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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1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5. 5. 1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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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출판 : 새파란상상
출간 : 2020.05.26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두 주인공이 각자의 시점에서 서로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을 띤 연작 소설이다.

 

원래 이 두 이야기는 작가가 자신의 오랜 팬이었던 예비 신랑 신부를 위해서, 그의 프로포즈를 위해서 쓴 선물이었다. 작가 후기의 표현처럼 정말 '두 사람만 볼' 소설이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출판된 스텔라 오디세이 시리즈는 '트릴로지'라는 제목에 담긴 바와 같이 <미래로 가는 사람들>까지 총 3부작으로 이뤄진 작품이지만, 내게는 이 두 권이 중심이 되는 -마치 한 권처럼, 한 쌍처럼- 이야기로 느껴진다. 

 

작가마저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지는 글로써 썼다고 해서일까.  

매번 읽을 마다 눈시울이 따가울 만큼 붉어지고 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연인은 서로의 사정 때문에 9년의 시간을 떨어져 보내게 된다. 여자는 가족들과 함께 알파 센타우리로 4개월의 여행을, 남자는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4년 반의 여행을 계획하고 우주로 떠난다. 다시 만나는 날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하지만 아주 작은 변수로도 시공간은 간단하게 뒤틀린다. 작은 사고, 한 번의 선택이 기다림을 몇 개월에서 몇 년씩 늘어나고 만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몇 번이나 기다림을 포기할 뻔했던 한 남자의 길고 긴 생존기다. 

 

나는 그가 슈퍼 히어로처럼 굳건하게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지 않아서, 흔들리고 또 흔들리면서도 결국은 그 식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두 눈이 뜨거워진다. 

발췌를 정리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인류애가 0에 수렴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겠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때도.
    

2025년의 두 분들은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기를 바라며.

끝.

    


    


- 한 달, 다시 지구에 내려서기 위해 감속하는 데 한 달. 최신 엔진에 신형 중력 완화 장치를 써도 그게 한계지.
네가 가족과 알파 센타우리로 가면서 걱정했던 걸 기억해.
"괜찮겠어. 내겐 넉 달이지만 네게는 4년 반이 넘는 시간이야. 아무리 기다림의 배로 시간을 반으로 줄인다 해도 말야. 쉽게 생각하지 마."
그때 나는 네 이마에 내 이마를 대며 말했지.
"이 늙은 여자야." 내가 말했어. "완전 땡잡았지. 네가 올 땐 내가 너보다 두 살 더 많아."
그 말을 듣고 너는 헤벌쭉 웃었지.

- 친구들이 그러더라. "원래 사람이 한두 달 멍하니 있으면 미치거나 평온해져."

- 그런데 하루쯤 지나니까 시시하더라. 우주에 나오면 별을 잔뜩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유리 너머로 보니까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 밤에 집 안에 있으면 바깥 안 보이잖아. 우주는 늘 밤이고. 하지만 괜찮아. 겨우 두 달인걸. 
뱃사람들은 이 항로를 '기다림의 궤도'라고 불러. 태양을 중심으로 나선을 그리며 돌다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지.
여기에는 다른 장소가 아니라 다른 시간대로 가는 이민자들이 타. 곧 바뀔 연금 제도나 부동산세제를 바라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들이 시대를 잘못 탔다고 믿고 떠나는 예술가들도 있어. 새로 도입되는 수능 시험을 찾아가는 수험생도 봤어. 물론 나처럼 다른 성계에서 오는 애인과 나이를 맞추러 가는 바보들도 있지. 

- 처녀자리 은하군을 향해 초속 600킬로미터로 날아가는데 지구에 서 있는 아파트가 조각나느냐고 했지. 그런데 규정에 없다고 계속 뻗대는 거야. 
너 없이 석 달이나 더 살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 선장한테 내가 새신랑이고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길인데, 석 달이나 더 기다렸다간 총각귀신으로 말라죽어서 우주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되어 밤마다 꿈에 나타날 거라고 했어. 못 알아듣더라고. 
근데 옮겨 탄 뒤에야 아차 싶더라. 예식장 날짜를 잡아 놨잖아. 계약금도 지불했는데. 석 달 미룬다는 연락이 제대로 갈까? 계약금 안 돌려주면 어쩌지? 생각하다 보니 우리 집 빌려준 세입자도 걱정이 되는 거야. 원래 4년 반만 살고 비워 주기로 했는데, 내가 제때 안 왔다고 모른 척 거주권 같은 거 주장하면 어쩌지? 아무래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집부터 달려가야겠어. 

- 배에 있으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바람도 소리도 없어. 별빛은 기울어져 눈앞에 전부 쏠려 있어. 온 우주의 별이 다 한데 모여 섬광처럼 빛나. 여기 있다 보면 빛의 속도로 나를 스쳐가는 것은 온 우주고, 지구며, 내 집과 친구들이고, 나는 여기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내 시간도 서는 거라고.

 

- 공간과 시간이 같은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는데. 다른 시간대로 가는 건 다른 장소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지.
우리 아버지는 고향에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쯤에는 세상을 다 돌아보고 오신 것 같았어. 실제로 그러셨을 거야. 그분이 태어났을 때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고향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으니까. 건물이 서고 도로가 닦이고 산이 깎이고 강이 길을 바꾸었지. 시간이 그분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분이 한 곳에서 살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 배를 갈아탄 건 정말 잘한 거야. 내가 3개월 못 기다리고 옮겼는데, 당신은 3년이었는걸.
지구에 내리자마자 그 길로 배를 탔다고 했지. 표를 급히 구하느라 기다림의 배가 아니라 지질탐사 가는 연구선을 탔다고. 그런 배는 연한 넘은 낡은 게 많다는 말도 들었어. 안 쓰는 정거장이나마 찾아 피난해서 다행이야. 울지 마. 중간중간 '흙'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뭔가 한참 생각했더니, 당신 울음소리를 기계가 그렇게 읽어 주는 거더라고.

 

- 하지만 11년, 11년이라니...

- 다시 당신 편지를 읽었어.
[난 괜찮아. 조금 긁혔을 뿐이야. 하지만 배를 고치다가 승무원도 한 사람 죽었어. 그래도 그 사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도 못 왔대.
항해사 말이 여기를 지나는 배는 화물선이나 연구용 운행선밖에 없대. 그것도 인원이 한정되어 있어서 번호표를 뽑았어. 내 번호표로는 선택지가 둘 있는데, 두 달 더 기다리다가 알파 센타우리로 가는 빛배를 타는 것과 다음 달에 오는 지구로 가는 동면식 화물선을 타는 거래.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더니 11년 뒤라고 했어. 선장이 빛배를 타고 돌아가라고 했어. 11년 뒤의 세상이란 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야. 거기서 쭉 살았던 사람도 살 만하지 않다고. 
가겠다고 했어.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더니 다 웃는 거야. 11년이나 기다리는 남자는 아무도 없대.
당신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해서 가는 게 아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땐 이미 나는 잠들어 있을 거야. 답장을 해 줘. 깨어나서 볼 테니까.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든 서운해하지 않으려 해. 나는 내 선택을 했고 당신은 당신의 선택을 한 거니까. 흘흙흘.
아니, 그렇지 않아.
너무 바라서 말로 다 할 수도 없어. 너무 바라서 차마 바랄 수가 없어. 그래서 잠을 자려고 해. 나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마중 나와 주겠어? 어떤 모습으로든 좋아.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으면 많이 슬플 것 같아. 항구에 당신이 없으면 예식장에 갈 거야. 가서 혼자라도 기분 내야지.]
그리고 편지는 흘흐르흙흘흘 하는 건조한 목소리로 끝을 맺어.

 

- 미안해.
자기야,
정말 미안해.
하지만 11년을 기다릴 수는 없어.
벌써 3년이나 늦었어. 7년 반이나 지났다고. 지금 가도 내 집하고 직장이 멀쩡히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고. 사람 3년 소식 없으면 사망자랑 동급이야. 삼촌들이 내 통장 다 털어서 조카들 나눠줬어도 돌려 달라고도 못 한다고. 세입자가 내 집 자기 거라고 주장해도 할 말 없단 말야. 요새 경기 봐선 직장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아. 어디 인수됐으면 옛날 직원은 받아 주지도 않아. 
11년이라니, 아니, 18년이라니. 그때 가면 친구들 다 늙어서 같이 놀아 줄 사람도 없어. 18년 전 지식을 대체 어따 써? 내가 배운 게 그때 가면 다 무슨 소용 있냐고. 그때도 납품 업체 공돌이가 밥 먹고 살지 어떻게 알아? 18년이나 세상 물정 모르고 살다 뭐 해 먹고 살라고? 
미안해.
나 집에 갈래. 이건 아냐. 우리가 11년 뒤에 만나 봤자 남편이 집도 절도 없는 놈팡이면 결혼이다 뭐야. 우린 처음부터 연이 아니었나 봐.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잘못된 거야. 
건강해야 해. 몸조리 잘하고, 동면 여행 하면 몸에 안 좋다는데 오면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마중도 나갈 거야. 그건 약속할게. 잊지 않고 나갈게. 정말이야. 사랑해. 

- 선내 TV를 켜도 계속 뉴스만 나오는데, 그것도 방송이 하나밖에 안 나오는 거야. 포털 사이트도 다 터져서 밀린 메일 확인도 못했어.
일주일이 지나서야 웬 새파란 녀석이 뒤에 신병들 줄줄이 달고 들어와서는 성질을 내는 거야. 어제 뭐 잘못 먹은 사람 같았어. 우리더러 너희 늙은 세대들이 게으르고 나태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 됐다. 너무하잖아. 겨우 7년 전인데. 
그 사람 말이, 테러 분자들이 서울을 점령했대. 그래도 서울은 안전하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용감한 국군이 금방 진압은 할 건데 지금 입항하면 행정 처리가 안 되니 잠깐 나갔다 오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집에 보내 달라고 하는데 그냥 나가 버리는 거야. 
조금 있다가 적십자인지 민변인지 하는 데서 와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말해 줬어. 선거에서 진 당에서 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장악했고, 시민들이 항전하고 있다는 거야. UN은 뭘 하냐고 물어보니까, 미국이 작년에 파산했고 그 여파로 전 세계가 대공황이라 상황이 안 좋대. 그러면서 10년쯤 있다가 오면 대공황도 좀 지나고 사태도 안정될 테니 그때 오래. 그것도 빨리 가라는 거야. 나라가 안전하다고 할 때가 도망칠 마지막 기회라면서. 어물어물하다가 출항 금지령이 내리면 정말 오도 가도 못 하게 될 거래. 

- 그거 알아?
출항하면서 내가 바란 건 하나밖에 없었어.
네게 보낸 편지가 가지 않기를!
며칠 참았다가 지구에 와서 상황 좀 파악하고 보낼걸, 뭐가 급하다고 바로 답장을 썼을까? 어차피 너는 몇 년 뒤에나 받아 볼 텐데!
보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밤늦게 회식하고 들어와도 거들먹거릴 수 있었을 거야. 어허, 이 양반이 내가 11년이나 기다린 걸 벌써 잊었나?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았어. 그리고 이내 떠난 기차, 아니, 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지.
네 배 선장을 구워삶아서 편지를 폐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 선장이 인공지능이라고 들었는데. 인공지능은 어떻게 구워삶을까. 신형 메모리 같은 걸 사 준다고 꼬셔 볼까.
있잖아, 있잖아 자기야.
둘이 같이 항구에서 내리면 진짜 웃길 거 같아. 당신 보자마자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다 용서해 달라고 할 거야. 그리고 재회한 기념으로 우리가 나눈 편지는 어디 화롯불 같은 데 태워 하늘로 날려 버리자.

- 오랜만이야.
아니, 오랜만인지 당신은 모르겠구나. 편지 못 받았다고 들었어. 수신자가 자고 있대. 그 대신 오는 편지는 차곡차곡 보관해 놨다가 깨어나면 한꺼번에 준대. 선장이 일 처리 깔끔하더라고. 배 잘 탔더라.
지구에 돌아왔어.
10년보다는 좀 더 일찍 왔어. 급하게 떠났더니 부족한 것 천지라 다들 아우성이었거든. 늘 쓰는 수분 크림이 없으면 피부 상한다는 아주머니가 제일 시끄러웠어.  

- 성간물질을 모으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어. 우주에는 수소가 있고, 산소도, 칼슘, 나트륨도, 물도, 유기물질도 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을 뿐이지. 하지만 광속으로 수집하면 문제는 달라질 거야. 겁나 빠르게 공간을 지날 테니까. 큰 진공청소기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어. 공장에 내려가서 모델명을 일일이 확인하며 부품을 찾고 예비 발전기로 기계를 돌렸어. 다른 건 몰라도 매뉴얼은 내 암호로 보관해 놨거든.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야 했어.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도록.

- 그걸 보며 생각했어. 저 빌딩 지을 때부터 다들 10년 안 갈 거라고 했지.
당신네 집에서 몇 년 비워둔 시골집에 갔을 때를 생각했어. 집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흉물이 되어 있었지. 변기는 막혔고 하수관과 보일러는 터졌고, 햇빛이 드는 곳은 삭아서 파삭파삭하고 들지 않는 곳은 곰팡이로 눅눅했지. 집은 고독으로 팍삭 늙어 버린 듯했어. 이리 외로울 바에야 살 가치가 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어. 두어 해 사이에 혼자 스무 해는 산 것 같았어.
"사람이 안 살면 금방 이렇게 된다니까."
당신이 까맣게 변색된 문설주를 쓰다듬으며 말했어.
"내가 옆에 있어 주었어야 했는데."
당신이 집이 아니라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어.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내게 말하는 듯했어. 내내 혼자였던 나에게.

 

- 그리고 이제 항해한 지 석 달이 지났어.
석 달이 지난 뒤에야 정신이 들었어. 정신이 드니까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했는지 알 것 같더라.
언젠가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몇 달 살았던 적도 있다고 했었지?
이제 알 것 같아. 그건 혼자 산 것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치워 갔고 정화조를 비워 주었어.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선을 연결하고 가스를 점검하고 물통을 갈고 하수관을 청소했어. 어느 집에선가 면을 삶고 그릇에 담아 배달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가 닦았어.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살 수 있단 말야?
그저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잠에서 깰 때마다 생각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죽을 거야.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 죽겠지.
사료는 더 이상 목구멍을 넘어가지도 않아. 먹을 때마다 토해 돌아가야겠다고 살려달라고 벽을 두드리는데, 지금은 돌아간다 해도 어차피 이만큼을 더 가야 해.
괜찮아.
괜찮아. 겨우 2년인걸.

- 당신은 오지 않았어.
밤이 새도록 기다리고 다음 날에도 기다렸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어.
나는 들판에 누워 별이 뜨고 지는 것을 보았어. 지구가 별바다를 흘러가는 것을 보았어. 엄청 큰 배에 타고 있다고 상상했어. 사실이기도 하고.

'괜찮아.' 나는 생각했어.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라면 10분쯤 늦을 수도 있잖아. 10년 거리면 1년쯤 늦을 수도 있지.'
정말로 1년을 기다린 건 아냐. 하지만 4개월 하고 3일을 기다렸어. 잠은 배에서 자고 밥통에 흙을 갈아먹으며 살았어.

- 당신은 오지 않았어.

- 그런데 왠지 슬프지 않더라. 기쁘지도 않았지만. 그저 담담했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어. 당신이 갈댓잎 사이에서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이상하니까 집에 갔다가 다시 와.' 했을 거야.

- 그런 뒤에 나는 떠났어.
사실 떠날 이유는 없었어. 더 이상 미래로 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남아서 뭘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어. 오염이 사라지고 사람이 살만해진 미래로 가자고 생각했어.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어. 생각할 만한 마음이 없었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어. 이 모든 것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당신을 포함해서.

-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오래전에 어느 별에 정착해 좋은 사람 만나 아들딸 열쯤 낳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한 생을 마감했다 해도. 혹은 어느 빛의 궤도에 올라, 지구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아득한 여행을 하고 있다 해도. 어쩌면 아득한 성계 너머에서 이제 막 배에서 내리며, 어린 날의 가벼운 추억거리처럼 나를 회상하고 있다고 해도. '아, 그런 사람이 있었죠. 오래전에 다른 시간대에서 죽었겠지만.'

-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하루가 다 필요해.
하루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나 하염없이 늘어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생이 끝나리라는 예감을 해.
알람 시계가 시간 단위로 울리게 만들어 놓았어. 바깥 시간과 상관없이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의 밥을 먹어. 내 몸이 고장 나면 아무도 고쳐 주지 않을 테니까. 
배는 계속 어딘가 삐걱거려. 내가 예전에 싸 놓은 오줌이 지금도 어디엔가 스며들어 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을 해. 뭔가 고치다 보면 하루가 다 가. 배 밑창에 들어 있는 매뉴얼을 매일 연구해. 아무도 나를 위해 대신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
배 안에서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어. 씨앗 한 알을 갖고 타도 몇 달 뒤에는 수백 배의 열매를 맺어. 공기에 자연 산소도 필요하고. 처음에는 많이 죽었는데 지금은 다들 꽤 적응한 편이야. 덕분에 요새는 사료 말고 다른 것도 먹고 있어.

- 나는 나이를 먹었어. 하루에 하루씩, 한 달에 한 달씩, 한 해에 한 살씩, 시간을 몸에 쌓으며 살았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10년 전보다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어. 몇백 년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어. 내일은 하루만큼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내년에는 또 한 해만큼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내 배에 있었어. 다른 것들과 함께 떠다니고 있었어. 반지가 노래하는 것만 그대로였어.

 

-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떴어. 눈을 떴을 때엔 당신이 와 있었어. 내 몸 위에 겹쳐 누워 있었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위에 있는 거였지만.
"여기서 아기를 낳자." 당신이 말했어.
내가 웃었어. "여기서?"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이 세계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상에서. 그러면 그 아이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그 시간선이 그 애의 고향일 테니까." 

당신이 내 귀에 속삭였어.
"오히려 느리게 흘러가는 다른 시간선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거야. 그 애는 우리처럼 다른 시간대에 이를 때마다 무서워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스물에서 스물한 살이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천 년이나 2천 년의 세월을 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겠지. 지나간 시간을 서러워하지 않을 거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보며 울지 않을 거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생각할 거야. 그 애는 우리처럼 더듬거리지 않을 거야. 중력에 묶여 방황하지도 않겠지. 무한의 끝까지도 나아갈 거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보게 될 거야."

- 그래, 괜찮을 거야.
우리가 만날 수만 있다면.

- 거기에 '먼저 간다, 인마.'라고 쓰여 있었어.
'항구에 당신이 없으면...'
당신이 내 귀에 속삭였어.

'혼자라도 기분 내야지.'
삭은 카펫이 맨발에 밟히며 삐그덕 소리를 냈어. 발을 옮길 때마다 하얀 먼지가 향처럼 일어났어. 의자는 녹슬고 낡았지만 정돈되어 있었어. 

- 제단 뒤 벽에 색 바랜 종이가 겹겹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 원래는 색지였을 것 같았지만 모두 회색이었어. 거기에 물먹은 글씨로 비슷한 말이 잔뜩 적혀 있었어.

- 나는 한 번 넘어졌어.
일어나 다가갔어. 종이는 만지는 대로 부서져나갔어. 종이마다 붙여진 시기가 달랐어. 수백 년 전 것도 있고 수십 년 전 것도 있었어. 몇 년 단위로 왔을 때도 있었던 것 같았어.
벽을 따라 걷다가 커튼을 잡았는데 죽 흘러내리더라. 그 뒤에 종이며 리본이 누군가가 칼로 마구 생채기를 낸 것처럼 찢겨 나가 있었어. 그 위에 스프레이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그이는 없어. 백만 년쯤 전에 죽었을 거야."라고 쓰여 있었어.
나는 그 앞에 오래 서 있었어. 말이 심장을 베서 피가 통하지 않았어. 주저앉았고 그대로 오래 앉아 있었어.

- 다행이라고 중얼거렸어. 속은 다른 말을 했지. 그래도 나는 다행이라고 말했어. 그만둬서 다행이라고.

- 한참을 그러고 있다 일어나려는데 널브러진 커튼에 붙어 있는 종이가 눈에 띄었어. 노란색이라서 눈에 띄었어.
노란색이었어.

- 색이 남아 있다는 건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색이 바래지 않았다는 거야. 어릴 때 창가에 놓아둔 책들을 떠올렸어. 몇 년 가지 않고 표지가 하얗게 바랬었는데. 
종이를 커튼에서 떼어냈어. 잘 안 떨어지더라. 접착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어.

작년이었을까? 한 달 전? 어제?
방금?

- 해가 기울며 창에 걸쳐졌어. 창에 걸쳐진 해가 은빛 커튼을 드리우며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모습을 드러냈어. 비질을 한 바닥, 새로 종이를 얹은 제단, 제단에 놓인 꽃병, 누군가가 불을 피운 흔적이며 그 위에 얌전히 놓인 양은 냄비까지. 사람이 밟고 오간 발자국이며 이부자리 흔적까지.
바람이 불어와 삭고 낡은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어. 햇빛이 내려앉아 글씨를 황금빛으로 비추었어.



 

 

 

출간에 대한 욕심 없이 단 두 사람만 볼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가벼운 마음인 동시에 다른 종류의 긴장감을 갖고 임했습니다. 단 두 사람만 만족하면 되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로맨스를 써 본 적은 없지만 제대로 쓴다면 나 스스로가 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다 쓰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제대로 쓴 것이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다 쓰고 나니 실제로 그런 마음이 들더군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글쓰기가 부드러워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은, 또 한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사람의 삶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변한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이 글을 제대로 썼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프러포즈는 성공적이었고 두 분은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간혹 접하는 두 분의 사는 모습이며 나누는 대화가 마치 이 소설의 속편과도 같아서 행복하고 기쁠 뿐입니다.

하나뿐인 독자와 완벽한 편집 회의도 나눌 수 있었고, 글값 이상의 많은 감사를 받았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저 글을 쓸 뿐인데, 사람의 일생에 이처럼 중요한 일에 함께할 수 있다니. 

2015년 4월
김보영


 




노드롭 프라이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소설가 novelist는 인격 personality을 취급한다. 이 경우의 등장인물들은 페르소나, 즉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다. 소설가는 안정된 사회의 틀을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훌륭한 소설가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인습을 존중해 왔다. 로맨스 작가는 개성 individuality을 취급한다. 이 경우의 등장인물들은 진공 속에 존재하며, 몽상에 의해 이상화된다. 또 로맨스 작가는 아무리 보수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글에서는 무언가 허무적인 것 또는 야성적인 것이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노드롭 프라이, <비평의 해부>, 한길사, 1982, 432쪽.)

 

이 설명을 김보영의 작품으로 가져오자면, 소설의 개연성을 중시하는 독자들은 "선박 부품 납품 업체"에서 근무한 경험밖에 없는, 그것도 내근직에 불과한 남자가 "돛단배" 또는 "조각배"라고 자조적으로 부르는 작은 우주선에 몸을 싣고, 직접 조종하며(!), 어떤 때는 파괴된 우주선을 직접 수리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지구 주위를 항해하며 여자를 기다리는 모습(!!!)에 감동하기보다는 이것이 과학적 사실이나 사회적 인습'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의 독자들은 그러한 세속의 사정보다는 주인공이 품고 있는 의지와 이상을 중요하게 여기며, 문자 그대로 '진공'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감동적으로 따라 읽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긴다.

게다가 SF란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상상력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과학을 서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딱딱한 수학식을 문자로 옮겨 이야기로 풀어쓰는 것이 아니다.

(세릴 빈트, <에스에프 에스프리_SF를 읽을 때 우리가 생각할 것들>, 전행선 옮김, arte, 2019, 12쪽.)

 

현대 이론물리학을 선도하는 학자 중 한 명인 에드워드 위튼은 계산보다는 몽상을, 수식보다는 명상을 주로 하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리학자가 엄청나게 복잡한 계산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리학의 핵심은 계산이 아니라 개념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리학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미치오 카쿠, <초공간>, 박병철 옮김, 김영사, 2018, 247쪽에서 재인용.)

 

그러니 독자들에게 당부하는 데, 김보영의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3부작을 보다 '잘' 읽는 방법은 노트를 펼쳐 놓고 각각의 챕터 소제목에 적힌 비행 속도와 지구 시간의 간극을 계산하며 이것이 얼마나 엄밀한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 놓은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의 경이로움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이며, 그 시간의 무상한 흐름보다 가치 있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에 동감하는 것이다. 편하게 얘기하자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별도 따다 주겠다는 청혼자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가능하냐를 따지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그의 의지가 가리키는 미래를 지긋이 바라보라는 그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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