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반시연] 습도 8페이지

일루젼 2025. 5. 16.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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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반시연
출판 : 영상출판미디어(영상노트)
출간 : 2014.09.30


       

 

쌓아둔 책들을 정리할 때 <무저갱>이 굴러다니는 걸 봤다. 

책을 마구 사들일 때 들여온 장르소설류겠지 싶어 읽지 않고 정리하려 했더니, 묘하게 한 번은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소장한 '반시연' 작가의 책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사가>와 <습도 8페이지>도 발견하게 되었고-  <습도 8페이지>부터 읽게 되었다.

 

당시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작가의 책들을 모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현재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읽지 않고 처분한 책들 중에서도 이런 보석이 있었을 것 같다는 옅은 후회도 느낀다-

 

내가 읽은 판본은 일반적으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판본과는 표지가 조금 다른데,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습도 8페이지>는 단편집이면서 동시에 장편 소설이다. 작가 본인이 녹아든 듯한 중심화자 '견지'와 수수께끼의 여인 '노이'를 통해 흘러가는 메인 스토리는 '100일간의 집필'이다. 이 계약의 룰에 따라 견지는 매일 8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써야 하는데, 저자의 단편들은 작중 견지가 쓴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소설 속의 소설의 형태를 빌린 단편집인 셈이다.

 

전체 소설을 위한 장치로서 한 두편의 '작중작'을 활용하는 경우는 몇 차례 읽어보았지만, 아예 단편집을 공개하기 위해 메인 스토리를 짜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런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고 몰입감 있는 스토리라는 사실에 더더욱 놀랐다. 

 

충격은 끝나지 않는다. 한창 기괴할 정도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편들을 읽다가,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는데도 모두 대체로 어딘가 비틀린 구석이 있는- '실화를 썼다'는 에필로그의 문장을 보게 되면 흠칫 놀라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메인 스토리의 주인공 '견지'는 확실히 작가와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 인물이다. 프로필도, 블로그에 작별인사를 남긴 점도, '돌아왔습니다'를 올린 점도. <습도 8페이지>에 실린 단편들도 이전부터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을 테니 '견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작가 본인이기도 하다. 각각의 단편 속의 '나'들에게도 작가의 파편은 공통적이고 직관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일관성이 견지의 주장에 묘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진짜인가...?

어쩐지 이 저자라면 '소설가 게임'도 했을 것만 같고, 권투도 해봤고 마트 수산물 코너에서도 일해봤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면 조금은 가볍게 읽었던 단편들이 훨씬 짙어진 색채로 다시 떠오른다. 

 

강렬하고, 놀랍고, 또 강렬하다.

어두운 이야기를 잘 쓴다는 평이 이래서 나온 거였구나. 

어떤 이야기들을 더 썼을까. 반시연 작가의 책을 더 읽고 싶다.

 

등등의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책장을 다시 들춰읽게 되는 것이다. 

 

이사를 거치며 <사가>와 <무저갱>은 자취를 감추었다. 책장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므로 -정 아쉬우면 도서관 대출이나 재구매라는 방법도 있으므로- 확실한 여름의 느낌이 찾아들 때 반시연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려 한다.

어쩐지 여름에 잘 어울릴 것만 같아서. 

그 끈적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열기와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습도 속에서, 약간의 광기와 짜증이 뒤섞인 상태로 읽어보고 싶다.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다.   

    


   

 

- 괴팍한 소설가들이 하는 게임이 있다.
두 명 이상이 참여하여, 누군가가 소재를 던져주면 그걸로 소설을 써내는 것이다. 30분에서 60분 사이의 제한시간이 있으며 상대적으로 퀄리티가 떨어지는 소설을 쓴 사람은 지게 된다. 미완성은 무조건 패배다. 장르는 자유. 분량도 자유. 심사는 그 자리에 모인, 소설을 읽은 모든 이가 한다. 따라서 편파적인 판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 이 게임은 불공평하다.
발상이 뛰어난 사람에게 유리한 룰이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제법 많은 소설가들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게임에 뛰어들었다. 때로는 도발에 걸리거나 등 떠밀려 마지못해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표면은 친목을 다지는 것이지만 창작자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게 다들 그렇듯, 패배한 이에게는 은근한 모욕과 멸시 어린 시선이 뒤따랐다. 
애초에 소설가들의 대다수는 뱃속이 뒤틀린 족속들이고, 이 게임을 하는 소설가들은 죄다 뱃속이 뒤틀리다 못해 걸레 같은 내장을 가진 놈들이었기에, 참가자들은 자연스레 많든 적든 적을 가지고 있었다. 적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패배를 기다렸다. 때문에 게임에서 진 소설가는 항상 뜻밖의 큰 규모로 자존심을 파괴당했다. 슬럼프가 오는 일은 예사, 한동안 바닥에서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절필을 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 이겨도 별 이득은 없다.
충족된 시커먼 욕구와 자기만족뿐이다.
확실히 정신 나간 게임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런 짓을 할까.

- 내가 마지막으로 그 게임을 이겼을 때, 나에게 패배한 상대는 한동안 키보드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반칙'이라며, 이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냈다고, 모든 게 처음부터 '속임수' 였다며 발악을 했다.

- 속임수라니.
시작하기 전에 밝혀두고 싶다.
나는 올해로 글을 쓴 지 11년째에 접어든 소설가다. 스물한 살 크리스마스에 소설을 쓰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나이가 서른둘이니 스물한 살의 마지막 일주일가량은 계산에 넣지 않은 셈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사기를 당했고, 그보다 많이 사기를 쳤고, 여러 가지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한 끝에 현재는 부족하나마 글을 써서 굶어 죽지 않는 형편은 된다. 살아오며 겪은 것과 치른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결과라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일 중 가장 신기한 체험을 담고 있다.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글쓰기를 시작할 때 썼듯이 실화다. 정말로 벌어졌던 일이고, '이걸 소설로 써도 되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일인 데다가... 이제 그 미친놈들로 이루어진 '조직'은 없어졌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스물아홉 살 때의, 죽도록 무덥던 7월부터 선선한 저녁이 오기 시작한 9월까지의 일을 담고 있다. 
 
- 그때 나는 강물을 보고 있었다.


- 강물을 보기 전에는, 다리 구석에 앉아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을 뒤적였다. 분명 기억하기로... 고등학생 때도 같은 자리에 앉아 '불안한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데, 스물아홉이 되고서도 여전히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 사실 고등학생 때보다 더 심각했다.
평소 연락도 안 되던, 망나니 같은 아버지가 빚을 떠넘기고 간 탓에 갚아야 할 돈이 5천만 원이었다. 방 같지도 않은 단칸방에서 매달 겨우 월세를 메꾸는 나에게는 끔찍한 액수였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여동생이 병으로 입원했는데, 무시무시한 병원비가 청구되었고 친구는 다리를 쓰지 못했으며 친구의 일가 중에 그걸 내준다고 나서는 넉넉한 인간은 한 놈도 없었다. 

 

- '어떻게든 되겠지. 신경 쓰라고 한 말 아냐.'라고 억지로 웃는 친구를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내가 내줄게.'라고 생각 없이 호기롭게 말한 뒤 끝내 내주지 못한 채 자멸하는 것과 '그래, 어떻게든 될 거야.'라고 말하고서 친구의 지옥에서 발을 빼는 것 중, 어떤 게 더 덜 비참할 것인지를. 
그나마 다행인 건 어릴 때부터 20년 넘게 봐온 친구의 여동생에게 아무런 이성적인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여동생에게 털끝만큼이라도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순간적으로 엄습한 충동을 이기지 못한 채 좋지 않은 짓을 저질렀을 터였다. 예를 들면 강물에 뛰어들어 폐를 끼치거나, 빌린 차에 테이프를 발라 연기를 안으로 쑤셔 넣거나, 연탄 같은 물건을 원래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행위들 말이다. 그런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다행히도 알고 있었다. 

-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인생이 '견디는 것'이 되어버렸을까.
'살아가는' 게 아니라.

-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무렇게나 발길 가는대로 걷다가 다리에 도착했다. 담배를 사는 것마저 어쩐지 죄스러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산 디스를 꺼내 물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이 담배 피우는 것 말고 없는 것처럼 줄담배를 피워댔다.
망할 욕을 했다. 멍청한 자식. 병원비가 얼마라고, 2천? 일단 내야 했기에 빌려서 냈는데, 빌리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렸다고. 두 달이나 세 달 뒤면 갚아야 할 돈이 두 배로 뛸 터였다. 답이 없는 새끼. 달리기도 못하는 놈이. 도망도 못 치는 주제에.
"하긴 도망친다고 해서."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뭔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 슬럼프였다.
'전업 작가'라는 건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일을 한다는 것, 인세가 없으면 수입도 없다.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무직과 마찬가지다.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때로 돈으로 대표되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는 인간의 근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나는 벌써 몇 달째 한 줄의 문장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텅 빈 원고지의 여백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억지로 두피를 쥐어짜는 형편이었다. 머그컵 가득 채운 블랙 커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 가고, 담배를 피우고, 연기 뿌연 방 안에서 소득 없는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곧 좋은 문장이 떠오르겠지, 첫 문장만 나오면 나조차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올 거야. 

- 결국 방에서 나왔다.
'도망쳤다'는 게 옳은 표현일 터였다.
침대도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방, 책상과 재떨이와 노트북이 전부인, 마치 '집필을 강요하는 듯'한 방에서 살았다. 그곳의 공기를 마실 자신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시넝쿨 같은 것이 전신을 갉아대는 기분이었다. 결국 블로그에 보잘것없는 작별인사를 남긴 채 원고지를 내렸다. '누구도 내 소설을 기다리지 않는 기분'을 더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체 이게 뭐지. 
죽고 싶다. 우울하게 혼잣말을 흘렸다. 그때, 음주운전을 하는 건지 위태롭게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인도를 덮쳤다. 가까스로 피해내자 가드레일을 긁고서 다시 차도로 질주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뒤 욕지기를 지껄였다. '죽고 싶다'고 해서 '죽어도 좋다'는 건 아니야. 머리를 사납게 쓸어 올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다리 난간 위로 올라가는 여자를 목격했다.

- 늘씬한 체형과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달빛에 은은한 색을 머금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돌과 부딪쳐 세차고 날카로운 소음을 뿌렸다. 뭐 하는 짓이야, 즉시 소리를 치면서 달려 나갔다. 팔을 붙잡고 끌어내리자 기운 없는 몸뚱이가 가슴팍을 덮쳤다. 희미한 재스민 샴푸 냄새 사이로, 여자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찾아야 하는데..."
반쯤 넋이 나간 채였다.
흐릿한 동공이 허공을 보고 있었다.
“찾아야 하는데, 찾지 못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못 찾으면 죽어야 해. 어쩔 수 없어."
오싹한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마자 숨이 막혔다. 머릿수는 셋, 시커먼 정장을 입은 체격 건장한 남자들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저 퇴로를 막은 채 서서,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길했다. 

- 갑작스러운 혼란이 온갖 생각을 머리통에 꽂아 넣었다.
폭력배? 여자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를 먼저 공격해야 하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대범하고도 현실성 없는 선택지가 휘몰아쳤다. 반면 남자들은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미동도 없었다. 탈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은 몰골이었다. 때문에 더 두려웠다. 일단은 도망을 치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어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동시에 여자가 남자들을 향해 나를 떠밀었다. 
"이 사람이에요."
굉장히 즐거운 음색이 이어졌다.
"이 사람이라면 해줄 거예요."

 

-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과 엮이면 최소 몇 시간, 최대 인생 절반까지 귀찮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난간에서 끌어내린 여자도 예외는 아니라, 갑자기 안색을 싹 바꾸어,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깊이의 늪을 나의 발 주변에 끌어놓았다.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일단 너무도 피곤했고, 현재 짊어지고 있는 무게만으로도 어깨가 무너질 지경이었다. 타인의 사정을 들어줄 만큼 귓구멍이 넓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자리를 떠나기에는, 뭔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 찝찝하게 발목을 묶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떤 상황입니까?"
질문하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분들은 제 경호원이에요."
"경호원?"
"아버지가 붙여주셨어요. 제 신변을 보호하고 치한이나 강도가 접근하는 걸 막아줘요. 제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익사하기 전에 건져 올리는 일도 하고요. 예전에는 제가 손목을 그으면 빠르게 응급처치를 하고 의사를 들여보내는 일을 했어요." 

"..."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성이 강하게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관여하면 안 돼. 경고했다.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이든, 뱉는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간에 절대 관여하면 안 돼.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되는 영역에 실수로 들어갔을 때의, 특유의 오한과 공포가 돋아났다. 나는 다리를 빠져나가려 즉각 몸을 돌렸다. 그 순간,

"1억."
여자가 입을 열었다.
"1억을 벌게 해드릴게요."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태연하게 굴었다. 동시에 남자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아타셰케이스를 열어보였다. 가로등 조명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화려하게 빛났다. 돈, 현금, 구세주. 나는 떠나려던 자세 그대로 정지하여 눈길을 떼지 못했다. 

- 여자가 도도하게 콧대를 높였다.
"돈이에요.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돈."

"..."
"서서 이야기하는 건 싫어요. 서로에 대해 알아갈 거라면, 어디든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마침 저쪽에 바도 있으니 말이에요. 아까 들은 일기예보에서 곧 비가 내릴 거라 했어요. 여기서 흠뻑 젖는 것보다는 위스키를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노이가 한순간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할 정도로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원래의 매혹적이고 위험한 분위기로 돌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를 위해 견지 씨가 할 일을 만들었어요."
"제가 할 일."
"정확히는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간단해요. 쉬워요. 견지 씨에게 익숙한 일이에요. 소설을 쓰도록 하세요. 하루에 100만 원을 드리겠어요. 기간은 100일. 1억을 버는 거죠. 안 팔리는 작가에게는 괜찮은 일거리 아닌가요?" 
"... 하루에 100만 원."
노이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가지던 참이었다. 눈앞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여자가 과연 어떤 종류의 생물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살 시도와 경호원, 괴이하게 변이한 태도, 음침한 혼잣말, 빗나간 인간들에게서 의외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미모, 노이는 턱이 자연스럽게 갸름했고 눈매가 고혹적이었다. 가만히 뭔가를 응시하고 있어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다소 사나운 듯한 인상 가운데에서 진하게 붉은 입술이 움직여 간혹 부드러운 음색을 자아내면... 눈빛에 꽂힌 것처럼 정지되어 둔탁한 심장 고동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로 인간인가.
강의 귀신에게 홀린 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 "돈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이 정도의 돈을 가질 수 있고 마음대로 쓸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말했듯이 조건을 클리어하면 이 돈을 주겠어요. 모조리 다. 약속할게요."
미쳤어.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짓이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돼. 지나치게 환상적이었다. 고어 영화에서나 나올 스토리였다. 그러나 호기심이 고막에 대고 속삭여댔다. 조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봐, 거기까지는 괜찮잖아. 아버지가 남긴 빚과 여동생의 병원비가 염산처럼 등골을 녹였다. 부글부글, 하고 하얀색의 거품이 상상력의 영역에서 살점을 태우고 끓어올랐다. 이성이 뇌로 순환하기도 전에 혀가 먼저 의문을 뱉었다.
"내용이 이상해요."
"어떤 점이 이상한가요?"
"너무 틀이 많아요. 제약 말이에요. 어째서 이렇게나 작위적인 겁니까? 소설을 원한다면 굳이 시간과 장소가 한정될 필요는 없잖아요. 다섯 시 삼십 분부터 여섯 시까지라니. 분량도 마찬가지예요. 8페이지? 애매하잖아."
"약한 소리 하기에는 일러요. 룰은 더 있으니까."
"더 있다고?"
잠시 노이가 침묵했다.

<신의 눈>


- 내가 그녀를 강렬히 열망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배려했다. 소중하게 여겼다.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나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할 때 보게 되는 얼굴, 편집증 환자, 사기꾼, 인간쓰레기. 나는 그녀를 망쳐버릴 것이다. 그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정말로 그렇게 해버릴 것이다. 나는 괴물이다. 미친놈이다. 그녀는 나로 인해서 울게 될 게 분명하고,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한마디의 말도,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 상상 속에서, 나는 가방을 열어 가면을 꺼낸다. 내 가방에는 다양한 종류의 가면이 있다. 일을 할 때의 가면, 거짓말을 할 때의 가면, 아이들을 상대할 때의 가면, 그리고 여러 가지. 가면들은 하나같이 경극 배우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 백색을 발랐다. 진한 화장에 그보다 진한 웃음을 짓는다. 광대다. 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 나는 그런 가면들을 상황에 따라 바꿔 쓰면서, 사람들 속에서 들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 가끔 생각한다.
가면을 벗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때로 나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반쯤 벗은 가면을 다시 뒤집어쓴다. 울음소리가 가면을 넘어 들리지 않게 주의하면서, 그림자가 비치지 않게 그늘을 골라서 사람들 속을 걷는다. 나는 만족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내 가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과 내 가면 속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 사이에 서서 눈을 감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나라는 인간이 있다. 그 정도만 알고 있는 그녀가 내가 취해야 할 거리다. 서있어야 할 자리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가 멀어지고 난 다음에야 고개를 들어 뒷모습을 좇았다.

- 어느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잠에서 깨었다.
가슴 중간 부근이 아팠다. 숨통이 막혀서 숨을 쉬려 할 때마다 미약한 호흡만이 가까스로 들어왔다. 목구멍이 메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신음소리만을 내어 보냈다. 그것은 열망, 그리움, 소유욕이었다. 지독한 자기혐오이자 경멸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몸뚱이를 부딪치며 알았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체내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 머리로 담아둘 수 없이 팽창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겨우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았다. 귀가 멍멍했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했다. 벽에 처박힐 때의 소음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컸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를 찾아야 했다. 가방 속을 뒤져봤지만 빌어먹을 가면들만 잔뜩 이었다. 내 가방에는 ... 

- ... 의 세계가 번갈아 빛을 뿜었다. 현실과 꿈이었다. 내 방의 천장과 그녀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녀의 생각이 급속도로 휘몰아쳤다. 깨져나간 가면의 조각들이 의식을 난도질했다. 현실로 돌아오며 나는 삼켰던 알약과 위스키를 왈칵 토해냈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 <낙화>


-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누가 부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들려오기 때문에 노래는 이야기가 되고, 불길한 소문이 되었다. 벚꽃이 피어나 그 붉은빛 번진 순백에 달빛이 은은하게 젖어, 마침내 연한 분홍색 부드러운 잎이 떨어질 무렵에 노래는 들린다. 곡조는 누군가를 바라고, 누군가를 부른다. 음이 쌓일 때 그리움도 쌓인다. 그래서 봄날의 달이 뜨면 꽃잎은 떨어진다.

- 후회했다. 
이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고 끊임없이 욕을 지껄이다가 주먹에서 피가 날 때까지 바닥을 내려쳤다. 현명하게 판단했어야 했다. 뇌를 머리에 장식으로 넣어둔 게 아니라면, 상황을 진득하게 보고 경우의 수를 가늠했어야 했다. 정말로 그래야 했다. 
룰.
룰을 접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애초에 사람이 견딜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커튼을 젖히지 말고 창문을 열지 말라는 것,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방 안에 전등을 켤 수 있을 때의 사정이었다. 노이가 안내한 원룸은 조명이 없었다. 온통 어두컴컴했다. 불빛이라고는 노트북 모니터에서 나오는 희미한 게 고작이었다. 오로지 그 밝음 하나에 의존하여 사물의 윤곽을 구별했다. 14인치짜리 희망이었다. 따라서 화장실에 갈 때도 노트북을 들고 가야 하는 신세였다. 
오늘로 일주일이었다.

- 나는 정상적인 성관계가 가능하다. 여자를 증오하지 않고, 동거하는 여자도 있다. 어릴 때 성적인 범죄 따위는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겪지도 않았다. 나의 부모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로, 나는 가족애를 느끼며 화기애애한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또한 이성애자다. 주식 같은 건 한 적이 없다. 정치에도 관심 없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아무 책임감 없이 쏟아지는 저능아들의 우매한 소리에 화가 났다.  
문제는 언제나 무식한 것들에서부터 발생한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저능아들 중, 자신이 저능아라는 것을 아는, 입을 닥칠 줄 아는 놈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항상 자신이 저능한 줄 모르는 저능아들이다. 놈들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식도 없고, 열의도 없으며, 지능은 낮고, 반성도 하지 않는 주제에 뻔뻔하기만 하다. 놈들은 그런 식으로 표적을 잡은 뒤 죄의식도 없이 고문을 즐긴다. 그러다가 이내 흥미가 떨어지거나 표적이 회생 불가능한 몰골까지 뭉개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다른 주제에 관해 떠들어댄다.
"다시 보여줘야겠어."
어떤 인간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똑같은 수법으로, 정말이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고 싶어서. 갑자기 그런 충동이 들어서. 단지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이것 또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나는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 <그런 이야기>


- 예전에 하나의 일화를 들었다.
제자가 아침에 스승을 찾아갔더니, 스승이 책상에 빼어난 시 한 수를 올려두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명작이었다. 제자는 감탄하며 "언제 쓰신 겁니까?" 하고 물었고, 스승은 "간밤에 갑자기 떠올라 써 내려갔다네."라고 대답했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한 번에 말입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면 충분하지. 뒷간에 다녀오겠네." 스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자는 존경하는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 시를 다시 읊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방구석의 쓰레기통에 가득 찬 '실패한 시'들의 종이를 스승은 하룻밤을 바쳐 수많은 시도 끝에 시를 완성시킨 것이다. 그제야 제자는 '아하' 하며 모른 척 앉은 자리를 바로 잡았다. 

 

- 계속해서 생각해 왔다.

시답잖은 범재의 '배려'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뛰어난 천재의 '노력'에 관한 것일까.

어느 쪽일까. 이 이야기는. 

- 나는 1983년에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예민하지 않던 시기였다. 건강에 대해 민감하게 굴지도 않았고 아동 또는 여성 보호나 기본적인 인권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동네 어디를 가도 담배 냄새가 짙었고 심지어는 극장이나 버스에서도 흡연을 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거의 집단 최면에 가까운 무지 아래 서로를 향한 몰지각한 무질서가 일종의 질서를 빚어내는 꼴이었다. 사방에서 크고 작은 폭력이 들끓었고 자고 일어나면 전깃줄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지만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정말로 그랬다. 그런 시절이었다. 
시체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전깃줄에 목을 맨 사람은 ...

- "이제 아무 문제없는 거지?"

남자는 켁켁거리며 기침만 토해냈다. 나는 남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안 가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조금 비켜주시겠습니까? 지나가려고 그래요. 네, 감사합니다. 조심하세요. 우산에 눈이 찔릴 뻔했잖아요. 이런 날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빌어먹을, 비키라고, 멍청한 새끼야. 가랑이를 찢어버릴까. 저기, 좀 비켜줄래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눈치를 보면서 빠르게 물러섰다. 나는 비닐봉투를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 언덕을 올라갔다.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집이 가까워져서 그만두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골목으로 들어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 앞에 비닐봉투를 내려놓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텔레비전을 틀까 했지만 리모컨이 멀리 있었다. 몸을 파묻고 있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물속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낡은 집안에서는 빗소리가 유난히 뚜렷하게 들렸다. 작은 거실의 정적 속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굳이 그래야 했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이 소파에 앉아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쳐들었다.
이 상황에서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내가 행한 방식들보다 더 좋고 평화로운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려 했지만 나는 어딘가로 점점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어쩌면 지금까지 해온 짓들이 가장 좋고 일반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방식은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나는 내일 그녀를 만나기로 했고, 나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불안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은 어려웠다. 그리고 흥분보다 느렸다. 바깥에는 아직 비가 내렸다. 나는 고개를 든 채 눈만 굴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물어봤지만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 도대체 당신은 뭐가 문제예요?"

 

-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낡은 집에서 묵묵히 연기를 올려 보냈다. 발 옆에는 폭력의 흔적이 굴러다니고 집 안의 벽들은 핏물로 범벅이었다. 생각하기를, 가서 고양이를 묻어줘야 하는데. 그리고 또 생각하기를, 오는 길에 날 쳐다보는 게 기분 나빠서 두들겨 팼던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 <7월>



- 땀의 수증기, 역한 구취가 뭉쳐 지독한 안개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리를 재면서 살며시 입술을 핥았다.
늦장을 부리면 놈들의 칼에 목이 떨어질 터다. 아니면 심장을 관통당하거나. 어느 쪽이든 곱지는 않을 테고 어느 쪽이든 죽은 뒤에도 편한 신세는 아니겠지. 언제인가, 놈들의 인간 같잖은 대장인 발피에르가 후퇴하며 던진 말이 떠올랐다. "내가 호모는 아니지만 너를 위해서 기꺼이 박아줄 수 있어." 뒤이어 이렇게 외쳤다. "죽이기 전에 하고, 죽인 뒤에 또 해주지." 슬프게도 놈이 과거에 한 행각들을 보면 농담이 아니었다. 하고도 남을 인종이었다. 나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적장을 보며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셋까지 센 후 단숨에 빼는 거야.
하나, 둘, 하고는 화살을 뽑아냈다. 한순간 길게 솟구쳐 오른 핏줄기가 얼굴의 반을 적셨다. 내면에서 '셋'을 준비하고 있던 순진한 이성이 욕지기를 지껄였다. 자기 자신을 속이다니, 나쁜 놈. 목에 감아두었던 버프를 풀어 상처에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았어? 주머니에서 지혈제를 꺼내 뿌리고 약초를 뿌리째로 씹었다. 개똥 같기도 하고, 개오줌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개 같은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뭐든 간에, 바닥을 짚고 일어나 대검을 어깨에 올렸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 "이제 끝내자."
적들이 일으키는 먼지를 주시했다.
"내가 끝낸다고 하면, 끝나는 거야."
사실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항상 듣기만 했었지, 여자들한테. 달려 나가며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포르니티 제인에서도, 길버트 쿠틀레이에서도, 발디니 포스터에서도 그랬다. '이렇게 끝내는 거야? 여태까지 함께 해온 것들을 생각해 봐, 네가 좋아하는 나의 면모 같은 거, 그래, 술 취해서 읊는 시나 발 냄새 같은 거, 너무 아깝잖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에게, 이런 식으로 지독하게도 구차하게 붙잡으면 법으로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끝나. 내가 끝낸다고 하면 끝나는 거야.'
"투항하지 그래!"
순간 해머가 관자놀이를 스쳤다.
적의 돌격대였다. 나는 가까스로 회피하며 대검 손잡이로 놈의 손목을 찍었다. 이어서 허리를 뒤틀어 측면에서부터 대검을 휘둘렀다. 쉬익, 하고 두터운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병사와 말을 한꺼번에 두 동강 냈다. 이어서 창을 검신으로 막은 뒤 말의 뱃가죽을 찢고, 추락하는 적의 상체를 뛰어오르며 찍었다. 죽기 좋은 날이지, 그렇지 않아?   

- 게임을 삭제했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서니, 문간에서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한 거예요. 지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 놓아둔 정장을 들어 옷걸이에 걸고 오전에 이발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울려요? 잘생겼어요?
"잘생겼지, 누구 아들인데."
"밖에 나가서는 그런 말하면 안 돼요."
"뭐 어떠니. 없는 말 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드릴 거 있어요? 바람 쐬러 나갈 건데."
그러면, 음. 어머니가 잠시 망설였다.
망설이는 목소리와... 분명 나 때문에 고생해서 생겼을, 그런 게 틀림없는 주름살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스물여덟. 대학을 졸업한 후 방에 틀어박힌 지 몇 년이었다. 왜 그러고 살았을까. 뭐가 그렇게나 두려웠을까. 창밖을 보면, 정말로 별것 없는 노을과 마을일 뿐인데.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식사 담은 쟁반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면 울고 싶었다. 문득 목 부근이 울컥, 해서 나는 재빨리 재킷을 집어 들었다. 
"심부름시키실 거 없어요? 뭐든 괜찮은데."
"그러면 삼겹살을 사다 주겠니."
"오. 삼겹살."
"내일이 면접이니까... 든든하게 속을 채워둬야지."

다녀올게요. 집 밖으로 나왔다.

- 이제 지기 시작한 노을이 아파트 사이로 주황색 빛을 흘렸다. 전신주 위에 앉은 까마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운동화끈이 풀려 묶자 하교하는 중학생들이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퇴근길의 회사원들도, 아버지들도, 가장들도 꽉 조인 운동화 끝으로 아스팔트를 콩, 찍은 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녔고 다들 싸우고 있었다. 모두가 영웅이겠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볼륨을 올렸다. 두고 온 싸움과 앞으로 할 싸움에 대해 가볍게 생각했다.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았고... 좋은 저녁이었다.

- NO1 : 따뜻하긴 하네요.

savior : 그런 게 필요하니까요.

NO1 : 온라인 게임 해본 지 오래됐어요.

NO1 : 애완동물도 키우고 그랬었는데.

savior : 온라인 게임? 어떤 거요?

savior : 그런데 시간이 없어요.

savior : 소재도 받아야 하고, 얘기도 더 하고 싶은데
savior : 타자가 느린 거예요?
 
- <애완동물>

- 그는 슬리퍼를 끌며 나갔다.
아까부터 누군가가 벨을 눌러대고 있었다. 나가기 싫어서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벨은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울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소리쳤다.
"누구세요?"
그러자 모자를 쓴 남자가 상자를 내밀었다.
"택배입니다."
"무슨 벨을 그렇게 눌러대요? 없으면 그냥 갈 일이지."

"무거워서요. 다시는 들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멋지네요."

그는 그렇게 답한 뒤 상자를 받아 들었다.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보니 새삼스레 무지막지한 크기였다. 발송인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사람 이름이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는 커터 칼을 휘둘러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마구잡이로 뜯어냈다. 

 

- "알?"
안에 든 것은 그의 몸통만큼 큰 알이었다. 동봉된 카드에는 멋스러운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이 알을 받으신 고객님께.
귀하는 저희 회사의 이벤트에 당첨되신 운 좋은 분이십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충분히 짐작합니다. 분명 귀하는 지금, 그럴듯한 이야기로 속인 뒤 나중에 돈을 요구하는 질 나쁜 업체가 접근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저희는 건실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홍보의 일환으로 이 이벤트를 계획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귀하는 갖가지 방법으로 얼마든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미 화제가 되고 있지요. 따라서 저희는 이벤트에 당첨된 귀하의 그 운에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알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드리고자 합니다. 
이 알은 애완동물이 들어있는 알입니다.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한 달 정도 뒤에 부화합니다. 어떤 애완동물이 나올지는 모릅니다. 귀하의 보살핌의 결과로 그 모습과 성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나올 수도 있고, 에어리언이나 프로덱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귀하는 죽습니다. 당연하잖아요. 에어리언과 프로덱터니까. 아마 말도 못 할 정도로 처참한 꼴을 당할 겁니다. 어쩌면 뱃살을 뚫고 에어리언이 부화하는 꼴을 봐야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가슴 크고 얼굴이 예쁜 여성이 나올 수도 있으니 그리 심려치 마십시오. 흔히 말하듯 용기 있는 자가... 아시잖습니까. 
모쪼록 저희 회사의 슈퍼 테크놀로지가 집약된 애완동물 키우기의 정점을 기쁜 마음으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알을 통해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합류하십시오. 동참하십시오. 명심하셔야 할 것은 알 키우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후에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귀하가 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드셨다면 리뷰를 남겨주십시오. 추첨을 통하여 알을 하나 더 드리는 이벤트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알이 귀하께 행운을 가져다 드리길 바라며.]


- "거창하군."
그는 카드 뒷면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자 어떤 젊은 여자가 받더니 야릇한 숨소리와 신음을 흘려대며 간간히 목소리를 내어 보냈다. 요약하자면 잘못 걸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그런데 당신, 혹시 섹스 중입니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흥분의 극에 달한 교태 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애완동물 알에서 이상형의 남자가 나왔어요!"
그는 다급히 전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자위행위를 했다.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 경우다. 여자가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생동감 넘치는 과정을 그는 함께했다. 마침내 여자가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환희의 절정을 세상에 꽂아 넣었을 때 그도 바닥에 진한 정액을 뿌려댔다. 여자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티슈로 바닥을 닦으면서, 그는 간간히 흐뭇한 시선을 알에게 보냈다. 

- 그로부터 한 달 동안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알을 보살폈다. 언제나 알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도, 포르노를 보며 자위행위를 할 때도 알을 안고 있었다. 심지어는 샤워를 할 때도 알을 안은 채로 했다. 다행히 그는 프리랜서라서 출근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알을 품은 채 머릿속으로는 어떤 여자가 나올지를 생각했다. 물론 가끔 젊은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격정의 한 페이지를 생중계로 들으며 자위행위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은 제법 친해졌다. 


- 한 달이 지나는 그날, 알에 금이 갔다.
그는 거친 숨소리를 마구 내뿜으며 그 순간을 만끽했다. 탁자 위에는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해 둔 60개들이 콘돔 다섯 박스가 탑처럼 쌓여있었다. 러브젤과 망사 속옷, 교복 그리고 갖가지 알 수 없는 음란한 기구들도 잔뜩 준비해 두었다. 남은 것은 알이 부화되며 미인이 걸어 나오는 것뿐이었다. 빠지직. 

- 알이 박살 났다.
그리고 안에서 한 명의 인간이 몸을 들었다.

- "세상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태어나서 느껴본 감정 중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이 그를 강타했다. 그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런 미친!"
알 속에서 나온 것은 남자였다.

- 그것도 그와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했다. 거시기의 휘어진 부분과 털이 난 위치, 피부 상태까지도 똑같았다. 부인할 수 없이 그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좌절하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았다. 알이 부화하기 전까지 온갖 에로틱한 상상으로 부풀어있던 거시기가 70대 노인의 그것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 "키우기 싫지?"
알에서 나온 남자가 말했다.
"원래 애완동물이란 그런 거야. 키우기 전까지만 신이 나지."

- 뭐가 어때서 그래,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이 정도는 하게 해 줘도 되잖아, 무슨 말이 많아. 나는 <애완동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블로그에 올린 뒤 다시 읽으며, '역시 나는 이런 걸 써야 해.'라고 만족스레 중얼거리기까지 한 터였다. 집필도 쉬웠다. 본성이 천박하고 저질이라 그런지 15분 만에 완성했다. 나는 반쯤 남은 소시지를 입안에 구겨 넣었다. 

- savior: 미안해요.
savior: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직였어요. 

savior :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NO1 : 당신이 변태라는 걸 이런 식으로 증명 안 해도 돼요. 

NO1 : '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savior : 내리는 눈 말입니까? 
NO1 : 아니, 사람 눈, 여자아이의 눈.

NO1 : 이런 순수한 소재라면, 당연히 순수한 소설만 나오겠죠.

- <눈알>

-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소설을 쓰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소재를 두고 구상하는 게 흥미로웠고, 자연스레 시간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쓴 소설을 곱씹다 보면 두 시간이, 앞으로 쓸 분량을 다듬다 보면 세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문득 깨닫고 난 뒤에는, 강박적으로 주문하여 먹던 음식의 수가 줄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 NO1 : 많이 안정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NO1 : 그런 이야기와 미완성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걱정했어요.

NO1 : 망가질까 봐, 게임을 끝내지 못할까 봐.
NO1 : 어때요, 괜찮아졌나요?

 

-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savior : 잘은 모르겠지만.

savior: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 절망적으로 물들어있던 내면을, <연애소설>이 새로운 색으로 이끌었고 <굿 이브닝>이 잊고 있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어서 <애완동물>이 유머감각을, <눈>이 인간성을 끄집어냈다. 돌아오기 시작한 감각이, 서서히 두 손을 감싸고 체온 사이에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마치 가을처럼.
습도 높은 방안에 누운 나는 아주 멀리에 있는 겨울을 감지했다. 그러자 숨을 쉬는 게 나아지며 한순간 등줄기에 차 있던 땀이 식었다. 방안을 메운 좌절과 괴로움이 팔을 뻗지 못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까지 쓰지 못했던 영역을 말이다. 막연한 자신감이, 작고 강력한 돌풍처럼 심장에서 돌기 시작했다. 

- 계속 마우스를 클릭했다. 뭐든지 말해요. 분량이 어떻게 되든, 무슨 소재를 꺼내든 상관없어. 무의식적으로 손을 관자놀이 옆에 대고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고 있었다. 습관, 되돌아온 버릇. '괴팍한 소설가들의 게임'을 할 때의 몸짓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곧 시간이 끝난다고. 시계가 10분을 가리킴과 동시에 노이의 새로운 댓글이 떠올랐다.

-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에서 깬 직후에는 언제나 사물의 색이 다르게 보였다. 머리맡에서 울리는 알람소리를 들으며, 의식이 자연스럽게 하루에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평소보다 어둡고 축축한 아침이었다. 이상하게 빗소리가 선연하다 했더니 창문이 열린 채였다. 밤을 보내온 흔적으로 창틀에 빗물이 고였다. 수건을 올려두고 밖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길은 단지 비의 풍경일 뿐 다른 의미는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믿을 수 없이 잔잔한, 분명히 그 냄새를 인식하고 있다가도 어느 틈에 잊어버리게 되는 연한 아침이었다. 

- <오전 8시 30분. 38세 남성. 8Km 거리. 갈 수 있나요?>
일은 보통 문자 메시지로 들어온다. 갈 수 있다,라고
답을 보내면 이어서 고객의 자세한 정보가 도착한다. 5분 내로 답을 하지 않으면 일을 맡지 않겠다는 의사로 간주된다. 나는 가겠다고 답한 뒤 셔츠를 벗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오전 6시, 늘 하던 대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늘 하던 대로 하루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템포가 적당한 재즈를 틀어두고 쉐도우 복싱을 네 세트 했다. 팔굽혀펴기 50회와 윗몸일으키기 30회도 잊지 않았다. 최근 들어 허리에 묘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나친 운동은 삼가야 한다. 샤워를 하며 두 번에 걸쳐 면도를 하고 단백질을 제거한 소프트 렌즈를 착용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후 옷장에서 정장을 꺼내니 비가 그쳐있었다. 젖은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향수를 뿌리며 내가 가진 규칙들을 점검했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짧게 깎을 것, 옷차림을 단정히 할 것, 뒷모습까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할 것. 진하게 탄 블랙커피와 밤 식빵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7시 40분이었다.

 

-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했다. 그게 직업이었다. 나는 나의 일을 좋아했다.

-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어. 모두 죽고 말 거야."
남자는 연신 주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양손을 깍지 끼고서 수시로 다리를 떨어댔다. 구두소리가 요란했다. 남자는 이미 엉망이 된 손톱을 물어뜯었다. \

"바다 근처에는 가지 말아야 해. 거기에는 감시자들이 있어."

나는 그렇습니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이야기에는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또한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일을 하며 나는 이런 부류를 수없이 만나왔다. 어렸을 때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던 사람, 정부가 자신을 조종한다고 믿는 사람, 천사와 동거하는 사람, 연쇄살인마, 도대체 언제 발발했는지 알 수 없는 제3차 세계대전에서 고아가 ...
 
- 내가 가진 차가운 규칙들로 억누르려 했다. 언젠가는 주희의 커다란 가방도 함께 담아두겠지. 하지만 막상 그녀의 가방을 보자, 살짝 삐져나온 하얀 도화지를 보자 나의 상자보다 주희의 가방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도화지를 펼쳤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결한 여백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의 '오늘'이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주희는 이야기를 했다. 그 보름간의 유대가 바로 나에게 남긴 말이었다. 혼자 죽는 것만은 싫어요,라고. 지독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도 길게 목소리를 이어온 것이었다. 나는 들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그녀가 말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분명히 들어왔다. 그것으로 우리는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안식을 얻은 셈이었다. 

- 나는 여전한 세계에 남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냄새가 나는 하늘을. 곧 비가 내리고 그 비가 그친 뒤에 나는 옷장에서 정장을 꺼낼 것이다. 템포가 적당한 재즈와, 가벼운 운동과, 샤워와, 깔끔한 면도와, 잡다한 규칙들도 함께. 손목시계가 삑 삑, 하고 전자음을 냈다. 나지막이 물었다. 연장하시겠습니까? 문득 코끝이 서늘해졌다. 계절의 냄새가 밤의 공기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거야. 나는 내리기 시작한 비를 느끼며 옷깃을 올렸다.

- NO1 : 이번 이야기 좋았어요.
NO1 :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NO1 : 좋았어요.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 <가을과 겨울 사이>를 9일간 썼다.
집필하는 내내 소설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쓸쓸하고 막연한 감각에 묻혀 방안을 거닐었다. 완성하여 마지막 문장을 쓰자 내면 어디에선가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폐일 수도 있고 위장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목젖이거나. 뭐든 간에 그러한 작용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 NO1 : 여운이 길게 갈 것 같아요.

- 이제, 어떤 소설을 읽고 싶어요? 다소 전문적인 어조였다. 조금은 거만한.
NO1 : 8월도 10일 남짓 남았네요. 

NO1 : 여름도 그 정도 남은 거예요.
거기서 댓글이 끊겼다.
시계를 18시 10분이었다. 노트북에서 물러나 간만에 기지개를 켰다. 뭉친 어깨와 목에 통증이 늘어졌다. 테이블은 먹다 남긴 음식과 포장 용기로 엉망이었고 주위는 그보다 지저분했다. 여태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광경이었다. 어이없게도 말이다. 

- 아주 약간, 움직이는 게 수월해진 것 같아 뱃살을 잡아보았다. 희미하지만 변화가 있었다. 살이 빠졌다. <가을과 겨울 사이>를 쓰는 9일간 폭식을 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배가 부르면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없기에 식사량을 조절했다.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분위기 속에 계속 존재하려면 허전한 위가 필요했어.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섰다. 무엇보다 미련하게 배를 가득 채우면 자신을 혐오하게 돼. 나는 아직까지 사방에 만연해 있는, 소설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나아지려면, 강하게 버티려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바라는 것. 여기까지 온 이상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한다.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가뿐하게 가방을 들고 이 방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구질구질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 뒤, 복귀를 알리고 다시금 소설을... 길게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그다지 나쁘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방울토마토요."
문을 두드려 요구사항을 말했다.
"지금 말고 모레 아침에 먹을 거예요.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냉동실에 넣어서 보관한 생아몬드와 해바라기씨를 주세요. 깨끗하고 차가운 생수도요. 양상추도, 물은 지금도 필요하니 넣어주세요. 가루녹차도 준비해 주시고, 앞으로 밥은 현미로만 먹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51일째였다.
절반 동안 부은 몸을 나머지 절반에 돌려놓자고 다짐했다. 식사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거르지 말고 꼬박. 그전에 내일은 단식이었다. 그간 혹사당했던 위에게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채식 위주로 식단을 짜면서 견과류를 빼놓지 말고 섭취하는 거야. 구멍으로 시커먼 팔이 들어와 물병을 놔두었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신 뒤 테이블에 두고 엎드렸다. 푸쉬 업, 힘을 가하자마자 팔꿈치에 막대한 압박이 올라왔다. 
"끈질기게."
각오를 다졌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이를 깨물고 천천히 운동을 시작했다.

- 화장실의 환풍구를 타고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트로트를 불렀고 다른 남자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알아들 수 없는 랩을 했다. 연이어 여자의 음색이 발라드를, 또 다른 여자가 도저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불렀다. 때때로 천장과 벽이 쿵, 하고 울렸다. 그리고 향기. 가까스로 세트를 끝내고 드러누워 거칠게 숨을 헐떡이자 어디선가 재스민 향기가 흘러왔다.

- 분량이 긴 소설을 쓰기로 했다.
소설이 유지되는 동안은 나도 유지될 테니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몸 관리의 고비는 다음 소설로 넘어갈 때겠지. 부정적인 생각은 피하기로 했다. 항상 문제와 연결되거나 인생이 끝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자신 있게 하세요,라는 남자의 말에 속으로 누가 긴장을 해, 누가,라고 중얼거렸던 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만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우자, 차분하고 냉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자, 그리 결정했을 때 여섯 명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아무개 씨, 거시기 씨, 마스카라 씨, 빌려 입은 양복 씨, 여드름 씨, 쓰레기 씨, 들어오세요. 내 이름은 마지막이었다. 각기 다른 색의 넥타이를 맨 여섯 명이 일렬로 서서 입장했다. 모두가 면접을 끝내고 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넥타이 만드는 놈들이었다. 
아무개 씨는 왜 지원을 했나요? 거시기 씨는 이전에 어떤 일들을 했지요? 여드름 씨는 이 회사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면접관들이 테이블을 두고 앉아 줄기차게 질문을 해댔다. 앞에는 면접자들이 순 엉터리로 써낸 서류들과 토마토 주스가 놓여있었다. 토마토라, 미칠 것 같았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나에게는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런 부분들이 나로 하여금 일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과 완전히 글러먹었다는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덕분에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나머지 다섯 명이 경직되어 떠드는 영웅담을 듣게 되었다.

- 정말이지 세상은 사기꾼들 천지였다. 빌 게이츠, 힐러리 클린턴, 스티브 잡스, 아돌프 히틀러를 능가하는 재능의 소유자들이 내 옆에 줄을 지어 앉아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전용 세종대왕 동상처럼 굳어있는 것들이 말이다.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나의 머릿속에 생텍쥐페리와 에미넴과 이상의 이름이 빙글빙글 회전했지만 역시나 나에게는 질문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입을 열 기회는 한참 뒤 공통질문에서 찾아왔다. 

 

- 항상 2등을 하는 사람과 가끔가다 1등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 누구를 고용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나를 완전히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나를 포함한 여기 앉아있는 놈들은 학비만 주면 졸업장을 주는 대학 출신들이고 입사한다고 해도 허드렛일만 죽어라 할 운명이었다. 감히 누군가를 고용하는 권한은 죽어도 오지 않을 신세였다. 사회의 톱니바퀴에 묻어있는 가소로운 기름때 같은 게 우리였다. 
재치 넘치는 대답들이 쏟아졌다. 2등을 하는 사람을 고용하겠습니다. 저는 반대로 하겠습니다. 1등을 하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마침내 나에게 질문이 왔을 때 면접관들은 지루해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저 그렇겠지, 하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 솔직히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 탓이었다. 똑같은 질문의 답을 내 앞의 다섯 명이 해대는데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뱃속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을 제어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둘 다 고용하지 않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항상 1등만 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널려있을 테니 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이 애써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후에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위트를 겸비한 임기응변은 강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면접관의 말이었다. 굉장히 인상 깊었지만, 입사 이후 이어진 사회생활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같은 일을 반복했고 오늘을 복사하여 내일이 올 자리에 붙여놓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위트를 겸비한 임기응변은 뇌와 혀 사이의 어딘가에 걸려 녹물만 분사하고 있었다. 

- 보통 직장생활을 말할 때, 일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든 거라고 말한다. 이놈은 일과 사람 양측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혹시 잔뜩 살이 오른 바퀴벌레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시커멓고 역겨운, 당장에라도 밟아 죽이고 싶지만 발을 뗀 뒤가 두려워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그런 바퀴벌레 말이다. 
이놈이 그런 놈이었다. 일단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을 조금만 하거나 얌체 같이 하는 것에 대한 적개심 어린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주구장창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제시간에 출근하는 일이 없이 늘 한 시간 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기어들어왔다. 미친놈이었다. 
게다가 히스테리가 심했다. 비참한 인생 탓인지 늘 신경질적이고 입이 더러웠다. 타인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취미였다. 정신 나간 놈이었다. 그런 주제에 불륜 상대까지 있었다. 가끔 쓸데없이 친한 척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불륜은 좋지 않은 거란다,라는 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존경할 구석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치질 걸린 항문 같은 놈이었다. 


- 사실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누구나 10대 후반에 한번 하고 20대 중반에 한 번 하는 진로 선택의 기로가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10대 후반에도 하지 않았고 20대 중반에도 하지 않았는데, 그 두 개가 지금 한꺼번에 온 것 같았다. 그만큼 무겁고 크고 아름답고 역겨웠다.

- 생텍쥐페리는 날개를 가지고 싶어 했다. 하늘이 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열둘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고 스물에 공군에 입대하여 비행기 수리를 했다. 180분의 연습시간을 가진 뒤 극적으로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스물셋에 두개골이 파열되는 사고를 겪었다. 약혼녀와도 파혼했다. 비행을 접고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후에 다시 비행기를 만질 수 있는 곳에 취직했다. 스물여섯에 야간 비행을 했고 서른다섯에 사막에 불시착하여 닷새 만에 구조되었다. 서른여덟에는 두개골이 또 파열되었다. 서른아홉에 다시 비행을 시작하여 전투조종사로 복무하였다. 마흔셋에 연령제한으로 조종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마흔넷에 5회 비행 기회를 얻어내어 8회 비행했다. 그리고 1944년, 마지막 출격 명령을 받아 비행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 나는 60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6.3퍼센트이던 198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무렵에만 잠깐 나를 좋아했으며 이후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서 나를 키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시답잖은 아버지의 몫까지 나를 보살폈다. 인간쓰레기들이 다들 그렇듯 아버지는 훌륭하지 못한 만큼 폐를 끼치는 게 많았다. 삼촌이 넣어준 직장을 일주일도 못 가 그만두고 항상 술을 마시며 뭔가를 집어던졌다. 그 당시에는 나를 좋아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진즉에 나를 잡아 던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는 나이가 되자 나는 어머니가 항상 하는 게 아버지 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심했다. 어머니가 나를 앉혀두고 한풀이를 하면, 아버지가 돌아와 밥그릇을 집어던졌다. 매일이 그랬다. 하루하루가 똑같아서 오늘을 사는 게 내일을 사는 것이었다. 1년은 단지 낮과 밤이 많은 긴 하루에 불과했다. 차츰 내면에서 무언가가 사라 ... 

 

- 삐뚤어진 인간성 위에 시야가 삐뚤어졌기 때문에 균형이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해, 틀림없이.
나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 일리가 있어, 상처도 받았지만. 또 재미나는 질문을 생각했는지 하코가 사정없이 눈을 깜빡거려 댔다. 그 큰 눈을 말이다. 
있지,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어느 쪽이야? 죽도록 먹고 배부른 채로 죽는 쪽이야, 아니면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죽는 쪽이야?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죽도록 먹어서 운명이 날 죽이기 전에 배가 터져서 죽어야지. 즉각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하긴 넌 아름다운 모습 같은 거 없으니까, 그래도 그나마 봐줄 만한 몰골로 가는 편이 여러모로 나아, 진짜로.
그러면서 하코는 요상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리로 웃어댔다. 바닷물이 출렁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가 몰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굉장히 어둡고 고요했다. 밝게 웃는데도 느낌이 그랬다.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온다면 그런 소리일 것 같았다. 
나는 다소 심오한 표정으로 하코의 입을 주시했다. 왜?라고 하코가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라서. 하코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사람이 아닌가 보네, 그럼. 

- 나는 한숨을 쉬며 바나나 우유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방금 나의 감정을 통과하고 지나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놀라고 있었다. 마치 천사의 실, 아주 투명하고 연해서 손가락을 내밀면 스며들듯 감겨올 것만 같았다. 심장에 닿았던 기분 좋은 차가움이 아직 체내에 남아 감각으로 퍼져나갔다. 
어린 시절, 소년이라고 불리던 범주의 시기에 드물게 찾아온 휴식을 맞는 기분이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낸 따뜻한 오후에 싫어하는 모든 것을 잊고 상냥한 낮잠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났다. 불안감도, 공포도, 폭력도, 눈물도 없는 나만의 작은 세계에서 깊이 쉬었던 추억이었다. 그때와 같은 공기가 병실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름이 잠시 물러나 봄이 그 자리를 채운 듯했다. 

- 나는 몽롱한 눈으로 하코를 바라보았다.
하코는 바람을 부르는 것처럼 창문 너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먼 상공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듣고 싶어. 하코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해줘. 


- 여섯 시에 일어나 눈의 따가움을 견디며 대충 세수와 양치질을 한다. 어젯밤에 벗어놓은 상태 그대로인 바지에 발을 넣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어떻게든 직장에 도착하게 된다. 마법 같은 과정이다. 
아무리 빨아도 생선 비린내가 배어 있는 삶의 흔적 진한 유니폼을 입고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이런 걸 인생이라고 할 수 있나, 같은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08시가 되기 전에 업무에 들어간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넣을 수 없는 발주의 결과를 목격하고 혼자서 수십에 이르는 생선 박스를 정리한다. 특히 연어와 고등어가 든 박스가 무거운데 그 두 가지는 매일, 많이 입점된다. 
오픈 전에 진열대를 채울 물량을 준비하면 10시, 사생활이 복잡한 상관의 사적인 히스테리를 받아내면 10시 30분, 쓰레기를 치우면 10시 40분, 담배를 피우면 10시 43분, 요즘 들어 이상하게 아픈 허리를 매만지다가 다시 칼을 잡으면 10시 45분이다. 그 뒤로는 고객 상대와 칼질의 연속이다. 쉬는 시간 같은 건 없으며 퇴근 시간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집에 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진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서서 일하며 연장근무를 하는 경우 열여섯 시간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홉 시, 씻고 파스 붙이면 열 시, 스트레스와 통증을 누르고 겨우 눈을 붙이면 열한 시, 중간에 깨면 새벽 두 시, 다시 잠들면 새벽 네시, 그다음은. 

- 결국 술 처먹고 쓰기 시작했다는 거네.
나는 손가락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아무튼 그렇게 일하면서 소설은 못 써, 난 기계가 아니라고, 글만 쓰고 살아도 글을 쓰는 건 어려워,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허리도 망가진 이상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이 상태로 계속 일할 자신도 없잖아, 머지않아 재발할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하코가 코를 찡그렸다. 애초에 왜 취직 같은 걸 한 건데? 나는 웃었다. 웃지 않고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 하코가 말했다. 아버지를 싫어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싫어, 죽어서도 싫어할 거야, 내 나름대로의 복수였어, 겪지 않은 사람은 몰라, 아버지가 인간쓰레기라는 이유로 내 미래가 결정되어 버린 기분을.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일에 화를 내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 말하지, 사람들은 꼭 내가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들, 있잖아, 한동안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있었어,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도 않고 주위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걸음걸이가 아버지와 똑같다는 거야, 어쩌라는 거야, 발이라도 자를까, 아버지도 싫어, 아버지만큼이나 사람들도 싫어, 아버지를 닮아가는 내 얼굴도 싫어, 싫은 것들뿐이었어,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치료비를 낸 거야,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증명하려고,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 안 하니까. 
하코가 전에 없이 인간미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울면 받아주려고 안아줄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기가 찼다. 하코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말투를 내려 노력했다. 일단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직장을 가지는 게 소설 쓰는 것보다 돈을 많이 벌어? 

-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그럴 때도 있고, 직장은 고정수입을 주니까, 아니, 돈 계산은 집어치워, 소설가라는 건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 속에서만 통하는 직업이야, 모르는 것들이 보기에는 그냥 백수라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부모 등골 빼다가 동네 슈퍼에 담배랑 소주 사러 나오는 백수, 그런 소리를 엄마가 듣는 게 싫었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가 나를 아버지처럼 쳐다보는 거였지, 엄마는 날 무서워해, 말도 잘 안 하고, 그래서 취직한 거야, 여러 가지 구차한 이유 때문입니다, 끝, 다른 이야기 하자.

- 그 순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하코의 진정한 존재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주 거대했다. 지금까지 나는, 하코를 대하고 있으면 그녀와 내가 맞닿은 경계의 모든 것이 작아져버리는 기분을 받아왔다. 하코에게서 감지되는 어떠한 힘이 나의 자아를 감싼 내 세계 전체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내면의 잡스러운 고민들과 두려움도 있어서, 비로소 나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할지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진즉에 내렸던 선택이었다. 이미 던졌던 주사위였다. 하지만 그리로 갈 용기가 없어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마음에게 빚을 갚았고 하코는 대답을 기다렸다. 애초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내일 병원에서 나가게 된다. 나는 웃으면서 하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생선 장사해야지, 무슨 놈의 소설이야. 

- 괜찮아요?라는 감정 없는 인사들이 적어도 80만 번은 날아왔다. 그때마다 대답해 주는 것도 고역이었다. 혀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서로 간에 아무런 인간적인 관심이 없다는 걸 서로 아는 상황에서 교환하는 다정한 미소만큼 역겨운 것도 없었다. 견딜 만해? 상관이 쓸데없이 자상한 태도로 내 등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내가 생선 박스를 정리하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했다. 
나는 여전히 여섯 시에 일어나 퇴근 시간을 넘겨서 지하철을 탔고 일주일에 한 번은 열여섯 시간을 일했다. 버스에 붙어있는 작가들의 신작 광고 밑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쉬는 날에는 바닥에 누워 창밖에 흘러가는 구름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이 부서져서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 그렇게 무너진 몰골로 앉아있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통증이 왔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수없이 시도했던 날들, 지쳐있는 머리에 피로와 정신적 고통이 파고 들어와 결국 손가락을 접어버렸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 이 일 하면서 다른 일도 하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요. 
지나가는 듯이 직장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못 해. 선배가 딱 잘라 대답했다. 일하면서 다른 거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그런 거 없어,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도 힘든데 우리는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하잖아, 3DS야, 더티, 데인저러스, 디피컬트, 스트레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선배가 말했다. 더티, 데인저러스, 디피컬트, 씨발이라고도 하지, 쉬는 날은 다른 거 하는 날이 아냐, 잠시나마엿 같은 거 잊기 위해 술 먹는 날이라고. 그 말이 정답이네. 그렇다니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당일에 처리해야 하는, 잔뜩 쌓인 생선 박스 앞에서나 웃음을 터뜨렸다. 

- 때로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선연한 구토증세가 일어났다. 인터넷에 이름을 쳐보니 오래간만의 검색결과가 나왔다. 견지 자살. 한강에서 시체 발견. 후속작은 내놓고 뒈질 일이지. 모조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술과 닭고기를 사서 잔뜩 먹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그런 식의 뱃살은 허리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런 식이 어떤 식인데요. 
끝없이 깊고 차갑고 어두운 물에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간다, 간다, 달을 넘어서 가버리자, 우주로 가자, 목성의 테두리를 따라서 날아보자. 밤하늘에 드문드문 별이 반짝거렸다. 하나, 둘, 셋, 세고 있으려니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허리디스크인데 그렇게 처먹어도 돼?
안 되지. 나는 말했다. 망할 년아. 하코가 창틀에 앉아 다리를 흔들어댔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굉장히 박진감 넘치는 움직임이었다.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하려다 복장이 뒤집혀서 관두었다. 
확실해. 하코가 나를 보며 웃었다. 지구는 여러모로 끝장이야.
나는 하코의 양심도 없는 다리를 응시했다. 끝장이지.

<8월>



- 허리와 등이 미친 듯이 아팠다. 완성된 원고를 보니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정신 나간 짓이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작업이었다. 쓰다가 잠이 들면 자면서도 머릿속에서 계속 써 내려갔다. 그 상태로 깨어나 바로 앉은 뒤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분명히 잤는데도 잤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생활이었다. 문장이 나오지 않아 벽에 머리 박기를 수십 번, 목구멍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 게 수백 번이었다. 손톱으로 가슴팍을 하도 긁어 남자다운 가슴털이 다 벗겨진 지경이었다. 
체중을 줄여도 아픈 건 똑같았다. 그런 식의 뱃살이 소멸했는데도 그런 식의 허리는 여전했다. 글이 써질 듯 말 듯할 때 허리까지 아파오기 시작하면 그때 환장하는 것이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보는 내가 괴로우니 다 죽이고 빨리 끝내버리라고 외치는 환청을 몇 번이나 들었다. 쓰는 동안 반은 미쳐있었고 반은 미친 척을 하고 있었다. 

- 퇴고를 끝낸 뒤 일어나서 냉철하면서도 절제된 동작으로 춤을 췄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켜자 화면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잡음만 가득했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깨끗하게 면도를 마쳤다. 옷장을 열어 멋있는 옷을 입고 냉장고의 맥주를 꺼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결국 맥주는 시원해질 것이 아닌가. 해방에 가까운 목 넘김을 즐기며 나는 창문을 열었다. 
 
- 선배를 작업실 내의 비품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단지 배경의 일부일 뿐이었다. 선배는 철저히 고립된 지역에서 그저 공존했다. 한 발 물러나서 상황을 보면 선배가 서있는 자리만차가운 흑백이었다. 
"고등어나 썰어요."
하루 중 열 시간 이상을 마트에서 보낸다.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해 잔뜩 주문한 생선 박스를 정리하고 오픈 물량을 준비한다. 판매대를 채우고 나면 열 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뒷정리를 하면 열 시 삼십 분, 밥 먹고 오후 물량을 정리하면 두 시, 그 뒤로는 계속 생선 손질이다. 휴식은 없다. 간간히 생선에 소금을 뿌려달라거나 비늘을 제거해 달라는 고객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퇴근 시각까지 일을 마치지 못하면 당연히 남아서 해야 한다. 고등어와 동태와 우럭과 제주도 특산 은갈치가 이 재미나는 작업에 끝까지 어울려준다. 

- 지독한 생선 비린내 속에서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미치기 마련이다. 때문에 마트의 직원들은 조그만일에도 크게 반응했다. 별것도 아닌 일을 크게 부풀려 거기에 정신을 쏟아붓지 않으면 권태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정말이었다. 재채기를 했는데 다음날 에이즈라는 소문이 도는 곳이 유통업계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여서, 아래로는 참돔 비늘을 긁으며 위로는 고객들을 주시했다. 그중 하나는 틀림없이 신나는 짓을 벌일 거라는 기대감에서였다. 

- 최근 들어 내가 환장하는 고객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중년의 부인인데, 카트가 미어터지도록 물건을 담고 하루 종일 마트를 돌아다녔다. 유통기한을 단호하게 확인하고 시식으로 맛을 검증한 다음 곳곳에 우아한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고는 계산대로 가서 갖은 트집을 다 잡은 뒤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았다. 아마도 '물건을 사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나는 도마 건너편에서 부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인생을 낭비하는 방법에 대해 의미 있는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이십 대 후반의 아가씨였다. 늘 퇴근하고 와서는 특별 행사 중인 오백 원짜리 스테이크를 샀다. 갈색으로 염색한 귀여운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서, 마치 세상에서 제일 좋은 물건이라는 듯 급히 바구니에 쑤셔 넣었다. 지금 사지 않으면 빼앗겨버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따위 고기를 사는 사람은 갈색 아가씨뿐이었다. 항상 물량이 넘쳐났다. 누가 봐도 재고가 썩어나기에 싸게 팔아치우는 고기였다. 역시나 나는 도마 건너편에서 그녀가 인생을 존중하지 않는 방법을 바라보았다. 때로 슬퍼졌는데, 그건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 슬프다.
화가 났다.
곧 있으면 '고등어 사랑 DAY'였다. 무려 보름에 걸쳐 고등어를 파격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 따위 괴이한 행사를 기획했는지, 애초에 사랑 'DAY'인데 왜 보름이나 판매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시기가 되면 고등어를 사려고 몰려든 고객들 때문에 바닥의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 선수시절에도 그런 관중은 보지 못했다. 선배와 함께 그 짓거리에 임해야 한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 주먹으로 문을 치고 나갔다. 뒤에서 선배가 다급히 소리쳤다.  
"조금 있으면 끝나는데 기다려주면...."
괜찮습니다, 하고 크게 맞받아쳤다. 분명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제안일 터였다. 마트 내에서 선배가 술 상대를 요구하는 인물은 내가 유일했다. 어이가 없었다. 터무니없이 기분 나빴다. 선배는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나를 동류라 믿었다. 같은 생물로 분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나와 선배는 '자각몽클럽'에서 얼굴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꿈속에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원하는 대로 꿈의 세계를 조작한다. 그를 자각몽이라 부른다.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각몽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자각몽 꾸는 기술을 공부하는 모임이 바로 자각몽 클럽이었다.

 

- 권투선수를 그만둔 뒤 나는 클럽에 가입했다.
꿈에서나마 왕이 되고 싶은 인간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실거렸다.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비열하고 추악한 욕망들이 암묵적인 동질감 밑에서 꿈틀거려댔다. 
그 와중에 선배는 제일 앞줄에 앉아있었다. 커다랗고 우둔한 몸집으로 몇 번이고 옆 사람에게 물어가며 눈을 깜빡였다.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도대체 꿈에서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러는지, 실수로라도 그 습도 높은 세계에 발을 들 ...  
 
- 등 뒤에서 거대한 냉동 창고가 한순간 매서운 소리를 내며 냉기를 뿜어냈다. 그걸로 체내를 달구는 지긋지긋한 열을 식힐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고등어 대가리를 쳐냈다. 내가 이토록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선배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손은 느려 터졌고 특유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를 간간히 중얼거렸다. 집에 안 갈 거예요?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뜬금없이 선배가 입을 열었다. 
“문장과 재미 중 어떤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드디어 미쳤거나, 미쳐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려는 것 같았다. 코털과 깎지 않은 수염으로 난잡한 선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불안해졌다. 삼 년 전 자각몽 클럽에서 감지했던 더러운 기분이었다. 열등감과 배설의 덩어리들 중에서도 유독 두각을 드러냈던 선배의 은밀한 영역, 실수로라도 알고 싶지 않던 그 습도 높은 세계가 내 눈앞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추려 했다. 급히 차단할 방법을 모색하려 했지만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 중년의 남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 "나 말이야. 사실 소설 쓰거든. 결혼하기 전부터 써왔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게 내 꿈이야. 그런데 아직 변변찮은 완성작 하나 없어. 일하면서 글 쓴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더라. 있잖아, 소설에는 재미가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재미만 있으면 문장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하지만 난 달라, 소설에는 문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읽고 난 후에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런 거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 문장 쪽이야, 재미 쪽이야?" 
일단 굉장한 충격이었다.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기도 했거니와, 그 말을 한 상대가 나라는 사실이 진저리 치게 끔찍했다. 내가 화가 나있다는 것과 아픈 어깨를 움직이며 퇴근도 못하고 있다는 게 선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정작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끄러미 시선을 돌렸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였다. 선배는 전에 없이 진중한 태도로 나의 시선을 받아내며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고등어, 썰어주십시오." 

- 술에 취한 노인들이 먼저 증명해 왔듯이, 비참한 현재에 서서 불가능한 꿈을 떠드는 일은 현재를 더 비참하게 실감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거기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최악이었다. 형편없었다. 뚱뚱하고 인상 험한 중년의 남자가 꿈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언급하는 모습은 심히 추했다.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숭배하는 듯했다.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 꿈에서 선배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랍니까?" 
그걸 원한 거예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냐고요. 내 꿈속에서나마 작가가 되고 싶어요? 고등어나 썰어요. 제발. 
퇴근 시각을 울리는 종이 울렸다. 땡.

- 마치 수십 년 전의 졸업앨범을 보는 분위기였다.
"자각몽이지, 그거. 난 사흘하고 그만뒀어. 꿈에서나마 이루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쩐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한심하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뒀어. 현실에서 이뤄야지. 넌 계속했나 보네." 
상대를 상실한 링에서 나는 혼자 묵묵히 어깨를 돌렸다. 고객들이 몇 명인가 와서 오징어 껍질을 벗겨달라거나 소금을 쳐달라는 식의 시시한 주문을 했다. 도마 건너편의 세상은 파도 없이 잔잔했다. 상품 광고를 실은 유치한 노래가 이따금씩 흘렀다. 누가 손짓을 하기에 나갔더니 갈색머리 아가씨였다. 
연어가 신선하냐고 묻는 그녀의 바구니에는 스테이크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떼었다. 오늘은 고기 안 드세요? 그녀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 하고 웃음 지었다. 개밥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먹은 게 아니라 강아지 먹이로 줬어요. 밥 위에 얹어주면 잘 먹더라고요. 그래도 일주일이나 줬더니 질렸는지 안 먹어서...
그때 안내방송으로 수산 코너 담당자를 찾는다는 내용이 울려 퍼졌다. 계산대에 도착하자 카트 부인이 여기요, 하고 손을 흔들었다. 회를 구입했는데 고추냉이를 얻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시식용을 챙겨드리겠습니다, 하며 가려다가 뭔가에 홀린 듯이 물어보았다. 그거, 계산하신 겁니까? 카트가 폭발할 정도로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부인이 당연하다는 투로 지갑의 단추를 닫았다. 몇 번에 걸쳐 접은 영수증이 삐져나왔다. 애들 먹여야 하니까요. 

- 뭔가 잘못됐어. 나는 의자에 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마트에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뚜껑을 따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가 거품을 올려 보냈다. 뭔가 잘못됐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엇이?

- 이미 알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싫을 뿐이었다.
인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여긴 두 사람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도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 삶을 버리고 있는 게 아니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도마 건너편에서 극히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을 보고 착각했다.
꼴좋다. 대단하십니다. 한때는 라이트 미들급 챔피언을 꿈꾸었던 양반, 어깨가 덜그럭거리자 바퀴벌레들 틈으로 숨어들었지. 꿈을 꾸지 않으려고 꿈을 꾸러 갔던 거야. 그에 비해 선배는, 하지만 선배는.
 
- 하루에 정해진 분량을 써낼수록 더위도 약해져 갔다. 습도를 8페이지씩 써내는 느낌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듯, 내 방의 숨 막히는 공기가 연해질 때마다 주위의 괴기한 현상도 빈도가 줄어들었다. 천장과 벽을 울리는 소음, 화장실 환풍구를 통해 들리는 노랫소리들.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온순하고 적었다. 
다만 변화가 없는 것은 재스민 향기였다.
운동 후 흘린 땀을 씻어낼 때도, 거울에 비친 마른 몸을 비춰볼 때도, 물기를 닦을 때도 향기는 가까이에서부터 ... 

- 장이 폐백실로 들어갈 때 나는 인사를 남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정장의 상의를 벗어 팔에 걸치고 넥타이를 풀었다. 계획대로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조금의 오류도 없이 시나리오가 흘러갔다. 나는 얼굴 전체에 걸쳐두었던 민망한 웃음을 거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다를 따라 걸으며 아직 붉게 물들어있는 귀의 색깔을 되돌렸다. 
가면을 벗었다.
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 항상 유쾌하고 쉽게 눈웃음치는 광대의 가면이었다. 열 살에 장을 만난 이후 줄곧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오면서도 장은 나를 몰랐다. 나의 가면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모래를 밟으며 걸어오던 연인이 나의 무표정을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반응이었다. 


-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광대의 가면을 썼다. 기분이 우울해졌다. 사실 늘 우울했다. 가면 아래의 '진짜' 나는 인간들과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자신이 완벽하게 알고 있기에 나는 확연한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과 나를 나누며 일종의 경계였다. 선의 너머에서만이 서로가 보호받았다. 종이 달랐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 생각과 기억의 사용법을 이해했을 무렵 나는 끝없는 지루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를 비롯한 사람들이 보이는 표정들이 나로 하여금 어떠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탓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웃는 이유와 우는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했다. 마치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물이 흘러가듯이, 내가 아닌 인간의 상태는 나의 눈을 통과하여 곧장 뇌 어딘가로 저장되었다.  
무엇도 나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했다. 어머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배가 고프면 어머니는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되었다.' 입을 다물었던 유년기의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오로지 나의 것, 나에게만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동시에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 나는 괴물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크게 다쳐 찢어진 피부 틈으로 뼈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식이어서는 모처럼 얻은 삶의 기회를 망쳐버릴 거라고 판단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에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들과 생활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나는 그들을 관찰했다. 평범한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 처음으로 만든 가면은 어머니였다. 항상 볼 수 있었기에 자료를 모으기가 쉬웠다. 나는 어머니의 웃음, 어머니의 한숨, 어머니의 억양을 복사했다. 어머니라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반응의 패턴들을 머릿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나의 내면에서 한 명의 완전한 인간으로 형성되었을 때, 어머니는 내가 착용할 수 있는 훌륭한 가면이었다. 아버지와 둘이서 방에 있던 날 말없이 어머니의 가면을 쓰자 아버지는 무심결에 부부 사이의 대화를 꺼냈다. 


- 이후 나는 아버지를 거쳐 당시 접할 수 있었던 모든 인간들에게서 가면을 얻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에 가까운 가면의 형태를 알게 되었다. 모서리가 없는 도형, 수많은 타입들 속에서 대체적으로 잘 굴러갈 수 있는 동그란 가면이었다.
또한 나는 내가 수집한 가면들에게서 긍정적이고 유쾌한 면을 모아 광대의 가면을 만들었다. 내가 내뱉는 말에 웃음이 터졌고 내가 짓는 미소에 호감이 돌아왔다. 우호적인 공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거짓으로 자아낸 진정한 감정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유영했다. 물론 가면 아래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표정 없는 얼굴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편의점 도시락과 맥주가 담긴 묵직한 비닐봉투가 종아리를 때릴 때도 그녀 생각을 했다. 또한 술에 취할 때면 그녀를 생각했다. 술에 취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 생각을 했다. 그녀 생각만 했다. 


- 일찍이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어떠한 길을 선택했는지 조사를 해본 적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놈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살아갔다. 변호사가 되어 피도 눈물도 없는 전적을 쌓거나, 의사가 되어 지극히 사무적인 시각으로 환자를 대하거나, 연쇄살인마가 되어 이기적인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질러댔다. 
나는 그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다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뿐, 최소한의 그릇은 지니고 태어났다. 그렇기에 사회적 규범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를 외우는 것이 가능했다.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고 피해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결과는 인간들이 나를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형태였지만 사실상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 고뇌했다. 아무리 느껴보려고 해도 느껴지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저편의 영역을 둔 기분이었다. 갈수록 확연해지는 사실은 내가 괴물이라는 것, 그리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 문득 화가 치밀었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인간처럼 움직이는 신기한 고무풍선을 대하는 것에 불과했다. 다가오는 문제를 보고, 그에 맞는 대답을 머릿속에서 골라 내놓는 일에 신물이 났다.
이만 일어날까요. 나는 가면을 교체했다. 대학생 시절 학생들의 존경을 받던 여교수에게서 긁어낸 가면이었다. 무례마저도 매력으로 느끼게 만드는, 마법 같은 도도한 힘이 있었다. 많이 드셨습니다, 집으로 가시지요. 먼저 일어나 말하자 팀장이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눈가의 근심이 차츰 엷어져갔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래. 놓아둔 옷을 집으려다 팀장이 휘청거렸다. 내가 낼 거야, 내가 낼 거라고, 지갑에서 손 떼. 나는 다시 광대의 가면을 쓰고 팀장을 부축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갖가지 냄새와 지친 몸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깊은 물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택시에 오를 때 팀장이 나의 어깨를 소리 나게 짚었다.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야. 엉망이 된 어조와 함께 손아귀가 거칠게 어깨를 움켜쥐었다. 너 말고는 아무도 이해 못 하고, 아무튼, 내일 보자, 내가 너 믿어, 새끼야. 

- 택시가 묵직한 소음을 내며 출발했다. 이내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뒤에서 오던 다른 택시 한 대가 나를 보고 속도를 줄였다. 고개를 흔들며 손짓하여 나를 지나치도록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방금 나를 본 택시 운전사는 누구를 태우려 했을까.
팀장은 오늘의 술자리에서 응어리를 해소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의 막막함이 쌓여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팀장이 믿음을 주고 간 상대는 내가 아니라 내 얼굴에 얹어져 있는 가면이었다. 나를 통해서 서로를 모르는 인간들이 기분을 교류하고 있었다. 목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나는 넥타이를 풀어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한숨을 쉬었다. 어서 나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휴식이 절실했다. 나는 폐쇄적인 작은 공간과 위스키, 그리고 하얀색의 알약 몇 개를 떠올렸다. 

- 나의 취미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천천히 취해가면서 알약을 삼키면, 곧 은밀한 이면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책을 읽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말 그대로 '일'인 나에게, 다수와 협동하며 경쟁하는 분야가 취미일 수는 없었다. 
가면은 굉장한 에너지의 소모를 의미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정신적인 안정을 취했다. 최근에는 추리소설과 바이올린에 빠져있었다. 그 둘은 이면세계로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 화면을 메운 룰을 바라보다가 무표정하게 침대에 앉았다. 이렇게 한다 이거지. 피식, 웃다가 피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살며시 놀랐다. 이 시점에서 나를 휘감은 감정은 공포 따위가 아니라 연민이었다. 한편으로는 노이의 입장을 이해하기도 했다. 당신도 힘들겠어. 저녁식사를 받으러 나가며 입을 열었다.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되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러자 바깥에서 투박한 음색이 대답했다. 
"납득해 주셔서 기쁩니다, 견지 씨."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접시를 무릎에 얹은 채 감자에 블루베리를 얹어 먹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늘 해왔던 대로 건강한 식단과 운동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굴을 씹으면서, 나는 14인치 불빛에 비치는 두터운 문을 노려보았다. 

- 우득, 하고 뭔가가 이에 박혔다.
손가락을 넣어 몇 차례 휘젓자 손톱 끝에 딱딱한 파편이 걸려 나왔다. 작은 굴 껍데기 조각이었다. 가루가 남은 것 같아 퉤, 하고 이물질을 뱉어내니 곧장 시큼한 통증이 잇몸을 찔렀다. 찔린 모양이었다. 화장실로 가 입안을 헹구고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상처가 심한지 이내 혓바닥 아래로 액체가 고였다. 손바닥에 받아 모니터 불빛에 갖다 댔다. 비릿한 붉은색에 희미한 광채가 언뜻 비쳤다. 

- "피."
순간적으로 생각이 연계되었다.
피, 싸움, 폭력, 끔찍한 결과, 잔해. 그리고 한창 미쳐있을 때 썼던 <이유는 없다>와 <그런 이야기>, <미완성>이 떠올랐다. 놈들에게 내재된 광기 어린 문장들이 섬뜩하게 살갗을 스쳤다. 그 시기의 나는 폭력에 대해 썼지만 휘둘리고 있었다. 시간이 두려워 이성의 주도권을 모조리 내맡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목젖까지 차오른 핏물을 그대로 삼켰다. 이번에는 다른 측면에서 써보자. 주도권을 되찾은 뒤의 폭력성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했다. 묘하게 흥분이 되면서 상상력이 음산한 하품을 늘어뜨렸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가볍게 이를 부딪치자 시큼한 아픔이 솟아났다. 
"소재는 이미 받았어."

-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왠지 모르게 고향에 돌아온 감각이었다.

- <펌프킨>

-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왼쪽 눈이 따가웠다. 깜빡이면서 눈언저리를 문지르자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폰의 버튼을 눌렀다. 알람이 울리기 3분 전이었다. 
08시 57분.
전에 회사에서 일을 했을 시절에는 알람을 여섯 시 삼십 분에 설정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프리랜서로 살아가면서 알람 기능은 사용하지 않았다. 지켜야 할 룰이 없는 이상 낮과 밤은 단지 밝고 어두움의 차이었다.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09시에 알람을 설정한다. 여전히 낮과 밤은 밝고 어두움의 차이지만, 이제 그 차이는 지독하리만치 심각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밝을 때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밝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해서는 안 된다.

 

- 침대에 앉아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밤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죽고 싶을 때,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고 싶지 않지만 목숨을 끊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해가 저문 뒤에 밖에 나가면 된다. 그러면 놈들이 알아서 시체까지 깨끗하게 처리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밤이 되면 얌전히 방에 처박혀 있었다.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운동을 한 뒤 술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하면서 말이다. 


- 저녁 무렵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자를 찾으면 그날은 호의를 베풀어준다. 그것이 나의 룰이다. 이런 세상에서도 아직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저녁 무렵에, 방으로 돌아가지 못해 불안해하는 여자를 보면 나는 말한다. 
내가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건 인스턴트 저녁 식사와 커피, 약간의 위스키와 수많은 책들이야. 그러면 보통의 여자들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여유를 즐길 줄 알며 위트가 있는 여자들은 조금 다르다. 그녀들은 이렇게 물어온다.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나는 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와타야 리사, 가네시로 가즈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그 말에 여자들은 나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본다. 당신, 일본인인가요? 그러면 나는 다시 말한다. 이상, 황순원, 김유정, 이외수, 공지영, 박민규.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인이군요.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워문다.   

- 오른쪽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 왼쪽 시야 구석의 시커먼 곳에서 숨 막히는 위기감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전장에서 닳고 닳은 쓰레기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총구가 나를 조준하고 있을 때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거지 같은 기분이었다. 이것을 완벽하게 탐지하려면 아군이 죽는 것을 600번 정도 목격하고, 아군의 오인 사격에 죽을 위기를 넘겨보고, 저격 도중 적의 저격수와 눈을 마주쳐보면 된다. 칙, 지금은 아무도 없는 KFC의 가판대 뒤에서 루돌프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 아직은 계절이 공존하는 시기라서, 해가 있을 때는 여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 없는 사람들은 짧은 옷차림을 하고서 긴 옷을 들고 다녔다. 나처럼 재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에게도 증발한 무언가가 있고 그를 감추려 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 거리는 꼭 전쟁 중의 크리스마스 같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서로를 보려 하지 않으려 애써 시선을 돌리지만 결국은 서로의 증발한 부위를 찾으려 눈을 굴려댔다. 그러다가 상대의 증발을 알게 되면 자신의 증발과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를 저울질했다. 그러한 행위의 끝이 자기혐오라고 해도 사람들은 인간성을 고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자아는 공유하는 것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증발이 발현하기 전에는 관심도 없었을 나의 재킷에, 은근하고도 불쾌한 감정을 담아 시선을 돌렸다. 

- 실례합니다,라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에게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그의 손이 없어져버렸다. 그는 자전거 자물쇠에 열쇠를 꽂으려던 참이었다. 열쇠는 번거로울 만큼 복잡한 열쇠꾸러미에 달려있었는데, 이제는 지탱할 힘을 잃고 다른 열쇠들 속에 섞여 요란한 소음만을 뿌리고 있었다. 나를 불렀던 그의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열쇠를 꽂는 동안 자전거를 잡아달라거나 간단히 시간을 물어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제 내가 알 수 있는 길은 사라졌고 그가 띠고 있는 성질은 변화해 버렸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아니면 그저 일개의 사물로서 내가 거기에 서있을 뿐인 주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의 깜빡임이 느렸다. 

 

- 그의 증발을 목격한 사람들 중 일부가 걸어왔다. 나는 그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고 있었다. 사소한 증발로 넘겨버린 사람들, 코털과 입가의 점 같은 것으로 증발을 '치러버린' 자들. 이 세계에서 그것은 더 없는 축복이었다. 어차피 갚을 무거운 빚을 가볍게 갚아버렸다는 홀가분한 기분을 그들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간만에 맞는 휴일 저녁처럼 걸었다.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 자신이 안전한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보내는 동정은 방주 위에서 던지는 일방적인 흥미였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하는 곳에 그들은 없었다. 다만 가까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거나, 가까이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운을 자랑할 뿐이었다.

- 자전거 근처로 다가온 소소한 증발자들이 음흉한 선의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지, 한 번 증발하고 나면 다시 겪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심장 같은 게 증발해 버리면 그야말로 끝장 아닌가, 난 눈썹으로 끝냈지만 그것도 제법 불편해, 손 하나 없는 것과 다를 게 뭐야, 놀리긴 무슨, 아냐, 이상한 의도는 없었어. 이어서 새로운 관심이 나에게로 향했다. 아직 증발이 오지 않았나, 없어진 부위를 못 찾겠는데.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알고 싶은 것도 그거요. 

- 폭력의 숨결이 상냥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내 안에는 나쁜 것이 있어. 그리고 그게 널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 이층이 죄다 박살 난 이층 집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피우던 담배를 껐다. 여기다. 손짓을 보내자 재제가 집 옆으로 돌아가며 주위를 경계했다. 나는 감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고동보다 시각을 신뢰했다. 지나간 시간, 흘러갔기에 기념되며 진실 외에는 띠고 있지 않은 지나간 시간이 지나가는 시간 위에 앉아 객관적인 흔적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움직여서 묻혀놓은 자국이었다. 
 

<9월>


- "N동의 구세주를 찾아오는 게임을. 100일간 시커먼 방에 처박혀 이 정신 나간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 말이에요."
"..."
"하지만 찾지 못했고,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려야 할 처지가 됐지요. 경호원이라고 소개한 남자들의 감시 속에서요. 그게 노이 씨의 룰이었을 겁니다.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는, 내가 가졌던 망할 항목처럼." 
나는 아타셰케이스를 들었다.
"정리하자면 이 게임은 노이 씨의 게임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친놈들의 게임이었다는 겁니다. 사람을 개 같은 환경에 몰아넣고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겠지요. 고어 영화처럼, 얼마나 빨리 포기할지를 두고 내기를 할 수도 있겠고... 심한 경우에는 어딘가에 생중계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견지 씨, 더 이상의 말은."
"아니오. 끝까지 할 겁니다. 이 정도는 들으세요. 나는 이런 짓거리를 꾸미는 인간들을 대단하다고 여겨요. 여기에 들어올 때 목격했던 여유로운 인상의 신사들이 바로 고객이겠지요. 이 마을 자체가 게임을 위한 장소입니다. A동부터 V동까지의 건물에 플레이어들을 박아놓고 갖가지 미친 짓을 해요. 다른 동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하면 끔찍합니다."  

- "내가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사실 나도 뒤틀린 인간이라 짐작이 가요. 망가질수록 가치가 있겠지요. 그래서 식사 메뉴의 제한을 없애고 신경 써주는 척하며 독자를 붙인 겁니다. 암담한 나날 속에 유일한 소통을 던져주고, 그에 매달려 무너지는 나를 보고 싶었겠지만, 사실 나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어요.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노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어떤 부류의 인간이죠?"
대답 대신 사나운 이를 보였다.
"머리카락 걷어요."
발끝에서부터 짜증이 기어 올라왔다.
얼어붙은 것처럼 잠시 정지했던 노이가, 매니큐어 없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뻗었다. 그러고는 예의 그 익숙한 동작으로 머리를 누르더니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며 뒷말을 뚜렷하게 발음했다. 손톱 끝이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작은 이어폰이 꽂힌 게 보였다. 당신은 내 독자가 아니었어. 나는 차갑게 뱉은 뒤 노이의 곁을 지나쳤다.

-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이어폰을 빼며 노이가 말했다.
나는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하세요."
어떻게 해낼 수 있었던 거죠? 예상대로의 물음이 고막을 찔렀다. 나는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을 잘랐다. 고맙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투로 노이가 재차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어떤 부류의 인간'이기에?
"괴팍한 소설가들이 하는 게임이 있어요."
설명했다.
"아니, 있었어요. 과거에 이겨도 별 이득 없이 시커먼 욕구를 충족시킬 뿐이지요. 자기만족을 위한 사이코들의 놀이예요.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 났거나 인간성이 박살 난 놈들만이 그 짓을 합니다. 나 역시 했어요. 그렇게 뒤틀린 인간이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거예요." 

-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었어요. 무패.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그 게임을 이겼을 때, 나에게 진 놈이 말했어요. 반칙이라고. 모든 게 처음부터 속임수라고요. 웃기는 소리지. 속임수라니. 그 게임은 처음부터 '발상이 뛰어난 사람에게 유리한 룰'인데.”
알고 참가한 주제에 말이야. 밑바닥 끝까지 비웃었다.

 

- 노이씨, 소설가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문장이 아름다운 사람, 플롯이 치밀한 사람, 대사가 끝내주는 사람, 캐릭터를 잘 잡는 사람, 소재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발상'이 뛰어난 사람.

- "게임에서 무조건 이기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연습과 노력, 같은 거 아닐까요."
"틀렸어요. 그런 건 승률을 높일 뿐 무조건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아요. 있잖아요,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그 게임을 만드는 겁니다.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유리하기 짝이 없는,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불공평한 게임을 나는 천재가 아니지만 발상에 있어서 잘난 척할 정도는 됐어요." 
"그러니까 그 소설가들의 게임을..."
"잘 살아요."
옷깃을 뿌리쳤다.
아타셰케이스를 지고서 모퉁이를 돌았다.
"당신 이름도 모르지만."

- 이후에는.
모든 게 대체로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 나는 올해로 글을 쓴 지 11년째에 접어든 소설가다. 스물한 살 크리스마스에 소설을 쓰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나이가 서른둘이니 스물한 살의 마지막 일주일가량은 계산에 넣지 않은 셈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사기를 당했고, 그보다 많이 사기를 쳤고, 여러 가지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한 끝에 현재는 부족하나마 글을 써서 굶어 죽지 않는 형편은 된다. 살아오며 겪은 것과 치른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결과라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가끔, 그때의 게임을 생각한다. 
어지간한 일들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100일은 지금도 추억이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빚은 갚았고, 친구를 곤경에서 구해냈다. 다행히 여동생은 크게 상태가 악화되는 일 없이 점차 호전되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나는 남은 돈으로 괜찮은 원룸을 구해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블로그에 '돌아왔습니다.'라고 쓴 뒤 일거리를 구했다. 다행히 책을 내자는 곳이 있었고 출간 후 뜻밖의 괜찮은 반응을 얻어 밥을 지어먹을 자리를 잡았다. 행운이 미소를 지었는지, 나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블로그를 찾아와 안부를 묻고 댓글을 남겼다. 모니터를 향해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기반을 다진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NO1 씨, 기다리고 있어요.'라며 살고 있는 집의 약도를 올린 것이었다. 큰 신세를 졌다. 은혜를 입었기에 꼭 갚고 싶었다. 그렇게 공개적인 편지를 쓴 뒤 집필을 이어나갔다. 꾸준히 쓰다 보면 어떻게든 이름이 알려져 언젠가는 나를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년, 다시 1년이 지나고.
'신작은 어떤 걸 준비 중입니까.'라는 편집자의 전화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있는데.'라고 애매하게 말을 흘렸다. 편집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야죠.' 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통화를 끊고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해도 될까. 이 실화를. 정말로 벌어졌던 일을 '이걸 소설로써도 되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 "하지만 이미 오래전 일인 데다가..."
쓰고 싶다는 욕구.
이제 그 미친놈들로 이루어진 '조직'은 없어졌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집필을 결심했다. 소설은 내가 스물아홉 살 때의, 죽도록 무덥던 7월부터 선선한 저녁이 오기 시작한 9월까지의 일을 담고 있었다.   

<에필로그>

 

 



후기


 
반시연입니다.

 

소설 내용이 언급되니 주의해 주십시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여섯 살쯤의 저는 죽도록 책을 안 읽는 놈이었습니다. 그냥 안 읽는 정도가 아니라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보면 적개심을 불태울 만큼, 그래서 저 어린것이 혹시 전생에 책과 관련하여 무시무시한 일을 당한 게 아닌가, 말도 못 할 원한을 가진 채 태어난 게 아닌가 의심할 만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5월 즈음이라고 기억하는데, 책장을 지배한 60권짜리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 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뭔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읽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한동안은 또 죽도록 책만 읽었습니다. '그만 읽어라.'라고 주위에서 만류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저의 어린 시절을 지금에 와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정말 지긋지긋하고 재수 없기 짝이 없으며 그냥 복부를 한 방 갈긴 뒤 자루에 싸서 강물에 버리고 싶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어쨌거나 그 책들은 정말로 대단했는데, 삼국지나 수호지나 서유기 같은 것들을 아이들이 보기 편하게 한 권으로 압축해 놓았습니다.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엇 하는 순간에 도원결의를 맺고 엇 하는 순간에 여포를 만나고 엇 하는 순간에 동탁이나 조조나 손견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그러다 대체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제갈량이 전략을 쓰고 또 엇 하는 순간에 정신을 차리니 이야기가 끝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는 있었고... 저는 책장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전래 동화와 일본 동화와 독일, 북유럽(북유럽 동화집 안에 수록된 일러스트 장난 아니게 무서웠어요), 러시아, 프랑스, 도로시, 바보 이반 등을 만났습니다.

나이를 먹은 뒤 어엿한 소년이 되어 도서관에서 그들의 완전한 이야기를 보았을 때, 저는 옛 친구들을 만난 기분에 전율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던 친구의 모습보다 한결 사납고 정신세계가 음울하고 죄다 툭하면 보드카를 마셔대는 술고래에 이상하리만치 계모와 사이가 안 좋았지만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고 머리가, 허벅지가 굵어지는 동안 그들이 속삭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항상 함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를 써내는 순간에도 동행할 거예요. 의자에 팔을 걸치거나 뒤에서 팔짱을 끼거나 비스듬히 엎드려 사과를 먹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보드카도 마시면서요. 걔네들은 수시로 마시더라고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중학생 때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무언가를 한때의 변덕으로 잠시 끄적인 거나 밴드를 했던 고등학생 때 노래 가사를 소설 형식으로 써본 것 말고, '제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 주위에는 제가 만든 인물들도 한 명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쓰고 싶은 소설을 쓴다.'가 집필의 근간이었고, '하루에 한 편은 소설을 쓰자.'가 자세였기에 나날이 저의 작은 방에 갖가지 인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방에 전기톱을 든 수상한 청년이나 어딘가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애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 방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는 놈들이었는데, 가끔 폴더를 무겁게 채운 소설들을 보면서, 이놈들을 풀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습도 8페이지>는 제 방에서 음습한 기운을 풍기며 뒹굴고 있던 놈들의 일부가 튀어나간 소설입니다. 읽어주신 분들, 지금 이 메시지를 보고 계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에는 단편만 이어서 그야말로 '단편집'으로 낼 생각이었으나 메인 스토리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단편들을 이어주는, 저변에서 희미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줄기. 거기에 매력을 느꼈기에 견지를 만들어 극한 상황에서 구르게 했습니다. 사실 견지는 본편에도 수록된 <멸망이 하코, 하고>의 주인공으로, 그를 끄집어 내 이야기의 진행을 맡겼습니다. 더불어 노이와 NO1도 태어나 이 단편들을 모으는데 힘을 써주었습니다. 짧게는 최근에 쓴 소설부터 길게는 10년 전의 소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장을 새로 고치면서 '아, 이때는 이랬구나.' 하며 기쁨과 공포에 사지를 떨었습니다. 또한 무한한 애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 낸 모든 인물들과 세계에게 경의와 사랑과 존중과 감사를 그리고 제 자신에게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싣기에는 수위가 높은 게 있어 부드럽게 순화한 편이 있고, 그때의 느낌을 담기 위해 다소 위태롭지만 놔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와 '미완성'은 원래 버전이 너무도 하드코어하여 묘사를 살짝 다듬었습니다. <연애소설>은 마지막 문단의 감정을 깎았고 <그냥>은 줄기를 따라가되 전체적으로 손을 봤습니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소설들을 담으며 새로이 숨결을 불어넣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삶을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즐겁고... 씁쓸하고... 끔찍하고... 다정한... 그러면서도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습도 8페이지>는 저의 기록입니다. 완성된 원고를 둔 채 한동안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습니다.

끝으로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큰누나, 작은누나, 덕분에 제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동료들, Soul Dealers와 Midnight Carnival과 Guillotine Groove와 Zero Clock Fever, Slaughter, 루모, 환타, 더럽고 불길한 놈들에게도 경멸과 혐오와 존경을 보냅니다. 항상 의지가 되어주는 장성혁 씨와 든든한 미스터 시로에게도, 그리고 긴박한 상황에서 멋진 표지를 그려주신 만다린 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담당인 에딧J 님께도 사랑을.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왔습니다. 이름을 모두 적을 수는 없지만 저에게 당신의 존재가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무엇보다 소설을 읽어주신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반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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