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일루젼 2022. 12.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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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심채경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1.02.22 


       

춥다. 가능만 하다면 바로 월동에 들어갔을 날씨인데, 영하의 눈발을 헤치며 꾸역꾸역 출퇴근을 행하느라 아주 고역이다.

(수많은 출퇴근러들에게 위로와 안부의 인사를 건네본다.) 

 

원래 동일 조건에서 절대 온도가 내려가면 입자의 활동은 저해되는데, 꼭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굉장히 '느려진' 느낌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책을 읽는다거나, 그림을 그린다거나, 논다거나, 먹는다거나 모든 활동들이 평소의 몇 배는 걸리는 것 같다. 마치 물 속에서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그리 싫지 않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심채경 저자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21년도에 구매해두었던 책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올 겨울, 눈이 내리는 날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내 상상과는 꽤 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던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같은 느낌의 과학 에세이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이 책은 '과학자의 에세이'였다. 같은 것 같지만, 같지 않다. 

 

저자의 대학원생으로서의 삶, 계약직 연구원으로서의 삶, 이후 강단과 학회에 서고 엄마로서 살아가는 인생 전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긴 기간을 '과학자'로서 살아왔기에 별과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을 뿐, 이 책은 저자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한 글이다. 

 

하나의 주제에 관해 잘 벼려진 글이 주는 날카로운 지적 매력이 있다. 어떻게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저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하기위해, 조금도 어긋날 틈을 주지 않고 설계된 대로 결말로 몰아가는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설레는 무력감.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한 사람의 글이 아닌 것도 같은,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더듬는 글도 좋다.

그 면들의 경계들을 가만히 이어보면 '심채경'이라는 하나의 별자리가 완성된다. 

 


   

- 오랜 친구가 흔히 그렇듯 서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지내다 문득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친구는 미술을 전공하는 유학생이 되어 있었다. 졸업하고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라고 했다. 화가가 되면 뭐해서 먹고사느냐고 물었더니, 이래서 공대생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공대가 아니고 자연대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 자연대 나온 천문학자는 돈을 많이 버느냐고 했다. 눈물 나는 노력 끝에 입학했다는 그 미술대학의 명성을 전혀 몰라 미안했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속으로는 조금 놀란 채였다. 뭐해서 먹고사느냐는, 걱정인 듯 걱정 아닌 그 질문을 내가 하다니. 나는 언제나 그 질문을 받는 쪽이다. 

 

- 황도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고, 별자리는 항상 같은 곳에 있는데 지구가 자전할 때 팽이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스르르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가 하느라고 기준 면이 아주 조금씩 바뀌니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별자리 위치가 오늘날은 조금 틀어져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 섞인 설명은 시작한 지 십오 초 이상 지나면 정적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기능이 있다. 상대방은 이미 내가 앉아 있는 뒤쪽 벽의 무늬를 감상하는 중이고, 나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가만있자, 지구 세차운동 주기가 2만 5000년도 넘을 텐데, 그러면 황도12궁이 정립된 게 적어도 만년에서 오륙천 년 전이라는 건가? 주기 동안의 각도 변화량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아주 대단히 틀리진 않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가 대단히 차분해졌네. 이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언가 다른 화제를 꺼내야 하는군. 무슨 말을 해야 자연스럽지? 그런 설명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경우는 내가 강연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서 있을 때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논란의 주인공인 뱀주인자리는 한쪽 끝이 황도에 약간 걸쳐 있어서 황도상의 중요 별자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무려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놀랍게도 나의 분광선 발견 대잔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쭉 계속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수님들은 한번 들어온 제자를 잘 내쫓지 않는다. 대단한 영재가 아닌 다음에야 제자라고 해도 다 성인 아닌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대한민국에서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대학원을 얼쩡거리는 사람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는 종자들이라는 것을 교수님들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다시 새로움을 향해 떠나야 할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삶은 끊임없는 평가의 연속이다. 연구한 내용을 학회에서 발표하면 그 자리에서 곧장 신랄한 지적이 들어온다. 논문으로 써서 제출하면 심사자가 이것저것 고치라고 하거나, 이건 논문감이 아니라며 승인을 거절해버릴 수도 있다. 허접한 논문을 제출했는데 운이 좋게 너그러운 심사자를 만나 출판이 되어도 문제다. 내 잘못이 '박제'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A가 ○○년도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이러이러한 성질이 제안되었으나 이는 B의 영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성급한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이며, B를 고려해 다시 분석해보면 실제로는 저러저러하다'라는 문장이 남들의 논문에 등장해 공개적으로 반박당할 수도 있다.

 

- 논문을 심사하는 입장이어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논문 심사는 같은 분야의 동료 학자들이 하므로, 내가 논문을 투고할 때도 있지만 남이 투고한 것을 심사하기도 한다. 심사자 본인이 스스로 밝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은 익명을 전제로 하지만, 적어도 편집자는 심사자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니 심사를 대충 할 수가 없다. 게다가 편집자 역시 학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논리적이고 예리하며 사려 깊고 성실하기까지 한 그래서 꽤 쓸 만한 학자라고 보일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해 심사를 한다. 심사자가 두 명 이상이면 더욱 신경 쓰인다. 논문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는데 나는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심사자만 찾아내지는 않을까 ... 

 

- 거의 '지박령'에 가까운 집순이, 연구실순이인 나의 인맥은 일가친척과 극소수의 어릴 적 친구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죄다 천문학자 아니면 곧 천문학자가 될 사람, 그러려다 다른 길을 찾아간 사람, 그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 등으로 아주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그런 내가 이토록 다양한 분야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고? 중심을 잡고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아, 연구실 밖으로 처음 고개를 내민 과학자란 방금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유약한 존재인 것을. 이쪽 사정이야 떨리거나 말거나 세 학기 동안 내가 맡았던 여섯 반의 수강생 전공 분포는 대동소이했다. 그들과 천문학을 나누었던 시간은 고작 일 년 반 남짓이었지만, 그 아찔하고 짜릿한 경험의 여운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Q1. '유니버스 universe' '코스모스 cosmos' '스페이스 space' 모두 우리말로 '우주'라고 번역된다. 무엇이 서로 다른가? 각 단어를 어디에서 들어보았는가? 

 

- 우리가 은하니 성단이니 얘기할 때 사용하는 '우주'는 '유니버스'다. 별과 먼지와 행성과 우리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환경이다. 영화, 소설 등 예술작품 속에서 설정된 배경을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 부르듯이, 유니버스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그 자체로서의 우주다. 별까지의 거리, 성운의 크기, 가장 멀리 있는 은하까지의 거리, 은하의 나이, 우주의 크기 등을 구하는 것을 두고 '우주를 측정한다'라고 표현하는데, 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분야다. 필요한 단위 체계를 정하는 일도 포함된다. 이 넓은 우주를 센티미터나 킬로미터 단위로 재려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겠는가. 폐지되기 직전의 짐바브웨 달러처럼 0의 꼬리가 너무 긴 숫자는 컴퓨터도 버거워한다. 

 

- '코스모스'는 질서와 조화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우주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는 질서와 조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릴 텐데, 다행히도 우주의 먼지는 모이면 구름이 되고, 구름이 꼭꼭 뭉쳐 별과 행성을 만들어내고, 별은 제 안의 연료가 소진되면 남은 것을 폭발적으로 내어놓으며 다시 우주에 먼지를 공급한다. 별이 모이고 모여 성단을 이루고, 은하를 이루고, 은하단을 이룬다. 밤하늘의 별은 흘러가고 행성은 때때로 역행했다 다시 순행한다. 일식과 월식은 예측에 맞게 일어난다. 빅뱅 이론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했는가 살펴보는 분야를 '우주론 cosmology'이라고 한다. 칼 세이건의 대표작인 그 책 이름이 <코스모스>인 것도 우주의 질서와 조화, 우주라는 대자연의 작동 원리를 논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주' 따위로 섣불리 번역하지 않고 원제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 컴퓨터 자판에도 있는 '스페이스'는, 자판에서와 다름없이 '공간'으로서의 우주다. 특히, 인류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과 같은 인공 물체를 보내 탐사하는 공간을 칭한다. 지구 주변의 환경과 그곳에 존재하는 플라즈마 등의 입자를 연구하는 분야가 '우주과학 space science'이다. 인공 물체가 도달한 우주 공간의 범위는 지난 40여 년간 크게 확장되었다. 1977년에 발사한 행성 탐사선 보이저 1, 2호의 끊임없는 항해 덕분이다. 보이저는 이제 태양계 끝자락을 넘어갔다. 태양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인 태양권계면 heliopause을 지나 항해를 계속하는 보이저와 함께 우리의 우주는 매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 Q4. 다음 중 본인의 생일에 호주에 놀러 가서 볼 수 있는 별자리를 모두 고르면? 
a. 북두칠성 b. 남십자성 c. 내 생일 별자리

 

- 답은 b. 남십자성이다. 호주 밤하늘의 남십자성은 우리 밤하늘의 북두칠성에 견줄 만하다.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보이는 별을 주극성이라고 부르는데, 호주에서는 남십자성이 주극성이라서 생일이든 아니든 매일 밤 볼 수 있다. 남반구에서는 북두칠성을 볼 수 없다. 호주에 여행 갔더니 과연 공해가 없어서 북두칠성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더라는 호들갑은 떨지 말자. 

 

- 생일 별자리와 관련된 황도 12궁은 우리나라에서도 호주에서도 주극성이 아니다. 뜨고 지는 '출몰성'인데, 계절에 따라 뜨는 시각이 바뀐다. 생일 별자리는 태양의 위치가 중요한 시스템으로, 내 생일에 태양이 내 별자리 구역에 임한다는 뜻이다. 해가 그토록 밝으니 바로 옆의 별이 눈에 보일 리가 있나. 애초에 생일 밤에 제일 잘 보이는 것을 생일 별자리로 정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점성술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목숨을 걸고 천체의 움직임을 읽는 진지한 운명론이다. 해와 달이, 행성과 혜성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다.  

 

- 2019년, 인류는 최초로 블랙홀의 사진을 얻는 데 성공했다. 블랙홀 자체는 볼 수 없지만 빨려 들어가면서 휘어지는 빛, 그리고 빨려 들어가는 물질 일부가 방출하는 에너지로 블랙홀의 윤곽을 관측한 것이다. 그런 기법을 고안하고, 그걸 해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마침내 블랙홀의 사진을 얻어낸 놀라운 천문학자들 덕분에 나는 다시 강의하게 된다면 첫 시간 퀴즈를 수정해야 한다. 아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수강생들이 답도 주고, 문제도 정정하고, 함께 생각도 해보는, '우주의 이해'는 그런 강의니까. 
 

- 17세기 말까지 지속된 소빙기와 상당 부분 겹친다. 빙하기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추운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1650년에서 1700 년 사이에 특히 온도가 낮아서 온 지구가 추위에 떨었는데, 이 시기를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한여름에 우박이 기록된 건수를 연도별로 살펴보았더니, 과연 마운더 극소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록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빙고! 나는 이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서로 제출했고, 성적표에 백점이 찍힌 것은 이 보고서 때문이었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하며 두고두고 뿌듯해했다. 

 

- 강의 전날 외워둔 그 대학의 학칙을 읊으며 통원치료는 출석 인정 사유가 아니라는 따위를 경고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취업했으니 강의는 듣지 않고 시험 당일만 학교에 나오겠다는 이메일에, 어려운 시기에 일찍 취업한 것은 축하하지만 수강신청 대란을 4년간 겪어온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수강 기회를 양보해달라고 거절할 때는 정의의 용사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다. 내 수강생의 상당수는 예체능 전공자여서, 돌을 조각하거나, 버선발로 춤추거나, 전국을 돌며 야구 시합을 뛰느라 바빴다. 빠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의 분야에 뛰어든 전문가들이 4년제 대학까지 졸업해야만 하는 사회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쳤다. 

- 가장 먼저 알려줘야 할 것은 '대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대학은 서양식 학교다. 오늘날 우리가 논하는 학문과 그 체계는 서양식 기틀을 바탕으로 발원했고 견고해졌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도 서양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대학에서 다루는 바는 그렇다. 동양식의 관찰과 사유, 겸양과 조화의 가치가 열등하거나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서양식 학문이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이집트의 화가들은 사람을 평면으로 그렸다. 얼굴은 옆모습인데 눈은 정면을 향하고, 몸통은 앞에서 다리는 옆에서 본 것처럼 그렸다. 그리스 헬레니즘은 사람의 삼차원 형태를 그대로 모사하려고 애썼는데, 중세시대에는 다시 이집트식의 평면 양식이 유행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시 실제의 형태를 중시했고, 현대에 들어서는 피카소와 같은 해체적 화풍이 대두되었다. 시대에 따라 고평가 되는 분야가 바뀌었지만, 그중 무엇이 가장 우월한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동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도 이와 비슷하다. 서양식 과학을 무조건 맹종할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전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갖게 되었는지 관찰하고 탐구해볼 필요는 있다. 관찰하고 탐구하는 그 자체가 학문적 태도다.

 

- 신기하고 새로운 현상을 배우고 발견하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한다. 밤하늘의 모든 별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홀로 역행하는 행성을 발견하고 두려워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수 세기에 걸쳐 지식을 쌓아 올리는 것, 끊임없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새로운 근거를 더하는 것, 나의 생각을 제삼자의 눈으로 조망하는 것, 그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 다음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글쓰기의 형식이었다. 학문은 정제된 기록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발견한 것이나 실험한 내용, 조사 결과와 그에 관한 생각 등을 잘 정리해서 이름, 날짜와 함께 기록해두면, 훗날 누구라도 그것을 참조해 재현해보고 거기에 새로운 부분을 더해 다시 자신만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다른 학자들이 따라 해 보았을 때 같은 결과가 재현되도록 레고 조립 매뉴얼처럼 정확하고 자세해야 한다. 

 

- 학자들은 교류를 통해 지식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기록을 발표한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학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학자들과도 교류하기 위해서 편지 형식을 취했던 것이 오늘날 논문의 전신이다. 논문에서는 과거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연구하고 논했던 내용을 정확히 밝히며 인용한다. 남의 업적을 내 것인 양하는 태도는 국가나 가족에 대한 긍지를 느낄 때나 쓰는 것이요, 남의 글 베끼기는 타자 연습할 때나 하는 일이다. 

 

- 학문할 때의 글은 형식도 갖추어야 한다.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넘어 그야말로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이미 갖추고 있는 명성이나 영향력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읽히고 판단받을 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용은 뛰어날지라도 형식만은 판에 박혀 있어야 한다. 이 연구를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혹은 마침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적지 않는다. 시적 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생이라면 학문적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문적 글쓰기는 유려한 글솜씨를 요구하지 않는다. 연구 내용이 별것 아니더라도, 글이 서툴더라도, 남의 것을 베껴 열 쪽짜리 보고서를 쓰는 것보다 한두 쪽이라도 자신이 행하고 생각한 내용을 형식에 맞게 쓰는 것이 더 지적인 활동이다. 그것이 대학의 모든 강의에서 공통으로 배우는, 혹은 배워야 할, 대학생으로서의 기본 소양이다. 
 

- 대학생은 시 쓰기를 연습하는 초보 시인과 같다. 남의 시를 베끼지 않고, 남의 시와 비슷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시상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그런 시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 생각' '내 의견'이 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과생도 일필휘지로 글을 쓸 수 있기 마련이다. 

 

- 거의 습관적으로 적은 그 알량한 축복에, 학생은 넘치게 고마워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이 젊은 청춘에게, 그따위 싸구려 축복조차 해주는 선생 한 자가 이때껏 없었다는 게 화가 났다. 넌 잘하고 있다고, 너만의 특질과 큰 가능성이 있다고, 네가 발을 떼기만 하면 앞뒤가 아니라 사방, 아니 만방으로 길은 열릴 것이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가. 스무 살, 스물한 살은, 그런 이야기를 차고 넘치게 들어도 되는 나이다. 그런 청춘들이 '대졸자' 꼬리표 하나 달기 위해서 돈과 젊음을 들여 스스로 대학 안에 갇히는 기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기꺼이 가지치고 분재로 다듬어가는 기간, '멀쩡한 대학 나와서 왜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도 못하느냐'는 어른들의 질문을 향해 전진하는 그 기간이 나는 너무나 아깝다. 왜 그런지는 질문한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 사회의 요구에 의해 다니는 것치고는 너무나 비싼 개인적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있는 대학생들. 대학이 그들에게 '배운 것'보다 배우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의 뿌듯함을 일깨워주기를 바란다.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눈을 들어 앞으로 나아갈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우주의 이해'에서도, '글쓰기의 이해'에서도, '시민교육'이나'전자기학', '천체물리학 개론'에서도 가르쳐주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꼭 다녀야만 한다면, 대학 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넘치게 바란다.

 

- 살다 보면 본인의 삶에서 강의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이 생기니까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죠. 강의에 빠지는 대신 중요하고 알찬 시간을 보냈다면, 그게 학생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 '중요하고 알찬 시간'이란 전공 분야 행사일 수도 있고, 연애일 수도 있고, 신나는 취미생활일 수도 있고, 돈벌이나 가족 문제, 또는 그저 좌절하는 데 들어간 시간일 수도 있죠. 다 중요한 시간이고 인생에 꼭 필요한 경험이에요. 본인의 삶에 있어 이 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하고 있었으니까, 결석이 많다고 해서 죄송할 건 없어요. 출결 상황을 기록하는 게 내 직업의 일부라서 확인하는 것뿐이고,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아요. 시험도 마찬가지예요. 세세한 지식이야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오는 시대잖아요. 다만 문화센터도 아니고 대학이니까, 평가하고 성적을 내야 하니 과제도 내고 시험도 보는 것이지, 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내가 불쾌해하는 것도 아니고, 점수가 낮은 학생들을 한심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 방학 잘 보내고 있나요?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다시 연락 줘서 고마워요. 유학 가서도 천문학 강의를 신청한 게 반갑고 고맙긴 했지만, AST 101이나 AST 301 같은 기초강의가 아니라 AST 309라는 중간 단계의 수업이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까 봐 내심 걱정했어요. 그런데 잘 적응했다니, 성적마저 잘 받았다니 정말 자랑스럽네요! 새로운 나라와 그곳의 대학 시스템, 외국인 교수진이며 전공도 아닌 천문학 과목까지 모든 게 낯설고 애로사항이 많았을 텐데, 잘 이겨내고 한 학기 훌륭하게 완주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앞으로 더 많이 남은 학교생활도 지금처럼 현명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즐기면서 잘해나가길 바랄게요. 나도 대학, 대학원에서 한 과목 한 과목 새로 배울 때마다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 좀 더 할걸, 대학 1학년 때 기초과목 공부 좀 더 할걸. 학부생 때 연습문제 좀 꼼꼼하게 풀어볼걸... 그러나 기초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볼 기회는 쉬이 오지 않고, 그럴 시간도 만들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대신 깨달은 건 있었어요. 연습이 부족해서 생긴 빈틈은 그 원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것으로 메꿀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구구단은 달달 외워도 인도 학생처럼 19단까지 외우진 못하지만, 곱하기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으니 계산해보면 19 곱하기 19까지 써 내려갈 수 있듯이요. 괴로울 때는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고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게 되지만, 그땐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삶의 다른 면을 돌보고 있었잖아요. 어쩌면 K 씨에게 AST 309는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을 거예요. 이제 301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쉬운 과목이 됐겠네요. 

 

- 어떤 사람들은 이소연을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선발된 우주인이 갑자기 교체된 것도 당황스러운 데다가, 여성 우주인이 앞으로 나서게 되는 것을 고까워하는 시선이 더해졌다. 여성 우주인이 남성 우주인 옆에 후보로 있다가 역사적인 발사의 순간에 손뼉 치며 환호해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고산이 이소연으로 교체된 사건은, 남자의 자리를 여자가 대신한다는 충격으로 퍼져나갔다. 이소연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생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우주정거장에서의 실험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전문가라는 점은 쉽게 무시되었다. 많은 사람이 놓쳤지만, 우주인 프로젝트의 명목상 목적은 우주정거장에서의 과학 실험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우주 실험을 수행할 사람이 마침 학계에서 과학 하던 사람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 우주정거장에서는 지구에서보다 얼굴이 붓는다. 다리 쪽으로 피를 잡아당겨주는 중력이 없는데도 심장은 지구에서의 제 역할을 다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성 우주인의 잔뜩 부은 얼굴을 두고 외모를 비하하는 댓글이 기사마다 달렸다. 이소연은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열여덟 가지의 실험을 수행해냈고,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실험을 두고는 몇 날을 고민했다. 러시아 측에서 실험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요청할 정도로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런 일을 새내기 우주인이 완수해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목소리 높여 칭찬해주지 않았다.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 귀환 모듈의 결함으로 죽을 뻔했던 일이 한국 우주인의 영웅담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일도 없었다. 이소연이 탄 귀환 캡슐은 궤도를 이탈했고, 화염에 휩싸이는 바람에 통신조차 끊어진 채 거의 수직으로 카자흐스탄의 평원에 메다 꽂혔다. 예상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벗어난 곳에 불시착했다. 당황한 그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귀환 캡슐에서 탈출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수 시간 동안 동료와 의지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극적인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로 지겹도록 재생산되는 대신 누구도 넘겨보지 않은 책장처럼 홀로 바래갈 뿐이었다. 
  

- 수년간 손 놓았던 사람이 다시 그 급류 속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물살을 타는 일이 어디 쉬울까. 우주인 이소연이 활수 있을 후속 프로젝트가 마련될 길은 요원해 보였다. 고민 끝에 휴직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이번에는 '먹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했을 때도, 휴직 기간이 만료되고 마침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퇴사했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공립' 과학고등학교를 나와 '국립' 한국과학기술원을 졸업한 경력까지 문제가 되었다. '그 여자'를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국가 세금으로 키워준 것이 괘씸하단다. 강연료를 챙기면서 출장비까지 받았으니 구상권이라도 청구해야 한다고 한다. 정말 그래야 할까? 

 

- 규정 위반으로 우주 비행에 참여하지 못한 고산도 연구원과의 의무계약기간을 마친 뒤 미국에 갔다. 역시 우주인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별 접점이 없는 분야로 유학길을 떠났지만,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지금은 3D 프린터를 만드는 회사의 대표로 있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 사람들은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그의 도전 정신과 마침내 성취해내는 모습에 칭찬을 보낸다. 우주인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260억이니 300억이니 하는 '혈세'를 뱉어내라던가, '우주 개척의 가치와 비전을 스스로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어 제2, 제3의 우주인이 배출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는다. '국가 차원의 후속 지원이 없다는 이유로 뱀 허물 벗듯 우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벗어던졌다'는 비난은 오롯이 이소연의 차지였다.  
 
- 애는 애다. 아프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아이는 없다. 그리고 아이는 아플 때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부족하므로 양육자 중 누군가는 본인의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럴 때 아빠는 왜 애를 보러 가지 않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당연해서'일 것이다. 애가 아파도 엄마가, 등굣길 교통지도 당번도 엄마가, 학교 도서관의 서가 정리 자원봉사도 엄마가, 유치원 입학 추첨도 엄마가,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온 거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그게 가능하니까'다. 여성 직원은 "저 오늘 애 때문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많아서 이래저래 눈치도 보이고 불이익도 받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육아와 가사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여성에게는 책임이 있는 직급이나 전문직군의 자리에 애초에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 처음부터 '가끔 빠져도 직장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직급'에 배치되는 것이다. 

- 그런데 남성 직원에 대해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애가 아파서..."라며 휴가 내는 남사원을 상상해보면, 그런 말을 꺼냈을 때 받는 첫 번째 질문은 "어디가 아픈데?"가 아니라 "애 엄마는?"일 것이다. 남직원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만, 내 남편이 그 제도를 활용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쪽 직장의 분위기는 '이 회사의 역사에 길이 기록되고 싶으면 어디 신청해봐라'였다. 

- 물론 아픈 아이를 돌보는 데에 엄마가 유리한 점도 있다. 여성이 상대방의 정서에 더 잘 공감해주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남자보다 조금 더 잘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아플 때 엄마를 더 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엄마가 돌보면 더 좋은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엄마가 돌보는 게 당연한 이유'는 아니다. 부모 중 누군가가 본인의 일을 잠시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위해 달려가는 것은 양육자로서의 의무다. 아이가 아플 때 엄마가 일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건 누군가는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안 혹은 못 달려가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런 걸 누가 비난할 수 있겠나. 비난의 대상은 아픈 아이도, 달려가는 엄마도, 못 달려가는 아빠도 아니다. 갈 수 있으면서 안 달려가는 아빠가 있다면 그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런 경우엔 그게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도 비난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남의 가정 일에 비난할 자격과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 행성을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소행성대를 기준으로 태양 가까이 있는 지구형 행성들은 '이너 플래닛 inner planet', 더 바깥쪽에 있는 목성형 행성들은 '아우터 플래닛 outer planet'이라고 한다. 행성과학에서 대단히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우리말로 바꿔 부르기가 마땅치 않아서 영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내행성'과 '외행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얼핏 생각하면 앞의 표현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지구를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다.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수성과 금성이 내행성이고, 지구 밖에 있는 것이 외행성이다. 화성은 '지구형 행성'이고 '이너 플래닛'이며 '외행성'이다. 내행성과 외행성에 해당하는 영어 용어는 '인피리어 플래닛 inferior planet'과 '수피리어 플래닛 superior planet'이고, 지구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너 플래닛을 '내측 행성', 아우터 플래닛을 '외측 행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썩 마음에 드는 해결책은 아니다. 그저 최소한 다른 용어와 겹치지만 않도록 하자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아, 나의 빈약한 우리말 실력이여. 

 

- 아마도 적도 지역은 해가 많이 들어서, 고위도 지역은 해가 덜 들어서 그러리라고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양의 밝기, 색, 알갱이의 크기 등은 원래 그 흙이 어떤 성분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막에 있는 모래와 기름진 밭의 흙의 본질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토양의 변화가 오직 위도 때문이라고 말하려면 성분이 비슷한 지역끼리만 비교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연구는 달의 일부 지역들만을 분석한 것이었다. 

 

- 함께 연구하는 교수님께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달의 크레이터만 골라서 보자는 것이었다. 달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크레이터가 하나씩 생겨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크레이터 안에 있는 흙은 생성 연대와 기원이 같다. 그런데 크레이터 안쪽의 경사면은 해가 드는 방향에 따라서 조금씩 성질이 다르다. 어르신들이 한 동네라도 기왕이면 남향집에 더 좋은 점수를 주듯이, 크레이터 안쪽의 경사면도해를 더 받고 덜 받는 범위가 정해져 있다. 교수님은 해가드는 각도에 따라 토양의 노화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통계적으로 분석해보자고 했다. 크레이터라면 달의 적도부터 극지방까지 어디에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 내가 그려온 그림은 하나 더 있었다. 동그란 크레이터를 사등분해 남북벽을 살펴본 뒤 동·서벽이 남았길래 덤으로 분석을 해보았다. 달이 동서 방향으로 돌기 때문에 동벽이든 서벽이든 해가 드는 총량은 다를 리 없다. 그저 내 계산 코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동벽과 서벽의 차이를 그려보았는데, 평평한 가로선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래프가 만화에서 라디오나 무전기를 표현할 때 그리는 전파 신호처럼 휘여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남·북벽보다 더 재밌는 그래프인 건 분명해 보였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직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지만, 아무튼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그 그래프를 본 건 이 탁자에 앉아 있는 '오직 두 사람' 뿐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교수님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게 말했다. "심 박사, 사고 쳤네?"

 

- 동·서벽 그래프는 지구 자기장 때문이었다. 달은 지구를 한 달에 한 바퀴 도는데, 그중 5일 정도는 지구 자기장 영역을 통과한다. 이때 태양에서 달을 향해 날아가는 입자가 지구 자기장에 가로막혀서 달의 특정 경도 지역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수억 년 반복되면서 땅에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달 표면의 흙을 노화시키는 원인에는 태양풍 입자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어떤 입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더 강한지 하는 것이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동·서벽 분석 결과는 태양풍 입자와 지구 자기장의 상호작용만 고려한 모델로도 설명할 수 있었다. 태양풍 외의 다른 입자들의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것이 심증만 있는 상태였는데, 처음으로 물증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 보이저 1호의 마지막 관측대상이 타이탄이었던 것은 아니다. 목표했던 모든 천체를 다 방문한 뒤 정처 없는 길을 떠나면서, 보이저는 고개를 돌려 지구를 바라보았다.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태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보이저가 보기에는 지구 바로 근처에 태양이 있었다. 지구 사진을 찍으려다 자칫 잘못해서 카메라의 시야에 태양이 들어온다면 카메라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지구와 교신하는 안테나는 탐사선의 뒤쪽에 붙어 있어서, 뒤를 돌아보는 동안은 안테나가 지구 정반대 쪽을 향하므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가 없다. 지구 사진을 찍은 뒤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보이저를 영영 잃게 되는 것이다.

 

-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이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미항공우주국의 결정권자들과 보이저 담당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를 설득하기까지 7~8년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보이저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 내가 대학원생일 때, 부모님은 학기가 끝날 때마다 이제 방학이냐고 묻곤 하셨다.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방학이란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 이름일 뿐이며, 교수님이 강의에 시간을 뺏기지 않으니 오히려 더 바빠진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음 방학 무렵이면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부모님 주변에 이공계 대학원생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내가 모든 학점을 다 채우고 더 들어야 할 수업이 없는 수료생이 된 다음에도 개강과 종강, 방학과 개학 여부를 묻는 질문이 이어졌고, 나의 대답은 점차 불성실해졌다. 
 
 -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 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텨내어 두었다가 님이 오시는 날 굽이굽이 펴지 않아도' 퍽 괜찮을 것 같다. 하루가 엄청나게 기니까 일몰도 오랫동안 볼 수 있다. 게다가 수성은 태양 가까이에 있어서, 해가 지구에서보다 두세 배 크게 보인다. 거대한 태양의 아래쪽 끝이 지평선에 닿을 때부터 위쪽 끝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열여섯 시간, 지구에서는 해 지는 시간이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 

 

- 게으름뱅이는 아니지만 슬플 때면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에게 수성을 추천해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해가 하루에 두 번지는 명당이 있기 때문이다. 적도를 따라 펼쳐진 루거스 평원 Lugus Plantia, 그 한편에 라트비아의 시인 라이니스 Rajnis의 이름을 딴, 80킬로미터 크기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다. 크레이터 둘레의 언덕에 올라 일몰을 기다리면, 놀랍게도 해가 지는 듯하다가 다시 빼꼼 올라올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다니! 태양은 한동안 가던 길을 되짚어 올라오다가 다시 원래 방향으로 순행한다. 두 번째 일몰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재미있는 일은 일출 무렵에도 일어난다. 해가 동쪽에서 뜨다 말고 도로 졌다가 재차 떠오른다.   

 

- 지구는 공전 주기 1년에 비해 자전 주기 1일이 현저히 짧아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자전 주기의 몫이다. 수성은 다르다. 공전 주기 88일에 비해 자전 주기 59일이 너무 길어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은 공전과 자전의 하모니에 의해 결정된다. 수성 어디에서나 두 번의 일출과 두 번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도가 결정한다. 서경 90도 혹은 동경 90도 근처가 명당이다. 여기서 멀어지면 태양이 역행하는 시점이 점차 바뀌어서, 하루 두 차례의 역행 중 한 번만 볼 수 있다. 경도 0도나 180도에 가까워지면 해가 오던 길을 잠시 되짚는 시점이 정오에 가까워진다. 이곳의 한낮은 그야말로 뜨겁다. 

 

- 반사망원경에 푹 빠진 나머지 400여 개가 넘는 망원경을 직접 만든 윌리엄 허셜은 망원경 제작 말고도 많은 업적을 역사에 남겼다. 그는 요즘 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라 불릴만한데, 일단 삼십 대 초반까지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이자 저명한 작곡가였다. 수많은 교향곡과 협주곡을 만들었고, 연주회를 열 정도로 이름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음악 이론을 파고들던 허셜은 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더니 곧 스스로 망원경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가 되었고, 그 망원경을 이용해 밤하늘의 별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때는 별 하나처럼 보이지만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면 쌍성인 별들을 수백 개나 발견해 목록으로 만들었고, 토성 너머의 또 다른 행성, 천왕성을 발견했다. 토성까지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천왕성부터는 너무 멀어서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 특이한 점은, 전 세계 고인돌 태반이 한반도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별을 특히 사랑했거나, 돌을 조각하는 기술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고대의 무덤 벽화에서도 별자리는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어, 씨름무덤(각저총)과 춤무덤(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 수십 기의 벽과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밤하늘의 실제 별 위치가 반영되어 있다. 북두칠성, 남두육성 같은 우리 고유 별자리들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별자리 그림은 고고학과 천문학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 남한과 북한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 서양식 별자리는 밤하늘의 별을 88개의 구획으로 나누고, 해, 달, 행성이 지나는 길에 있는 별자리들을 특별히 황도 12궁이라고 부른다. 반면 우리 옛 선조들은 밤하늘을 세 구역으로 나누고 자미원紫微垣, 태미원, 천시원라고 이름 지었다. 밤하늘의 중심이 되는 북극성 근처는 자미원으로 하늘의 궁궐을 감싸는 울타리다. 자미원 너머에는 정부에 해당하는 태미원, 백성들이 주로 오가는 시장에 해당하는 천시원이 있다. 해와 달, 행성들이 지나는 길에 있는 별들은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 28 수로 묶어두었고,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북방의 현무, 남방의 주작이 각각 7수씩을 맡고 있다. 28수는 윷놀이 말판에서도 볼 수 있다. 말판을 잘 보면 한가운데 칸 주위로 28개의 칸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북극성과 28 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 한자 宿을 '별자리 수'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는 '잘 숙'자인데 동양 별자리에서 28수의 '수'자로 쓰인다. 28수는 밤하늘에서 달이 하루씩 머무는 영역을 별자리로 묶어놓은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각에 달의 위치를 관찰하면 매일 동쪽으로 옮겨가는데, 한 달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달이 하루 묵어가는 자리라서 자를 쓴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잘 숙'과 '별자리 수'가 함께 쓰임을 알 수 있다. 별자리뿐 아니라, 별의 이름도 기존의 한자를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동방칠수는 각, 항, 저, 방, 심, 미, 기의 일곱 별인데, 한자사전에서 각이나 항 자를 찾아보면 열 번째쯤 항목에 '별 각' '별 항' 같은 내용이 나온다.

(리뷰자 주 : '잘 숙'인지를 몰랐습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만 원권 지폐의 뒷면에도 우리 전통 별자리가 나온다. 세종시대의 천문 관측기기 혼천의와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의 뒷배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수많은 동그라미가 바로 한반도의 옛 밤하늘을 담은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다. 조선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석탁본, 목탁본, 필사본 등 종류도 다양하게 여럿 전해진다. 잘 나가는 집안이라면 탁본 하나씩은 갖고 있어야 폼 좀 났던 모양이다. 대개 맨 위에 이름이 크게 써 있고, 가운데에는 세밀한 천문도가, 위아래로는 설명이 빼곡 ... 

 

- 행성 탐사를 해본 적 없는 국가의 행성과학자로서 갖고 있던 그 자격지심과 부채감을 어느 날 입 밖으로 내보이고 말았다. 한국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내게 다정히 대해주고 지지해주는 미국 학자에게였다. 내 얘기에 그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와 나의 공동연구자 중에는 옛 소련에서부터 활동해왔던, 지금은 우크라이나인이 된 원로 과학자가 있다. 우주경쟁시대 초반에는 소련이 늘 미국보다 한 발 앞서 나갔는데 아폴로 우주인의 달 착륙으로 인해 상황이 역전되었을 때, 그때도 달 과학자였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나눠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사람을 달에 보내서 기뻤다고 했단다.

 

- '우리'는 미국인도, 미항공우주국 관계자도 아닌, 인류 전체였다. 이번엔 내가 조금 놀랐다. 과연 못난 자격지심이었구나.   

 

-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 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 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우리나라도 이제 달 탐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한국형 달 탐사선이 얻은 관측자료를 전 세계와 나눌 차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성과는 우리나라가 혼자서만 잘해서 얻은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 유사 이래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교육받고 서로의 연구를 공유하고 참조해가며 쌓아온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상의 전 인류에게 '우리' 관측자료를 내어놓을 그날을 기다린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무언가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름다운 무언가에 대해서는 ‘별처럼 빛난다’고 말하고, 무언가 간절히 원할 때면 별자리로 운을 점치며 ‘우주의 기운’이 함께하길 빌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천문학자에게 천문학이란, 달과 별과 우주란 어떤 의미일까. 할리우드 영화 속 과학자들의 ‘액션’은 스릴이 넘치고 미항공우주국과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일지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그런 뉴스들이 오히려 천문학을 딴 세상의 이야기로 치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속 천문학자 심채경이 보여주는 천문학의 세계는 그러한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멀다. 빛과 어둠과 우주의 비밀을 궁금해하는 천문학자도 누구나처럼 골치 아픈 현실의 숙제들을 그날그날 해결해야 한다. 다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과학적으로’ 골몰할 뿐이다. ‘지구는 돌고 시간은 흐른다’는 우주적이고도 일상적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는 그러하기에 더욱 새롭고 아름답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_「프롤로그」에서
저자
심채경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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