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한병철] 타자의 추방

일루젼 2022. 5. 2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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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병철 / 이재영

원제 : Die Austreibung des Anderen: Gesellschaft, Wahrnehmung und Kommunikation heute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17.02.27 


<피로사회>를 너무 인상깊게 읽었었기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이번 저작은 그 날카로움이 조금 무뎌진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개인들은 더이상 '타자'로서의 타인과의 교류를 체험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잉 표현 -자기복제- 에 몰입해 스스로를 자기 잠식의 사멸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타인은 하나의 숫자, 재화와도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의 숫자'인 '좋아요'로 쌓아올리는 자기 긍정은 실상 '나와 다른' 온전한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같은 다름' 만이 남아 진정한 의미의 가까움과 멂을 사라지게 만들고, 무간격만을 남겨놓는다. 

 

'내가 아닌 것'의 존재로 감각할 수 없는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수많은 자기 복제 안에서 더이상 새로운 자극을 찾을 수 없는 자아는 권태와 우울 속에 괴사 중이다. '불특정다수'로만 이루어진 또다른 '나'들은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재단되어 최적의 생산성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다른 가치가 사라진 세계는 어떤 기준이든 단 하나의 가치 평가 기준으로 전체를 줄 세울 수 있는 세계이며, 그 안에 더이상 '타자'라는 개념은 없다.

 

'타자'는 '내가 아닌', '개별적' 존재이며 그 자체로 기능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시에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그로써 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향한 방향성을 욕구, 자신이 아닌 것을 향한 방향성을 욕망이라 표현했으나 나는 다소 결을 달리한다. '욕망'은 하나의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합일과 분리, 양자는 모두 욕망의 다른 얼굴들이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욕구는 모두 욕망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것'이 가지는 가치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라진다면 '나'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만 맺는다. 이원성의 세계에서 하나의 쌍은 동시에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타자'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가 존재함으로써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요, 내가 아닌 것에도 친절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완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것들의 조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에고적 나르시즘과 건강한 자기애를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낯섦을 이해하게 될 때, '타자'는 여전히 '타자'로서 존재하는가? 에고의 경계는 확장되는가, 낯섦이 나의 안으로 잠식되는가? 

 

나는 다른 것에의 친절과 공존 다음으로는 이해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의 낯섦을 잃은 타자는 나의 다원성 중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being' 다음의 'shrink', 'tzimtzum'이다. 그 이후 이어지는 공존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나에게는 하나의 시각이 생겼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독서였고,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 때때로 멈춰야 하는 독서는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무척 좋았다.  

 


   

-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 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제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파괴적인 압박은 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 내적 압박으로서의 우울은 자기 공격적인 특징들을 나타낸다. 우울한 성과 주체는 말하자면 자신에 의해 맞아 죽거나 질식당한다.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 파괴를 작동시킨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자기 파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폭력의 변증법은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같은 것의 폭력은 그 긍정성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의 창궐은 스스로를 성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생산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정보는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고 왜곡하며, 소통은 더 이상 소통적이 아니라 그저 누적적이다. 

 

-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 워칭 Binge Watching", 즉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같은 것을 섭취하고 소비 가축처럼 살이 찐다.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는 오늘날의 지각 방식 전반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 감염은 타자의 부정성에 의해 일어난다. 타자는 동일자 내부로 침투하여 항체가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경색은 같은 것의 과잉 시스템의 비만으로 인해 일어난다. 경색은 감염적이 아니라 지방적이다. 지방에 대해서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어떤 면역 방어도 같은 것의 창궐을 막아낼 수 없다. 

 

-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를 보여준다. 

 

-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도 변모를 낳는다. 인식은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산출한다. 인식의 구조는 구원의 구조와 비슷하다.

 

- 신자유주의를 이 생명 정치로 교정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좌우되는 대중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세력들에 쉽게 포섭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절망감과 전망의 부재가 결합된 사회적 불안은 테러리즘 세력을 키우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낸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 외견상으로만 서로 대립하는 파괴적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배양한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실제로는 적이 아니라 형제다. 양자는 동일한 발생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 돈은 정체성을 매개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상상적인 것으로, 예컨대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국수주의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을 발명해낸다. 그 한 예가 이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의미를 제공해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상상적인 경로를 통해 면역성을 구축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무의식적으로 적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적은 상상적인 형태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상상적인 것은 현실 속의 결핍을 보충해준다. 테러리스트들 안에도 상상적인 것이 내재한다. 세계적인 것은 현실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동시에 면역 방어를 약화시킨다. 면역 방어는 정보와 자본의 가속화된 세계적 순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면역의 문턱이 아주 낮은 곳에서 자본은 더 빨리 흐른다. 오늘날, 같은 것을 전체화하는 세계적인 것의 지배적인 질서 안에는 사실상 같은 다른 것 혹은 다른 같은 것밖에 없다. 새로 설치된 경계 울타리들 주변에서는 타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 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 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 환대는 화해를 약속한다. 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 후기 하이데거는 두려움이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아직 미답의공간"에 들어서려면 사유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자 없는 존재를 견뎌야 한다. 일정한 측면에서 존재는 존재자에 선행하고, 각각의 존재자를 특정한 목소리를 지닌 be-stimmt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 사유는 "심연"을 "사랑한다". 사유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향한 명료한 용기"가 내재한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같은 것이 계속된다. 

 

- 두려움은 문턱에서도 깨어난다. 두려움은 문턱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느낌이다. 문턱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다. 문턱 너머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상태가 시작된다. 그래서 문턱에는 항상 죽음이 새겨져 있다. 모든 이행의 의식들, 이른바 통과의례 rites de passage에서 우리는 한 번 죽고, 문턱의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죽음은 이행으로 경험된다. 문턱을 넘어가는 사람은 자신을 변신에 내맡긴다.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준다. 문턱에는 고통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 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 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 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 도처에 시선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주시한다고 느끼는 것은 편집증의 증상 중 하나다. 이 점에서 편집증은 우울증과 다르다. 편집증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병이 아니다.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에 반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타자를 경험할 수 없는, 시선 없는 공간 속에 산다.  

 

- 음성은 다른 곳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타자로부터 온다. 우리가 듣는 음성은 장소를 전혀 특정할 수 없다. 서양의 형이상학이 음성을 직접적 자기 현존의 직접적 현재의 장소로 선호했고, 음성이 의미와 로고스에 특별히 가깝다고 생각한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유명한 음성 중심주의 테제는 음성의 탈영토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시선과 마찬가지로 음성은 오히려 자기 현존과 자기 투명성을 파괴하고, 자기 안에 전적인 타자, 미지의 것, 섬뜩한 것을 써넣는 매체다. 
 

- 노발리스 Novalis에게도 자음은 산문과 의미와 유용성을 의미했다. "자음화는 억제되고 제한되고 가두어지는 것"을 뜻한다. 자음화 된 정신은 미지의 것과 비밀스러운 것과 수수께끼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이에 반해 모음은 유혹적이고, 시적이고, 낭만적이다. 자음은 먼 곳을 배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먼 철학은 시처럼 들린다. 외침은 멀리 퍼질 때 모음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 자음화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소통은 자음화 된 소통이다. 여기에는 비밀도, 수수께끼도, 시도 없다. 이 소통은 간격과 거리가 없는 상태를 위해 멂을 제거한다. 

 

- 음성은 더 높은 심급 혹은 초월성을 자주 대표한다. 음성은 위로부터, 전적인 타자로부터 울려 퍼진다. 도덕이 흔히 음성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아가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도덕적 계율의 음성은 내면 속의 바깥으로부터 온다. 소크라테스가 거듭하여 들었다고 하는, 도덕적 심금으로서 경고하는 음성이 이미 데몬, 즉 섬뜩한 타자로부터 온 것이다. 

 

- 칸트의 이성 또한 명령하는 음성으로서 등장한다. 행복과 감각적 성향에 맞서 오로지 도덕 법칙에, "이성의 음성"에, "악한들조차 떨게 만드는" 천상의 음성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륜성이다. 하이데거는 이성의 음성 대신 "양심의 음성"을 내세운다. 이 양심의 음성은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의 가능성"을 붙잡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도 음성에는 탈영토성이 깃들어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아주 갑작스럽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 곁에 두고 있는" "친구의 음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친구의 음성을 듣는 것"은 "심지어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본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열어놓는다. 그 음성은 왜 친구로부터 오는가? 하이데거는 왜 하필 음성에 대해 말하는 지점에서 친구를 호출하는가? 친구는 타자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음성에 일정한 초월성을 부여하기 위해 친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이 청각은 귀하고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청각은 또한 인간의 본질이 그것을 향해 올라가도록 조율된 어떤 것에 인간이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그 자신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을 향해 조율되어 있다. 규정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음성에 직면하고, 이 음성의 부름을 받는다. 이 음성은 소리 내는 것들 사이를 고요히 관통할수록 더 순수한 소리를 낸다." 

 

- 음성은 바깥으로부터, 사유가 그것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전적인 타자로부터 울려 퍼진다. 음성과 시선은 존재 자신을 조율하고 규정하는 존재자의 타자로서 존재를 드러내주는 매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음성과 시선의 같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사유에는 타자를 향한 추구로서의 에로스가 필요하다. "너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내 사유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타자"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것을 에로스, 즉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의 말에 따르면 신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신의 이름으로 부른다.  

 

- 그 결과 낯선 것, 다른 것의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익숙한 시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디지털 반향 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주관적 정신은 자신의 망막으로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디지털 화면은 경이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다. 익숙함이 증가할수록 정신을 활성화하는 경이의 잠재력이 모조리 사라진다. 예술과 철학은 낯선 것,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반을 철회하는 작업을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 말해 주관적 정신의 확정적인 네트워크로부터 타자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그 낯설게 하는, 경이로운 다름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술은 수수께끼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은 수수께끼의 성질을 통해 행동 객체의 의심할 여지없는 현존에 가장 단호하게 대립한다.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께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 첼란도 예술이 섬뜩한 것을 간직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을, 인간적인 것을 쳐다보는 섬뜩한 영역으로의 진입"을 낳는다. 예술의 제자리는 섬뜩한 것 속에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의 현존은 역설적이다. 시적 영상들은 탁월한 의미에서의 상상, 즉 영상을 불러오는 것 Ein-Bildungen이다. 시적 영상들은 "영상을 가져오는 것, 즉 익숙한 것의 장면 속에 낯선 것을 보이도록 편입시키는 것"이다. 문학에는 어둠이 내재한다. 어둠은 그 안에 간직되어 있는 낯선 것의 현존을 증언한다. 그것은 "어떤 만남을 위해 - 아마도 스스로 만들어낸 먼 곳으로부터, 혹은 낯선 곳으로부터 - 문학 안으로 불러들인 어둠"이다. 시적 상상, 문학적 환상은 낯선 것을 같은 것 속으로 편입시킨다. 낯선 것의 편입이 없으면 같은 것이 지속된다. 같은 것의 지옥 속에서 시적 상상력은 죽는다.  

 

- 오늘날 타자의 소리 없는 음성은 같은 것의 소음에 파묻힌다. 문학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타자의 추방으로 인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 시는 어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의 비밀 속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생겨난다.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 가고자 하고, 이 타자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도 상대다. 시는 어떤 사물을 호출하고, 이 사물을 그 다름 속에서 만나며, 사물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 시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로 나타난다. 

 

- 오늘날의 지각과 소통에서는 타자의 현존으로서의 상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모든 관심이 예고에 집중된다. 지각을 탈거울화 시키는 것, 상대와 타인과 타자를 향해 지각을 여는 것은 분명 예술과 문학의 과제다.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끈다. 이런 관심은 자기 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점점 더 타자로부터 유리되어 에고로 흘러간다. 오늘날 우리는 관심을 둘러싸고 가차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 영혼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영혼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영혼은 타자, 전적인 타자를 향해 기도하는 호출이다. 
 

-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 저자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매체로서 예술과 철학에 희망을 건다. 예술은 세상을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서술한다.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철학 또한 세상을 낯선 것으로 대한다. 이는 예술과 철학이 세상을 인지하는 지배적이고 익숙한 틀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철학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그 결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 

-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때로 한병철의 당대 분석이 어둡고 부정적인 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항이 불가능한 존재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들'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실로 신자유주의 체제는 수많은 비판을 낳고 있으며, 대중이 현실 속에서 체감하는 불행과 불안은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저항들이 진정한 저항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한 사람들의 저항은 규칙의 가혹함을 규탄할 수는 있지만, 규칙 자체를 전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 저자는 핵심을 찌르는 도발적인 문장들을 통해 우리의 성찰을 자극한다. 이 책은 흔히 간과되거나 의식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부정적 단면들을 예리한 관찰과 을 파고드는 비타협적인 비판의식으로 조명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 책의 가치는 이런 점에 있을 것이다.
 

 

 

더보기

 

  - 막스 셀러는 <사랑과 인식 Liebe und Erkenntnis>에서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가 "식물이 하나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특이하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다고 지적한다. 식물은 "인간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욕망한다. 식물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 인도하는 인식을 통해 구원과 유사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꽃이 자기 안에 충만한 존재를 지니고 있다면, 인간이 바라봐주는 데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꽃은 어떤 결핍을, 존재의 결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담긴 시선, "사랑이 인도하는 인식"이 꽃을 이런 결핍의 상태로부터 구원한다. 따라서 인식은 "구원과 유사한 것"이다. 인식은 구원이다. 인식은 타자로서의 대상에 대해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점에서 인식은 타자의 차원이 완전히 빠져 있는 단순한 인지 혹은 정보와 다르다. 

 

- 나는 텔레마티크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기술이며, 유대 기독교를 실행하게 해주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텔레마티크의 토대는 공감이다. 텔레마티크는 이타주의를 위해 휴머니즘을 파괴한다. "이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 거대한 일이다." 오늘날 네트는 모든 다름, 모든 낯섦이 제거된 특별한 공명 공간으로, 메아리의 방으로 변하고 있다. 진정한 공명은 타자의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타자의 가까움은 같은 것의 무간격에 밀려난다. 지구적인 소통은 같은 타자 혹은 다른 같은 자만을 허용한다. 

- 가까움에는 그 변증법적인 상대방으로서 멂이 새겨져 있다. 멂의 제거는 가까움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 대신 완전한 무간격이 생겨난다. 가까움과 멂은 서로 얽혀 있다. 변증법적인 긴장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사물들이 그 대립물, 즉 그 자신의 타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긴장의 핵심이다. 무간격과 같은 단순한 긍정성에는 이런 활력을 주는 힘이 없다. 가까움과 멂은 동일자와 타자처럼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매개한다. 그러므로 무간격도, 같은 것도 활력이 없다.

 

- 오늘날 진정성 Authentizität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하다는 것은 사전에 만들어진,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듣고, 자신을 엿보고, 자신을 포위하는 강제 말이다.

 

- 소비사회는 소비할 수 있는, 나아가 헤테로토포스적인 차이들을 위해 아토포스적인 다름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아토포스적인 다름과는 반대로 차이는 긍정성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생산과 소비의 형태인 진정성의 테러는 아토포스적인 다름을 철폐한다. 전적인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 나아가 같은 타자의 긍정성에 밀려난다.

 

-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 오늘날에는 성적 에너지가 무엇보다도 자아에 투자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축적은 대상 리비도, 즉 대상을 점유하는 리비도의 감소를 초래한다. 대상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결속을 낳으며, 그 대가로 자아를 안정화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누적은 병을 초래한다. 이는 두려움, 수치감, 죄의식, 공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낳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매우 강력한 과정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 경우 나르시시즘적으로 변한 리비도는 대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을 수 없고, 이렇게 리비도의 가동성이 방해받으면 병이 생겨난다.

 

- 오늘날 생산은 유일한 삶의 형태로 전체화되었다. 건강 히스테리는 궁극적으로 생산의 히스테리다. 그러나 건강 히스테리는 진정한 활력을 파괴한다. 건강한 것의 창궐은 비만한 몸의 창궐처럼 외설적이다. 그것은 병이다. 그것에는 병적인 것이 내재한다. 삶을 위해 죽음을 부정하면, 삶 자체가 파괴적인 것으로 바뀐다. 삶은 자기 파괴적으로 된다. 여기서도 폭력의 변증법이 확인된다. 

 

-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정신의 삶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힘"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 이 두려움은 깊은 권태와 비슷하다. 얕은 권태는 불안하게 "바깥을 향해 안달한다." 깊은 권태에 빠질 때는 현존재가 모조리 우리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불능 Versagen" 속에는 현존재에게 "여기 이곳에서 행동할 것"을 결단하라고 호소하는 "통지"와 "호출"이 들어 있다. 깊은 권태는 지금은 나는 권태를 느낀다는 상태 속에 방치되고 있지만 현존재를 움켜잡을 수도 있는 저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다시 말해 행동하라고 현존재에게 요구한다. 깊은 권태에는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말한다. 그것은 목소리가 있다. 과잉활동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권태에는 언어가 없다. 이 권태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 권태는 이후의 활동을 통해 제거된다. 그러나 활동한다고 해서 이미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소진 Burn-out에 대한 열광의 첫 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동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쓰러진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실현한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최적화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무엇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인가? 억압을 행사하는 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라는 제니 홀저의 유명한 말이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에게도 타자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사르트르는 시선을 인간의 눈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주시된다는 것은 오히려 세계 내 존재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세계는 시선이다. 나뭇가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반쯤 열린 창문, 혹은 커튼의 가벼운 움직임도 시선으로 지각된다. 오늘날 세계에는 시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주시된다거나 어떤 시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눈요기로 나타난다. 디지털 화면도 시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윈도우 windows는 시선 없는 창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시선으로부터 차단한다.  
 

- 억압적인 시선이 사라짐에 따라 기만적인 자유의 감정이 생겨난다. 이것이 훈육 사회의 감시 전략과의 결정적 차이다. 디지털 판옵티콘의 수감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한다고, 다시 말해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디지털 판옵티콘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착취한다

 

- 다니엘 파울 슈레버 Daniel Paul Schreber도 자신이 음성에 쫓긴다고 생각한다. 이 음성은 전혀 다른 장소로부터 울려 퍼진다. 슈레버는 "다른 쪽으로부터 시작되는, 초감각적인 연원을 암시하는 음성들의 교류"에 대해 말한다. 쉴 새 없이 그에게 말을 건네는 음성들은 신의 것으로 간주된다. "신이 음성의 장광설과 기적을 통해 매일 매시 나에게 새로운 것을 계시한다는 것은 내게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다." 슈레버는 적당한 기회가 오면 견디기 힘든 음성의 요설을 다른 소리로 뒤덮고, 그럼으로써 적어도 잠시나마 평온을 얻기 위해 심포니온 뮤직박스와 오르골 시계, 하모니카들을 사들인다. 음성은 망령이자 유령이다. 배제되고 억압된 것이 음성이 되어 귀환한다. 부정과 억압의 부정성은 음성이 생겨나는 데 필수적이다. 억압된 심리의 내용이 음성 속에서 되돌아온다. 억압과 부정의 부정성이 갈수록 허용과 긍정에 밀려나는 사회에서는 갈수록 음성을 듣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대신 같은 것의 소음이 더 커진다. 

 

- "우리가 죽음의 가까움을 파악하게 되는 고통 속에서, 그리고 여전히 현상의 차원에서 주체의 능동성이 수동성으로 역전된다." 죽음 앞에서의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레비나스가 에로스라고 부르는 타자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에로스는 "죽음과 흡사하다." 에로스는 "할 수 있음으로는 절대 번역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바로 이 수동성이 타자에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준다. 

 

- 할 수 있음 Das Können은 자아의 화법 조동사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할 수 있음의 전면화로 인해 자아는 타자를 볼 수 없게 된다. 이 전면화는 타자의 추방을 초래한다. 소진과 우울증은 파괴적인 할 수 있음이 남겨놓은 황무지들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다른 종류의 피로로, 타자를 위한 피로로 나타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피로 대신 무력함 lassitude이라는 말을 쓴다. "근원적인 무력함 lassitude primordiale"은 자아의 주도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근본적인 수동성을 말한다. 이 무력함은 타자의 시간이 시작되게 한다. 이에 반해 피로는 자아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어떤 능력도, 어떤 주도성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나는 타자 앞에서 허약하다. 나는 타자에게 허약하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약함 속에서 타자를 위한 욕망이 깨어난다. 타자는 자기-존재로서의 존재에 생기는 균열을 통해서만 존재의 약점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설령 주체가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주체는 타자를 찾는다. 욕구는 자아에게만 해당된다. 욕망의 운행 궤도는 자아 바깥에 놓여 있다. sich의 중력은 자아를 자신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끌어들인다. 욕망은 이 중력에서 벗어나 있다.  

-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만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 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리뷰자 주 : '더글러스 애덤스'의 '전자수도사'. 그리고 현대의 수많은 심리상담가들은 이미 '경청자'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다.)

-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쫓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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