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허유정
출판 : 뜻밖
출간 : 2020.05.20
얇고 가벼운, 단아한 책이었다.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 떠올라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매료되고 말았다.
천연 수세미, 개방형 실리콘 빨대, 고체 치약, 브리타, 베이킹소다와 구연산.
내가 의식해서 선택해 본 것은 이런 정도였다. 신기한 아이템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호더 기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미니멀리즘'보다는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는 쪽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왕이면 '무해한' 쪽으로의 선택.
나는 탄산수를 좋아한다. 시원한 목 넘김도 좋고, 액상 과당의 끈적한 맛도 없다. 가끔은 하이볼이나 에이드처럼 다른 음료들과 섞어 신선하게 마실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장점 뒤에는 수북하게 남는 플라스틱 병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고민이었는데 약간씩의 변화를 추구해보기로 했다.
나의 사랑하는 여름을 맞아, 예전에 한번 포기했었던 소다스트림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한 것. 이번에는 부디 잘 활용해서 가스 충전도 해가며 꾸준히 쓸 수 있기를.
그리고 기존의 플라스틱 얼음틀을 실리콘으로 바꾸기로 했다. 기존에 쓰던 구형 얼음틀보다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바꿨는데, 쌓아뒀던 차들을 진하게 우려 얼려볼까 생각 중이다. 탄산수에 넣어 마셔도 재미있을 것 같고, 여름이니 텀블러에 담아 다니면 출퇴근 시 소비하던 탄산수들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모쪼록, 성공적이길 바란다.
설사 작심삼일로 끝나게 되더라도 '의도'를 기억할 것.
친환경을 추구하고 싶다는 '의도'가 잘못된 게 아니라, 실천할 방법적 측면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뿐이니까.
- 2년 전 독일 함부르크 여행을 계기로 우연히 '쓰레기 없는 삶'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날 이후 내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자주 업로드됐다. 나를 SNS로 알게 된 사람들은 종종 묻기도 한다. "혹시 환경운동가이신가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아니다'. 텀블러를 챙기려고는 하지만 잊고 나갈 때도 많고, 친환경 제품을 찾지만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은 여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소심한 환경쟁이' 정도랄까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 애는 쓰지만, 여전히 실수도 많고 유혹에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왜 그렇게 열심히 쓰레기를 줄이려 하냐고, 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그 질문에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구력 약한 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어떻게 이 일을 오래 하고 있는 건지,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고, 나라에서 마일리지를 쌓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어졌다.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 건, 결국 나에게도 무해한 일'이었다고. 자연에 가까운 선택을 할수록 내 몸은 건강해졌고, 쓰레기를 줄일수록 일상이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비닐과 플라스틱에 포장되지 않은 음식을 고르며, 서서히 독소가 빠지듯 조금씩 몸은 건강해졌다. 플라스틱이 아닌 자연 소재가 많아지며, 집 안 분위기는 더 따뜻하고 편안해졌고, 쓸데없는 물건이 줄어들며 내 곁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채울 수 있는 공간과 여유가 생겼다.
- 이 책을 통한 내 꿈은 하나다. '쟤도 하는데, 나도 해볼까?'의 만만한 '쟤'가 되는 것. 책을 읽고 지금 당장 쓰레기를 줄여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면 바랄 게 없다 대단한 결심도 필요하지 않다. '이제 나무 칫솔을 써볼까?' 하는, 딱 이 정도의 관심이면 충분하다. 이 책이 가벼운 시작을 만들어주게 된다면 참 좋겠다.
- "여기, 네가 정말 좋아할 것 같아."
어느 날 여름 휴가지를 고민하는 내게 친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장 동료로 만났지만, 먼저 퇴사해 함부르크에서 지내고 있던 선배. 선배는 일도 잘했지만, 일 외에도 따라 하고 싶은 게 많던 취향이 멋진 사람이었다. 직장 동료지만 휴일에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우리는 그만큼 잘 통했고 좋아하는 것이 비슷했다. 제로웨이스트, 문자 그대로 'Zero'와 'waste'가 합쳐진 말로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만들며 사는 라이프 스타일을 말한다.
- 선배가 데려간 첫 번째 장소는 '제로웨이스트 샵'. 이때 ‘제로웨이스트'란 말을 처음 들었다. 큰 마트 한쪽에 위치한 이 샵에서는 모든 제품을 포장 없이 살 수 있다고 했다. 듣기만 했을 때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샵에 들어가는 순간, 선배가 말했던 모든 게 한 번에 이해됐다. 입구에 들어서니 포장 없이 벌크로 담긴 곡물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쌀통 같은 디스펜서들이 한쪽 벽을 가득 채웠고, 그 안에는 콩, 밀, 그래놀라 등 다양한 곡물과 식자재가 들어 있었다 필요한 사람은 손잡이를 눌러 필요한 만큼 담는다. 포장이 없어 용기를 챙겨 와야 하고, 무게를 재어 나온 값으로 계산하면 된다. 대형 마트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먹고 마시고 씻는 기본적인 생필품은 대부분 살 수 있었다. 우리가 가게에 들어섰을 때 마침 진한 커피 향이 났다. 원두를 사고 그 자리에서 갈아 가져온 유리병에 담고 있던 손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정확히 말하면 세제 용기를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샴푸바와 린스바, 화장솜 대신 사용하는 면 패드, 천연 치실 등 모든 것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이곳을 찾는 사람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용기를 챙겨 샵을 찾아왔다. 장을 보면 장바구니는 더 무거워질 텐데 일일이 유리병을 챙겨 온 것이다. 아직 에코백 챙기기도 힘든 나에게 이런 모습은 특별해 보였다. 물건을 골라 용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움직임 또한 조용하며 우아했다.
- 직접 눈으로 본 쓰레기를 줄이는 삶은 더 멋지고 우아했으며,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는 고작 환경호르몬과 내 몸에 닿는 플라스틱만 생각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좀 더 근본적인 생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나뿐 아닌 모두, 그리고 현재만이 아닌 미래를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선택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세계에는 따뜻한 선의가 가득해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인상을 가졌고, 소신을 지키며 사는 단단한 기품도 느껴졌다. 나는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도 그들처럼 내 건강을 위한 일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고 싶어졌다.
- 독일에서 만난 '쓰레기를 줄이는 일상'은 생각보다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환경보호'는 나와 먼 일 같았다. 그런 일은 어느 단체에 소속된 환경운동가만이 하는 일 같달까? 하지만 함부르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 유리 용기를 들고 샵을 찾은 할머니, 쓰레기를 주우며 뛰는 동네 러닝 크루, 에코백을 들고 제로웨이스트 카페를 찾는 대학생은 모두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또 환경을 위하는 일도 생각보다 특별한 게 아니었다. 핸드워시 대신 비누를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실천이란 걸 나는 함부르크에서 깨달았다.
- 나는 요즘 조카들이 생선회를 먹을 때마다 사실 불안하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면역력도 약하고 살날이 많은 아이들은 먹지 않았으면 싶다. 바로 미세 플라스틱 때문이다. 미세 플라스틱은 5mm 미만의 작은 플라스틱으로, 플라스틱이 부서져 생기거나, 치약, 화장품에 들어갈 용도로 처음부터 제작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화장품, 생수, 소금, 바다 생물 등 일상 곳곳에 있는 미세 플라스틱, 2019년 6월 호주 뉴캐슬대학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들은 매주 평균 2,000여 개의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한다. 무게로 환산하면 5g으로 신용카드 한 장 정도 우리 모두 일주일에 카드 한 장씩을 주전부리로 먹고 있는 거다. 특히 우리나라 남해의 미세 플라스틱 오염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앞바다마저 상황이 이러니 점점 수산 시장에 가는 게 꺼려진다.
- '플라스틱은 대부분 재활용되지 않아?'란 친구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전혀 아니다'라고 답하겠다. 우리나라 재활용률이 50%가 넘는다는 자료에는 대부분 오류가 있다. 쓰레기는 수거 - 선별 처리 3단계를 거치는데, 보통 통계 조사는 선별 업체에 들어온 쓰레기를 기준으로 시작된다. 즉 모든 쓰레기를 기준에 두지 않고, 선별 업체가 재활용되리라 판단한 쓰레기를 기준으로 낸 통계이다. 환경부가 추론하기론 선별 과정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만 대략 39%라 한다.
- 어느 날 어차피 완벽한 실천은 불가능하고,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쓰레기를 만든 날은 '쓰레기 만들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다. '환경보호'라 하면 사람들은 뭔가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생각한다. 이런 편견은 환경과 관련된 실천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 그래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실천'도 하나의 노력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예전부터 엄마는 말했다. 물건은 돈을 좀 주더라도 좋은 걸사야 하고, 멀리 보면 이게 아끼는 방법이라고. 살림해보니 그 말은 진리였다. 싼 가격, 화려한 광고에 혹해 산 것들은 금방 망가지거나 불편했다. 특히 자잘한 살림이 많은 부엌에서 이런 실수가 잦았다. 남편이 회사에서 공짜로 얻어 온 에어프라이어는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녹슨 바닥이 드러났다. 맥줏집에서 술기운에 사 온 잔은 설거지 몇 번에 로고가 사라졌고, 저렴해서 산 설거지 브러시는 털갈이하는 고양이처럼 모가 빠졌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샀지만 결국 시간도 돈 낭비하는 꼴이 된 셈이다. 좋은 살림을 과감하게 사는 것도 살림력이라는 걸, 나는 꽤 많은 돈을 흩뿌린 후에야 알았다. 좋은 살림은 쓸수록 편하고 튼튼하며,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든다.
- "사장님 입장에서는 손님 가방이 젖을까 봐 자기가 만든 음식이 식을까 하는 말이지.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손님'과 '자신의 상품'을 생각해서 나온 행동, 내 생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그냥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게 됐다. 이제는 '그래도 비닐을 쓰라'는 사장님을 만나면 정중히 이유를 설명한다. 특히 사장님이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부분을 안심시켜 드린다.
"이거 밀폐 용기라 물 안 새요, 사장님. 웬만하면 비닐을 안 쓰고 싶어요."
- 생각해보면 조금은 다른 요청을 하는 내가 그분들도 당황스러울 수 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다양한 손님이 있나 혹시 특이한 손님이라 새로운 컴플레인이 생길까, 그냥 평소대로 하고 싶은 그 마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아직 다행히 무작정 불친절한 분을 만난 적은 없다.
- 주부가 된 후 '생활의 질이 달라졌다' 생각하는 가전제품이 3가지인데, 식기세척기와 빨래 건조기, 그리고 '미생물 음식물처리기'다. 최근 생긴 미생물 음식물처리기는 미생물을 이용해 음식물을 분해 소멸하고, 퇴비화하는 기계. 이 처리기가 오고 나서 부엌살림은 한층 더 여유로워졌다. 미생물 처리기는 수질오염 걱정도 없고, 전기사용량도 많지 않다. 음식물을 미생물에 넣으면, 다음 날 부드러운 흙처럼 변한다.
(리뷰자 주 : 정말 마법템들이다. 여유가 된다면 스타일러 추가.)
- 막 탈수가 끝난 말끔한 빨래를 건조기로 옮긴다.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는 대신 내가 사용하는 건, 양모 볼 귀여운 솜뭉치 같은 공 세 개를 건조기 속 젖은 빨래 위에 올려 둔다. 그리고 에센셜 오일을 꺼내 고민한다. "오늘은 무슨 향이 좋을까?" 요즘은 날이 춥고 생리가 시작되려는지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럴 때는 생기를 올려주는 상큼한 시트러스지 베르가 못 오일을 골라 공마다 2~3방울 떨어뜨리고 버튼을 눌러 건조를 시작한다.
- 양모 볼은 빨래가 엉키지 않도록 도와줘 건조 시간도 훨씬 단축해준다. 유연제 살 돈을 아껴주고 전기도 줄여주는 알찬 살림, 친환경 제품은 마냥 비쌀 것 같아도 따져보면 이렇게 보탬이 될 때가 많다. 면 생리대, 일회용 행주, 섬유유연제 등 쓰레기 줄이기를 몰랐다면 내 한 달 생활비에는 많은 것들이 추가됐을 것이다. 제로웨이스트,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모 대기업 회장으로 변신해 이 말을 건네고 싶다. "이봐, 해봤어?"
- 커피를 한 잔 내려 거실로 가져온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도 향이 퍼져 오겠지. 따뜻한 빨래 향을 기다리며 이렇게 또 한 주가 지나간다.
- 우리나라보다 좀 더 일찍 환경에 관심을 가진 나라를 여행하면 '종이컵에 이름 쓰기'와 같은 좋은 아이디어를 종종 발견한다. 2년 전 독일에 갔을 때 동네에서 열리는 작은 페스티벌을 갔었는데, 그곳에서는 술을 포함한 모든 음료를 '잔 보증금'을 받고 팔고 있었다. 보증금은 약 1~2유로 정도, 음료를 마신 후 플라스틱 잔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다시 내어주는 방식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돈은 받아야 하니,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잔을 반납했다. 땅에 뒹구는 더러운 일회용 잔이 없었던 쾌적한 페스티벌, 국내 페스티벌에서도 이렇게 보증금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리뷰자 주: 한국의 경우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22년 12월 1일까지 유예기간이 연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 1년 전 뉴질랜드에 신혼여행을 갔을 때는 이런 것도 봤다.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지역 농부들이 모이는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는데, 마켓 입구에는 몇십 개의 머그잔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이 머그잔은 마켓을 찾는 누구라면 이용할 수 있는 잔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이 잔을 가져가 커피를 사 마셨고, 마켓 곳곳에는 잔을 씻을 수 있는 세척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가 이 잔을 보고 신기해하니, 지나가던 한 남자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이 잔들은 동네 사람들이 기부한 잔이고, 잔을 쓰고 나서는 모두 깨끗이 세척해 반납하고 있어."
(리뷰자 주 : 기부받은 잔으로 운영되는 '오느른 카페' 등이 떠올랐다.)
- 다회용기 렌털 서비스, P.NOT(피넛). 단체 행사 때 일회용품 사용을 줄일 수 있는 서비스, 피넛. 그릇, 접시, 수저 같은 다회용품을 대량으로 빌려주고 정해진 장소에 배송 및 수거까지 하는 서비스다. 동호회 모임, 쿠킹클래스, 브랜드 홍보행사 등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곳에서 이용하면 좋다. 세척까지 알아서 해주니 환경도 보호하고 편리한 것이 장점. 모임을 기획하고 있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서비스.
- 처음에는 조금 귀찮았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챙기는 크고 작은 '목욕용품'들, 요즘은 어메니티를 쓰지 않기 위해 샴푸바, 린스바, 세안 비누 그리고 칫솔 세트를 꼭 가져간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 호텔은 '어메니티' 쓰는 맛도 있는 거라며, 호텔방에 들어서면 어메니티 브랜드부터 확인했던 사람이 나였다.
(리뷰자 주 : ... 나는 아직...)
- 예전에는 '어메니티 쓰는 맛'을 즐겼다면 요즘은 '어메니티를 쓰지 않는 맛'을 즐기고 있다. 호텔 방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가져온 파우치를 꺼내 욕실로 간다 미리 놓여 있던 어메니티를 정리해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둔다. 어메니티가 있던 자리는 집에서 챙겨온 비누들 차지. 샴푸바, 린스바, 세안 비누를 나란히 놓고 가져온 화장품도 꺼내 올려둔다. 그리고 정리한 어메니티 위에 메모 하나를 남긴다.
'쓰지 않은 것들입니다. 재사용해주세요.'
- 실제로 내가 하는 실천은 기후 문제를 반전시킬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 수 있다. 기후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구 에너지 중 일회용품 소비가 차지하는 건 일부분이고, 선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숫자를 변화시키긴 어렵다고.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조천호 박사는 한 교양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텀블러를 휴대하는 건 감수성 측면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즉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는 있지만, 효과적인 실천은 아니란 이야기. 텀블러를 쓰고 플라스틱 제품을 사지 않는 행위만으로는 결정적인 변화는 없을 거란 말이다.
- 하지만 막 쓰레기를 줄이기 시작했던 초반과 달라진 게 있다면, 당황스럽긴 해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환경 문제를 반전시킬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법'이다. 국회의원을 찾아가는 환경운동가, 학교를 나와 시위하는 그레타 툰베리와 청소년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법을 만들어달라'고. 환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큰 흐름을 주도하는 '산업'이 변해야 하는데, 이 큰 덩치를 움직이기 위해서 우선 법이 필요하다. 그들이 함부로 탄소를 배출하지 못하도록, 화석연료가 아닌 대체 에너지를 쓰게 하는 게 바로 '법', 산업 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당장 10년, 2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 이 법을 바꾸기 위해 우선 '텀블러'를 들어야 한다 생각한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한 기후변화 전문가가 말했다. 환경을 위한 실천 중 가장 효과적인 건 '고기를 덜 먹는 것'이라고. 지구 육상동물 중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30%고, 사람이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 67%라고 한다. 야생동물은 고작 3% 소나 양이 다 함께 트림만 해도 지구가 위험해지는 거다. 또 가축을 키우는 전 과정에 탄소가 발생한다. 비료를 쓰고, 기계를 돌리고, 저장 운송하는 과정 모두에 쓰이는 화석 연료. 소고기 1kg를 얻기 위해 옥수수 16kg이 필요하다고 하니, 축산업이 발달할수록 지구는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완벽하게 채식을 하는 날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말자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도 있다. 이 캠페인은 2009년 폴 매카트니가 유엔 기후변화 회의에서 제안해 시작된 운동. 비건을 떠올리면 멀게만 느껴졌던 채식이, 월요일 하루만이라도 먹지 말자 생각하니 뭔가 쉽게 느껴졌고 해보고 싶어졌다. 조금씩 줄이는 일도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것이다. 최근 '언리미트' 같은 식물성 고기를 판매하는 회사도 늘고 있는데, 이런 대체재도 함께 활용한다면 조금 더 쉬울 것이다.
- 해외 제로웨이스트 샵에서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친환경' 제품이 많다. 뉴질랜드 신혼여행 때 발견한 신문물은 바로, 고체 '데오드란트'와 고체 '바디크림'. 노플라스틱을 추구하는 뉴질랜드 브랜드 '에티크(ethique)' 제품인데, 마치 버터처럼 네모난 블럭으로 만들어져 종이상자에 들어 있었다. 화장품은 항상 '용기'에 있는 건 줄 알았는데, 포장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니.
(리뷰자 주 : 러쉬의 바디버터들과 유사한 제품 같은데, 버터 블럭에 관심이 간다.)
- 지금은 여행 후 남는 건 '새로운 일상'인 것 같다. 여행 중 우연히 먹은 심심한 독일식 빵, 홍콩에서 배운 상큼한 아침 홍차 같은 것들은 여행이 끝나고도 내 일상을 풍요롭게 해 준 것들 새로운 경험으로 좋아하는 게 많아질수록 일상은 더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익숙한 것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취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 채소마다 다르지만, 가격대가 그리 저렴한 편은 아니다. 그래도 믿음직한 사람들이 파는 건강한 재료라는 점, 다양한 유기농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아 한 달에 한 번은 이곳에서 창을 본다. 싱싱한 제철 채소, 흙냄새, 포장 없는 시장 마르쉐의 매력은 많고 많지만, 이곳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 시장에 가까워지면 하나둘 보인다. 에코백을 메고 손에는 텀블러를 들고 시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찍 장을 보고 채소로 가득 찬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리 반찬통을 챙겨 와 유기농 피클, 반찬을 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이 시장에 확인하러 오는 것 같다. 나 혼자 애쓰는 게 아니라고, 다른 누군가도 이 불편함을 공감하고 있다고.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상관없다.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든든하니까.
- 마르쉐 채소시장이 열리면 신선한 제철 채소로 만드는 '채소 점심'도 맛볼 수 있다. 마르쉐 공식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메뉴가 안내되고, 이 점심은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는다. 금방 예약이 차기 때문에 오픈 시간에 맞춰 가면 좋다. 일찍 가 점심을 예약해두고 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알록달록한 채소가 그득한 한상이 차려져 있다.
- 어슴푸레 해가 뜨고 있는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밤새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한다. 정돈이 끝나면 베란다로 간다. 어제 하루 햇볕에 바짝 마른 소창 행주. 행주를 걷어 부엌으로 가면 씻지 못한 그릇 몇 개가 싱크대에 남아 있다. 물을 틀어 수세미를 적신다. 설거지 비누를 문지르면 금방 올라오는 부드러운 거품. 남편이 출근한 아침은 고요하다. 들리는 건 오직 물소리와 그릇 소리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씻다 보면 머릿속이 점점 투명해진다. 어제의 후회, 오늘의 걱정이 잠시 물줄기와 함께 비워지는 느낌. 젖은 그릇을 널어놓고 원두를 꺼낸다. 스테인리스 캡슐에 가루를 담아 꾹꾹 누르고,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내려온다. 커피 향이 집 안을 채우면 이렇게 또 하루는 시작된다.
- 쓰레기를 줄이며 나는 '일상'이 더 좋아졌다. 예전에는 특별한 장소, 특별한 때에만 느꼈던 감정을 요즘은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문득문득 느낄 수 있다. 항상 먼 곳만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기만 했던 나. 지금은 언제 올지 모를 그 순간을 더 기다리지 않는다. 그 대신 눈앞에 있는 것부터 보고, 만지고, 온전히 누리며, 지금을 충실히 살고 있다. 그게 더 나은 일이란 걸 이제는 안다.
- 쓰레기가 있던 자리가 비워지니 그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점점 채워졌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이토록 작은 것에 감동하는 사람인 줄은. 욕실에 들어서면 동글동글 놓인 비누가, 부엌에서는 나란히 줄 선 유리 잡곡 병이, 이 작은 것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쓰레기를 줄이며 취향은 더 분명해졌다.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비누를 쓰며 알게 됐고, 비닐과 플라스틱이 치워진 단정한 부엌은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취향이 또렷해진다는 건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 이렇게 일상은 풍성해져 갔다.
-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대하며 품위를 지키려는 감정, 자존감. 이렇게 사전을 찾아봐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환경을 위해 무언가를 해본다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에 도움이 됐다. 회사생활 중 가장 힘들었을 때는 '내가 조직에 필요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사람은 그 누구의 인정보다 자신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쓰레기를 줄이다 보면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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