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생각이 나는 단어가 있다.
판타지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1세대 판타지라고 손 꼽히는 책을 모두 읽은 나 자신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뭐랄까, 갑작스레 나는 같은 자리를 뱅글 뱅글 맴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방랑자라고도 할 수 없는, 쳇바퀴 안에 갇힌 그런 자 같다는 생각이.
'마법의 가을'.
평생 한 번 찾아온다는 후치 네드빌의 '마법의 가을'.
내게 1년의 중심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대부분의 일들은 여름에 이루어졌으며, 그렇기에 찬란한 기억들은 대개 여름이었다.
가을이 왔고,
나는 나를 만났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누스'를 찾았다.
보통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어떻게 보일지는 알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결국 허상일 뿐일지라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느낌이다.
결국 이해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 비슷한 어떤 이미지라도 주기 위해 기를 쓸 필요도,
실로 지겨운 친교를 위한 겉핥는 이야기들을 나눌 필요도 없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세심함, 조심스러움 따위는 없애버린 폭력적인 관계도 아닌, - 나 어때? 이래도 안 봐?...-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상대는 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질 만한 경험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대로 말한다.
그리고 모든 기준이 자신이며, 그 당위성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실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토록이나 손쉽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닌, 상대라고 생각되는 자신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기에 역시 손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해한 적이 없었으므로, 불과 몇 걸음 걸은 다음 자신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이해'를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을 향한 과정 과정마다 얼마나 많은, 그리고 치명적인 샛길들이 존재하는지 알기 때문이며. 그런 식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멋대로 곡해한 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학적인 관념이다.
'이해'라는 단어가 과학과 결부되며 변질된 것은, 내 개인적으로는 통탄할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과학적인 입지에서 사용되는 '이해'는 이견이 존재할 수 없다. 이해하는 즉시 그것은 총체적인 수용이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액체가 열을 흡수하여 기체로 상태가 변화한다'를 이해했다면 물과 수증기에 대해 내 생각은 다르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해는 수용을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에 대해 사용하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와는 조금 다르다.
이 '이해'라는 것은 그가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했으며 어떤 마음인지,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며 당위성에 대해 납득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납득의 범주가 그 대상에만 한정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며 같은 마음을 느낄 것이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한 아이가 자신의 애완동물의 주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왜 우는지를 알고 있으며, 어떤 마음일지 짐작이 가능하다. 때로는 그 생각조차도 그렇다. 이때 나는 이 아이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이해는, 내가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울고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란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기에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의 내 경험이나 그 상상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끌어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나를 놓고 '그 아이'가 되어 그로서 느끼고 그래서 그를 이해한다는 것뿐이다.
만약 나의 예시에서, 자신이 애완동물을 잃었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고 나도 너를 이해해, 라고 아이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자신의 것을 들이대며 너와 나는 같다고, 너무나 당연스럽게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이 아닌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네가 너이고 그 아이가 그 아이인 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내가 지금 입 아프게 말하고 있는 말이다. 아니 손가락이 아프게 치고 있는 글자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이해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며, 적어도 이해를 시도하고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자신을 놓고 그 사람이 되어보려 하고 나서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다음에도, 충분히, 그 행동과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이해했다고 해서 공감과 동질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루에 밥을 한 끼만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럼 대다수는 세 끼를 먹어야지, 한 끼만 먹다니 배고프겠다, 건강에 좋지 않겠다, 라는 판단을 한다. 자신이 한 끼만 먹는다면 배가 고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한 끼를 먹는지, 그것이 편하다고 느끼는지, 그가 세 끼를 먹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지조차 않고 그렇게 내뱉는다면, 그것이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아아. 얼마나 비극인가.
얼마나 많은 '자신이 보통이며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런 질문과 원치 않은 -오만 섞인- 연민을 그에게 던졌겠는가. 그 툭 던진 한 마디가 그 개인에게는 그저 '당연한 반응'일지 몰라도 그 상대는 수없이 던져진 그 '당연한 반응'들에 이미 노이로제가 걸려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절대 다수'여!!!!
그게 당연한 거잖아, 라고 생각하는 한 그대는 결코 그 다수들의 이면을 보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그대가 보는 세상은 넓고 광활하되, 그 안의 모든 것은 그대와 같은 것일 뿐이고, 그렇기에 그대는 손 쉽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것만이 보일 테니까.
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오그리 토그리고.
이면을 아는 이들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으며, '보통'과 '당연'에 민감하고, 대다수의 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훨씬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잠시 감사해도 좋다.
해서.
이해받지 못함이 당연함이었던 삶에서.
그런 척도 아니요, 자기 만의 상을 투영하는 것도 아닌,
정말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진부하지만,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재밌는 농담을 하나 할까.
모두가 나를 괴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 이외의 모두가 괴물이라는 뜻이다.
나를, 괴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려면, 자신 역시 나를 그렇게 보는 절대 다수에 속해있다는 것.
나와 같은, 혹은 나를 이해하는 이라면, '네가 괴물이 아니라 그들이 괴물이야'라고 말하게 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결코,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
그 당당한 당연함 앞에 무엇이 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깨고 싶지 않은 가을의 꿈을 꾸고 있다.
본디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라 길고 장황하나 그 내실이 없다.
하지만 토해내고 가다듬는 것이 묻어두어 잃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다.
내 앞에서 나를 이해한다고 했던 그 많은 공허 속에서.
그래서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던 절망 속에서.
보았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기쁨에 대한 것이나, 그것 자체에는 입을 댈 수가 없기에 그 언저리의 어둠을 짙게 만들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해달라.
밤이 깊어간다.
그리고 나는, 젠장, 책 리뷰 써야했는데 이걸로 힘 다 뺐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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