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하지은 / 소만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3.06.19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시키는 표지에 이끌렸다.
<오만한 자들의 황야>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하지은 작가의 작품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까지 읽은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녹슨 달>이다.
<오만한 자들의 황야>는 서부 개척 시대와 유사한 무법자들의 황야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라신이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해당 시대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큰 무리가 없다. 총기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현실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한국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내가 접한 작품들 중에서는- 일종의 버터 향이 짙은 소설인데, 저자가 처음에 의도한 분위기대로 마무리가 된 것인지는 조금 모호하다. 하드 보일드를 표방하지만 혈연과 부성애, 최종적으로는 로맨스가 뒤섞인 장르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초반부의 분위기였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따온 듯, '파이프'를 주체로 서술된 도입부가 매력적이었다. 조금 더 연결되었어도 좋았겠다 싶어 아쉬웠다. 이어지는 라신의 등장 장면 또한 그랬다. 죽은 생물을 소생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이나 법칙 등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어서 풀어나갈 줄 알았는데 극후반을 제외하면 중심적인 장치는 아니었다. 라신을 포함해 주변인들도 그의 이능(異能)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인지 바드레 수사의 경우는 어째서 적용이 불가했는지에 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시간이 너무 흘렀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은원과 애증, 혈연과 부정(父情)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 된다. 인과 관계 자체는 매끄러운 편이지만, 다소 극적이라고 느껴지는 호흡이 몇 군데 있었다. 사수(射手)로서의 재능이 천부적인 것으로 묘사가 된다거나, 그전까지 아무런 정을 느끼지 못하던 대상이 '혈연'임을 알게 되는 순간 감정적으로 폭발한다거나 하는 장면들은 개인적으로는 따라가기가 조금 벅찼다.
키워준 정과 낳아준 정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여러 아버지 후보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독자들은 진짜 아버지를 손쉽게 눈치챌 수 있지만- 바드레 수사를 죽인 수사나드와 테사르를 죽인 베르네욜에 대한 라신의 감정적 온도 차이는 꽤 의아하다. 어머니와 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존재 자체도 몰랐던 이들의 죽음이 그렇게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친아버지처럼 여겨왔던 수사의 죽음에 더 큰 복수심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테사르의 죽음 이후 감정적으로 무동(無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접근도 이후 라신의 모습을 보면 모순된다.
베르네욜 역시 그렇다. 자신 또한 그런 선택을 했으니 테사르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란 생각을 했을 법한데...
외전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들 또한 미묘한 지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호'이지만 처형은 지워지고 친우의 딸로서만 바라보는 점이라던지 -물론 그녀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고도 설명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력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었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읽어나가며 감정선의 급격한 변화가 조금 혼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모래선혈>에서도 유사한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저자는 전체적인 감정선을 염두에 두고 써나가기보다는 핵심적인 장면들을 정해두고 그 사이를 이어가는 형태로 쓰셨던 게 아닐까 싶다.
각각의 장면들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복잡한 감정들이 조금 더 밀도 있고 강렬하게 묘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뚜렷하지 않은 선악의 구도와 와일드 웨스트 특유의 거칠고 남성적인 분위기가 잘 담긴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운이 길게 남는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떠오르는 다른 작품은 미드 <웨스트 월드>와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
즐겁게 읽었다.
- 파이프는 그에게 무척 고마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남자에 대해 별다른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고 눈빛 또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정성을 들여 단장한 파이프를 그는 다른 남자에게 선물했다. 선물 받은 남자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거기에 놓게,라고 했을 뿐이다.
- 파이프는 자신의 새 주인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축축한 입으로 자신을 물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경례하는 것으로 보아 높은 인물임이 분명했지만, 정작 내면은 황폐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고 있었다. 부하들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하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그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 파이프는 축축한 침보다 더 기분 나쁜 액체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비린내가 나는 붉은 액체 구덩이 속에 버려진 채로 파이프는 누군가가 자신을 옮겨주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랐다.
- 소망이란 참으로 알기 힘든 변덕쟁이다. 그런 소망을 품자마자 누군가가 파이프를 주워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파이프가 원하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 그는 불길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반면 어둠처럼 몹시 차가웠으며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을 끌어다 그의 내면에 집어넣기라도 한 듯 악독했다. 곁에는 마찬가지로 악을 찬미하는 수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으며 그들 중에서 그는 왕처럼 군림하며 복종과 두려움을 강요했다.
그의 이름은 베르네욜이었다.
- 베르네욜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 처형식에 참관할 신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신부는 성전을 들이대며 신의 이름 앞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후회와 참회의 말들을 지껄일 것을 강요할 터였다.
베르네욜은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신부에게 침을 뱉어 줄 준비가.
- 신부는 그가 예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결한 척, 신을 찬미하는 척, 선량한 척 가장하고 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저열한 욕망을 숨기지는 못했다. 그도 인간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더러운 인간.
신부 역시 그런 베르네욜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서른여섯 명의 사람을 살해했으며 다섯 아이의 목을 베어 피를 마셨다는 미치광이 살인마 치고는 너무도 침착하다고.
- "당신들 때문에 희생당한 가엾은 이들은 어찌할 것이오? 사람이 누구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는 걸 막기 위해 법이 있고 신앙이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법도 신앙도 부정하겠다."
신부는 어두운 눈으로 베르네욜을 내려다보았다.
"그 대가가 온몸이 여섯 갈래로 찢겨 죽는 것이라 해도? 죽음이 죽음으로 당신을 이끈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단 말이오?"
- 신부의 냉엄한 질문에 베르네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는 듯했다.
- "많은 이들이 그런 착각을 하지. 하지만 죽음만이 가장 큰 형벌은 아니다."
총소리를 듣던 베르네욜이 조용히 말했다. 신부는 허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큰 형벌이오?"
"안다 해도 소용없을 거야. 나는 이미 그 형벌을 받았고 이제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다."
- 신부는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 구원할 수 없는 악한에게 이미 형벌이 내려졌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다만 연민을 느꼈다.
"이제야 당신을 위해 기도할 의미가 생긴 것 같소."
- 팔마가 마차 안으로 들어와 그의 족쇄를 풀어 준 뒤 품에 갈무리했던 꾸러미를 꺼냈다.
베르네욜은 그것을 받아 풀었다. 안에는 새까맣고 질긴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총집, 그리고 사탄의 뿔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리볼버 한 자루와 갈색 파이프가 들어 있었다.
- 베르네욜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총을 꺼내 든 채 신부를 내려다보았다. 신부는 그를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발에 닿자 베르네욜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굳어졌다.
"내게 매달리는 건가, 신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이 순간, 신이 아닌 내게?"
- "아뇨. 무지 건방진 말을 지껄이던데요."
"뭐라고?"
"형님의 죄를 사하겠다고요."
- "레바트만과 악마 사라본의 논쟁이야말로 선과 악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진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악마가 대성인에게 궤변을 늘어놓고 저주를 퍼붓고 떨치기 힘든 유혹을 보내는 동안, 레바트만은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였다. 사라본은 마침내 패배를 인정하였으나 결코 참회하지는 않았다. 악마조차도 구원할 수 있다던 레바트만이 의지가 사라본에 의해 꺾인 것이니, 결국에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는 단언하기 힘든 문제다. 다만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악마란 결국 최후의 불길 속에 던져질 타락한 존재일 뿐 감화시킬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수사님, 저는 그 일화에서 레바트만이 단지 실패했을 뿐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지?"
"참된 설교와 진실된 마음이라면 악마조차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대성인마저 실패한 일을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로구나."
라신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 그래야 마땅하지. 신학교 학생이라면 그 정도 열정은 가져야 한다. 나는 언젠가 네가 그것을 꼭 증명하길 바란단다."
- 바드레 수사는 앞에 앉은 사내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 면에서 베르네욜과 닮아 있었다. 어떤 일에도 주저하지 않으며 오직 원하는 것을 향해 곧게 달려가는 성격, 냉정하게 죽음을 마주하는 눈빛까지도. 그러나 같은 것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 "겁쟁이는 용기를 내야 할 때 도망치는 자들일세. 도망쳐야 할 때 용기를 내는 것은 만용이라고 하지. 그리고 정녕 자네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기에는 왜 온 건가?"
바드레 수사는 그렇게 물으면서 그가 단지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기를, 이제 미련 없이 떠날 거라고 답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테사르는 바드레 수사가 계속 두려워한 그 이름을 꺼냈다.
- "두렵지 않다면 거짓일 겁니다. 하지만 베르네욜이 두려운 건 아닙니다. 제가 마지막이 될 것이 두렵습니다. 제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진다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라신에게 잇게 할 셈인가? 라신은 아무것도 모르네. 신학과 라틴어를 좋아하는 보통 학생일 뿐이야. 자네들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
- "그 아이도 곧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할 겁니다. 때가 되면 황야와 바람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 그게 총잡이들의 숙명이니까요."
"거절하게 만들 걸세. 그러기 위해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수사님이 아닙니다."
잠깐이지만 바드레 수사의 얼굴에 상처 입은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서, 테사르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사과의 뜻이기도 했지만 옛 스승의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 바드레 수사는 모아 쥔 두 손만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라신을 아끼는 동시에 그는 테사르를 이해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 아이여만 합니다. 제가 실패한다면 오직 그 아이만이 가능할 테니까요. 피는 무엇보다 강한 법입니다. 그리고 제겐 그걸 요구할 자격이 충분히..."
"그만. 알겠네."
- 만나자마자 달려가서 안아 줄까, 이름을 부를까, 사내들답게 악수하고 어깨를 치는 것으로 대신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회랑에 다다랐지만 라신을 처음 보는 순간 테사르는 그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저 아이라고?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진실하게 무릎 꿇고 앉은 라신의 모습이, 사물의 깊이를 재듯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항상 입가에 머물고 있을 듯한 선한 미소가 아름다웠다.
- 그러나 까마귀는 이내 라신의 무릎에서 일어나 까악거리고 울었다.
- 팔마는 속력을 줄이고픈 생각도, 바위 뒤에 숨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항상 상대방의 얼굴을 직접 보며 머리를 날려주는 걸 좋아했다. 두 다리로 단단히 말의 배를 감싼 그는 양손으로 총을 꺼내 들었다. 고삐를 잡지 않고도 말 위에서 유연하게 리듬을 타며 달리는 그의 기술을 두고 베르네욜은 원숭이 같은 팔마만 가능한 재주라고 말했었다. 물론 팔마는 베르네욜이 자기를 원숭이라 부른 것을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여겼다.
- "누군지 안 물어보십니까?"
"죽은 놈 이름 알아서 뭐 하나. 그래 봐야 나를 죽이려는 놈이 천에서 구백아흔아홉이 되었을 뿐인데."
- "그렇기도 하고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기도 하지."
"개인적인 원한이라고요?"
바드레 수사는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가늠해 보았다.
"그가 말하지 않고 떠났다면 나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구나. 나중에 그에게서 직접 듣거라."
- "아버지 말로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던데, 그런가요?"
수사는 잠시 천장을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라신이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그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그도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악했던 건 아니란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와 시련이 너무도 컸던 게지. 그는 악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잔혹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 "그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련과 불행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베르네욜과 같이 악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드레 수사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의 라신을 바라보았다. 라신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묘하고도 슬프게 느껴졌다.
"네 말이 맞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시련이 닥쳐왔을 때 계속해서 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 또한 아니란다."
"그렇다면 베르네욜은 약한 사람이겠군요."
- 바드레 수사는 소리 없이 웃었다. 라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남자는 온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하지 못한 일, 가지지 못한 것이 없었다. 눈앞의 세상 물정 모르는 신학생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단다."
"그렇다면 제가 그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 "그를 만난다면 레바트만이 그러했듯이, 악마일지라도 참회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를 바른길로 이끌고 과거의 일을 뉘우치게끔 설득해 올바르며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확고한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못할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베르네욜이 원하지 않을 거라는 말, 라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기만 해도 쏴 버릴 거라는 말 따위는 불필요할 터였다.
- 바드레 수사는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묻힌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것은 감격 때문이기도 하고 슬픔 때문이기도 했다.
"언젠가 네가 그렇게 하길 바란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하길 바란단다."
- "그 힘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함부로가 아닙니다. 수사님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대가를 치르지 않는 힘이란 어디에도 없음을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힘을 쓸 때마다 네가 피를 흘리고 병이 나는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어쩌면 그 힘이 네 생명을 대신 갉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 "결코 그 힘을 사용하지 말거라. 내가 네 눈앞에서 죽어 간다고 해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네 힘에 대해 알게 하지 마라. 그걸 알게 되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이용할지 모르지 않을 거다."
- 바드레 수사는 라신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음을 눈치챘지만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라신은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는 수밖에 없다.
- "그와 말이라는 게 통할지 잘 모르겠구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레바트만은 악마 사라본에게로 향할 때 그를 가로막는 무리를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지."
바드레 수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뜻대로 한번 해 보자꾸나."
- 철없던 시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는 정반대인 거친 삶을 동경했다. 이제는 죽고 없지만 당시 가장 유명한 강도단이었던 데렉 일당이나 누구보다도 바른 손을 가졌던 에슬렉 하우드, 무법자 카라보의 이야기 등을 좋아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베르네욜을 가장 좋아했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악당들의 일화란 어느 정도 각색되기 마련이어서, 그가 1대 10으로 결투해서 이겼다느니, 들어가서 누구도 살아 나오지 못한 탕드당트의 감옥을 탈출했다느니, 어떤 레이디의 이름을 자신의 애마에 붙여 그것만을 아끼고 사랑한다느니 하는 낭만적인 이야기만 들어온 탓이었다.
- "역시 최고의 총잡이는 베르네욜이에요, 그렇죠? 우리 땅엔 안 오려나? 꼭 만나 보고 싶은데."
어린 시절 철없이 그렇게 외치는 그의 행동에 어머니는 난색을 표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허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 물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녹스는 한때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 살의에 가까운 경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 한마디가, 터무니없는 소망 하나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릴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순식간이었다. 어떤 예고도 징조도 없이 현실은 너무나도 쉽게 환상을 무너뜨렸다.
- 어머니의 무릎을 벤 채 하인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누워 있던 오후. 정원은 영원할 것처럼 푸르렀고 하늘은 끝이 없을 것처럼 높았다. 그 완벽한 날 녹스는 오히려 조금 따분해하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아버지가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줄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거친 총잡이로서의 삶을 살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녹스는 베르네욜이 그의 총에 사탄의 뿔이라는 이름을 붙였듯 자기만의 총에도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책에서 본 악마의 이름 중 하나가 좋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벌벌 떨 수 있도록.
- 그런 상상들로 즐거워하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순진하게도 녹스는 순간 아버지가 드디어 자신에게 총을 선물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건 아버지가 아닌 수십 명의 총잡이들이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 남자가 그런 녹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없이 하잘것없는 것을 보는 눈길로.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바로 베르네욜이었다. 녹스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이야기 속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멋있던 악당 말이다.
- 하지만 그는 녹스가 상상한 것처럼 호탕하게 웃지도 않고 낭만적이며 정의로운 눈을 가지지도 않았다. 다만 죽어 버린 듯 가라앉은 눈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여라. 물건은 가벼운 것만 골라서 챙기고."
녹스가 가지고 있던 환상을 무자비하게 깨부순 그 두 마디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조 하나하나까지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했다.
- 녹스는 씁쓸한 기억을 덮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맥주를 마셨다.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그는 결코 위스키만은 마시지 않았다.
- "수사나드가 돌아오면 죽는 거지, 뭘 어쩌나."
"성직자가 죽는 건 영 찝찝하다고. 그놈들은 자기 목숨 귀한 줄도 모르나? 신학교에서 그런 건 안 가르치나 보지?"
- "가란다고 진짜 가네. 정말 의리들 없지. 키워 놓아 봐야 다 소용없다니까."
"새삼스러울 거 있나."
가니시오는 짐 속에 둘둘 말아 두었던 천을 꺼냈다. 렘은 아직 떨림이 멎지 않은, 멍으로 뒤덮여 까맣게 변한 팔을 내밀었다.
- "삼촌, 실망했겠지?"
가니시오는 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천을 꽉 묶었다.
"기대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실망도 할 수 있는 법이야."
- 그라노스 사람들이 일견 아무 규칙 없이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 나름의 일정한 생활 방식이란 게 있었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숙취에 찌든 몸을 이끌고 주점으로 들어가 한참 퍼마시고, 시비가 붙으면 주먹이든 총이든 꺼내서 해결하고, 해가 지면 도박판이나 사창가에 들어가 각자 볼일을 보고, 나와서 또 한참 퍼마시다가 잠드는 그런 일상 말이다.
- "내가 보기에 넌 단지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미워하고 있어."
"두 개가 뭐가 다른데?"
"꽤 다르지."
- "싫어한다면 피하면 그만이지. 미워하니까 일부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거 아닌가."
"멋대로 생각해. 아무튼 저놈 가면은 꼭 벗겨 내고 말 거야."
"가면?"녹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잔을 탕 내려놨다.
- 라신은 그 모든 걸 교회를 짓는 데 사용했다. 그에게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심판의 광장에서도 그랬지만 그런 차분하고 끈기 있는 태도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님에도 지켜보게끔 되는 것이다.
- "남들은 쉽게 다른 색깔로 물들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 색이 뭔지 알아?"
뜬금없는 녹스의 물음에 잔센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하지만 녹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검은색이야. 제일 시커멓고 기분 나쁜 색이지."
- "글쎄. 짐승들 무리에 강아지 새끼가 들어오면 어쨌든 한동안은 귀여운 거 아닐까?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주변 총잡이들은 다 그런 상태야. 신기해하며 관찰하고 있는 거지.""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뒤에서 두 사람이 그런 말을 주고받거나 말거나 녹스는 라신을 바로 쏴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도 나름의 규칙이란 게 있었다.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죽이지 않는다는 규칙. 고로 그에게는 지금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 녹스를 발견하자 그는 뜻밖에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군요. 사과하러 오셨습니까?"
녹스는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잠시 잊어버렸다.
"뭐?"
"사과하러 오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 "아니."
타이밍이 늦은 데다 별로 당당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라신은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그라노스에서 그렇게 친절하게 충고해 주는 일은 없거든. 보아하니 대놓고 무시한 모양이지만."
"그런 식의 충고에 감사할 순 없습니다."
"나도 감사받자고 한 일은 아니지."
- 녹스는 허리에서 총을 꺼냈다. 라신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총을 내려다보았다.
"이 도시의 소통은 항상 그것으로 이루어집니까? 적응하기 어렵군요."
"그래도 적응해. 이리저리 해를 끼치고 다니는 주제에 자신은 해를 입지 않겠다는 뻔뻔한 태도가 어디 있어."
- "이곳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싶어? 그럼 총 쏘는 법부터 배워."
"전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배우고 싶어 졌을 때는 늦지. 미리 배워 둬. 내가 당장 사람을 쏘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 "아니, 이번엔 다른 것을 해 보지. 총잡이들끼리 하는 결투에 대해 들어 봤나?"
"결투라고요?"
라신은 의아한 듯 반문했고 녹스도 깜짝 놀라 잔센을 쳐다보았다. 잔센은 홀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등을 맞댄 채 각자의 방향으로 다섯 걸음을 걸어간다. 그리고 돌아보는 동시에 서로를 쏘는 거야. 간단하지?"
- 하지만 라신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당신을 쏘라는 말입니까?"
"그래."
"그런 일은 못 합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해야 할걸. 안 하면 내가 널 쏠 테니까."
"전 하지 않을 겁니다."
"마음대로 해. 난 시작한다. 떨어져라, 녹스."
- 그가 한번 결정을 내리면 철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녹스도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녹스가 잔센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잔센이 네 걸음째 내딛고 있었다. 잔센의 태도는 더없이 분명했고 지금 그에게 다가가면 녹스는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 총을 든 잔센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은 라신에게 매우 느릿하게 보였다. 상대가 쏘면 그냥 맞으리라 생각하며 서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로 쏠 거란 직감이 온몸을 덮치자 뭘 한다는 의식도 없이 라신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방금 해 본 일이었기에 그의 감각은 동작 하나하나를 똑똑히 기억했다.
잔센의 총이 라신을 겨냥하는 순간 라신이 먼저 그를 쏘았다. 불이 뿜어지고 탄알이 날아가 상대방의 어깨에 박혔다.
- "그런데 두 분은 친구가 아니라면 어떤 사이이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잔센이 녹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녹스는 그를 외면했다. 하는 수 없이 잔센이 대답했다.
"적이자 원수이자, 은혜를 갚아야 하는 동료라고 할까."
- "결국 은혜를 먼저 갚은 뒤에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녹스를 따라다니고 있지. 빚을 갚고 나면, 복수하기 위해. 그런 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친구 비슷한 게 된 거지만 내 사명을 잊지는 않아."
"그걸 알면서도 함께 다니는 건가요?"
"그래. 그래서인지 내게 은혜 갚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하더군."
- "웃기고 있네. 복수니 은혜 갚음이니, 다 네 녀석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난 특별히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 상태로 불편한 침묵이 흐르자 라신은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게 자기 탓인 양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비우는 것으로 민망함을 표현했다.
"후,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
말을 하다 말고 라신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고꾸라졌다.
-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총 쏘는 실력이야 뭐, 잘 쏘는 놈들 한둘이 아니니까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눈빛이 마음에 걸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도 꿈쩍을 안 하더라니까? 병을 쏠 때는 그러려니 했어. 하지만 사람을 쏠 때도 마찬가지더군."
- 탈수 증상에 이어 열까지 오르기 시작한 지금,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위해 가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다만 말라비틀어져 가는 나무 그림자 아래 간신히 몸을 기댄 채 옛일을 떠올릴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죄를 지었다, 베르네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그래. 우리는 서로를 용서할 수도,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다.'
- '라신, 그 아이가 과연 내 복수를 해 줄까? 만약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제 아비와 같은 눈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러나 결국에는 아무것도 떠올리기 싫어졌다. 죽음이 닥쳐오면 살고 싶은 의지로 발버둥 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모든 게 허무하고 담담했다. 그저 지쳐 잠들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 그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복수심도 증오도, 그리움도 슬픔도 모두 부질없었다. 삶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갔다. 아니, 그는 언제나 죽음과 더 친숙했다.
- "아니, 살아 있는걸."
"귀찮게 됐네. 그냥 죽어 버리지 왜 짐짝이 되고 난리래요."
"마음 좀 곱게 써라, 딘. 언젠가 네가 이런 입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야."
"밥 먹고 할 짓 없나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뭐 하러 생각해요?"
- "테사르라고? 형씨가 테사르라고요?"
빈쿠스는 딱한 눈으로 딘을 쳐다보았고 다른 남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딘은 테사르의 곁에 바싹 붙어 앉더니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형씨,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나, 형씨를 존경해요."
"... 그거 고맙군."
"와, 내가 테사르의 은인이 되다니. 내가 테사르의 생명의 은인이 되다니!"
왜인지 테사르는 반년 이내에 딘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생명을 살렸다는 소문이 남부 전역에 퍼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상처로는 솔직히 그렇소."
"한 손으로도 총은 쏠 수 있소. 내 장기는 라이플만이 아니지."
빈쿠스는 잠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딘이 열렬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가운데 빈쿠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좋소. 우리로서도 남부 최고의 저격수를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 "나는 다 알아요. 삼촌은 내가 불쌍해서 주운 거고 가엾어서 키운 거야. 정을 주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정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애정을 느낄 거야. 나를 아낄 거야."
베르네욜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 비슷한 것도 짓지 않았다.
"총 쏘는 법을 가르친 것도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저 거칠고 무자비한 남자들 틈에서 자라게 놔둔 것도 내가 강해지길 바라서야. 모두 다 나를 위해서였던 거예요. 나는 알아요."
"신을 믿나, 렘."
"그런 건 믿지 않아요."
"네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큼이나 터무니없게 들리는데."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아는 거예요.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별이 뜨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요. 내가 또 뭘 아는지 말해 줄까요? 내가 지금 기대어도 당신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 렘은 일어서서 베르네욜의 등 뒤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등에 두 손을 올려놓았고 거기에 머리를 대었다.
"나는 다 알아요."
베르네욜은 말없이 파이프를 물었다. 커피가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내 차가워질 때까지도.
- 테사르는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년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필요했다. 테사르가 버린 것이.
- "나도 데려가요."
"안 돼. 지금의 넌 아무것도 못 해."
"그럼 가르쳐 줘요. 당신 같은 총잡이로 키워 달라고요!"
"내겐 그럴 시간이 없어."
- "그라노스로 가거라. 어제 그 남자들이 향한 곳 말이야. 절대로 혼자서는 덤비지 마."
"아저씨는 왜 혼자서 가는데요?"
"이건 나와 그 사이의 일이니까."
"아저씨 말은 모순투성이예요."
"산다는 게 원래 그래."
- 소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테사르는 그를 남겨두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왔다. 소년을 구제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이미 십수 년 전에도 그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버렸었다. 두 번이라고 어려울 리야.
-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를 어쩌면 너는 믿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 그러나 어쨌든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말을 남기지 않을 수 없구나. 어쩌면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 채 모든 게 끝나 버릴지 모르니."
- "그래서 이번 사냥이 그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닐까 하고 다들 조심스레 기대했었어.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야. 적어도 중부를 건너야 하는데 그러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없거든."
"사냥이 그런 사냥을 말하는 거였군요."
"다른 사냥도 있나?"
- 라신은 남은 빵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계란도 한입에 삼켰다.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쭉 들이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 "가져가.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고맙습니다. 하지만 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그게 필요한 상황이 오면 이미 저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있으나 마나 마찬가지입니다."
- "어째서인지 난 예전부터 도와 달라고 하는 놈보다,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놈을 더 도와주고 싶더라고. 라신이 찾아내기 전에 내가 먼저 가서 수사나드를 설득해 보지."
"미친 거야? 놈을 상대로 설득 같은 게 통할 것 같아? 총에 맞을지도 몰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일어나도 할 수 없지."
"잔센!"
녹스는 흔들림 없는 친구의 눈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결심한 이상 잔센은 듣지 않을 것이다.
- "뭘 그렇게 걱정하나. 내가 없어지면 자네의 원수가 하나 줄어드는 건데."
"정말 그렇게밖에 말 못 하겠어?"
“착각하지 말게. 난 자네와 우정 놀음이나 하려고 따라다니는 게 아니야. 진 빚을 갚고 나면 언제든 망설임 없이 쏠 거다."
녹스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잔센이 자길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거라 생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잔센의 얼굴에는 한 점 과장도 거짓도 없었다. 녹스는 이를 꽉 물었다.
"그럼 가 버려, 멍청한 자식."
- "잘 있게."
녹스를 남겨 놓고 여관 입구로 걸어가던 잔센은 나가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자네와 함께한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 홀로 남겨진 녹스는 한동안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떨고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망할 자식, 갈 거면 그냥 가지 그딴 얘긴 왜 하고 가는데!"
그는 돌진하듯 2층으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 돌진하듯 다시 내려왔다. 여관을 박차고 나가는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총이 들려 있었다.
- "운명이라는 게 참 사납지, 안 그래?"
바드레 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사나드가 자는 동안 밤새 기둥에 묶여 있어야 했기에 얼굴이 몹시 초췌했다.
"그때 그렇게 내 눈앞에서 도망가 버린 사람이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매달린 수사 앞에 한가로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즐거워하던 수사나드는 꼬치에 끼워 불 위에 올려 둔 고기가 노릇노릇 익자 후후 불면서 한 점 떼어먹었다.
"괜찮군. 원했던 사람 고기는 아니지만 뭐."
- "그나저나 그 꼴은 당신과 별로 어울리지 않네. 사제라니, 교회에서 당신 같은 사람도 받아주나?"
"사제가 아니야. 수도사일 뿐이다."
- 수사나드는 근처에 있던 부하 중 하나에게 고갯짓 했다.
"풀어 줘. 그리고 네 총을 줘."
바드레 수사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나드의 부하는 정말로 그를 포박했던 끈을 자르고 자기 총을 꺼내 아무 망설임 없이 쥐여 주었다.
- 바드레 수사는 아주 오래간만에 총을 잡는 감각을 느꼈다. 의지와 상관없이 옛 기억들이 주체하지 못할 속도로 떠올라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때 그것을 들고 최고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역시 당신은 그걸 들고 있어야 어울려. 이제야 옛날 분위기가 나는군 그래."
"나에게 이걸 왜 주는 거냐. 너를 쏘라고?"
"그럼 내가 무기도 없는 사람을 쏠 줄 알았어? 난 그런 치사한 놈이 아니야. 내가 누구?"
그가 부하들을 돌아보며 묻자 남자들은 마치 합창하듯 소리 높여 외쳤다.
"그라노스의 지배자! 데스탄콘의 벼락! 베르네욜의 유일무이한 대적자!"
"옳지, 옳지. 그게 나야. 나 수사나드라고."
- 그제야 바드레 수사는 그의 이름 앞에 왜 그렇게 많은 수식어들이 붙어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웃음이 났다.
"베르네욜의 이름 앞에 뭐가 붙어 다니는지 알고 있나."
그의 물음에 수사나드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베르네욜 앞에? 글쎄, 별거 없지 아마."
"별거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지. 베르네욜은 베르네욜, 그 이름만으로 충분하기에."
- 내내 명랑하던 수사나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경직되었다. 뒤에 포진해 있던 부하들도 긴장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언제 그가 폭발할지 몰라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웃기지 마. 그놈은 뭐 하나 한 일도 없으면서 소문만으로 그렇게 된 거야."
- "그것 참 자랑스럽기도 하겠군. 베르네욜은 이 도시 말고 모든 땅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그런데 너는 고작 이 도시 하나를 끼고 떵떵거리고 있군. 그라노스의 지배자? 웃기지도 않는군. 그라노스만의 지배자라는 호칭이 뭐 그리 자랑스럽단 말이냐."
느닷없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드레 수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수사나드는 그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총을 쐈다. 총알은 그가 묶여 있던 기둥에 박혀 있었다.
"옛날에는 이렇게 말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당신도 늙었군."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수사나드가 말했다. 그가 말한 이유와는 달랐지만 바드레 수사도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상대방이 총을 쏠 때까지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 "부탁이 하나 있다."
바드레 수사가 말하자 수사나드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와 함께 온 아이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
"알아. 그놈도 조만간 잡아 올 거야."
"그 아이는 나와 상관없다. 나를 죽이는 대신 그 아이는 보내다오."
- "내가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보내 줄 거지?"
"딱 하나 방법이 있긴 하지. 나와 결투를 해서 이기면 보내 주겠어."
바드레 수사의 몸이 움찔거렸다. 결투라.
다시는, 다시는 이 손에 총을 들지도 사람을 쏘지도 않을 거라 맹세했었다. 그것이 짐승 같던 자신을 거두어 준 신부에게 한 유일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라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 어리석은 세월이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저질러 놓고 세상을 등지면, 자신만 다 잊어버리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그를 기억했다. 그가 했던 많은 일들 또한.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것도 온전히 그의 몫.
- 태양은 뜨겁게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쪼아 대고 지면에서는 아지랑이가 올라와 발목을 잡았다.
적색의 땅 위에 감도는 침묵과 긴장은 오로지 두 사람만의 몫이었다. 다른 이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당장의 결과가 어찌 되든 흥미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은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거나.
- 카라보는 수사나드를 바라보며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셋 모두 훌륭했기에 뭉쳐서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카라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셋은 갈라졌다. 그것도 철천지원수가 되어.
각자 자신만이 가장 뛰어난 총잡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에게 애초에 단합이 쉬울 리 없다. 특히 수사나드는 자존심이 너무 세서 탈이었다. 그만큼 시기와 열등감과 강했다.
- "내가 가르친 세 놈 중에 두 녀석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 그러나 한 녀석만은 독보적이었어. 적어도 일대일로는 그 녀석을 이길 자가 없을 거다."
카라보의 말에 역시나 수사나드는 금세 반응했다.
"어느 놈?"
"날 이기면 가르쳐 주지."
- "이제 말해줘. 당신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게 누구지? 나야, 테사르야, 아니면 베르네욜이야?"
- "처음부터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지? 망할 늙은이, 언제나 나한테만 이런 식으로 심술 맞게 굴었잖아.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당신을 따랐어. 그걸 부인할 텐가? 그런데도 늘 이런 식이었지."
"착각하지 마라. 난 누구에게나 그랬어."
"대답해! 누구야, 누구냐고?"
- "진심인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하겠다고?"
테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레 수사는 그 표정을 보고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죽어 있는 자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때 거절했어야만 했다.
- 팔마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경악하던 참이었다. 같은 무리라고 해도 도시에서까지 항상 같이 있는 건 아니다 보니 개인행동에 이렇다 할 제약은 없었다. 각자 흩어지면 술집에 가는 놈도 있고 도박장에 가는 놈도 있고 사창가에 가는 놈도 있고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베르네욜의 경우에는 누구도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혹 알게 될까 오히려 두려워했다. 자신들의 대장이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존중을 담아 베르네욜이 무슨 일을 하든 정중하게 무시했다. 대장이니가 어디서든 뭔가 이득이 되는 일을 하겠지, 나머지는 알 바 아냐.
- 한데 지금 베르네욜이 보여 준 행동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었다. 베르네욜이 여자를 원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인데도 팔마는 이상한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
"렘이 없어서 그런가 보군."
정적 속에 가니시오가 툭 내뱉었다.
- 렘은 지금쯤 사막을 건너고 있을 거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틀이면 건널 거리였다.
그 정도도 못 하는 머저리로 키우진 않았어, 그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지, 혹은 그렇게 범 새끼가 되기 전에 솨 버렸어야 옳았는지도 몰라.
어찌 되었든 지금은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무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렘을 버릴 정도로 그가 멍청하지는 않았다. 아기 때부터 그녀를 돌봐 온 가니시오는 그녀에게 아버지와 같은 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 아버지라.
베르네욜은 어둠 속에서 낮게 웃었다. 어릴 때 그녀와 놀아 준 건 가니시오였고 밥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 준 건 팔마였다. 그런데도 두 살 때 처음으로 입을 뗀 렘은 베르네욜을 아버지라 불렀다. 한번 안아 주지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지도 않았는데.
생존 본능이야. 베르네욜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기일지라도 직감적으로 모든 걸 안다. 그녀는 무리 내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그런 자에게 아버지라 불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또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 "괜찮으십니까?"
"네놈 눈에는 괜찮아 보이냐."
"예? 설마 맞으셨습니까?"
팔마는 베르네욜의 상처를 보고는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베르네욜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게 혐오감이라는 것을 읽었다.
이 녀석은 정이나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오직 자신을 내리눌러 줄 자를 찾아다니지. 나에 대한 두려움이 흔들려서는, 존경심이 없어져서는 금세 등을 돌릴 거다.
그래서 그는 팔마의 얼굴을 후려쳤다.
- "멀쩡한 놈들 데리고 가서 이놈 가족과 그 밑에서 일하던 놈들 모두 쓸어 버리고 와라."
"전부 다요?"
"그래. 그리고 시체는 광장에 널어놓도록."
- 모든 게 밤 안에 끝나야 했다. 누군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테사르가 도착하기 전에.
- "부상자로서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제안?"
"네가 아직 명예를 아는 총잡이라면 나와 일대일로 결투를 하자. 나머지는 모두 배제하고 너와 나, 둘이서 모든 걸 끝내는 거다. 모든 게 시작된 그 옛날처럼."
부하들의 눈이 베르네욜에게 돌아갔다. 누군가는 겁을 내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기대하고 있었다. 희대의 악당과 희대의 저격수의 결쿠라니. 그런 것을 볼 일이 또 있을까?
- "내가 거기에 응해야 하는 이유는 뭐지."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지. 명예라든지 승부욕이라든지. 하지만 네가 찾는 게 설마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내가 너를 이겨 얻을 게 뭐냐는 말이다."
- "네 아들의 마지막 모습 같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는 있겠지."
- 테사르의 기대 혹은 우려와 달리 베르네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했다.
"그 정도는 언제든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네가 궁금해할 만한 걸 하나 알고 있거든. 너 또한 네 딸자식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고 싶을 거 아닌가."
- 도발을 한 쪽은 자신인데도 테사르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총을 꺼내 난사할 뻔했다. 간신히 자신을 내리누르는 그에게 베르네욜이 담담히 덧붙였다.
"궁금하겠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던 그 아이를 내가 어떻게 죽였을까? 죽음으로 데려가려고 안을 때 그 아이는 내게 손을 뻗더군."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테사르의 눈에 핏발이 솟았다. 이마에서도 목에서도 터질 것처럼 힘줄이 곤두섰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든 자신이 토해 낼 것은 오열뿐임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귀여워했었지. 네가 내 아들을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아이들을 죽였어. 서로의 아이들을. 자라났으면 우리를 삼촌이라고 불렀을 아이들을. 결국에는 서로가 자기 자식을 죽인 것과 다름없다."
- 테사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덜미를 찌르는 태양은 뜨거웠고 몸에서 열이 났다. 어깨 상처가 말도 못 하게 아파 왔다. 내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더라...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네 말에는 나도 동감이다. 오늘 여기서 끝을 내도록 하지."
베르네욜은 상처 입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가니시오가 부축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어 거절하고 대신 속삭였다.
"내가 죽으면 렘을 찾아 죽여라."
가니시오가 끔찍한 거부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다른 놈들은 따라오지 마라. 둘이서 해야 할 말들이 조금 많으니까."
- 아주 오래전의 일. 이제는 두 사람의 발밑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흙먼지처럼 덧없는 기억들.
서로를 위해서라면 심장이라도 빼어 줄 것 같은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분야를 두고 최고를 다투었으나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서로를 시기하는 일도 없었다. 아름다운 자매를 각자의 부인으로 맞이했고 이웃해 살면서 한 가족처럼 지냈다. 각기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자신들을 삼촌이라고 부를 귀여운 아이들을.
- 파멸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 흔하디 흔한 사랑. 그러나 결과는 결코 흔치 않은 재앙이었다.
각자의 부인이었던 자매는 사실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과 결혼한 쪽은 동생이었다. 처음에 언니는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진심으로 동생을 축복해 주었고, 그 남자를 대신해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그럼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잊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독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쑤셨다. 그 남자와 함께 행복해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살의가 치솟았다.
-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혹은 모두의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반면 총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격렬한 감정이 동반된 그 물건은 자매는 물론이고 형제와도 같던 두 친구에게조차 너무나 위험한 물건이었다.
- 테사르는 이따금 후회했다. 그때 아내와 억지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베르네욜을 사랑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그녀가 자기 여동생을 총으로 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때 바사를 막지 못했나."
베르네욜의 탁한 목소리에 테사르는 자기 총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좀 더 그녀를 잘 다독이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조롱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다."
"천만에. 그건 단지 시간문제였어. 내가 어떻게 했어도 그녀는 에리사를 죽였을 거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점은 여전하군. 비겁해."
"어찌 됐든 바사는 내 아내를 죽였고 그래서 나도 바사를 죽였다. 우리가 살아온 세계의 방식 그대로를 따랐던 거다. 그걸 타당한 복수가 아니라고 말할 테냐? 규칙을 먼저 깬 건 너다, 테사르."
- 그의 말이 옳았다. 테사르로서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내 아내를 쏴 버렸다는 말만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성이 날아간 채 내 아들이자 네 조카인 아이를 데려가 개처럼 죽였다는 거군."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수? 아니지. 아니야, 테사르.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라."
- 베르네욜은 고개를 들어 무방비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이지만 테사르는 그대로 그를 쏴 버릴까 생각했다. 망설이는 사이 베르네욜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너는 그저 분풀이를 했을 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살짜리 갓난아이한테. 그런 네가 도대체 누구더라 겁쟁이라고 하는 건가?"
"그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너에게 사죄하려고 했어. 제대로 다 설명하려고 했다고!"
"사죄, 설명? 안 듣길 잘한 거 같군.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일 것 같지 않거든."
테사르는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솟는 걸 느꼈다.
"그래서 너도 같은 짓을 했지 않나! 내 딸, 하나뿐인 내..."
-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하다. 불쌍한 이들이 그렇게 다 죽었다. 우리 둘만 남았지. 가장 큰 죄인들만 살아남았어.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일 거다."
- 테사르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총을 뽑을 준비를 했다. 진심으로 베르네욜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상대와 달리 자신은 모든 걸 버린 상태였으니까. 이 자리에서 베르네욜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물론 그전에 베르네욜에게 해 줄 말도 하나 있지만.
- "미안하지만."
긴장감이라곤 하나 없는 목소리로 베르네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이길 방법을 알고 있다, 테사르."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네 딸은 살아 있어."
- 겉으로는, 아니 속으로도 자신에게 어떤 동요도 없다고 테사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모를 뿐 이미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 "스승인 카라보가 말했지. 우리 셋 중 멀리서는 네가 가장 뛰어나고 다수를 상대할 때는 레모가 가장 낫고 일대일 결투로는 내가 제일이라고. 알고서나 이런 일을 저지른 건가? 실망이로군, 테사르."
- 다만 그는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애썼다. 콕스 강에서 만났던, 그조차도 감탄했던 저격수의 희끄무레한 모습, 그 그림자만이라도.
나무에서 뛰어내려 언덕 뒤로 숨을 때 그녀를 잠깐 본 것 같기도 했다. 그 뒷모습이 어땠더라. 자신을 닮았던가? 혹은 제 어머니를 닮았던가?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왜 그녀의 얼굴을 한번 제대로 볼 생각도 못 했던지.
- "다시는, 내가 하는 일에 감히 끼어들지 마라."
팔마는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덜덜 떨었다. 베르네욜은 그의 앞에 침을 뱉고 자리를 떴다.
지겹다. 모든 것이 지겨웠다. 오랫동안 그는 테사를 없애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이루어진 지금 어떤 해방감도 희열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확실히 내 손으로 끝낸 게 아니어서? 아니면, 이제 그런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나?
더 이상은 답을 얻을 수도 없게 되었다. 테사르를 두 번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 그가 바라보는 건 시야에 들어오는 어떤 풍경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만 있는 일종의 공허함인 것 같았다. 그 시선에는 분명한 대상은 없되 표출해야만 하는 분노,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담담히 머리를 긁적일 것 같은 순진무구한 잔혹성 등이 담겨 있었다.
라신은 그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직 자기 힘으로 자신만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상식이나 논리, 도덕성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하면 그는 왜냐고 묻지조차 않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말한 자를 쏘리라.
- 사실 그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수사의 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게 정마로 바드레 수사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사람 모양을 한 바위 덩어리가 흙먼지와 피가 뒤섞인 지저분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 정말로 죽었어도, 모두가 분명히 죽었다고 말해도 라신은 자신이 기도로 그를 살려 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태까지 스스로를 희생하여 많은 병을 치료해 왔다.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오게 만드는 일은 아직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그걸 위해서가 아니라면 이 능력이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분명한 죽음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런 마음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것은 절망도 슬픔도 아니었다. 끔찍한 공포였다.
- "결론은 간단한 거였군. 네놈들은 그 녀석이 마음에 들었단 거지."
마마 수의 바에서 가장 독한 위스키를 꺼내 마시며 수사나드가 중얼거렸다. 녹스는 위스키 냄새를 맡을 때마다 눈살을 한껏 찌푸렸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뭐라고 말도 못 했다. 잔센이 그의 빈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렇소."
- "그럼 네가 믿는다는 그 신은 악신이냐? 우리가 죽이고 해친 그 많은 사람들이 믿는 신은 그럼 무슨 신인데?"
가니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팔마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프긴 한 것 같군.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맹수가 사냥감에게 동정심을 갖는 순간 그 자신의 생명은 끝난다."
- "대장에게 말해서 잠깐 쉬자고 하겠다."
"이 기회에 날 아예 죽이려고?"
"네 탓으로 만들지 낳는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 가니시오는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로 베르네욜을 앞질러 갔다. 베르네욜은 그를 힐끔 보았을 뿐 특별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니시오는 그런 베르네욜의 앞을 막아선 뒤, 갑자기 말 위에서 땅으로 풀썩 떨어졌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베르네욜을 비롯한 무리 전체는 가니시오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가니시오가 몸을 뒹굴며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아프다, 대장. 오늘은 더 이상 못 가겠다. 여기에 자리 잡고 쉴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 베르네욜은 잠깐이었지만 무리 모두에게 가니시오를 그대로 밟고 지나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매사에 진지한 쿤족 사내가 보여 주는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에, 그보다는 오랜 동료에 대한 일말의 존중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베르네욜은 팔마 쪽을 힐끔 돌아보고 말했다.
"두 놈은 이리 와서 늙은이 부축해라. 다리에 생채기 하나라도 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머지들은 짐 내리고 천막 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니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베르네욜은 못 본 척해 주었다. 그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나 그러는 편이 마음 편했다.
- 다른 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가 때론 놀라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잠시 후 그들을 덮칠 재앙에 대해서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베르네욜은 그런 때가 가장 좋았다. 누구도 비극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 자신이 나타나 악몽을 던져 주는 것, 행복했던 시간을 생애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하여 삶에는 언제 어떤 것이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며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더라도 언젠가는 깨어지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자신이 배운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말하자면 그는, 악과 불행의 신실한 전도자였다.
- "이대로 우리가 짐과 식량을 다 빼앗아 가며 너희는 어차피 사막에서 말라죽을 것이다. 그러니 선택권을 주지. 내 총에 맞아 죽겠나, 태양에 맞아 죽겠나?"
남자는 냉큼 대답했다.
"태양에 맞아 죽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인간들은 이상하게 가능성이 희박한 일도 자기에게는 일어나리라 믿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기적이라는 단어까지 붙여 가면서. 내 총을 피한다 해도 죽는 건 마찬가지야. 오히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 "하나 더 해 봐."
"마음에 들어서요? 아니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건가요?"
"마음에 들어."
여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런 거라면 이쪽에서도 한 가지 더 받아야지요. 노래를 하나 더 하는 대신 제 친구들도 함께 보내 주세요."
- "저들에게 물도 주고 말도 줘서 보내 주겠다. 하지만 너는 못 가."
"어... 어째서요?"
"앞으로 나를 위해 매일 밤 노래할 테니까."
- "불공평하지. 따지고 보면 내가 너희를 습격한 것도 그래.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공평하다고 말하기 어렵지. 하나 그래서?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래를 내려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밑에는 피를 빨아들인 검은 모래가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고 크게 숨을 내쉰 그녀는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 노래가 끝나자 그는 약속한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물과 식량, 말을 내어 주었다. 그들은 친구도 강아지도 내팽개치고 냉큼 사막을 내달렸다. 도시와는 가장 먼 방향이었지만 베르네욜은 그것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 '왜?'
가니시오가 손을 들어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팔마는 쑤시는 상처와 베르네욜의 폭거에 대한 부당함, 렘이 사라진 뒤로부터 쌓여 온 이유 모를 초조함 등이 겹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만 그것을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무자비한 쇳덩이로 폭발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20년 가까이 함께하고 존경하고 섬긴 사람이다. 어쩌면 그런 세월이나 인정, 의리, 형제애 따위는 팔마 혼자만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자신만은 그걸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게다가 그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상대는 베르네욜이었다. 그에게 반항한다는 것, 뒤를 치거나 배신한다는 일은 팔마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 '게다가 뒤에서 쏘지 않는 이상 일대일로는 못 이긴다.'
팔마는 자신이 가능성까지 생각해 본다는 것에 유쾌함에 가까운 경악을 느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여자가 렘의 자리를 침범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렘의 자리는 아무나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고, 그건 즉 팔마나 가니시오, 베르네욜의 곁에 있는 누구라도 아무나가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팔마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의 머리 용량으로는 한계인 데다 더 생각했다가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 "굳이 살고 싶어서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내게도 정당한 이유는 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난 신부를 싫어해."
라신은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맨눈으로 수사나드를 바라보았다.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라니, 그게 제일 중요한 이유다."
-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 때문입니까?"
"너희들이 가진 것 또한 맹목적인 믿음뿐이잖아. 너희들이 믿고 따르는 성경이란 결국 모숨과 편협함과 신의 어린애와도 같은 질시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수사나드는 나른한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말했다.
"성경을 읽어 봤다면 너도 알 거 아닌가? 소위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인물들이 신의 명령과 시험에 따라 근친을 저지르고 패륜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지 않느냐."
- "인간은 결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죄를 짓습니다.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다시 온전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 성경을 비롯한 우리가 배우는 성전의 교리들입니다. 물론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관점으로는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쓰였고, 그들이 살던 시대의 기준과 도덕관념을 현재의 관점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헛소리하지 마.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패륜은 패륜이다. 너희가 믿는 신이란 결국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자식을 죽여 보라 말하는 편협하고 유치한 자다. 태초로 돌아가 뱀과 열매로 장난한 것만 봐도 그 점은 명확하지. 하나 묻자. 인간은 신의 장난감이냐?"
- "우리는 그분의 자식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 사랑이라. 드디어 그 말이 나오는군. 만물의 진리는 사랑이라 그거지? 그래서 너는 나에게 지금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총을 겨누고 있는 거냐? 내가 보기엔 나를 죽이기 위해 겨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 총을 들고 있었기에 라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 "너도 결국에는 마찬가지다. 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네 나약함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들만이 신을 믿는 거다. 그보다 편리한 도피처도 없거든. 하지만 세상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한 꺼풀만 벗겨 내면 마침내 보일 거다. 네가 들고 있는 그 차가운 쇳덩이만이 진실이라는 거."
- "그건 무슨 눈이냐."
"당신을 생각하는 눈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쇳덩이만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눈이요."
"아 그래, 동정. 너희 족속들은 꼭 그렇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자기만이 옳다는 듯, 다른 이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가엾다는 듯 바라보지. 본인이 안다고 자부하는 신이나 신앙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납득시키지 못하면서. 그렇다면 말해 봐라. 네가 믿고 있는 진실은 무엇이냐. 단지 신?"
- "하얗게 별이 박혀 있는 여름밤입니다. 땀을 쓸어 가주는 청량한 바람입니다. 발에 감기는 부드러운 흙, 등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햇볕입니다. 돌담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끼와 우는 풀벌레, 날아가는 나비입니다.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웃음소리, 곡식을 거두는 아낙들의 노랫소리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남을 의심하지 않는 나무이며, 들리지는 않지만 모든 생명들이 분명하게 숨을 쉬고 있는 소리입니다."
수사나드가 낮게 웃었다. 라신은 이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에게 있어 진실이란, 이 세계입니다."
- 수사나드는 라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한 번도 무엇으로부터 상처 입거나 배신당해 본 적 없는 눈이다. 그러니 그렇게 거리낌 없이 이 세계를 진실이라 말할 수 있을 테지.
그러나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더없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라신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음을. 보통의 광신도들이 자기만의 신념에 홀려 있는 것과는 다른 눈이었다. 이 녀석은 충분히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이나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않았다. 진실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이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있는 녀석아. 그럼 이제 세계를 위해 날 제거할 거냐?"
"당신은 제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유를 말해 줄까?"
- 그가 자꾸만 같은 말을 되뇌는 것이 실망감 때문임을 라신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수사나드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마침내 그것을 확인받는 기분은 역시나 달갑지 않았다.
- "저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용서할 테니까요."
"용서?"
"저를 죽이는 것도, 수사님을 죽인 것도 모두 용서하겠습니다."
- "이래서 성직자 놈들이 싫다니까. 약해서 죽어 나자빠지는 주제에 항상 자기네가 우위에 있는 줄 알아. 네가 뭘 어떻게 나를 용서한다는 거냐? 용서라는 건 말이야, 힘으로 나를 굴복시키고 땅에 처박아 얼굴을 밟아준 뒤 총으로 겨누면서 해야 할 말이다. 지금처럼 총을 내려놓은 채로 하는 게 아니라."
"그건 당신들 세계의 법칙일 뿐입니다. 제게 있어 용서란 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착한 척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라.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지 않냐? 난 네가 그렇게나 아끼던 또 하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죽였다. 그야말로 개처럼 죽여버렸지. 사자에 대한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땅에 내다 버리고 왔으니까. 해가 이렇게 뜨거우니 지금쯤이면 꽤나 흉측하게 부패해 가고 있겠군."
라신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그 일도 용서하겠습니다. 그분은 이미 제가 거두어 묻어 드렸습니다. 당신이 교회처럼 그분의 무덤을 훼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걸 어쩌나, 그렇게 말하니까 손수 가서 훼손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럼 다시 묻어 드리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 "그렇게까지 날 용서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네놈이 잘나고 고귀하신 성직자라서?"
"아닙니다. 당신을 용서하려는 이유는..."
라신은 코앞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용서야말로 유일하게 당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은 총을 겨누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도리어 죽음을 행사하는 쪽이 되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번 죽음을 행사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걸 담담히 인정하시는 분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이 아닐 것입니다."
- "당신이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결론은 용서입니다. 당신은 무엇도 용서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복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고귀한 관념으로 복수당한 당신을 동정합니다."
수사나드는 입을 꾹 다문 채 얼굴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라신을 끌어당겼다. 라신은 밝은 초록 빛깔이 눈동자가 그렇게 무섭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마치 뱀의 눈동자 같았다.
"너는 마치, 네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 "용서하겠다느니 죄를 사하겠다느니, 많은 성직자 놈들이 내 손에 죽어 가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고귀한 행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건 기만이다. 두려움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 손 쓸 수 없이 닥친 불행을 마치 자기가 선택한 일인 양 미화할 뿐이다. 어차피 막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정당화해야 죽더라도 마음이 편하니까. 난 그런 놈들보다 차라리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는 놈들이 인간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본다. 적어도 그 녀석들은 자기 목숨을 소중히 할 줄 알고 스스로에게도 솔직하니까."
"저는 두려움을 속이는 게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까지 두려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필요한 일이니까요."
- 라신은 그의 등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샷건을 보았다.
지금 집어 들면 틀림없이 수사나드보다 먼저 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막는 건 오로지 스스로의 신념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신념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수사나드의 말마따나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행위야말로 인간적으로 훌륭한 게 아닐까?
바드레 수사는 분명히 말했었다. 너 자신 없이는 신도 우주도 없는 것이라고. 라신을 살리기 위해 그가 버린 목숨마저도 가치 없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 "왜, 이제야 목숨에 미련이 남는가 보지? 죽을 때가 되어야만 가면을 벗는 놈들이 꼭 있지."
"아닙니다. 저도 제가 죽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당기십시오."
- '젠장, 어제 보자마자 바로 쏴 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많은 말을 나눴다. 너무 유심히 얼굴을 본 나머지 머릿속에 박혀 버렸다. 자기가 죽인 사람이 얼굴이 이따금 떠오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라신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지금 당장 아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너는 나를 너무 닮았어.'
- 처음부터 자기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건, 바드레 수사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어 버린 건 그 말이 사실이길 간절히 바란 탓이었다.
- "그게 사실이 아니어도, 네가 그렇다고 말했으면 나는 믿어 버렸을 거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너를 아꼈을 거다.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곤 했다. 내게 아이가 있다면 이렇게 해 줄 텐데, 저렇게도 해 주었을 텐데. 테사르나 베르네욜이 그러하듯 자식 때문에 일생을 복수에 미쳐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감미로운 원정길로 받아들였을 거다."
- "어머니와... 누이라고요."
그들이 한때 존재했으며 또한 살해당했고, 눈앞에 죽어 있는 아버지와 같은 상대로부터 당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일은 단지 머리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동안 간신히 평정을 지켜 온 라신의 생각과 마음 모두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베르네욜..."
복수하러 간다. 복수하지 말거라.
- 마침내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차갑게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조용하게.
라신은 이제 스스로가 웬만한 일로는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일도 할 수 있으리란 것 또한 알았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그것을 새로운 세계로의 성장, 각성, 혹은... 타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라신은 테사르의 관에서 그가 남긴 롱라이플을 꺼내 들었다.
- 녹스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손은 어느새 남자의 바지를 붙잡고 있었다. 남자를 따라가면서 녹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남자는 그런 응석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황야에 불을 지피고 잠드는 밤이면 언제나 그의 웃옷을 벗어 녹스에게 덮어 주었다.
세넌빌에 녹스를 데려다주고 남자는 미련 없이 떠났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그의 등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녹스가 기억하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은 등에 기이할 정도로 기다란 총신을 멘 모습이었다.
- 그가 테사르였다. 녹스는 총잡이들 세계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녹스에게 은인이었을 수도, 혹 구차한 삶을 이어 가게 한 원수일 수도 있었다.
- "언제는 알고 따라다녔나.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군."
"죽으러 가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이번만은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 "죽음은 긴 잠일뿐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지.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쿤족 세계에서나 그렇겠지, 여기선 아냐. 젠장, 나는 신도 안 믿는다고."
"괜찮다. 내가 다시 태어나면 너도 다시 태어난다."
- "다음 생에서 우리는 형제로 태어나니까."
팔마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쳐다보았다. 가니시오는 드물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대장 밑에 있었던 게 거의 20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 정도 됐다. 내가 매일 밤 그렇게 기원을 드린 시간이."
- "앉아, 렘."
강아지는 발라당 뒤집어졌다. 베르네욜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총알이란 게 직선으로 뻗어 나갈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거리가 멀수록 포물선을 그리지. 이건 바람의 영향도 있고 총마다 사정이 달라. 네 스스로 체감하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어."
- "침착하게 잘하는군. 하지만 네가 아무리 100야드 밖에 놓인 병을 전부 쓰러뜨린다 해도 사람을 쏘는 것은 달라. 너는 정말로 베르네욜을 쏠 수 있겠냐?"
라신은 총을 내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아까부터 총을 손에 들고 있긴 했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이것으로 무얼 한다는 그런 목적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거기에 몰두할 뿐이었다.
- "마음을 잘 먹어 두는 게 좋아. 나와 독대했을 때처럼 말로 해 보겠다는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론 안 된다. 나야 인내심을 가지고 다 들어줬지만 베르네욜은 안 그럴 거야. 말이라는 것 자체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그에게 사람다운 무언가를 기대하지 마라. 그냥 보이는 즉시 쏴 버려! 그게 그한테는 예의야."
- "그 사람은 제 가족들을 왜 죽인 겁니까?"
수사나드는 라신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네가 직접 녀석을 무릎 꿇리고 물어봐라."
- "잘한다! 역시 내..."
수사나드는 못 할 말을 한 사람처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녹스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라신은 수사나드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그런 그에게 연민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못 느낄지도 모른다.
하나 그런들 또 어떻단 말인가.
라신은 담담히 총을 들어 네 번째 표적을 겨누었다.
- '이건 같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살려 보내 줄 기세는 아니야.'
문득 베르네욜이 왜 갑자기 그라노스를 치겠다고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꽤 옛날 일이지만 그라노스 얘기가 나왔을 때 베르네욜이 한 말이 있었다.
"내가 그 땅을 왜 놔두었을 거라 생각하지. 그건 그 땅이 훌륭한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나를 증오하는 이들이나 두려워하는 이들 모두 동류를 구하겠다며 그곳으로 가지. 그리고 거기서 다 함께 나를 욕하고 분노하고 술을 마시며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적들을 손쉽게 한 곳에 몰아넣고 나머지 대륙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야."
- 그래놓고 이제 와서 새삼 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베르네욜 무리는 아직 북쪽 끝으로 가서 그곳에만 있다는 백색 하늘을 보지 못했다. 남쪽의 시퍼런 바다나 초승달 섬도 본 일이 없었다.
- 그녀는 두려웠다. 딘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인질이 되어 베르네욜의 앞에 나섰을 때, 만약 그의 얼굴에 아무 변화가 없다면. 조용히 혀나 차고 인질이 된 멍청한 부하 따위 망설임 없이 쏴 버린다면.
'그래도 죽는다면, 죽어야만 한다면 나는...'
렘에게는 총잡이로서의 긍지가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인정하는 상대로부터 죽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딘처럼 이름도 모르는 비겁한 총잡이 따위가 아니었다.
'누군가 날 죽일 수 있다면 그건 당신뿐이야. 그러니 빨리 와요, 빨리.'
- "그러고 보니 죽은 신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남긴 말이 있었어."
라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잔센은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녹스는 생각난 김에 말해 버리기로 했다.
"네가 내 아버지를 구원해야 한다고 하더군. 너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가 네 진짜 아버지라고 말이야. 근데 진짜 아버지란 건 무슨 소리냐? 넌 아버지가 여러 명이냐?"
- 난 네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네 수사라는 작자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문득 수사나드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라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수는 없었다. 수도원에 찾아와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던 테사르의 손, 그건 분명히 아버지의 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결코 바드레 수사를 죽인 자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는 없었다.
-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진다. 내 경우에는 그랬어."
"그렇군요."
- "연습은 잘 되어 가나? 수사나드가 직접 가르친다지?"
"잘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물체와 움직이는 물체를 쏘는 건 꽤 다르다고 하더군요. 움직이는 물체까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건 어느 정도 쏘아 맞힐 수 있습니다."
"그 정도가 딱 좋아. 네 손으로 직접 복수해야겠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는 마라. 다른 이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너는 살아남아서 베르네욜의 시체에 침이나 뱉어주면 된다."
"아마 그의 장례도 제가 직접 치르게 되겠지요? 이 근방에 신부 비슷한 거라곤 저뿐이니까요. 여러 번 해보았더니 이제는..."
라신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고 잔센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툭툭 쳤다.
그때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규칙적로 울리는 세 번의 총성.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베르네욜."
녹스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 "괜찮나? 네 복수를 내가 대신해서."
녹스는 길게 입을 찢어 킬킬거리고 웃었다. 입가가 움직일 때마다 흉터도 같이 들썩거렸다.
"괜찮아. 나도 나름의 복수를 했으니까."
"그래, 그럼 이제 알고 있겠군."
섬뜩한 기분이 들어 녹스는 웃음을 멈추고 잔센을 바라보았다. 잔센도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이것으로 은혜 갚음은 끝났다는 걸."
- "난 그냥 강한 척하고 싶었어. 무서워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특히 삼촌이 제일 무서웠고, 너도 그랬어. 생긴 건 네가 제일 흉악하게 생겼잖아. 이제 흉터까지 하나 더 늘어났으니 어쩔래? 그런 얼굴을 해 가지고는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소리는. 아침마다 네 얼굴 보면서 경기 일으키라는 거야 뭐야. 나랑 같이 살고 싶으면..."
렘의 말이 거기서 멎었다. 그녀는 팔마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있던 무언가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어딘가 허전했다.
- 렘은 그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의 팔이 툭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생기라곤 하나 없는 둔탁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렘은 총을 놓고 팔을 뻗어 그 손을 잡아 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총을 잡고 살았으면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특히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는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20여 년. 그 오랜 시간 베르네욜과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하지만 지나온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할 줄 알았다.
- "빤히 보이는 짓을 하는군, 레모. 대화는 그만두고 우리가 할 일이나 마무리 짓는 게 어떠한가."
말을 마치고 그는 오른쪽 코트 자락을 걷었다. 허리춤에 그때까지 한 번도 뽑지 않은 사탄의 뿔이 꽂혀 있었다. 내색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건만 수사나드는 반사적으로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베르네욜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지만 수사나드는 그가 꼭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한데 그놈의 어울리지도 않는 강아지는 계속 안고 있을 거냐?"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테사르라면 모를까 너는."
- 수사나드는 머리 위로 무언가 확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기가 무얼 한다는 의식도 없이 건홀더에서 총을 꺼냈다. 그러나 베르네욜을 겨냥하는 순간 그가 먼저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죽는다.
-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이 당할 것 같았습니다."
"날 뭘로 보는 거냐? 그나저나 나도 복수의 대상 아니었냐? 살려 줘서 뭘 어쩌려고."
라신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베르네욜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 라신은 그토록 무섭게 가라앉은 깊은 눈을 태어나 처음 보았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자의 눈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마주 볼 뿐이다.
문득 바드레 수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를 만난다면 레바트만이 그러했듯이, 악마일지라도 참회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 그건 진심이었다. 라신에게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마주하고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해했다. 아무것도, 심지어 레바트만이 와도 그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눈은 결코 변형되지 않는 성질의 어떤 것이었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악인지도 모른다. 이미 불인 것을 물로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도 마찬가지였다.
- "당신이 제 가족을 죽인 분이로군요."
라신이 입을 떼자 베르네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대신 곁에서 미리온이 어쩔 줄 몰라하며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애썼다.
"글쎄, 몰살시킨 가족이 너무 많아서."
"제 아버지는 테사르십니다."
베르네욜의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입을 연 그는 잠시 후에야 끓는 듯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 "어디서 뭘 듣고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웃기지 마라. 테사르에게는 아들이 없어."
조금 전 뜸을 들였던 거에 비하면 다소 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친 대꾸였다. 라신은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그분에겐 아들이 있고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와 나는 친구이자 형제였고 서로의 아내와 아이들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마라."
- "듣기로 당신은 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누이도 죽였다고 하더군요."
잠시 동안 베르네욜은 라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신은 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는 당신에게 그 복수를 하겠습니다."
그는 내려뜨렸던 라이플을 우아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동작으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젊었을 적 테사르와 거의 흡사해서 한순간 베르네욜은 라신의 말을 모두 믿을 뻔했다.
- "이 앞뒤 꽉 막힌 섬사람 놈아, 그 이야기를 지금 꼭 해야겠어?"
"그럼 언제로 할까. 베르네욜을 잡은 뒤에? 그들 일당을 모두 다 몰살시킨 뒤에? 수사나드의 손에서 벗어난 뒤에?"
"언제가 됐든 지금은..."
"녹스."
진중한 친구의 목소리에 녹스는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끼면서.
"내게는 그중 어느 것보다 자네와의 일이 가장 중요해."
- 녹스가 후회하는 몇 안 되는 과거의 기억 중 하나, 그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없었더라면 녹스는 잔센의 말을 달리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잔센이 말하는 그 빌어먹을 일이라는 건 서로를 죽이는 것에 관한 문제였다.
- "진심이야? 우리가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함께 이렇게나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여전히 죽이고 싶은 거야?"
"내가 갈라파스 사람인 이상, 섬의 율법을 따르는 이상은 해야만 해. 내가 죽이고 싶어 하고 말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한테는 있어, 망할 자식아! 말해 봐, 네놈이 내 목을 직접 따 버리고 싶다고, 머리에 쇳덩이를 박아 주고 싶다고 해. 아니, 말할 필요도 없어. 지금 해, 지금 죽여!"
- 녹스는 총을 쥔 잔센의 오른팔을 직접 들어 올려 자기 이마를 겨냥했다. 그리고 잔센을 똑바로 노려보며 씹어 뱉듯 말했다.
"당겨 보라고."
잔센의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상황이긴 하지만 녹스는 그가 정말로 쏴 버릴까 봐 두려웠다. 죽는 것보다는 친구라고 믿었던 사내가 그런, 아무 감정도 미련도 없는 얼굴로 자기를 쏴 버릴까 봐 두려웠다.
두 사람만이 있는 창고는 좁고 어두웠다. 바깥에서 들리는 총성 따위는 더 이상 그들과 관련된 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 잔센은 녹스를 바라보며 미동 없이 팔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총을 내렸다.
"힘들군."
- 지금 상황이 힘들다는 건지, 부상당한 채로 그러고 있는 것이 힘들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잔센은 고개를 돌려 어느 한구석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이 상처로는 임무를 완수하는 게 무리일 것 같군. 출혈이 심하니 가만히 놔두면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나 혼자서는 움직일 힘이 없으니 그렇게 되면 많이 곤란하겠군."
녹스가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잔센은 계속 혼잣말하듯 말했다.
"혹시 누가 도와준다면 모를까. 도와준다면, 그는 내 생명을 구한 셈이 되겠지. 그럼 나는 섬의 율법에 따라 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고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따라다녀야만 하겠지."
말을 마친 잔센은 녹스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녹스는 이해했다. 그래서 다만 고개를 숙인 채 조끼를 벗어서 잔센의 상처를 꽉 묶어 주었다.
"잊지 마. 네 생명의 은인은 나라는 걸."
"잊을 턱이 있나."
-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사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니시오도 그녀의 빠른 속도와 정확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만 몰랐을 뿐 사실 팔마도 예전부터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혹은 베르네욜일지라도.
- 라신이 반 발자국 물러나고 나서야 그녀가 살기 어린 눈을 거두고 다시 베르네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럼 원수의 자식이었던 거네요. 그게 사실이라면 나를 그렇게 키워 줬을 리가 없잖아요. 삼촌은 원수의 자식에게 총을 가르치나요? 최고의 저격수로 만들어요?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별자리를 가르쳐 줬잖아요. 대륙의 지도를 펴 놓고 도시의 이름을 가르쳐 준 것도, 동서남북 어디로든 다니면서 여러 세계를 보여 준 것도 삼촌이었잖아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건 뭐든 줬잖아요, 한 가지는 아니었지만."
"그건..."
"나를 사랑했잖아."
-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고 이를 꽉 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를 사랑했잖아요."
베르네욜은 초조하면서도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착각이다."
"나는 다 알아요. 안다니까요."
"잘못 안 거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 "네 아버지 것이다. 이것으로 나를 쏴라."
- "언젠가 내게 물은 적이 있었지. 너를 왜 주웠느냐고. 이날을 위해서였다. 때가 되면 나를 죽일 사람으로서 너를 준비했다."
렘은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뻗은 그녀의 손에 총이 잡혔다. 베르네욜은 그녀를 마주 보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혹은 렘 혼자 그런 것을 보았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너의 손에라면, 기꺼이 죽겠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 그녀는 깨달았다. 베르네욜이 아무리 부정한다한들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사랑하였음을. 이 총을 쥐여 준 것이 그 증거다.
- 얼마나 원했던가. 그의 뒤에서 걸어갈 때마다 그 넓은 등이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머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까끌까끌한 수염 사이 마른 입술이 자신에게 입맞춤해 주기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당신을 쉼 없이 사랑하였다.
- 타앙...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인 듯 귀에만 감도는 이명인 듯, 바로 곁에서 난 총소리가 그렇게 들려왔다.
지독히도 원했던 사람에게 마침내 안기듯 렘의 몸이 베르네욜의 품 안으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 분명히 죽어 가던 몸이었음에도 베르네욜은 벌떡 일어나 렘을 끌어안았다. 끌어안고, 끌어안고 목덜미를 잡고 허리를 휘감으면서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것은 울부짖음이거나 혹은 포효였다.
-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안고 베르네욜은 일렁이는 파도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는 법을 모르는 사자처럼 신음하고 다리가 부러진 말처럼 고통스럽게 투레질했다. 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베르네욜의 피와 섞여 들었다. 그렇게 상처 입어야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처럼.
- 라신은 그 모든 광경을 그저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누이라고 했다. 자신의 누이라고 했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총을 들어 올리던 누이의 마지막 시선에서 라신은 다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사랑하는 이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는 것을.
- 라신은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은 새끼를 안고 신음하는 짐승을 보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 "쏴라. 그 총으로 나를 쏴라. 끝내자. 이 모든 것을 끝내자."
쥐어짜는 듯한 베르네욜의 목소리에 라신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의 원수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한 번 더 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이미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베르네욜도 라신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결국에는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 문득 그녀의 손을 처음 만져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자신을 감히 먼저 만진 것은 렘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고 자기 등을 쓸어내리던 손.
내가 지금 기대어도 당신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때 그가 물고 있던 파이프에 잇자국이 난 것을.
- 어차피 곧 누군가가 자신을 끝장내러 올 것이다. 누가 되었든 아무 상관없었다. 자신을 죽일 이로 오랫동안 준비했던,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던 상대는 이제 사라지고 없으니까.
- 라신은 더는 미동하지 않는 베르네욜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구원한다는 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이가 정말로 죽은 심장을, 악으로 굳어 버린 눈을 가졌을까?
아직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 같은 피가 흐른다면 응당 알아봐야 하지 않은가? 자식이 자기 아비를, 아비가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은가?
자식이 아비를, 총으로 쏴 버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 "증명해 보여."
그러지 못한다면 너는 죽으리라. 혹 증명한다 해도 너는 죽으리라.
- "난 널 죽일 거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거야. 베르네욜의 천한 핏줄 따위를 남겨 둘 수 없으니까. 아비와 아들이 나란히 사이좋게 가게 되겠지. 그리고 나서 나는 네 아버지의 시체를 모욕할 거야. 말에 매달아 그라노스 대로를 돌고 또 돌 거야. 아예 내 고향까지 데려가 죽은 가족들 앞에 엎드려 참회하게 만들 거야. 땅에 끌려 갈가리 찢겨지고 망가지고 부서지고! 아무 데나 내버리면 까마귀나 구더기 따위가 먹어 치우겠지. 그렇게 흔적도 남아 있지 않게 할 거야. 이 세상에서 베르네욜이란 이름 따위, 어디서도 다시는 들을 수 없도록 할 거야!"
- 네가 구원해야만 하는 자가 바로 네 진짜 아버지다.
-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라신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총은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소년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동작으로 총을 돌려 라신은 소년을 겨누었다.
- 먼 곳에서 혹은 기억 속에서 언젠가 자신이 읊은 적 있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라신은 신학교의 모두가 입에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그러나 저들이 무고히 나를 잡으려 했나이다.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저에게 임하시어 저들을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또다시 총소리가 들리고 소년의 허리가 뒤로 틀어졌다. 소년은 이제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 그 안에 담긴 게 무언지 라신은 알 수 없었다. 슬픔, 분노? 애걸 혹은 절망? 예전이라면, 모든 게 이렇게 되기 전이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데.
라신은 소년을 동정했다. 또한 소년을 위해 기도했다.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다. 네가 선이며 내가 악인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한때 신실했던 신학교 학생이 아닌, 그토록 바드레 수사를 따랐던 아이도 아닌, 악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예인 것을.
- 라신은 그 뒤에 앉아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축축하지만 아직 따뜻했다. 두 팔을 벌려 그의 몸을 뒤에서부터 안았다.
- 라신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의식 속에 없었고 그저 본능처럼 흘러나오는 기도였다. 죽은 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도할 뿐, 무엇을 위해 하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로 인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설령 그들과 함께 죽음으로 간다 해도 좋았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 분명히 그 아기에게는 죄가 없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그의 일생일대의 원수가 된 남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가 될 것임을 알았다.
- 그 손짓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는 동작이라거나 그에게 살려 달라 구걸하는 것이라면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기의 의도는 순수했다. 그저 그에게 갈 것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친숙한 남자의 품에 다시 한번 안기길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 쿤족의 앞에 도달한 베르네욜은 그를 무릎 꿇리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죽은 일족들 대신 내가 너의 형제가 되어 주겠다."
- 그는 항상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손을 아이에게로 뻗고 싶었다. 뻗어서 그 조그마한 목을 잡고 천천히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만류했다.
안 돼, 그건 너무 쉬워.
- 베르네욜은 자신이 피를 너무 흘려서 머리가 돌아 버렸거나 혹은 이미 죽어 사후 세계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가 입은 총상에서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문득 그의 시야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이 보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가던 그는 누구인지 깨달았다. 테사르의 아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이미 죽어 버린 듯도 했다.
의아해하던 베르네욜은 곧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수 없는, 극도로 기이한 어떤 일과 마주하게 되었다.
렘이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베르네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세계는 그의 눈에서 지워지고 단지 렘의 모습만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 그 하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에 느꼈던 것과도 비슷한...
-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가니시오의 말이 맞았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였어."
-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당신 세계였지만 여긴 내 세계야, 내 꿈이야. 내 죽음 속이야.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래요.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야."
- "그래. 여긴 네 세계이고, 네 꿈이고, 네 죽음 속이다. 네가 모든 것의 주인이야."
- 잠깐의 대화가 끝나면 그는 두 번째 무덤으로 갔다. 그러나 첫 번째 무덤 앞에서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신은 그 무덤의 주인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는 사랑하지도 않았다.
- "네가 원한다면 내가 같이 가 줄 수 있다."
라신으로서는 뜻밖의 말이었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이 오길 원하지 않을 텐데요."
"너 또한 오기를 원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걸."
- 목소리보다는 손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때문에 라신은 그가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냥 내가 네 아버지 하자. 너도 내 아들 해. 핏줄이니 뭐니, 그런 거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이번 일로 느꼈을 거다. 네가 아버지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러."
-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른 건 모두 잊어버린다 해도 이제 불구와도 다름없는 자기 몸을 그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그걸 모를 거 같냐? 나는 죽음을 봤다. 그런데 그곳에서 네 얼굴을 보고 다시 깨어났지. 아니, 봤다기보다는 느꼈다는 말이 옳겠다. 날 살린 건 분명히 너야. 그 정도는 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묻지는 않겠다. 어쨌든 그놈도 분명히 그걸 알 거다."
- 알고서도 '그래서?'라고 되묻는다면.
- "언젠가 그 모든 일이 일어날 때에...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 남자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두막집 바깥 계단에 앉아 길게 파이프를 피웠다. 잠시 후 여자가 고소한 향이 나는 커피잔 두 개를 들고 나와 곁에 앉았다. 여자가 잘하는 음식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커피를 끓이는 일이었다.
- 두 사람이 보는 것은 방향은 같아도 대상이 달랐다. 남자는 멀리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불분명한 흐릿한 선을, 여자는 멀리 우뚝 서 있는 나무 아래 그늘을 찾아 앉은 들짐승 무리를 보았다.
그랬기에 평원 너머에서 나타난 검은 점을 발견한 것은 남자가 먼저였다.
- 여자도 그제야 그것을 발견했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대답했다.
우리를 찾아오는 건 모두 지옥에서 오는 거야.
-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가오는 새벽을, 혹은 밤을 맞이하는 자들처럼 평온한 태도였다.
- 마차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거기서 누가 내리든 남자는 확인하지 않고 자신이 바로 방아쇠를 당기리란 걸 알았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들였어야 할 죽음을 거슬렀고 세계의 법칙이 그걸 좌시할 정도로 방만하지 않다는 걸 안다. 살아 있는 한 끊임없는 절망이 그들을 습격해 올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그 절망을 먼저 쏘는 존재가 되리라. 혹은 희망일지라도.
-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이미 지옥인 이상 무엇도 그를 위협할 수 없었으므로.
- 그도 모든 면에서 팔마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 말을 팔마가 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을 미루고 있던 그때 현명한 쿤족이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며칠간 이어진 강행군으로 사람과 말 모두 지쳐 있다. 전자야 알 바 아니지만 말들은 조금 걱정되는군."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렸던 베르네욜은 곧장 대답했다.
"가니시오의 말이 일리가 있군. 계곡에서 잠시 쉬기로 한다."
- 하지만 물 앞에 도착했음에도 땅을 발로 툭툭 차거나 손만 조금 담글 뿐, 옷을 벗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 모습을 베르네욜의 무리 모두가 보지 않는 척 다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에 땟국물이 가득한 험상궂은 사내들 사이에 말없이 필사적인 시선들만 오고 갔다.
그거 아냐?
드디어 그게 온 것 같지?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
- 그들은 동료의 얼굴에서 자신과 똑같은 무지를 발견하곤 누구든 답을 아는 자를 찾아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감히 베르네욜을 쳐다보는 자는 없었지만.)
- 모두의 기대를 받은 쿤족 원주민은 아무 근심 없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아 버렸다. 두 번째는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어쨌든 귀찮은 일을 떠넘기기에 가장 적합한 후보, 팔마였다. 하지만 다들 물속으로 안 들어가고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주 보는 팔마의 대책 없는 순진함을 목격하고 이도 포기했다.
-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렘은 아니면 곧장 아니라고 대답하는 성격이기에, 마르젤은 제발 틀리기를 바랐던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 "왜 난 남자애가 아니야?"
"어? 그거야... 네가 여자애로 태어났으니까 그렇지."
"난 여자애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건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거야."
- "남자애였으면... 삼촌은 나한테 나만의 말도 줬을 거야. 나한테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무법자들 이야기도 다 해 줬을 거야."
쉬울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마르젤은 이 정도로 할 말이 없어질 줄은 몰랐다. 그게 단지 렘이 여자아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베르네욜은 처음부터 무리 모두에게 확실히 못 박아 두었다. 렘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치지 마라, 렘에게는 따로 말도 주지 말아라, 특히 총잡이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해 주지 마라... 그렇다고 그게 렘을 무슨 상류층 레이디로 키우기 위함도 아니었다. 사실 그들의 대장이 무슨 이유로 갓난아이를 주워 왔는지부터가 무리 내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였다.
- 총을 집어 든 렘이 그걸 장전하고 몸을 돌려 남자를 겨냥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렘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날렵함은 물론이고 망설임 없이 확고하기까지. 수많은 총잡이들을 죽이고 수많은 총잡이들로부터 가족을 잃은 그에게조차 신선했다.
- "왜 마르젤을 죽인 거야?"
"베르네욜의 부하니까."
- 그건 너무나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또한 정당한 이유라서 렘은 미칠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산이 거기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 화를 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내가 당신을 죽여도 할 말 없겠지."
"너는 하지 못해."
"아니,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난, 나는..."
- 남자의 시선이 렘이 든 총으로 향했다.
"너는 못 한다. 공이치기를 당기지 않았으니까."
이 말에 렘의 시선이 잠깐 총으로 내려갔다. 남자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보적이고 뻔한 술수였으나 상대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총을 잡는 자세로 보아 많이 다뤄 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말에 다시 총을 장전하려고 허둥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가 한 발 떼자마자 렘의 총에서 망설임 없이 불길이 솟구쳤다.
- 그러곤 머리에 대고 다시 한 방을 쏘았다. 마치 수백 번 같은 동작을 연습해 본 사람처럼 침착했다.
그녀는 아까 잇지 못했던 말을 끝마쳤다.
"나는 베르네욜의 딸이니까."
- "이제 괜찮아. 괜찮으니 총을 내게 다오."
가니시오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렘은 자기가 죽인 남자의 시체만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함부로 대하던 팔마조차 이 날 선 분위기에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 "단 두 발. 심장과 머리였어."
가니시오는 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 그의 대장은 말에 이어서 총까지 렘에게 내줄 것을 명하고 있었다.
"대장."
"원하면 총잡이들에 대해서도, 대륙의 지도에 대해서도 가르쳐 줘."
- 그는 베르네욜이 늘 껄끄럽다고 생각하는 검고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지혜와 인내심이 들어 있거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검은색의 돌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대장이 있던 위치에서는 계곡이 모두 내려다 보였을 거다. 목욕하던 우리들뿐 아니라 하류로 내려간 두 사람이 모습도."
베르네욜은 이를 꾹 다문 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언제든 허리춤에 있는 총을 꺼내 그의 형제를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렘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총잡이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대륙의 지도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겠다. 나는 대장이 렘을 죽이도록 놔두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나란히 말을 몰았다.
- "오늘은 운 좋게 피했지만 언젠가는 나도 죽을 테죠. 어쩌면 삼촌보다 일찍. 그때 삼촌은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울까요? 내가 오늘 마르젤을 위해 흘렸던 눈물의 반만큼이라도."
등 뒤에서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 예상했던 대답이기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베르네욜이 말하는 그런 일이라는 게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일을 두고 한 말인지 알고 싶었다. 어차피 물어도 답해 주지 않을 테지만.
- 자신의 품 안에서 고르게 숨을 내쉬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베르네욜은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곤 새벽 별이 사라질 듯 점멸하는 모습으로 눈을 돌렸다. 동트기 전 무심하게 고요한 순간은 짧기만 하다.
아이가 아이로 남아 있는 시간 역시 그렇다고, 그는 생각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고쿠 나쓰히코]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0) | 2024.04.27 |
---|---|
[하지은] 모래선혈 (0) | 2024.04.18 |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집 3 (0) | 2024.04.17 |
[다카하시 히데미네] 네, 수영 못합니다 - 물이 무서워 수영을 못하는 남자의 포복절도 수영 입문기 (0) | 2024.04.15 |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집 2 (0) | 2024.04.11 |
[하지은 / 호인 / 이재만 / 김이삭 / 한켠 / 서번연 / 지언] 야운하시곡 외 우음, 혁명가들 (0) | 2024.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