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나카무라 아스미코 / 최윤정
출판 : 학산문화사
출간 : 2011.02.15
저자 : 나카무라 아스미코 / 최윤정
출판 : 학산문화사
출간 : 2014.05.21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섬세한 선을 좋아한다. 일견 비례가 어긋나 보이는데도 매력적인 인체는 전매특허기도 하다.
이 작가의 진짜 강점은 화려해 보이는 그림체로 놀랄 정도로 미묘한 감정들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어딘가 어둡고 비틀린 감정부터 막 일어나는 풋풋한 설렘과 끝이 보이지 않는 담담한 절망까지.
<우츠보라>의 '미조로기 슈운'은 수많은 이들을 닮아 있다.
(일본에는 유독 정사(情死)에 얽힌 일화가 많은 느낌인데, 아무래도 다자이 오사무가 먼저 떠오른다.)
그는 작가로서의 괴로움, 예민한 사람으로서의 괴로움, 남성으로서의 괴로움을 모두 담아낸다.
심경을 정리한 뒤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는 그 한 장면 만으로도 <우츠보라>는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소장하고 있어서 기뻤다.
-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쪽(here)'과 '저쪽(there)'이다.
- 그리고 나는 늘 '이쪽'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쪽'이 없으면 '저쪽'도 없다.
'저쪽'이 없으면 '이쪽'도 없다.
- 두 개의 존재가 공존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세상의 경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 요컨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은 보는 게 살짝 다르다고. 딱 맞는 쪽이 진짜로 보는 눈인 셈이지.
양쪽 다 같은 걸 본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이거야.
- "젊은 독자라니 기쁘셨겠어요. 그렇죠? 하물며 젊은 아가씨라면 더욱."
"당연하죠."
"게다가 선생님은 보다시피 이렇게 멋지시지 않습니까. 소설도 탐미적이랄까 관능적이랄까.
이 세상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꼭 등장하잖아요. 그러니, 여성들이 접근할 만하죠. 날 모델로 삼아 주세요- 라든가."
- 먼저 말을 건 것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날 표적으로 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 "선생님에게 흥미가 있어요.
사로잡은 마음을 미치게 하는 것. 사람을 환기시키는 것. 움직이는 정열을 힘을 가진 것.
... 이미,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 꽁꽁 얼어붙어 버린지라... 그런 열기를 가진 것에, 나도 모르게 너무나 끌리거든요... "
- "'후지노 아키'와 '미키 사쿠라'는 얼마나 닮았죠? 너무나 흡사한 순간이 있진 않나요? 과거의 잔상을 보기라도 하듯..."
[... 그렇게, 겁에 질린 토끼, 같은 얼굴...]
"'그녀'가 '그녀들'이란 걸 증명하고 있는 건 선생님뿐입니다."
-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 인간의 인식이란 참 애매하더군요. 어제 본 사람의 얼굴도 잘 몰라요. 당연하겠죠. 실제로 다른 얼굴이니까.
매일, 매 시간, 매분 매초, 모든 것은 영원히 변화해 가고... 동시에, 모든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요. 바로 그 한순간이 중요한 거예요.
... 그녀도 자주, 그런 얘길 했었죠."
- "미조로기를 닮았어."
"... 네?"
"분위기가 좀 그렇다고. 특히 젊은 시절. 자네 같은 느낌이었거든. 금욕적이고 예민한, 그야말로 의식 있는 문학청년. 그렇다고 해서 논쟁의 투사는 아니고 질릴 정도로 과묵한 성격. 뭐, 어쨌든 인기 좋았지."
"그러고 보니... 같은 대학 출신이시죠.
"응, 맞아. 학부도 학과도 같지. 게다가 같은 문학 서클이었어. 그런데 들어오는 여자란 여자는, 몽땅 미조로기에게 가버리는 거야. 사실, 문예부나 기웃거리는 여자들은 취향이 비슷하잖아... 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느낌의... 미청년을 좋아하지."
- "그런데, 그 순진해 빠져 보이는 남자가 붓만 들었다 하면, 관능이니 탐미니 요염이니 하며 아주 유창하게 설을 푸는데, 하아. 이거 아주 지독한 변태구나 싶더라고."
"... 그게 저랑 비슷하다는 건가요?"
"하하. 칭찬이야, 칭찬. 한잔 어떤가."
"아니, 근무 중이라서요."
"그래선 여자에게 인기 없어."
- "아, 그래. 과연 미조로기다운 문장이더라고. 모두가 미조로기에게 원했던 문장이야."
"..."
- "... 자넨... 자네들은... 뭘 어쩌고 싶은거지...?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책을 내요. 선생님. 우리로, <우츠보라>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거예요."
- "... 농담이 지나쳤어요. 야타베 선생님."
"농담 아니야."
"농담이 아니면 뭔데요...!!"
"츠지 군, 이제 슬슬 속을 터놓고 얘기하지 그러나. 내 괜한 기우일지도,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 모두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할 수도 있고."
"... 무슨.... 얘기세요?"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 그저 난 걱정이란 말이야."
- "<우츠보라>는 누가 쓴 거지? 자넨가?"
"아닙니다."
- "난 말이네, 츠지 군. 작가라는 정신 나간 작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하고, 그걸 팔아먹고 사니 말이야. 그게... 미치광이의 헛소리인지, 천재의 글인지, 그 판단은 제3자가 하게 마련이지.
우린 그저, 제1차 산업으로써, 망상을 문장으로 번역할 뿐이야. 그저, 그뿐인데.
가끔은 그게,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단 말이지. 흐름이 느려지다 결국 막히고 말아."
- "그러면. 작가는 흔들려.
서 있을 수도 없게 되고, 머리는 늘 웽웽 울리고.
바닥도 없는 어둠의 웅덩이에 빠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 공포.
자신감은 표리일체. 한 줄기 바람에도 쉽게 뒤집어지지. 존재 의의의 위기.
어젯밤 걸작은 오늘 아침 쓰레기가 되기도 해."
"그만하세요."
- "... 자네가 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어쩌면.
<우츠보라>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게 마침 자네가 담당이 된 직후였으니까.
하지만 점점... 아닌 것 같더군. 자넨 의심하고 있었어.
아니, 오히려. 떨고 있더군."
- 내가 있어서 당신이 있다.
하지만,
내가 듣는 목소리는 내 귀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
내가 보는 당신은 내 눈을 통해 보는 당신.
거기에 내가 만든 작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닐까?
- 과연,
나와 마주 보고 있는 당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당신이라 말할 수 있을까?
- 그저 글자를 좇아,
기계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끝.'
원고는 없애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귀찮다.
- "그야 골치 아픈사건이니까. 도내에서만 연간 약 170구.
참 희한하지? 분명 존재했던 사람일 텐데 누군지 알 수가 없다니."
...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건가.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면 정말이지, 좀 그런데."
- "뭐가요?"
"아니, 남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 "보트 안 타실래요?"
- "머리가 자랐군."
"... 짧은 편이 좋으신가요?"
"글쎄, 어떨까."
"다음 원고예요."
- 자꾸 그런 상상이 듭니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다 비웃으실지 모르지만.
아무리 지우고, 또 지워도,
'후지노 아키'와 '미키 사쿠라'는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 아니야.
'후지노 아키'와 '미키 사쿠라'는 다른 인물이다.
그런데.
왜지?
그럼에도, 두 사람의 윤곽이 겹치는 순간이 있다.
어째서?
'쌍둥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 난,
난 이 육체를 경험한 적이 있다.
- "왜 그런 짓을 했지?! 남의 작품을... 멋대로..."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 당신의 등을 밀어준 거라고. 당신이 계속 꾸물거리고 있으니까. 사실은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인정을 받은 셈이잖아? 가치가 있는 거야, 그 소설은. 훔칠 만한 가치가."
"그만해! ...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 "나도 투고했었어, <우츠보라>를..."
- [만났어, 그 작가.]
- "'후지노 아키'라고 이름을 밝혔더니, 후후.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아하하. 정말 웃겼어."
"어떻게..."
"간단해. 출판사 파티에 슬쩍 숨어들었거든."
- "당당하게만 굴면 아무도 눈치 못 채."
"그게 아니라!"
"당신이 만나고 싶어 했으니까."
- "당신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어.
있잖아.
사실 궁금한 건, 따로 있지 않아?"
- "... 죄송합니다. 음... 놀라서요. 아니...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하지만 마치... 미조로기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튀어나온 분 같아서요, 당신이."
- "당시 난 편집 프로덕션에서 이쪽으로 막 이직해 온 무렵이라... 그 해 신인상 사전 검토 작업을 맡게 됐어요."
"사전 검토..."
"쉽게 말해서 1차 선발이죠. 출판사에 온 투고작을 제일 먼저 읽어 걸러내는 작업... 많을 때는 투고작이 몇 백 편이나 됩니다. 그걸 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읽게 할 순 없으니까요. 대개는 프리 작가나 외부 편집자, 또는 신참 작가에게 부탁하는데... 당신의 작품을 읽은 건 나였습니다. ... 뭐랄까.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티브랄까, 읽히는 방식이랄까... 시점을... 다루는 방법이랄까. 미숙하고 조잡한 면도 있지만, 손보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이라고."
- "그런데, 기존 작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더군요. 미조로기 슈운의 문장을 너무 닮아 있었어요. 구두점의 리듬이며, 즐겨 쓰는 묘사, 관용구, 한자 활용, 등장인물의 이름, 캐릭터 등... 이대로는 많이 부족한 미조로기 슈운이란 평가를 받겠다 싶었죠. 그래서 난... 정말로. 이건, 규정 위반이지만... 이 투고작을 일단 빼두고... 이걸 쓴 본인을 직접 만나보려고. 그러니까, 미리 선수를 쳐 점찍어 두려고. ... 죄송합니다...!"
- "츠지 씨도 참. 농담 그만하시고하시고 앉으세요. 나도 그렇게 분수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에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내 작품에 관심을 가져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제발 앉으세요."
- "... 당신은 어딘지, 선생님과 비슷한 분위기가 있군요."
어딘가.
"그... 그런가요."
겁에 질린 듯... 겸손함과 자기 과시욕 사이에 늘, 끼어 있는 듯한.
- "상황이 바뀌었어요. 난 선생님의 유령 작가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그걸 그만두려 해요."
- "... 전화. 안 받으세요...?
... 이유가 뭘 것 같아요?
어째서 이 사실을 당신에게 얘기하는지...
선생님 곁을 떠나려 하는지.
... 저기. 사실 정말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 "... 선생님은,
츠지 씨가 한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그건 츠지 씨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 "난 이제,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 내가 내게서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오랜만이군."
"응?"
"이렇게 마주 앉아 한잔 하는 게 말이야."
- "연어와 흰오이 된장 무침입니다.
가지와 동과(冬瓜) 청어 냉찜입니다.
돗토리하면 사카이미나토의 다랑어죠.
작게 빚은 전갱이, 광어, 성게입니다.
다진 아욱과 성게를 얹은 자라 젤리입니다."
- "평소 씩씩하던 아이가 눈물을 보이니 기분이 묘하던데."
"자네... 또 이상한 소릴 했나 보군."
"그 아인 참 좋은 아이야. 아내로 맞고 싶을 만큼."
"은어 소금구이입니다. 취향에 따라 여귀 식초에 찍어 드십시오."
- "정말로 자네를 좋아하더군."
"쥐노래미와 강낭콩 튀김찜입니다.
감자와 큰실말 초절임입니다."
"... 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 우린 아직 별 볼 일 없는 작가였고, 자넨 그 집에 살고 있었지. 그날은... 그래. 코요미의 부모가 짧은 여행을 간다며, 자네에게 아이를 맡겼어."
- "그때 코요미가 말했어."
'복숭아는 어디서 온 거야?'
- "그렇게도 가슴 뜨겁게 읽던 작품의 작가가... 꼴사납게도... 슬럼프에 빠졌다 해서, 나, 남의 작품을 훔치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발표하다니...!"
'<우츠보라>는 후지노 아키보다 미조로기 슈운의 이름으로 나가는 편이 잘 팔려.'
"그런 일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인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나라면 용서 받을 거라고?! 자기 이름으로 내면 내용이야 어떻든, 어떤 졸작이든 독자는 군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듯이 읽을 거라고?!"
'팔린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거지. 그것이 바로, 작품의 행복 아니겠나?'
"헛소리하지 마!"
- "당신은 독자가 멍청이로 보입니까?! 작가로서의 자존심은 어디 간 거죠? 아니, 당신은 이미 작가도 아니야. 작가를 자처할 자격이 없어."
"알았네."
"지금 당장 공표하고, 온 세상에 사죄해야 마땅해!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의 문장에 감동한 독자 모두에게,"
"알았으니 좀..."
"난 재능이 말라버려 도작이나 하다 끝장난 작가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닥쳐!!"
- "입 다물어주길 바라는 겁니까?"
- "아. 별일이네요, 양복을 다 입으시고. 구두 안 닦아도 될까요?"
"오늘은."
- "코요미. 미안하다."
-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망설임은 없었어. 아니,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건 나 자신의 보신을 위한 주저였지. 죄의식에 기반한 망설임은 털끝만큼도 없었어. 난 그때 아마, 자네라는 독자를 저주하고 있었을 거야."
"... 놀라셨겠네요. 그 장본인이, 눈앞에 나타나서."
"... 그래. 마치 망령과 재회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
- "아름다운 망령."
- "써...! 알았어! 알았어. 쓸게... 쓴다니까...!"
"정말...?"
"정말이야. 그러니, 그만 내려와. 아키."
- "... 약속했어요. 꼭 '그녀'를 써주세요."
- '나, 이제 다 알았어.
내가...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뭔지.'
- '난 선생님을 사랑했어. 선생님의 작품을 사랑했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선생님에게 사랑받고 싶었어.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작가는 자기 작품만 사랑하거든.'
그러니...
꼭 써주세요.
선생님, 꼭.
'날' 써주세요.
-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휴대전화로 시선을 떨궈단 두 명만을 남기고 모든 통화 내역을 삭제했다.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면 이 조작 또한 금세 들통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그녀에겐 있었다.
나는 자살로 처리될 것이다. 수많은 자살자 가운데 그저 하나로.
자살...
어떤 의미에선 그럴지도 모른다. 단, 이 순간, 난 영원이 된다. 영원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난간에 올라섰다.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춤추게 했고 쉴 새 없이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 난 인생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고 있다. 온몸이 터질 듯 충만하고 새하얀 황홀경이 머릿속에서 넘쳐흐른다. 그녀는 웃었다.
- 그리고,
뛰었다.
- "... 요컨대 이 어긋남이 중요한 거야."
"무슨 뜻이죠?"
"생각해 봐. 메인 카메라가 되는 눈은 하나뿐인데, 어째서 눈은 두 개가 있는 거지? 전에 자네도 말했잖아. 하지만 말이야.
서로 어긋나는 이 두 개의 시점이야말로 입체적인 시야를 가능하게 한단 말이야. 이 사실은 꽤 은유적이지 않나?"
"그렇다면?"
"요컨대, 두 개의 시점. 자신의 시점, 그리고 또 하나의 시점. 이쪽과 저쪽. 주관과 객관.
어긋난 이 두 개를 모두 갖고 있어야 비로소..."
- "세계는 현실이 된단 말이야."
- "난 20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흔한 얘기죠. 일에 치여 사느라 가정에 소홀했거든요. 아이의 친권은 당연히 아내에게 갔고, 난 그저 양육비만 계좌이체하는 신세. 그게 작년에 드디어 끝났습니다. 아아. 이제 겨우 어깨의 짐을 내렸다, 홀가분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문득, 내가, 뿌리도 없이 떠다니는 부초가 된 것 같더군요. 아무 얽매임도 없이, 아무 연결고리도 없이, 그저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다니는."
- "당신과 연결된 사람이 있어요. 그 인연이 당신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걸 당신은,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 "형사님. 난 이미, 한 번 죽었어요. 형사님 논리에 따르자면. 알겠어요?
인간은 말이죠. 그래요...
원하지도 않았는데, 않았는데,라고 말하면 뭐 하지만.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결국, 어쩔 수 없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저 반죽된 점토처럼, 누구도 아닌, 무엇도 아닌 채, 어쩔 수 없이 태어나 무언가가 되어 죽어가는 거예요.
난 그걸 수행했을 뿐이에요. 아주 고도로 아주 순수하게."
- "한 번은 실패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둥실둥실 둥실둥실. 부초 같은 기분도 맛봤어요. 그런데 그녀가 내게 열기를 줬어요. 그녀 덕분이에요.
완벽해요."
- "다 썼어."
- "수고했네.
자넨, <우츠보라>의 작자가 아니야. 그렇지?"
- 난 <우츠보라>의 작자를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야.
- "바다를 보러 가지 않겠나."
- "미조로기 슈운으로 출판해 주세요."
"아아,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물론 인세는 확실하게..."
"전 저자가 아니에요. 선생님의 등장인물이죠."
- '... 저런 독자가. 잘 붙는단 말이야. 미조로기 선생님은.
잘 '붙었다', 고 해야 하나...'
- "... 낯간지러운 소리긴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산다는 건 글을 쓴다는 거야.
살아 있기에 글을 쓰고, 글을 쓰기에 살아 있는 거야.
그건 작가가 작가이기 때문이지.
글을 쓸 수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야.
글을 쓸 수 없는 작가는 죽은 거나마찬가지야.
그러니...."
- "숙부님도 그렇다는 건가요?"
- 애초에,
삶과 저울질할 만한 뭔가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일까.
- 그저 살아 있다.
살아 있기에 산다.
- 난 그거면 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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