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도노 하루카] 파국

일루젼 2022. 6. 2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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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도노 하루카 / 김지영

원제 : 破局

출판 : 시월이일 
출간 : 2020.11.18 


       

이것을 기묘하다고 해야 할지 기괴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나 무언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11년 144회 아쿠타가와 수상작인 '사쿠라바 카즈키'의 <내 남자>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 나름의 애매하면서도 매끄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2020년 163회 수상작인 <파국>을 읽고 나니 -논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특유의 기(奇)가 아쿠타가와의 느낌인가 싶다.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스포츠는 끝까지 종목을 알려주지 않지만 '럭비'인 것으로 보인다. 헬멧에 대한 언급이 없고, 태클과 15명 등의 부연 설명들로 미루어볼 때 미식축구는 아니다. 

 

럭비, 만담, 경찰, 사고물건, 경찰, 섹스.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각각들의 교차점 위에 '요스케'가 존재할 뿐이다. 뚜렷한 사건이나 서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요스케의 일상과 그의 사고 흐름을 보여줄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지키지 않으면 규제를 받는다 등의 단순한 논리로만 매 순간을 판단하는 그는 성인이되 성인이 아니다. 성적도 좋고, 근육질의 신체에 여자 친구도 끊이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매 순간 자신의 충동만을 감각할 뿐.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에 관해서도 문제시되었을 때 자신이 받게 될 디메리트를 생각해 억제할 뿐이다. 그가 언제나 외부에서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는 것은 '누가 보고 있으니까 그건 하면 안 돼'라는 유아기적 발상의 한 표현이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인정할 줄 모르기에 그의 감정들은 물음표로만 남아있게 된다. 그는 타인의 감정도 읽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몸짓이나 근육 등을 관찰한다. 감정적 서술을 배제한 채 묘사되는 인간관계들은 건조한 판단과 본능적 가호의 영역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배운 대로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울음소리를 흉내 내곤 하는 개에 가깝다.

 

마이코의 일화, 히자와의 관계, 아카리의 섬뜩함 또한 그의 결핍과 어우러지며 인간의 사회성이란 결국 이상론적인 가면일 뿐이며 통제할 수 없는 본능에 관한 두려움만이 실존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요스케'만의 이야기인가?        

 


   

- 대각선 뒤쪽에서, 이번에는 다른 적이 따라붙었다. 속도만 놓고 보면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의 나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슴 근처를 손으로 치자 금세 균형을 잃었다. 너무나도 간단해서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분명 지금은 이런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 팀에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강한 팀일수록 팔을 잘 사용하니까 그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 걱정거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는 얘기들을 들으면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꼴 아닌가.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자, 전 여자 친구의 집에 침입해 속옷을 훔친 혐의로 남성 경찰관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갑자기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똑바로 누워 가슴 위에서 양 손가락을 단단하게 깍지 낀 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없기를 빌었다. 과로로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사람이 없기를 빌었다. 치매로 자식의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빌었다. 모든 수험생이 올봄부터 바라던 학교에 갈 수 있기를 빌었다. 

 

- [녀석들은 말이지, 내 개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입생 환영회에는 맞지 않는다면서 될 수 있으면 나오지 말라는 둥, 신입생이 겁먹어서 입부 희망자가 줄어들면 어떻게 하냐는 둥, 괜히 이상한 녀석만 들어오는 거 아니냐는 둥,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어. 한 번이라도 R-1(R-1 그랑프리. 일본의 1인 개그맨 콩쿠르 -옮긴이)에서 예선 2차전을 통과했다면 다들 나를 인정했을 테고 나도 자신감이 붙었겠지만, 결국 끝까지 안 됐지. 그것만은 조금 미련이 남아... 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그게 괴로워. 아마 흔해 빠진 괴로움이겠지만, 그래서 괜히 더 괴로워. 나만이 맛볼 수 있는 나만의 괴로움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걸까? 네가 바쁘다는 건 나도 알아. 시험이 다음 달 초였지? 이제 별로 안 남았구나.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와줬으면 해.] 

 

- 기분 나쁜 여자가 웃으면서 내 쪽을 보며 사이가 좋은가 봐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이가 좋다고 말했다. 그 기분 나쁜 여자는 잘 살펴보니 얼굴이 예뻤다. 나는 얼굴의 근육을 사용해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히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히자는 공연 전에 말 거는 걸 싫어하니까 나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 예뻐,라고 나는 말했다. 마이코는 말없이 미소 짓고 바지락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혹시 조금 전에 한 크루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마이코는 부정적인 감정을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지 않고 돌려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턴가 마이코의 말과 행동을 깊게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바지락을 먹으면서 마이코가 처음 보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또 새 옷을 샀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마이코는 원피스만 입는다. 원피스가 정말 많아서 한 달 동안 같은 원피스를 입지 않는다. 오늘 입고 온 원피스는 가지 같은 색이었고, 작은 핑크색 꽃이 가지를 감추듯이 여러 개 피어있었다. 나는 꽃을 구별할 줄 몰라서 꽃의 이름은 모른다. 

 

- 화장실은 하나뿐이었고, 남녀공용이었다. 문을 열자 남자의 엉덩이가 보여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바로 닫았다. 생각해보니 소변을 누는 것뿐이라면 엉덩이를 내놓을 필요도 없고, 사과해야 하는 건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소변을 누고 있던 저 남자다. 그러나 생각하기보다 앞서 사과하는 말이 나오는 건,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 잠시 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남자는 배가 나온 중년으로 얼굴이 붉었다. 몸을 틀어 남자를 피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변기 커버가 올라가 있었다. 남녀공용인 화장실에서 변기 커버를 올려두는 남자를, 나는 철들었을 무렵부터 늘 용서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다음에 사용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제멋대로이고 매너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올라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남자는 어떻게 봐도 올린 변기 커버를 그대로 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남자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변기 커버에 오른손을 가져갔다가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등 뒤의 세면대에 허리 근처를 강하게 부딪쳤다. 검은 벌레가 재빠르게 변기 뒤쪽으로 사라져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름 끼치는 감촉이 손에 남아 있었다. 즉시 여기서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먼저 손을 씻어야 하는지, 정답을 알지 못한 채 화장실을 나섰다. 

- 자리로 돌아오자 아카리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하고 있었다. 아카리의 후줄근한 스웨트 셔츠를 보고 나는 조금 안심했다. 허리를 부딪쳐선지 요의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의 목적은 달성한 듯한 기분도 들었다.

 

- "상대가 볼을 갖고 달려와. 우리는 그걸 막으려고 태클을 하러 가지. 그러면 상대는 어떻게 할까?"
스텝을 밟아서 비키려고 한다고 포워드 지망인 1학년이 말했다. 올해 들어온 1학년 중에서는 가장 체격이 컸고, 그래서인지 꽤나 당당했다. 강호 학교와의 경기에서도 이런 태도로 임해준다면 더욱 좋겠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부딪쳐오는 녀석도 있지만 보통은 우선 비키려고 하거나, 비키지는 않더라도 직격은 피하려고 하지. 그럴 땐 상대의 허리를 보면 된다. 허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허리를 보면 상대가 어느 쪽으로 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어. 그리고 팔과 상반신만으로 태클하려고 하지 마라. 발을 확실하게 움직여서 상대의 가랑이 바로 아래를 디디는 거다." 
 

- [오히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요. 천장에서 얼굴만 나와 있다니, 어쩐지 바보 같은 느낌이라서. 게다가 그녀는 이쪽을 노려보는 게 아니라 왠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대요. 분명 자기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한 건지 스스로도 모르는 거겠죠. 이 사람은 우리에게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하세베가 웃으면서 말했으니까, 해롭지도 않아요. 그 증거로 하세베도 조금 전까지 누워서 뒹굴거렸어요. 저도 왠지 피곤해서 눕고 싶었지만, 하세베가 침대를 차지해서 저는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죠. 
후생노동성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도 1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자택에서 사망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높아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적이 있는 집이란 건, 그렇게 드물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괜찮은데, 요스케 선배한테 말을 안 하는 건 왠지 속이는 것 같아서 일단 전해요.] 

 

- 짧고 간결한 문장과 속도감 있는 전개가 특징적이며,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온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조성해내고 있다.  작품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주인공 요스케'의 캐릭터일 것이다. 요스케에게서는 감정이랄 것을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해야 한다', '~할 필요가 있다', '~는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이다'와 같은 것들이다. 그는 늘 규범과 매너에 사로잡혀있으며,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와도, 이유를 생각해보고는 슬플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멈춘다. 작중에는 요스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데 이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더 두려움이 커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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