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고민실
출판 : 한겨레출판사
출간 : 2022.04.13
'자격증'이 아니라 '면허'라는 점 외에는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학과의 특성상 학부 과정 도중에 복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실 모두 다 드물었지만, 그나마도 편입생이나 재입학생이 복학생보다는 많았다. 해서 또래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세계를 확장하기는 무척 힘든,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일찍 개국한 사람들 중에서는 '김약사' 같은 캐릭터가 종종 존재한다. 기묘할 정도로 강한 현실감이었다.
양과 조. '1인분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 '아직 0입니다'라고 답하게 되는 사람들.
그들은 0이고, 影이고, 靈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고,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조용히 울음소리만을 남기는 그림자이며, 그렇기에 유령들이다. 김약사의 '유령'은 단 한 가지의 의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신만의 생'을 살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유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이기도 하다. 순응하고, 기능할 것.
끝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양과 조, 그리고 김과 손님들은 각각의 독립된 개체이면서 동시에 모두 유령들이다. 일말의 조각들을 품고있지만 그들의 삶의 대부분은 '주어진 역할'들을 '수행'하는 시간들이다. 그것을 눈치챈 자와 눈치채지 못한 자만이 나뉠 뿐이다.
소설이 드러내주는 현실은 모호하고 또렷하다. 정확하게 선을 긋지 않는 경계의 영역은 선을 그을 수가 없는 세계다. 극한까지 수축한 순수한 하나의 픽셀 - 진정한 본질 - 이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을까?
문장들은 아름다웠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좋은 기억들로만 모아낸 픽셀의 바다를 보고 싶다.
아니, 어쩌면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나쁜 기억의 픽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가?'
세상은 유령이 살기에 더 적합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그런 순간일 것이다. 달라질 거라고 믿거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혜의 질문에 나는 좋은 기억이라고 대답했다. 선사 시대에는 위험한 순간을 오래 기억해야 생존에 유리했으며, 인간의 유전자는 선사 시대로부터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혜가 말했다.
'바다에 가자.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이 필요할지 몰라도 살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이 필요해.'
- 살기 위해서는 좋은 하얀 눈썹을 찡긋거리듯 밀려오는 파도, 수평선 위에 성하게 부풀어 오른 구름, 습한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 백사장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향기로운 차와 달콤한 케이크... 그리움이란 시공간을 복기하는 행위이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만이 아니라 공기의 감촉과 향기까지 모조리 끄집어내 되새김한다. 복기를 끝내는 순간 이별이 완성되겠지만 나는 여전히 썰물 속에 다리를 묻은 채 서성이고 있었다.
- '인도-아라비아 숫자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뭔지 알아?'
3이라고 대답했던 것도 같고 7이라고 대답했던 것도 같았다.
'0이야. 인도에서는 신이 아무것도 없는 0에서 태어났다고 봤거든. 그리스에서도 0을 발견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숫자라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어. 0만 인정했다면 그리스 숫자라고 부르게 됐을지도 모르지.'
- 혜는 책을 많이 읽었다. 주로 소설과 인문학 서적이었다. 나는 혜가 선택한 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다. 독립영화를 찾아보고 전시회를 관람했다. 풍족한 문화생활에는 돈이 들었다. 혜의 취향을 쫓아가기 버거웠지만 성장의 기쁨이 생활의 결핍을 충족해주었다. 나의 20대는 그를 빼놓으면 성립하지 않았다. 혜라는 창을 통해 온전히 세상을 바라본 시기이기도 했다. 다만 수학만큼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였다.
- 새로운 취향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는 노력이 유발하는 피로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요즘 무거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해를 훨씬 바쁘게 살았는데 그때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일을 배우느라 그렇다는 핑계도 슬슬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피곤했다. 그나마 무엇이라도 되었으니, 유령이기는 하지만, 다행인 걸까.
-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계는 생물학적 존재를 필요로 했다. 이제는 생물학적 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형성된 관계가 필요하다. 산만한 세상에 흩어진 자아의 파편은 쉽게 휩쓸리거나 왜곡되었다. 먼지처럼 하찮은 존재감에 서글퍼질 때면 바다를 보고 싶었다.
- "차 있을 때 많이 다녔죠. 마음 내키면 목적지 없이 훌쩍 떠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스피커를 고사양으로 바꿨는데 음악 빵빵하게 틀어놓고 달리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어요. 가다가 경치 좋으면 멈춰서 구경하고, 잘 데 없으면 차에서 담요 덮고 자고, 버너 싣고 다니다가 식당 못 찾으면 대충 라면으로 때우고..."
매료의 기억을 가진 사람에게서 발견하기 쉬운 열정의 부스러기가 조의 눈에서 반짝였다.
"한 번은 태백산맥을 넘어가는데 산 저쪽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는 거예요. 실을 꼬아 만든 것처럼 가느다란 수증기가 몇 줄기 올라가서 산 중턱에 있는 구름과 만나더라고요. 차를 세우고 지켜보는데 점점 이쪽 시야가 뿌옇게 변했어요. 구름 속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죠. 밖으로 나오니까 금세 팔이 축축해졌어요. 빗방울까지 부슬부슬 떨어져서..."
설명하는 목소리보다 움츠린 어깨에서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어요. 구름 사이로 메아리가 퍼져 나갔죠."
조는 맞은편에 앉은 나보다 더 먼 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꺼풀 안쪽에 내가 모르는 풍경이 고여 있을 태였다. 나는 식초를 집어 들었다.
"휴가에는 어디 갈 예정이세요?"
단무지에 식초를 뿌리자 조가 내 손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태백산맥에서 중국집으로 돌아온 것만은 분명했다.
- "커다란 조개껍데기라도 발견했다면 가지고 돌아왔을 텐데 정말 바다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계속 걷다가 왜 걷는지도 잊어버리고 걷기 위해 걸었어요. 어느 순간 고개를 드니까 바다가 눈앞에 있었죠."
"기분 좋았겠네요."
"오히려 실망했던 것 같아요.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는 했는데 엄청 얕았거든요. 색도 부옇고... 허리를 숙여 물속을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있더라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참 이상하죠. 무언가에게 발견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죠. 이미 지쳐 있었는데 텐트가 너무 멀었어요.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어요. 진흙이 발에 달라붙으니까 뛸 수도 없었고요. 아무리 걸어도 텐트는 가까워지지 않았고 돌아볼 때마다 바다는 등 뒤에 있었죠."
"무서웠겠어요."
"그랬을까요?"
"무섭지 않았나요?"
"모르겠어요. 겨우 텐트 있는 데 도착해서 뒤돌아보니 그제야 바다가 멀리 보이더라고요. 그때 기분이... 뭐랄까... 그 뒤로 바다에 여러 번 다녀왔거든요. 즐거운 추억도 많이 쌓였는데... 이상하게 바다라고 하면 어릴 때 발을 담근 썰물이 가장 먼저 생각나요."
- 때로 감각이 사고를 앞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새겨진 기억의 의미를 나중에 찾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쫓기듯 되돌아왔을 때 텐트도 아이들도 그대로였지만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썰물이 물러나고 밀물이 다가오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통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을 경계의 시간이었다.
- 혜는 영화관 선택에 까다로운 편이었다.
'아이맥스로 촬영해도 최종 출력 해상도가 낮으면 소용없어. 영상의 질은 픽셀 단위에서 결정되는 거야.'
취향을 세심하게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갈팡질팡하다가 선택하면 다른 선택의 순간이 찾아와서 또 갈팡질팡하기를 반복했다. 혜의 취향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따라가기만 하면 실망하는 법이 없었지만 가끔 피곤해질 때가 있었다. 나는 본가로 가는 버스 노선과 겹치는 지역의 영화관을 선택했다.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감자튀김을 한 번에 두세 개씩 집어 먹고 일어났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상영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꿨다. 광고가 몇 개 지나가고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이 하얗게 떠올랐다. 오프닝 크레디트를 보다가 혜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라는 걸 알았다.
- "향정약 처방받는 손님 중에 가끔 저런 분이 있어요."
약을 컵에 집어넣으며 조가 말했다. 커튼 너머로 머리가 반백인 여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혼자서 한참 넋두리하는데 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그냥 놔두면 제풀에 지쳐 돌아가더라고요.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닌가요?"
나는 '아닌데요'라고 대답하려던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조가 완전히 잘못짚지는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무서웠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약사와 의사의 구분이 없던 시절에는 신과 교감하는 사람이 치료를 담당했다. 약국은 사원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신탁 대신 약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속성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학이 명징하게 보여주는 세상을 다 이해하기란 어렵고,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 불안을 방치하느니 무언가를 믿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유령이 존재한다든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든가.
"다른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국장님 좋은 일하시네요."
마음의 경계가 선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면적인 감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다가 피곤해진다. 조가 쳐다보는 줄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 약만 골라냈다. 약 분류가 끝나자 조는 빈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약을 각각 빈 통에 담고 이름을 적었다.
- 조의 표정이 모호했다. 기뻐하기는커녕 언짢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선물을 잘못 골랐나 싶었다. 조는 파우더를 만지작거리다가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르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알면서 한 번도 안 묻네요."
"뭐를요?"
"제가 화장을 시작한 이유요."
"이유가 필요한가요?"
"보통은 궁금해하던데요. 국장님도 그렇고."
"국장님이 보통인가요?"
조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나에게도 식사를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공깃밥 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 조제약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일반약은 누구나 쉽게 쇼핑한다. 열이 나면 해열제, 속이 거북하면 소화제, 설사가 나면 지사제, 염증에는 진통소염제 스스로 판단하여 복용 여부를 결정한다. 부작용은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다.
- "낙엽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잖아요. 지구에 활엽수가 생긴 이래로 변한 적이 없는 규칙이에요. 다만 떨어진 낙엽이 바닥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수많은 요소들이 연쇄작용을 일으켜버리니까요. 거시적인 방향은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미시적인 도착점은 대강 알 수밖에 없죠."
- 과거 흑사병 앞에서 기도는 무용했다. 의심을 품게 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신뢰를 거두면서 인문주의가 싹트고 의학의 발달을 촉진했다. 이제 의학은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약까지 만들어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미신을 믿는다.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 단거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그저 견디기 위해서는 진통제라도 필요했다. 어쩌면 신이 사라진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물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 "아파요?"
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지를 걷어 올려도 멍 자국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아프다고 할 수 없었다. 조는 한 손으로 조제대를 짚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잊어버려요."
아버지가 늘 어머니에게 바라던 주문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방을 찾아왔고 나는 아버지와 같은 주문을 외웠다. 때로는 어머니를 향해, 때로는 나 자신을 향해.
"원래 그런 사람인 걸요."
조가 말했다. 나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매애애애애."
"별 얘기도 아니잖아요."
"매애애애애."
유령이라서 다행이었다. 울음소리가 딸꾹질처럼 멈추지 않았다.
- 세계 최초의 약국은 이슬람에 있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전문적인 약재상이 나타났고 의료행위가 전문화되었다. 유럽에서는 과세 문제로 의사의 약 조제를 금지했다. 런던 대화재 때 의사들은 왕당파와 함께 도시를 탈출한 데 반해 약사들은 남아서 시민을 치료하여 훗날 약사의 진료가 합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에서는 의료기관의 부족으로 약국이 1차 치료기관 역할을 하다가 3차 분쟁을 거쳐 의약분업을 시행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 "식겁하게 저런 걸 입고 다녀.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네."
계산대를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김 약사가 구시렁댔다. 나는 조를 쳐다보았다. 조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었다. 그들처럼 무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을까. 굳이 뭔가를 해야 할까. 선택은 행위를 부르고, 행위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과는 후회를 동반한다. 방관 또한 하나의 행위라는 걸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 때로 감각이 사고를 앞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새겨진 기억의 의미를 나중에 찾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한밤중에 유령이 내 머리맡에 앉아 중얼거렸다. '내가 왜 그랬을까?' 뜨거운 물을 붓듯이 얼굴 위로 쏟아진 말을 속절없이 듣고 있어야 했다. 원망일까 자책일까. 그 의미를 인지하기 전에 지나가버린 경계의 시간이었다. 안개가 걷힌 해협 너머에 울퉁불퉁한 돌담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모를 어머니와 딸의 역사가 흉터처럼 깊이 돌담에 새겨져 있었다.
- 한 움큼 뱉어낸 숨에 물거품이 까맣게 일어났다. 흐릿한 시야에 깜박이는 빛이 보였다. 빛은 셋이 되었다가 넷이 되었다. 물속으로 풍등이 하나씩 가라앉고 있었다. 꼬리를 끌며 내려오는 풍등 사이로 집이 보였다. 물속에 거꾸로 선 집 앞에 아이가 있었다. 둥글게 만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아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똑, 똑똑, 똑똑똑, 똑똑... 나는 유령을 무서워하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사막이었다. 발을 내디뎌 뜨거운 모래를 밟았다. 먼 하늘에 떠 있는 우주선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마다 부드러운 모래가 흘러내렸다. 익어버린 피부가 벗겨지고 모래와 피가 뒤엉켜 굳었다. 노을빛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손바닥만 한 전갈이 불쑥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상처 입은 발에 새살이 돋았다. 달이 하늘에 머리를 부딪칠 때마다 별이 우수수 지상으로 떨어져 솜털 돋은 씨앗이 되었다. 밤이 벗겨지고 낮이 드러났다. 걸음마다 솨솨 파도 소리를 내며 모래언덕이 무너졌다. 자욱하게 일어나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음영의 대비가 선을 그었다. 우주선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파란색 문이 열리고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혜가 나를 돌아보았다. '핫초코 마실래?' 크고 아름다운 지느러미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앞의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가 느릿느릿 흐려졌다. 점멸하는 빛이 환해질 때마다 신호등이 소금 기둥처럼 서 있었다. 6시구나. 날이 흐릴 때는 조가 미리 간판에 불을 올리고는 했는데 오늘은 잊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보면 어둠 속에 간판만 하얗게 떠 있겠지. 이웅 대신 피어 있는 꽃 그림에 위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 혜를 만나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스물다섯 해보다 지난 다섯 해를 더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파쇄해갔다.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구부러져 0이 되었다.
- 경계선만큼 불안정한 것도 없다. 단순한 세상을 복잡하게 보지 않으면 경계선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을 간과하게 된다.
-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느 쪽을 더 잘 잊어버릴까? 오래 안 살아도 좋으니까 나쁜 기억을 남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 드물게 풍랑이 없는 날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나는 새치가 돋아난 아버지의 머리를 응시했다. 언젠가 바닥이 투명한 전망대에 간 적이 있었다. 안전하다고 되뇌어도 유전자에 공포가 새겨진 것처럼 다리가 얼어붙었다. 스스로 믿고 싶은 모습이 실제와 어긋나는 경험은 이미 익숙했다. 금세 또 설탕에 잰 씀바귀를 먹듯이 모순되는 감정이 널을 뛰겠지만, 지금은 이해하기 쉬운 평화가 소중했다.
- 이미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수없이 실망해보았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캐묻는 시늉만 하다 곧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다. 조에 비해 내가 겪는 비극은 흔하디 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 "어디 아프신 데는 없는 거죠?"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버릴 물건 위에 올려두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는지 보일러실에서 멜로디가 울렸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서 문득 약국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플라워 약국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계기는 언제나 단순했다. 우연 같지만 필연이었고, 필연 같아도 우연이었다. 먼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와 긴 여행을 마친 물방울이 빨래 위에 내려앉았다.
- 영등포의 '영'은 원래 '꽃부리 영'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그윽한 풍류가 있다고 해서 붙은 한자였다. 예쁜 마을은 이윽고 신령이 머무는 마을이 되었다. '영등'은 바람을 관장하는 신령인 영등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영등날에서 유래했다. 언 땅이 녹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농한기의 마지막 명절이 영등날이었다. 신령이 머무는 마을은 다시 충신의 마을이 되었다. 멀리 왕성이 보이는 재가 있다고 해서 '길 영’을 쓰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왕도 없고 재가 있던 자리에는 역이 들어섰다. 영등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리지 않고 굿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풍경은 소멸하고 이름으로만 희미한 흔적을 남겼다.
- 혜와 오래 만날 수 있었던 건 우연히 뮤지컬이라는 접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같이 일하면 좋았을 텐데... 그럼 많이 친해졌을 것 같아요."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선택 가능했다. 관계에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 말속에 숨긴 거절의 뜻을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 여자는 다른 질문을 했다.
- '가끔 사진을 확대해볼 때가 있어. 점으로 존재하던 픽셀이 커다란 정사각형이 될 때까지 확대하면 사진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해. 거친 사막은 부드러운 뺨이 되고, 시멘트 길의 물웅덩이는 잔잔한 호수가 되고, 시퍼런 곰팡이는 넓은 녹차밭이 되는 거야. 원본보다 흐릿하지만 덜 역겹고 덜 추해지지. 그걸 또 확대하면 마지막에 라벤더나 올리브처럼 한 가지 색만 남아 어디선가 한 칸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이 모니터를 꽉 채우는 걸 보면 위안이 돼.'
언젠가 혜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지금 눈에 비치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확대하고 또 확대하면 과연 무슨 색이 남을까. 나는 무심코 혜를 찾았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 나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0은 다른 숫자 뒤에 채워 넣기만 하면 얼마든지 큰 수를 표기할 수 있다. 어쩌면 인도에서는 신의 무한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0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선창을 시작했다. 나도 피켓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함성에 묻히는 것 같아도 분명히 제대로 하나의 소리를 더하고 있었다.
- "위키드 보셨어요?"
가방에 캐릭터 인형을 매단 여자가 목소리가 허스키한 여자에게 물었다.
"내한공연 왔을 때 봤어요."
목소리가 허스키한 여자가 가방에 캐릭터 인형을 매단 여자에게 대답했다.
"엘파바가 하늘로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 있잖아요."
"디파잉 그래비티."
"중력에 맞서서."
동시에 노래 제목을 말하고 두 사람이 까르르 웃었다.
"그 노래가 머릿속에 흘러요."
- 유령이 되기로 했다. 배우가 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핼러윈에 트릭 오어 트리트를 외치지도 않았다. 취업 얘기다. 플라워 약국은 우연히 발견했다. 채용 사이트에서 '여성'과 '30세'로 조건을 설정해 검색한 결과를 차례로 클릭해보지 않았다면, 급하게 이사하느라 모아놓은 돈을 다 쓰지 않았다면,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고 이제 알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 아니었다면, 약국 채용 공고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을 테니 필연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나이 무관, 성별 무관, 학력 무관, 경력 무관. 15 년이나 됐으면 망하지는 않겠네. 어디에나 흔하게 있으니 이직하기도 편할 테고, 식사도 제공하는구나. 휴무일이 일요일밖에 없는 건 사소한 문제로 여겨졌다. 사무직으로 일해도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할 때와 급여는 비슷했으니까... 어쩌면 라면에 질린 나머지 지원할 이유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 독립에 들뜬 것도 잠시였다. 인테리어를 위해 구입한 캐릭터 무드등에는 먼지가 앉았고, 요리를 해보겠다고 장만한 프라이팬은 배달 음식에 밀려 인덕션에 올라가지 못했다. 혼자 사는 삶을 얼마나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월급이 통장에서 사라지는 속도로 실감했다. 냉장고가 웅웅 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한 밤의 적막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 밤중에 누군가 도어록을 눌러 경고음이 연거푸 반복되는 동안 핸드폰을 움켜쥐고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한 일도 있었다. 다만 자취를 접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는데, 가족과 함께 사는 삶 역시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은 출퇴근 시간이 주는 여유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해고를 당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첫 실업급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었다. 기껏 들어간 회사가 또 없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므로 신중하게 골라 이력서를 보냈다. 낯선 번호가 핸드폰 액정에 뜰 때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지만 대개 스팸이었다. 너무 신중했다고 자괴감 섞인 반성을 할 즈음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사 비용을 대줄 테니 한 달 안에 집을 비워달라는 제안 같은 통보였다. 밤에는 이력서를 쓰고 낮에는 집을 보러 다녔다. 풀옵션에 2층 이상, 교통까지 좋은 집은 월세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중개업자가 권하는 대로 호기롭게 집을 구경하다가 차츰 조건을 수정했다. 마치 어디까지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지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 하루는 계단 꼭대기에 있는 집을 보고 와서 뻐근한 다리를 쭉 펴고 라면을 먹었다. 바닥이 드러난 냄비에 달라붙은 파를 젓가락으로 집으려다가 번번이 실패하자 갑자기 넌더리가 났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 체격 차가 주는 위압감에 눌리지 않으려 의식하며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평범한 악수였지만 키가 큰 만큼 손가락도 길어 내 손등을 거의 감싸듯이 덮었다. 눈썹도 두꺼워서 자칫 강해 보일 수 있는 인상이 미소 하나로 유해졌다. 사람을 대하는 요령이 능숙하게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웃는 시늉만 하고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 "유령을 믿으세요?"
"글쎄요..."
말꼬리만큼 흐려지는 표정을 보고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한참 올려다보았더니 뒷목이 뻐근했다. 다시 턱을 들어 올리는 대신 옆으로 돌렸다. 가방을 내려놓을 장소를 물색하는데 조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서 들려왔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드물지 않으니까요."
- 고개를 바로 하자 허리를 굽힌 조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그제야 조가 화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비 크림을 발랐는지 균일한 색의 피부가 턱에서 경계가 졌다. 입술에 살짝 붉은 기를 머금은 윤기가 돌았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의 옅은 화장이었다.
"약사들이 과학적일 것 같지만 의외로 안 그래요. 미신을 믿는 사람이 은근히 많거든요."
- 김 약사가 신신당부했다. 조는 옥수수 식빵을 좋아하고 김 약사는 우유식빵을 좋아하고, 혜는 치아바타를 발사믹 소스에 찍어 먹는 걸 좋아했다. 나도 앙버터라든가 오후 3시면 품절되는 크루아상을 찾아다니며 먹고는 했는데 이제는 호빵이라도 상관없었다. 깔끔한 단맛과 진득한 단맛을 구분하던 때가 아득했다. 파란색 문 너머에 몰티즈가 앉아 있던 가게에서 혜는 또 브라우니를 주문했을까. 썰물처럼 물러가던 그리움이 되돌아와 무릎을 쳤다.
- 개가 색맹이 아니고 인간보다 적은 색이라고는 해도 세상을 컬러로 보고 있다거나, 빙하기가 끝나고 1만 년 가까이 고립되어 살았던 원주민이 이주민과 조우하고 200년 만에 멸족했다는 글을 읽었다. 천둥소리에 겁먹고 의자 밑에 숨은 아기 고양이와 40년 넘게 잘 돌아간다는 파란색 날개의 선풍기 사진을 리트윗 했다. 예전에 덕질했던 아이돌이 솔로로 데뷔한 영상을 보다가 열병처럼 앓았던 감정에 취해 가슴이 뛰었다. 핸드폰 화면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이 뻐근해서 눈을 감자 깜박이는 빛의 잔재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만 볼 수 있는 화려한 불꽃이었다.
- 가방에 캐릭터 인형을 매단 여자의 말에 목소리가 허스키한 여자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말한 뮤지컬을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초록마녀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 높이 떠오른 순간 온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래픽으로는 도무지 구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생생한 빛의 향연이었다. 긍정적인 경험은 반복하기 마련이다. 가방에 캐릭터 인형을 매단 여자도 목소리가 허스키한 여자도 다음 집회에서 또 만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픽셀의 바다를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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