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클레어 맥펄 / 조영학
출판 : 더봄
출간 : 2018.11.12
묵은 짐들을 정리하는 데 한참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의지보다는 계기가 중요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쉬운 것들은 가볍게 훑어보고, 더 나은 것들로 채우고 싶은 것들은 떠나보냈다. 덕분에 나름대로 쏠쏠한 기타 수익과 기부 영수증으로 연말정산까지 잘 마무리했으니 보람찬 한 해였다.
경계를 넘어가는 통과의례와 그에 뒤따르는 변화.
앞으로만 내달리라 부추기는 성장 지향 사회.
하지만 경계선에 머무는 것도, 되돌아가는 것도 가능한 선택이라는 걸 우리는 자주 잊곤 한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돌아온 제자리는 이전과 같은 자리일까, 다른 자리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알 수 없기에 더 기다려진다.
<페리맨> 자체는 추천하기 어렵다. 화려한 소개글과 절판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읽어보았지만 기대만큼은.
가장 큰 장벽은 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10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 읽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과 밥 딜런의 만남으로 상상하며 읽었다. 트리스탄까지는 애틋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잘 어울렸는데...
그래도 황무지의 이미지는 신선했다.
<페리맨>보다는 후속작이었다는 <트래스패서>가 더 궁금했지만 국내 발간은 어려울 듯하다.
끝.
얼마 전 개봉해, 1000만 관객을 훌쩍 넘은 시리즈 영화 <신과 함께>에도 '삼차사'라는 이름의 '페리맨'들이 있다. 사자(死者)를 인도해 저승 재판을 받게 한다는 점에서, 소설 <페리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후에 영혼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소위 '저승사자'가 필요하다는 플롯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에 '강림'을 비롯한 '삼차사'가 있다면, 서양에는 '카론'이 있다. 그리스신화를 보면, 저승세계 하데스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아케론, 코키토스, 피리플레게톤, 레테, 스틱스 강을 건너야 하는데 저승의 뱃사공, 즉 '페리맨'이 바로 '카론'이다. 이 다섯 개의 강을 지나면 하데스의 궁전에 들어가 <신과 함께>처럼 재판을 받고, 마침내 아프스텔들판에 가서 생전의 삶을 재현하며 살아간다. 몇 개의 고비를 지나야 하며 또 사후에 생전의 삶을 이어간다는 설정에서 소설 <페리맨>은 동양보다는 역시 서양의 신화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플롯은 북유럽 신화에서 빌려왔으나 정작 <페리맨>이 유명해진 것은 작가의 고국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북유럽이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클레어 맥펄과 소설 <페리맨>은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 2013년 중국에서 출간 이후, 불과 2년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렸으며(ebook을 합하면 훨씬 더 많다), 후속작인 <트래스패서> 역시 중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말에는 여세를 몰아 <배트맨 비긴즈>, <인셉션>, <쥬라기공원> 등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한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와 영화 판권까지 계약했다.
온갖 모험과 괴물, 악귀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페리맨>은 표면적으로 판타지, 어드벤처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죽음 이후에도 사랑이 있을까?"라는 부제에서 보듯, 근본적으로는 '러브스토리'다. 죽음에서 꽃 피어 죽음을 초월한 사랑 옮긴이가 보기에도 이렇듯 기이하고 기발하고 창조적인 사랑 이야기는 그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 짐작이지만, 중국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마치 서유기를 보듯 낯익은 판타지 장면도 장면이지만, 온갖 장애와 억압을 극복, 초월하고 이루어낸 사랑에 크게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 같다. 물론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페리맨>은 무엇보다 재미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 전개와 반전, 악귀들과의 생사를 건 싸움, 그리고 무엇보다 페리맨인 트리스탄과 딜런의 애틋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감정이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내 앞에는 아직 <페리맨>의 속편 두 권이 놓여 있다. 하루빨리,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소개할 날을 기대해 본다.
조영학(옮긴이)
- 그는 언덕에 앉아서 기다렸다.
새로운 날, 새로운 일. 저 앞의 녹슨 선로가 깊디깊은 터널의 벌린 입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우중충한 날이다. 희미한 빛은 터널 입구의 석조 아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입구만 노려보았다. 기다리기는 하겠지만 사실 너무나 피곤했다.
흥분이나 전율은커녕 관심조차 없었다.
호기심도 잃은 지 오래다. 의무를 완수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두 눈은 냉정하고 냉철했지만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살을 에는 바람이 꿈틀거리며 온몸을 휘감았다. 추위를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이제 곧 나타나리라.
- "터널에서 나왔을 때 애버든 중간쯤이라고 생각했지? 하이랜드의 거칠고 험악한 오지쯤으로? 그래서 황무지가 생긴 거야. 운동을 좋아하지 않으니 걸으면서 기분도 엉망일 테고. 이곳은 네 기분에 반응해. 화나면 구름, 강풍..., 어둠이 찾아오지. 마음이 어두울수록 밤도 길고 어두워져."
트리스탄이 고개를 돌려 딜런의 반응을 엿보았다. 딜런도 그를 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는데, 문득 그의 입술에 음흉한 웃음이 번졌다.
"사실, 나도 너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된 거야."
딜런이 그 말에 다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 보았다. 그 말을 곱씹을수록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 "왜?"
마침내 딜런이 물었다. 아무리 해도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 영혼의 안내자는 안전하게 보여야 해. 믿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자동적으로 너희 영혼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딜런은 계속 고개를 숙였지만 두 눈은 더 커졌다. 본심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잘하면 넌 날 좋아해야 해."
-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난 페리맨에 불과합니다. 얘기할 자격이 없어요'라고."
"남자는 다행히 내 말을 받아들였어. 그래서 난 돌아서서 어두운 밤을 걷기 시작했어. 그레고르도 여인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따라왔고."
"불쌍한 여자."
딜런이 중얼거렸다. 혼자 뒤에 남은 여성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 "그런데, 그 남자, 그레고르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네? 곧바로?"
딜런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했다.
"응, 그 친구는 불타는 건물 벽을 곧바로 뚫고 걸어 나왔거든.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종교적이었지. 교회를 절대 신봉했기에 가르치는 대로 믿은 거야. 요컨대, 나를 하늘의 사신쯤으로 여긴 거지. 뭐, 천사라고 해도 좋고... 아무튼 감히 대꾸하지도 못했어. 요즘엔 훨씬 더 골칫거리가 많아. 다들 자기한테도 권리가 있다고 믿으니까."
- 딜런이 하늘을 보았다. 다음 질문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왜?"
트리스탄도 그녀가 망설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 사람한테는 어떤 모습이었어?"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냥 남자. 지금 기억으로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어. 수염도 기르고."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딜런의 표정을 보았다. 딜런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렸다.
"당시엔 대개가 수염을 길렀어. 그것도 아주 덥수룩하게. 나도 콧수염이 있었는데 꽤나 마음에 들었어. 멋지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딜런도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금세 잦아들었다.
- "최악의 영혼은 그럼 누구야?"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너."
그가 미소 지었으나 미소가 눈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 트리스탄이 고개를 들어 딜런을 보았다. 불꽃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서 춤을 추었다.
"내일은 위험할 거야. 악귀들이 모여들고 있어."
그가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며?"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딜런의 목소리가 반쯤 갈라졌다. 경고하는 것을 보면 트리스탄이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트리스탄이 불안해한다면 위험이 상당하다는 건데... 속이 쓰렸다.
"못 들어와. 하지만 우리가 결국 밖으로 나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우리, 괜찮겠지?"
긴장해서인지 딜런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아침에 해가 뜬 후에는 당연히 괜찮아. 다만 오후에 계곡을 통과해야 하는데 늘 그늘이 지고 어두운 지역이야. 놈들은 그곳에서 공격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이곳 지형은 내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기본 지형은 똑같아. 넌 그 위에 네 풍경을 입히는 거야. 그래서 안가가 늘 같은 곳에 있지. 계곡도 그곳에 있을 테고. 늘 거기 있었으니까."
딜런이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어쨌든 묻기로 했다.
"그런데..., 계곡에서 영혼을 잃은 적이 있었어?"
트리스탄이 딜런을 올려다보았다.
"널 잃지는 않아."
- 계곡 길은 산책을 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길은 고르고 넓었다. 작은 자갈로 덮인 터라 오래전 버려진 시골 선로를 따라 걷는 기분도 들었다. 좁은 길이 굽이치며 언덕 사이의 골을 따라 흐르고, 언덕은 가볍게 물결치며 올라갔다. 언덕 어디에나 키 작은 풀과 야생화가 가득했다. 실로 완벽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풀밭 끝에서 치솟은 가파른 벼랑이었다. 벼랑이 치솟으면서 계곡 안쪽으로 굽어 그 끝으로 실눈 같은 하늘만 남겨 놓았다. 어둠이 계곡을 봉인한 것이다.
-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자 딜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트리스탄도 긴장한 탓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덩달아 딜런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스탄처럼 두리번거릴 용기도 없었다. 그저 눈앞만 노려보며 아무 일 없이 계곡을 통과했으면 하고 빌었을 뿐이다.
- 어제의 과도한 체력소모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제 용기를 내어 문고리를 비틀어 활짝 열어야 했다. 그러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발!"
트리스탄이 부르잖아!
딜런은 오직 그 생각만 붙든 채 활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숨도 멎고 심장박동도 정지했다. 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장이 두 배로 뛰기 시작했다.
- 황무지, 지난 며칠간 고향처럼 익숙해진 황무지가 사라진 것이다. 굽이치는 언덕도 없고, 발목을 계속 잡아채던 키 큰 잡풀도 없고, 청바지를 흠뻑 적시던 웅덩이도 없었다. 잔뜩 흐린 하늘도 사라지고 지난밤 안가까지 이어진 자갈길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붉은색의 현란한 그림자로 바뀌었다. 두 개의 언덕은 남았으나 지금은 붉은 진흙으로 덮였다. 나무도 풀도 없고 가파른 언덕배기는 예리한 칼바위들이 땅에서 삐쭉빼쭉 삐져나와 살벌하기까지 했다. 바위 모양도 기이했다. 자갈길은 검은색의 끈적이는 길로 변했는데 마치 부글부글 끓는 타르처럼 끊임없이 거품을 토해냈다. 하늘도 완전히 핏빛이었다. 검은 구름은 흐른다기보다 서쪽 지평선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태양은 뜨겁게 달군 고리처럼 새빨갛게 타올랐다.
- 하지만 가장 끔찍한 일은 따로 있었다. 땅 위를 미끄러지고 언덕을 오르고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수백수천의 존재들... 저걸 뭐라고 해야 하지? 딜런으로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인간이지만 형체가 없었다. 다만 간단한 윤곽으로 나이와 성별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딜런은 제일 가까이 있는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딜런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일에만 집중했다. 공 같은 구형의 물체가 각자의 앞에서 빛을 발했는데, 바로 그 구체(球體)를 따라가는 것이다.
- 각각의 존재들마다 검은 유령이 무수히 따라붙어 머리 주변을 떠돌거나 빙빙 맴돌았다. 그 광경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존재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악귀들이 주변 허공을 떠돌기 때문인데, 그나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맞아, 저 구체 때문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놈들은 맥동하는 빛의 공을 무서워했다. 다만 그림자가 짙은 곳에서 빛이 약해지면 악귀들이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딜런은 저들과 똑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진짜 황무지이며, 트리스탄은 그녀의 구체였다. 빛의 공이 없는데 저 밖에 나가 안전할 수 있을까? 지금 안가를 떠나면 악귀들이 공격할까? 대낮인데도? 어떻게 될지 알려면 밖에 나가봐야 하는데... 그럴 만한 용기가 나한테 있나? 딜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문간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안 돼! 몸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놈들이 씩씩거리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딜런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문을 쾅 닫은 뒤, 몸으로 막기라도 하듯 문에 등을 대고 섰다. 그렇게 몇 초를 버티다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두 다리를 감싸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기댔다.
- "가이드를 잃을 때만 진짜 황무지를 볼 수 있어. 나는 네 상상을 구현해 내는 매개야."
트리스탄의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가짜인 거야? 내가 지금 보는 건 전부 다? 내 머릿속 상상이라고?"
전에도 들었건만 딜런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어제의 황무지가 아무리 끔찍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트리스탄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더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 "딜런."
트리스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말에 설탕을 바를 수는 없지만 목소리만으로라도 충격을 덜어주고 싶었다.
"넌 죽었어. 네가 마음으로 보는 것만이 네 전부야. 여기 이곳? 여기는 네가 여행을 완성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또 그것만이 진실이야."
- "자, 가자."
그가 따뜻하고 든든한 미소를 지었다. 딜런도 가볍게 입술을 떨면서 웃어 보였다.
딜런은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문을 마주했다. 그와의 접촉에 가볍게 전율이 일었다. 이 오두막은 딜런에게 감옥이자 대피소였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건만, 트리스탄은 성큼성큼 그녀를 다시 한번 황무지로 끌어냈다.
오늘은 햇볕 없이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가벼운 뭉게구름들. 이 광경은 어떤 기분을 드러낸 걸까?
- 트리스탄은 황무지가 마음을 대변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당혹스럽기는 했다. 사실 가짜 세계에 속고 싶지는 않지만 언덕 풍경이 낯이 익으니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그 점에서는 당연히 트리스탄의 존재가 핵심이다. 딜런은 그를 보았다. 지금은 앞서 나가는 뒤통수와 튼튼한 어깨만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 멍들, 상처들. 딜런은 마음이 아팠다. 결국 자신을 지키려고 저렇게 된 것이 아닌가.
- "트리스탄."
그녀가 불렀다.
트리스탄이 돌아보며 속도를 줄였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왜?"
그의 시선을 받으니 왠지 주눅부터 들어 대신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저 영혼들..., 영혼들이 걷는 걸 봤는데 나한테로 오지는 않았어. 내 말은... 그들도 내가 있던 안가로 왔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어디에 대피해? 어떻게 되는 건데?"
트리스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페리맨은 각자 나름의 안가가 있고 보호수단이 있어. 보이는 방식도 다 다르고... 그건 너 때문이라고 했지? 하지만 너와 내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내 안가가 되는 거야."
"오."
딜런은 잠시 입을 다물었으나 계속 트리스탄을 훔쳐보았다.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을 해도 될지 자신이 없었다.
트리스탄도 눈치를 챘다.
- 잠시 쉬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혼란스러운 경험인 것이, 지금껏 한 번도 잡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악귀들한테 힘으로 밀린 적도 없었다. 딜런에게는 영혼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얘기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다. 무엇보다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 이따금 영혼을 잃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영혼은 아니야. 딜런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이 정도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빠져나왔어?"
다시 미소.
"네 덕분에."
"뭐?"
딜런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를 필요로 했잖아. 그래서 돌아온 거야. 난... 사실 그렇게 되는 줄도 몰랐어. 한 번도 그런 경험은 한 적이 없으니까. 네가 나를 부르고 난 네 목소리를 들었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다음 순간, 계곡 입구에 돌아와 있는 거야. 네가 나를 구한 거야, 딜런."
- 트리스탄은 이미 침대에 가 있었다. 느긋하게 그녀의 동작을 지켜보는데 얼굴 표정이 묘했다. 사실 트리스탄은 양심과 싸우는 참이었다. 딜런은 기껏 어린 여자 아이일 뿐이다. 아니, 자신에게 비하면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사악하기까지 했다. 삶을 경험해 본 적도 성장한 적도 없지만, 그녀의 세상에서 살았다면 세월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영겁을 따지는 마당에 세월이 과연 무슨 의미란 말인가. 보호자로서 얼마든지 그녀의 약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이와 무관하게 감정대로 행동한다면...
딜런도 자기를 좋아한다. 그 정도는 눈빛으로도 알 수 있다. 아니다.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딜런은 그저 혼자 남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를 향한 신뢰는 단순히 필요 때문이다. 그녀의 입장에서야 대안이 없으니까.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 그를 만지고 싶은 충동.... 그래봐야 아이가 두려울 때 위안을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면?
- 마지막으로 고민거리가 하나 더 있다. 너무나 치명적인 문제. 트리스탄은 딜런이 최종적으로 갈 곳에 함께 따라갈 수가 없다. 경계에 도착하면 그녀를 떠나야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딜런이 떠나는 것이다. 행여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을 주었다가 곧 거둬들인다면 그보다 잔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딜런에게 그런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절대 감정에 굴복하지 않아야 할 이유다. 트리스탄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초록색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숲처럼 짙고 깊은 눈. 갑자기 목이 메었다. 아니야, 난 안내자이자 보호자일 뿐이야. 오직 그뿐이야. 그래도 위로 정도는 괜찮겠지? 그 정도는 스스로 허락해도 좋으리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내밀었다.
- 트리스탄이 무심코 팔을 다독여주는데 뼛속까지 전율이 일었다. 딜런은 머리를 트리스탄의 어깨에 기댄 채 혼자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황무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 속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지?
- 딜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가 꿈을 꾸게 했다. 이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데 대한 징벌인 셈이다. 고통을 자초했으니 온전히 감내하는 것도 트리스탄 자신의 몫이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녀를 향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자 사실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비록 거짓과 위선이 난무했다 해도.
- 함께 건널 수 없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약속은 속임수였다. 그녀가 마지막 단계를 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딜런이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녀의 고마움과 안도감을 지켜보고, 그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트리스탄도 알고 있었다. 키스하고 포옹하면서도 딜런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딜런이 경계를 건너간 뒤 배신감에 치를 떨리라는 것도 알았다.
두 세계의 장막 너머에서 딜런이 울고 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눈물이 두 뺨을 흘러내렸다. 수치심과 자기혐오, 절망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해."
그가 속삭였다. 딜런은 듣지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기만을 바랐다.
- 지켜보는 순간순간이 고문이었으나 마침내 그녀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 윤곽이 흔들리고 모호해졌으며, 전신이 뿌예지고 대신 아련한 그림자만 남았다. 트리스탄은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흔적도 흩어졌다. 트리스탄은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떠올려보았다. 딜런의 눈매를 심장에 새겼다.
"안녕."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말로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딜런이 서 있던 땅을 보다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서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트리스탄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걷는 동안 주변 경관이 서서히 흰색으로 변했다. 언덕은 무너져 모래로 변하더니, 차츰 하늘로 떠오르다가 옅은 안개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오솔길은 특징 없는 표면으로 바뀌어 사방으로 끝없이 뻗어나갔다. 백열광이 번쩍이는 통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잠시 후 빛이 잦아들며 색의 입자들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입자는 트리스탄의 머리 주변을 소용돌이치다가 땅바닥에 내려앉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다음 임무, 다음 영혼이 곧 떠날 공간이다. 발밑에 아스팔트길이 깔리고 길은 저녁에 내린 비로 번들거렸다. 양쪽으로 건물이 솟구치더니 창문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안뜰을 비추었다. 안뜰은 오랫동안 버려진 탓에 잡초가 우거지고 울타리는 무너졌다. 갓길의 자동차들도 낡고 녹이 슬었다. 열린 문에서 악기소리가 쿵쿵거리고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했다. 전반적으로 가난하고 방탕한 분위기에 풍경 자체도 암울했다.
다음 영혼을 수습해야 하는데 전혀 감흥이 없었다. 최근에도 습관처럼 무의미하고 무덤덤했건만 지금은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혹독한 상실의 고통뿐.
- 트리스탄은 거리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 집에 멈춰 섰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동네에서도 이 건물만큼은 놀랍도록 깔끔했다. 잔디밭은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주변은 꽃들로 장식까지 했다. 새를 조각한 디딤돌이 붉은 문까지 기분 좋게 이어지고 문은 최근에 새로 페인트를 칠한 듯 선명했다. 지금은 이층 방 하나만 불이 켜져 있었다. 두 번째 영혼은 그곳에서 이제 막 육신과 헤어지려 하고 있었다. 트리스탄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 죽은 사람 얘기라면 필요한 정보는 모두 알고 있다. 여자는 이곳에서 혼자 10년을 살았다. 직장에 출근하거나 매주 한 번 마을 반대편의 어머니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이웃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오만하고 쌀쌀맞다고 여겼지만 여자는 두려웠을 뿐이다. 여자는 자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 정보는 모두 트리스탄의 머릿속에 흡수되었다. 사실과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트리스탄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만들어냈다. 그도 아는 바이지만 굳이 의식하지는 않았다. 이 영혼이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면 그건 트리스탄 덕분이다.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동정도 않고 위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는 하겠지만 오직 그뿐이다.
- 달이 머리 위에 휘영청 떠 있다. 강한 달빛이 그림자를 지우고 구석구석을 밝힌 탓에 문득 이 생경한 도시에 고스란히 노출된 기분이 들었다. 감정과 상념이 낱낱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같았다. 영혼이 나오려면 아직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신경이 지칠 대로 지쳐 그저 달아나 숨고 싶을 따름이었다. 고통과 슬픔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머릿속에서는 이곳을 떠나 슬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움직이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불가능한 일이다.
눈물이 푸른 두 눈에 고였다. 벌써 두 번째다.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높은 곳에도 질서가 있고 위대한 섭리가 있다. 고통, 절망, 책임을 저버리고 싶은 트리스탄의 갈망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운명은 자신의 발을 통제할 능력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 "딜런."
등 뒤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안가에서 혼자 지새운 그날 밤처럼 딜런은 눈앞의 풍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트리스탄은 정말로 소멸할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짓이다. 트리스탄은 이미 떠났다. 돌아오지도 않겠지만 딜런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다. 딜런은 길만 노려보았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었는데 어찌나 힘이 들어갔던지 살갗이 갈라지고 피맛이 났다. 그래도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감각이 마비된 것이다.
- "딜런."
이번에는 딜런도 움찔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어린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을 내거나 긴박한 말투도 아니었다. 그보다 자애로운 쪽?
환영받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건만.
"딜런."
딜런은 발끈했다. 조바심이 났다. 아무래도 대답할 때까지 계속 부를 모양이다. 결국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딜런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당혹스러웠다.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딜런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고, 정체를 드러내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냥 천천히 입을 닫고 말았다. 그래,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 그렇게 초병 임무로 돌아갈 참이었다. 트리스탄이 기적처럼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부질없는 희망으로 오솔길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뭔가 기이한 물건이 눈에 걸렸다. 빛? 백열? 순간 딜런의 심장이 뛰었다. 핏빛 황무지에서의 구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 똑같지는 않았다. 빛은 점점 커지고 모양이 바뀌었다. 점점 길어지면서 조금씩 형체가 생겼다. 마침내 딜런에게 미소를 지었을 때는 표정이 상냥했다. 두 개의 눈, 눈은 금색이고 눈동자는 없었지만 느낌은 따뜻했다. 기다리며 지켜볼 뿐 위협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얼굴이 드러나고 후광 같은 머리카락이 두 눈을 감싸주었다. 체형은 분명 인간 같았으나 동시에 완전히 달랐다. 지난번에 언뜻 본 영혼들처럼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반쯤은 초점이 맞고 반쯤은 흔들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갖추었다는 얘기지만 딜런을 불렀을 때의 목소리는 남자에 가까웠다.
"환영한다."
그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 딜런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상하게 웃어주니 오히려 짜증이 났다. 이곳에 왔으니 딜런이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투가 아닌가
"당신은 누구죠?"
"내 이름은 카일리. 너를 환영하기 위해 왔단다. 귀향을 환영한다."
귀향? 귀향이라니! 여긴 내 고향이 아니야. 난 고향을 떠났어. 두 번씩이나!
"궁금한 게 많을 게다. 자, 함께 가자."
딜런은 천천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 심지어 인간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상하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딜런을 보았다.
"돌아가고 싶어요."
딜런이 차분하게 말했다.
- "미안하구나. 돌아갈 수는 없단다. 네 육신은 사라졌어. 두려워 말거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곧 다시 만날 테니."
"아뇨,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황무지, 황무지로 돌아가고 싶어요."
딜런은 여전히 주변을 에워싼 황폐한 풍경을 둘러보았다. 어깨너머로 힐끗 보니 말발굽 모양의 언덕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 있는 느낌이었지만 벽이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 "넌 이미 건너왔어."
딜런의 비애가 깊어졌다. 카일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내 페리맨은 어디 있죠? 트리스탄 말이에요."
그의 이름을 부르자 다시 울컥해졌다.
"이제 그 친구는 필요 없다. 자기 임무를 다했단다. 자, 그러니 함께 가자꾸나."
그가 돌아서며 등 뒤를 가리켰다. 오솔길 조금 아래 문 같은 것이 나타났다. 창살이 다섯 개짜리 대문, 바닥엔 가축 탈출 방지용 도랑도 보였다. 느닷없이 그곳에 문이 떠 있으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양쪽에 울타리도 없건만.
- 이 영혼 덕분에 일이 너무너무 쉬웠다. 사실 그런 여자에게 차갑고 퉁명스럽게 대해 유감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도 버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마리,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요."
사실 그 이름도 부르기 싫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트리스탄."
여자가 공손히 사과했다.
트리스탄은 움찔했다. 멍청하게도 마리에게 예전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슬픔에 매몰돼 새로운 이름을 만들 수 없었던 데다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모습과도 어울렸다. 아무튼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여자가 부를 때마다 딜런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 여자가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저 앞쪽으로 이미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트리스탄은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자, 어서."
트리스탄은 앞으로 치고 나가며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여자도 어정쩡하게 총총걸음으로 따라왔다. 트리스탄도 속보를 취하며, 이번에는 팔꿈치 대신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이 더 이끌기가 쉽기 때문이다. 악귀들의 포효가 커졌다. 악귀들이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주변 공기도 꿈틀거렸다.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여자도 변화를 눈치채고 트리스탄의 손을 더 꼭 잡았다. 트리스탄도 그녀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트리스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도 알았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자 손을 놓고 달아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맙소사, 악귀가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달아나려 하다니.
- "달라진 건 없어. 난 여전히 함께 못 가고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그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봤잖아. 너한테도 언제든 일어날 일이야. 너무 위험해."
그 말을 되새기는 동안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또 다른 죄의식이 쇠메처럼 그녀를 내리쳤다.
"나 때문에 죽었어."
딜런이 그의 어깨에 대고 말했다. 속삭임보다 작은 소리였지만 트리스탄은 들을 수 있었다.
트리스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바람에 입술이 딜런의 목을 문질렀다.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아냐, 내가 죽인 거야. 내가 손을 놓았으니까."
“나 때문에..."
트리스탄이 다시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보다 더 단호했다.
"아냐, 딜런, 여자는 내 책임이었어. 내가 놓친 거야."
그가 심호흡을 하고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야. 지옥.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안 돼."
"함께 있고 싶어."
딜런이 애원했다.
- "그럼 함께 돌아가."
그녀가 사정했다.
"말했잖아, 불가능해 경계 너머로는 가지 못해. 난..."
트리스탄이 좌절감에 이빨을 부딪쳐 딱딱 소리를 냈다.
"그럼 저 반대쪽은 어때?"
딜런이 다시 몸을 빼내려 했다. 그의 손힘에 맞서보았으나 트리스탄은 이번에도 놓아주지 않았다.
- "내 세계로, 나하고 함께 황무지를 건너 기차로 돌아가자. 그건 할 수..."
트리스탄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고통 때문인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하나를 딜런의 입술에 댔다.
"그것도 안 돼."
"시도해 보지도 않았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 너도 모르는 거야. 어떤 영혼하고 얘기해 봤는데, 그분 말이..."
"누구하고 얘기했다고?"
트리스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 할머니, 엘리자. 이곳에 어떻게 돌아오는지 알려준 분이야.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어. 우리가 만일..."
"어쩌면? 아냐, 딜런, 돌아갈 방법은 없어."
트리스탄이 터무니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 트리스탄이 머뭇거렸다. 그래, 트리스탄도 모르고 있어. 방법이 없다고 믿고는 있지만 그건 전혀 다른 얘기야.
"시도해 볼 가치는 있잖아?"
딜런이 초조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 한 말이 정말로, 정말로 진심이었다면, 정말로 사랑한다면 시도는 해봐야 하잖아?
트리스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표정은 외롭고 우울했다.
"너무 큰 도박이야. 그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까 네가 그 말을 믿는 거야, 딜런. 내가 아는 건 이곳에 있으면 네가 위험하다는 사실뿐이야. 황무지에 있는 한 영혼은 살아남지 못해. 내일 호수 건너로 데려다줄게."
다시 호수를 건넌다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딜런은 한 걸음 물러나 팔짱을 꼈다. 표정도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혼자는 안 가. 기차로 돌아갈래. 그러니까 같이 가자, 제발."
마지막 단어는 애원하듯 나왔다.
- 사실이다. 트리스탄이 없으면, 기차로 돌아가는 것도 무의미했다. 지금껏 겪은 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트리스탄과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목숨도 걸었다. 트리스탄을 만나는 것도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당연히 트리스탄도 모험을 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트리스탄이 입술을 깨물고 숨을 삼켰다. 얼굴에 이 사태를 어쩌나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흔들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완전히 넘어오게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이해하지?
- 실패하면 악귀들한테 먹힐 수도 있다. 그래도 혼자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아무튼 그 말은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그러다가 안 되면 네가 다시 데리고 와줘. 시도라도 해보자, 응?"
트리스탄이 잔뜩 인상을 썼다.
"가능한지 모르겠어. 선택이 가능하다면... 내 말은, 딜런, 나한테는 선택의 자유가 없어. 이 발도 내 것이 아니고. 이따금 발에 이끌려 목적지에 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를 떠났을 때도 내 두 발에 이끌린 거야."
- "안가 근처야."
그 말이 나오자마자 고개를 들었더니 목초지 바로 너머에 오두막이 보였다. 바로 저 판잣집에서 얘기를 들었다. 왜 객차에서 딜런 혼자 빠져나와야 했는지.
태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빛이 강해 이번만큼은 달릴 필요가 없었다. 트리스탄은 천천히 산책하는 쪽을 택하고 딜런의 손을 꼭 잡았다. 오솔길이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 좁기는 했다. 두 사람의 다리에 야생화가 스치며 오묘한 향기가 대기를 가득 채웠다. 실로 꿈처럼 완벽한 그림이었다.
-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또 다른 그림에서도 잘생긴 이방인과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꾼 꿈. 무대가 같지는 않았다. 울창하고 습한 숲은 고요하고 아름다운 목초지로 바뀌었으나, 행복한 느낌과 완벽해진 기분은 그때와 똑같았다. 꿈속의 남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딜런은 본능적으로 트리스탄이었음을 직감했다. 지금의 상황을 예감하기라도 했었던 걸까? 그러니까... 숙명이라는 얘긴가? 터무니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 "음, 내 생각엔... 황무지가 변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기 때문인 것 같아."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의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딜런이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트리스탄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주눅 들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어쨌거나 너하고 함께 있을 운명이었어."
- 딜런은 트리스탄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래, 맞아 난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확신이 들자 마음도 여유롭고 느긋해졌다. 문득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권리 하나 없는 곳이지만.
- "그거 알아? 재미있을 것 같아."
트리스탄이 계속 침묵을 지켰지만, 딜런도 자신이 틀렸다는 지적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다니?"
그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딜런의 손을 놓고 대신 어깨를 감싸 안은 뒤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살갗을 맴도는 소름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목덜미의 털이 온통 일어섰다. 트리스탄은 딜런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잠자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도 하는 거야. 옛 삶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자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기... 기억은 하겠지? 응?"
트리스탄은 잠시 생각을 해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지금 넌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한 거야.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나도 몰라, 딜런."
"내가 아니라 우리야. 우리가 도전하는 거야."
- 트리스탄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입을 삐죽이고 미간을 좁혔다. 딜런이 그 모습을 훔쳐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케이트셸의 학생으로 돌아가, 엄마와 말다툼을 하고 동네 멍청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지내는 편이 속도 편하리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지만, 정말로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기억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고개를 돌리자 트리스탄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딜런의 마음을 읽은 표정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트리스탄만은 기억할 거야."
딜런이 속삭였다. 그 얘기를 트리스탄에게 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한 건지 확신은 없었다.
- 트리스탄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부디."
그리고 그가 딜런에게 키스를 했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딜런의 입술에 붙인 것이다. 키스가 끝나니 그의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야생화 한 송이. 가느다란 줄기가 보라색의 싱싱한 꽃잎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절을 했다. 트리스탄이 딜런의 머리카락에 꽃을 꽂아주었다.
"이 꽃, 네 눈을 닮았어."
그가 손을 떼며 가볍게 딜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딜런의 두 뺨이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트리스탄이 웃으며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며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웠다.
- 그날 밤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딜런의 생각에는 그랬지만, 동시에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다. 딜런은 트리스탄과 순간순간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으나 트리스탄은 안가에 멈출 때마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 ...
- 아무리 동작이 이상해져도 상관없다.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는다.
"잠깐."
트리스탄이 딜런을 잡아당겨 돌려세웠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트리스탄이 다른 팔로 허리를 감싸며 힘껏 끌어안았다. 터널 바닥이 울퉁불퉁한지라 곧바로 둘의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트리스탄의 숨이 딜런의 뺨을 간질였다.
"딜런, 난..."
트리스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 두 번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딜런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혹시 몰라서야."
그가 속삭였다.
트리스탄은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키스를 했다. 굶주린 사람처럼 입술을 탐하며 딜런을 힘껏 끌어안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키스를 마친 후에도 손으로 머리를 껴안고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딜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별은 안 돼! 절대로.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그의 냄새를 맡고 그에게 안기는 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절대 아니야.
이런 식의 키스라면 앞으로 수백만 번도 더 나누게 되리라.
- "준비 됐어?" 딜런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조금 숨이 가빴다.
"아니."
트리스탄이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목소리가 갈라진 탓에 겁에 질린 것처럼 들렸다.
딜런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도 아직 아니야."
딜런도 씩 웃으려 했으나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딜런은 어둠 속을 더듬어 다시 그의 손을 찾았다.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걸린 통에 손을 크게 부딪쳐 관절까지 시큰거렸다. 그래도 둘 다 객차 안에 들어설 수는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딜런, 네 판단이 옳기를 바라."
트리스탄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딜런은 허공에 대고 미소를 지었다. 딜런인들 어찌 바라지 않으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나를 찾아내야겠지? 중간 어디쯤 있을 텐데."
- 딜런은 조심조심 나아갔다. 객차는 고요했고 딜런 자신의 맥박만이 귓속에서 쿵쿵거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한 걸음 뒤쪽에 있는 트리스탄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속이 다시 들끓었다. 일이 꼬이면 어떻게 하지? 몸이 완전히 망가져 회복불능이라면?
게다가 영혼과 육신 사이엔 과연 뭐가 놓여 있을까? 어떤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거지?
- 딜런은 단 한 번, 황급히 숨을 삼킨 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죽음의 바닥으로 추락하며 절박하게 두 손을 휘저었다. 두 손. 두 개의 빈 손.
- 무저갱 같은 구멍도 은은한 흑색으로 변했다. 터널 입구에서 10미터쯤, 요원들이 방향을 바꾸더니 가파른 둑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터널 입구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거리가 먼 탓에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소년이며 십 대라는 사실 정도였다. 금모래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을 온통 가렸다.
- "트리스탄."
딜런이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안도감과 기쁨에 가슴이 마구 부풀었다. 딜런은 그의 모습을 흠뻑 들이마셨다. 여기, 이곳, 그녀의 세상에서.
그도 성공했어.
- 누군가 사이에 끼어들어 시야를 막았다. 소방관, 소방관 한 명이 상체를 숙이더니 트리스탄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며 뭔가 얘기를 건넸다. 질문을 한 걸까? 트리스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천천히, 다소 어색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방관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고 딜런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먼저 미소를 지었다.
- "안녕."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가 덮고 있는 담요를 부드럽게 다독이더니 손을 잡아주었다.
"안녕."
딜런도 입술을 파르르 떨며 속삭였다. 이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너도 왔구나."
"그래, 나도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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