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킴 투이] 만 Mãn

일루젼 2022. 6. 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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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킴 투이 / 윤진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19.11.29 


       

조그만 크기에 단단해 보이는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퀘벡으로 넘어간 뒤, 지금은 유년기의 언어인 베트남 어가 아닌 프랑스 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저자의 약력 또한 눈을 끌었다. 그전까지 베트남 문학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아직 <루>를 읽지 못해 조심스럽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 '만'과 저자의 삶은 많은 부분이 겹쳐 보인다. 만과 그녀의 세 어머니, 그리고 쥘리와 홍 모두 작가의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소설이라는 형태로 정말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게 아닐까. 삶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어떤 것이, 꼭 서글픈 것이기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 조금은 먹먹했다.

 

낯선 땅에 도착해 정착하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삶'이란 개념을 배우고 욕망이란 것을 가져보게 되는 만의 변화가 기뻤다. 그녀의 선택들을 평가하고 비난할 마음은 들지 않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점이나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생에 대한 욕망을 처음으로 감각하는 만을 지켜보고 있자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이 남았다. 

(배경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더 편안해진 것도 사실이다.)

 

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는 부부와 연인은 같은 단어가 아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며, 때로 생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당시 베트남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가는 그녀에게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란 무엇이었을까. '변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즐겁게 읽었다. 


   

- 엄마와 나는 닮지 않았다. 엄마는 키가 작고 나는 키가 크다. 엄마는 피부색이 짙고 내 피부는 프랑스 인형 같다. 엄마는 종아리에 구멍이 있고 나는 가슴속에 구멍이 있다.

- 나의 첫 어머니, 나를 수태하고 낳아준 어머니는 머리에 구멍이 있었다. 멀쩡한 베트남 여자라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기 전에 아이를 가졌을 리 없으니, 막 소녀티를 벗었거나 어쩌면 아직 어린 소녀였을 것이다.

= 나의 두번째 어머니, 채소밭의 오크라 묘판 가운데 버려진 나를 주운 어머니는 믿음에 구멍이 나 있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고, 특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래서 메콩강 유역의 권력자들을 피해 초가집에 칩거하면서 산스크리트어 기도문을 외웠다.

- 세번째 어머니, 첫걸음을 내딛는 나를 보아준 어머니는 엄마, 나의 엄마가 되었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다시 두 팔을 벌리고 싶었다. 그래서 항상 닫혀 있던 덧창을 열었다. 멀리, 따스한 빛 속에 내가 있었다. 나는 딸이 되었다. 어머니는 넓은 도시, 익명의 타지에서 딸을 키우기로 하면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교원 사택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교사이면서 얼린 바나나도 팔았고, 아이들은 그런 어머니를 가진 나를 부러워하며 주위에 모여들었다.  

- 엄마는 매일 아침 아주 일찍, 수업 전에 나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갔다. 제일 먼저 과육이 풍부하고 즙이 많지 않은 잘 익은 야자열매를 샀다. 야자열매 상인은 평평한 막대기에 탄산음료 병뚜껑을 고정시킨 강판으로 코코넛 절반을 갈았다. 얇게 저민 코코넛 과육이 가판대에 깔아놓은 바나나 잎 위로 프리즈를 이루며 리본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는 동안 상인은 쉬지 않고 이야기했고, 엄마에게 늘 같은 질문을 했다. "애한테 뭘 먹이길래 입술이 저렇게 붉어요?"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마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상인이 나머지 반쪽의 코코넛을 갈기 시작하면, 기가 막히게 빠른 손놀림에 넋이 나간 나는 결국 입을 반쯤 벌린 채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다행히 엄마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코코넛 밀크 만드는 법을 딸에게 가르쳐주었다. 코코넛을 갈아서 과육 조각을 따뜻한 물에 적셨다가 양 손바닥에 넣고 짤 것.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요리법을 가르쳤다. 혹시라도 이웃 여자들이 요리법을 훔쳐가서 똑같은 요리로 자기 남편을 유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리법의 전통은 흡사 스승에서 제자로 전수되는 마술처럼 일상의 리듬에 따라 한 번에 한 동작씩 은밀하게 전해졌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여자아이들은 밥을 지을 때 물의 양을 검지의 첫 관절로 맞추는 법을, 칼끝으로 '독한 고추'를 잘라서 독기 없는 꽃이 되게 하는 법을, 섬유질의 곁에 따라 밑에서 위로 망고 껍질을 벗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 엄마는 그의 세번째 방문을 허락했다. 이튿날 다시 찾아온 그는 잠시 나와 단둘이 있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처럼 의자들이 거리를 향해 놓인 카페는 베트남에서는 남자들만을 위한 장소였다. 화장을 하지 않고 속눈썹을 붙이지 않는 아가씨들은 적어도 공공장소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이웃집 정원에서 그라비올라나 사포딜라 혹은 파파야 스무디를 마실 수도 있었겠지만, 등받이 없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들이 놓인 그곳은 어린 여학생들이 보일락 말락 하게 미소 짓는 자리,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두 손이 조심스레 맞닿는 자리였다. 우리는 그저 부부가 될 사이였다.

 

- 동네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우리 집을 포함한 교원 사택들의 앞쪽, 그러니까 학교 운동장의 화염목 아래 분홍색 화강암 벤치뿐이었다. 만발한 꽃을 무겁게 떠받친 화염목의 여린 가지가 흡사 발레리나가 쭉 뻗은 긴 팔 같았다. 그는 벤치에 수북이 쌓인 선홍색 꽃잎들을 조금 밀어낸 뒤 그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작 그는 꽃에 둘러싸인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앞으로 늘 이렇게 서 있게 되리라는 것을. 늘 혼자이고 외톨이인 그는 나를 위해 자기 옆에 자리를 만들어 줄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 그 여자의 부엌에서 몇 주 동안 자고 난 뒤 엄마는 다시 다른 일을 위해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렇게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길에, 가시가 박히고 무거운 (다행히 밤에만 떨어지는) 두리안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농장을 지날 때였다. 바로 그곳에서 엄마의 아버지가 남자 두 명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어릴 때처럼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같이 걷던 여자가 뒤로 젖힌 엄마의 고깔모자 아래 드러난 충동 어린 눈빛을 보았다. 엄마의 몸이 눈길과 같은 방향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둥 Đùng." 그 말은 "안 돼"가 아니고 "멈춰"도 "걸어"도 아닌, "그냥 참아"였다. 엄마는 눈길을 다시 돌렸다. 5년 만에 보는 아버지는 많이 늙어 보였다. 판사의 위엄은 여전했지만, 두 볼은 미소 짓게 해 줄 근육이 사라져 버린 듯 처져 있었다. 엄마는 혹시라도 아버지 눈에 띌까 봐 두려웠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거운 짐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하나 더 떠안게 될까 봐, 당국에 불려 가서 수백 가지 질문에 대답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 엄마가 아버지를 본 것은 그날 두리안 나무 아래서가 마지막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 나무를 '서우리엥 sâu riéng'이라고 부른다. 그때까지 엄마는 '개인적인 슬픔'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두리안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두리안의 뜻을 자주 쉽게 잊는 것은 아마도 두리안에 담긴 슬픔이 가시 돋은 두꺼운 껍질 아래 따로따로 밀폐된 방들에 봉인된 과육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 남쪽 베트남에서는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도 날씨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계절 구분이 없고 이 주방 안처럼 날씨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원래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대로, 왜 그런지 어떻게 그런지 묻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 언젠가 준비된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는 사각 창으로 변호사 손님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이미 답이 있는 질문만 해야 한다고, 답이 없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했다. 나의 질문들은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 남편은 사흘 동안 열이 내리지 않아 고생했다. 밥도 내가 한 입씩 떠먹여 주었다. 베트남에서는 누군가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는 바람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결한 바람을 맞으면 죽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나쁜 바람을 쫓아내기 위해 남편에게 셔츠를 벗으라 하고 도자기 숟가락에 호랑이 기름 연고를 발라 등을 긁어주었다. 남자의 맨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척추를 따라 뼈 사이로 등의 골격을 그려가며 문지르는 동안에 살갗에 진한 붉은색 반점이 나타났다. 몸속의 열기가 빠져나온 자리였다. 어쩌면 느껴지지 않은 채로 몸 안에 담겨 있던 다른 통증들도 함께 배출되었을 것이다. 낯선 남자, 하지만 내 삶이 닻을 내린 유일한 남자를 위해 나는 수천 년을 이어온 동작을 계속했다. 원기를 되찾게 해주고 싶었고, 그의 살갗을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생산되어 우리 아파트로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냄새로 배어 있는 담요를 덮어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 몇 달이 지나자, 혼자 오던 손님들이 동료 혹은 이웃 혹은 여자 친구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식당 안에서, 이어 바깥에서, 길 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럴수록 나는 밤까지 주방에서 일해야 했다. 이내 손님들은 통킹식 수프 대신 '오늘의 요리'를 찾았다. 그날의 요리가 무엇인지는 식당에 와서 창유리에 걸어놓은 흑판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하루에 딱 한 가지 메뉴였다.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추억만 되살렸다. 추억으로 흥분한 가슴이 접시 밖으로 넘쳐흐르지 않게 하려면 힘겨운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소금 통을 떨어뜨려 소금이 바닥에 흩어지기라도 하면, 하루 배급이 소금 알갱이 서른 개로 정해져 있던 때 엄마가 했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하얀 소금 알갱이를 세어보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야 했다. 다행히 손님이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천천히 추억을 되살리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 햇살 동생은 밧을 위해 우선 내 부엌에서 마니옥 케이크, 게살 볶음밥, 생강과 표고버섯을 넣은 닭고기를 가져갔다. 그녀를 처음 고모 집까지 데려다준 뒤 달려온 그는 영원한 젊음을 강렬하게 내뿜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밧에게 청혼했다. 밧이 결혼을 결심한 것이 매일 네 시간씩 버스를 타고 다니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결혼했다.   

 

- 약혼식 전날 식당 안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사랑의 붉은색이 아니라 행운의 붉은색이다. 베트남의 미신에 따르자면 선물은 모두 행운의 붉은색으로 싸야 한다.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루고 또 그 삶이 다른 삶들을 떠받칠 수 있으려면 균형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행운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랑 신부에게도 사랑 대신 행복을 빌어준다. 그리고 두 번 빌어준다. 그래서 글자를 두 번, 서로 포개지고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서로를 복제하도록 두 번 쓴다. 그 누구도 그 믿음을 어기려고 하지 않기에, 쟁반에 들고 가는 선물들도 같은 글자로 두 번이 아니라 같은 글자 두 개가 포개진 한 글자로 행복을 수놓은 새빨간 보자기로 덮여 있다. 
(역자 주 : '기쁠 희 喜' 자의 모양을 조금 바꾸어 두 개를 연결시킨 '쌍희 희 囍'자를 말한다.)

 

- 다행히도 요즘의 신랑 신부들은 앞서 시험을 통과한 이전의 신랑 신부처럼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식의 절차도 축제일뿐이다. 그들은 결혼하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혹은 둘이 있으면 행복하니까 결혼한다고 믿는다. 

- 보석, 쌀로 빚은 술, 구장 잎과 빈랑 열매는 사촌들이 맡았다. 요즘에는 베트남 사람들도 빈랑 열매를 거의 씹지 않는다. 하지만 빈랑은 여전히 만남의 시작을 상징한다. 100년 전만 해도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자개로 장식된 통에서 절구를 꺼내놓았다. 그 절구에 빈랑 열매를 찧어 소석회를 살짝 바른 잎으로 싸는 것이다. 즐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섞으면 커피처럼 각성 작용이 생긴다고 하고, 심장이 약한 사람들은 어지럽고 취한 기분이 든다고도 한다. 천천히 씹으면 효과가 나타나면서 입술이 영원한 결합의 이야기를 되새겨주는 붉은색으로 물든다. 

- 전설은 이렇다. 쌍둥이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했다. 형이 그 여자와 결혼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동생은 형에게 자기 마음을 숨기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사랑의 아픔을 안고 힘이 빠지도록 계속 걷던 동생은 결국 쓰러져 석회암 바위가 된다. 형이 동생을 찾으러 나서고, 동생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다 힘이 빠져 동생이 바위로 변한 자리에서 쓰러져 빈랑나무가 된다. 이어 형의 아내가 남편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같은 장소에서 나뭇잎이 하트 모양인 덩굴로 변한다. 결국 나무가 바위를 지키고 덩굴이 나무를 감싸게 된다. 나는 이토록 슬픈 결말을 맺은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행복한 결혼의 상징이 될 수 있는지 의아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조상들의 뜻을 잘못 받아들였다. 조상들이 빈랑을 축하 선물 행렬의 제일 앞에 놓은 것은 우리가 믿는 것과 반대로 신랑 신부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혹은 사랑이 우리를 죽일 수 있음을 알려주려고 한 게 아닐까?
 
- 쥘리는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보내던 사각 창 안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그녀의 미소에 창 전체가 환해졌다. 쥘리는 첫 키스의 흔적을 찾아낸 고고학자처럼 환희에 찬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굳이 말이 필요 없이 곧바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는 자매가 되었다. 쥘리는 딸을 입양할 때 그랬듯이 나를 받아들일 때도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오후에 나를 극장에 데려갔고, 자기 집에도 데려가서 명작 영화를 함께 보기도 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그날 기분에 따라 이것저것 맛보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스모크드 미트부터 투르티에르까지, 케첩부터 베샤멜소스까지, 셀러리 뿌리, 대황, 들소 고기, 푸딩 쇼뫼르, 달걀 피클까지 먹어보았다. 쥘리가 식당으로 와서 나와 함께 음식을 만들 때도 있었다. 나는 바나나 잎을 포개 놓고 찹쌀이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하지만 내용물이 숨 죽지 않도록 부드럽게 싸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손가락이 더 잘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한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역자 주 : 푸딩 쇼뫼르. 일종의 고기 파이로, 퀘벡 지역에서 성탄절과 새해에 먹는 음식이다. 홍 케이크 반죽에 메이플시럽을 부어 오븐에 구운 푸딩으로, 퀘벡의 대표적인 디저트다. 20세기 초 대공황이 닥쳤을 때 값싼 재료로 개발된 음식이라 프랑스어로 '실업자'를 뜻하는 '쇼뫼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 그날 이후 내 삶은 쥘리가 가져다 놓은 두루마리 그림이 내 앞에서 조금씩 펼쳐지는 셈이었다. 내가 한걸음 나아갈수록, 그림이 펼쳐질수록, 새로운 색과 새로운 형태가 계속 등장했다. 마침내 형상들이 마법처럼 베일을 벗어 던지고 하나의 장면을 만들었다. 혹은 하나의 순간을 그렸다. 그리고 갑자기,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손짓이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기 시작했다. 접시, 봉투, 진열장, 어디나 비취 초록색으로 써놓은 내 이름 - '만 man'에서도 목소리가 솟아 나왔다. 막 태어난 그 목소리는 나의 요리 강좌에 처음 참석한 스무 명이 조리법을 배워가면서, 그날의 음식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을 퍼뜨려주면서 그 음량이 높아져갔다. 그렇게, 새로운 모험을 떠난 격동의 삶이 또 다른 삶을 가져왔다. 그 새로운 삶은 마침내 나의 배 속 따뜻한 곳에 자리 잡았다. 

 

- 쥘리는 부족한 게 전혀 없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줄 게 많고 또 모두에게 무엇이든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행복을 파는 상인이었다. 

 

- 흔히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이 저절로 늘어나고 또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각자에게 맞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쥘리에게서 배웠다. 그런 행복 속에 한 해 한 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달력이 넘어가는 것도 계절이 바뀌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홍이 식당을 이끌어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날 아침 아주 일찍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아찔할 정도로 완벽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뿐이다.  
 

- 내가 베트남식으로 만들던 바나나 케이크는 맛이 아주 좋지만 모양이 건장한 남자, 위압적일 정도로 거친 남자를 연상시켰다. 필리프는 원당 캐러멜 거품을 사용해서 내 케이크를 순식간에 부드럽게 만들었다. 코코넛 밀크와 우유를 넣은 바게트빵 반죽에 바나나 몇 개가 통째로 들어간 케이크로 필리프는 동과 서의 결합을 구현했다. 약한 불에서 익어가는 다섯 시간 동안에 빵 반죽은 바나나들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반대로 바나나들은 과육의 단맛을 빵에 건네준다.  
 

- 홍이 간직한 아버지와의 마지막 추억은 빛바랜 노란색의 우묵한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있던, 토마토 한 조각과 자른 파슬리 줄기가 들어간 맑은 수프였다. 홍의 아버지가 지나가면서 아들 옆 한구석에 그릇을 내려놓았고, 홍의 오빠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두 다리를 세우고 앉아서 그 밑에 두 손으로 그릇을 받치고 기다렸다. 그렇게 홍은 그 수프를 조금 마실 수 있었다. 홍에게는 먹어본 모든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에도 홍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같은 수프를 만들어서 그때의 맛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온갖 토마토를 다 사용해봐도 그때 몇 모금 마신 그 맛을, 절대 지워지지 않는, 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추억을 되살릴 수 없었다. 우리는 홍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 수프의 조리법을 영원히 남기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통으로 썬 오징어를 가지, 파인애플과 함께 튀긴 요리는 나와 쥘리의 만남을 기억하기 위해 고른 것이다. 이렇게 우리 책의 조리법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 프랑신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누나가 되고 자기보다 큰 아이들에게는 동생이 되어 함께 자랐다. 그녀는 밥숟가락을 참을성 있게 내밀면서 어린아이들을 먹였고, 자기보다 큰 아이들 곁에서 중국 주판으로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낮잠 시간에는 프랑신의 어머니가 피아노에 앉아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주현절을 맞아 혹은 새로 온 아이를 축하하기 위해 프랑신의 어머니가 케이크를 만들 때면 보모들이 베트남 전통 노래로의 동생 뤽을 재웠다.  
(역자 주 : 주현절은 교회력에서 예수의 신성 출현을 축하하는 날(1월 6일)로, '왕의 갈레트'라는 케이크를 굽고 그 안에 잠두콩(요즘은 잠두콩 대신 도자기로 구운 인형을 사용한다)을 넣어 먹을 때 잠두콩이 나온 사람이 왕이 되는 풍습이 있다.) 

- 미색 종이에, 어릴 때 하던 대로 잉크에 펜을 적셔가면서 썼다. 어릴 때와 똑같은 보라색 잉크를 구하느라 한참 돌아다녀야 했다. 우리의 삶이 가장 편안하던 시절에 베트남의 모든 학생이 그 잉크를 썼다. 삶이 팍팍해진 뒤로는 노트를 두 번 사용할 수 있게 처음에는 연필로 쓰고 두 번째에 잉크로 썼다. 글씨가 글의 내용까지, 나아가 그 글을 대하는 마음과 경의를 담아낸다고 믿었기에, 어떤 것을 썼는지뿐 아니라 그것을 쓴 글씨가 어땠는지도 채점 대상이었다. 몇 년 동안 손가락 마디에 늘 보라색 잉크를 묻히고 다니면서 훈련한 덕분에 나는 곱고 가지런한 글씨체를 갖게 되었다. 이후에도 굵은 부분은 유연하고 가는 부분은 가볍게 쓰는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 일부러 써보기도 했다.  
 
-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뤽과 함께했던 몇 분이 사진 같은 정지화면으로 이어진 영화가 되어 밤새도록 천장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빨아들여서 무중력의 공간으로 쏘아 보냈는지 그 정체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레스토랑 바닥을 덮고 있던 장미 덩굴과 나팔꽃이 섞인 화려한 풍경의 브리아르 모자이크 타일 하나하나를 되짚어보았다. 그 나뭇잎들 사이에 앉아 있던 앵무새들의 꾸밈없는 핑크빛 깃털이 나를 취하게 만든 걸까? 쉬제트 크레이프를 굽던 황동 프라이팬이 반짝이는 바람에 눈이 부셨던 걸까? 뤽의 눈 안에 들어 있던 비취 때문일까?  

 

- 색깔을 생각하면, 숫자의 경우가 그렇듯이, 나는 늘 베트남어가 먼저 떠오른다. 베트남에서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머리카락과 눈의 색깔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시아인들의 눈동자는 아주 짙은 갈색과 흑단같은 검은색까지 결국 한 가지 색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머릿속에서 푸른색과 초록색은 같은 단어 - '싼 xanh' - 로 지칭되기 때문에, 뤽의 눈이 어떤 색이었는지 정확히 떠올리느라 그의 얼굴 전체를 몇 번이나 클로즈업해야 했다. 뤽의 '싼'은 푸른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다. 할롱 만의 물빛, 혹은 여자들이 몇십 년 동안 차고 다녀 짙어진 비취색이었다. 비취는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음영을 얻는다. 처음에는 피스타치오 열매처럼 부드러운 녹색이었다가 점점 짙어져서 어린 올리브 색이 되고, 심지어 아보카도 과육 색깔이 된다. 그러다 나무에 붙은 이끼와 전나무의 색, 혹은 보틀 그린 색에 가까워질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그 때문에 어떤 여자들은 비취의 색을 변하게 하려고 일부러 하녀들에게 자기 팔찌를 차고 있게 한다. 비취는 쉽게 긁히기 때문에 팔찌를 차고 있으면 급하게 움직일 수 없다. 탄을 만지느라 시커메지고 여기저기 튼 손마저도 동작이 우아해질 수밖에 없다.  
 

- 모르는 프랑스어가 나오면 나는 우선 음색을 통해 추측해본다. 'colossal', 'disjoncter', 'apostille' 같은 단어가 그렇다. 때로는 단어의 결, 냄새, 형태로 추측한다. 비슷한 단어 사이의 미세한 의미 차이를 파악해야 할 때는, 예를 들어 'mélancolie'와 'chagrin'을 구별해야 할 때는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무게를 재어본다. 그렇게 손에 얹으면, 하나는 잿빛 안개처럼 떠 있고 다른 하나는 단단한 쇠공의 느낌을 준다. 이런 식으로 추측하고 더듬어서 얻은 답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실수를 하는데, 지금껏 가장 뜻밖의 실수는 'rebelle'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나는 '르벨 rebelle'이 '벨 belle'에서 파생된 말, 그러니까 '다시 아름다워진다'는 뜻인 줄 알았다. 아름다움은 얻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니까. 엄마가 늘 말하길, 혹시라도 갈등이 생기거든 설사 상대가 잘못했다 해도 욕하지 말고 그냥 물러서는 편이 낫다고 했다. 욕하려면 우리 입을 분노와 피와 독기로 채워야 하기에 결국 우리 입이 더러워지고 아름다움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rebelle' 앞에 붙은 're'가 원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이전의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열어주는 말이라고 믿었다. 

 

- 남편은 나를 위해 마음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눈길 혹은 경의를 바칠 이유가 없었다. 지인들에게내 얘기를 할 때 남편은 내가 남극 대륙에서든 사막에서든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남편은 같이 걸어가다가 샌들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내가 길모퉁이에서 멈춰 서야 했을 때도 한참 동안 혼자서 계속 걸어갔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의 선택을 받는 행운을 누린 여자였기에 내가 그를 걱정하고 챙겨야 할 뿐 그가 나를 위해 마음 써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세세한 모든 것이, 아주 사소한 것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까지, 저녁마다 침대 옆에 벗어둔 슬리퍼 방향이 제대로 되었는지부터 가족 구성원들의 생일 선물까지, 닭 엉덩이살을 그의 그릇에 챙겨 담는 것부터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는 것까지 전부 나의 몫이었다. 

 

- 뤽은 등산가를 안내하는 세르파처럼 나를 이끌고 프랑스어의 온갖 에움길들을 헤쳐 나갔다. 마치 장미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듯 낱말에 담긴 의미의 뉘앙스를 한 겹 한 겹 벗겨나갔다. 그는 프랑스어 단어 'évidence'에 대해서도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하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맥 속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표현해주었다. 

- 뤽에 따르면 자기가 내 구두끈 버클 뒤에 갈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래서 마치 평생 해온 일을 하듯 망설임 없이 그 갈고리를 벗길 수 있었던 것은 'évidence' 덕이었다. 내가 움푹한 그의 쇄골에 입술을 가져다댈 권리, 그 자리를 나의 휴식처로 삼을 권리가 있다고 느끼게 된 것 역시 'évidence' 덕이었다. 엄마와 함께 수없이 많은 장소를 떠나면서도 단 한 번도 뒤돌아본 적 없던 내가 그 몇 센티미터 안에 나의 깃발을 꽂고 나의 영토로 선언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뤽이 말하는 'évidence'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와 함께 석양에 물드는 도시를 바라보며 에드윈 모건의 시를 낭송했을까?
 
- 나의 시간은 영원했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니 나의 시간은 무한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종류의 견과류와 볶은 수박씨로 속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단단한 껍질을 벗겨야 한다. 힘껏 깨야 하지만, 섬세한 속살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힘 조절을 잘해서 알맞은 순간에 멈춰야 한다. 안 그러면 속살까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꿈처럼 순식간에 전부 깨져버린다. 워낙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에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다행히 베트남어 동사에는 시제가 없다. 동사는 늘부정법으로, 현재형으로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어제' '앞으로'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만 잊으면 뤽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게 만들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평생을 함께 살아낸 것 같았다. 난처한 상황이면 하늘로 향하던 그의 오른쪽 검지, 블라인드 그늘에서 쉬던 그의 몸, 아이들을 따라 뛰어갈 때 그의 목을 감싸던 로열블루 빛 커다란 머플러, 모두 눈앞에 그대로 그려 보일 수 있었다. 

- 늘 홀로 인내하며 살아온 세번째 어머니와 진정한 모녀관계를 맺는다. '인내'를 뜻하는 '년 nhan'이라는 이름으로 저항군 활동을 하다가 총상을 입고 "종아리에 구멍을 가진" 어머니는 "가슴속에 구멍을 가진" 딸을 이름 그대로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로 만들어준다. 이 땅에 묶어두는 '빚'을 갚기 위해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인내'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인 '충만함'은 서로를 채우는 존재이자 서로의 분신이다. 그래서 만이 자신의 일부였던 뤽의 사랑을 떼어내는 순간은 연인 프엉이 바친 "살지 못한 삶"을 두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사랑과 겹쳐진다. 

- 책의 전반부가 어머니와 딸의 삶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갑자기 나타나 세계의 중심이 되어버린" 남자, "수없이 많은 장소를 떠나면서도 단 한 번도 뒤돌아본 적 없던" 만에게 처음으로 영토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 연인 뤽과의 사랑 이야기다. 책 전체에서 화자는 남편의 마음에는 거의 다가가지 않는다. (폭군처럼 군림하던 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피해 힘들게 잠들던 그의 유년기 이야기가 유일하다). 좀 더 정확히는 남편과는 내밀한 감정이 중요하지 않은 사이다. 남편과 함께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숨 쉬는" 일만 해내면 "아무런 문제도 다툼도 없는, 아무 자국도 남지 않는" "활주로처럼 매끄럽고 평평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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