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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사랑의 이해(理解·利害)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5. 7. 3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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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혁진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9.04.19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들을 얻는 경로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깊고 꾸준하게 좋아한다면야 인적 물적 경로들이 계속 유지되겠지만- 나처럼 얕고 넓게 깔짝거리는 경우는 관심이 식으면 더는 찾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중 마케팅에 굉장히 적합한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다.

메인 포탈에 노출된 광고 배너, 유튜브나 OTT에서 짧게 스쳐가는 쇼츠나 광고 등이 주된 정보 유입원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고전적인 광고라면 책을 읽다 확장되는 참고문헌 또는 발췌 도서들 정도.

 

그게 <사랑의 이해>와 무슨 상관이냐. 

 

유튜브 쇼츠로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처음 알았고, 어쩐지 자꾸만 떠서 관심이 생겼고, 원작인 소설 <사랑의 이해>부터 찾아 읽게 되었다-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

 

<사랑의 이해>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은 역시 제목일 것이다. 

이해(利害), 또는 이해(理解).

 

사랑이란 감정이 가져다주는 이익과 손해.

또는 사랑이란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둘은 다르지 않다.

 

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해석했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 수없는 이와 해들의 반복이 아닐까 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매력적이어서, 재미있어서, 말이 잘 통해서, 배울 점이 많아서, 여유로운 데이트를 할 수 있어서...

요약하자면 나와 닮아서, 혹은 나와 달라서.

 

내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처럼 상대도 변해간다. 

그렇기에 처음 이끌렸던 부분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랑은 끝이 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거나 휴식기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다양하다.

미움, 원망, 연민, 정, 동정, 동경, 후회, 기대, 미련. 

다채롭고, 또 대체로 끈적한 것들. 

 

그때에 이르러서야 시작을 다시 더듬어볼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깨닫는다. 애초에 사랑이 시작된 이유는 없었다는 것을. 

감정이 먼저 찾아오고, 이유는 나중에 덧붙였다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의 것들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이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경필이나 수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런 일들이 현실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있다는 것만 알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사랑의 이해' 아닌가. 

사랑이란 것을 완전히 이해한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그냥 그럴 수 있었기에- 라는 말 정도로 설명을 덧붙여보고 싶다. 

정당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절망과 지침은 자기 파괴 본능을 자극하게 마련이니까. 

천천히 자살하는 방식으로 술, 담배, 혹은 다른 약물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혹은, 또는.

 

아직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결말은 알고 있다. (나는 스포일러에 그리 예민하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결말이 훨씬 현실적이고 마음에 든다. 

돌고 돌아 결국은 이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꽃들이 만발하던 어느 봄밤에, 즐겁게 읽었었다.

끝.  

 


   

 

- 부지점장은 파란색 플러스 펜으로 상수의 셔츠 주머니 아래를 찔렀다. "뭔데, 너? 너, 너, 뭐냐고?" 허연 입김이 사납게 터졌다.
"아닙니다." 상수는 손을 뒤로 한 채 플러스 펜을 받았다. 지점 뒤 주차장이었다.
"아닌 건 뭐고?" 부지점장은 같은 곳을 쿡쿡 쑤셨다. “뭐냐니까?"
상수는 뒤꿈치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닙니다."
"은행원 편하지? 창구에 앉아 고객이 준다는 돈 받고, 달라는 돈 주고, 웃고 인사하고 그러면 다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꾸!" 부지점장은 다른 손에 움켜쥐고 있던 서류를 상수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 상수는 허리를 숙여 흩어진 서류를 챙겼다. 연초 본사에서 내려온 중금리 대출 상품 판매 실적이었다. 순위별로 이름과 판매 실적이 나와 있었고 플러스 펜이 죽죽 그인 상수의 이름 밑에는 양 과장이 있었다. 상수는 차곡차곡 간추려 부지점장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부지점장은 받지 않고 피식 웃었다. "한 달 반 동안 열개도 안 한 게 죄송할 일이야? 회의 때마다 내가 주의를 드렸어, 안 드렸어?" 부지점장은 다시 플러스 펜으로 상수의 셔츠 주머니 아래를 쑤셨다. "각별히 일 좀 하시라 했냐고, 안 했냐고?"
“죄송합니다." 상수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남들 다 잘하는 거 잘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런 걸해야, 다들 벌벌거릴 때 빤빤하게 하나 해서 보여 줘야 지점 퍼포먼스, 로열티가 된다는 거, 그 잘난 MBA에선 안 가르쳐 주나 보지? 애초에 상품 설계가 글렀네 어쩌네, 후선에서 여직원들 앞에 두곤 그렇게 잘난 척하시더니, 응, 응?" 부지점장은 플러스 펜 끄트머리로 상수의 목덜미를 톡톡 쳤다. 눈빛은 뺨을 그렇게 건드리고 싶은 것 같기도, 어깨를 건드린다는 것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같기도 ...

- 막상 두 사람을 보니 조금 서글펐고 무척 피곤했다. 상수는 양치 도구를 챙겨 들고 화장실로 갔다.
맥없이 양치질하며 상수는 그 일을 되새김질했다. 어떻게든 그날 수영에게 갔어야 했다. 부지점장이 뒤에서 콧김을 내뿜어 가며 눈을 부라리든 말든, 모르겠다고, 그냥 내 돈으로 메꿔 버리겠다 말하고 수영과 만나기로 한 호텔 일식당에 갔어야 했다. 가서 사귀자고, 남자 친구 여자친구 하자고 분명히 말했어야 했다. 이렇게 다 지난 일이 되기 전에. 하지만 그날은 정말 홀린 것 같은 날이었다. 자기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세 명이나 시재 마감이 안된 데다 꼬리를 물어 가며 차례로, 게다가 마지막에 물린 사람이 하필 상수 자신이었다. 재앙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상수는 양치 거품을 내뱉다 말고 거울을 봤다. 허연거품 비벼진 얼굴이 지지리 못나 보였다. 

- 경필은 빈 채를 붕붕 소리 나게 휘둘렀다. "양반이라서 양반이냐. 밑에서 그렇게 머슴질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양반질하는 거지. 어차피 당장 나가도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야. 상가가 둘에 아파트가 두 채라든가 세 채라든가. 그것도 다 인 서울."
"정말?"
"그분은 클라스가 다른 분이에요. 딱 보이잖아. 묵직한 게. 부지점장은 내내후년까지 지점장 못 달면 명단 올라가는 사람이고. 애들이 중학생에 연년생. 집도 일산, 그것도 아마 전셀걸?"
"뭐 한다고 그것밖에 못 한 거야? 그 정도면 못해도 두어 번은 말아먹은 거 아냐?" 상수는 채를 휘둘렀다. 잘 맞은 공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모르지." 경필도 시원스럽게 공을 걷어 올렸다. "확실한 건, 되는 놈은 뭘 해도 되고, 되는 놈이 되자면 밑천부터 두둑해야 한다는 거다. 지점장도 깔고 앉은 게 있으니까 스트레스 안 받고 우량 고객만 상대하면서 실적 올리고, 그게 먹히니까 평판도 더 좋아지고, 평판 좋아지니까 사람들이 더 몰리고, 위에서는 예쁨 받고 밑에서는 충성하고 계속 잘되는 거 아냐. 부지점장은 그럴수록 믿을 건 지점장 하나밖에 없어지니 더 바스락거리기나 할 수밖에 없는 거고. 지점장이 곧 떨어질 끈이라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러자고 이 시간에 연습장 와서 이러고 있는 건데."


- 연습장에서 나와 경필과 헤어지고 상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은행원 생활 아무리 잘해 봤자 장가 잘 가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곱씹었다.
사실 그렇게 보면 수영과 틀어진 것도 잘된 일이었다. 듣기로 수영의 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수영 역시 계약직 창구 직원이었다. 조건으로만 따지면 외모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종현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기고 어리다는 것이 장점일 뿐 아르바이트생이나 다름없었고 본업은 고시생이었다. 떨어지면 쪽박이었고 붙어도 고작 경찰, 연봉에 연금까지 다쳐 준다고 해도 은행원 벌이에 비하면 우스웠다. 솔직히 수영도 알고 있지 않을까? 은행에서 일하면 돈맛을 모를 수 없었다. 얼마나 맵고 짠지, 또 달달하고 상큼한지. 창구에 앉아 있으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맡기러 온 사람과 꾸러 온 사람이 한눈에 꿰뚫려 보였다. 그래, 그런 거겠지. 아직 젊을 때, 시간 있을 때 어리고 잘생긴 남자와 연애 좀 해 보고 싶은 거겠지. 한 달도 안돼 벌써 그러고들 있으니 뻔했다. 얼마나 갈까? 한 달, 석 달? 길어야 반년? 나잇발 얼굴발 다 빠지고 질리면 헤어질 일밖에 없을 터, 어쩌면 수영이 아니라 종현이 먼저 그렇게 할지도 몰랐다. 여자들도 얼굴값 하는데 남자가 왜 안 할까? 더 하면 더 했지.  

- 두 사람이 은밀하게 주고받는 웃음은 매번 상수의 망막을 지졌다. 질투를 느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를 핥기보다 상처 입힌 사람에게 침 뱉기를 택했기 때문에, 상수는 자신의 예정과 박탈감, 패배감을 더욱 고통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수영의 태도는 그 고통을 더욱 부추겼다. 수영은 이전처럼 프린터에 갔다가 상수의 것이 있으면 가져다줬고 돈띠나 클럽처럼 자주 쓰는 소모품도 눈치껏 챙겨 줬다. 하지만 상수가 진상 고객을 간신히 보내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어도 부지점장에게 꼬투리가 잡혀 지청구를 욕 나오게 먹고 난 뒤에도 수영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더는 상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 "무슨 소리냐고요!"
수영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상수를 쳐다봤다. 아무 거리낌 없이, 거의 순진한 눈으로. "남자들은 늘 이렇게 비겁하죠. 세상없이 순한 척, 착한 척, 점잖은 척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 몰리면 반말하고 으르렁거리고 주먹질하려 들고. 벽에든 문짝에든 강아지한테든, 여자한테든. 자기보다 센 남자한테만 빼고, 그렇죠? 비겁도 남자들 본성인가? 아, 종현 씨는 안 그렇던데." 수영은 어깨를 으쓱한 뒤, 고개를 까딱하고 나갔다.

- 수영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는 했지만 공포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뒤는 한번 돌아봤다. 상수는 취식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조금 심했나 싶은 생각이 얼핏 들었다. 사실 상수야말로 만만했다. 만만한 여자보다 더 만만한 남자. 처음부터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한동안 끌렸을까? 수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종현에게서는 연락 온 것이 없었다.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홍 팀장의 해괴한 소리가 있고 종현은 전 같지 않았다. 퇴근 후 연락이 줄었고 수영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자기 전 한 번밖에 연락하지 않는 날마저 있었다. 수영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어쭙잖은 밀고 당기기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 사귄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종현이었다. 의아했지만 수영은 선뜻 동의했다. 그때만 해도 종현은 진지한 대상이 아니었다. 우연히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러자 안 될 건 뭔가 싶어 눈길을 줬다. 자꾸 보다 보니 마음이 갔다. 종현은 훌쩍 큰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하면서도 간결했다. 눈썹은 가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해 부러운 마음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함께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수영은 그때마다 뿌듯했다. 하지만 얼굴 하나 보고 남자를 사귈 만큼 정신없지 않았고 그런 적도 없었다. 제법 생겼다는 남자들도 만나 볼 만큼은 만나 봐 막연한 결핍감 따위도 없었다. 수영은 종현이 달콤한 디저트 같은 남자, 예쁘고 사르르 녹지만 입가 심밖에 안 되는 남자라고 지레짐작했다. 상수처럼 퍽퍽한 닭 가슴살 같은 남자를 잊어버리기 위해 잠시 쉬어 가는.

- 시간이 지나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수영은 종현이 다르다고 느꼈다. 종현은 섬세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진중하고 분명했다. 작은 것 하나도 말했으면 지켰고 세심하게 챙기지는 않아도 서운하거나 의아해할 만한 여지는 결코 남기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들 특유의 재수 없음, 고작 권총 몇 발 땅땅거린 주제에 핵폭탄이라도 떨어 ...

- "요점은 왜 혁신이 필요한가가 아니에요. 우리끼리 아무리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애기해 봤자 시간 낭비밖에 안 돼요. 본사에서 왜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거기서 시작하는 게 맞아요. 주관식 같지만 사실은 객관식인 거죠. 다 그렇잖아요, 우리나라."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한데,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조금 더 정리한 다음에 한번 같이 얘기해 봐요. 아까 얘기한 그거 하 계장님도 알아봐 주시고요. 전 모레오전까지 보낼게요."


- 정신없이 전환하는 화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소리, 넌지시 자기 일정을 주지시켜 압박하는 대화 방식에 상수는 따라가기 급급해하면서도 매력을 느꼈다. 미경은 똑똑하고 강단 있고, 확실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자 식사에 돌입한 모습도 그랬다. 뼈다귀를 참알뜰하다 싶을 만큼 발라 먹었고 감자는 국물을 자작하게 적신 다음 시래기까지 한 조각 더해 흰밥 위에 올려 먹었다. 상수는 보기 좋았다. 자신을 전혀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좀 섭섭할 만큼.  
 
- "정말 저희가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 품평하면 과연 좋게 보실까? 또 표도 그만큼 갈리지 않을까. 은행 생활 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의사 결정이라는 게 항상 무난하게, 아무도 욕 안 먹는 게 되는 거 같고 지점의 선배님들도 거기에 불만이 많으시더라구요. 그러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하는데, 저는 한번 싹 다 뒤집어엎고 새판 짜자고 하면 위에서도 사실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눈치 볼 일 없고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그럴 거 없으니 오히려 반기시지 않을까, 한편 생각해 보면 굳이 이제 와 이렇게 대회까지 하는 것도 사실 그 명분을 챙기려고 그러시는 거는 아닐까,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정말 저희 안이라서가 아니라 위에서 원하시는 게 그런 방향이라면 저희도 그쪽 방향으로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 벌써 다 한 이야기를 뭘 저렇게 장황하고 없어 보이게 할까? 미경은 의아했지만 이내 상수가 왜 그러는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상수가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상수가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에두른 말로 설득하자 분위기가 슬슬 바뀌었다. 미경의 안을 제외하면 그닥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두 알았고 소모전에 지쳐 가던 중이었다. 상수가 체면을 세워 주며 뒷문까지 열어 주자 하나둘 그리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일단 센터장에게 올려나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자리가 정리됐다. 

- 미경의 안은 센터안이 됐다. 상수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미경을 알아 갔다. 미경은 자존심 강하고 집중하면 곧장 빠져드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처구니없을 만큼 허술하기도, 종종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지기도 했다. 상수는 그런 미경을 챙기고 짜증도 무던하게 받아줬다. 미경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이유였지만 실은 수영에게 그렇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수는 미경과 함께 있을 때도 수영을 떠올렸다. 세심하게 맞추고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이 별것도 아닌 일을 왜 그때는 못했을까?  

- "더웠죠?" 여자는 산뜻하게 웃으며 수영을 맞았다. 저택의 높은 천장과 두꺼운 벽을 실감할 만큼 실내는 선선했다.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에서는 장미 향이 은은히 감돌았다. 수영은 구두를 벗으며 벽에 걸린 큼직한 추상화를 살폈다. 유화물감의 질감이 생생한 실물이었다. 여자는 자리를 권한 뒤 경쾌하고 고상한 투로 아주머니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자의 살구색 원피스는 뒤에 상표를 짐작할 수 있는 실밥 장식이 있었고 손목에서 느슨하게 찰랑거리는 가죽 팔찌와 시계도 알 만한 명품이었다. 수영이 탐색하듯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여자는 거실로 나와 밝은 초록색 소파에 앉았다. 들어오면서 혹시 노란색 고양이 한 마리를 보지 못했냐며, 말을 붙였다. 집 근처를 배회하는 길고양이지만 사료도 주고 간식도 주면서 반은 집고양이나 다름없이 돌보는 모양이었다. 홍차와 다과를 내온 아주머니는 쉰쯤, 나이 들어 남의 주방일 하는 사람 같지 않게 맵시 있는 몸매에 옷차림도 간소하고 적절해 보였다. 다과는 유크림이 듬뿍 들어간 일본제 롤과 뽀얀 모찌였다. 모두 비싸고 맛깔스러워 보였다. 찻잔과 접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수영은 민망할 만큼 식욕이 동했지만 홍차만 한 모금 마시고 일 얘기를 꺼냈다.

 

- 수영이 다시 한번 내용을 요약해 주려고 하자 여자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었다. 여자는 직접 상품의 개략을 짚어 가며 수영에게 확인한 뒤 몇 가지를 질문했다. 모두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여자는 이런 상품을 잘 알았고 투자자로서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수익과 지불해야 할 비용, 부담해야 할 위험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영은 더욱 긴장하면서도 한편 뿌듯했다. 정말 어엿한 은행원, 개인 자산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여자의 태도가 그것을 확인시켜 줬다. 여자는 수영을 팔러 온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물을 수 있는 것만 물었고 요구할 수 있는 것만 정확히 요구했다. 사소한 조건을 확인할 때도 까다롭게 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확성을 기한다는 투였고 상의 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에도 못 미더워 망설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한 번 더 신중히 검토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 저택을 나온 수영의 얼굴은 피곤하면서도 밝았다. 지금까지 맞아 본 고객 중 가장 어려운 고객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보람 있는 고객이었다. 멋진 일이었다. 매일 창구에서 만나던, 그 많은 돈을 한 푼 두 푼 아귀처럼 벌어들이느라 찌들고 시달린 사람들에게는 없는, 기품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들과 자격증 준비할 때나 읽은 전문 용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도.

- 수영은 시간에 맞춰 지점 뒤로 나갔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미경의 흰색 렉서스가 서 있었다. 지점장의 차가 국산 차였기 때문에 미경은 어쩌다 차를 가져오면 그곳에 세웠다. 수영이 다가서자 짙게 선팅한 유리창이 내려갔다. "어서 와." 미경이 몸을 기울이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에 감색 정장 바지 차림, 동그란 머리에 잘 어울리는 동그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서는 유칼립투스 향이 났다. 창밖은 난숙한 봄이었다. 무성한 잎들이 물 오를 대로 오른 연둣빛, 이제 며칠만 지나면 여름의 녹색으로 바뀌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주택가 담벼락에 얹힌 장미 덤불들이 탐스러웠다. 들뜬 마음에 수영은 몇 마디 말을 붙여 봤다. 미경은 평소 몰고 오지 않는 차에, 초밥을 싸들고 소풍까지 가는 길인데도 어딘지 시무룩해 보였다. 역시 수상을 못 한 것 때문일까. 수영은 직접 위로하는 대신 미경의 흰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걸이를 칭찬했다. 짧고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조금씩 엇갈리듯 맞물린 줄에 가운데 펜던트는 너도밤나무 잎사귀였다. "목걸이 너무 예뻐요, 언니. 디자인도 독특하고 색도 특이하구, 뭘로 만든 거예요?" 
미경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금속공예 하는 친구가 만들었는데 친구가 선물하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그 자리에서 이런 건 사야 한다고, 우겨서 샀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미경은 한 손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순동이라 되게 부드러워, 진짜 낙엽처럼 갈라져 있는데 이렇게 막 구부릴 수도 있다?"

 


- 미경은 웃었다. "괜찮아. 친구도 일부러 이렇게 펴기도 하고 구부리기도 할 수 있게 한 거거든. 걔 작업 테마야. 이렇게 100개를 만들어 100명에게 가면 10년 뒤, 20년 뒤 각각 어떤 모습일지. 예쁘고 연약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변하는지, 그게 궁금한 거지. 시간이 지나면 이 목걸이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다고."

- 미경은 씩 웃으며 운전대를 감아 모퉁이를 돌았다. "이거 마음에 들어? 가질래?"
"네?" 눈은 이미 웃고 있었다.
"내 일도 많이 도와줬잖아. 고마워서 그래."  

- 차는 넓고 펀펀한 산 중턱의 공원 앞에 멈춰 섰다. 오래된 부촌의 공원답게 잘 늙은 벚나무가 입구에 널따란 그늘을 펼치고 있었고 굵직한 메타세콰이어가 주위를 옹위하듯 촘촘히 둘러서 있었다. 입구를 지나 말끔하게 관리한 운동 기구를 지나면 높게 흙을 돋운 곳에 번듯하게 지은 팔각정이 서 있었다. 미경은 수영을 데리고 팔각정위로 올라갔다. 주택과 정원들이 굽어보였다. 수영의 감탄에 미경은 씁쓸히 웃었다. "나도 이런 데 공원이 있을 줄 몰랐어. 밤낮없이 불려 다니다 보니까 알았지. 무슨 비밀인지 자기 집도 은행도 카페도 아닌, 꼭 여기서 봐야겠다는 영감님들, 사모님들이 있더라. 지점장이 그러는데 여기는 방범 카메라도 없대. 부잣집 앞뒤, 골목 어디 가나 하나씩 다 걸려 있는데 여기만.”

 

- 봄볕의 손끝이 기분 좋게 살갗을 간질였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연초록 나뭇잎들이 느긋하게 흔들렸다. 미경이 단골집에서 포장해 온 초밥을 꺼내자 수영은 탄성을 터뜨렸다. 성게 알은 두툼히 올라와 있었고 새우는 자숙이 아닌 분홍색 생새우였다. 간장 절인 전복과 직화로 바삭하게 구운붕장어, 마블링 치밀한 참치 뱃살, 루비처럼 붉은 참치 등살에 카스테라처럼 익힌 계란구이도 있었다. 아까워서 못 먹겠는 마음과 어서 한 점 한 점 음미하며 ... 

- 반면 상수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수영이 뒤통수를 한 대 날려 주고 싶을 만큼 무심했다.
단지 둔감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수영은 상수가 자신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몸짓, 슬쩍 흘리는 혼잣말에도 상수가 반응해 왔으니까. 하지만 미경의 태도도 문제였다. 저렇게 속을 내보일수록 상대방은 도망갈 궁리만 하기 마련이었다. 외모, 능력, 성별과 무관하게 관계라는 것이 그랬다. 끌리면 끌어와야지, 끌려가서는 안 됐다. 더구나 남자들이란 배은망덕한 사자나 다름없지 않나. 대책 없이 내주기만 하다가는 어느 날 더 내줄 것이 없을 때 내주던 손부터 먹어 치우려 든다. 덮어 놓고 안 내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연애란 순전히 길들이기의 문제, 누구를 만나든 결국에는 언제 어떻게 왜 내주고 받을지 서로 약속하고 그것에 적응해 나가는, 험난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대상이 가장 중요했다. 굶주린 사자는커녕 미어캣도 못 되는 상수 같은 남자는 애당초 제외해야 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미경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미 마음을 줬는데, 갖고 싶은 남자가 가져지지 않아 약 올라 죽겠는데 어느 여자가 다른 여자 말 따위를 들을까.  

- 모르고 나왔다가 은행 명함에 눈빛이 바뀌던 여자도 있었다.
후, 상수는 한숨을 내쉬며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남자라는 종자들이 얼마나 지겹고 추잡스러운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뒤로 자기들끼리 모여 수영을 얼마나 말로 벗기고 핥아 댔나. 침이 질질 흐르는 것같이 더러운 소리들을 너도 그러고 싶잖냐는 눈빛으로 지껄여들 댔나. 모른 척 스치고 만진 뒤 그걸 자랑처럼 떠들기는? 같은 남자가 듣기에도 한심한 수작질을 부려 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기는 또? 위에서 압박이 내려와 조심들 한다고 했지만 말 그대로 걸리지 않게, 조심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아직도 유튜브에는 본사에서 제작한 홍보영상이 걸려 있었다. 후궁이 된 텔러들이 임금인 신입 사원 눈에 들려 아양을 부리고 서로 암투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 여자들한테는 말로 안 되겠다고 말한 것이 혀를 깨물고 싶게 창피했다. 난감하니까, 불리하니까, 넘겨 버리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수영을 여자들 중 하나로 만들어서 논점을 뭉개고 대화를 끊은 것이었다. 상수 자신이 뒤에서 지껄여 대는 남자들 중 하나가 아니듯, 당연히 수영도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어디 사는지, ...

- 미경이 예약한 이탈리아 식당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전시에 관해 이야기했다. 미경은 좋았던 작품들을 분명히 집어서 왜, 어떻게 좋았는지, 자코메티의 다른 작품이나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까지 하면서 구체적으로 말했다. 상수는 몇 마디 보태 보려다 포기했다. 아는 척 정도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신 사진과 서술 자료를 보면서 나름대로 떠올려 본 자코메티를 얘기했다. 젊어서 쉽게 얻은 아내에게서 평생 도망치려고 한 예술가, 일본인 친구에게 자기 아내와 사귀어 보라고 부추기까지 하고 임종마저도 아내가 아니라 그때쯤 빠진, 어리디 어린 술집 여자가 지키게 한, 예술적으로는 거장일지 모르지만 가정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한 남자. 미경은 의외로 아주 재미있어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었던 데다 보는 내내 찜찜하던 것을 상수가 시원스럽게 긁어 주는 것 같았다.

- 상수는 전시 기획자가 자신들 같아서 감정 이입까지 되더라는 말도 했다. "누가 보더라도 불륜이고 늙어 바람나 조강지처 내팽개친 건데, 아주 세계적, 역사적 거장이시니 전시도 이렇게 크게 벌여놨으니까 곧이곧대로 쓰지는 못하겠고, 결국 이런저런 사정들 다 조사해서 쓰기는 세세하게 다 써 놓고 제목은 사람들 좋아하게 거장과 뮤즈, 예술적 영감의 탄생, 부활, 그런 말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참 이 사람도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더라구요. 우리랑 별로 다를 거 없는 팔자구나 싶고." 
"완전 우리네요. 제목이랑 기획 의도는 거창하게 뽑고 정작 뒤로는 카톡 찍어서 여기 들어가서 앱 받아 줘, 회원가입해 줘, 이거 하나 들어줘, 저거 하나 사 줘, 그런 걸로 실적 만들고 그 실적으로 고과 받고, 아, 갑자기 서글프다."

- 이탈리아 식당은 빌라들이 연립한 주택가의 반지하에 있었다. 둥그스름한 천장 때문에 아늑한 동굴 같았다. 미경이 언니라고 부르는 여자가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전채부터 후식까지 주문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크루아상도 앙버터도 사지 않은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갔다니, 서로 이렇게나 잘 맞다니. 사실 두 사람 모두 만나기 직전까지 걱정하던 바였다. 막상 봤는데 어색하고 대화가 자꾸 끊기면 어쩌지? 두 사람은 홀가분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부딪쳤다.

- 음식은 아주 좋았다. 상수가 지금까지 먹어 본 곳 중 최고였다. 많은 곳을 가 본 것도 아니고 가격도 최고였지만. 맛있게 먹는 상수를 흐뭇하게 보면서 미경은 몇 해 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를 했다. 차를 빌려 몇 시간씩 운전하던 시골길, 완만한 구릉이 나른하게 이어지고 포개지면서 그리던 풍경, 긴 장대로 후려치며 올리브를 수확하던 모습, 바람조차 상큼하던 레몬 과수원과 드넓게 펼쳐진 포도원. 그리고 한낮의 호텔 테라스에서 새하얀 밀라노 대성당을 보며 아삭아삭 베어 먹은 사과 한 알과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아르노 강변에서 파르스름한 어둠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마신 차가운 맥주 한 병.

- 상수는 작년에 혼자 다녀온 터키 이야기를 했다. 무심코 구둣솔을 주웠다가 돈 뜯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얼른 구두닦이에게 던져 주고 도망쳤던 일화, 관광책을 보고 있을 때 접근해 온 남자를 미친 척 따라갔다가 한국전에 참전한 할아버지를 만나 셋이서 포커 친 일화, 처음 본 물담배를 멋모르고 쭉쭉 빨았다가 카페에서 10분쯤 정신을 잃었던 일화. 웃긴 남자로만 보일까 봐 아야소피아를 등지고 본 석양도 이야기했다. 축축하고 드세던 바닷바람, 쇳물처럼 붉게 물든 바다, 구름이 말갈기처럼 나부끼던 하늘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 상수는 비워진 와인병 너머로 미경을 봤다. 어느새 두 병째였다. 와인과 촛불에 물든 미경의 뺨은 유리 등피처럼 반드럽고 투명했다. 미경은 탁자보 위에 얌전히 올려진 상수의 왼손을 봤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채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잘 조여진 기계 관절을 연상시키는 손. 이전부터 자꾸 눈이 가던, 미경이 좋아하는 모양의 손이었다. 미경이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별말 없이 웃었다. 눈을 떼지 않은 채 와인 잔을 들었다.

- 두 사람은 그다음 주 주말에도 만났다. 이른 저녁을 먹고 극장에 가 영화를 봤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다. 조금 심심한 듯하면서도 끝맛이 달착지근한 영화가 끝나고 출구로 나오면서 상수는 자연스럽게 미경의 손을 잡았다. 미경도 손을 잡아 왔다. 연인들이 들어찬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은 꼭 붙어 서로 마주 봤다. 어딘지 풋풋한 내음이 느껴지는 웃음. 자꾸 매만지게 되는 손. 미경은 손을 뺐다가 다시 잡았다. 깍지를 꼈다.

- 어울린다고 확인하고 믿어 왔는데, 이제 이 선을 넘기만 하면 되는데. 알 수 없는 채 상수는 감색 바지 아래 미경의 발목을 봤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움켜쥐고 싶게 희고 가느다란 발목이 자주색 가죽 구두 위에 드러나 있었다.

- 파고들듯 안겨 왔지만 다급하거나 갈구하기보다 도망치고 싶은 듯했다. 상수에게서, 상수에게로. 미경은 상수를 두려워하면서도 원했다. 상수가 자신에게서 쾌감을 찾기를, 상수를 통해 자신 역시 그 쾌감을 향유할 수 있기를. 상수는 욕구와 망설임을 다시 한번 동시에 느꼈다. 맹렬해진 욕구만큼 망설임도 이제 팽팽하고 또렷했다. 자신이 왜 망설이고 뭘 망설이는지 상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미경이 아니었다. 미경은 다다르고 싶던 결승선이 아니라 지금껏 달려온 궤도의 어느 지점, 무수히 지나온 분기점에 불과했다. 멈춰 서야 했다. 그나마 지금이 멈춰 설 수 있는 유일한, 최후의 찰나였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 정남향 아파트의 아침 빛은 부드러웠다. 상수는 일어나 북유럽풍의 화장대를 봤다. 견고해 보이는 나무 장식대에는 여러 전시에서 사 모은 도록과 소품들이 있었고,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상수가 선물한 자코메티의 작품 모형도 놓여 있었다. 벽에는 유럽에서 찍은 여행 사진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미경은 새벽에 잠시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화장대 의자에 잘 개켜진 셔츠와 바지가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남의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상수는 고개를 돌려 미경을 봤다. 슬립을 입고 잠들어 있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가 맑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상수는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감은 눈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앳돼 보였다. 상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다음에는 좋은 여자. 어른들이 누누이 얘기하고 부모님이 불경처럼 외며 등골 휘게 깔아 준 철로가, 궤도가 진즉부터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 지난밤 느닷없이 떠오른 분기점의 의미가 그것이었다. 선택인 듯 보이지만 실은 모두 궤도 위에 이미 존재하는, 안전하고 예정된 과정의 매듭에 불과한 것. 후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상수는 소파에 느긋이 등을 붙였다. 비로소 수영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제대로 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지금껏 그래왔듯 밝은 장래, 좋은 미래로 쭉 뻗은 궤도를 미경과 나란히 달려 나갈 일만 남아 있었다. 다들 개성, 특색, 자기만의 어떤 것이나 남들과는 다른, 하고 말들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장면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엇비슷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지라면 왜 굳이 험한 길을 택하거나 그런 길을 택한 척 가식을 떨어야 할까. 검증된, 효율적이고 안전한 궤도를 놔두고, 상수는 피식 웃었다.  

- 종현은 수영이 빨래를 개고 있을 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향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 모습이 구부정하고 무거워 보였다. 종현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왔냐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수영은 화가 나기보다 미안했다 
종현은 젖은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물기가 장판에 뚝뚝 떨어졌다. 수영이 일어서며 새 수건을 건넸지만 종현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저녁은?" 수영이 말했다.
"불 좀 꺼 줄래요?"
"저녁은?"
"배고프면 뭐라도 꺼내 먹어요. 별거 없지만."
수영은 참았다. 목소리를 차분히 가다듬어 말했다. "미안해, 내가 내 잘못이 큰 거 같아."
종현은 대답이 없었다.

- 수영은 다가가 종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시험 떨어진 거 때문에 많이 뭐라고들 하셨지? 힘내자. 우리. 나도 이제 잘할게. 내가 더 잘하고 최대한 도와줄게. 방해하지 않을게."
“안 갈래요?" 종현은 얼굴을 이불에 묻은 채 말했다.
수영은 못 들었다. "자기는 돼. 되는 사람이고 돼야 하는 사람이고, 나는 믿고, 믿을 수 있어. 그러니까 기운 내자, 응? 주변 사람들 말에 너무 상처받을 거 없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나도 우리 엄마 반대 무시하고 세 번 만에 여기 된 거야. 자기는 이제 두 번이잖아. 내년에는 돼, 틀림없이 될 거야. 점수도 아슬아슬했잖아. 내가 정말 미안해, 나만 아니었으면, 이번에 분명 됐을 텐데."
종현은 고개를 돌려 수영을 봤다. "오늘은 가 주지 않을래요?"
수영은 말보다 얼굴에 놀랐다. 운 얼굴이었다.
종현은 수영을 똑바로 봤다. "미안한데, 가면 좋겠어요. 오늘은, 가 주면 좋겠어요."
"뭔데? 무슨 일인데? 뭐가 있었어? 심한 말 들었어? 아니면 다른 얘기라도 들은 거야?"
종현은 맥없이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영이 더 묻고 사정해 봤지만 답이 없었다.
수영은 화가 나 일어났다. 아무 말도 없이 불을 끄고 현관문을 열었다. 종현은 끝내 일어나지도, 잘 가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 월요일인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수영은 종현에게서 연락받지 못했다. 지점에서 단둘이 마주칠 때도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까딱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서로 남모르게 웃음을 주고받던, 고객용 책상 모서리 자리에도 서지 않았고 수영이 보안 당번이던 금요일 아침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 수영은 자기 잘못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일요일에만 보기로 한 원칙을 어긴 뒤, 종종 평일에도 종현을 찾아갔고 부르기도 했다. 늦은 시간까지 통화를 길게 끌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종현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종현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보여 주고 싶어서, 어떤 날은 혼자 누운 밤이 막연히 싫고 무서워서. 시험 결과가 나오자 수영은 진심으로 미안하고 후회했다. 왜 참지 못했을까.

- 시들기 시작한 나뭇잎들, 차고 메마른 바람이 불어왔다.
상수가 미경과 사귄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며칠 뒤, 수영은 침대에서 종현의 배를 베고 있다가 물었다. "우리도 얘기할까. 사귄다고?"
종현은 잠시 답이 없었다. "뭐 하러요. 이제 와서."
"왜? 이제쯤 됐으니까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가볍게 꺼내 본 말이었기 때문에 완강한 반대가 기분 나빴다. 수영은 침묵했다.

- "나랑 사귄다고 말하기 싫어?"
종현은 다시 답이 없었다. 긴 한숨을 흘렸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수영은 일어나 앉았다. 종현의 눈을 봤다.
종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상수와 미경처럼 봐주지 않을 거라고, 결국 잘생긴 청경 꼬신 텔러, 예쁘장한 텔러 후린 청경이 될 뿐이라고.

 

- "흥미롭게 지켜들 보겠죠. 얼마나 갈까, 어떻게 될까?"

수영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게 뭐냐고, 사람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종현은 차갑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서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는 게 사람들이에요. 자신과 다를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을수록 더 뻔뻔하게, 무자비하게." 종현은 일어나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호텔에서 일할 때 객실 정비부 여자애랑 사귀었어요. 나보다 네 살 어렸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였어요. 애기처럼 생겨서는 누구한테든 네네 하면서 잘해 주고 뭘 시켜도 그저 열심히 하는, 엄청나게 착하고 미치도록 순진한 애였어요. 내가 걔랑 사귄다고 말했을 때 팀장이 대뜸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메이드 복 입히고 해 봤냐는 거였어요. 다른 일 때문에 호출에 늦으면, 더럽게 쪼개면서 둘이서 몇 호실에서 나왔는지 CCTV 찾아본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요. 나만 당한 것도 아니에요. 걔랑 같이 일하던 언니들은 걔한테 내 사진 보여 달라고, 같이 돌려보자고 그랬어요." 종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걔가 정말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맨날 자기 따돌리고 힘든 일, 더러운 일 미루던 언니들이 좋겠다, 부럽다 해 주니까 나랑 같이 찍은 사진, 나만 찍은 사진, 나 모르게 찍은 사진까지 전부요.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 그렇게 했어요. 거짓말 같죠? 그쵸?" 수영이 다 그런 건 아니라고,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 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것을 들었다면 종현은 어떤 얼굴을 할까.

 

- 종현이 맞았다. 아무도 종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종현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조차 없었다. 종현은 흥분한 목소리로 그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많든 적든, 이상하든 이상하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나 걔나 바닥이었기 때문에, 어리고 임시직이니까 그딴 짓을 당했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난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항상 눈치 보면서 객장 정리하고 지점장님, 부지점장님 한 번씩 객장 둘러볼 때마다 조마조마하다고요. 청소 아주머니 있고 내 일 아니란 걸 알지만 그렇다구요. 그게 밑바닥에 있다는 거예요."
종현은 아직도 그 밑바닥에 있었다. 수영이 모르는 어떤 일과 함께. 수영은 지점 정문 앞에 섰다. 유리문 너머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종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 그날 저녁, 아직 학원에 있을 시간이었지만 종현의 원룸은 불이 켜져 있었다. 수영은 다시 골목길을 나왔다. 편의점에 들러 소주 두 병과 종현이 좋아하는 달달한 과자 두어 가지를 샀다. 
종현은 말없이 현관문을 열어줬다.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종이 박스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옷과 책들이 널려 있었다. 일부는 이미 박스 안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 수영은 침을 삼켰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나한테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안 보고 끝내자고?"
종현은 담담했다. "동생은 아르바이트 세 개 뛰어요. 평일에는 맥줏집, 주말에는 낮에 결혼식 부페랑 저녁에 고깃집. 편의점 알바도 한번 못해 봤어요, 걘. 시급이 낮아서. 걔가 학교를 그만두겠대요. 엄마는 다리 때문에 일을 못 하니까 자기가 생활비 벌겠다고." 종현은 억지로 웃었다. "엉망진창이에요, 우리 집은 바닥인 줄 알았는데, 끝도 없나 봐, 바닥이란 건." 
막막한 침묵이 고였다. 수영은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머그잔에 든 소주를 마셨다. 다시 반을 채웠다. 술내 나는 한숨이 더웠다.

- "어쩌겠어요.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죠. 그래 봤자 친구들 어학 연수, 해외여행 다 다녀오도록 캐리어 한번 못 사보고 끝나는 대학 생활이겠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하잖아요. 남자도 고졸이면 힘든데, 여자애가 더 말해 뭐해요. 간호대, 나와서도 그렇게들 고생한다지만 그래도 나와야죠. 나와야 아무것도 없는 우리한테 그만둘 데라도 하나 생기는 거잖아요." 종현은 빨간 눈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나보고 계속하래요. 아들이, 장남이 잘돼야 한다고. 어차피 여자애는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인물 반반하니 누구라도 데려갈 거라고, 그것도 걔 있는 앞에서 그러는 거예요. 더 웃긴 건이 속도 없는 게, 자기 괜찮으니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정말 괜찮다고, 이번에 거의 됐으니 다음번엔 꼭 될 거 아니냐고. 내가 뭐라고 했을까요? 뭐라고 해야 했을까요?"
수영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쌍욕을 해 줬어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대학교도안 나와서 네 주제에 어디 가서 뭘 할 거냐고, 돈 없고 배운 거 없고 얼굴이나 반반한 여자애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해 돈 버는지 그렇게 궁금하냐고."
수영은 종현의 어깨를 때렸다.
"난 다 봤어요. 겪었어요. 군대 가기 전 노래방에서 새벽 알바도 하고, 룸살롱에서 웨이터도 했고. 나보고 호스트 바에서 같이 일하잔 형도 있었어요. 나 같은 얼굴이 잘 먹힌다면서." 종현은 맥없이 웃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나도 거기까진 안 가요, 정말 가기 싫어요. 그래서 호텔에, 전에 일하던 형님도 봤고, 자리 알아봐 주신댔어요. 임시직으로 있다가 나중에 티오 나는 대로 정직원 해 보는 걸로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얘기가 됐어요."

- "왜? 일해도 나는 볼 수 있잖아. 우리 만나는 건 아무 상관없잖아."
종현은 차분히 수영을 봤다. "아니에요.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시험도 안 볼 거라면서!"
"그래서 못 보는 거예요."
"또 무슨 말이야, 그게."
"수영 씬 청원경찰이나 호텔 접객부 말단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에요. 더 낫고 더 나은 사람 만날 수 있는 여자예요."
"그걸 왜 네가 결정해!"
"결정한 게 아니에요. 내가 만약 아무 꿈도 없는, 그냥 청원경찰 알바나 하러 온 애였으면 수영 씨 날 만났을 거예요? 어쩌다 셔터 올릴 때 마주쳐서 도와주고 해장국 한번 같이 먹었더라도, 얜 그냥 그런 애구나, 그러고 말았을 거잖아요. 똑같이 나도 수영 씨 엄두 못 냈을 거고요."
"내가 지금 사랑하는 건 너야."
"나도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수영 씨예요."
"그럼 되잖아.”
"그러니 된 거죠." 종현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만해요, 우리."

-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당장은 호텔로 간다지만 계속 붙어 있을 자신이, 솔직히 지금까지도 없어요. 적응 못 해서 결국 다른 길을 찾을지도 모르겠고, 또 시험 다시 본다고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서 어떻게 뭐가 될지, 정말 나도 너무 모르겠어요." 종현은 수영을 바라봤다. "그런 미래에 수영 씨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너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수영 씨도 나도 결국 못 견딜 거예요."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내가."  

- 수영은 핸드폰의 사진을 봤다. 지난여름 갤러리 카페에서 종현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종현은 에곤 실레의 자화상 아래에서, 수영은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 아래에서 고개를 튼 채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그림 속 인물처럼 두 사람의 모습도 닮아 보였다. 젊고 아름다웠으며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도도했다.

- 종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종현과 함께 살면서, 종현이 보증금을 내려보내 동생 등록금으로 쓰게 하고 집세만큼 아껴 어머니께 보낸다면 적어도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었다. 종현을 설득할 말도 있었다. 말한 대로 바닥이라는 건 끝이 없는데, 시험부터 관뒀다가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할 텐가? 바닥에 바닥이 없다면 추락에도 끝이 없다. 한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끌려다녀야 한다. 아무것도 없어질 때까지, 탈탈 털려 가면서 가진 것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가지고서 버텨내야 한다. 악착같이 붙들고 버텨서 차라리 뺏길지언정 순순히 내줘서는 안 된다. 제법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가는 꼴을 보면서 수영이 몸으로 배운 것이었다.

 

-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차바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조차 한번 데려오면 돌이킬 수 없다. 종현과 함께 간다는 것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었고 종현이 쥔 것을 놓지 않게 한다는 것은 대신 수영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먹고 사고 쓰던 것을 한 등급씩 낮추고 한 푼 두 푼 쓰는데도 세 번 네 번씩 생각하는, 수영이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더는 어리숙하지조차 않은 채 할 수 있을까? 창구에 앉은 수영은 번호표를 보며 걸어오는 고객을 봤다. 옷차림, 가방과 구두, 눈빛, 걸음걸이를 훑으며 남자가 여신이 아니라 수신 쪽 용무임을 파악했고 역시나 남자는 일정 연봉 이상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적금 상품을 문의해 왔다. 수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조금만 유심히 보면 돈을 맡기러 온 사람인지, 꾸러 온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돈이 사람을 만드니까. 매일 그 돈이 만든 사람들을 보고 파악한 것에 맞춰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수영의 일, 실적이었으니까.

 

- 수영은 자신 없었다. 종현을 사랑했지만, 그날 밤 뭐든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런 자신이 너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날 밤 이후, 종현은 한결 차분해졌다. 더는 자리를 비우지도, 짙은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채 딴생각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정중히 고객들을 대했고 노인과 아이들에게 특히 친절했다. 퇴근하면 일하게 될 호텔 근처에 고시원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했다. 야간에 총무를 보는 대신 숙박을 제공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지점장에게는 그 자리까지 구해지면 말할 예정이라고, 머릿속에 이미 순서도를 다 짜 놓은 것처럼 말했다. 나쁜 놈, 혼자 잘난 척 멀쩡한 척은 다 하고! 하지만 그 마음을 모를 수도 없었다. 생활이, 돈이 정리가 안 된다면 마음이라도 정리해야 했다. 한 번도 집을 손 내밀면 잡아 줄 곳이라고 생각해 보지 못한 자신이나 종현 같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처럼 쉽든, 쉽지 않든 그래야 하는 일. 그러니 이렇게 끝내야 했다. 종현의 말대로 끝내는 것이 맞았다.  

- 미경은 그제야 웃었다. "정말 너무 좋아서 힘들 정도야. 떨어져 있고 싶지가 않아. 주말마다 헤어지는 게 너무 싫어, 아쉽지도 않고 정말 그냥 싫어. 월요일보다 더. 살짝이 아니라 좀 많이 미쳤나?"
수영은 미경을 물끄러미 봤다. 예뻤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어떤 화장으로도 만들 수 없는 윤기와 향기가 흐르고 있으니까. 씁쓸한 마음이 차올랐다. 나도 저랬을 텐데, 아니 저보다 훨씬 반짝이고 향기로웠을 텐데.

"그래도 좀 겁나지 않아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그만둘 수가 없는 거잖아요. 끝까지 가야 하는 거잖아요. 끝이 날 때까지."
"사실 그게 제일 고민이야. 우리 상수 씨," 미경은 민망한 듯 혀를 쫑긋하며 웃었다. "상수 씨 마음은 어떤지, 함께한다는 걸 얼마나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지. 그 개념만 일치하면 다 괜찮을 것 같아. 집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살면 되고, 애초에 부모님이 신혼집이라 생각하고 마련해 주신 거였으니까, 살림도 그렇고. 차도 상수 씨 차만 바꾸면 될 거 같고,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라 좀 오래됐거든." 미경은 잔을 들었다. "새삼 어른들 말씀이 맞구나 싶어. 두 사람 마음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부족할 것 없는 사람들이 왜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걸까, 이제 좀 알 것 같아." 

- 참 달랐다. 결혼이, 함께 산다는 것이 단지 마음과 성격의 문제이기만 하면 되다니. 짜증이 나면서도 부러웠다. 수영은 웃었다. 울기는 싫으니까. "테스트해 봐요. 같이 살 만한 남잔지 아닌지."
"여행은 벌써 몇 번 다녀왔어. 잘 맞아. 꽤 힘들 때도 서로 배려해 주고, 오래 걷는 것도 둘 다 좋아해. 다니다 맛있어 보이는 데 들어가서 먹고 쉬고, 그런저런 입맛, 취향들 다 잘 맞는 편이야."
"여행은 여행이고, 얼마쯤 같이 살아 본다든가, 그럴 수 있잖아요."
"동거 같은 거? 난 그런 거 싫더라.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 왜 결혼도 안 한 사람들이 결혼한 사람들처럼 사니?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수영은 입을 다물었다.

- "그럼 잔에 소금 말고 설탕을 묻혀 달라고 해야죠. 시큼하고 달착지근하게."
"그래야겠다. 넌 뭘로 할래?"
뭘 마실까, 뭘 마셔야 이 아린 속이 덜해질까. "마티니로 할래요. 올리브 말고 레몬 트위스트로, 드라이하게."
"그건 내 술인데." 미경은 장난스레 눈을 흘기고 바텐더를 불렀다. "진 마티니, 레몬 트위스트로 드라이하게 하나, 그리고 마르가리타 하나, 그렇게 할게요. 마르가리타는 소금 말고 설탕 묻혀서."
"백설표 정백당으로 듬뿍요." 수영은 교태 부린 웃음으로 바텐더를 봤다. 그래 보고 싶었다.

- 수영은 턱을 괸 채 조명을 받고 있는 술병들을 바라봤다. 바텐더는 한쪽에서 셰이커를 흔들었고 재즈 트리오의 경쾌한 즉흥연주가 허공을 맴돌았다. 갑작스레 취기가 몰려왔다. 문득, 수영은 미경에게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 중인지, 자신과 종현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지금 자신이야말로 그 대책 없는 낙천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 허무맹랑한 것에 기대서라도 종현을 붙잡고 싶다고, 정말 이렇게 놓치고 싶지는 않다고 모두 말해 버리고 싶었다. 펑펑 울어 버리듯.

- 미경이 새로 더한 크리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자리로 돌아왔다. 수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 드라이 마티니는 아주 썼다. 솔잎 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왔고 레몬 트위스트인데도 신맛은 향뿐이었다. 모르지, 취해서인지도. 수영은 쓰게 웃었다. 삶이 너무 달콤해서 술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귀족과 신사 숙녀들의 술. 수영은 크고 둥근 마르가리타 잔의 설탕을 핥고 있는 미경을 보다가 마티니 잔을 내려놨다. 다시 입에 대기도 싫었지만 끝까지 다 마실 작정이었다. 얼른 이 자리를 끝내 버릴 수 있게. 그런 다음 종현에게 갈 것이다, 택시를 타고.

- 종현을 붙잡을 작정이었다. 놓아야 한다고, 그래서 놓아 보내려고 했지만 더 꽉 움켜잡을 작정이었다. 대책 없는 낙천 따위가 아니라 그래야 하는 것이니까. 종현에게 들려주려 했던 말은 기실 수영 자신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가진 것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가지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가지고서, 끝까지 버텨 내야 했다.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게, 차라리 빈손이라서 앞을 볼 수밖에 없게. 그것을 일깨운 사람은 미경이었다. 쓰고 불쾌하게. 진실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슬프지는 않았다. 종현이 더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끝장이 나는 그 끝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을 만큼.

- "양쪽에 주말 끼면 9일이잖아. 그러면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쉬면 어떨까 해서."
"왜 갑자기?"
"요즘 많이들 한대. 비행기표랑 호텔비를 집에서 쓴다고 생각하는 거야. 넉넉하고 편하게. 이동 안 해도 좋고... 생각해 보니까 서울에 안 다녀 본 곳도 많길래."
상수는 망설였다. "생각 좀 하고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혹시, 좀 그래?"
"꼭 연차 써야 할 일 있는지 한번 보려고."
"알았어. 어차피 서울에 있는 거니까, 어지간한 일은 중간에 보면 되고. 긍정적으로 검토 부탁해요, 하 계장님.”
"그런데 꼭 9일이나 해야 하는 거야?"
"너무 길어? 좀 그런가?"
그렇다고 하면 이야기는 길어질 것이고 미경은 결국 토라질 터였다. 좋거나 싫은 성향의 문제를 미경은 부쩍 자신에 대한 애정과 배려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었다. "아냐. 여튼 이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대리님."

- 한겨울, 서울은 매일 갑갑한 미세 먼지 하늘이었다. 어쩌다 걷힌다 싶으면 어김없이 한파. 싸매고 껴입어도 욕 나오게 추웠다. 외근 다니는 친구들은 지점 안에 앉아 있으니 팔자 늘어졌다고 부러워했지만 사실 그만큼 퍼지고 둔해지는 기분에 체중도 불어나 있었다. 상수는 어디 먼 남쪽에, 적도 가까운 곳에 가서 일주일쯤, 아니 사나흘 정도라도 푹 쉬다 오고 싶었다.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곳에 가서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걸어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히터 바람이 아닌, 진짜 훈훈한 바람을 맞으며 낯선 길을 지치도록 걸으면. 밥시간 상관없이 배고파지면 어디 들어가 쌀국수나 꼬치구이를 시켜 먹고 나와서 어슬렁어슬렁 걷고 또 걷고. 그러다 다리가 좀 팍팍하다 싶으면 깔끔해 보이는 마사지점 들어가서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쯤, 선선한 에어컨 바람 쐬며 비몽사몽 전신 마사지 한판 받아 주고, 저녁 되면 관광객 없는, 현지인들만 바글바글한 식당 찾아가서 사람들 제일 많이 먹고 있는 걸로, 서너 가지 넉넉하게 시킨 다음 병뚜껑이 하얗도록 차가운 병맥주도 하나. 꽝꽝 언 유리컵에 맥주 살살 부어 쭉 들이켜면서 담배 한 개피 피워 물면 아, 얼마나 좋을까?

 

- 그렇게 다녀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미경은 아무리 맛있는 식당이라도 허름해 보이는 곳은 꺼렸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자주 쉬어야 했고 인적이 드물거나 현지인들만 다니는 길은 싫어했다. 기념품 하나를 사도 백화점이나 번듯해 보이는 편집 매장에서만 샀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새벽에 잠깐 자고 나오는 곳도 최소한 프랜차이즈 호텔이어야 했다. 위생과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곳에서만 미경은 안심하고 먹고 자고 사고 걸을 수 있었다. 불만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미경이 고르는 곳은 안락하고 쾌적했다. 까탈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계산도 선뜻 먼저 했다. 선선히 양보하고 배려하면 그만큼 미경 역시 다정하고 세심하게 자기를 챙겼다. 요컨대 미경의 뜻을 따르는 것은 늘 최선이자,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왜 가끔씩 그러기가 싫을까. 왜 눌리고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까?

- 퇴근하고 집에 온 상수는 그렇게 하자고 메신저로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여행과 달리 서로 더 깊이 알아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며 한번 잘 지내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미경은 하트 이모티콘을 빽빽하게 날려 보냈다.

-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결혼은 일찍 하고 싶었고 작년 런던 지사에 석 달간 파견 근무 다녀온 뒤로 더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해외 지사에 주재원으로 나가 근무하려면 반드시 기혼이어야 했다. 집에서 눈치를 주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 휴가를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 미경은 상수를 데리고 강남 중심가에 있는 대형 마트로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 농장에서 갓 날라 왔다는 듯 나무 궤짝에 실린 유기농 사과와 배가 보였다. 탐스러운 레몬과 포도는 마대자루를 씌운 나무 광주리에 넘칠 듯 담겨 있었다. 지푸라기로 만든 둥지에는 당일 낳았다는 유정란이 다 팔리고 두 알만 남아 있었다. 냉장 진열대 쪽으로 가자 하얀 냉기 너머 여느 마트에서는 볼 수도 없는 식용 꽃과 향신채들이 놓여 있었다. 수산물을 손질해 파는 곳에서는 러시아 대게와 방어, 문어와 광어가 넓게 부려 놓은 얼음 위에 마취당한 것처럼 싱싱하게 죽어 있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상수는 어느 사이 떨어진 미경을 찾았다.

- 미경은 장 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꼼꼼히 내용물의 상태와 원산지, 첨가제를 읽으며 필요한 것을 담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달라 보였다. 카트나 유모차를 밀며 쇼핑 중인 다른 여자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예쁠 뿐 아니라 잘 가꾸고 단장했다는 인상까지 주는 여자들 속에서 미경은 아무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코트, 가방, 구두, 머리 모양, 이런 곳에서 장 보는 것이 일상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무심한 표정까지 모두. 이럴 줄 알았으면 좋은 걸로 차려입고 나올걸. 은행에서 입는, 서로 작업복이라고 빈정거리는 정장 차림에 하필 구두조차 늦게 일어나 대충 신고 나온 것이었다. 상수는 여자들과 함께 장 보는 남자들을 곁눈질했다. 모두 인상이 뚜렷했다. 귀엽든 활동적이든 진중하든 분명해 보이게 입고 쓰고 신고 들고들 있었다. 그 남자들은 어떤 생활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었다. 상수가 살아 보고 싶은, 미경과 함께한다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생활.

- 상수는 미경이 골라 온 것들을 계산대에 올렸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 금액은 옆구리를 걷어차는 발길질 같았다. 상수는 신음을 내뱉는 대신 지갑을 꺼냈다. 다른 계산대의 남자들이 그러듯.

- 집은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앞으로 9일이나 함께 지낸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미경은 사 온 것들을 정리하며 자기가 준비할 테니 일단 씻고 한숨 돌리라고 말했다. 상수는 잠깐 생각한 후에 같이 만들고 같이 먹자고, 그런 다음에 같이 쉬자고 말했다. "그럴까, 그럼?" 무덤덤한 척 말했지만 미경의 입술은 기분 좋게 끝이 올라가 있었다. 상수가 예상한 대로였다.

 

- 이럴 때 왜, 미경은 그냥 같이 하자고 말하지 않을까. 배려하는 사람이면서 배려받는 사람도 되고 싶은 걸까.
묻지는 못했다. 조용히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 미경은 즉석 밥으로 만든 전복죽에 문어 카르파초, 크래커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루콜라와 앤초비를 얹은 카나페를 만들었다. 상수는 재료 포장이나 자투리를 치우거나 설거지거리를 바로 해결했다. 주방장과 보조 주방장이 된 듯 말장난도 하고 괜히 물을 튀기거나 잘라 낸 문어 다리를 슬쩍 빼다 목덜미에 대 미경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난도 치면서. 재미있었다. 광고나 리얼리티쇼 속의 신혼부부가 된 것 같았다. 텔레비전으로 볼 때는 가식이고 거짓말이라고 피식거렸지만 직접 해보니 재미나고 즐겁기만 했다.

- 준비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미경은 와인 냉장고에서 빈티지 소테른 와인을 꺼냈다. 포도를 삭혀 만든 황금색 와인이 잔에 채워지면서 달콤하고 화사한 향기를 피워 올렸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워킹데드>를 봤다. 상수는 그중 몇몇을 지점 사람에 빗대 미경이 배를 잡고 웃게 만들었다. 일요일에는 대청소를 했다. 상수는 미경의 키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쓸고 닦고 치웠다. 미경과 함께 침대와 소파, 서랍장 배치를 바꿨다. 월요일에는 갤러리와 박물관을 둘러봤고 화요일에는 폭설이 내려 집 안에서만 지냈다.

- 세차게 내린 눈이 얼어붙은 한강을 뒤덮었다. 강 건너 늘어선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도 눈발에 가려 회색 윤곽으로만 보였다. 한강 공원은 산책로도 자전거 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벌판이었다. 상수에게는 이 아파트에서 처음 보게 된,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폭설은 다음 날도 이어졌다. 묵직한 눈송이가 끝도 없어 쏟아져 내리며 보이는 모든 것을 두껍게 뒤덮었다. 속보를 되풀이하는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창문 앞 탁자에서는 미경이 내린 하와이코나 커피가 김을 올리며 식어 갔다. 상수는 미경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이 어른거리는 창문 밖에서 세상은 희게 적막했다.

- 폭설이 지나자마자 강추위가 왔다. 미경이 패딩 코트를 사고 싶다고 해 두 사람은 함께 백화점에 갔다. 미경은 한번 훑어본 다음 두어 가지를 골랐다. 한 번 더 입고 자기 것을 점찍은 다음 상수에게 하나 골라 보라고 말했다.
"사 주게?" 상수가 농담처럼 물었다.
미경은 왜 안 되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었다.

"됐어, 뭔 날도 아닌데. 골랐으면 얼른 가자."
“나랑 같은 걸로 하나 맞춰서 입자. 내가 고마워서 그래."
"고마울 게 뭐라고, 됐어.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상수는 미경의 양어깨를 잡고 살며시 밀었다.

- "여기 건 아니잖아. 나랑 잘 지내 줘서, 내가 정말 고맙고 좋아서 그래. 사 주고 싶단 말야."
상수는 내키지 않았다. 2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받는 것도, 나중에 그만한 선물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위축감이라고 말하기도 싫은 위축감을 느끼며 상수는 고르는 척했다.
"아니 그런 조끼 같은 거 말고."

미경은 굳이 상수를 코트와 점퍼가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 실랑이 끝에 상수는 미경이 골라 주는 것을 입었다. 막상 입어 보자 괜찮다, 됐다 하던 입이 쏙 들어가듯 다물어졌다. 두툼히 올라온 목은 든든하면서도 편안했고 무게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지퍼를 올리자 금세 땀이 배어 나올 것처럼 따뜻하기까지 했다. 과연 비싼 데는 다 비싼 이유가 있는 법인가. 상수는 자청해 몇 가지를 더 입어 봤다. 매번 가격표를 확인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이 선물을 기꺼이 받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 "이거 괜찮지 않아? 어떤 것 같아?" 고르고 고른 것 중 하나를 입고 상수는 미경을 봤다.
미경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볼수록 실망을 감춘다는 표현이 더 맞는 표정이었다.
상수는 다시 거울을 봤다. 좋은 것 같은데,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미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게 더 낫지 않을까?"

- 이번에는 상수가 실망을 감추는 표정이 됐다.
"이것도 잘 어울리는데, 난 아까 그게 우리 애인이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길이도 아까 딱 좋았고 지금 날씨에도 더 잘 맞고, 춥잖아, 무지무지."
상수는 미경이 말하는 옷을 다시 한번 입어 봤다. 남색 패딩 코트였다. 색상도 형태도, 팔 옆에 큼직하게 붙은 브랜드 로고도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거울 안의 모습이 너무 얌전하고 착실하게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은행원 같달까.
상수는 자기가 고른 옷을 한 번 더 입어 봤다. 카키색 패딩 점퍼였다. 엉덩이 조금 위까지 내려오고 로고는 왼쪽 가슴에만 조그맣게 있었다. 어깨에는 채도를 맞춘 갈색 스웨이드가 덧대져 있었다. 거칠고 강한 느낌을 주면서도 촉감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웠다. 한 바퀴 몸을 돌려 봤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집에 있는 진한 색 청바지, 갈색 스웨이드 부츠와 함께 입으면 더 근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미경의 얼굴이 아니라고 웅변하는 중이었다.

- "“그래, 이게 더 마음에 드네." 상수는 미경이 골라 준 것을 잡아 들었다. 미경의 선물이었으므로, 남은 나흘을 평화롭게 보내고 싶어서. 딱히 마음에 아주 안 드는 것도 아니었고.
상수가 바란 대로 미경은 기뻐했고 남은 나흘은 평화롭게,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롭게 지나갔다.

- 일요일 저녁 상수는 운동복에 미경이 사 준, 얌전하고 착실하고 어느 모로 보나 은행원 같은 패딩 코트를 걸친 다음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분리수거를 한 다음 한쪽 구석에 서서 그제 저녁 슬그머니 나가 편의점에서 산 전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층층이 불 켜진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고작 9일이었는데 9년 동안 산 집처럼 풍경이 익숙했다. 상수는 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런 것이 갖고 싶던 행복일까. 결혼한 선배, 상사들이 권태로운 한숨과 함께 발음하던 행복. 상수는 첫날 마트에서 본 남자들을 떠올렸다. 세련되고 뚜렷한 인상 속의 그 남자들도 실은 이런 행복 속에 살고 있던 걸까?  

- 종현은 수영과 함께 살기로 했다. 속내는 복잡했다. 수영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했지만 한 번 더 시험을 봐 기어이 합격해 내고 싶은 마음도 절실했다. 수영이 어느 때보다 고맙고 사랑스러웠지만 똑똑히 마주 보게 된 자신의 무력은 혐오스럽고 무서웠다. 경계는 불분명했고 그래서 경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시험에만 합격한다면 모두 좋고 행복할 수 있었다. 수영도, 식구들도, 자신도.

- 뒷수습은 어렵지 않았다. 지점장은 젊고 잘생긴 종현을 계속 정문 옆에 세워 두고 싶어 했다. 한소리 크고 길게 하기는 했지만 결국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는 듯 계속 일할 수 있게 했다. 호텔에서 일하는 형은 내심 종현의 부탁이 번거롭던 차였다. 종현의 결정에 반색하며 진심 부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여자 친구 덕 제대로 보네. 역시 남자도 카바가, 이게 좋아야 한다니까." 손을 얼굴 아래위로 경박하게 흔들며 말했다.

- 수영은 대출을 내 보증금을 올려 잡고 월세를 낮췄다. 전자 건반을 사려고 수개월째 모아 온 돈은 큰 침대로 바꾸는 데 썼다. 종현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애써 고맙다고 말했다. 수영을 위해서, 한편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수영의 집으로 들어가던 날, 비워진 베란다를 보자 더는 그 말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수영이 덤덤히 말했다. "인터넷에 올려서 입양 보냈어. 화분 예쁘다고, 잘 키워 준다고 그랬어. 괜찮아."

- 수영이 벌이에 비해 크고 비싼 이 집을 택한 이유는 그 화분들 때문이었다. 반지하 방이나 다닥다닥 붙어 서서 창이 있으나 마나 한 집에서는 키울 수 없는 것들. 수영은 시들시들하다가도 한 번씩 흠뻑 물을 주면 푸르고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그것들을 보면 자신도 그렇게 푸르고 싱싱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온몸이 찰흙 덩어리가 된 것처럼 피곤할 때 한 번씩 매만져 향기를 쥐고 맡아본다던 레몬밤과 라벤더, 금괴라도 얻은 듯 좋아하며 지점장에게서 받아 온 꼬리난초, 어느 일요일 아침 누가 꽂아 놓고 간 듯 봉긋 솟아오른 제라늄의 빨간 꽃봉오리를 보며 함께 웃던 일도 기억났다. 수영이 맛있게 한 끼 만들어 먹자며 똑똑 따서 찬물에 씻을 때 퍼지던 로즈마리와 바질의 청신한 향은 종현도 처음 알고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미안해요." 종현이 말했다.

- 그 밖에도 자잘한 변화가 많이 있었다. 비용은 모두 수영에게서 나왔다. 종현은 자신의 무력이 수영에게까지 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있었다. 시험도 더 좋아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파탄나 더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것이었다. 종현은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러진 발목이나 뒤틀린 팔꿈치를 보는 것처럼 명백했다.

- 새벽에 일어나 근처 공원까지 달리는 것으로 종현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공원에서는 턱걸이,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같은 운동들을 횟수와 개수를 맞춰 했다. 어지간한 비나 눈 정도는 무시하고 매일 했다. 체력 검정이 있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 따스한 물줄기가 기분 좋은 압력으로 쏟아졌다. 베르가못과 바질 향기 섞인 샤워 거품이 개운하게 씻겨 내려갔다. 상수는 물을 잠갔다. 상큼하고 알싸한 수증기가 나른히 내려앉았다. 어느 사이부터 즐기게 된 것이었다. 상수는 머리를 말리고 몸을 꼼꼼히 닦았다. 미경이 샤워 후 몸에 물기 남는 것을 질색했다. 상수는 젖은 수건으로 물이 튄 벽을 닦고 배수구에 감긴 머리칼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처음에는 남의 집이라 조심스러워했던 것인데 미경이 호들갑스럽게 칭찬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좋아할까, 싫어할까.

-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렇게 지낼 곳이 없을 테지만 수영은 모르는 척 묻지 않았다. 친구와 밥이라도 좋고 맛있는 곳에서 먹으라며 10만 원을 억지로 쥐어주면서 죄책감을 묻었다.

- 나흘 동안 수영은 편안하게 바빴다. 옷장과 소파의 위치도 바꿨고 묵은 빨래와 청소까지 혼자 해치웠다. 꽤 먼 곳에 있는 대형 마트까지 가서 느긋하게 장을 봤다. 명란파스타와 목살 스테이크를 해 먹고 달콤새콤한 시리얼을 대접 가득히 우유에 말아서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를 새벽까지 연속으로 다시 봤다. 일어나고 싶어질 때까지 침대를 뒹굴거리며 늦잠을 잤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드는 아침 공기와 새소리가 처음 듣는 것처럼 싱그러웠다. 종현과는 가끔 문자메시지만 주고받았다. 잘 있는 모양이었고 재미있는지 별말도 없었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 일요일 오후, 수영은 벼르고 있던 책장을 정리하다가 미국 회계사 시험 교재를 꺼냈다. 그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는 종현에게도 아직 말한 적이 없었다. 은행 1년 차 때까지 네 번 봤고 모두 떨어졌다. 은행 일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마지막이 가장 절박했지만 점수는 그동안 본 것 중 제일 낮았다. 하지만 이따금 책을 펴 봤다. 한 번 더 시험을 보고 싶었다. 원서 접수는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니까. 집에서는 이제 자리 잡았으니 시집가라며 선 자리를 갖다 대기 시작했고 은행에서는 지금 지점장이 오면서 정신없이 이것저것 헤집어 댔다. 수영 자신도 월급 쓰는 재미에 팔려 있었다. 동대문을 돌며 옷과 구두를 사고 홈쇼핑에 나오는 속옷과 가방을 홀린 듯 결제하고, 중고 명품 사이트에서 새 제품이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 덥석덥석 6개월 할부로 긁었다. 다 부질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가져온 것보다 버린 것이 더 많았다.

- 그나마 이 집이 돈 쓴 것 중 가장 가치가 있었다. 대학생, 취업 준비생 때는 꿈도 못 꾸던 집, 작지만 베란다가 있고 앞뒤 다 트여 마음 놓고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날이 좋으면 멀리 서울의 불빛이 아스라히 보이기까지 하는 언덕배기 건물의 8층.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계절이 바뀌어 바람과 풍경이 달라질 때는 더욱 그랬다. 이 집 덕분에 종현과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종현을 잡아 줄 수 있었다. 잘한 일이었을까? 그때 종현을 놓아줬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종현이 좋았다. 종현을 사랑했다. 종종 호텔 방으로 겉돌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최대한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상황은 지금이었다. 떨어져 있자 오히려 회복이 되고 있는.

- 종현이 붉어진 눈을 치켜떴다. "그래! 그렇게 한심해. 한심한 남자 새끼야, 몰랐어? 그래서 먹여 주고자 주고 공부까지 시켜 주는 여자 친구 있는데 이러고 있어. 아버지는 요양소 침대에 누워 있고 엄마는 건물 계단에 제대로 굽혀지지도 않는 무릎 꿇어 가며 남 오바이트 해 놓은 것까지 걸레질해 닦고 여동생은 휴학하고 돈 번다고 화장품 가게 앞에서 마이크 차고 샘플 돌리는데 정신 못 차리는 그런 새끼야. 몰랐어? 네 애인, 네 남자 친구라는 개새끼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고!" 
수영이 부르짖었다. "닥쳐! 닥치라고! 내가 지금 그 말했어? 그런 이야기 하고 있었어? 나쁜 새끼야, 이 비겁한 새끼야!"

 

- 수영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종현은 서 있었다. 맞았다. 너무 아팠고, 아프지 않았다. "결국 같은 말이야. 나 같은 놈한테 무슨 선택이 있어? 고작 한두 번 객기나 부리는 거야. 그래, 나도 고시 한번 쳐봤지. 나도 경찰 간부가 돼 보려고 했어. 남들이 소방관이나 순경, 동사무소 공무원이 되려고 할 때, 나도 시도는 해 봤어. 노력도 좀 했어. 결국 그 소리가 내가 어깨에 찰 견장인 거라고. 내려오는 동아줄은 하나야. 나보다 못난 놈, 잘난 놈 수백수천이 그 동아줄 하나 붙잡아 보자고 이러고 있는 거고.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못나고 잘난 게 아니야. 바닥이야. 디디고 선 바닥!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 떨어지면 어디로 굴러 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 종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난 뭐가 될까? 이것도 못 되는 난 도대체 뭐가 될 수 있을까!"

- 수영은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울어 내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뒤죽박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전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종현이 말하는 세상이 무섭도록 똑똑히 보였다.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곳에서 도망쳐 지금 직장을 잡았다. 후회하고 미련이 남았지만 그 세상이 무서워서, 다시 나가기 끔찍해서 더는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 과장과 마 대리가 한 짓 따위 수도 없이 겪고 모른 척 삼켜 가면서 견뎌야 한다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 ... 

- 사랑, 믿음, 정, 어떤 말로도 고정할 수 없는 것이 세면대의 비눗물처럼 나선을 그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영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아무것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얼굴이 되어 갔다.

- 문이 열리는 급한 소리로, 몰고 들어온 공기의 흔들림으로 수영은 상수가 온 것을 알았다. 고개를 돌리자 걸어오는 상수가 보였다. 상수는 웃고 있었다. 기대를 확인했으면서도 아직 실감하지 못하겠다는 듯 순진하고 무구한 웃음, 이곳에서 종종 봤고 그때마다 난감하던 그 웃음이었다. 하지만 다가오면서 웃음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옆에 선 상수는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차분하고 오만한 미소, 기꺼이 손 내밀어 입 맞추게 해 줄 마음이 드는 남자의 웃음. 
상수는 수영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시원스럽게 마셨다. 울대뼈가 기운차게 꿈틀거렸다. 술잔을 내려놓은 상수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나가자. 더 좋은 데로 가자." 상수가 말했다. 수영은 웃었다.

- 미경은 페타 치즈에 엔초비를 올려 구운 바게트를 와삭 베어 먹었다. "여긴 정말 끝내줘. 정말이지 너무 맛있다. 어쩜 이럴까?"
아담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너머에서 수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맛을 음미했다. "그쵸? 엔초비도 맛있고 빵도 누룽지 맛 나게 바짝 구웠고. 미리 예열해서 정확한 온도에 시간 맞춰 딱 구워야 이런 맛 나오는데, 여긴 정말 제대로 하네요. 잘하는 집인 거 같아요."
"파스타랑 메인도 괜찮겠지?"
"그렇겠죠?" 수영은 웃었다. "안티파스티 똑바로 하는 집이 파스타나 메인을 대충 할 리 없으니까."
"그래, 젤라토집에서는 바닐라 먹어 보고 커피집에서는 드립이나 에스프레소 먹어 보면 답 나오지."
"맞아요. 기본 잘하는 집이 응용도 잘하더라구요. 사실 그 반대가 이상한 거잖아요."

- 미경은 와인 잔을 들었다. 수영과 가볍게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좋다, 참. 오랜만에 이렇게 너랑 미식회 하는 것도 좋구, 오늘 너 기분 좋아 보이는 것도 좋구."
수영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 웃어. 너 웃는 게 얼마나 예쁜데 마음이 많이 쓰이더라. 종현 씨도 종현 씨지만 네가. 벌써 1년 넘게 사귀었는데 네 마음은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괜찮아요. 종현 씨 열심히 다시 공부하고 있고 저도 저대로 잘하고 있어요. 처져 있기만 한다고 뭐가 되나요. 더 해야죠. 뭐라도."
"당연하지. 네가 누군데.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하잖아."
"잡초처럼 밟혀도 밟혀도 다시 살아나니까?"
미경은 어색하게 웃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 "민들레쯤으로 해요. 잡초들 사이에서도 오똑 피어서 봄바람에 뽀얀 홑씨 태워 날려 보내는. 그래 봤자 또 잡초들 속에서 피겠지만."
미경은 괜히 더 웃었다. "민들레는 무슨. 너 정도면 최소 수선화지. 먹자, 저기 우리 올리브튀김인가 보다. 오늘은 맛있게 먹고 마시자. 딴 거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계산도 내가 할 테니까 우리 더 시키자. 먹고 남기도록 시켜보자." 미경은 잔을 들었다. "자."

- 자리가 끝나고 미경은 좀 걸었다. 배불리 먹었고 많이 웃고 떠들었는데 뒷맛이 안 좋았다. 수영이 아닌, 다른 사람과 밥을 먹은 것 같았다. 미경은 자신의 빈 목을 쓰다듬었다. 더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잘한 일 같았다.

- 가을의 밤거리가 헐거웠다. 바람은 이제 서늘하다 못해 쌀쌀했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곳마다 조락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수영은 택시를 잡을까 머뭇거리다가 조금 더 걸었다. 코트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누런 신문지 같은 플라타너스 낙엽이 구두에 밟혔다. 미경은 상수에게 전화했다. 금방 받았다.
"이제 끝났어? 좀 늦었네."
"전화도 안 하고, 문자도 없고, 우리 애인은 걱정도 안 되나?" 그냥 하는 말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난 뒤 상수는 느낌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어쩌면, 그저 안정기에 접어든 것인지도 몰랐다.
"밥 먹는다고 해서, 일부러 안 했지."

- "그래?" 수영은 상수의 눈을 봤다.
"진짜. 너한테는 다 얘기할 수 있거든. 잘난 거, 못난 거 그런 생각 안 하고, 이런 척 저런 척 안 해도 되고." 미경이 떠올라 상수의 표정이 씁쓸해졌다가 다시 웃었다. "어설프게 척하면 당장 들키니까."
수영도 웃었다. "내가 좀 그렇지. 여자건 남자건 재수 떠는 꼴은 못 보거든." 수영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한 모금 마시고 상수는 잔을 내려놨다. "그래서 네가 좋았지, 널 참 좋아했지." 촉촉한 눈으로 수영을 봤다.
잔을 비운 수영은 싱긋 웃었지만 상수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보자구." 상수는 수영의 잔을 채웠다.
"그러자구." 수영은 자작하려는 상수에게서 소주병을 넘겨받아 채워 줬다.

- 상수는 잔을 받았다.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수영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뉴스에서 본 오피스와이프, 오피스 허스밴드 관계로 여겼다. 옆자리에서 함께 일하면서 어렵거나 난감한 상황이 닥치면 거들어 주기도 하고 다독여 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관계. 미경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수영에게는 할 수 있었고 미경에게서는 듣지 못할 말을 수영에게서는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미경에게도 이전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수영에게도 이전보다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와 있든 모두 개운하게 즐거웠다. 

 

- 공부는 잘돼 갔다. 대학원 때까지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던 것이라 수월했고 생활이 안정한 덕분인지 집중도 잘됐다. 상수는 별일 없으면 일찍 퇴근해 대학교 도서관의 열람실로 갔다. 대략 9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재장전을 하면서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12시가 지나 경비업체 직원들이 한 바퀴 둘러보고 정문을 잠갔다. 한 시간쯤 더 하다가 나갈 때 상수는 잠긴 정문을 일부러 흔들어 보고는 옆문으로 나갔다. 든든하게 잠겨서 꿈쩍도 하지 않는 유리문이 오늘도 한눈팔지 않고 견고하게 보낸 하루를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피곤하지만 가벼운 걸음으로 어둑한 교정을 걸어갔다.

 

- 미경은 토요일 하루만 만났다. 하루 마음 놓고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미리 재고 따지느라 지칠 것 없어 좋았다. 청담동에 가서 초밥을 먹거나 한남동에서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는 영화나 전시를 봤다. 이른 저녁을 휴식 시간 막 끝난 인기 식당으로 가 줄 서지 않고 먹었고 저녁에는 대개 공연을 봤다. 미경이 좋아하는 오페라나 뮤지컬이었고 가끔 미경 친구의 독주회가 있으면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갔다. 고전음악을 몰라 상수는 연주회가 하품이 날 만큼 지루했지만 끝난 뒤 함께 대기실로 가서 연주자와 사진 찍는 것은 좋아했다.

- 12월 마지막 한 주는 함께 호텔에서 보냈다. 멋진 생활이었다. 5성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함께 공부했다. 미경도 자극받았는지 프랑스어 공부를 다시 하는 중이었다. 작고 정갈해 보여서 가끔 일본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미경이 프랑스어 발음을 능숙하게 하면 상수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당장 침대로 업어 가고 싶었다. 그래도 오후까지 공부하며 저녁을 기다렸다. 호텔 수영장에서 올라와 음악을 틀고 와인을 마시다 서로 몸을 매만졌고 입을 맞췄다. 상수가 미경의 풍만한 곳을 움켜잡고 미경이 상수의 목을 끌어당기면 신호가 됐다. 상수는 미경에게 진입했다.

- "나보다 한참 어린 새끼가 피식 쪼개면서 그러더라. 아, 일단 받으시라고, 받고 하신 다음에 다른 데 가서 뻥튀기하면 되잖냐고. 자기네들이랑 했다고 하면 자잘한 회사들이 하고 싶다 줄을 설 건데, 왜 그런 걸 갖고 고민하시냐고."
상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사실 다 그렇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돌아가는 거잖아요."
하하, 선배는 웃었다. "그게 잠깐은 그렇게 돼도, 곧 망하는 거야. 우리만 한데 다 그렇게 망하는 거라구. 걔 말대로 줄 서지. 그런데 그렇게 줄 서는 데 중에 멀쩡한 데가 몇이나 있을 거 같냐? 없어. 없으니까 자잘하게, 다들 구멍가게 하고 있는 거야. 밖에서는 결제 안 되지, 안에서는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고 아우성에 축축 처져들 있지. 그렇다고 하지 말자고 말할 수가 있나. 아무리 내가 단가 후려치는 그 짓거리하기 싫어서 회사 때려치우고 나왔다 해도 망할 수는 없는 거 아냐. 채찍질하고 휴일에도 마감 돌린다고 나와라 전화하고, 그러다 아끼던 놈, 믿던 놈 하나둘 회사 나간다고 나오면 미안하기보다 화부터 나고, 화내다가도 쩔쩔매면서 조금만 더 해 보자고 빌고 있고, 집에 돌아오면 왜 이러고 사나 싶고, 그렇더라구, 그렇게 되더라구."

 

- 선배는 잔을 비웠다. 
상수도 잔을 비웠다. 선배 잔을 채워 주고 자작했다.
"그러니 너도 바짝 해. 딴생각 말고, 드라마 대사처럼 나오면 전쟁터도 아니고 지옥이야. 후려치고 후려 맞고 안 밟히려고 밟고 그러다 난데없이 더 세게 밟히고. 아사리 판이야." 선배는 맥주잔을 들었다. "정, 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장가가기 전에 하든가. 우리 마누라도 안 그랬는데 변하더라구. 자꾸 변하더라구. 뭐, 나도 똑같구. 밖에서 깨지기 시작하면 집까지 다 깨지는 거지. 그렇게 돼, 사는 게."
상수는 수영과 종현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랬다, 다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 선배는 피식 웃었다. "아예 든든한 집에 들어가든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안 그랬잖냐, 정말. 남자 새끼 어디 여자덕 보려 드냐고, 내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 내 걸로 못 만들면서 뭘 한다고, 그러고 다녔잖냔 말이야. 아버지, 엄마, 고모들까지 뜯어말리는데 지금 마누라랑 기어이 결혼까지 했고. 그런데 힘드니까, 진짜 돌아버리게 힘드니까, 후회가 되더라고. 그때 나 좋다던 여자, 정말 잘 살았거든. 평창동 집에, 벤츠에."
상수는 묵묵히 들었다. 미경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미경을 떠올리는 것이 싫기도 했다.

- "그냥, 그런 것도 궁금한 거지."
수영은 웃었다. "안 했어. 생눈이야."
"웃긴다. 생눈."
"공부를 별로 안 했거든. 우리 엄마 말로 하자면, 내 죽어 보자고."
"안 하고 뭐 했는데?"
"너무 대놓고 묻는 거 아냐?"
"그런가."
수영은 당황하고 민망해하는 상수가 귀여웠다. "그림 그렸어.”
"어떤 그림? 만화?"
"회화, 드로잉 하고 스케치하고 그런 거. 에곤 실레 좋아했거든."
"오, 점점."
"그림은 더럽게 못 그렸어. 내가 봐도 좀 그랬어. 소질이라고는 없었지. 하면서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했어? 보통 그 나이 때는 아니다 싶으면 딱 하기 싫어지지 않나? 난 라디오헤드 좋아해서 기타 배웠다 석 달 해 보고는 딱 치웠는데."
"내가 못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서 더 했지. 더, 더." 수영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여전히 못 하더라고. 성격만 버렸어. 하하."
 
- 상수는 가만히 들었다.
수영은 잔잔히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말이나 갖다 붙였을 텐데, 그러고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지금 나오는 이 곡 뭔지 알아?"
상수는 피아노 곡이고 연주곡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듣기는 좋은데 좀 처지는 것 같았다. "아씨,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쇼팽, 왈츠, 9번. 부제는 작별의 왈츠."
"아, 그래?" 듣고 보니 심란한 선율이었다. "근데 좀 밝아지기도 하는 것 같네? 여기, 지금 나오는 부분."
"맞아. 회상하는 거지." 수영은 웃었다. "지금 이 부분은 그 회상을 곱씹는 거고, 그러다 다시 또 예뻤던 순간을 떠올리는 거야. 피아노로 치면 이렇게 돼." 햇살 내리는 나무 탁자 위에서 수영의 흰 손이 나비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금씩 빨라져. 박자가 뚜렷해지고, 대리석 바닥을 가로지르는 드레스 자락들처럼 막 움직이다가 음들이 높아져, 서로 이름을 부르는 듯. 한 번, 여기서 한 번 더, 서로 부둥켜 안듯이. 그리고 다시 예쁜 춤곡으로 천천히 내려와, 이렇게 헤어지지 않기로 한 것처럼. 하지만."
구슬프다기보다 먹먹하게 슬픈 선율이 들렸다. "처음 거기네."
"끝이지. 그게 끝인 거야." 수영의 손이 재빠르게 음들을 짚어 냈다. "한 번, 섬광처럼 반짝이지만 그대로 끝이 나고 연극의 암전처럼 곡은 닫히지."
짧은 침묵이 있었다.

"대박! 클래식을 이렇게 들은 건 처음이야. 엄청나게 좋은데? 라디오에 나오는 해설가들보다 훨씬 쏙쏙 들어온다. 그림이 그려져.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상수는 호들갑을 떨어 가며 칭찬했다. 묘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곡이 나오는 걸까, 왜 수영은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상수는 문득 수영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떨칠 수 없었다.

- 먹먹한 선율이 흐르자 아까 느낀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다. 왜 아무 근거도 없는 두려움을 느꼈을까? 왜 관계의 기로에 서 있는 미경을 떠올리기보다 눈앞의 수영이 사라질까 봐 조바심을 느꼈을까?
답은 명료했다. 수영이니까, 수영을 좋아하니까. 어쩌면 사랑하니까. 설명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미쳤다는, 미친놈이 된 것 같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미경보다 잘해 주는 것도, 미경만큼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닌데 수영과 있으면 좋았다. 떨리고 설레고 뿌듯했다. 사랑이라는 그 말이 아주 명료하게, 그 명료함마저 싫을 만큼 진실하게 떠올랐다. 미경에게는 늘 어렵던 그 말이, 농담으로 뭉쳐 넘기거나 의무감으로 발음하던 그 말이. 

- 미경은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있었다. 오라면 두말없이 왔고 가래도 두말없이 갔다. 투정도 부리지 않았고 이따금 내던 괜한 짜증도 없었다.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는 눈빛을 가로등처럼 늘 켜 놓고 있었다. 그럴수록 상수는 더 미경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 자신이 그런 눈빛을 보냈을 때 수영이 얼마나 정 떨어져 했을까, 생각마저 들었다. 스스로 아주 못되고 악랄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만둬지지가 않았다. 일이 없으면 먼저 연락하지 않고 연락을 해도 족족 먼저 끊었다. 

- 본관에서 정문까지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별말 없이 타박타박 걸어 내려가다가 상수는 잠깐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한번 와 보니 좋았다. 옛날 생각도 나고, 별것 아니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화제도 생기고. 하지만 역시 수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빨간 버섯처럼 하나둘 올라오던 여드름 얼굴인 채 인생 뭘까, 되뇌며 걷던 길을 은행원이 돼 예쁜 수영과 함께 걸으니 좋았다. 미경과 왔다면 어땠을까. 연희동으로 과외를 다니며 경영학, 영문학, 법학 3전공에 B학점도 찾기 힘든 미경의 대학생활을 묵묵히 들었을 것이다. 샌드위치 이야기 대신 괜찮게 들릴 만한 일화를 떠올려 보려고 애쓰며.
 
- "성당 다녀?" 상수는 수영의 옆에 다가섰다.
"좋아는 해, 미사포도 예쁘고 미사 볼 때 그 분위기도 좋아하고, 성호 긋는 모습도 아름답잖아." 수영은 성모상을 보고 있었다.
상수는 수영의 손을 잡았다.
수영은 고개를 돌려 상수를 봤다. 아주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상수는 입술을 가까이 했다. 수영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쳤고 망설임이 읽혔다. 상수는 주저하지 않았다.
긴 입맞춤이었다. 부드러운 지진, 소리 없는 천둥, 비바람 없는 태풍이 차례로 지나갔다. 시구(詩句)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 입술을 떼었을 때 수영은 옅게 웃고 있었다. 상수는 웃었다. 오만하지 않은, 부드럽고 무구한 미소였다.
"갈까?" 수영이 말했다.
상수는 수영의 손을 잡았다. 잘 잡지 않으면 놓칠 것처럼 보드랍고 가냘픈 손이었다. 상수는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전봇대라도 좀 뽑아 버리고 싶게 지나가는 버스라도 밀어 넘어뜨려 버리고 싶게. 

- 두 사람은 밝고 좁은 거리를 조금 더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상수가 말했다. "정리, 시작하자."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가 떠났다. 상수는 혼자 서 있었다.

- 경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해. 양 과장도 결국 했잖아."
"그 정도면 내가 여기서 왜 널 보고 있어? 나 사랑해, 상수 씨 사랑한다구. 진심이야. 우리 아빠한테 인사드렸고 아빠가 벌써부터 정리하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다 싫다고, 계속 그러면 집 나가 애 배서 들어올 거라고 그랬다구. 우리 아빠 얼굴이 어땠는 줄 알아? 엄마는? 내가 그러고 있어. 그렇게까지 하고 있다구!"
경필은 냉담했다. "그럼 넘겨."
"못 넘겨, 어떻게 넘겨? 한 지점에서, 눈앞에서 바로 둘이 그러고 있는데!"
"그래도 넘겨. 그것도 못 하면서 뭘 넘기겠다는 건데? 양 과장이랑 결혼했으면 안 그랬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정리했고 정리됐잖아. 안 되면, 넘겨야지 별수 있어?"
"못 한다구, 안 된다구. 상수 씨는 안 그럴 줄 알았어. 절대로 안 그럴 남자 같았단 말이야."
"이봐요, 박미경 씨. 여기 인형 가게 아니고, 나 너네 아버지 아니야. 내 앞에서 칭얼거리지 마. 그거 받아 주는데 선수긴 한데, 너라서 싫다. 짜증 나." 경필은 한 모금 마신 커피 잔을 섬세하게 내려놨다. "절대로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넌 절대로 그럴 여자였고? 똑같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빈민처럼 똑같아. 기회, 외모, 돈, 능력, 시간 그 차이지 다른 거 없어. 우리 다 거지새끼들이야."
미경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 "넘어가질 때까지 넘겨, 참고 삼켜질 때까지 참고 삼켜. 목줄을 걸어서라도 결혼식장에 끌고 들어가 죽어도 네 옆에서 도망 못 가게 호적으로 묶어 버려. 한눈 못 팔게 비싼 차 사 줘서 위치 추적기 달아. 애 낳아서 한강 보이는 마흔세 평 재개발해 올린 새 아파트에 가둬."
"왜?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싫음 말든가. 지금 누가 못 하고 안 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상수는," 경필의 목소리가 확고해졌다. "잡으면 잡히는 애야. 네가 그 정도까지 하면 저 잘난 맛에라도, 아니 겁이 나서라도 나중에 딴짓은 못 해. 그건 내가 얘기해 줄 수 있어. 남자들끼리만 알 수 있는 게 있어. 절대로,라고는 못 해도 대충은 보여. 쓰레기인지 아닌지. 여자들이 여자들끼리만 보이는 게 있듯이."
흔들림 없는 경필의 눈이 신뢰를 줬다. 한때 반했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그 눈빛이었다. 미경은 진정했다.

- "당장 폐차시켜야 할 쓰레기들 빼면 남자는 두 가지야."

"뭐냐고 물어봐 줄게."
"핸들 없는 새 차, 핸들 있는 중고차. 결혼하면 자율 주행 기능이 생기는데, 진화 속도를 감안하면 전혀 신뢰할 건 안 돼. 핸들 꽉 잡고 타면, 어지간하면 탈 만해. 가끔 처박기도, 누가 와서 처박을 때도 있지만."
미경은 피식 웃었다.
"상수는 핸들 있는 중고차는 돼. 연식도 나쁘지 않고. 너 운전, 꽤 하잖아."
"넌 핸들 없는 새 차고?"
"핸들 있는 중고차이고 싶었으나 누가 핸들도 뽑아 가고 불도 질렀지. 그래서 핸들 없는 새 차로 혼자 다시 태어났어. 그것도 외제 차로." 담담한 경필의 얼굴에 석양빛이 드리웠다.
미경은 씁쓸히 웃었다. "나 계속 가?"
"결정은 네 거지."
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도 네 거고."

- 상수는 좀처럼 미경에게 정리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더는 묻고 치워 버릴 수 없는 자신의 비열함, 졸렬함과 함께 비로소 미경의 진심이 보인 탓이었다.

- 미경은 그 수모를 겪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자존심에, 아쉬울 것 없는 처지에, 결혼한 것조차 아닌데, 자기 같은 남자 따위 얼마든지 쉽게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있었다. 독하고 징그러운 오기가 아니었다. 2년 동안의 애정과 애착으로, 그리고 수영을 사랑하면서 알게 된 감각으로 상수는 미경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더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쓰라리게 느꼈다. 

- 상수는 미경에게 잘 대해줬다. 하나하나 귀담아듣고 작은 말, 몸짓 하나에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반응했다. 피식 웃어넘겨 버리거나 못 보고 못 들은 척 무시하거나 여자는 왜 그러냐는 듯 한심한 얼굴로 보던 것을 더는 할 수 없었다. 미경이 코를 찡그리며 웃을 때, 그것이 더는 미워 보이지 않았다. 사랑해서 사랑받고 싶어서, 더 사랑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종이에 베인 손끝의 통증처럼,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미경이 사랑은 아니었다. 5000원짜리 같은 은행일조차 그렇지 않게 해 주는 사람은 수영이었다. 궤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도 가 보고 싶게, 갈 수 있을 것 같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도 수영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설명할 수 없지만, 자신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다 겪은 뒤에야 알 수밖에 없었을까. 왜 이제서야. 후회도 탄식도 아닌 쓰고 저린 감각이 마음의 낮은 곳에 고였다.

-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 상수는 미경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때는 이제 지나 있었다. 미경과는 돌이킬 수 없이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미경을 위해서라는 말 따위는 버려야 했다. 비루하고 비열했다면 끝까지 비루하고 비열해야 했다. 모두 자신이 쏟아낸 오물이었고 뒤집어쓰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 다시 현실적인 걱정들이 엄습해 왔다. 미경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헤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전부터 수영과 만나 온 것을 지점 사람들에게 더럽게 소문이 나돌고, 미경의 사촌오빠가 인사과의 동기나 선후배에게 몇 마디쯤 하면 은행에서 얻을 수 있는 장래는 끝장나는 것이었다. CFA는 1차에 합격했지만 2차, 3차가 진짜 시험이었다. 그 일을 겪고도 지금처럼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준비하는 동안 자신은, 수영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사랑을 믿고 싶기도 믿고 싶지 않기도 했다. 후회가 된다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후회가 된다는 선배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점점 알 수 없기만 했다. 더욱더 무력해지기만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상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일 수만은 없는 자신이 나약하고 남루해 견딜 수 없었다. 좁은 침대에서 상수는 뒤척이고 또 뒤척였다. 

- 학교 정문 수위실에서 맡은 비 냄새, 엄마와 아버지가 다투고 난 것을 직감할 수 있던 거실 공기의 음울한 촉감처럼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도 또렷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수영은 상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손끝이 떨려오고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그 머리에 떨어질까 두렵고 아까운 남자는 상수가 아니라는 것도 명백했다.

- 수영은 방 안의 어둠을 바라봤다. 거울처럼 자신을 또렷이 비추는 어둠. 부끄럽고 참담했다. 후회조차 할 수 없었다. 상실감을 감당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종현에게 한 짓은 결국 도망이었다. 애정 없이 다가갔으므로 상수에게 한 짓도 결국 유혹이었다.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서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종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수, 그리고 그 자신이란 명백히 안수영, 자기 자신이었다. 부서지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자신이 망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망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와 자유로, 유혹하고 유혹당할 수 있는 그 힘과 권리로.

- 이제 와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종현이나 상수가 용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될 뿐이었다. 이대로 모르는 척하는 것이, 종현과 헤어지고 상수를 계속 만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지 몰랐다. 상수의 마음, 지금보다 안정하고 윤택해질 생활,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을 하나씩 채워 나가다 보면 다 지난 일이 되지 않을까? 다시 행복하지 않을까? 서 대리처럼 애들 보고 산다 말하며 푸근하게 웃을 수라도 있지 않을까?

- 수영은 종현의 핸드폰을 내려놨다. 옷을 챙겨 입고 충전 중이던 자신의 핸드폰을 뽑아 들고 집을 나섰다. 내리막을 걷고 끊긴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멀리, 계속 걸어갔다. 편의점과 불 꺼진 청과점과 셔터가 내려진 세탁소, 정육점, 종현과 종종 야식이나 일요일 아침 밥을 먹던 24시간 분식집을 지나 큰길, 4차선 도로 앞에 도착했다. 사나운 경적 소리가 들렸다. 물류 트럭들이 잇달아 굉음을 내지르고 위협적으로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며 달려갔다.
수영은 눈물을 닦아 절망을 지웠다. 

- "아니면 아직도 대학교 때 그 박미경 못 잊어서 이랬어? 박미경 대신 나한테 복수라도 하게?"
경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입술을 실그러뜨려 웃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차라리 산뜻하게 네가 박미경한테서 가지려던 거 내가 대학교 때 가지려다 못 가져봐서 그런 거냐고 하지 그랬어. 그럼 사람 좀 덜 촌스러워 보였을 텐데." 경필은 담뱃진이 올라온 듯 걸게 가래를 뱉었다. “쓰레기? 너나 네가 박미경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대가리라는 게 있으면, 응?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는데, 난 아무것도 강제로 안 했다. 나 좋은 대로 했고 수영이 걔도 걔 좋은 대로 했어. 먼저 전화 걸어 보자고 한 것도 걔야. 새벽에, 두 눈 똑바로 뜨고 술 한잔 안 한 맨 정신으로. 그러니까, 이쯤 해 두는 걸로 하자. 나도 더는 안 봐준다." 경필은 떨어진 담뱃갑을 상수에게 차 주고 돌아섰다.

- 예약한 식당에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상수는 그날 밤 미경과 함께 있었다. 상수는 미경에게 모두 말했다. 수영과 있었던 일, 그전에 자신이 흔들린 이유, 그동안 미경에게 말하지 못한 못난 자격지심과 비겁하고 엉뚱한 분노들까지. 미경은 차분하게, 되묻는 것 없이 들었다 

- 자신을 순전히 사랑해 준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게 웃는지 가르쳐 준 사람. 수영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미경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수영은 가진 적이 없으므로 잃을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선택했다고 여겼지만 기실 미경이 수많은 여자 중 자신의 여자가 돼 준 것이었고 그런 미경을 자신은 영영 잃어버린 것이었다. 함께 보낸 2년이라는 시간까지. 미경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준, 운 좋게 가질 수는 있어도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는 없는 사람. 자기가 좋은 사람이 못 됐기 때문에 결국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싫고 서운했던 것들은 다 잊어졌지만 좋고 잘해준 것들은 잊어지지 않았다. 상수는 미경이 선물해 준 파자마를 버리지 못했다. 샤워를 끝내면 혼자 사는 집 욕실벽의 물기를 닦고 배수구의 머리카락을 건졌다.

- 4년쯤 지났을 무렵, 상수는 여의도 스타벅스에서 수영과 마주쳤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중이었고 수영은 나오는 중이었다. 전체적인 인상이 예전과 달랐지만 상수는 단번에 알아봤다. 수영은 가벼운 묵례로 지나치려고 했다. 상수는 수영을 잡았다. 명함을 건넸다. 연락 달라고, 그래도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수영은 상수의 눈을 봤다. 명함을 지갑에 넣었다.

- "다시 왔을 때는 종현이 간 뒤였고, 시험 결과도 내가 조회해서 알았어."
상수는 수영을 봤다. 평온하지만 윤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지금도 거기 살아?"
"아니, 요 근처에."
"오, 강남."
"이젠 좀 벌거든.”
"만나는 사람은 있어?"
수영은 웃었다. "넌?"
상수도 웃었다.

- 수영은 커피 잔을 매만졌다.
상수도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몇 마디 별 의미 없는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상수는 여러 번 망설이다 왜 경필이었는지 물어보려던 것을 그만뒀다. 물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묻고 싶은 말은 왜 경필이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아니었는지였으니까. 그것은 이제 궁금해할 수 없는 문제였고 설명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수는 창문에 비치는 수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담담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전 같은 떨림도 아니었다. 어딘지 쓸쓸했다. 모두 지나갔다는 감각만, 미경은 잃어버렸고 수영은 지워졌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 "일어날까?" 수영이 말했다.
상수는 빈 커피 잔을 챙겼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비가 여전했다.
"태워 줄까?"
수영은 잠시 생각했다.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같이 가 줄래? 좀 멀어."

 

- 두 사람은 가느다란 쇠 난간에 우산을 받친 채 풍경을 바라봤다. 가는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졌다.

 


 

작가의 말



이야기를 써 나가면서 사랑이 다른 감정과 다르다면 결국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의 징후인 두려움과 떨림도, 보상인 환희와 자유로움도 그래서 생겨나는 것 아닐까, 하고.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에곤 실레의 나체화처럼 벌거벗은 우리는 대개 헐벗었고 뒤틀려 있기 마련이니까.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벌거벗은 상대방을 지켜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심, 질투심, 시기심같이 사랑을 둘러싼 감정들과 온갖 생활의 조건들은 오히려 더 갖춰 입고 뻔뻔해질 것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사랑을 원한다면 결국 거짓의 밝고 좁은 조명 아래서든,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는 짙은 어둠 안에서든 입고 껴입을수록 더 헐벗고 뒤틀리기만 하는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이야기 안의 상수와 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이 여느 감정과 다르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다르게 해 주는 것 아닐까. 역시 수영과 상수가 이야기의 끝에서 그렇게 알게 된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쓰고 고쳐 쓰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수도 없다. 사랑은 각자의 것이고 그래야 하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이런 감정과 감각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단어와 문장, 이야기로 체험할 수 있게 쓰려고 애썼다. 초고를 읽은 편집자와 만나 한 얘기도 그것이었다. 창피하게도 그 초고는 사랑에 대해 뭐라도 그럴싸한 말을 써 보려 안간힘을 짜낸 것이었지만. 

이야기를 쓰는 동안 가장 큰 장애물은 나였다. 정말 여러모로 그랬다. 쓰는 내내 역부족이라는 말을 실감했고 고치다 고치다 못해 마지막 3교까지 대폭 고쳐 썼다. 쓸 수 없는 모든 결말을 다 써 본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탁월한 편집자 덕분에 이렇게 끝맺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 이름과 표지를 붙여 줬을 뿐 아니라 세심하면서도 적확한 조언으로 도와준 박혜진 편집자께, 그리고 교정과 디자인을 도와주신 민음사의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깊이 감사한다. 

이야기를 쓰고 고치는 긴 시간 동안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진실한 도움을 받았다. 갚는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 그저 마음을 다해 감사한다. 


2019년 봄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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