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명섭] 온달장군 살인사건

일루젼 2022. 6. 2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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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명섭
출판 : 들녘 
출간 : 2020.02.10 


       

책 박스를 까다가 툭 튀어나온 책이었다. 아마 표지에서 풍기는 기담 느낌에 대뜸 질렀던 것 같은데, 연결되는 다른 작품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읽어서 끝맛이 조금 개운치 않다.

 

시대배경은 6세기말 고구려, 평원왕 사후 영양왕 즉위 직후인 듯하다. 나는 저자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연도만 보았을 때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아들보다는 온달 자체가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린 시절 태자로 책봉된 뒤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태자로 머물러야 했던 영원왕에게 전장터에서 명성을 떨치는 부마는 경쟁자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어째서 25년이나 양위를 받지 못했을까?

 

자식에게도 왕위만은 내어주지 못했던 왕들이 적지 않다. 평원왕이 선왕이 되기를 거부했다 하더라도, 온달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와 양원왕의 즉위 직후 '빼앗긴 땅을 되찾거나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출사는 사실상 명예롭게 죽기 위해 떠난 유배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물들을 바라보고 해석해낸 시각에는 흥미를 느꼈지만, '살인사건'이라는 형태를 풀어나가는 형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어지는 <무덤 속의 죽음>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을지문덕에 대해서도 이전부터 이어지는 서사가 있다는 분위기를 강하게 풍겼는데, 혹시 전작이 있나 싶어 찾아봤지만 딱히 연결되는 작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라진 조우관>이 을지문덕을 탐정으로 내세우긴 하지만 아동도서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작품의 전작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 새로운 인상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찾아서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끝.  

  


 

- "아까는 왜 그러셨습니까?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면 아무도 장군님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 온달은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넨 내가 어떻게 평원태왕 폐하의 부마가 되었는지 알고 있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말고."

"그거야..."

우물쭈물하는 을지문덕을 보고 온달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 결혼은... 나 같은 하급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네. 그래서 원래 정해진 혼처인 상부 고씨 집안 대신 한미한 우리 집안을 혼처로 정한 거야. 난 지금도 황궁에 들어가서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네.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를 보는 눈길이었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고, 우리 어머니를 늙고 눈먼 할머니로 만들었네. 하지만 내가 정작 견디기 힘든 건, 사람들이 나와 아내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혼인했다고 믿는다는 점일세."

온달이 망루 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이야기를 끝맺자 을지문덕이 대답했다. 

"장군님께서는 백성들의 희망입니다. 백성들이 장군님을 바보로 만든 것은 장군님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처지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두 사람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청난 숫자의 횃불들이 지평선을 타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온달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산자락을 넘어오는 횃불 무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시작이군." 

 

- 말의 쇠 편자에 눌린 대지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 뭉개진 풀 위로 제법 피가 튀어 있었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온 곳은 없었다. 을지문덕은 온달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과 주변 광경을 머릿속에 남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꼭 감은 눈 너머로 펼쳐진 검은 공백 위로 온달의 시신과 주변에 흩어진 핏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발에 짓밟혀서 잘려진 풀잎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갈 무렵 등 뒤에서 뭔가가 그를 덮쳤다. 온달의 시신 위로 넘어진 을지문덕에게 보밀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발이 꼬여서..."

을지문덕은 방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일단 서두르기로 했다. 보밀이 가져온 것은 병사들이 천막으로 쓰는 말가죽이었다. 

 

- 바위에서 뛰어내린 을지문덕은 눈앞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보았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핏자국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변색되긴 했지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을지문덕은 핏자국들 사이를 지나면서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화살 맞은 상처에서는 창이나 칼에 찔렸을 때처럼 피가 많이 쏟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보다 깊고 오래간다. 겉으로 난 상처는 작아 보여도 몸 깊숙이 파고든 화살촉이 아주 조금씩 뼈와 살을 썩어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화살촉이 헤집어놓아 살은 저 깊숙한 곳까지 짓무르고 고름까지 나오게 된다. 을지문덕은 젊은 시절 목격했던 광경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신라 군이 쏜 화살을 맞은 병사의 등에서 고름 덩어리와 구더기가 쏟아져 나오던 그 처참한 모습을 이지 못했다. 

 

-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온달장군께서 추모성왕의 곁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시길 기원합니다."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부군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평강공주와 인사를 나누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을지문덕은 관이 놓인 평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상 아래에는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가져다 놓은 얼음들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 있었다. 

 

- 다리는 살포시 미소를 짓는 그녀가 붉은 기운을 띤 저녁 햇살보다 아름답고 장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 먼지 낀 탁자와 평상을 깨끗하게 닦아낸 다리는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더러운 방구석에서 몽글거리던 어둠이 귀신 들린 여인처럼 끽끽거리다가 소멸되었다. 좁은 방 안에 놓은 평상에 걸터앉은 다리가 시장에서 사 온 떡을 꺼내놓았다. 

 

- "손목!"

을지문덕의 외침에 놀란 섬모는 을지문덕이 소매를 걷어 올리는 시늉을 하자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좋소. 짐을 열어보지 않겠으니 대신 팔을 한 번만 보여주시오."

 

- "자네 오른손잡이군. 그렇지?"

수부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을지문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아까 팔뚝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자넨 왼손을 먼저 보여주었어. 오른손잡이들은 보통 팔을 보여 달라고 하면 오른손 먼저 보여주는데 말이야."

수부 관리는 을지문덕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관리 앞에 선 을지문덕이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냥 팔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바로 손목을 보여줬어. 손바닥일 수도 있고, 손목일 수도 있었고, 팔뚝일 수도 있었는데."

(리뷰자 주 : 어느 손을 내미는지는 개인 차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기가 남들 다 들리게 손목이라고 소리쳐놓고...)

 

- "의심이 가는 귀족들을 문초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대로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을 중리부로 불러낸단 말인가? 그건 절대 안 돼."

"중리부에서만 심문하지 않으면 된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건 모른 척하겠네. 확실히 물증이나 자백을 받아오게. 그럼 그자가 누구든 태왕 폐하를 기만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까."

 

- "간혹 관청과 엮이는 걸 싫어하는 상인이나 은밀히 재물을 모으는 사람들이 관청에서 나온 금괴가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앞면의 인장이나 뒷면의 글씨를 지우는 경우는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지우느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파인 홈에 녹인 금을 부어서 흔적을 없애는 것인데요. 녹인 금을 사용해야 하기에 번거로워서 잘 쓰지 않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밀랍을 부어서 홈을 메우고 쇠줄로 주변을 살살 갈아서 색깔을 맞추는 겁니다. 보통 그 방법을 많이 씁니다."

 

- 반룡사 앞 시장과 더불어 도성 안 백성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다경문 앞 시장은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장의 담장이 꺾어지는 모서리에는 상인들이 믿는 가한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당은 점차 본래의 목적 대신 사람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나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난한 장사치들이 좌판을 벌이는 곳으로 변해갔다. 

 

- 활짝 열린 궁문으로 맨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시위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백제의 서쪽 바다에 있는 섬에서 채취한 수액을 바른 황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을 황금빛이 숨죽이며 구경하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했다. 양쪽으로 갈라진 시위대 병사들이 계단을 따라 늘어서자 태왕과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삼지창에 붉게 물들인 소꼬리를 빙 둘러서 붙인 둑은 사방으로 늘어진 벌이줄을 잡은 병사들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옆에서 나의 복수심을 불러일으켜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군.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었으니까. 삶이 너무 힘들면 어느 순간 삶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자네가 그랬던가?"

 

-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어리석은 짓도 불사한다. 그건 그 사람의 신분이나 인격과는 별개의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자기 것이라고 믿는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제각각 일을 벌인 것이지."

 

- "온달장군은 참 불쌍한 사람이었네. 살아생전에는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불행한 결혼 때문에 많은 질시를 받아야만 했지. ... 자네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나?"

 

- "죽음 뒤의 불멸이 과연 살아생전의 고통보다 더 가치 있을지는 모르겠군."

 

- "거타지라면 돌아가신 평원태왕 폐하의 대묘에 사신도를 그린 화공 아닙니까? 나이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직접 붓을 들지 않겠다고 해서 아주 간곡하게 부탁했답니다. 연로하긴 해도 제자들이 도와주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무덤의 주인과 어울리는 사신도가 그려지겠군요."

(리뷰자 주 : 부탁하는 이의 간절함보다는 부탁받는 이의 난감함이 더 와닿고 만다.)

 

- 우리나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 중에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온달장군이다. 죽은 지 천오백 년이 지났지만 이름 옆에 여전히 '바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인물이자 아내 덕분에 출세한 대표적인 남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들여다보자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일단 평강공주가 가져온 재물로 말을 사서 열심히 무예를 연마해서 눈에 띄었다는 부분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금방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말을 자유자재로 몰면서 활을 쏘려면 아주 오랜 기간 연습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리는지 묻자 최소 오 년에서 십 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온달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가난한 청년이 아니라 말과 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귀족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왕실과 혼인을 맺을 정도는 아닌 수준으로 말이다. 

 

- 그렇다면 왜 온달은 뜬금없이 왕의 사위가 된 것일까? 울보이고 고집 센 성격으로 나오는 평강공주의 선택보다는 아버지로 추정되는 평원왕의 정치적인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의 육 세기 후반의 고구려는 귀족들의 피 비린내 나는 다툼으로 인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할아버지인 안원왕의 사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외척인 추군과 세군 간의 내전으로 이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다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자리에 오른 양원왕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였고, 귀족들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겼고, 신라는 함경도의 함흥 일대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런 상황에서 자리에 오른 평원왕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백제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는 중국의 후주 세력과도 맞서 싸웠다. 평원왕의 이런 노력으로 고구려는 안정되어 갔다. 한숨을 돌린 평원왕은 국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딸을 온달에게 시집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하여 온달 같은 중소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려 했던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원래 평강공주에게는 상부 고씨라는 예정된 혼처가 있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실과 혼인을 맺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 집안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 온달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과연 온달이 행복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날벼락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평강공주와 결혼한 후 온달은 충실하게 부마 노릇을 했다. 북주의 침략에 맞서 앞장서서 싸웠고,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정해서 싸우다 죽었다. 죽은 이후에도 관을 실은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수많은 고구려 백성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이야기 어디에서도 온달의 심정이 어땠는지에 대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 이 이야기는 온달장군이 과연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에 대해서 행복하게 생각했을지, 그리고 평강공주가 찾아왔을 때 혹시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다. 당연히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상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등장인물과 사건의 무대가 되는 시대적 배경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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