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일루젼 2024. 7. 1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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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전미연
출판 : 열린책들
출간 : 2020.08.30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장편을 많이 쓰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심판>을 읽어보면 그에게 작품의 길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전에 그는 '글' 또한 하나의 건축물처럼 잘 설계된 구조에 따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심판> 또한 그런 구조적 탄탄함이 잘 느껴지는 글이다.

 

<심판>은 아나톨 피숑이라는 인물이 겪는 사후 세계에 관한 희곡이다. 수술대에서 심정지가 찾아온 순간부터 최종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게 되는 순간을 본인이 지켜보는 모습은 조금 으스스하면서도 흥미롭다. 환생을 선고받은 그가 '생' 자체보다는 '아나톨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모습에는 나도 모르게 자신을 겹쳐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결말은 무척 의미심장했다) 

 

그의 재판에 참여한 수호천사이자 변호자 카롤린과 검사 역의 베르트랑이 이전 생에서 부부 관계였다는 설정도 재미있는데, 자칫 딱딱하고 엄격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자유롭게 풀어나가는 장치가 되어준다. 반면 재판장은 대천사의 이름이기도 한 '가브리엘'이지만, 인간이었던 동명이인이다. 처음에는 성별이 모호하던 재판장은 작품 후반 성별이 특정되고, 이전과는 반대되는 성별로 다시금 육화하기로 결정한다. (말씀의 육화를 상징하는 '가브리엘'이니 이 또한 의도한 바가 있을 것 같다.)       

   

<심판>은 적당히 비틀린 유머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과연 지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보다 사후 세계에 영으로서 남는 것이 '더 좋고 자격이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반전일수도 있는- 이런 결말은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열어두는 것일지도. 

 

즐겁게 읽었다.   


   

 

- 커튼 두 개가 무대를 세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왼쪽에는 책상 세 개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데, 가운데 책상이 제일 높다. 붉은색 태피스트리를 배경으로 한쪽에 심장, 다른 쪽에 깃털을 올린 저울을 손에 들고 있는 대천사의 조각상이 보인다. 무대 가운데에는 검은 배경에 흰 스크린이 있다. 앞에는 법정 가로대가, 뒤로는 다이빙대가 보인다. 무대 오른쪽에는 진짜 구름처럼 그려진 배경이 보인다. 

 
- 여자 외과 의사 : 잠깐만, 조르주 봐봐. 맥박이 느리긴 느려도 잡히긴 해.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자 외과 의사 : 아니. 난 더 이상 의욕이 없어.
여자 외과 의사 : 너무하네.

 

- 남자 의사가 나가버린다. 혼자 남은 여자 의사가 몸을 숙여 아나톨을 내려다본다.
여자 외과 의사 :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영혼은 어디 있는지 궁금하네요... 
암전.

- 카롤린 : 에이,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아니, 아니에요. 피씨, 마약은 <쿨> 하지 않아요. 장담할 수 있어요.
아나톨 : 모르핀이었는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마취 덕에 기막힌 꿈을 꿨어요. 환상적이고, 끝내주는 멋진 우주여행을 했죠. 허공에 터널 하나가 딱 떠 있는 걸로 꿈이 시작됐어요.
카롤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카롤린 : 터널 끝에 빛이 보였죠?
아나톨 : 맞아요. 환한 빛이 마치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나는 한 마리 새처럼 공간 속을 날았고, 주위에는...
카롤린 : 투명한 존재들이 있었죠?
아나톨 : 맞아요, 바로 그랬어요. 다 함께 날아가다가 우리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는 은하의 중심에 도착했어요.
카롤린 : 소용돌이가 푸른빛을 띠고 가장자리에는 별 가루가 뿌려져 있었죠?
아나톨 : 그래요. 푸른색, 그 안으로 모두 날아 들어갔죠. 그러고는 빛을 향해 나아갔어요.
카롤린 : 산이 하나 솟아 있는 하얀 들판이 나올 때까지요? 들판에 강줄기가 흐르고, 강가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죠? 
아나톨 : 맞아요, 당신이 말한 그대로예요. 어떻게 아는 거죠?
카롤린 : 당신 같은 경우가 다 그렇거든요. 특히나... 오른쪽 폐를... 절제할 때.
아나톨 : 아, 그런가요? 마취제의 부작용이에요?
카롤린 : 그렇게도 얘기할 수 있어요.

- 아나톨 : 믿기지 않겠지만 (이름을 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메릴린 먼로와 존 레넌, 지미 헨드릭스, 아인슈타인을 봤어요.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더군요. 하지만 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앞질러 나갔어요.
카롤린 : 그러다가 하얀 미로에 도착했죠, 아닌가요?
아나톨 : 정확해요. 하얗고 거대한 미로에 수없이 많은 복도와 문이 있었어요. 문이 수백 개는 됐죠. 나는 어떤 숫자가 쓰인 문 앞에서 멈췄어요. (숫자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뭐였더라.
카롤린이 서류를 똑바로 들어 보여 준다. 103-683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카롤린 : 103-683?
아나톨 : (놀라며) 맞아요, 그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카롤린 : 순전히 우연이에요.

- 베르트랑 : 안 될 것 같은데, 내 눈엔 가망 없어 보여, 당신 의뢰인.
카롤린 : 난 구할 거야.
베르트랑 : 기적이 필요하겠네. 
카롤린 : 기적은 언제든지 가능해.

- 베르트랑 : 난 멍청이들을 경멸해.
카롤린 :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멍청이야.
베르트랑 : 시대를 막론해 보편적인 멍청이들이 존재하지. 그들은 시대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대부분 무자각, 게다가 전염성까지 있어. 우리를 전염시켜 버리지.
카롤린 : 그쪽으로 전문가인가 봐. 하긴, 그런 부류들과 많이 어울렸을 테니까.
베르트랑 : 그들과 어울려도 얼마든지 옮지 않을 수 있어. 동물원 사육사라고 꼭 원숭이들과 밥그릇을 같이 쓰진 않지...
카롤린 : 억지스럽기는.
베르트랑 : 어릴 때 아버지가 나한테 이러셨어. <살아 보면 알게 될 게다, 아들아, 세상에는 멍청이가 가득하단다. 상처도 쉽게 받아 면전에서 멍청이라는 얘기도 해줄 수 없지.>

- 베르트랑 : 진실을 들려주면 못 견디는 거, 이게 바로 멍청이들의 근본 특성이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면 오죽하겠어. 진실을 알려 주면 알려 준 사람을 원망하면서, 마음에 담아두고 절대 잊지 않아. 그래서 멍청이들과 얘기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카롤린 : 에헴... 에헴...
베르트랑 : 칭찬. 멍청이들은 칭찬이라면 죽고 못살아. 이게 그들의 두 번째 특성이지. 칭찬을 듣는 순간 상대를 좋아하게 돼.
카롤린 : 피숑은 멍청이가 아니야.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이야.
베르트랑 : 멋지다고 얘기해 주면 틀림없이 금세 날 좋아하게 될걸.
 
- 아나톨 : (베르트랑에게) 당신은 왜 흰 옷을 입지 않았죠?
베르트랑 : 저는 직책이 같지 않아요.
아나톨 : 그럼 당신은 뭔데요...?
베르트랑 : 좋은 질문이군요. 저는 <초롱불>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톨 : 검은 옷을 입고?
베르트랑 : 검은색이 흰색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해주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신수가 훤하시네요, 아나톨, 얼굴에서 빛이 나요.
아나톨의 표정이 슬그머니 바뀌더니 엷은 미소를 띤다.
아나톨 : 그래요? 수술이 잘됐거든요. 나도 믿기지 않아요.

- 카롤린 :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일이죠?
가브리엘 : 공공 기관의 무능력을 절대 과소평가해선 안 돼요.
가브리엘이 카롤린에게 서류를 내민다.
카롤린 : (서류를 읽으며) 103... 783?
가브리엘 :야단 났네.

- 가브리엘 : 지난 생에 말이에요.
카롤린 : 아, 음... 프랑스 여자였어요. 1922년 알비에서 태어나 1957년 퐁로뫼에서 죽었죠.
가브리엘 :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웃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롤린 :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고유한 서정성을 부여해 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예요. 

- 베르트랑 : 지금은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죠.
가브리엘 : 내려가서 저들에게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긴 해요.
베르트랑 : 2천 년 전에 시도한 이가 있었죠. 그 결과는 우리가 봤고.
가브리엘 : 너무 때 이른 시도였는지도 모르죠.
베르트랑이 리모컨을 집더니 화면을 슬로모션으로 바꿔 놓는다.
베르트랑 : 저들을 보세요. 준비가 됐다고 보이나요? 저들은 지나치게 어리석어요.

- 가브리엘은 당혹한 기색이다. 카롤린이 주저하다가 포문을 연다.
카롤린 : 한번 확인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죠.
가브리엘이 카롤린에게 눈길을 주더니 어깨를 으쓱하면서 앞에 있는 커다란 수화기를 집어 든다.
 
- 가브리엘 : (여전히 수화기에 귀를 댄 채) 아니, 잠깐만, 지금 말고... 103-683 이 패닉 상태라서... 내가 나중에 다시 걸게. (아나톨을 향해 몸을 틀며) 들들 볶으니까 결국은 좋은 일이 생기네요, 피숑 씨. 가끔은 집요해질 필요도 있죠. 당신이 옳아요, 돌아가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다는군요. 
아나톨 : 아, 그래요?
가브리엘 : 그래요, 그렇긴 한데... 미리 알려 줄 게 있어요. 당신 뇌 일부에 몇 분 동안 혈액이 공급되지 않았어요.
아나톨 : 그래서요?
가브리엘 : 치명적인 후유증이 생길 위험이 있어요.
아나톨 : 후유증? 어떤 후유증인데요?!
가브리엘이 한숨을 내쉰다.
카롤린 : (아나톨에게 속삭인다) 재판장님의 인내심을 악용하지 마세요. 지금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만 해요.

- 가브리엘 : (다시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쥘리에트, 응, 다시 나야. 피고인이 어떤 후유증이냐고 물어봐서. (대답을 들으며) 아? ... 아! ... 아, 아! (송화구를 손으로 가리며 아나톨에게 작게 말한다) 당신은 막 오른쪽 눈의 시력을 관장하는 부위와 기억 중추의 일부를 상실했어요. 이미 애꾸에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아직 작동은 되고 있다는군요. 
아나톨 : (다급하게) 그렇다면 서둘러야죠! 당장 돌아가겠어요.
가브리엘 : 오는 건 쉬워도 가는 건 위험이 따르는데...
아나톨 : <위험>이라고요? 어떤 위험인데요?
카롤린 :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어요.
아나톨 : 갇혀요? 어디에 갇혀요?
카롤린 : 두 차원 사이에. 
 
- 가브리엘 : 떠돌이 영혼이 될 위험이 있어요.
카롤린 : 유령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더 이상 물질세계에 속하지도, 이곳에 있지도 않은 상태.
가브리엘 :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천국에 있는 것도 아니죠.
카롤린 : 일종의 심령체가 되는 거예요. 벽을 통과해 지나가고, 스코틀랜드 고성(古城)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아무것도 만질 수 없어요. 더는 걷거나 앉지도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게 돼요. 잠을 잘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없죠.
가브리엘 : 대신 영매들과 소통할 수는 있어요.
베르트랑 : 비록 그들 대부분이 당신의 메시지를 곡해하긴 하지만.
아나톨 : (결연하게) 돌아가고 싶어요. 위험을 감수하겠어요.

- 아나톨 : 내가 삶에 정이 뚝 떨어지게 만들려는 거죠?
카롤린 : 당신이 모험을 계속할 마음이 생기게 만들려는 거예요. 당신의 영혼은 젊다는 걸 기억해요. 어린아이 같죠. 그 영혼이 너무 비좁은 껍질 속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화하게 내버려 둬야 해요.
아나톨 :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나와 얘기하고 있는 당신의 정체는 뭐죠? 어쩌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가 여전히 수술 후 비몽사몽간에 있는 거죠.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가 머뭇거리다 손을 잡고 만져 본다.
카롤린 : 난 당신의 수호천사예요.
아나톨 : 아하... 알겠네요. 여긴 정신병동이군요.

- 아나톨 : (빈정대며) 그런 분이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에는 어디 있었죠?
카롤린 : 당신 평생 그랬던 것처럼 곁에 있었어요!
아나톨 : 그런데 날 위해 대체 뭘 했나요?
카롤린 : (발끈하며) 모든 걸 다 할 순 없어요.
아나톨 : 당신한테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은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카롤린 : 로또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카지노에서 돈을 따게 해달라고, 동료 경쟁자들이 추락하게 해달라고,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여자들을 꼬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죠!
아나톨 : 어쨌든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잖아요.
카롤린 : 당신이 심각한 사고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떠올려 봐요.

- 카롤린 :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기 직전에 어떤 직관이나 예지몽, 징표가 그것을 막아 준 순간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잘 떠올려 봐요.
아나톨이 입을 열려고 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생각에 잠긴다. 돌연 표정이 바뀐다.
아나톨 : 그럼 그 낙하산 사고 때...?
카롤린 : 나무가 충격을 흡수해 줬었죠? 나였어요.
  
- 아나톨이 심각한 얼굴을 한다.
아나톨 : 난 그저 행운이라고 믿었죠.
카롤린 : 행운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에 무지한 자들이 붙이는 이름이에요.
아나톨 : 오케이. 내가 좀 배은망덕했다 치죠.
카롤린 : 진심이에요, 내가 바라는 건 오직 당신의 행복뿐이고, 나는 늘 당신 편에서 행동했어요. 그러니 날 믿고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요. 날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당신 영혼의 진화를 위해서 말이에요.

- 아나톨 :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디 쉬운 가요.
카롤린 : 당신의 길을 받아들여 계속 가라는 거예요, 아나톨. 삶은 여행의 일부일 뿐이에요. 당신이 형태를 바꿀 시간이 왔어요. 어차피 다른 형태는 당신이 마모시켜 이미 상해 버렸어요...
베르트랑 : 뼛속까지.

- 아나톨 : 법정? 뭘 재판하는데요? 난 양심에 거리낌이라곤 없는 사람이에요. 항상 바르게 살아왔어요.
베르트랑 : 과연 그럴까요? 그에 대한 판단은 우리한테 맡기시죠.
가브리엘 : 그의 전생들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 베르트랑 : 당신은 교태 넘치고 색기가 철철 흐르는 팜 파탈이었어요.
아나톨 : (이죽거리며) 그게 바로 납니다.
카롤린 : (베르트랑에게) 당신 눈에는 무조건 나쁘게만 보이겠지.
베르트랑 : 아주 나쁘게.
아나톨 : 그러니까 그 문제의 잠자리 씨가 내 이번 생을 결정했다는 거예요?
베르트랑 : 지금 당신이 당신의 다음 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 가브리엘 :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한다) 그러니까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의지 50퍼센트가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아나톨 : 통 무슨 말인지.
카롤린 :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가브리엘 :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카롤린 : 하지만 당신이 자유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가브리엘 : 말하자면 자유의지 50퍼센트를 가지고 다른 요소들을 새롭게 분배할 수 있다는 거죠.

아나톨 : 그 말은, 내가 엘리자베트 루냐크였을 때 미래에 펼쳐질 삶의 시나리오를 결정해 놓았는데, 그게 바로... 아나톨 피숑의 출생이었다?

- 아나톨 : 우리 다 어렸을 땐 그런 짓을 했잖아요!
베르트랑 : 판사였던 양반이, 어떤 범죄가 널리 퍼졌다고 해서 그것의 위법성이 사라지진 않는다는 건 알고 있을 테죠.
아나톨 : 증거 있어요?
베르트랑 : 화면으로 보여 드리죠, 피숑 씨.
베르트랑이 리모컨을 찾아들고 온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을 향해 리모컨을 누른다. 두 꼬마가 싸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인다.
베르트랑 : 여기서, 우리가 다 보고 있어요. 우리는 다 알고 있어요.


- 아나톨 :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연극을 사랑하는 게 뭐 잘못이라도 되나요?
베르트랑 : (돌연 정색하며) 되죠, 당신이 그걸 직업으로 삼지 않은 게 바로 잘못이에요.
아나톨 :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배우 말이에요?
베르트랑 : 바로 그거예요. 지금부터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요. 당신의 지난 생은 그걸 당신의 이상적 여정에 포함시켜 놓았어요. 잠자리 씨도 연극을 무척 사랑했거든요.

- 베르트랑 :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아나톨 :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 아닌가요.
베르트랑 : 25퍼센트의 카르마가 있잖아요! 당신의 삶을 이상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시나리오 말이에요. 당신은 분명히 성공을 거뒀을 거예요. 밑에서는 유명 배우로, 그리고 여기서는 완성된 영혼으로. 

- 아나톨 :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베르트랑 : 여기서 우리는 모든 걸 보고 있어요, 모든 걸 알고 있죠.

- 베르트랑 :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아나톨 : 그때는 소심했거든요.
베르트랑 :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요. 두 사람은 완벽히 조화로운 커플을 이루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죠!
카롤린 : 내 의뢰인은 인간이에요. 천국에서야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으니 훈계가 쉽죠.
베르트랑 : 어떤 일이 어려워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가브리엘이 말의 의미를 곱씹고 있다. 베르트랑이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하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친다.

- 베르트랑 :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꿈을 배신했어요.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아나톨 : 하지만 나는...
베르트랑 :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손가락으로 아나톨을 가리키며)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 가브리엘이 씩 웃더니 회상에 잠기는 듯 보인다.
가브리엘 : 지상에서는 신앙심이 깊었죠. 여기서는, 그러기가 당연히 쉽지 않아요.
베르트랑 : 왜죠?
가브리엘 : 왜일까...? 마술의 비밀을 알고 나면 이전만큼 놀랍게 느껴지지 않죠.
베르트랑 : 실망스러운가요?
가브리엘 : 아니, 실망스러운 건 아닌데... 우리의 상상력이 모든 것을 대단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은 필연적으로 그만큼 강렬할 순 없어요. 그러는 당신은, 신앙이 있나요?
베르트랑 : 시시각각 변해요. 지상에 있을 때, 샹젤리제 근처에서 주차 자리를 발견하면 신을 믿게 되더군요.
가브리엘이 히쭉 웃는다.  

- 가브리엘 :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죠?
카롤린 :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 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베르트랑 : (빈정거리며) 용기보다 비겁함을,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편안함을 택한 거죠.

- 베르트랑 :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이려고 애쓰죠.
카롤린 : 그들은 거시적으로 보지 못해요. 바로 코앞의 것만 보죠. 만약 피숑 씨가 유죄라면, 한 시대와 그 시대의 풍속과 관습 전체에 함께 죄를 물어야 해요.

- 모두가 일제히 한숨을 내뱉는다.
가브리엘 :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
얼이 나가 있던 아나톨이 갑자기 폭발해 소리친다.
아나톨 : 안 돼요!

- 가브리엘이 법봉을 두드린다.
가브리엘 : 그러므로 피고인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지상의 태아로 환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법정과 전생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잃게 될 거예요.
아나톨 : 안 된다고요!
카롤린 :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정하세요,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아니에요. 몸가짐을 바로해 주세요.
가브리엘 : 내생에서는 더 잘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될 거예요.

- 아나톨 : 안 돼요! 판결을 수용할 수 없어요.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베르트랑 : 아까만 해도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나톨 : 나는 아나톨 피숑으로 남고 싶었던 거예요. 다른 누군가가 될 생각은 없어요.
베르트랑 : (달관한 듯) 사람들이 저렇게 새로운 것에 거부감을 보인다니까...
아나톨 : 나는 아나톨 피숑이에요. 죽고 싶지 않아요.
카롤린 : 누가 당신한테 죽으라고 했어요? 다시 태어나라고 하잖아요.
아나톨 :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 가브리엘 : 여기서 일하고 싶지 않을걸요. 우린 끔찍한 노동강도로 인해 과로에 시달리고 있어요. 휴식도 없고 밤도 없죠. 은퇴도 없어요. 노동조합이나, 하다못해 점심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아요. 이렇게 몇 백 년을 갈 수도 있어요. 종국에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겠죠.

아나톨 : 지상으로 돌아가는 건 다시 인간이 된다는, 결국 다시 무지해진다는 뜻이잖아요. 그동안 실수를 저질렀는데, 다음 생에서도 또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예요.
가브리엘 : 괜찮아요, 지금부터 당신의 내생을 위한 이상적인 여정을 우리가 함께 고를 거니까요.
아나톨 : 여기 남고 싶어요.
가브리엘 : 애처럼 굴지 말아요. 그리고 그게 말이에요, 누구나 가능하진 않아요. 여기 머무른다는 건 어느 정도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죠. 나는 사자들한테 잡아먹혀 순교했잖아요.
아나톨 : 나도 잡아먹혔어요... 암덩어리한테. 폐암은 뭐 장난인 줄 알아요? 그거야말로 훨씬 음흉한 적이에요. 그놈은 몸속 깊이 웅크리고 있거든요. 몇 년이나 그렇게. 한 10분 맹수한테 물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가브리엘 :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죠. 암은 고약한 흡연자였던 당신에게 필연적인 결과였어요.

- 가브리엘 : 이성을 찾아요. 피숑 씨. 그렇게 신경과민으로 굴면 태어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몰라요. 최악의 경우 탯줄에 걸려 질식할 수도 있어요.
아나톨 : 잘됐네요. 그러면 더 빨리 여기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 가브리엘 : 당신은 형을 선고받았어요. 나와 같이 여기 남아 있고 싶다면 한 번은 모범적인 삶을 살았어야 해요. 적어도 한 번은 당신의 다음 생에 영웅이 되도록 해요. 그러면 모든 게 가능해질 거예요.
그가 그녀를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 역시 강렬하지만 결이 다르다.
아나톨 : 지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면회소 같은 데가 있을까요?
가브리엘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제스처를 한다. 카롤린과 베르트랑이 돌아와 합류한다.
가브리엘 : 영매들을 통해 보든가요... 
카롤린 : 하지만 제대로 골라야 해요. 사기꾼이 많거든요.
베르트랑 : (비아냥대며) 귀가 안 좋아서 모든 걸 곡해하는 이들도 더러 있죠.
가브리엘 : (난처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시간을 때 허비했네요. 이제 절차의 마지막으로 넘어갑시다.

- 가브리엘이 서류를 꺼낸다.
가브리엘 : 시작합시다. 남자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자가 되고 싶습니까?
아나톨 : 엇? 선택할 수 있어요?

- 가브리엘 : 좋아요. 항목 1번에 남성. 다음은 국적을 선택할 차례군요. 당신은 이미 두 번의 삶을 프랑스에서 보냈네요...
아나톨 : 아, 내가 원하는 곳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이에요?
가브리엘 : 사용 가능한 부모가 있는가에 달렸어요. 담당자한테 확인해 봐야 해요.
가브리엘이 수화기를 들고 메모할 준비를 한다.

- 아나톨 : 맛있는 치즈 없인 못 살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 환생하겠어요.
베르트랑 : 저렇게 호기심이 없을까.
가브리엘 : (메모하며) 알겠습니다. 피숑 씨, 부모는 어떤 스타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나톨 : 부모도 선택할 수 있나 보죠?
카롤린 : 물론이에요.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기 전에 자기 부모를 선택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정말로 원망할 수는 없어요.

- 가브리엘 : 그럼 쉬잔으로 결정됐고, 에필로그로 넘어가죠. 미래에 다가올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나톨 : 아, 그것도 벌써 얘기해야 하나요?
카롤린 : 물론이에요. 일종의 시나리오를 써두는 거죠.
아나톨 : 그렇다면 내가 앓았던 폐암이...
카롤린 : 당신이 미리 선택해 놓았던 거예요.
아나톨 : 혹시 가능하다면 말이에요...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요.
가브리엘 : (항목을 다시 확인하며) 가능해요.
아나톨 : 순식간에 고통 없이 죽고 싶어요. 가급적이면 침대에 누운 채, 가령 자다가 말이죠. 죽음을 인식조차 못하면 더 좋겠어요.
가브리엘 : 하지만 그런 식의 죽음은 점수가 높지 않다는 걸 주지해 주길 바랍니다.
카롤린 : 확실하게 환생을 멈추고 싶으면, 영웅적인 죽음이 최상의 방법이죠. 불 속에 뛰어들어 어린아이들을 구하다 질식사하는 건 어때요? 그런 죽음은 점수가 아주 높거든요!
아나톨 : 불 속에서 질식사요? 너무 끔찍하잖아요.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카롤린 : 10여 분 숨이 막히고 고통스럽긴 하겠죠, 당연히. 하지만... 직전에 당신이 폐암으로 3년간 경험한 고통에 비하면 한 10분 콜록거리는 게 뭐 대수겠어요?
아나톨이 얼굴을 찡그린다.

-

가브리엘 : 우리가 지금 정하고 있는 건 당신의 카르마에 해당하는 25퍼센트라는 사실을 알아 둬요. 당신이 무의식의 소리에 계속 귀 기울일 때 펼쳐지게 될 인생 경로인 거죠.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징표들이 끊임없이 이 삶의 여정을 당신에게 일깨워 줄 거예요.
아나톨 : 징표들이라고 했어요?
카롤린 : 맞아요, 꿈이나 전조, 설명 불가능한 욕망, 직감 같은 것들...
가브리엘 :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다시 내려가면 자유 의지를 가지고 혼자가 될 거예요. 쉬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가게 될 수도 있어요.
베르트랑 : (빈정거리며) 만약에 말이죠, 이번에 당신이 판사가 될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지에 따라... 배우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정말 웃길 거예요!
 
- 가브리엘 : 서둘러야겠어요. 필라르스키 부인이 몇 분 후에 출산한대요. 이미 진통이 시작됐어요.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나톨의 팔을 잡아 다이빙대 쪽으로 이끈다. 그녀가 스크린을 켜자 붉은색 긴 터널처럼 생긴 게 보인다. 터널 끝부분이 팔딱거린다. 베르트랑이 다이빙대를 조절한다.
가브리엘 : 가요, 보이체크 필라르스키, 다시 태어날 시간이에요.

- 아나톨이 머뭇거리다 다이빙대에 오른다. 붉은색 터널이 빛으로 물들며 팔딱팔딱 요동치고 있다.
아나톨 : 저기... 만약에 당신들한테 연락하고 싶어지면?
카롤린 : (비밀 약속이라도 하듯) 고양이를 통해 연락해요. 고양이들은 다 우리와 조금씩 연결돼 있어요.
가브리엘 : 성공을 빌어요.

- 가브리엘 : 여기 있는 것도 이제 좀 지겹고, 세상을 따라잡을 필요도 있고요.
베르트랑 : 천국의 재판관이 지상에요? 말도 안 돼요.
가브리엘 : 나한테는 육화(肉化)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고동치는 심장, 송송히 맺히는 땀, 입 안에 고이는 침, 자라나는 머리카락...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을 나눌 때의 기쁨. 뛸 때 두 다리에 팽팽히 힘이 들어가는 느낌, 선들선들하는 바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 태양, 젊음, 심지어 노화마저도 느껴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자동차 핸들의 감촉, 주식 거래의 긴장감, 말 등에 올라 달리는 기분... 

 

- 카롤린 : 그럼 아나톨은 어떻게 되는 거죠?

 


- 다시 전화가 울린다.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수화기를 든다.
 


 
옮긴이의 말



<심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이다. 첫 희곡 <인간>은 통상적인 희곡의 형식을 따르지 않아 소설로도 희곡으로도 읽혔다. 하지만 작가가 연극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을 2인극 형태의 <인간>은 프랑스에서 즉시 무대에 올려졌고, 2010년 국내 초연을 시작으로 한국 관객들과도 만났다. 2015년에 출간되었지만 국내에 뒤늦게 번역 출간되는 <심판> 역시 프랑스에서 무대에 올려졌으며, 올 가을에도 새로운 연출가에 의해 다시 한번 프랑스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심판>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판사 아나톨 피숑이 천국에 도착해 천상 법정에서 다음 여정을 위한 심판을 받는 내용이다. 재판장인 가브리엘,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인인 카롤린, 그리고 구형을 맡은 검사 베르트랑이 그의 지나온 생을 조목조목 평가해 환생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로 이 네 인물의 대화로 구성된 작품은 전작 <타나토노트>의 심판 장면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탓에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와 친근한 독자는 '이번에도 전생과 환생 이야기야?' 하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촌철살인의 대화와 베르베르식 유머는 이런 우려를 씻어 주면서 참신하고 유쾌한 독서를 선사한다. 

베르베르의 작품에서 유머는 주제와 상황의 무게로 발생하는 긴장감을 풀어 주기 위해 쓰이는 필수 장치다. <죽음>의 주인공 가브리엘은 떠돌이 영혼 신세인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손자에게 시종일관 농담을 건넨다. "좋은 책은 결국 한마디의 멋진 농담 같은 거 아니겠니"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악당 쇼브 박사는 강제로 뇌에 전기 충격을 당하고 실신했다 깨어난 주인공 르네에게 기억력에 좋은 골 요리가 포함된 병원식 메뉴를 능청맞게 설명해 준다.

베르베르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웃음은 폭소보다는 실소에 가깝다. 전형적인 언어유희와 허허실실한 농담에도 능하지만 그의 장기는 역시 타자적 시선을 통한 특유의 비틀기다. <개미>와 <고양이>의 눈에 비친 덩치 큰 포유류 인간, 떠돌이 영혼들과 천사들이 내려다보는 현생의 육신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 헛웃음이 나온다.

 

- 전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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