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울라 타이넬] 노르딕 환상 동화 - 세계를 매료시킨 신비로운 북유럽 동화 17편

일루젼 2025. 3.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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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울라 타이넬 / 권기대

출판 : 베가북스
출간 : 2019.12.25


       


울라 타이넬이 17편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의 전래동화를 모아 자신의 그림과 함께 정리한 책.

 

짤막하고 위트 넘치는 이야기도 있었고, 한 편의 소설처럼 길고 아련한 이야기도 있었다.

각 이야기마다 저자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함께 시작하는데, 개인적 취향으로는 호.

이미지도 매력적이고, 이야기를 잘 요약해 표현한 그림도 많아 몇 작품 골라 첨부했다.

 

수록작들은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 같은 유명한 이야기부터 <셰홀름에서 온 뱃사람> 같은 생소한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는데, 저자는 이를 크게 "변신", "재치", "여정"이라는 세 테마로 묶었다. 

      

동화들은 재미라는 이야기 자체로서의 기능도 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이나 교훈 또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의 전승을 위해서도 존재했다. (이런 숨겨진 목적을 살펴보겠다는 관점으로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읽어본다면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일지도 모른다.)

 

비틀어 보는 시각으로 가볍게 뜯어보자면-

 

평범하던 주인공이 마법에 걸려 비루하게 변해있던 이들을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보상을 얻는, 혹은 나쁜 술수에 걸려 제 모습을 잃었다가 되찾는 '변신'은 평면적으로 볼 때는 '선하고 친절하게 살자'가 교훈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내게 보이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라는 법칙은 선해 보이는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게다가 '곧이곧대로 믿지 말되,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실천하자'라기엔 주인공들이 쓰곤 하는 속임수는 조금 치사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변신'은 '이중성'의 가능성을 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언제고 주위의 보이지 않는 '저주' -가십 또는 고발- 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진하게 녹아 있는 테마일지도 모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이.

 

"재치"는 이런 시각을 더욱 강화해 준다. 권위나 힘으로는 상대를 이기기 힘든 주인공이 '재치'나 '유머' 같은 약간의 속임수를 이용해 상황을 반전시키는 이야기는 권력자를 향한 농민과 평민들의 울분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이런 해학으로나마 현실을 벗어나 불만을 해소해보고 싶었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혹은 언제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는 정면 돌파가 아닌 '상황 모면'을 선택하라는 교훈을 이야기로 전하는 것일지도.

 

"여정"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인물들은 '떠남'을 통해 성장이나 보상을 얻어 돌아오기도 하고,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끝에 고생만을 얻기도 한다. '공동체'는 결속과 정착을 통해 유지되지만 어디선가 '떠나온' '새로운 유입' 없이는 성장이 어렵기도 하다. 예상되는 모습 그대로 안주할 것인가, 모험을 떠나는 도박을 벌여볼 것인가 같은 여유로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높은 세금과 착취, 망가진 평판 등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과 불안이 녹아 있지는 않을까. 

 

신화 같은 '영웅'의 여정이 아니다. 전래 동화에 담긴 '여정'은 그보다는 훨씬 고달프고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셰홀름에서 온 뱃사람>의 잭은 성공적으로 여정을 수행하고도 유령과의 거래를 받아들여 불길한 배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를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고자 노력하는 셰임케는 그의 아군이기도 하고 적군이기도 하다. 그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다시금 그녀를 찾아 함께 배에 오르는 장면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음. 뭔가 리뷰 풍이 바뀐 것 같은데.

지금 작성하는 리뷰의 대다수는 작년 말 블로그를 잠시 쉬는 동안 읽었던 책들이다. 아무래도 읽었던 시기와 리뷰를 쓰는 시기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리뷰에도 조금은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다. (아예 책과는 다른 소리를 하거나, 감상보다는 분석을 한다거나)

뭐... 이런 것도 괜찮지 않을까. 

 

   


    

 

 

 

 

- 외아들 하나만을 둔 가난한, 아주 가난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견진성사를 받을 때까지는 그와 함께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으나, 그 후로는 더 이상 아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면서 아들한테 세상으로 나아가 직접 살아갈 궁리를 하라고 말했다.

 

- 그래서 집을 떠나 방황하던 외아들은 하루쯤 걸은 끝에 어떤 외지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네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 남자가 물었다.

"너른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자리라도 얻어볼까, 하는 중입니다."

젊은이가 그렇게 답하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내 밑으로 와서 일할 생각이 있는가?"
"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아저씨든 다른 누구든, 가서 일하는 거야 다를 게 없겠지요."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일자리라는 것을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달리 할 일은 없고 그냥 나와 함께 있어만 주면 되거든."

- 그렇게 아들은 남자의 집으로 따라갔다. 과연 그는 먹고 마실 것을 넉넉히 얻었으며 할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아저씨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점이 이상하긴 했다.

- 그러던 중 하루는 주인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난 여드레 동안 일을 보러 가야 하네. 자네 혼자 여길 지키게 될 텐데, 이 네 개의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방에 들어갔다가는, 내가 돌아오면 자네 목숨을 내놓아야 해."

젊은이는 그 어떤 방에도 절대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 그러나 그는 주인이 떠난 지 사나흘이 지나자 더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중 한 방의 문을 열고 말았다. 방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방문 위쪽 벽에 선반 같은 게 하나 보일 뿐이었고, 그 선반에는 자그마한 찔레 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흠, 틀림없이 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놓은 거로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이윽고 여드레가 지나고 주인이 돌아와 이렇게 물었다.

"어느 방에 든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
"아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청년이 답했다.

"흠, 그래, 곧 알게 되겠지."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젊은이가 들어갔던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 말과는 달리 자네는 여기 들어왔었잖아. 자, 이제 자넨 목숨을 내놓아야 해!"

- 젊은이는 큰 소리로 울며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어 간신히 목숨만은 유지했다. 하지만 대신 회초리로 실컷 두들겨 맞아야 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다시 전과 다름없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주인은 다시 집을 비우게 되었다. 이번엔 보름쯤 떠나 있을 거라면서, 주인은 무엇보다 먼저 젊은이에게 이미 가본 데를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했다. 전번에 이미 들어가 본 방은 다시 가도 괜찮다면서.

- 아뿔싸, 하지만 사태는 첫 번째와 똑같이 전개되었고, 청년은 여드레가 지나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번째 방에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이 방 역시 방문 너머 벽에 선반이 있을 뿐이었고, 그 선반에는 돌 한 개와 물병이 놓여 있었다. 그래, 저런 물건을 보고 몹시도 겁을 먹으라는 얘기로군. 그는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 주인이 돌아와서는 그에게 혹시 방에 들어갔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뇨, 천만에요, 아무 방에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두고 보면 곧 알게 되겠지."

주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젊은이가 다른 방에 또 들어갔었다는 걸 알게 되자 이렇게 으르렁댔다.

"이제 더 이상 널 살려두지 않을 테다. 이번엔 목숨을 내놓아야 해!"

- 그러나 주인이 천 조각을 찢어냈더니 그의 손가락을 번거롭게 하고 있는 게 진짜 뭔지 금세 드러났다.
처음에 주인은 젊은이를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온 집안이 떠나가라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흠씬 패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말았다. 어찌나 심하게 때렸던지 청년은 꼬박 사흘을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주인은 벽에 걸려 있던 항아리를 가져와 거기 담겨있던 것을 조금 발라 문질러주었다. 젊은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오래지 않아 주인은 다시 집을 떠났다. 이번엔 한 달가량 돌아오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는 젊은이에게 일러두었다.

"만약 네가 마지막 네번째 방까지 침범한다면, 그땐 목숨을 부지할 생각하지 마, 알겠니?"

- 두어 주일이 흐를 때까지 젊은이는 근근이 유혹을 참아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나 남은 그 방안을 꼭 가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유혹에 지고 말았다.

 

- 방안에는 크고 새까만 말 한 마리가 상자 속에 서 있었고, 말 머리 쪽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잉걸불이 든 말구유, 그리고 꼬리 쪽에는 건초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건 완전히 잘못 놓여 있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둘의 위치를 바꾸고 건초다발을 말 머리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말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심성이 아주 착해서 나한테 먹을 것을 주었으니, 내가 당신을 난쟁이 괴물에게서 구해주겠소. 당신이 함께 일하고 있는 그 주인이 바로 난쟁이 괴물이거든. 바로 이 위의 방으로 올라가서 거기 걸려 있는 옷들 중에서 갑옷 한 벌을 가져와요. 하지만 반들반들 빛나는 갑옷을 택하면 안 돼요. 가장 녹슨 갑옷이 보이거든 그것을 가져오라고요. 또 칼이며 안장도 직접 보고 꼭 같은 식으로 골라요."

- 젊은이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그 모든 걸 한꺼번에 다 들자니 너무나 무거웠다. 그가 돌아오자 말은 그를 향해 입고 있는 옷을 홀랑 다 벗고 아래쪽 방에서 끓고 있는 구리 솥 안으로 뛰어들어 푹 적시라고 말했다.
"그럼 난 눈 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 될 텐데."

젊은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말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구리 솥에서 몸을 적시고 나오니 아주 깔끔한 미남이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핏빛처럼 발그레하고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에 예전보다 힘도 훨씬 세졌다.

-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말이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말은 "날 번쩍 들 수 있는지 한번 해봐요"라고 했다. 오, 맙소사, 심지어 말을 번쩍 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무겁던 칼도 마치 새털인 양 머리 위로 마구 휘둘러댔다. 
"됐어, 그럼 내 등에 안장을 얹어요. 그리고 그 갑옷을 입은 다음, 찔레 가지와 돌덩어리와 물병과 향유가 든 항아리도 잊지 말고! 준비됐으면 우린 이제 출발!" 

- 그런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어떤 병사는 "굶어 죽을 때까지 저렇게 앉아 있을 모양이로군."이라고 내뱉으면서 마구 웃어젖히다가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렇지만 군대가 지나간 후 젊은이는 다시 참피나무로 달려갔고, 아슬아슬하게 때를 맞추어 전쟁터에 도달했다. 그날 그는 적군의 왕을 죽였고, 그리하여 전쟁은 막을 내렸다. 

- 전투가 끝난 후 왕은 그 신비의 전사가 다리에 감고 있는 자신의 손수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제 그 용감한 전사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뚜렷해졌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그를 환영했고, 궁전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창 너머로 보고 있던 공주는 도저히 믿을 수 없으리만치 기쁨에 겨워 행복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저기 내 사랑하는 그이가 오는구나!"

- 젊은이는 자신의 다리에다 향유를 발랐고, 이어 상처 입은 다른 부위에도 모두 향유를 문질렀다. 그러자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 나았다.

- 그렇게 젊은이는 결국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혼례를 올린 바로 그날 그는 외양간으로 내려갔다. 거기엔 자신의 말이 찌무룩하고 풀이 죽은 채 서 있었다. 두 귀를 축 늘어뜨리고 아무것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젊은 임금이 (그렇다. 이제 그는 왕이 되어 왕국의 절반을 물려받았다) 말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말은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난 지금껏 당신을 도와주었고, 더 이상은 살고 싶은 의욕도 없소. 그러니 칼을 꺼내 내 머리를 내려치시오!"

- 젊은 왕이 대꾸했다.

"아니, 그런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앞으로 당신은 원하는 것이면 뭐든 갖게 될 것이며, 더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자 말이 다시 답했다.

"흠, 만약 당신이 내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목숨을 잘 지켜야 할 것이요. 그 목숨은 온전히 내 손아귀 안에 있으니까."

그래서 왕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 그러나 왕이 칼을 높이 들어 내리치려는 순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말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말의 머리를 자르자마자 그 자리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생긴 왕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도대체 너는 어디서 나타난 게냐?"

왕이 물었다.
"제가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왕자의 대답이었다.

"임금님이 어제 전투에서 죽였던 그 왕의 나라에서 사실은 제가 예전의 왕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날 말로 둔갑시키고는 난쟁이 요정한테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었으니, 저는 제 왕국을 되찾게 되고 임금님과 저는 서로 이웃나라의 왕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다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요."

- 과연 그들 두 왕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평생을 두고 좋은 친구였으며, 서로의 왕국을 자주 방문하여 교류하곤 했다.

<과부의 아들, 노르웨이>



- 아버지는 목청을 높였다.
"세상에, 이게 뭐야! 하얀 빵이잖아! 오, 막내야, 네 신부는 틀림없이 부자인 모양이다."
"물론이지요."

두 형은 코웃음을 치면서 냉큼 받았다.

"우리 막내가 자기 신부는 공주님이라고 했잖아요. 이봐, 베이코, 공주님이 아주 가늘게 빻은 밀가루가 필요할 땐, 어떻게 그런 걸 구하지?"
베이코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냥 자그마한 은방울을 울리기만 하면 돼. 그럼 하인들이 들어오고 우리 공주는 최고로 부드러운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시키거든."

- 그 말을 들은 두 형은 질투심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고,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 자, 우리 막내가 운이 좋은 건데 너희들이 투덜투덜 불평하면 안 돼! 너희 신부들이 각자 만들 줄 아는 빵을 구워왔으니 아마도 모두 나름대로 좋은 배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각자 신부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집안 살림 꾸리는 재능은 어떤지 한 번 더 테스트해보고 싶구나. 자, 그러니 다들 베를 조금씩 짜서 나한테 보내라고 하거라." 


- 이 말에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쾌재를 불렀다. 자기 신부들이 베 짜는 재주는 탁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의 신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베 짜기에서도 자신들을 부끄럽게 만들 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던 형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이번엔 공주 마님께서 어떻게 해내실지 한번 두고 보자고."

- 베이코 역시 심각하게 의구심이 일었다. 앙증맞은 생쥐가 베틀을 만질 줄이나 알려나?
"베를 짤 줄 아는 생쥐라니, 누가 그런 말을 들어보기나 했겠어?"

그는 숲 속 오두막의 문을 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오, 마침내 오셨군요, 당신!"

생쥐는 즐겁게 짹짹거렸다. 그러고는 환영의 뜻으로 자그마한 두 발을 내밀더니 몹시 흥분하여 식탁 주위를 맴돌며 춤을 췄다.
"우리 생쥐 아가씨, 내가 와서 정말 그렇게 기쁜 거야?"

베이코가 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생쥐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난 당신의 신부잖아요. 안 그래요? 난 지금까지 당신이 반드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다고요! 베이코, 이번에도 당신 아버님이 또 원하시는 게 있어요?"
"응, 맞아 생쥐 아가씨, 이번엔 당신도 줄 수 없는 걸 원하시는 것 같아."
"그거야 뭔지 들어봐야죠. 뭘 원하시는데요? 말해봐요."
"응. 당신이 짠 천을 좀 가져오라고 하셔. 당신이 베를 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베를 짜는 생쥐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거든."

- 뒷자리에는 하인 생쥐가 앉았다.
"이그, 형들이 보면 깔깔대고 웃겠네!"

베이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베이코는 웃지 않았다. 그는 마차 옆에서 걸어가면서 공주 생쥐에게 자기가 잘 보살펴줄 테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마음씨 부드러운 노인이니까 당신한테도 친절하실 거야.

- "아이고, 맙소사!"

베이코의 옆에서 기묘하게 생긴 조그만 마차가 또르르르 굴러가고 있는 모습을 본 남자가 소리 질렀다.

"이게 도대체 뭐야?"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던 남자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마차와 공주 생쥐와 하인들과 새까만 다섯 생쥐를 발로 걷어차는 게 아닌가! 그들은 모두 다리 밖으로 떨어져 강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베이코가 냅다 소릴 질렀다.

"내 귀여운 신부를 물에 빠뜨렸잖아!"
그런 베이코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황급히 달아나버렸다.
베이코는 눈물을 글썽이며 강물 속을 내려다보았다.

 

- "불쌍한 생쥐 공주님! 이렇게 물에 빠져 죽다니, 정말 미안해. 당신은 정말 성실하고 사랑스러운 신부였어. 이제 당신이 가고 없으니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아." 
혼잣말을 하고 있던 베이코가 머리를 드는데, 번들거리는 말 다섯 마리가 끄는 아름다운 금빛 마차가 반대편 강둑을 내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 레이스로 치장한 마부가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었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마차 뒤에 앉은 하인은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딸기처럼 빨갛거나 눈처럼 하였으며, 치렁치렁한 금발이 온갖 보석들과 함께 반짝였고, 그녀가 입은 옷은 진주 색깔의 벨벳이었다. 그녀가 베이코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다가가자 이렇게 말했다. 
"이리로 들어와서 나랑 함께 앉지 않을래요?"

- 아름다운 아가씨가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생쥐로 변해 있을 때도 당신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날 신부로 택했으니까."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공주로 돌아왔다고 나를 버리진 않겠죠?"

- "내가 바로 그 생쥐였어요. 사악한 주술에 걸려 있었던 거죠. 만약 당신이 날 신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또 다른 인간이 날 물속에 빠뜨리지 않았더라면, 그 마법은 절대로 풀리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난 영원히 그 주술에서 풀려났어요. 그러니 함께 아버님을 만나 허락을 받고 나면 우린 결혼할 것이고, 그다음엔 우리 왕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고는 모든 것이 그녀의 말대로였다. 두 사람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농부의 집으로 내달렸다. 베이코의 아버지와 형들과 그들의 신부들은 공주님의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서자, 저토록 지체 높은 분들이 이 누추한 데서 무슨 볼 일이 있을까 싶어 모두들 나와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아버지!"

베이코가 소릴 높였다. 

"몰라보시겠어요?"
농부는 허리를 펴고는 한참 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 "베이코? 아이구, 우리 아들, 어디서 공주님을 찾았어?"
"저의 나뭇가지가 가리켰던 저 숲 속에서요."
"그래, 그래, 네가 잘라낸 나뭇가지가 거길 가리켰지! 신붓감을 찾는 데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얘길 수도 없이 들었단다."
두 형들은 울적한 표정으로 머릴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에구구, 참 운도 없지! 우리 나뭇가지가 숲 쪽을 가리키기만 했더라면 우리도 못생긴 시골 처자들이 아니라 공주님을 찾았을 텐데 말이야."

- 하지만 형들의 생각은 틀렸다. 베이코가 공주님을 얻게 된 것은 그의 나뭇가지가 숲을 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베이코가 너무도 우직하고 착해서 자그마한 생쥐에게조차 친절했기 때문이다.

- 어쨌거나, 농부의 축복을 받은 다음 두 사람은 공주의 왕국으로 함께 돌아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 서로에게 착했고 서로를 진실로 대했으며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 <숲 속의 신부 : 생주로 변한 공주 이야기>

 

- 농부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적당한 나이가 되자 장사 일을 배우라고 어느 가게에 보냈다. 그러나 아들은 땀 흘려 일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서 맨날 집으로 쪼르르 달려오곤 했다. 이에 아버지는 크게 상심했지만 그런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교회에 가서 주기도문을 외운 다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들 녀석에게 어떤 장사를 가르쳐야 할까요? 일자리를 마련해 줬지만, 번번이 달아나고 만답니다."
때마침 제단 뒤에 서 있던 가게 점원이 농부의 말을 듣고는 큰 소리로 이렇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아들한테 마법을 가르쳐주지 그래요. 네, 마법을 가르쳐줘요!"

- 농부는 그 점원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는 그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충고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그 말씀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 다음날 농부는 아들에게 말했다.

"날 따라오너라. 너한테 새로운 삶을 찾아주도록 하마."

 

- 그렇게 시골길을 한참 동안 걸어가던 두 사람은 목동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목동이 인사했다.
"내 아들한테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도사를 찾아가는 중이오."

농부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목동이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이 길로 쭉 가시면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있지요."

농부는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계속 걸어갔다.

- 얼마 안 있어 그는 큰 숲에 이르렀고, 그 숲속 한가운데 마법사의 집이 있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난쟁이 요정이 나오기에, 혹시 어린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물었다.

"받아들일 수 있소."

난쟁이 요정이 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사 년은 여기 맡겨두어야 해요. 그럼 우리 서로 이렇게 약속합시다. 그 사 년이 흐르고 난 다음 당신이 와서 아들을 찾을 수 있으면, 그 아이는 다시 당신의 아들로 돌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아들을 못 찾으면 그는 우리 집에 남아 평생토록 나의 시종이 되어야 하오."

- 농부는 그 조건을 수락하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다. 다른 가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금세 마법사로부터 달아나서 올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농부의 아내는 울면서 말했다. 아이를 사악한 마법사의 손아귀에 주고 오다니 제정신이냐고. 이젠 아들의 모습을 다신 못 보게 되지 않았느냐고.

- 그러구러 사 년이 흘러 농부는 마법사와의 약속대로 그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 숲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 그는 예전의 그 목동을 만났는데, 그가 농부에게 어떻게 해야 아들을 되찾아 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마법사의 집에 가거들랑, 밤이 되면 시선을 항상 벽난로 쪽으로 고정시키도록 하세요. 그리고 절대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돼요. 안그러면 마법사가 순식간에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놓고 나중엔 당신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고 말할 겁니다. 내일이면 당신은 마당에 개 세 마리가 접시에 담긴 우유죽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볼 거예요. 그중 가운데 있는 개가 바로 당신 아들이니까, 꼭 그 개를 선택해야 됩니다."
농부는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작별했다.

- 그가 마법사의 집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목동이 알려준 대로였다. 그는 마당으로 안내되었고 거기 세 마리의 개가 있었다.  

- <마법사의 제자, 덴마크>


 

- 산골마을에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도, 그의 농장이 뭐라고 불렸는지도, 우리한테 전해 내려오지 않아서 말해줄 수 없다. 그는 총각이었고 힐두르라는 이름의 가정부를 두고 있었는데, 그녀의 가족이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 힐두르는 농장 안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관장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관리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생활습관이 깔끔하고 검소했으며 말투도 친절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하는 모든 식솔은 물론 농부 자신까지도 그녀를 좋아했다. 

- 농부는 남자의 간절한 부탁에 마침내 뜻을 굽히고 그를 목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뜻을 모아 아주 훌륭하게 일했다. 직책이 높건 낮건 모두가 목동을 좋아했다. 그는 정직하고 열린 마음을 지녔을 뿐 아니라, 손을 대는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고 필요하다면 누구든 기꺼이 살갑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 마침내 성탄 전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농부와 모든 식솔들은 (농부가 이미 연례행사로 선언했던 만큼) 교회로 가고, 아직 돌봐야 할 집안일이 남아 있던 힐두르와 때맞춰 양 떼를 떠날 수 없었던 목동만 뒤에 남았다밤이 깊어지자 목동은 평소와 같이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이불을 덮자마자 예전에 일했던 목동들에게 바로 이날 저녁 생겼다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단단히 대비하기 위해서 눈을 똑바로 뜨고 깨어 있는 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 한밤중 그는 농부와 식솔들이 교회에서 돌아와 밤참을 들고는 각자 잠자리로 가는 소리를 다 들었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라치면 기이하고 오싹한 현기증이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목동은 오히려 깨어 있으려는 의지를 더욱 다졌다.
  
- 이런 여러 가지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 누군가가 침대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 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는가! 희미한 어둠 속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서 목동은 그것이 가정부 힐두르인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그는 푹 잠들어 있는 척했다. 


- 다음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자신의 입에 집어넣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마법의 굴레임을 즉각 알아차렸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자신에게 굴레를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여자는 굴레를 씌우자 그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어 농장 밖으로 데려 나갔다. 그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고 저항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여자는 그의 등에 올라타서 땅에서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마치 날개라도 단 듯이 그를 타고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절벽에 도달했다. 무슨 거대한 우물처럼 저 아래 땅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절벽이었다. 

- 커다란 돌 옆에 이르러 그의 등에서 내린 여자는 그 돌에다 고삐를 단단히 묶어놓고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사이 밤새도록 이 돌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고 결심한 목동은 여자가 도대체 무엇으로 둔갑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굴레를 쓴 채로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는 한은 도저히 달아날 도리가 없음을 알아챘다.

-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구 몸부림을 치자 어찌어찌 굴레를 머리에서 벗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힐두르가 사라졌던 절벽 아래로 뛰어들었다. 

 

- 한참 동안을 떨어져 내린 다음, 그는 아래에 힐두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어떤 아름다운 초록빛 잔디에 도달했다.

- 이 모든 것으로 판단컨대, 힐두르는 결코 자신이 가장해 왔던 것처럼 평범한 인간이 아니로군. 목동은 그렇게 추측하면서 더럭 겁이 났다. 이 초원으로 저 여자를 마냥 따라왔다가 그녀가 몸을 돌려 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호기심의 대가로 어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목동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마법의 돌을 꺼냈다.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남들이 자신을 볼 수 없게 만들어주는 돌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마법의 돌을 넣은 다음, 여자를 뒤좇아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 널따란 초원 위로 얼마를 달렸을까. 웅장한 궁궐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힐두르는 거기로 가는 길을 익히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공경하고 기뻐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무리의 맨 앞에 임금님처럼 고귀한 모습의 남자가 걸어왔는데 인사하는 모습을 보건대 힐두르의 애인이거나 남편인 듯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여왕을 맞이하듯 그녀에게 절을 했다.  


-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경이로움에 넋을 잃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힐두르는 목동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여태껏 당신이 한 얘기는 모조리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 증명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 그러자 목동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요정의 나라 궁전에서 집어 들었던 여왕의 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힐두르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내 꿈을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자, 여기 당신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실한 증거로 간주할 물건이 있어요. 어때요, 이거 당신의 반지가 아닌가요, 힐두르 여왕님?" 
힐두르가 대답했다.

"그러네요, 의심의 여지없이 내 반지입니다. 운도 좋은 사람이군요. 분노에 사로잡힌 나의 시어머니가 덮어씌운 끔찍한 저주, 그리고 해마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저주로부터 당신이 날 해방시켜 주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크게 성공하고 번창하기를 기도할게요."

- 그런 다음 힐두르는 자신의 인생 얘기를 이렇게 풀어놓았다.
"나는 요정의 세계 보잘것없는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임금님과 사랑에 빠져, 시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심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했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노여움으로 이 세상 끝까지 나를 증오하겠노라고 맹세하면서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죠.
'이 예쁜 너의 신부와 함께할 기쁨은 덧없이 짧으리니, 너는 일 년에 단 한 번, 그것도 오로지 그녀가 저지르는 살인의 대가로만, 네 신부를 볼 수 있을지니라! 이것이 네 여자를 향한 나의 저주요. 이 저주는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이루어지리라. 여왕이라는 저 여자는 인간세상으로 나아가 봉사할 것이며, 크리스마스 전야마다 이 마법의 굴레를 이용해서 함께 일하는 남자 일꾼 가운데 한 명을 타고 요정의 땅으로 올 거야. 여기서 너의 여자는 몇 시간 동안만 너와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일꾼을 타고 그놈의 가슴이 터져버릴 때까지, 그 놈의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전력을 다해 돌아가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 끔찍스러운 숙명은 내가 이 숱한 살인의 죄를 떠안은 채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는 절대로 날 떠나지 않게 되어 있었어요. 아니면 이 목동처럼 용감무쌍한 남자, 나를 따라 요정의 나라로 내려갔다가 나중에 자신이 나와 함께 그 땅에 있었고 요정들의 관습도 목격했음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배짱과 용기를 지닌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그 운명이 끝까지 나를 괴롭혔을 겁니다. 그리고 이젠 고백해야겠군요. 예전에 여기서 일했던 목동들은 모두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일이므로 그 어떤 처벌도 날 건드릴 수 없어요. 그리고 이 목동은 아, 참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담대하게 요정의 나라를 탐색했고 이 끔찍한 저주의 굴레에서 저를 구해주었죠. 당연히 당신에게 앞으로 보답할 거예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나의 고향과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엄청난 그리움이 나의 등을 떼밉니다. 모두들 안녕히!"  

- 그렇게 말하면서 힐두르는 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 목동은 농부를 떠나 스스로 농장을 지었고, 생업이 번성하여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대열에 올랐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성공을 요정 여왕 힐두르의 덕분으로 돌리면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요정들의 여왕 힐두르, 아이슬란드>



- 스가드 지방 클로드 밀 근처의 한 저택. 옛날 옛적 이 저택에서 어떤 젊은 남녀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주인 내외는 그 둘이 모두 정직하고 성실한 일꾼이었기에 그들을 아주 좋게 보았던 터라, 어느 날 저녁에 혼례를 올려주고 부부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조그만 밭뙈기가 딸린 아담한 오두막까지 두 사람에게 마련해서 살게 해 주었다. 

- 이 오두막은 거친 황야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주변 환경도 평판이 썩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어놓은 언덕이 몇 개 있고 산골사람들이 거기 산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톨러'라고 불리는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톨러의 생각은 이랬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옳고 정당한 일만 한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잖아?"

- 어쨌거나 부부는 주인이 마련해 준 이 오두막으로 하잘 것 없긴 하지만 그들의 전 재산을 들여놓았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두 사람이 오순도순 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톨러가 문을 열자 아주 아주 자그마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더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쬐끄만 남자는 머리에 빨간 모자를 썼고 수염과 머리칼은 길었으며 등에 커다란 혹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가죽 에이프런을 둘렀으며, 거기 망치 하나가 꽂혀 있었다. 부부는 그가 난쟁이 요정이라는 것을 곧장 알아봤다. 그렇지만 그 요정이 어찌나 심성 좋고 친절하게 보이는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 자그마한 방문객은 이렇게 말했다.

"자, 들어봐요, 톨러. 내가 척보기에도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를 잘 아는 것 같군요, 그렇죠?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어떤가 하면 말이죠. 나는 가진 거라곤 없는 언덕바지 꼬마 요정인데, 사람들이 우리한테 남겨놓은 생활터전이라고는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무덤이나 언덕밖에 없고, 그런 데는 따스한 햇살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못한답니다. 헌데 듣자 하니 당신들이 이 언덕바지에서 살기로 했다더군요. 우리 임금님은 행여나 당신들이 우릴 해치거나 어쩌면 파괴할지도 몰라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가능한 한 상냥하게 부탁하라고, 이렇게 저를 당신들에게 보냈어요. 우린 절대로 당신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이 뭘 추구하든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톨러가 말했다.

"마음 푹 놓으세요, 착한 양반. 나는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피조물을 단 하나도 내 맘대로 해친 적이 없어요. 우리 모두 살기에 세상은 얼마든지 크다고 믿거든. 그러니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롭힐 필요는 전혀 없다는 데 다들 동의할 거라고 생각해요."

 

-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작은 요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추며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잘 되었네. 그럼 대신에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드릴 겁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우리랑 저녁을 좀 들지 않겠어요?"

부인이 그렇게 물으면서 창가 의자에다 죽을 한 그릇 놔주었다. 꼬마 요정은 너무 작아서 머리가 식탁에도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뇨,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요정이 그렇게 답했다.

"제가 돌아오기를 임금님이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이렇게 좋은 소식을 너무 늦게 전해드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서 요정은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났다.

- 그때부터 톨러는 산골의 작은 요정들과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낮이면 그들이 둔덕을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무도 두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로에게 완전히 익숙해지자, 요정들은 톨러의 집도 마치 자기 집인 양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되었다. 때로는 톨러의 부엌에서 냄비나 구리주전자 같은 걸 빌려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반드시 빌린 걸 다시 갖고 와 원래 위치에다 조심스레 돌려놓았다. 반대로 요정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두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 봄이 오면 요정들은 밤에 둔덕에서 나와 두 사람이 경작하는 땅에 흩어져 있던 돌을 전부 모아서 밭고랑을 따라 가지런히 놓았다. 추수할 때가 되면 톨러가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도록 옥수수 이삭들을 모두 줍기도 했다. 

-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톨러는 침대에 누워서, 혹은 저녁기도를 할 때, 산골의 요정을 이웃으로 보내주신 데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부활절이나 성령강림절 혹은 성탄절이 오면 그는 어김없이 온갖 정성을 다해 우유를 넣은 죽을 만들어, 언덕으로 가져다주었다.

- 톨러에게 왕의 인사를 전한 다음, 요정은 그가 온 까닭을 설명했다. 그들의 임금이 무언가 중요한 사안을 톨러와 상의하고 싶어서 그러니, 즉시 톨러 내외와 딸 잉거까지 모두 산속을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꼬마 요정의 두 뺨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톨러가 그를 위로해 주려고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요정은 한층 더 울기만 할 뿐, 슬픔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 톨러와 아내, 그리고 딸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요정의 동굴을 내려가다 보니, 황야에서 볼 수 있는 버들잎이며 미나리아재비며 다른 야생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동굴 속 널찍한 공터에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꽉 차게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요정들은 톨러 가족을 테이블의 상석, 임금님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꼬마 요정들도 모두 자리를 잡은 다음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전혀 여느 때처럼 명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푹 숙였다.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 식사가 끝나자 임금이 톨러에게 말했다.

"여러분을 여기로 초대한 것은, 당신들이 지금까지 우리들을 너무도 친절하고 살갑게 잘 대해주어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요.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린 좋은 이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고 또 교회마다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어 아침저녁으로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우리는 그 소릴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유틀란드를 떠나 노르웨이로 건너가려고 합니다. 오래전 훨씬 더 많은 수의 우리 요정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이젠 우리가 헤어져야 하므로, 톨러,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 임금이 말을 마치자, 꼬마 요정들이 하나씩 다가와 톨러의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톨러의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딸 잉거한테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스러운 잉거, 우리 꼬마 요정들이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릴 생각할 수 있도록 너에게 추억을 선사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 요정들은 바닥에 있던 돌을 하나씩 집어 들어 잉거의 앞치마 안에 넣어주었다. 이윽고 임금이 앞장선 가운데 요정들은 산속의 보금자리를 떠났다.

- 그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톨러 식구들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각자 등에는 보따리를 지고 손에 지팡이를 든 꼬마 요정들이 황야를 가로질러 느릿느릿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들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에 이르자 다시 한번 모두 돌아서더니 작별의 뜻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다시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톨러는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갔다.

- 다음날 아침 잉거는 꼬마 요정들이 자신의 앞치마에 넣어주었던 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는 진짜 귀금속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보석, 갈색 보석, 희거나 까만 보석! 꼬마 요정들이 떠난 후에도 잉거가 그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각자의 눈동자 색깔을 그 돌에다 넣어주었던 것이다.

- 지금 우리 인간들이 보게 되는 모든 보석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빛을 뽐내는 것도, 오로지 저 산속의 꼬마 요정들이 자기 눈의 색깔들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그 옛날 요정들이 잉거에게 주었던 것도 바로 이 아름다운 보석들이었다.

 

- <톨러의 이웃사람들, 덴마크>


 

 





- 옛날 옛적 어느 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뱅이가 있었다. 가난한 데다 애들까지 줄줄이 낳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먹일 음식도 입힐 옷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다들 예쁜 아이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막내딸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거의 바라보기가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 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날씨는 끔찍이도 나빴고 밖은 무시무시하게 캄캄하다 싶더니 비까지 쏟아지고 벽이 우지끈거릴 정도로 바람도 세게 불어재꼈다. 가난뱅이 식구는 모두 불가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창문을 세 번 두드리는 것이었다. 마음씨 착한 아버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 봤더니, 커다란 흰곰 한 마리가 서 있지 않겠는가?

- 들어와서 아침이면 날이 밝기 전에 떠나버렸으니까.
어쨌거나 한동안은 모든 게 만족스럽게 지나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막내딸은 말수도 적어지고 슬퍼 보였다. 종일 혼자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향 집으로 돌아가 다시 엄마 아빠랑 언니와 오빠들이랑 지내기를 간절히 원한 것도 무리가 아닐 터.

 

- 흰곰이 뭣 때문에 그처럼 시름에 젖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너무 외롭다고, 아무도 없이 혼자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너무너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너무 슬프다고.
"당신이 원한다면 가족들한테 한번 다녀오면 되잖아."

흰곰이 그렇게 말했다.

"다만 나한테 딱 한 가지만 약속해 주면 돼. 당신 어머니랑 단둘이서는 절대 대화를 하면 안 돼. 다른 식구들이 함께 있을 땐 괜찮지만, 당신 어머니는 당신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단둘이서만 얘기하려고 할 거야.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해선 안 돼. 만약 그랬다가는 우리 둘 모두가 불행해지고 우리한테 재앙이 닥칠 거야."

- 그러던 어느 일요일, 흰곰이 그녀에게 이제 함께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말했다. 막내딸이 흰곰의 등에 탄 채로 둘은 길을 떠났고 오랫동안 먼 거리를 여행한 끝에 마침내 아주 커다란 농장에 이르렀다. 거기, 오빠들과 언니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모든 게 너무나 예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당신 부모는 저기 사셔."

흰곰이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을 잊으면 안 돼. 그걸 잊으면 우리 둘이 모두 불행해지거든."

"아뇨, 난 안 잊을 거예요."

그들이 농장에 도착하자 흰곰은 몸을 돌려 가버렸다.

- 엄마 아빠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 막내가 느낀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막내가 그들을 위해서 희생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도무지 말로 표할 수조차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 모두 막내의 안부를 걱정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등을 궁금해했다.

- 막내는 자신이 편안하게 잘살고 있으며 바라는 것은 모두 누리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것들 외에는 막내가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주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거나 가족이 막내로부터 그리 많은 것을 알아내진 못했던 것 같다.

-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에 흰곰이 말했던 바로 그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가 막내딸과 자기 방으로 가서 단둘이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 것이다. 흰곰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막내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랑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면, 언제든 나중에 할 수 있을 거예요."

막내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찌어찌 기어코 막내딸을 구슬렸고 끝내는 모든 것을 털어놓도록 만들어버렸다. 밤마다 자려고 불을 끄고 나면 어떤 남자가 방으로 들어온다는 것, 그런데도 그 남자가 날이 밝기 전에 가버리 ... 

- 순식간에 왕자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자리에서 왕자에게 입 맞추지 않고서는 더는 숨조차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 키스하다가 그만 그의 얼굴에 양초 기름을 세 방울 떨어뜨렸다. 아, 그렇게 왕자가 깨어나고 말았다.

-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물었다.

"이제 당신 때문에 우린 모두 영원히 불행해졌어. 일 년만 참아주었더라면 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사실은 나의 계모가 나한테 주문을 걸어서 낮에는 흰곰, 밤에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었어. 그러나 이젠 모든 게 끝났어! 난 당신을 떠나서 계모한테 돌아가야 해. 계모는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성에서 살고 있는데, 그 성에는 코가 거의 2미터나 되는 공주가 있지. 이제 나는 그 공주와 결혼해야 돼." 

- 막내딸은 엉엉 울며 소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왕자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 그녀는 자기도 따라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건 절대 안 돼!"

"하지만 가는 길을 말해줄 수는 있겠죠? 제가 가서 당신을 찾도록 할게요."

그녀가 애원했다.

"적어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줄 수는 있겠죠?"

그러자 왕자가 답했다.

"그래,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그 성으로 가는 길은 없어.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곳이라 당신은 절대로 길을 찾을 수 없을 거야."

-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왕자도 성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저 멀리 어둡고 울창한 숲 속 한가운데 자그마한 녹색 밭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집을 떠날 때 가져왔던 보따리 안에 그녀의 넝마 같은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슬피 울다가 지쳐버렸지만, 마침내 길을 떠나야 했다. 여러 날을 걷고 걸은 다음에야 아주 커다란 산기슭에 도착했다. 

- 그런데 거기 어떤 노파가 앉아서 황금사과를 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막내딸은 혹시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성에서 계모와 살고 있는 왕자, 코가 2미터나 되는 공주랑 결혼하게 될 왕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네가 그 왕자를 어떻게 알지?"

노파가 물었다.

"혹시 원래는 네가 그 왕자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던 게냐?"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

"아하, 그렇군. 그게 너였어?"

 

- 노파가 말을 이었다.

"흠. 나도 왕자가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성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네가 거기에 늦게 도착하든지 아니면 절대 도착하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너에게 내 말을 빌려주마. 그 말을 타고 내 이웃집에 사는 나의 오랜 친구를 찾아가렴. 어쩌면 그 사람이 길을 알려줄 수도 있어. 거기 도착하거든 말 왼쪽 귀밑을 채찍으로 한 번 때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줘. 아, 그리고 이 황금사과도 네가 갖고 가는 게 좋겠구나." 

- 막내딸은 일어나 말을 타고 오래, 오래 달렸다. 이윽고 어느 산 밑에 이르렀는데 웬 늙은 여자가 금으로 만든 빗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혹시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는 성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앞서 만난 노파와 똑같은 말을 해주는 게 아닌가? 그 성에 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거기에 일찍 도착할지 아니면 늦게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네가 나의 이웃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내 말을 줄게. 내 친구가 그 성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친구에게 도착하거들랑, 그냥 내 말의 왼쪽 귀밑을 채찍으로 한 번 때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주면 돼." 

그리곤 늙은 여자는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금으로 만든 빗을 막내에게 주었다.

- 막내는 다시 한번 오래오래 말을 달려 피곤한 몸으로 어떤 커다란 산에 도착했다. 거기엔 또 어떤 노파가 앉아서 황금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막내는 다시 물었다. 왕자님한테 가는 길을 아느냐고, 햇님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다는 성이 어디쯤이냐고. 그랬더니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혹시 원래 그 왕자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던 게 너냐?"

"네, 맞아요, 저예요!"

하지만 이 노파도 길을 모르기는 앞서 두 여자와 마찬가지였다.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맞아, 나도 잘 알지. 그리고 넌 일찌감치든 늦게든 거기 도착할 테지만, 하여간 내 말을 너에게 빌려주마. 그리고 동쪽바람한테 가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어쩜 그 지역을 잘 알아서 널 바람에 실어 데려다 줄지도 모르겠어. 넌 거기 도착하면 내 말의 귀밑을 건드려주렴."

 

- < 햇님의 동쪽 달님의 서쪽, 노르웨이>

 


- "성을 찾아오셔서 따님께서 이제부터 어떤 왕궁의 여주인이 될 것인지를 직접 보셔야 할 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미코가 여우의 충고대로 왕을 초대하자, 왕은 기뻐서 펄쩍 뛰었다. 막상 혼인을 시켜놓고 보니 혹시 자신이 좀 성급했던 건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미코의 말에 마음이 푹 놓인 왕은 그의 초대를 쌍수로 환영했다. 

- 이튿날 여우가 미코에게 말했다.
"저, 그럼 내가 먼저 가서 준비를 좀 해둬야겠군요."
"아니, 어딜 가려고?"

이 앙증맞은 친구가 자신을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미코는 더럭 겁이 났다.

- 여우는 그런 미코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며칠 행진하면 닿을 거리에 아주 화려한 궁전이 있는데, '버러지'라는 이름의 아주 사악하고 늙어빠진 용의 궁전입니다. 내 생각엔 이 '버러지'의 궁전이 미코에겐 안성맞춤일 것 같은데."
"그야 물론 안성맞춤이겠지."

미코가 끄덕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성을 버러지에게서 뺏는담?"
그러자 여우가 답했다.

"나만 믿어요. 자, 딴 건 필요 없고 이렇게만 하는 겁니다. 우선 저 큰길로 임금과 신하들을 데리고 나와요. 내일 정오쯤이면 네거리를 만날 텐데, 거기서 왼쪽으로 틀어서 죽 나아가다 보면 버러지의 왕궁이 나올 거예요. 도중에 혹시 목동이라든지 ..."
 
- 왕은 이후 며칠 동안 성에서 묵었고, 미코를 보면 볼수록 그가 자신의 사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리만치 뿌듯하고 기뻤다.
마침내 왕이 떠나는 날, 그는 미코에게 말했다.
"자네의 성이 나의 왕궁보다 어찌나 더 화려하고 좋은지, 자네한테 다시 우리 궁을 찾아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구먼."
그러나 미코는 진지한 어조로 왕에게 말해주었다.
"존경하는 장인어른, 제가 처음으로 어르신의 성에 발을 들였을 때, 저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고 생각했답니다."

 

- 왕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고 신하들은 서로서로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자신의 성이 얼마나 더 훌륭한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다니, 참으로 상냥하고 서글서글한 분이로군요!"

 

- 왕과 그의 신하들이 안전하게 길을 떠난 다음, 자그마한 빨간 여우가 미코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 나의 주인님, 이젠 슬프고 외롭게 느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성의 주인이 되었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아내로 맞으셨잖아요. 이젠 더 이상 저를 옆에 둘 필요가 없어졌으니, 작별을 고할게요."
미코는 귀여운 여우가 해주었던 모든 일에 대해 고마움을 전했고, 여우는 숲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 자, 이제 여러분도 아시겠는가? 미코의 궁핍한 아버지는 비록 아들에게 남겨줄 재산 하나 없었지만, 바로 그 아버지야말로 미코의 온갖 행운을 불러온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왜냐고? 애당초 올가미에 잡혀 있는 짐승을 산 채로 집에 데려오라고 말해준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였으니까!

- <천하장사 미코>

 

 

춤추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깽깽이 바이올린 소리만 들려오면 거의 정신을 못 차리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 소녀는 너무너무 영리한 춤꾼이었고, 이 소녀보다 더 날렵하게 빙글빙글 돌며 춤추거나 발꿈치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아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소녀의 신발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고 발에는 겨우 뜨개질해 만든 레깅스를 신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휩쓸고 스쳐 지나가는지 주변의 공기가 윙윙 소리를 내는 팽이처럼 휘감길 지경이었다. 물론 제대로 가죽 신발을 신었더라면 훨씬 더 빠르게 돌며 춤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대체 어떻게 가죽 신발을 구한담? 소녀는 교회당의 생쥐보다 더 가난해서 가죽 신발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암베리 들판에서 시골장이 열렸을 때, 소녀는 다름 아닌 '닉 영감'을 만나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추측하시겠지만, 시골 장터란 게 온갖 종류의 뜨내기며 방랑자며 손목시계 장수며 부랑배들이다 모이는 곳인지라, 닉 영감은 바로 그런 장터가 주는 재미를 느끼려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사 양반들이 찾는 곳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부류의 다른 사람들도 모여들기 마련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무슨 일인지 이미 잘 알고 있는 닉 영감은 짐짓 모른 척하며 소녀에게 물었다.
"춤출 때 신을 가죽 신발 한 벌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중이에요."

소녀가 답했다.

"그런 걸 살 수 있는 돈이 없거든요."
"그게 전부야? 그 정도 문제라면 머지않아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닉 영감은 가죽 신발 한 벌을 턱 내놓았다.

"어때, 맘에 들어?"

그가 물었다.

- 소녀는 가만히 서서 신발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섬세하고 화려한 신발이 있을 수 있다니! 저건 어설픈 실로 꿰맨 평범한 신발이 아니라, 구두창을 맞대어 붙인 진짜배기 독일제 구두잖아! 저보다 더 훌륭한 신발은 바랄 수도 없겠어!

 

- "안에 스프링도 있나요?"

소녀가 물었다.
"그래, 있다마다. 믿어도 좋아."

닉 영감이 말했다.

"어때, 갖고 싶니?"

- 여기서 Old Nick은 악마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 <닉 영감과 소녀, 스웨덴>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떤 남자가 덩굴 받침대로 쓸 나무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원했던 것처럼 길고 곧고 가느다란 나무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돌무더기 아래까지 오게 되었다. 


- 그런데 거기서 신음하는 듯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마치 누군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신음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곤경에 빠져 있는가 싶어서 남자가 다가갔더니, 그 신음은 돌무더기 맨 위에 놓인 크고 평평한 돌판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 석판은 너무나 무거워서 장정들이 여러 명 달라붙어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를 하나 잘라내고, 그걸로 지렛대를 만들었다.  

 

 

- <세상만사 그런 거지 뭐, 노르웨이>


 





- 북쪽 왕국에 사는 어떤 남자를 위해 오랫동안 하인으로 봉사해 온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주인은 맥주 만들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경지의 장인이었다. 그가 빚은 맥주는 어찌나 환상적인 맛이었던지, 그런 맥주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 이윽고 젊은이가 그 남자를 떠나야 할 때가 되어서 남자가 그에게 보수를 지급하려 했는데, 젊은이가 다른 것은 한사코 필요 없다면서 굳이 성탄맥주 한 통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자는 젊은이에게 성탄맥주를 한 통 주었고, 젊은이는 그걸 걸머지고서는 머나먼 길을 떠났다. 

- 그런데 그가 통을 지고 오래오래 걸으면 걸을수록 맥주 통이 자꾸 더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은이는 누구든 함께 길을 가는 사람 ...

"다들 아저씨 탓이라고 하던데요, 뭘. 그러니까 아저씨랑은 마실 수가 없어요."
젊은이는 다시금 맥주 통을 걸머지고는 더 멀리 걸어갔고, 마침내 통이 어찌나 무거워졌는지 이젠 정말 더는 걸음을 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또 한 번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오는데, 그는 어찌나 바싹 마르고 호리호리한지 몸속의 뼈가 어떻게 붙어있을까,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 "좋은 날입니다!"

그 남자가 인사했다.
"그러네요. 안녕하세요?"

젊은이도 인사했다.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

남자가 물었다.
"아, 저, 그게, 누구든 함께 맥주를 마실 사람이 없을까, 찾고 있던 중입니다. 그러면 이 술통이 좀 가벼워질까 하고요. 이게 너무 무거워 들기도 버겁거든요."

- "호오, 그러면 나랑 함께 마시면 안 될까?"

남자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괜찮아요."

젊은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저씬 누구인지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람들이 날 죽음이라고 부르더구먼."

남자가 그렇게 답했다.
"아하, 아저씨야말로 아주 안성맞춤입니다."

젊은이가 쾌재를 불렀다.

"아저씨랑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함께 마실 수 있지요."

 

- 그렇게 말하면서 젊은이는 맥주통을 내려놓고 사발에다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아저씬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똑같이 대우하니까."

- 그렇게 젊은이와 죽음은 서로 건배하고 맥주를 들이켰고, 죽음은 한 번도 이런 술맛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젊은이는 그가 마음에 들어서 한 잔, 한 잔, 자꾸 마셨고 맥주가 자꾸 줄어들면서 통도 한결 가벼워졌다.

 

- 마침내 죽음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나한테 준 이 맥주보다 더 맛이 좋거나 이만큼 내 기분을 좋게 해 준 술은 여태껏 없었다네. 그 대가로 자네한테 뭘 주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술을 실컷 마시더라도 이 술통이 텅텅 비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어. 그리고 이 통 속의 맥주를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켜야 하고 말이야. 그러면 자넨 그걸로 그 어떤 의사보다도 더 훌륭하게 병든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겠지. 응, 이렇게 하자고. 자네가 환자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죽음인 나도 반드시 거기 있을 것이고 자네가 나를 볼 수 있도록 하겠어. 그리고 만약 내가 침대 발치에 앉아 있다면, 그건 이 술통의 맥주로 환자를 말끔히 치료할 수 있다는 표시야. 하지만 만약 내가 환자의 베개 옆에 앉아 있다면, 그 환자는 내 차지니까 자네가 절대로 그 사람을 고쳐줄 수 없다는 표시라네. 알겠나?"

 

- <죽음과 의사, 노르웨이
 

 

 





- 어떤 떠돌이가 숲 속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집과 다음에 나타날 집 사이의 거리가 어찌나 멀었던지, 밤이 되기 전에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데를 찾기는 거의 글러 보였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의 눈앞에 작은 오두막집 하나가 나타났다. 화덕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떠돌이는 생각했다. 저 불길 앞에서 몸을 녹일 수 있다면, 그리고 뭐든 좀 요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 오두막집을 향했다.

- 바로 그때 어떤 노파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떠돌이가 그렇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쇼."

노파도 인사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유?"
"햇님의 남쪽, 달님의 동쪽에서 왔지요."

떠돌이가 답했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이 동네만 빼놓으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녔거든요."
"아하, 그러면 당신은 틀림없이 대단한 여행가로구먼."

 

- 노파가 말을 이었다.

"그래, 여긴 무슨 볼일이 있는 거유?"
"아, 전 그냥 하룻밤 쉬어 갈 데를 찾고 있습니다."

떠돌이의 대답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노파가 타일렀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당장 떠나는 게 좋을 거유. 우리 바깥양반은 지금 집에 없고, 또 우리 집은 여인숙이 아니거든."

- "아, 친절하신 할머니,"

떠돌이가 사정했다.

"너무 언짢게 생각하시거나 냉랭하게 그러시지 마세요. 우리 모두 인간이잖아요.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성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요."
"서로 돕는다고?"

노인이 물었다.

"돕긴 뭘 도와? 그런 얘기 듣는 게 처음이네. 누가 나를 도와줄 것 같소? 우리 집에는 빵 한 조각조차 없는데, 안 돼, 당신 묵을 곳이 필요하면 다른 데로 가봐야 할 거야."

- 그러나 이 떠돌이는 다른 떠돌이들과 마찬가지여서, 처음 한 번 퇴짜 맞았다고 해서 그대로 물러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비록 노파가 있는 대로 툴툴대고 불평을 터뜨렸지만, 떠돌이 역시 평소와 ... 

- 아주 번듯하게 차려졌다.
노파는 평생토록 이렇게 성대한 만찬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수프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봐, 못 하나로 이 모든 걸 만들었다니! 
그토록 경제적인 수프 만들기를 배워서 어찌나 기분 좋고 유쾌했던지, 노파는 자신에게 그런 유용한 것을 알려준 떠돌이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두 사람은 완전히 지치고 졸음이 몰려올 때까지 마시고 먹고, 먹고 마셨다.
이제 떠돌이는 바닥에 몸을 누이려고 했다. 하지만 노파는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노파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바닥에 눕게 하면 쓰나. 침대에서 자도록 해야지."

- 두 번 권할 필요도 없이 떠돌이는 수락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달콤한 크리스마스 때랑 똑같은 기분이에요. 할머니보다 더 친절한 여자는 만나본 적이 없고요. 아, 그래요, 그렇게 착한 사람들과 만나는 이들은 정말 행복하죠."

떠돌이는 침대 위에 누워서 달콤한 꿈나라로 떠났다.

- 다음날 아침, 그가 눈을 떠보니 따뜻한 커피와 술 한 잔이 놓여 있었다.

- 마침내 그가 다시 길을 떠나려 하자, 노파는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 한 닢을 쥐어주었다.
"고맙네, 젊은이, 고마워, 나한테 그런 걸 가르쳐주어서."

그녀가 말했다.

"이젠 못 하나로 수프를 끓이는 방법을 배웠으니, 난 앞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야."

- "아, 거기다 무언가 맛있는 재료를 더해주기만 한다면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떠돌이가 오두막을 나서며 그렇게 말했다.

- 노파는 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죽 지켜보았다.
"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게 뭐 그리 자주 생기는 일은 아니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 <노파와 떠돌이, 스웨덴>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 북쪽 노르들란트에 있는 거라곤 볼썽사나운 어선뿐이고, 사람들은 핀족의 마법사로부터 포대에 넣은 맑은 바람을 살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다. 그땐 겨울 날씨에 너른 바다에서 지그재그로 항로를 잡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선원은 절대 늙는 법이 없었다.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대개 여자들이나 아이들이었다.

-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싸늘하고 칠흑 같은 밤, 잭은 아직 살아남은 선원들 몇 명이 내지르는 고함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저들에게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겠지."

잭은 생각했다.

"그 가족들도 책임을 씌울 수 있는 나 같은 존재가 있을까, 궁금하네."

- 그렇게 물결 가는 대로 흘러가고 또 흘러가는 동안 점점 날이 밝아지려는 무렵, 갑자기 잭은 뭍을 향해 내달리는 강력한 해류의 기운이 배를 휘어잡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잭은 마침내 뭍으로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새까만 바다와 새하얀 눈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 그렇게 거기 서서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주위를 살피던 잭은 저 멀리 핀족의 오두막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낭떠러지 바로 아래에 있는 그 오두막까지 어찌어찌 다가갈 수 있었다. 주인인 핀 사람은 너무나 노쇠하여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는 따스한 재를 모아놓은 곳의 한가운데 앉아 커다란 포대 안에다 뭔가 중얼거리면서, 잭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 큼직하고 노란 말벌들이 마치 오뉴월인 양 눈 위를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웬 아가씨가 거기 앉아 불을 피우면서 노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었다. 노인의 손녀 손자들은 순록을 데리고 멀리멀리 빙하가 깎아먹은 대지에 나가 있었다.

- 여기서 잭은 옷도 잘 말릴 수 있었고, 그토록 갈망했던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핀족 아가씨 세임케는 잭에게 순록의 우유도 마시게 하고 골이 든 뼈도 대접하는 등, 더할 나위 없이 그를 위해 마음을 써주었다. 덕분에 잭은 은빛 여우가죽 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 연기가 퍼져 있는 오두막 안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러나 그가 비몽사몽 누워 있자니 자신의 주위에서 여러 가지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인인 핀 노인은 문간에 서서 순록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순록들은 저 멀리 산속에 있을 텐데 말이다. 그는 늑대가 가는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곰에게 마술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가 가죽으로 만든 포대를 열자 거센 바람이 울부짖고 외치며 오두막 안에 있던 재를 온통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 잠시 후 모든 게 잠잠해지자 허공에 노란 말벌들이 가득했다. 노인이 뭔가를 지껄이고 중얼대며 해골 같은 머리를 흔들고 있는 동안 말벌들은 그의 털옷 속으로 들어가 자릴 잡았다그러나 그 노인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것 외에도 생각할 다른 일들이 좀 있었다. 무거운 잠이 그의 눈에서 떠나자마자, 그는 곧 느린 걸음으로 자기가 타고 온 배를 향했다. 배는 해변에 찰싹 달라붙어 마치 여물통처럼 기울어져 있었으며, 바닷물이 용골을 찰싹찰싹 때리며 문지르고 있었다.  

- 그사이 세임케는 갈색 눈동자로 잭을 어르고 유혹했으며,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꼬여 마침내 노인이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연기 한가운데로 그를 끌어들였다.

- 핀 족의 마술사는 머리를 돌려 살펴봤다.
"내 두 눈은 어리석고 연기 때문에 눈물이 흐르지만,"

노인이 말했다.

"잭이 거기 뭘 붙들고 있는 거냐?"
"당신이 덫으로 잡은 하얀 들꿩이라고 말해요!"

세임케가 잭에게 속삭였다. 잭은 그녀가 몸을 웅크려 그에게 기대고는 살짝 떨고 있다고 느꼈다.

- 이어서 그녀는 속삭였다.

"노인은 화가 나서 당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배에 대해 심술궂은 말이나 마법의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녀가 어찌나 살그머니 속삭이는지, 잭은 방금 그 말이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세임케는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배를 완성시킨다면 핀의 마법사는 앞으로 노르들란트 전역에 맑은 바람을 팔지 않을 걸요!"

그런 다음 그녀는 괜히 핀족과 마법의 파리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되자 잭은 자신의 배가 어쩌면 자기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그런 가운데 최 ...
 
- 곰곰 생각하고 있을 때, 설상화(미끄러지지 않게 바닥에 쇠갈고리가 달린 신발) 한 켤레가 바다 안개를 뚫고 아주 살그머니 그를 향해 미끄러져 와서는 바로 그의 발 앞에 가만히 멈추었다.
"네가 이렇게 날 찾았으니, 돌아가는 길도 그렇게 찾아주면 좋겠다."

잭이 말했다.

 

- 그래서 잭은 설상화를 신고 그 신발이 알아서 언덕배기와 가파른 절벽을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두 눈이 인도하도록 두지 않았고, 자신의 두 발이 그를 데려가도록 두지 않았다.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설상화가 갑자기 딱 멈추어 섰고, 그는 핀족 마법사의 오두막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거기 세임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찾던 중이었다.
"당신을 따라가도록 내가 설상화를 보냈어요."

그녀의 말이었다.

"당신이 배를 찾지 못하도록 핀 할아버지가 이 땅에 주문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애초에 당신이 할아버지 집에 피신했으니 목숨은 안전해요. 하지만 오늘 저녁엔 당신이 할아버지를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러면서 핀 주인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세임케는 그를 몰래 집안으로 들인 다음, 그에게 고기와 휴식할 장소를 제공했다.

- 그러나 잭이 밤중에 잠을 깨자,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멀리서 웅웅대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배가 있어도 핀족을 절대 묶어둘 수 없고,
선원이 있어도 파리를 찾을 수 없는데,
방향 잃은 바람만 빙글빙글 도는구나.'

- 핀 주인은 잿더미 속에 앉아서 마법의 노래를 불렀고 땅이 제법 흔들릴 때까지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동안 이마를 바닥에 댄 세임케는 두 손을 목 뒤에 단단히 깍지 끼고서 그를 막아달라고 핀족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잭은 깨달았다. 민족의 마술사는 여전히 눈발과 바다 안개 속에서 자신을 추적하고 있으며, 자신의 생명이 마법의 주문으로 위험에 빠져 있음을.

- 그래서 그는 날이 밝기 전에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가,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채 다시 쿵쿵거리며 돌아왔다. 그러고는 핀족 사람들의 겨울 피난처에서 곰들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그처럼 지독한 바다 안개는 생전 처음이었으며, 집에서 겨우 몇 발짝 나갔을 뿐이었는데도 오두막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느라 여기저기 헤맸다고도 했다. 핀 주인은 벌집처럼 노란 파리 떼가 가득한 보자기를 살갗에 댄 채로 거기 앉아 있었다. 그는 파리들을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니게 내보냈지만, 모두 다시 돌아와서 그의 주위를 감싸고 윙윙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잭이 문간에 서 있는 걸 보고 파리들이 제대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졌다. 그리고 몸이 흔들리도록 웃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린 싱크대 아래에다 곰을 꽁꽁 묶어둘 거야. 그리고 잭이 자기 배를 못 보도록 내가 마법의 주문으로 그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지. 게다가 난 봄이 올 때까지 그의 앞에다 잠에서 못 깨는 말뚝을 박아둘 거야."

- 그러나 같은 날, 핀 주인은 문간에 서서 몸으로 마술을 걸고 허공에다 이상한 손짓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어 그는 흉측스러운 마법의 파리 두 마리를 날려 보냈다. 임무를 띤 파리는 어딜 가든 그 아래 흰 눈에다 새까만 흔적을 남겼다. 늪속에 있는 오두막에 고통과 질병을 가져다주고, 핀의 질병을 바깥세상에 퍼뜨려 대도시의 신부를 결핵에 걸려 쓰러지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 그러는 동안 잭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어떻게 해야 핀의 마법사를 이길 수 있을지만을 생각했다.
처녀 세임케는 그를 감언이설로 꾀거나 눈물을 흘리며, 목숨이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다시는 배를 찾으러 바닷가로 내려가지 말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그 모든 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잭은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세임케는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쓰라린 눈물을 흘렸다. 적어도 핀의 마법사가 스웨덴과의 국경에 있는 조크목산으로 가고 없을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겠노라고 약속해 달라고 하면서.

- 핀 주인은 야수들의 이야기를 이용해서 손자들한테 당부했다. 내가 멀리 떠나 있어서 늑대나 곰들로부터 너희를 보호할 수 없으니 순록을 너무 멀리 내놓지 말라고. 그런 다음 그는 약을 마시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숨을 헐떡이고 신음을 내뱉으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법사가 있던 자리에는 그가 덮고 있던 동물의 가죽만이 남았다. 그의 영혼은 저 멀리 조크목산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 마술사들은 피난처인 높은 산 아래 어두운 바다 안개 속에 모두 둘러앉아, 온갖 종류의 비밀과 숨겨진 것들을 중얼대고 신참 마법사들에게 혼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마법의 파리들은 윙윙 소리를 내면서 노란 고리 모양으로 핀의 마법사가 남긴 동물 가죽 주위를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밤에 잭은 마치 멀리서 뭔가가 자꾸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에 잠을 깼다. 말하자면 어떤 공기의 흐름이 그의 주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밖에서 휘날리는 눈발의 한가운데로부터 무언가가 윽박지르고 그를 불러댔다.
"그대가 오리처럼 매끄럽게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그대가 지으려는 배는 조금도 진전이 없을 테고,
핀의 주인은 그대가 돛 달고 남쪽으로 가게 놔두지 않을 터,

바람을 꽁꽁 조여 묶어두고 광풍도 가두어버릴 것이므로."

 

- 그 목소리의 끝에는 핀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잭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피부는 길게 축 늘어져 있는 데다 늙은 순록의 살갗처럼 주름투성이었고, 그의 눈에는 어질어질한 연기가 서려있었다.
잭은 몸을 바르르 떨며 사지가 뻣뻣해졌다. 핀의 주인이 자신에게 마법을 걸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잭은 마법의 주문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얼굴을 굳히고는 강하게 뻗대었다. 그런 식으로 둘은 드잡이를 펼쳤고, 이윽고 핀의 마법사는 얼굴이 녹색으로 변하면서 거의 질식할 뻔했다.

- 그러자 조크목산의 다른 마법사들이 잭을 향해 마술을 걸어왔으며 그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기묘했다. 배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거나 배 안의 무언가를 고쳐놓았을 때마다 금세 다른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마침내 그는 자기 머릿속이 불안과 초조로 꽉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다음엔 깊은 슬픔이 덮쳐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원하는 대로 배를 만들 수 없었다. 다시는 저 바다를 건너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어느덧 여름이 찾아왔다. 잭과 세임케는 따스한 저녁마다 바다로 돌출한 곳에 함께 앉았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각다귀들이 윙윙대고 물고기는 해안 가까이 솟구쳐 올랐으며, 솜털오리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아, 누군가가 물고기처럼 날렵하고도 민첩하게 날 위해 배를 완성해주기만 한다면, 마치 갈매기처럼 저 큰 파도를 타고 넘을 수만 있다면,"

잭이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그러면 난 떠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대를 인도하여 고향 헬걸란트로 데려다주길 원하는가?"

바닷가로부터 어떤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 평평하게 만든 모자를 쓴 어떤 사람이 거기서 있었다.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호박돌 너머 아까 솜털오리를 봤던 곳에 길고 폭이 좁으며 앞뒤 머리가 높은 배 한 척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타르를 바른 널빤지들이 그 아래 맑은 물속에 그대로 비쳤고, 나무엔 단 하나의 옹이조차 없었다.

- "그렇게 길을 안내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습니다."

잭이 말했다.
세임케가 그 말을 듣자 소리 높여 울면서 무섭게 흥분했다. 그녀는 잭의 목을 잡고 늘어져 놓지 않으려 하면서 정신없이 지껄이고 절규했다. 세상의 어떤 것이든 뚫고 통과시켜 줄 설상화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여태껏 사람들이 땅에 묻은 행운의 금화란 금화는 모두 찾아낼 수 있도록 핀족의 마법사에게서 뼈 지팡이를 훔쳐 주겠다고 했다. 낚싯줄에다 연어잡이용 매듭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아주 멀리서도 순록을 꾀어서 다가오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도 했다.

"당신이 날 버리지만 않는다면, 당신은 핀족의 마법사만큼이나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잭의 시선은 오로지 저 아래 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자 세임케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새까만 머리채를 뜯어내 그의 두 발에다 묶었다. 그 바람에 잭은 그 머리털을 잡아 떼낸 후에야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 "만약 내가 여기 남아서 당신이나 어린 순록이랑 노닥거리고 있다면, 부서져버린 못을 들고 배의 용골에 들러붙어 있어야 할 가련한 일꾼들이 한둘이 아닐 거요."

잭이 그렇게 말했다.  

-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이끌어 헬걸란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같은 식으로 그대의 밥벌이도 도울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대신에 그대는 약간의 세금을 내야 하네. 그대가 일곱 척의 배를 지을 때마다 한 번씩은 반드시 내가 용골의 널빤지를 끼울 것이네."
잭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배가 자신을 증오의 아가리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혹시, 교묘하게 환심을 사서 아무 대가 없이 나로부터 그 속임수를 얻어내리라고 은근히 상상하는 것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싱긋이 웃으면서 유령이 말했다. 이어 뭔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창고 안에 묵직한 무언가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곤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원하는 게 뱃사람의 배라 하더라도, 죽은 자의 배까지 함께 받아들여야 해. 오늘 밤 네가 몽둥이로 용골을 세 번 두드리면, 노르들란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배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


- 그날 밤 잭은 몽둥이를 두 번 들어 올렸다가 두 번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오트링은 그의 눈앞 바다에 가볍게 흔들리며 뽐내듯 놓여있었다. 이미 자기 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온통 환하게 빛나고 타르를 새로 칠해 번들거렸으며 밧줄과 고기잡이 장비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얼마나 가벼운지, 얼마나 높이 파도 위로 올라탈 수 있을는지 느껴보기 위해서 잭은 그 날씬하고 멋진 배를 발로 툭툭 차고 흔들기도 했다. 
그런 다음 한 번, 두 번, 세 번, 나무 몽둥이가 용골을 때렸다. 그리하여 셰홀름에서 첫 번째 배가 만들어졌다.

- 어느 가을날, 빽빽이 모인 새들처럼 엄청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툭 튀어나온 갑에 모여 잭과 그의 형제들이 새로 만든 오트링의 돛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배는 거센 물결을 뚫고 미끄러져 나갔고 물보라는 성의 해자처럼 배를 둘러쌌다.
한순간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음 순간 갈매기처럼 솟구쳐 오르면서, 배는 암초와 갑을 화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 어장에 있던 어부들은 노를 놓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 배는 생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해에 오트링 때문에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면, 이듬해에 그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배는 널찍하고 육중한 겨울 고기잡이용 펨뵈링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잭이 만들어낸 배는 그 앞의 작품보다 노 젓기에 더 가볍고 돛을 올리기에 더 날렵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배는 바닷가 조선대 ...

- "만든 배의 측표 절반에 해당하는 은화를 벌금으로 내야 하느니라!"

그가 선언했다.
행정관의 분노는 갈수록 요란해지고 격렬해졌다. 잭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북녘 스크라르 요새로 보내, 해와 달을 더는 볼 수 없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관은 노를 저어 펨뵈링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얼마나 날렵하고 아름다운 배인지 맘껏 눈요기한 다음, 마침내 '정의'보다는 '자비'를 베푸는 데 동의하고 벌금 대신 펨뵈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 그러자 잭은 모자를 벗고 말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이 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행정관 나으리입지요!"

그렇게 행정관은 그 배를 타고 떠났다.

- 그 아름다운 펨뵈링을 잃게 되자 잭의 가족들은 일제히 쓰라린 눈물을 쏟아냈지만, 잭은 배 만드는 창고 지붕에 올라가 허리가 끊어지도록 껄껄 웃어젖혔다. 

- 그 후 가을이 무르익을 즈음, 여덟 명의 부하를 대동한 행정관이 펨뵈링과 함께 서쪽 피요르드에서 침몰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 세임케는 잭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서 이 암순록을 사겠다고 제안하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고는 순록 가죽을 몸에 두르더니, 마법사가 잿빛 가죽만 보고 그들이 순록을 데리고 온 거라고 상상하게 만들기 위해, 연기 자욱한 오두막 입구 안쪽으로 가서 섰다.

- 이어 잭은 세임케의 목에 손을 얹고 흥정을 시작했다.
마법사의 뾰족한 모자가 홱 움직이고 끄덕이더니 그가 따뜻한 허공에 침을 탁 뱉었다. 하지만 그는 순록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잭은 가격을 올렸다. 그러나 마법사는 주위에 온통 재를 끌어올리고는 으름장을 놓고 소리를 질렀다. 파리들이 눈보라처럼 빡빡하게 날아왔다. 마법사의 털가죽 싸개엔 파리들이 꽉 차 있었다.

- 잭은 거듭거듭 가격을 올렸다. 마침내 값이 한 부셸 가득한 은화에 이르자, 마법사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 그리곤 은화 일곱 부셸로 올라갈 때까지 중얼대기도 하고 마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 다음 핀의 주인은 허리가 거의 부러질 때까지 웃어젖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군지 몰라도 저걸 사는 친구는 돈깨나 쓰겠는걸?

그사이 잭은 세임케를 번쩍 들어 올려 함께 배를 향해 뛰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핀의 마법사가 알지 못하게 순록 가죽은 내내 뒤에다 들고 있었다.

- 마침내 둘은 뭍을 떠나 바다로 나아갔다.
세임케는 너무나 행복해서 두 손을 맞부딪혔고 자기 순서가 오자 노를 잡았다.
북국의 빛이 온통 녹색과 적색으로 불타오르며 머리빗처럼 쏟아져 나와 그녀의 얼굴을 핥고 장난쳤다. 그녀는 그 빛을 향해 말을 걸기도 하고 두 손으로 다투기도 했으며, 맑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혀와 입과 재빠른 손짓을 사용해서 그 빛과 말을 주고받았다.

-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잭의 가슴을 베고 누웠고, 그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까만 머리칼이 바로 그의 위로 흘러내렸다. 손으로 가만히 만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깜짝 놀라 핏줄이 펄떡펄떡 뛰는 한 마리 뇌조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잭은 그녀의 몸에 순록 가죽을 덮어주었다. 배는 육중한 바다 위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나아갔다. 마치 바다가 요람처럼 느껴졌다.
둘은 밤의 장막이 내려올 때까지 쉬지 않고 항해했다. 바다로 돌출한 땅도, 섬도, 멀리 떨어진 섬들에 사는 해조도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돛을 올리고 계속 나아갔다.

 

- <셰홀름에서 온 뱃사람, 노르웨이>
  

러자 일로나는 대대로 사용해 오던 절구가 절굿공이로 한 번 내려칠 때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낡아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고향 집을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오즈모는 절구에 금을 내버렸고 동생이 절굿공이로 두드리자 역시 박살 나버렸다.

- 그다음엔 일로나가 뭘로 핑계를 댔을까? 조상님들이 대대로 건너 다녔던 저 오래된 문지방이 자신의 치맛자락에 휩쓸려 산산조각 부서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집을 못 떠난다고 우겼다. 이번에도 오즈모는 낡은 문지방을 몰래 쪼개서 일로나가 그 문지방을 걸어 넘을 때 치맛자락에 으스러지도록 만들었다.

- 마침내 일로나가 물러섰다.

"우리 조상님들이 더는 나를 붙들지 않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떠날 때가 되었네."
일로나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리본과 조끼와 치마 등등을 환한 색깔의 나무상자에 차곡차곡 넣고 강아지 필카를 데리고 배에 올라탔으며, 오즈모는 동생과 함께 임금님의 궁전을 향해 배를 저어 나아갔다.

- 머지않아 두 사람은 좁고 긴 땅을 지나갔는데, 그 끝에 어떤 여자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사실 그것은 마녀 수예타였지만, 물론 두 사람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날 배에 좀 태워주시구랴!"

마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 "어째, 태워줄까?"

오즈모가 동생에게 물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일로나의 대답이었다.

"저 여자가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저 여자가 혹시 악마일지 어떻게 알아?"
그 말에 오즈모는 여자를 태워주지 않고 그냥 노를 저었다.

 

- 여자는 자꾸 소리쳤다.
"이거 봐요, 배에 좀 태워줘요. 태워달라니까."
다시 한번 멈칫한 오즈모는 동생에게 또 물었다.
"태워줘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
"아냐, 오빠."

일로나는 다시 말했다.

- 그래서 오즈모는 계속 노를 저어 나갔다. 그러자 가련한 여자한테 이 정도의 도움도 안 주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가 어찌나 비참하게도 소란을 피워대는지, 오즈모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일로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배를 뭍으로 가져다 댔다.
마녀 수예타는 곧바로 풀쩍 뛰어 배에 올라타, 일로나에겐 등을 대고 오즈모를 바라보면서 자리를 잡았다.
"아이고, 참 훌륭한 젊은이로군."

수예타는 징징대면서도 아첨을 떠는 어조로 말했다.

"노를 잡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튼튼하고 당당한지! 게다가 이 아가씨는 참 예쁘기도 해라. 내 감히 말하지만 이 처녀를 보면 왕자라도 금세 반해버리겠어!"

- "네가 만약 결백하다면,"

왕자가 말했다.

"독사들이라도 널 해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너에게 죄가 있다면 널 집어삼킬 거야!"

- 한편, 가여운 일로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아래로, 아래로, 깊이 빠져들어 가다가 이윽고 용왕의 궁전에 도달했다. 용왕의 신하들은 그녀를 정중하게 영접하고 위로했으며, 그녀의 비탄과 아름다운 자태에 감동을 받은 용왕의 아들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일로나는 육지의 세계를 그리워하기만 할 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전 오빠를 다시 보고 싶어요."

일로나는 눈물을 흘렸다.

- 그들은 육지의 왕자가 오빠를 독사로 가득한 방에 처넣었으며, 일로나 대신에 마녀 수예타랑 결혼해 버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일로나는 뜻을 굽히지 않고 육지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너무나 참담하게 애원했던지라, 마침내 용왕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좋다, 그럼! 계속해서 사흘 밤, 네가 저 위 물 밖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내가 허락하노라. 하지만 그 후에는 절대로 다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스러운 바다의 보석으로 일로나를 꾸미고, 목에는 커다란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었으며 양쪽 발목에는 기다란 은발찌를 달아주었다. 물속에서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발찌는 은방울처럼 오묘한 소리를 냈으며, 십 리 밖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할머니, 지금 하신 말씀이 옳아요. 제가 일로나를 구출하도록 좀 도와주세요. 넉넉하게 보상해 드릴게요."
"그렇담, 얘야, 바로 행동에 들어가야 하겠다. 왜냐하면, 일로나가 한 말을 들었는데, 오늘 밤이 용왕한테 바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은 마지막 밤이거든. 지금 당장 대장장이한테 가서 튼튼한 쇠사슬 하나와 커다랗고 단단한 낫을 만들어달라고 해. 그리고 밤이 되면 저 바닷가로 나가 배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자정이 되어 은방울 소리가 들리고 그 처녀가 파도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면, 쇠사슬을 그녀의 주위에 던져서 재빨리 자네한테로 잡아당겨야 해. 그런 다음 낫을 단호하게 휘둘러서 그녀가 발목에 차고 있는 은발찌를 잘라내라고. 그런데, 얘야, 이게 다가 아니야. 일로나는 지금 주문에 걸려 있기 때문에 네가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면 용왕이 그녀를 온갖 이상한 것으로 둔갑시킬 거야, 물고기, 새, 파리 같은 것으로. 난 잘 모르겠어, 아무튼 어떤 모습으로든 둔갑해서 그녀가 달아나 버리면, 오, 만사가 끝장이란 말이야!"

- 왕자는 즉시 대장간으로 급급히 달려가 대장장이로 하여금 튼튼한 쇠사슬과 묵직하고 날카로운 낫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자 그는 배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기다렸다. 자정이 되자 은은하고 달콤한 은방울 소리가 나면서 일로나가 천천히 파도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다가오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필리, 필리, 귀여운 필카,'

- 왕자는 지체하지 않고 튼튼한 쇠사슬을 그녀의 주위로 던져서 그녀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세차게 낫을 휘둘러 그녀의 발목을 감고 있던 은 발찌를 싹둑 잘라버렸다. 발찌는 땡그랑 소리를 내며 물속 깊이 빠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왕자의 팔에 안겨 있던 처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끈적끈적한 물고기로 변해 몸을 비틀고 꿈틀거리며 거의 그의 손가락에서 빠져나갈 뻔했다. 그가 물고기를 죽여버리자, 오,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겁에 질린 한 마리 새로 변하여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새도 죽였는데, 오, 이번엔 새가 아니라 도마뱀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변신을 거치면서 점점 더 작고 약한 생물로 둔갑하더니, 마침내 자그마한 모기 한 마리만 남았다. 왕자가 모기를 으깨 죽이자, 그의 팔 안에는 다시 사랑스러운 일로나가 안겨 있었다.

- "오, 아름다운 아가씨,"

왕자가 속삭였다.

"당신 흉내를 내고 있었던 수예타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나의 진짜 신부였구려. 갑시다. 당장성으로 가서 그 마녀와 맞닥뜨려야겠어!"
하지만 그 말에 일로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의 왕자님, 아니에요. 거긴 안 됩니다. 마녀 수예타는 저를 보자마자 죽여서 한 입에 집어삼키려 할 거예요. 그 마녀 곁에 절 데려 ..."

- <그의 진짜 신부>

 

- 옛날 옛적 어느 왕에게 일곱 왕자가 있었다. 그는 왕자들을 어찌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언제나 그들이 모두 곁에 있지 않고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왕자들은 항상 부왕의 곁을 지켜야 했다.

- 형제들이 성장하자 그들 중 여섯은 신붓감을 찾으러 길을 떠났다. 하지만 왕은 막내아들만큼은 떠나보내지 않고 곁에 두면서, 형들에게 막내를 위해서도 공주를 찾아 궁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 왕은 여섯 왕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최상의 의복을 하사해, 멀리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왕자마다 엄청나게 비싼 말을 한 필씩 주어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 수많은 왕궁을 찾아가 직접 보고 그곳의 공주들을 만난 여섯 왕자들은 마침내 공주만 여섯을 거느린 어느 임금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토록 아리따운 공주를 여태 본 적이 없었기에, 각자 한 명의 공주를 맡아 사랑의 구혼을 시작했고, 여섯 공주 모두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자 그들은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각자 공주를 유혹하려고 정신이 없던 와중에 왕자들은 고향에 남아 있던 막내 '아셰파틀'을 위한 신붓감 구하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역주 : 아셰파틀, 노르웨이 동화에 많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웅은 흔히 '아스컬라든(Askeladen)'이라 불리는, 말하자면 신데렐라의 남성 버전으로 언제나 한 가족의 막내아들로 나온다.


- 귀향길에 올라 얼마쯤을 갔을까, 여섯 왕자는 아주 가파른 산의 허리를 가깝게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 어떤 거인의 성이 있었다. 거인은 그들을 보자마자 여섯 왕자와 여섯 공주를 모두 돌덩어리로 둔갑시켜 버렸다.

- 부왕이 여섯 왕자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극도의 비탄에 빠진 왕은 살아서 다시는 기쁨 일이 없을 거라고 탄식했다. 그러고는 막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라도 내 곁에 남지 않았더라면, 난 더 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형들을 모두 잃었으니 이 무슨 비극이랴!"

그러자 막내 아셰파틀이 대답했다.

"임금님, 사실 저는 형들을 찾아 나서도 좋다는 허락을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극구 말렸다.

"아니다. 너마저 떠나보낼 수는 절대 없어! 막내왕자까지 잃을 수는 없잖니?"

하지만 막내는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하고 애원했으며, 기어코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부왕으로부터 얻어냈다.

그런데 여섯 형들에게 좋은 말들을 줘버렸던 터라, 남은 거라곤 늙어빠진 말 한 마리뿐이었다. 막내는 그래도 개의치 않고 시원찮은 늙은 말 등에 올라탔다.
"건강하십시오, 아버님."

막내 왕자가 임금에게 인사했다.

"전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형님들까지 저와 함께 돌아올 수 있게 만들게요."

그러고는 떠났다.

- 막내가 얼마나 갔을까, 길 위에 갈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누워 있었다. 얼마나 오래 굶었던지 막내가 다가가도 피해줄 엄두를 못 내는 것이었다.
"아, 친절하신 왕자님, 먹을 것을 좀 주세요. 그러면 왕자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드리겠습니다."

갈까마귀가 허덕이며 부탁했다.

"나도 먹을 게 거의 없는데."

막내가 대답했다.

"게다가 네 모습을 보니 별로 나를 도와줄 형편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지만 척 보기에도 네가 몹시 궁한 것 같으니까 먹을 것을 약간은 주어야겠군."

왕자는 지니고 있던 음식을 갈까마귀한테 나눠주었다.

- 꺾어다가 석판 위에 전부 흩뿌려놓은 다음, 석판을 다시 제자리에 놔두었다.
거인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막내 왕자는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그가 제대로 몸을 숨기기가 무섭게 거인이 들어왔다.
"이크, 이 방에서 웬 기독교인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거인은 다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요, 까치 한 마리가 우리 집 위로 날아와서 물고 있던 인간의 뼈를 굴뚝 안에 떨어뜨리더라고요."

공주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그걸 치웠지만 냄새는 곧장 없어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거인은 더는 묻지 않았다.

-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대문 밖 석판에 꽃을 뿌려놓은 게 누구냐고 물었다.

"아, 그거야 물론 내가 뿌려놓았죠."

공주가 대답했다.

"그래, 무슨 뜻으로 꽃을 흩뿌린 거지?"

거인이 다시 물었다.

"아, 그거야, 내가 당신을 무척 좋아한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그런데 당신의 심장이 그 아래 있다는 걸 알고는 꽃을 뿌려놓지 않을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아하, 그랬었군! 하지만 사실 내 심장은 거기 있는 게 아냐."

- 밤이 깊어 그들이 침실에 들자, 공주는 거인에게 심장이 어디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당신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꼭 알고 싶은 거죠, 하면서. 그러자 거인이 대답했다.

"아, 내 심장은 저기 벽에 붙은 찬장 위에 있어."

옳거니, 우리가 찾아낼 거다, 막내 왕자와 공주는 ...


- <네 심장은 어디다 둔 거야?,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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