여나갔다. 

- "설마 놈이 선단 위치를 알고 있을까?"
부캐넌 대령이 부함장에게 나직이 물었다. 만약 선단의 정확한 위치를 한국 잠수함이 알고 있다면 매복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골치 아픈 일이었다. 
"우리가 출항한 것을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위치는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이 정찰위성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태평양 한복판에서 우리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잠수함이 대규모로 동원됐다면 모르지만, 해군 정보국에서도 태평양에 투입된 잠수함은 기껏 한 척 내지는 두 척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부함장의 설명을 들으며 부캐넌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캐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잠수함을 놓쳤을 경우에 걱정할 일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 부캐넌 대령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조금 뒤면 장거리 대잠초계기인 오라이언이 목표 해역 상공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그전까지 한국 잠수함과 보급함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오라이언이 도착하는 시간은?"
"초계중인 오라이언은 50분은 걸립니다. 기지에서 긴급 출격한 오라이언들은 120분이 소요됩니다."
 

- 그런데 대잠헬기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근처에 구축함이나 프리깃과 같은 전투함이 있다는 뜻이었다. 박위함이 있는 해역은 육지로부터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지상기지에서 이륙한 헬기는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미군 수송선단이 있을지 몰랐다.

- 그때였다. 보급선에서 갑자기 흰 연기가 치솟았다. 하늘로 솟구친 흰 연기는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며 미 해군의 대잠헬리콥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보급선에서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발사한 것이었다.
"대잠헬기들을 우리한테서 떼어놓으려는 거다.”
잠망경을 계속 쳐다보며 서승원 중령이 중얼거렸다. 헬기들이 보급선 쪽으로 유인되지 않자 정태원 대령이 무리수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서승원 중령은 정태원 대령이 박위함은 신경 쓰지 말고 도망칠 데까지 도망치기를 바랐다. 

- "함장님! 잠망경을 내려야 합니다. 적 레이더에 탐지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김철진 소령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함장에게 조언했다. 박위함에서 정태원 대령의 보급선을 지원할 방법은 없었다. 박위함이 살아남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잠망경을 내린 서승원 중령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 게다가 어선이라고 얕볼 것이 아니었다. 최고 속도로 도주하는 그 위장 보급선은 속도가 페리급 프리깃에 맞먹을 정도였다. 때문에 속도가 빠른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폴 F. 포스터가 직접 어선을 쫓아야 했다. 부캐넌 대령은 당장 그 위장보급선을 격침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함대 호위지휘관은 나포하고 싶어 했다. 위장보급선 선원들은 샌 디에고 공격사건의 전말은 물론이고 태평양에 배치된 한국군 잠수함의 동향을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견시수의 보고대로 어선이 선회를 시작하자 부캐넌 대령이 급박하게 함포사격을 중지시켰다. 함포가 떨어지는 데 측면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도주를 포기한 것 같은데?"
부캐넌 대령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함교 난간에 있던 신호수가 점멸신호기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발광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어선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부캐넌 대령이 본 것은 선체 중앙에서 피어오르는 흰색 연기였다. 
"뭐야. 연막탄인가? 아니! 으아아!"
부캐넌이 잠깐 동안 연막신호라고 생각한 것은 실수였다. 연기사이로 빨간색 점이 쏜살같은 속도로 포스터함을 향하고 있었다. 부캐넌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 첫 발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포탄은 연속적으로 포스터함을 명중시켰다. 경쾌한 그 포탄의 연속 발사음은 육군이 M-16 소총소리를 정확히 가려내듯이 해군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낯익은 소리였다. 바로 40mm 보포스 쌍열포였다.

- 포격은 점점 함교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캐넌은 어선에 탑승한 승조원들이 틀림없이 해군일 거라고 확신했다. 전투가 뭔지 잘 아는 녀석들이었다. 어선은 계속 구축함의 함교 구조물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함교 바로 아래쪽 갑판에 폭발이 일었는지 거센 충격이 밀려왔다. 그러나 구축함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포스터함의 함포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쪽은 무인자동함포이기 때문에 사격은 매우 정확했다. 초탄이 발사되고 함교 위쪽의 반구형 레이돔에 장착된 SPQ-9B 사격통제레이더가 포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탄도 계산과 동시에 사격컴퓨터가 착탄 위치를 계산하고 곧바로 두 번째 포탄의 발사각을 수정했다. 
 
- "뭐야? 저건!"
그곳은 함포가 맞은 장소도 아니었다. 붉은색 화염 두 개가 치솟고 배는 아주 간단하게 두 동강이 나버린 채로 기울어졌다. 부캐넌은 배 안에 적재하고 있던 무기들이 화재에 유폭 했을 가능성도 잠시 따져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폭발물이라도 그렇게 한꺼번에 폭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침이었다.

 

- 유조선은 격침당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을 경유하든지,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해서든 전장에서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타격으로 미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반 수송선이었다. 

- 8월 15일 18 : 52 샌프란시스코 서쪽 1,310km [한국시간 8월 16일 10 : 52]
긴장을 이기지 못한 소나장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겨우 300미터 옆으로 미 해군의 페리급 프리깃이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미국 프리깃이 액티브 소나를 사용한다면 수중 250미터에 머무르고 있는 박위함의 위치는 단박에 노출되고 만다. 

 

- 서승원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소나 헤드폰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머리 위에서 스크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승원 중령의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선단의 좌측 전방 부분을 맡은 이 페리급 프리깃만 무사히 넘긴다면, 서승원 중령이 모자를 벗고 잠시 땀을 쓸어내렸다. 페리급 프리깃만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바로 뒤에는 수송선단이었다. 돼지같이 동작이 굼뜬 수송선단 바로 한가운데로 박위함이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측면에 다른 호위함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박위함이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 공격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뚱뚱한 수송선들 때문에 호위함들이 잠수함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함장님! 음탐실입니다. 목표 8은 방금 통과했습니다. 이상한 징후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음탐장이 숨을 가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보고하자 서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부장 김철진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계산을 마친 김철진 소령이 고개를 들어 함장에게 보고했다. 
"공격 순위를 결정하겠습니다. 탱커들이 섞여 있습니다만, 탱커는 공격에서 제외했습니다. 공격은 맨 마지막 열과 그 앞 열인 4열입니다. 표적은 모두 여덟 척입니다. 어뢰 여덟 발을 동시에 공격하는 방법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좋은 생각이야. 근데 부장." 
설명을 다 들은 서승원이 고개를 들어 김철진을 다시 불렀다. 

"넷! 함장님."
"어뢰는 여덟 발이 전부야. 그걸 다 쏘고 나면 더 이상 어뢰가 없다는 것을 감안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함장님. 두 번째 공격할 때까지 우리가 살아남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송선단이 뿔뿔이 흩어지면 공격하는 것도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돼지 먹은 한 방에 따는 겁니다. 시간을 주면 우리가 불리해질 겁니다." 
김철진 소령이 말미에 특히 힘을 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서승원 중령은 김철진의 의견에 바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김철진과 눈길을 마주쳤다. 두 차례의 전쟁을 함께 무사히 넘긴 직속 부하였다. 항상 저돌적인 작전으로 부하들을 이끌어왔던 서승원 중령이지만 이번만은 그에게도 부담감이 앞섰다. 
"부장! 무모한 작전은 그동안으로도 충분했네. 나의 무모함을 부장이 항상 따라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이번은 정말 어려울 거야. 젠장!"
서승원 중령이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장만큼은 꼭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 부장뿐만이 아니었다. 부하들 모두 집으로 무사히 귀향시켜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승낙해 주십시오, 함장님. 어차피 퇴로를 계산한 작전이라 해도 그것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준다. 실패는 없다."
"물론입니다."
서승원의 질문에 김철진 소령은 마치 훈련소의 신병이 교관에게 응답하듯 배에 힘을 잔뜩 주고 고함치듯 대답했다. 사령실 요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함장과 부장에게로 쏠렸다.
"공격을 성공시키고 우리는 무사히 탈출한다. 문제없겠나?"

"예! 그렇습니다!"
  
- [바이얼러직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음파 발신원의 방위가 계속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윽! 이건!]
그것은 음파에서의 도플러 효과를 말한다.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질수록 음파는 파장이 짧아지고 높은 소리가 나는 반면 멀어질 때는 파장이 길어지며 낮은 소리로 변한다. 이 특성을 이용하면 음파를 발생하는 파원의 이동방향과 속도 등을 역으로 계산할 수 있다. 
 
- "뭐야? 누가 어디서 어뢰를 쐈다는 거야!"
부캐넌 대령이 고함을 지른 것과 동시에 포스터함의 정면 쪽을 항해 중인 수송선 한 척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대형 수송선이라고 하지만 덩치만 컸다 뿐이지 군함보다 견고한 것은 아니다. 용골 아랫부분을 명중당한 수송선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난 채로 두 척의 조각배가 돼버렸다. 

- 구축함이 방향을 바꾼 것은 어뢰가 구축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회피를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쪽이 유선유도인 이상 닉시 어뢰기만시스템에는 속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7번 어뢰, 명중 10초 전입니다."
김철진 소령이 스톱워치를 보며 외쳤다.
이제 마지막 목표인 수송선이었다. 속도를 높이려고 애썼지만 그 수송선은 최고속도가 21노트 정도에 불과했다. 신속대응 예비선대라고 번역될 수 있는 RRF(Ready Reserve Fleet)는 고속해상 수송선 FSS (Fast Sealift Ships)들과 달리 어뢰를 피하기에 충분한 속도는 분명 아니었다. 
 
- 음탐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서승원 중령이 발을 구르면서 벌떡 일어섰다. 7번 어뢰가 수송선에 명중했을 시간이지만 이제 그것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어뢰는 헬리컬 탐색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잠수함 승무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 어뢰다. 단 한방이라도 피격되기만 하면 잠수함은 치명적인 상황에 빠지기 때문이다. 음탐실 요원들이 어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부장! 구축함은?"
서승원이 김철진을 큰소리로 불렀다. 어뢰는 대잠헬기에서 투하했을 수도 있지만 구축함에서 애스록 대잠미사일로 쏘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뢰를 피할 것인지 구축함을 향해 계속 어뢰를 유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20초만 더 주십시오! 함장님! 다 잡았습니다. 놈이 예상보다 속도가 느립니다."
고개를 돌리는 김철진의 눈가가 분기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서승원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직관의 힘이었고, 서승원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 구축함이 정태원 대령의 위장보급선을 격침시켰다는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목이 컥 하고 막혔다.  
"좋아! 개새끼들! 우리만 지옥으로 가진 않는다. 놈과 함께 간다!"

- 구축함도 역시 박위함이 어뢰에 포위되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박위함이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구축함은 다시 반대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명중 5초 전, 4초 전, 3초 전, 2초 전, 1초 전..."
김철진이 스톱워치를 누르고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 쪽을 멍하게 쳐다보는 순간 둔탁한 폭음이 박위함을 때렸다. 드디어 어뢰가 구축함에 명중한 것이다.
"제기랄! 지금이다! 전방 밸러스트 불어! 긴급 부상한다!"
 
- 마지막 디코이를 발사하는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렸다.

쿠쿵!
낯익은 충격이었다. 가까운 거리의 물속에서 어뢰가 폭발했을 때 만들어내는 거대한 압력의 폭풍이 박위함을 감싸고 있었다. 박위함의 사령실에 전원이 일순간 꺼지고 곧 응급전원이 들어왔다. 그러나 서승원과 김철진 모두 온몸에 가해진 충격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출력 3분의 1로! 잠항타 수평, 전방 밸러스트 중립상태로!"
서승원 중령이 명령을 내리고 그제서야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수면에 일고 있는 거친 파랑이 어뢰의 소나를 속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파랑 속에서 디코이가 내뿜는 높은 대역의 음파가 어뢰의 추적프로세서를 유인한 것이었다.

서승원이 잠시 현기증으로 비틀거렸다. 아드레날린이 몰아치고난 후유증으로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선단 중심 깊숙이 들어온 박위함은 태풍의 눈 속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분간 여기 있기는 쉬워도 이곳을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8월 15일 21 : 06 샌프란시스코 북서쪽 1,421km [한국시간 8월 16일 13 : 06]
"우현 15도 기관 전속!"
서승원이 긴박하게 명령을 내렸다. 수송함들은 이제 최고 속도로 치닫고 있었다. 잠수함이 미국 프리깃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계단을 건너뛰듯 수송함의 그늘에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양 떼와 늑대, 그리고 사냥개들의 숨바꼭질은 벌써 두 시간째였다. 출력을 최대로 높인 박위함이 곧 반응을 시작했다.

- "그래! 어뢰도 없으니 육탄공격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지금이다! 좌현 전타! 타 고정!"
서승원 중령이 소리치자 조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키를 꺾었다. 수만 톤짜리 수송선이 내리누르는 물의 압력으로 박위함이 거세게 요동쳤다.
"맙소사..."
김철진 소령이 저도 모르게 잠망경 통을 감싸 안았다. 수만 마력짜리 추진기가 만들어내는 거센 수류가 박위함의 사령실을 천둥처럼 두들기고 있었다.

- "됐어. 타 중앙으로!"
서승원이 명령을 내리고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조타수가 키를 꺾었으나 박위함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송선의 스크루가 뿜어내는 엄청난 힘의 후류가 박위함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음탐장! 페리급 프리깃의 위치는!”
"함장님!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승원이 의도하던 바였다. 페리급 프리깃이 쏘아대는 액티브 음파까지 안 들릴 정도라면 박위함이 내는 소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순서였다. 
"잠망경 심도로 부상한다! 기관실 스노팅 준비해!"
서승원은 수송선 옆을 나란히 항주 하면서 배터리를 충전할 생각이었다.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었다.

- 이판사판이었다. 서승원이 잠망경으로 주변을 훑었다. 지금 들키거나, 배터리가 떨어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 채로 발각되거나 어차피 똑같았다. 죽음뿐이었다. 연료전지 시스템을 탑재한 신형 잠수함이었다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망경에 이어 스노클 마스트가 수면 위로 거의 동시에 올라갔다. 
 
- 김철진 소령이 초조하게 시간을 쟀다. 배터리를 완전히 충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 5분 만의 충전이라도 박위함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그 사이 잠망경을 돌려대던 함장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북동쪽이 열렸다!"
선단의 오른쪽 후미를 맡고 있던 프리깃 두 척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도주할 것이라 짐작하고 대잠헬기와 함께 집요하게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자 포기하고 원래 진형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 "함장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이상 어뢰도 없습니다."
김철진 소령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녹초가 된 서승원이 잠망경에 기대선 채 조용히 김철진의 시선을 받았다.

"글쎄..."
갑자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받은 서승원이 뭔가를 생각해 내기 위해 애썼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실업자가 돼본 적은 없지만 지금 기분이 그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아야겠지."
서승원 중령이 차분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살아남을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무작정 살아남는 것이 박위함의 마지막 임무라는 생각이 들자 서승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움직여야지. 부장! 어느 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좋겠나? 북쪽 남쪽? 동전으로 결정할까?" 

- "부장이 결정하지. 난 단지 졸릴 뿐이야.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서승원 중령이 다시 빙그레 웃었다.

- 8월 16일 13 : 15 부산광역시 김해공항
원정군 사령관 홀더 대장을 태운 C-130 수송기가 공항 터미널로 천천히 들어왔다. 구석에 정렬해 있던 델타포스 대원들이 달려 나와 수송기 양쪽을 에워쌌다. 수송기 문이 아래위로 열리자 홀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끈한 열기가 얼굴에 몰아쳤다. 주변을 둘러본 홀더는 주변 경계가 대단히 삼엄함을 깨달았다. 평상시 늘 대동하는 델타포스 소속 특별 경호대를 제외하고도 그 몇 배에 이르는 병력이 공항청사 주변에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령관님!"
허버트 캐일러 3군단장이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네 명의 군단장 중 선임자였다. 원래는 18 공수군단장인 키팅이 선임이었다. 그러나 오늘 정오를 기해 키팅이 해임되었기 때문에 캐일러가 선임이 됐다. 홀더는 가볍게 경례를 받은 후 활주로로 내려왔다. 좌우로 참모장과 부관이 뒤따랐다. 
 
- "직접 기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10킬로미터 거리에서 122밀리 로켓포 공격을 해왔습니다. 착륙하던 C-141 수송기 한 대가 당했습니다."
기지사령관이 활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홀더의 눈에 거대한 수송기 잔해가 보였다. 기체 전방 부분은홀랑 타서 골조만 앙상하게 남았다. 후방 부분은 하얀 소화액 포말로 뒤덮여 있었다. 
잔해 주변에는 크레인과 트럭 몇 대가 주차해 있었다. 실려 있던 화물이 대단히 귀중한 것 같았다. 레이션류 같은 음식물이었다면 당장에 모두 폐기처분 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박스 하나하나를 꺼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패트리어트 운용요원으로 보이는 육군 병사들이 그것을 구경했다. 기지사령관이 계속 말을 이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이런 게릴라식 로켓포 공격이 잦아 수송기 이착륙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 "대포병 레이더로 위치를 찾아 제압하면 되잖은가?"
홀더의 질문에 기지 사령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은 교묘하게 이착륙 시간에 맞춰 시한장치로 사격을 합니다. 우리 특수부대가 투입될 시점에는 이미 그 자리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제는 기지 식당에 로켓이 떨어져 3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식사시간이 아니라 다행이었지요. 그 일로 병사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 C-141 수송기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이륙했다. 물건을 다 내렸기 때문인지 몸짓이 훨씬 가벼워 보였다. 어느 순간 수송기의 꼬리에서 하얗게 빛나는 불덩어리들이 투하되었다. 적외선 유도 미사일을 기만하기 위한 플레어다. 지상에서도 비슷한 불덩어리들이 솟구쳤다. 기지 근처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게릴라의 휴대용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는 항공기의 동작이 크게 제한받는다.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야 한다. 그래서 휴대용 미사일을 쏘기에 딱 알맞다.
"장거리 저격총으로 수송기를 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방벽을 높이 쌓았습니다. 또 특수부대를 투입해 기지 주변을 순찰하고 있습니다."
기지사령관이 수송기들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철제 방탄판을 가리켰다. 설명을 듣던 홀더는 30여 년 전에 참전한 월남전을 떠올렸다.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짧은 기간 동안 홀더는 월남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다.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어 있다는 느낌은 당시와 비슷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적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뿐이란 것이다.  

 

- 원래 계획대로라면 3해병원정군이 문경 방면을 통해 충주로 진격하고, 3군단은 상주에서 옥천으로 진군하게 되어 있었다. 또 18군단은 김천에서 영동으로 진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주공인 육군 2개 군단은 멈추고 조공인 해병대만 전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주요 회랑 주변만이라도 보병으로 고지 점령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은 크겠지만 현재로선 그 방법이 제일 빠릅니다. 물론 강력한 항공지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만."

- "딱 두 가지만 해주십시오."
"무엇인가?"
홀더가 묻자 캐일러가 대답했다.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공군 두 개 비행단을 우리 군단에 주십시오. 그리고 전투지경선을 재조정해서 우리 군단이 경부고속도로 축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비행단 두 개는 지원해 주겠네. 그러나 전투지경선을 재조정하면 18군단의 기동로는..."
홀더는 곤란하다는 말을 하려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핵심적인 기동로다. 그것을 3군단에 넘겨버리면 18공수군단은 제대로 된 기동로를 구하기 어려웠다. 군단급 부대가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는 차량 수는 엄청나다. 18군단이 아무리 헬기를 많이 보유한 공수군단이라 해도 3기계화보병사단 같은 지상 전력도 많았다. 그리고 전투지원임무에 투입된 병력과 장비는 훨씬 많았다. 제대로 된 기동로를 구하기 힘들면 부대 전체의 진격 속도가 떨어지고 양 측방에서 가해지는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새로 18군단장이 된 슈미트가 고생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캐일러는 홀더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우리가 뚫고 나간 뒤에 후속부대로 투입하면 됩니다. 어차피 18군단은 이제 정면 공격보다는 측면 엄호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경부선의 교통량이 폭증한다면 무주 방면으로 우회시켜도 되잖습니까?" 
   
- "미군 49사단은 어디 있습니까?"
"에섹스란 곳에서 우리 전투기들한테 한 방 맞았다더군. 쉽게 접근하진 못할 거야."
그건 어젯밤에 들은 이야기였다. 미군의 지금 위치는 아무도 몰랐다. 아까 기지를 이륙한 전투기들이 미 49기갑사단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는지, 아니면 스텔스기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최훈욱은 전차가 담당 방어구역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기지가 더욱 엉망이 된 사실을 알았다. 두 시간마다 주기장을 옮겨 다니는 전투기는 대부분 안전했다. 엄폐호는 미군 폭격에 성한 것이 없어도 에드워드 기지는 워낙 넓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시설물은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았다. 이틀째 매 시간마다 폭격을 받았으니 LA만큼 넓다는 에드워드 공군기지가 폐허로 변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 어쨌든 또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좋은 것은 폭격에 엉망이 된 기지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쁜 것은 다음 폭격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올랐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죽음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8월 17일 05 : 40 충청북도 보은군
퍽! 
생일날 가장 먼저 받은 선물은 적 저격수의 총알이었다. 이경호 상사는 심장이 한순간 멎는 것 같았다. 수첩을 꺼내려고 잠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머리는 깨진 수박통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총알이 날아온 다음 총소리가 들렸다. 이경호는 미군 저격수들이 사용하는 M-700 계열 저격총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느낌으로는 한 3~4초 정도 시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저격총은 초속이 거의 1,000미터에 가깝다. 그러나 총소리는 초속 340미터 정도 속도로 전파된다. 그렇다면 저격수와의 거리가 약 1,000미터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 거리에서 사람 머리를 노릴 정도라면 보통 고수가 아닐 것이다. 자세를 바짝 낮춘 채 옆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 이경호는 갑자기 화가 났다. 사냥꾼이 늘 잡던 사냥감에게 당했을 때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화를 삭였다. 흥분은 금물이다. 한순간 실수라도 하면 바로 황천행이기 때문이다.
 
- "봤어?"

둘 다 못 봤다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이경호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제대로 훈련된 저격수라면 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내민 것이 저격수를 눈으로 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경호는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보다 정확한 거리를 알아내려 한 것이다. 물론 운이 좋다면 총 쏠 때 발생하는 섬광을 볼 수도 있다. 운이 나쁘면 당연히 죽는다. 

- 시계를 봤다. 해가 뜨려면 1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경호가 해를 등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 저격수가 총을 쏘려면 잠시나마 햇빛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짧은 시간이지만 조준경이 햇빛에 반사된다. 
"아직 10분 남았다. 걸리면 한 방에 끝내."
유덕신이 대답 대신 드라구노프 저격총을 불끈 쥐어 보였다. 유덕신 역시 1,000미터 거리에서 사람 머리를 맞출 정도의 실력은 됐다. 통일참모본부에서 선정한 인민군 특등사수들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이 시작된 후 그가 잡은 미군은 20명이 넘었다. 

- 이경호는 천천히 수풀을 헤치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부러 주변 수풀을 흔들었다. 미군 저격수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이경호가 조준선 근처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이상 미군 저격수는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있던 벌레들이 강한 살기를 느꼈는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이경호는 해가 뜨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계획했다. 몸을 노출시키는 시간, 달리는 속도, 다음 숨을 장소 등을 면밀히 계산해야 했다. 그 사이 10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등뒤에서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황금색 햇살이 건너편 수풀을 비추기 시작했다. 햇빛이 비치는 면적이 점점 늘어났다.

 

- "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속았습네다. 으윽! 거울 조각입네다.]
상대가 보통은 아니라고 이미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인 유덕신이 당하자 이경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군 저격수는 반짝이는 거울로 유덕신을 유혹했던 것이다. 그것에 속아 유덕신이 먼저 총을 쐈다. 상대가 노출되기만을 기다리던 미군 저격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잡아버린 것이다. 유덕신의 목소리가 빠르게 꺼져갔다. 

 

- 8월 17일 08 : 05 경기도 오산시
"비상! 비상!"
고함 소리와 함께 활주로 구석에서 식사 중이던 정비사들이 달려 나왔다. 전투기는 시동만 걸면 곧바로 출격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발전기에 시동이 걸리자 시커먼 연기가 엄폐호 주변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 외부 전원을 공급받자 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팬텀의 쌍발 엔진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인석은 무장 계통을 다시 한번 더 점검했다. 날개에는 러시아제 AA-10 알라모 미사일 네 발과 AA-11 아처 미사일 두 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엔진 회전수가 올라가자 계기반의 복잡한 다이얼 계기들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인석은 방공관제소를 호출했다.
"여기는 유령 편대, 제로 사이트, 무슨 일인가?"
[적 폭격기 편대의 내습이다. 현재 대전 부근에서 적 엄호 전투기와 아군기 간에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다. 즉각 출격하라.]

관제사의 목소리는 상당히 긴박하게 들렸다.
 
- 캐노피가 서서히 닫혔다. 무장사들이 미사일과 각종 센서에 붙은 노란색 보호 커버를 떼어냈다. 정비사가 접지선을 떼어내고 랜딩기어를 고정시키는 노란색 받침목을 빼냈다. 기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전투기에서 멀리 떨어졌다. 
최인석은 다시 한번 전방과 측방을 살펴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공기흡입구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엔진 출력을 높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엔진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사고가 생긴다. 항상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 최인석은 비상 활주로에 그어진 선에 정확하게 기체 중심선을 맞췄다. 그리고 엔진 스로틀을 끝까지 밀었다. 등뒤에서 J79 쌍발 엔진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후연기가 켜지자 팬텀의 엔진 배기구가 하얗게 달아올랐다. 
 
- 8월 17일 08 : 15 충청북도 보은군
최인석이 F-16 파일럿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기체 간격이 수 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작은 돌풍이라도 부는 날에는 전투기 네 대가 공중충돌로 사라질 판이다. 신호를 받은 F-16 편대가 유령 편대에서 조금 멀어졌다. 
편대가 밀집한 상태로 저공비행하는 것은 미군 레이더를 조금이라도 속이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미군 전투기의 레이더가 우수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편대가 정확하게 몇 대인지 분간하기 힘들 것이다. 밀집편대는 주변 산등성이보다 낮게 날았다. 
 
- [0-2-0 방위에 이글 편대 접근 중, 속도 580노트. 거리 35마일.]

E-2C의 테이터 링크를 받은 요격관제사 유철종 대위가 미군 전투기의 위치를 계속 알려줬다. 최인석은 전투기에 탑재한 액티브레이더 유도형 알라모의 레이더를 웜업 시켰다. 미리 웜업 시켜 두지 않으면 미사일의 레이더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미사일 웜업에는 거의 2분이 소요되었다. 그 사이 이글의 레이더가 추적모드로 바뀌었다. 레이더 경보 수신기가 삑삑거리며 울어댔다. 

- [여기는 새매! 편대를 분리하겠다.]
새매 편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편대를 풀 시점이었다. 최인석은 갑자기 네 대로 불어난 적기를 발견한 미군 파일럿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 "우리도 간다!"
팬텀이 이글을 향해 로켓처럼 상승했다. 금방 기체는 구름 위로 솟구쳤다. 그때서야 이글 편대의 모습이 IRST에 확실히 보였다.
[레이더 락온! 앗! 두 대가 아닙니다. 네 댑니다!]
미군 역시 최인석의 편대와 똑같은 속임수를 썼다. 밀집편대 비행으로 한국군 조기경보 레이더를 속였던 것이다. 네 대로 불어난 이글이 최인석의 팬텀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IRST 화면에 나타난 이글의 날개 부분에서 밝은 점이 번쩍였다. 미사일을 쏠 때 발생하는 강한 적외선 반응이었다. 유철종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저쪽이 쐈습니다!]
"나도 알아! Fox 3! Fox 3!"
유철종이 그중 한 대를 선택해 액티브 레이더 유도형 알라모를 발사했다. 순식간에 마하 4로 가속된 알라모가 이글을 향해 날아갔다.
 
- "회피기동 실시! 대청호 상공에서 만나자!"
최인석이 부르짖으며 기체를 급강하시켰다. 팬텀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은빛 채프가 허공에 점점이 뿌려졌다. 최인석은 마음속으로 침착해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레이더 경보 수신기의 삑삑거리는 경보음을 들을 때마다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 그리고 100미터쯤 후방에 지휘관 차량으로 여겨지는 전차 두 대가 따라왔다. 선두에 선 전차들은 모두 지뢰제거용 쟁기를 장착하고 있었다. 미군 전차대대가 보유하는 지뢰제거용 쟁기가 12대니 대대의 물량을 총동원한 셈이었다.   
전차중대에서 약 150미터 후방에 브래들리 중대가 따라왔다. 보병전투차 중대의 대형은 ㄷ자 모양이었다. 전면에 한 개 소대, 양측면에 한 개 소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브래들리 두 대가 대형 가운데 위치했다. 그중 한 대는 포병관측차일 테고 다른 한 대가 중대장 차일 것이다. 철통 같은 대형에 김태균이 고개를 흔들었다.
  
- 전차대 후방에 모습을 드러낸 아파치가 화력지원에 나선 것이다. 로켓탄 여러 발이 포도밭 근처에서 일제히 폭발하며 반짝이는 뭔가를 잔뜩 뿌렸다. 다음 순간 은빛 소나기가 포도밭을 휩쓸었다.

"젠장! 플레쉐트다!"
안인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플레쉐트 탄두에는 작은 화살 수백 발이 들어 있다. 목표물 근처에 이르면 껍질이 깨지면서 작은 화살들이 확 뿌려진다. 탄두가 폭발한 후에 불필요한 화염이나 연기가 발생하지 않아 상당히 유용했다. 
  
- 김태균은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땅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이상한 미사일은 한 번도 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쏴본 것은 팬저파우스트 대전차 로켓탄 한 발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연대장이 사수들을 불러 모아 이걸 쓰라며 건네준 것이다. 한글 매뉴얼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림도 대단히 엉성했다. 급조한 티가 팍팍 났다. 

- 안인환과 김태균이 발사하려는 이 미사일은 스웨덴제 BILL II 대전차 미사일을 복제한 것이다. '땅벌'이라는 촌스런 이름은 소형이지만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작명가 소질이 정말 없는 사람이 붙인 것 같았다. 땅벌은 모체인 BILL II처럼 전차 머리 위를 지나가며 아래쪽으로 폭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미군전차에는 더 위력적이다. 훈련 시 틀어준 비디오 화면에서는 미군 M-1A1 전차가 단 한 방에 불덩어리로 변했다. 그러나 실전에서 어느 정도 성능을 발휘할 것인가는 미지수였다. 
  
  




- 8월 17일 12 : 30 충청북도 영동군 
한국군 18연대 본부는 황간면 소계리에 위치했다. 황간 인터체인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연대 지휘소와 통신실은 포격을 받지 않도록 산 후사면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가파른 산기슭을 파고 동굴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통신실이 있는 곳은 더욱 경사가 심했다. 산사태 위험이 있지만 달리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다른 곳은 대부분 암석지대여서 적당치 못했다. 그렇다고 마을에 지휘소를 설치할 수도 없었다. 언제 폭격이나 포격을 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망할!"
연대 통신참모 서기석 소령이 탁자를 쾅 쳤다. 파기한 것 같다는 것은 하사관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뿐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후퇴할 때는 아군 스스로 무전기를 파기하기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미군의 포격이나 융단폭격에 무전기까지 파괴된 게 틀림없었다. 물론 병력도 몰살당했을 것이다.  

- 서기석 소령이 윗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원래 민감한 통신장비가 많은 곳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 규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기석 소령이었다. 그러나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대대적인 포격이 있은 다음 시작된 융단폭격에 18 연대의 방어선은 갈기갈기 찢겼다. 예하 두 개 대대는 통신이 완전히 두절됐다. 연대본부도 폭격을 받았다. 노출된 통신시설 일부가 폭격을 받아 부서졌다. 본부 요원도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교묘한 위치 덕분에 지휘소와 통신실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예하 대대의 전투상황을 살피러 나간 연대장과는 연락이 끊어졌다. 연대 작전과장이 연대장 대리를 맡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나머지 한 개 대대조차 조금 전 통신이 갑자기 두절됐다. 연대는 이제 팔다리가 모두 잘리고 머리만 남은 상황이었다. 
 
- "너무 오래 전파를 발신했습니다. 잠시 중단하는 게 좋겠습니다."
서기석은 흠칫했다. 통신 소통에 온 정신이 팔려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쇄애애액!
제트기의 찢어지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천장을 올려보았다. 서기석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 "이쪽 능선이 미군한테는 옆구리나 마찬가진데, 그걸 비워두고 그냥 가겠냐? 미리 청소 다 하고 올라가야지." 
소대 선임하사 홍기철 상사가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며 이동천의 방탄모를 건네받았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 다음 방탄모에 담긴 흙탕물을 진지 밖으로 쏟았다. 물을 퍼내는 작업이 끝나자 이동천은 다시 방탄모를 썼다. 방탄모 안에 남아있던 흙탕물이 얼굴에 주르르 흘렀다. 

지뢰에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인지 유탄으로 여겨지는 폭발이 진지 주변을 휩쓸었다. 두 사람은 급히 진지 바닥에 엎드렸다. 유탄 수십 발을 동시에 퍼부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마크 나인틴(Mk19)이라 불리는 자동유탄발사기밖에 없다.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저 아래쪽 능선 어딘가에 그것을 설치한 모양이었다.  
소대에도 비슷한 K4 자동유탄발사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미국이 실시한 제압사격에 진지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이동천은 너무 아쉬웠다. 그것이 있었다면 정말 뜨거운 맛을 보여줬을 텐데. 
 
- 이동천의 진지 뒤쪽에 자리 잡은 M60 기관총이 도랑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세 발씩 끊어 쏘는 사수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직이 너무 자주 바뀌어 누가 어느 무기를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소총수였던 이동천 역시 지금은 유탄사수로 바뀐 실정이었다. 

 

- 8월 17일 18 : 21 제주도 남서쪽 153km
"액티브 탐신을 계속 중입니다.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식한 놈들..."
음탐장의 보고를 받은 이승렬 중령이 혀를 찼다. 그것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들이었다. 계속되는 액티브 탐신으로 음탐장과 음탐실 요원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들은 한국 잠수함 이억기로부터 불과 8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두 척은 괘씸하게도 액티브 음파를 쏘아대며 움직였다. 마치 어군탐지기로 물고기를 찾는 어선처럼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잠능력이 강력한 구축함이라도 액티브 탐신음을 사용하면 이쪽 위치가 먼저 노출되기 때문에 위험했다. 지금처럼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 이승렬이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 행동은 신중하게 계획된 무모함이었다. 두 척씩 짝 지워진 미국 구축함들은 한국 잠수함에 먼저 발견되더라도 쉽게 공격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 척이 엄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쌍끌이 저인망어선들이 바다 밑바닥을 훑어 고기를 싹쓸이하는 것처럼 대잠방어망을 넓혀가고 있었다. 괘씸했다. 이쪽에서 공격하지 못할 것을 미군 구축함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액티브 음파를 계속 쏘아대는 것은 이억기함에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 "그런데 왜 방향을 바꾸는 걸까요? 저라면 이곳까지 확인을 했을 겁니다."
부장 김창규 소령이었다. 지금 이억기함이 숨어 있는 해역은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의 서쪽 사면이었다. 제주도에서 남서쪽으로 152km 떨어진 이 암초는 이어도의 전설로 알려진 바로 그 암초였다. 태풍이 불 때만 보인다는 그 전설의 섬은 다름 아닌 수심 5미터에 숨어있는 소코트라 암초이다. 이 암초가 예전부터 관측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암초가 이어도로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승렬 중령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 해군도 이곳 해저지형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충분히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 구축함들은 수색을 중단하고 방향을 되돌리고 있었다.

 

- 이승렬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잠시 갈등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그는 물 위로 올라가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망경 심도로 부상한다."

- 오랜 침묵을 깨고 이억기함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심도가 올라가고 이억기함을 내리누르던 엄청난 수압도 약해지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심심도 잠항을 했던 까닭인지 이승렬은 높은 산에서 내려올 때처럼 막혔던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ESM 마스트 올려!"
이제 잠망경 심도에 다다른 것을 확인한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얼마나 많은 레이더 시그널이 있을지 곧 드러나겠지만 겁부터 덜컥 났다.
"방위 공삽심공, 그리고 삼백오십공에서 레이더 전파가 감지됩니다. 방위 공삼십공은 목표 41과 42의 레이더 파입니다. 다른 쪽은 거리가 멉니다. 추정거리 20km 이상입니다. 이상합니다. 항공시그널이 없습니다." 
전탐관이 보고한 후 재차 공중에서 발사된 레이더 시그널을 확인했다. 하지만 없었다. 그것은 이억기함 상공에 대잠초계기나 대잠헬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기상상황이 나빠서 철수한 건가? 겨우 이 정도 파랑인데?"
이승렬이 잠망경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몇 시간 전이라면이 해역에도 미군 구축함과 프리깃, 그리고 대잠초계기가 곳곳에 있어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 "그렇다면..."
이승렬 중령의 두 눈이 번뜩였다. 태풍이 불면 함정들은 피해야 한다. 군함도 태풍이라면 예외가 없다. 작은 배라면 항구 안으로 피항하지만 대형 함정들은 비좁은 항구에 들어갔다가 다른 배들과 대형 충돌사고를 낼 수 있다. 그래서 큰 배들은 태풍이 불 때면 태풍의 진행경로 바깥쪽 원양까지 도망쳐야 한다.  
"속도 3분의 1로 증속한다. 침로변경! 공십공(0-1-0) 잡아!"
"함장님! 그곳은 미군 대잠방어선 안쪽입니다."
"그래, 부장, 난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바로 이곳!"
이승렬 중령이 부장 김창규 소령의 반문에 아랑곳 않는  해도판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태풍이 부는 동안 미 해군의 대잠방어망은 말 그대로 개점휴업상태나 다름없었다. 아쉬웠다. 만약 잠수함지휘통신소로부터 기상정보만 제대로 통보를 받았다면 태풍을 이용한 전술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잠수함지휘통신소는 붕괴된 지 오래였다. 기상정보를 받지 못하는 해군만큼 비참한 존재도 없었다. 이제 늦은 만큼 더욱 빨리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물속 수백 미터는 거센 태풍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고요한 세계다. 잠수함에게 태풍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 8월 18일 04 : 50 충청남도 천안시
천안시 흑성산 북쪽기슭의 2야전군 지하지휘소는 초비상 상황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수해 소식에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융단폭격으로 엉망이 된 전선을 복구하기도 전에 수마가 덮쳤다. 어떤 곳에서는 중대급 병력 태반이 산사태에 매몰되었고 어떤 부대는 이동 중에 도로가 침수돼 허겁지겁 근처 높은 지대로 대피했다. 제방이 터져 모조리 휩쓸려 가버린 소대도 있었다. 예상을 몇 배나 초월한 비전투 손실에 야전군 지휘부는 경악했다.   

- "호우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이 정도인가?"
2야전군 사령관 김용선 대장의 얼굴은 답답한 기색이 가득했다. 줄담배를 피워대서 탁자 위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원탁 주변에 앉은 참모들은 말이 없었다. 서정재 중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6시간 전 호우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명령을 분명히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우에는 사실 별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전투 중에 진지를 비워놓고 안전지대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미군의 폭격지역과 산사태 및 범람지역을 조합해 본 결과, 80% 이상의 지역이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지반이 취약해진 지역에 고공폭격을 가해 고의적으로 산사태나 제방 붕괴를 유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참모 신동호 소장의 말에 회의실 내의 장성들이 가볍게 신음소리를 냈다. 제공권을 상실해도 기상만 좋지 않다면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오산이었다. 미군 전투기들은 이런 악천후에서도 지상 표적을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바로 JDAM이라는 GPS 유도폭탄이다. 레이저 유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상이 악화되더라도 JDAM은 사용이 가능하다. 까마득한 고공에서 투하해도 정해진 표적 10미터 이내에 떨어질 정도로 정확하다. 많은 비로 지반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럴 때 2,000파운드 폭탄이 산기슭에 깊숙이 박혀 터지면 결과는 끔찍했다. 오늘 같은 날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미군의 폭격을 막아주던 산이 이제는 한국 병사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있었다. 
 

- "지역에 따라 비가 오는 양이 다르니 일괄적으로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상부대는 확실히 발이 묶입니다. 미군 전차는 너무 무겁고, 보병 전투차는 수상작전이 불가능합니다. 수몰지구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헬리콥터부대 같은 것은 안 그렇다는 이야긴가?"
사령관은 공중강습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미군은 단숨에 수백 대가 넘는 헬리콥터를 동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측방을 위협하는 18군단 소속 101 공중강습사단만 해도 200대에 육박하는 수송헬리콥터를 가지고 있다. 그중 25% 정도는 일반 헬리콥터의 3배에 이르는 수송능력을 가진 치누크다. 군단급에서 운용되는 항공여단의 전력을 제외한 단일 사단의 항공전력만 해도 이 정도였다. 
"일부지역에서는 CH-53E나 MV-22 같은 대형 기종도 운용할 수도 있습니다. 기상악화로 비전투 손실을 상당히 입겠지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지휘관 결심에 달린 문젭니다." 
신동호 소장은 확답을 피했다. 다시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미군은 언제나 몇 개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내놓을 카드는 언제나 똑같았다. 하늘을 제압당한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 서정재 중장이 천장을 쳐다봤다. 하늘은 한국군을 돕지 않았다. 9군단의 주력인 3사단은 융단폭격을 당해 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8사단 역시 폭격에 사단포병과 전투지원부대를 몽땅 상실했다. 속리산 북쪽에 배치된 5군단은 미 제3해병원정군과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쪽도 항공기 때문에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날이 개면 더욱 불리했다. 한국군은 물이 빠질 때까지 발이 묶일 수밖에 없지만 미군은 엄청난 항공전력이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한국군을 철저하게 두들겨댈 것이 뻔했다. 충청지역의 방공레이더망이 완전히 붕괴됐다는 것이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영동지역 일대에 가해진 융단폭격과 동시에 미군은 방공레이더 제압작전을 진행했던 것이다. 

- 이제 한국군에게 남은 것은 서울 부근의 레이더 기지 몇 개와 E-2C 호크아이 조기경보기뿐이었다. 그러나 E-2C는 F-22 스텔스전투기의 기습을 겁내 서울 인근에만 머물렀다. 서해안으로 우회해 온 F-22 전투기에게 한국군의 E-2C 한 대가 격추당한 것이 사흘 전이었다. 모든 여건이 한국군이 미군의 공중강습으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기에 아주 이상적이었다. 금산 방면에는 그것에 대비해 특공여단과 방공대대가 하나씩 전개되어 있었다. 구식이긴 했지만 M48A5 전차대대 하나도 그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긴급 전문입니다! 금산에 배치된 316방공대대가 지금 지대지미사일 공격을 받고 있답니다. 그리고 37번 국도와 17번 국도, 68번 지방도로 주변에 FASCAM이 살포됐다고 합니다." 

- 그래서 인민군들은 출항 전에 갑판일부를 절제하고 단단한 내압선각 위에 충격흡수재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포판을 용접하여 고정시켰다.
임각균 소좌가 부하들이 구령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멀리 티니안 섬 북단을 노려보았다. 사이판 바로 남쪽이며, 미군의 B-52 폭격기용 활주로 4개가 연달아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산이 있는 이웃 사이판과 달리 티니안은 섬 전체가 평탄한 지형이라 활주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 쪽으로부터의 공격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평소에는 미군이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병력이 긴급전개되고 수십 대의 폭격기가 뜨는 활주로로 변한다. 티니안 섬의 상당 부분이 미국 정부 소유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 박격포 3문이 차례로 발사되자 잠수함이 거세게 흔들렸다. 임각균 소좌가 비틀거리다가 갑판에 주저앉았다. 예상보다 훨씬 큰 충격이었다. 작전조원들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계속 박격포를 발사했다. 드넓은 활주로를 향해 쏘기 때문에 정확도는 필요 없었다. 다른 항해요원들은 포탄을 갑판 위로 계속 날랐다. 갑판 위에 한꺼번에 포탄을 늘어놓을 경우 잠수함이 전복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함장은 사령탑에서 잠수함 상태를 직접 보며 사령실에 연락해트림 탱크를 조정하기 바빴다. 

- 옅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올라간 박격포탄이 드넓은 활주로 곳곳에 널린 폭격기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포탄이 떨어지기도 전에 박격포에서 10여 발이 더 발사되었다.
"이럴 땐 방사포가 최곤데, 에잉~"

 

- "여기서 더 오면 우린 정말 빠져 죽습니다."
최영주의 말에 화기소대장이 두 손을 내저었다.
"싸울 일도 없잖아. 죽을 일도 없고, 죽일 일도 없고..."

"갑자기 그런 말씀 들으니 좀 이상합니다. 중대장님."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물바다가 된 들판으로 퍼져갔다. 그냥 툭 던지는 듯한 한 마디였다. 그러나 화기소대장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최영주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에는 누런 얼룩이 져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것을 프라이팬에 올려 가스 불로 말린 것이다. 덕분에 담배 맛이 많이 순해졌다. 
"저놈들을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최영주가 손에 담배를 끼운 채 마을회관을 가리켰다. 화기소대장도 그쪽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버둥거리던 송아지는 이제 힘이 다한 것 같았다. 지붕 위 어미소의 울음이 더 한층 커졌다. 잠시 후 송아지는 흙탕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툭! 퍼서석~
뭔가 우주명의 등에 맞고 잡초 사이로 굴러갔다. 수류탄이었다. 우주명은 몸을 피하는 대신 방아쇠를 힘껏 눌렀다.

깡! 투퉁!
얼굴과 어깨 곳곳에 불처럼 뜨거운 고통이 엄습했다. 우주명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흰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수백 개였다. 곧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주명이 고통에 겨워 떼굴떼굴 굴렀다. 누군가 달려오면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8월 19일 14 : 25 충청북도 보은군
낮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햇빛이 새어들었다. 부채꼴 햇살이 멀리 산 너머로 비쳤다. 그러나 인민군 공군 조종사 백철호 소좌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편대장 강태익 중좌의 꽁무니뿐이었다. 백철호는 편대장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 함께 움직여야 했다.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끝장이었다. 편대장 강태익 중좌는 50미터 전방 왼쪽을 날고 있었다.

- 인민군 공군의 공격기 편대는 원래 완편 정수가 세 대였다. 그러나 거듭된 미군의 폭격으로 상당수가 지상이나 지하격납고에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편대 정수가 두 대로 줄었다. 백철호의 기종은 Q-5A였다. 중국에서 미그-19를 개조해 만든 공격기였다. 구형이었지만 지상공격능력은 원판보다 훨씬 낫다. 동체내부 폭탄창의 공간을 이용해 추가연료탱크까지 달 수 있어 항속거리도 더 길다. 그러나 지금 백철호의 기체는 연료탱크 대신 폭탄을 더 적재하고 있었다. 목표를 타격하고 나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백철호의 편대는 일종의 특공기, 가미카제였다. 육탄으로 돌격하지 않는다는 차이일 뿐이었다. 낙하산으로 탈출한 이후에 대비해 조종사들은 자동소총까지 어깨에 걸쳤다.

- 편대는 19번 국도를 따라 충북 보은 상공을 통과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누런 흙탕물 천지였다. 대부분의 논과 도로가 물속에 잠겨 있고 도로변 절벽은 무너진 곳이 많았다. 저공을 날고 있어서 그런 모습이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원래 강이나 도로를 이용한 지형참조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것이 강이고 어느 것이 도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형참조점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노련한 편대장만 무조건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 강태익 중좌의 기체가 고도를 더 낮췄다. 백철호도 조종간을 밀어 함께 내려갔다. 지면에 추락하는 것도 싫지만 미사일에 맞는 것은 더 싫었다. 고도를 낮추자 지금까지 내려다보이던 전봇대들이 이젠 수평으로 지나쳤다. 지면에서 불과 20미터도 안 되는 고도였다. 고도계는 아예 0으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 삑! 삑! 삑!
레이더 경보 수신기가 울렸다. 백철호는 심장이 덜컥거렸다.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는지 단순한 추적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지면에 더 바짝 붙어 미사일이 빗나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 그러나 백철호는 놀라지도, 떨지도 않았다. 이런 비슷한 경우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다. 더 이상 동료들의 죽음으로 인해 감정변화를 겪지 않을 정도로 백철호 소좌는 죽음과 가까웠다. 그리고 미국 전투기 편대가 이왕 나타난 이상, 이제는 신경 쓰지도 않게 되었다. 삶과 죽음은 그가 결정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추락한 강태익 중좌의 희생만으로 더 이상의 공격이 없기만을 바랐다. 미사일을 발사한 미군 전투기가 밀집비행한 미그기들을 둘로 봤을지, 아니면 하나로 봤을지는 백철호도 장담할 수 없었다. 
 
- 폭격목표는 옥천 터널 입구에 있는 미군 기갑부대 선봉이었다. 한국군이 터널을 폭파시켰기 때문에 미군 선봉대는 분명 터널 부근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미군 선봉대는 전차중대와 기계화보병중대, 자주포대가 섞인 대대급 특수임무부대였다. 이들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 백철호는 Mk-20 클러스터 폭탄을 폭탄창에 네 발, 주익에 여섯 발이나 달았다. 탑재 한계중량을 조금 넘는 무게였다. 그래서인지 조종간이 아주 묵직했다. 마치 로켓을 조종하는 기분이었다. 
백철호는 삑삑거리는 레이더 경보 수신기를 꺼버렸다. 요란한 경보음은 집중력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이제 조종석 내부에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제트엔진 소리만 들렸다. 
 
- 백철호는 사전에 예약된 채널로 관측수를 불렀다. 폭격지점 부근에는 폭격을 유도하는 인민군 공군 특수부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의 암호가 심청이였다. 곧 응답이 왔다. 
[여기는 심청! 표적은 505번 지방도와 고속도로 교차지점 부근에 집결해 있다. 대공 무기는 눈에 아니 띈다. 진입 경로에 아파치 편대가 있으니 충돌을 조심하라우!] 
"고맙다! 심청이, 계속 수고 바란다."
백철호의 Q-SA는 양저리 상공에 이르렀다. 기수를 약간 왼쪽으로 틀어 보정천의 지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5층 아파트 크기만 한 바위 절벽이 양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길이 2킬로미터 정도의 골짜기를 통과하면 곧바로 경부고속도로가 나온다. 백철호는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탑재한 로크아이 폭탄의 최소 투하고도는 75미터였다. 제대로 공격효과를 내려면 그 조건만은 맞춰줘야 했다. 그리고 이제 목표지점에 거의 다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저공비행을 할 필요도 없었다. 

- 8월 19일 16 : 50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방 130킬로미터 해상 
태풍이 빠져나간 직후라 그런지 바다는 아직 거칠었다. 중국 국적의 어선 동방홍 88호는 10노트로 동쪽을 향해 달렸다. 갈매기들이 배를 따라 날아가며 끼룩거렸다.

동방홍 88호는 원래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에서 사용하던 정보수집선이었다. 주요 임무는 한국과 일본 해상자위대, 미군의 통신을 감청하는 것이었다. 그 임무를 위해 갑판 아래에는 각종 정교한 전자장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임무는 소련이 냉전 시절 트롤어선으로 미 해군 기동함대를 따라다니며 각종 전자정보를 수집한 것과 비슷했다. 임무가 상대방에 노출되어 급속이탈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이 배는 아주 강력한 기관을 탑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고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달아날 수 있다. 스파이 선박답게 이름도 여러 가지였다. 지금은 동방홍 88호지만 일본 어선 야마토마루가 되기도 했다. 어떨 때는 러시아 어선 알렉세이예프가 되기도 했다. 

- 김현수 상좌는 지난 전쟁에서 일본의 이지스함을 나포하는 공로로 부하들과 함께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었다. 이미 유명무실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명색은 유지하고 있는 노동당 정치국에 의해 전쟁영웅 칭호도 수여되었다. 또 그 일로 인해 정찰국 내에서 지명도가 아주 많이 높아졌다. 세계의 해군과 특수부대에서 적 전투함에 돌입해 점령하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김현수 상좌의 성공 이후였다. 
그런데 이번에 김현수 상좌가 맡은 것은 이지스함 나포보다 훨씬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였다. 한국군에도 특수부대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에 침투해 활동해 본 경험은 없었다. 그런 쪽은 인민군이 훨씬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인민군에게 일본 해안에 상륙하는 것쯤은 우스웠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된 것이다. 임무는 일본에 있는 미군 탄약창을 폭파하는 것이다. 

 

- "로스케는 겨우 일곱 척밖에 아니 되는구만! 저걸 가지고 미제 함대를 견제하다니!"
김성현의 말투에는 경멸감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김현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김 동무 동무는 저기 뒤에 있는 큰 배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소?"

"커 봐야 얼마나 크갔습네까? 우리가 잡은 이지스 정도 갔지요."

김성현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것 때문에 일계급 특진까지 한 몸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컸다.
"틀렸소."
"예? 그럼 더 크단 말입네까?"
김성헌의 목소리는 상당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 앞에 있는 작아 보이는 배가 이지스만한 크기요. 그럼 저 중앙에 있는 큰 배가 얼마나 큰지 알겠소?"
김성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른 배들은 뒤에 있는 큰 배의 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김현수는 갑자기 조용해진 김성헌을 보고 킬킬거렸다. 그리고 다시 쌍안경으로 배들을 지켜보았다. 중앙의 거대한 배는 정말 위풍당당했다. 밋밋하게 생긴 미국 배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저기 큰 놈은 표트르 벨리키, 피터 대제라는 놈이오. 만재배수량이 28,000톤에 이르는 놈이다. 싣고 다니는 미사일이 수백 발이 넘소, 배를 훔치려면 저런 큰 놈을 훔쳐야디. 제대로 때깔도 안 나는 밋밋한 놈은 재미가 별로야. 아니 그렇소?" 
 
그런데 이상하게 이함태의 전투복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았다. 퍼킨스가 계급장이 붙어 있을 만한 곳을 찾자 이를 알아챈 이함태가 빙긋 웃었다. 
"저는 문관입니다. 군속쯤으로 생각하십시오."
한국인이지만 영어는 수준급이었다. 이함태는 싱글싱글 웃으며 시 청사로 뛰어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LA 경찰국 건물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창가에 몰려나와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은 절대 보장합니다. 저희들은 저항하지 않는 경찰이나 민병대를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네 헬기가 엘파소에서 텍사스 방위군을 공격했지 않소? 민간인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오.”
"그들이 먼저 우리 헬기를 공격했으니까요. 인터넷에 총알이 박힌 헬기 사진을 띄웠는데 못 봤습니까?"
"인터넷은..."

- "그런데 시청에는 왜 들어가는 거요? 점거하려는 겁니까?"
"군사작전이고, 비밀입니다. 다만 민간인에 대한 피해는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애애앵~
시커먼 방탄차가 사이렌을 울리고 달려왔다. 경찰 특수부대인 SWAT이었다. 방탄차가 경찰 대열 앞에 서자 스왓 대원들이 뛰어내렸다. 그러나 스왓 대원들은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TV에서 많이 본 한국군들이었다.

 

- 군장을 풀고 수통을 찾았다. 그러나 수통에는 구멍이 두 개 뚫어져 있었다. 하나는 총알이 들어간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총알이 나온 구멍이었다. 물은 이미 구멍으로 다 빠져나간 뒤였다. 찬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 8월 20일 15 : 35 충청북도 보은군
햇빛을 오래 받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물을 제대로 못 마신 데다 땀을 비 오듯 쏟다 보니 가벼운 일사병 증세까지 나타났다. 눈앞에 사물들이 흐릿하게 상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 총소리가 계곡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경호가 화들짝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름 모를 새들도 놀라 후드득 날아갔다. 왼쪽 골짜기 아래서 들려온 총소리가 왠지 귀에 익었다. 예전에 정보사단 특수전 훈련장에서 들어본 기억이 났다. 크로아티아제 RT20이라는 20밀리 중저격총의 발사음이었다. 이경호도 시험 삼아 그 총을 한 번 쏴본 적이 있었다. 반동이 충격적일 정도로 강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반동만큼 위력도 무시무시했다. 작약이 충진 된 고폭탄을 사용할 경우 사람 몸통을 폭죽처럼 터뜨려버릴 수도 있다. 웬만한 장갑차도 대부분 한 방에 주저앉힐 수 있었다. 

- 갑작스런 우군의 출현에 이경호는 놀랐다.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우군은 이쪽이 우군이라는 것을 알아줄 때만 우군이 된다. 피아를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쏴대는 우군은 적군이나 마찬가지였다.  

 

불타는 M-1A2 전차를 본 클라크가 마스크를 꺼냈다. 열화우라늄의 위험성에 대해 클라크는 한국으로 오기 전부터 몇 차례 교육을 받았다. 파괴된 M-1A2 전차에서 뿜어지는 불길에는 열화우라늄의 미세한 분말이 먼지 형태로 섞여 있다. 그것을 들이마실 경우 호흡기로 들어온 열화우라늄이 폐에 축적되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 기름에 몇 번 적셨다. 그리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가스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군복에는 방염처리가 된 모양인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기름에 불을 지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과 달랐다. 최영주는 황당했다.
"중대장님! 트럭에는 비상시 자체파괴용으로 쓰는 소이수류탄이 있을 겁니다. 그걸 쓰십시오."
최영주가 애쓰는 걸 안타깝게 지켜보던 지형준이 소리를 질렀다.  
 
- 소이 수류탄은 섭씨 2,000도가 넘는 고온을 30초 이상 내뿜는다. 불길이 치솟은 곳 주변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소이수류탄의 흰색 불덩이 근처에서 하얀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길이 화르르 일어났다. 경사를 따라 움직인 불길이 유조트럭들을 차례로 집어삼켰다. 시커먼 연기가 도로 전체를 뒤덮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폭발이 계속 일어났다. 
 
- 팀장 최민형 대위가 연락을 위해 사용한 개인휴대통신기는 미국에 파견된 국가정보원 요원이 건네준 단말기였다. 아무래도 국정원 요원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상훈 중위의 비트도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도와줘야 합니다!"
박정우 중사가 자동소총 노리쇠 후퇴전진시키며 말했다. 다른 팀원들도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상훈 중위는 팀원들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안 돼! 임무가 먼저다. 무조건!"
"우리 비트도 들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박정우 중사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평상시의 웃고 농담하던 박정우가 아니었다. 선욱규 중사나 김민석 하사도 마찬가지로 이상훈 중위를 주시하면서 공격명령을 기다렸다. 
"우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기다려!"

- 그래서 작전기획참모본부는 전선이 가장 넓게 확장됐을 때를 작전일로 잡았다. 
미군의 진격은 예상보다 조금 빨랐으나 편차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한기수 대장은 반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군의 탄약창을 한꺼번에 파괴하는 날짜는 그날로부터 일주일 전으로 잡았다. 미군 최전선 부대에서의 탄약소모량과 미군이 탄약을 전선에 보급하는 시간까지 감안한 것이다. 한기수 대장은 몇 번이나 재검토했다. 다른 변수는 없는 것 같았다. 드디어 작전일 전날이었다. 통일참모본부에서도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누가 봐도 계획은 완벽했다.  


- "미 수송선단은 이미 태평양에 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질문을 들은 참모들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한기수 대장은 바보 같은 계산을 했다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국이나 일본 탄약창만 제거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본토 외에도 해외 수많은 기지에 사전배치선이나 보급창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의 수송선단이 계속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송선단이 며칠 간격으로 끊임없이 일본으로 와서 물자를 하역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 보급선을 차단하지 않고는 미군에게 탄약부족 사태를 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군에게는 미국 수송선단을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아직도 장보고급 잠수함이 몇 척 남아 있었지만 통일참모본부는 한국 해군 잠수함들에게 수송선단을 공격하도록 명령할 수단이 없었다. 사실 통일참모본부에서는 한국 잠수함이 몇 척이나 남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그래서 한기수 대장이 다시 제안했다. 갸웃거리는 다른 참모들에게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장담했다. 작전 개요는 이렇다. 일본과 미국의 탄약창을 동시에 파괴하더라도 바다에는 탄약을 만재한 수송선단이 계속 오고 있다. 언뜻 보면 탄약창을 파괴해도 소용이 없을 듯해 보인다. 한국이 일본의 미군 탄약창을 폭파하더라도 수송선단이 일본에서 일단 하역하지 않고 바로 부산에 하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미군 수송선단이 부산항에 탄약을 하역하더라도 최전선에 보급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만약 한국군이 사력을 다해 경부고속도로를 공격하면 미군의 보급에 소요되는 시간은 더 걸리게 된다. 바로 그 사이를 최대한 이용해 한국군이 반격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이 수정된 작전의 핵심이었다. 

- 선봉부대 일부는 천안 남쪽에서 전투 중이었다. 한국군은 전면퇴각 중이었다. 평야가 나타나자 미군의 공세가 더 치열하고 저돌적으로 바뀐 것 같았다. 화력과 기동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한국군에게 평야지대는 너무 불리했다. 미군은 서울 바로 코앞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군 제3해병원정군의 전진속도가 뒤처진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미 해병대는 문경을 돌파하고 충주 남쪽으로 접근 중이었다. 또다시 대도시 하나가 미군 수중에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 "미주원정군이 단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있는 게요?"

이종식 차수가 묻자 참모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궜다.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통일참모본부 입장에서 미주원정군은 처음부터 버리는 돌에 불과했다. 사령관 차영진 준장을 비롯해 미주원정군 병사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버린 돌이 아직까지는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남동해안의 텍사스에서 출발해 까마득히 먼 서해안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것이다. 거의 꿈같은 기적이었다.

- 그리고 뜻밖에 미국 내의 반전여론이 기하급수적으로 세력을 늘렸다. 처음 원정군이 텍사스에 진입했을 때 비등했던 비난 여론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어떤 미국 시민이 미국을 침공한 한국군을 비난할라치면 다른 시민들로부터 '한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당신이 직접 입대해서 싸우겠소?'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이 한국을 침공한 것처럼 한국도 미 본토를 침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더 많은 미국 시민들은 미국과 한국이 서로 침공하는 것보다는 평화적으로 사태가 해결되길 바랐다. 미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미국 대통령은 3일 이내에 한국에서의 전쟁이 끝날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원조로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에 투입할 예정이었던 육군 주 방위군 3개 사단을 대통령이 고집을 피워서 모두 캘리포니아에 투입했다. 우선 미 본토를 뒤집어놓은 한국군부터 잡을 작정이었다. 덕택에 한국에서의 압력은 크게 줄어들 수 있었다.

 

- 미주 원정군의 역할은 이렇듯 대단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위기에 처한 주 방위군 40사단과 텍사스에서 큰 피해를 입은 49 기갑사단을 합하면 한국군 미원정군은 5개 사단을 상대한 셈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계속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던 미주원정군도 그 한계에 온 것 같았다. 오늘 새벽에 보고하기로는 병력이 절반, 장비가 3분의 1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통일참모본부에서는 그들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할 수도, 병참지원을 할 수도 없었다. 미국과 태평양, 그리고 한국의 하늘과 바다는 모두 미국의 것이었다.

- "한기수 대장 동지. 대통령께 한 번 더 항복제안을 해보시도록 건의하시라요."
이종식 차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 숙인 한기수 대장도 마찬가지로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한국군에게 여러 가지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은 항복이었다. 한국 입장에서는 싸울수록 손해였다. 그리고 더 이상 싸우면 통일한국에는 진정 파멸뿐이었다. 이종식 차수가 잠시 떠올린 것은 태백산맥으로 이동시킨 핵미사일 발사기지였다. 

- 8월 22일 22:50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 [한국시간 8월 23일 14 : 50]
샌 디에이고가 바로 눈앞이었다. 그리고 선두에서 달리는 자주포대가 샌 디에이고 군항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샌디에이고를 방어하는 미 제40사단의 2여단과 3여단은 꼼짝 않고 방어선에 못 박혀 있었다. 해군비행장이 공격당하자 미 해군기들은 모두 시애틀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때문에 샌디에이고의 미군은 공중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갑지휘차에 탑승한 차영진과 참모들은 시종 우울했다. 한국군 미원정군은 샌디에이고를 공격하고 싶어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북쪽과 동쪽에서 미군 3개 사단이 미주원정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 "기보 2중대와 통신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ATACMS에 당한 것 같습니다."
김종태 중위가 침울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차영진 준장과 오성환대령은 잠시 말을 잃었다. 캘리포니아에 주 방위군 정예 3개 사단을 투입한 미군은 한국군 미주원정군을 확실히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기계화보병대대 2중대 소속 브래들리 6대는 원정군 대열 후방을 엄호하면서 15번 고속도로를 통해 고속으로 기동 중이었다. 그것이 2중대의 마지막 차량들이었다. 중대 정수에서 한참 모자라는 브래들리 장갑차들은 지금 고속도로 위에서 불타고 있었다. 

- "정찰위성..."
차영진이 고개를 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미국은 인공위성으로 한국군의 이동을 감시하다가 장갑차량들이 눈에 띄자 사정거리가 긴 ATACMS를 날렸을 것이다. 보병전투차 6대는 고속도로 위로 쏟아지는 자탄 950개를 피할 수는 없었다. 
 
- 그러나 한국군의 전투기들은 항상 평균 손실률을 넘는 손실을 입었다. 한국군 조종사들은 지대공미사일을 상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상대해야 하는 미군의 전투기 숫자가 너무 많았다. 최초에 30대에 가깝던 F-16 전투기는 이제 7대밖에 남지 않았다. 활주로 자체방어에도 어려운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전투기나 헬기의 비전투손실이 아직 한 대도 없었다니 대단합니다. 저는 정비사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차영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주로 미국의 공군기지 위주로 부대를 전개한 까닭에 전투기나 헬리콥터가 사용할 무기와 연료가 부족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전투기와 헬기대수가 문제였다. 미군은 언제부턴가 한국군에게 기지를 탈취당할 것 같으면 전투기와 헬기부터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의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이동해야 하는 한국군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미주원정군이 한계에 봉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이제 여덟 시간만 참아! 겨우 여덟 시간이란 말야!"
차영진이 참다못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무는 완수해야 했고, 부하들은 살려야 했다. 그것이 차영진의 모순이었다.

- 8월 23일 19 : 10 대구광역시 중구
미군 한국원정군 사령부는 한국은행 대구지점 지하금고를 사용했다. 이곳 역시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됐다. 하지만 조사해 보니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 슈미트 중장 이야기가 나오자 캐일러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나 캐일러 중장도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할 줄 알았다. 18 군단이 금산과 논산에 전격적으로 공수 및 공중강습작전을 펼쳤을 때, 캐일러는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 옥천과 금산을 잇는 교통로를 개척해 줬다. 덕분에 공중으로 투입된 병력과 지상부대가 연결되어 모험에 가까웠던 공중강습 작전은 결국 성공으로 끝났다.
"내일은 오후부터 날씨가 흐리다는군. 비가 올지 모르네. 한국군의 역습을 조심하게."
그간 있었던 한국군의 역습은 꼭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에 이뤄졌다. 그래야 미군이 항공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의 제공권 상실은 한국군에게 뼈아픈 손실이었고, 전쟁기간 내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 "늦어도, 사흘 안에는 결판이 나겠군."
홀더 대장이 뒤에 앉아 있는 참모들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제 이 전쟁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 8월 23일 22:35 일본 히로시마현 에다 섬
아카츠키 탄약창은 정말 넓었다. 섬 전체가 탄약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김현수의 작전조는 사전에 지도를 보면서 도상훈련을 숱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 접해보니 그 거대함에 당장 압도되어 버렸다. 거대한 탄약고들은 각 탄약고 지붕 높이와 비슷한 언덕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탄약고의 연쇄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언덕 뒤 건물들 사이로 불쑥 무장한 순찰조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탄약고들은 지붕이 둥그스름했다. 그 모양이 에스키모의 얼음집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글루라 부른다. 이글루의 출입구는 컴퓨터 보안장치로 잠겨져 있었다. 플라스틱카드가 없다면 육중한 강철문을 열 수 없다. 다른 조원들이 엄호하는 사이 대원 두 명이 고양이 걸음으로 문에 접근했다.  

 

- 일반적으로 미군의 디포(Depot)라고 하면 사전에 나온 의미인 병참부와 조금 다르다. 디포는 각종 무기를 생산하고 수리하며 시험하고 보관도 하는 곳이다. 무기라면 당연히 폭탄과 포탄, 각종 구경의 총탄 등 탄약도 있고, 전차와 장갑차, 헬리콥터 등 장비류도 있다. 그런데 화약 재료를 생산하거나 보관하는 곳도 디포라고 한다. 

- 1990년대 초반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있던 소련 극동해군 탄약고에 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화재는 곧 연쇄 폭발사고로 이어졌다. 가득 쌓인 탄약이 폭발을 일으켰지만 한꺼번에 폭발하지 않고 거의 몇 시간마다 대규모 폭발이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탄약창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사태가 자그마치 거의 6개월 간 계속되었다. 미군 탄약고는 훨씬 엄격한 안전 기준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김현수의 작전조는 그것을 충분히 고려해서 폭파장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아카츠키 탄약창은 저장능력 이상의 폭탄을 기지 내에 보관하고 있었다. 
 
- "안전조치는 확실히 해뒀소?"
김현수는 미군 폭발물 처리반이 폭파장치를 해제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자 김성헌이 가슴을 탁 쳤다.
"걱정 마시라요. 해제하려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날 겁네다."

"좋아. 기럼, 이제 항복이나 해볼까?”
김현수가 총을 도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다른 조원들도 총을 던졌다. 여섯 명의 대원들은 두 손을 높이 든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방에서 강한 불빛이 비춰졌다. 김현수가 눈을 찡그렸다. 

 

- 천천히 거니는 한국 군인 세 사람은 마치 외계인 같았다. 공원 주변 카지노에서 밤을 새고 산책 나온 관광객들이 세 사람을 힐끗거렸다. 동양인에다가 총을 들고, 게다가 미군과 조금 다른 얼룩무늬 군복이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눈에 띄었다. 박정우 중사는 왼팔에서 흐르는 피를 붕대로 대충 지혈하고 다녔다. 세 사람은 검은색 위장크림을 아직도 지우지 않았다. 노파가 이들과 스쳐 지나가다가 뒤돌아보고 안경 너머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벤치에 앉아서 이동전화를 꺼내 작은 목소리로 신고하는 노인도 있었다. 조깅하던 젊은 여성이 이들을 보고 놀라 반대로 달아나기도 했다. 

 

- 숲 속에서 비명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저격병 한 명이 계단을 떼굴떼굴 굴렀다. 그러나 그는 민간인이었다. 사람과 같이 굴러온 장총이 옆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군인 아니면 제발 빠져! 박 중사 어딨나?"
이상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박정우 중사도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겨우 민간인들에게 두 명이나 죽다니, 이상훈은 눈에서 불이 났다. 만약 아까 그 자리에서 항복했다면, 두 사람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 [일본에 있는 탄약창이 몽땅 날아갔습니다.]
"뭐?"
홀더 대장은 처음에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설리번이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카츠키, 구레이치히로, 가와가미 탄약창이 적 특수부대에 습격당했습니다. 현재 연쇄폭발로 폭발물 처리반의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특히 아카츠키의 기화폭탄 저장고 일부는 극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 "알겠네. 어서 대피령을 내리도록 하게. 그리고 탄약창 주변에 외지인들이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게. 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일세. 거기에 위험한 물건은 남아 있지 않았던가?" 
홀더는 특별한 이름을 대지 않고 그저 '위험한 물건'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7공군 사령관은 '위험한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전투기에 탑재되는 B-61 전술핵무기였다. 지하 수백 미터 아래에 있는 지휘소를 파괴할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된 B-61 전술핵무기 몇 발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아카츠키에 임시로 보관되어 있었다.  


- 홀더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걱정거리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 통신장교가 다시 종이를 가져다줬다. 홀더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그리고 펼쳤다. 다음 순간 홀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홀더 대장이 급히 안경을 꺼내 몇 번이고 문서를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씌어진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 종이에는 미 본토에 있는 탄약창들이 모조리 날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군수참모! 현재 탄약재고로 며칠을 버티겠나?"
"현재 소모형태로 본다면 길어야, 사흘입니다." 
 
- "젠장! 놈들은 아직 마지막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어! 그놈의 유령군단은 나타나지도 않았단 말이야! 이 상태에서 탄약재고가 겨우 사흘이라니!"
한국군의 마지막 승부수라고 불리는 7군단의 종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수도권 인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워낙 종적이 묘연해서 미군 정보담당자들은 7군단을 다들 유령군단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탄약 보급이었다.
"가장 가까운 선단이 한국까지 곧바로 온다면, 몇 시간이 걸리지?"

"24시간 이내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 홀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한국 지도로 다가갔다. 부산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홀더가 며칠 전에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군수참모 말처럼, 부산에 직접 하역하더라도 전선까지 물건을 보내는 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홀더의 시선이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가더니 아산만 근처에서 멈췄다. 한국군의 평택 해군기지는 일본 해상자위대의 요코스카 기지에 비교될 정도로 거대하다. 홀더 대장이 아산만 지역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 물었다.  
"정보참모! 평택 해군기지의 파괴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우리 고속수송선이 곧바로 물자를 하역할 수 있겠나?"
"현재로는, 물자하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보참모가 대답한 다음 사진첩을 잽싸게 뒤졌다. 평택항 위성사진을 찾았는지 정보참모가 촬영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긍정했다. 홀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군수참모! 지금 즉시 한국에 있는 모든 부대의 탄약 소모를 줄여 4일 이상 사용분을 확보하도록 하게. 그리고 이동 중인 선단은 곧바로 이 아산만으로 진입시켜 내가 그전에 아산만 기지를 확보하도록 조치해 놓겠다."

- 평택이라면 전선까지 탄약을 보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다. 한국군이 많은 병력을 파견해 일본과 미국에서 탄약창을 파괴했지만, 결국 미국의 보급능력을 무시한 헛된 작전으로 드러났다. 바다에 떠 있는 수송선단이 계속 한국으로 오면 미군의 탄약보급 부족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8월 23일 11:23 캘리포니아 샌 디에이고 [한국시간 8월 24일 03:23]
강윤택 중령의 전투기는 샌디에이고 북쪽 해안선에 접한 도로 위를 낮게 떠서 날았다. 바닷가 언덕 위의 라 호야(La Jolla) 고급 주택가와 리조트가 아래로 휙휙 지나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끝없이 이어진 해안선이 '보석이 박혀 있다'는 라 호야의 뜻 그대로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푸른 바다에는 파도가 일렁이며 하얀 거품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종말이 다가왔어.'
강윤택의 전투기를 노리는 미군 전투기들이 집요하게 추격해 왔다. 레이더 경보 수신기가 끊임없이 삑삑거렸다. 그러나 아직 미사일은 날아오지 않았다. 기관포탄에 걸레처럼 찢기고 연료가 떨어져 가는 강윤택의 전투기는 죽을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 강윤택 중령은 왜 원정군 지휘부가 막판에 샌디에이고로 돌입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샌 디에이고 동쪽은 거대한 삼림지대에 막혀 도로가 끊긴 곳이다. 한국군이 기계화 부대니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주 방위군 2개 여단이 방어하는 샌 디에이고를 강행돌파하고 남쪽 멕시코로 가든지, 아니면 차량을 모두 버리고 삼림지대를 걸어 멕시코로 가는 것이다. 둘 다 마찬가지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휘부는 '그래서'라고 말했지만 강윤택은 '그렇다면'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원정군은 '그래서' 샌 디에이고로 쳐들어갔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화려하게 끝내자는 것인지, 아니면 사령관 차영진 준장이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샌 디에이고 인근 지상에서는 지금도 화려한 불꽃과 검은 연기가 연속 피어나고 있었다. 

- '헬기만 남아 있었어도...'
강윤택 중령은 안타까웠다. 헬기로 국경을 넘어가면 전투 없이도 많은 원정군 병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차나 장갑차는 어차피 미군에게서 탈취한 것들이니 아까울 게 없었다. 그러나 원정군에 헬기는 한 대도 없었다.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겨우 몇 명만 살아남았고, 절반쯤 남은 정비사들은 보병이 되어 싸우고 있었다. 전차도 겨우 몇 대, 장갑차도 열 대를 넘지 않았다. 그것도 30분 전 이야기였으니 지금은 몇 대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  

 

- 연락이 끊겼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 대부분도 처절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는 보고를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 차영진은 그들이 제발 어서 미군에게 항복하길 바랐다. 드넓은 미국땅에서 사방에 깔린 감시의 눈초리와 총구를 피해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차영진은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오려고 싸우느니 차라리 항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전략적으로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였다. 의미 없는 싸움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들이 차영진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나 물론 특수부대원들이 결코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미국의 탄약창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고속도로 곳곳이 끊긴 지금 미국의 반전여론은 최악의 상황으로 들끓어 올랐다. 그리고 머나먼 한국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검은 옷을 입고 백악관 앞도로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주 방위군으로 참가했다가 사망한 아들을 둔 부인들도 가세했다. 워싱턴 경찰은 부인들의 시위가 격화되어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에게 축하한다는 농담을 건넬 수 있는 미국 사람들이었지만, 아들을 잃고 우는 어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다시 한국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전상자들이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묻는 질책이 유명 신문사설과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도배되었다. 이제 대통령을 지지하는 미국 시민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 공격헬기 수십 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앞에는 미군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차영진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멕시코 국경에서 겨우 50미터도 남지 않았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길 힘도 없었다. 
"사령관님! 우린 끝까지 해냈습니다."
옆에 엎드린 오성환 대령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오성환 대령의 군복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잠시 놀란 표정이던 차영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차영진이 오성환에게 손을 뻗었다.
"오 대령님. 고맙습니다. 잘 싸워주셨습니다."


- 오성윤 대위는 한국군미주원정군의 모든 전투기록을 담은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부상자들과 함께 가장 먼저 국경을 넘었다. 오성환의 눈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물론입니다. 그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고마워요, 오 대령님. 오! 오 대령님! 흑!"
차영진이 팔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꼈다. 오성환 대령의 눈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벌린 입으로 뭔가 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 계속되는 폭음에 차영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도망가거나 싸울 필요는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임무는 완수했고, 탈출은 불가능했다. 미군에게 잡히거나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었다. 

차영진이 천천히 일어섰다. 머리 위에는 불을 뿜는 공격헬기들, 앞에는 전차와 장갑차의 대군이 몰려들었다.
차영진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부하들을 쏘려면 차영진 자신부터 쏘라는 표시였다. 총구 몇 개가 그에게 겨눠졌다.

차영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마치 팥빙수처럼 높이 위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 이제 끝이었다. 정말 끝이었다. 전쟁을 세 번이나 치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갔다. 이제는 드디어 차영진이 죽을 차례였다. 운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순서가 늦게 왔을 뿐이었다.
차영진은 부상자들이 가장 걱정이었다. 만약 미군이 국경을 넘어 원정군 생존자들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이 없었다. 미국이 멕시코를 쥐고 흔든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다. 더욱이 멕시코는 현재 내란이 진행 중이었다.

-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따사롭던 태양의 샌 디에이고가 갑자기 싸늘한 가을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더니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전차와 장갑차를 따라 전진해 오던 미군 병사들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무운돌풍인가? 여긴 바다가 아니라 땅인데...'
뱃사람들에게 공포의 전설이 무운돌풍, white squall이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의 버뮤다 삼각해역 같은 바다에서 발생하는 기상현상이다.  

-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농민반군들은 한국군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믿지 못할 사람보다는 차라리 자연이 나았다. 바람소리에 뒤섞인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널리 퍼졌다.

- 8월 24일 11 : 15 경기도 평택시
82 공수사단은 미군 유일의 공수사단답게 부대 구성도 특이하다. 다른 부대는 대부분 여러 연대에서 대대 한두 개씩을 차출한 다음 뒤섞어 부대를 구성한다. 같은 18 군단 소속인 10 산악사단 1여단의 경우에도 22, 32, 87연대에서 각각 대대 하나씩을 당겨와 여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82 공수사단과 101 공중강습사단은 한 개 연대가 사단 예하 각 여단을 구성하고 있다. 예컨대 82 공수사단 1여단은 504 공수보병연대, 2여단은 325 공수보병연대, 3여단은 505 공수보병연대로 이뤄진다. 이들은 이른바 순종 공수혈통을 가진 부대인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2차 대전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 18 군단의 최전방에서 전진하는 2기갑기병연대는 원래 경차량인 험비 위주였다. 그러나 같은 군단소속 기계화보병사단에서 2개 전차대대를 지원받아 전투력이 훨씬 강해졌다. 경차량이 특기로 삼는 고도의 기동성과 전차가 자랑하는 강한 충격력을 함께 갖춘 부대가 된 것이다. 

 

- 8월 24일 11 : 36 목포시 북서쪽 64km
"방위 삼백이십공(3-2-0)! 헬기 호버링음입니다. 추정거리 2천!"

"기관 정지!"
음탐장이 보고하자 이승렬 중령이 허겁지겁 명령을 내렸다. 대잠헬기가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사령실 요원들이 바짝 긴장한 나머지 이곳저곳에서 숨죽인 한숨이 들려왔다. 
"함장님. 더 이상 북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김창규 소령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함장에게 다가섰다. 수심이 겨우 60여 미터밖에 안 되는 얕은 해역이었다. 서해의 해저지형은 원래 그랬다. 게다가 군산을 경계로 그 북쪽으로는 수심이 더욱 낮기 때문에 자칫 잠수함이 좌초할 위험이 있었다. 

- 서해는 잠수함으로 항해하기 매우 까다로운 해역이다. 수심이 낮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 이억기함은 연료전지 AIP 시스템을 탑재하기 때문에 장보고급 잠수함보다는 대형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심까지는 어느 정도 기동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서해 바닥은 뻘이 발달되어 있고 가는 모래, 개흙으로 된 지형이기 때문에 해수의 투명도는 매우 낮다. 지금처럼 수면 가까이 잠항하고 있더라도 육안으로 발각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그러나 김창규 소령이 서해에서 더 이상 북상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이 아니었다. 서해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본토에서 유입되는 하천수의 양이 많다. 게다가 최근에 상륙한 태풍으로 인해 더욱 많은 하천수와 빗물이 서해로 유입되고 있었다. 잠수함이 물속에 머무르는 원리는 물 위에 떠 있는 배와는 약간 다르다. 수상함정은 양성부력이라고 하는 부력의 초과 상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과 반대되는 현상은 음성부력인데, 이것은 부력이 부족한 상태로 물위에 뜰 수 없는 경우이다. 잠수함은 부상할 경우에는 밸러스트 탱크에 공기를 집어넣어 양성부력 상태로 만들고, 잠항할 때는 밸러스트에 물을 집어 넣어 음성부력 상태로 만든다. 그런데 수중에서 일정한 심도에 머무를 때는 중립(Neutral) 부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그런데 서해와 같이 담수의 유입이 많은 바다에서는 해역마다 바닷물의 밀도가 급격히 변하므로 일정한 잠항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게 된다. 만약 염도가 높은 짠 바닷물을 항해 중이면 잠수함은 양성부력을 받아 갑자기 떠오르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민물보다 바닷물에서 쉽게 뜨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반대로 같은 조건에서 담수층을 만나면 잠수함은 갑자기 하강하게 된다. 음성부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잠수함은 작은 밸러스트 탱크라 할 수 있는 중량보상탱크(compensating tank)를 조정하는 방법으로 심도를 유지한다. 그런데 서해에서 잠수함이 중립부력상태를 유지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서해가 매우 얕다는 데에 있다. 균형을 미처 잡지 못한 상태에서 물 위로 떠올라버리거나, 아니면 해저 바닥에 좌초될 위험이 있었다. 지금처럼 미 해군의 구축함과 대잠초계기들이 쫙 깔린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억기함의 존재는 바로 들통이 나고 만다.

- 낮은 충격으로 사령실에 서 있던 이승렬과 김창규가 비틀거렸다. 해저면에 안착한 것이다. 개흙바닥이 수중배수량 1,800여 톤의 이억기함을 스펀지처럼 부드럽게 안착시켰다. 긴장했던 이승렬은 부하들이 듣지 못하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다. 잠항관! 이곳에서 당분간 대기한다. 음탐장! 외부 상황은 어떤가?"
"안 좋습니다. 함장님. 담수괴 때문에 소나 효율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질이 더럽게 나쁩니다." 

- 가뜩이나 많은 음탐장의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었다. 하천수와 같은 담수는 바다에 유입되면서 바로 바닷물과 뒤섞이지 않는다. 담수괴, 즉 물덩어리의 형태로 움직이는데 이것이 음파를 차단하거나 굴절시켜 버린다. 그리고 서해의 수질에는 개흙입자들이 많이 섞여 있어 음파의 전달효율을 심각할 정도로 떨어뜨린다.

 
- "음탐장. 우리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놈들 역시 우리를 찾으려면 애를 먹어야 할 거야."
이승렬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고 음탐장을 격려했다. 사령실 요원들 모두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부장! 우리가 감자를 마친 게 언제였지?"
"넷? 감자라니요? 아! 감자 작업. 예, 7월 12일입니다. 40일 조금 넘었습니다."
김창규 소령이 난데없이 감자 작업이라는 말을 잠시 착각했는지 머쓱하게 대답했다. 먹는 감자를 생각했던 것이다. 함장은 선체의 자기장을 줄여주는 소자 작업을 말한 것이었다.

- "아냐. 테스트는 할 필요 없어. 높다고 감자 작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이승렬 중령은 대잠초계기의 자기감지장치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억기함이 해저 바닥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낮은 수심이면 대잠초계기의 자기감지장치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이억기함과 같은 잠수함은 강철로 만들어졌는데, 강철은 강자성체이다. 잠수함의 추진계통에는 자장을 심하게 발생시키는 모터와 발전기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선체는 물속을 항주 하면서 마찰 저항을 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도 아주 미세한 자장이 발생한다. 이러한 자기장이 강자성체인 선체에 계속 누적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잠수함은 점점 더 강한 자성을 띠게 된다. 선체가 자성을 가지면 자석처럼 지구자장대, 즉 지자기를 더욱 심하게 흩뜨리게 된다. 이것은 대잠초계기에서 잠수함을 더욱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 이런 이유로 잠수함 보유국가들은 선체의 자장을 제거하는 소자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케이블을 선체 주위로 감아 반대의 자장을 강제로 흘려보냄으로써 선체의 자성을 상쇄시키는 방법이다. 그 외에 선체 내부에도 자장을 발생시키는 모터나 발전기, 전기기기 등에 감자장치를 부착하기도 한다. 이승렬 중령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지금 함장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은 대잠초계기의 자기감지장치(MAD)에 걸리는 것이었다.  


- "부장, 왜 미 해군이 이곳까지 대방어를 강화하는 걸까? 놈들은 그동안 계속 대잠방어망을 외해로 확장했는데 말야."
만약 이승렬이 생각하는 문제를 부장도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함장님. 저도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해역에 대한 미군 대잠항공기의 초계빈도가 너무 높습니다. 이건 우리가 제주도 서남방으로 밀릴 때보다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김창규 소령이 대답하다 말고 눈을 반짝였다. 미 해군은 그동안 선방어 개념의 대잠방어망을 구축해 왔다. 부산 서쪽 해상부터 차츰차츰 구역을 넓혀서 태풍이 불기 전에는 제주도 남서쪽까지 완벽한 대잠방어선을 확장했다. 그런 다음 방어선 안쪽의 대잠경계는 철저히 무시했다. 미군 함정들이 마치 손을 잡고 늘어선 것처럼 구축함과 프리깃, 그리고 초계기들이 물 샐 틈 없이 이어지며 강력한 대잠방어망을 구축했던 것이었다. 

- "함장님. 미 해군이 어쩌면 태풍 때문에 선개념의 대잠방어망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미군은 거점방어로 전환했습니다."
"그래. 맞았어. 왜 구역을 방어하겠다는 거지? 그것은 바로 미 해군이 뭔가 지킬 것이 생겼다는 거야!"
이승렬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미 해군이 지금까지 서해에서 지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새로 생겼다면, 그것은 미군이 부산항을 확보하려고 대잠방어선을 확장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이번에는 서해에서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김창규 소령은 그제야 미군이 또 다른 항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승렬이 잽싸게 서해안 지도를 찾아 항구들을 더듬었다. 검지 손가락이 몇 차례 빠른 속도로 서해안을 왕복했다. 손가락은 잠시 인천에서 머물렀으나 이승렬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다시 아래쪽을 더듬었다. 
"만약 이곳으로 들어간다면 그리 멀리 우회하지는 않을 거야."

"함장님. 들어가기도 전에 당할 겁니다. 그리고 그곳은 수심도 낮은 데다 해류도 빠릅니다. 도저히..."
이승렬이 가리킨 지점을 확인하자마자 김창규 소령이 펄쩍 뛰었다. 조선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수도로 운반하는 조운선들이 무수하게 침몰한 곳이 바로 그 해역이었다. 풍랑과 빠른 조수 때문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여기까진 진입해야 한다."
함장은 단호했다. 이승렬이라고 그곳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해도상에 그가 가리킨 곳은 섬들이 일렬로 이어선 열도였다. 그곳은 태안반도 서쪽, 격렬비열도였다.

- "부장. 우리는 우리가 살아남을 곳을 선택하는 게 아닐세. 난 우리가 죽을 곳을 선택하려는 거야. 자네라면 잘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네."
이승렬의 말끝에는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김창규 소령은 그것이 함장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때문임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이동침로와 방법을 준비하겠습니다."
김창규 소령도 이제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다. 이젠 부장이 함장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할 때였다. 두 사나이가 눈빛을 마주한 채로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 "평택에 뭔가 있다는 말이군. 후훗! 그동안 숨어 있던 7군단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전쟁이 시작된 후 한국군 7군단은 강력한 대공방어망 아래에 꼭꼭 숨어 있었다. 수많은 정찰위성과 정찰기로 이 잡듯이 뒤졌지만 7군단은 '아마도' 수도권에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정보만 얻어냈을 뿐이다. 그래서 미군 사이에서는 한국군 7군단에 유령군단이란 별명까지 붙였다. 이제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려는 순간이었다. 

-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면, 나쁜 것부터 말해주게."
"오산 인근에 띄웠던 무인정찰기들이 모두 격추됐습니다. 그리고 평택 근방에서 방공망 제압작전을 펼치던 F-16 네 대가 격추됐습니다."
캐일러의 얼굴이 보기 싫게 찡그려졌다. 잠시 후 다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좋은 소식이란 뭔가?"
"아군기를 격추시킨 러시아제 SAM이 한국군 7군단의 방공부대 것이라는 겁니다. 수도권 방공부대와는 다른 러시아제 신형 SAM입니다. 현재 적 주력의 위치는 평택과 수원 사이일 걸로 추정됩니다." 
캐일러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 표정이 싹 달라졌다.  
 
- 모두들 자신감에 차 있었다. 경기도 남부지역은 지형이 평탄해서 기갑전을 벌이기에 최적이다. 캐일러 중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국 지도를 바라보았다. 마치 패튼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캐일러 중장이 뒤로 돌아 참모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제 마지막 빅게임이 눈앞에 다가왔다. 7군단을 밟아버리면, 한국군도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한국군의 완벽한 항복, 무조건 항복을 기다리겠다!"

-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은 남북전쟁 당시의 북군 지휘관 U. S. Grant 장군의 별명이다. 남군에게 무조건 항복만을 허용하겠다는 뜻의 'U. S. Grant'라는 별명을 가진 그랜트 장군의 이름은 Ulysses Simpson Grant다. 그랜트 장군은 그전에도 이름을 몇 번 바꿨는데, 인형 같은 것을 껴안는다는 뜻의 HUG에서 시작해 엄청나게 많이 좋아진 이름 약자다. 

- "전대장님. RRF 선단도 목적항구를 평택항으로 변경해서 항해 중입니다. 우리도 RRF 선단과 합류하라는 명령입니다."
"뭐? 그 느림보들과 합류하라고?”
부산항을 향해 선수를 돌리는 고속수송함 리걸러스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배럿 대령이 펄쩍 뛰었다. 군사해상수송사령부에는 제1고속해상수송선대 외에도 사전배치집적선대, 그리고 RRF, 즉 신속대응예비선대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대형함으로 편성된 것은 물론 사전배치집적선대(APFafloat prepositioning force)이다. 그리고 이들은 육해공군의 중요한 장비들을 실은 APS(afloat prepositioning ships) 선단, 그리고 해병대의 장비를 적재한 MPS(maritime prepositioning ships) 선단으로 나뉜다. 사전배치집적선대는 이미 전쟁 전부터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고 부산항이 장악되자마자 바로 입항한 선단이었다. 군사해상수송사령부 소속 수송선 중에 전쟁지역으로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선단이었다.

 

- 그러나 이 함정들은 미 본토로 다시 귀환해서 전략물자를 실어오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배럿 대령이 지휘하는 제1고속수송선대가 가장 빠른 속도로 전쟁지역과 미 본토를 왕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사전배치집적대(APF)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위험지역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APS와 MPS의 RoRo 수송선들은 모든 군사물자를 미리 배에 실어놓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신속대응예비선대는 속도가 느리지만 총 척수가 96척으로 실질적으로 군사해상수송사령부의 주력 선대이다. 사전배치집적선대와 고속수송선대의 수송선은 주로 RoRo 수송선인데 이는 전투장비와 물자를 동시에 수송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RRF의 수송선들은 대개가 컨테이너 수송선과 같은 전문수송선으로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이 매우 크다. 
 
- "릭! 전쟁이 곧 끝나겠는걸?" 
해도판을 곰곰이 살펴보던 배럿 대령이 리처드 웨이크먼 소령에게 중얼거렸다. 평택항은 아직 미군의 손에 장악되지 않은 항구였다. 예인선들이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복잡한 수로를 진입하는 것도 부두에 접안하는 것도 예인선의 도움 없이 수송선단 스스로 해야 했다. 앨갈급 고속수송선은 선체 앞부분에 보조추진기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향을 바꿔 접안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쟁이 벌써 끝날까요? 아직 평택 근처까지밖에 진격을 못했다잖습니까? 놈들의 수도인 세울까지 올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을 것 같은데요?"
웨이크먼 소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배럿 대령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목적항구를 평택으로 바꾼 것 말야. 우리뿐만 아니라 RRE선단까지도 모두 평택항으로 입항한다니 난 솔직히 놀랬어. 평택항으로 우리 선대와 RRF까지 동시에 입항하면 원정군 사령부는 더 이상 지상병참선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네. 보급품을 일선부대로 수송하는 시간이 대폭 단축되거든. 지금 원정군 사령부는 전쟁을 단번에 끝내겠다는 의도야. 기뻐할 일이지." 

- 8월 24일 16 : 48 경기도 평택시 
국군 9기계화보병사단 소속 1개 기갑수색중대는 안성시와 평택시의 경계지점인 칠원동 일대에 매복했다. 각 전차는 가정집 벽을 허물고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만주 전역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여단작전장교가 제안한 매복 방법이었다. 전차가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일단 적에게 관측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열상관측장비에 쉽게 포착이 안 된다. 더더욱 좋은 것은 집 벽이 1차 방벽이 되어주기 때문에 대부분 HEAT탄인 대전차미사일 공격을 받더라도 전차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전차가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훨씬 안전했다. 
다만 전차가 들어갈 정도로 큰 집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어떤 소대는 소똥이 사방에 널린 축사를 은신장소로 쓰기도 했고 어떤 소대는 사료용으로 쌓아둔 짚더미 속에 숨기도 했다.  

 - 그 사이 장원형은 전차장용 관측장치, CPS를 돌려 주변을 수색했다. 머리 위로 불덩어리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아군 기계화보병소대의 메티스-M 대전차미사일이었다. M-1A2 전차의 전면장갑을 관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잘만 맞추면 전투불능상태에 빠뜨릴 수는 있었다. 
한국군의 대전차미사일을 발견했는지 미군 전차들이 다시 한번 연막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전차 간 간격을 늘리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좌측에서 작은 불덩어리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들이 25밀리 기관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 물이 가득 고인 논은 아니었지만 전차가 기동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옛날에 남북한이 대치할 때 북한이 동절기에 남침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많은 것은 한반도에 무수히 널린 논 때문이었다. 

- CPS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눈앞에서 불덩어리 다섯 개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토우였다. 미군의 토우는 전차의 포탑 바로 위에서 아래쪽으로 폭발한다. 그래서 살상력이 아주 뛰어나다. 거리는 불과 1,000미터 정도였기 때문에 날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5초 이내였다.
 
- 강한 진동과 함께 전차가 움찔거렸다. 사격 결과 확인은 포수의 몫이다. 장원형은 연막탄을 발사한 다음 고함을 질렀다.
"오른쪽으로 최대한 꺾어!"
전차가 오른쪽으로 급회전하자 모두들 균형을 잡기 위해 뭔가를 붙잡았다. 전차의 50미터 전방에서 연막탄이 터졌다. 열상조준경을 방해할 수 있는 신형 연막탄이었다. 흰색 연기가 연극무대의 막처럼 위에서 아래로 쏟아졌다.
 
- 남쪽 하늘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장원형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장원형의 눈에 비친 것은 허공을 가득 메우면서 쏟아지는 수천 발의 로켓탄이었다. MLRS의 집중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가로세로 길이가 불과 2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좁은 지역에 MLRS 한 개포대가 쏟아낸 5만 발 이상의 자탄이 일시에 쏟아졌다.  


- 8월 24일 17 : 14 격렬비열도 남서쪽 57km
"우현 5도 이백구십공(2-9-0)도 잡아!"
김창규 소령이 땀을 뻘뻘 흘리며 조함 명령을 내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부상해서 육분의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싶었다. 미군이 GPS 코드를 바꾼 이후로 잠수함 이억기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관성항법장치는 오차가 계속 늘어나서 더 이상 신뢰하기도 어려웠다. 더욱이 이 해역은 수심이 낮은 데다 토사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해저지형으로도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함장은 김창규 소령에게 좌초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격려했지만 이미 30분 전에 김창규 소령은 개펄 언덕으로 보기 좋게 이억기함을 충돌시키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억기함에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실수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적어도 조함실력만큼은 함장 이승렬 중령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김창규였다. 

- "조류가 바뀌고 있습니다. 북동에서 남서로 흐릅니다. 유속 1.5노트!"
잠항관 권혁인 대위가 외부환경센서에 시선을 집중하며 보고했다. 조류가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억기함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으나 거센 조류로 인해 방향을 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차라리 출력을 더 낼 수 있다면 이깟 조류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잠수함이 해저바닥에 충돌할까 일단 두려웠고, 갑자기 수면 위로 상승해 미군 대잠초계기에 포착될까 봐 아주 느린 속도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기관실, 연료전지 시스템 가동한다.”
배터리의 충전 상태를 살피던 함장 이승렬이 인터폰으로 명령을 내렸다. 일반 디젤 잠수함이라면 부상한 다음 디젤 엔진으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지만 이억기함은 연료전지 방식의 AIP 시스템을 탑재했기 때문에 수중에서도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기관실입니다. 연료전지 시스템 가동 시작합니다.]
기관실에서 짧은 응답이 왔다.

 

- 연료전지 시스템이 작동을 시작했지만 특별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디젤 엔진이나 가솔린 엔진처럼 열기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억기함의 압력 선체 바깥쪽에 탑재된 액화 산소탱크와 수소탱크로부터 각각 반응에 필요한 산소와 수소가 흘러나왔다. 이들 탱크가 압력선체 바깥에 위치한 것은 안전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내부에 탑재했다간 자칫 새어 나오기라도 하면 잠수함이 통째로 터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탱크에서 배출된 산소와 수소 기체는 질소가 충전된 2중 파이프를 타고 선체 안쪽에 설계된 기계실의 연료전지 장치로 공급되었다. 양극으로 수소, 그리고 음극 쪽으로 산소가 공급되고 이 기체는 양극판과 음극판 사이에 흐르는 전해질을 통과하며 전기를 생성시켰다. 발전기 없이 전기가 생성되는 연료전지는 어떤 면에서는 외형과 원리가 축전지와 유사하지만 산소와 수소를 계속 공급해 주면 지속적으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연료전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 연료전지 덕택에 부상하지 않고 이억기함이 이곳까지 무사히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산소와 수소가 모두 동이 나면 그때부턴 디젤 엔진을 가동해야 했다. 
 
- 이승렬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음탐장은 이미 목표를 잃은 뒤였다. 음탐장이 허둥거리며 소나의 탐색모드를 이리저리 바꾸어보았지만 한 번 접촉을 잃은 목표를 재차 포착하는 것은 어려웠다.
"거리가 워낙 멀어 확실치는 않지만 대형 함정입니다. 속도도 빨랐습니다."
음탐장이 아쉽다는 듯이 보고했다. 이승렬이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김창규 소령을 불렀다.
"부장! 변침한다. 방위 삼백오십(3-5-0) 잡아!"
"함장님.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음파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이승렬 중령의 명령에 김창규가 난색을 했다. 이억기함을 또다시 해저바닥에 충돌시키기는 싫었다. 그러나 함장은 뜻밖에 매우 단호했다.
"추적한다. 속도 3분의 1로 증속 한다!"
"함장님!"
"부장! 그럼 이제부턴 내가 조함을 지휘하겠다."
이승렬이 김창규 소령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김창규가 말하려고 하는 위험을 함장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접촉을 잃은 직후에 바로 움직여야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목표는 이억기함을 노리는 구축함일 수도 있었다. 김창규 소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김창규 소령이 알기로 함장은 겨우 적 구축함 한 척을 잡기 위해 이렇게 무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 이억기함이 연료전지를 가동할 수 있는 동안 표적을 찾아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억기함 쪽이 모든 면에서 불리해진다. 서서히 속도가 빨라지는 잠수함 안에서 김창규 소령이 진땀을 흘렸다.

- 8월 24일 19 : 38 격렬비열도 남서쪽 23km
"전단장님. 제1고속수송선대가 22시에 합류합니다. 그쪽 전대장이 이동침로에 대잠수색은 완료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문제없다고 전해. 바보 같은 놈들! 예정시간보다 늦고 있잖아? 이미 대잠수색을 마친 구역에서 왜 이리 꾸물거리는 거야?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인가?"
보고를 받은 항모 에이브럼 링컨 전단장 마이클 스킨스(MichaelHaskins) 소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평택 주변지역에 대한 공중지원으로 링컨의 비행갑판은 불이 날 지경이었다. F/A-18E 수퍼 호넷 전투기들은 착륙하자마자 연료를 재급유받고 폭탄을 장착한 다음 바로 이함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해병항공대 소속 비행대 하나까지 더 날아와 항모 링컨에서 출격했다.
 

"어뢰 같습니다! 항모를 향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도대체 누구야!"
이승렬 중령이 벌떡 일어섰다. 이억기함의 위치는 아직 항모를 공격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좋은 공격위치를 잡기 위에서는 좀 더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먼저 항모도 아니고 외곽호위를 맡은 페리급 프리깃을 공격하고 또다시 어뢰를 발사한 것이다. 이승렬이 이를 앙다물었다.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숨을 죽여왔는데 그것이 몽땅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우군에 대한 동료의식보다도 먼저 허탈감이 밀려왔다.


- "함장님, 아군 잠수함의 공격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저러다간 회피하기도 전에 당장 반격을 당할 겁니다." 
"그래, 맞아. 너무 안 좋은 위치야. 그런데 대체 누굴까?"
부장을 향해 이승렬 중령이 나직히 물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우군 잠수함은 항모로부터 불과 6,0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항모의 외곽경비를 맡은 페리급 프리깃을 날려버리고 또다시 어뢰를 퍼붓고 있었다. 저 잠수함처럼 이승렬 중령도 항모의 외곽 방어망을 뚫고 그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항모는 아직 속도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 어뢰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이억기함에서 공격을 준비했던 것이 이제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이억기함에서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였다. 지금은 그저 안타깝게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 "함장님! 방위 삼백십공(3-1-0)에 돌발음입니다. 고속추진음입니다! 구축함 같습니다. 맙소사!"
음탐장이 고함을 질렀다. 그곳에 구축함이 있으리라고는 미리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구축함이 최고속도로 접근하면서 엄청난 기관음을 내뿜고 있었다. 
"발사된 어뢰는 도합 여섯 발입니다. 모두 항모 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음탐장! 어뢰와 항모의 거리는?"
이승렬 중령이 음탐장 뒤로 바짝 다가선 채로 질문했다. 긴장으로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거리 5,600미터입니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표적이 저속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거리지만 항모는 달랐다. 최고속도를 내면 항모는 30노트를 거뜬히 넘어선다. 거리가 5km가 넘으면 어뢰의 자체추적 소나가 목표를 완전히 잡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런 경우 잠수함은 어뢰를 목표까지 정확히 유도하기 위해 유선유도를 사용한다. 잠수함의 소나와 전투정보시스템이 어뢰의 소나보다 훨씬 정확하기 때문에 아예 어뢰를 리모컨으로 조종하듯이 직접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잠수함은 어뢰를 계속 유도해줘야 하므로 도망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 "이런 제기랄! 항모가 알아챘다!"
음탐장의 보고에 이승렬 중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거리에서 어뢰가 항모를 따라잡으려면 최대한 늦게까지 항모가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항모는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이승렬의 목구멍으로 타는 듯한 열기가 솟구쳤다. 이억기함에서도 당장 어뢰를 발사하고 싶었지만 항모까지의 거리가 10km를 훨씬 넘었다. 속도가 빠른 DM2A4 어뢰라도 최고속도로 도주하는 항모를 10km 거리에서 명중시킬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배터리가 소진되기 때문이다. 

- 이승렬은 지금 항모를 공격하는 잠수함이 과연 누구일지 궁금했다. 잠수함 지휘소의 통신망이 붕괴된 이후로 우군의 작전 정보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물론 부상을 해서 단파 무전기를 사용하면 사령부와 통신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미 해군의 치밀한 대잠감시망을 피해 부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에서 무전기를 사용하면 전파신위치가 역으로 탐지당할 수 있었다. 사령부와 통신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승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몇 가지 가능성을 걸러내자 떠오르는 우군 잠수함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이억기함이 있는 해역까지 스노팅을 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잠수함은 오로지 두 척이 유일했다. 그것은 이억기함과 같은 연료전지 AIP 체계를 탑재한 신형 잠수함뿐이었다. 
"젠장! 최윤덕이다!"

- 최대속도로 가속하는 최윤덕함의 특성은 누구보다도 음탐장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억기함과 자매함이기 때문이었다. 
우군 잠수함이 최윤덕이라 밝혀지자 이승렬이 반가운 감정으로 감격했다. 오랫동안 생사를 몰랐던 동료 잠수함의 존재가 확인되자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십만 톤이 넘는 거함이 지금 최고속도로 어뢰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도 겨우 1,800톤짜리 잠수함에게. 
 
 - "이런! 유선유도를 지속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저건... 자살공격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장 김창규 소령이 소나 콘솔을 지켜보다가 격해지는 감정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최윤덕함은 어뢰를 모두 발사하고도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 미국 구축함이 최윤덕함으로 점점 접근했다.

어뢰를 정확히 명중시키려면 유선유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쪽 위치를 알 경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전술이었다. 최윤덕함은 게다가 최고속도로 항모를 쫓고 있었다. 시속 22노트로 항모를 잡겠다고 물고 늘어진 것이다. 
 
- 8월 24일 21 : 42 격렬비열도(서격렬비도) 서쪽 16km
"맥컬스키가 당했습니다. 퇴함 하겠답니다!"
"이런 망할!"
래리 크레이그(Larry Craig) 중령이 치솟는 화염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함미사일 경보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항모 링컨전단에는 이지스 순양함, 이지스 구축함이 모두 배속되어 있었지만 페리급 프리깃인 맥컬스키(McCulsky)를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 지금 당장 애스록으로 공격하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애스록 발사합니다!"
대잠전 사관이 곧 발사절차를 수행했다. 그리고 곧 구축함 잉거솔의 전갑판에 탑재된 마크 41 수직발사기에서 애스록 대잠미사일이 치솟았다.

- 8월 24일 21 : 45 격렬비열도(서격렬비도) 남서쪽 5km
"대잠어뢰 입수했습니다. 방위 삼백오십공(3-5-0), 거리 7,000! 액티브 탐신을 시작했습니다."

"개새끼들!"
이승렬 중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윤덕함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어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항모를 향해 최고속도로 돌진 중이었다.
"음탐장! 항모까지 어뢰의 남은 거리는 얼마인가!”
"1,500미터입니다! 선두 어뢰군과 후미 어뢰군 간에 속도 차이가 많이 나고 있습니다. 후미 어뢰군은 네 발입니다."
이승렬 중령이 목에 걸린 스톱워치를 꺼냈다. 항모를 향해 선두를 달리는 어뢰는 시속 50노트를 낼 수 있는 독일제 DM2A4 신형어뢰였다. 한국 해군이 기존에 운용해 왔던 독일제 SUT Mod2 어뢰, 그리고 국산 백상어 어뢰보다 발전된 추적장치와 훨씬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어뢰이다. 그러나 DM2A4 어뢰가 시속 50노트로 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항모 역시 지금 33노트의 최고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상대속도는 기껏 17노트에 불과했다. 최윤덕에서 발사한 어뢰들이 차근차근 거리를 좁히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어뢰가 항모에 명중하려면 3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후미를 뒤따르는 어뢰들은 기존에 사용해 오던 SUT Mod2 어뢰였다. 이 어뢰의 최고속도는 35노트이다. 항모가 가속을 시작하기 전에 3,500미터까지 접근했지만 일단 최고 속도로 가속한 항모를 따라잡기에는 SUT 어뢰로썬 역부족이었다.

- "젠장! 항모를 격침시키려면 적어도... 여섯 발 이상의 명중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이승렬이 긴장한 나머지 사령실 요원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크게 외쳤다. 항공모함은 어뢰 한두 발로는 도저히 격침시킬 수 없는 상대였다. 몇 발 쏘고 나서 제대로 명중확인을 하기도 전에 잠수함은 호위함들로부터 집중 공격받아 침몰당할 것이 분명했다. 미 해군의 대형항모들은 어뢰 공격을 막기 위해 선체 하부에 수미터의 공간을 띄운 이중의 중장갑으로 보호되어 있다. 게다가 수백 개에 달하는 방수격실로 철저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 구획이 피격되더라도 함 전체로 침수되는 것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 2차 대전 당시의 전함에 가까운 정도의 방호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미 해군의 대형항모이다.  

- "놈들이 투하한 어뢰 두 발이 최윤덕을 발견했습니다! 공격침로로 항주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200!”
음탐장이 소리 질렀다.미 해군이 교묘해지고 있었다. 이곳처럼 낮은 심도에서는 대잠어뢰를 일반적으로 세팅할 경우 어뢰의 소나가 작동하기도 전에 해저바닥으로 처박히고 만다. 게다가 해저면이 가깝기 때문에 액티브를 사용해도 난반사가 심하다. 그러나 이번에 투하한 어뢰는 나선형으로 하강하지 않고, 대신 투하된 방향으로 직진했다. 그런 후 어뢰가 균형을 잡은 다음, 크게 반원을 그리며 탐색모드로 전환했던 것이다. 

- "놈들도 애스록을 자칫 잘못 발사하면 어뢰가 항모에 맞을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김창규 소령이 소나 콘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최윤덕함을 탐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구축함은 단 한 척뿐이었다. 그러나 인근에는 애스록 대잠미사일을 탑재한 또 다른 구축함이 있었다. 애스록을 더 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미 해군은 철저하게 안전 위주였다. 그것은 항모가 내는 엄청난 굉음 때문이었다. 어뢰가 자칫 항모의 추진음에 현혹되어 항모를 표적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많았다. 

- 이승렬 중령이 최윤덕함의 위치를 다시 살폈다. 낮은 심도인데도 불구하고 최윤덕함은 점점 수심이 낮은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유선유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격렬비열도의 북서쪽 해역은 태안반도 쪽의 육괴가 그대로 침강한 해저지형이다. 그래서 수심이 40여 미터에 불과하다. 최윤덕함이 좌초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쪽으로 항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잠어뢰를 최대한 피하면서 항모를 계속 뒤쫓겠다는 의도였다. 

 

- "함장님! 이상한 음파가 잡힙니다. 음원은 최윤덕함의 위치와 동일합니다. 이건 아무래도... 수중전화 같습니다."
음탐장이 미세한 음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음문분석을 시작했다. 그것은 10kH 대역의 고주파였다. 음탐장이 뭔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중전화입니다. 함장님! 어서 받아보십시오."

- 이함을 위해 3번 캐터펄트에 걸려있던 톰캣 전투기도 무사하지 못했다. 캐터펄트 사출기의 구속장치에 단단히 조여 매진 듯했으나 그것은 단지 앞바퀴뿐이었다. 벽에 매달려 기어오르려고 바둥거리는 고양이처럼 톰캣 전투기는 앞바퀴만 달랑 걸린 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톰캣 전투기 역시 무거운 돌덩어리처럼 바다로 추락했다. 
 
- 항모를 지휘하고 또 항모에 무수히 많이 탑승해 본 해스킨스 소장이었지만 지금 링컨의 기동은 놀랍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최고출력인 28만 마력으로 움직이던 링컨이 어뢰를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폭주를 계속했지만 어뢰를 뿌리치지 못했다. 함장의 얼굴은 잔뜩 사색이 되어 있었다. 갑판에서 추락한 전투기들과 트레일러를 보면서 해스킨스가 함장에게 뭔가 질책하려는 듯 입을 실룩거리다 말았다. 전단장은 그였지만 항모를 책임지는 사람은 함장이었다. 
"마크 46 대응어뢰 발사!"
 
- 링컨호의 후갑판에는 시 스패로 대공미사일 발사기와 벌컨 팰렁스 근접방어화기가 탑재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바로 옆에 3연장 어뢰발사관이 있다. 그것은 잠수함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항모 링컨은 소나도 없는 데다 대잠전투시스템도 없다. 링컨이 탑재한 마크 46 어뢰는 잠수함이 아니라 어뢰를 요격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그것도 항적추적(wake homing) 방식의 어뢰를 요격하기 위한 것이다. 

- 러시아는 장사정에 소나와 함께 항적추적장치를 결합한 새로운 유도방식의 650mm급 어뢰를 개발했다. 특히 니미츠급 항공모함과 같은 거함은 배가 지나간 뒤에도 거의 하루 동안 항적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물거품을 만들어낸다. 바로 그 거품과 물의 밀도차를 감지해 배의 항적을 추적하는 것이 항적추적 어뢰이다. 이 때문에 항적추적어뢰는 잠수함이 계속 유도할 필요도 없는 데다 원거리에서 발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어뢰는 미 항모전단에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미 해군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부랴부랴 마크 46 Mod7 어뢰를 항모에 탑재한 것이다. 

- 8월 24일 21 : 49 격렬비열도(서격렬비도) 서쪽 15km
"함장님! 시에라 투는 허위 표적이었습니다. 시 호크 12가 확인했습니다. 시에라 투는 허위목표입니다! 자항식 디코이였답니다."

"디코이였단 말이지.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크레이그 중령이 입을 벌린 채로 히죽거렸다. 농락을 당해도 이건 너무 비참할 정도였다.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는 목표를 잡지 못했다. 어뢰의 액티브 소나가 해저면의 난반사로 인해 표적을 놓치고 엉뚱한 방향으로 항주 하다 자폭하고 만 것이다. 결국 잉거솔에서 발사한 애스록 대잠미사일은 겨우 한 발이 명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치명타는 아니었다. 그 한국 잠수함은 아직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경어뢰가 낮은 심도에서 약점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활용하고 있었다. 
 
- 이제 믿을 것은 폭뢰밖에 없었다. 한국 잠수함으로 접근하는 시호크 헬기 두 대를 크레이그 중령이 지켜보았다. 한국 잠수함의 진로 앞에 폭뢰를 투하할 생각이었다. 
 
- [전투정보센터입니다. 시 호크가 폭뢰를 제대로 먹였습니다. 시에라 원이 부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잔뜩 들뜬 부장의 목소리였다. 크레이그 중령이 시 호크들이 수면 위를 맴돌고 있는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로 망설여지지는 않았다. 크레이그는 송신기를 잔뜩 힘주어 쥐고는 전투정보센터에 명령을 내렸다.
"적 잠수함이 부상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라!"
[넷? 무슨 말씀입니까? 함장님.]
"폭뢰를 머리 위에 던져주라고! 못 알아듣겠나? 놈을 그냥 바닷속에 처박아버리란 말야!"

- [함장님. 탱고 유니폼 에이틴-닷-쓰리로부터 연락입니다. 청소가 깨끗이 끝났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통신사관의 연락이었다. 크레이그 중령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것은 TU18.3 임무그룹, 즉 태평양함대사령부 직할로 배속된 수송전단을 의미했다. 고속수송전대와 신속대응예비선대가 한국 잠수함 때문에 이동을 멈추고 격렬비열도 남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다 끝났다고 해. 망할 자식들에게 아주 깨끗이 청소됐다고 전해!"
크레이그 중령은 이제 더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수송선단에게는 항공모함의 안위 문제 따위는 관심 없을 것이다. 
 
- 8월 24일 22 : 21 격렬비열도(서격렬비도) 남서쪽 8km
"전 발사관 개방하라!"
진노한 이승렬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온 바다가 수송선이 내뿜는 소음으로 요란했다. 음탐장은 이제 소리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동료 잠수함 최윤덕함이 피침당하고 서해 바다는 미국 수송선이 뒤덮고 있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함장님! 아직 상세한 함종 파악은 하지 못했습니다."
"부장! 그건 올라가서 하면 된다! 잠망경 심도로 부상한다!"

이승렬이 거침없이 부상을 명령했다. 이억기함이 수면 위로 천천히 솟구쳤다.
"잠망경 올려! 부장이 탐색잠망경을 맡아. 내가 공격잠망경을 맡겠다!"

- 최윤덕함에 가한 미 해군의 공격을 함장은 잊을 수 없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면서 부상하려는 최윤덕함을 미 해군은 무참하게도 박살 냈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승렬이 잠망경을 열영상모드로 전환했다. 연두색으로 빛나는 서해바다에서 미군 수송함들이 하얀색으로 밝게 빛났다. 그는 하얀색 실루엣만 가지고 빠르게 함정들의 특징을 살폈다. 이제 피로 응징을 해줄 시간이었다. 
 
- 이승렬은 목표를 십자눈금에 넣고는 잠망경 손잡이에 붙어 있는 레이저 거리계의 버튼을 눌렀다. SERO 15형 공격잠망경에서 목표 함정으로 레이저가 쏘아졌다. 
"작전! 확인된 목표부터 즉각 어뢰를 발사하라! 시간이 없다. 어서!"
"알겠습니다. 1, 2, 3, 4번 발사관 발사!"
표적을 정확히 지정하는 것은 어뢰가 항주 하는 사이에도 가능했다. 이승렬은 일단 어뢰부터 발사하고 그다음에 어뢰를 통제할 생각이었다. 둔중한 진동과 함께 이억기함 함수의 어뢰발사관에서 어뢰 4발이 솟구쳤다. 독일제 DM2A4 고속어뢰로 독일어로 Seehake라는 별명이 붙은 신형 어뢰였다. 

- Seehake는 대구과의 메를루사(merluza)라는 물고기로 크기가 1미터가 넘는 데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돌출한 전형적인 폭식성 어류이다. 활동하는 영역도 매우 깊어 수중 1,000미터 정도에서도 서식하는 물고기이다. 그야말로 DM2A4 어뢰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별명이었다. 알루미늄-산화은전지를 사용하는 DM2A4 어뢰는 전기모터 추진방식의 어뢰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속 50노트의 속도를 낸다. 일반적으로 그 속도를 내는 다른 어뢰들은 모두 열기관 구동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는 소음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DM2A4 어뢰는 강력한 출력의 영구자석 모터에 이중반전 프로펠러로 추진된다. 그러므로 출력에 비해 추진소음은 아주 작다. 게다가 정밀한 유도장치와 기만장체에 대응할 수 있는 프로세서를 내장하고 있었다.

- "함장님! 방위 백육십공(1-6-0), 백육십팔(1-6-8)도에 고속수상선박입니다. 저건!"
부장 김창규 소령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말을 머뭇거렸다. 이승렬 중령이 잽싸게 그 방향으로 공격잠망경을 돌렸다. 뱃머리 쪽에 선교가 설치된 특이한 선형의 그 수송선은 엄청난 속도로 다른 수송선들을 헤쳐 나오고 있었다.
"알골급이다! 저건 알골급이야. 정말 더럽게 빠르군!"
이승렬 중령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미 해군의 군사해상수송사령부가 자랑하는 고속수송선 앨갈(Algol) 급이었다. 고속수송선들은 호위함들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미친놈들! 호위함의 방어진형을 저렇게 무시하다니. 저건 자살행위입니다!"

- "아냐. 놈들이 저 속도를 내면 공격원잠도 따라잡기 힘들다. 녀석들은 만약 이곳에 잠수함이 있더라도 속도로 따돌릴 생각으로 최고속도를 내는 거다. 정말 대단하다!" 
이승렬 중령이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6만 톤에 달하는 거함이 구축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머지 발사관, 모두 저놈들에게 선물해 주자!"

 

- 곧이어 이억기함의 나머지 발사관에서 SUT Mod2 어뢰가 물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아직 우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장 김창규 소령이 또 다른 목표가 없는지 확인하며 계속 잠망경을 돌려댔다. 수면 위에 대잠초계기 한 대가 떠있었지만 파랑이 높은 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래. 계속 잠망경 심도에 머무른다!"
이승렬은 혹시나 대잠초계기에서 이억기함의 잠망경 마스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지금 목표로 삼은 커다란 먹이를 두고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수치였다. 

- "함장님! 1, 2, 3, 4번 어뢰, 확실한 표적 추적 범위에 진입했습니다."
"좋아! 무선유도로 전환한다. 케이블 절단하는 즉시 재장전한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1, 2, 3, 4번 어뢰 무선유도로 전환! 유선유도 해제! 발사관 개구부 폐쇄! 재장전 시작합니다!" 
이승렬 중령과 부함장, 그리고 작전관의 손발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무선유도로 전환된 DM2A4 어뢰들이 수송선이 내는 음파를 확인하고 곧이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액티브 유도모드로 전환됐다. 날카로운 음파를 쏘아대며 어뢰들이 수송함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 [즉시 방어로 전환하고, 다른 선단이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네. 후퇴는 안 돼! 현 지점을 고수하게.]
홀더 대장은 처음부터 후퇴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미군이었다. 수도권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면 최소한 30년 간 한국인들은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며 전후복구사업에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미국의 뜻을 거스를 나라는 없게 된다.

 

- 8월 24일 23 : 21 격렬비열도(서격렬비도 남서쪽 6km)
쿠쿵~
"제기랄! 어디 한번 해보자. 네놈들 손엔 안 죽는다!"
이승렬 중령이 이를 악물었다. 잠수함을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이 마치 카운터 펀치를 얻어맞았을 때처럼 몇 초 간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빼놓았다. 

- 대잠초계기, 그리고 대잠헬기들이 폭뢰를 마치 융단폭격하듯이 뿌려대고 있었다. 최윤덕함을 어뢰로 공격하려다 쓰디쓴 맛을 본 미 해군은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함장님! 수평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계속 상승하게 됩니다!"
부장 김창규 소령이 직접 조타석에 앉아 이리저리 움직여봤지만 충격으로 손상을 받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평타가 위로 꺾인 채 고정됐는지 이억기함은 계속 상승하려 하고 있었다. 이승렬 중령이 서둘러 감속 명령을 내렸다. 
"제기랄! 속도 2분의 1로 감속!"
이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물 위로 부상해서 항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도망칠 것인지 어느 한쪽을 지금 당장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렬은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복하려고 부상하던 최윤덕함과 같은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 수상함 요원들이 잠수함에 대해 갖고 있는 증오심은 지금과 같은 전쟁에서는 더욱 극심하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전투능력을 상실한 독일군 U보트가 항복하려고 부상하다가 무수히 격침당했었다. 게다가 지금 이억기함은 미군 수송선들을 완전히 요절낸 뒤였다. 게다가 항모까지 최윤덕함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자 이승렬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 해군의 항모에는 거의 6천 명에 달하는 승무원, 그리고 항공요원들이 탑승한다.
"제기랄! 더 이상 버틸 수는 없다. 전원 탈출한다!"
"함장님! 지금 폭뢰공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나갔다가는 다 죽을 겁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이억기함과 함께 수장당할 셈인가? 부장! 어서 탈출을 준비해!"

- 이승렬이 함내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 부서 요원들을 사령실에 집합하도록 명령했다. 어뢰실과 기관실에 있던 수병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왔다. 수염도 깎지 못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부하들은 그야말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대한민국 해군의 최정예, 잠수함 이억기함의 승무원들이었다. 어쩌면 여태껏 살아남은 해군의 유일한 함정 승무원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2개조로 나눠 탈출을 실시한다. 전방탈출해치와 후방탈출해치를 이용해서 동시에 탈출한다. 미안하다. 함장은 탈출 후에 제군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자." 
이승렬의 목소리가 떨렸다.  

 

- "9사단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
"진위천 남쪽에서 미군 3기갑기병연대를 붙잡아두고 있습니다. 전차 소모가 극심하지만 양측 전차 파괴 교환비는 거의 1대 1 정도입니다. 군단 포병의 확실한 지원을 받고 있어서 그렇게 전황이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미 제1기병사단 선봉은 평택 남방에서 진격을 멈췄습니다. 군단 정찰대대의 보고로는 놈들이 현재 방어태세로 전환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군단 진격로 일부에 살포식 지뢰가 깔리고 있습니다."
정보참모의 마지막 말에 이강신 중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놈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모양이군."

- 9기계화보병사단은 미끼였다. 그것도 미군 지상부대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3군단 본진을 낚기 위한 거대한 미끼였다. 국군 9기계화보병사단을 잡기 위해 미군이 1기병사단과 기계화보병사단을 투입하는 순간 측방으로 통일한국군 1, 2기갑사단이 파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이제 실행만 남았을 뿐이다. 최근 이틀 동안 미군은 대단히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3군단은 정상적인 공격속도의 두 배가 넘는 고속으로 경기도로 달려왔다. 무리를 해서라도 아산만 해군기지와 지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 미군의 탄약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군단 정보참모로부터 전해 들었다. 최근 미 군단의 포탄 사용량은 평시보다 25% 정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군단 정보부가 미군 포로에게서 입수한 문서에는 군수장교들에게 탄약사용 통제를 강력히 실시하라는 명령문이 함께 들어있었다. 미군 수송선단이 서해로 들어온 것과 2개 군단이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탄약부족사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이 분명했다.

- 그러나 미군은 너무 큰 모험을 했다. 3군단은 기갑군단이지만 그 우측면을 엄호하는 제3해병원정군은 보병위주의 부대다. 충북 지역에서 한국군 보병 2개 사단이 미 해병대의 발목을 붙잡는 사이 미 3군단은 너무 앞으로 나와버렸다. 우측방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 잠시 지도를 내려다보던 이강신 중장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2기갑사단장과 그 뒤에 서 있는 여단장 세 명을 똑바로 주시했다.
"국가의 운명이 이 마지막 일전에 걸려 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조국이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그리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 임무는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는 것이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모두 절망적이었다 해도 아직 미래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우리 군단은 미래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 주기 바란다. 이상."

- 정병호가 그동안 꼬불쳐둔 담배 한 갑을 풀었다. 보병전투차 하차반은 물론 승차반에게도 하나씩 담배를 돌렸다. 그러나 아직 불은 댕기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정병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다들, 기분 졸라 더럽지? 여기 있는 놈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고 짬밥도 많지만, 나도 이제 겨우 스물다섯밖에 안 먹었다. 제일 어린놈은 이제 갓 스물이지. 우린 곧 죽을 거다. 우리 가운데 절반이 숫총각인데 말야. 정말 좆같은 세상이다. 안 그러냐? 후훗!" 
모두들 말이 없었다. 정병호 병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끝까지 살아남을 놈이 얼마나 될지는 나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지. 나는 교회나 절 근처에 가본 일도 없는 놈이지만,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 다들 라이터 하나씩 있지? 모두 꺼내봐. 내가 켜라면 다 함께 켜는 거다. 알았지?" 
 
- 8월 25일 02 : 35 황해도 평산군(황해남도 봉천군)
팬텀을 주력 기종으로 하는 제11전투비행단은 원래 수원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공습이 점점 심해지고 지상군이 충남 아산과 천안까지 진격해 오자 북한의 황해남도 봉천군 누천비행장으로 이동했다. 누천비행장은 통일 이전에는 북한 공군의 전방전개기지 가운데 하나였다. 한미연합공군의 대규모 공습에 대비해 각 격납고는 지하암반을 뚫어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몇 차례 미사일 공격과 정밀 폭격을 받아 격납고 출구 하나가 붕괴됐지만 기지 자체는 무력화되지 않았다. 격납고는 암반 속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 지하에 마련된 조종사 숙소는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 있었다. 최인석 중령은 출격을 앞두고 방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녹음했다. 비행단의 전투기들이 각 기지에 흩어져 작전을 했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파일럿들에게 어떤 심리적인 영향을 끼칠 것인지 불확실했다. 이런 녹음작업이 그들의 사기에 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조종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녹음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 심하게 떨리던 최인석의 목소리는 결국 울음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녹음되는 테이프는 전사가 확인된 다음 가족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가족들이 이 테이프를 듣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생각하니 최인석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 앞에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 든든한 남편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눈물을 함부로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은 녹음기를 조작하는 병사 한 명뿐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일시에 쏟아졌다.
 
- "정훈아. 넌 집안의 장남이다. 그러니 엄마와 누나는 네가 지켜야 한다.아빠가 너한테 항상 엄하게 대한 것은 너를 단련시키기 위해서지 널 미워해서가 아니야.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언제든지, 꿋꿋하게 살아남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란다. 너한테 처음 회초리를 들었을 때, 난 그날 밤 내내 한숨도 못 잤단다. 새벽에 네 종아리에 약 발라준 거, 넌 엄마가 그런 줄 알겠지만, 사실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어. 정훈아! 아빠는 널 사랑해.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큰 바위처럼 꿋꿋하게, 바르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 
최인석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계속했다.
"여보! 정은이 엄마, 아니, 조혜미 씨! 늘 당신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가슴속에 묻어두면서도 제대로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사랑해, 여보. 헛헛! 어색하구만. 이거 듣고 당신 웃지 마! 웃으면 너무 이쁘니까." 

 

- 최인석과 유철종은 장구를 챙겨 애기(愛機), 미스 박이 주기되어 있는 8번 지하격납고로 향했다. 미스 박은 완벽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멋진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미스 박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어떤 파일럿이 팬텀을 가리켜 '세상 그 어떤 글래머보다 더 육감적'이라고 했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기체 주변을 돌면서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파일런에는 70밀리 로켓포드와 Kh-31P 대 레이더 미사일이 장착되어 있었다. 최인석의 임무는 한국 공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미군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 포대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자위용으로는 AA-11 아처공대공미사일 두 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 삐익! 삐익! 삐익!
경보음이 세 번 울리자 거대한 8번 격납고 문이 열렸다. 격납고 밖에는 전투기를 지상까지 올리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예인 차량이 전방 랜딩기어에 토잉 바를 걸어 엘리베이터 위로 끌고 갔다. 마치 만화에서나 나옴직한 지하기지 설비에 최인석은 감탄했다.
 
- 활주로 상에 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고글로만 볼 수 있는 특수파장의 빛을 내는 램프였다. 일반 조명등을 사용할 경우 조종사의 암순응이 일시에 깨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 거기다가 패트리어트 대대 작전통제소는 E-3C 조기경보통제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국군의 E-2C도 조기경보 능력이 있다. 그러나 E-3C보다는 그 능력이 훨씬 제한적이다. E-2C는 레이더만 공중에 띄워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정보를 지상기지로 보내 처리하고, 스스로 항공기들을 지휘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된다. 반면에 E-3C는 레이더 기지 전체를 공중에 띄워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기경보와 지휘통제능력이 E-2C보다 훨씬 강력하다.  

- 최인석의 편대는 서울 외곽을 지나 과천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고도는 지상 250미터를 유지했다. 편대 2킬로미터 전방에는 자그마한 무인기들이 날아갔다. 무인기는 자동항법장치로 지상에서 불과 50미터 상공을 전투기보다 더 빠르게 날아갔다. 그 무인기들은 레이더 추적을 받을 경우 팬텀의 레이더 반사특성과 비슷한 신호를 발신하는 장비를 싣고 있었다. 일종의 미끼인 셈이다.

 

- 일반적인 경우라면 적의 레이더를 기만하기 위해 무인기를 전투기보다 높이 띄운다. 그래서 그쪽에 주의를 쏠리게 한 다음 공격편대가 저공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오늘의 공격방법은 달랐다. 오히려 공격편대가 높이 떴고 무인기는 더 낮은 고도를 날았다. 상대의 일반적인 예측을 역이용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 상대가 적외선 탐색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이런 작전은 어렵다. 레이더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팬텀의 적외선 특성은 무인기와 다르게 마련이다. 상대는 금방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구름 위에서 작전하는 조기경보통제기에 적외선탐색장비가 붙어 있더라도 구름 때문에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매그넘! 매그넘!" 
먼저 오른쪽 주익에 붙어 있던 Kh-31P가 떨어져 나왔다. 650킬로그램짜리 미사일이 떨어져 나가자 일시적으로 기체가 기우뚱했다. 그러나 다음 미사일이 발사되자 전투기는 곧 균형을 유지했다. 미사일은 잠시 자유활강한 다음 부스터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폭발적인 가속이 붙어 전투기를 빠르게 추월해 나갔다.윙맨도 동시에 미사일을 발사했는지 다른 미사일 두 발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 가파르게 상승하던 미사일은 잠시 후 부스터를 분리시켰다. 속도는 마하 1.8이었다. 다음 순간 액체연료에 의한 램 제트엔진이 작동을 개시했다. Kh-31P 미사일은 순식간에 마하 2.5를 돌파했다. 편대가 발사한 네 발의 Kh-31P 대 레이더 미사일이 패트리어트 포대의 레이더를 향해 초고속으로 돌진했다.

- 미군의 패트리어트 포대는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하나는 미사일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레이더를 끄는 방법이다. 여기에 덧붙여 레이더의 위치를 급히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미사일을 발사해 Kh-31P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레이더를 끄면 전투기나 지대지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포착하기 어렵다. 저항도 못해보고 당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레이더를 끄는 것은 지상군 부대에 대한 대공방어 임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패트리어트 포대가 설사 미사일을 발사해 요격을 시도하더라도 요격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다. 저고도를 아음속으로 날아오는 표적에 대한 요격시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마하 2.5에서 마하 3에 이르는 속도로 돌진해 오는 Kh-31P 미사일은 차원이 틀렸다. 

-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 레이더 미사일 공격이 지대지미사일 공격과 병행될 경우 파괴효과는 훨씬 높아진다. 1991년 걸프에서 지상전이 벌어졌을 때, 미군은 이라크의 방공미사일 기지에 대해 ATACMS 지대지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이전에는 지대지미사일의 명중률이 낮아 소형의 레이더와 발사대를 공격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현대의 지대지미사일은특정 건물을 골라 명중시킬 정도로 명중률이 우수하다. 

 

- 이번에 패트리어트를 상대로 실시된 대 레이더 미사일 공격은 한국군 7군단 포병이 보유한 ATACMS 지대지미사일 공격과 맞물려 있었다. 다행스럽게 이런 다중공격이 먹혀들어 패트리어트가 상당 시간 동안 기능을 정지하게 된다면 한국 육군이 보유한 헬리콥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7군단 항공여단이 보유한 2개 공격헬리콥터 대대는 아직 한 번도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만큼 미군 패트리어트에 대한 집중 공격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8월 25일 03 : 36 대구광역시 달성군
미 공군 962 항로통신대대 소속 E-3C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35,000피트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호출부호가 Eagle Eye인 이 조기경보통제기는 황해도와 경기도, 강원도 북부지역까지 감시할 수 있었다. 보잉사의 707 여객기를 개조한 E-3C 조기경보통제기의 등에는 직경이 9.14미터에 이르는 접시모양의 레이더 돔이 붙어 있다. 레이더 돔 안에는 고성능 APY-2 레이더와 각종 전자장비가 가득 차 있다. 레이돔의 무게는 무려 5톤이 넘는다. 이 레이더로 E-3C는 반경 400킬로미터 이내를 비행하는 항적들을 감시할 수 있다. 

- 날씨가 흐리다고 공중전투초계임무를 맡은 F-15C 전투기 숫자를 줄인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공군은 날씨가 흐리면 야간비행을 크게 줄였다. 야간저고도 비행을 도와주는 랜턴장비가 한국 공군에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출격 수를 늘리는 것은 그나마 귀한 전투기를 잃을 가능성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래서 야간요격에 나오는 한국군 전투기의 숫자는 항상 극소수였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기량이 대단히 우수했다. 정예 조종사만 내보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동안 북한 각지에 흩어진 기지에 꼭꼭 숨어 있던 한국군 전투기들이 벌떼처럼 뛰쳐나왔다.


- "적이 두 개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항적의 속도는 600노트, 침로는, 아! 조인트 스타즈를 정확하게 노리고 있습니다! 상대 거리는 70마일입니다." 
랜소는 가슴이 철렁했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렇게 접근할 때까지도 몰랐지?"

화가 잔뜩 난 랜소의 물음에 가까이 있던 수석관제사가 대답했다.
"레이더상에 처음 나타난 지점 근처 지상에는 한국의 공군기지가 없습니다. 폭이 좁은 도로만 있을 뿐입니다. 지하화 된 비밀기지가 아니라면 로켓 보조추진장치를 달고 단거리 이륙을 한 기체일 겁니다."
그런 방식의 기습에는 특별한 대응방법이 없었다. 당하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한다. 

 

- "항적의 기종은 파악됐나?"
그러나 안경을 쓴 흑인 관제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런 전파도 발신하고 있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속도는 계속 600노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망할 놈들! 아주 정확하군. 전파도 안 쏘면서 어떻게 우리를 찾지?"
랜소는 정체불명의 항적이 정확하게 E-8C를 추적해 오는 것을 보고 점점 불안해졌다. 항적과 조인트 스타즈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장거리 레이더의 관제를 받을 가능성도 있고, 적외선 탐색장치를 사용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둘 다 스스로 전파를 발신하지 않고 목표물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 표적은 앞서 날아오는 미사일이었다. 전투기를 잡을 때는 암람 두 발로 충분하다. 그러나 날아오는 미사일은 일반 전투기의 세 배가 넘는 고속이었다. 그리고 레이더 단면적 역시 전투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 요격이 쉽지 않은 것을 감안한 공격이었다. 매 초가 숨 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암람 네 발은 접근하는 미사일 정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각각 약 40킬로그램의 고성능 탄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네 발이 동시에 터지는 위력은 엄청났다. 탄두가 터지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파편으로 화면이 뿌옇게 흐려졌다. 

- 랜소는 1969년 미 공군전자 정찰기 EC-121의 격추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북한 공군은 동해안을 정찰 중이던 EC-121을 격추시키기 위해 황당한 전술을 선보였다. 그들은 미그 전투기를 분해해서 기차로 비밀리에 동해안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잔디밭에서 이륙시키는 전술을 썼던 것이다. EC-121은 근처에 북한 공군기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여유만만하게 비행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미그 전투기한테 어이없게 격추당했다. 한참 떨어져 있던 팬텀 전투기들이 손을 써볼 사이도 없이 재빨리 치고 달아났던 것이다. 

 

- 8월 25일 04 : 10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한국군 7군단 항공여단 710 공격헬리콥터대대 조재홍 준위와 박원철 준위는 두타산 줄기의 어느 능선 위에서 정지비행을 하고 있었다. 조재홍은 사수고 박원철은 파일럿이었다. 그들이 탄 Bo-105CS5 정찰헬리콥터는 능선 위로 로터와 센서 일부만 살짝 내민 채 산 아래 도로를 살폈다. 조재홍은 조심스럽게 스틱을 움직여 헬리콥터 천장에 붙은 NHSS센서를 조작했다. 나이트 호크 조준 시스템의 약자인 NHSS는 열상관측장비와 레이저 조준장치가 함께 내장된 것이다. 모양은 마치 골프공처럼 둥글게 생겼다. 조재홍은 NHSS의 화면을 조준경을 통해보고 있었다. 

- 열상관측장비에는 20대가 넘는 대형 탱크로리와 탄약 수송차량이 보였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가 금방 느껴졌다.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엄중한 호위였다. 수송대 앞과 뒤에는 M-2A2 보병전투차 네 대와 M-1A2 전차 네 대, 그리고 4연장 스팅어 발사기를 붙인 M-6 라인베커 대공차량 한 대가 따라붙었다. 라인베커는 M-2A2 브래들리를 개조한 대공차량으로 4연장 스팅어 발사기와 스팅어 미사일 10발을 싣고 있다.
 
- 수송부대에 대해 이 같은 엄중한 호위가 붙는다는 것은 미군 보급부대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였다. 한국군 게릴라들의 보급부대 습격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은 상당한 병력을 보급부대 호위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급부대에 대한 호위가 엄중할수록 일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미군의 숫자는 줄어든다. 한국군 지휘부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 조재홍은 정찰결과를 꼼꼼하게 불러줬다.
"대열 전방에, 전차 두 대, 보병전투차 두 대, 후방에도 전차 두 대, 보병전투차 두 대다. 라인베커 대공차량이 지휘관용 험비와 함께 트럭 행렬 제일 후미를 따라가고 있다. 그 외에 트럭들 중에 중기관총이 붙은 놈들이 많다. 보병전투차량도 스팅어를 가진 놈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기타 다른 대공화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상." 

 

- T-80U 전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일한국군 제1기갑사단 11 전차여단 112 전차대대 소속 전차들이었다. T-80U 전차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파트촌 옆을 지나갔다. 전차장 이승재 하사는 포수용 조준경에 연동된 BURAN-PA 열상장비로 주변을 살폈다. T-80U 전차는 미군의 M-1A2 전차나 한국군의 K-1A1 전차와 달리 전차장용 독립관측장비가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다. 그래서 전차장은 포수처럼 전방의 일부 각도밖에 볼 수가 없었다.

- 한국군 T-80U 전차와 보병 전투차량들은 미군 포병의 SADARM 대전차 자탄에 당했다. 그리고 미군 전차와 보병전투차량들 역시 한국군 포병의 BM-30 스멜쉬 다연장 로켓포가 발사한 대전차 센서 무기에 당했던 것이다. 서로 상대를 보고 전차포로 격파한 것은 파괴된 전차의 10%도 되지 않았다. 


- "1기병사단 소속 전차로군."
불타오르는 M-1A2 전차 포탑에서 부대마크를 확인한 이승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1기병사단은 미군의 정예 기갑부대로 주황색 방패모양 바탕에 굵은 사선과 말머리가 그려진 부대마크를 쓴다. 1기병사단은 원래 1차 대전 이후 미 육군 최초의 기병사단으로 출발했다. 2차대전 당시에는 말에서 내려 보병이 되었다가 월남전에서는 헬리콥터로 바꿔 타고 공중강습사단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는 다시 전차로 바꿔 탔다. 이렇게 자주 바뀌었지만 The First Team이라는 부대 별명에 걸맞게 미군이 싸우는 곳이라면 언제나 제일선에서 활약했다.
 

- [전방 우측 진촌마을에 적 기병대가 매복 중이다! 아군 포병의 제압사격이 끝난 다음 곧장 돌격한다. 측면으로 들어오는 아군 BMP-3를 오인사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1중대는 철갑탄, 2중대는 대전차미사일 공격을 준비하라!]
대대장은 마치 전장을 눈금 보듯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승재가 포수에게 지시했다. 이승재의 전차는 2열에서 달리는 2중대 소속이었다.

- "대전차유도탄 일발 장전!"
포수 하원식 병장이 복창하면서 스위치를 조작했다. 자동장전장치가 철커덩 소리를 내며 약실에 있던 철갑탄과 장약을 빼냈다. 그리고 AT-11 리플렉스 대전차미사일과 장약을 장전했다. 리플렉스는레이저로 유도되는 초음속 대전차미사일이다. 4,000미터를 5초 이내에 날아갈 정도로 빠르다. 

 

- 아군 포병이 쏴대는 DPICM탄이었다. 하늘에서 한차례 폭발이 일어나더니 다시 지면에서 작은 폭발이 수도 없이 번쩍였다. 이중목적개량탄으로 불리는 이 포탄은 공중에서 파열하면서 수십 개의 소형 자탄을 살포한다. 각각의 자탄은 80밀리미터 이상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어 거의 대부분의 전차들을 격파할 수 있다. M-1A2 전차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모든 부분이 강한 것은 아니다. 포탑 상면 뒤쪽에 있는 포탄저장고나 차체 후방의 가스터빈 엔진은 다른 부분에 비하면 거의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형 자탄이 한두 발만 떨어져도 전차는 기동불능이 되거나 대부분의 포탄을 상실한다.

- 이승재는 벌컥 화가 났다. 고작 사람이 걷는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이동 중에도 발사가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러시아 무기상들이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느린 속도로라도 전차가 움직이면 이동표적에 대한 명중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래서 한국군은 아예 T-80U 전차를 정지시킨 다음 사격을 했다. 이승재는 할 수만 있다면 러시아 무기상들의 다리를 밧줄로 묶어 서부극에 나오는 장면처럼 전차 뒤에 질질 끌고 다니고 싶었다. 

- 기다란 125밀리 활강포가 불을 뿜자 전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포구를 벗어난 리플렉스 미사일은 비행고도를 약 5미터로 높였다. 지상에 있는 각종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로켓모터에 불이 붙자 리플렉스의 속도는 순식간에 마하 2.5를 돌파했다. 

- 포수와 전차장들은 교육을 받을 때 리플렉스로 M-1A2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측면이나 뒤쪽을 노려야 한다고 배웠다. 교관들은 정면에서 저 70톤짜리 괴물전차를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궤도를 노리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사수들은 애초부터 포탑을 조준하지 않고 궤도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굴곡이 심한 지형이라면 미군 전차들이 차체 하부를 가리고 포탑만 내놓고 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장은 사방이 탁 트인 평지였다. 숨으려 해도 숨을 장소가 없었다.

- BMP-3 중대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재장전을 위해 올려졌던 포신이 다시 수평으로 돌아갔다. 약실에는 700밀리 이상의 관통력을 자랑하는 BM32 열화우라늄 철갑 탄두가 장전되어 있었다. 1,000미터 정도 거리에서는 미제 최신형 포탄과 별 차이가 없다는 강력한 철갑탄이었다.

- 브래들리는 한국군의 K-200 장갑차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를 가졌다. 포탑에 중기관총 대신 25밀리 기관포와 토우 대전차미사일을 탑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관이 비슷한 전차와 달리 브래들리와 K-200은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 곧 라이언의 전차에서도 레이저 경보기가 울렸다. 상대방 전차가 레이저 거리측정기로 이쪽과의 거리를 잰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격 직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아처 리더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사격을 금지한다."
라이언은 먼저 사격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지시했다. 경상북도 경산 북쪽에서 벌어진 미군 전차부대끼리의 전투 이후 상부에서는 전투개시 전에 정확히 피아식별을 할 것을 크게 강조했다. 그래서 라이언은 상부에서 정해준 그 식별 절차를 진행했다. 

- 전차장이 사용하는 CITV보다는 포수용 조준경이 훨씬 배율이 높다. 그래서 훨씬 더정확한 식별이 가능하다. 조준경을 들여다보던 마르티네스가 보고했다. 
"포탑 양쪽에 사각형 모양의 식별 패널이 붙어 있습니다. 일부 차량은 포탑 상부에 피닉스 라이트가 보입니다. CITV도 보입니다. 아군 전차가 맞습니다! M-1A2입니다."

- 피닉스 라이트는 9볼트 전지로 작동되는 피아식별용 조명장치다. 포탑 정면 주포 옆에 붙어 있는데, 적외선 주파수 대역의 빛을 내서 밤에는 맨눈으로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이전에 쓰이던 피아식별 장치와 달리 피닉스 라이트는 발광신호 형태를 사전에 입력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전에 정해진 암호 방식으로 계속 신호를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기갑차량들은 물론 일반 보병, 공중강습부대 등에 널리 쓰였다. 

 

- 원래 전투에 들어가면 해치를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시계가 극도로 좁아진다. 해치를 열고 나온 것은 대공감시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계를 좀 더 넓히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조종수 김원남 상병도 해치를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조종했다. 승무원 세 명중 바깥을 보기 힘든 사람은 포수 하원식뿐이었다. 이승재는 사방을 둘러본 다음 인터컴을 통해 날씨를 설명해 줬다. 
"구름이 낮게 끼었고, 공기는 약간 시원해. 기름 냄새만 빼면 다 좋아. 구름 때문에 시정이 짧아 근접지원기 걱정은 별로 없겠다." 
이승재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봤다. 낮게 드리운 회색 구름 때문에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 위에서는 미군 전투기와 군단 방공포병여단의 미사일, 대공포 부대 간에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 군단이 남하함에 따라 수도권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장거리 방공망은 점차 그 두께가 얇아졌다. 이제는 군단 소속 야전방공포병여단이 미군 전투기들의 파상공격을 막아야 한다. 이승재가 소속된 7군단의 야전방공포병은 크게 네 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단 전체를 둘러싸는 것은 Buk-1M, 사단의 머리 위를 지키는 것은 Tor-M1 대공미사일 시스템이다. 전차부대를 직접 따라가며 공격헬리콥터와 근접지원기로부터 전차를 지켜주는 2S6M 퉁구스카 자주대공 시스템이 있고, 마지막으로 보병전투차에 실린 SA-16 이글라 휴대용 대공미사일이 있었다.
 
- 이승재가 왼손을 들었다.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한 시간 사이에 벌써 네 대가 추락했다. 그가 알기로 F-16은 대당 가격이 3,000만 달러를 넘는다. 한 시간 사이에 1억 2,000만 달러가 날아간 셈이다. 전투기 가격과 하사 1년 연봉을 비교하던 이승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은 미친 짓이란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 "젠장! 또 포도밭이군."
충청남도 천안 북부에서 경기도 평택과 안성 일대에 이르는 평야지역은 포도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을 주변 논밭에는 어김없이 포도밭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군의 전차기동에 적잖은 장애를 주고 있었다. 포도밭에는 지주와 수많은 철사줄이 뒤엉켜있다. 작은 포도밭이라면 단숨에 뚫고 지나가겠지만 폭이 넓은 포도밭은 문제가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궤도에 철사가 엉켜 전차가 기동불능에 빠질 수도 있다.

- 주변지형은 전반적으로 평탄했다. 1~2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가끔 솟아 있는 작은 구릉은 근처에 있는 고층아파트보다 오히려 더 낮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승재는 이곳이 말로만 듣던 중부 독일의 지형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지형은 미군이 가장 선호하는 지형이고 미군 무기가 가장 효과를 발휘하는 지형이다. 미군의 모든 무기체계는 유럽, 그것도 특히 독일지역 평원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개발됐다. 냉전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거대한 기갑전력을 맞서 싸울 주전장이 바로 독일땅이었기 때문이다. 이승재의 사단 주력전차인 T-80U는 그런 나토군을 상대하기 위해 구 소련이 만들어낸 전차다. 이승재는 미군을 상대로 싸우는 소련군의 입장이 된 것이다.

- M-1A2 전차의 방어력에 대해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다. 미군이 방어력과 공격력, 그리고 사격통제장치의 우수성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원거리 전투를 벌인다면 이승재의 부대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 [우릴 조준하고 있습니다! 대전차미사일 유도용 레이저입니다.]
하원식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미군이 사용하는 레이저 유도 대전차미사일은 단 하나, 헬파이어밖에 없다. 헬파이어 미사일은 초음속이다. 1,000미터를 날아가는 데 3초면 충분하다. 주변지형으로 볼 때 미사일이 들이닥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6초 정도였다. 이승재가 재빨리 연막탄 발사 버튼을 차례로 눌러대며 소리 질렀다.  
"좌측 연막 발사! 연막 발사!"
 

- 연막 덕분인지, 레이저 경보장치는 더 이상 신호음을 내지 않았다. 그 대신 레이더 경보장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롱보우 아파치의 레이더에서 나오는 밀리미터파 레이더였다. 이승재의 손이 재빨리 계기판에 붙은 방해 전파 발신기 작동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포탑 뒤쪽 위에 붙은 깡통 모양의 물체에서 강한 전자파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헬파이어 미사일의 탐색장치가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과 유사한 방해신호를 내서 미사일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 전파방해장비의 전자파 출력은 대단히 강하다. 전차병들 사이에서는 이 장비를 오래 켜면 고자가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승재도 일전에 시험 삼아 작동시켰다가 휴대용 라디오를 태워먹은 적이 있었다. 그나마 차내의 전자장비들은 전자파 보호장치가 붙어 있어 피해를 입지 않았다.

- 해치에 반쯤 몸이 낀 채 불타고 있는 조종수를 보자 이승재는 섬뜩함을 느꼈다. 강력한 헬파이어에 맞자 한 대는 포탑이 완전히 깨져버렸고 다른 한 대는 엔진실 전체가 무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궤도도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 있었다. 불타는 강철관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 "날탄 장전!"
[날탄 장전!]
하원식이 복창하면서 자동장전장치를 조작했다.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125밀리 날개안정식 철갑탄이 장전됐다. T-80U에는 자동장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급격한 기동을 하면서도 장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K-1A1 전차 승무원들이 부러워하는 T-80U 만의 장점이었다. 


- K-1A1 전차의 주포는 안정화장치가 붙어있어 큰 움직임이 없지만 달리는 차체는 계속 움직인다. 그런 상황에서 무거운 120밀리 전차포탄을 장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장전하는 데는 약 8초가 걸렸다. 재장전되는 중에 미군 전차 세 대가 갑자기 아파트 건물들 틈새로 불쑥 나타났다. 순간 이승재의 가슴이 철렁했다. 재장전 중에는 포가 앙각 3도 위치로 고정된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재장전 중에는 그냥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포구 방향을 보니 이승재의 전차를 겨눈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로 달려가던 BMP-3 기계화보병중대가 표적이었다. BMP-3들이 미군 전차를 먼저 발견하고 선제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BMP-3의 100 밀리포에 장전된 것은 장갑관통력이 있는 미사일이 아니라 일반용 고폭파편탄이었다. 미군 M-1A2 전차의 주변에서 큰 폭발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그러나 미군 전차들은 움직이지 않고 정확하게 BMP-3들을 조준했다. BMP-3의 전방에서 일제히 연막탄이 터지는 순간 미군 전차의 120밀리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 패트리어트의 최소 사거리는 3킬로미터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가까워 패트리어트가 표적을 제대로 조준할 수가 없다. 심정학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최인석도 그걸 노렸다. 하지만 먼저 한 발을 맞아 기체가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어 당한 것이었다.
속도를 높이자 암람에 한 차례 당한 기체가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분해될 것 같았다. 심정학의 팬텀은 파편이 둥둥 떠있는 대홍저수지를 지나 패트리어트 포대의 레이더가 있는 월봉산으로 돌진했다. 스팅어로 여겨지는 작은 미사일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기체가 두 번 거칠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계기판에서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 "투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암람 두 발이 심정학의 팬텀을 덮쳤다. 그러나 이미 로크아이 클러스터 폭탄 세 발이 분리된 다음이었다. 나머지 세 발은 배선이 손상되어 투하되지 않았다.  
 
- 8월 25일 10 : 15 미국 워싱턴 [한국시간 8월 25일 23:15]
"3군단 전체가 위기에 처했는데, 핵을 사용하는 게 어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요? 전술핵은 그럴 때 쓰라고 갖고 있는 게 아니었소?"
제임스 커티스 대통령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화면 저쪽의 홀더 대장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표정을 읽은 커티스 대통령이 빈정대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한국 대통령한테서 전화가 왔었소. 그래서 내가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도 있다고 그를 위협했소."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 상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미 3군단뿐만 아니라 18군단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자칫하면 한국에 상륙한 수십만 미군이 몰살당하거나 포로가 될 판이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 "그렇소. 아무래도 핵배낭 같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좋소. 하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전술핵을 사용하면, 한국에 있는 미군도 똑같이 당할 거요. 그게 문제요. 그리고 본토가 탄도탄 공격을 받을 수도 있소. 장군은 탄도탄을 요격할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된다고 보시오?" 
[50퍼센트 미만입니다.]
홀더 대장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미국의 탄도탄 요격 능력을 매우 높이 쳐준 셈이었다. 그러나 탄도탄 수십 발에 한국 땅이 초토화되더라도, 미 본토에 핵미사일이 단 한 발이라도 떨어진다면 미국으로서는 밑지는 장사였다. 그것은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여지도 없는 불리한 거래인 셈이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한국에 핵을 사용하면 러시아는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왔소. 아무리 바보 같은 러시아 곰들이라 해도 벌써 눈치챘겠지. 하지만 그런 건 필요 없소. 한국의 동쪽 바다에 총출동한 러시아 극동함대와 폭격기들이 우리 항모전단과 대치하고 있지만, 그것도 신경 쓸 것 없소. 그러나..." 

 

- 전략기획참모부장 박정석 상장이 출입구에 들어섰다. 이종식 차수와 양석민 장관이 박 상장을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를 질책하면 화장실 갔다 와서 시원하다고 변명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박정석은 화장실에서 한바탕 실컷 웃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 "일선 부대에 전투 종식 명령은 제대로 전달됐습니까?”
"우리 군은 이미 10여 분 전에 전진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과 미군 헬리콥터들이 전선을 돌아다니며 전쟁이 자정에 완전히 끝난다는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전선에서의 교전행위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대통령은 똑같은 질문을 10번도 넘게 했다. 작전기획참모부장 한기수 대장이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종식 차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적에 체면을 너무 세워준 거이 아닌지 모르갔습네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미국도 충분한 양보를 했습니다. 섭섭하시겠지만, 미래를 위해 참으십시오. 이제 전쟁을 끝내고 복구를 시작해야지요. 평화가 시작됐습니다!"

- 평화를 말하는 홍지영 대통령의 얼굴에는 그늘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미군은 몰아냈지만 국토는 거의 초토화됐다. 군 전력이 급감하고 산업기반이 붕괴됐지만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대통령 입장에서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은 수많은 국민이 죽거나 다친 전쟁의 참상이었다.

 

- "수많은 전사자들, 부상병들, 유족들..."
대통령은 재산을 잃은 사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을 잃은 시민이나 전사자들의 유족, 또는 부상병들이 재활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돕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다. 전쟁이 끝나자 시급히 닥친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세계은행에서 전후 복구사업을 도와준다고 했습니다만, 어차피 나중에 갚아야 할 재원입니다. 우리 세대는 후손들에게 빚을 떠넘기는 추태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한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정부가 약속한 배상금을 그들이 제안한 것처럼 원조형식을 빌려 들여올 예정입니다. 최대한 많이 말입니다." 

- 장성들의 얼굴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 미국 부통령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한국 대통령에게 큰 액수의 원조를 제안했다. 참모들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미국 부통령은 배상금이 아닌 원조 형식이라고 못 박았다. 참모들 대부분은 그런 돈은 결코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분 나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빚을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홍지영 대통령이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남게 마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굶주림과 실업의 만연, 범죄 등이었다. 전쟁에 참가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 그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결손가정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 문제도 심각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었다. 

- "미국 놈들이 공중에서 여객기를 폭파시키면 어떡합니까?"
"그럼 다 죽는 거지, 뭐."
김주현 중위가 피식 웃었다. 1960년, 중국과 구 소련의 밀월관계가 갑작스럽게 깨졌을 때 소련에서 핵기술을 습득하던 중국 기술자들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절반은 비행기로 중국을 향했는데, 그만 비행기가 추락해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소련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비행기 사고는 확률이 낮아도 가끔씩은 있는 사고였다. 중국 정부는 나머지 절반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했다. 나머지 절반은 안전한 기차로 떠났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경 가까운 마을에서 전원이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식중독 사고도 비행기 사고처럼 가끔 있는 일이었다. 
최훈욱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들은 텍사스부터 캘리포니아까지 미국 본토를 휘저은 한국군 미주원정군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 미국이 이들을 곱게 볼 리가 만무했다. 

 

 



   
 

- 후기 -



진병관



전쟁소설 데프콘 2부에 참여한 이후로 어느새 3년 여가 지났군요. 3부가 완결된 지금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김경진 씨, 신재호 씨, 손중극 씨와 함께 한 공동작업은 저에게도 큰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상전쟁소설 데프콘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군사분야의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과 실제 전쟁과 전투묘사를 개연성 있게 꾸며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른 공저자분들과 수많은 난상토론을 했고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정말 이런 전쟁은 일어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강대국의 힘의 구도 속에서 우리나라는 정말로 힘없는 주변국일 뿐입니다. 어쩌면 전쟁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이 어느 정도 밑바탕에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국가는 소리 없이 종속될 뿐입니다. 

소설 데프콘의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짜고 전투를 묘사하면서 제가 느낀 감정들의 어떤 부분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소설 데프콘과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과연 이렇게 싸울 수 있을까? 저항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항상 부정적인 결론이 나오더군요.

가상전쟁소설 데프콘은 독자 여러분께 또 다른 흥미와 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소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데프콘을 재밌게 읽어주시고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독자 여러분께서도 한 번쯤 생각해 주신다면 그것이 저희들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데프콘의 완성도를 위해 함께 고민해 주셨던 하이텔 군사동 회원분들께도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신재호



데프콘 3부 작업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 나는 20대였다. 작업이 끝난 지금 이제 난 30대다. 취미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일상의 삶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손중극



톰 클랜시의 팬이었던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 중 하나는 왜 미국인들의 이야기만 나오는가라는 것이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치즈 냄새는 늘 불만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전쟁소설이 없는 것이 아쉬웠을 때 나는 컴퓨터 통신이란 것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데프콘을 만났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데프콘을 만난 지도 어언 3년이 흐른 지금, 이제 내가 데프콘을 쓰는 데 참가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다. 
데프콘 3부를 쓰면서 얻은 것 세 가지가 있다. 야행성 체질, 뱃살, 새치다. 이제 정상인이 되기 위한 힘든 과정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전쟁이란 것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쟁을 애써 무시하고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군인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무리 일반인이라 해도 왜 싸우게 되었는가, 그리고 싸움은 어떤 방법으로 결말이 지어졌는가 정도는 충분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방이 군사대국으로 둘러싸인, 휴전선을 중심으로 160만 대군이 대치해 지구상의 마지막 화약고라 불리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우리가 전쟁에 대해 배운 것은 무엇인가? 전쟁의 공포밖에 더 있던가? 전쟁의 결과가 가져오는 참혹성에 대해서만 가르치지 정작 어떻게 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어떻게 해서 전쟁이 끝났다는 중간 과정은 모두 생략된다. 민족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작 국사 교과서를 보면 전쟁에 대한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 자에게 보다 나은 미래는 없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김경진



드디어 끝났습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데프콘이 드디어 끝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소설을 쓰면 쓸수록 역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전쟁은 현실보다는 소설이나 영화로 편안히 보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한미전쟁을 쓰면서 왜 하필 우방인 미국을 상대로 삼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데프콘에서 미국은 단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데프콘은 소설일 뿐입니다. 

데프콘 3부를 쓰는 동안 우여곡절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최초로 PC통신상에 연재를 시작한 지 만 5년이 넘었습니다. 데프콘 1부를 아시아2000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95년 5월인데, 벌써 2000년이 됐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드디어 데프콘 시리즈를 3부까지 모두 마치게 되어 무척 다행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 도와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원고를 마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진병관 님, 손중극 님, 윤민혁 님이 앞으로도 계속 전쟁소설을 쓰실 겁니다. 저는 데프콘 3부를 마지막으로 현대 전면전을 다룬 전쟁소설은 당분간 쓰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세 분을 계속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나서서 근미래 전쟁소설 장르가 계속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당분간 장르와 시간대를 오가며 범 전쟁장르를 쓸 계획입니다. 아마도 무늬만 역사소설, 장르만 SF소설인 전쟁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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