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일루젼 2024. 3. 20.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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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스카 와일드 / 박명숙

원제 : De Profundis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5.05.02


   

   

불현듯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걸 느낄 때, 그리고 사실은 소유하고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감사함과 함께 부끄러움을 감각한다. 

 

욕망은 너무나도 손쉽게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것'만 가지면 모든 게 좋아질 것만 같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해낸 적 없던 일들을 척척 해낼 수 있을 것만 같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 문제들도 모두 매끄럽게 풀려나갈 것만 같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저것'을 얻지 못하면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거나 뒤쳐지게 될 것만 같다. 욕망은 불안과 함께 다닌다. 

 

진정한 다채로움은 극단의 폭에서 나온다. 고저와 진폭이 존재하지 않는 단조로움과 끝을 가늠키 어려운 극한의 추락 -혹은 비상- 은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결코 같지도 않다. 

 

오스카 와일드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해보자. 가장 빛나는 순간을 위해 가장 어두운 순간 또한 필요하다면, 단 한순간이라도 그 찬란함을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몸을 던질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고통은 빛나는 영광을 담보하지 않지만, 영광의 월계관 아래에는 언제나 짙은 어둠이 따라온다. 그를 너무나도 극적으로 -자신의 삶 자체로- 증명한 이가 바로 오스카 와일드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보아야 하는가'는 낯설지 않은 논쟁거리지만, 앙드레 지드는 이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설령 플로베르가 죄를 지었다 해도', <살람보>는 여전히 흥미로운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보다는 '만약 플로베르가 죄를 지었다면', 그는 <살람보>가 아닌 다른 것을 썼거나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발자크가 자신의 인간극을 직접 살아내고자 했다면 그는 아마 그것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훨씬 더 흥미롭고 더욱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예술가와 그의 작품의 관계를 그의 표현 이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심연으로부터>는 철저하게 오스카 와일드의 시선에서 쓰여진 편지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와 삶,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 예술에 대한 그의 깊은 고찰과 날카로운 비유가 인상적이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언제나 겸손과 연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오스카의 담담한 절규는 이전까지의 그의 삶과 작품을 아는 이들에게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모든 것들 또한 그의 삶의 한 단면임을, <옥중기>에서는 채 느끼지 못했던 경이로움과 씁쓸함으로 읽었다. 

이러한 존재가 있었음에 감사하며.

 


    

 

 

 

- 오스카 와일드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알자스 호텔 전경. 그 후 5성급 호텔로 변모하면서 '호텔(LHôtel)'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 호텔의 단골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거의 언제나 옳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아홉 살 때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그후 평생 동안 와일드의 열렬한 팬이었던 보르헤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흠모하던 작가가 세상을 떠난 곳에서 죽고 싶어 했다고 한다.

 

- 1.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는 Oscar Wilde, De Profundis and Other Prison Writings, Penguin Classics, Revised edition, 2013, 앙드레 지드의 <오스카 와일드>는 André Gide, Oscar Wilde, Mercure de France, 1910(1989)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2. <심연으로부터>는 옮긴이가 임의로 장을 나누었다.
3. <심연으로부터>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 주이며 미주로 처리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주는 각주로 표시했다.
4. 본문 중 고딕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와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의 전환점은, 
아버지가 나를 옥스퍼드에 보냈을 때. 
그리고 사회가 나를 감옥에 보냈을 때였다.

-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에서

 

한 번의 키스는 한 인간의 삶을 망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 오스카 와일드, <보잘것없는 여인>에서

 

 

 

-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저명한 외과의사 윌리엄 와일드와 민족주의 시인이자 번역가인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의 세례명은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였다. 평범하지 않은 부모의 비범한 아들 오스카 와일드는 훗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이름을 그에 걸맞게 수정한다.  
"내 이름에는 두 개의 O, 두 개의 F, 두 개의 W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이름은 너무 길어선 안 된다. 광고할 때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세례명이 유용하거나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처럼 유명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이름에서 몇 개를 버려야만 한다. 열기구를 타는 사람이 높이 올라가기 위해 불필요한 바닥짐을 버리듯이... 그래서 난 내 이름 다섯 개 중에서 두 개(오스카 와일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기구 밖으로 던져버렸다. 난 머지않아 나머지 하나도 마저 버리고 '더 와일드'나 '더 오스카'로만 불리게 될 것이다."

 

- 트리니티 칼리지 재학 시절부터 돋보이는 차림새, 빛나는 지성과 현란한 말솜씨, 뛰어난 유머감각, 선함과 관대함을 모두 갖춘 성품으로 특별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청년 와일드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에 진학한 후에도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 나날이 인기가 높아졌다. 어느 날,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 친구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절대 옥스퍼드의 따분한 교수가 되진 않을 거야. 나는 시인, 작가, 극작가가 될 거야. 어떤 식으로건 유명해질 거라고. 만약 유명해질 수 없다면 악명이라도 떨치고 말 거야." (그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이다. 어떤 식으로건 유명해진 것은 분명하니까.)

 

- 이 이야기는 당시 와일드가 라파엘 전파와 유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백합을 잔뜩 꽂은 블루 차이나(청자기)로 자신의 기숙사 방을 장식하고는 "블루 차이나의 수준에 맞춰 사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라고 말해 재학생들 사이에 경탄을 자아냈던 유명한 일화와 함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훗날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된 웨일스 공이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했던 말은 당시 그의 사회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나는 아직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지 못했다. 그와 친분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알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 1882년에 그는 불과 28세의 나이로 미국 전역과 캐나다로 1년간 순회강연을 떠남으로써 일약 두 대륙 간의 유명 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때 미국 세관에서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고 한 그의 말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1891년에는 그의 대표작이 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문학·예술 평론집 <의도들>, 단편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동화집 <석류나무 집>을 연이어 출간하고 12월에는 파리에서 <살로메>의 집필을 끝내면서 말 그대로 '경이로운해 annus mirabilis'를 맞이한다. 가히 오스카 와일드의 해였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가 훗날 연인이 된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으로 만난 것도 그해 여름이었다. 그로 인해 채 4년도 지나지 않아 와일드가 끝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그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생애 최고의 정점에서 추락의 싹이 움트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삶의 아이러니와 반전이 또 있을까.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처럼 화려한 명성의 극을 달리다가 한순간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작가나 예술가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 와일드는 그의 유미주의 미학을 설파한 거짓의 쇠락에서 문학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문학을 모방하고 재현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오스카 와일드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만남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묘사된 화가 바질 홀워드와 도리언 그레이의 첫 만남과 몹시도 흡사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와일드의 주장대로, 마치 삶이 문학을 모방하고 재현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나는 내 삶이 그 어떤 외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내 천성이 독립적이라는 건, 해리 자네도 잘 알 거야.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주인이었고, 적어도 언제나 그래왔어.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대체 이걸 자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무언가가 내게, 내가 삶에서 어떤 끔찍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운명이 나를 위해 강렬한 기쁨과 강렬한 슬픔, 그 모두를 마련해두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지.]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 1891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아홉 번이나 읽고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온 더글러스는 시인 라이어널 존슨의 소개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난다는 생각에 한껏 격앙된다. 오래전에 와일드가 다녔던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 재학중인, 그리스 조각상을 닮은 스물한 살의 미청년과 영국 사회의 유명 인사이자 위험하다는 평판을 얻은 서른일곱 살 와일드의 만남은 오래지 않아 치명적인 열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해 5월, 와일드는 '무분별한' 편지(필시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 한 통으로 인해 공갈범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던 더글러스를 곤경에서 구해주었고,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3년간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창작을 해야만 했던 와일드에게 예술적, 재정적,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와일드는 과격하고 충동적이며 낭비벽이 심하고 끊임없이 관심과 돈을 요구하는 더글러스에게서 벗어나고자 그의 어머니를 설득해 더글러스를 몇 달간 이집트로 보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심연으로부터>에서 세세하게 묘사되듯이, 와일드가 그를 떨쳐내려 할 때마다 더글러스는 수없이 전보를 보내며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다.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치명적인 매력과 집요함에 번번이 굴복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하던 1894년 10월, 더글러스의 큰형인 드럼랜리그 자작이 사냥 중에 총기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사고사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그는 당시 외무장관이던 로즈버리 경과의 동성애 의혹을 받고 있던 차에 스캔들이 두려워(혹은 총리가 된 자신의 연인과 결별한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일드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더글러스의 형의 죽음은 와일드가 감옥에 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와일드는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더글러스에 대한 연민으로 또다시 그를 받아들인다. 더글러스와의 공공연한 관계로 인해 법정에 서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기까지 와일드는 그와의 반복된 다툼과 화해, 수차례의 결별과 재회로 이어지는 연인들의 사랑의 과정을 모두 겪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을 연상시키는 진정한 고행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진 앨프리드 더글러스는 누구인가. 그는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귀족 가문의 후손인 아홉번째 퀸스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와일드의 명성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도 시인이자 작가이며 번역가였다. 와일드를 만나기 전부터 동성애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초기에는 주로 동성애를 주제로 하는 시를 썼고, 옥스퍼드 재학시절에 그가 편집장을 지냈던 잡지 <스피릿 램프 The Spirit Lamp>는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은밀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과 끊임없이 대립했고, 부자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격렬하고 과격한 방식과 언사로 표출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던 와일드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도록 적극 부추긴 것도 앨프리드 더글러스였다. 퀸스베리 후작은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영국 권투의 현대적 규칙을 만든 인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공공연하게 정부들을 만나며, 화가 나면 사람들에게 말채찍을 마구 내리치는 난폭하고 과격한 성향의 소유자였다. 이는 와일드의 언급대로 퀸스베리 후작과 더글러스의 피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가문의 유전적인 기질이었다. "당신은 예전에도 종종얼마나 많은 당신 가문 사람들이 자신의 피로 손을 더럽혔는지 이야기하곤 했지. 당신 삼촌이 그랬고, 당신 할아버지도 아마 그랬을 것이며, 당신이 혈통을 이어받은 광기와 사악함으로 얼룩진 계보의 또 다른 이들도 그랬다고 말이지." 
  

- "너무나도 비열한 그의 공격에 반격을 했더라면 나는 파멸하고 말았을 거야. 그리고 반격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로 파멸했을 거고." 와일드는 자신이 그들 부자간의 갈등의 희생양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아니면, 당신 아버지와의 증오 싸움에서 내가 당신들 각자에게 방패이자 무기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한술 더 떠서 그 전쟁이 끝난 다음에 벌어진 내 인생을 건 그 끔찍한 사냥에서 당신이 친 그물에 먼저 걸려들지 않았더라면 당신 아버지가 결코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던 건가?"

 

- 1895년은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이자 평론가로서 영광의 정점에다다른 오스카 와일드가 한순간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최악의 해 annus horribilis'로 기록되고 있다. 그해 1월 3일,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는 와일드의 <이상적인 남편>이 초연되었고, 2월 14일 런던의 세인트제임스 극장에서는 와일드 최고의 극작품으로 꼽히는 <진지함의 중요성>이 초연될 예정이었다. 퀸스베리 후작은 극이 끝나고 와일드가 무대 인사를 할 때 그에게 썩은 야채 다발을 던질 궁리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리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와일드는 경찰을 동원해 그를 저지하여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자 퀸스베리 후작은 2월 18일에 와일드의 단골 클럽인 앨버말 클럽에 자신의 명함을 남겨놓았는데(와일드는 열흘 후에야 그 명함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남색자를 자처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To Oscar Wilde posing Somdomite'라고 씌어 있었다('Somdomite'는 'Sodomite'를 잘못 쓴 것이다. 퀸스베리의 필체가 불분명한 탓에 '남색자를 자처하는'인지 '남색자인 척하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 "당신은 그 말을 매일같이 지겹도록 반복했지.난 식사할 때마다 그 말을 어김없이 들어야 했어. 어쨌거나 당신은 소원을 이룬 셈이지. (...) 당신들은 역겹기 짝이 없는 '누가 더 미워하나' 게임에서 내 영혼을 걸고 주사위를 던졌고, 그 결과 당신이 지고 말았지." 

 

- "더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제 무언가가 일어날 차례입니다." 그는 불과 두어 달 전 알제에서 앙드레 지드를 만났을 때 이렇게 예고한 바 있다. 그는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고, 이제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야 할 터였다. 와일드는 그의 죽음의 천사가 된 연인의 손에 이끌려 마치 최면에 걸린 제물처럼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들 사이에서 난 이성을 잃고 만 거야. 나의 판단력은 나를 저버렸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지.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당신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았어. 난 눈이 가려진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비틀거렸지. 나는 엄청난 정신적 과오를 범한 거야."  
 

- 4월 26일에 열린 재판에서는 <카멜레온>에 발표한 더글러스의 시 <두 개의 사랑>이 와일드에게 불리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나는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니"라고 한 시의 마지막 구절은 금지된 사랑,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상대는 와일드라는 암시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5월 1일, 배심원들은 불일치 판결을 내렸고, 어렵게 보석으로 풀려난 와일드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거리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쫓기기도 했으며, 호텔과 레스토랑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5월 20일에 다시 열려 엿새 동안 이어진 두 번째 재판에서 와일드는 태도와 어조를 완전히 바꿔 겸손하고 법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예전 재판들에서와 똑같은 신문, 반대신문, 증언 그리고 논고가 끝없이 이어진 끝에 와일드는 테일러와 함께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1885년에 발효된 형사법 개정안 11조에 근거하여) 법적 최고형인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일찌감치 예상되었던 판결이었다. 재판장이었던 윌리스는 판결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토록 가증스러운 사건은 다뤄본 적이 없으며, 저질러진 범죄에 비하면 법적인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가차 없는 논평을 덧붙였다. 와일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발언조차 저지당한 채 퇴장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빛나는 재담으로 좌중을 매료하던 예전의 오스카 와일드가 아니었다. 박탈당한 영예로운 이름 대신 수인번호 C.3.3.으로 납덩어리보다 무거운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한낱 흉악범일 뿐이었다.  

  

-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와일드의 동성애에 대한 단죄는 단지 한 개인을 풍속사범으로 감옥에 보낸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일드의 두번째 재판에서 배심원 대표는 판사에게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과 오스카 와일드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더글러스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지 물었다. 이에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그는 이번에는 그러한 조치를 고려하고 있는지 물었다. 판사는 또다시 부정적인 답변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의 증언을 가로막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배심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실에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배심원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더글러스에게는 어떤 법적인 조치나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으며, 그는 와일드의 재판이 시작되자 그다음 날 유럽으로 떠나 3년간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가장 '핫한' 유명 인사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이제 몇몇 충실한 친구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버림받은 무명의 죄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 콘스턴스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떠났고,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두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후손은 끝내 와일드라는 성을 되찾지 않았다. 

 

- 그러나 이 모든 일상적인 고통 가운데서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하는 지적인 굶주림이었다. 누구보다 책과 대화를 사랑했던 와일드는 새로운 교도소장이 부임할 때까지 모든 문화적인 것과 단절된 채 더욱더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견뎌야 했다. 

 

- 언젠가 넬슨 소장은 와일드를 면회했던 로스에게 와일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괜찮은 듯 보이지만, 와일드 씨처럼 이런 중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아마 앞으로 2년 내에 죽게 될 겁니다." 와일드는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 같은 해, 로스도 런던의 메수엔 출판사에서 편지의 삭제판을 펴냈다. 당시 로스는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더글러스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구절(전체 분량의 3분의 2에 해당)을 삭제하여 이 편지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1949년에 와일드의 아들 비비언 홀랜드가 여전히 불완전한 편지의 새 버전을 펴내고, 1962년 비로소 완전한 와일드의 편지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될 때까지 사람들은 심연으로부터 오스카 와일드의 단순한 '참회록'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국내에도 그의 작품들이 수백 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심연으로부터>에 대한 제대로 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잘못된 정보를 이제는 바로잡을 때인 것이다. 

(리뷰자 주 : 범우출판사의 <옥중기> 또한 그러하다.)

 

- 본래 와일드가 자신의 편지에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 Epistola: In Carcere et Vinculis'(호라티우스에게서 빌려온 표현)였다. ‘심연으로부터'는 로스가 1905년에 삭제판을 펴내면서 구약의 시편 130편의 첫 문장에서 빌려와 붙인 제목이다. 그는 편지를 좀 더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09년, 향후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영국박물관에 원본을 맡겼다. 편지의 수신인이 앨프리드 더글러스라는 사실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12년이었다.  

 

- 예전에는 명료하고 우아했던 와일드의 필체가 읽기 어렵게 변하여 때때로 내용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긴 오류, 로스가 불러주는 편지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타이피스트의 실수로 인한 오류, 로스 자신이 문법과 구문에 관한 수정을 하고, 문장과 때로는 단락 전체의 위치를 바꿔서 생긴 오류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로스는 더글러스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와일드의 신랄하고 비판적인 말들을 100여 군데나 삭제했다. 그 후 와일드의 편지는 무려 65년을 기다린 끝에 1962년에야 비로소 어떠한 수정이나 가감 없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  오스카 와일드는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단점과 잘못을 들추어내면서 모든 비극을 그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이 글을 썼던 것일까? 앙드레 지드에게 '예술에는 1인칭이 없다'고 단언했던 와일드가 유일하게 자신의 맨얼굴과 치부를 드러내며 써 내려간 이 글을 하나의 단면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일 터이다. <심연으로부터>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운 면모와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다. 와일드로 하여금 이토록 기나긴 편지를 쓰게 했던 중요한 한 가지 동기는 글을 다 쓴 직후 로스에게 보낸 1897년 4월 1일 자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 "단지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감옥에서의 나의 정신적 성장과, 지난 삶에 대한 지적 태도와 나의 기질의 필연적인 변화를 다루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변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내 편에서 있는 이들이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기를 바라." 

 

- 오로지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온 와일드는 자신의 삶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슬픔과 고통과 씁쓸함과 치욕으로 가득한 낯선 세계에 내던져졌다. 그곳에서 그는 "단지 기다란 복도에 있는 한 조그만 감방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에 불과했고, "생명 없는 천 개의 삶 중 하나, 생명 없는 천 개의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통과 치욕이 일상이된 세상에서 와일드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예술적 삶의 완성과 궁극적인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강렬하고 놀라운 실재'이자 '삶의 비밀'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심연으로부터>가 포함한 특별함 중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와일드의 참신하고 새로운 해석이다. 와일드의 종교적 열망은 언제나 그의 유미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미학적이고 낭만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전향을 거부해온 그는 예술가처럼 그 본질에 '강렬하고 불꽃같은 상상력'을 포함한 그리스도에게서 '지고한 개인주의자'의 전형을 본다. 스스로를 "타고난 도덕률 폐기론자이며, 법이 아닌 예외를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규정한 와일드는 그리스도를 두고 "그에게는 법칙이란 것은 없었어. 오직 예외만이 있을 뿐이었지"라고 이야기한다.  
 

- 그는 대부분 혼자였고, 세상 사람들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적대감과 끊임없는 치욕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로비에게 보낸 편지 (1897년 4월 1일 자)에서 예고한 대로, 자유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또 다른 감옥'으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는, 감옥에서 나가는 날, 나는 단지 하나의 감옥에서 또다른 감옥으로 옮겨갈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네. 내게는 온 세상이 내 감방만큼 조그맣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 같을 때가 있고 말이지." 어디를 가든지, 그가 마주칠 예전 친구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올지 그를 철저하게 외면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지드의 회상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와일드와 친분이 각별했던 지드조차 그와 함께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꺼려했다.

 

- 어느 날, 와일드의 어머니의 친구였던 애나 드 브레몽 백작 부인이 그에게 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지 묻자(그녀는 전날 그를 모른 체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글로 쓸 수 있는것을 다 썼습니다.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지요. 이젠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 1912년에는 와일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헬렌 커루의 후원으로, 미국 출신 조각가 제이컵 엡스타인이 제작한 기념비적인 조각상, '날아가는 수호천사 Flying Demon Angel'(와일드의 장시 <스핑크스>에서 빌려온 스핑크스의 신비스러운 이미지와 그의 얼굴 모습이 결합된)가 와일드의 무덤에 세워졌다. 하지만 조각상의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었다는 이유로 1914년 8월까지 보호덮개로 씌워진 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 후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아오던 조각상은 1961년 반달리즘에 의해 성기가 잘려나갔고, 이후 그 부분은 은으로 된 보철로 대체되었다. 

 

- 심각하게 훼손되자, 아일랜드 정부와 프랑스 관계 당국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쳐 2미터 높이의 투명 플라스틱 보호막이 설치되었다.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와일드의 팬들에게 "붉은색 키스 대신 꽃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해줄 것"을 부탁했으며, 그의 극들을 수차례 공연한 적이 있는 영국 배우 루퍼트 에버렛은 오스카 와일드가 금지된 키스로 인해 강제 노역형에 처해져 죽음에 이르렀음을 상기시키면서 "오스카 와일드에게 키스는 단순한 사랑의 징표가 아니다. 그에게 키스는 위험과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 엄청난 반전이 있는 한 편의 기막힌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와일드의 생애에서 그와 가장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그의 공식적인 연인 앨프리드 더글러스도 아니었다. 와일드의 첫 동성애 상대로 알려진 로버트 로스(그는 캐나다 초대 총리의 손자였다)는 일찌감치 애정 관계를 넘어선 그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그와 평생을 함께했다. 그는 와일드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도왔고 변함없이 그를 존중했으며,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만사를 제쳐놓고 그의 곁을 지켰다. 와일드의 사후에는 그의 문학과 관련한 유언집행자로서 그의 작품들을 펴내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관리해 그가 생전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바람대로 죽어서도 와일드와 함께 묻혔다. 오스카 와일드도 누구보다 그를 사랑한 로비와 함께 잠든 것에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 그는 와일드의 죽음 이후 한동안 그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부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1902년에는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얻었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1911년에는 그도 와일드처럼 로마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는 와일드 사후에 다양한 송사에 휘말렸고, 특히 1923년에는 당시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을 비방한 죄목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와일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더글러스는 훗날 수감생활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져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했다. 또한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에 화답하듯 '높은 곳에서 In Excelsis'라고 제목을 붙인 장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 하지만 그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그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지드 또한 "이제 그를 향한 경멸과 오만한 관대함, 그리고 경멸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연민만을 느끼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인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 와일드는 지드에게 "내 삶은 한 편의 예술작품과도 같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내 삶에 내 모든 천재성을 쏟아부었다. 내 작품들에는 내 재능만을 투영했을 뿐이다"라고 한 자신의 말대로 삶도 사랑도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살아냈다. 비록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극한의 고통을 포함한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는 동안 단 한순간도 자신이 뼛속까지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다. <심연으로부터>는 차디찬 감옥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도 자신이 천생 예술가임을 말하고 입증하고자 했던 이의 절절한 기록이며 뜨거운 삶의 고백록이다. 언젠가 그가 잠들어 있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묘지에 가게 된다면 이 책을 오스카 와일드의 영전에 바치며 그와 로비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싶다. 이처럼 귀중한 책이 내 손을 거쳐 우리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도록 애써주신 문학동네 편집부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 박명숙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에게

1897년 1~3월, 레딩 감옥에서

- 보시 Bosie에게.

오랫동안 헛된 기다림을 이어온 끝에 나는 당신과 나 모두를 위해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당신이 내게 안겨준 고통 말고는 당신에게서 단 한 줄의 편지도, 아니 어떤 소식이나 메시지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 참으로 한탄스럽고 불운했던 우리의 우정은 내게 공적인 불명예를 안겨주면서 파멸로 끝나고 말았지. 하지만 아직 서로의 애정에 대한 기억이 종종 떠오르는데, 한때 사랑이 차지했던 내 마음속에 증오와 씁쓸함과 경멸이 영원히 자리할 거라는 생각이 나를 무척 슬프게 해. 어쩌면 당신도 마음속으로는, 외로운 옥살이를 하고 있는 내게 편지를 쓰는 게 내 허락도 없이 내 편지를 출간하거나 내게 시를 헌정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물론 당신이 어떤 슬픔이나 열정, 또는 회한이나 무관심의 말들로써 내게 답장을 하거나 호소를 할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의 삶과 나의 삶, 과거와 미래, 씁쓸함으로 바뀐 달콤한 것들, 그리고 기쁨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씁쓸한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 편지 속에는 당신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 거야.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오만함을 완전히 죽여버릴 때까지 편지를 읽고 또 읽기를. 만약 편지 속에서 당신이 부당하게 비난받는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부당하게 비난받는 어떤 과오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만약 편지 속에 당신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밤과 더불어 낮마저도 눈물을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감옥에서 우리가 우는 것처럼 울기를 바라. 그러는 것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로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경멸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처럼 또다시 당신 어머니에게 하소연함으로써 그녀가 당신을 자아도취와 자만심에 빠지도록 어르고 달래게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거야. 만약 당신 자신을 위해 그릇된 변명 하나를 생각해 낸다면, 당신은 머지않아 100가지의 변명을 찾아낼 것이고, 그럼 다시 과거의 당신으로 돌아가고 말 거라고. 

 

-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동기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어. 기껏해야 어떤 것에 대한 욕구를 느꼈을 뿐이지. 동기는 지적인 목표를 말해. 아니면, 우리의 우정이 시작되었을 때 당신은 '너무 어렸다'고 변명하고 싶은 건가? 당신의 진정한 문제점은, 당신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당신은 삶의 새벽과도 같은 어린 시절, 그 연약한 꽃봉오리, 그 투명하고 깨끗한 빛, 그 순수성과 기대가 주는 기쁨을 저만치 뒤로한 채 앞질러 나갔지. 빠르고 날렵한 걸음으로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버린 거야. 그리고 당신은 시궁창과 그 속에서 사는 것들에 매혹되기 시작했어. 그러다 곤란한 일이 생겨 내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볼 때 매우 어리석게도 동정과 친절을 베푼답시고 당신을 도왔지. 당신은 이 편지를 끝까지 다 읽어야만 할 거야. 편지 속의 한마디 한마디가 생살을 태우는 뜨거운 불이나 피를 흘리게 하는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느껴질지라도. 

 

- 당신은 신들의 눈에 비친 바보와 인간의 눈에 비친 바보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예술 양식이나 진보하는 사상의 양상, 라틴어 시구의 장엄함이나 그리스어 모음의 한층 풍부한 음악성, 토스카나의 조각이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감미로운 지혜를 지닐 수 있어. 신들이 조롱하거나 가혹하게 다루는 진정한 바보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내가 바로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지. 당신도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고.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말도록 해.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어.

 

-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야.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고, 당신이 내 편지를 읽으면서 느끼는 괴로움보다 그것을 써 내려가면서 느끼는 내 고통이 훨씬 더 크다는 것도 알아야 할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이 당신한테는 몹시 관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크리스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듯 당신에게 삶의 기이하고 비극적인 형태들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한 걸 보면, 당신은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머리도 거울을 통해서만 보도록 허락받았고 말이지. 당신은 꽃들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색채와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빼앗겨버렸어. 

 

- 당신은 모름지기 예술가는 그리고 특별히 나처럼 개성의 강화에 작품의 질이 좌우되는 예술가는 더더욱 자신의 예술을 꽃피우기 위해 아이디어의 교류와 차분함과 평온함 그리고 고독이 동반된 지적인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 당신은 완성된 내 작품을 보고 감탄했지. 내 연극이 초연되던 날에는 그 놀라운 성공과 그에 뒤이은 멋진 연회를 즐겼고. 당신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토록 유명한 예술가의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지. 하지만 당신은 예술 작품의 창조에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지금 수사학적 과장법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사실에 근거한 절대적인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가 함께 지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내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것을 떠올려보길 바라. 토키, 고령, 런던, 피렌체 또는 그 어디에서든 당신이 내 곁에 있던 동안 내 삶은 철저히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었지. 그리고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당신은 거의 공백 없이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 
 

- 이 모두가 나 같은 본성과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나 기막힌 비극적인 상황이었지.
당신도 이젠 분명히 알 수 있겠지? 절대 혼자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성격, 지적이고 일관된 집중력의 부족, 불행한 사고(그건 단지 사고일 뿐이라고 믿고 싶거든)로 인해 지적인 문제에서 '옥스퍼드적인 기질'을 갖추지 못하게 된 사실(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과격하게 표현할 줄만 알았지 생각을 우아하게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어). 당신의 욕망과 관심은 예술이 아닌 삶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합쳐진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의 문화적 발전이나 나의 예술가적 작업에 얼마나 파괴적으로 작용했는지를 확실히 깨달았으리라 믿어. 나는 당신과 나의 우정을 당신보다 젊은 존 그레이나 피에르 루이스 같은 사람들의 우정과 비교해 볼 때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어. 나의 진정한 삶, 나의 고귀한 삶은 그런 사람들 곁에서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만 가능한 거야.  

- 나는 지금은 당신과의 우정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해. 단지 그 우정이 지속되는 동안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만 생각하고 있어. 그건 내게 지적인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었지, 당신은 기본적으로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는 예술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어. 난 당신을 너무 늦게 혹은 너무 일찍 만났던 거야. 어느 쪽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내게서 멀리 있을 때 난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앞서 언급한 그해 12월 초, 당신 어머니를 설득해 당신을 영국 밖으로 보내도록 했을 때, 난 망가지고 복잡하게 엉켜버린 내 상상력의 실타래를 다시 풀어서 감고, 다시 스스로 내 삶을 통제하고, <이상적인 남편>의 나머지 3 막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완전히 다른 유형의 극인 피렌체의 비극과 신성한 유녀를 거의 완성했어. 그런데 갑자기 예상 밖으로 달갑지 않게, 내 행복에 치명적인 상황 속에서 당신이 돌아온 거야. 결국 두 작품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두게 되었고, 난 그것들을 끝낼 수 없었어. 처음 그 작품들을 쓸 때의 기분으로 되돌아가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지. 당신도 이젠 시집을 출간한 사람으로서 지금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 당신이 그 사실을 깨닫건 그러지 못하건 그것은 우리 우정의 가장 깊은 곳에 추한 진실로 남아 있게 될 거야.

 

-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당신은 내 예술에 절대적인 재앙으로 작용했지. 그리고 난 당신한테 예술과 나 자신 사이에 끈질기게 자리하도록 허용한 것을 더없이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끝없이 나를 자책하고 있어. 당신은 알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평가할 줄도 몰랐지. 나한테는 당신에게서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기대할 권리가 없었던 거야. 당신은 오직 근사한 식사와 당신 기분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당신은 그저 즐기는 것과, 평범하거나 그보다 저급한 쾌락만을 원했어. 그 당시 당신은 기질적으로 그런 것들을 필요로 했거나,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지. 당신을 내 집이나 아파트에 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어. 특별히 당신을 초대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나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고 또 탓했어. 그건 단지 나약함일 뿐이었던 거야. 당신과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예술과 30분을 같이 보내는 게 내게는 언제나 더 유익했어. 내 삶의 그 어떤 시기에도 예술과 비교해 볼 때 조금이라도 더 중요했던 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어. 예술가에게 나약함은 곧 죄악이야. 그 나약함이 상상력을 마비시킨다면.  

 

- 나는 젊은이에게 자만심은 가슴에 꽂고 다니는 우아한 꽃과 같다고 생각했어.  

 

- 결국 나는 당연히 체포되었고, 당신 아버지는 당대의 영웅이 되었지. 사실 당대의 영웅 그 이상이라고 볼 수 있지. 참으로 희한하게도 당신 가족은 이제 불멸의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거야. 역사에서 고딕풍의 요소를 떠올리게 하며, 클레이오를 가장 하찮은 뮤즈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기괴함과 함께 당신 아버지는 교리문답서에 등장할 법한 순수한 마음의 부모들 가운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당신은 어린 사무엘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겠지. 그리고 나는 말레볼제의 가장 끔찍한 진창 속에서 질 드 레와 마르키 드 사드 사이에 앉아 있게 될 거고. 

 

- 물론 나는 당신을 진작 떼어냈어야 했어. 옷에 붙어서 몸을 찌르는 벌레를 떼어내듯 당신을 내 삶에서 몰아냈어야 했던 거야. 아이스킬로스가 쓴 가장 훌륭한 극작품에 자기 집에 새끼 사자를 데리고 온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지. 그는 그 새끼 사자를 무척 아꼈어. 그가 부르면 사자는 언제라도 눈빛을 반짝이며 달려왔고, 먹을 것을 달라고 재롱을 부리곤 했지. 그런데 그 새끼 사자가 성장하더니 사자의 타고난 본성을 드러내면서 자기 주인과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 거야. 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 하지만 내 잘못은 당신과 헤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과 너무 자주 헤어졌다는 거야. 내 기억으로는, 난 석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당신과의 관계를 끝냈어. 그럴 때마다 당신은 애원과 전보, 편지, 당신 친구들의 중재, 내 친구들의 중재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도록 나를 설득했지. 1893년 3월 말, 당신이 토키에 있는 내 집을 떠났을 때 나는 당신하고 다시는 말하지 않기로, 다시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당신이 떠나기 전날 보여준 과격한 행동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당신은 브리스톨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고 전보를 쳐서는 당신을 용서하고 다시 만나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했지. 당신이 떠난 후 내 집에 계속 남아 있었던 당신 가정교사가 내게 그러더군. 당신은 때로 당신이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해 아주 무책임하다고. 그리고 모두는 아니지만 모들린의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이지.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기로 했고, 물론 당신을 용서했지. 함께 런던으로 가는 동안 당신은 내게 사보이 호텔에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지. 그건 정말 나한테는 치명적인 방문이었어.  

 

- 나는 그때의 광경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우린 잔디가 잘 다듬어진 크로케 구장 위에 서 있었고, 난 당신한테 알아듣게 얘기했지. 우린 서로의 삶을 망치고 있고, 당신은 내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으며, 난 당신을 전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으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결별만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현명한 결정이라고 말이지. 그러자 당신은 점심을 먹은 후 뚱한 얼굴로 떠나면서 내게 전해달라며 집사에게 몹시 불쾌한 편지 한 장을 남겼지. 그리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 당신은 런던에서 내게 용서를 빌며 다시 돌아가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는 전보를 보낸 거야. 난 당신을 기쁘게 해 주려고 그 집을 빌렸어. 당신의 요구대로 당신 하인들도 고용했지. 난 당신이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 나는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고 당신을 용서했지.  

 

- 그리고 석 달이 지난 9월, 또다시 한바탕 난리가 났지. 당신이 <살로메>를 번역하면서 저지른 기본적인 잘못들을 내가 지적했기 때문이었지. 당신도 지금쯤은 프랑스어 실력이 꽤 늘었을 테니까, 그때 당신이 했던 번역이 보통의 옥스퍼드 학생이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생각해. 물론 그때 당신은 그걸 몰랐겠지만. 당신은 몹시 공격적인 어조의 편지에서 그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지. 당신은 내게 "어떤 종류의 지적 의무도 없다"라고. 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것이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당신이 내게 했던 유일하게 진실한 말이라고 느꼈어. 그 순간, 당신한테는 나보다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 더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지금 결코 씁쓸한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단지 우리가 함께 나눈 삶의 경험에 근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궁극적으로, 결혼이나 우정과 같은 공동적인 관계를 이어주는 건 대화이고, 대화는 서로의 공통적인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지. 그리고 지적 수준이 아주 다른 두 사람 사이에 가능한 공통적 기반은 가장 낮은 수준이 될 수밖에 없어. 생각과 행동에서 경박한 것은 매력적이지. 경박함은 내 극과 역설 속에 표현된 아주 멋진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고. 하지만 삶의 허황됨과 어리석음은 종종 나를 진력나게 했어. 우린 오직 진창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이 끝없이 반복했던 단 한 가지 이야기가 아무리 지독하게 매력적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조차 더없이 단조롭게 느껴졌지. 난 종종 지루해 죽을 것만 같았고,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당신과 어울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의 일부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 뮤직홀에 빠져드는 당신의 취향이나, 먹고 마시는 데 엄청난 돈을 써대는 당신의 기벽, 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당신의 성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 난 당신이 문학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당신 앞날을 가로막거나 당신 용기를 꺾어놓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시인이 아닌 한 그 누구도 내 작품의 색채와 리듬을 적절하게 살리는 번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당시의 내게 헌신이란 것은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되는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래서 나는 당신의 번역과 당신을 다시 받아들였던 거야. 

 

- 그리고 그날 오후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완전히 잘못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곰곰 생각하고 있었어. 나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 사실상 강제로 영국에서 도망을 치고 있다니, 그것도 지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나의 좋은 점은 모두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우정을 끝내기 위해서라니. 게다가 내가 멀리하려는 대상이 시궁창이나 진창으로부터 현대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나와 인연을 맺은 무시무시한 생물체가 아니라, 바로 당신, 나와 같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누리는 청년, 나와 같은 옥스퍼드의 칼리지를 다녔고, 수없이 내 집을 방문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니. 

 

- 당신에게 3년 전은 뒤돌아보기에 긴 시간이겠지. 하지만 감옥에서 지내는 우리로서는, 슬퍼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우리는 고통이 주는 통증과 쓰라린 순간들에 대한 기억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밖에 없어. 우리에겐 달리 생각할 게 없거든.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 주기 때문이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건 우리의 지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이자 증거 같은 것이거든. 나 자신과 즐거움의 기억 사이에는 나 자신과 실제의 즐거움 사이만큼이나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 그곳에 도착한 날 밤, 당신은 사람들이 바보같이 인플루엔자라고 부르는 은근히 지독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지. 당신한테는 그게 벌써 두 번째나 세 번째 발병이었지. 그때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돌보고 간호했는지는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을 거야. 돈으로 살 수 있는 과일, 꽃, 선물, 책 등을 잔뜩 안겨준 것은 물론이고,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애정과 다정함과 사랑으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당신을 보살폈지. 아침에 한 시간 동안 산책하고, 오후에 한 시간 정도 마차로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 말고는 난 호텔을 떠난 적이 없었어. 그러면서 당신이 호텔에서 주는 포도를 좋아하지 않아서 런던에서 특별히 포도를 배달하게 했고, 당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냈고, 당신과 함께 있거나 당신 옆방에서 머물면서 저녁마다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거나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지. 

- 4, 5일 후 당신이 회복되자 난 극을 마저 끝내기 위해 집을 빌렸지. 물론 당신도 나를 따라왔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다음날 아침 난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지. 당신은 일 때문에 런던에 가면서 오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어. 당신은 런던에서 친구를 만났고, 다음날 늦게까지 브라이턴으로 돌아오지 않았지. 그때까지 나는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는데, 의사는 나보고 당신한테서 인플루엔자가 옮은 거라고 하더군. 내가 머물던 집은 아픈 사람이 지내기엔 엄청 불편한 곳이었지. 거실은 2층에 있고, 내 침실은 4층에 있었지. 시중 들어줄 하인도 없고, 메시지를 전달해 줄 사람도, 의사가 처방한 것을 구해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지. 하지만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난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다음 이틀 동안 당신은 나를 철저하게 홀로 내버려 두었지. 보살펴주지도, 같이 있어주지도 않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어. 난 지금 포도나 꽃, 멋진 선물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지. 심지어 나는 의사가 처방해 준 우유조차 구할 수가 없었어. 레모네이드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지. 당신에게 서적상에 가서 책을 구해줄 것을 간청하거나, 그들이 내가 원했던 것을 구하지 못했으면 다른 책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당신은 그곳에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지. 그 바람에 내가 하루종일 읽을거리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자, 당신은 태연히 내게 책을 샀으며 그들이 곧 보내주기로 했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 후 난 우연히 당신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  

 

- 당신은 그동안 물론 내 돈으로 지내면서 마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사실상 돈이 필요할 때만 내 방에 나타났지. 토요일 밤에, 아침부터 철저히 혼자서 침대를 지키고 있던 나는 당신에게 저녁식사 후에 돌아와 잠깐이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지. 당신은 짜증스럽고 불손한 태도로 그러겠다고 약속했어. 난 11시까지 기다렸지만 당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내게 어떤 약속을 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어겼는지를 간단하게 적은 메모를 당신 방에 남겨두었지. 

 

- 하지만 사실, 크고 작은 모든 것들에서 당신이 내게 가져다준 기이한 불운의 예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당신은 끔찍한 사건들을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손에 의해 조종당하는 단순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그런데 꼭두각시들 또한 스스로의 열정을 지니고 있지. 그들은 자신들이 보여주는 것에 새로운 구성을 추가하고, 자신들의 변덕이나 욕구에 맞춰 사건들의 정해진 결과를 비틀기도 하지. 

- 전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 깨닫게 되는 인간적인 삶의 영원한 모순인 것 같아. 그리고 종종 그것만이 당신 성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영혼이 지닌 심오하고 무시무시한 미스터리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면 말이지. 무엇이 그 미스터리를 더욱더 경이로운 것으로 만드는지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 물론 당신은 당신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그 속에 빠져 살았지. 그리고 수시로 변화하는 안개와 채색된 베일을 통해 모든 것을 다르게 보았던 거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당신은 당신 가족과 가족적인 삶을 완전히 제쳐두고 자신을 온전히 내게 바치는 것이 나에 대한 커다란 존중심과 깊은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지. 당신은 분명 그렇게 믿었어. 하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사치와 호화스러운 생활, 무한한 쾌락과 넘치는 돈을 의미했다는 걸 잊지 마. 당신 가족의 삶은 당신을 짜증 나게 했기 때문이지. 당신은 -당신 표현을 빌리자면- 차가운 싸구려 솔즈베리 와인을 혐오했어.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지적인 매력과 더불어 이집트의 환락가가 선사하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었지. 나와 함께 있지 못할 때 당신이 대용품으로 선택했던 파트너들은 결코 당신을 돋보이게 할 수 없었고 말이야. 

 

- 화끈거려 온다면 그건 당신한테 아주 잘된 일일 거야. 최고의 악덕은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 무엇이든 깨닫는 것은 옳은 거야. 

 

- 그때 당신은 더없이 친절하고 세심하게 내게 신경을 써주었지. 외국에 가기 전까지 거의 매일 오후 홀러웨이까지 나를 보러 달려왔고, 내게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편지들을 보내주었지. 하지만 나를 감옥에 보낸 것은 당신 아버지가 아닌 당신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당신이었으며,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신을 통해,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에 의해서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당신 머릿속을 스쳐가지 않았지. 심지어 나무 우리의 창살 너머에 있는 내 모습조차도 당신의 죽어버린 상상력을 되살리지는 못했어. 당신은 매우 비장한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의 연민과 감상으로 나를 대했지. 자신이 이 끔찍한 비극을 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거야. 나는 당신이 자신이 한 짓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마음이 당신에게 말해주었어야 하는 것을, 당신 마음이 증오로 굳고 무감각해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었을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누군가에게 그가 느끼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어.  

- 내가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내 오랜 영어(囹圄) 생활 동안 당신이 지킨 침묵과 당신이 보여준 행동 때문이야. 게다가 결과적으로 오직 나만 커다란 타격을 입은 셈이 되었지. 그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어.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받는 것에 만족했어. 비록 당신을 지켜보면서, 당신의 철저하고 고집스러운 맹목성 속에는 여전히 지극히 경멸스러운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신이 하찮은 대중지에 공개한 '나에 관한 편지'를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면서 내게 보여주던 일이 생각나. 아주 신중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글이었지. 당신은 '추락한 사람'을 대변해 '페어플레이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각'이나 그 비슷한 매우 따분한 것에 호소했지. 당신 편지는 당신과는 전혀 친분이 없지만 그런대로 존중할 만한 인물이 고통스러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를 위해 썼을 법한 종류의 글이었어. 그런데 당신은 자신의 글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 거야. 마치 거의 돈키호테적인 기사도 정신의 발현인 것처럼 여겼지. 나는 당신이 다른 신문들에도 또 다른 편지들을 보낸 것을 -그들이 신문에 싣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었어.

 

-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당신이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런 당신 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증오는 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부정이라는 거야. 감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증오는 위축증의 한 형태이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이지. 신문에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수치스러운 병을 감추고 있음을 공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당신이 증오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당신 아버지이며, 그러한 감정이 철저하게 상호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당신이 품은 증오를 어떤 식으로든 고귀하거나 근사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아. 당신의 증오가 무언가를 보여주었다면, 그건 단지 당신이 느끼는 증오가 유전적인 질병이라는 사실뿐이야.    

 

- 또 하나, 내 집에 동산 압류가 들어왔을 때의 일이 생각나. 그때 내 책들과 가구 모두가 차압당하면서 경매에 부쳐진다는 공고가 났지. 파산이 임박했던 거야. 난 당연히 당신한테 그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썼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종종 식사를 했던 집에 집행관들이 쳐들어온 게 당신에게 한 선물들 때문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런 소식이 당신을 조금이라도 괴롭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난 당신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이야기했어. 당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그러자 당신은 불로뉴에서 거의 서정적인 열광 상태를 보여주는 어조로 내게 답장을 보내왔지. 당신은 아버지가 '돈에 쪼들리고' 있어서 소송비용을 위해 1500파운드를 어디선가 융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나의 임박한 파산은 그에게 비용 청구를 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이는 셈'이 될 거라고 기뻐했어!

 

- 당신도 이젠 증오가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닫지 않았을까? 증오는 자신만 빼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축증이라고 묘사했을 때 나는 실제의 심리학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묘사한 것이었음을 당신도 인정하지 않을까? 내가 소장했던 매력적인 물건들. 내가 아끼던 번존스, 휘슬러, 몽티셀리 그리고 시메온 솔로몬의 그림들. 내가 애지중지하던 도자기들. 당대의 거의 모든 이름난 작가들 -위고부터 휘트먼, 스윈번부터 말라르메, 모리스부터 베를렌에 이르기까지- 에게서 선사받은 증정본.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름답게 장정한 저서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받은 특별한 상들. 

 

- 이 모든 것들이 경매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팔려나간 사실이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당신은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말했을 뿐이야. 그게 다였지. 이 일에서 당신이 본 것은 당신 아버지가 최종적으로 몇백 파운드 정도 손실을 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고, 당신은 그런 하찮은 생각에 황홀경과 유사한 기쁨을 느꼈던 거야. 

 

- 만약 당신 아버지가 내게 소송비용을 청구할 권리가 없었다면, 당신은 빈말로라도 내 장서의 완전한 손실 -문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며, 내가 입은 물질적 손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에 대해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했었을 거야. 당신은 분명 그랬으리라는 걸 난 잘 알아. 더 나아가, 내가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썼던 엄청난 돈과 당신이 수년간 내 돈으로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서, 나를 위해 내 책들의 일부라도 되사는 수고를 했을지도 몰라. 더없이 귀한 내 책들이 150파운드도 안 되는 금액에 팔려나갔지. 평범한 1주일간 당신을 위해 썼던 돈과 거의 맞먹는 금액에 말이지. 그런데도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손실을 볼 거라는 생각에 천박하고 하찮은 기쁨을 느끼느라 내게 작은 보답을 하려는 시도조차 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 아주 사소하고, 지극히 쉽고, 돈도 얼마 들지 않고, 지극히 명백하면서, 당신이 하기만 했다면 내게 엄청난 위안이 될 수 있었을 작은 보답 말이야. 이래도 증오가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는 내 말이 틀리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젠 당신도 내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알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 의도가 없었다고 나 자신에게 자꾸만 상기시켰어. 당신은 그저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화살이 왕의 갑옷 솔기를 꿰뚫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한 거야. 당신을 나의 가장 작은 고통과 가장 미미한 손실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난 당신을 나처럼 고통받는 존재로 여기기로 했어. 오랫동안 멀어 있던 당신 눈에서 마침내 비늘이 벗겨졌다고 믿기로 한 거야. 당신이 자신의 끔찍한 작품을 응시하면서 얼마나 경악했을지 고통스럽게 상상하곤 했지.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때도 있었어. 그 어두웠던 날들,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순간조차도 당신이 마침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말이지. 

 

- 그때만 해도 난 당신이 최고의 악덕인 피상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오히려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내 가족 문제에 할애할 수밖에 없음을 당신한테 알리면서 무척 마음 아파했지. 내 처남이 내게 편지를 보내서는, 내가 편지를 한 번만이라도 보내주면 나와 내 아이들을 위해 이혼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아내의 말을 전해주었어. 나로서는 그녀의 말대로 해주는 게 내 의무라고 느꼈지. 다른 이유들은 차치하고, 난 내 아들 시릴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내 아들. 내게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이자 동반자이며, 금발이 빛나는 조그만 머리의 터럭 하나가 당신 머리부터 발끝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할 뿐 아니라 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감람석과도 같은 내 아들. 나한테 그 애는 언제나 그런 존재였지. 난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 당신이 가명으로 내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어쩌면 잘한 일인지도 몰라. 그 당시 나는 아무런 이름도 갖고 있지 않았지. 당시 내가 수감되어 있던 커다란 교도소에서 나는 단지 기다란 복도에 있는 한 조그만 감방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에 불과했어. 생명 없는 천 개의 삶 중 하나, 생명 없는 천 개의 숫자 중 하나였던 거야. 하지만 진짜 역사 속에는 분명 당신한테 훨씬 더 잘 어울릴 법한 진짜 이름들이 많이 있었어. 나는 그 이름들을 통해 당신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을 테고, 흥미로운 가면무도회에나 어울릴 법한 번쩍거리는 가면의 스팽글 장식 뒤에 숨은 당신을 찾지 않아도 되었겠지. 아! 당신 영혼이, 그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그랬어야 하는 것처럼, 고통으로 인해 상처받고, 회한에 짓눌리고, 비탄에 잠겨 겸손해질 수 있었다면, 고통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그런 가면의 뒤에 숨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 삶의 위대한 것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종종 해석하기가 힘들지. 하지만 삶의 하찮은 것들은 상징들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상징들을 통해서 가장 손쉽게 삶의 씁쓸한 교훈들을 얻게 되지. 당신 가명으로 말하자면, 겉보기에는 우연한 것으로 보이는 그 선택은 상징적인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남게 될 거야. 그 선택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지.   

 

- 그 문제의 버전은 이제 공식적인 역사가 되어버렸지.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 양 인용하고 믿고 이야기하지. 목사는 그것을 설교에 써먹고, 도덕주의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무익한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지. 모든 세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내가 원숭이이자 어릿광대 같은 사람이 내린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거야. 이 편지 앞에서도 씁쓸하게 언급했던 것처럼,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당신 아버지는 교리문답서에 나올 법한 영웅으로 살아가고, 당신은 어린 사무엘과 동급으로 여겨지며, 나는 질 드 레와 마르키 드 사드 사이에 앉아 있게 되겠지.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어. 나는 불평할 생각이 전혀 없어. 감옥에서 깨닫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은 그대로이며,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난 내게는 중세시대에 배척당한 사람과 <쥐스틴>의 저자가 샌드퍼드와 머튼보다 더 나은 동반자가 되어줄 거라고 믿고 있어. 

 

- 하지만 난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당시에는, 당신 아버지가 속물적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 그의 변호사를 통해 제시하게 한 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바람직하고 적절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한테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좀 더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쓰도록 요청했던 거야. 그것이 적어도 당신에겐, 프랑스 신문들에 당신 부모님의 가정생활에 관한 허접한 글을 기고하는 것보다 더 득이 되는 일이었을 테니까. 당신 부모님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건 말건 프랑스인들이 그딴 것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 그런 건 그들에겐 아무런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시답잖은 주제일 뿐이라고.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나처럼 뛰어난 예술가가 그가 화신이 되어 이끈 유파와 운동을 통해 프랑스적 사상이 나아갈 길에 현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가, 어떻게 그토록 화려한 삶을 살다가 그런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는가 하는 거야.  

 

- 당신이 내가 보낸 수많은 편지들을 당신 기고문에 싣겠다고 했다면, 비록 편지들의 공개를 허락하진 않았더라도 이해할 수는 있었을 거야. 당신이 내 삶에 초래한 파멸, 당신 자신과 내게 해를 입히면서도 끝내 다스리지 못했던 당신의 광기 어린 분노, 모든 면에서 내게 엄청나게 치명적이었던 우정을 끝내고자 했던 내 바람, 아니 굳은 결심에 대해 이야기했던 편지들 말이야. 

  

-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큰 고통과 가장 가슴 아픈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은 당신이 그토록 이해가 느리고, 그토록 감수성이 부족하며, 당신 스스로 내 편지들 -난 그 속에서, 그것들을 통해 사랑의 정수와 영혼을 계속 살아 있게 해, 오랜 기간 육체적인 굴욕을 당하는 동안 내 몸속에 머물게 하려 했던 거야- 을 발표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둔하다는 -귀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사실이야. 당신이 왜 그랬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아주 잘 알고 말이지. 증오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다면, 오만함은 당신의 눈꺼풀을 철실로 꿰매버렸던 거야. 당신의 편협한 이기주의는 '실제적이고 이상적인 관계 속에서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능력을 둔화시켰고, 오랫동안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 무용한 것으로 만들었지. 당신의 상상력은 나처럼 감옥에 갇혀 있었던 거야. 빗장을 질러 창문들을 막아버린 것은 당신의 오만함이었고, 당신을 지키는 간수의 이름은 다름 아닌 증오였던 것이지. 

 

- 이 모든 것은 재작년 11월 초에 일어난 일이었지. 그토록 아득한 시간과 당신 사이에는 거대한 삶의 강물이 가로놓여 있지. 당신이 그토록 광대한 황량함 너머를 본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거야. 하지만 내겐, 이 모든 일이 어제도 아닌, 바로 오늘 일어난 것만 같이 느껴져.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고통을 중심축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져. 삶을 마비시키는 부동성不動性. 일상의 세세한 상황까지 불변의 패턴에 따라 규제하기.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빠짐없이 지배하는 철의 공식으로 이루어진 가차 없는 법칙. 이러한 삶의 부동성은 끔찍한 각각의 날들을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까지 형제처럼 닮게 만들어버리면서,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힘들에까지 그 부동성을 전염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파종기나 수확기, 허리를 굽혀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이나 포도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포도를 따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들로 새하얗게 변하거나 떨어진 과일들이 흩어져 있는 과수원의 풀밭에 관해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우리에겐 오직 한 가지 계절, 고통의 계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심지어 우리에겐 해와 달조차 허락되지 않아. 바깥에서는 날들이 푸르고 금빛으로 빛날지 모르지만, 쇠창살로 가로막힌 조그맣고 두꺼운 유리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은 그 아래 웅크리고 앉은 우리에겐 더없이 인색한 잿빛일 뿐이야. 이곳 감방은 언제나 석양이 지배하고 있어. 우리의 마음속이 언제나 한밤중인 것처럼. 그리고 시간뿐만 아니라 생각의 영역도 정지되어 있지. 당신이 개인적으로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지금 내게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내일 또다시 일어날 거야. 이 사실을 기억하길 바라. 그러면 내가 왜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지, 왜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 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너무나 끔찍한 충격이어서, 한때 '언어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나조차도 내가 느낀 비통함과 부끄러움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어. 예술가로서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조차도, 이토록 엄숙한 마음의 짐을 지는 것을 도와주고, 충분히 장엄한 음악에 맞춰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의 자줏빛 행렬을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말들을 찾아낼 수 없었을 거야.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 고고학과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내 나라가 한 국가로서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공식적인 역사에서도 고귀하고 명예롭게 여겨지는 이름을 내게 물려주셨지.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영원히 욕되게 했어. 그 이름이 비천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찮은 조롱거리가 되게 했지. 내가 그 이름을 진창 속으로 끌고 들어간 거야. 상스러운 자들이 그 이름을 상스러운 것으로 입에 오르내리게 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 이름을 어리석음의 동의어로 변질시키게 만들었던 거야. 그때 내가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고통은 그 어떤 펜으로도 쓸 수 없고, 그 어떤 종이에도 기록할 수 없을 거야. 당시 내게 배려 깊고 다정했던 아내는 무관심하거나 낯선 사람의 입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지 않게 하려고 아픈 몸을 끌고 제노바에서 영국까지 먼 길을 달려왔어. 결코 돌이킬 수도 바로잡을 수도 없는 엄청난 손실에 대한 소식을 그녀 자신이 직접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지. 나를 여전히 아꼈던 모든 이들에게서도 애도의 메시지가 몰려들었지. 심지어 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망가진 내 삶에 새로운 고통이 더해졌다는 소식에 내게 자신들의 조의를 전달할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어. 오직 당신만이 냉담하게, 내게 아무런 메시지도 편지도 보내지 않았지. 그런 태도에 관해서는,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고귀한 충동도 느끼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만을 좇던 이들을 가리켜했던 말이 꼭 어울릴 거야. "그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하지 말자. 그냥 쳐다보고 지나치도록 하자."  

 

- 그리고 친구들이 다시 나를 보러 왔지. 나는 늘 그렇듯이 당신 안부를 물었고, 당신이 나폴리의 별장에 가 있고, 시집을 출간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면회가 끝날 무렵, 지나가는 말로 당신이 그 시집을 내게 헌정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 그 소식에 삶에 대한 환멸 같은 게 느껴지더군.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에 당신에 대한 경멸과 비웃음을 간직한 채 감방으로 돌아왔어. 어떻게 내게 먼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시집을 헌정하겠다고 꿈꿀 수 있었는지? 아니, '꿈꾼다'는 말로는 부족해.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 어쩌면 당신은 나의 삶에 영광과 명예가 넘치던 전성기에는 당신이 초기 작품을 헌정하는 데 기꺼이 동의하지 않았느냐고 내게 되물을지 모르겠군. 물론, 그때는 그랬지. 아름답고도 힘든 문학이라는 예술에 첫발을 내딛는 다른 어떤 젊은이였더라도 난 그가 바치는 경의를 기꺼이 받아주었을 테니까. 예술가에게는 모든 경의가 유쾌한 법이지. 게다가 경의를 바치는 이가 젊은이라면 그 기쁨이 배가 되지. 월계관과 월계수 잎은 나이 든 이들의 손에서는 금세 시들고 말아. 오직 젊은이들만이 예술가에게 왕관을 씌워줄 권리가 있어. 그것이 바로 젊음의 진정한 특권이지. 젊은이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하지만 실추와 오명으로 점철된 날들은 위대함과 명성으로 빛나던 날들과는 전혀 다른 법이야.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번영, 기쁨 그리고 성공이 거친 낟알과 흔한 섬유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고통은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민감하다는 사실이야. 생각이나 운동의 세상에서는 약간의 움직임에도 고통이 섬세하면서도 어김없는 떨림으로 반응하곤 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떨리는 금박과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대략적인 비유일 뿐이야. 고통은 사랑이 아닌 다른 손으로 만지는 즉시 피를 흘리는 상처인 거야. 그리고 사랑의 손길에도 또다시 피를 흘리게 되지. 비록 아픔 때문이 아니더라도.

 

- 그런데 어째서 레딩 감옥의 소장에게는 당신 시집을 내게 헌정하기 위한 허락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은 거지? 당신들이 얼마나 굉장한 미사여구들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젓번 경우에는, 내가 잡지사에 편지들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기 -편지들에 대한 권리가 전적으로 내게 있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때문에 그렇게 했고, 이번 경우에는 당신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건가? 내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리기 전까지는 내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을 작정으로? 당신 작품 앞면에 내 이름을 넣고 싶었다면, 내가 사회적으로 추락하고 파산해서 감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호의와 영광, 특혜를 간청하듯 내게 허락을 구했어야만 했어. 고초를 겪으면서 치욕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라고.   

 

- 당신이 내게 의견을 물었더라면 나는 시집 출간을 조금 미루라고 충고했을 거야. 혹은 그러기 싫다면,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했다가 당신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 -진정으로 얻을 가치가 있는 종류의 연인들이지- 이 생기면, 그때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에 이렇게 외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대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 꽃들은 내가 씨를 뿌려 자라난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 꽃들을 그대들이 버림받고 배척당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에게, 그에게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에 대한 헌사로 바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잘못된 방법과 잘못된 순간을 선택했어. 사랑에도 요령이란 게 필요하지. 문학에도 요령이 있듯이. 그리고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에도 소질이 없었던 거야. 

 

- 마침내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한 짓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깨닫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기 때문이지. 맹목성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기괴해지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상상력이 부족한 기질은 그것을 일깨우기 위한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마치 돌처럼 무감각하게 굳고 말지. 육체가 먹고 마시고 쾌락을 추구하는 동안, 그 속에 살고 있는 영혼은 단테의 브란카 도리아의 영혼처럼 완전히 죽어버리고 마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내 편지가 적절한 시기에 도착한 것 같더군. 당신은 아마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거야. 로비에게 보낸 답장에서 당신은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모두 박탈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지.

 

- 당신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응답받지 못한 관대함의 행위들, 당신이 내게 아직 갚지 못한 감사함의 빛들이 모든 게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단지 의무 때문에라도,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유대 중에 가장 메마른 유대인 의무에 의해서라도 내게 편지를 써야 했음을 당신도 결국엔 인정하게 될 거라고 난 굳게 믿고 있었어. 설마 정말로, 내가 가족들로부터 일과 관련된 편지만을 받아볼 수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로비가 내게 석 달마다 꼬박꼬박 문학계의 소식을 담은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거야. 재치, 매우 치밀하고 영리한 비평적 감각, 표현의 경쾌함이 느껴지는 그의 편지들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을 거야. 그야말로 진정한 편지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지. 그의 편지를 읽노라면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프랑스식의 은밀한 담소 causerie intime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는 내게 경의를 표하는 섬세한 방식을 통해 어떤 때는 나의 판단력, 어떤 때는 나의 유머감각, 또 때로는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본능 또는 나의 교양에 호소하고, 예전에 내가 많은 이들에게 예술의 영역에서 스타일의 결정권자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최고의 결정권자였음을 수많은 미묘한 방식으로 내게 상기시키면서, 그가 문학의 요령뿐만 아니라 사랑의 요령 또한 터득하고 있음을 입증하지. 그의 편지들은 나와 내가 한때 왕이었던 예술의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세상 사이의 작은 전달자들이 되어주었지. 거칠고 완성되지 않은 열정, 분별없는 욕구, 끝 모르는 욕망과 무형의 탐욕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세상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그 세상의 왕으로 남아 있었을 거야. 어쨌거나 이젠, 단순히 심리적인 호기심의 차원에서라도, 앨프리드 오스틴이 시집을 출간하려 한다거나, 스트리트가 <데일리 크로니클>에 발표할 극 비평을 쓴다든지, 찬사를 보낼 때마다 말을 더듬는 이가 메넬 부인이 스타일의 새로운 시빌레가 될 거라고 예고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는 당신에게서 편지를 받아보는 게 내겐 훨씬 더 흥미로우리라는 것은 당신도 이해할 수 있거나 적어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 

 

- 나는 내 아이들까지 빼앗기고 말았어. 인류와의 사랑스러운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만 거야. 나를 치유하고 도울 수 있으며, 나의 멍든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고, 고통받는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난 그것마저 거부당한 거야. 

-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작지만 잔인한 사실 하나가 더해졌지. 당신의 행위들과 당신의 침묵, 당신이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으로써 당신은 나의 긴 감옥살이의 하루하루를 더욱더 힘겹게 만들었어. 심지어 당신은 교도소에서 먹는 빵과 물까지도 변화시켰어. 빵은 더욱 씁쓸하게, 물은 더욱 짜게 만들었지. 당신이 함께 나누었어야 할 슬픔이 당신으로 인해 배가 되었고, 당신이 경감시키도록 노력했어야 할 고통은 더욱더 큰 아픔으로 변했지. 물론 나는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의도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당신은 아마 그럴 의도가 없었을 거야. 다만, '당신 성격 중 실제로 치명적인 단 하나의 결점, 당신의 절대적인 상상력 부족'이 문제였던 거야.

-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얻은 결론은, 나는 당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거야. 나는 반드시 당신을 용서해야만 해.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당신 마음속에 씁쓸함을 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그런 감정을 뽑아내기 위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용서해야 하는 거야. 가슴속에 독을 품은 채 자신을 갉아먹고 자라게 하거나, 매일 밤 일어나 자기 영혼의 정원에 가시를 심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당신을 용서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당신이 나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예전에는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건 난 언제나 금세 당신을 용서했지. 당시에는 내 용서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야. 아무런 흠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내가 치욕과 불명예에 처해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 용서는 지금의 당신에게는 많은 것을 의미해야만 해. 당신도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당신이 조금 일찍 또는 조금 늦게 그걸 깨닫거나, 조만간 깨닫거나 혹은 전혀 깨닫지 못하더라도,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파멸시켰다는 마음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걸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런 생각은 당신을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게 만들거나, 죽을 만큼 슬프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난 당신에게서 그 짐을 거두어 내 어깨 위에 올려놓아야만 해.

- 나는 스스로에게 거듭 되뇌어야 해. 당신이나 당신 아버지 같은 이들은, 설사 그 수가 천배나 많아진다 하더라도, 결코 나 같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없을 거라고. 나를 파멸시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위대하거나 하찮은 누구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파멸에 이를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이 말을 마음에 깊이 새길 준비가 되어 있고, 지금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지금으로서는 내 말을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을 가차 없이 비난한 게 사실이라면,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가혹한 비난을 가했는지를 생각해 봐. 당신이 내게 한 짓이 잔인했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짓은 훨씬 더 잔인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 나는 우리 시대의 예술과 문화와 상징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어. 난 성년이 시작될 무렵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 후에 우리 시대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만들었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사실을 인정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대개는 그 사람이 죽고 그의 시대가 한참 지나간 뒤에야 역사가나 비평가에 의해 밝혀지게 마련이지. 그나마 밝혀질 수 있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내 경우는 전혀 달랐어. 나는 그 사실을 나 자신이 먼저 느끼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느끼게 만든 거야. 바이런 역시 상징적인 인물이었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열정과 열정에 뒤따르는 권태로움을 노래했을 뿐이야. 나와 우리 시대의 관계는 그보다 더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더 고귀하고 더 영속적이고 더 필수적인 것이었지. 

- 신들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지. 천재적인 재능과 저명한 이름. 높은 사회적 지위, 빛나는 재기, 지적인 대담함 모두를. 나는 예술을 철학으로 변모시켰고, 철학을 예술로 변화시켰지. 또한 사람들의 마음과 사물들의 색깔을 바꾸어놓았지. 나의 말과 행동 모두는 언제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 나는 예술에서 가장 객관적인 형태로 알려진 연극을 서정시나 소네트만큼 개인적인 표현 방식이 되게 했고, 그와 동시에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부각시켰지. 연극, 소설, 압운시, 산문시, 절묘하고 기막힌 대화체의 글 등등, 손대는 것마다 아름다움의 새로운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탄생시킨 거야. 또한 진실 자체에 그 정당한 영역으로서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똑같이 부여했고, 거짓된 것과 진실한 것은 단지 지적인 존재의 형태들일 뿐임을 입증했지. 


- 나는 또한 예술을 지고한 현실로, 삶을 단지 허구의 한 방식으로 다루었어. 그리고 우리 세기의 상상력을 일깨워 내 주위에 신화와 전설이 생겨나게 했지. 나는 모든 시스템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모든 존재를 하나의 경구 속에 담아낸 거야.

- 이런 것들과 더불어 내겐 또 다른 것들이 있었어. 난 오랜 기간 이어진 무분별하고 관능적인 안락함 속으로 빠져들었지. 플라뇌르 flâneur, 댄디,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즐겼던 거야. 내 주위에는 무미한 기질과 보잘것없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지. 나는 나의 천재적인 재능을 헤프게 썼고, 영원한 젊음을 낭비하는 것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어. 상에 있는 것이 지겨워진 나는 새로운 감각들을 찾아 의도적으로 깊은 구렁 속으로 내려갔던 거야. 열정의 영역에서 퇴폐는 생각의 영역에서 역설이 내게 의미하는 것과 같았지. 욕망은 종국에는 하나의 질병이나 광기, 혹은 그 둘 다가 되고 만 거야. 난 점차 다른 이들의 삶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삶을 계속 이어갔어. 평범한 날의 사소한 모든 행위들이 한 인간을 형성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고, 비밀스러운 방에서 행한 것을 언젠가는 지붕 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 한마디로, 난 나 자신의 주인이기를 그만둔 거야.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지. 난 당신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했고, 당신 아버지가 나를 협박하도록 내버려 두었어. 그리고 결국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졌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절대적인 겸손밖에 없어. 당신에게도 오직 한 가지, 절대적인 겸손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당신이 이곳 먼지 속으로 걸어 들어와 내 곁에서 그 사실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 

- 내가 감방에서 썩은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어. 그사이 내 마음속에는 미칠 것 같은 절망감이 몰려왔고, 난 봐주기조차 힘든 비통함에 빠져들었지. 끔찍하고 무력한 분노, 씁쓸함과 경멸, 큰 소리로 울게 만드는 고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함과 침묵하는 슬픔을 모두 느꼈지. 난 고통의 모든 방식을 거쳐온 거야. 워즈워스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지 워즈워스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만큼. 
"고통은 영구적이고, 모호하고, 어두우며 무한성을 띠고 있다."

- 그런데 난 내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때로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내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었어. 이제 난 이 세상에서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중에서도 의미 없는 고통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고 내게 속삭여주는 무언가가 나의 내면에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 거야. 들판에 숨겨진 보물처럼 내 안에 숨겨져 있던 그 무언가는 바로 겸손이었어.

 

- 겸손은 내게 남은 마지막이자 최고의 것이었어. 내가 도달한 지고의 발견이자,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었지. 그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따라서 난 그것이 적절한 시기에 내게 왔음을 알았어. 그것은 더 일찍도 더 늦게도 나를 찾아올 수 없었던 거야. 누군가가 내게 그것에 대해 말했다면, 난 그것을 거부했을 거야. 누군가가 내게 그것을 가져다주었다면, 난 그것을 내쳤을 거야. 나 자신이 발견했기 때문에 난 그것을 간직하려 했던 것이지. 난 그래야만 해. 그것은 나를 위해 그 안에 삶의 요소들, 새로운 삶, 비타 누오바의 요소들을 품고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이상한 것은 없을 거야. 누군가에게 그것을 줄 수도 없고, 누군가가 그것을 줄 수도 없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도 없어. 우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지. 

- 그것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실제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아.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어떤 외부의 제재나 지시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난 그런 것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난 지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야. 자기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 나의 본질은 자기실현의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어. 난 지금 오직 그 생각뿐이야. 그러기 위해 내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당신에 대한 모든 씁쓸한 감정으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거야.  

- 나는 지금 완전한 알거지에 노숙자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 있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보다 더 힘든 일도 많다고 생각해. 이건 정말 진심하는 얘긴데, 난 당신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을 가슴에 품고 이 감옥에서 나가느니, 기꺼이 집집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며 사는 편을 택할 거야. 만약 부자들의 집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집에서는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많이 가진 사람들은 종종 탐욕스럽게 굴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언제나 뭐라도 나누려 하는 법이거든. 난 여름에는 서늘한 풀숲에서 얼마든지 잠잘 수 있고, 겨울이 오면 푹신하고 따뜻한 건초더미 속에서나 널찍한 곳간의 지붕 밑 다락방에서도 기쁘게 잠들 수 있어. 내 마음속에 사랑만 간직할 수 있다면. 이제 내겐 삶의 외적인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당신도 이제 내가 얼마나 강렬한 단계의 개인주의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게 맞을 거야. 아직 갈 길이 멀고, "내가 걸어가는 길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지.

- 물론 내가 길가에서 구걸을 하며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내가 만약 밤에 서늘한 풀숲에 누워 있게 된다면, 그것은 달에게 소네트를 바치기 위해서일 거야. 내가 감옥에서 나가게 될 때는, 로비가 쇠징이 박힌 커다란 문 반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애정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의 애정을 상징하기도 하지. 난 내가 적어도 18개월 정도는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아름다운 책들을 쓰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아름다운 책들을 읽을 수는 있을 테니, 내게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 

- 그런 다음에는, 나의 창작능력을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연민에서라도 내게 문을 열어줄 집이 단 한 군데도 없다면,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낡아빠진 누더기 외투와 적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렇더라도 난 모든 원망과 냉혹함과 경멸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자줏빛 고급 리넨을 몸에 두르고 증오로 병든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평온하고 확신에 찬 채 삶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로 조금도 힘들지 않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럴 수 있으려면, 당신 스스로 용서를 원한다는 것을 느껴야만 해. 당신이 진정으로 용서를 원하게 되면, 그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될 거야. 

- 내 임무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만약 당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내겐 오히려 쉬운 일일 거야. 하지만 내 앞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날 기다리고 있어. 난 더욱더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가야 하고, 훨씬 더 어두운 계곡을 통과해야만 하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해. 종교나 도덕, 이성 그 어느 것도 나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야. 

- 도덕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나는 타고난 도덕률 폐기론자이며, 법이 아닌 예외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알 것 같아. 그것을 알게 되어 참 다행이야. 

- 종교도 내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다른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주는 믿음을 난 만질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에 주지. 나의 신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신전에 살고 있고, 실제 경험의 범주 안에서 나의 믿음은 완전하고 완벽해지지. 어쩌면 너무 완벽한지도 모르겠어. 이 땅에 자신들의 천국을 자리 잡게 하는 다른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처럼 난 그 속에서 천국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지옥의 공포까지도 발견했기 때문이야. 종교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교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해. 고아 형제회쯤으로 부를 수 있을 그곳의 제단 위에는 양초가 불을 밝히지도 않고, 마음에 평화가 깃들지 않은 사제가 축복받지 못한 빵과 포도주가 들어 있지 않은 성배를 가지고 미사를 주관하게 될 거야. 진실한 것은 무엇이든 종교가 될 수 있어야만 해. 그리고 불가지론도 믿음 못지않게 자신만의 의식을 행해야만 하지. 자신의 순교자들을 씨 뿌려놓았으니 자신의 성인들을 거둬들여야 하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긴 신에게 매일 감사 기도를 올려야만 해. 하지만 믿음이나 불가지론 그 어떤 것이든 나와 상관없는 외적인 것이어서는 안 돼. 그것의 상징들은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어야만 해.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하게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 내 안에서 그 비밀을 발견할 수 없다면, 난 그것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할 거야. 내가 이미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내게 오지 못할 거라고. 

- 이성 또한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이성은 내게 유죄판결을 내린 법이 잘못된 부당한 것이라 말하고, 내게 고통을 주는 제도는 잘못된 부당한 제도라 말하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든 난 이 모든 것을 내게 정당하고 옳은 것이 되게 해야만 해. 예술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특별한 어떤 순간에 어떤 특별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 기질의 도덕적인 발전도 그와 유사한 과정을 거치지.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게 유익한 것이 되게 해야만 해. 널빤지 침대, 역겨운 음식, 손끝이 고통으로 무감각해질 때까지 잘게 찢어야 하는 질긴 밧줄, 매일같이 하루를 시작하고 끝맺을 때까지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천한 노동, 판에 박힌 일상이 필요로 하는 듯한 엄격한 지시들, 슬픔을 바라보기에도 흉측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끔찍한 죄수복, 침묵, 고독, 수치스러움- 나는 이 모든 것들과 각각의 것들을 영적인 경험으로 변모시켜야 하는 거야. 모든 육체적인 타락을 하나도 빠짐없이 영혼의 영화化를 위한 수단으로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 

- 난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순간이 오기를 바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의 전환점은, 아버지가 나를 옥스퍼드에 보냈을 때, 그리고 사회가 나를 감옥에 보냈을 때였다." 하지만 그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은 너무 자조적으로 들릴 테니까.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거나, 사람들이 나에 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나는 우리 시대의 지극히 전형적인 자녀로서, 나의 사악함으로 인해, 그 사악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 삶의 좋은 것들을 악으로, 악한 것들을 선으로 변모시켰다."

 

- 하지만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정말 중요한 것,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내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불구가 되거나 망가지거나 불완전한 존재로 남게 되지만 않는다면-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나의 기질 속으로 빨아들여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게 하고, 아무런 불평이나 두려움이나 저항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야.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야.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고.

- 처음으로 내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내게 자신이 누군지 잊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했어. 아주 파괴적인 충고였지. 내가 누군가를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어떤 종류의 위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의 몸이 되면 내가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라고 충고하곤 하지. 하지만 난 그러는 것 역시 내겐 치명적이 되리라는 걸 잘 알아. 그건 곧, 난 내내 견딜 수 없는 불명예에 대한 기억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또한 다른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내게도 소중한 것들 -해와 달의 아름다움, 계절의 행렬, 새벽의 음악과 깊은 밤의 침묵, 나뭇잎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물, 잔디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며 잔디가 은빛을 띠게 하는 이슬- 이 내겐 모두 어두운 기억으로 더럽혀지고, 그것들의 치유하는 힘과 기쁨을 전달하는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야.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입술에 거짓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 우리의 육체는 온갖 종류의 것들 -천하고 더러운 것들과, 사제나 우리의 환상이 정화시킨 것들을 포함한- 을 모두 빨아들여서, 그것들을 유연성이나 힘, 멋진 근육의 움직임이나 잘 다듬어진 몸의 형태, 또는 머리카락과 입술, 눈의 곡선과 색깔로 변화시키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그만의 유익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본래는 비루하고 잔인하고 비천한 것들을 고귀한 생각이나 수준 높은 열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런 것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가장 위엄 있는 방식을 발견하거나, 본래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을 통해 종종 가장 완벽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지. 

- 나는 내가 평범한 교도소의 평범한 죄수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만 해. 그리고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배워야 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런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하나의 벌로 받아들여야 해. 만약 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벌 받는 게 아무 소용없겠지. 물론 난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고, 내가 한 행동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저지르고도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은 것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아. -내가 이 편지에서 앞서 말한- 신들은 이상하게도 우리의 악덕과 사악함뿐만 아니라 선함과 인간적인 행위 때문에도 우리를 벌한다고 했던 것과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난 이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뿐 아니라 자신의 선행 때문에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 나는 그러는 것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어. 그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 그 어느 쪽에 대해서든 자만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도움이 되어야만 해. 그리고 내 바람대로, 내가 받는 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면 난 자유롭게 생각하고, 걷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 많은 사람들이 출소할 때 자신의 감옥을 세상으로 함께 가지고 나가며, 그것을 자기 마음속에 비밀스러운 불명예처럼 간직하다가 종국에는 독에 중독된 불쌍한 짐승처럼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으로 숨어 들어가 죽고 말지.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더없이 비참한 일이고, 사회가 그렇게 하도록 그들을 막다른 길로 내모는 것은 잘못된, 아주 잘못된 일이야. 사회는 개인에게 끔찍한 벌을 가할 권리를 휘두르지만, 피상적이라는 최고의 악덕을 지니고 있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하지. 누군가를 벌주는 것이 끝나면, 사회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아. 말하자면, 그를 향한 사회의 가장 큰 의무가 시작되는 순간에 그를 내팽개치는 거야. 사실 사회는 자신이 한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벌준 사람들을 피하는 거야. 자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채권자를 피하거나, 되돌릴 수도 보상할 길도 없는 잘못의 피해자가 된 누군가를 피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지. 나로서는 내가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만큼 사회도 내게 어떤 고통을 가했는지를 의식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러면 서로에 대한 씁쓸함이나 원망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야. 

- 물론 난 어떤 관점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 사실 내 경우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지. 이곳에 나와 함께 수감된 불쌍한 도둑들이나 무법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 잿빛 도시나 초원에서 그들의 죄를 목격했던 은밀한 장소는 그 범위가 아주 작아.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는 새가 석양과 새벽 사이에 날아갈 수 있는 거리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도 없어. 하지만 내게 "세상은 손바닥만큼이나 줄어들어 있지." 그리고 내가 돌아보는 곳마다 바위에 내 이름이 납으로 새겨져 있어. 나는 무명의 존재에서 범죄로 인한 일시적인 악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 같은 명성을 누리다가 영원한 불명예를 얻었기 때문이지. 때로는 내가 명성과 악명은 한 걸음 차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그런 걸 보여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들어. 어쩌면 한 걸음 차이도 안 될지 모르지만.

- 그런데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 삶에 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내 삶의 별스러운 행각이 이어지는 한- 사실 속에서 내게 좋은 점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되었어. 그 사실은 내게 다시금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을 확고히 할 필요성을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야. 그것도 되도록 빠른 시간에. 내가 만약 다시 한번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면, 난 악의에서 독을 비겁함에서 비웃음을 사람들의 혀에서 경멸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삶이 내게 문제가 되는 게 분명한 사실이라면, 나 역시 삶에 문제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고, 그들 자신과 나에 관한 어떤 판단을 내려야만 하기 때문이지. 물론 지금 내가 특정한 개인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같이 있고 싶은 유일한 사람들은 예술가들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해. 게다가 난 삶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말한 모든 것들 중에서 나는 삶 전체에 대한 나 자신의 정신적인 태도에만 신경을 쓸 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해 도달해야 하는 첫 번째 단계 중 하나가 내가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임을 느끼고 있어. 나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 그런 다음에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 예전에 난 그 방법을 알고 있었거나, 안다고 생각했어. 본능적으로 말이지. 예전에 내 마음속은 언제나 봄날이었지. 나의 기질은 기쁨을 닮아 있었어. 난 내 삶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웠지. 포도주를 잔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우듯. 이제 난 삶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고, 행복을 떠올리는 것조차 지극히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아. 옥스퍼드의 첫 번째 학기에 페이터의 <르네상스> -내 삶 전체에 기이한 영향을 미친 책이지-에서 단테가 "슬픔 속에서 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지옥에서도 얼마나 깊은 곳에 자리 잡게 했는지를 얘기한 것을 읽고, 당장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가 시커먼 수렁 아래 '상큼한 공기 속에서도 음울한 이들이 누워 있다'는 구절을 찾아본 기억이 나.  
 

- 원즈워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나는 죽기를 간절히 바랐어. 그것만이 나의 단 하나의 소원이었지. 그곳 교도소 병동에서 두 달을 보낸 후 이곳으로 이감되어 점차 건강이 회복되자 난 분노에 휩싸였어. 나는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날 자살을 하리라 마음먹었지. 그리고 그 최악의 상태가 지나가자 나는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하지만 그건 왕이 자줏빛 망토를 걸치듯 우울함을 입고 살기 위해서였어. 다시는 웃지 않고, 내가 들어가는 집마다 애도의 집으로 만들고, 내 친구들이 나와 함께 슬퍼하며 천천히 걷게 하고, 그들에게 멜랑콜리가 삶의 진정한 비밀이라고 가르치고, 그들에겐 낯선 슬픔으로 그들을 다치게 하고, 나 자신의 고통으로 그들을 망치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이젠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 그토록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와서 내게 그들의 공감을 표현하기 위해 나보다 더 우울한 얼굴을 하게 만들거나, 그들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초대해 쓰디쓴 풀과 장례식의 구운 고기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배은망덕하고 배려심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난 즐겁고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해. 

 

- 내 앞에는 아주 많은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것들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이루기 전에 죽는 것은 정말 끔찍한 비극이 될 거야. 이제 예술과 삶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고, 각각의 발전은 새로운 완성의 방식이 될 거야. 난 기필코 살아서 내게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온 것을 탐험할 수 있기를 바라. 내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뭔지 궁금해?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그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지. 

 

- 고통과 그것이 가르쳐주는 모든 것이 나의 새로운 세상이야. 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왔어. 모든 종류의 슬픔과 고통을 피했던 거야. 나는 둘 다 극도로 싫어했어. 그리고 되도록 그것들을 외면하려고 마음먹고는, 일종의 불완전함의 형태들로 취급했지. 슬픔과 고통은 내 삶의 계획에 속해 있지 않았고, 나의 철학에서 제외되었지. 전체로서의 삶에 관해 잘 알고 있었던 내 어머니는 칼라일이 번역해 자신의 책 -그는 수년 전에 이 책을 내 어머니에게 주었어- 에 인용했던 괴테의 구절을 내게 종종 들려주곤 하셨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 긴긴밤을 눈물 흘리며 새벽이 오는 것을 기다려보지 못한 사람.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 하늘의 힘을."

- 이 시구들은 나폴레옹에게 거칠고 무례하게 취급당했던 고귀한 프러시아의 왕비가 그녀의 수치스러운 유배생활 동안 늘 되뇌곤 했던 구절이었어. 또한 내 어머니가 말년의 힘든 삶 속에서 종종 떠올렸던 구절이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이 말들 속에 감춰진 엄청난 진실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기를 전적으로 거부했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어머니에게 난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싶지도 않고, 더 씁쓸한 새벽이 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눈물 흘리는 밤을 보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곤 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그때 난 그것이 운명이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둔 것들 중 하나이며, 사실상 1년 내내 그러는 것밖에 달리 할 게 없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그게 바로 내게 할당된 몫이었지. 그리고 최근 몇 달 동안 끔찍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은 끝에 고통의 깊은 곳에 숨겨진 몇몇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는 성직자들과 사람들은 때로 고통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얘기하곤 하지, 고통은 사실 하나의 계시인데 말이지. 고통으로 인해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거든. 모든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고. 또한 예전에는 예술에 대해 본능적으로 모호하게 느꼈던 것을, 더없이 명료한 통찰력과 강력하고 완전한 이해력으로 지적이고 감정적으로 깨달을 수도 있고 말이지. 

- 이제 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지고한 감정인 고통이 모든 위대한 예술의 전형이자 시금석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아. 예술가가 늘 추구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면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삶의 방식이야. 외양이 내면을 표현하고, 형식이 내용을 드러내는 삶이지.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 아주 드문 것도 아니야. 어느 때에는, 젊음과 젊음에 관심을 두는 예술이 우리에게 그러한 본보기가 될 수 있지. 또 어떤 때에는, 현대적 풍경화가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인상을 표현함으로써, 외적인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땅과 공기, 엷은 안개와 도시를 외관에 걸침으로써, 그리고 분위기와 색조와 색채의 병적인 동조를 이룸으로써, 그리스인들이 그토록 완벽한 조각을 통해 실현했던 것을 우리를 위해 그림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 표현 속에 모든 주제가 녹아 있는 음악,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는 음악은 복잡한 하나의 예이며, 꽃이나 어린아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단순한 예가 될 수 있어. 하지만 고통은 삶과 예술 모두에서 지고한 전형이 될 수 있지.

- 즐거움과 웃음 뒤에는 거칠고 엄혹하고 냉담한 기질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을 뿐이지. 기쁨과는 달리 고통은 가면을 쓰지 않아. 예술에서 진실은 근본적인 아이디어와 우연적인 존재의 필연적인 일치가 아니야. 그것은 형태와 그림자 사이의 유사성도, 크리스털에 비친 형태와 형태 그 자체 사이의 유사성도 아니야. 공허한 언덕으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도 아니고, 달을 달에게 보여주고 나르키소스를 나르키소스에게 보여주는 계곡의 은빛 샘물도 아니야. 예술에서 진실은 어떤 것이 자신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지. 내면을 표현하는 외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혼, 정신이 충만한 육체. 이런 이유로 고통에 비견할 수 있는 진실은 세상에 없어. 때로는 고통만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어쩌면 우리를 눈멀게 하거나 물리게 하기 위한, 눈이나 욕구에서 비롯된 환상일 수도 있지만,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어린 아이나 별의 탄생에도 고통이 함께하지. 

- 한발 더 나아가, 고통 속에는 강렬하고 놀라운 현실이 포함되어 있어. 언젠가 나 자신에 대해, 우리 시대의 예술과 문화와 상징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이런 끔찍한 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비참한 사람들 중에서 삶의 비밀과 상징적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삶의 비밀은 고통이기 때문이야. 고통은 모든 것 뒤에 숨어 있지.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자신에게 달콤한 것은 아주 달콤하고, 씁쓸한 것은 아주 씁쓸하게 느끼면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쾌락으로 향하게 하며, 단지 '한두 달 동안 꿀을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평생 동안 다른 것은 먹으려 하지 않게 되지. 그러는 동안 우린 자신의 영혼을 굶어 죽게 만들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말이지. 
 
- 그녀에게는 아름다움과 고통이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고, 똑같은 메시지를 지니고 있어. 그 당시 나는 그녀에게, 런던의 비좁은 골목길에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히 많은 고통이 존재하며, 자신이 저질렀거나 저지르지 않은 잘못 때문에 조그만 정원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고통만으로도 창조된 세상의 모든 얼굴이 남김없이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때 난 그러한 믿음에 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이젠 그것이 어떤 형태든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 것 같아. 그것 말고는 다른 어떤 설명도 생각할 수 없어. 사랑 외에 다른 설명은 없으며, 이 세상이 정말 고통으로부터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의 손길로 만들어졌음을 확신하게 된 거야. 이 세상이 인간의 영혼을 위해 창조된 것이라면, 사랑이 다닌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더없이 완벽해질 수 없기 때문이지. 쾌락은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 존재하고, 고통은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 내가 이런 것들을 확신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지나친 자만심을 드러내는 것이겠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완벽한 진주를 닮은 신의 도시가 보이지. 그것은 무척 근사해서 마치 어린아이도 어느 여름날 단번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어린아이는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와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결코 그럴 수가 없어. 어느 한순간에 무언가를 깨달았다가는, 이내 무거운 걸음으로 뒤따르는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지.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야. 우린 영원 속에서 생각을 하지만, 시간 속에서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지. 하물며 우리처럼 감옥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갈지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삶의 매 순간마다 우린 과거의 자신인 것만큼 미래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예술은 하나의 상징이야. 인간이 곧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에. 

 

- 내가 그런 경지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만 있다면, 그건 예술적인 삶의 궁극적인 실현이 될 거야. 예술적인 삶은 한마디로 자기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예술가에게 겸손이란 모든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예술가에게 사랑이 단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의미하는 것처럼.  
 
- 나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삶과 예술가의 진정한 삶 사이에서 훨씬 더 친밀하고 즉각적인 연관성을 간파하면서, 고통이 나의 날들을 앗아가고 그것의 굴레에 나를 묶어놓기 훨씬 전에 이미 인간의 영혼에서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완벽하게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강렬한 기쁨을 느꼈어.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언덕 위의 양치기와 감방의 죄수뿐만 아니라, 세상을 화려한 행렬처럼 바라보는 화가와 세상을 하나의 노래로 간주하는 시인도 함께 예로 들었지. 언젠가 앙드레 지드와 함께 파리의 어떤 카페에 앉아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 형이상학은 내게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도덕성은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하지만, 플라톤이나 그리스도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예술의 영역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만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말이지. 그것은 참신하면서도 심오한 일반화였지.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고전주의 예술과 낭만주의 예술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개성과 완벽성의 밀접한 결합 -그리스도로 하여금 삶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진정한 선구자가 되게 한- 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예술가의 그것처럼 강렬하고 불꽃같은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예술에서 유일한 창조의 비밀인 상상적 공감을 실현한 거야. 그리스도는 나환자의 나병과 맹인의 어둠, 쾌락만을 좇는 이들의 지독한 불행, 부자들의 기이한 빈곤을 모두 이해했어.  

 

- 당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내게 "영광의 좌대 위에 올라서 있지 않은 당신은 조금도 흥미롭지 않아. 다음에 당신이 다시 병들면 난 즉시 당신을 떠날 거야"라고 말했을 때, 그런 당신이 매슈 아널드가 '예수의 비밀'이라고 말한 것과 동떨어진 만큼이나 예술가의 진정한 기질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도 이젠 알 수 있을 거야. 설마 아직도 잘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두 사람 중 하나는 당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새벽과 한밤중에 즐거움이나 고통을 느끼기 위해 읽을 수 있는 경구를 새겨두고 싶다면 당신 집 담장에 이렇게 새겨두도록 해. 낮에는 태양이 금빛으로 비추고 밤에는 달이 은빛으로 물들일 수 있도록.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셰익스피어의 머리'라고 대답하면 돼.  

 

- 사실 그리스도의 자리는 시인들 옆이야. 그의 인류관人類觀은 바로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의미는 범신론자에게 하느님의 의미의 같아. 그리스도는 갈라진 인종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한 최초의 인물이었어.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신들과 인간들이 존재했지. 오직 그만이 삶의 저 높은 곳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거야. 그리고 신비로운 공감을 통해 자기 안에서 그 각각의 존재가 구현되는 것을 느끼며,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자신을 유일신의 아들이나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렀지. 그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로맨스가 언제나 호소했던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을 우리 안에 일깨워주었어. 나는 지금도 젊은 갈릴리의 농부가 자신의 양어깨 위에 온 세상의 짐을 짊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아. 이미 저질러진 악행들과 존재했던 고통들. 앞으로 저질러질 악행들과 존재할 고통들. 네로와 체사레 보르자, 알렉산드르 6세가 저지른 죄악들. 로마의 황제였고 태양의 사제였던 이의 악행들. 그 이름이 군대이며,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고통, 억압당하는 민족들.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 

 

- 그리스도는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을 상상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거야. 그래서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은 비록 그의 제단에 절을 하거나 그의 사제 앞에서 무릎 꿇지 않더라도 즉각적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추함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들이 겪는 고통의 아름다움이 자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 연민에 관한 엄격한 대가인 아이스킬로스나 단테의 작품 속에서도,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인간적인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도, 눈물의 베일 뒤에 세상의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삶이 한 송이 꽃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음을 노래하는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도, 비극적 효과의 장엄함과 하나로 합쳐진 페이소스의 순수함과 단순함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기의 마지막 막에 필적하거나 근접할 만한 것이 있을까? 

 

- 그 순간이 나를 구원한 것 같았어. 그때 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은 거야. 그 이후 -당신한테는 분명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더 행복해졌어. 

- 물론 내가 도달한 것은 영혼의 궁극적인 본질이었어. 나는 여러 면에서 내 영혼의 적이었던 거야. 하지만 난 내 영혼이 친구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우리는 영혼과 접촉하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지. 그리스도가 그래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야. 에머슨은 언젠가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위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그들의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인용일 뿐이지.  
 

- 그리스도는 지고한 개인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개인주의자야. 사람들은 19세기의 끔찍한 자선가들처럼 그를 평범한 자선가쯤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비과학적이고 감상적인 면을 지닌 이타주의자로 치부했지. 하지만 그는 이도 저도 아니었어. 물론 그는 가난한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 하층민들과 불행한 이들을 불쌍히 여겼지. 하지만 그는 부자들과 냉정한 향락주의자들,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자유를 낭비하는 사람들,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의 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훨씬 더 가엾게 여겼어. 그는 부와 쾌락을 빈곤과 고통보다 훨씬 더 큰 비극으로 간주했던 거야. 이타주의로 말하자면, 우리를 결정짓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소명의식이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수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보다 더 잘 알았던 이가 있을까? 

- 그의 교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확고하고 의식적인 목표로 삼고 살라는 것이 아니었어. 그것은 그가 설파하는 교리의 근본이 아니었지. 그가 "너의 적들을 용서하라"고 한 것은 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어. 사랑이 증오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지. 그가 보자마자 사랑한 젊은이에게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태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젊은이의 영혼, 부가 망치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염려했던 거야. 그리스도의 인생관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완성의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시인은 노래해야만 하고, 조각가는 청동으로만 생각하고, 화가는 자신의 기분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세상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산사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고, 수확기의 곡식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규칙적인 운행 속에서 달이 방패에서 낫으로 낫에서 방패로 그 모습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예술가와 하나인 거야.

-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도록 하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과 우리 자신의 삶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가리켜 보여주었지. 그런 식으로 그는 인간에게 거대한 타이탄과 같은 인성을 부여한 거야. 그가 이 세상에 온 뒤로 각각의 인간의 역사는 세상의 역사가 되었고, 될 수 있게 되었어. 물론 문화는 인간의 인성을 강화시켰고, 예술은 우리를 무수한 마음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주었지.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단테와 함께 유배를 떠나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남의 집 계단이 얼마나 가파른지를 알게 되는 거야. 그들은 잠시 동안 괴테의 평정심과 평온함을 가까이서 느끼며 어째서 보들레르가 신에게 이렇게 외쳤는지 아주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지.
"오! 주여! 저에게 주옵소서, 내 몸과 마음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힘과 용기를!" 

- 그들은 스스로 상처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부터 그의 사랑의 비밀을 캐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지.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적 삶을 바라보게 돼. 그들은 쇼팽의 녹턴을 들었고, 그리스의 유물들을 다루어보았으며, 어떤 죽은 여인 -머리카락이 섬세한 금실 같았고, 입술은 석류 같았던- 을 위한 어떤 죽은 남자의 뜨거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지. 예술적 기질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되어 있어. 언어나 색깔, 음악이나 대리석, 아이스킬로스 연극의 채색 가면, 시칠리아 양치기의 구멍 뚫린 갈대 다발 등 무엇을 통해서든 인간과 그의 메시지가 드러나야만 했던 거야. 

 

- 예술가는 오직 표현을 통해서만 삶을 상상할 수 있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겐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리스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는 우리를 경외감으로 가득 채우는 광범위하고도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목소리를 잃어버려 표현을 하지 못하는 고통의 세계를 자신의 왕국으로 삼아 스스로 그곳의 영원한 대변자가 되었지. 내가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 탄압 속에서 말을 잃어버려, '오직 신만이 그 침묵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그는 자신의 형제들로 선택했어. 그리고 장님에게는 눈이, 귀머거리에게는 귀가 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입술의 소리가 되어주고자 했지. 그의 소망은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향해 볼 수 있는 나팔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었어. 그리고 아름다움의 개념을 슬픔과 고통을 통해 실현하는 사람의 예술적 기질과 함께, 어떤 생각이든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되지 않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느끼고는 자신을 고통의 인간의 이미지로 구현한 거야. 

 

- 그리스의 신들은 사실 날렵하고 아름다운 하얀색과 선홍색의 손발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존재들이지. 아폴론 신의 볼록 나온 이마는 새벽에 언덕 위에 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해와 같고, 그의 발은 아침의 날개와도 같지. 하지만 아폴론 자신은 마르시아스에게 몹시 잔인했고, 니오베에게서 자식들을 빼앗아갔지? 아테나 여신의 강철 방패 같은 눈에서는 아라크네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어. 헤라 여신의 화려함과 공작새는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고귀함의 전부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신들의 아버지는 인간의 딸들을 지나치게 사랑했지.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깊은 영감을 주는 두 명의 신을 꼽자면, 종교에서는 올림포스 산의 신들에 속하지 않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예술에서는 인간 여인의 아들이며 탄생의 순간이 곧 그의 어머니의 죽음의 순간이 되어버린 디오니소스를 들 수 있을 거야.  

 

- 그러나 삶 자신은 가장 낮고 미천한 영역으로부터 페르세포네의 어머니나 세멜레의 아들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인물을 창조해 냈지. 나사렛의 목수의 작업실에서 신화나 전설에 의해 만들어진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인물. 기이하게도, 포도주의 신비주의적인 의미와 들판에 핀 백합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로 운명 지어진 존재가 탄생했던 거야. 키타이론 산이나 엔나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기 위해서 말이지.  

 

-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고통의 인간인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배척당했다. 그리고 우린 그 앞에서 얼굴을 가렸다"라고 얘기한 이사야의 노래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을 예고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 예언은 그 안에서 실현되었지. 이런 말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각각의 예술작품은 하나의 예언의 실현인 셈이야. 예술작품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하나의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 마찬가지로 각각의 인간은 하나의 예언의 실현이 되어야만 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신의 마음속에서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이상의 실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리스도는 그 유형을 발견해 고착화했어.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풍의 시인의 꿈은 오랜 세기가 흐른 끝에 예루살렘이나 바빌론에서 온 세상이 기다려왔던 그의 안에서 구현되었지.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인간의 얼굴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아들의 그것이 아니었다"라는 예언은 이사야가 새로운 이상을 알아보는 징후로 기록해 둔 것들이었어.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예술은, 예술에서의 진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람 앞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났지. 예술에서의 진실이란 결국,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내면을 표현하는 외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혼, 정신이 충만한 육체, 형식이 내용을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 내가 역사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샤르트르 대성당과 아서 왕의 전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 조토의 예술 그리고 단테의 <신곡>을 생겨나게 한 그리스도 고유의 르네상스가 자발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페트라르카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팔라디오 풍의 건축, 형식에 얽매인 프랑스 비극, 세인트폴 대성당, 포의 시, 그리고 어떤 영감과 자극을 주는 정신을 통해 내면에서 비롯되지 않고, 죽어버린 규칙에 의해 외부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한 따분한 고전적 르네상스에 의해 맥이 끊겨버렸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예술에서 낭만주의적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어. <로미오와 줄리엣>, <겨울 이야기>, 프로방스의 시, 늙은 선원의 노래, 무정한 미인, 그리고 채터턴의 <자비의 발라드>와 같은 작품들 속에서처럼 말이지. 

- 우리는 그에게 아주 다양한 것들과 사람들을 빚지고 있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보들레르의 <악의 꽃>, 러시아 소설에서 느껴지는 연민의 어조, 스테인드글라스와 태피스트리, 번존스와 모리스의 르네상스풍의 작품들, 베를렌과 베를렌의 시 등은 조토의 종탑, 랜슬롯과 기네비어 왕비, 탄호이저, 불안감이 느껴지는 낭만적인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첨두식 건축, 그리고 아이와 꽃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그에게 속한 것들이야. 아이와 꽃으로 말하자면, 이 두 소재는 고전예술에서는 아주 작은 자리만 차지했을 뿐이지. 그 속에서 성장하거나 놀 수 있을 만큼만. 하지만 아이와 꽃은 12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예술에 등장해 왔어. 아이와 꽃이 본래 그러하듯, 장난스럽게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면서 말이지. 봄이 올 때마다 꽃들은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어른들이 자신들을 찾는 데 지쳐 더 이상 찾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움을 느낄 때에만 햇빛에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고, 어린아이의 삶은 비와 태양이 수선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4월의 어느 날과도 같지. 

- 그리고 그리스도를 로맨스의 가슴 뛰게 하는 중심인물로 만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상상력이었어. 시적인 극과 발라드의 기이한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나사렛 예수는 전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었지. 이사야의 외침은 사실 예수가 세상에 온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달이 뜨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듯이. 그는 예언의 확언이면서 동시에 부정이었어. 그는 하나의 소망을 이룰 때마다 또 다른 소망을 하나씩 파괴했지. 베이컨은 모든 아름다움에는 '균형의 어떤 기이함'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그리스도는 정신으로부터 태어난 사람들, 즉 그 자신처럼 움직이는 힘인 사람들에 관해, 그들은 "임의로 불어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바람"과 같다고 말하지. 그게 바로 그가 예술가들에게 그토록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야. 그는 삶이 포함하는 모든 색깔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거든. 신비함, 기이함, 페이소스, 암시, 황홀경, 사랑. 그는 감탄할 줄 아는 기질을 가진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이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 그가 만약 '상상력이 충만한 존재'라면, 이 세상도 그의 상상과 똑같은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세상의 가장 큰 죄악들은 머릿속에서 저질러지며, 우리 머릿속에서 모든 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했지. 이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잖아. 눈과 귀는 감각적인 느낌들을 전달하는, 적절하거나 부적절한 수단일 뿐이야. 양귀비꽃이 붉은색이고, 사과가 향기로우며, 종달새가 노래하는 것은 모두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말이지. 

- 최근에 나는 그리스도에 관한 산문시 네 편을 꽤 열심히 공부했어. 크리스마스에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거든. 나는 매일 아침 내 감방을 청소하고 양철로 된 식판을 윤나게 닦은 다음 복음서를 조금씩 읽어나갔어. 아무 데나 펴서 열두 절씩을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 좋은 방식이었지. 당신도 그렇게 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삶을 살아가는 당신한테도 분명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리스어도 아주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그동안 성서 속에서 걸핏하면 되풀이되는 끝없는 반복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복음서의 순박함 naiveté과 신선함, 단순하고도 낭만적인 매력을 망쳐놓았던 거야. 우린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너무나도 자주, 너무나 잘못된 방식으로 접해왔던 거지. 모든 반복은 반정신적인 것이거든. 그리스어 복음서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비좁고 어두운 집에서 나와 백합이 피어 있는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아.

- 더구나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가 사용한 실제의 언어 ipsissima verba를 읽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기쁨이 두 배가 돼. 사람들은 예수가 아람어로 이야기했다고 추측해 왔지. 심지어 르낭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갈릴리의 농부들이 오늘날의 아일랜드 농부들처럼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과, 그리스어는 팔레스타인 전역과 심지어 동양 전역에서까지 소통을 위한 일상적인 언어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는 그리스도가 했던 말씀들을 오직 번역의 번역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못마땅했어. 그래서 그리스어 성서를 읽고 그의 대화와 그가 한 말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나를 몹시 기쁘게 했지. 카르미데스도 그의 말을 들었을 수 있고, 소크라테스도 그와 토론을 했으며, 플라톤이 그를 이해했을 수도 있고, 그가 정말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했으며, 그가 일하지도 실을 잣지도 않는 들판의 백합들을 떠올리며 한 말이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였으며, 그가 "내 삶은 완성되었고, 충만하고 완벽해졌다"고 외쳤을 때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정확히 성 요한이 우리에게 전한 대로, "다 이루었다"였던 거야. 

- 복음서 -특히 성 요한이 쓴 것이나, 그의 이름과 옷을 빌린 초기 그노시스파의 것- 를 읽는 동안 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삶의 근본으로서의 상상력이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을 보았어. 또한 그리스도에게 상상력은 단지 사랑의 한 형태였으며, 그에게 사랑은 완전한 의미의 주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6주 전쯤 난 의사에게서 교도소의 일상적인 식사인 검은색이나 갈색의 거친 빵 대신 흰 빵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정말 기막히게 맛있었지.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맨 빵도 누구에게나 아주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어. 내게도 그랬지. 그래서 난 매번 식사를 마칠 때마다 내 양철 식판 위에 남아 있는 빵 부스러기나, 각자의 탁자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식탁보처럼 사용하는 거친 수건 위에 떨어졌을 부스러기를 꼼꼼히 주워 먹곤 했어. 여전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난 이제 충분한 양의 음식을 제공받고 있거든- 단지 내게 주어진 그 무엇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야. 사랑을 할 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 그는 충분히 죽을 만한 가치가 있었을 거야. 그의 정의는 오로지 시적인 정의를 뜻해. 정의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처럼. 걸인은 불행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천국에 가야 했던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 못했거든. 같은 포도밭에서 시원한 저녁에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뙤약볕에서 하루종일 고생한 사람이 똑같은 보수를 받기도 하지.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 그건 아마도 그 누구도 어떤 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일 거야. 아니면 그들이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사물처럼 여기면서 모두를 똑같이 취급하는 따분하고 생기 없는 기계적인 시스템과, 그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어. 그에게는 법칙이란 것은 없었어. 오직 예외만이 있을 뿐이었지. 

- 낭만적인 예술의 근본이 되는 기조는 실제 삶에도 꼭 들어맞는 원칙이었어. 그에게 그 밖의 다른 원칙이란 없었어.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다 붙잡힌 여자를 그에게 데려와 법이 정한 그녀의 형벌을 말해주고 어떻게 처분할지 묻자, 그는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썼어. 그리고 그들이 거듭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자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어 말했지. "너희 중에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런 말을 한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야.

- 시적인 심성을 지닌 모든 이들처럼 그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했어. 그는 무지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언제나 위대한 생각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을 수가 ...

 

- 우리는 교리라는 것을 단지 손쉽고 어리석은 묵인으로 여길 뿐이지만,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손 안에서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무시무시한 독재의 수단이었던 거야. 그리스도는 그것을 몰아내버렸지. 그는 오직 정신만이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 그는 그들이 법전과 예언서를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강렬한 즐거움을 느꼈지. 그들이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를 바치듯이, 매일매일을 판에 박힌 강제적인 의무의 연속으로 나누는 것에 반기를 들며 순간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의 엄청난 중요성을 설파했고 말이지. 

- 그리스도가 죄악으로부터 구해낸 사람들은 그들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이었어.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보자 그녀의 일곱 연인이 그녀에게 준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지치고 더러운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그 한순간 덕분으로 천국의 새하얀 장미 꽃잎들 사이에서 룻과 베아트리체와 함께 영원히 자리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리스도가 가볍게 경고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매 순간이 아름다워야 하고, 영혼은 언제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언제나 연인의 목소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속물주의는 간단히 말해 상상력에 의해 일깨워지지 않은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일 뿐이야. 그리스도는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 속에서 빛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았어. 상상력은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이지. 세상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세상은 상상력을 이해하지 못해. 또한 상상력은 단지 사랑의 발현일 뿐이며,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 짓는 것은 바로 사랑과 사랑을 하는 능력인 거야.

-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가 가장 낭만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죄인을 다룰 때야. 세상은 신적인 완성에 가장 근접하는 존재로서의 성인을 언제나 사랑했지. 그리스도는 그의 안에 내재된 어떤 신적인 본능으로, 완전한 인간에 가장 근접한 존재로서의 죄인을 언제나 사랑했던 것 같아. 그의 첫 번째 바람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게 아니었어. 그의 첫 번째 바람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었던 것처럼. 그의 목적은 흥미로운 도둑을 따분한 정직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게 아니었어. 그는 재소자 구호 단체와 그런 종류의 현대식 운동에는 무관심했을 거야. 그는 세리를 바리새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결코 대단한 성취로 간주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세상에서는 아직 이해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죄악과 고통을 그 자체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자 완전함의 방식들로 여겼지. 그것은 매우 위험하게 들리는 생각이고, 실제로도 그래. 모든 위대한 생각은 위험한 법이거든.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리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나 역시 이것이 진정한 교리임을 의심하지 않고 말이지.

- 물론 죄인은 뉘우쳐야만 해. 그런데 왜 그래야 할까? 그러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 뉘우침의 순간은 입문의 순간이야. 아니,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해. 그리스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 그들은 종종 금언이나 경구 등에서 "신들조차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곤 했지. 하지만 그리스도는 가장 비천한 죄인도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보여주었어. 만약 그리스도가 그에 관해 질문을 받았더라면, 확신하건대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야. 방탕한 아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 순간 그는 창녀들과 어울리며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고, 돼지를 치면서 그것들이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자 했던 사실을 그의 삶에서 일어난 아름답고 성스러운 사건들로 변화시켰다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일 수도 있어. 그런 것을 이해하려면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감옥에 가는 것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거고 말이지.

- 그리스도에게는 정말 유일한 무언가가 있어. 물론, 진정한 새벽이 오기 전에 거짓 새벽이 먼저 밝아오고, 겨울날에 느닷없이 햇빛이 가득 비치면서 현명한 크로커스를 헷갈리게 해 적절한 때가 되기 전에 금빛을 낭비하게 하고, 어떤 멍청한 새가 자기 짝을 불러 황량한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짓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이전에도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긴 했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우린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불행한 것은, 그리스도 이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단,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는 하나의 예외라고 볼 수 있지. 신은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시인의 영혼을 주었고, 그 자신은 아주 젊었을 때 이미 신비주의적인 결혼에서 가난을 그의 신부로 삼았지. 그리고 시인의 영혼과 걸인의 육체로써 완전함으로 가는 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어. 그는 그리스도를 이해했고,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었지. 성 프란체스코의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 본받기 Imitatio Christi -한 편의 시나 다름없는 그의 삶에 비하면 그 이름을 딴 책은 하찮은 산문에 불과하지- 라는 것을 알기 위해 리베르 콘포르미타툼 Liber Conformitatum까지 읽을 필요도 없는 거야. 사실 그리스도의 매력은 무엇보다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볼 수 있어. 그는 그 자신이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아. 그는 우리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그와 마주하면 우린 무언가가 되지. 그리고 우리 각자는 언젠가는 그와 마주하도록 예정되어 있어.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그리스도와 나란히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걷게 되어 있는 거야.   

 

- 내가 여기서 나간 후에 한 친구가 파티를 열어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 해도 난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자유와 책과 꽃과 달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이제 파티 같은 것은 내 몫이 아니야. 그런 건 이미 신물이 날 만큼 해본 터라 더 이상 아무런 흥미도 없어. 이제 내겐 그런 식의 삶은 완전히 끝났어. 아주 다행스럽게도 말이지. 하지만 여기서 나간 후에 어떤 친구가 슬픔에 처했는데 그것을 나와 함께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그때는 정말 더없이 씁쓸하게 느껴질 것 같아. 만약 그 친구가 내게 애도의 집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거야. 내가 함께 나눌 자격이 있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만약 그가 나를 그러기에 적절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눈물 흘릴 자격이 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나는 그 사실을 가장 사무치는 수치이자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게 가해진 불명예로 느끼게 될 거야.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고통을 나눌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 두 가지의 경이로움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신적인 것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 누구보다 신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는 거라고 볼 수 있어. 

- 어쩌면 내 삶과 마찬가지로 내 예술 속에서도 훨씬 더 일관성 있는 열정과, 충동의 단순함과 명쾌함을 보여주는 한층 더 진중한 분위기가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현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폭이 아니라 강렬함을 추구하는 것이지. 우리는 예술에서 더 이상 어떤 전형에 관심을 두지 않아. 우린 예외를 다루어야만 해.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내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 예술은 모방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하지만 무언가가 내 작품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해. 더욱 세심하게 조화를 이룬 언어의 배합, 더욱 풍부해진 리듬, 한층 더 흥미로운 색채의 효과, 더욱 단순해진 구성 등, 어쨌거나 어떤 미학적 특성이 드러나야만 하는 거야.  

- 단테의 가장 무시무시한 문장과 가장 타키투스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마르시아스가 "그 수족의 칼집에서 뽑혀 갈가리 찢겼을 때" 그는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었다고 그리스인들이 말했지. 아폴론이 승리자였던 거야. 수금이 피리를 이긴 거지. 하지만 어쩌면 그리스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몰라. 나는 수많은 현대예술 속에서도 마르시아스의 비명을 들을 수 있어. 그는 보들레르의 작품 속에서는 씁쓸하게, 라마르틴의 작품 속에서는 감미롭고 구슬프게, 베를렌의 시 속에서는 신비롭게 표현되고 있고, 쇼팽 음악의 늦춰진 해결(解诀)에도 존재하지. 또한 번존스의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의 얼굴들에서 어김없이 느껴지는 불만족 속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어. 심지어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명백한 어조로 '달콤하고 설득력 있는 수금의 승리'와 '유명한 마지막 승리'를 들려준 칼리클레스의 노래를 쓴 매슈 아널드조차도, 그의 시구를 지배하는 회의와 절망이 느껴지는 불안한 표현 속에서 마르시아스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지. 그가 차례로 답습했던 괴테와 워즈워스조차도 그를 치유해주지 못했어. 그리고 그가 '티르시스'를 애도하고, '학생 집시'를 노래하고자 했을 때, 그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것은 피리였지.    

 

- 손에는 수갑을 찬 채 클래펌 분기점의 중앙 플랫폼에서 2시부터 2시 반까지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지. 난 어떤 예고도 듣지 못하고 교도소 병동에서 끌려 나왔던 거야. 나는 그들의 눈에 더없이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였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웃었어. 기차가 새로 도착할 때마다 구경꾼의 수는 늘어갔지. 그들은 나를 보고 재미있다며 박장대소를 했어. 그건 물론 내가 누군지 알기 전이었지.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게 되자마자 더욱더 크게 웃어댔어. 나는 내게 야유를 보내는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잿빛 11월의 빗속에 30분간 서 있었지. 그 일을 겪고 난 뒤 나는 1년간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시간만큼 울었어. 이런 게 당신에게는 별로 비극적인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은 매일 겪는 일상의 한 부분이지. 감옥에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행복한 날이 아니라, 마음이 돌처럼 굳은 날이야.  
 
- 그런데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보다 나를 비웃었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어. 물론 그들이 날 봤을 때 나는 영광의 좌대위에 올라서 있지 않았지. 나는 공시대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오직 상상력이 지극히 부족한 사람들만이 좌대 위에 올라서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법이지. 좌대는 아주 비현실적인 것일 수 있어. 하지만 공시대는 무시무시한 현실이지. 그들은 또한 고통을 좀 더 잘 해석하는 법을 알아야만 했어. 난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다고 말했지. 그런데 그보다는 고통 뒤에는 언제나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현명했을 거야.

 

- 고통 속에 있는 영혼을 조롱하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야.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삶은 추할 수밖에 없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묘하게 단순한 경제학적 논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는 것만큼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어떤 대상의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 연민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감정 말고 달리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 당신한테 내가 이곳으로 어떻게 이송되었는지 이야기한 것은, 내가 치르는 형벌 속에서 씁쓸함과 절망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이끌어낸다는 게 나로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당신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야. 그렇더라도 난 그렇게 해야만 하고, 그러다 보면 때때로 순종과 체념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지. 단 하나의 어린 새싹 속에도 충만한 봄이 숨어 있을 수 있고, 종달새가 땅 가까이 지은 나지막한 둥지는 수많은 장밋빛 붉은 새벽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예고하는 즐거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게도 아직 삶의 어떤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면, 그건 굴복과 실추 그리고 굴욕의 어떤 순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나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고,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 자신을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게 해야만 해. 
 
- 예전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며 나를 비난하곤 했지.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에 적게 요구해야만 해. 사실, 나의 몰락은 삶에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요구한 데서 비롯된 거야.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수치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고 경멸할 만한 행위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며 마지못해 사회에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는 거야.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잘못된 것일 수 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 같은 성격과 면모의 사람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 물론 내가 사회의 힘을 작동시키자마자, 사회는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지. "당신은 지금까지 나의 법들을 무시하며 살아와놓고, 이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법들에 호소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법들이 최대한으로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당신이 법에 호소를 했으니, 그 법을 따라야만 하오." 그 결과, 나는 지금 감옥에 있지. 그리고 경찰재판소부터 시작해서 세 번의 재판을 거치는 동안, 당신 아버지가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부산스럽게 드나드는 것을 -마치 마부 같은 걸음걸이와 옷차림, 휘어진 다리, 떨리는 손, 축 늘어진 아랫입술, 모자라 보이는 동물적인 웃음 등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거나 기억되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듯- 지켜보면서 내가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생각하며 씁쓸해하곤 했지. 심지어 그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거나 눈에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난 그의 존재를 느끼곤 했어. 그리고 때로 커다란 법정의 텅 빈 음울한 벽과 허공에 원숭이를 닮은 수많은 가면들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처럼 비루한 수단으로 이토록 비천하게 추락하진 않았을 거야. 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어딘가에서 "사람은 자신의 적들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지. 그때 난 나 자신을 천민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천민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던 거야.

- 사회에 도움을 청하라고 내게 강요하고 나를 몰아붙인 것,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을 그토록 경멸하고, 당신에게 굴복한 나 자신 또한 경멸하게 된 이유 중 하나야. 당신이 나를 예술가로서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어. 그건 기질적인 것이니까. 당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나를 개인주의자로서는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었어. 그건 특별한 교양이 필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게다가 당신은 속물주의를 철저히 배척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절멸시켰던 삶 속에 그것의 요소를 끌어들였지. 삶에서 속물주의적인 요소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어부, 양치기, 농부, 소작농 등등의 매력적인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야. 속물은 사회의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힘들을 지지하고 돕는 사람, 그리고 인간이나 어떤 운동 속에서 역동적인 힘을 만날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 행실이 좋지 않은 젊은이들을 초대해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 내게 맹렬한 비난을 퍼붓곤 했지. 하지만 삶의 예술가로서 그들에게 다가가 살펴본 바 그들은 유쾌한 암시와 자극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었어.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마치 검은 표범들과 주연을 벌이는 것'과도 같았지. 거기서 느껴지는 흥분의 반은 그에 포함된 위험에서 오는 것이었어. 그럴 때 나는 마치 뱀 부리는 사람이 알록달록한 천이나 갈대 바구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코브라를 꾀어내어, 그의 지시에 따라 뱀이 머리 덮개를 펼치고 개울 속에서 평화롭게 흔들리는 물풀처럼 앞뒤로 흐느적거릴 때 그가 느낄 법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했지. 그들은 내게 가장 빛나는 금빛 뱀들이었어. 그들이 지닌 독은 그들의 완벽성의 일부였지. 당시 나는 당신의 피리 소리와 당신 아버지의 돈 때문에 그들이 나를 공격하게 되리라는 걸 알지 못했지. 나는 그들과 어울렸던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 그들은 정말 엄청나게 흥미로운 존재들이었거든.

- 내가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끌어들인 역겨운 속물적 분위기야. 나는 예술가로서 에어리얼과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당신은 나를 캘리맨과 싸우게 했어.

 

- 어떤 기고문도 -편지와 함께든 아니든- 발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내 뜻을 로버트 셰라드가 당신에게 전해주었을 때, 당신은 그 문제에서 내 뜻을 확인해 준 데 대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했어. 또한 당신이 이미 준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내게 가하는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일이 없게 해 준 것에 대해서도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추락한 사람'에 대한 '페어플레이'를 이야기하는 오만하고 속물적인 편지는 영국 신문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당신은 기억해야 해. 그건 예술가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관련한, 영국 저널리즘의 오래된 전통을 잇는 것이니까.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나는 세인의 야유를, 당신은 경멸을 한 몸에 받게 될 거야. 나는 그 목적과 성향, 접근 방식 등등을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나에 관한 그 어떤 기고문도 싣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예술에서 좋은 의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형편없는 예술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 만약 지난 2년간 가혹한 옥고를 치르는 동안 내게 의지할 친구라곤 오직 당신밖에 없었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을지,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단 한 번이라도?  

 

- 내가 당신이라면, 누군가가 가식적인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걸 원치 않았을 거야. 누구라도 자신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줘야 할 이유는 없어. 세상은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달라지지. 예전에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 -1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 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그는 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우린 여전히 친구로 남았어. 나는 가식으로 그의 우정을 구하지 않았던 거야. 당신에게도 말했듯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운 일이지.  

- 내 마지막 재판 때 피고석에 앉아 록우드가 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말을 듣고 있던 것이 기억나. 마치 타키투스의 발췌문이나 단테스 한 구절, 또는 로마의 교황들을 비난하는 사보나롤라의 연설을 듣는 것 같았지. 나는 내가 듣는 것에 진저리가 쳐지며 구토가 날 것만 같았어.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거야. "나에 관한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게 나였다면, 그럼 얼마나 근사할까!"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을 말하는가'인 거야. 확신하건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순간은 흙먼지 속에 무릎을 꿇고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살아오는 동안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는 순간이야. 당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직접 당신 어머니에게 자신의 삶의 일부분이라도 제대로 알게 한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 당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그것을 역사의 커다란 무대에서 희비극으로 상연할 것을 고집했다는 거야. 온 세상 사람들을 관객으로 삼고, 나를 경멸스러운 시합의 승리자에게 주는 상품으로 내걸고 말이지.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증오하고, 당신이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사실은 영국 대중에게는 아무런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어. 그런 감정싸움은 영국인들의 가정사에는 아주 흔한 일이고, 그것이 특징짓는 장소, 즉 가정에 국한되어야만 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거야. 그것을 다른 데로 옮겨놓는 것은 위법 행위나 마찬가지야. 가정사는 거리에서 흔들어대는 붉은 깃발이나, 지붕 꼭대기에서 목이 쉬도록 불어대는 뿔피리처럼 다뤄져서는 안 돼. 당신은 가정사를 그 고유의 영역 밖으로 끌어냈어. 당신 자신을 당신 고유의 영역 밖으로 끌어낸 것처럼.  

- 자기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환경만 바꿀 뿐 본성을 바꿀 수는 없어. 자신들이 침범하는 영역에 걸맞은 생각이나 열정을 획득할 수 없는 거지.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감정적인 힘들은, 내가 <의도들> 어딘가에서 말한 것처럼, 그 범위와 지속 기간에서 물리적 에너지의 힘들 만큼 제한적이야. 딱 그만큼만 담게 되어 있는 작은 컵은 꼭 그만큼밖엔 담지 못하지. 그 이상은 절대 담지 못해. 아무리 커다란 자줏빛 통에 부르고뉴 포도주를 철철 넘치도록 가득 채우고, 스페인의 돌 많은 포도밭에서 딴 포도를 모아놓은 통 속에서 사람들이 무릎까지 빠지면서 포도를 밟아대더라도 말이지.  

- 엄청난 비극의 원인이나 계기가 된 사람들이 비극적인 분위기와 어울리는 감정들을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 더 흔한 착각도 없는 것 같아. 그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도 없다는 말이지. '불타는 셔츠'를 입은 순교자는 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지. 하지만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뭇단을 쌓거나, 불이 더 잘 붙게 하려고 묶여 있는 장작들을 느슨하게 풀어놓는 사람에게는 그 장면이, 푸주한이 황소를 도살하거나, 숯꾼이 숲 속에서 나무를 베거나, 낫으로 풀을 깎는 사람이 꽃을 자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거라고. 위대한 열정들은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위대한 사건들은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야. 

- 나는 모든 극들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로젠크랜츠와 길든스턴의 묘사보다 예술적 관점에서 더 훌륭하고, 관찰의 섬세함에서 더 암시적인 것을 본 적이 없어. 그들은 둘 다 햄릿의 대학 친구들로 오랫동안 그의 동반자였지. 그들은 함께 즐거웠던 날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어. 극 중에서 그들이 그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그와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있었어. 죽은 자들이 무장을 한 채 무덤에서 나와 그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너무나 하잘것없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지. 몽상가인 그가 행동하도록 부름을 받은 거야. 그는 시인의 심성을 지녔는데, 그가 아주 잘 아는 이상적인 본질 속의 삶이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구체적인 현실 속의 삶과 원인과 결과로 뒤얽힌 하찮고 복잡한 것들과 드잡이 하도록 요구받은 거지.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그의 광기는 단지 광기를 흉내내기 위한 것이지.  

 

- 존재 자체를 나의 하루하루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내 삶 전체를 빨아들이는 데 성공한 다음, 그 삶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 거야. 그런데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러는 것은 사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어. 

- 어린아이에게 그의 낮은 정신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근사하거나, 잠이 덜 깬 눈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장난감을 쥐여주면, 의지가 있는 아이라면 그것을 부서뜨릴 것이고, 무심한 아이라면 그것을 버려두고 자신의 놀이 친구들을 만나러 가겠지. 당신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던 거야. 당신은 내 삶을 움켜쥐고는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몰랐지. 당신은 절대 알 수가 없었어. 내 삶은 당신이 쥐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근사한 것이었으니까. 당신은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당신의 놀이 친구들에게 돌아갔어야 했어.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신은 고집스러웠고, 그래서 그것을 부서뜨려버렸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 속에 감춰진 궁극적인 비밀인지도 모르겠어. 본래 비밀이란 언제나 그 구체적인 발현들보다 훨씬 작은 법이거든. 원자의 위치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당신을 전혀 봐주지 않은 것만큼 나 자신도 냉정하게 평가하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자 해. 당신과의 만남이 애초부터 위험한 것이긴 했지만, 그 만남이 어떤 특별한 순간에 일어남으로써 내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 거라고. 그때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씨를 뿌리는 행위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곧 수확을 하는 것과 같은 삶의 시기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지. 

 

- 그런 것보다는 빈곤 앞에서의 내 고통과 수지의 감정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했던 거야. 사실상 나의 파산을 가능하게 만들고 내 첫 번째 소송을 진행하도록 내게 강요함으로써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고, 정확히 그가 원했던 대로 움직였지. 혼자 아무런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는 당신에게서 -물론 당신은 그런 끔찍한 역할을 맡을 생각이 없었겠지만- 언제나 그의 가장 든든한 동맹군을 발견했던 거야. 

- 모어 에디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여름 당신이 '내가 당신을 위해 쓴 것을 조금이라도' 내게 갚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전해주더군. 그에게 보낸 답장에서 말했듯이, 불행하게도 내가 당신을 위해 허비한 것은 나의 예술과 나의 삶, 내 이름, 역사 속의 내 위치, 그 모든 것이었어. 만약 당신 가족이 이 세상의 멋진 것들이나, 세상이 그렇게 여기는 것들, 천재성, 아름다움, 재물, 높은 사회적 지위 등등을 모두 갖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내 발밑에 갖다 놓는다고 해도 내게서 앗아간 것 중에서 가장 하찮은 것의 10분의 1, 또는 내가 흘린 눈물의 한 방울이라도 내게 갚아줄 수는 없어. 그렇지만 누구든지 그가 하는 모든 것은 그 대가를 지불받아야 하지. 그리고 그건 파산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만 해.

 

- 당신은 파산이 자신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됨으로써 '채권자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전혀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지. 당신이 즐겨 쓰는 표현을 다시 빌려 말하자면, 파산은 어떤 사람의 채권자들이 그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고, 법의 힘을 빌려 그의 모든 자산을 몰수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빛을 남김없이 깊게 하는 수단이지. 그래도 그가 끝내 빚을 갚지 못하면, 그를 무일푼이 되게 해서 하찮은 걸인처럼 포치 아래에서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두려움을 느끼며 -적어도 영국에서는 그래- 손을 내밀어 구걸하게 만드는 게 파산이야. 법은 내게서 내가 가진 모든 것, 장서, 가구, 그림, 출간된 책들과 내 희곡에 대한 저작권, 사실상 <행복한 왕자>와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부터 내 집의 계단 카펫과 신발닦개, 그리고 심지어 내가 앞으로 받게 될 것들까지 모든 것을 빼앗아간 거야. 예를 들면, 결혼 계약에서의 내 몫까지 몽땅 팔려나갔지. 다행히 난 그것을 친구들을 통해 되살 수 있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내 아내가 죽게 되면, 나의 두 아이들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처럼 거지꼴이 되고 말 거야. 아마 다음번에는 내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우리 아일랜드의 땅에서 나오는 소득마저 빼앗기게 될 테지. 그 땅마저 팔려나간다면 난 정말로 마음이 아프겠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겠지.

- 심지어 내가 가진 모든 것과 앞으로 가지게 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절망적인 파산자로 낙인찍힌 채 복권이 되더라도 난 여전히 내 빚을 갚아야만 해. 맑은 거북이 수프, 시칠리아의 구겨진 포도나무 잎에 싼 오르톨랑 요리, 짙은 호박빛의, 거의 호박향이 나는 샴페인을 곁들인 사보이에서의 저녁식사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도주가 다고네 1880년 산이었지, 아마? 이 모든 것도 여전히 갚아야만 하는 빛으로 남아 있어. 윌리스에서 먹은 야참들, 우리를 위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던 특급 포도주 페리에주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직접 가져오는 기막히게 맛있는 파테, 인생에서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진정한 미식가에 의해 그 향이 더 잘 음미될 수 있도록 언제나 커다란 종 모양의 잔 바닥에 담아 내오던 황홀한 고급 샴페인. 이 모든 것도 갚지 않고 놔둘 수는 없어. 마치 부정직한 고객이 남긴 수치스러운 빚처럼 말이지. 심지어 나의 두 번째 희극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디자인해 헨리 루이스에게 주문했던, 당신을 위한 특별한 작은 선물인 앙증맞은 커프스단추 -하트 모양의 진주모빛 월장석 네 개가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번갈아 둥글게 박힌 원 안에 세팅된- 때문에 진 빚도, 그 빚마저도 갚아야만 해. 당신이 그 선물을 몇 달 후 하찮은 값에 팔아버린 걸로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 내가 당신에게 준 선물을 보석상이 자신의 돈으로 지불하게 놔둘 수는 없어. 당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했든 말이지. 그러니까, 복권이 되더라도 내가 갚아야 할 빚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당신도 이젠 알겠지. 

- 그리고 파산한 사람에게 진실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에도 해당되는 진실임을 알아야 해. 사람은 각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야. 당신조차도 -모든 의무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고 싶어 하는 바람과,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조달받고자 하는 집요함과, 당신에게서 애정이나 관심 또는 감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신조차도 언젠가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속죄를 하려는 어떤 노력이라도 해봐야만 할 거야. 설사 그런 것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할지라도 말이지. 당신이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건 당신이 받는 벌의 일부가 될 거야. 당신은 결코 그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거나 씩 웃어 보이고는 다른 새 친구나 새로운 파티를 찾아갈 수도 없어. 당신 잘못으로 내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단지 때때로 담배와 리큐어와 함께 상에 올리는 감상적인 추억이나, 시골 주막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 같은 쾌락에 빠진 현대적 삶의 그림 배경쯤으로 여길 수는 없는 거야. 이 모든 것은 잠깐 동안은 새로운 소스나 신선한 포도주 같은 매력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파티에서 먹고 남은 음식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게 마련이고, 술병에 남은 찌꺼기는 그 맛이 씁쓸하지. 오늘이나 내일, 또는 언젠가 당신은 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해. 안 그러면 당신은 그냥 이대로 죽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정말 얼마나 보잘것없고, 빈약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되겠느냐고. 

- 나는 모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되도록 빨리 어떤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좋을지 이야기했어. 그가 당신한테 그 이야기를 해줄 거야. 그런데 내가 말한 관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당신의 상상력을 계발해야 해. 상상력은 사물과 사람을 이상적이고도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자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만약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해. 

- 나는 내 과거를 똑바로 마주해야만 했어. 당신도 당신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해. 가만히 앉아서 당신 과거를 곰곰 되새겨 봐.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야.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고. 그 문제에 관해 당신 형하고 이야기를 해봐. 그런 얘기를 하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은 퍼시니까. 그로 하여금 이 편지를 읽고 우리 우정과 관련한 모든 상황을 알게 하도록 해. 그가 이 모든 것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거야. 우리가 진작 그에게 진실을 말했더라면, 나의 고통과 불명예가 얼마나 많이 덜어졌을지! 

 

- 만약 이로 인해 당신이 혼란을 느낀다면, 그건 내게는 바닥까지 경험해야 하는 가장 가혹한 수치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

- 당신하고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형기를 마치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와 관련한 조건과 상황 그리고 장소에 관한 거야. 당신이 작년 초여름에 로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에서, 당신이 내 편지들과 선물들 -적어도 그중 아직 남은 것들을- 두 묶음으로 싸서 내게 개인적으로 전달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물론 당신으로서는 어떻게든 그것들을 처분해야 했겠지. 당신은 내가 왜 당신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편지들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째서 내가 당신한테 그토록 아름다운 선물들을 주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은 내 선물들이 전당포에 저당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내 편지들이 신문에 공개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거야. 게다가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삶의 한순간, 어떤 이유로든 당신은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우정에 속하는 것들이야. 당신은 이제 당신이 내 모든 삶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날들을 놀라움과 함께 되돌아봐야만 해. 나 역시 그날들을 놀라움과 함께 돌아보고 있어. 당신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말이지. 

- 만약 모든 게 예정대로 진행되어 5월 말경 출소한다면, 나는 그 즉시 로비와 모어 애디와 함께 외국의 어느 조그만 바닷가로 떠나고 싶어. 에우리피데스가 이피게네이아에 관해 이야기한 어느 극에서 그랬듯이, 바다가 세상의 더러움과 상처를 깨끗이 씻어줄 테니까.

- 이상하게도 나는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거대하고 원초적인 것들에 대한 동경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지. 이를테면 바다 같은 거 말이야. 내게 바다는 대지처럼 어머니 같은 존재야. 우리 모두는 자연을 지나치게 많이 바라보지만, 자연과 함께 사는 시간은 너무도 적지. 나는 그리스인들이 아주 건전하고 현명한 삶의 방식을 지향했다고 생각해. 그들은 결코 석양에 관해 얘기하지도 않았고, 풀밭 위의 그림자가 정말 연보랏빛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하지도 않았어. 그들은 바다는 헤엄치는 사람을 위해, 모래는 달리는 사람의 발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들은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 때문에 나무를 사랑했고, 정오의 침묵 때문에 숲을 사랑했어. 포도원 원정은 새로 돋아난 싹을 굽어볼 때 햇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담쟁이덩굴을 머리에 둘렀고, 그리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전형적인 두 인물인 예술가와 운동선수로 말하자면, 그들은 씁쓸한 월계수와 야생 파슬리의 잎들로 화관을 만들어 썼지. 그런 용도가 아니라면 그것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을 거야.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실용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처하지만 실은 그 무엇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지. 물은 깨끗이 씻겨주고, 불은 정화해 주며, 대지는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거야. 그 결과, 우리의 예술은 달의 성질을 띠며 그림자들과 함께 놀지. 그리스의 예술은 해의 성질을 띠며 사물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어. 난 자연력은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 그래서 자연으로 가서 그 속에서 살고 싶어. 물론 나처럼 현대적인 사람, 내 시대의 자녀 enfantde mon siècle인 나로서는 그런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행복을 느끼지만, 내가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날, 뜰에 금작화와 라일락이 만발할 거라는 생각과, 바람이 불안정한 아름다움으로 금작화의 금빛을 물결치게 하고, 깃털 장식 같은 라일락의 창백한 자줏빛을 흔들리게 해 마치 아라비아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뻐서 몸이 떨려오거든. 린네는 처음으로 영국 고지대의 기다란 황야가 평범한 골담초의 향기 나는 황갈색으로 노랗게 물든 것을 보고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지. 그리고 나는 꽃들이 욕망의 일부분인 나로서는 장미의 꽃잎 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나는 소년 시절부터 늘 그래왔어. 꽃받침 속에 감춰진 색깔이나 조개의 곡선 하나에도 사물의 영혼과의 미묘한 공감에 의해 내 기질이 반응하지 않은 적이 없거든. 난 언제나 고티에처럼 '가시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인 사람들' 중 하나였던 거야.

- 하지만 지금 난 이 모든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럽긴 하지만- 뒤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 채색된 형태와 모습은 그 정신이 발현되는 방식들일 뿐이야. 나는 그 정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 나는 이제 인간과 사물의 명료한 표현에는 신물이 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에서의 신비로움, 삶에서의 신비로움, 자연에서의 신비로움이야. 그리고 어쩌면 음악의 위대한 교향곡과 고통이라는 입문의식, 그리고 바다 깊숙한 곳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어디서건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해. 

-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는 나를 위한 장소를 허락하지도 않고, 내게 내줄 수 있는 장소도 없어.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지. 부정하거나 공정한 사람 위로 똑같이 달콤한 비를 내려주는 자연은 바위들 사이에 내가 숨을 수 있는 틈과, 정적 속에서 방해받지 않고 울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계곡을 마련해 놓을 거야. 그리고 밤하늘에 별들을 걸어놓아 내가 어둠 속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멀리까지 갈 수 있게 해 주고, 내 발자국들 위로 바람을 불게 해 아무도 나를 쫓아와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또한 자연은 넘치는 물로 나를 깨끗이 씻겨주고, 씁쓸한 풀들로 내게 건강을 되돌려줄 거야. 

- 우선 당신은 이름부터 바꿔야 할 거야. 당신이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하찮은 별칭 -사실 그 때문에 당신 이름이 마치 꽃 이름처럼 들리기도 했지- 을 포기해야만 해. 한때 명성의 입속에서 그토록 감미롭게 들렸던 내 이름도 나 스스로 버려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말 얼마나 편협하고 비열하며, 자신의 의무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고 있는가 말이야!  

- 나는 우리의 만남이,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뒤의 당신과 나의 만남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하는 만남이 되기를 바라. 과거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지. 완성된 예술과 폭넓은 교양의 골이 우리를 갈라놓았던 거야. 지금 우리 사이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존재하지. 고통의 골이 바로 그거야. 그러나 겸양을 아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어. 그리고 사랑을 아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쉬워지지.

- 내가 당신에게서 꼭 듣고 싶은 것은, 재작년 8월 이후, 특히 작년 5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1개월 전에, 당신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후에도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한 것처럼- 어째서 내게 단 한 번도 편지 쓸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해명이야. 나는 수개월 동안 당신 편지를 기다렸어. 설사 내가 기다리지 않고 당신한테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해도, 당신은 그 누구도 사랑에 문을 영원히 닫아걸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했어야만 했어. 복음서에 나오는 부당한 재판관은 마침내 일어나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그건 정의가 매일같이 찾아와서는 그의 집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진정한 친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마침내 '친구의 끈질긴 간청' 때문에 그에게 굴복하고 만다는 일화도 있지. 어떤 세상에도 사랑이 뚫고 들어가지 못할 감옥은 없어. 당신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 당신 자신에 관해 무엇을 얘기하든, 두려움 없이 말하도록 해, 진심이 아닌 것을 얘기하진 마.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부탁의 전부야. 만약 당신 편지에 거짓되거나 가식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난 어조만으로도 그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을 테니까. 평생 동안 문학을 숭배해오면서 내가 '미다스 왕이 황금에 집착했던 것만큼/소리와 음절에 인색해진 것'은 거저 얻어진 것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야. 

- 또한 난 아직 당신을 더 알아야만 한다는 것도 잊지 마. 어쩌면 우린 아직 서로를 더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지.

- 당신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 말해줄게. 과거를 두려워하지 마. 사람들이 당신한테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들 말을 새겨들을 필요 없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신이 보기에는 단 한순간일 뿐이야. 우리는 신의 눈길 아래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해. 시간과 공간, 연속과 확장은 생각의 우연적인 조건들일 뿐이야. 상상력은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이상적인 존재의 자유로운 영역 속에서 움직이지. 사물 역시 그 본질에서 그것이 어떠할지를 결정짓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져. 다시 말하면, 각각의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는 거지. 블레이크도 어디선가 "다른 이들은 언덕 너머로 새벽이 오는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신의 아들들이 기쁨으로 소리치는 것을 본다"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신한테 떠밀리듯 당신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었다가 세상과 나 자신에게 나의 미래로 여겨졌던 것을 모두 잃고 말았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 어쩌면 난 그것을 그보다 훨씬 전에 잃어버렸는지도 몰라.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나의 과거야. 나는 나 자신과 세상사람들과 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과거를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도 안 되고, 찬양하거나 부인해서도 안 돼. 오직 내 삶과 인성이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서 내 과거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만, 내가 견뎌왔던 모든 것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그럴 수 있기 때문이야. 내가 그런 영혼의 진정한 기질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기분, 경멸과 씁쓸함, 열망과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잘 말해주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내 과업을 이루기 위해 내가 지금 얼마나 무시무시한 학교에 와 있는지를 결코 잊지 마. 그리고 내가 비록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내게서 배울게 많을 거야. 당신은 삶의 쾌락과 예술의 기쁨을 배우기 위해 나에게 왔지. 어쩌면 난 당신에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고통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인지도 몰라.


당신의 좋은 친구

오스카 와일드

 


 

- 먼저 독자들에게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이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전기도,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도 아니다. 다만 미간으로 남겨두기에는 아까운 두 편의 짧은 글을 한데 모은 것일 뿐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위대한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가운데, 이 글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그리한 것이다. 하나는 다양한 비평을 모아놓은 책 속에 묻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1905년 8월에 처음 공개된 <레르미타주 l'Ermitage>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이제 와서 아무것도 다시 고쳐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이 두 편의 글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펴내고자 한다.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그사이 생각이 아주 많이 달라졌는데도 말이다.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특히 그의 희곡에 대해 부당하게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까지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와일드 자신도 때때로 자신의 희극들을 장난스럽게 비하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 마지막으로,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남편과 보잘것없는 여인>이 그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아가 그의 작품들의 문학적 가치는 그 고백록적인 중요성과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토록 기이하게 의식적이며, 우연조차도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 속에서는 어떤 사건도 별로 놀랍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데에 나는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 사람들은 그에 관해 터무니없는 일화들을 퍼뜨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와일드는 금 필터가 달린 담배를 피우고, 한 손에 해바라기 꽃을 들고 거리를 산책하는 인물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세속적인 명성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데 능했던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보다 앞선 흥미로운 허상을 창조해 내 그것을 재치 있게 가지고 놀 줄 알았던 것이다. 

 

- 와일드는 그저 잡담을 하는 causer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conter.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쉬지 않고 부드럽고 느릿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 또한 더없이 감미로웠다. 그는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지만, 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들을 찾는 척하기도 했다. 그에게서는 외국인의 악센트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신이 재미 삼아 일부러 구사하는 게 아니라면, 악센트는 종종 단어에 신선하고 야릇한 뉘앙스를 부여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셉티시스므 scepticisme'를 의도적으로 '스켑티시스므 skepticisme'로 발음하는 식이었다.

 

- 그날 저녁 그가 우리에게 끝없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혼란스러웠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은 아니었다. 와일드는 아직 우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우리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나 광기 중에서, 듣는 사람이 음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들려주었다. 각자의 입맛에 따른 먹을거리만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가벼운 디저트의 맛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처음에는 좌중을 즐겁게 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를 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흥미로운 재담가의 모습만을 보았을 터였다. 

 

-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내 두 친구가 나란히 걸어가자, 와일드는 나를 옆으로 잡아끌며 불쑥 말했다. 
"당신은 이야기를 눈으로 듣는군요. 그래서 당신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들판의 꽃들은 몹시 슬퍼하면서 강물에게 그를 애도하기 위한 물방울을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러자 강물은 이렇게 대답했죠. '그럴 수 없어요. 내 물방울들이 모두 눈물이 된다면 내가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데 필요한 물이 부족해질 거예요. 난 그를 사랑했어요.' 그러자 들판의 꽃들이 말했어요. '오! 어떻게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에요.' '그가 아름다웠나요?' 강물이 물었어요. '누가 그걸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그는 매일 당신의 기슭에서 몸을 숙여 당신 물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았는걸요...'"
와일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러자 강물이 대답했어요.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일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와일드는 야릇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덧붙였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제자>입니다."

- 우리는 그의 숙소 앞에 도착해 그와 헤어졌다. 그는 내게 다시 만나기를 청했다. 그해와 이듬해에 난 그를 자주 그리고 여러 곳에서 만났다.
앞서 말했듯이, 와일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과시용 가면을 쓰고 그들을 감탄하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때로는 그들의 짜증을 돋우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듣는 법이 없었고, 자기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홀로 빛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우리끼리 단둘만 있게 되면 비로소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 "그래, 어제 이후 무엇을 했나요?"
당시 내 삶은 별문제 없이 흘러가고 있던 터라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에게 어떤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순순히 사소한 일들을 반복해 이야기하면서 와일드의 이마가 어두워지는 것을 살폈다.
"정말 그게 단가요? 당신이 한 일이?"
"네."
"당신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 때문에 그 이야기를 다시 하는 거죠? 당신도 보다시피 전혀 흥미롭지 않은데.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세상. 우리는 그것을 현실세계라고 부르죠. 애써 이야기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세상이죠. 다른 하나는, 예술세계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야기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니까요."

- "옛적에 이야기를 잘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는 매일 아침 마을을 떠났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했죠. 마을의 모든 일꾼들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한 뒤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이렇게 말했어요. '자, 얼른 이야기해 보라고. 그래, 오늘은 뭘 봤지?' '오늘은 숲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며 꼬마 요정들에게 원무를 추게 하는 목신을 봤어요.' '더 얘기해 봐. 또 뭘 봤지?' 사람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졸랐죠.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물가에서 금빛으로 초록색 머리를 빗고 있는 세이렌들을 봤어요.'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를 사랑했어요."

- "어느 날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마을을 떠났어요. 그런데 바닷가에 이른 그는 세 명의 세이렌을 발견했어요. 물가에서 금빛으로 초록색 머리를 빗고 있는 세이렌들을. 그리고 산책을 계속하던 그는 숲 부근에 이르러서는 플루트를 연주하며 꼬마 요정들에게 원무를 추게 하는 목신을 발견했어요. 그날 저녁, 마을로 돌아온 그는 다른 날처럼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채근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오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 "난 당신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입술처럼 너무 반듯한 게 말이죠. 내가 당신한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쳐주겠소. 당신 입술이 고대 가면의 입술처럼 아름다워지고 일그러지도록."

- "예술작품과 자연의 작품이 각각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아나요? 그 둘의 차이점이 뭔지 아나요? 수선화도 예술작품만큼 아름다운 게 사실이고, 아름다움은 그 둘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될 수 없어요. 그럼 무엇이 그들을 구분 짓는다고 생각해요? 예술작품은 언제나 유일합니다. 하지만 항구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은 언제나 반복을 거듭하지요.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 무엇도 영영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도록 말이에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수선화가 존재하지요. 그래서 꽃들은 하루밖에 못 살아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연은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때마다 즉시 그것을 복제합니다. 바닷속에 사는 괴물은 다른 바닷속에 자신을 닮은 또 다른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신이 네로 황제나 보르자나 나폴레옹 같은 인물을 창조할 때는 그와 유사한 인물을 다른 곳에 비축해 둡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하나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은 예술작품을 창조해 내는 겁니다." 

- "그래요, 나도 압니다. 언젠가 이 땅이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었지요. 마침내 자연이 유일한 무언가를, 진정 유일한 무언가를 탄생시킬 것처럼. 그리고 이 땅에 그리스도가 태어난 겁니다. 그래요, 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난 너를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야겠다.'
'당신은 나를 지옥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어째서 너를 지옥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냐?'
'나는 이미 지옥에서 평생을 살았으니까요.'
그러자 심판의 집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어요.
'좋다! 지옥에는 보낼 수 없다고 하니 너를 천국으로 보내야겠구나.'
'당신은 나를 천국으로 보낼 수도 없습니다.'
'어째서 너를 천국으로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냐?'
'나는 천국을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그러자 심판의 집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 어느 날 아침, 와일드는 상당히 아둔한 비평가가 그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잘 포장하기 위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지어낼 줄 안다'고 칭찬한 기사를 내게 내밀었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모든 생각들이 벌거벗은 채로 생겨난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야기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조각가는 자신의 생각을 대리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대리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 "옛적에 청동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한 남자가 있었어요. 어느 날 문득 그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즐거움, 한순간만 머무르는 즐거움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그는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한 조각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인간들이 모두 써버렸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무덤 위에 있는 한 덩어리의 청동을 떠올렸어요.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직접 만든 조각상이었죠. 그것은 슬픔의 조각상이었어요. 영원히 지속되는 슬픔의 조각상이었죠.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슬픔의 조각상, 영원히 지속되는 슬픔의 조각상을 가져와 부서뜨려 불에 녹였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한순간만 머무르는 즐거움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 와일드는 예술가의 숙명 같은 것을 믿었고, 그 생각은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예술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답을 제시하는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입니다. 따라서 예술가가 답을 제시하는 쪽인지, 질문을 던지는 쪽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답을 제시하는 이들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야만 하는 작품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건 그 작품들이 아직 던지지 않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이 제시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지요." 

 

-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영혼은 나이가 든 채로 몸에서 태어납니다. 몸이 늙어가는 것은 영혼을 젊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플라톤은 젊어진 소크라테스입니다."
그 후 3년간 나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여기서부터는 비극적인 기억들이 시작된다. 

- 와일드의 성공에 비례하듯(당시 런던에서는 그의 극을 세 군데 극장에서 동시에 공연하기도 했다) 나날이 커지며 끈질기게 퍼져나가는 그에 관한 소문은 그의 동성애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웃음과 함께 그 소문에 분노하거나, 전혀 분노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는 그 사실을 별로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종 공공연하게 드러내기까지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용감하게, 또 어떤 이들은 그가 시니컬하게, 또 다른 이들은 그가 가식적으로 그리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소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와일드와 알고 지낸 이래로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을 기하느라 이미 상당수의 친구들이 그를 떠난 터였다. 아직은 그를 공공연하게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그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 그를 만나지 못했던 3년간 (1년 전 피렌체에서 잠깐 만났던 것은 제대로 본 것이라고 간주하긴 어려우므로) 와일드는 상당히 변해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예전보다 나른함이 덜 느껴졌고, 그의 웃음소리는 다소 걸걸했으며, 유쾌해 보이는 모습 뒤로 격렬한 분노 같은 것이 엿보였다. 자신의 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거라는 확신은 전보다 더강해 보였고,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야심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는 대담했고, 확고했으며, 예전보다 더 커 보였다. 이상한 것은 더 이상 우화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냈던 며칠간 나는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 무엇보다 나는 알제리에서 그를 만난 것에 놀라워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 나는 지금 예술작품을 피해 다니는 중입니다. 이제 난 태양만을 숭배할 생각이거든요. 태양이 생각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태양은 생각을 계속 뒷걸음치게 해서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리게 만들죠. 생각은 애초에는 이집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태양이 이집트를 정복해 버렸죠. 생각은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태양은 이번에는 그리스를 정복했어요. 그다음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죠. 이제 생각이란 생각은 모두 노르웨이와 러시아까지 밀려나 있습니다. 태양이 결코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말이죠. 태양은 예술작품을 질투하거든요." 

- 태양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 아! 그것은 곧 삶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와일드의 서정적인 숭배는 격렬하고 무시무시한 성질을 띠어갔다. 일종의 숙명성이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고, 벗어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격화하고 자신을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데 온 힘과 정성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치 의무를 이행하듯 쾌락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부여된 의무는 미치도록 즐기는 겁니다."

- 훗날 니체조차도 당시 이런 말을 했던 와일드보다는 나를 덜 놀라게 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행복을 원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절대 행복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쾌락만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가장 비극적인 것을 원해야 합니다."


- 와일드의 말에 누군가가 플로베르에게 어떤 종류의 영광을 가장 누리고 싶은지 물었을 때 그가 "풍기 문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 나는 이 모든 것들 앞에서 놀라움과 경탄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위태로운 상황과 사람들의 적대감, 그를 향한 비난들, 대담한 쾌락의 추구 뒤에 감춘 그의 음울한 불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런던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Q 후작이 그를 모욕하고 싸움을 걸어오면서 그를 도망자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곳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떤 위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 건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내 친구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내게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하더군요. 하지만 신중을 기하라니! 내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뒤로 물러서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난 되도록 멀리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제 무언가가 일어날 차례입니다. 또 다른 무언가가..."

- 와일드는 다음날 배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한 '또 다른 무언가'는 강제 노역형이었던 것이다.

- 최초의 아이디어는 무척 아름답고, 단순하며, 심오하고, 어떤 울림을 준다. 그리고 잠재적인 필요에 의해 그중 일부분이 채택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멈추는 듯 보인다. 이야기의 전개가 인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다음에 그는 문장을 다듬을 때, 감정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가볍고 야릇한 말들과 기교적인 수식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영롱하게 빛나는 외양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깊은 감동을 가려버리는 것이다. 

- 알제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내던 어느 저녁, 와일드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자신에게 약속이라도 한 듯 보였다. 그가 지나치게 정신적인 역설을 남발하는 것에 얼마간 짜증이 난 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런 농담 말고 더 할 얘기가 없는 겁니까? 오늘 저녁엔 내가 마치 대중이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 않느냔 말입니다. 아니, 대중에게도 당신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처럼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째서 당신 희곡들이 당신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없는 겁니까? 당신은 대화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걸 글로 쓰지 않는 거죠?" 
그는 즉시 이렇게 외쳤다.
"오! 내 희곡들은 그리 훌륭하지 않습니다. 난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죠.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다는 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내기의 결과물입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마찬가지고요. 내 친구 하나가 나는 결코 소설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말에 자극받아 며칠 만에 써내려간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그는 느닷없이 나를 향해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 뭔지 아시오? 그건 내 삶에 나의 모든 천재성을 쏟아부었고, 내 글에는 내 재능만을 투영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라오."

- 그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다. 그가 쓴 최고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빛나는 대화의 희미한 반영에 불과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처음에는 정말 놀랍고, <나귀 가죽>보다 더 훌륭하고 더욱더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 글로 쓰인 작품은 불완전한 걸작이 되고 말았다.

 

- 여기서 인용하는 와일드의 말은 모두 내가 들었던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덧붙이거나 매만지지 않았다. 당시 와일드가 내게 했던 말들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아니 내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내가 본바, 와일드는 자기 앞에 감옥이 기다리고 있음을 또렷이 의식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느닷없이 그를 원고에서 피고인으로 변모시키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런던의 모든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극적인 반전은 당사자인 그에게는 특별한 놀라움을 안겨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에게서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 같은 모습만을 보고자 했던 언론은 그가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을 한껏 왜곡해 보도함으로써 그러한 몸짓의 모든 의미를 앗아갔다. 어쩌면 먼 훗날, 그 끔찍했던 재판의 역겨운 진창을 딛고 그가 다시 우뚝 서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 멜모스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는 길에 외투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전날 밤 그곳의 하인이 그에게 가져다준 공작 깃털(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하나가 그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예고한 터였다. 그는 그쯤으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어찌나 추위에 떨었던지 그에게 그로그주를 데워주기 위해 호텔 전체가 법석을 떨었다. 그는 내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격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배스천 멜모스가 예전의 오스카 와일드와 아주 비슷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의 흥분 또한 즉시 가라앉았다. 그에게서는 알제리에서 알았던 격정적이고도 서정적인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위기가 닥치기 전의 온화한 와일드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2년 전이 아닌, 4, 5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와 똑같은 나른한 눈빛, 변함없이 유쾌한 웃음과 똑같은 목소리...

- 그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 두 곳에 머물면서 그곳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며놓았다. 테이블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는 얼마 전에 출간된 나의 <지상의 양식>을 내게 보여주었다. 커다란 받침대 위에 놓인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성모상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 우리는 이제 램프 가까이 앉아 있었고, 와일드는 그로그주를 홀짝거렸다. 이제 난 그를 좀 더 잘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 피부는 벌겋고 평범하게 변해 있었다. 손은 더 그래 보였지만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반지들을 끼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가 특별히 아끼는 움직이는 거미발에 청금석으로 된 이집트의 신성갑충 형상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의 이는 아주 흉측하게 망가져 있었다. 

- "당신은 영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떤 것인지 대략 알지 않았나요? 위험을 예감하면서도 그 속으로 뛰어들었던 겁니까?"
(나는 와일드를 만난 직후 그가 했던 말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들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적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오! 물론이에요! 물론 난 파국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식으로든 말이죠.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나요? 어떻게 그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었겠어요. 더 이상 그렇게 계속 갈 수는 없었지요. 그러니 어떻게든 끝을 봐야만 했던 거란 말입니다. 감옥은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그곳에서 난 그걸 기대했던 겁니다. B는 정말 딱하기 그지없어요. 그는 이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해요. 내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를 바꿔놓았다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다니... 하지만 결코 똑같은 삶을 다시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내 삶은 한 편의 예술작품과도 같습니다. 예술가는 두 번 다시 같은 것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감옥 이전의 내 삶은 더없는 성공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모두 끝난 얘깁니다." 

- "대중은 무척 인색해서 한 사람을 그가 마지막으로 한 것으로만 판단하는 습성이 있어요. 내가 지금 파리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내게서... 낙인찍힌 죄인의 모습만 보려 들 겁니다. 나는 새로운 극을 쓸 때까지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다들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입니다."

 
- "불행했습니다. 너무도 불행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도 나처럼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연민을 느껴 마음을 바꾼 겁니다. 아! 연민이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지요! (그는 전혀 흥분하지 않고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연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매일 저녁 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무릎을 꿇고, 그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쾌락만을 생각하면서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감옥에 들어왔지만, 이제 그런 내 마음은 완전히 부서져버렸습니다. 연민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연민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난 나를 단죄한 사람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모든 걸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B는 내게 끔찍한 편지들을 보내옵니다. 그는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내게 더없이 잔인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요,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매번 반복해 말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길을 갈 수가 없다고. 그에게는 그의 길이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길이지요. 하지만 난 내 길을 가야 합니다. 그가 가는 길은 알키비아데스가 갔던 길이지요.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갔던 길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누군지 압니까? 아! 정말 놀랍습니다! 놀라워요! 그런데 내 청을 좀 들어줄 수 있나요? 당신이 보기에 가장 훌륭한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좀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 "그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무엇을 상상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가 얼마나 상상력이 부족했는지는 내 얘길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먼저, 교도소에서는 하루에 한 시간밖에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둥글게 대열을 이루어 교도소 뜰을 걷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요. 교도관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고, 얘기를 하다 적발되면 끔찍한 징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수감된 지 6주가 지나도록 그 누구와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와도 말입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의례적인 산책 시간 동안 둥글게 대열을 이루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 바로 뒤에 있던 재소자가 '오스카 와일드, 난 당신이 정말 안 됐습니다. 당신은 우리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힘들 테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교도관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그땐 정말 기절하는 줄만 알았어요)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소, 친구, 우린 모두 똑같이 힘든 겁니다.' 그날부터 나는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 "우린 그렇게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의 이름과 그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를 알게 되었죠. 그의 이름은 P였습니다. 정말 좋은 청년이었죠. 아!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그런데 난 아직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C3.3.!(C.3.3.은 내 수인번호였습니다) C.3.3.하고 C.4.8., 대열에서 나와!'라는 명령에 우린 대열에서 나왔고, 교도관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소장님 호출이다!' 이미 연민이 내 마음속에 들어온 터라 나는 오직 그를 위해서만 두려워했습니다. 나 자신을 염려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는 것에 행복해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당시 교도소장은 악명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P를 먼저 불렀습니다. 우리를 따로따로 신문하기 위해서였죠. 먼저 말을 건 사람과 대답을 한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징벌이 가해지기 때문이었어요.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대답한 사람의 두 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먼저 사람은 2주 동안 지하독방 신세를 져야 했지만, 나중 사람은 1주일만 지하 독방에 있으면 됐으니까요. 따라서 교도소장은 누가 먼저 말을 건넸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물론 좋은 청년이었던 P는 자신이 그랬다고 대답했지요. 그리고 소장이 나를 신문했을 때 나는 물론 내가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장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P는 자기가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단 말이오!'"

 

- 그는 내 책을 다시 언급하면서 칭찬했지만, 그의 말속에서는 왠지 모를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다. 그는 내게 작별인사를 하고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불쑥 말했다. 
"저기 말이에요, 친구, 내게 약속을 하나 해줘야 할 것 같소. <지상의 양식>, 훌륭해요... 아주 훌륭해요... 하지만 내게 약속해 주시오. 앞으로는 '나'라는 말은 결코 쓰지 않겠다고."
내가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그는 다시 말했다.

"예술에는 말이죠, 1인칭이란 없습니다."

 

- "빠짐없이 영혼의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른다.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야." 

 

- "나는 수감된 이후 처음 1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무력한 절망감 속에서 두 손을 비틀면서 '이런 비참한 종말이라니! 이토록 끔찍한 종말이라니!'라며 절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때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때면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곤 해. '굉장한 시작이야! 정말 놀라운 시작이 아닌가!' 그리고 정말 그런지도 몰라. 정말 그럴 수도 있고 말이지."

 

- 그는 그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채, 그가 격찬하던 '절대적인 겸손'에 반하는 말을 한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 삶에 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내 삶의 별스러운 행각이 이어지는 한-사실 속에서 내게 좋은 점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되었어. 그 사실은 내게 다시금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을 확고히 할 필요성을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야. 그것도 되도록 빠른 시간에. 내가 만약 다시 한번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면, 난 악의에서 독을, 비겁함에서 비웃음을, 사람들의 혀에서 경멸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을 거야."

- "나는 자신의 완성을 위해 도달해야 하는 첫 번째 단계 중 하나가 내가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임을 느끼고 있어. 나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그런 다음에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 예전에 난 그 방법을 알고 있었거나, 안다고 생각했어. 본능적으로 말이지. (…) 이제 난 삶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고, 행복을 떠올리는 것조차 지극히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아." 

 

- "그리고 내 바람대로, 내가 받는 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면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걷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 감옥에 가기 전과 출소 후의 와일드를 알았던 이들에게 그의 이런 말들은 의심스럽고 고통스럽게 들린다. 그의 예술적 침묵은 라신 같은 작가의 경건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부여하는 그럴듯한 이름에 불과했다.

- "많은 사람들이 출소할 때 자신의 감옥을 세상으로 함께 가지고 나가며, 그것을 자기 마음속에 비밀스러운 불명예처럼 간직하다가 종국에는 독에 중독된 불쌍한 짐승처럼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으로 숨어 들어가 죽고 말지."

- '독에 중독된 불쌍한 짐승처럼'. 그렇다, 예전에 내가 알았던 거인 와일드는 그렇게 변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사회가 그를 희생시키기 직전까지 달콤한 찬사를 보냈던, 득의양양하고 빛나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수치심에 휩싸이고, 망가지고,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던 페터 슐레밀처럼 방황하면서, 투박하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내게 흐느낌처럼 들리던 억지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하던 그가 떠오른다.

"그들은 내 영혼을 앗아갔소. 그걸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의 '겸손'의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과거의 자긍심은 더욱더 우울하게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예고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매달아 놓은 기괴한 공시대에 언제까지고 머물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그 이름이 영원히 더럽혀진 채로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야."  

-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문학과 술, 고고학과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내 나라가 한 국가로서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공식적인 역사에서도 고귀하고 명예롭게 여겨지는 이름을 내게 물려주셨지.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영원히 욕되게 했어. 그 이름이 비천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찮은 조롱거리가 되게 했지. 내가 그 이름을 진창 속으로 끌고 들어갔어. (…) 그때 내가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고통은 그 어떤 펜으로도 쓸 수 없고, 그 어떤 종이에도 기록할 수 없을 거야."

-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 자신을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게 해야만 해"라고 말하고 있다.

- 기이하게도 여전히 명료함을 간직하고 있던 와일드는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추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성질에 대해서도 정확한 분석을 시도했다. 자신은 과도한 개인주의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 개인주의 탓에 추락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며 나를 비난하곤 했지.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에 적게 요구해야만 해. 사실, 나의 몰락은 삶에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요구한 데서 비롯된 거야." 

- 이러한 잠재적 숙명성은 그의 삶에 비장미와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그의 작품들의 내밀한 의미를 돋보이게 한다. 그렇다,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었던 사람의 작품이 우리에게 그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예술 속에서 그 전조가 보이고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었지." 

 

- 아아! 가엾은 와일드, 당신의 이야기가 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지요. 당신이 말하는 예술가는 그 반대로, '슬픔의 조각상'을 부수어 '즐거움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의도적인 오류는 그 어떤 고백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장조제프 르노가 와일드의 <의도들> 번역본에 덧붙인 서문을 읽으면서 짜증이 치미는 것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게다가 진위 여부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은 채, 명예롭고 부유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던 한 작가를 느닷없이 감옥으로 보낸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작품에 반하는 어떤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들을 잊어버리자. 우린 뮈세, 보들레르 같은 작가들의 사생활과 상관없이 그들의 작품을 읽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가 플로베르와 발자크가 범죄를 저질렀음을 밝힌다면, 그런 이유 때문에 <살람보>와 <사촌 베트>를 불태워야 할까? 작품은 작가가 아닌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다."

뭐라고! 아직도 우리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물론 그의 말은 더없이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와일드 자신이 <심연으로부터>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예전에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 -1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야.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입술에 거짓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 '설령 플로베르가 죄를 지었다 해도', <살람보>는 여전히 흥미로운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보다는 '만약 플로베르가 죄를 지었다면', 그는 <살람보>가 아닌 다른 것을 썼거나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발자크가 자신의 인간극을 직접 살아내고자 했다면 그는 아마 그것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훨씬 더 흥미롭고 더욱더 타당할 것이다.

 

- "삶에서 얻은 것은 예술에선 잃게 마련이다."

와일드는 평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와일드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예술에서 좋은 의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형편없는 예술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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