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윌리엄 바이넘 / 박승만
원제 : History of Medicine : a Very Short Introduction
출판 : 교유서가
출간 : 2017.06.12
가볍게 읽으려고 꺼냈다가 생각보다 열심히 읽게 되었다.
흔히 서양의학사를 다루는 책들은 시대순으로 흘러가며 일종의 역사적 분기점이 되는 '발견', 혹은 지금은 사라진 당대의 특이한 '믿음'을 위주로 풀어나간다. 그렇지 않다면 다 외우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의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했던 연구들을 나열하는 형태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른 형태의 접근을 시도했다. 다섯 가지 영역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직접적인 치료활동을 의미하는 머리맡,
각종 의료 기록과 자료들을 연구하는 도서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넘어서 집단적이고 전문적인 치료를 시도한 병원,
질병의 치료뿐 아니라 예방의 영역까지 의도하기 시작한 지역사회,
그리고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 새로운 진리의 연구가 이루어지는 실험실.
이 다섯 분류는 대체로 시대 순으로 흘러가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최초로 그 개념이 생성된 이후로는 어느 시점에서나 각 영역은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각자의 성취들을 교류하며 전체 의학의 진보를 이루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의학은 많은 영역을 정복해왔다. 이제는 적어도 장미가시에 찔려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멀어진 질병의 대다수는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엔가는 존재하고 있으며, 새롭게 등장하는 질병들도 적지 않다. 진실로 붉은 여왕의 역설이다. 모든 종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고, 인류는 이 영역에서 아직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하지는 못하고 있다. 의학은 진정 진보의 길을 걷고 있는가?
수많은 이들의 자신의 삶을 바쳐 한 걸음씩을 내디뎌 주었고, 그 다음 세대들은 그들의 걸음을 이어 걸으며 알게 모르게 그 수혜를 누려왔다. 현재의 우리가 내디딜 수 있는 지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한 보다 많은 이들이 잘못된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좀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들을 취해야 할까.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개인의 책임이 되어가고 있는 현시대다. 바디 프로필이 유행하는 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이중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 빛나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혹은 일종의 도전과 성취로 시도하고 싶은 마음 등 각자의 욕구는 다양할 것이다. 그것들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좋은 경험이고 성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흐름이 일종의 시대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회가 '최상의 건강 상태를 추구하세요. 그것은 당신의 책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유행에 녹아든 그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공공은 개인의 건강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부담을 져야 적절한지. 건강보험과 연금보험의 재정난 뉴스와 더불어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많이 웃고, 좋은 것도 먹고, 잘 자고 잘 지낼 수 있었으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방향이 의학의 진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질병들이 너무 잘 예방이 되어 의학이 관심사에서 조금씩 잊혀져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태평성대였던 요순 시대에는 삶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워 왕이 누군지조차 몰랐다는 그 말처럼.
그런 삶이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심이 아닌
각자가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꾼다.
일단은, 건강하자.
- 의학의 다섯 가지 유형, 즉 머리말, 도서관, 병원, 지역사회, 실험실 의학의 구분은 각 유형이 이루려는 목표와 실행되는 장소를 기준으로 삼는다. 시대에 따른 구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와 함께 시작된 머리맡 의학은 현재의 일차의료에 조응하며, 중세의 도서관 의학은 의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는 정보량의 폭발적인 증가와 상통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확장된 형태의 머리맡 의학이라 할 수 있는 19세기 병원의학은 지금 보기에도 그리 낯설지 않은 각종 진단 장비와 치료 설비, 전문 인력 등을 특징으로 한다. 지역사회 의학은 정수 처리와 폐기물 관리, 예방접종, 사업장 보건 및 안전 감독 등의 환경 인프라뿐 아니라, 섭생과 생활습관, 유해물질과 같은 요인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 등을 포괄하여 다룬다. 마지막으로, 이름 그대로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실험실 의학은 새로운 약과 신체의 여러 작동 기전을 탐구함으로써 진단과 치료에 이바지한다.
- 체액은 피, 황담즙, 흑담즙, 점액으로 분류되며, 도판 2의 도식에서도 보이듯 건강과 질병을 이해하는 강력한 개념틀을 구성한다. 체액설은 또한 기질 이론의 바탕이 된다. 고대인들은 기질을 통해 각 개인의 성격이 어떠한지, 또 어떤 병에 걸리기 쉬운지 파악하고자 했다. 네 체액은 온, 냉, 건, 습의 성질을 나누어가지며, 이는 병의 경과와 개개인의 생애 주기를 예측하고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피, 황담즙, 흑담즙, 점액은 각각 공기, 불, 흙, 물이라는 네 원소에 연결된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달 아래 세계는 네 원소로 구성된다. 이곳에서 만물은 변화하고, 노화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달 너머 세계는 다르다. 다섯 번째 원소로 이루어진 천체의 세상은 완전한 원운동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공간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몸은 네 원소의 영역에 속한다. 그리스의 체액설은 건강과 질병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틀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과학적 의학이 체액설을 대체하기 전까지, 의사들과 일반 대중은 체액설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했다.
- 체액설에 기반을 둔 의학에는 해부학이 필요치 않았다. 장기와 같은 고체가 아니라, 액체인 체액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 또한 나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각 종류의 체액은 저마다 하나씩의 장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점액은 뇌에, 피는 심장에, 황담즙은 간에, 그리고 흑담즙은 비장에 해당되었다. 외과 영역에서도 장기는 중요한 주제였다. <전집>의 일부 저작은 골절이나 탈구된 관절의 정복(復), 상처의 치료, 간단한 수술 등을 주제로 하며, 체액이 아닌 여러 장기에 초점을 둔다. 예나 지금이나 수술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전인적이었으며, 체액의 변화를 먼저 살폈다. 체액설은 서양의학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균형과 절제이다. 히포크라테스 주의자들은 건강이 체액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따르면 특정 체액이 지나치거나 부패하게 되면 신체는 병에 걸리고 만다. 물론 체액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자연적인 방법도 존재한다.
- 이슬람의 땅에서도 병원은 중요한 시설이었다. 11세기 무렵 병원은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하였고, 때로는 눈병 환자나 광인을 위한 병동과 같이 독립된 분과를 두기도 했다. 수많은 학생이 의학을 배우기 위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의 병원과 비교하면 조금은 더 '의학적'인 색이 강했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병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때로는 자선 시설이기도 했고, 또 유행병이 돌 때는 격리 시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상이 되었던 질병은 흑사병과 나병 두 가지였다. 나병 환자를 수용했던 격리 병원은 라자레토(lazarettos)라 불렸는데, 이는 <루가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라자로(Lazarus)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흑사병이 크게 유행했던 14세기 이후, 라자레토는 주로 흑사병 환자를 격리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나병은 잔인함과 사랑의 기묘한 결합이라는 중세 기독교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병으로 진단받는 순간, 환자는 사회에서 추방되는 동시에 법적으로도 망자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배우자가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할 정도였다. 환자에게는 격리와 구걸의 삶이 강요되었다. 대부분은 라자레토에 수용되었으며, 라자레토 밖으로 나올 때는 의무적으로 딸랑이를 달아야 했다. 사람들에게 '육체와 정신의 오염원'이 다가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수사와 수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헌신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이 또한 종교의 힘이었다.
-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 유럽 전역에서 나병은 굉장히 흔한 병이었다. 그러나 나병은 잇따른 흑사병의 유행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공동생활은 유행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나병 병원은 흑사병 병원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평생을 앓아야 하는 만성질환인 나병과 달리, 흑사병은 급성질환인 데다 일부 회복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흑사병이 사라지면서 흑사병 병원, 특히 남부 유럽의 흑사병 병원은 다른 용도의 의료 시설로 전환되었다. 한편, 흑사병이 계속 유행하던 중동에서는 여행자 등을 검역하는 용도로 계속 활용되었다.
- 화학을 의학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스위스의 괴짜 천재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에게서 비롯하였다. 사실 파라셀수스는 남들에게 알려진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다. 테오프라스투스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봄바스투스폰 호엔하임(Theophrastus Philippus Aureolus Bombastus vonHohenheim)이라는 부르기도 버거운 이름이었다. 원래 이름을 두고 굳이 별명을 쓴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일설에 따르면 로마의 유명한 의학자 '켈수스(Aulus Cornelius Celsus, 서기전 25?~서기 50?)를 뛰어넘겠다'는 의도로 자신을 파라셀수스라 불렀다는데,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파라셀수스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보여준다. 의학과 과학이 근대인에 의해 다시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파라셀수스는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에게 기대지 않았다. 바젤 대학 의학부에 재직하던 짧은 기간에는 저항의 뜻으로 갈레노스의 의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버리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주의로 전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마르틴 루터의 개혁에 어떤 영향을 받은 듯하다. 파라셀수스는 배움이란 책이 아닌 자연에 있다고 말했다. 정작 자신은 살아생전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발표했지만 말이다.
- 두 번째 특징은 화학에 대한 강조다. 그는 화학을 통해 인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내고, 약을 지으려 했다. 전통적인 식물성 약재뿐 아니라, 수은이나 비소와 같은 금속 물질도 약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를 따르는 의화학자 무리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파라셀수스는 종종 세균 이론의 선구자로 해석되기도 한다. 질병을 몸 바깥의 무엇이라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파라셀수스는 자연을 신비주의와 연금술을 통해 이해하려 했을 뿐이다. 살아 있을 때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끝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기인(奇人)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 아무튼, 파라셀수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100여 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화학의 언어로 의학의 이론과 실제를 다시 쓰려했다.
- 기나피는 시드넘의 질병관을 뿌리부터 흔들어놓았다. 여전히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체액설에 익숙했던 시드넘이었지만, 기나피와 간헐열의 관계는 어딘가 달랐다. 환자와 질병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이론과 달리, 기나피는 간헐열 환자 모두에게 효험을 보였다. 시드넘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식물학자들이 식물을 분류하듯 질병 역시 종류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환자가 보이는 증상의 차이는 외려 우연의 결과일 뿐이었다. 제비꽃도 저마다 조금씩은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시드넘은 이렇게 썼다.
'자연은 질병을 만들어냄에 있어 한결같고 일관되다. 그러하기에 서로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은 질병이라면 증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증상을 얼간이에게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후대의 의사들은 시드넘을 따라 질병을 분류했다. 질병은 환자로부터 분리되어 탐구되었고, 각 질병에 공통된 요소를 조망함으로써 치료를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드넘은 언제까지나 자신이 히포크라테스의 충직한 추종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어떠하건 간에, 시드넘은 근대 의학에 하나의 딜레마를 던져주었다. 과학에 기반을 둔 일반화된 지식을 개별의 환자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질병의 지도를 그리는 일은 계몽주의 의학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 질병은 환자의 증상에 따라 분류되었고, 진단이 이루어질 때도 의사는 환자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의학은 환자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환자가 우위에 있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물론 이는 과장일 수도 있다. 19세기와 그 이후의 의학 역시도 의사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럼에도 근대의 여러 진단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환자들은 진단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환자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혈압과 혈당이 높다는, 혹은 흉부 영상에서 의심스러운 음영이 보인다는 소식을 듣곤 한다. 앙시앵레짐 시기, 환자와 의사는 같은 언어와 같은 개념을 공유했다. 의사와 환자의 단어 꾸러미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 비샤는 오늘날 '조직학의 아버지'로 추앙된다. 장기의 종류와 무관하게 조직의 종류만 같다면 병리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막(膜)은 심장과 뇌, 흉강, 복강 모두에 존재하지만, 병리적 상태에서 같은 유형의 변화를 드러낸다. 비샤는 작은 확대경과 맨눈을 통해 인체 조직을 골조직과 신경조직, 섬유조직, 점액조직 등 21가지의 종류로 분류해냈다. 그에 따르면, 정맥과 동맥 역시 특별한 종류의 '조직'이었다. 단순한 관찰을 넘어 병리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의 탐구에 골몰했다는 점에서 비샤는 파리의 여느 의사들과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짧았던 그의 삶은 병동과 검시소가 있는 병원을 벗어나지 않았고, 깊은 생각과 왕성한 활동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리뷰자 주 : 이 책은 주석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원저자가 본문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짚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하단에 배치하지 않은 것은 원저자에 대한 신뢰도를 배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사소한 오류들이긴 하지만, 놓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원저자가 진료의로서의 경험이 있을까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추가로, 용어 선택 및 번역의 질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는데 -술파제 제외- 역자 또한 의학자라 국내의 용어들로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듯 하다. 감사 드린다.)
-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인두법은 더욱 간단하게 개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 루이 16세가 인두를 접종하였고, 이에 따라 보급률은 더욱 올라갔다. 그러나 간단하고 편리하다는 장점에도 인두를 맞은 사람들이 외려 천연두로 사망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병을 퍼뜨리고 다니는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 제너는 새로운 발견을 담아 논문을 투고했지만, 왕립협회는 게재를 거부했다. 결국 1798년 제너는 사비를 털어 글을 발표했다. 제목은 '백신', 소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vacca'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은 곧 반대를 마주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우두법이 동물에서 나온 물질로 사람을 '오염시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역사가들은 초기 우두법의 결과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당시 사용되었던 두묘가 천연두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는 우두법이 아닌 인두법이 된다. 아무튼, 제너의 업적은 영국 안팎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제너는 영국 의회로부터 두 번의 상을 받았고, 백신의 확산이라는 대의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다.
- "예방할 수 있다면, 왜 아직 예방되지 않았소?" 훗날의 에드워드 7세가 의사들에게 물었다. 좋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질문이 좋다고 답까지 명쾌할 수는 없다. 오히려 비용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정치적 혹은 의학적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균등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딘가 맥 빠지는 답이 현실에 가깝다. 제너의 예견처럼 천연두는 1979년에 박멸되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의학의 여러 영역 가운데, 질병을 예방하는 일은 늘 찬밥 신세였다. 사실 산업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는 그보다 더 시급한 일도 없지만 말이다.
- 질병은 이러한 방식으로 한 가족을 가난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명제의 역은 어딘가 미묘했다. 질병이 가난을 일으킨다면, 가난은 질병의 원인일 수 있을까?
-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직후인 1860년대 초반에는 자연발생을 주제로 한 유명한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 유명한 백조목 플라스크가 사용된 실험이었다. 파스퇴르는 플라스크 내부의 용액을 가열하여 멸균한 뒤, 공기를 통해 미생물이 들어올 수 없도록 주둥이를 길게 늘였다. 그는 이로써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주장을 반박하였고, 공적인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결과는 달랐다. 분명 파스퇴르를 따라 같은 실험을 반복했지만, 그들의 플라스크에서는 때로 미생물이 무리지어 자라곤 했다. 실험실 기록을 찾아보면 파스퇴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신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그는 조용히 기록을 지워버렸다. 파스퇴르는 당시 탄저균과 유사한 고초균을 연구하고 있었다. 고초균은 포자 형태에서 열에 저항성을 보이는데, 아마도 이것이 파스퇴르의 실험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했고, 이렇게 상대편을 무찌를 수 있었다. 언제나 옳은 편만을 기가 막히게 선택하던, 그리고 그렇게 고른 입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던 인물이었다.
- 광견병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양법조차 확실치 않은 미생물이었다. 파스퇴르는 광견병이 신경계를 침범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토끼의 척수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광견병의 '독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잠복기는 또 다른 기회를 의미했다. 광견병에 걸린 동물에게 물린 시점과 증상이 발현하는 시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이 기간에 병을 이겨낼 힘을 기를 수 있다면 광견병을 치료하는 일도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만약 오늘날이라면 파스퇴르의 연구는 계획서 단계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당대에는 광견병이나 바이러스에 대해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만약 고대 그리스인이 파스퇴르를 보았다면, 필경 '오만'이라는 단어를 읊조렸을 테다. 그렇다면 파스퇴르는 그리스비나오는 영웅들의 전철을 밟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결국 광견병 백신을 만들어냈고, 이로써 이름 있는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를 넘어, 과학의 성인 성 루이가 되었다.
-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이 화학반응을 통해 얻은 물질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나날이 높아만 가는 실험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에테르는 미국이 의학 부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이기도 하다. 누가 먼저 에테르를 발견했는지, 또 누구에게 특허권이 있는지와 같은 지저분한 문제로 얼룩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에테르를 이용한 최초의 공개 수술은 1846년 10월 16일,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시행되었다. 소식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각국의 의학사는 새로운 물질을 이용한 '최초의' 무슨무슨 수술로 채워졌다. 에테르가 도입된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클로로포름이 나타났고, 그 이후에도 새로운 마취제를 향한 연구가 이어졌다.
- 어떠한 혁신도 논쟁을 피할 수는 없다. 마취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은 분만에 마취제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따르면 출산의 고통은 이브에게 내려진 징벌이었다. 일부 군의관도 부상으로 고생하는 병사들이 수술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고통으로 인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취제로 인한 사망 사건이 새로운 물질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부분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취의 역사 서막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취법이 퍼져나간 속도이다.
- 리스터는 파스퇴르의 논문에서 소독법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생물이 발효와 부패와 같은 생명현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였다. 리스터는 자신이 인용한 파스퇴르의 통찰에, 석탄산 즉 페놀을 활용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더했다. 하수를 살균하는 데 쓰이는 물질이라면, 수술 부위도 능히 소독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었다. 마침 개방 골절 환자가 있었고, 새로운 기법이 시험 삼아 시행되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나오는 경우에는 그저 절단만이 답이던 시절이었다. 상처를 봉합하고 다리나 팔을 보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처음에는 소독법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리스터는 초기의 작업을 가다듬어 소독법을 세균 이론 위에 올려놓았다. 파스퇴르가 자연발생에 대한 실험에서 보여주었듯 상처를 감염시키는 오염원은 공기 주위의 먼지를 타고 날아오며, 석탄산으로 상처를 소독함으로써 오염원을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소독법은 좋은 효과를 보였고, 리스터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외과 의사 일부의 반대가 뒤따랐다. 상처를 닦기만 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 무균법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무균법을 바탕으로 외과 의사들은 마침내 복강과 흉강, 두개강을 메스로 열어젖혔다. 19세기 말이 되자 외과학은 매력적인 분야로 거듭났다. 이처럼 코흐와 같은 인물들이 세균학 실험실에서 개발한 여러 기술은 수술실이라는 내밀한 공간에서 꽃을 피웠다. 복강과 흉강, 두개강이라는 금지된 공간의 문이 열렸지만, 외과 의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과다 출혈이나 감염과 같은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입과 항문을 통해 외부와 연결된 위장관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달리 무균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외과 의사들은 일단 환자를 보면 수술 날짜부터 잡으려 했다. '자를 수 있다면 고칠 수 있다'는 새로운 격언에 사로잡힌 그들이었다. 내과 의사들이 어쩔 수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병도, 외과 의사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오늘날과는 다른 시절이었다. 관리 제도는 미비했고, 환자와 의사의 관계도 어딘가 체계적이지 못했다. 외과 치료의 대상도 요즘과는 사뭇 달랐다. 히스테리나 월경통을 이유로 난소를 제거하고, 변비나 만성피로를 이유로 창자를 잘라내던 때였다. 편도 역시 이런저런 불편을 예방한다는 이유로 수시로 절제되곤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이런 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국소 감염' 이론이 유행했다.
- 베르나르가 생각하기에, 실험의학은 정상 기능을 탐구하는 생리학과 이상 기능을 연구하는 병리학, 치료법을 강구하는 치료학의 세 기둥 위에 놓여 있었다. 베르나르의 업적 역시 세 분야 모두에 걸쳐 있다. 하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철저한 실험을 거친, 다시 말해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연구라는 점이다. 베르나르에 따르면, 현장 조사나 부검, 임상에서의 관찰 등은 자료를 얻고 연구 주제를 잡는 데까지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학의 핵심 목표는 기전과 원인을 밝히는 데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실험실에서의 탐구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 이에 따라 세계 보건기구는 1950년대부터 몇십 년간 천연두와 말라리아 문제에 몰두했다. 1955년에는 세계 보건기구 총회를 열어 말라리아 프로그램의 시행을 승인했는데, 그 배경에는 디디티(DDT)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개발되어, 전장의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를 막는 데 요긴하게 사용된 바로 그 살충제다. 영국의 로스와 이탈리아의 조반니 바티스타 그라시(Giovanni Battista Grassi, 1854~1925)가 얼룩날개 모기의 역할과 열원충의 생활 주기를 밝힌 이후, 말라리아는 금방이라도 박멸될 것만 같았다. 모기가 서식하는 습지를 말리고, 기름을 뿌린 다음 일종의 모기 순찰대인 '모기 여단'을 조직하여 더 이상의 번식을 막는다면, 말라리아 정도야 우습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전망이었다. 게다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는 퀴닌까지 있지 않은가. 삶의 마지막 30년을 보내며, 로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충분한 자원만 있다면 말라리아는 예방될 수 있다. 지식은 이미 마련되었고 필요한 것은 오직 의지와 예산뿐이다.
- 디디티의 등장과 함께, 수직적 프로그램에 대한 이런저런 근심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저렴한 데다 분사 후에도 잔류 효과를 나타내는 디디티는, 말라리아에 대한 기술의 승리를 약속했다. 몇십 년 안에 말라리아를 박멸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예외 지역도 있었지만, 워낙에 유행이 지독한 곳이었다. 그리고 전후의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분사 기구가 배달된 곳에는 디디티가 없고, 디디티가 배달된 곳에는 분사 기구가 없었다. 현장 작업자를 훈련하는 일도 더디고 고생스러웠다. 지역의 상황에 따라 프로그램은 성공하기도, 또 실패하기도 했다. 여기에 환경 운동의 반대가 더해졌다. 1962년에 출간된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의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을 필두로 많은 사람이 디디티의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고, 1960년대의 저항운동은 디디티로 수익을 올리는 대기업의 활동에 비난을 퍼부었다. 설상가상, 디디티에 내성을 가진 모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1969년이 되자, 말라리아 박멸 계획은 억제 계획으로 슬며시 이름을 바꿔 달았다.
- '생활습관 의학'은 이미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들어와 있다. 새로운 조어가 만들어진 후 겨우 20년 만의 일이다. 지역사회의학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생활습관은 개개인의 건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건강과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크게 좌우된다. 사실 의학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살건 결국 의사가 우리의 몸을 고쳐주리라 믿었다. 항생제, 진정제, 호르몬제, 피임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약이나 수술과 같은 치료가 있기에, 건강의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의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오늘날, 모두가 건강한 그날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예전만 같지 않다. 알코올 중독과 흡연, 약물 남용, 성병, 비만, 기름지고 짠 패스트푸드, 공장식 농업을 비롯한 현대 서구 사회의 낡고 새로운 특징들이 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환자에게 권력의 일부가 이양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다. 환자는 이제 건강에 대한 책임도 나누어 갖는다.
-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퍼시 스노(Charles Percy Snow, 1905~1980)는 '두 문화'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문화 일반에 대한 과학자의 무지보다 과학에 대한 비과학자의 무지가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1959년 이전부터 스노의 주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무지 자체야 특별할 게 없지만, 과학과 의학에 대한 무지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한 탓이다.
(리뷰자 주 : '무지'라기보다는 '정보격차'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자료나 책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 그렇게 탈리도마이드는 적절한 시험을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출시되었고, 40여 곳이 넘는 나라에서 모두 수천 명의 산모가 이 약을 복용했다. 예외적으로 미국에서만큼은 시중에 풀리지 않았는데, 약의 효능에 의문을 품은 담당자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식견이었다.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사지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신약에 대한 안전 규정이 재정비되긴 했지만, 제약 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행하게도 비극 이후, 그 정도 규모의 사건이 되풀이된 적은 없다. 부작용이 드러나자마자 재빨리 회수된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겠으나, 현대의 제약 산업은 여러 다국적 기업이 주도한다. 작은 회사는 큰 회사에 인수되어 합병되고, 연구와 개발보다는 홍보와 판매에 더 많은 돈이 투자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처방약에까지 광고가 들러붙어 제약 산업 전반에 작지 않은 충격을 준 바 있다. 한편 신약에 대한 투자는 그리 많지 않아서 이미 존재하는 약을 조금 변형시켜 되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연구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서구의 질병에 집중될 뿐이다. 가난한 나라의 질병은 투자에 비해 이익을 거둘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 연구는 오래도록 혹은 평생토록 약을 먹어야 하는 만성 질환에 몰리게 마련이다.
(리뷰자 주 : 예전에 인상 깊게 봤던 <콘스탄트 가드너>가 떠오른다.)
- 오늘날 보완대체의학의 지지자들이 전인적 관점에 집중한다면, 현대의 과학적인 의학에 조응하는 특징도 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자연주의이다.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와 같은 고대 근동의 의학에서는 신앙과 치유가 연결되어 있었다. 사제와 의사를 겸하는 일도 예사였고, 질병은 신의 진노나 죄악, 또는 초자연적인 힘의 결과로 여겨졌다. 진단 역시 기도를 올리거나 동물의 내장을 살피는 방식으로, 혹은 계율을 어긴 지점을 되짚어보는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의 의학은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리스에도 존재했다. 그리스 문화권 전역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코스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이름 높은 사원은 본토의 에피다우로스에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원형이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다. 사원은 상주하는 사제에 의해 운영되었다. 환자들은 사원에 찾아가 신성한 뱀과 함께 밤을 보내고 사제에게 간밤의 꿈을 이야기했으며, 사제는 그를 바탕으로 나름의 진단을 내려주었다. 사실 옆에 뱀을 두고 잠을 잤으니, 꿈자리가 평소와 같을 리 없었을 테다. 그런데 왜 하필 뱀이었을까?
- 우리는 무엇보다도 뇌를 통해 생각하고 보고 들으며,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나쁜 것과 좋은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을 구별한다. 뇌가 정신 현상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플라톤은 히포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정신 활동이 뇌에서 일어난다고 여겼지만,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과 같은 정신기능이 심장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화를 내거나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뇌가 아닌 가슴의 두근거림을, 다시 말해 심장의 박동을 느끼지 않는가 발생학적인 근거도 있었다. 닭의 발생 과정을 살펴보면, 생명은 심장박동을 통해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발생학에 정통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했다. 2000년 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썼다.
'사랑의 환상이 싹트는 곳, 가슴인지 머리인지 말해줘요.'
'가슴이 아리다'와 같은 말에서 보이듯, 우리의 언어는 여전히 '가슴', 그러니까 '심장'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 의학사의 맥락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기관은 대학이다. 사실 11 세기 후반부터 존재했던 살레르노 의학교는 그저 의사를 훈련하는 양성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180년경 볼로냐 대학을 시작으로 1200년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 1218년경의 살라망카 대학 등 수많은 대학이 지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살레르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은 늘고 늘어 15세기 후반 유럽에는 50여 개의 대학이 존재했다. 대학은 저마다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교양학부와 신학부, 법학부, 그리고 의학부를 두었다. 다른 학부와 비교했을 때 의학부는 규모도 작고 졸업생의 수도 미미했지만, 결과적으로 학문으로서의 의학과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나타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은 '도서관 의학'의 정수가 깃든 곳이었다. 대학에서의 의학교육은 고전 및 이슬람의 의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경험이나 실습보다는 학문적인 논쟁을 중심으로 했다.
-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등장하면서 의료인 사이에는 계서가 생겼다. 19세기까지 계속될 질서의 탄생이었다. 많은 돈과 오랜 시간이 필요한 대학 교육을 바탕으로, 의사들은 신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런던의 왕립의사협회 회원은 진료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손을 쓰는 일은 신사가 아닌 계서의 아래에 놓인 외과의와 약재상이 맡았다.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라틴어를 읽고 갈레노스와 이븐시나를 논하는 동안, 외과의와 약재상은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의사가 그러했듯 도제를 통해 선배의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 물론 개중에는 대학 교육을 받거나 학식과 부를 갖춘 외과의와 약재상도 있었다. 경계는 언제나 불분명했고, 시골에서는 의사들이 스스로 약을 짓고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일반의의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상황은 달랐다. 직군 간의 구분은 엄격했고, 여러 의사와 대학의 교원이 한데 모여 계서제를 수호했다. 도시의 외과의는 동물을 도축하거나, 빵을 굽거나, 양초를 만드는 이들처럼 길드를 조직했다. 의료 체제가 기틀을 갖추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의료인 사이의 위계만큼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훗날의 일이지만, 견고하던 위계는 의학 지식의 발전과 함께 의사에게 맡겨진 일이 바뀌게 되면서 비로소 무너졌다.
-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공개 해부는 해부학자 몬디노 델리우치(Mondino deLiuzzi, 1270?~1326)의 집도 아래, 1315년 볼로냐에서 진행되었다. 이듬해 델리우치는 최초의 근대 해부학 저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부가 보통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한 세기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해부대에 올라갈 시신을 수급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의학 교육이 해부를 백안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대의 흐름은 해부를 향했다. 15세기부터는 더 많은 해부가 이루어지고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인체 안팎의 생김새에 관심을 기울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해부도가 대표적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탓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 초창기 해부학자 가운데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Vesalius, 1514~1564)의 이름을 빠뜨릴 수는 없다. 베살리우스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파도바 대학에서 해부학과 외과학을 가르친 인물로, 1543년에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De humanicorporis fabrica>를 출간하였다. 본문이 아닌 도판에 중점을 둔 최초의 저작이었다.
-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저작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전통적인 방식의 해부학에 만족하지 않았다. 무엇이건 직접 손으로 해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마음속에는 갈레노스에 대한 의심이 싹트게 되었다. 물론 갈레노스를 향한 최초의 도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판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조심스러웠던 태도는 확신과 함께 점차 대담해졌다. 우심실과 좌심실 사이의 심실중격은 하나의 예였다. 갈레노스의 생리학에 따르면 심실중격에는 작은 통로가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구조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의 간이 네다섯 개의 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갈레노스의 설명 또한 사실과 달랐다. 베살리우스는 흉골과 자궁을 비롯한 다양한 장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 계몽주의 의료의 특징을 두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먼저 강한 기업가 정신이다. 건강은 중요했고,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다. 야망이 있거나 정직하지 못한 의사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사실 '돌팔이'와 '정식 의료인'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돌팔이'라 해서 반드시 동시대 의료 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정식 의료인' 역시 치료제를 광고하고, 자신만의 비방(方)을 사용하며, 환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입소문을 흘리기도 하는 탓이다. 돌팔이들은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주류의 언어를 사용했다.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를 들먹이는 일도 많았다. 다만 파라셀수스는 예외였다. 그는 이론뿐 아니라 의학의 전통을 싸잡아 거부했기 때문이다. 파라셀수스는 정말이지 반역사적이었다. 돌팔이 대부분은 익숙하고 전통적인 것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포장했다.
- 의학사의 맥락에서 '병원 의학'이라는 말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물론 병원의 등장은 중세 초기의 일이고, 의료의 역사는 더욱더 장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1789년과 1848년 사이의 프랑스, 특히 파리의 의학을 '병원의학'으로 요약하곤 한다. 당대의 파리는 그야말로 의학의 메카였으며,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병원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병원에서 교육과 진료에 사용되던 여러 도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던 의학적 사고방식은 서구 세계 전반을 사로잡았다. 이 시기의 일은 때로 '의학 혁명'이라 일컬어진다. 그 기원이 정치적 혁명에 있으니 썩 알맞은 표현이다. 일각에는 이를 '혁명'이 아닌 '진화'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견해도 있다.
- 교육 체계나 의료 행위, 의사와 환자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을 때, '병원의학'의 선례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1840년대의 의사들은 선배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분명 파리 의학의 영향이었다. 여느 혁명과 마찬가지로, 파리의 의학 혁명은 사소한 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치와 군을 장악한 혁명 세력은 의사와 외과의, 병원, 그리고 대학 등을 앙시앵 레짐의 유산이라 규정하고 곧 폐지해버렸다. 이와 함께 의료인의 자격을 규정하던 여러 조건 역시 사라졌다. 혁명의 지도부가 보기에 계서제와 불평등의 폐지는 곧 특권과 부패의 일소를 의미했다. 폭풍과도 같던 1790 년대 초반, 원한다면 그 누구든 곧바로 의료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낙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질병은 사라지지 않았고, 혁명정부는 곧 군인과 선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군대는 또한 내과뿐 아니라 외과에도 능한 의사를 요구했다. 내과와 외과를 구분하는 오랜 이분법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794년에 세 개의 의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새로운 공화국에서 복무할 군의관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 시대상에 걸맞은 새로운 의학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 국민의회는 의사이자 화학자인 앙투안 푸르크루아(Antoine François Fourcroy, 1755~1809)를 발탁했다. 혁명에 동조적이었던 그는 이미 화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곧 만들어진 파리의 새로운 의학교에서도 화학을 가르칠 것이었다. 기민한 정치적 감각과 진실한 인품을 바탕으로, 그는 파리와 스트라스부르 몽펠리에의 의학교 설계를 책임졌다. 군사적 필요성에 방점을 둔 그의 보고서는 새로운 의학 교육이 갖추어야 할 특징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먼저 그것은 무엇보다 실용적이어야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학생은 적게 읽고, 많이 보고, 많이 해보아야 했다. 이론의 폐기와 실습의 강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의학 교육은 병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경험의 양과 질이라는 면에서, 병원에 비견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의학도는 내과와 외과 모두를 배워야 했다. 이는 외과적 사고의 적극적 수용을 의미했다. 전통적으로 의사가 신체 전반과 체액, 영혼, 그리고 질병의 총체적인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외과의는 언제나 국부적인 문제와 씨름했다. 그들은 농양이나 골절과 같이 특정 부위에 한정된 질병을 다루었다. 이로써 질병에 기인한 병리적 변화를 의미하는 '병변'이라는 개념이 의학적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의사들은 외과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웠고, 신체의 각 장기가 새로운 의학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 환자의 흉강이나 복강을 두드려보는 타진은 신체검사의 세 번째 요소이다. 1761년, 빈의 의사 레오폴트 아우엔브루거(Leopold Auenbrugger, 1722~1809)는 <새로운 발견 Inventumnovum>이라는 소책자를 남겼다. 그 이전에 타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긴 기록 속에만 남아 있었으며, 그렇기에 '새로운 발견'이라는 말은 정당할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우엔브루거는 종종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곤 했다. 지하 창고에 있는 술통에 포도주와 맥주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아보라는 주문이었다. 양초를 켜고 뚜껑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어린 아우엔브루거는 술통의 옆을 두드려 그 양을 어림짐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소리는 수면을 기준으로 확연하게 달랐다. 후에 의사가 된 그는 같은 방법을 통해 심장과 간의 비대나 흉강과 복강에 저류된 체액의 존재를 알아냈다. 한편, 아우엔브루거의 소책자는 고전이 이른바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가들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의 책은 처음 출판된 후 40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세기의 의사들에게 장기는 그다지 중요한 의학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화는 프랑스 의학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다.
- 주치의이자, 파리 의학교의 교수였던 장 니콜라스 코르비자르(Jean-Nicolas Corvisart Desmarets, 1755~1821)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그는 당대의 여느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장기를 중심으로 한 의학관을 공유했고, 특히 심장질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곧 심장비대와 심낭액저류와 같은 병의 진단에 타진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코르비자르는 학생들에게 타진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08년에는 아우엔브루거의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본문의 세 배가 넘는 주석에는 새로운 진단법의 중요성이 분명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여담이지만, 2년 앞서 출간된 코르비자르의 논고 역시 주목할 만하다. 어떤 학생이 기록한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원고였다. 여기에서 코르비자르는 당대의 의학 수준으로는 도저히 심장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투의 비관적인 결론을 내려놓았다. 맞는 말이었다. 사망률은 높았다. 입원한 환자들은 대부분 중병을 앓는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이었고, 병원은 그들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병원은 '죽음으로의 관문'이기도 했다.
- <새로운 발견>은 나폴레옹의 타진 이후, 청진이라는 가장 혁신적인 진단법이 추가되었다. 이전부터 의사들은 환자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왔다. 천명이나 심장잡음, 그리고 장음 등과 같은 소리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의사들은 환자의 흉부나 복부에 귀를 직접 가져다 대곤 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접' 청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의사의 귀와 환자 사이에 무언가가 놓여 있다면, 그것은 '간접' 청진이 된다. 맞다. 재능 있는 의사 르네 라에네크(René-ThéophileHyacinthe Laënnec, 1781~1826)가 개발한 청진기가 바로 그것이다.
- 라에네크의 경력은 한 사람의 삶에 바깥 환경이 미치는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유능한 개업의였고 동시에 언론인이자 편집인으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라에네크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제1공화국과 제1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가톨릭 신자이자 왕당파였던 그에게 분명 유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정이 돌아온 후에야 라에네크는 비로소 병원과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루는 어떤 젊은 여자가 병원에 찾아왔다. 가슴에 직접 귀를 가져다 댈 수없었던 라에네크는 들고 있던 공책을 돌돌 말았고, 오히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직접 청진보다 소리를 더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청진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는 곧 간단한 형태의 청진기를 고안했다. 속이 비어 있는 나무관에 서로 다른 높이의 소리를 듣기 위한 벨과 진동판이 달린 구조였다. (그는 숙련된 음악가이기도 했다.)
- 라에네크는 수많은 프랑스 학생과 외국 유학생에게 청진을 가르쳤고, 청진기의 진단적 유용성은 여러 저명한 의사들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라에네크의 책을 영어로 번역한 이에 따르면, 의사를 집으로 부를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은 '망측한' 청진을 반기지 않았다. 오로지 병원에 입원한 빈민이나 군인만이 청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바로 돈에서 비롯하기 때문이었다. 자산가들의 면전에서 의사들은 오히려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실 의사가 갖는 병원 내의 권력이 병원 밖으로까지 이어지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엄밀한 병력 청취와 신체검사는 여전히 병원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파리의 의학교에서 의사들이 벼려낸 이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임상에 임하는 의사들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 큰 규모의 수련 병원에서 소아과학이나 순환기학, 신경과학, 산과학, 정형외과학, 이비인후과학 등의 세부 분과는 저마다 과장을 두며, 서로 다른 병동에서 개별적으로 회진을 실시한다. 그러나 정신과학만큼은 예외적이었다. 정신질환이 워낙흔한 탓에 '의학의 절반'이라고도 불리지만, 종합병원에서는 오래도록 이렇다 할 몫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던 이들은 '광기'라는 낙인 아래 별도의 시설에 수용되곤 했다. 근대 초기에 마련된 시설에 대한 규정도 병원에 대한 그것과는 별개였다. '광인의 집'이라는 점잖지 못한 이름으로 불렸던 시설은, 주로 비의료인에 의해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종합병원과 달리 환자들은 대개 부유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남다른 행동을 하거나 환영을 보는 등 집안을 난처하게 하는 행각을 일삼았고, 결국 천덕꾸러기가 되어 시설에 보내진 이들이었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설은 베들레헴의 성모 병원이었다. 어찌나 유명했던지 오늘날의 영어에서도 그 흔적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수라장을 의미하는 '베들럼(bedlam)'이라는 단어는 베들레헴의 준말이고, 광인 하면 떠오르는 상투적인 인물의 이름 역시 '베들럼의 톰(Tom o' Bedlam)'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도 등장하는 '베들럼의 톰'은, 정신과 환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의 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베들레헴 병원은 광인의 집 가운데서도 예외적인 시설이었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동시에, 운영을 전담하는 관리자도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설은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소규모의 사설 기관이었고, 이른바 광기가 사회적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비로소 공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요즘은 치매가 그러하다. 암보다 치매를 더 무서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편, 광인의 집은 통상적인 병원의 범주 바깥에 놓여 있는 무엇이라 여겨졌고, 그런 탓에 대개 '병원'이라는 이름을 달지 못했다. 진단 역시 오직 이웃이나 가족의 말 또는 환자의 행동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내려졌다. 파리 의학의 이념에 따라 정신병만의 병변을 찾으려 했던 의사들은 좌절에 빠졌다. 광인의 뇌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엇이 증상을 유발하는지 알 수 없었다. 광기는 정신의 문제이지, 신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광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책임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란 신께서 내려주신 영혼의 속성일 터, 그렇다면 광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 흑사병이 하나의 유행병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1340 년대의 흑사병이 페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유행이다. 다시 말해, 1890년대 홍콩에서 확인된 페스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와 흑사병의 원인균은 서로 다르다는 의견이다. 전파 속도나 계절에 따른 변화, 사망 패턴이 달랐고, 죽은 쥐떼를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유행한 페스트는 언제나 설치류의 페스트 감염을 동반했다. 여러 미생물이 후보로 떠올랐다. 일군의 학자들은 탄저병이나 미지의 바이러스, 혹은 그 외의 미생물을 범인으로 내세웠다. 맥각 중독 역시 하나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안적 해석의 문제점은 첫 번째 유행에만 집중한다는 점이다. 만약 1345년에서 1666년까지의 유행을 더욱 넓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실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665년의 런던 대유행처럼, 후대로 갈수록 의학적인 증거도 충분하다. 여러 번의 유행을 겪어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물론 몇백 년의 유행을 모두 경험한 사람은 없겠지만, 살면서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이 병을 겪어본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다. 게다가 개중에는 의사들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누적된 역사적 경험들은 반복해서 유행했던 그 병이 '우리가 아는' 페스트, 다시 말해 페스트균에 의한 질병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유행은 페스트에 면역이 없는 사람들을 덮쳤고,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천연두나 홍역과 같은 질병 역시 처음 유행할 때는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 당대인들은 인간의 죄악과 나태, 유대인과 마녀 등 사회 주변부 집단에 대한 신의 진노, 나쁜 공기 등을 유행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점성술에 근거한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자연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페스트의 유행으로 사람들은 지역사회의 건강 문제에 눈을 떴고, 그 결과 질병을 예방하거나 억제하는 조치들을 갖추게 되었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격리나 국경 검문, 강제 입원과 같은 방법이 시행되었고, 페스트 유행 지역에서 들어오는 선박에 대한 검역이나 사람 및 상품의 이동에 대한 통제, 질병의 유행 여부를 돌아보는 의학적 순찰 등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조치도 함께 이루어졌다. 페스트는 근대 초기 공중보건의 능력을 시험하는 계기인 동시에, 위기의 순간에 진행되는 국가와 의학의 필연적 결합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 종두법과 인두법 모두 의사에 의해 도입되었지만, 그 뿌리만큼은 민간요법에 있었다. 인두법은 천연두를 앓는 사람의 고름집에서 두묘(痘)를 채취하여, 걸리지 않은 사람의 몸에 접종하는 방식이다. (무언가를 떼서 다른 곳에 옮겨 심는다는 유사성 때문에, 영어로 인두법을 가리키는 'inoculation'이라는 단어는 원예학을 의미하는 'horticulture'에서 유래했다.) 일부러 병에 걸리게 하다니,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먼저 천연두의 높은 사망률과 유병률이다. 천연두는 굉장히 흔한 병인 데다 위험한 병이기도 했다. 사망률은 상황에 따라 5퍼센트, 때로는 20퍼센트에 달했다. 따라서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천연두를 막을 수 있는 방편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요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수두 파티'를 연다. 수두에 걸린 아이의 집에 자신의 아이를 데려가 굳이 병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다. 수두 파티에 비하면 인두법은 훨씬 위험한 방법이지만, 기본적인 전략 자체는 다르지 않다. 두 번째는, 한 번 앓고 나면 평생 다시 앓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약한 천연두를 골라 두묘를 얻는다면, 천연두로 사망할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 특히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1810년대, 집으로 돌아온 수천 명의 군인이 한꺼번에 실업자가 되면서 구빈법은 위기에 봉착했다. 조사 결과 구빈법은 각 교구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집행되고 있었고, 공리주의자 채드윅에게 이러한 상황이 마뜩할 리 없었다. 1834년에 간행된 최종보고서에는 조직의 간소화와 통합을 주문하는, 그리하여 모두가 비슷한 규칙과 규정에 근거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보고서는 같은 해 시행된 신구빈법의 근간이 되었다. 엄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던 신구빈법은 1929년까지 빈민구제의 기조로 작동했다. 채드윅은 새롭게 설치된 왕립구빈법위원회에서 전권위원의 자리를 맡고 싶었지만, 서기 자리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신구빈법을 집행하며 채드윅은 가난과 질병의 관계에 눈을 떴다. 사실 의사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유행병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먼저 덮쳤고, 이는 밀집된 주거환경과 열악한 식사, 남루한 생활환경 탓이었다. 채드윅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실은 사람들이 구호를 신청하는 이유였다. 가장이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채드윅을 비롯한 그 시절의 사람들은 가난에 도덕의 굴레를 씌우곤 했다. 가난의 궁극적인 원인은 개인의 결함에 있다. 경솔하게 짝을 맺고, 저축을 하지 않고, 술 따위에 재산을 탕진하기 때문에 가난할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질병은 여전히 가난의 한 원인이었다. 병을 예방한다면 가난을 줄일 수 있고, 이로써 구빈세의 부담을 덜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채드윅은 장기설을 믿었고, 따라서 콜레라나 발진티푸스, 성홍열과 같은 여러 병이 부패하는 유기물의 악취에 의해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해결은 간단했다. 청결이었다. 불결이 병을 일으키므로, 청결은 '불결병'을 예방할 것이었다.
- 1834년과 1842년 사이 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채드윅은 구빈법 개혁가가 아닌 공중보건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공중보건 운동의 고전인 <영국 노동 인구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 Report on the Sanitary Condition of the Labouring Population of Great Britain>를 발표했다. 채드윅은 통계를 바탕으로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각각의 사망률과 출생 시 기대여명을 조사했고, 충격적인 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 혼인신고가 1837년에 시작되었으니, 당대로서는 최신의 기법이었다. 또한, 그는 불결병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 공급과 하수처리의 동정맥'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 선언에 따르면, 생리학의 모든 32문제는 물리학과 화학을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이후, 그들 중 둘은 각각 베를린과 빈의 생리학 연구소를 이끌었고,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헬름홀츠는 전자기학과 열역학에서의 업적으로 유명하지만, 특수감각기관의 생리학과 청각의 물리학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루트비히의 주된 관심사는 심장과 신장의 기능이었다. 그가 쓴 교과서는 독일어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독일어판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독일어는 의과학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들 넷을 비롯한 여러 독일 생리학자들의 실험실은 점차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어갔으며, 이와 함께 과학자들은 최신의 기술로 무장할 수 있었다. 헬름홀츠는 검안경을 개발했고, 루트비히는 카이모그래프, 즉 운동기록기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기록장치가 연결된 원통이 달려 있어서, 맥박이나 근수축, 혹은 근긴장도의 변화 등 지속적인 신체 기능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었다. 그래프를 이용한 생명현상의 기록은 의과학과 임상의학의 여러 분야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시절에는 누가 뭐래도, 생리학이라면 역시 독일이었다.
- 그러나 프랑스도 할 말은 있었다. 세기가 낳은 탁월한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가 바로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다. 파리 대학교 의학부에 진학한 베르나르는 임상을 중심으로 하는 학풍에 한계를 느꼈다. 질병의 기전을 이해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더 필요했다. 베르나르는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을 기반으로 의학 연구를 시작했다. 불행한 결혼생활이 가져다준 몇 안 되는 선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실험 탓에 그는 부인과 딸에게서 더욱더 멀어지게 되었다. 아무튼, 실험실에서 베르나르는 외과 의사로서의 재능을 갖춘 숙련된 장인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초기에는 당 대사 과정에서 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소화 과정에서 췌장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등을 연구했고, 이후에는 말초신경의 기능과 일산화탄소 중독 과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였다. 뇌 일부를 파괴하여 인위적으로 당뇨를 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베르나르의 눈길을 끈 지점은 여러 생리 기전이 한데 모여 생명체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내부환경 (milieu intérieur)'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명체가 좁은 범위의 생리학적 지표, 다시 말해 일정 범위의 체온과 전해질, 혈당 등을 유지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내부환경'은 후에 미국의 생리학자 월터 캐넌(WalterCannon, 1871~1945)에 의해 '항상성'으로 재해석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강과 질병, 진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 베르나르는 이후 철학적인 주제로 눈을 돌렸다. 1865년에는 <실험의학 연구 서설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을 출간하여 자신의 연구를 되돌아보는 한편, 의학 연구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개진했다. 여전히 읽을 만한 책이다. 여기에서 베르나르는 실험실이야말로 진정한 의과학의 성소(聖所)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는 수많은 변수 탓에 단편적인 관찰만이 가능할 뿐, 진정한 실험과학을 수행할 수 없다. 변수를 통제하고, 그로써 분명한 결과를 얻는 일은 오직 실험실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실험실에서 베르나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언젠가 파스퇴르는 기회란 준비된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했다. 베르나르는 준비된 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별반 중요치 않은 결과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오히려 거기에서 풍성한 연구 성과를 뽑아냈다.
-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토끼의 소변은 보통 염기성이며, 탁한 빛을 띤다. 그러나 먹이를 먹지 않은 토끼의 소변은 산성이다. 베르나르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토끼가 먹이 대신 자신의 조직을 대사한다고 추론했으며, 여기에 착안하여 이후 소화 과정을 밝히는 데 천착했다. 베르나르가 몸소 보인 발견의 철학은 오늘날의 가설-연역 방법에 해당한다. 특정 현상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결과가 어떠할지 추론한 다음, 실험을 통해 가설의 진위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베르나르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실험을 시행할 때에는 자기 생각을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모자의 비유를 들었다. 모자를 사고 기능이라고 하자. 유능한 과학자는 실험실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실험실을 떠날 때는 다시 모자를 챙겨 나간다. 관찰한 바가 무엇이고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실험을 통해 가설을 받아들일지를 결정했고, 필요할 때에는 가설을 수정하여 다른 실험을 다시 진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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