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종산] 블루마블

일루젼 2025. 2. 7.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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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종산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23.04.12


       

           


<커스터머>를 읽고 이종산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지나치게 끈적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연애.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발랄함과 정체성의 혼란이 뒤섞인 십 대의 풋풋함.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라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 읽고 싶어졌었다.

 

그렇게 읽게 된 <블루마블>.

길지 않으면서도 간질간질했다.

 

'이상'을 꿈꾸는 푸른.

'현실'을 바라보는 구슬. 

 

'보편'을 두려워하는 푸른.

'소통'을 피했던 구슬.

 

두 사람이 그려내는 '푸른 구슬'- '블루마블'은 반짝거렸다. 

 

 

사족.

개인적으로는 <커스터머>의 안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신선한 세계관, 화려한 이미지와 환상적인 매력 때문일 것이다. 

<블루마블>의 너무 가까운 현실감은 회사 조직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오히려 하나의 거리감이 되었다.

푸른의 두근거림과 떨림, 실망과 두려움에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지만 상대적으로 구슬이 멀게 남겨진 점도 아쉽고.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더블 5. 말도 안 돼!

푸른은 좌절한 나머지 그대로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고 "으" 하는 짧은 신음 소리만 냈다.

‘회사에서 울면 안 되지. 난 스물아홉 살 어른인 데다 어엿한 사회인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역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그렇네요! 푸른 님 이름이랑 구슬 님 이름을 영어로 하면 블루와 마블이니까 부루마블이랑 마찬가지네요. 진짜 신기한 우연이다."
루미가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푸른은 루미의 말을 흘려들으며 구슬을 봤다.
'구슬 님도 나랑 부루마블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귀찮은 일을 떠맡아서 기분이 안 좋으려나?'

 

- 그때 푸른과 눈이 마주친 구슬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이 설렜다. 푸른은 부푸는 기대를 애써 억눌렀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 저건 업무용 미소야. 동료를 향한 사심 없는 미소. 예의상 짓는 미소라고. 나랑 일하게 돼서 짜증 난다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억지로 웃는 걸 거야.'

 

- 하지만 억지로 웃는다기에는 너무나 밝은 미소였다. 푸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미소를 외면했다. 사실은 기뻤다. 따로 보상도 없고 기한도 촉박한 일을 떠맡게 된 건 귀찮았지만, 그 일을 구슬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대됐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구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 푸른은 짝사랑 전문가였다. 혼자 사랑에 빠졌다가 혼자 정리하는 일에 익숙했다. 이번에도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다가갔다가는 망신만 당할 것이다. 게다가 회사 동료인데. 푸른은 구슬과 어떻게 해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
 

- 말하는 뻐꾸기를 쳐다봤다.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미쳤나 봐."
푸른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너 미친 거 아니야. 그냥 좀 희한한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편하게 생각해."
뻐꾸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재빠르게 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침대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제자리에서 총총 뛰기까지 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맨날 저기 갇혀서 갑갑해 죽는 줄 알았어."

- 푸른은 뻐꾸기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정신분열증의 시작이라면, 뻐꾸기에게 말을 거는 순간 증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너 미친 거 아니라니까."
뻐꾸기가 푸른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 "난 마법에 걸려서 시계에 갇힌 뻐꾸기, 넌 마법에 걸려서 게임에 갇힌 인간. 알라딘 알지? 램프에 갇힌 지니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잠깐만. 네가 마법에 걸려서 시계에 갇혔다는 건 알겠는데, 내가 갇혔다는 건 뭐야? 내가 어디에 갇혀?"
"게임에 갇혔다고. 인간만 게임을 만들어서 말을 가지고 노는 줄 알아? 신들도 심심하니까 온갖 게임을 만들어서 논다고. 우리는 신들의 말이야. 인간들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들을 하는 것 같아. 은유니 뭐니 하면서. 신들이 일부러 망각하게 해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푸른은 뻐꾸기의 현란한 말솜씨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내가 어떤 게임에 갇힌 건데?"

 

- "실패로 끝날 거야."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해? 그 사람이랑 잘 안 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 사람 여자야." 
푸른이 눈을 질끈 감고 한 말에 뻐꾸기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 사람이 여자인데, 뭐?"
"나도 여자, 그 사람도 여자. 성별이 똑같다고."
"그러니까 그게 뭐가 문제냐고."
"인간 사회에서는 그게 문제가 돼."
"아니,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달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달린 게 아니야.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얼른 전화해! 다시 말하지만 대단한 걸 하라는 게 아니고 전화만 하라니까?"

 

- 뻐꾸기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건... 데이트 신청이잖아."
"너 혹시... 모태솔로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반반 섞인 푸른의 얼굴을 보며 뻐꾸기는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아니, 뭐 그렇게 물으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난 그런 단어가 별로 안 좋다고 생각해. 그 단어는 연애하는 것을 기본으로 놓고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것처럼..."
뻐꾸기가 길어지려는 푸른의 말을 잘랐다. 

"여기서 안 나갈 거야?"

 

- "솔직히 좀 거부감이 들어요. 다들 부동산 가격이 미친 도시에 살면서 집값 때문에 허덕이는데, 부동산 독점 게임을 만들고 즐긴다는 게 별로예요."
구슬은 그동안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조금 편해지신 걸까?' 생각하면서 푸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대리 만족의 측면이 있는 게 아닐까요? 현실에서는 내 집 마련도 어려운데 부루마블 게임에서는 별장이며 호텔이며 마구 지을 수 있잖아요.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는 거죠.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요."
"글쎄요. 잠깐 꾸고 마는 꿈이 의미가 있을까요? 게임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저는 부루마블 게임 같은 걸 하고 나면 허무해져요. 게임에서 부동산 갑부가 되어도 게임이 끝나고 나면 열 평도채 안 되는 오피스텔 월세를 내는 데에 월급의 4분의 1을 써야 하는 현실이 눈앞에 있으니까요." 

-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다리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가 너무 냉소적으로 말했나요?"
구슬이 먼저 침묵을 깼다.
"아니에요. 모노폴리는 원래 부동산 독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허무함이 모노폴리 게임의 진짜 정서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잠깐 꾸고 마는 꿈이 정말 의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저한텐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꿈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도요?"
"글쎄요,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저는 꿈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눈앞에 놓인 상황만 생각하면서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체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요."
푸른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놓고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말하고 보니 모노폴리나 부루마블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리를 했네요. 죄송해요."

 

-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좁은 동네가 갑갑해서 서울에 사는 게 꿈이었어요. 매달 세련된 잡지를 몇 권씩 사서 읽으면서 '나중에는 서울에 가서 잡지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멋있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 멋지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상상력이 정말 뛰어난 사람일 거야. 나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다.' 어떤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알 것 같아요.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거요.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정말 한 줌인데, 모르는 존재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내가 모르는 존재들을 마치 내가 아는 사람들처럼 느끼고 상상할 수 있다는 거죠."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런 상상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세상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매일 실패하고 있지만요."
"이미 멋있으신데요."
푸른은 수줍게 중얼거렸다. 

- 구슬은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활기 있어 보였다. 푸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을 때 구슬이 크게 웃었던 것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을 해서 구슬이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의 구슬의 얼굴과 웃음소리만 아직 눈앞에 있는 듯 생생했다.

'자꾸 좋아져서 정말 어떡해.'

푸른은 페이지 구석의 남은 공간에 그렇게 쓰고, 세우고 앉아 있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 "당신이 정말 좋아."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마음이 그 말로 가득 차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좋아. 정말, 정말로. 당신이 너무 좋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푸른은 가만히 누워 구슬을 떠올렸다. 사랑이 편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랑은 처음이었다. 그저 더 다가가고 싶기만 했다. 더 가까이. 구슬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 "넌 회사 동료한테 단순 문병을 가?"

"우린 그냥 회사 동료가 아니라 친한 동료니까. 그럴 수도 있지."
"오, 친한 동료 사이는 집까지 찾아와서 약이랑 먹을 걸 줄 수도 있는 거구나."
뻐꾸기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만해! 나 진짜 김칫국 마시기 싫어. 구슬 님이 친절하기도 하고, 요즘 우리가 좀 친해지기도 했고, 집도 가까우니까 퇴근길에 가볍게 들르는 느낌으로 오시는 걸 거야."
"김칫국 마시기 싫은 게 아니라 상처받을까 봐 무서운 거겠지. 혼자 기대했다가 아니면 실망이 너무 클까 봐. 안 그래?"
푸른은 대답하려 했지만 뻐꾸기의 말에 정곡을 찔려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구슬이었다.

- 무거운 질문들만 잔뜩 떠올랐다. 그날은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 왜 다음 날부터 그렇게 싸늘해졌는지. 고백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던 건지. 그렇다면 오늘은 왜 데려다주는 것을 허락해 줬는지. 여전히 자신이 불편한지. 그러나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구슬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구슬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는 것도 두려웠다. 

 

- "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신 거예요?"
구슬이 불쑥 물었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때 푸른은 여러 번 구슬의 집 앞까지 와봤다. 집에 들어가서 차를 마신 적도 있었다. 그날도별일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따뜻한 대화를 나눴었다. 푸른은 그때가 아득하다고 생각했다가 그게 겨우 한 달 반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 지금 두 사람의 기분도 그랬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같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나중에 알게 된다. 푸른과 구슬은 신기해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역시 운명이라고. 이런 게 바로 사랑의 기적이 아니겠느냐고.

 




- 내가 좋아했던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남과 여'였기 때문이다.
나는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꿔본 적이 없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로맨스 속의 여주인공들이었던 것 같다.
사랑스럽고, 용감하고,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 말이다.

- <블루마블>을 쓰던 중 푸른이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요"라고 말한 순간, 나는 바로 그 대사가 내가 이 소설을 쓰는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 오랫동안 나는 '나'를 이입할 수 있는 로맨스, '남과 여'가 주인공이 아닌 로맨스가 세상에 훨씬 더 많아지기를 바라왔다.
그러나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나는 제자리에서 꿈꾸는 것보다 내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에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 <블루마블>은 내가 만든 이야기지만, 나는 세상에 푸른과 구슬 같은 멋지고 귀여운 커플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서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 상상하는 능력, 사랑하는 능력은 초능력과 같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사랑하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 당신들이 이 세상이 망하지 않도록 떠받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 멋진 기획을 제안해 주시고, 원고를 소중하게 받아주신 스토리독자팀과 "블루마블 영원하라"라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는 팀원분들, 그 외 이 책을 위해 힘 보태주신 위즈덤하우스의 여러 분들, 그린북에이전시에 감사드린다. 퀴어문학커뮤니티 '큐연'의 멤버들에게도 감사하다.

- <블루마블>은 1년간 '큐연'에서 배운 것들 덕분에 쓸 수 있었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힘과 용기, 지혜를 불어넣어 주신 서주희 님,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어주실 독자들께 특별히 무한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2023년 3월
이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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