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Drawing Book

[서하나] 모던민화 수업

일루젼 2022. 7. 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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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하나
출판 : 미진사 
출간 : 2021.01.14 


       

색연필로 그려볼만한 일러스트를 찾아 관련 분야 도서들을 살피다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기법은 전혀 다르지만 표지 그림의 서서히 퍼져나가는 색감이 아름다웠고, '모던' 민화는 뭔지 궁금해졌다. 민화라고 하면 김홍도나 신사임당 정도만 떠오르는 상태였지만, 나름대로는 해도나 초충도를 꽤 좋아했었던 기억이 나 읽어보았다. 

 

민화. 벽사기복을 담아 그린 소박한 일상 정물. 

기본 선을 이용해 형태를 잡고, 색을 조금씩 바림해 펼쳐나가는 그림. 

 

저자에 따르면, 더이상 새로운 일상을 담지 못하는 고정된 '민화'에 과감하게 현대인의 일상을 녹여낸 그림을 '모던민화'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기법이나 재료는 동일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 또한 현대인의 '민화'라는 것.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다 익숙하던 것들이 민화 속에서 낯선 듯 익숙한 듯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서 감탄하고 말았다. 민화 속의 딥디크라니.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초반 기본기를 설명하며 필요할 경우 동영상 강의를 볼 수 있도록 삽입된 QR 코드들이었다. 뉴욕주민 등의 다른 저자들도 주석에서 QR 코드를 활용한 경우가 있었지만, 실용 도서에서 해당 기법에 관한 강의 영상을 바로바로 보며 따라할 수 있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글과 사진 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감각을 영상으로 보충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고, QR로 첨부한 점이 정말 '모던'했다. 전부 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대다수의 코드들이 현재도 잘 연결되고 있었다. 

 

색을 쌓아올리기도 하고, 퍼트려 묽히기도 한다. 

투명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두텁게 가두기도 한다.

 

저자는 민화 기법에만 갇히지 말고 다양한 좋은 그림들을 접하고, 일상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드로잉이나 채색으로 자주 그려보라고 조언한다. 또한 초기 단계부터 창작 그림에 도전할 것을 권하는데, 다른 사람의 사진이나 그림은 이미 한 번 그 사람의 시각을 통해 재해석된 것이라는 점과 모작에 익숙해지면 본이 없는 그림은 그리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막상 백지를 펼쳐놓았는데 그 위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하다면 지금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라고. 나는 색연필화를 연습중이긴 하지만, 딱 그렇게 생각하고 다양한 모작을 연습 중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뜨끔했다.  

 

<모던민화 수업>은 실질적인 민화 기법과 연습에 관한 설명이 절반, 그리고 지금까지 민화를 그려오면서 겪고 느꼈던 저자의 경험담들에 대한 에세이가 절반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 쪽으로만 크게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이 좋았고 이 또한 모던 - 민화와 어울리는 구성이라고 느꼈다. 저자의 작품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사진으로 옮겨 보려하니 색감이 도무지 살지 않아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마음에 들었던 몇 작품을 저자의 홈페이지에서 캡쳐해왔다. 무척 아름답고, 이 외에도 멋진 그림들이 많았다.

 

이 책 한 권만으로 독학으로 민화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 책의 조언을 따라 채색과 선긋기부터 연습해나가자. 권말에 따라 그리거나 복사해서 쓸 수 있는 19점의 본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그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어보실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꼭 민화 기법이 아니더라도 이 본을 활용해 수채화나 색연필화 등의 다양한 연습을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끝.   

 


   

 

연꽃
모란바구니
빛, 바람 그리고 사랑
사물들
사물들

 

 

- 평소 내가 작업할 때나 수업을 진행할 때 주로 쓰는 재료들을 소개해보겠다. 나는 주로 인사동 필방에 들러 제품을 직접 보고 사는 편이다. 어느 가게에서 파는 이 제품을 꼭 써야 한다는 것은 없으니 구할 수 있는 선에서 준비해보는 것이 좋겠다. 재료를 살 수 있는 가게가 가까이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멀더라도 한 번쯤은 필방을 찾아 돌아다니며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도움을 받으며 재료를 구입하길 권한다. 

① 한지

작업의 바탕이 되는 종이로는 한지를 사용한다.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만들어 순우리말로는 닥종이라고도 부르고 원료와 용도 등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는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순지(32~36g)를 사용하길 추천한다. 앞으로 여러 작업을 해보며 더 얇은 순지도 써보고, 순지를 두 겹 이상 붙인 장지도 써보자. 종이의 두께에 따라 발색력과 깊이감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를 써보고 본인에게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② 분채

호분이나 흙에 색을 입혀 만든 채색 안료다. 안료 회사마다 다양한 색이 나오고 있는데, 처음 구입할 때는 원색으로 구성된 12색 세트를 하나 장만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이 책에서 실습을 하며 주로 사용할 색은 노랑, 주황, 분홍, 빨강, 갈색, 연두, 민트, 초록, 하늘, 파랑, 남색, 보라색이고 브랜드에 따라 부르는 이름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개 필방에서 판매하는 색의 이름은 농황, 황주, 홍매, 적, 초다, 황약엽, 백록, 녹청, 신교, 군청, 남, 등자로 불리니 구매 시 참고하도록 하자. 이 원색의 분채들은 이어 설명할 재료인 호분과 조색해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 그림을 몇 점 그려보며 작업에 재미를 붙이고, 앞으로도 그림을 계속할 수 있겠다 싶을 때 마음에 드는 색들을 추가로 구매하면 되니 시작할 때는 이것저것 많이 살 것 없이 꼭 필요한 기본 재료만 갖추는 것이 좋다. 

 

③ 호분 

호분은 하얀색을 내는 안료 중 하나로 조개껍질, 굴껍질을 오랜 시간 풍화시킨 뒤 정제해서 만든 재료이다. 흰색을 내기 위해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색이 있는 분채와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어 쓸 수 있다. 

④ 봉채

분채와 같은 원료에 아교, 밀랍 등을 섞어 막대 형태로 굳혀서 만든 채색 재료이고, 분채의 매트한 질감과는 달리 수채화처럼 맑은 느낌이 난다. 분채에 비해서는 색상 선택의 폭이 좁은 편이다. 

⑤ 먹 

먹은 송진을 태워서 만드는 재료로 스케치를 하거나, 검은색이 필요할 때 사용한다. 먹과 벼루를 준비하거나, 그림용 먹물을 준비해도 좋다. 

⑥ 채색붓 

민화 혹은 채색화용 붓을 대, 중, 소 다양한 크기로 다섯 자루 정도 준비한다. 소품 위주의 작은 그림을 그린다면 중소 정도의 붓이 적당하고, 그림이 커지면 당연히 붓도 더 큰 것이 필요하다. 초반엔 다섯 자루 정도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같은 크기의 붓이라도 여러 개 구비해놓고 진한색용과 밝은색용을 구분해 쓰는 것이 좋다. 

⑦ 세필 

선을 그릴 때나 섬세한 묘사가 필요한 부분에 사용되는 얇은 붓이다.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붓털이 짧고 탄력이 좋은 붓을 먼저 갖추는 것이 좋다. 

⑧ 평붓 

넓고 평평한 붓으로 다양한 크기가 있다. 종이에 아교칠 및 염색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 폭이 10cm 이상 되는 평붓을 준비한다. 

⑨ 아교 

아교는 동물성 젤라틴 성분의 재료로 작업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 번째는 종이 전면에 아교액을 도포해서 채색 시 물감이 번지지 않게 하는 초벌 작업을 하는 용도로 쓰이고 두 번째는 안료와 섞어 사용해 그 안료가 종이에 잘 고착될 수 있게 하는 미디엄의 역할이다. 알아교, 막대아교, 물아교가 있는데 모던민화 시간에는 알아교를 준비해보도록 하자. 

⑩ 백반

백반은 아교액을 만들 때 극소량 섞어 쓰게 되는데, 아교액이 종이의 섬유질 사이사이로 잘 고착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⑪ 볼 

아교액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평붓이 들어가는 크기의 가열 가능한 그릇이나 냄비를 준비한다

⑫ 접시 

분채를 덜어서 색을 만들 때 각각의 작은 접시가 필요하다. 꽃 모양으로 여러 칸이 붙어있는 접시보다는 간장 종지처럼 작은 그릇을 색마다 각각 쓰는 것이 편리하다. 

⑬ 둥근 나이프 

분체를 곱게 갤 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이프의 앞부분으로 분채를 개는 것이라 그 부분이 접시에 들어가는 크기여야 하므로 길쭉한 나이프가 아닌 둥근 나이프를 준비한다. 

⑭ 융 

아교칠을 할 때와 채색할 때 종이 밑에 깔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한지에 붓질을 하다 보면 종이 아래로 물감이 스며 나오게 되는데 이때 융이 깔려 있지 않으면 책상에 색이 다 묻어나게 된다. 또한 한지가 얇아 비치기 때문에 작업 중인 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반드시 하얀 융을 깔고 작업해야 한다.

이 외에도 문진, 물통, 행주가 필요하다. 이쯤 되면 다들 '그림 그리는 데 준비할 게 굉장히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위의 재료들 중에서는 봉채를 제외하고는 필수적인 것들이므로 꼭 준비하도록 한다.  

 


 

- 민화의 매력 중 하나는 그림이라고 하여 처음 시작할 때 직접 창작을 하지 않아도 돼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꽤 완성도 있게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는 쉬운 접근성에 있다. 순식간에 그 시간에 빠져들게 되는 몰입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평소에 두세 시간씩 뭔가 하나에 푹 빠지기가 쉽지 않은 바쁜 현대 사회인데 그림을 그리며 그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그 시간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게 되니 성취감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 모던민화는 그리는 기법의 면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민화와 차이가 없으나, 그림의 내용이 되는 소재들에 변화를 준 것이다. 지금 나의 주변에 있는 것,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들을 찾아 그리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바로 <의자> 연작이다.

 

- 다녀와서 그 여행을 곱씹어보아도 의자들이 자꾸 떠올랐고, 퐁피두 센터 앞에서 단소를 불며 그림을 팔 거라면서 한창 파리 앓이에 빠져 있던 나는 프랑스의 고전적인 의자 형태에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부귀영화의 상징인 모란을 문양화해서 그림을 몇 점 그려봤고, 그것이 지금의 '모던민화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검은색 단소를 장만하고 몇 번 파리를 다시 가긴 했지만, 단소를 불며 길에서 그림을 팔겠다는 꿈은 꿈에 그쳤고, 그 단소는 몇 년 후 친구에게 기증했다. 

 

- 세필의 종류도 다양한데, 처음 스케치를 할 때는 털이 짧고 탄력 있는 붓을 추천한다. 두께나 각도 조절을 하기에 쉽다. 대신에 붓털이 많지 않기 때문에 먹물을 많이 머금고 있을 수 없어 자주 묻혀서 써야 한다. 털이 긴 붓은 곡선을 그릴 때 붓이 튕겨져 나가 처음에는 조절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 수업을 하다 보면 "선을 얇게 그리는 게 좋은 거죠?"라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나의 대답은 "얇게 그리고 싶은 부분은 얇게, 두껍게 그리고 싶은 부분은 두껍게 내가 원하는 선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힘 조절이 가능한 상태가 가장 좋다"이다. 그 상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잠깐씩이라도 꾸준하게 연습을 하면 도움이 된다.

 

- 수업 시간에 학생들도 스케치를 하고 며칠을 충분히 말렸는데도 아교칠을 하면 먹선이 다 번진 경우가 드물게 몇 번 있었는데 물어보면 동네 문구점에서 산 먹물을 쓴 것이 원인이었다. 먹이든 먹물이든 필방에서 그림용(민화)으로 사서 쓰는 것이 좋다. 

 

- 아교는 동물 혹은 생선의 가죽이나 힘줄, 뼈 등으로 만든 것으로 젤라틴이 주요 성분이다. 농도를 아주 진하게 쓰면 강한 접착력이 있어 옛날에는 목가구를 만들 때 아교를 접착제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림 작업에서는 전처리를 하지 않은 한지에 바로 채색을 하면 물감이 번지기 때문에 채색 작업 전에 꼭 아교칠을 해야 한다. 

 

- 이 단계는 한지에 아교액으로 막을 씌워 채색할 때 안료가 번지지 않고 잘 고착될 수 있게 한 번 코팅을 하는 개념이다. 아교칠을 해도 하기 전과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만져봤을 때 미묘하게 조금 더 종이가 빳빳해지는 느낌이 있다. 수업 시간에 그림을 갓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이 가끔 겪는 일 중 하나는 아교칠을 해도 그냥 봤을 땐 별 차이가 없으니 마른 다음에 정성스레 한 번 더 칠해서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농도로 두 번 칠하면 너무 진하게 코팅이 돼서 물감이 잘 안 먹는다. 아교칠은 제대로 한 번만 해도 충분하다. 

 

- 채색 시 분채와 섞어 쓸 아교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만드는데 비율은 물의 양을 두 배 늘려 더 연하게 쓴다. 만든 아교는 냉장 보관하면 3~4일 정도 더 쓸 수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젤리처럼 탱글탱글하게 굳지만 꺼내면 다시 액체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보관했더라도 며칠 지나고 봤을 때 아교액의 색이 탁하거나 비린내가 난다면 써서는 안 된다. 특히 여름엔 높은 온도에 의해 쉽게 상하기 때문에 보관과 사용에 주의하도록 하자.  

 

- 나는 종이에 염색이 필요할 때는 아교칠을 먼저 하고 다 말린 후 염색을 따로 한다. 아교액을 만들 때 그 물에 색을 첨가하면 볼 바닥에 덜 녹은 아교가 있는지 없는지가 안 보여서 따로 작업하는 편이다. 민화 수업에서 흔하게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커피' 염색이다. 아메리카노를 아교칠 하듯이 종이에 칠하면 은은하게 갈색빛이 돌아 오래된 종이의 느낌이 난다. 커피마다 농도가 다르니 자투리 종이에 칠해서 말려보고 색이 마음에 들면 전체적으로 칠하도록 한다. 

 

- 색을 칠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퍼뜨리며 그러데이션을 만드는 기법을 순우리말로 '바람'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색깔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앞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다양한 색으로 많은 바림을 하게 될 것이다. 색상에 따라, 색의 농도에 따라, 종이의 두께에 따라 발색과 난이도가 달라진다. 선 연습, 바림 연습은 많이 해볼수록 도움이 된다. 

 

- 칠해놓은 부분들이 다 말랐다면 이제 앞에 바람을 하기 위해 밑색으로 칠했던 색에 초록색과 남색을 섞어 좀 더 진한 색을 만든다. 바림엔 항상 두 개의 붓을 사용하게 되는데, 하나는 색을 묻혀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물만 묻혀서 바림용으로 쓴다. 이때 바림용으로 쓰는 붓은 물기가 거의 없이 써야 한다. 잎의 안쪽에서부터 색을 칠하고 물붓을 이용해 그 색을 바깥쪽으로 풀어주며 자연스럽게 옅어지게 바람 해본다.  

 

- 덧바림을 할 때마다 물감의 농도는 점점 더 묽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같은 농도로 계속 안료를 쌓아가다 보면 그 두께 때문에 추후 그림에서 안료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 모란과 작약을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은데, 둘 다 작약과의 식물이긴 하나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알뿌리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땅에 닿은 식물의 줄기 부분이 목질화가 되어 있는지 보면 나무와 풀을 구분하기가 쉽고, 이파리를 보면 생김새가 많이 달라 더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모란은 세 갈래로 나뉜 오리발 모양의 잎이고, 작약은 갈라지지 않은 잎들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이렇게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점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이 한가득 담겨 있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나는 언젠가 작업실에 헤링본 무늬의 마루를 깔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바구니에 그 무늬를 넣었다. 그림에는 이렇게 내가 좋아하고 가까이 있는 것들과, 지금의 생각들이 담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지만 그림을 보면 그걸 그렸던 시절의 마음과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린 지 십 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작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헤링본 마루는 근처에만 가보려다 말았다.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나와 나의 작업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 민화는 하나의 본으로 여러 사람이 베껴 그려 본그림이라고도 불렸다. 그 덕분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전혀 없어도 부담 없이 시작하기가 쉽긴 하나, 그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그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민화가 계속해서 재생산되며 이어지고 보존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내 그림 수업의 목표다. 

- 계속 모사만 하다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그때 창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시작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모사를 하면서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은 그림에 익숙해지게 되고, 그 상태에서 창작을 시작하면 그간 해오던 모작만큼의 완성도가 나오지 않으니 스스로 실망을 하고 오히려 손을 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번갈아가면서 작업해나가면 채색의 숙련도도 높아지고 처음엔 어설프더라도 차근차근 나만의 그림을 그려갈 수 있다.

 

- 작업물이 독창성을 갖는 방법 중 하나는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보면서 그리는 것이다. 사진이나 그림은 이미 누군가의 눈과 손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는 방법으로는 독창성을 갖기가 어렵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꽃을 놓고 여럿이서 각자 드로잉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모아놓고 보니 서로가 같은 꽃을 보고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나왔다. 같은 것을 보아도 각자의 눈과 마음과 손을 거쳐 모두 다른 개성이 묻어 나오게 되는데, 나는 찍어내듯 똑같이 만들어지는 그림들보다 서툴더라도 개성이 담긴 그림들이 좋다. 

-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테크닉이 수려한 그림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힘을 많이 빼고 그려도 아우라가 있는 그림. 그러기 위해선 그 길로 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간과해선 안 된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그곳에 닿기 위한 길을 거쳐가야 하는데 그걸 건너뛰고 바로 결과만 얻으려고 한다면, 알맹이는 없이 빈 껍질만 남게 될 뿐이다. 결과물보다 중요한 것이 과정이므로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호흡을 조절해가며 작업에 몰입해보자. 나 역시 내 지금의 작업들이 훗날 내가 바라는 궁극의 작업을 위한 여정이길 바란다. 

 

- '모던민화'라는 이름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 '의자'에 쉼을 담은 연작들을 해왔고, '책가도' 형식의 작업들에서는 내 일상의 요소들을 그림 속에 담아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업을 해왔다. 그때그때의 관심사를 주제로 그림에 담아내다 보면 그림을 그리던 시절의 내가 담기게 된다. 작업하는 동안의 고민, 즐거움, 날씨, 내가 바라본 색들이 그림 속에 녹아들어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림을 마주하면 그때의 기분이 고스란히 살아나게 된다. 감정은 계속 변화하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그림 속에 남아있다. 

 

- 수업 시간에 "에이, 이 그림 망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사실 망친 그림이란 없다. 특히나 배우는 단계에 있는 경우엔 더더욱 망칠 수 없다. 망쳤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점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다가 스스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과연 어떤 부분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지를 꼭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나는 이것을 '망쳤다'라고 생각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 부분에 집중해서 다시 도전해보는 것이다. 작업을 하며 예기치 않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방향을 찾아갈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서의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답을 만들어가는 것. 

 

- 작품의 크기가 커지고 진행 과정이 길어질수록 대개 작업의 중반쯤 왔을 때 지치곤 하는데, 해도 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은 지리멸렬한 그 고비를 무사히 잘 넘기고 나서야 훨씬 좋은 그림을 만나게 된다. 많은 작업을 해보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이 말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 가보는 산을 오르는 것 같다. 많은 체력이 소모되며, 어디에서 어떤 풍경이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고, 때로 (실은 늘) 고비가 있다. 그 고비를 넘기고 산에 올라 무사히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완성된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쉬운 산도 있고 어려운 산도 있겠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만날 수가 없다. 

 

- 민화, 궁중화와 같은 조선시대의 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대부분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복숭아는 벽사, 장수의 의미를 갖고 있고, 모란은 부귀영화를, 포도와 석류처럼 알갱이가 많은 과일들은 다산을 상징한다. 또 뛰어오르는 잉어는 출세와 합격, 호랑이는 벽사, 나리꽃은 소원 성취와 평안의 의미가 있고, 제목마저 십장생인 그림에는 소나무, 바위, 사슴 등장수를 기원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옛날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며 또 그 그림들로 집안을 장식하며 다산, 장수, 합격, 평안 등을 기원하였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의미가 있는 소재를 그림으로 그린 걸까, 혹은 그림을 그리며 그 대상에 대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걸까. 순서가 어찌 됐건 우리도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맞는 소재를 찾고 그것에 의미를 더해 민화를 확장해가며 그 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장에선 옛 그림들의 매력을 탐구해보며 더불어 앞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더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 새 책가도 작업에 들어가면서 이번에는 어떤 주제로 그려볼까 며칠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장 한켠에 모아 둔 다 쓴 초와 향수병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래, 향기를 그려보자!'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향수는 드물게 가끔씩 사용하는데, 그 사용 빈도에 비해 많이도 샀던 향수 브랜드가 딥티크(Diptyque)였다. 싸뺑(Sapin)이라는 초는 태우면 소나무 향기가 피어나 마치 숲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필로시코스(Philosykos)는 세련된 무화과 향의 향수이다. 

(리뷰자 주 : 내가 사랑하는 향은 롬브로단로(L'Ombre Dans L'Eau).)

 

- 그림 선생으로서 나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며 학습 방법을 주입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고자 하는 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게 옆에서 돕는 역할을 하는 존재다. 뭘 그려야 할지, 어떤 색으로 표현해야 할지, 그리고 싶은 것은 찾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그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거들고 작업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답을 정해놓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에 있는 무형의 것을 스스로 관찰하고 탐구하며 그림으로 표출해 유형의 것으로 전환해보는 그 행위와 과정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 일련의 과정을 유희로서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이렇게 해도 될까? 저렇게 해도 될까? 주저하지 말고 자신 있고 자유롭게 행해보길 바란다. 이 책 초반에 재료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여러분이 그림을 그리며 더 나은 재료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책에서 설명한 나의 작업 방법이 그림을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저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길을 찾았을 뿐이고 그 방법은 유연한 상태에 있다. 책 안에서 내가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구구절절 풀어놓았지만 이것이 단 하나의 절대적인 방법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작업했으면 한다. 



 

 

HANA SEO painting & illustration

서하나의 모던민화

www.seo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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