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서윤빈, 김혜윤, 김쿠만, 김필산, 성수나, 이명]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2022

일루젼 2022. 6. 28.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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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윤빈 / 김혜윤 / 김쿠만 / 김필산 / 성수나 / 이명
출판 : 허블 
출간 : 2022.05.24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하게 읽은 뒤, 나름의 소화 시간을 가지고 며칠을 묵힌 끝에 리뷰를 써본다. 

 

내 경우에 정말 만족스러운 독서 다음에는 두 가지 반응 중 하나가 따라온다. 강한 감흥에 이끌려 의식의 흐름을 쏟아내게 되거나, 혹은 내 부족한 글자들을 덧대어 미처 언어화되지 않은 감상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침묵하거나. 

 

이번 <제 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 경계에서 치열하게 진동하던 책이었다. 부디 보다 많은 분들이 이 작품들을 접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수록되지 못한 미수상 작품들도 따로 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파 드 되>와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이 굉장히 궁금하다.)

 

 


 

<루나> 

 

우주에서 물질하는 해녀라는 이미지는 지극히 낯설면서도, 읽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친숙한 이미지이다. 짙은 바다 밑을 유영하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우주를 겹쳐 볼 수 있었던 작가의 감각이 멋지다. 극 초반부터 선명한 이미지에 압도당한 독자는 그 뒤부터는 순순히 작가가 풀어가는 명줄을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다. 매서운 할망의 쿠사리에서 묘한 정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켈빈이 의식을 찾은 다음부터 이야기는 여러 갈래의 명줄로 갈라진다. 독자들은 제각각의 이해대로 하나씩을 골라잡지만, 저자는 마지막까지 하나의 줄을 선택해주지 않은 채 남겨둔다.

 

루나는 파트너인 이오와 함께 물질을 하던 중 우주에 떠있던 크리스 켈빈이라는 남자를 구조한다. 의식을 회복한 그는 루나에게 자신이 쓴 책 <솔라리스>를 선물하며 그녀가 원한다면 지구에 데려가 주겠다고 말한다.

 

그 책의 내용에 따르면, 활발하게 우주로 진출하던 지구인들은 실수로 달과 위성의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달을 잃은 지구는 제 기능을 잃었고, 밀물과 썰물이 사라지며 변화한 해양 환경으로 인해 해녀들도 더이상 물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위성 무리에 뒤덮인 지구인들은 더 이상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없어졌지만, 대신 주변 궤도에 사로잡힌 위성 조각들에서 희귀 광물들을 채취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한편 불가해한 바다를 가진 행성 솔라리스에 남겨졌던 레야는 사실은 그 행성의 바다가 의태한 것이었다. 우주에서 탐사정과 함께 다시금 점액질화한 레야는 은갈색 아이가 되어 해녀에게 구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해녀로서의 정체성만을 기억한 채 살아간다. 

 

언뜻 연결되지 않는 이 두 가지 사건은 '크리스 켈빈'이라는 남자에 의해 연결된다. 모든 사건은 재연되는 루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행성 '솔라리스'에 갔던 남자는 그곳에서 '레야'를 버렸다. 그리고 '레야'는 은갈색 피부를 지닌 우주 아이가 되어 해녀들에 의해 길러졌다. 루나와 이오를 포함한 아이들은 엄마를 모른 채 할망들에 의해 길러진 은갈색 피부의 해녀들이고, 그녀들의 세계는 삼무호와 그 주변 30미터 반경이 전부이다. 

 

아이들은 때때로 물질을 하다 헛것을 보고 듣는다. 할망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바로 할망들에게 보고하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것이 '헛것'일까? 달을 잃고 희망을 잃은 지구로 가는 것은, 진정으로 루나에게 '기회'인가? 

 

동화처럼 달콤하게 들렸던 켈빈의 제안은 소설이 전개될수록 달을 잃은 지구로 다시 달(=루나)을 납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솔라리스에 갔던 이유가 무엇인지, 어째서 레야를 버렸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그와의 대화를 그대로 재연하게 되는 루나는 그 기시감과 기묘함에 책을 더는 읽지 못한다. 이번에 루나가 지구행을 결심한다면, 켈빈은 '이번에는' 그녀를 '버리지' 않을 것인가? 

 

이오가 우주에서 보는 '엄마'는 레야일 것이다. 계속해서 태어나는 우주 아이들은 레야의 본체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루나처럼 지구행을 선택했다가 또다시 버려진 다른 레야일 수도 있다. 루나가 어렴풋하게 남은 레야의 기억을 본능처럼 가지고 있다면, 이오의 말처럼 '나일 수도 있었다'면.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이 '왕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아이들 중 누구라도 가능했다는 사랑다툼 이야기가 아닌, '누구여도 상관없이' 반복되고 있는 만남과 이별로 다가왔다. 흔들리는 이오의 명줄은 그들 모두를 잉태하여 품고 있는 우주와 연결된 탯줄로 다가왔다. 그것은 오싹함에 가까운 전율이었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본문을 읽을 때는 아직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체 인증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들이 이미 존재할 수 있음을, 지금은 선택이 가능한 로그인과 인증 절차에서 다른 선택지가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겪게 될 소외와 불편들을, 그런 작은 소외들로 인해 결국은 목소리를 낼 창구들을 잃고 잠겨들어갈 이들을 떠올렸을 때 다수는 얼마나 손쉽게 소수를 배제할 수 있는지 놀라게 되었다. 

 

선택의 순간 최선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최선'이란 대개 선택지에 존재하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최선'이란 어쩌면 선택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선, 혹은 그조차도 되지 않는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두려움에 떨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들만이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그럼에도 사라진 선택지들을 들어야 한다. 그 괴로움과 불편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설사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그저 다른 무언가가 탄생할 수도 있을 아주 약간의 빈틈을 보기 위해서라도 수많은 침묵의 이야기들을 '들어야' 한다. 그곳에 고인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이야기들을.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이 소설은 진정 '공상소설'이 맞는가? 이 혼몽한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의 경계를 세련된 그라데이션으로 뒤섞어버린다. 쿠엔틴 타란티노, KHVatec 서울사옥이나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발할라) 게임이 연상되는 설정들은 "약간 이상하지만 '말'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따라가게 되는 화자의 독백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정말 한 번에 끝까지 써내려갔을 것만 같은 강렬한 '흐름'이다. 맨 마지막에 와서야 '???' 하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게 된다. 솔직히 두 번 이상 다시 펼쳐봤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 화자가 나눠지는지 모르겠다. (아예 처음 시작부터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읽으면서도 빨려 들어가게 되는 '의식의 흐름' 기법과 작가 후기에서조차 '이건 제 손가락이 하는 말입니다'를 느끼게 하는 작가의 재담이 아주 매력적이다.

 

작가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응원을 보내게 된다. 독자로서는 보다 다양한 작품에서 만나뵙고 싶다.  

 


 

<책이 된 남자>

 

 

'이븐 시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완전히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한 심사평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허구를 이런 밀도와 톤으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 훌륭한 점이라고 평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실존 인물과 저서를 끌어들여 정교하게 짜내려 간 직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초기에 언급된 '살레이우스 바수스(Saleius Bassus)' 등 작가 후기에서 창작되었다고 언급되지 않은 대부분의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책이 된 남자>는 오히려 창작된 부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한다. 

 

'모든 것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등장인물의 대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수학은 신이 세계를 써내려갈 때 사용한 언어다'라는 문장과 이어진다. 신성 기하학이 아랍 대수학과 연결되는 순간, 천체의 소리를 계산해내었던 피타고라스 학파가 플라톤을 거쳐 이븐 시나의 신 플라톤주의로 펼쳐져나간다. '수'. 문화권마다 그 각각을 표기하는 문자는 모두 다를 지라도 '수'의 '개념'은 공통적 진리에 가깝다.

(공리적 접근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재 거의 유일한 '세계 공용 기호'가 아라비아 숫자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개인적으로 내가 <책이 된 남자>에서 가장 놀랍다고 느꼈던 점은 '시그눔'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있기에 그는 책이 될 수 있었으며, 독자는 모든 것을 물어볼 수 있고 그는 대답할 수 있었다. 빛이 사물에 부딪힌 다음에서야 전달할 수 있게 되는 '시그눔'은 부딪친 사물의 본질, 일종의 결정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책'은 시그눔을 이용해 대화를 진행할 때마다, 즉 책을 읽는 자가 전달한 전환된 '시그눔'이 '책'과 부딪칠 때마다, '책'의 '시그눔' 또한 변화한다는 것이 핵심적인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연결되는 카발라나 게마트리아, 자동기술 같은 개념들은 부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를 고조시켜줄 뿐이다. 네 번째 아치가 없는 계에 구현된 영생은 상호작용, 즉 끝없는 이항을 통해 완성된다. 변화하는 '시그눔'을 통해 흐르는 시간, 이것은 연금술적 과정과도 상통한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관찰 할 때만' 시간이 흐르는 양자적 세계관과 빛의 광양자의 연결을 수학적 이항으로 연결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초(?) SF적인 소설이 사막과 아랍, 희랍의 분위기와 그것을 다시 수도원에서 필사해와서 읽어내는 중세의 분위기를 덧입고 고풍스럽게 태엽을 돌리고 있다. 소설 내에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분위기를 더욱 사실적으로 고조시킨다. 당대의 식자들은 대다수가 남성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감안할 때, 이런 고증적인 설정들은 독자들이 위화감 없이 작품의 세계관으로 흡수당하게 한다. 

 

'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전까지 그것은 찌릿하고 기묘한 감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하나의 현상이 아닌 '존재'로 인식하고 '힘'으로 사용하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인류에게는 아직 감각의 영역에 남아있는 '힘'들이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힘들 중 하나에 '책'이 가지는 무언가가 틀림없이 존재하리라 믿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좋은 작품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이런 감각을 설명할 길이 없다.

 

행복하게 읽었다.     

 

 


 

<신께서는 아이들을>

 

 

'내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

 

이 문장을 읽고 눈물을 조금 보이고 말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주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세계가 차안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섬에 오는 이유는 그런 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체험'을 통해 깨닫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럼에도 믿을 수 없었던 아이들이 섬에 남겨져, 다른 수많은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신의 사랑을 바라보며 믿음을 배우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이 없을 때의 섬은 해도 나지 않고 열매도 맺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제한들은 사실 반려인이 스스로 거부를 통해 만들어낸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벽에 갇혀 계속 의심 속에 외로워하는 삶- 어쩌면 그것은 차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제 각각의 '섬'에 갇혀 스스로를 묶고 있는 반려인들의 모습은 각자가 그어놓은 안전지대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닮았다. '나'라는 경계 안에서 밀려오는 인연들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모습, 소설 속의 '섬'은 하나의 '개인' 그 자체였다.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해주는, 현실과 다른 세계관이 존재하는 소설은 SF라고 칭할 수 있지 않을까.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가만히 들어보기를.

작가의 말처럼 '무언가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치지 않을 수 있기를'. 

 

이 소설을 접한 모든 이들이 작은 치유를 얻어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

 

 

대게. 해물 파스타. 베개. 도넛. 

한 줄씩 읽어내릴 때마다 입 안에 고이는 침과 꼬르륵 거리는 배가 신경 쓰였다. 입에 뭐라도 물고 마저 읽어야지 싶던 내 식욕을 싸늘하게 식혀준 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볶음 요리'였다. 

 

책을 덮으며 양희 씨가 행복하게 품고 나선 폭신한 베개처럼 나를 채워줄 음식을 찾아 주방으로 향했지만, 냉장고 문 앞에 선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멈춰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라는 말들로 눈을 가린 채 맛있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 불현듯 낯설어 보였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을까? 

'물질은 형태를 바꾸며 영속한다'는 화학적 진실은 '한 공간은 하나의 입자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물리적 진실과 연결된다. 원자가 결합을 통해 성질을 변화하든 붕괴해서 변질되든 입자는 언제까지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째서 존재해야 하는 걸까? 

 

유쾌하고 맛있게 읽었고, 깊게 흡수했다.

이 소설을 읽은 뒤로 '나는 줄 보상이 없는데...'라는 마음으로 먹을 거리를 선택할 때 최소 한 번 이상 더 생각하게 되었고, 보다 나은 선택과 방향성은 없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그 선택들이 개인의 윤리적 불편을 달래주는 사탕이 아니라 결국은 인간 종의 보다 나은 삶과 연결된 선택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과정들에서도 최소한의 고통이 있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관심과 의견들이 모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고통의 필요성은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한 방향 제시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 뒤를 돌아보니 명줄을 끌고 유성우처럼 날아가는 다른 해녀들이 보였다. 그건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모습이다. 해녀 동기인 나와 이오, 유로와 판의 명줄 길이는 30미터로 삼무호에서 두 번째로 짧다. 가장 명줄이 짧은 사람은 삼무호를 수리할 때를 빼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파일럿 할방이다. 최상급 할망들은 300미터, 때에 따라서는 더 길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하급 해녀인 우리는 30미터 너머로 나아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가 할망들이 물질하는 앞모습을 볼 기회는 처음 뛰어드는 순간밖에 없다. 

 

- 휘이 휘이.
그걸 숨비소리라고 부른다.

 

- 삼무호가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동안 천천히 그 뜻을 이해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왜 그 꿈이 다시 떠오른 걸까.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걸까.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마뇽 할망도 어느 순간부터는 호통을 멈추고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따끔히 혼내기로 마음먹고 왔는데 오히려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는지 어설픈 말투였다. 그런 할망을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사람 구한 건 잘했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하지만 네가 구하는 사람의 목숨만큼이나 네 목숨도 소중하다는 걸 항상 명심해라. 나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돌아오는 거야."

 

- 어제 마지막 훈련을 끝마치고, 켈빈은 내게 책을 다 읽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로는 전혀 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책을 읽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책에서 내가 겪은 일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었어."  


 

<루나>, 서윤빈

 

- 저는 어릴 때부터 벌레를 무서워했습니다. 대충 다섯 살 때였나, 부모님과 등산을 하려고 나섰는데 장수하늘소 하나가 몸에 붙어 더듬이를 휘젓던 일이 있었습니다. 거의 기억나지 않는 유년기 속에서도 그 장면과 감촉만은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충격적이긴 했나 봅니다. 그러나 딱히 그게 제 벌레 공포증의 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이 공포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건 이미 그전부터, 어쩌면 본능적으로 벌레를 무서워했다는 뜻일 테니까요. 벌레 특유의 촉감과 냄새,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움직임과 생김새, 그런 것이 몸에 붙거나 얼굴의 구멍 중 하나를 향해 돌진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저는 스물이 넘은 지금도 벌레만 보면 도망치기 바쁩니다. 

 

- 망상 열차를 한 바퀴 타고 돌아오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현실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하드 SF가 아닐까. 모든 현상이 엄밀한 과학적 원리에 따라 발생하고 소설적 허용은 어림도 없죠. 앞서 얘기한 무충 공간도 어지간한 SF이었다면 별 탈 없이 집어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되지 않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죠? 그렇다면 누군지는 몰라도 현실이라는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텍스트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부디 포기하지 말고 우리를 읽어주세요. 

 

- 가끔 불행 한계의 법칙을 떠올립니다. 간단한 법칙인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인생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균형 있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불행을 겪은 후에는 반드시 행복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 구술사 수업은 우리 학과의 선택 연계 과목이었다. 바이오데이터 전공 학부생들이 필수도 아닌 사학 기반 수업을 열심히 들을 리가 없었다. 강의는 소수의 경청하는 학생을 위해, 말하자면 과외에 가깝게 진행됐다. 교수님은 그런 상황을 오히려 기껍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거의 담소를 나누는 투로 거시사에서 미시사로 발전해 온 서술 기술을 가르쳤다. 거대하고 일직선인 역사나 문자로 나열되고 정리된 역사를 기록하는 게 아닌 개인적이고 혼란스러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 대해서. 

- 나는 그 수업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동기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전공 수업도 제쳐둔 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구술 기록과 재해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녹취록을 밤새워 읽었다. 누군가의 인터뷰 기록을 읽고 나면 눈을 감고 그의 표정과 목소리를 상상했다. 그건 어떤 기록보다도 생생했다.

 

- "루이, 문제가 있어요."
"문제? 무슨 문제?"
머리가 슬라임처럼 떡이 진 루이가 내 자리로 헐레벌떡 다가왔다.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모니터에 떠오른 테스트 설문을 가리켰다. 화면을 들여다본 그는 이내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나는 설문 의의에 대한 설명문과 데이터 제공 동의 사이의 공백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개별 데이터 제공 항목 선택지가 없어요. 누락된 것 같은데요."
"아, 난 또 뭐라고."
루이는 놀란 가슴을 달래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눈 밑의 그늘이 짙었다.
"그런 건 없어도 괜찮아요."
"네?"
"요즘 BD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만약 없다 해도 우리 쪽에서 단말기 대여 가능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물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이오 데이터, 즉 BD 기술이 발전한 후로 이 기술은 거의 모든 영역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제 병원에 가면 의사는 BD를 받아 즉각적으로 진단을 내린다. 용의자의 혐의에 관한 증언을 듣는 대신 피해자의 BD 시료를 채취한다. BD를 수집해 개개인에게 딱 맞는 취향을 찾아주는 알고리즘 서비스는 한창 경쟁에 불이 붙은 참이었다. 더 정밀하고 진실된, 무의식의 영역까지 측정 가능한 웨어러블 단말기가 연달아 개발되고 있었다. 망각이나 왜곡, 틀린 짐작과 거짓말에 대한 의심은 여지조차 사라졌다. BD 일기와 SNS 기록은 트렌드를 넘어 일상으로 진입했다. 생체 데이터는 현상의 지표이자 일종의 언어가 되었다. 당연히 리서치 업계에서도 BD를 이용해 여론조사를 실행한 지 오래였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고, 특이점이었다. 데이터를 이용한 조사는 이전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이런 말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이제 진실의 한 종류다.'

- 나는 멍하니 사무실 한가운데 달린 대형 모니터 속, 회사 홈페이지에 박혀 있는 디데이를 쳐다봤다. 메인 페이지에 흐르는 캐치프레이즈가 반짝였다.

'바이오 데이터는 뇌파, 뇌전자극, 호르몬, 신경계 분비물질, 근육의 긴장과 이완 등 생체 데이터를 종합해 상황을 판단하고 신체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어 모든 사람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보 취합에 유용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완벽한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몸이 없으면 데이터를 채취할 수 없어요. 인터뷰를 해야 해요."

- 나는 몸을 떨고 있었다. 준이 내 팔을 부드럽게 붙들었고 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네 자리로 돌아가. 내 입술을 읽은 준은 이마를 찌푸렸다. 
"나는 네 편이야."
준이 또렷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사무실은 여전히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했다. 준은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더니 뚜벅뚜벅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손을 얹었던 어깨를 만져보았다. 따뜻한 촉감은 남아 있었지만 살갗의 온도는 차가웠다. 나는 차마 고개를 돌려 준이 자리로 무사히 되돌아갔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 시간이 지나니 현실이 좀 더 명확해졌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작 2년 차 사원일 뿐이다. 회사 입장에서, 나는 별것 아닌 일에 프로젝트를 멈춰 세우는 방해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커리어가 박살 나는 모습과 보이지 않게 흐를 소문을 상상했다. 선배들의 조언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이 업계에 머무른다면 이 경험은 엄청난 자산이 되겠지만, 뒤도 안 보고 도망친대도... 나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자조의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될 것이다. 
이 선택을 번복할 이유는 충분했다. 내게는 당장 다음 달에 내야 할 집세가 있었다. 학자금 대출도 한가득 남아 있었다. 지난했던 취업 준비생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천천히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 BD 앱을 실행했다. 실시간으로 데이터가 업데이트됐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과 자기혐오와 자책과 흥분과 후회가 그대로 기록됐다. 그래프들이 위험 사인을 보내며 깜빡였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으니 주의하라는 문구가 떴고 나는 앱을 종료했다.  

-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나는 아주 단단한 무언가를 부수고 있다.

이건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 우리는 한 명의 인간이고, 인간은 결국 자신의 경험을 절댓값으로 사고합니다. 그렇게 생기는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연구자의 평생 과제입니다. 

 

- 엘리는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그 말들이 엘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고, 이 순간이 지나면 그가 외로움과 박탈감에 시달릴 거라는 사실도 예감했다. 우리는 가까워진 순간부터 서로를 위안 삼으며 지낸 사이였다. 그 위안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오는 위로기도 했지만 연민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오는 안심이기도 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남겨진 사람은 두 배의 더 큰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엘리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두 번은 할 수 없는 선택을 감내하는 사람의 반응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로티의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때 내가 그랬으니까.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며,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을 했으니까.  

 

- 나는 하나의 사건에 붙들려 평생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 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내 가난하고 외로웠는데 그날만은 이상한 충만감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요청받은 사람은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자기 안에 고여 있었는지를. 사건의 순서를 되짚고 정렬할 때마다 자신도 몰랐던 사실들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김혜윤

 

 

- 하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될까요? 
저는 이야기를 만드는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하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건 지난하고 막막한 일인데, 그걸 감내할 만큼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 이 소설은 제가 인터뷰어로 일할 때, 어떤 지휘자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잃고 레퀴엠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레퀴엠을 작곡할 때는 엄격한 형식적 문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포레는 자신의 레퀴엠을 쓰며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신의 심판'은 축소시키고, 그 대신 용서와 구원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이고 맹렬한 동기로 견고한 문법을 부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했고,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이 소설은 라나가 로티를 떠나 시작된 이야기이며, 로티가 아닌 라나의 이야기고, 저는 그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저는 아직 라나가 로티와 함께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사이보그들이 질문이 없더라도 목소리를 내는 이야기도 쓰지 못했습니다. 소설을 완성한 후에도 그랬지만, 수상 통지를 받았을 때는 그 사실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이야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읽어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고...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에 붙들려 평생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감히,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그날은 실 단위 망년회 회식이 있는 쌀쌀한 연말이었지. 실제로 끝장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은 연말 분위기를 느끼며 개발자들은 술을 열심히 들이켰어. 다른 게임 회사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 회사에선 1차까지는 실 단위 회식으로 진행됐고 그 이후로는 팀 단위 회식으로 바뀌었지. 예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그렇게 진행된다고 하는데, 좋은 사건은 아니었을 거야. 1차로 갔던 양꼬치 집에서 마오주와 수정방을 섞어 마시고 벌겋게 취한 내러티브 팀장은 판교에 이런 술집이 남아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며 꼬인 혀로 팀원들에게 말했어. 확실히 그곳은 게임 회사가 우글우글 몰려 있는 판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술집이었지. 뭐랄까. 나폴리 피자와 남대문 빈대떡을 어설프게 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절반은 한국적이고 절반은 서양적이었던 그 빈티지 바는 완벽하게 고전적이었어. 1970년대 혹은 1980년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낡은 서가에 핑크 플로이드나 신중현 같은 옛날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나란히 꽂혀 있는 기묘한 풍경을 보고 싶어? 그렇다면 판교 H스퀘어 구석에 있는 <BAR MARIO>에 놀러 와. 어째서 이딴 곳이 판교에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니까? <BAR MARIO>에서 판교와 어울리는 건 가게 이름과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인 바텐더뿐이었어. '고슴도치 소닉'이라고 알아? 여기 바텐더 녀석은 고슴도치 소닉처럼 삐쭉삐쭉한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였지. 그래서 별명이 소닉이야. 녀석은 그 별명을 썩 달가워하진 않지만, 어쩌겠어? 게임 회사 직원들 상대로 장사하려면 그 정도는 감안해야지. 자리에 앉자마자 팀장은 바텐더에게 양주 한 병과 포스트잇 한 장을 주문했지. 생긴 것과 다르게 행동이 굼떴던 소닉은 느릿느릿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포스트잇과 펜을 하나씩 내려놓은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어. 팀장은 볼펜 버튼을 여러 번 누르며 팀원들에게 말했지. 

 

- 세상에. 1980년대라니. 팀원 중 절반은 태어나지도 않은 시대였지. 난 옛날 노래 듣길 고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들었어.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아직도 저 노래를 듣는 걸까?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어. 아. 저건 본능이로구나. 어떤 철학자가 그랬지. 회상이야말로 짐승과 인간의 분기점이라고. 맞는 말이야. 그런 연구 결과도 있잖아? '인간은 10대와 20대 때 들은 노래를 평생 듣는다.' 다들 과거에 침식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지. 아직 회상할 거리보단 경험할 거리가 더 많이 남아 있던 막내 지우 님(이 회사는 무슨 수평적 조직 문화인지 수직적 조직 문화인지 하며 팀장 이하 팀원들은 직급이 없었는데, 그래 봤자 회사는 회사야, 당장 지금 술집에 앉아 있는 꼴만 보더라도 입사 연도순이었어)은 심각하게 망설이더니 비틀스를 적어 내더라고. 그러자 팀장은 비틀스 같은 영국 샌님들 노래는 듣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피우며 삐뚤빼뚤 적힌 'Beatles - Yellow Submarine'을 볼펜으로 좍좍 그었지. 지우 님은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어. 요즘에도 저런 팀장이 있냐고? 당연히 있지. 모두 똑같은 달력을 넘기고 있지만, 살아가는 시대는 제각각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알아먹기 쉽게 게임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줘야겠군. 불과 1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의 시간이 과연 똑같이 흐를까?

 

- <프로젝트 AAA>는 1년 내내 크런치가 진행될 정도로 대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이었어. 'AAA 게임'이란 보통 10시간 이상의 스토리를 가진 제작비 1,000억 원짜리 비디오 게임을 일컫는 말인데, 대표는 1,000억을 번 게임을 세 개나 만들었지만, 제작비가 1,000억인 작품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어. 게임 업계를 잘 모르는 사람은 1,000억을 번 게임은 훌륭한 게임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겠는데, 그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얘기야. 물론 돈 벌면 좋지. 하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건 돈뿐만이 아니라고. 명예가 고팠던 대표는 GOTY와 찬사를 받을 수 있는 게임을 원했지. 모든 제작비 1,000억짜리 게임이 GOTY와 찬사를 받는 건 아니지만, 찬사를 받는 대다수의 게임은 1,000억짜리 게임이었어. 당연한 얘기지. 1,000억 원을 현명하게 썼다면 스토리도 좋고, 그래픽도 좋을 테니까. 그래서 <프로젝트 AAA>가 어떤 게임이냐고? 음. 과거를 찾아 헤매지만 왜 과거를 찾는지 모르는 주인공이 나오는 어드벤처 게임이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과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패트릭 모디아노의 이런저런 소설들에 상당한 영감을 받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레트로 게임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했다는 것만 알면 돼. 아,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받는 메타버스 게임이기도 했어. 메타버스는 또 뭐냐고? 인공지능만큼이나 IT 회사에 해로운 친구라는 사실만 알려줄게. 나머진 나도 잘 몰라. <프로젝트 AAA>에 대해 조금 더 알려주자면, 대표의 경험이 가득 들어간 게임이었지. 덕분에 회사 안팎으로 이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대표는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한 봉준호 감독의 말을 인용했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게임적인 이야기야."

 

-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섣불리 대표를 비난하고 싶진 않아.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 그건 신이 인간의 본능에 프로그래밍한 거라고. 문제는 그게 재미가 있냐 없냐는 것뿐이지. 개인적인 감상을 얘기하자면, <프로젝트 AAA>의 스토리는 재미가 없었어. 심각할 정도로.

 

- 더 뜬금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때 한국에선 오래전에 죽은 르코르뷔지에를 개나 소나 곡해하며 수작을 부렸어. 정치인은 물론이고, 영화감독, 수학자, 심지어 소설가 같은 조무래기들도 르코르뷔지에 이야기를 했지. 그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아. 과거를 곡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특징이자 특기이니까. 부끄럽지만 회사 대표도 그런 특징과 특기를 가지고 있었지. 대표는 르코르뷔지에를 존경한다고 종종 얘기했어. 그래선지 몇 년 전 회사 사옥의 설계를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의 제자에게 비싼 돈을 주고 맡겼었지. 비싼 돈 덕분인지 르코르뷔지에의 사손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사옥은 '대한민국 올해의 건축상'을 받았어. 게임 회사가 받아봤자 쓸모없는 상이지만, 대표는 그 상을 자신의 사무실 한가운데에다 놓아뒀지. 대표가 르코르뷔지에를 존경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었어. 게임 개발과 건축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게 이유였는데, 건축이랑 일맥상통하지 않은 분야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심지어 성경에도 건축 이야기가 나오잖아? 어느 분야든지 기반을 다지고, 터를 닦고, 뼈대를 세운 다음, 안을 채워야 하지. 안 그런 분야가 있어? 만약 그런 게 있으면 내게 알려줘. 당장 그쪽 일을 배울 테니. 어쨌든 르코르뷔지에에게 상당한 영감을 받은 대표는 종종 직원들이 하는 일을 건설업에 비유하곤 했어. 그가 말하길 내러티브 팀원들이 하는 일은 '고바다테'랑 유사하대. 처음엔 '고바다테'라는 말을 듣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벽돌 쌓는 일'이라는 뜻을 가진 은어더라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 

 

-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프로젝트와 한국의 공사판은 <마리오 카트>와 <카트라이더>만큼 거리가 멀고 수준도 달랐지만, 아무도 대표의 비유법에 딴지 걸 순 없었어. 어쩌겠어. 대표님인데. 여러 번 말했듯이, 결국 여기도 회사라고. 그것도 아주 지독한 회사. 이해가 안 가는 게, 사람들이 왜 게임 회사를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아마도 게임을 시시껄렁하고 널널한 무언가로 봐서 그런 것 같은데, 조금만 플레이해 본다면 게임이야말로 빡빡한 규칙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빡빡한 규칙으로 가득한 놀이를 만드는 곳이 어떻게 널널할 수 있겠어?  

 

- "그리고 그 새끼가 여기 이제 안 온다고 하잖아요."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김쿠만

 

 

-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은 과거에 관한 불안정한 향수와 미래에 관한 불완전한 예지가 뒤섞인 '공상 소설'이다. 120매짜리 공상으로 이루어진 이 텍스트에서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은 마지막 장면뿐이다. 영업이 끝나고 모든 조명이 꺼진 술집에서 조곤조곤 들려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나머지 장면은 전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상상이다. 게임 개발 부서에서 일했던 1년 동안 나는 야근을 세 번만 했고, 심각하게 불어 터진 역병 때문에 회식은 랜선으로만 했으며, 사내 사우나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내 손가락으로 이런 문장을 적기 뭣하지만, 이 소설의 대부분은 픽션이다. 혹시나 이 소설을 읽고 동질감이나 기시감 따위를 느꼈다면, 당신에게 애도를. 


- "대여는 불가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완강한 표정으로 레오나르도 브라촐리니의 앞을 막아섰다. 유독 까다로웠던 수도원장의 허락까지 얻어냈는데, 사서의 허락이 또 필요하다니. 애초에 책을 빌리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사서가 레오의 앞을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서가 억지를 부려 레오의 출입을 거부한다 해도, 레오에게는 '도둑질'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책을 훔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긴 하겠지만, 그건 그저 레오가 일반적인 도덕관념을 가졌기 때문이지, 딱히 신앙심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레오는 수도원에 일말의 존경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루한 관습과 규정에 얽매인 자들. 비록 타락한 교황청의 대척점에 있다지만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위험이 큰 도둑질만은 정말로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했다. 

 

- 로마의 코르넬리우스 세베루스와 살레이우스 바수스의 책들, 옛 이슬람 제국 시절에 쓰였으나 여전히 발견되지 않은 이븐 시나, 아부 라이한 알비루니의 몇몇 책들. 그 밖에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인류의 보물로서 지켜져야 할 고서적들. 이들 중 하나라도 여기 도서관에서 발견된다면 이 곰팡내 나는 수도원까지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과거 아랍어로 '알안달루스'라고 불렸던 '코르도바', 이곳 에스파냐의 도시가 바로, 아라비아의 현명한 번역가들이 잊혀가던 그리스, 로마, 아라비아의 철학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던 곳이었다. 그들은 추방당했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지식은 여기에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고루한 자들이 사는 이 수도원에. 

 

- 아침에 만난 수도원장은 홀쭉하고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었다. 그는 세련된 베네치아 말투에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작자가 남루한 시골 수도원 도서관에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는 레오의 설명을 들은 후에도 그 근본 목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불안해했다. 책을 베낀다고? 도대체 뭐 하러? 그건 도리어 레오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대체 이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은 왜 빛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아라비아의 지식 결정체인 책을 가지고 단지 베끼기만 하는가? 베끼는 행위가 정신 수양을 위해서라니. 레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찬란한 지성의 산물을 베끼고 또 베꼈다. 오직 글자를 베끼는 행위가 정신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사본을 잘 남겨놓지 않았다. 한 번 쓴 양피지는 다시 깨끗하게 긁어내어 재활용했다. 때로는 원본 책의 양피지마저 아깝다며 세척했다. 인류의 보물이 또다시 소실되기 전에, 레오는 한시라도 빨리 어떤 책이든 베껴서 들고나가야 했다.  
 

- 네메시우스는 상인의 무례함이 거슬려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나에게 알 콰리즈미를 들먹이다니. 그는 몸을 일으켜 벽에 세워진 책장으로 걸어가 가장 눈에 띄게 진열되어 있던 양피지 제본 코덱스 책 한 권을 꺼냈다. 알 콰리즈미의 <완성과 균형의 계산서>였다.

 

- 네메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름난 장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 저택을 물려받아 풍요로운 인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장군의 아들보다는 언어의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7세 때부터 이미 모국어인 그리스어뿐 아니라 고전 라틴어와 이국의 아랍어까지 능통했다. 이국의 언어를 배운 덕에, 네메시우스는 황금의 도시 바그다드에서 한두 권씩 흘러나오던 이슬람 자연철학자들과 연금술사들의 책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아랍어로 쓰인 책들을 수집해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이븐 시나의 <치유의 서>, 그리고 자비르 이븐 하이얀의 자연철학에 바탕을 둔 연금술 책들을 번역했고, 그 책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는 곧 자신의 지성이 부잣집 도련님으로 돈이나 흥청망청 써가며 지내기에는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써서 명성 있는 연금술사를 후원하고, 그들이 쓴 책을 모아 장대한 도서관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왜 '저주의 탑'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은, 기괴한 모양에 낡아빠진 이슬람식 첨탑이 드러났다. 물이 다 말라버린 해자 너머에 아치형 다리로 연결된 성채의 입구가 활짝 열려있었다. 바위 언덕 위로 높게 솟은 첨탑은 아마 근처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이 사막 한가운데까지 다가오려 한다면 말이다. 성채의 입구엔 하인으로 보이는 덩치 크고 등이 구부정한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덩치 큰 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브라힘과 그의 상인들도 아무 말이 없었고, 간단한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하인은 뒤로 돌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브라힘과 상인들이 낙타를 묶어놓고 하인을 따라가자 네메시우스도 뒤따랐다. 황폐한 성의 내부를 지나(군데군데 구석에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길쭉한 직사각형 중정에 진입했다. 중정 한가운데에는 과거에 연못이었을 길쭉한 직사각형의 얕은 구덩이가 있었다. 중정의 한쪽 짧은 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네 개의 기둥과 세 개의 아치가 있었고, 중앙의 가장 큰 아치 너머에는 더 큰 아치형 문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아치형 문이 있는 건물 위로 뾰족한 첨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일행이 다가가자 아치형 문의 왼쪽이 작게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 "제 말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라며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현명한 로마인은 처음 만나봅니다, 위대한 콤니모스 경이여. 사실 이 지혜의 이항 이야기는 비유가 아닙니다. 자연철학에 근거해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지요. 경께서는 이븐 알하이삼의 '키탑 알마나지르' 그러니까 <광학의 서>를 당연히 읽어보셨겠지요.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물체를 볼 수 있는 이유는, 태양 빛이 물체에 반사되고 그 빛이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이븐 알하이삼도 우리가 물체를 본 후로 그것을 어떻게 지혜로 만드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알 콰리즈미의 대수학을 적용하면 정말로 간단한데 말이지요. 붉게 잘 익은 대추야자를 본다고 가정해 보지요. 이븐 알하이삼에 따르면, 대추야자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태양빛이 그 과일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경의 안구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빛은 다른 곳에서 반사된 빛, 이를테면 접시에서 반사된 빛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원리로 경은 대추야자를 '대추야자'라고 알아보고, 접시를 '접시'라고 알아보게 될까요?
알 라시르는 네메시우스가 생각할 시간을 잠시 주기라도 하듯 말을 멈췄다.

"그것 또한 미지수와 이항의 문제로군요. 우리가 대추야자를 알아채기 전의 상태를 미지수라고 하면, 빛이 대추야자의 무엇인가를 이항 시킨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알라시르는 과장된 몸짓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콤니모스 경이여, 경의 지혜야말로 제가 무릎 꿇고 이항 시키고 싶은 위대한 지혜 그 자체입니다. 이 상황에서 지혜란 대추야자가 대추야자인지 알아보게 하는 과정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는 그런 지혜를 가질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도 대추야자에 관한 지혜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 빛도 없는 그믐밤에는 대추야자를 알아보는 지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서 대추야자에 관한 지혜는 미지수지요. 동이 터 태양 빛이 대추야자에 반사되면, 그 빛은 우리의 눈을 통과해서, 즉 이항 되어서 지혜의 원천인 머릿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미지수는 결국 이항 된 빛과 결합하여서 방정식처럼 풀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혜는 대추야자를 대추야자로 알아보게 하고, 접시를 접시로 알아보게 합니다." 

네메시우스가 물었다.
"그런데 왜 빛은 대추야자에 부딪힌 후에야 미지수를 풀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알라시르가 대답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 자체는 아무것도 담지 않습니다. 빛이 대추야자에 부딪힌 후에야 무엇인가를 담게 되지요. 저는 빛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에 생성되는 그 무엇인가를 '시그눔 signum'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시그눔은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빛에는 없지만, 대추야자에 반사된 빛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그눔을 포함한 빛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에는 시그눔이 있습니다. 바람 소리와 달리 말에는 시그눔이 있죠. 정체불명의 외국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모국어로 된 책에서는 풍부한 시그눔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대화 중 한 음절을 들을 때도, 책의 글자 한 자를 읽을 때도 시그눔은 우리의 지혜를 생성시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그눔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연쇄적으로 전달되지요." 

 

- "우리가 생각하고, 욕망을 느끼고, 신체를 움직이는 모든 사소한 행위들은 바로 이 미지수 연쇄를 일으키는 작고 미세한 지혜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리입니다."

- 만약 성부 성자, 성령 중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하느님으로서의 개념이 사라지듯이, 세 개의 태엽 중 한 개라도 빠진다면 시계는 멈춰버린다고 레오는 우고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고는 이 비유가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세 개의 태엽을 항상 '성부 태엽', '성자 태엽', '성령 태엽'이라고 불렀다. 레오 자신도 좋은 비유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이다. 우고가 태엽을 잘 다루는 건 태엽의 작동 원리를 근본부터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 성 삼위일체라는 비유로 태엽을 파악해서가 아니었다. 지혜의 방정식 비유도 마찬가지였다. 지혜가 방정식의 풀이법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건 그저 비유일 뿐, 그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따로 있지 않은가?

 

- "사실 지혜는 언어가 아닌 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 레오는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대략 눈치챘다. 

'인간의 지혜, 그러니까 인식 과정은 대수학적 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오는 여전히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방정식 풀이가 뇌 어디선가 일어나고 심지어 관찰할 수 있는 자연철학적 현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가? 

 - '독자여, 무엇이든 물어보라. 책이 대답할 것이니.' 

 

- 레오는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QUOD NOMEN TIBI EST?"라는 라틴어 문장을 다른 종이에 적었다. 알고리즈미 장에서 지시하는 바, 문장의 알파벳 수는 공백과 마침표, 물음표 등을 제외하고 32자를 넘기면 안 된다. 이 문장은 16자이므로 문제 없었다. 레오는 세 번째 장의 '듣는 페이지'를 펼쳤다. 듣는 페이지에는 가장 작으면 두 자리, 가장 크면 3,000을 조금 넘는 수들이 23개씩 32개의 묶음으로 구성된 표가 적혀 있었다. 왜 23개인가 하면 A부터 Z까지의 라틴 알파벳의 개수가 23개이기 때문이었고, 왜 묶음이 32개인가 하면 문장을 구성하게 될 글자의 수가 32개로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 "콤니모스 경도 먼 옛날 그리스에서 전기라는 것을 발견한 탈레스를 아시겠지요. 고양이 털가죽으로 호박석을 문지르면 나오는, 찌릿한 느낌이 드는 미지의 힘 말입니다. 바그다드에는 예로부터 전기를 도기에 모으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 도기를 만드는 데 식초와 구리, 쇠막대가 필요한데, 이브라힘의 캐러밴이 이것들을 구하는 데 항상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앞으로 보여드릴 거의 모든 연금술의 재료 중 이브라힘의 힘이 닿지 않은 것은 거의 없지요."  

 


 

<책이 된 남자>, 김필산

 

 

- 중세 이슬람 시대의 과학은 매우 뛰어나다.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과학기술이 다 있었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건 바로 수학자 알 콰리즈미였다. 현대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본질적으로 알 콰리즈미의 대수학 체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모든 아이디어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나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차기작은 어떻게 하지? 이 모든 아이디어를 나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짜깁기를 통해 창작하는 사람인가? 선배 작가님들, 짜깁기를 통해 창작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작가가 될 수 있나요?

 

- 해보는 수밖에. 나 또한 현대의 책 사냥꾼이지 않은가?
 



- 아이들은 섬을 떠나기 전에 선택한다. 태어날 것인지 태어나지 않을 것인지. 태어나는 쪽을 선택한 아이들은 바다의 바닥에 있는 차안, 즉 아이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태어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아이들은 바닷물에 섞여 모습을 감춘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첫 번째 섬의 회색앵무와 반려인은 그 아이들이 동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우리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을 신이 거스를 리가 없다. 신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가끔은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 

- 새벽에 바다에서 밀려온 아이들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고 나는 그들이 눈을 떴을 때 입을 옷을 식탁 위에 올려둔다. 언덕에는 우리가 묵는 단층 오두막과 아이들이 묵는 2층짜리 오두막, 이렇게 두 채가 있다. 아이들의 오두막 1층에는 8인용 식탁이 놓인 거실이 있고, 2층엔 침대 여덟 개가 놓여 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대신 하루에 세 번 바다로 나가 몸을 적시는데, 개도 마찬가지다. 개와 아이들은 바다가 주는 충만함만으로도 허기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 신이 내게 바다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식욕을 느끼는 건 나뿐이다. 나는 하루 두 번, 우리의 오두막에 숨어 밥을 먹는다. 언덕에 있는 풀과 열매를 뜯어먹는 것뿐이지만 나는 내가 뭔가를 먹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다른 섬의 반려인들도 식욕을 느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나는 그들을 만날 수 없으므로 이 섬에서 뭔가를 씹어 삼키며 허기를 채우는 건 나뿐이고, 나는 그 사실이 아직도 창피하다. 먹는 행위는 나의 부족함과 미개함을 스스로 씹어 삼키는 행위와 같다. 

- 나는 해변에 멈춰 서서 바다를 둘러본다. 짧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잠수했다가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기를 반복하고 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홀린 듯 본다. 아이의 두상이 둥근 탓에 그 모습은 마치 구름에 해가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신의 촘촘한 그물 안에서 안전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개를 찾는다. 개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 나는 다시 생각을 이어나간다. 신의 그물 안에서 자유로운 건 아이들과 동물들뿐이다. 그들은 언젠가 이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이들은 계절이 지나면 선택을 할 것이고, 개도 언젠가 죽을 테니까. 물론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다른 동물이 섬을 찾아오겠지만 그건 개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일 테다. 결국 신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건 나 같은 반려인뿐이다. 

- 나는 고개를 돌려 개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개는 여전히 멀리 있다. 어쩌면 개는 나의 이런 불온한 생각들을 이미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니까.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는 충분히 그럴 만한 동물이지만 나는 아마 개의 속마음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짧은 머리의 아이를 찾아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 바닥이 밑으로 꺼진다. 나는 누운 채 아이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아이의 발목은 내 왼손에 잡혀 있다. 아이의 다리가 고무처럼 늘어난다. 이곳은 피안도, 차안도 아니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내가 지은 죄가 대체 무엇이에요?

나는 입술을 움직여 묻는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다시 입술을 움직인다. 

무엇이길래 나만 계속 혼자 남게 되는 거예요?

- 그럼 대답하렴. 아이야. 

 

- 나는 계속 의심할 거야. 

내가 말을 만들기도 전에 내 입술이 움직인다. 

내가 배운 사랑은 그게 전부니까. 

 

- 어서 와. 

 


 

<신께서는 아이들을>, 석수나

 

-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믿음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믿음은 약점이 아니라 네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자 친구라는 걸, 언제고 아이들의 귀에 속삭여 주고 싶다. 

 


 

- 검진 뒤에 이어진 점심식사 자리에서 양희 씨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른 피험자도 놀랐는지 저마다 수군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식당은 말 그대로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갓 쪄내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대게 다리부터 시작해 그릴 자국이 선명한 양갈비와 꽃등심 스테이크, 짚불로 구워 파삭하게 그슬린 삼겹살과 목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소갈비찜, 도미찜, 해물찜 등등. 양식과 한식이 마주 보며 배치되었고 사선으로 비껴가니 일식과 중식 차례였다. 세상에, 양희 씨는 저렇게 큰 꽃게는 처음 보았다. 훈제 연어도 참치만큼 컸는데 생참치는 그것보다 더 컸다. 미사일 수준이었다. 

 

- 단정한 전자 음성에 피험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넘어갔다. 기대감에 차오른 얼굴로 접시를 들고 각자 취향대로 음식을 담았다. 양희 씨는 찰나의 자제력을 발휘해 샐러드 코너로 향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식탁에는 대게 껍데기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갓 쪄낸 대게 속살이 너무 부드럽고 달고 입 안에서 살살 녹기에 차마 한 그릇만 먹고 끝낼 수가 없었다. 

- 한식·양식·중식·일식이 끝나니 이번에는 디저트 차례다.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벗어던진 양희 씨는 산양유가 듬뿍 들어간 스콘에 살구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 발라 먹고, 입가심으로 크림과 딸기 잼을 넣은 홍차를 즐겼다. 의료진을 향한 의심은 그릴 위 스테이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양희 씨는 한껏 여유로운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별관을 나와 연구소 주변을 산책했다. 너른 산이 연구소 대지를 둘러싼 구조였기에 공기가 도심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맑고 청명했다. 피 뽑는 시간만 빼면 모두 자유 시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 산책을 즐기고 별관 로비로 돌아가 보니, 이번에는 직원들이 피험자들에게 종이봉투를 나눠주고 있었다. 유명 제과점의 로고가 찍힌 것으로 보아 세면 용품 따위는 아닌 듯했다. 점심을 워낙 거하게 먹어 식단을 조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양희 씨는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에 또다시 넘어가고 말았다. 봉투에는 마카롱 한 세트와 진하게 뽑아낸 커피가 담겨 있었다. 모두 그 자리에서 마카롱을 하나씩 꺼내 베어 물고 커피를 마셨다. 황홀한 미소가 로비를 가득 메웠다. 

 

- 그날 밤, 양희 씨는 침대 위에서 반성회를 가졌다. 숙소에 갖춰진 볼펜과 메모지로 오늘 하루 먹은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내일은 과식하지 말자는 다짐과 달리, '내일은 무얼 먹을까?'라는 행복한 고민만 메모지에 담겼다. 결국 포기하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스마트폰을 압수당한 건 속상 하지만 숙소 TV에는 여러 OTT가 깔려 있어 지루할 새가 없었다. 생각 없이 드라마와 영화 목록을 넘기고 넘기다가 양희 씨는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뒷머리가 베개를 누르자마자 절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솜이 들었는지 궁금해 죽을 정도로 베개는 폭신하다 못해 구름을 베는 것처럼 안락했다. 천국이 따로 없다. 몰래 훔쳐 가고 싶다. 직원에게 물어보면 브랜드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양희 씨는 리모컨을 놀리다가 언뜻 잠이 들었다. 얕은 꿈속에서 양희 씨는 베개를 날개 삼아 하늘을 날아다니며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깼을 때 양희 씨는 메모지에 크게 적었다. 파스타. 해물 파스타. 


- 국제 우주 연맹에서는 3등급 이상의 ***을 사육·도축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랍곶은 우주 연맹의 일원으로서 이러한 지침을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지구의 잘못된 선택으로 랍곶의 수많은 *** 목장과 식당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남은 ***은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리라 판단해 살처분되었지요.  

 

- 과연 무엇이 당신의 몸을 위한 걸까요? 이대로 집에 돌아가 죽을 날만 기다리기? 아니면 혈관 교환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당신의 몸 안에서 힘겹게 산소를 옮기고 있을 적혈구를 생각해 보세요. 심장을 비롯해 간과 폐, 신장 등의 장기가 당신께 선물하는 삶의 찬란함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혈관을 생각해 보세요. 과연 당신은 당신의 혈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 "영상을 보러 온 인간들은 대부분 그런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럽고 두렵고, 때로는 놀라 기절하기도 합니다. 저희도 이 영상을 보여드리는 것이 불편하고 지겹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설명하고 끝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업자 등록증을 취득할 때 고객에게 동영상 가이드를 보여줘야 한다는 정부 권고가 있었다."

 

- "그거 웬 거예요?"

"베개요." 양희 씨는 쇼핑백에서 보란 듯이 베개를 꺼내 흔들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채혈이 끝난 후 이어진 면담 자리에서, 양희 씨는 차마 베개를 달라는 소리는 못 하고 베개 브랜드만 물어봤다. 최 박사는 진작 눈치챘다는 듯 직원을 시켜 쇼핑백에 베개를 담아 건넸다. "선물입니다." 베개는 건조기에서 막 꺼낸 것처럼 부드럽고 포근했다. 어릴 적 가지고 다니던 곰 인형처럼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 이명


- 고백하자면, 초고를 쓸 당시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동물권은커녕 축산업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철저히 자기만족의 산물이었고 혼자 낄낄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글을 거듭 수정하면서 사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의미가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어떤 글은 쓰면서 깨닫게 된다. 자신도 몰랐던 속뜻을 알게 된다. 

 

 


김보영

 

- 가작인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은 현실감 넘치는 게임 개발 현장 묘사가 발군인 소설이었다. 옛 시대에 머물러 있는 낡은 개발자에 대한 풍자가 문장마다 웃음을 자아내었다. 창작 AI를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도 발군이었고, 게임 현장뿐 아니라 AI에 대한 통찰이 깊은 소설이었다. 사소한 위화감이 이어지다가 화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탁월했다. 

-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먹고 싶다'는 절실한 욕망의 문제를 개그와 코스믹 호러를 섞어 그려낸 유쾌한 작품이다. 음식의 묘사가 내내 군침을 돌게 했고 기본기가 탄탄하여 즐겁게 몰입했다.

- <책이 된 남자>는 디지털 인격이라는 소재를 고대 연금술, 수도원의 필사 작업과 연결하여 판타지적으로 그려낸 하드 SF였다. 수도원과 디지털 기록을 연결하는 상상이 그간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최소한 현대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발상이며, SF 팬으로서 이 정도까지 나아간 작품을 발견하여 반가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리로 밀도 있게 전개한 작품이다.

- <신께서는 아이들을>은 아름다운 환상소설이었다. 판타지에 가깝다는 평도 있었으나 자신만의 독창성과 논리로 세계를 구성하여 설득력을 주었다. SF의 '과학'은 흔히 생각하듯 자연과학만이 아니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논리의 아름다움을 뜻함을 상기시켜 주는 좋은 지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 

- 우수작인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는 기성작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안정적인 필력과 구성으로 전개한 소설이었다. 대상인 <루나>와 함께 여러 심사위원의 지지를 받았고 대상 선정 과정에서 긴 토론이 있었다. 통계에 담기지 않는 소수자의 소리를 찾아 듣는 문제를, 생체 데이터가 주류가 된 시대에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터뷰하는 설정을 통해 심도 있게 그려내었다. 담긴 메시지가 따듯하고 결이 풍부한 작품이었다.

- 작품의 수준이 높아졌고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응모되었다고는 하나, 개인적으로 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리라는 기대는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상인 <루나>는 첫 문장부터 감탄했다. 우주 유영을 해녀의 물질에 비유하여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변주한 작품으로, 한국에서 밖에는 나올 수 없는 작품으로 본다. 시각적으로도 빛나는 작품이었다. 우수한 작품이 많은 해라 작품의 장점의 가치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엇보다 이 작품의 독창성과 신선함에 큰 지지를 바쳤다.

 


강지희 

 

- <파 드 되>가 사유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소위 리얼리즘 서사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과연 측정 가능한 것인지, 엄밀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늘 초과해 버리거나 미달되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서사에 녹여내는 방식은 꽤 근사했고,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사변적으로 접근해 가는 SF의 방식으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다만 두 수학자의 관계가 학문적 동반자 이상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조금 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만들어지기를, 그렇게 되었을 때 소설이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춤의 의미가 주는 울림이 더 크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되었다.

 

-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은 로맨스와 결합된 스페이스 오페라다. 소설은 시간 곡선에 휘말려 있기에 필연적으로 어긋나면서도 서로를 구하고 또 그리워하는 운명적인 인연에 대해 더없이 낭만적으로 접근해 나간다. 상대방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여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마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정도겠지만, 자식은 부모의 탄생을 목격할 수도 그 유년 시절을 함께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그 관계는 결코 상호적일 수 없다. 사랑은 생각보다 한정적인 시기에 국한되어 있고, 특정 강도의 에너지로 지속되다가 소멸된다. 하지만 시간이 꼬여 있다면 다음과 같은 사랑도 가능해질 것이다. 갓난아기인 상대를 구하고, 젊고 열기가 넘칠 때 그와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그의 죽음을 회수하고 애도하기. 소설은 그렇게 서로의 삶을 관통하지만, 상대방의 유년과 노년을 구출할 수는 있어도 젊은 시절 함께 사랑하는 행복한 시절은 허용되지 않는 사랑을 발명해 냈다. 남은 생이 온통 닿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만 채워지더라도, 서로의 가장 연약하고 고독한 시기를 곁에서 지킨 것이라면 그 사랑은 무척 특별하지 않은가? 다른 심사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성긴 이야기였던 것 같지만, 내게는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며 얻는 쾌감이 꽤 컸다.

 

- 본심을 시작하면서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라고 생각했던 작품은 <블랙박스와의 인터뷰>였다. 많은 소설들이 사이보그를 등장시킬 때 인간과 변별되는 점에 집중해 인간 이상 혹은 인간 이하라는 명확한 선을 그어두고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향해 가파르게 치달아 간다. 이런 서사에서 사이보그가 지능적으로 얼마나 탁월하며 감정적으로 깊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이보그를 두고 인간 이상과 이하를 계속 가늠하는 소설들은 사이보그를 아무리 친근하게 그려놓더라도 그 태생과 존재가 '자연적인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공적인 무엇'이라는 뚜렷한 구분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둔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호의적 재현은 언제든 반대로 뒤집힐 수 있다. 다르기에 뛰어남에 감탄하거나 선량함에 사랑을 느낀다면, 다르기에 혐오하게 되는 건 너무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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