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미치오 슈스케 / 김윤수
출판 : 들녘
출간 : 2014.09.05
여름볕이 뜨겁던 때에 읽었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너무도 익숙한 제목 때문에 이미 읽었던 책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다 읽고 나서야 조금씩 마음에 걸리던 의문들이 풀려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반전 소설에서 느껴지는 개운한 깨달음이 아니다. 공포 소설에서 느껴지는 느지막한 섬뜩함과도 다르다.
그저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는 허함에 가깝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그 느낌은 실망도, 전율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본디 그리 명확하고 선명한 존재가 아니기에.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인간의 다면성과 섬세함이다.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는 감지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제각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힘.
타인의 생각을 문자에서 읽어내는 힘.
힘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이에게 자신을 빌려준다.
맞춤법이 흐트러지고 문해력이 낮아져 가는 시대라고 하지만, 세대보다는 개인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통합과 분열의 춤이 펼쳐내는 한 세상.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 유지매미가 우는 소리를 듣고, 바로 매미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빗소리를 듣고 빗방울이 한 방울씩 땅에 떨어지는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지매미의 소리는 수많은 개체에서 나오는 소리가 서로 섞이고 겹쳐서 탄생하는, 바로 그 탁하고 물결치는 듯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 어딘가 이상하다.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 더운 계절이 되면 나는 언제나 매미 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녹음이 우거진 공원 옆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방 안 창문 너머로 느티나무 가로수를 노려보면서 명치에 힘을 준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제발 그 소리 좀 멈춰,라고.
- 그 사건이 발생한 여름,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당시 내게는 세 살짜리 여동생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동생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딱 1년 뒤, 여동생은 네 살 생일을 맞이하고 바로 죽어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동생은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을 수십 년이나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나는 아직까지 여동생의 유골 일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당시 내가 사용하던 기다란 유리컵에 넣어서 랩을 씌우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떠올린다. 작은 손가락이 붙은 사랑스러운 손. 라텍스로 만든 모형처럼 매끈매끈한 배. 죽을 때 내 무릎 위에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잊지 마"라고 말하던 예쁘고 동그란 눈.
- 여름이 되면 나는 그 유골을 책상 서랍에 넣어둔다.
유지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동생을 떠올린다면, 분명히 또다시 나 자신이 부서져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 뭔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샤프펜슬을 꺼내 들었다. 책상 구석에 그림을 그리며 집중하려고 했다. 그런데 손끝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선을 그으면 한결같이 비뚤거리며 흔들렸다.
"야, 뭐해, 책상에 낙서나 하구." 옆에 앉은 하치오카가 머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거 뭐야, 악어?"
"상관 마."
"아아, 도마뱀이구나."
"아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한 순간,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 바람이 창문에 쿵 부딪혔다. 눈에 보일 정도로 유리가 흔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샤프펜슬을 떨어뜨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정말 한 순간이었다. S가 바람을 타고 창밖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이었다. 여기는 학교 건물의 2층이다. 회색 티셔츠에 짙은 갈색 반바지를 입은 S의 몸이 종잇장처럼 바람에 펄럭이며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창을 가로지를 때 S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교실 안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고...
그러고는 휙 날아갔다.
- 그 자리만 비어 있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반 친구들이 앉아 있는데, S의 자리만이 잊힌 것처럼 덩그러니 비어 있다.
"숙제를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면 힘들 거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조금씩 하도록 해라."
(네에.) (무리예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할머니 집에 간단 말이에요.) (가져가면 되잖아.)
- 가장 안쪽 문 앞에 섰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 S가 보였다.
- S는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밝은 마루와 해가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다다미방의 경계선에 정확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S의 눈은 엄청난 사시였기에 두 눈이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쪽 눈은 분명히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회색 티셔츠에 짙은 갈색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내가 교실 창문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S는 나에게 몸을 정면으로 향한 채 이상한 자세로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작게 원을 그리듯이 흔들흔들...
- "뭐해?"
나는 물어보았지만 S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랏빛 입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이 사람 같지 않게 길게 늘어나 있다.
심장이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처럼 쿵 하고 소리를 냈다. 짧게 숨을 들이킨다. 이 사이에서 공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S의 두 다리는 허공에 떠 있다.
"아아, 아..."
반바지에서 뻗어 나온 S의 허벅지 안쪽에서 진흙 같은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S의 거무스름한 가는 다리를 따라 내려가다가, 이윽고 맨발인 발끝에서 툭 떨어졌다. 정확히 다다미와 문지방 사이에 떨어져서 복잡한 색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한 번씩 숨을 쉴 때마다 호흡이 가빠졌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목 속에서 아, 아, 아 하며 떨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지매미의 높은 소리에 머리가 눌린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 배에서 가슴으로 이유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S에게 다가가려고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덮쳤다. 무릎이 힘없이 툭 꺾이면서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은 태양빛을 받았을 텐데도 차가웠다. 나는 두 손을 마루 위에 얹은 상태로 S를 올려다봤다. 뒤에서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이 내 머리를 스친 다음, 또다시 S의 몸을 흔들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날카로운 칼처럼 위에서 내 귀를 찔렀다.
나는 S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손발을 주워 모으듯이 일어섰다.
- 마루를 절반쯤 지났을 때, 나는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S의 모습은 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많은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커다란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꽃들은 하나같이 S가 있는 방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S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 활짝 핀 해바라기를 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무슨 일이냐?"
6학년을 맡고 있는 니시카키 선생님이 돌아보며 물었다. 마르고 앙상한 얼굴에 네모난 안경을 걸친 니시카키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는 거냐? 무슨 일인데? 너는 아마 4학년의..."
"이와무라 선생님 계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한 뒤, 폐가 벌룩거리며 멋대로 움직였다.
"아아, 이와무라 선생님은 안 계시는데. 그런데, 이와무라 선생님이 아니면 안 되는 거냐? 무슨 일인지 선생님이 들어줄게. 자,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려무나."
- S의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나는 정말 S 하고 사이좋게 지냈던 걸까? 누군가와 비교해 보고서야 비로소 괜찮은 사이였다는 식으로 생각되는 관계는 아니었을까? 반 친구들은 S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두 S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한결같이 입을 히쭉거렸다. S가 죽은 일도 역시 히쭉거리는 얼굴로 이야기할까? 지저분한 농담을 섞어가면서 웃을까? 그 모습을 보면 내 기분은 어떨까?
- "오빠, 밥 먹자."
"어?"
내가 고민하거나 슬퍼할 때 미카는 항상 이렇게 전혀 상관없는 말을 꺼낸다. 마치 나를 불러 세우는 것 같은 미카의 말에 나는 언제나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 우리는 같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탁 위에 볶음밥 두 그릇이 랩에 싸여 있었다. 그릇 위에 놓인 숟가락 중에서 하나는 플라스틱 손잡이 부분에 토레미짱이라는 음표 모양의 머리를 한 아기가 프린트되어 있다. "미카는 토레미짱을 아주 좋아하니까"라며 엄마는 이 캐릭터가 그려진 물건들을 사 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 혼자만의 생각이다.
- 전자레인지에 볶음밥을 넣고 타이머를 적당히 맞춘 다음, 나는 마당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열었다. 잡초가 무성한 잔디에서 숨 막힐듯한 풀 냄새가 났다. 그와 함께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 바로 바깥에 쓰레기가 가득 찬 봉투가 잔뜩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쓰레기를 마당에 내던지지는 않는다. 저 마당에 놓인 쓰레기는 집에서 넘쳐흐른 것들이다. 우리 집은 식당, 부엌, 거실도 모두 쓰레기투성이였다. 엄마가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수거일에 맞춰서 몇 번이나 쓰레기를 내다 놓으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함부로 그런 짓 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빠도 쓰레기를 버리려고 했지만, 나처럼 한 번 엄마가 화내는 것을 본 뒤로는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무슨 일에든지 아빠는 포기가 빠르다.
- "우리 미카야, 집 잘 봤니? 엄마 왔어."
도저히 같은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정다운 목소리. 마치 노래의 한 마디 같았다.
"어머나, 치마가 다 구겨졌네. 이러면 안 돼요. 미카는 여자애잖니. 단정해야지."
엄마는 의자 위로 몸을 굽히고는 손으로 털듯이 치마 끝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얼굴만 나를 향한 채, 다시 무미건조한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정말이니?"
- "멍청한 것." 엄마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대답이 없으면 현관이나 신발장 위에 놓고 나왔으면 되잖아. 뭣 때문에 너는 그렇게 멍청한 짓만 하는 거냐? 너 때문에 엄마는 일도 중간에 그만두고 왔잖아. 이제 곧 선생님과 경찰들이 올 텐데. 너 말이야. 엄마를 괴롭히려는 거지?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S가 죽어 있을 줄 몰랐어요."
"너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엄마가 나를 싫어하게 된 그날, 내가 했던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는 나를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진심으로 반성하는데.
- "너는 음침해."
그리고 엄마는 입에서 흙덩어리라도 뱉는 것 같은 어조로 멍청이, 하고 덧붙였다. 내가 하루에 몇 번씩 듣는 단어다. 스스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는 멍청하지 않다고 확인하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가 정말 멍청하다고 여기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카야,"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미카는 영리하니까 오빠처럼 되면 안 돼요. 알았지?"
나는 마지막 남은 볶음밥 한 숟가락을 마저 떠먹고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 나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미카를 미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데요? 엄마도 그렇게 부르잖아요."
엄마는 또 뭐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멈췄다.
결국 나는 미카와 같이 2층으로 올라갔다.
- "이거 실례 많았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드님이 많이 놀랐을 거예요. 뭔가 즐거운 이야기라도 해주세요."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입술 가장자리를 살짝 올렸다. 다니오 형사는 약간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고는 다케나시 형사와 눈짓을 교환했다. 나는 계단 위에 선 채 세 사람이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봤다.
- "너, 또 거짓말했구나."
아무 억양도 없는 목소리가 갑자기 날아왔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 얼굴을 올려다봤다.
"엄마, 여기서 다 들었어. S가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너, 또 엄마를 속였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S의 시체가 없어졌어요."
이곳에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 엄마가 오른손을 높이 쳐든다. 나는 몸에 힘을 주며 각오했다. 엄마는 퍽 하고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벽을 쳤다.
"어쨌든 네가 하는 말 따위는, 엄마는 안 믿어."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다. "너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만 하고 남에게 폐만 끼치고..."
거기까지 말하고 엄마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잠시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할까?" 이번에는 완전히 바뀌어서 낮은 목소리를 냈다. "엄마는 선생님한테 연락이 와서 S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각했단다. ... 네가 ㅁㅁㅁㅁㅁㅁ고."
- 마지막 말은 내 귓속에서 윙하고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 마음은 그 말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익힌 방법이다.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렇게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하면 나는 이 집에서 지금쯤 벌써 부서졌을 것이다.
- 이윽고 엄마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항상 내 가슴속에 있는 생각이다.
이 세상은 어딘가 이상하다.
- 신발을 신는데, 열어둔 문 너머로 식당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의 등이 보였다. 가능하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주의했지만, 내가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디 가려고?"
"잠깐, 도코 할머니 집에..."
엄마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 그리고 입을 삐죽했다.
"그 정신 나간 데를..."
나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 뜨거운 뙤약볕 아래, 우리는 유지매미의 소리를 들으면서 도코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호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걸었다.
"오빠, 그런 손수건 있었어?"
"담임인 이와무라 선생님이 빌려줬어. ... 아 참, 아까 돌려드릴걸."
- 동네를 벗어나서 학교와 반대 방향으로 큰길을 5분 정도 가면 상점가가 나온다. 그 입구에 '오이케 국수공장'이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공장과 살림집이 이어진 형태로, 바로 앞쪽의 콘크리트로 된 정사각 모양의 건물이 할머니의 아들과 종업원들이 일하는 작업장,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는 목조 건물이 살림집이다. 현관문 옆에는 먹으로 '軍茶利明王(군다리명왕) 기도소'라고 적힌 오래된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軍茶利'는 '군다리'라고 읽는다고 도코 할머니가 가르쳐줬다. 옛날 인도어로 '뱀이 몸을 서린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때는 엄마도 나하고 같이 있었다. 미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도 엄마하고 자주 외출하곤 했다.
- 도코 할머니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한테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게 좋겠구나."
"처음이요?"
"그래, 제일 처음부터 S가 죽은 시점부터."
"죽은 시점이요? 시체가 사라진 시점이 아니고요?"
나는 반문했지만, 도코 할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대로 약 1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와 미카, 그리고 도코 할머니가 말없이 있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상점가를 오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우리 얼굴을 훔쳐보며 지나갔다.
"할머니, 그 힘, 써주시면 안 돼요?"
"요즘 통 써보지 않아서." 미카의 부탁에 도코 할머니는 몹시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시험 삼아 해 주세요. 저희,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내 부탁에 도코 할머니는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나는 슬쩍 도코 할머니의 뒤를 봤다. 방 한구석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그 자리에 높이가 1미터 반이나 되는 목조 불상이 보인다. 바로 군다리명왕이다. 정면을 노려보는 그 얼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형상이었다. 바위 대좌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그 대좌 부분도 목조라고 한다. 군다리명왕은 눈이 세 개, 팔이 여덟 개로 각각의 팔이 창과 불꽃 등 여러 가지를 들고 있다. 모든 팔, 그리고 다리를 여러 마리의 뱀이 둘둘 감고 있다. 그 뱀들은 환생을 의미한다나.
- "온 아밀티..."
갑자기 도코 할머니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놀라서 도코 할머니를 쳐다봤다.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소리다. 도코 할머니는 그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온 아밀티 은 팟타... 온 아밀티 은 팟타... 온 아밀티 은 팟타..."
계속 반복해서 도코 할머니는 같은 주문을 되뇌었다. 눈을 감고 열심히 낮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내 심장이 마치 다른 생물처럼 가슴속에서 쿵쿵하고 커다랗게 고동쳤다.
- 갑자기 도코 할머니가 주문을 멈췄다.
나는 숨을 죽이고, 할머니의 얼굴을 응시했다.
도코 할머니는 잠긴 목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냄새가..."
그게 전부였다.
"냄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나 도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물어도 도코 할머니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많이 지치고 넋 나간 것처럼 어딘가 한 곳을 그저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 아빠를 보면 나는 종종 거북이 생각난다. 졸린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기도 한 눈을 하고, 모래와 물 사이에서 멍하게 있는 남생이다. 윗입술이 약간 돌출된 점도 비슷하다. 아빠는 항상 느릿느릿 움직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 카레라이스를 먹으면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S의 일을 아빠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진다. 어차피 언젠가 아빠는 분명히 S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연관된 사실도 알게 된다. 그때 아빠는 얼마나 많이 놀랄까? 내가 그 이야기를 아빠한테 하지 않았다고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아빠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저기, 아빠."
망설인 끝에, 나는 에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돼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엄마도 괜한 말을 하지 않을 테고, 아빠도 나중에 S의 일을 알게 되더라도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이다. 잘하면 '친구가 죽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들은 그 일을 직접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근사한 아이디어였다.
- "죽으면? 글쎄, 아빠가 듣기로는 사람은 죽으면 다른 걸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구나. 일본에는 그러한 사상이 있단다. 할아버지 장례식 때 스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래, 그때 너도 같이 있었잖니?"
"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만은 기억했다. 그러나 그다음은 어쩐지 어려운 이야기가 나왔던 느낌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구나, 그때 너는 네 살이었으니까. 다섯 살이었나?"
- "사람은 죽으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데, 그 영혼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헤맨다. 헤매는 기간을, 뭐더라... 중유(中有)라고 부른다더구나. 다시 말해, 영혼이 저 세상과 이 세상 사이에 있다는 거지."
바람이 부는 대로 종잇장처럼 하늘을 날던 S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것은 S의 영혼이었을까?
- "중유 상태에 있는 영혼은 7일마다 다시 태어날 기회를 갖는대. 처음 7일째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다음 7일째, 그래도 안 되면 다시 다음 7일째, 그런 식으로 말이지."
"우와, 일주일마다네."
"그래, 일주일마다란다. 그 기회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
"그럼 계속 새로 태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니, 몇 번째에 다시 태어나는가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그래도 7 곱하기 7. 다시 말해서 49일째에는 모두 반드시 어떤 걸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더라. 뭐, 종파에 따라서 사고방식은 다르지만."
- 말을 마치고 아빠는 엄마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엄마는 짜증 나는 모습으로 말없이 카레를 먹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가슴속 답답함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S가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될까?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아빠는 분명히 거북이 되지 않을까? 엄마는 틀림없이 사마귀다.
- 바로 그때 아빠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어?"
아빠는 식당 문 밖의 복도를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은 허공에 멈춘 채 목을 조금 내민 모습으로 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요?"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꼭 왜라기보다는..."
시선은 그대로 복도를 향한 채였다.
- "당신, 뭐예요?"
엄마가 심기가 불편한 듯이 아빠의 얼굴과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번갈아 봤다. 복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고 벽에 걸린 시계가 여덟 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을 뿐이다.
- "아버지 산소에 가본 지도 꽤 되었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아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가 있어요?"
나는 다시 한번 물었지만, 아빠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서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 쪽을 다시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그 옆얼굴은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멍해 보이기도 했다. 아빠는 무엇을 본 걸까?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사람들을 가두는 탑 꼭대기는 이러한 곳이었습니다. 벽돌로 둘러싸인 작은 방으로 마차의 짐받이 정도의 넓이였습니다. 누워서 잘 수도 없습니다. 창은 전혀 없어서 아주 캄캄합니다. 그 대신에 벽의 한 부분에서 두 개의 관이 안팎으로 뻗어 있습니다. 마치 쌍안경처럼 그 두 개의 관은 사람의 두 눈 너비와 똑같았습니다. 깜깜한 방안에서는 두 관의 끝이 조금씩 반짝였습니다.
잡혀온 사람들은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히면서도 이것은 뭘까, 하고 반드시 그 관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기에 날마다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배급되는 작은 빵 조각과 물만으로 버텨나가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온종일 두 관을 들여다보면서 지냈습니다.
관 너머로 성의 지붕이 보였습니다. 그 지붕의 끝에는 언제나 삼각형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갇힌 사람들은 매일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성의 지붕과 국기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그 제한된 경치 속에 자신들을 구해줄 뭔가가 언젠가는 나타나기를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관 너머로 보이는 경치를 바라보면서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야윈 몸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3개월 동안, 거기에 갇혀 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자마자 그들은 관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전날과 똑같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경치를 보고는 슬퍼서 눈물을 흘립니다.]
- [3개월이 지나면, 임금님은 마침내 그들로부터 임금님이 아주 좋아하는 어떠한 먹을 것을 뺏습니다.
3개월째 되는 날 아침,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은 평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두 개의 관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반드시 앗,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의 지붕에 펄럭이는 깃발. 그것은 평소에 보던 그 국기가 아니었습니다. 잡혀온 사람들은 놀라서 두 개의 관에 두 눈을 바싹 대고 그 깃발을 다시 봅니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국기 대신에 꽂힌 깃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기다려라. 곧 구하러 간다.'
그것을 한번 본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떱니다. 마침내 왔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며 희망에 찬 눈을 반짝입니다.]
- [그때 임금님은 아침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시간을 보고 식탁 위의 버튼을 누릅니다. 버튼을 누르면 기계가 작동을 합니다.
그 기계는 바로 거대한 청소기입니다. 청소기의 파이프는 탑의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이프 끝은 그 두 개의 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임금님 앞에 놓인 접시 위에 둥근 것이 두 개 대굴대굴 떨어집니다. 바로 탑 꼭대기에 잡혀온 사람들의 눈알입니다.
임금님은 그것을 포크로 찔러서 날름하고 맛있게 먹어버립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아아, 희망이여, 나는 이것을 먹는 걸 정말 좋아한다네.'
임금님이 좋아하는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임금님은 그것을 먹고 나라를 크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 "그렇군요." 다니오 형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또 일이 있으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니오 형사가 눈꼬리에 주름을 만들며 머리 옆으로 손을 들고 경례를 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케나시 형사를 재촉하며 두 사람은 현관을 나갔다. 엷은 아지랑이 너머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다이조는 그저 멍하니 배웅했다.
- 그때 다이조의 머리에는 어떠한 정경이 또렷하게 재현된다.
오늘 아침, S네 집 마당을 등지고 터벅터벅 집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숲 중간쯤, S의 집과 자신의 집의 딱 중간 지점에서 등 뒤로 들린 발소리. 당황하는 것처럼 어지러운 발걸음 걸음을 멈추고 다이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의 모습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들어왔고...
"말해야 했는데..."
기껏 경찰과 마주했는데.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다이조는 말라붙은 침을 삼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어떠한 사실을 계속 기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을 일부러 잊는 일에 비하면 별로 어렵지 않다.
-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여러 날이 지났다. S의 일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경찰에게서도 그 뒤로 아무런 연락이 없다. 신문을 훑어봐도 S의 일을 다룬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경찰이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막연히 알 것 같았다. S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수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근처에서 종종 경찰차가 보이고 외부로 나가는 차선은 아침부터 밤까지 검문이 이어졌다. 검문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 아까부터 미카가 옆에서 계속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S의 설명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미치오." S는 약간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무슨 말이야?"
"너무 믿지 말라는 거야. 지금 이 얘기는 어디까지나 내 추리고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야. 이게 정말인지 아닌지, 우리는 아직 몰라. 사람은 한번 이렇다고 생각하면 쉽게 그 생각을 바꾸지 못하거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눈앞에 이 이야기하고 모순되는 어떤 게 나타났을 때 거기에 대응할 수 없게 돼. 말하자면 현상을 정확하게 볼 수 없게 된다고."
S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나는 그 말을 명심했다.
- "앗!"
계속 아무 말도 안 하던 미카가 갑자기 높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미카는 도코 할머니가 준 힌트가 무슨 의미인지 알았어."
"힌트...? 아아, 그 '냄새'라는 말?"
- 미카는 상당히 흥분한 것 같았지만, 나는 미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머릿속에도 땡 하는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 점차 도서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벽이 여름 햇볕을 한껏 반사한다. 건물 앞 벽돌 받침 위에는 나란히 서서 춤추며 장난치는 모습을 한 소녀들의 석상이 보였다.
자동문을 통과하자, 싸늘한 공기가 바로 다이조의 온몸을 감쌌다. 한창 햇볕이 강할 때 걸은 탓에 두 다리가 노곤했다.
도서관 내는 의외로 붐볐다. 학교가 한창 여름방학이기 때문이다. 열람용 테이블마다 하얀 백합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이조는 그 소설을 찾기 위해서 도서관을 찾았다. 샐러리맨 시절에 무심히 구입한 책 한 권. 일인칭으로 시종일관 담담하게 써 내려간 그 소설은 어떤 비뚤어진 성벽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묘사가 이어졌기에 계속 읽어나가기가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 소설의 존재를 다이조는 바로 어젯밤에 떠올렸다. 지금의 자신에게 어떠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 소년을 살해하고, 그 유해를 욕보인다.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 지닌 성벽이었다.
- "경찰은 아직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은 거 같지만..., 그래도 이곳이 워낙 좁으니까요. 소문은 금방 퍼져요."
소설 분야는 저자 이름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저자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이조는 제목만 가지고 책장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책 중에서 제목만으로 책 한 권을 찾아낸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걸..."
-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고 다이조는 '검색 코너'라고 쓰인 한 모퉁이로 갔다. 그곳에는 검색용 컴퓨터가 설명서와 함께 여러 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설명서에 써진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접수처의 젊은 여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아주 흔쾌히 다이조를 대신해서 익숙한 솜씨로 검색해 주었다.
"소설인데요. 저자 이름을 잊어버려서..."
"괜찮아요. 제목은 아세요?"
"네, 아마 <성애의 심판>. 아아, 아니야, <성애의 심판>이었나?"
"네, 잠시만요. 성... 애... 아아, 여기 있네요. <성애에의 심판>이에요."
- "바로 이 앞에 있는 책장의 가장 이쪽이네요."
"아아, 그렇게 눈에 띄는 곳에."
그다지 유명한 책도 아닐 텐데...
다이조는 약간 의외였다.
"이 지역 분이 쓰셨나 보네요. '이 지역 작가' 코너거든요."
"그렇군요..."
심장이 움찔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
- "이 저자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데요."
다이조의 질문에 접수처의 여자는 앞에 있는 키보드를 탁탁 두들겨서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의외였고 놀라웠다.
자신은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은 이러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던 걸까?
"어떻게 이런 일이..."
- 수십 분이 지나도록 다이조는 도서관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소설 표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머릿속은 어떠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접골원의 젊은 선생님이 자신에게 이야기해 준 내용.
그 이야기는 대부분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서 딱 한 부분, 수정해야 하는 곳이 있다. 언제까지나 계속 떨고 있는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며 다이조는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그 애는 자살이 아니야."
- 하나만 꽃을 피우지 않았다.
해바라기 옆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상당히 많았다. 벚나무, 녹나무, 비파나무, 애기동백... 손질을 잘하지 않는지, 모두 화난 듯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시끄러울 정도의 유지매미 소리. 소리가 뒤섞여서 마치 뜨거워진 공기 전체가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 높은 울음소리 속에서 다이조는 아까부터 다른 소리를 들었다.
바로 경보 소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경보. 다이조의 가슴속에만 울리는 희미한 그 소리.
- "나쁜 예감... 이야."
어릴 때부터 그러했다. 다이조의 가슴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뭔가가 살고 있어서 갑자기 지금처럼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중에 다이조는 반드시 후회를 했다. 그 소리를 따랐어야 했다고...
- "그때도 그랬는데..."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불과 서른의 나이였다. 아버지는 이미 전쟁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다이조는 어머니하고 둘이서 조그만 집에 세 들어 살았다. 어머니는 근처에 있던 방적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여자 혼자 몸으로 열심히 다이조를 키웠다. 일요일도, 국경일도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였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여위긴 했지만 아름다웠다. 아들인 다이조가 보기에도 꽃처럼 예뻤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아침, 다이조가 이불을 걷자, 눈을 뜬 채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이야기'는 부조리한 시공간이 만들어낸 일상이다
- "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독서가들의 남모를 고민이 아닐까? 나도 직업상, 일 년에 수백 권의 소설을 읽지만, 읽었다고 해서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소설은 아주 희미한 느낌만 남기고 모두 망각의 수렁으로 빠져버린다.
-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기억력이 나쁘다며 한탄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작가가 아무리 진지하게 쓰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중요할 확률은 필시 아주 낮을 테니까. 때문에 작가가 호소하는 것과 독자가 추구하는 것이 잠시 일치할 때 발생하는 '감동'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화학반응은 더없이 귀중한 것이다. 소설을 꾸준히 읽는 행위는 그런 기적과도 비슷한 만남을 추구하는 편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나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설이다. 솔직히 호불호가 나뉘는 소설일 것이다. 공감이 되는가, 안 되는가도 독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릴 것이다. 그러나 정말 마음에 남는 소설은 그런 게 아닐까?
- 생각건대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라는 소설을 읽고, 등장인물들의 따끔따끔한 통중과 그들의 비뚤어진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건 실은 독자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새로운 곳에서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작업도 역시 독서의 즐거움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할지 말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 이 책은 그가 독서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게 된 출세작이다. 부조리한 일이 연속되는 환상소설 같으면서 일종의 사이코서스펜스이자 마지막에는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본격 미스터리로 착지한다. 그만큼 모든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다면성을 가진다(토머스 트라이언, 다케모토 겐지, 아야츠지 유키토를 계승하는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 소설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갓 등단한 신인의 두 번째 작품인데도 일찌감치 제6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후보에 오를 만큼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대담하기 짝이 없는 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준 높은 기교가 양립하는 소설이다.
- 주인공은 끊임없이 추리를 펼쳐나간다. 하지만 진짜 수수께끼는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동반된 많은 정보를 독자에게 숨기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의문을 품게 된다. 예를 들면, 여러 등장인물들이 별다른 위화감 없이 환생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동생 미카가 세 살이라는 나이에 비하여 말과 행동이 유난히 어른스러운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어머니는 왜 미치오를 미워하고 미카를 편애하는가? 그러한 횡포를 부리는 엄마에 비해 아버지는 왜 그다지도 무력한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도코 할머니의 정체는 무엇인가? 미치오의 1인칭 부분과 병행하여 서술되는 3인칭 부분에서 등장하는 노인 후루세 다이조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공정함과 공정하지 못함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이러한 위화감을 단숨에 해소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모든 진상의 키워드는 바로 인간의 주관이다. 본래 본격 미스터리는 1+1=2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격 미스터리에서 주관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쿄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1994년)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이후의 본격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를 푸는 범위 내에서 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게 된다.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와 타인에게 보이는 세계는 반드시 동일할 수 없다는 회의가 작품 배경에 깔리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격 미스터리 장르의 위기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세계 역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본격 미스터리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사실을 우리는 쿄고쿠 나츠히코나 야마구치 마사야의 뛰어난 작품에서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 같은 미스터리 흐름에서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들, 특히 이 책은 주인공의 주관을 중시하면서 합리적인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축한 뛰어난 야심작이라 하겠다.
-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의 비뚤어진 주관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구성력 또한 이 소설이 본격 미스터리와 양립하는 데 일조한다. 결국 주관을 모티브로 한 본격 미스터리는 문장이나 구성 면에서도 최대한으로 기교를 부린 인위적인 소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소설과 현실성의 연출은 양립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진부한 소설관에 반기를 든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는 인간을 그리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인간을 그린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자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현실 세계는 항상 주관과 오해, 그리고 환상에 좀먹히는 약한 존재일 따름이다.
- 슈스케의 소설에는 인간의 생각과 착각, 잘못 듣는 것들이 진상을 가로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우리 인간이 사소한 생각에 쉽게 좌우되고, 보지 않았는데 보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독자는 인정사정없이 철저히 깨닫게 된다. 2006년에 발표한 <해골의 손톱>은 거듭된 착오가 낳은 비극을 외부의 시각에서 그린 소설이지만,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그 모든 것을 내부에서 그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해골의 손톱>과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표리일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빈발하는 환상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조리와 부조리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실제 인간 모습을 그리고 있다.
-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현실과 환상이 훨씬 복잡하게 뒤엉킨 그레이존에서 살아간다. 특히 어두운 감정에 짓눌릴 때, 인간은 아무리 단단히 각오를 해도 본능적으로 도망칠 곳을 찾게 된다. 비록 그 장소가 타인이 보기에는 삐뚤어진 곳일지라도 본인에게만큼은 분명한 현실이다. 미치오와 그의 가족, 다이조 노인도 모두 그러한 세계에 매달려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두 사람의 형사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성과 광기, 그리고 현실과 환상이 서로의 영역을 침식하는 가운데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타인에게 지극히 불안정하고 부조리하게 보이는 시공간이 바로 일상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들의 어리석으면서도 슬픈 언동을 남의 일이라며 잘라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텔레비전은 환생이나 수호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프로그램을 빈번하게 방송하여 시청률을 높인다. 아무리 즉물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후생의 안락을 기원할 것이다. 그럴 때 환상은 아주 쉽게 현실 속으로 침입한다.
- 꿈과 환상에 기대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 표현의 근원이기도 하다. 현실이라는 영역, 육체라는 한계를 초월하려는 의사야말로 인간을 다양한 표현으로 끌어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영혼불멸이나 환생에 희망을 맡기는 것도 인간이 유한한 일회성의 존재라는 사실을 초월하려는 것이다.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도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혹은 배우로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 현실 속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타인을 만들어내어 연기하고 이야기를 꾸미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이 아닌 다른 생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애절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 현실이 불확실하다 보니 각자가 엮어내는 이야기의 강도가 현실 자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미치오는 "이야기를 만들려면 조금 더 진지하게 하셔야죠"라고 범인에게 말한다. 그런데 엮어낸 이야기들은 종종 편안한 피난처가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속박하기도 한다. 때문에 미치오는 결국 스스로 이야기를 끝내게 된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한때의 유행이나 경향을 뛰어넘은 보편적인 소설로 완성된 것은 이처럼 인간과 이야기의 관계를 철저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
... 제멋대로 비틀어버린다.
이 소설은 그처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그런지, 결말이 주는 임팩트가 아주 강하다. 기분 좋은 결말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미치오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있잖아요"라고 외치던 미치오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환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인간 개개인에게 잠재된 광기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미스터리 애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2009년 9월
김윤수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종산] 블루마블 (0) | 2025.02.07 |
---|---|
[바보아저씨] 바보아저씨의 경제 이야기 1, 2 (2) | 2025.02.06 |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0) | 2025.02.05 |
[클레어 맥펄] 페리맨 (0) | 2025.02.04 |
[김용진, 한상진, 봉지욱] 압수수색 (0) | 2025.02.03 |
[닐 게이먼] 죽음: 디럭스 에디션 (0) | 2025.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