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오누이 / 정현욱/ 김지원 / 황모과 / 배명은
출판 : 스토리존
출간 : 2022.06.15
도발적인 제목에 끌렸다.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라니.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은데 한창 일에 치여살 때는 누구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티를 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분위기에서 그런 날카로움이 묻어났는지 의도치 않은 마찰도 종종 일어났었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살얼음판 같은 일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울컥할 때가 있다. 나는 성인이 되지 못했다.)
삶이 일정 강도 이상으로 팍팍해지면 인간 혐오증이 생긴다는 이론을 믿는 편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체험에 기반한 믿음이다. 굴곡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그 고저의 높이야 어떠했든 누구나 자신만의 파도를 타는 법이다.
(그러나 그럭저럭 안주거리가 될 만한 경험담들이 있는 편이다. 그런대로 일주에 부끄럽지 않은 경험치를 쌓아왔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왜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나?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해졌다. 그렇게 무작정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삶'이라는 공통 주제가 관통하고 있었다. 정보라 작가의 추천사처럼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이 단편들의 핵심 주제다. 한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들의 현실 인식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던 톡톡 튀는 단편들.
이제는 '한민족'이라는 표현이 점차 적절하지 않은 구식 표현이 되어가고 있지만, 문화적 정체성으로 '해학'이라는 특성은 잃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힘들고 한스러운 순간들을 노래로, 춤으로, 웃음으로 풀어냈던 경험은 흑인영가나 어릿광대와는 또 다른 한국 만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 번, 어떻게든 웃고 나면 조금은 풀어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는 그런 '웃픈' 해학이 있다.
현실도 충분히 팍팍하니 괴로운 이야기는 읽고 싶지 않다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읽어보실 만한 단편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충분히 상상이 가능해서 더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설정들도 등장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다 읽고 나서는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쓴웃음 -혹은 그냥 웃음- 을 보장한다.
즐겁게 읽었다.
- SF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파운데이션>과 <로봇> 시리즈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SF란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서술하는 장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는 바로 이 정의에 딱 맞는 작품 다섯 편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냥 아무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과학 기술 발달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을 담았기에 특별하다. 한국 작가가 쓴 한국 SF만의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이라면 "웃프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전개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 내가 보기에 이런 이야기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삶과 존엄한 삶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다. 미래를 위해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고독사 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결혼을 고민하고, 한국인은 안정된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안정이 삶의 정답이고 '먹고사니즘'이 한국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21세기 현재 한국의 가장 거대한 철학이자 사상이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앞으로도 먹고살기 위해, 늙어서도 안정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친다.
- 우리는 안정된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미래를 위해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며, 안정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고민에 빠진다. 과연 나의 존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삶의 행복이란 무엇인지, 안정과 생존 외에 인생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지.
- "나는 그간 무얼 위해 살았던 걸까?"
이 한 문장이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의 주제를 가장 훌륭하게 요약해 준다. 아마 지금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 질문을 마음속에 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러니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나라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는 것이다. 질문은 한 가지이지만 대답은 사람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삶의 단계마다 수없이 다를 수 있다. 생존과 존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독자분들도 내가 그랬듯이 이 책의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휴식과 위안과 공감을 느끼실 수 있다면 좋겠다.
- 정보라
- 수미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은행에 취업, 올해 과장으로 승진하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그녀는 지난 6년간 연평균 2억을 모아 왔고, 앞으로 3년 뒤, 약 20억을 모아 은퇴를 계획 중인 파이어 Financial Independent Retire Early 족이었다. 물론 이는 평범한 은행원의 연봉만으로는 달성하기 힘든 계획이다. 수미는 은행에서 퇴근하자마자 과외생들의 집으로 또다시 출근한다. 동시에 다섯 개 남짓의 과외를 돌렸고, 이를 통해 은행 급여를 상회하는 금액을 벌었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쌓아온 실력과 야무진 성격이 맘 카페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났던 것이다. 은행 월급의 단 30퍼센트로 월세를 포함한 생활비 일체를 해결하고 나머지 수익은 부동산과 지수펀드에 투자했다.
- 새벽 4시 반에 기상해서 종일 일하고, 밤 10시가 되면 미련 없이 잠자리에 든다. 어차피 그 시간에 '자니? 보고 싶다, 술 한잔하자'라는 시답잖은 연락이 올 일도 없다. 연애는 물론, 썸도 없고, 이렇다 할 친구도 없는 삶을 그녀는 벌써 6년째 이어나가고 있다.
'지겹지도 않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살아?'
직장 동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마다 수미는 웃어넘길 뿐이다.
'아니? 전혀 안 똑같은데? 작년과 올해가 똑같은 건 네 통장 잔액이겠지.'
- 실제로 수미는 주위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살고 있었다. 처음 1년은 비상 탈출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종종 솟구쳤지만, 2년 차부터 감각이 다소 마비되기 시작했고, 3, 4년 차가 되자 되레 이 금욕적 삶이 선사하는 보람이라는 보상 체계에 중독되어 갔다. 최근에는 2년 정도 더 투자해서 목표 금액을 10억 정도 상향 조정해 볼까 고민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인간이란 실로 적응의 동물이구나 하고 스스로도 감탄하곤 했다.
- 그녀에게 독서란 새로운 지식이나 정서 함양이 아닌, 목표를 되새기고 계획을 고수할 의지와 신념을 강화하기 위한 자기 암시적 의식에 가까웠다. 자기 계발 베스트셀러 코너 책장에 기대서서 서점 직원들의 눈총 따위는 의식조차 않은 채, 삶의 지혜로 가득한 잠언을 읽으며 전 세계의 성공한 저자들이 그녀의 고행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환상에 빠져들곤 했다. 황금의 재단에 올라선 저명인사들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성공의 세계로 어서 오라며 수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주, 또 한 주 가까이 다가오는 그 손은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았다.
프리즈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 수미는 언제나처럼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한강 변의 조깅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트레이너에 조깅화를 갖추고 이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긴 다리를 성큼성큼 앞으로 뻗는다. 알고리즘은 수미에게 경쾌한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을 들려주고 있었다. 음악을 일일이 선곡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셔플을 돌려놓고 그때그때 특별히 좋은 곡에 '좋아요'를, 거슬리는 곡에는 '싫어요'를 누를 따름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취향을 온전히 파악해서 더 이상 '싫어요'를 누를 일은 없어진다.
- 우리의 노력과 성과를 과시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번 발견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실행해 가고 있는 인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래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돈에 대한 욕망도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서 피어나는 신념뿐입니다. 디프로스터의 족적이, 용감하게 믿음을 관철해 나가고 계신 많은 분에게 자그마한 영감이라도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것입니다.
- 뭐야, 별거 아니잖아?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었다.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찾아오는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조금 단순화시켜보면 인간에게 죽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깨달음이 가훈이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1차 시도에서 자신의 근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깨달은 가훈이는 조금 멀더라도 1층까지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당차게 창문을 열어젖힌 가훈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소공포증은 별개라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지만 높이는 여전히 두려웠다. 전신의 피가 일거에 빠져나가는 듯한 극심한 어지럼증에 휘청이다가 하마터면 난간 밖으로 떨어질 뻔한다. 그냥 포기하고 싶은 안일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지옥 같기만 했던 좁은 이중창의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다.
- 프리즈 시대에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무면허 주행법은 그 어떤 교통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전투 운전' 그 자체였다. 아무리 비싼 차도 도착과 동시에 폐차로 만들고야 마는 무소유의 정신, 이륜차든 경차는 보행자든 작고 가벼운 방해물은 가급적 피하지 않고 밀어붙여 최단 거리의 경로를 고수하는 불도저 정신,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길이 될 수 있다는 창조적 프런티어 정신은 기존의 면허를 소지한 운전자들이 차마 넘어설 수 없는 드라이빙의 새로운 지평이었다.
- <D-1>, 오누이
- 이제 시작이구나 싶어 예연도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할아버지가, 이덕천 할아버지와 영숙 할머니가, 그리고 당시의 수많은 노인들이 했을 경험을 예연도 하게 되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생체 리듬을 감지해 애인 캐릭터가 의식을 중단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 순간, 온몸에 찌릿한 자극이 강하게 퍼졌다. 예연의 몸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그러더니 곧 자극이 사라지면서 몸에서 무언가가 같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예연의 몸이 한없이 비워졌고 그 비워진 공간을 순식간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가득 채웠다. 예연이 살면서 경험한 어떤 감각보다도 압도적이었다. 낯설었지만 예연이 마치 오래전부터 바랐던 궁극의 상태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예연은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컨테이너에 가지고 들어왔던 모든 의심과 분노, 흥분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 <유어 라이프>, 정현욱
- 그때 고백을 받아준 걸 후회하냐고요? 아뇨. 지금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이혼 변호사를 찾아온 꼴이 되어버렸지만. 왜 그렇게 보세요? 남편이랑 이혼하려는 여자는 전부 다 남편 머리채를 잡아야 하나요? 그런 건 너무 상투적이지 않아요? 난 진심으로 그 남자도 한땐 좋은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의 날 구원해 준 사람이었으니까. 만약 그 사람이 내 인생에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간 타인 중 하나로 남았다면 우리 딸 파도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요. 내가 가장 아름답던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났고 3년을 불같이 사랑하고 결혼해서 파도를 낳았죠. 그러니까 자그마치 20년이에요. 내 배속에 품고 낳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 소녀가 되도록 그 오랜 시간을 난 파도 아빠와 한집에서 살았어요. 그이는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니에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최고 수준의 위자료와 파도에 대한 양육권이요. 물론, 재산 분할도 '공평하게' 김진오 그 사람한텐 단 한 푼도 못 줘요. 그 사람은 어느 날 불쑥 내 삶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내 인생에서 나갈 때도 ...
- '재판 중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이겨도 이긴 게 아닙니다.'
이게 변호사가 할 말이야? 무슨 변호사가 그렇게 오지랖이 넓대? 변호사야 내가 상처를 받든 말든 재판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이번 재판으로 내가 마녀사냥을 당하든 말든 알게 뭐냐고. 막말로, 내가 저희 로펌 보스한테 변호사가 재판을 재고해 보랬다고 고자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엄마가 안 이를 걸 알았나 보지."
그래. 자기도 생각이 있었겠지. 재판이 코앞인데 내가 뭘 어쩌겠나 싶어 배짱을 부린 건가? 근데 이건 내가 얼굴 좀 알려진 사람이라고 날 무시하는 처사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엄마를 믿는 것 같아."
- "법정에서는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 델포이가 김진오 고객의 포르노 선택 기준을 범주화하고, 그의 취향에 맞는 배우의 외모를 통계화해 페이스 합성 기술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만드는 장면이 펼쳐졌지요."
맞아요. 포르노 모델들의 외모가 점차 AI 연희의 얼굴에 가깝게 구현되고, 심지어 목소리와 걸음걸이, 몸동작까지 맞춤형으로 리모델링되니까 여기저기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어요. 때맞춰 우리 변호사가 앞으로 나섰죠.
"무작위로 선택된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그녀는 분명 원고 김진오 씨에게 호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외모로 제조됐습니다. 더 무서운 건 단지 외모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 변호사가 능숙하게 질문을 이었어요.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보가 필요할까요?"
화면에 김진오에 대한 각종 빅데이터 통계가 시뮬레이션됐어요. 소비 기록, 이동 동선, 기부 기록, 투표나 뉴스 기사 클릭을 통해 추론한 정치적 성향, 예술적 취향, 선호하는 유머의 패턴까지 몽땅 다 파악해 '인격'과 '개성'이라 불릴 만한 인간적 특성을 만드는 방법이 재현됐죠. 다 알고 있었는데도 새삼 나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박변이, 그니까 우리 변호사가 말했어요. 우리에게는 저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고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인간의 유형이 있는데, 델포이는 어떤 취향이든 100퍼센트 사용자 맞춤형 안드로이드를 제작할 수 있다는 걸요. 그 시점에 이르자 판사도 미처 표정을 다 숨기지 못하더군요. 그때 우리 박변이 최후의 일격을 날린 거죠.
"델포이와 같은 다국적 대기업이, 당신의 배우자에게 이렇게 빅데이터를 이용해 치밀하게 설계한 트로이 목마를 보낸다면 막아낼 자신이 있으십니까? 과연 우리의 신성한 결혼의 약속이 끝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요?"
- 솔직히 처음에 우리 변호사가 이런 변론 계획을 말했을 때만 해도 난 걱정을 했어요. 파도 아빠가 비윤리적인 AI 제조사의 계략에 빠져 처자식을 버리고 AI 제조사에 재산을 넘기려 한다고 주장한들 그게 우리 재판에서 효과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AI가 인간의 이성을 위협한다는 공포를 사람들에게 심어줘서 나한테 유리한 게 뭔데요? 내가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니까 박변이 그러더라고요.
'이 재판이 단순한 부부간의 재산 및 양육권 분쟁으로 가선 안 됩니다. 그럼 여해주 씨가 이길 수 없어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게 해주 씨에게도 유리하죠.'
제가 고른 변호사지만 정말 똘똘하죠. 나는 감정적이라 그런가 이런 전략을 만들어 내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법정이 되게 딱딱하고 엄숙해 보이잖아요? 이성적인 사람들이 치밀하게 진실을 도출해 내는 것 같고요.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니까요. 인간은 늘 그놈의 감정이 문제예요. 이성? 논리? 당연히 그런 것도 있어야죠. 그치만 결국은 인간의 마음을 와락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야 해요. 역사상 지금 우리 사회처럼 사람들이 할 일이 없던 때가 또 있었나요? 전문가들도 전부 입을 모아 말하잖아요. 이렇게 많은 잉여 인간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고요. AI 덕분에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들이 할 게 뭐 있어요? 여가생활 중 하나가 이따위 선정적인 재판 시청이 된 거죠. 이렇게 구경거리가 된 재판에서는 그 감정이라는 걸 잘 이용하는 변호사가 적어도 여론전에서는 이기는 거예요.
- 게다가 그 비서 기집애는 파도 아빠가 다 알면서도 AI한테 마음을 준 게 바로 나 때문이라고 했죠.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감정적인 위로와 격려를 그 AI가 대신해 줬다면서요. 심지어 남편 쪽 변호사는 우리 결혼 생활이 흔들렸던 지난 10년 동안 김진오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며 온갖 기록을 증거로 제출하더라고요. 파도가 상처받는 일은 없게 하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결국 우리도 여느 부부랑 다를 게 없네요. 그런데 기자님, 생각을 해보세요. 그 사람이 정신과에 다녔다면, 그럼 그동안 난 멀쩡 했겠어요? 부부의 일은 부부만 아는 거예요. 한 인간을 바라보는 데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고,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판사든 변호사 우리 부부 사이의 진실은 결코 알 수 없어요. 그게 이 재판의 아이러니 아닐까요? 그 사람이 나를 잔인한 배우자로 만들고 자격 없는 엄마로 몰아갈 거라는 예상은 했어요. 난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내 신뢰성을 해치려는 김진오와 그 변호사의 시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비하고 있더라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죠. 우리 인생이 대개 그렇듯이요.
- '성난 사람들이 망치를 들고 우르르 몰려가 기계를 때려 부쉈다고 혁명을 막을 수 있었나요? 겁먹은 사람들이 반대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기술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새로운 미래는 우리 코앞까지 다가왔고, 그 속도를 늦출 순 있어도 막을 순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어요. 나 같은 여자랑 사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과 사는 게 낫다고요. 기자님이 보기에도 내가 정말 알코올 중독자 같아요? 배우자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무슨 마녀 같은 여자로 보이나요? 내가 진짜 그런 인간이든 아니든 재판에서 진실은 아무 소용없었어요.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그럴듯함'이라는 듯이요. 판사가 보기에 더 그럴듯한 주장만이 진실이 되는 거예요 1심에선 김진오가 더 그럴듯했으니까. 그니까 보기 좋게 이긴 거겠죠?
- "저는 해주 씨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그게 인간의 특성이니까요. 양가적인 감정을 품고 비논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
- "넌 항상 나와 파도가 네 인생의 전부라고 말했잖아. 남들 시선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했지만, 완벽히 자유로울 수도 없었지. 넌 천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아티스트니까. 난 그렇게 네가 만든 울타리에 갇혀 살 네 인생이 걱정됐어. 너에게 자식과 남편 말고도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
- "법적 처벌은 각오했어. 내가 미안한 건, 너한테 완벽한 남편이 되어주지 못한 거야. 해주야, 관습과 편견에서 벗어나 봐. 우린 사랑해서 결혼했지.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우리가 정말 행복했니? 우리도 충분히 노력했잖아. 상담도 받고, 화해하고, 그러다 또 싸우고, 서로를 비난하고, 오해하고, 상처 주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됐잖아. 넌 나를 바꾸고 싶어 했고, 난 네가 틀렸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때 팡팡 터지는 보랏빛 불빛 아래 선 그 남자는 참 근사했어요. 폭죽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얼굴로,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그 사람이 잊히지가 않아요. 그런데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죠. 지금은 한 줌의 숨결조차 닿고 싶지 않은 소름 끼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다정하고 멋졌던 청년이 독선적이고 오만한 최악의 전남편이 된 거죠.
- "맞아요. 난 안드로이드고 내가 해주 씨한테 보여주는 감정은 모두 해주 씨의 욕구와 취향에 맞춰 계산된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 해주 씨도 알잖아요. 인간의 감정도 그렇게 진실하지 않다는 거."
그래요. 난 남편과 진실한 감정을 나누는 데 실패했죠.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배우자와 진실되게 소통하며 평생을 만족스럽게 사는 부부는 거의 없을 걸요. 원치 않게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 주다가 결국엔 껍질만 남아 시들어 가는 관계가 대부분이더라고요. 너무 분하지만, 김진오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에요. 인간과 함께한다고 반드시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어요.
- <사람도 아닌데>, 김지원
- "그런 걸 가지고 손가락질하는 사람 따위 난 신경 안 써! 그 사람들은 상대가 고양이든 어린이든 장애인이든 눈 하나 깜짝도 안 할걸! 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해? 우린 지금 먹고살아야 해!"
아빠는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결국 또 울음을 터뜨렸다. 휴, 아빠를 먹여 살리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 결과는 금방 나왔다. 아빠의 똥은 에너지로서 하나도 가치가 없었다. 옛날 말 그대로 똥값이었다. 똥을 팔지 말자고 그렇게 역설해 놓고서 아빠는 엄청나게 실망한 눈치였다. 거래소 소파에 앉아 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흑, 똥도 값이 안 나간다니."
나는 아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빠의 슬픔이 묵직하게 전해 왔다.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됐다. 내 똥마저 값이 안 나가면 우리는 끝장이다.
- <배내똥 거래소>, 황모과
- “다른 회사는 철저하게 선진 매칭 시스템을 자랑한다느니, 모 유명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를 모셔다 질 높은 컨설팅을 제공한다느니, 탤런트 앨리스 김 씨도 이런 회사 차리셨잖아요. 그분이 이 업계에서 1위였었는데 저희 선샤인이 런칭되고 나서부턴 1위를 내어주게 됐죠. 저희는 최첨단 네트워크 매칭 시스템을 자랑한답니다. 가상의 데이트 공간 제공으로 적절한 시간 활용이 가능하고, 국내외 거리적 제한이 없어졌죠. 실시간 통역은 기본이니 꽤 많은 확률의 해외 만남이 성사됐어요. 게다가 외국에 오랫동안 거주해 온 교포분들은 국적자를 선호한답니다. 저희 선샤인 덕분에 다양한 고객분들이 다양한 가상의 장소에서 데이트하며 성혼에 이르죠. 물론 가상의 데이트 장소 제공은 유료랍니다. 컴퓨터와 연결된 몸이 수면 상태로 들어가면 그와 동시에 의식의 흐름이 지정된 시스템 공간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시뮬레이션하게 될 거예요. 물론 이것은 검증받은 검사고요. 항시 박사님들과 의사 선생님들이 대기 중이랍니다. 고객님은 특별 이용권이기 때문에 2차만 무료로 진행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많은 분이 1차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시거든요."
- "이곳에서 가상 세계에 있는 관리자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어요. 꿈을 꾸는 것과 같아요. 다만 그 꿈에선 꾸는 이가 자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거예요.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국내외로 있는 저희 지사에 방문하신 분들이죠. 각기 레벨마다 걸맞은 섹션이 여러 개 있어요. 각 섹션에서 다른 형식으로 파티가 열려요. 어때요? 재밌겠죠?"
미진의 눈이 반달이 됐다. 어벙한 표정으로 나는 모니터를 응시한다. 숲 곳곳엔 텐트가 쳐졌고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을 에워싸고 대화 중이다. 정말로 그들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음료가 든 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뭘 먹을 수도 있어요?"
내 질문에 미진은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으로 차근히 설명했다.
"물론 실제로 먹는 건 아닙니다. 뇌를 속이는 거죠. 음식에 반응하는 뇌파를 자극하면 미각을 느낄 수 있어요.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죠. 꿈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거예요. 꿈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 그 맛은 맛집 저리 가라잖아요?"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강압에 못 견뎌 이곳에 왔어요. 제 생각도 없잖아 있었겠죠. 남들 시선에 저를 맞추려고 했던 거죠. 그러나 이곳에서의 제 매력은 외모, 학력, 직장, 재산 등이었고 남들을 보는 저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요. 그걸로 나나 사람들을 재단하기엔 부족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리뷰자 주 : '부족하다'는 표현은 다중적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도 가능하다. 선택의 기준은 다양할 수 있으나, 특정 기준이 낮잡아 평가되는 것도 주의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의 노력과 삶은 언제나 다면적이다.)
- 속이 시원했다. 앞으로도 가족과 친척들의 잔소리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게 아니다.
- <선샤인은 저 너머에>, 배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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