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무라야마 사키 / 류순미
출판 : 클
출간 : 2018.11.05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따뜻한 치유계 소설'.
<오후도 서점 이야기>는 긴가도 서점에서 근무하던 직원 잇세이와 오후도 서점, 그리고 <4월의 물고기>라는 소설 속의 소설 이야기이다. 소설의 저자와 잇세이, 나루루의 반딧불이 장면은 작위적인 느낌이 좀 들지만- 한 권의 책이 인생 전반에 되풀이해서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 이해하기로 했다.
이 책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상당히 구체적인 일본의 서점가 상황 묘사 덕분이었다. 점차 줄어드는 독서 인구, 온라인의 활성화로 인한 오프라인 서점의 수익 감소 및 배본 문제는 공통적이었지만 청소년의 도서 리셀 금지라거나 서점 자체 북커버, 띠지 이벤트 같은 이슈는 일본 고유의 문화라 흥미가 생겼다. '에키벤'처럼 지방 서점마다 각 지방의 특색을 담은 한정 상품 이벤트를 한다거나, 책만이 아니라 공간과 분위기도 판매하는 북카페로의 전환 같은 발상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일 배송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한국에서 '오프라인 서점'이 가질 수 있는 의의란 무엇일까? 쇼케이스나 전시장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온라인 서점마저도 매달 바뀌는 굿즈를 이용해 판매를 증진하려 노력 중인 지금, 종이책을 오프라인 서점에서 골라 구매한다는 행위에 '고풍스러움' 외에 어떤 즐거움을 더할 수 있을까?
지난해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며 <채식주의자> 구판의 수요가 반짝 증가했던 적이 있었다. 굳이 구판을 구매하기 위해 지방까지 서점 투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도서 판매 시장은 '리커버'를 통한 한정판만이 효과를 볼 수 있는 걸까 싶어 조금 서글퍼졌었더랬다.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기원이 담겨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왜 이 책이 서점 직원들의 추천 도서가 되었는지에 대해 공감하며.
고래의 꿈을 함께 꾸었다.
사족.
SNS나 미디어를 통한 홍보는 이제 필수적인 시대인가 보다.
하지만 이전에도 잡지나 속표지, 책갈피 등을 이용한 차기작과 신간 광고는 있어왔다. 중심이 되는 매체가 변했다고 해서 지나친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인 것 같다... 지만 표지 인증으로만 끝나는 건 아무래도 좀 아쉽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모든 독서는 오독일지라도.
읽는다는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임을 믿으며.
추천사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권의 책을 고르고 빛을 비추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서점원 청년,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며 힘을 합치는 동료들, 이에 기꺼이 화답하는 손님들이 가득한 서점 이야기. 한때는 당연한 풍경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마치 동화처럼 애틋하게 읽힌다. 어린 날 수없이 들락거렸던 동네 서점의 직원들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책은 날이 갈수록 팔기 힘든 물건이 되어가고 있다. 이 책의 인물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기꺼이 서점의 고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며, 작은 기쁨과 보람을 찾는 길을 택했다. 이 책은 '책'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 '책'으로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로 인해 다시 용기를 얻는 것이 비단 책 속 인물들뿐이겠는가. 이 세상의 서점원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동네 서점이 희망과 활기를 전파하는 곳이 되기를 작가는 온 소망을 담아 외치고 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책을 파는 일'의 행복을 다시금 되새겼다.
반대로 한 개의 동네 서점이 사라질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비단 몇 명의 일터만이 아니다. 책방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그 동네에 근육과 살이 붙는다는 것을 지켜본 사람, 또는 그 작은 공간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순수한 이야기라고,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책이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디, 행복해지는 것을 포기하지 말 것.
당인리책발전소, 책발전소위례 대표
김소영
- 깊은 산골짜기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
신록에 둘러싸여 있어, 이파리와 줄기가 만들어낸 푸른 파도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마을이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차르르 하는 나뭇잎 소리가 때로는 파도 소리처럼, 때로는 자장가처럼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감싼다.
-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그 옛날에는 거쳐가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던 때도 있었다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길을 걷는 여행자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 개화기인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1912~1926)를 거쳐 고도성장을 이루게 되는 쇼와 시대(1926~1989)로 들어설 때까지 입소문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이국 사람들에 의해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관광지이자 휴양지로 떠올라 나름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던 시절이 있었다. 예배당과 작은 영화관이 생겼으며, 도시에서 돌아온 젊은이가 ...
- '여자 무사 같은 분위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나기사에게는, 저잣거리에서 자란 계집아이가 실은 왕의 숨겨진 서녀로 검술에도 능하다는, 뭐 그런 설정이 어울릴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우사미 소노에는 그녀의 소꿉친구로, 거상 집안의 대를 잇는 딸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단짝이라고 들었다.
- 소노와 나기사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소노에와 달리 나기사는 이른바 '카리스마 서점 직원'으로, 잘 팔릴 것 같은 책을 즉각 선별해 마케팅한 뒤 단번에 매진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친구도 많은 것 같았고, 출판사나 다른 서점 사람들은 물론 저자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여기서 '같았다'라고 추측만 하는 건, 잇세이가 나기사 본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건 어쩌다 주워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특별히 나기사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업무에 관한 것 외에는 서점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는 건 결코 아니다. 분위기는 잘 파악하는 편이지만, 때맞춰 농담을 하거나 추켜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사귀는 편은 아니다. 서점 직원, 그것도 문고본 담당은 그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대학에 진학해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매상에서 오는 박스를 재빨리 열어 서가나 평대에 책을 진열하고, 팔리지 않는 책이나 재고를 정리해 다시 발송하는 일, 필요한 책을 주문하고 고객을 맞는 일, 고객 문의와 예약을 받는 일, 계산대 업무 등. 이력이 붙긴 했어도 어느 것 하나 적당히 해도 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책을 팔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였다. 쉴 틈 없이 서가를 둘러보거나 평대를 살피고는 있지만,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계획한 만큼 소화해 내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부족했다.
- 혼자 사는 집에서 그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았다. 앤티크 그라인더는 손잡이를 돌리면 부드러운 반동과 함께 그윽한 소리를 내며 향이 올라온다. 몇 해 전 상점가 여름 축제 때 길거리 앤티크 상점에 나온 물건이었다. 방은 책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어서 가능한 한 살림을 늘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라인더를 한번 손에 든 순간 제자리에 다시 놓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집에 있던 그라인더 같아서 덥석 사고 만 것이다.
- 낡은 아파트, 천장이 높은 적막한 공간으로 커피의 희뿌연 수증기가 길게 피어오르며 그윽한 커피 향이 유유히 퍼져나간다. 이 방에는 책이 많다. 책장에든 바닥에든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다.
아침이지만 실내가 어두컴컴한 건 책이 바래지 않도록 커튼을 아주 조금만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 옆집에 사는 노인과는 어쩌다 우연히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함께 텔레비전을 보거나 편의점에서 산 음식과 통조림을 나눠 먹으며 그렇게 몇 년간 이웃으로 지냈다.
'아마 성격이 비슷해서였겠지.'
잇세이와 노인은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서로의 경계를 넘거나 하지 않았다. 밝게 인사하고 다소 어려운 일은 도와가며 지내면서도 그 이상 선을 넘지는 않았다. 잇세이는 노인이 스스로 말한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혼자 살게 된 이유조차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과 이별하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 말이다.
-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집에는 책이 많았다. 잇세이와 누나는 그 책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자랐다. 누나도 활자를 좋아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걸로 치면 잇세이가 한 수 위였다.
그랬다. 잇세이는 누나를 이길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 적당히 시간을 때웠는데 (가방 안에는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는 책도 있고, 체크하기 위해 넣어둔 문예지도 있다. POP 광고 아이디어를 짜는 동안 시간은 적당히 흘러가주었다), 그래도 역시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가능한 한 점장 눈에 띄지 않게 서점으로 들어갔다. 오후 택배로 문고본 신간이 도착할 때까지 서가를 정리해두고 싶었다. 물론 도착한 신간을 어디에 어떻게 진열할지는 어제 대략 정해두었다.
- 같은 신간이라도 책마다 배본되는 수량이 달랐다. 서점에 따라서도 달랐다. 작은 서점에서 원하는 신간을 도매상이나 출판사에 미리 주문한다 해도 실제로 배본되는 부수는 적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긴가도 서점은 오래된 데다 지역에서 제일가는 서점으로 과거 판매 실적도 있어, 전국 체인의 대형 서점에는 못 미친다 해도 일단 희망 부수는 들어온다.
- 신간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잘 팔리니 큰 문제가 없다. 그보다 기존에 있던 책을 더 신경 써서 판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POP를 만드는 등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가를 항상 편리하게 정돈해두고 싶었다.
- 서가에 몸을 숨겨가며 뒤섞인 책들을 바르게 꽂고 있자니 서서히 잡념이 사라졌다. 뒤틀린 띠지를 바르게 펴고 손님이 그랬을, 거꾸로 꽂힌 책을 다시 뒤집어 꽂는다.
'이게 왜 평대에 있지?'
그 역시 분명 손님이 그랬을 테지만 다른 책 밑에 깔린 책을 찾아내고...
'이래서 봄방학은 성가시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방학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가 정리에만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렸다.
- '이 뿐만이 아니지.'
방학 기간에는 책 도둑도 많다. 요즘 책 도둑은 예전과 달리 돈이 없어서 정말 갖고 싶은 책 한 권을 어쩌다 순간적으로 훔치는 갸륵한 처지가 아니다. 한때는 중고 서점에 책을 되팔아서 돈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벌이는 절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막 들어온 고가의 비즈니스 서적이나 화제의 신간을 몰래 훔쳐갔다. 청소년들의 중고책 매매가 금지되자 돈을 목적으로 책을 훔치는 일은 없어졌지만, 이제 자신이 읽을 책을 슬쩍 가져가기 시작했다.
- 후쿠와 문예문고라는 계열사에서 6월 마케팅에 특별히 주력하는 책은 순조롭게 팔리고 있는 시대물 신작으로, 전국 어디서든 출간 첫 주 매출이 순위권에 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기다리는 독자도 많아 이미 예약에 들어간 상태이고, 잇세이 역시 신간 평대에서 열심히 팔아볼 계획이었다. 이 시리즈의 신작을 기다리는 단골손님들의 기뻐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잇세이가 진짜 팔고 싶은 책은 목록 맨 아래에 다른 책에 비해 작은 글씨로 적힌 단 시게히코의 책이었다.
- "저희 서점에서 팔아보고 싶어요. 괜찮으시다면 뭔가 광고나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까 해서요. 가능하다면 교정쇄를 읽어보고 싶어요. 앞으로 2, 3주 후면 책이 나오잖아요."
일명 '게라'라고도 불리는, 책과 똑같이 조판하여 종이에 인쇄한 교정쇄는 서점 직원이 출판사에 요청하면 보내주기도 한다. 읽고 리뷰를 전하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사전에 서점 직원들의 반응도 알 수 있고, 그 리뷰를 띠지나 광고로 사용할 수도 있다. 서점 입장에서는 막 찍어낸 (대개 원고가 완성되고 2주 정도면 인쇄소에서 도착한다) 교정쇄를 독자보다 먼저 읽고 입고 부수를 결정하거나 어떤 식으로 매장에 진열할지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신간 배본 부수를 더 늘려주기도 해서 고맙기도 하다.
- 단 시게히코의 원고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자의 트위터나 블로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의 진행 상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저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활기차고 신나 보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작가지만 귀엽다는 생각마저 하면서 매번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일상을 전하는 글도 재미있었다. 기르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나 최근 시작했다는 요리에 관한 이야기. 가족과의 대화나 추억에 관한 이야기. 떠나온 지 오래된 고향 이야기. 산책 중에 만난 하늘이나 새들을 찍은 사진도 아름다웠다.
- "안목이 높으신 것 같아요. 실제로 담당 편집자도 기대되는 책이라고 했거든요. 아직 젊은 편집자인데 이 작가에게 엄청 반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솔직히 말해서 단 선생님은 무명 저자나 마찬가지여서요. 물론 방송 쪽에서는 잘 나가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뭐랄까, 왕년의 영광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거든요. 물론 저희 쪽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어쨌든 츠키하라 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는 거죠?"
"그냥, 직감이에요..."
이 작가가 쓴 글은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큰 병에 걸리기 전에는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였던 그는, 텔레비전 드라마 전성기에 수많은 히트작을 낸 이력이 있다. 하지만 이미 20년, 아니 30년도 더 된 얘기인 데다 드라마 대본도 아니고 신작 소설로 어떤 작품이 나올지를, 집필 중인 원고를 단 한 줄도 읽어보지 못한 잇세이가 판단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블로그의 필력을 보면서 에세이 정도라면 잘 쓸 것이라 판단하는 편집자나 작가는 더러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단지 직감으로 느꼈다.
-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주간지에서 우연히 단 시케히코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드라마 작가로 정점을 찍고 있던 무렵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와 싸우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낸 날들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낸 무척 훌륭한 에세이였다. 병에 걸리고 나서야 처음으로 마주할 기회를 얻은 가족에 대한 감사와,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열정을 쏟아온 일에 대한 뜨겁고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 또한 그의 글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공감이 있었다. 지적이지만 잘난 체하지 않고, 엉뚱하고 인간적이지만 고지식하지 않은, 이 사람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쾌한 문장이었다. 잇세이는 그 에세이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오려내 수첩에 끼워두었다.
- 후쿠와 출판사에서 신간 뉴스가 팩스로 도착했을 때, 6월 간행 예정인 신간 문고본 가운데 다른 저자의 책에 비해 작게 표기된 이 드라마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았다. 첨부된 줄거리에는, 꿈만 좇는 생활력 없는 남편 대신 한 집안의 가장으로 꿋꿋하게 살아온 아내가 갑자기 병에 걸린 뒤, 지금까지 어딘가 데면데면하던 가족들 사이에 끈끈한 정이 생기면서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4월의 물고기>. '푸아송 다브릴'(만우절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4월의 바보', 영어로는 'April fool', 프랑스어로는 'Poisson d'avril'이라고 하는데, 이는 '4월의 물고기'라는 뜻으로 고등어를 가리킨다 - 옮긴이)이라는 프랑스어가 부제처럼 붙어 있었다.
-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팔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섬광처럼 흐르는 직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거의 완성되었을 표지 디자인이 궁금했다. 책 판매에는 표지 그림과 디자인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띠지도 중요하다. 어떤 디자인에 어떤 그림과 어떤 카피를 썼을까.
-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직접 띠지를 만들어 표지를 숨기는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표지가 좋으면 그럴 필요는 없다. 팩스로 도착한 표지 그림은 흑백인 데다 작고 뭉개져 있어 뭐가 그려져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 잇세이는 팩스를 뚫어져라 봤다. 판화처럼 가는 선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프랑스어 단어를 그림 사이사이에 넣어 은은한 멋을 더했다. 중앙에는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창가에 놓인 둥근 테이블. 그 위에 앉아 이쪽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사랑스런 고양이와 튤립이 꽂혀 있는 꽃병. 젊은 여성(그림책이나 사진집을 살 것 같은 센스 있는)이 좋아할 만한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번역 추리소설 표지처럼 고전적인 안정감까지 갖추고 있어, 이 정도라면 활자를 좋아하는 나이 든 남성 독자들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항상 그랬다. 대부분 계시처럼 번뜩이는 직감으로 추천할 책을 고르곤 했다. 뒷받침할 만할 이유는 나중에 따라왔다. 이번처럼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교정쇄 상태에서 번뜩이는 직감을 경험하기도 하고, 책으로 나온 상태에서 '이거다!' 싶을 때도 있다. 산처럼 쌓인 책 더미 속에서 그 책의 표지만이 빛나 보이고, 그 책을 팔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목이 타는 듯한 조바심마저 드는 것이다. 그 직감은 본문을 단 한 줄도 읽지 않고도 느낄 때가 있는데, 어딘가 마법 같은 육감이었다.
- "듣던 대로 '보물찾기 대마왕'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네?"
"아, 그 왜, 야나기타 점장님이 츠키하라 씨를 그렇게 부르셨잖아요.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어라? 그때 안 계셨던가?"
업무가 끝나면 출판 관계자나 다른 서점에서 일하는 서점 직원들이 모여 가끔 회식을 한다. 아니, 그런 자리에 가본 적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자주 모여 즐겁게 술을 마신다는 건 알고 있다.
- 오노 씨가 빙긋 웃었다.
"야나기타 점장님이 문고본 코너의 츠키하라는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찾아내는 데 천재라고 칭찬하시더라고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나 잘 나가는 책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그런 점은 어떻게 좀 안되나 싶긴 하지만, 숨은 히트작을 발굴하는 천재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 대신 피드백은 서점 사람들이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노 씨는 점장의 말투를 똑같이 흉내 냈다. 점장은 기분이 좋으면 연극 투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 이런."
- 잇세이는 같이 어울리는 것보다 서점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편이 더 좋았다.
'내가 조금은 인정받고 있었구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쑥스럽긴 해도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자신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사금을 캐는 일과 닮았다고.
- 어릴 때 읽은 책에 남쪽 나라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 나라에는 금빛으로 넘실대는 강이 있다. 강바닥에 엄청난 양의 금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이끼를 쪼아 먹거나 작은 벌레를 잡아먹을 때 금까지 함께 먹어서 비늘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도 날개와 눈동자가 금빛이었다. 강가에 자라는 풀들도,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버드나무도 황금빛을 발했다. 남쪽 나라 사람들은 반들반들 빛나는 몸을 물에 반쯤 담그고 사금을 캔다. 손에 익은 소쿠리를 흐르는 물에 담갔다가 모래 안에서 반짝이는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유리병에 넣는 것이다. 같은 동작을 끝없이 반복하는 하루, 그 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세월이 되면서,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일생을 살아간다.
- 서점 직원이 되고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백화점 폐점 시간이 지난 시각, 어둡게 밝힌 조명 아래 혼자 남아 POP를 만들며 야근을 하다가, 문득 황금빛으로 빛나는 강과 사금을 캐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사금을 캐고 있는 건지도 몰라.'
소중한 사금이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눈에 띄지 못한 채 모래에 휩쓸려 강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 매일 엄청난 양의 신간이 도착하지만 서점에는 책을 진열하는 서가와 평대가 제한되어 있다. 새로운 책을 진열하려면 그 대신 다른 책을 도매상을 통해 출판사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긴가도 서점의 문고본 서가에서 책임지고 책을 선별하는 일이 잇세이의 업무였다.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반품할까. 그 반복된 과정이 쌓이면서 서가는 변화해 간다. 긴가도 서점이 잇세이의 손에 의해 변화하는 셈이다. 그것은 출판 불황으로 많은 서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요즘 같은 시절에는 두려울 정도로 무거운 책임이었다.
- 생각하면 두려웠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줄타기를 하는 서커스 단원이 된 것처럼 잇세이는 눈앞에 있는 책만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선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로지 독자와 책에 대한 책임만을 생각하려 애썼다.
- 긴가도 서점의 문고본은 잇세이가 진열한 책이 아니면 독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 그리고 서가와 평대, 어느 쪽에 진열할지에 따라 책과 독자가 만날 운명도 바뀐다. 손님이 한 권의 책과 만나는 운명, 책이 손님에게 선택받는 운명을 잇세이가 쥐고 있는 것이다. 잇세이는 그날 밤 무섭게 밀려드는 책의 파도 속에서 자신은 사금 알갱이를 고르듯 서점에 진열할 책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일이라고.
- 한 권의 책으로 그날의 기분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잇세이는 알고 있다. 가령 운수가 나쁜 하루였다 해도, 귀갓길에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을 읽고 다음 날은 기운 내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 읽는 사람의 기분을 살짝 좋게 만드는 것만이 책이 가진 힘이 아니다. 삶이 괴로울 때나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읽다 만 책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내일까지, 또 그다음 날까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안데르센의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는, 눈 내리는 어느 밤 성냥을 하나씩 켜서 불꽃 속에서 행복한 환영을 본다. 잠시 동안 행복한 시간을 산다. 소녀에게 성냥이 있었다면 어린 잇세이에게는 책이 있었다. 성냥갑 속의 성냥과는 달리 책은 세상 어디에든 가득했고, 언어와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에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진작 마음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 그 당시 살았던 적막이 흐르던 저택,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은 서가에 꽂힌 책들은 한결같이 크고 아름다웠지만 너무나 낯설게 보였다. 거인이 버티고 있는 듯한 높은 서가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손을 뻗어 품에 안았던 책의 서늘한 감촉을 잇세이는 잊을 수가 없다.
- 기억 속의 그 서재는 항상 춥고 적막했다. 마치 영원한 겨울 공기가 그곳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니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을 텐데도 늘 추웠다. 커다란 저택은 학자가 사는 집으로 서재에 꽂혀 있던 책도 동서고금의 명저였는데, 그것도 옛 글자로 된 독특한 활자판으로 인쇄되어서 어린아이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뿐이었다. 그래도 잇세이는 그 책들을 읽었다. 그런 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곱 살 때까지 살았던 그리운 아파트 단지의 햇살 가득한 집에 있었던 아이들 그림책이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따뜻한 책은 그곳에 없었다. 그래도 잇세이는 혼자서 외로울 때면 종이와 잉크 냄새가 그리워 책을 찾았던 것이다.
- 계속 읽는 동안에 차츰 그 서재에 있는 책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책들은 어른들의 언어로 세상을, 인류를, 역사를, 사람들의 생각과 미래의 희망을, 잇세이에게 들려주고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책은 츠키하라 잇세이라고 하는 인간의 마음과 지성을 길러주었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와, 그 후 영원히 헤어진 아빠와 누나 대신에.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 원래 서점에 있는 책은 도매상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위탁받은 책이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은 반품이 가능하다. 그러한 시스템 덕에 작은 서점에서도 많은 책을 진열해 둘 수 있다. 하지만 사인본은 반품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서점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사인본을 입고하는 것은 모험과도 같다.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기필코 모두 판매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친필 사인이 필요했다. 매장의 깃발이 되는 그런 상징이.
- "네, 맞아요. 요모기노 선생님이 여기 가자하야에서 태어나셔서 부모님 댁도 이곳에 있다고 하네요. 긴가도 서점에서 이벤트를 기획하면 딱 좋을 것 같아서요. 담당 편집자에게 들었는데, 이 동네 서점이라면 다 좋다고 하셨대요. 원래 서점을 좋아하셔서 서점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평소에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고."
"아, 네."
"문고본 정도로 작은 책인데 가장 좋은 종이를 써서 사진을 많이 넣을 거예요. 장정도 돈을 좀 들여서 멋지게 만들려고요. 식도락가로도 유명하신 요모기노 선생님이 추천하는 유명 음식점에서 요리와 함께 사진을 찍고 그 요리에 얽힌 에세이를 엮는 거라, 정말 고급스럽고 멋진 책이 될 거라 확신해요. 맞아요, 문고본 사이즈로 제작하는 건, 비용 절감도 되고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작고 가볍게 만들려는 거예요. 책을 산 독자가 그 책을 들고 서점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를 달아 포스팅을 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그렇게 독자까지 끌어들여 분위기를 좀 띄우려고요. 기획이 성공해서 독자가 늘어난다면 2탄, 3탄도 이어갈 생각이에요."
오노 씨가 얼굴이 발개져 상기된 채 웃는다.
"어때요? 꽤 좋은 아이디어 아닌가요?"
잇세이가 책을 판매하는 것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면서도 즐겁게 일하고 있듯, 오노 씨 또한 출판사 영업자 입장에서 책 파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잇세이는 생각했다.
- "어랏? 츠키하라 씨, 요모기노 선생님과 살짝 닮았는데요? 앗, 죄송합니다."
오노 씨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가지고 있던 커다란 가죽 가방과 종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은품이며 자료 같은 것을 마술사처럼 마구 꺼내놓으며 자연스럽게 영업 멘트를 시작했다. 잇세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듯 문지르고는 오노 씨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 오노 씨는 강매를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앓는 소리를 하거나 매달리지도 않는다. 잇세이가 바빠 보일 때는 알아서 후퇴할 줄도 알기 때문에 항상 좋은 인상을 남겼다. 6월 신간 건으로 도움을 받으려면 다른 책에 대해서도 들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점장은 자신을 유독 많이 챙겨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그 친절을 알면서도 그는 내밀어준 손을 못 본 척해왔다. 지금의 잇세이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마치 사람을 따르지 않는 길고양이 같았다. 미소 짓고 있어도, 어느 정도 대화를 주고받긴 해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동료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속한 장소 같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체념하고 있었다. '안식처'를 만드는 것을.
- 그런데 그런 잇세이에게 이 서점은 물론 서점과 연결된 사람들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한쪽 손에 사탕이 든 봉지가 들려 있다. 잇세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눈을 감아 떨쳐버리고 웃었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하나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비록 짧은 순간이어도 왼쪽 다리의 통증마저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한밤중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든 달빛이 창가에 잠들어 있는 앵무새를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앵무새는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열이 난다. 온몸의 관절이 욱신거리고 기침이 나온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목이 아프면서 몸이 으슬으슬했다.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열이 나더라도 푹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지금까지 신기할 정도로 감기에 걸리는 일이 별로 없었고, 간혹 걸리더라도 금방 나았다. 서점을 그만둔 걸 몸이 알고 안심한 것 같았다.
봄인데도 방 안 공기는 싸늘했는데, 열이 나서인지 시원하면서도 으슬으슬 추웠다. 아픈 왼쪽 발목에 냉기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저릿한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 목이 말랐지만 이 다리로 침대에서 내려가 냉장고를 열기가 귀찮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저녁은 먹었던가. 기억이 없다. 살짝 허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냉장고를 열고 뭔가를 만들어 먹는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성가셨다. 어두운 방에서 기침을 하며 몸을 둥글게 말아 움츠렸다.
'몇 시나 되었을까?'
베개 밑에 두었던 스마트폰에 더듬더듬 손을 뻗어 느린 동작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표시된 요일과 날짜를 본 순간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이런 시간에 잠이 깬 걸까.'
얼른 다시 잠들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날 수 없다.
- 잠시 후,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열로 몽롱해서일까, 아니면 10년이나 해온 직장 생활이 아예 몸에 배어버린 걸까.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건 참 좋구나.'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침울하기만 했다.
- 한숨 잔 탓인지 묘하게 맑아진 정신으로 어둠 속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럴 때 돌아가신 아빠처럼 담배라도 피울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술이라도 마실 줄 알았다면, 잇세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담배는 그렇다 쳐도 술은 평생 마실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대학 때부터 긴가도 서점에서 일했기 때문에 다른 서점은 모르고, 서점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일도 없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지만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교사 자격증을 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많은 과목을 이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다. 의지할 곳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침착하게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마음속에 텅 빈 어둠이 있었다. 일어나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발 내딛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깊은 구멍이었다.
- 잇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갈 만큼 긴 휴가를 내본 적이 없었다. 점장은 항상 직원들에게 휴가 좀 가라고 말했지만, 문고본 코너가 걱정이 되어서 휴가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끔은 다른 곳에 가 바람을 쐬는 것도 좋지.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별안간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약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만나러 가야 하는 거야. 나처럼 할아버지가 되어버리면 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강 건너가 버리고 없다고."
"보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머릿속이 엉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먼 길을 떠나고 없는 것 같았다.
"좀 쉬면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자리를 찾으면 되잖아. 있을 거야, 분명. 형씨한테 어울리는 일자리가."
- "싫어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단호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솔직히 저는 서점에서 일하고 싶거든요."
그래, 자신은 다른 일을 찾으려는 의욕이 없는 게 아니라 서점에서 일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하지. 형씨는 다시 서점에 취직하면 돼."
- 책도둑 사건 이후 마음이 괴로웠던 시기에 잇세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릴 수가 없었다. 이웃 블로그를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오후도 블로그에 새 포스팅이 올라오지 않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그 후 계속해서 마음이 쓰였다. 메일로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안부를 묻는 메일을 보내고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오후도 주인은 사진으로 봐서는 나이가 꽤 많은 것 같았다. 혹시 나쁜 병에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사고라도?
- '설마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잇세이는 사람 목숨이란 게 맥없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일상이 별안간 끝나버린다.
불안해졌다. 그래서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어졌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빠서 블로그에 글을 올릴 겨를이 없었다면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사실 예전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 게다가 봄에는 교과서 판매도 해야 하니 마을의 작은 서점은 바쁠 것이다.
- "어차피 한 번은 가보고 싶은 서점이었어. 언젠가도 찾아가겠다고 약속도 했고. 좋은 기회야. 가보자."
그래, 잘 생각했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앵무새가 소리 내어 울었다. 잇세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 깊은 산속 골짜기 작은 마을에 온천이 있다는 얘기를 오후도 주인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규모가 작긴 해도 상처나 병에 효험이 있는 오래된 온천. 봄에는 벚꽃 잎이 둥둥 떠 있고, 낮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반사되어 마치 도원경에 나오는 온천 같다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
- [몸은 물론 마음의 상처에도 잘 듣는다고 전해지는 곳이죠. 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어떤 피곤함이나 슬픔도 사라지고 다시 살아갈 힘이 솟아난다고 해요. 옛날에는 오솔길을 따라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과 산에 사는 사슴과 여우도 온천의 효능으로 상처를 치유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메이지 시대 때 외국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호텔 안에 스파를 만들어 온천 치료를 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효능 좋은 온천에 마을 풍경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인정이 많은 곳이라며 외국에 소개된 적도 있어요.]
잇세이가 한번 가보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그곳에 가보는 건 거의 체념하고 있었다.
[고초테이 님, 저희 마을은 봄에 오시면 좋아요. 벚꽃이 무척 아름답거든요. 사쿠라노마치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그랬지요. 아마도 아름다운 벚꽃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거예요. 옛날부터 산벚나무와 능수벚나무에, 나중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심은 왕벚나무까지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핀답니다. 꼭 보여주고 싶네요.]
- 잇세이는 벚꽃이 흩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떠나볼까."
앵무새 선장을 어깨에 태우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을로, 작은 서점을 찾아 떠나볼까. 동화 속 주인공처럼.
- "문제는 서점이에요. 서점 일이란 게 마치 아이 키우는 일 같아서, 누군가를 믿는다고 덜컥 맡길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니 조금 힘들죠."
잇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벌써 2주나 문을 닫고 있는 셈이니 큰일이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똑같이 휴업 상태라 해도 과일이나 고기와는 달리 썩거나 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꽃이나 나무나 새가 아니니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다. 책은 서점 서가에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생물과 마찬가지다.'
- 서점은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 곳이다. 문을 열고 서점 직원이 일을 해야만 하는 곳이다. 입출고가 빈번한 잡지는 매일같이 신간이 쏟아지고, 지난 잡지는 반품해야 한다. 책을 배송하는 기사도 그 시스템을 알고 기다렸다 가져간다. 택배 편에 반품하는 책은 잡지뿐만이 아니다. 문고본이나 단행본, 만화까지, 이 서점에서는 더 이상 팔리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서면 결정하고 반품해야 한다. 창고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매상을 통해 출판사에서 빌려온 책들이다. 일정 기간 빌려 서점에서 손님에게 파는 계약이다. 매출에서 일정 금액이 서점 매출이 되고, 그것을 뺀 금액을 도매상으로부터 청구받는다. 서점에서 파는 책 한 권의 매출을 도매상과 출판사가 나누는 시스템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반품기일'이 있다는 점인데, 그날을 넘기면 도매상과 출판사는 반품을 받아주지 않는다.
2주나 서점을 닫아놓았다면 오후도의 서가와 평대는 수많은 책들이 움직임을 멈춘 상태이다. 매출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신간을 들여오지도, 반품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주문한 책이 도착해 있어도 전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인터넷으로 찾아봤어요. 친하게 지내는 서점 직원들이 마침 긴가도 서점의 책 도둑 사건을 SNS에서 떠들며 분개하고 있기에, 문고본을 담당하는 젊은이였다고 해서 금방 알았죠. 그 후에 서점을 그만두었다는 것도 바로 어제야 알게 됐고, 블로그도 오랫동안 그대로여서 걱정이 되더군요."
아아, 그랬구나, 잇세이는 그제야 이해하고는 왠지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잇세이와 오후도 주인은 서로를 걱정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블로그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오후도 주인은 머리를 숙였다.
- "이번에는 고래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4월의 물고기>라는 이 소설에는 간혹 물고기나 고래가 페이지 사이에 얼굴을 내민다. 그것은 가족이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행복했던 여름을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로도 작용했다. 환자인 (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주인공 리카코가 마지막에 새벽하늘에서 환영을 보는 장면에도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고래'. 고래는 한없이 넓은 등에 리카코와 그 가족을 태우고 허공을 날아간다. 가족은 행복한 미소를 띠며 고래 등 위에서 멀리 지평선과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바라본다.
여기에 리카코의 독백이 겹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이윽고 찾아온 자기 삶의 끝과 마주하지만, 그래서 더욱 밝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문장이었다. 소설 전체의 테마를 정리한 것이기도 했다.
-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삶이라는 여행은, 가족이라는 여행은, 영원하다. 비록 잡은 손을 놓고 작별을 고하더라도 우리들은 분명 같은 하늘을 여행하는 여행자, 한 무리의 물고기인 것이다. 눈을 감는 날, 나의 눈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 같은 시선으로 지평선에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볼 것이기에.]
- 기필코 주목받는 POP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서점에 오는 손님들이 POP를 보고 놀라고, 시선을 사로잡아 구매로 이어지면 좋겠다. 그러지 않으면 POP가 화제가 되어 그것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다가 또 다른 서점에서 <4월의 물고기>가 판매되는 것이다. 흠, 이것도 좋은걸, 하고 생각했다.
"좋은 책이니까."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반드시 자신이 일하는 서점이 아니더라도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서점인이다. 가령 지금처럼 말이다.
- 눈물을 닦고 콧물을 훌쩍였다. 쉬는 날이지만 아침부터 출근해 카운터에 앉아 이번에 나오는 신간의 교정쇄를 몇 번이고 읽으며 울었다.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엉엉 소리 내어 목 놓아 울었다.
과연 굉장한 책이었다.
- "죽음은 특별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는 것이군."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하면 투병 생활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족 이야기를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좀 더 깊고, 훨씬 보편적인 것을 전하려 하는 듯했다.
- 리카코는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찾아온다. 이 소설은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가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세상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한, 평범한 삶 속에 반짝이는 순간을 그린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점장 야나기타는 감정이입이 되어 원고를 읽었다. 그 역시 삶을 사랑하면서도 언젠가 죽어야 하는 인간이며, 자신이 미래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고래를 타고 지평선 끝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더라도 그것이라 의식하지 않더라도.
고래 등에 타고 있는 자신의 옆에 오래전에 헤어진 그리운 누군가가 있다. 살며시 곁에 다가와 떠오르는 태양을 함께 바라본다. 그 순간의 가슴 벅찬 환희와 행복을 그린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 "멋진 이야기였어."
야나기타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았다.
이것은 묻혀서는 안 될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아직 무명이라 해도 좋을 저자가 쓴 첫 소설 작품이다. 어쩌면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를 책이었다. 아마도 초판 부수는 소량만 인쇄될,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조차 이 책과 만날 수 없었을, 그런 책이었다.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었다니, 행운이야."
- "원수를 갚아주마, 사자死者의 복수전이다."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외국 문학 담당인 부점장 츠카모토 다모츠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기품이 흐르는 가벼운 봄 코트 차림이었다.
"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고 난리세요? 잇세이 씨, 살아 있잖아요."
부엉이처럼 심오한 철학자의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이지적이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
대학 시절 츠카모토는 이미 서평이나 단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마이 미스터리 일도 그때부터 계속해오고 있다.
만년필로 수정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야나기타는 순간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츠카모토는 원고를 수정할 때 만년필을 써? 아무 데서나 파는 수정용 빨간펜이 아니고?"
츠카모토가 얼굴을 찡그렸다.
"평생 살면서 문구를 사용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지요. 글씨를 쓰는 횟수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손에 익은 최고의 만년필로 아름다운 글씨를 쓰고 싶어요. 아무 데서나 파는 펜을 쓰다니 말도 안 돼요."
- 서점에 진열된 책은 한 권 한 권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게 아니다. 출판사별 또는 수준별로 혹은 서점에 따라서는 저자별로 구분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고, 신간이 놓인 평대나 그 서점에서 홍보 중인 책, 추천하는 책이 놓인 평대는 서점이나 담당자마다 달라 서점 직원의 열의와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다. 언뜻 평범하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책에, 책이 놓인 그 위치에, 손님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옆에 신간이지만 어딘가 비슷한 인상을 주는 책이 함께 놓여 있는 경우도 흔하다. 같은 저자의 책이 나란히 진열되는 것은 당연하고, 같은 테마나 같은 나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가 함께 놓여있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책들은 그렇게 하모니를 연주하고 있다.
- 하지만 이 서점의 경우에는 언뜻 별 상관없어 보이는, 연결 고리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 책끼리 진열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다고나 할까.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기저기에 관련 있는 책들끼리 진열되어 있었다. 그 연결 고리를 알아챈 사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고를 것이며, 연결 고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이나 기억이 반응해 왠지 모르게 나란히 진열된 책에 시선이 꽂혀, 사려던 책 말고도 다른 책까지 구입하는 손님도 있을 것이다. 이 서점의 평대는 마치 퍼즐처럼, 혹은 별자리처럼, 책과 책이 연결 고리를 가지고 서로를 빛내고 있었다.
- 책을 좋아하는 단골에게는 은밀하게 암호와 같은 메시지를 속삭이면서, 앞으로 독서의 세계로 들어오려는 새로운 독자를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여유와 배려가 살아 있는 훌륭한 서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내 한복판의 대형 서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작은 서점이라 분명 배본도 적을 테고, 팔고 싶은 신간이 있어도 원하는 부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나이 든 주인 혼자서도 무리하지 않고 손님을 배려할 수 있는 서점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오후도 주인은 그 온화한 눈빛으로 꽃을 키우듯 매일 조금씩 이 서점을 돌보며 서가와 평대를 가꿔왔으리라.
- 이 서점은 이렇게 살아왔구나, 잇세이는 감탄했다. 점점 쓸쓸해지는 작은 마을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적을 것 같은 곳에서, 서점을 둘러싼 상황이 해가 갈수록 악화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 일대의 마지막 서점으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 서점 안쪽에 작은 주방이 있었다.
"집에서 만든 거라 죄송해요."
도오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금누룩(누룩과 소금, 물을 섞어 발효·숙성시킨 일본 전통 조미료 - 옮긴이)에 절여두었던 닭다릿살과 양배추를 참기름으로 살짝 볶아 마법처럼 뚝딱 닭고기덮밥을 만들어 내왔다. 토마토와 가늘게 썬 양파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앵무새 선장을 돌보는 일까지 도맡았다.
- 이렇게 두 사람과 두 마리는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콤하고 달콤한 간장 소스로 맛을 낸 닭고기덮밥은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소금누룩에 절인 닭고기는 야들야들한 식감으로 입에서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보람찬 일과를 마친 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식사였다. 그래서 더욱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자 바바루아(과일, 우유, 달걀, 설탕, 젤라틴으로 만들어 디저트로 먹는 프랑스 과자 - 옮긴이)까지 나왔다.
"할아버지 병문안을 왔던 분이 맛있는 홍차를 주셔서요. 마침 고급 생크림도 이웃분이 나눠주신 게 있고 해서, 밀크티 맛 바바루아는 어떨까 싶어 만들어봤어요."
예쁜 민트 잎이 올려져 있었다.
- 한입 떠서 입에 넣자마자 잇세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재료가 신선하고 좋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요리와 디저트를 정말 잘 만드는구나."
"좋아해요."
소년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 답장은 바로 왔다. 메일이 왔다는 착신 표시를 보는 순간 심장박동과 호흡이 멈추는 줄 알았다. 잘못 본 건 아닌지, 환영은 아닌지, 하지만 화면에는 나기사가 등록한 대로 잇세이의 이름이 있었다.
아름다운 하늘과 봄 들녘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바람이 이는 초원에 앵무새가 있었다.
건강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여행 도중에 오솔길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처음 방문하는 사쿠라노마치와 오후도 서점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다리 통증도 깨끗이 나았다고 적혀 있었다. 멋진 봄 여행을 하고 있다고.
- 봄이 찾아온 들녘에서 메일을 쓰고 있는 잇세이의 표정을 상상해 봤다.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서점을 떠날 때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그 표정을 이제는 짓지 않을 것 같았다.
- '문예 서가가 마음에 드셨다니 기쁘네요. 그 서가 담당은 미카미 나기사라고 하는데, 큐레이션 감각이 아주 뛰어난 직원이에요. 책도 많이 읽는 독서광인데, 저 같은 사람은 상대가 안 될 정도죠.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와 책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나누었다면 좋았을걸, 이제와 후회가 됩니다. 미디어 쪽 노출도 많은데 일주일에 한 번, 지역 라디오 FM 가자하야의 <초승달 서가>라는 밤 11시 전에 하는 짧은 프로에서 책 소개도 하고 있어요. 큐레이션이 흥미롭고 세련된 프로그램이니 기회가 닿으면 꼭 들어보세요. 책 취향은 당신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나기사는 웃었다.
"비슷하고 말고가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구나, 나기사는 중얼거렸다. 동시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서점 직원으로서 자신은 잇세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됐어, 이걸로."
눈물을 닦고 다시 웃었다. 이제 이걸로 자신의 사랑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 '아동서 쪽 서가는 어땠나요? 호시노카케스님은 아이들 책까지 섭렵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메일은 갑자기 그곳에서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서점을 맡아서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하고 묻고 있었다.
'아동서 서가.'
나기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것은 어쩌면,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아동서 서가를 맡고 있는 우사미 소노에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 '호시노카케스는 앞으로도 영원히 너의 친구로 남을게.'
하늘을 나는 새가 높은 하늘에서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땅을 내려다보듯, 홀로 꿋꿋이 걸어가는 잇세이를 곁에서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격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줄 모르는 츠키하라 잇세이의 길을, 그가 걸어가는 길을 높은 하늘에서 지켜보는 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괜찮아.'
그와 소노에가 행복하다면.
-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은 밤, 같은 하늘 아래, 소노에는 뭘 하고 있을까. 요새 잠을 별로 못 잤다는 얘기를 들었다. 밤새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4월의 물고기> 띠지와 POP에 넣을 그림을 직접 그리고 있다고.
"난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이 걸려서,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6월 출간일에 못 맞출 것 같거든."
소노에는 행복한 듯 방긋 웃었다. 웃으면서도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듯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껏 나기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띠지와 POP에 넣을 그림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작심하고 그리려는 걸까. 소노에는 마음먹고 전시를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걸까.
- '이거 기대되는 걸.'
긴가도 서점 사람들은 소노에가 '작심하고 그린 그림'을 아직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들 놀라 자빠지겠지, 나기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 그럼 난 뭘 하면 좋을까?"
흥얼거리듯 말하고는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4월의 물고기>. 잇세이와 상관없이 추천했을 소설이었다. 이미 서점에서도 교정쇄를 읽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극찬하는 말을 들었다. 4월의 물고기는 독자를 가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나기사의 기준에서 따지자면, 미안하지만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재미있어했고, 외국 문학담당인 츠카모토 씨도 "읽었어, 괜찮던걸" 하고 짤막하게 칭찬했다. 그는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니 리뷰를 발표하는 잡지에 좋은 평가를 할 것 같았다.
- 한편으로 나기사나 츠카모토처럼 줄곧 책을 읽어왔거나 책에 익숙한 서점 직원들은 행간의 숨은 메시지가 가슴에 와닿았다.
살아 있다는 것, 꿈을 꾼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추억한다는 것. 그리고 이룰 수 없었던 꿈을 가슴에 담고, 이제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해야만 하는 그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고통.
- '쓴 잔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말이지?'
주인공인 리카코가 성서의 말을 인용하는 장면이 있다. 가족에게는 시한부 선고받은 것을 비밀로 하고, 서점에서 종교에 관한 책과 심리학책을 잔뜩 사들고 와서 한밤중에 부엌에서 밤새 혼자 책을 읽는 장면이었다. 큰 병으로 방송 일에서 물러난 뒤 소설가로 재기한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느낀 점을 비롯해 품어온 생각을 그린 게 아닐까 싶었다. 주인공이 느낀 일이나 가족과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듯 탄탄한 힘이 있었다. 산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 리카코의 대사 속에 녹아 있는 것 같다.
- 독특한 가족 이야기 속에서 리카코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는 사실.
만약 세상에 마법이나 신이 존재하지 않고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라져 버린다 해도, 기억이나 추억은 무無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생명이 이 지상에 존재하면서 울고 웃는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지구는 요람처럼 많은 생명의 기억을 태우고 우주를 떠돈다.'
그렇다면 지구는 기억의 묘지, 기억의 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기사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이 책을 읽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도 지구에 담겨 우주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마음과 함께 수많은 소망과 눈물과 미소와 함께.
- 5월이 되었다.
황금연휴 중에는 이 마을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아침 바람 속에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구나, 이곳 사쿠라노마치는 귀성객을 맞이하는 마을, 여행자를 기다리는 마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츠키하라 잇세이는 서점의 유리문과 커튼을 열고 기지개를 켠다. 신선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앞치마가 아침 바람에 나부낀다. 쌀쌀함마저 느껴지는 바람 속에서 신록과 여름 냄새도 느껴졌다.
서점을 둘러싼 벚나무들도 꽃잎을 떨구고 보드라운 연둣빛 잎으로 갈아입었다. 아침 바람에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는 얼마 전까지 살았던 바닷가 마을에서 듣던 파도 소리와 어딘가 닮았다. 잇세이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떠나온 마을의 그리운 사람들이 오늘도 행복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 그래서 먼저 서점 문을 열기로 했다.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책과 서가에 쌓인 먼지를 떨어내고 택배로 보낼 짐을 정리한다.
슬슬 도오루를 깨워야 할 시간이라 2층으로 가려는데, 아까까지 잠들어 있었던 도오루가 이미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라이팬에서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겨왔다. 앵무새 선장은 싱크대 옆에 놓아둔 홰 위에서 양배추를 발로 움켜쥐고 먹고 있었다.
"도오루, 잘 잤니?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치즈 오믈렛이에요."
낡은 팝업 토스터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안에 이미 빵이 들어 있었다.
"자, 그럼 난 커피를 내릴까?"
신선한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카페오레를 만들기로 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잇세이와 누나에게 만들어주었듯이.
- 부엌 창으로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고, 잇세이는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창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 아침 햇살이 가득 부서지던 그리운 부엌에서 아버지와 누나의 뒷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 "잇세이 아저씨?"
도오루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잇세이는 웃었다. 그리고 냉장고 앞으로 가 무릎을 굽혀 우유병을 꺼내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퇴원하시면 의논해 보려고. 오후도 서점 한쪽에 작은 카페 공간을 만들어도 되는지."
"카페 공간이요? 오후도를 차도 마실 수 있는 서점으로 만드신다는 거예요?"
"맞아. 요즘 북 카페라고 해서 음료를 마시거나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서점이 인기거든. 오래된 서점에 카페 공간을 마련했더니 카페 매상이 오를 뿐 아니라 책 판매도 늘고, 사람들 발길이 끊겼던 옛 상점가가 다시 부활했다는 얘기도 들었어."
- 자세한 것은 오후도 주인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 서점도 점점 쇠퇴하고 말 거야.'
오후도 주인이 지쳤다면서 체념했던 것도, 지금이 아닌 앞으로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 오후도 서점을 지켜온 한 달 동안 고객층과 매출도 대강 파악했다. 손님을 직접 상대하고 잡지를 배달한 일도 참고가 되었고, 오후도 주인이 매출전표 뒤에 적어놓은 메모도 도움이 되었다. 책을 산 손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나 짧은 대화, 혹은 날씨 같은 세세한 메모를 매출전표 뒤에 따로 적어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 전표에서 서점과 손님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후도는 그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서점이 아니었다. 아마도 창업자가 여기에 '도교식' 서점을 개업할 때부터 서점이 지향해야 할 자세를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던 것 같다.
- 오후도는 손님과 마을을 키우는 서점이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문화를 키우고, 고향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생활과 행복한 삶을 안겨주고 싶은 바람을 품고 존재하는 서점이었다.
- 서점 주인은 이를 필요로 하는 손님들에게 어울리는 책을 고르고 추천해 왔다. 책을 읽는 습관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아 어렵사리 책장을 넘기는 젊은 고객들에게, 활자 세계에 속해 있지만 미지의 분야로 떠나고 싶어 하는 고객들에게. 그들을 위해 서점 주인은 책을 고르고 추천해 온 것이다. 활자 세계로 가는 머나먼 여정의 길동무, 혹은 하늘에서 빛을 발하며 방향을 알려주는 별처럼. 대대로 서점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자신도 활자를 사랑하며 자란 한 사람의 서점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서점을 맡는다는 건 그분과 내가 같은 일을 한다는 뜻인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노력해보고 싶었다. 지금 이곳을 지킬 수 있는 서점 직원은 자신밖에 없으니까.
- 하나의 서점을 지키려면 그 서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지적인 고객층이 필요하다. 인구도 적은 마을에서 작은 규모로 오후도 서점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후도가 고객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 그 방법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보다 안정된 상태를 원한다면, 잇세이는 다른 아이디어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오후도 서점의 주요 고객은 고령이고, 이 사실은 고객이 서서히 감소한다는 뜻이므로.
- '사쿠라노마치에서는 맛있는 유제품이나 홍차, 거기다 채소와 허브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
그런 것들을 이용해 제대로 된 메뉴를 개발할 수 있다면.
'이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쓰면 지역을 응원할 수 있고, 동시에 운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신선한 재료를 싸게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생산자와 의논하면 원가를 낮출 수도 있을 것 같다. 맑은 물과 기름진 토지 덕분에 채소는 그냥 놔둬도 수확량이 많은 곳이고,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아 골치라는 이야기를 시장에서 들었다.
'차와 과자로 사람을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어쩐지 <눈물 흘린 빨간 도깨비>(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도깨비가 주인공인 아동문학가 하마다 히로스케의 대표작 - 옮긴이)에 나오는 착한 도깨비가 된 기분이군, 잇세이가 빙그레 웃었다.
-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서점뿐 아니라 가게라는 건 사람을 모을 수 있어야 하는 '장사'이다. 북 카페나 대형화된 서점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저 책을 파는 장소라는 것만으로는, 요즘 같은 시대에 더 이상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없다. 설사 할 수 있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순수한 서점의 형태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화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잇세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책을 파는 장소를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우사미 씨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림에도 재주가 있더군요."
"..."
"아이쿠, 혹시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잇세이가 헛기침을 했다.
"아뇨, 그냥."
"그게 글쎄, 며칠 동안 밤새워 그렸다지 뭡니까. 오늘 아침에 드디어 완성했다며 좋아하더라고요. 아, 우사미 씨가 그린 띠지, 혹시 필요하세요? 오늘은 깜박하고 그냥 왔는데 다음에 데이터라도 달라고 해볼까요?"
"데이터라면 제가 직접 연락해 볼게요."
"아, 그렇지."
오노 씨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긴가도 직원들과 직접 얘기하고 싶으시군요. 모두들 츠키하라 씨가 잘 지내는지 걱정하고 계셨어요. 아, 사진 찍어 가도 될까요?"
잇세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오노 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서점 안을 찍기 시작했다.
"자, 여길 보세요. 치즈."
"여전히 짓궂으시네요, 오노 씨는."
잇세이는 겸연쩍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 "고마워요. 교정쇄를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역시 이렇게 책으로 나오니 각별하네요."
이야기라고 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퍼올려져 응고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교정쇄를 읽고 견본을 받아봤지만, 그때마다 왠지 마법이나 기적처럼 느껴졌었다.
이번에는 더욱 꿈만 같았다.
- "오노 씨는 읽어보셨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정말 좋았어요. 가슴이 씻겨 내려갔다고나 할까, 아무튼 엄청 울었어요. 띠지처럼 식상한 감상이지만요. 그래도 눈물이 흐르는 그 얼굴로 전국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을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하며 잇세이가 웃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푸근한 안도감 같은 걸 느꼈어요. 왠지 소설이 왔니? 하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았어요."
잇세이는 책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스르륵 책장을 넘겼다. 작은 바람이 일었다.
- "왜 그럴까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아닐 테고,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가족이 많아 북적거리며 산 것도 아닌데 말이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고, 감정 모두가 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기억처럼 느껴졌어요. 떠나야만 하는 리카코가 남겨질 가족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마치 저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이 들을 수 없었던 말을 이제야 듣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이지만, 돌아가신 엄마의 말을.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와 누나의, 실제로는 들을 수 없었던 마지막 인사와 사랑을 전하는 말이 이 책 속에 있었다.
우주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그 영혼들이 활자가 되어 그곳에 있는 듯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왔니?' 하고 반겨주는 것 같았다.
- "울어버렸어요. 제게는 특별한 책이에요. 감사합니다. 교정쇄를 읽을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에요. 드디어 이 책을 제 손으로 팔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뻐요."
"제가 더 기뻐요. 츠키하라 씨가 밀어주신 덕분에 많지는 않지만 초판 인쇄 부수도 늘어났어요. 처음에는 8,000부밖에 안 됐는데, 덕분에 회의에서 1만 부로 결정됐어요."
"1만 부라... 그것도 많은 편은 아니군요."
잇세이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러다간 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요."
그 정도 부수라면, 화제의 책으로 떠오른 순간 곧바로 '아무 데도 없는 책'이 되어버린다.
- 한 조사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서 책을 진열할 서가를 갖춘 서점 수는 1만여 곳. 1만 부의 책이 각 서점에 한 권씩 간다면 계산상으로는 전국 서점에 모두 깔린다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유명 서점 쪽으로 많은 부수를 보내기 때문에 지방이나 동네 서점은 한 권도 받을 수 없다.
그들 서점은 나중에 주문하더라도 출판사로 초판본이 반품되어 돌아오거나 중쇄를 찍지 않는 이상 매장에 책이 입고되지 않는다. 가령 도시의 대형 서점에서 초판본이 팔리지 않고 대량으로 쌓여 있다 하더라도 동네 서점에는 책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책을 원하는 고객이 있다는 걸 알더라도 어쩔 수 없다.
- 가시와바 나루미는 일본의 출판업계에서도 복덩이 같은 존재였다. 책을 좋아하는 여배우로 알려진 나루루, 가시와바 나루미는 10대 때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로 군림하고 있다. 소녀 시절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도 하는 아이돌이었다가 차츰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는 실력파 배우가 되어갔고, 결국 국내외에서 큰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는 대배우가 되었다. 독서가에 필력도 갖추고 있어 신문에 서평도 기고하고 있다. 잡지에 북 가이드 같은 칼럼을 기고하기도 한다. 그녀가 소개한 책은 주목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대로 스테디셀러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다. 다시 말해 가시와바 나루미는,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좋은 책을 선별하는 감각을 갖춘 여배우였다. 그래서 서점이나 도서관 쪽에서도 그녀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다.
- "가시와바 씨는 친필 사인에 뭐라고 적었어요?"
"안 그래도 사진을 찍어왔어요. 출간 전이라 아직 서점에 진열하지는 않았는데 사무실 제단(가미다나 神棚, 신을 모시는 제단. 일본에서는 집이나 사무실에 이 제단을 두고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귀중한 물건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올려두어 신께 고하는 풍습이 있다 - 옮긴이)에 올려놨더라고요."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아름답게 균형 잡힌 검은 글씨가 보였다. 여백에는 솜씨 좋게 마네키네코(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자세를 하고 있는 고양이 - 옮긴이)가 그려져 있다.
"단 선생님, 저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로 멋진 이 책이 대박 나기를. 가시와바 나루미."
잇세이는 "산다는 것" 하고 입안에서 다시 한번 되뇌어보았다.
- "뭘까요, 산다는 건."
"우사미 씨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가시와바 씨는 10대 때 단 선생님이 쓴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대요. 단 선생님은 촬영 현장까지 나오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분이셨대요. 가시와바 씨는 그런 단 선생님에게 조금 심하게 지적을 받고 꽤나 울었다고 하더군요. 한때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때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고 한대요. 드라마에는 많은 사람들의 꿈과 감정과 이상 같은 인생이 그려져 있었다고요. 등장인물 모두에게 생명이 있었던 거죠. 그 하나하나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 여배우라는 걸 각본을 통해 배웠대요. <4월의 물고기>를 읽고 그때 감정이 떠올랐다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
- 친필 사인에는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꼭 읽어보세요'라고도 적혀있었다. 나루루 특유의 시청자를 향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가시와바 나루미는 마음에 든 책은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4월의 물고기> 역시 꽤 많이 소개할 것이 틀림없다. 책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수호천사가 내려온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 "초판 부수가 적어서 금세 품절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재고가 없는 곳이 속출할 테고, 처음부터 재고를 충분히 확보해 둔 서점만이 4월의 물고기가 남아 있는 상태가 되겠지요. 그때 주문을 한다 해도 중쇄를 찍을 때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니까, 그사이에 품귀 현상이 일어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오후도와 긴가도 서점은 희귀본을, 그것도 사인본을 가지고 있는 서점이 되는 거죠. 멋지지 않나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오후도와 긴가도에 사인본을 주세요. 만에 하나 이 책이 히트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4월의 물고기를 판매할 생각이니 염려 마시고요. 말 그대로 오후도의 명물,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선물' 같은 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 책을 사람들에게 꾸준히 알릴 생각이거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도시에서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서 4월의 물고기라는 책의 훌륭함을 알리고, 그것이 잔잔한 파도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만 되는 곳이면 세상 어디에 있든,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그곳에 열의와 소망이 있다면, 반드시.
오노 씨를 주차장까지 배웅하고, 멀어져 가는 토요타 코롤라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며 잇세이는 자신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 일러스트 보드를 들여다보더니 뒤로 물러서서, 우와, 어머나,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걸 우사미 씨가 그렸다고?"
"인쇄한 거 아니야? 아니네."
"진짜 화가 같은걸."
소노에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점장과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 그때 한달음에 온 나기사가 소노에 옆에서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굉장하죠? 화가가 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서점 식구들의 시선을 받자 소노에는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좋아, 지금 내가 마치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 같아.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자신은 못나고 볼품없는 미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림이 정말로 아름다운 걸까. 나기사와 부모님이 항상 칭찬해 주던 것이 위로가 아니라 정말로 내 그림이 아름다워서였나 보다. 마치 백조처럼.
내가 그린 그림이 서점과 그 책에게, 그리고 잇세이에게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될 만한 그림을 그린 걸까.
- "소노에가 그린 그림은 사진처럼 똑같아서 주위 아이들이나 초등학교선생님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거예요. 뭐랄까, 어른들은 특히 '아이다운' 그림을 원하잖아요. 그러니 자기 그림은 이상하다, 못 그린다, 뭐 그렇게 믿어버리게 된 거죠. 그 후로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못 그리게 되어버렸어요."
- 띠지에는 물고기를 그려 넣었다. 맑은 물살과 해초와 꿈꾸듯 눈을 감고 미소 짓는 물고기들. 소설에서 풍기는 유럽풍 분위기에 맞춰 세밀한 터치로 촘촘하고 정교하게 그린 것이었다. 물고기들의 표정에는 코믹한 데포르메(회화나 조각 등에서 대상을 변형, 왜곡시켜 표현하는 기법 - 옮긴이) 기법을 썼다. 하지만 비늘이나 나부끼는 해초의 유연함, 물살과 바닷속 물방울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과 같은 리얼리티를 주었다. 물고기와 해초와 물방울은 자료를 찾지 않아도 그릴 수 있었다. 소노에의 눈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절대 잊지 않으니까.
여기에 파란색과 하늘색 같은 수채화 물감이 연하게, 혹은 진하게 농도를 조절해 가며 물들인 것처럼 채워져 있었다.
물고기 떼와 해초 위에 하얀 틈을 만들어 검을 글씨로 '언어는 귀로 흘러간다. 영원히 흐르는 물결처럼'이라고 적고, '영원'이라는 두 글자는 불투명한 붉은색으로 썼다. 파랑이 섞인 빨강. 피처럼 붉은 빨강이다. 파랑에 어울리는 색. 커다란 일러스트 보드에는 띠지와 같이 세밀화풍 터치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그렸다. 제목 4월의 물고기와 저자인 단 시게히코, 여기에 후쿠와 출판사 이름은 하늘에 넣었다. 맵시 있게 표현된 것 같다.
- 주인공 리카코도 살며시 눈을 감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짧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데포르메 기법으로 표현된 달과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마치 여신이나 신탁을 받은 점성술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입가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뭐든 알고 있어, 이 세상 어떤 비밀이라도 신들의 이야기나 우주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미소였다.
- 맨발에는 물이 흐른다. 그곳을 헤엄치는 꿈 꾸는 물고기 떼. 그것은 띠지의 그림과 같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물살에 조금씩 변형을 주어 무성한 잎과 흐드러진 꽃으로 완성했다.
일러스트 전체에 옅게 깔려 있는 것은, 밤하늘이나 물 빛깔과 같은 파란색과 하늘색. 그 색채의 빛. 지평선에 투명한 오렌지색 라인으로 원작의 마지막 장면, 동이 터오는 새벽을 암시하려고 했다.
그림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책이 돋보일 수 있도록,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배경이 되게 했다. 그림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계산은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이나 그림책, 사진 같은 것을 좋아해서, 셀 수 없을 만큼 원화나 인쇄물을 보러 다녔다. 그 기억의 축적이 소노에의 눈동자에 어려 있었던 것이다.
- "여러분, 긴가도 서점은 호시노 백화점 개점과 동시에 오픈한 가장 오래된 입점 매장 중 하나입니다. 오랜 벗끼리 손을 잡고 하나의 상품을 판매한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머리 숙여 인사하고는 두 백화점 직원이 돌아갔다.
- 돌아가면서 매니저가 뒤돌아보았다.
"광고부 사람들과 얘기해 봐야겠지만, 아마 우사미 씨의 그림을 어떤 형태로든 홍보에 사용할 것 같습니다. 정말 훌륭한 그림이니까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그야 물론이죠, 하면서 점장은 소노에를 돌아다보았다.
"괜찮지?"
소노에는 눈물을 닦고, 살짝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기사가 옆에서 웃고 있었다.
- 나기사는 자신의 손수건을 건넸다.
"고마워."
소노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기쁜 듯 웃으며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표정에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였던 순간순간 보았던, 소노에의 웃는 얼굴이 겹쳐 있었다.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 그리고 좀처럼 볼 기회는 없지만, 화난 얼굴마저도 소노에는 공주님처럼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나도 사실 이렇게 사랑스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기사는 빙그레 웃었다.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면 누군가가 잡아주는 사람. 그러면서도 신념이 강하고 단단한 사람.
- 츠키하라 잇세이는 소노에의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나기사는 궁금해졌다. 안목이 있으니 아마 깜짝 놀라겠지. 소노에의 매력에 빠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살짝 심술이 발동했지만, 아니 아니,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며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웃었다. 자신의 그림을 타인에게 보이려 하지 않던 소노에가, 잇세이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간 것을 언젠가 ...
- 녹음 일자와 방송 날짜까지 마치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준비해 둔 것처럼 잘 맞아떨어졌다.
운이 좋은 책이구나, 나기사는 생각했다. 생명력이 강한 책이다. 스스로 알릴 기회를 잡는 책,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출간 전날 하는 방송이잖아. <4월의 물고기> 홍보도 되고, 나하고 책얘기를 나누고 싶다네요."
나기사의 말에 점장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마음이 갸륵하네. 본인 책 홍보는 안 해도 되나?"
외국 문학 서가로 가던 츠카모토가 흥미로워하며 끼어들었다.
"요모기노 선생님은 폭넓은 독서가에 서평가로도 활약하고 있으니까. 관심 있는 책에 대해 분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할걸. 게다가 출판업계 상황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계시는 분이라 방송에 출연해서 추천하고 싶은 신간을 응원하고 싶은 게 아닐까."
- "하나 더." 나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분 성격 참 좋다니까요.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 나누는 걸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어."
잡지나 인터넷상에서 본 사진에서 늘 웃고 있었다. 주위가 훤해질 만큼 화사한 용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편하게 느껴지는 데다 본인 스스로도 항상 행복해 보였다.
패션 감각도 워낙 뛰어나지만, 어디서 어떤 식으로 촬영을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잘 어울렸다. 누구와도 즐겁게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층 아파트에서 강아지와 함께 산다고 하는데, 취미는 요리와 베이킹, 원예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활기 넘치게 살고 있는 듯하다.
- '진정한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말로, 현재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태도를 일컫는 신조어 - 옮긴이)랄까, 고생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 같아.'
나기사에게는 살짝 불편함도 있었다. 생김새가 어딘가 츠키하라 잇세이와 닮아서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못마땅한 건지도 모르겠다. 안경을 쓰면 아마 형제처럼 보일 것 같았다. 단지 잇세이는 저렇게 느긋한 표정으로 웃지 않는데, 하면서 무의식 중에 비교하고 말았다.
'비교할 필요가 없는데 왜 이러지.'
나기사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후 말을 이었다.
"요모기노 선생님의 다음 작품은 후쿠와 출판사에서 레스토랑 가이드 & 맛집 편으로 12월에 나올 예정이래요."
"문고본 사이즈로 나온다는 그 책?"
"맞아요. 취재할 것도 많고 사진도 많이 실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린대요. 멋진 책을 기획하고 있더라고요."
- "묘하게 운이 따르는 책이에요. 어쩌면 꽤 팔릴지도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니? 이 책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그렇게 마케팅해 왔다. 나기사의 노력이 결과로 나타난 책도 있었고, 미안해, 하며 반품 상자에 대고 사과한 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4월의 물고기>는 정말 운이 좋다. 3월에 츠키하라 잇세이가 그 가능성을 내다본 때를 기점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에 보호받아온 것만 같은 신간이다. 표지 그림도 무척 아름답다. 품위가 있으면서도 따뜻하고 서민적이어서 친밀감이 든다. 문고판이어서 귀엽기도 하다.
이 책은 분명 잘 팔릴 것이다. 살아남아서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서점까지 가는 책이 될 것이다.
'서가에 살아남아 기필코 스테디셀러가 될 거야.'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서점의 서가에 남아 때때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사랑받는 책이 되리라.
그런 책이 강한 책이다. 천천히 중쇄를 찍고 미래를 향해 가는 책. 저자가 엮은 이야기는 그렇게 시간을 넘어 살아남는다.
- "할아버지의 비극은, 금지옥엽으로 키운 똑똑한 딸이 서재에 산처럼 쌓인 책의 모습을 한 지식을 통해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깨닫고 날아가 버린 것이라 정리할 수 있겠죠. 아무것도 모르고 사유하지 않는, 머리만 좋은 딸로 키웠다면 아마 이모는 그 집과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 텐데, 아니 어쩌면 지금 살아 계셨을 수도 있죠. 분명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른 인생을 사셨을 거예요. 그렇게 되었다면 츠키하라 잇세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테지만요."
준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집이나 학교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그냥 '기타'에 속하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가끔 만나는 사촌동생 잇세이만큼은 저를 인정해 주고,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누구보다 강한 형이라 생각하고 잘 따랐어요. 영웅을 보듯이 진심으로 믿어줬어요. 하지만 그런 잇세이네 집에 불행이 찾아왔죠. 엄마를 잃고, 아빠와 누나까지."
준야는 살짝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나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일은 얼마 전 츠카모토 씨로부터 간략하게 들었다.
"우리 집, 그러니까 외갓집에 온 잇세이는 몹시 충격을 받았는지 딴사람 같았어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혼자서 조용히 울기만 했어요. 전 이미 멀리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곁에 있어주지 못했죠."
- "기적 같은 이야기죠. 신이 그린 그림 같아요. 그러니까 그에게는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드라마가 있었고, 이번에는 어른이 된 자신이 그 드라마 작가가 쓴 첫 소설을 발굴해 수호자가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이럴 수가."
나기사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하고 준야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말이죠, 잇세이의 심연에 그 드라마의 편린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4월의 물고기>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소설 속 주인공인 리카코는 잇세이가 어릴 때 좋아하던 드라마 속 리카코가 성장한 모습이니까요. 딱히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설정을 보고 짐작했거든요. 성격도 같아요. 활달한 여고생이었던 그 집 큰딸이 어른이 되어 결혼해 가정을 이뤘어요. <4월의 물고기>는 예전에 쓴 드라마의 후속편인 거예요."
- "그건 요모기노 선생님께서 츠키하라 씨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시면 그 사람도 기뻐할 것 같은데요..."
"아뇨, 그건."
준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제가 그 아이의 믿음을 깨버렸기 때문이에요. 잇세이의 아버지가 음주 운전으로 오해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그 애 말보다 신문 기사에 난 '사실'을 믿어버린 거죠."
"..."
"잠시였지만 의심하는 마음이 얼굴에 나타났나 봐요. 잇세이는 상처받아 슬픈 표정이었어요. 그 후 잇세이에게 네 말을 믿는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또 하나는 잇세이의 고양이를 죽게 만든 거예요."
- 리카코와 그 앞에 놓인 4월의 물고기는 아침 햇살 속에서 화려한 색채가 한데 어우러져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을 본떠 만든 입간판 옆에는 커다란 보드에 소설 제목과 저자의 이름, 그리고 줄거리가 적혀 있다. 글자를 맵시 있게 나열한 보드는 디스플레이와 마찬가지로 호시노 백화점 광고부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며 시간 안에 겨우 완성한 것이었다.
- "슬슬 여름 상품을 진열할 시기여서 물고기는 마침 좋은 소재였어요. 이 물고기 그림을 메인 쇼윈도만이 아니라 백화점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 헤엄치는 것처럼 연출했어요."
그날 아침 이 마을에 배달된 신문 전단지에도 4월의 물고기가 실려있었다. 전단지 역시 멋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호시노 백화점에서 마련한 선물이 또 하나 있었다. 소노에가 띠지에 쓰려고 그린 일러스트로 디자인한 <4월의 물고기>를 위한 특제 북 커버였다. 보드라운 감촉의 짙은 파란색 전통종이에 물고기와 해초와 물방울이 디자인되었고, 책 제목과 긴가도 서점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북 커버는 긴가도 서점에서 4월의 물고기를 구매한 독자들에게 증정하기로 했다.
지하에 있는 전문 인쇄기를 오랜만에 가동시킬 수 있어서 광고부 사람들도 좋아했다는 소리를 듣고 서점 직원들은 고마워했다.
- 천장에는 점장이 직접 만든 하늘을 나는 고래가 한 시간에 한번 꼴로 크게 원을 그리며 천장에 고정된 레일을 타고 천천히 날고 있었다. 비행기 양 날개에 비행기 구름이 나부끼고 있었고, 고래는 지느러미와 꼬리에 반짝이는 솜털 구름을 달고 달과 별을 이끌며 사람들 머리 위를 천천히 날았다. 고래의 배 주위로 늘어뜨린 색색의 가늘고 긴 종이가 나부끼고 있었는데, '4월의 물고기·단 시게히코·후쿠와 출판사·절찬 판매 중'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종이는 머리 위에서 나부끼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 드라마 작가 단 시게히코가 소설가로 부활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 단 작가 앞으로 쓴 메시지를 가자하야의 긴가도 서점에 남겨두었다는 정보도 슬쩍 흘린 것이다.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긴가도 서점에서 사인본을 구매하지 못했다며 속상한 듯 "이제 사쿠라노마치에 있는 서점에 가야 할까 봐요" 하고 방송 프로그램에서 입술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 츠카모토 다모츠가 슬쩍 반칙을 써가면서까지 추리 잡지 마이 미스터리의 신간 코너에 <4월의 물고기>를 소개한 일은, 활자 마니아들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마이 미스터리의 공식 트위터에 올린 것도 발 빠른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마중물이 되었다. 트위터 계정 담당자도, 츠카모토 씨가 대놓고 선전을 하는군요, 하고 웃더니, 하지만 그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고 글을 올렸다.
- 그런 책이 팔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또한 긴가도 서점과 인연을 맺은 전국의 서점 가운데 수제 띠지나 POP 데이터를 교환하고 있는 사이좋은 서점들도 긴가도 서점이 이렇게까지 밀고 있는 신간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전에 SNS에 올린 정보를 보고 발 빠르게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의 몇몇 서점에서는 규모와 상관없이 4월의 물고기가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되었고, 책 자체가 디스플레이와 같은 효과를 낳아 활발한 판매로 이어졌다. <4월의 물고기>는 재고를 확보하고 있는 서점에서 매출 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서점 쪽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요즘은 서점 직원끼리는 소속에 상관없이 온라인을 통해 자유로이 소통하며 화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팔릴 것 같은 신간의 정보를 잊힌 구간의 명작을.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출판 불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든 아니면 의식적으로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려 역경과 싸우는, 한 거대한 생물의 방어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이러한 움직임은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서점으로도 확산되었다. 서점 직원들은 소통이 없는 서점이라 할지라도 그 서점에서 추천하는 책에 주목하며, 이를 자신의 서점에 반영하기도 한다. 한 서점에서 추천한 책이 전국으로 서서히 퍼져나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이렇게 <4월의 물고기>는 순조롭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전에 출판사와 도매상에서는 재고가 바닥났다. 시중에 남은 재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팔리는 책이자 팔고 싶은 책은 서점에서 반품을 하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 흐름이 너무 빨라 중쇄 결정을 하기도 전에 공백이 생겨버렸다. 4월의 물고기가 없어요, 언제 입고되나요? 하는 서점 직원들의 원성이 전국에 가득했다.
- 이런 와중에 오후도 서점의 츠키하라 잇세이는 사인본 30부를 일찌감치 모두 판매하고 지금은 평평하게 쌓아 올린 4월의 물고기를 서점에 온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추천하는 이유를 정성껏 적은 POP도 마련했다.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 소개 글만 적었지만, 긴가도 서점에서 데이터를 보내준 덕에 우사미 소노에가 그린 일러스트로 만든 패널과 띠지로 매장을 환하게 만들었다.
- "서점 직원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 멋진 책이 잘 팔리기를 바랐을 뿐이고, 실제로 열심히 팔고 있는 이들은, 전 직장이었던 긴가도 서점 직원들과 후쿠와 출판사 영업사원들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요. 역시 처음 기적을 만든 사람은 츠키하라 씨 바로 당신이에요. 저 같은 작가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워요."
"저 같은 작가라니요."
단 시게히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딸과 손녀도 서점으로 돌아와 반딧불이를 바라보며 정말 예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책은 유서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솔직히 제 병은 재발 가능성이 높아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쓰게 된 거죠."
잇세이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단 작가의 말에는 공포도 두려움도 없었고, 사뭇 밝고 부드럽고 온화할 뿐이었다.
<4월의 물고기> 여주인공 리카코가 소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얻게 된 마음의 평온 같은 것이리라고 잇세이는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유서라는 단어를 부정하지 않았다. 평온한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유서, 아니 러브레터인가. 사랑 고백 편지였던 거죠. 세상을 향한."
- "남기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썼어요. 저는 말이죠, 츠키하라 씨, 한창때 일에 빠져서 온통 드라마 쓰는 것에만 몰두해 있느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아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지, 하면서요. 난 그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각본을 쓰는 것에만 열중하면 된다고 믿었어요. 실제로 정신없을 정도로 시간이 없었어요. 그때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죠. 맞아요,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각본을 쓰거나, 굴러다니는 옷을 대충 걸치고 미팅하러 가는 일의 연속이었죠. 가족과는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어요. 나를 위한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눈만 마주치면 이해해 달라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죠. 잠을 못 자서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이죠. 대화를 하지 않았던 건 가족만이 아니었어요. 촬영 현장에서도 필요이상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냥 단순히 시간이 없었어요. 가족과 촬영 현장 식구들에게 속으로는 늘 고마워하고 있었어요. 모두를 사랑했고 신뢰했거든요. 혼자 각본을 쓰면서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릴 정도로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표현할 줄 몰랐어요. 아니, 그냥 게을렀던 거예요. 누군가를 위해 말을 하는, 자신의 수고와 시간을 아끼고 있었던 거예요."
단 시게히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말이 필요한 순간에 제때 하지 못했어요. 감사의 마음도, 애정도 우정도, 스스로 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거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요. 그보다는 좀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막말을 쏟아냈어요. 항상 날이 선 상태였죠. 왜 이런 간단한 것도 모르느냐며.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말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아주 간단한 건데 말이죠. 그럴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는데."
- "어느 날 문득 내 주위에 친구가 사라지고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족도 마찬가지였죠. 딸은 불량한 애들과 어울리며 겉돌기 시작하더니 결국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죠. 나는 드라마 작가다, 작품으로 모든 걸 표현하면 된다, 하고 항상 큰소리쳤는데 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였는지 겨우 깨달은 거예요. 그 무렵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드라마 현장을 떠나야 했는데, 아쉬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요, 단 한 사람도요. 그래도 가족은 저를 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주었어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반성도 많이 했어요. 아내와 딸을 소중히 지키겠다고 울면서 다짐했어요.
어려운 수술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오랜만에 이 눈으로 빛을 봤을 때, 아아, 나는 아직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지 않았구나 싶었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글로 남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구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는 드라마 현장에 돌아갈 체력은 남아 있지 않았죠. 그때 우연히 신문 칼럼을 읽었다며 후쿠와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연락이 왔어요. 나 역시 책을 좋아하니 혼자서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불안한 마음을 품고 주섬주섬 써 내려가기 시작했고, 담당 편집자의 지도를 받으며 완성한 책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감사의 말들과 마음을 엮어낸 이야기가, 제 일생일대의 러브레터가."
단 시게히코의 목소리는 밤공기에 나지막이 스며들었다. 거침없고 차분하고 행복한 목소리였다.
- "훌륭한 책이에요."
잇세이가 말했다. 단 시게히코는 재차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오노 씨한테서 들었어요. 잇세이 씨는 마케팅할 책을 잘 찾아내서 '보물찾기 대마왕'이라 불린다면서요? 제 책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덕분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이 러브레터가 더 멀리, 더 많은 날을 살아가게 됐어요. 이 세상에 오래오래 살아 있을 수 있게 된 거죠. 처음 예정보다 훨씬 오래. 정말 감사드려요. 제게 잇세이 씨는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와 다름없어요."
그럴 리가요, 하고 대답하려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택시 불빛을 보았다. 택시가 속도를 늦추며 다가와 서점 앞에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택시 기사에게 수고하셨다고 인사하며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이 우아한 몸짓으로 내렸다.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낸 것은 단 시게히코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허공을 나는 반딧불이를 신기해하면서 오후도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가시와바 나루미, 나루루였다.
- "아뇨, 아뇨. 청년이 이곳에 있으니 이제 이곳을 애용해야겠네요. 아참, <4월의 물고기> 있어요? 아무리 찾아도 그 책을 구할 수가 없어요. 긴가도 서점에 그렇게 많았는데, 아까 가보니까 한 권도 없어서. 정말 한 권도 없었다니까요. 세상에, 쇼윈도가 화제가 된 데다 자체 제작 커버가 소문이 나는 바람에."
"잘됐군요."
잇세이가 미소 지었다.
"저희 서점에는 아직 재고가 있어요. 사인본은 다 나가고 없지만요."
"여기서 선생님께 직접 받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나루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커다란 눈으로 윙크를 하면서 단 시게히코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죠, 선생님?"
단 시게히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루미는, 우와, 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그럼."
"여고생 때 선생님께서 던진 슬리퍼에 맞았던 나루미예요."
"그럼, 기억나고말고. 그땐 정말 미안했네."
- "선생님, 솔직히 저도 그때는 선생님을 원망했어요. 화도 났고요. 그런데요, 훌륭한 각본과 거기 담긴 메시지는 가슴에 확 와닿았어요. 화가 났지만 제 가슴에도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맹세했어요. 맞아요, 옛날 얘기죠. 언젠가 반드시 나도 슬리퍼를 도로 던질 수 있는 대배우가 되겠다고요. 그 일념으로 지금의 가시와바 나루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게..."
"맞아요, 앞으로는 좀 부드럽게 말씀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건 그렇고 마침 잘됐어요.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리카코가 저죠?"
- "그 표정, 대사 치는 방식, 사람 보는 눈빛. 모든 게 그 당시 제가 연기했던 리카코가 그대로 어른이 된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단 시게히코가 미소 지었다.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싫으니?"
"그럴 리가요."
나루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다행이라고. 그 무렵 선생님은 슬리퍼를 집어던질 정도로 제 연기를 못마땅해하셨지만.”
"그래서 미안하다니까."
- "그야 물론 무척 마음에 들었지. 그 당시에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게."
"다음에는 칭찬해 주세요."
나루미는 사랑스럽게 웃었다. 나이를 초월한 요정 같은 사랑스러운 환한 얼굴로.
-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고, 밤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반딧불이의 반짝임 속에 여신처럼 빛나는 환한 미소로 작가를 바라보는 모습은 리카코 바로 그 자체라고 잇세이는 생각했다.
- 잇세이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뒤따르려 하는데, 작가가 말했다. 혼잣말처럼.
"사실은 후쿠와 출판사에서 새 책을 의뢰받았어요. 이번 책으로 충분히 만족했고, 이젠 작품을 쓸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포기하고 있었어요. <4월의 물고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세상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과연 제가 새로운 러브레터를 쓸 수 있을까요?"
잇세이가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의 소설을 계속 읽고 싶어요. 그 이야기를 멀리까지, 그리고 미래에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고마워요."
단 시게히코는 고개를 숙였다.
- 잇세이는 서점을 향해 걸으며 미소 지었다.
'살아 있는 한,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꿈꾸는 일은.'
- 빨간 서점 간판과 실내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잇세이를 부르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을 나는 반딧불이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갈길을 걷는 자신의 발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고 몸에 닿는 밤바람이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세상은 아름답고, 들이마시는 공기는 깨끗하고 신선했다. 이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리라.
- 자신이 찾아낸 <4월의 물고기>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세상에 전할 수 있었다. 작가는 또다시 새로운 책을 쓸지도 모른다.
이런 행복한 밤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된 일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 자신은 행복해서, 너무나 행복해서, 그래서 괜찮았다.
- 그날 밤 잇세이는 꿈을 꾸었다.
고래의 등을 타고 새벽하늘을 날고 있었다. 세상은 빛으로 넘쳐흘렀고 아름다웠다. 이것은 리카코의 고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척에 옆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아빠와 누나가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동이 터오는 세상을 행복한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는 이따금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잇세이는 그런 아빠와 누나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아빠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을,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했다. 하늘 위에서 잇세이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두 사람에게 용서를 빌었다.
두 사람은 너그러운 미소로 그저 잇세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누나가 손짓하며 부르자 누나보다 훨씬 커버린 잇세이는 몸을 굽히듯 그 곁으로 다가갔다.
"있잖아."
누나는 귓가에 뭔가 한두 마디 부드러운 말을 속삭였다. 말은 바람소리처럼 귀에 스며들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몹시 중요한 것을 들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라고 영혼은 이해하고 있었다.
- 커다란 고래는 하늘을 날았다. 투명한 하늘에 드디어 태양이 떠올랐고, 세상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너무나 찬란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 동이 틀 무렵, 오후도 서점 뒤뜰에 있는 작은 서재 겸 살림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으로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잇세이를 스쳐 지났다. 그 머리칼을 쓰다듬고,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휘리릭 넘기고 있었다.
안채의 시원한 복도에 잠들어 있던 앨리스는 별채에서 자고 있는 잇세이가 가위 눌리는 소리를 듣고 안뜰을 지나 일부러 살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잇세이는 이미 행복한 얼굴을 하고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고, 앨리스는 애써 찾아온 보람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여 좋았다.
앨리스는 잇세이의 머리맡에 자리 잡았다. 눈을 감았다. 아직 잠들지는 않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깼다. 오늘은 왠지 무척 좋은 날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 바람이 수염 끝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멋진 일이 생길 거야, 앨리스는 생각했다.
- 이 키가 큰 사람, 올라타기에 딱 좋은 높이인 이 사람이 이곳에 오고 난 후, 그러고 보니 행복하고 기쁜 일만 가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채 2층에서 잠들어 있는 어린 사내아이는 전에는 울기만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잘 가라는 슬픈 인사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픈 인사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앨리스는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 말
- 저는 책을 고를 때 반드시 작가의 말부터 읽습니다. 그 책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도 작가의 말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저도 이 책의 내용과 특징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 이 책은 시골 마을의 작은 서점과 소도시의 오래된 서점, 그곳에서 일하는 서점 직원들의 아주 작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적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제 작품과는 다르게 신이나 요정,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내용은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고, 그것을 꾸준히 거듭해 온 사람들의 끈끈한 정과 아끼는 마음이 생각지도 못한 멋진 일을 이뤄내고, 그로 인해 작지만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을 실현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들이 책을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POP를 만드는 것을 비롯해 띠지를 제작하거나 포스터를 그리고, SNS를 통해 다른 서점과 소통하면서 같은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은 요즘 서점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매력적인 서점 직원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어떻게 하면 출판업계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많은 서점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작금의 현실입니다.
- 현실에서는 한 권의 책이 단지 운이 좋아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마을, 어느 서점에서 이 이야기처럼 소소하고 행복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요즘처럼 책 한 권 팔기가 어려운 시기에 이런 책이 한 권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분석해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서점 직원들이 있다는 사실이 소설의 형태를 빌려 세상에 나와도 좋지 않을까 하고. 폐점이나 철수 같은 슬픈 소식보다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아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서점 직원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 원래 책과 출판업계, 서비스업과 소매업에 관심이 있어 그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서점 직원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서점 직원이 된 저를 상상해 가공의 인물을 만들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저는 한 사람의 서점 직원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런 기분으로 일상을 보냈습니다. 스스로도 이상했던 것은,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다른 글에서도 함부로 '객 客'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 ...
- 이윽고 소설이 완성되었고, 원고를 요청했던 각 서점으로 보내며 마지막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가장 두려운 때였습니다. 원고를 읽어주길 원하는 건지 아닌지 도통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원고는 전국으로 보내졌고, 드디어 감상이 돌아왔습니다. 무척 많이 왔습니다. 정성 어린 감상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면서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구나, 이 이야기는 어쩌면 현장에 있는 모든 서점 직원에게 사랑받으며 흥미롭다거나 재미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찌 됐든 마무리됐구나, 하고 저는 그제야 얼굴을 들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싶어 눈물이 났습니다.
- 당연히 이 소설은 책과 서점을 좋아하는 독자, 다시 말해 지금 이 책을 사거나 빌려서 손에 들고 있는 바로 여러분을 위해 썼습니다. 물론 서점과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합니다.
- 어릴 때부터 무턱대고 좋아했던 서점. 지금은 내가 쓴 책을 서가에 꽂고 평대에 진열해 정성껏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글로 엮어낸 이 소설은, 제게는 서점에 보내는 은밀한 러브레터였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읽어주신 서점 직원들로부터, 재미있었다, 이 책을 팔고 싶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 지금 이렇게 드디어 책이 되어 나온 이 소설이 전국의 서점으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서점에서 이 책은 서점 직원 여러분께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웃는 얼굴로 맞아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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