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나가오 도모코 / 임윤정
출판 : 앨리스
출간 : 2017.08.23
생강과 벌꿀, 레몬만 들어간 과립차를 매일 마시고 있다. 아직 곳곳에 남아있는 냉기를 수월하게 털어내기 위함이다.
지난 몇 해는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더워졌던 것 같은데, 올해는 유독 추위가 천천히 물러간 느낌이다.
유독 비도 잦았고, 찬 바람도 끊이지 않았다. 마치 끓어오를 만하면 찬 물을 부어 한 김 식혀 버리는 것처럼.
그런 날씨를 따라 차게 굳은 손발을 녹일 겸 꾸준히 생강차를 마시는 중이다.
그렇게 몇 주간 오락가락하던 날씨지만 이제는 슬슬 한낮이면 햇살이 따갑다.
살짝 눈부신 햇살,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창을 활짝 열고 환기하는 기분.
<하루의 맛>은 그런 기분을 맛으로 담아낸 것 같은 에세이였다.
저자가 소개하는 레시피나 요리도구는 적당히 흥미가 생기는 선에서 흘려 넘길 수 있었는데, 화과자들은 너무너무 먹어보고 싶다. 양갱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미즈요칸이나 미나즈키, 구리무시를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러다 직접 사러 떠날지도 모른다)
매번 먹던 야채 볶음이나 조림이 아닌, 수프 형태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재료 본연의 맛을 좀 더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신선할 때 먹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소금만 살짝 친 찐 야채라. ... 어쩐지 나는 맥주 안주로 먹을 것만 같지만- 다른 안주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잠들기 전 병아리콩 한 자밤을 물에 담궈 불려놓고, 다음날 일어나서 씻는 동안 올리브유와 소금을 뿌려 에어프라이어에 돌린다. 식감도 맛도 입이 심심할 때 과자 대용으로 먹기 딱 좋다. 얼마 전까지는 라이스페이퍼에 김을 붙여 부각을 만들어 먹고 있었는데, 병아리콩이 더 만족스럽다. (김부각은 맛도 있고 건강에도 크게 나쁠 게 없지만, 첫째로 포만감이 낮고 둘째로 부스러기가 너무 많이 생긴다.)
때아닌 간식 열풍의 시발점은 커피 머신이다.
커피 머신을 샀더니 커피 섭취가 늘었다 -> 줄이기 위해 차를 마신다 -> 곁들일 화과자나 티푸드를 산다 -> 군것질을 줄이기 위해 다시 커피로 돌아간다
무한 순환에 갇힌 기분인데...
언젠가 차를 마신다, 에서 멈추는 날이 오겠지.
계속 도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고.
5월이다.
앗 하는 사이 6월이 되겠지.
다시, 모기향이 생각나는 밤이 곧.
- 이상적인 아침 식사는 어떤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손이 가고, 이제 막 잠에서 깨서 몽롱한 상태에서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한동안 아침을 정말 간단하게 때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홍차나 커피, 비스킷만으로 아침을 대신했는데, 주변에서는 그것만 먹고 힘이 나느냐고 물었지만 저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던 터라 다시 그렇게 먹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아침은 제대로 먹는 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뭐, 이렇게 고민한 결과 지금은 커피와 빵 또는 비스킷, 요거트와 과일을 곁들이는 정도로 아침을 먹은 지 꽤 되었습니다.
-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행지에서는 기분이나 몸 상태가 확 바뀌면서 일본식 정식이든 양식 뷔페든 함께 여행을 떠나온 일행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먹습니다. 그것이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라고 해도 평소와 달리 기운이 넘치는 까닭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면 여행지에서의 아침만큼 맛있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덕분에 저는 여행지에서만큼은 활기가 넘치지요.
- 행선지가 미국인 경우, 역시나 아침 식사가 기대됩니다. 샌프란시스코 주변에서 지역적 특색이 물씬 풍기는 아침밥을 먹은 기억이 납니다. 가게로 이어지는 길모퉁이를 돌면 커피 볶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워 그 향기로운 커피 향만으로도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평화로운 분위기에 커피 향과 우유를 데울 때 나는 스팀 소리. 와플로 할까 도넛으로 할까, 페이스트리가 좋을까 아니면 머핀이 좋을까,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부 맛있어 보여 좀처럼 메뉴를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홈메이드 시리얼에 요거트도 있습니다. 그런 광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이런 아침도 있구나' 하고 무척 부러웠지요. 호텔 조식과 비교하면 굉장히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
- 몰라서 못 쓰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이 피처입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면 갖고 싶어지는 탓에 이미 집에 여러 개가 있지요.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요.
- 영국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본 민예품 중에서도 매력적인 형태의 주전자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두께감도 있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유약의 빛깔은 굉장히 아름답지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1리터 전후의 용량이라면 이런저런 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 듯하지만, 와인 한 병을 따서 주전자에 옮겨 담아 마실 정도로 주량이 센 편도 아니고, 하지만 사용은 하고 싶고... 뭐 그런 곤란한 상황입니다. 장식만 하고 사용하지 않을 식기는 사지 않는다는 주의인지라 어떻게든 잘 사용하고 싶은데 고민이 되었지요.
- 사가현 가라쓰시에서 외국인 작가가 만든 주전자를 산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지내면서 만든 이 주전자는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크기나 감촉 모두 굉장히 좋았습니다. 교토에서 열린 골동품 박람회에서 발견한 것은 팔리고 남은 재고 중 하나였지요. 그 외 유리로 만든 다양한 주전자는 적당량의 맛있는 와인을 담아 마시기에 딱 알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아침에 우유를 담아 마시는 데도 유용합니다. 그때는 250밀리리터 정도의 작은 크기가 적당한데, 그보다 조금 더 큰 것은 그 안에 뭔가 넣을 게 없는지 찾게 되지요. 물론 매실 주스 같은 것을 만들 때는 주전자를 얼른 꺼내서 활용하지만 볼륨이 있는 피처는 유럽이나 미국의, 게다가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도구라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합니다.
- 자연스럽고 느낌이 좋은 사용법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르타뉴의 레스토랑에서 시드르(cidre, 사과술)를 담아 내왔을 때는 '그렇구나, 기죽지 말고 사용하면 되는 거야' 하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지요. 하지만 항상 음식의 온도에 민감한 제게 어쩌면 주전자는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어요. 상온에 방치해 두는 음식이 거의 없으니 말이에요. 예민하다고까지 말하기는 뭣하지만 느긋한 편도 아닌 제가 그럼에도 아름다운 주전자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 검은색 도자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의 아카쓰키가마의 주전자는 단단하고 긴장감 있는 형태를 띱니다. 감촉 좋은 매트한 질감이 살짝 가미되어 존재감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카쓰키가마의 마쓰자키 후미코 씨에게 여름에 차가운 것을 담아 안과 밖의 온도 차이를 이용하라는 얘기를 듣고, '맞다, 이 주전자가 차갑게 식어서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이 얼마나 맛있고 예뻐 보일까' 하고 상상했었지요. 얼음이 깨지는 소리도 분명 더 시원하게 들릴 테고요.
- 아침밥으로 팬케이크를 먹는 것은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입니다. 달콤한 메이플 시럽과 짭조름한 베이컨을 곁들인 미국식 조합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일본에도 단짠이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 있어서인지 금세 적응했습니다. 다만 아침으로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팬케이크는 거대하다고 할 만큼 정말 큽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체격에 맞춘 크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만요. 어쨌든 그 소박한 풍미는 좋았습니다.
- 팬케이크라고 해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브르타뉴의 크레이프와 갈레트(galette, 메밀가루로 만드는 팬케이크 형태의 빵과자)는 지혜의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밀가루 생산이 안 되는 북쪽 지방의 식생활 연구에서 비롯한 음식들인데,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맛이 넘쳐흐릅니다. 가볍고 고소하게 구워서 먹는 형태는 개성이 넘치고 심플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에 브르타뉴에서 공부한 지인의 가게에서 갈레트와 크레이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숙성해야 한다고 했는데, 의외였던 점은 불의 세기였어요. 모순적일 수도 있지만, 강한 불에서 짧은 시간 안에 바싹 구워내는 듯 보였습니다.
- 일본의 찻집에서 파는 팬케이크에도 나름의 개성이 있습니다. 굽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두껍고 무거운 생지의 특징을 살린 팬케이크를 오랫동안 고수하는 가게도 있고, 오래된 찻집이나 커피숍의 팬케이크는 완고한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여행지에서는 아침을 호텔에서 먹지 않고 팬케이크를 목표로 찻집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곳에서라면 분명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집에서 만드는 팬케이크는 팬케이크 믹스를 사용하는 편이 간편하고 좋습니다. 먼저 굽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평소 집에서 밀가루 요리를 자주 해 먹지 않는 사람은 예쁘게 굽는 것부터 연습한 후에 자기 나름의 반죽 만들기에 도전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박력분에 베이킹파우더, 설탕 약간, 샐러드유 조금, 달걀과 우유만 있으면 재료 준비 끝. 밀가루와 물을 같은 양으로 섞어 본인 입맛에 맞는 찰기가 될 때까지 우유를 부어가면서 저어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주르륵 흐르는 반죽은 가볍고 폭신한 팬케이크가 되고, 뚝뚝 방울져 떨어지는 되다 싶을 정도의 반죽은 그대로 구우면 두툼한 팬케이크가 완성됩니다. 반죽의 농도로 굽는 정도와 모양이 변하는 점이 팬케이크의 매력이에요.
- 오키프의 작품이 등장합니다. 그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너무나 환상적이라 실은 내가 비행기 위에서 본 풍경을 작품으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의심할 정도로 그 충격이 눈에 강렬하게 새겨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해외를 나가기 시작한 오키프로서는 비행기 위에서 바라보는 하늘이야말로 그림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 '오키프의 그림이 너무너무 좋아'라기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애를 산 예술가다 보니 굉장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오키프에 대해 쓴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미술관에서였지요. 보라색의 작은 꽃을 그린 그림이었어요. 다음 전시실로 이어지는 복도 벽에 걸린 피튜니아 꽃에서는 뉴멕시코의 메마른 토지는 상상도 되지 않는 미묘한 색의 농담과 냉정함이 굉장히 도회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 같은 시기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의 대형 서점에서 <화가의 부엌 A Painter's Kitchen(요리인과 오키프의 아이디어를 정리한 레시피북)>이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오키프는 인생 후반을 뉴멕시코주의 산타페에 닿기 전에 있는 아비키우 Abiquiu라는 작은 마을(마을의 중심이 어디인지도 모를 만큼 작지요)에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정말 멋진 집을 지었달까... 만들고, 혹은 창작했다는 느낌이 강했지요. 터키석보다도 맑은 새파란 하늘과 붉게 메마른 바위산, 여기에 흰빛을 띠며 마른 세이지 덤불, 꾸불꾸불 아름답게 이어지는 오아시스 같은 강. 그것만으로 구성된 듯한 토지입니다. 마치 가공되지 않은 몇 가지의 소재를 그대로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장소지요.
- 그 토지의 높은 곳에 자리한 오키프의 집에는 채소와 과일, 허브 등을 재배하는 텃밭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먹는 음식도 자연에서 안전하게 자란 특별한 재료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고집은 물론 성공해서 재력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지만, 오키프가 주로 먹은 요리를 모아놓은 화가의 부엌에 실린 것은 맥 빠질 정도로 단순하고 자연친화적인 요리들뿐이었습니다.
- 이쯤에서 겨우 수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만, 그 책 속에서 오키프가 "수프는 어째서 이렇게 쾌적한 음식일 수 있는 걸까?"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어요. 물론 텃밭에서 직접 딴 제철 채소를 사용해 만들면 맛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녀는 고령이 되어서도 왕성하게 육식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것이 100세 가까이 장수한 오키프의 힘의 원천이었다고 해도, 필시 수프처럼 '쾌적하고 '가벼우며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식도 필요했을 테죠. 위의 문장 하나로 저는 오키프라는 사람에게 흥미가 생겼고, 그녀의 책을 발견한 이래로 십수 년 후에야 비로소 뉴멕시코에 다녀올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 오키프의 집은 상당히 희귀한, 아름답고 붉은 빛깔의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강렬한 태양을 가려줄 서늘한 그늘, 환한 분위기의 작은 중정, 간소하고 아무 장식도 없는(하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의 도구들이 줄줄이 있는) 부엌과 식당이 차례차례 나타나는 풍경은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기후, 풍토 모든 것을 디자인에 포함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강한 인상이 남았습니다. 그 완벽함에 감탄한 후 쓴 원고는 어느샌가 예정한 것보다 세 배 이상 길게 쓰고 말았을 정도였습니다.
- 매일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오키프가 앉는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자주 사용하던 테이블의 주방 쪽으로 향한 의자에 앉은 그녀 앞에 온기를 품은 하얀 수프 접시가 놓이는 순간을 상상하자, 한쪽에서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면서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방안에 보글보글 끓인 채소의 색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자연의 맛, 한 그릇의 수프가 함께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었지요. 아마도 요리를 한 사람은 깐깐한 주인에게 식사를 낼 때 바짝 긴장했을 게 뻔하지만요. 채소로 끓인 수프와 빵에 버터, 그다음은 차가운 물이 있는 정도의 간소한 식탁이 그 후 제가 수프를 만들 때 늘 머릿속으로 그리는 이상적인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 채소도 같은 방법으로 우선은 약간 부족한 듯한 물에 찌듯이 삶다 보면, 그 후는 별 어려움 없이 요리가 착착 진행됩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요리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할 때 저는 이것을 '채소의 반신욕'이라고 불러요. 정말로 채소들이 모두 기분 좋게 반신욕을 하는 이미지이거든요. 김이 빠져나가지 않게 뚜껑이 꽉 닫히는 냄비가 필요하니 바닥이 두꺼운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주물 냄비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뚜껑을 씌우고 중불에서 끓이다가 끓기 시작할 즈음 약불로 줄여 10분 정도 더 끓입니다. 바닥이 두꺼운 냄비라면 일단 끓기 시작하면 그 후는 너무 약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불을 줄여도 됩니다. 뚜껑을 걷어내면 이미 양배추는 부들부들하게 잘 익은 상태일 거예요. 조금 뒤적여 수분이 여유 있게 남아 있는지 확인한 후 다시 뚜껑을 덮어줍니다. 그렇게 8~10분 정도 더 삶으면, 겨울 양배추의 경우에는 씹는 맛이 살아 있는 느낌으로, 봄 양배추라면 완전히 부드럽게 잘 익어 있을 거예요.
- 이때 나오는 국물에는 양배추의 단맛이 잔뜩 배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이 국물이 정말 중요해요. 마치 양배추를 먹는 것처럼 맛이 확실하게 배었으면 성공입니다. 평범하게 수프로 먹을 때는 여기에 물을 붓고 소금으로 간을 하면 됩니다. 또는 양배추 끓인 물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후추를 보태어 먹어도 좋아요. 양배추를 삶을 때 후반에 토마토나 누에콩(잠두)을 넣는다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베이컨 등을 함께 넣고 끓이면 풍성한 수프가 완성됩니다. 월계수나 타임 등 허브와의 궁합도 좋아요. 간장을 아주 조금 넣어 풍미를 더해줘도 좋고요. 어떤 식으로 변형을 주어도 좋지만, 처음 한 번은 양배추만 넣고 만들어보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 먹는 방법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 양배추를 토대로 거기에 무엇을 더하느냐에 따라 어떤 요리든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면 과언일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로 이 양배추 수프는 요리의 활용범위가 넓습니다. 푹 삶은 양배추에 살짝 데친 굴, 마무리로 생크림 조금. 혹은 물을 더 붓고 카레를 만들어볼 수도 있지요. 아니면 일단 양배추를 꺼내 큼지막하게 썰고, 채 썬 생강과 함께 냄비에 넣고 미소시루를 만드는 것도 방법입니다. 어떤 첨가물도 없이 푹 끓이다가 생모차렐라 치즈를 올린다든지, 이런 식으로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은 조합해 볼 수 있지요.
-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산맥과 가까운 지방에 햄을 만들고 남은 것으로 육수를 내는 가르뷔르(garbure, 걸쭉하게 끓인 채소 또는 고기 수프를 말한다)라는 요리가 있습니다. 이 요리에서 양배추의 단맛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그 외에 파, 당근, 감자, 흰강낭콩, 계절에 따라 제철 채소를 더해 먹는 요리예요. 옛날에는 아침에 끓여서 먹고, 일하러 가서 점심에 먹고, 완전히 푹 익은 것을 저녁에 먹었다고 합니다.
-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는 요리 마지막에 신맛을 살짝 더해 마무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딘가 좀 부족하게 느껴지던 맛이 전부 해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럴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레몬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에 레몬이 없으면 불안해질 만큼 제게 레몬이라는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지요. 신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레몬을 많이 사용한 음식이 힘들 수도 있지만, 다른 해결책을 아무리 깊게 생각해 봐도 역시 레몬만 한 것이 없어서 ...
- 로즈마리를 심은 작은 화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자연 건조 상태가 되고는 하는데, 대신 그만큼 향기가 강해집니다.
-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당신 책을 보고 요리를 했는데 향신료나 허브가 너무 많이 남는다"라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 내심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사실 문제는 프레시 허브지요. 팩이나 봉투에 든 허브는 눈으로 봤을 땐 적어 보여도 의외로 몇 차례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양이든 경우가 많아요. 요리 하나 만드는 데 타임 세 줄기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그것만을 위해서 산다는 건 조금 무리라고 여길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요. 게다가 모두가 마음속에 '허브라는 건 좋네'라는 생각을 품고는 있지만, 한편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현실입니다. 실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허브의 경우는 아무래도 이미지가 지나치게 앞서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가끔은 평범한 생선구이를 양식풍으로 만들어보고 싶을 때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해 둔 생선에 칼집을 낸 후 허브를 사이사이 꽂아주거나 배 속에 넣어주면 좋습니다. 이때 너무 많이 넣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듬뿍 사용하는 편이 향을 충분히 내는 데 효과적입니다. 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요. 그렇게 사용했는데도 남은 타임이나 로즈마리는 줄기째로 말리면 됩니다. 건조되면 잎 부분만 뜯어 병에 담아둬도 되고, 줄기째 사용해도 좋아요. 향이 강해져서 평범한 생선구이도 프랑스 요리로 탈바꿈할 테니까요. 수프에 조금 넣어보는 건 어떨까요. 수프에 넣을 때는 한 자밤 정도의 허브를 손가락으로 잘게 부숴 넣어주면 혀끝에 닿는 맛도 방해받지 않고 좋아요. 모두 기억해 두면 좋은 방법이겠지요? 어찌 됐든 저는 주위에 허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러니 일부러 조금씩 남겨두라고 말하고 싶어지네요.
- 최근에 생강이 유행인가 봅니다. 인스턴트 수프나 마실 것에도 생강이 들었다는 문구를 제법 보게 되니 말이죠. 심지어 꽤 잘 팔리는 듯합니다. 저의 생강 이력은 꽤 긴데, 생강 특유의 매운맛에 상당히 둔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주 사용합니다. 수프에 생강을 넣고 끓이면 언제나 "생강 맛이 강하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쩌면 나, 생강 풍미는 느끼지 못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니까요. 곱게 다져서 아침부터 요구르트에 넣어 먹는다든지, 밀크티나 뜨거운 레몬차, 미소시루 등에도 넣어 먹습니다.
- 향신료가 든 마살라티, 전분을 풀어 만든 중국식 수프, 타이완 샤오룽바오, 향신료를 사용한 팽데피스(Pain d'épices, 초콜릿케이크) 등은 생강과 만났을 때 그 맛이 배가되는 음식입니다. 타이베이의 인기 있는 가게에서 나무 찜통에 가지런히 놓인 한입 크기의 샤오룽바오를 처음 먹었을 때, 가장 중요한 샤오룽바오의 맛보다도 깊이 감동했던 것은 생강 사용법이었습니다. 무척 섬세했거든요. 정말 놀랄 정도로 곱게 채친 생강은 사각의 중식칼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조금 과장을 보태서 실처럼 가늘게 썬 채.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가늘게 채 썬 생강과 흑초의 배합은 샤오룽바오 말고도 돼지고기 찜이나 닭고기, 후로후키다이콘(ふろふき大根, 무나 순무를 둥글게 썰어 흐물흐물하게 삶아서 된장을 쳐서 먹는 요리) 같은 간단한 요리와도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예요. 여기에 고추기름이나 두반장을 곁들이면 입안을 톡 쏘는 매콤함도 함께 즐길 수 있지요. 아직 이 맛을 못 느껴봤다면 너무나 안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추천하고 싶은 양념입니다.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예요. 곱게 간 생강에 소금, 레몬즙을 넣고 참기름과 섞어주면 정말 끝내줍니다.
- 팽데피스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빵 중 하나입니다. 향신료가 귀중품이었던 그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빵이지요. 버터나 달걀을 넣고 부드러운 파운드케이크처럼 굽는 것인데, 약간 탄력이 있는 것은 아침 식사용으로 제격입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건물 등의 모양을 따서 굽는 것도 있고, 벨기에의 노포 빵집에서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구울 때는 버터는 넣지 않고 약간 단단한 식감의 생지로 만듭니다. 만든 후 2,3일 정도 지나면 한층 맛이 드는 타입이지요. 영국이나 미국의 진저브레드맨이 팽데피스의 이웃사촌쯤 됩니다. 이것도 생강과 향신료를 넣어서 만드는데, 밀크티와 궁합이 좋은 소박한 맛이지요.
- 그러고 보니 화과자에도 의외로 생강을 많이 사용합니다. 설탕과 생강을 섞은 간단한 배합의 생강설탕을 사용한 것인데, 전체가 생강 맛이라기보다 가끔 생강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정도의, 있는 듯 없는 듯 사용하는 것이 화과자다운 면이라고 하겠습니다.
- 그 외에 간단한 생강 활용법을 떠올려보면 꿀이나 메이플시럽에 가미한다든지, 아주 가끔이지만, 붉은 강낭콩이나 검은콩을 조릴 때 넣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곱게 간 생강을 수프에 넣고 끓여 먹으면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좋고, 막 간 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해독에 효과적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계절 따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생강을 더 자주 사용하고 싶습니다.
- 아직 요즘처럼 소금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 집에 있던 온기 있는 소금은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물기가 전혀 없이 보슬보슬한 소금 하고는 너무나 달라서 어린 마음에 왜 우리 집 소금은 끈적끈적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게다가 맛도 진하고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최근에는 천일염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점차 자연 지향, 건강 지향적 사회 분위기도 한몫해서 이제 시중에서는 산지나 제조법이 저마다 다른 다양한 종류의 소금이 판매되고 있지요. 제가 확실히 소금의 소중함을 느낀 계기는 채소요리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던 시점부터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날 소금을 살짝 가미한 것만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맛이 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이죠. 당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정제도 낮은 회색소금을 채소를 데치는 데 한 자밤 넣었을 뿐인데 그렇게나 맛이 달라지다니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도대체 맛의 깊이는 어디서에서부터 나오는 걸까, 소금 하나로도 이 정도까지 바뀐다면 단순한 채소요리도 다른 요리 못지않게 맛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렇게 깨달은 저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소금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에 지금은 제법 유명해져 브랜드화가 된 게랑드 Guerande라는 소금 생산지가 있습니다. 그 근처에는 누아르무티에 Noirmoutier라는 섬이 있고, 조금 더 남쪽으로 라로셸 La Rochelle이라는 항구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길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일 드 레 ile de Ré라는 소금 산지가 있습니다. 게랑드에서 처음 맛본 프랑스 소금 중에서도 밸런스가 가장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바로 이 섬의 소금입니다.
- 장기 보존은 성격상 맞지 않는 듯하지만요.
그럼 채소는 어떨까요. 여름에는 토마토에 올리브유를 붓고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먹기도 좋고 보관하기도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길어봤자 일주일이면 다 먹을 수 있고요. 보존기간이 짧은 편이 마음도 편합니다. 소금을 치면 토마토의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오는 탓에 토마토 올리브유 절임에는 소금을 넣지 않지만, 여주는 어떨까 궁금해져서 거칠게 간 여주에 소금을 뿌리고 작은 병에 담아 냉장고에 두어봤습니다. 그 맛이 의외로 좋아서 무침이나 각종 토핑으로 활용해 닷새 만에 다 먹었어요. 아마도 여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참을 수 없는 맛일 거예요. 물론 여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특유의 쓴맛이 싫을 수도 있지만요.
- 앞에서 닭고기에 소금을 뿌려 보관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도중에 물기를 제거해 주면서 완성한 염장육은 짠맛이 강하다기보다 소금의 풍미가 고기에 천천히 배어든 느낌이지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 조금 더 손쉬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염장한 것의 소금기를 제거할 필요 없게끔, 하룻밤 내지는 최대 2,3일 정도만 염장하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보존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도 확실히 맛이 좋아집니다. 세상 귀찮은 게 많은 타입인 저로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전부를 그 자리에서 만드는 수고의 일부를 저장해 둔다는 이미지랄까요.
- 불린 후 물기를 빼면 냉채 재료로 활용하기에 편리합니다. 그대로도 충분히 맛있다며 불린 무말랭이에 굵은 소금을 살짝 뿌려, 그것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는 주당 친구도 있어요.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재료의 특성을 제대로 인지한 예인데, 말려서 한층 단맛이 깊어진 무말랭이가 굵은 소금의 미네랄 성분을 품은 짠맛과 만나 좋은 술안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여기에 식초를 뿌리면 냉채가 됩니다. 너무 공을 들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지만, 느억맘(Nuoc Mam, 생선을 발효시킨 일종의 장)과 레몬즙을 뿌리고 참기름을 한두 방울 넣고, 다진 향채를 넣어주면 마치 베트남에 진짜 그런 요리가 있는 듯 에스닉한 풍미의 무말랭이 샐러드가 됩니다. 그 밖에도 석쇠에 구워 찢은 말린 오징어나 다져서 볶은 말린 새우, 젓갈, 유자후추, 구운 김 등 무말랭이와 어울리는 재료는 산처럼 많아요. 물에 불리는 것 정도는 요리를 하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을 테니 얼마든지 무말랭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 배꼽 무처럼 본디 두껍게 썰어서 말린 것은 물에 담갔다가 끓여서 사용합니다. 처음 해보면 누구나 놀랄 정도로 변신하는 모습에서 건물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거예요. 더욱 훌륭한 점은 말린 무 자체가 맛국물의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건물의 최대 특징과 장점은 그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대체로 건물 불린 물을 반 정도 사용해(맛국물의 농도는 그 정도가 좋습니다) 의외로 단순하게 소금 약간과 간장 정도를 넣고 끓입니다. 만약 뭔가 더 넣고 싶다면 소량의 닭고기나 푸른 기를 돌게 할 채소 정도이지요.
- 그 외 말린 채소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죽순이에요. 규슈에서 찾은 말린 죽순은 그때까지 제가 알고 있던 죽순 써는 법과 달리 상당히 얇게 슬라이스한 것이었어요. 비교적 큰 죽순의 단면도를 떠올려보면 그 모습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험 삼아 맛을 봤는데, 그대로 단초에 적시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방법이 매우 간단한 재료였습니다. 토란이나 머위와 함께 끓이면, 이것 역시 좋은 맛국물이 되고요.
- 진한 맛국물이라고 하면 말린 표고버섯이 대표적인 강자입니다. 저는 맛과 향이 강한 표고버섯 맛국물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잘 다루고 싶은 재료 중 하나예요. 그리 어렵지 않은 아사즈케(浅漬け, 통째로 말린 무·가지·오이 등을 소금과 누룩이나 겨에 절인 것)를 만들어볼까 생각하던 차에 오이와 무를 시로쇼유(白醬油, 밀가루를 주원료로 한 호박색의 간장)에 절이는 것을 떠올렸는데, 맛을 한층 깊게 하기 위해 작게 자른 다시마 외에 시험 삼아 말린 표고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몇 개를 넣어봤어요. 때때로 재료를 잘 섞어주면서 절여두자 표고버섯은 마치 다시 생을 얻은 것처럼 부드러워지고 모습도 변했습니다.
- 이 희한한 형태의 도구는 안에 가는 체가 든 채소 분쇄기로 물랭 아 레귐 moulin à légume이라고 합니다.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나름 프랑스가 고향이에요. 약 70년 전에 발명된 이래 프랑스 가정요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주방도구가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푸드 프로세서나 믹서가 워낙 잘 발달해서 어쩌면 이 분쇄기도 추억의 도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입구가 넓은 본체에 구멍의 크기가 다른 원형 판 부속이 두세 장, 그것을 달칵하고 끼우고 나사 같은 손잡이를 끼웁니다. 볼이나 냄비에 올려놓고 잘 고정한 후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삶거나 찐 채소를 으깨거나 거르는 게 이 도구의 쓰임입니다.
- 제 경험에 비춰보면 길이 들면 차츰 나아지지만 처음 사용할 때는 조금 힘을 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찬장에 넣어두기 힘든, 게다가 설거지도 쉬워 보이지 않는 모양새랄까요. 자주 사용할 것 같은 물건은 아니지요. 참으로 사용하기 귀찮은 생김새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써보면 의외의 실력에 놀라게 됩니다.
- 제가 처음 산 물랭은 파리의 시장에 있는 철물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팔던 것이었습니다. 버튼 같은 붉은 손잡이가 있는, 어딘가 무사태평한 모습이 도무지 밉지가 않았지요. 이것만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를 일이지만, 처음 이 물건으로 채소 퓌레를 만들었을 때는 프랑스 가정요리의 토대를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소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는 것은 달리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식감 때문입니다. 포타주(potage, 고기 따위를 넣어 진하게 끊인 수프)는 분명 프랑스의 미소시루 같은 음식이구나 하는 것을 저는 이 물랭을 사용해 요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 우선은 삶은 감자, 당근, 양파 등을 걸러서 포타주를 만들어보세요. 맛있는 매시트포테이토도 물랭을 사용하면 점성이 생기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철망에 끼운 체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할 뿐 아니라 훌륭한 매시트포테이토를 완성할 수 있어요. 여러분도 한 번쯤 써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 바구니를 만드는 역사는 직물을 짜는 것보다 오래되었거나 그 비슷한 정도일 거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다케자이쿠(竹細工, 대나무를 가공하거나 대오리를 엮어 세공물을 만드는 것) 장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게 앞에서 대충 엮은 듯한 꽃바구니를 보여줬을 때 저도 모르게 "직물 같네요"라고 말하자 그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에 대한 이미지는 예쁘고 귀여운 것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바구니가 널리 퍼지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현실과는 좀 동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도구를 갖추고 보자는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교토에서 산 '미스야추베이 みすや忠兵衛'의 사용감 좋은 가위와 용도와는 별개로 예쁜 종이에 포장된 바늘은 늘 지니고 있습니다. 같이 산 바늘은 유리옥이라고 부르는 머리 부분이 굉장히 아름다워서 마음에 쏙 들었지요. 색도 은은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저 갖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은 어쩐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처럼 지금의 제겐 다소 레벨이 높아진 바느질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이것들을 갖고 있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요리와 재봉은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이나 실을 이용해 손을 움직이는 것과 요리가 좋은 것은 아마도 같은 이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 옛 아오모리의 인상이라고 하면, 어린 제게는 밝은 곳이라는 느낌보다는 무서울 정도로 크다고 느낀 역 앞 시장의 번화함과 아오모리역 플랫폼 너머로 해협을 건너 홋카이도로 떠나는 배가 출항하는 모습 등이 떠오릅니다.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는 광경을 그곳에서는 보게 되니까 전혀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지금도 그 풍경은 현실이 아니라 마치 옛날이야기 속 세계 같은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 아오모리의 요리는 수작업 그 자체입니다. 내용물이 가득 든 게노시루(けの汁, 아오모리현 쓰가루 지방부터 아키타현에 걸친 향토음식, 작게 썬 채소를 다시마 우린 국물에 넣고 끓인 국의 일종)라는 국물 요리는 정성껏 다진 엄청난 양의 채소를 넣고 끓이는 것입니다. 언제나 쉬지 않고 일하는 여성들이 정월 하루쯤은 쉴 수 있도록 한꺼번에 많이 끓여두는, 일종의 아오모리 판 미네스트로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피레네의 가르뷔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향토요리는 어째서 이렇게도 훌륭한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값비싼 재료 대신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이겠지요. 기후와 풍토에 맞춘, 검소하고 성실한 손맛. 여기에 제가 한 가지 더 찾은 세련된 멋이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고긴사시(こぎんさし, 아오모리현 쓰가루 지방에서 전해진 자수 기법 중 하나)에 만드는 사람 개인의 아이디어가 가득 담긴 점도 요리의 세련미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아오모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전국 어느 지방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일 거예요. 이 얼마나 멋집니까. 이러니 좀 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지혜가 여전히 많이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지요.
- 히로사키는 조카마치(城下町, 쇼군과 다이묘의 거성에 형성된 계획도시)였던 점도 영향을 받아 화과자점이 의외로 많습니다. 화과자의 멋진 점은 상자에 빼곡하게 담긴 세계관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재료의 단순함도 포함해 심플한 모양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사카'의 다케나가시(竹流し, 은은한 메밀향과 바삭한 식감의 센베)라는 화과자의 심플함, 정말 조금도 무리한 기색 없이 그저 납작하게 구운 과자가 상자 안에 촘촘하게 담긴 모습의 균형감은 이보다 절묘한 것을 달리 보지 못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로 과자가 맞을까? 과자라는 이름을 빌린 뭔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니까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먹어보면 메밀 풍미를 음미할 수 있는 친숙하고 소박한 맛의 화과자입니다.
-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영국의 도예가)를 통해 해외의 공기를 직접 느낀 그들의 생활을 떠올리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일상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릇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조금 고도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보는 방식과 보이는 방식은 확실히 우리 일상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매력적인 도구가 갖는 공통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더군요. 예를 들어 마치 유럽의 소박한 목판화에 있을 법한 유머를 표현한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일본 아오모리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나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일본의 시인, 동화작가)의 언어와 그림에 표현된 이국적인 정서 같은 것에는 어딘가 사람이 지닌 사랑스러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스러움이 형태를 띠고 나타난 듯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귀염성'이라고나 할까요. 몇 년 전에 오키나와에서 본 긴조 지로(金城次郎, 오키나와 출신의 도예 인간문화재)가 만든 쓰보야 시대의 그릇에서도 느낀 거지만, 자연의 형태를 예술적으로 변형한 무늬에서는 밝고 따뜻함이 느껴졌고, 서양과자를 담아내기에 잘 어울릴 듯했지요. (쓰보야야키는 17세기 후반 류큐왕국 때부터 전해지는 오키나와만의 특색 있는 도자기로 현재는 나하시 쓰보야 지구 및 요미탄촌 등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 저의 벼룩시장 역사를 되돌아보면, 귀엽고 아기자기한 잡화는 하나도 산 적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들도 산 적이 없네요. 제가 주로 사는 거라고는 중고 잡동사니들뿐이에요. 너무 많이 사용해서 변형이 되었거나 표면이 벗겨진 실버 수프 튜린(tureen, 수프 따위를 담는 뚜껑이 달린 움푹한 그릇) 같은 것들, 여기에 낡아빠진 헝겊, 팔다 남은 삼베, 오래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테이블 클로스, 방치된 듯 바닥에 마구잡이로 놓인 업무용 식기 등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들만 삽니다. 물론 때로는 크리스토플 Christofle의 커틀러리를 사기도 하지만, 그것도 정통파라기보다는 사용하기에 다소 무겁고 칙칙한 느낌의 양각 무늬가 새겨진 것들이지요. 이처럼 어딘가 요상한 타입을 사버리고 맙니다.
- 현실적인 생각으로 물건을 산다면 그것이 집에 오는 순간 상상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벼룩시장에서 산 물건들은 누가 어떤 식으로 매일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넣고,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끊이지 않죠. 또한 도구든 식기든 손에 익고 나름의 맛이 날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물건도 아름답지만, 몇 번씩 닦고, 오랫동안 사용해서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친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물건은, 비록 잡동사니에 불과할지라도 좀처럼 버리기 어려운 매력이 있지요. 생각해 보면 매일같이 애용하는 접시나 커틀러리, 클로스도 무엇하나 벼룩시장에서 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오랫동안 사용했을 게 분명한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며 선반에 놓여 있지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가 긴 시간 동안 물건들을 줄곧 사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잘 관리되고 사용된 도구나 식기의 힘을 빌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릇이 바뀐 이유는 자신이 만드는 요리의 모습이 변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간단히 답이 나옵니다.
실은 식기 선반을 볼 때마다 시험 삼아 일단 써본 후에 이거다 하는 것을 골라 딱 그 한 가지 종류로만 구색을 갖추고 싶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른 브랜드의 흰색 그릇이 잔뜩 쌓여 있지요. 사정이 이러하니 꿈에 그리는 정갈하게 정돈된 식기 선반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 전에 영국의 건축가가 요리연구가와 함께 만든 레시피 책을 보고 엄청 부러워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작풍, 다시 말해 해외에서 말하는 '젠 ZEN 테이스트'가 물씬 풍기는 디자인으로 공간을 철저하게 꾸민 점이었습니다. 식기는 웨지우드의 본차이나 시리즈를 사용했는데, 형태는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서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요리도 심플하고 모던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시리얼 볼에 접시 두 종류, 여분의 커다란 볼과 오븐웨어가 몇 개 있을 뿐. 그다음에는 그것들을 돌려가며 사용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가까운 시일 내에 저도 한번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다만 식기 전부를 한 가지 브랜드로 마련하는 게 아니라, 제각각 브랜드는 달라도 어울리는 것들끼리 잘 정리해서 쓰는 것이지요. 비슷한 모양끼리 모아도 재미있을 거고요. 그런데... '뭐야, 지금하고 별로 달라지는 게 없잖아' 하고 깨닫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슬픈 사연이... 일단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철저하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이지요.
- 비대칭이 매력인 그릇 중 하나를 꼽자면 '체체 Tsé & Tsé associées'의 흰색 시리즈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애용하는 것으로 볼과 컵, 크고 작은 플레이트, 거기에 파리에서 사 온 연못 같은 형태의 그릇을 사용하고 있어요. 전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 다른 그릇과 함께 놓았을 때 희한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점이 매력입니다.
- "흰색 그릇이 참 많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자세히 보면 전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색이나 질감의 다양한 면을 그릇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한 종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흰색도 그 폭이 넓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 외 밝고 알록달록한 색까지 신경을 쓸 여지가 없어지고 말아요. 식재료에 색이 없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녹황색채소만 놓고 봐도 다양한 색의 종류를 담아내므로, 역시 식재료의 색깔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궁극의 심플함을 동경하지만 잡다하게 모은 백색 그릇은 저마다 좋아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당분간 정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흰색 그릇을 사용하는 기술을 더욱 갈고닦을 수밖에요.
- 형태와 질감, 색, 그것은 어딘가 요리와도 닮아 있습니다. 어쨌든 사용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해 딱히 당장 필요하지 않은데 그릇을 사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분명 인기가 있을 게 틀림없는 '아스티에 드 빌라트 Astier de Villatte'라는 프랑스 브랜드가 있습니다. 이 브랜드의 상점 안은 온통 흰색 그릇으로 가득하지요. 독특한 질감을 가진 유럽 스타일의 흰색입니다. 클래식한 그릇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어딘가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사랑스럽다기보다 개성이 강한 인상이에요. 꽤 오래전에 런던에서 이곳의 그릇을 발견했을 때는 제가 만든 요리를 담을 만한 그릇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쩌다 보니 그릇 하나를 샀습니다. 마치 입지도 않을 거면서 충동적으로 사서는 옷장 안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 보는 셔츠 같은 존재였던 셈이지요.
- 일상적인 식사를 조금 더 특별하게 차리기 위한 한 가지 힌트는 바로 식사의 기승전결입니다. 식사 시작부터 마무리까지의 흐름과 고조, 그리고 그 끝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인 셈이지요. 반찬을 한상에 차려 내놓는 일식에서는 아무래도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술 한잔과 안주가 될 만한 것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 주변의 술꾼들을 보면 일본 요릿집이나 이자카야에서든 비스트로나스시 가게에서든 간에 술과 약간의 안주만으로도 오랫동안 즐긴다는 사실에 감탄하곤 합니다.
- 술 한잔과 아주 소박한 무침이나 찬 날두부 요리 같은 것으로 시작해, 다음은 시간차를 두고 밥과 국물 요리, 무즙을 올린 생선구이나 찜 요리를 함께 식탁에 올리는 거예요. 정식의 일부를 따로 떼어냈다는 느낌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즈음 과일이나 차로 식후의 여운을 만들어줍니다. 이때도 평범한 방법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분으로 나눠 낼 것인가, 한 번에 담아내고 그 자리에서 나눠 먹을 것인가 등 식탁에 어떤 식으로 내놓을 것인가에 따라 의외로 식사의 전체적인 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일식의 경우에도 양식 코스요리나 작은 요리를 여러 차례 나눠 내는 가게의 방식을 떠올리면 어쩐지 제대로 대접받았다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요리를 한꺼번에 차려내지 않고 시간자를 두고 냄으로써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다 보니 음식에 대한 인상이 뒤섞이는 것을 방지하는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평소 식사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먹으면 기분이 달라질 겁니다.
- 그렇다면 사람을 초대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애써 불리서 왔는데 대접하는 느낌이 없는 것도 좀... 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큰맘 먹고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내는 것도 좋지만 음식을 하느라 기진맥진해지는 것도 싫다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한 가지 팁은 기승전결이 있는 식사 구성입니다. 다소 젠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한 상 차려내지 않는 것도 요령이지요. 하지만 내용은 평소 먹는 요리를 기본으로 하는 것. 처음에는 조금씩, 평소보다 반찬 가짓수를 한 게 정도 더 만드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저는 참기름이나 레몬, 고추에 유자후추 등 향기가 강한 재료의 힘을 빌려 극히 단순한 채소 요리(예를 들어 살짝 데쳐서 양념을 한 무침 정도)를 몇 접시 준비합니다.
- 다음은 디저트. 사실 디저트라고 해도 딸기에 설탕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적당한 타이밍, 딸기와 설탕이 잘 어우러져 맛이 들기를 기다렸다 손님상에 내면 디저트다운 느낌이 나지요. 어떤 의미로는 이 디저트의 시간이 그날 대접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식후의 시간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어떤 식으로 식사를 매듭지었는지에 따라 그날의 식사에 대한 인상이 정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구성하는 식사에서 중심은 의외로 디저트에 있고, 그것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양을 많이 만들기보다 맛의 조화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적게 만들고, 대신 궁합이 좋은 초콜릿을 조금 곁들이는 식으로 하고 있어요. 아이스크림이나 젤리를 만들어 과일 마멀레이드나 소스를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초콜릿을 먹거나 차와 커피로 마무리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식후의 여운이 오래 지속되지요.
- 제게 술과 커피는 비슷한 거리에 있는 것들입니다. 재료의 산지나 제조방법, 만드는 사람, 온도, 내리는 방식, 가는 방법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맛이 변하고, 그 지방의 풍속이나 인품이 드러나는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 점이 대단히 흥미롭고 좋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그다지 잘 마시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 그런 제가 사서 쟁여둔 술들이 있어요.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그중 화이트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발포주, 증류주, 청주, 긴조슈(吟醸酒, 60퍼센트 이하로 도정한 백미를 원료로 저온 발효해 빚은 청주), 다이긴조슈(大吟醸酒, 50퍼센트 이상으로 도정한 백미를 원료로 빚은 긴조슈 중 특히 향과 색이 좋은 것). 거기에 직접 담근 매실주까지 여러 종류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주위에 굉장히 많지만, 어떻게 봐도 공급과잉이라 한동안은 술을 더 사지도 만들지도 말고 마셔 없애야 할 지경입니다. "뭐야~그런 거면 얼른얼른 말해! 언제라도 마시러 갈 테니까"라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어떤 술을 어떤 요리와 곁들여 마시면 좋을지는 제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술, 특히 향기가 짙게 감도는 화이트와인과 채소 요리가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여긴 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 남서부의 피레네에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이제와 떠올려 보면 그 주변 지방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중심가는 포 Pau라는 곳으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된 시장과 향토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맛있는 과자점 등이 있습니다. 게다가 날씨 좋은 날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피레네산맥은 그야말로 천상의 낙원 같았지요. 전에 이 지방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먹은 가르뷔르라는 소박한 수프에 완전히 매료된 이후, 만드는 것도 먹는 것도 절대 질리지 않는 이 수프를 시작으로 피레네 주변의 작은 밭에서 만들어진 와인으로까지 제 관심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포에서도 가까운 쥐랑송 Jurangon이라는 지역은 달콤한 화이트와인 산지로 유명합니다. 몇 번인가 그곳에서 머문 적이 있는데, 향기 짙은 쥐랑송의 와인에 완전히 빠져들었지요.
- 도멘 드 수크의 당주인 이본 씨의 와이너리는 포 시내에서 산 쪽으로 향하는 몇 개의 포도밭을 지난 지점의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 주변의 포도밭은 부르고뉴 같은 곳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담한 편입니다. 지형이 다르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도 같은 포도밭이 이어지다 그 앞을 피레네산맥이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건물 앞의 정원수에는 짙은 색의 장미가 피어 있고, 경사면에 닿아 있는 포도밭 바로 앞에는 렌클로드 reineclaude라는 매실 같은 푸른 자두와 작고 빨간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가 심겨 있어요. 이런 풍경에 스며들 듯 흰색에 붉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이본 씨가 추천하는 떫은 맛, 중간 맛, 디저트처럼 단맛의 와인까지 정성스레 빚은 쥐랑송의 와인을 마시고 있자니 땅과 요리가 완벽하게 이어진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 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려보면 마음이 끌리는 요리의 곁에는 반드시 맛있는 와인이 있었네요.
도멘 드 수크뿐만 아니라 쥐랑송의 와인, 특히 타닌(tannin, 포도의 껍질이나 그 밖의 부위에 자연적으로 들어 있는 물질)이 많거나 중간 정도의 종류는 일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달콤하고 향이 짙은 와인이라면 알자스나 모젤, 최근에는 일본의 와인도 맛있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조합해 보고 시험해 보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술 중에서도 발포주나 숙성주 같은 것도 있고, 원료만 다를 뿐 와인과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느낀 긴조슈에 놀란 적도 있습니다.
- "술 잘 마시지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때도 있어요. '내 요리가 술과 잘 어울리는 것들이 그렇게 많은가?'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 그럴 의도는 없는데, 요리를 하다 보면 술이 있는 식탁을 떠올리며 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네요.
- 무엇보다 간단하지만 재료에 따라 꽤 깊이가 느껴지는 술안주가 있습니다. 우선 무, 또는 무와 오이 등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썹니다. 오이는 조금 두껍고 비스듬하게 썰어도 됩니다. 큰 볼에 재료를 넣고 굵은 소금을 뿌립니다. 고운 소금은 짧은 시간에 재료 속으로 스미기 때문에 약간 굵은 소금을 선택하는 편이 좋아요. 살짝 버무려서 약 3분. 흐르는 물에 소금기를 살짝 씻어냅니다. 짭조름한 맛이 벤 무는 단순한 채소 스틱이 아닌 조리되고 맛이 밴 무가 됩니다. 고소한 참기름을 살짝 찍어서 먹거나, 유자후추를 가미해도 좋아요. 유자후추하면 마요네즈와 섞어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지요. 평소에는 마요네즈를 많이 쓰지 않는 편이지만, 유자후추와의 궁합이 너무나 좋고 더없이 간편하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유자후추는 사실 아보카도 스틱에도 잘 어울립니다. 할라피뇨보다 상큼하고 조금 더 고급스러운 맛이 나요. 아름다운 초록색 동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다음은 토마토. 작은 크기의 토마토를 반으로 잘라서 꼭지는 칼로 도려낸 후 접시에 올립니다. 거기에 굵은 소금을 아주 약간만 뿌려줘요.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소금을 뿌린 후 약 1분 정도 기다렸다 올리브유를 한 번 뿌려주면 끝. 소금기가 살짝 감도는 토마토 샐러드 완성입니다. 물론 여기에 취향에 따라 안초비나 올리브유에 절인 정어리를 올려도 좋습니다. 저는 이처럼 'ㅇㅇㅇㅇ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식의 요리를 좋아합니다.
- 조금 더 공들여 만든다면 토마토를 끓는 물에 3~5초 정도 데쳤다 식힌 후 껍질을 벗겨 위에서 설명한 대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먹을 때 식감이 훨씬 좋아지지요. 끓는 물에 데칠 때도 요령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 담가서도 안 되고, 또 너무 짧으면 데치는 의미가 없어요. 조금 큰 토마토는 위아래로 뒤집어가며 5초씩 담갔다 꺼내고 온도를 내려주기 위해 큰 볼에 찬물을 붓고 토마토를 담가둡니다. 만약 껍질 일부가 찢어졌거나 벗겨졌다면 찬물에는 담그지 않는 편이 좋아요. 실온에서 식힌 후 껍질을 벗겨냅니다. 껍질이 찢어질 정도로 오래 데치면 껍질을 벗길 때 껍질 바로 아래 가장 맛있는 부분까지 함께 벗겨질 뿐 아니라 모양도 형편 없어지니 주의해야 해요. 한편 너무 짧게 데쳐 껍질이 벗겨지지 않으면 다시 한번 뜨거운 물에 넣었다 빼면 되지만, 그때도 만약 껍질이 찢어지거나 하면 찬물에 넣는 것은 절대 금지입니다.
- 소금을 뿌리고 데치는 정도일 뿐이지만 이것도 요리입니다. 맛이 잘 어우러지도록 그저 소금만 뿌렸을 뿐인 채소가 아주 훌륭한 요리가 되는 것이지요.
술을 맛있게 마실 수 있도록 곁들이는 요리는 심플함과 소박한 맛을 잘 살리는 게 포인트입니다. 설마 이런 것만 계속 얘기하니까 술꾼이라는 말을 듣는 걸까요?
- 여행지에서 느낌 좋은 식기를 발견하거나 요리를 내놓는 방식이 요리의 내용보다 인상적으로 남으면, 돌아와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따라 해 보곤 합니다. 그중 대부분은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고 비스트로도 아닌, 일본으로 치자면 이자카야 같은 가게의 방식이 많아요. 술은 못하지만 좋아는 하는(전혀 못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저로서는 맛있는 토주와 함께 무슨 요리를 어떻게 내놓을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 우선 요리를 하기 전에 제가 항상 내놓는 컵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데가 Bodega라는 이름의 원통형 스타일의 컵입니다. 항간에 지명도가 올라간 바스크 지방 특유의 것으로 그곳에서는 어느 가게에서나 대중소 세 종류 모두를 사용하는 듯했습니다. 처음 본 순간, 어쩜 이렇게 멋질 수가! 하고 감탄하며 앞으로는 뭐든지 보데가로 마시겠다고 정할 만큼 단순하고 아무 장식이 없는 그 모습에 빠져들었지요. 고추 축제에 나온 가게에서 여섯 개 묶음으로 가장 작은 컵을 구입한 이후, 보데가는 제 주방에서 차츰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주의해서 잘 보면 S사이즈는 샹그리아나 시드르, M사이즈는 와인이나 주스, 제법 큰 사이즈는 물 또는 술통에서 직접 따르는 시드르, 공기와 맞닿으면 더 맛있어지는 미세 발포 화이트와인 등에 사용하는 듯했습니다. 바스크에서 정말 많이들 마시는 이 차콜리(Txakolí, 알콜 도수가 낮고 약간 신맛이 감도는 와인)라는 와인은 M사이즈에 따라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컵의 아랫부분이 묵직하고 두껍지 않아 전체적으로 섬세함을 더해주는 느낌입니다.
- 바스크에 갈 때마다 몇 개씩 사 오는 터라 자꾸 늘어가는 데도 비슷한 모양의 컵을 보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튼튼하고 사용하기 좋은 것은 ‘보르미올리 로코 Bormioli Rocco'의 것입니다. 한때 스페인 바스크 거리에서 굉장히 가벼운 보데가를 만났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선술집에서였습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가볍다고는 해도 물론 크리스탈일 리가 없는데, L사이즈 컵에 차콜리를 조금 따르자 법에라도 걸린 듯, 어떤 음료보다 맛있어 보이더군요.
- 문득 살펴보니 일본에서도 바스크의 지명도가 올라가면서 보데가를 사용하는 가게가 제법 늘었습니다. 잡화점에서도 판매하는 걸 보았을 때는 어쩐지 감회가 새롭더군요. 프랑스 바스크의 견고한 것, 스페인 바스크의 가벼운 타입,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어느 레스토랑에서 좀 더 섬세한 느낌의 보데가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보데가는 아무래도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터라 보면 그 차이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이 컵은 얼핏 통짜로 보이지만 실은 컵의 입 쪽으로 향할수록 아주 살짝 벌어져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찾은 컵은 거의 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습니다. 정말 절구 같은 모양새였지요. 뭔가 약간 격식을 차린 듯한 분위기가 어찌나 좋던지, 도대체 어느 브랜드의 것인지 바닥 면에 적힌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RIEDEL'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리델의 H2O 클래식 바 시리즈였어요. 저런, 이렇게 곤란할 수가. 이렇게 되면 또 늘어나겠군.
- 그 후 다시금 느낌 좋은 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엔 뭐지 하고 살펴보니 '알레시 Aless'에서 새로 출시한 것인 듯했어요. 이렇게 되면 졌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가장 작은 화이트와인용 컵을 사고 말았어요. 그런데 이거 정말로 화이트와인용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텀블러 느낌의 사이즈였습니다. 컵 네 개가 예쁘게 디자인된 상자에 곱게 포장되어 왔지요. 실제로 사용해 보니 역시 화이트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과연 디자인은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로 알레시의 보데가 컵을 디자인했다) 만한 인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완전히 절구 같지도 않고, 미묘하게 볼록하게 디자인된 부분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얼마 후 레드와인은 물론, 물 컵으로도 애용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몇 종류의 보데가가 혼연일체가 되어 트레이에 올려져 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이 많이 사들이는 것만은 주의하고 있습니다만, 저희 집에 있는 많은 보데가들을 구별하는 것은 아마도 저뿐이겠지요.
- 요리 자체가 멋을 부린 스타일은 아니라서 손때 묻은 테이블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 요리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지요. 하지만 바스크식으로 테이블러너처럼 폭이 좁은 테이블클로스를 씌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주문이나 자기 암시 같은 것인데,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박물관에서 산 테이블클로스는 소박하고, 커다란 냄비에 끓인 요리가 있는 식탁에 딱 어울릴 듯한 스타일입니다. 간신히 테이블을 커버할까 말까 한 정도의 크기라서 거기에 올려놓을 그릇은 두툼하고 소박한 것이 딱 어울리지요. 혹은 커다란 빵이나 길쭉한 빵, 또는 두툼한 빵을 식탁 가운데에 놓아도 좋습니다. 작은 빵이라면 바구니에 가득 담아두어도 좋고요. 하지만 대체로 저는 나무 도마에 길고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바게트(뤼스티크 rustiqu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를 올리거나 또는 독일식 호밀이나 통밀로 만든 커다란 덩어리의 빵을 올립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것은 둥근 형태의 빵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둥근 빵을 좋아하지?" "또 둥근 빵이야?"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어느샌가 그것이 "둥근 물건을 좋아하지?"라는 식으로 발전했을 정도로 동그란 형태의 빵을 무척 좋아하지요. 팽드캉파뉴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테이블 한가운데에 올려놓는 식입니다. 그다음은 컵과 평소 요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상승하는 듯합니다.
- 캉파뉴라고 하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이지만, 유럽의 가정 요리, 그것도 현재가 아니라 조금 과거의 생활이 떠오릅니다. 이탈리아의 고산지대 마을에서 일 년 분의 커다란 빵을 한데 모아 굽는다는 관습은 물론,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원재료를 바탕으로 빵을 굽는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빵을 만든 후 시간이 흐르면 수분이 날아가고 점점 말라가지만 그것을 수프에 적셔 먹으면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을 테고, 궁합도 좋을 테지요. 손으로 잘게 찢은 빵을 넣은 수프도 있을 정도로 커다란 빵은 요리를 다 먹을 때까지 함께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 어느 날 '시니피앙, 시니피에 signifiant, signifié'라는 빵집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크기의 둥근 빵을 보았습니다. 그 커다란 빵을 통째로 사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반만 사 가지고 돌아왔지요. 잘 구워진 생지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촉촉했고,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이 지금까지 알던 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언젠가 이것을 통째로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던 차에 많은 직원들이 일하는 곳에 가지고 가서 테이블 위에 떡 하니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정도 크기의 커팅보드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도마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빵을 올렸기 때문에 그다지 멋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런대로 기대감을 높이는 아이템으로서는 제격이었습니다.
- 호밀이나 통밀을 밀가루와 섞어 만든 빵은 그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묵직한 느낌이 강합니다. 하얀 빵은 폭신폭신하고 쫄깃한 식감이 좋고요. 양쪽 다 매력적이라 어느 쪽을 더 좋아한다고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지만, 저는 평균적으로 생지는 옅은 갈색 빛을 띠고 탄력이 있으며 약간 신맛이 나는 캉파뉴처럼 살짝 묵직한 느낌의 빵을 즐겨 먹습니다. 메밀가루나 통밀, 호밀 등은 영양도 풍부해서 건강식으로도 불리지만, 사실 밀가루를 재배하기 힘든 지역에서 밀 대신 재배했던 지역 특산물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신맛이 있고, 배합에 따라 탄력 없이 부스러지는 빵은 독일에서 자주 먹는 종류의 것으로 차게 두었다가 슬라이스 한 무염버터를 바르고 굵은 소금을 아주 살짝 뿌리면 와인 안주로도 일품입니다. 물론 치즈와도 잘 어울리고요.
- 북유럽의 그릇이나 냄비는 쭉 사용해 왔으면서도 실제로 그곳에 간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핀란드 헬싱키는 풍토도 요리도 상당히 수수하다는 인상이 강한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거나 꾸미지 않은, 장식 없이 재료만으로 승부를 본다는 느낌의 다양한 음식이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고 또 그게 마음에 들었지요. 어딜 가나 그랬다고 할 만큼 수프 요리에 수북하게 곁들여 나오는 매시트포테이토도 프랑스에서처럼 버터를 듬뿍 넣어 크리미하게 만들지 않고, 전반적인 요리의 간이나 양념이 단순했습니다. 갈색 빵, 황색 치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훈제 생선, 한 그릇 가득 담긴 수프가 핀란드의 식탁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지요. 그런 단순함 때문일까요, 그곳의 음식이 그저 그렇다는 사람도 있지만 제게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 헬싱키는 북유럽 중에서도 러시아 색이 짙은 곳 중의 하나로, 거리에는 러시아 음식점도 꽤 많습니다. 간 김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 조금 찾아가기 힘든 후미진 곳에 위치한 러시아 요리 전문점을 찾아갔었지요. 그 덕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러시아 요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러시아 요리는 사우어크림이나 피클의 신맛을 살리는 게 특징인 듯합니다. 거기에 살짝 가미하는 단맛도 개성적이고요. 피클을 곁들인 사우어크림에 꿀을 넣어 완성한 전채요리는 너무 맛있어서 마치 미지의 음식을 만난 것처럼 오랜만에 즐거움이 샘솟았지요. 그런 요리에는 반드시 갈색이나 검은 빵이 곁들여 나옵니다. 그런 묵직한 빵들이 요리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었는데, 며칠 두고 먹어도 되는 빵은 사 가지고 오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지요. 얼마나 맛있었는지 일본에 돌아와서도 그때 먹었던 빵과 러시아 요리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 그러고 보니 후쿠오카 덴진에 위치한 러시아 요리점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더군요. 출장을 갈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은 '툰드라 Tundra'라는 곳은 식초에 절인 청어와 펠메니(pelmeni, 레몬 풍미가 감도는 시베리아식 물만두, 등 러시아 전통 요리)가 변함없는 맛으로 반겨주었지요. 양파 같은 채소를 장식하는 방식도 괴이함을 자랑하지 않고 전통파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검은 빵입니다. 몇 가지 요리와 마찬가지로 이 빵도 포장이 가능합니다. 검은 빵이라고 해도 품페르니켈(pumpernickel,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유래한 빵으로 증기에 익히며, 검은색에 가깝다)처럼 검지 않고, 먹기에 거부감이 없는 색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갈색이 알맞은 정도로 감도는 게 무척 좋습니다. 이 빵도 빵만 먹기보다 버터를 바르거나 치즈를 올리면 완전체를 이룬다는 생각이 들지요. 여기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결국 저는 신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피클이나 마리네의 산미, 펠메니 소스에서 느껴지는 레몬 풍미, 사우어크림과 빵의 산미까지, 이렇게 되면 신 음식의 역할을 조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 한 종류의 채소를 맛있게 요리할 수 있다면 앞으로 요리 자체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 채소마다 품고 있는 맛의 차이를 인식하면 몇 가지 채소를 같이 요리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만드는 것을 보고 "에게, 그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제법 많은 것도 일반적인 룰을 따르지 않는 요리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요리를 할 때 대개 자기만의 룰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상식을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어찌 됐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채소 하나하나의 개성을 알아가는 것은 다음에 요리할 때 큰 힘이 되어줍니다. 그러니까 "양파만으로도 괜찮네!" 하고 놀라지 말고, 양파만으로 맛내기에 도전해 보기를 바랍니다.
- 다음은 반드시 채소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써는 방법 역시 요리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써는 방식이야말로 어떤 요리에나 통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잘게 다진 양파에 버터를 넣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다가 향신료와 화이트와인, 산미가 있는 재료를 살짝 가미해 그릇에 옮겨 담으면 필시 아름다운 요리가 완성될 겁니다. 우선 그런 것을 생각합니다. 양파는 섬유질에 따라 방사형으로 자르면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올리브유, 커민 시드, 소금을 넣고 타지 않게 잘 섞어주면서 볶습니다. 그다음에 화이트와인을 붓고 이때부터는 뚜껑을 덮어 찌듯이 끓입니다. 마지막으로 레몬즙을 뿌려주면 끝. 만약 돼지고기나 청새치 소테(sauté, 버터를 발라 살짝 튀긴 요리)와 함께 낸다면 레몬은 모든 요리가 끝났을 때 한 번만 뿌려주는 게 포인트예요. 이런 순서로 요리를 하면 됩니다. 요리의 중심에 채소를 두면 단순한 곁들임 음식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높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칼은 손도 대지 말고 양파를 통째로 오븐에 넣고 천천히 구우면 함께 먹는 요리가 고기든 생선이든, 확실히 메인 요리 이상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갈색 빛이 감돌면 이쑤시개나 꼬치 등으로 찔러 익은 정도를 확인하는데 부드럽게 들어가면 완성입니다. 잘 구워진 양파를 반으로 가를 때 소금 한 자밤을 뿌려주는데 이 약간의 소금이 깜짝 놀랄 만큼 양파의 맛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저것 양념을 더하려고 하기보다 그냥 채소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향이 좋은 올리브유나 비네거 (vineger, 식초류)도 찰떡궁합이니 우선 굵은 소금을 뿌리고 올리브유, 비네거 순으로 조금씩 맛을 더해가며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처음 먹는 사람이 "양파 통구이라니!" 하고 놀라면서 나이프를 들더니 "양파가... 양파만으로..." 하고 중얼대며 먹는 모습을 보면 '양파니까 되는 거야, 양파라고 언제나 조연만 ...
- 그런 연유로 가장 가까이 두고 손쉽게 사용하는 향신료인 검정 후추는 매일처럼 사용 기회를 만들어 연습합니다. 셀러리를 어슷하고 얇게 썰어 반숙한 달걀과 함께 접시에 담아 소금을 살짝 뿌린 후 올리브유를 골고루 뿌려줍니다. 그런 다음 마무리로 검정 후추를 전체적으로 뿌려주는 거예요. 곁들이는 레몬은 이등분해서 따로 담아냅니다. 이 역시 상당히 소박한 연출이지요. 7~8밀리미터로 슬라이스한 감자를 삶아서 셀러리와 섞어주거나 계절에 따라 잠두콩, 토마토, 코티지치즈를 올려 식탁에 낸 후 테이블 위에서 검은 후추를 갈아서 향을 북돋아주면 이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요리가 될 거예요. 뭣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 양념이라는 점이 후추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 후추 사용법을 기본으로 익혀두면 향신료를 대하는 기준이 조금 낮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커민, 코리앤더, 넛맥 등의 분말을 한자밤 후추와 함께 뿌려주면 향신료에 따라 변화하는 풍미를 신선하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향신료를 잘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후추와 함께 향을 더하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향신료에 대한 얘기라면 끝이 없는 관계로 언젠가 또 기회가 생기면 이다음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 가서 보면 한눈에도 선택지가 굉장히 넓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올리브유라고 해도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서 무엇이든 어느 요리에나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그런 점도 올리브유의 매력이지만요. 피렌체의 식재료 가게에서 처음으로 토스카나산 올리브유를 시식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풍미가 어찌나 강하던지 깜짝 놀랐지요.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맛과 칼칼함이 어우러진 올리브유였어요. 그것은 소스를 만들기보다 요리에 그대로 뿌려주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며 어울릴 법한 요리를 계속 머릿속으로 떠올렸었죠.
- 그러는 사이 일본에도 이탈리아 요리 붐이 일어서 이탈리아 식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모던한 느낌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빵에 버터가 아닌, 올리브유와 발사믹 섞은 것을 내기 시작했지요. 그것을 보고 저도 소량의 발사믹을 올리브유에 떨어뜨리고(발사믹 양이 너무 많으면 신맛밖에 나지 않으므로 주의), 말린 타임과 로즈마리를 살짝 더해서 빵과 함께 조리하지 않은 생올리브유의 맛을 음미했습니다. 다만 너무 많이 찍으면 조금 느끼할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아주 조금씩만 찍어 먹을 것을 권합니다. 나중에 소스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을 처음에 전부 빵에 찍어서 먹어버리게 되니까 맛있더라도 적당히.
- 풍미가 강한 올리브유는 채소를 데치거나 쪄서 메인처럼 많은 양을 먹는 채소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또는 토마토와 함께 끓인 고기 요리에 아주 살짝 뿌려주면 풍미를 살리는 데 굉장히 효과적이지요. 값도 적당하고 맛도 있어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산이나 그리스, 터키산 올리브유도 자주 사용합니다. 스페인 요리에서 올리브유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거의 모든 요리에 쓴다고 말할 정도로 끓일 때나 구울 때나 심지어 튀길 때도 올리브유를 사용하지요. 이처럼 요리에 사용한 올리브유는 맛있는 소스로 접시에 남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일 거라고 언제나 생각합니다. 고추의 매운맛과 허브의 풍미, 구운 파프리카의 고소함이 올리브유에 고스란히 녹아든 맛은 올리브유만 있으면 특별한 소스가 필요 없다고 확신하게 될 정도입니다.
- 채소만으로 만든 수프, 돼지고기 덩어리를 끓일 때 등 올리브유를 사용하는 방법에도 최근 몇 년 사이 저만의 규칙이 만들어졌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소금으로 간을 맞출 때처럼 올리브유도 한 번에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채소 몇 종류로 미네스트로네식 수프를 만든다고 칩시다. 주사위 크기로 자른 당근, 양파, 셀러리, 감자, 파프리카, 토마토, 그리고 콩류 등을 준비해, 단단한 순으로 먼저 끓여줍니다. 냄비에 물을 붓고 갖은 재료와 월계수 잎, 프레시 또는 드라이 타임을 넣고 불에 올린 후 끓기 시작하면 소금 약간과 올리브유를 넣습니다. 베이스가 되는 단계에서 우선 올리브유 1작은술, 토마토 등을 넣고, 완성단계나 진짜 마지막에 1작은술을 넣는 식입니다.
- 일단 재료를 볶은 후 수프를 만드는 방식은 최근에는 거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채소와 함께 올리브유를 끓이는 편이 맛이 더 잘 스며든달까요. 신기하게도 기름이 겉도는 느낌이 없습니다. 올리브유를 양념의 조력자로 센스 있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적은 양의 기름으로 튀김을 할 때는 포도씨유나 유채씨유를 사용할 때가 많지만, 올리브유를 살짝 섞어서 풍미를 더하는 것도 습관 중 하나입니다.
- 올리브유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참기름인데, 참기름은 정제도에 따라 용도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아주 살짝 기분 좋게 고소한 향이 감도는 정도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세를 여행하는 중에 유독 색이 짙은 참기름을 봤습니다. 그 후 우연히 한국 식품점에서 같은 것을 발견하고 사용해 본 후로 참기름은 진한 것을 적게 쓰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한국 요리가 가진 맛의 바탕에는 참기름이 깔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양한 요리에서 참기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채소를 충분히 사용하는 한국 요리에서 고소한 풍미로 식욕을 돋우는 점은 일본 요리를 만들 때도 참고가 됩니다.
- 여러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과연 있을까 모르겠지만, '이 점이 마음에 든다'라고 강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으면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제가 주로 사용하는 냄비는 우선 일본 요리에 적합한 교토의 도구점에서 산 알루미늄 편수냄비입니다. 직경 18센티미터와 20센티미터짜리 냄비를 각각 한 개씩 갖고 있지요. 적은 양의 잎채소 등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넓고 평평한 접시에 펼쳐놓고 남은 열로 익히면 되니까 이 정도 크기의 냄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냄비 가장자리에 입처럼 살짝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물을 흘려버리기에도 굉장히 편리하지요. 다만 뚜껑이 없으므로 필요할 때는 벼룩시장에서 산 만능뚜껑을 사용합니다.
- 그다음으로 많이 쓰는 것은 10년 정도 사용하고 있는 두꺼운 스테인리스스틸 냄비로 핀란드 '행맨(현 이탈라 Ittala)'이라는 브랜드의 것입니다. 2리터와 3리터짜리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두께감이 있어서인지 열전도율이 상당히 좋아서 밥이 맛있게 지어지지요. 처음에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사용하기 편리해서 손잡이가 뜨거워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즐겨 쓰고 있습니다.
- 같은 스테인리스스틸 냄비로는 '크리스텔 '의 깊이가 얕은 형태의 것도 편리합니다. 깊이가 얕고 입구가 넓은 형태는 어떤 냄비라도 그 쓰임이 상당히 좋지요. 너무 깊으면 재료를 지나치게 많이 넣게 되니, 재료의 모양을 흩뜨리고 싶지 않을 때는 얕은 냄비를 사용하는 편이 스트레스받지 않고 요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손잡이를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어서 수납하기도 쉽고, 몇 개를 세트로 가지고 있으면 어떤 요리에라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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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깊은 맛을 한층 강하게 살리고 싶을 때나 찌듯이 끓이거나 찌듯이 굽고 싶을 때는 거의 '스타우브 '의 냄비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업소용에 적합한 냄비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인기가 높은 듯합니다. 무엇보다 스타우브는 뚜껑이 무거워 그 덕에 원하는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특히 고기가 정말 맛있게 구워지므로 역시 알자스제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고기를 삶거나 구워 먹는 식문화가 발달한 지방에서 만든 냄비여서 그 쓰임이 유용하지요. 작은 사이즈를 한 개 가지고 있으면 1인 가구라도 맛있게 1인분을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식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계속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타진 냄비를 어디서 어떤 것을 살까 하는 고민이에요. 현지에 가서 살까, 모로코나 북아프리카 요리를 알게 된 파리에서 살까, 현지에서 만든 것이 좋을까, 아니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살까 등등 고민이 끊이지 않았지요. 수납이 편리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삼각형 모자 같은 뚜껑의 형태도 구매 결정을 망설이는 데 한몫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에밀 앙리 Emile Henry'의 매트한 검은색 타진 냄비를 보고 바로 구입했습니다. 정말 단순한 형태예요. 컬러풀한 색 배합의 도구도 그렇지만 진짜 현지에서 쓸 법한 느낌의 도구는 제 부엌과 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닐까 망설이던 차에 발견한 것이지요.
- 견고하면서 뚜껑을 닫았을 때 은은하게 나는 소리 등은 도기의 독특한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씻은 감자를 냄비 안에 가지런히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올리브유와 소금, 드라이 허브를 한 번 휘두른 후 뚜껑을 닫고, 중불에 올립니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조금 줄여줘요. 그런 단순한 조리법으로도 정말 맛있는 감자 요리가 만들어져서 우선 채소부터 시작해 두세 종류의 재료를 조합한다든지, 생선류를 넣거나 고기를 삶는 등 타진을 활용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점점 더 커져갑니다. 타진 냄비는 증기를 모아서 순환시키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견고한 뚜껑이 있는 냄비가 있다면 어느 쪽이든 기능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기든 철이든 스테인리스스틸이든 알루미늄이든, 냄비의 기본은 열전도와 증기의 순환이기 때문이지요.
- 찌는 요리를 할 때는 찜기를 주로 사용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횟수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르 크루제 LE CREUSET'의 찜기 전용 스티머입니다. 이것은 스테인리스스틸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측면을 실감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르 크루제는 미네스트로네나 포토푀 등 푹 끓이는 요리를 만들고 싶어지는 냄비지요.
- 핀란드 아라비아 ARABIA라는 브랜드의 빈티지 냄비 중에 리에키 LIEKKI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기능적으로 우수한지 어떤지도 모른 채 작은 편수 냄비와 그보다 조금 큰 것을 샀어요. 양쪽 모두 돔형이라고 해야 할지, 둥그스름한 뚜껑이 달려 있습니다. 색은 전부 다크 브라운. 근데 막상 사용해 보니 이게 또 밥이 엄청 맛있게 지어지는 겁니다. 냄비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려면 밥을 지어보면 알 수 있는데, 뜸이 잘 들면 물을 먹은 밥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라 아주 맛있는 밥이 되지요. 그래서 어떤 냄비라도 꼭 한 번은 밥을 지어봅니다.
- 쓰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는지도 잊어버렸을 정도라 이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요. 올리브나무로 만들어진 도마나 서버 등은 깜박하고 세제를 묻혀 따뜻한 물로 닦거나 하면 금세 생기를 잃은 것처럼 허옇게 색이 바래서 윤기가 사라집니다. 그러니 세제와 물의 온도에 주의해야 해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도마를 쓰고 나면 바로 헹구고 털어내는 정도로 닦아서 키친타월로 물기를 제거하는 식으로 사용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때때로 올리브유를 발라주면 더욱 좋고요.
- 한눈에 소박하게 보이는 도구도 제게는 디자인이 과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많아서 올리브나무로 만들었다고 해서 바로 사거나 하지 못합니다. 크기가 큰 도마는 무게감 이상으로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모던한 것이든 예쁘게 디자인된 것이든 서버가 도마의 기세에 주눅이 들고 말지요. 그러니 도마에 기죽지 않을 서버를 찾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이탈리아에서처럼 우연한 기회에 마음에 드는 스푼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물건 찾기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맙니다.
- 새로 들인 스푼, 거기에 다른 곳에서 찾은 작은 소금통(꼭 소금이 아니어도 되지만)을 쭉 사용해 온 도마에 올려놓자 '이제부터다' 하고 앞으로 사용할 일이 기대됩니다. 스페인의 바에서는 도마를 그릇대용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그게 또 굉장히 멋집니다. 손잡이가 있는 사각 도마에 색이 진한 하몽 세라노 Jamón Serrano를 얇게 썰어 겹겹이 쌓아 담아내는데, 어찌나 수북한지 정말 맛있어 보이는 담음새였습니다. 식사 중에 도마에 끼워진 예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타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붉은 고추와 올리브유를 뿌렸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걸까? 하고 늘 생각하는 이러한 전채는 거의 대부분 약간 두툼한 도마 같은 둥근 나무 그릇에 담겨 나옵니다. 항상 사용하는 그릇과 소재가 변하면 먹는 사람의 기분도 변하는 걸까요. 작은 도마를 잘 활용하면 식탁에 변화가 일어나고 리듬감이 생기는 듯합니다.
- 요리가 가장 중요한 알맹이라고 말하지만 먹을 때 금세 어질러지거나 지저분해질 것 같은 형태의 식기나, 너무 무거워서 요리를 들어 올리기 어려운 커틀러리로는 요리의 맛도 반감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도구를 디자인한 사람들이 음식을 어떻게 보는지에도 흥미를 갖고 있어요. 그중에는 아마도 무엇을 먹을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디자인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지만 역시나 형태미에만 신경 쓴 탓에 안타깝게도 거의 사용하는 일이 없지요. 많이 갖고는 있지만 식탁에 자주 내놓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그것만 갖고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오랜만에 꺼내서 써보니 또 좋은 것들도 있어서 그리 간단하게 정리할 수가 없네요.
- 기본적인 커틀러리는 심플한 것들이 많지만 테이블 위에서 단독으로 사용하는 빵이나 치즈, 버터용 나이프 등은 조금 다릅니다. 대나무 무늬의 버터나이프나 등나무를 휘감은 공예가 돋보이는 나이프 등 실버나 스테인리스스틸 이외의 소재를 조합한 것을 함께 사용하면 식탁의 분위기가 달라진달까, 맛이 난달까, 다른 소재끼리 짝을 맞추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스푼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스푼으로 요리를 덜고 수프를 뜨는 것이 음식에 얽힌 가장 행복한 동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포타주의 걸쭉함을 보는 것도 스푼, 소스를 섞는 것도, 아이스크림을 뜨는 것도, 푹 끓인 음식 ...
- 부엌에서 가장 수명이 긴 설거지 용품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가메노코타와시(亀の子たわし, 막대 모양의 수세미를 둥글게 휘어 고정한 것으로 일본의 가메노코타와시 니시오 상점에서 등록한 상표명이다)가 아닐까요. 저는 중간 크기와 작은 크기의 것을 사용하고 있어요. 쓰고 나면 물기가 바짝 마르는 게 기분 좋고, 아무튼 믿음직스러운 사용감이 장점입니다. 철 냄비의 그을린 부분은 조금 큰 수세미로, 우엉의 껍질을 벗길 때는 작은 크기로, 그밖에 세심한 곳에 쓸 때는 교토 '나이토쇼텐 內藏商店'에서 산 솔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찜기의 안쪽 면에 달라붙은 것을 떼어낸다든지, 찻잔이나 주전자 안쪽을 닦을 때 쓰기에 딱 좋아서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저조차도 일단 솔을 손에 쥐면 제법 꼼꼼하게 닦게 되는 탓에 청소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둥글게 휘었거나 홈이 있는 부분에는 정말 이 교토에서 산 솔이 딱이에요.
-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거의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째서인지 그 지방의 미소(味噌, 일본식 된장)를 사고 맙니다.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된 터라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미소를 자주 사네"라는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저도 참 어지간한 미소 마니아일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좋아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미소의 맛이 좋아서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초콜릿이나 팥 앙금의 깊은 맛을 깨달았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 집 주방에는 늘 몇 종류의 된장을 적당한 크기의 병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 오랫동안 먹고 있는 것은 이른바 간토식 아카미소 赤昧贈이지만, ...
- 미소의 차이는 곧 문화의 차이라고 할 만큼 지역에 따라 개성이 다다릅니다. 좀 더 미소에 관해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수프를 만들면서였어요. 미소를 그대로 개서 끓이면 뭘 어떻게 해도 미소시루가 되고 맙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텁텁하지 않고 산뜻한 맛으로 내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채소 수프에 미소의 풍미가 살짝 감돌지만 미소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게 맛을 낼 수는 없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가쓰오와 다시마를 끓인 맛국물에 두툼한 키친페이퍼로 거른 아카미소를 넣어봤습니다. 이게 또 제법 맛있더라고요. 그중에서도 맛이 깊은 센다이미소 仙台 昧贈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요.
- 북쪽 지방의 미소는 콩을 잘 짓이겨 반죽해 맛에도 야무진 데가 있습니다. 풍토가 그대로 깃든 느낌의 맛이지요. 소금기가 강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대신 적은 양을 사용해도 향이 제대로 날 만큼 맛이 강하지요. 맛이 꽉 찬 그 느낌이 어찌나 좋은지요. 센다이에 갔을 때 찾은 것은 '사사주 佐々重'라는 브랜드의 향이 강한 미소였습니다.
- 센다이미소와는 대조적으로 교토미소의 개성도 독특합니다. 시로미소 白昧贈라고 하면 간사이, 교토가 연상되기 마련이지만, 먹어보면 단맛과 짠맛이 저마다 다 다르지요. 160년 전통의 노포 '고코마치 간토야 御幸町 関東屋'의 시로미소, 그중에서도 사이쿄즈케(西京漬け, 의교토식 시로미소에 미림, 술 등을 넣고 삼치, 은대구, 연어 등 생선 토막을 절인 것) 용으로 팔고 있는 성근 시로미소는 소박함이 더해져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시골의 미소는 모두 소박하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소박함이란 고코마치 간토야의 시로미소처럼 어딘가 온화한 느낌입니다. 품질도 좋고요. 그것도 어쩌면 교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미소도 간장도, 서쪽으로 갈수록 단맛이 강해집니다. 아마쿠사보리미소의 독특한 단맛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단독으로 사용하면 약간 단 정도지만, 아카미소나 시골미소와 섞어서 쓰면 신기할 정도로 맛이 깊어지고 단맛도 더 살아나 굉장히 맛있어지지요.
- 미소를 사용하면서 일반적이지 않은 미소시루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미소의 다른 면을 요리로 표현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잘 거르면 미소 스톡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을 정도의 콩소메 consommé 같은 세련된 풍미의 수프가 되지요. 가쓰오나 날치로 맛국물을 강하게 우려 채소 몇 가지를 삶고, 약간의 미소를 첨가하면 또 다른 별미의 국물 요리가 됩니다. 이것은 맛국물을 강하게 우리는 것이 포인트로, 유자후추를 살짝 가미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미소시루에 대한 인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새로운 맛의 발견이 이어지는 한 어딘가에 갈 때마다 미소를 사는 저의 버릇은 계속되겠지요.
- 저는 평소에 커피를 그리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반대로 커피를 내리는 일은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모순적인 기호를 갖고 있습니다. 커피는 반드시 홀빈으로 사서 마시기 직전에 갈아 내리는 게 최고지요. 거리를 걷다가도 커피 향이 나면 '아~ 좋다. 이 냄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피를 좋아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커피를 즐겨 마시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딘가 갔을 때 커피 향이 공기 중을 떠돌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왠지 휴식을 취하는 이미지라서일까요, 아니, 뭐니 뭐니 해도 커피 특유의 고소함 덕분이겠지요.
- 영국은 이제 더 이상 홍차의 나라가 아닌 걸까요?
그런 런던에서 제가 커피를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글라스 커피서버를 발견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도쿄에서도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별히 더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보자마자 일단 하나 더 샀을 만큼 좋아해요. 그러면서 '이것보다 더 큰 것도 갖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계속해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마음에 든 물건은 여러 개 사서 쟁여둬야 직성이 풀리는 듯합니다. 좋아하는 물건은 선반에 줄줄이 올려두고 싶어요.
그런데 그 사이 두 번째 서버를 산 가게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 후 큰 사이즈의 서버는 아직 구하지 못했어요. 양 많은 1인분, 또는 양 적은 2인분 정도밖에 내리지 못하는 탓에 커피와 함께 내놓는 디저트도 그다지 볼륨이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식사 대용이 될 법한 커다란 머핀보다 프티 프루(petit four, 한입 크기의 쿠키나 케이크) 종류인, 이탈리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잔두야 Gianduja라는 헤이즐넛 초콜릿 등은 너츠의 향이 커피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것 이상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은 와산본토(和三盆糖, 치쿠토(竹糖)라고 불리는 사탕수수를 원료로 도쿠시마현과 가가와현 일대에서 생산하는 고급 설탕을 모양판에 박아낸 마른 과자)입니다.
- 교토에서 다양한 과자를 알기 전까지는 마른 과자의 좋은 점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화과자를 보거나 먹어보면서 부드러운 생과자부터 모나카 같은 반생과자 그리고 마른 과자로 차츰 관심이 옮겨갔지요. 밤이나 콩가루로 반죽한 것에 으깬 팥소를 넣고 나무틀로 살짝 눌러 모양을 내는 화과자는 '생과자 맛에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생과자는 아니지만, 수분기가 있어 마른 과자라고 하기 어려운 그 절묘하고 섬세한 질감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어요. 지금도 여전히 과자에 대한 흥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 마른 과자는 그저 생김새만 예쁜 것이 아닙니다. 계절감을 담아 만든 듯한 이 작은 과자는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색을 들인 것도 그렇고, 와산본토의 색조를 그대로 살려 곡선이 아름다운 나뭇잎 무늬를 새긴 '시요시켄 塩芳軒'(1882년 설립된 교토의 과자점)의 모모토세 百とせ는 무의식 중에 커피도 정성스럽게 내려야 할 것 같은,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지는 과자입니다. 게다가 와산본토의 오프 화이트에 조금씩 다른 무늬가 새겨진 모모토세는 하나하나 화지에 섬세하게 싸여있지요. '이것을 커피와 곁들인다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부드러운 풍미의 커피에는 상냥한 듯하지만 실은 본성이 강한 와산본토의 풍미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의 비스킷 중에는 물과 소금, 밀가루만으로 만들어 '이보다 더 빈곤할 수 없다'고 할 정도의 것이 있습니다. '워터 비스킷 waterbiscuit'이라는 이름이 납득이 가는 이 과자는 밀가루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요. 보관이 용이하도록 연구한 끝에 물로 반죽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검소하면서 플레인 빵처럼 다른 재료를 더해가며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영국의 밀가루류 음식은 이른바 미식의 관점에서 탄생했다기보다 좀 더 수수하고 검소한 생활이 떠오르는 소박한 것들이 많다는 느낌입니다. 베이킹파우더 등을 사용해 발효 시간이 필요 없는 생지도 있지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드는 것도 먹는 것도 즐거운 스콘입니다. 이런 방식의 생지로 만드는 빵 종류는 영국 음식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 설탕, 소금을 섞은 후 차게 둔 버터를 넣고 으깨주면서 소보로, 즉 성긴 빵가루 상태로 섞어줍니다. 그 후 우유를 붓고 잘 뭉쳐주면 반죽 끝. 이렇게 반죽한 것을 밀대로 몇 차례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너무 얇지 않게 펴고 원형 틀로 찍어내 오븐에 굽습니다. 이때 적당히 달고 매혹적인 향이 주변을 감싸지요.
- 스콘과 닮은 것이 미국에도 있습니다. 폭신폭신한 식감의 핫비스킷 hot biscuit이라는 것인데, 스콘처럼 잼이나 크림을 발라 먹기보다 푹 삶은 고기를 사이에 끼워 그레이비소스 gravy sauce를 뿌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식사용 빵의 역할을 하는 듯해요.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외국 서적에서 본 오래된 사진 속 핫비스킷은 거의 간격을 두지 않은 탓인지 빵들이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로 구워진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과한 느낌이 제법 잘 어울리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반죽을 하나씩 떼어 구우면 빵 가장자리는 바삭바삭할 테고, 옛 사진 속 모습처럼 다닥다닥 붙여서 구우면 수분이 날아가지 않아 촉촉하게 먹을 수 있겠지요. 상상하면 양쪽 모두 맛있을 것 같습니다.
- 생지를 좀 더 치댄다고 엄청난 탄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삼아 해보면 구웠을 때 그 차이가 드러나는 게 재미있습니다. 달걀을 사용하는 레시피도 있지만, 달걀 없이 버터와 우유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스콘을 추천합니다. 핫비스킷은 스콘 재료 중 버터를 쇼트닝 (shortening, 과자나 빵의 바삭바삭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반고체 상태의 유지제품)으로, 설탕은 절반, 우유 양의 절반을 플레인 요거트로 대체해서 만들면 작은 차이지만 스콘과는 다른 미국식 비스킷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 비스킷. 이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정겹고 따뜻한 느낌이 있어서 '비스킷 먹을래?'하고 누군가 물으면 거절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합니다. '비스킷이 맹렬하게 먹고 싶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지만 짧은 휴식시간에 먹는 한두 조각의 비스킷은 밀크티 등의 차와 함께 곁들이면 기분이 안정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는 듯해요. 비스킷, 쿠키, 비스퀴트리, 사브레, 갈레트, 비스코티, 비스코초 등 부르는 이름은 제각각 다르지만 러스크나 크래커, 비상식으로 준비해 두는 마른 빵까지 모두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면 비스킷의 세계에는 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 배아나 호밀을 주재료로 바삭바삭하게 구운 크리스프 브레드(crisp bread, 북유럽에서 주로 먹는 크래커 모양의 빵)는 지방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치즈나 꿀, 버터를 곁들여 아침 식사부터 와인 안주까지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 비스킷입니다. 조금 달 수도 있지만, 시판 비스킷 두 장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끼워 얼리면 아이스크림샌드가 되지요. 오래전에 어디선가 맛본 것 같은 추억의 맛입니다. 바삭하고 가볍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떤 재료와 조합하느냐에 따라 밸런스가 변하는 비스킷은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음식 중 하나입니다.
- 다양한 종류의 비스킷을 맛보며 자라는 프랑스의 아이들이지만, 처음으로 그 아이들이 부럽다고 생각한 것은 브르타뉴에 있는 노포 브랜드 'LU'의 비스킷들을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사각형의 가장자리가 톱니 같은 형태를 한 사각형 비스킷이 가장 유명하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시판되고 있어요.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폭넓게 사랑받는 과자 브랜드로 일본에서도 몇 종류 팔리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브랜드의 비스킷 중에 초콜릿을 바른 둥근 모양의 것이 있는데, 토핑 된 초콜릿이 달지 않은 다크 계열이었던 것이 충격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다크 초콜릿을 먹는단 말야' 하고 놀랐지요.
- 플럼(plum, 서양 자두) 산지 중 한 곳으로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아장 Agen이 있습니다. 아장은 마을 이름이지 그 장소에 집중해서 플럼밭이 있다는 것은 아니에요. 중심지의 이름이 브랜드 명이 된 것뿐이지요. 남서부의 시장이나 축제에 출점하는 가게 등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플럼 산지에서 딱 좋게 말린 푸룬(prune, 말린 자두)을 생산자가 직접 가지고 나옵니다. 그걸 보면 저는 무겁다는 걸 알면서도 상당히 많은 양의 푸룬을 사버리고 말지요. 그 신선한 향을 맡으면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돼요. 산지에서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푸룬은 역시 맛있습니다.
- 그 아장의 명물로는 프뤼노 푸레 Pruneaux fourrés라고 하는 과자가 있어요. 푸룬의 씨를 제거하고 그 과육과 사과를 퓨레 상태로 만들어 모양을 잡아 만든 것이지요. 때에 따라 바닐라나 럼의 향을 더하기도 합니다. 물론 맛은 달지만, 푸룬 본연의 심플함이 강하게 전해지지요. 그런 점은 어딘가 화과자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뜻 프뤼노 팥소라는 느낌이랄까요. 어느 부분을 먹어도 푸룬이에요. 가끔은 이렇게 국가나 지역의 경계 따위가 없는 듯한 과자들이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상점에 줄지어 진열되어 있는 광경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푸룬을 그대로 과자로 만든 듯한 프뤼노 푸레는 그 옆에 피를 얇게 해서 만든 만주나 양갱이 있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신기한 분위기를 풍기지요.
- 그런 과자에 곁들여 낼 음료로는 뭐가 좋을까? 의외로 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이런 과자에는 커피보다 차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것도 풍미가 진하고 강한 것으로, 스트레이트로 마셔도 맛있는 홍차가 어울릴 것 같아요. '마카이바리 Makaibari'(1840년에 다르질링 지방에서 영국인이 창업한 홍차 농원)의 듬직한 맛의 다르질링, 탄자니아나 케냐의 소박한 맛을 지닌 유기농 홍차, 또는 향신료나 감귤류의 향미를 더한 홍차, 기문 祁門이나 철관음 같은 중국차 등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도 여러 가지가 있네요.
- 꽤 오래전에 처음으로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집 안에서 손짓하는 할머니의 부름에 함께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어요. 요리사들이 쓰는 모자처럼 제법 높이가 있는 쿠아프 coiffe라고 하는 자수가 놓인 머리쓰개를 한 여성들이 아직 드물게 눈에 띄던 때로, 그 할머니도 마치 그림처럼 쿠아프와 민속의상을 입고 현관 앞에 서 있었지요. 무명에 흰색 실로 섬세하게 수를 놓은 그 아름다운 머리 장식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그 집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뒤뜰에 면한 부엌의 식탁으로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이가 조금 빠진 카페오레 볼에 따뜻한 물이 담겨 나왔어요. 그 물에 티백을 퐁당 넣은 다음, 아마도 먹다 남은 바게트를 쑹덩쑹덩 썰어주더니 딸기잼이 담긴 커다란 병을 가리키며 발라 먹으라고 했지요. 그곳에 브르타뉴의 가염버터나 쿠인아만 Kouign-amann, 버터 케이크, 막 구운 크레이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지요. 그러더니 문득 용무가 생각난 건지 할머니가 잠시 밖으로 나가버렸고, 부엌에 남겨진 저와 친구는 오후의 햇빛 아래서 싱거운 홍차와 잼을 바른 빵을 먹었습니다. 봄을 앞둔 따뜻한 오후에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때면 희한하게 그때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뒤뜰에 햇살이 비치고, 윙윙대며 날아다니는 벌레의 날갯짓 소리 외에는 정말 ...
- '스즈야키 すずやき'라는 이름의 과자가 있습니다. 작고 둥근 형태가 방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일본어 すず는 '방울'이라는 뜻이다). 옛날 생각이 난다고 말할 사람도 많을 이 과자를 만들고 있는 회사는 오사카의 '고마도리제과 こまどり製菓입니다. 스즈카스테라와 쿠키 등 과자를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지요. 잡화나 귀여운 물건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먹힐 만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설립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점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밀가루와 설탕에 팽창제를 넣고 수분을 더해 만드는 것은 과자의 기본입니다. 슈퍼마켓에서 오랜만에 본 스즈야키는 울새가 그려진 봉투에 들어 있었지요. 언제 봐도 같은 모습, 같은 맛입니다.
- 그건 그렇고 도대체 군것질이라는 게 뭘까요. 어릴 때는 누구에게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을 테지요. 심플한 비스킷이나 센베보다 훨씬 달고 부드러운 과자를 바라기도 했겠지요. 군것질 꿈을 노래로 만든 듯한 "주머니 속에는 비스킷이 하. 안. 개"라는 동요 가사를 좋아했는데, 몰래 가사를 바꿔 꿈의 군것질을 상상하며 노래를 불렀던 것은 저뿐이었을까요. 이런 군것질거리 본연의 좋은 점을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성인이 된 이후입니다. 어떤 장식도 없이 밀가루, 달걀, 설탕 등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과자의 맛은 어릴 때는 잘 알지 못하는 법이지요. 추억과 더불어 소박한 과자는 어른들의 휴식에야말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 마쓰시마 명물의 '마쓰시마 고렌 松島こうれん'이라는 쌀과자가 있습니다. 평소 먹는 군것질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하고, 섬세하고 질 좋은 색과 식감은 일반적인 센베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요. 다실에서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모양인데, 크기도 알맞고 역시나 사양하지 않고 군것질로 먹고 싶어지는 친근한 면도 있어요. 전에 센다이에서 센다이선을 타고 마쓰시마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목적 중 한 가지는 마쓰시마 고렌이었지요. 제가 흥미를 느끼는 과자 중에는 어째서인지 모노톤의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과자를 만드는 가게는 상품의 종류가 결코 많지 않아요. 마치 서로 짠 것처럼요. 아니나 다를까 '고렌야신게쓰안 紅蓮屋 心月庵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고렌 뿐이었습니다. 이곳은 쌀과 고급 백설탕, 소금이라는 굉장히 심플한 재료만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볍고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의 섬세한 풍미를 한번 맛보면 저도 모르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됩니다.
- 팔랑팔랑하고 가냘픈 고렌 옆에 생고렌이라는 이름의 흰색 판 모양의 것도 판매하고 있더군요. 이것은 집에서 구워서 즐길 수 있는 고렌의 재료라고 하는데, 아무려면 가게에서 파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구워질 리가 없지요. 집에서는 고소함을 살리기 위해 석쇠에서 나무주걱으로 눌러가면서 굽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단맛이 도는 것이 일품 센베이지요. 재색을 겸비한 언니가 마쓰시마고렌이라고 한다면 생고렌은 개구쟁이 동생이라고 하면 될까요.
- 매력적인 과자는 전국에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지만, 장식이 없고, 기본에 충실한 과자야말로 일본의 군것질거리라고 생각합니다.
- 어느샌가 자신도 똑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아침 차를 마시지요.
오키나와의 약초는 싫다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지만, 오랜 시간 계속 마시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평소 마시는 차를 못 마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은 순간도 있었지요. 작업실에 온 손님에게 내기도 했는데 "맛이 강하네, 이거"라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거든요. 어쩌면 무리해서 마셔준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는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 수년 전에 이즈모의 차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의 온화하고 맛있는 차였지요. 차풀이라는 작은 콩의 꼬투리와 미니어처 풀고사리나 자귀나무 같은 잎을 호지차처럼 배전한 것이었어요. 상상하기 어려운 맛이지만 마셔보면 고소하고 답니다. 가와라 게쓰메이 河原決明라는 사람과 동명의 식물은 그 이름대로 본래 강가나 물가의 들판 등에 널리 생식한다고 합니다. 돗토리와 이즈모 지방에서 예부터 마셔온 차라고 해요.
- '하마차'라는 이름의 가와라게쓰메이와 비슷한 차를 또 다른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마차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와일드한 데다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었어요. 보리차처럼 끓여내는 것이 본래의 우리는 방법이지만 포트로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도 맛있습니다. 게다가 일부러 글라스 잔을 쓰고 싶을 정도로 줄기와 잎이 살아 있는 찻잎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한동안 마실 요량으로 몇 개나 구입을 해서 친구들에게도 나눠주었지요. 이 하마차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 없는 듯해서 호지나 보리차와 블렌딩 하거나 미팅 자리에도 내놓는 등 질리지 않고 계속 마시고 있습니다. 한정적인 지방만의 독특한 맛과 관습은 이런 때가 아니면 거의 만날 기회가 없으니 역시 도쿄에만 있을 게 아니라 자꾸자꾸 새로운 곳에 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혼자 차를 마실 때는 항상 정해진 식기를 사용합니다. 'Yen Ware'라는 도자기 시리즈로 형태는 모던하지만 감촉은 굉장히 소박하고 굽의 형태도 높고 독특한 그림 같은 식기지요. 커피에 어울릴 법한 작은 것부터 몇 종류나 되는 컵을 갖고 있는데 저는 그중에서 큰 사이즈를 차를 마시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마차 등을 듬뿍 우려서 일하는 틈틈이라고 할까, 일하는 내내 꿀꺽꿀꺽 마시는 식이지요. 마음에 든 티백이 있으면 그것도 몇 잔씩 우려서 마십니다. 이 컵을 디자인한 나카무라 요시로 中村善郎 씨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가장 작은 컵에 커피를 내려주었어요. 몇 년이나 사용해 온 컵은 가느다란 관유(貫乳, 도자기의 표면에 보이는 아주 섬세한 금)가 자리하고 있어 굉장히 멋스러웠습니다. 관유도 커피색이었지요. 매일같이 고소한 갈색의 차를 마시다 보면 언젠가 제 컵에도 손때와 더불어 멋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겠지요.
- 어둠이 밝아오는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푸르고 하얀 새벽달을 '잔월'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이쿠(俳句, 일본의 5.7.5의 3구(句) 17음(音)으로 되는 단형(短型)시)에서 춘하추동의 계절감을 나타내기 위해 넣도록 정해진 말이지요. '지새는 달'이라는 말도 있지만 멋대로 떠올리는 이미지로는 지새는 달이라는 말은 '남았다'라는 뉘앙스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잔월 쪽이 정취가 더 느껴지는 것이, 정말 잘 지은 것 같아요. 이처럼 문자의 의미와 풍경 사이를 포착한 듯, 문자와 함께 그림이 떠오르는 이름은 일본어의 독특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이 잔월을 영어로 표현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단순하게 '새벽에 뜬 달'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좋을지 여느 때와 달리 고민을 했었지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홀로 하늘에 남겨진 달'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궁리했습니다. 그런 풍경을 이름으로 삼는 것은 작은 과자 하나에도 일본 특유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도라야 とらや'의 잔월은 팽창제를 넣지 않고 구워 바삭바삭한 표면에 꿀을 바른 과자에 맛이 깊은 팥소를 넣은 것으로 생강의 풍미가 감도는 화과자입니다. 포인트는 뭐니 뭐니 해도 생강이지만, 이 과자의 개성은 바삭한 생지가 완성한다고 하면 조금 과한 표현일까요. 부드러운 식감으로 구워낸 도라야키(どら焼き, 물에 갠 밀가루를 원형으로 구워서 두 장을 겹쳐 그 사이에 팥소를 넣은 일본 과자)의 맛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잔월이라는 과자는 그것과도 비교하기가 어렵고, 도라야키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시중에 많이 나오는 과자들은 가볍고 보송보송한 식감이 주를 이루는데 서양과자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야무진 식감으로 만들어지던 화과자에까지 파급되었지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밀가루의 맛, 팥소의 맛, 거기에 생강을 가미해 탄생한 맛의 대비가 과자의 핵심을 이루고, 이러한 세 가지 맛을 조합해서 반달 모양으로 빚은 이 작은 과자 잔월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먹을 때는 역시 그릇에 한껏 담아내기보다 하늘에 홀로 뜬 잔월처럼 접시에 하나 정도만 담아내는 것이 어울리지요.
- 춘하추동, 한 해 동안 살펴보면 일본의 과자는 계절 그 자체를 표현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채소나 과일의 계절감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할까요. 하나의 과자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만으로 계절 인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특히 봄의 사쿠라모치(桜餅,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 팥소를 넣고 벚나무 잎으로 싸서 찐 떡)나 여름의 미즈요칸(水羊羹, 묽게 만든 양갱)이 그렇지요. 물론 이것을 겨울에 먹는 지방도 있으니 전부 그렇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저는 과자의 향이나 혀에 닿는 식감으로 그 계절을 떠올리는 것을 해마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역시 밤이지요. 구리킨톤(栗きんとん. 강낭콩과 고구마를 삶아 으깨어, 거기에 밤 따위를 넣은 것)이나 찐 밤을 넣은 양갱, 서양과자라면 몽블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두 달하고 조금 더 되는 기간 동안 맛볼 수 있는 이 음식들을 일 년 내내 음미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저도 어느덧 밤을 재료로 한 과자를 계속 곁에 두고 있습니다.
- 화과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한창 더울 때 열리는 고보상(弘法さん, 고보대사를 참배 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의 형태)과 겨울의 특별 참배 등 뭔가 구실을 만들어 교토에 가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도쿄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 전시회를 일부러 교토로 보러 가는 일도 있지요. 그렇게 교토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는 목적 하나가 있는데, 바로 과자입니다. 계절과자를 보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제가 식탐이 많아서만은 아닙니다. 평소 일본과 서양식을 절충한 생활을 하다 보면 뭔가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마련이지요. 그것은 지극히 일본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토는 제법 큰 도시이기도 해서 맨션 같은 주거 형태도 꽤 늘었지만, 그럼에도 도시 주변에 산이 있고 강이 흘러, 도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절이 많고, 그 많은 수의 절 이상으로 화과자점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지요. 제게는 그것만으로도 평소 생활 풍경과 다르게 보입니다.
- 9월이 되면 '구리무시 栗蒸し를 사러 가야지' 하고 언제 교토에 갈지를 계획합니다. 꾸물대다 11월이 되어버릴 때도 있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해마다 시기에 맞춰 교토에 갈 수 있었어요. 쓰키모치야 나오마사 月餅家直正의 과자는 상당히 고급 제품이면서도 결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뭐, 이렇게 말하는 건 순전히 제멋대로의 해석이지만요. 하지만 제게 이곳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친근감이 있는 곳으로 느껴집니다. 구리무시는 이곳의 아들이 고안한 것이라고 해요. 맛있는 것끼리 조합한,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과자지요. 위에는 흑설탕으로 찐 과자, 아래에는 찐 밤을 넣고 만든 양갱으로 두 가지 맛을 음미할 수 있어요. 긴 형태 그대로도 좋지만, 한입 크기로 잘라 나무를 종이처럼 얇게 밀어 만든 냅킨으로 포장한 것도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 않은 느낌이라 좋아합니다. 제 머릿속 교토의 과자는 화려하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빚은 과자라는 인상인데 구리무시에도 그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먹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 저는 사실 긴 형태로 만들어진 과자를 좋아해요. 그것을 직접 잘라 담아내는 것을 좋아하지요. 군더더기 없는 사각형으로 모든 것을 전달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장식도 없는 형태의 과자를 동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양갱에 필적할 만한 심플한 형태의 과자가 가고시마에 있었습니다. 미나미규슈라고 불리는 지방은 기후가 따뜻하고, 여태 본 적 없는 문화가 뒤섞여 완성된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나가사키처럼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문화도 아니고, 밖을 향해 열린 기질이라고 할까요, 단순히 이국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을 갖고 있지요.
- 그런 지방의 과자라고 하면 아카시야 明石屋의 가루칸(軽羹, 참마를 갈아서 쌀가루, 설탕을 넣고 반죽하여 찐 과자)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과자가 너무나 신기합니다. 가루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런 호기심 때문이에요. 새하얗고 깨끗한 사각의 형태가 마치 무사를 떠올리게 한달까요? 아니, 그렇게 말해도 찐 과자니까 폭신폭신하고 탄력이 있지요. 눈처럼 하얗다기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단계 온기를 입힌 흰색이고, 남부 지방의 태평함이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몇 번이나 먹으면서도 진짜 모습이 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이것이 가고시마의 기질인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 이상의 복잡한 의도는 없다는 것이 가루칸인지도 모르지요.
- 가루칸은 행복하게도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6월 30일에만 먹을 수 있는 과자가 있습니다. 바로 미나즈키(水無月, 쌀 과자 위에 팥을 올린 것)입니다. 미나즈키는 일 년 중 반환점이 되는 6월의 마지막 날, 앞으로의 시간 동안 무병과 안녕을 기원하며 찾는 신사에서 맛볼 수 있는, 얼음을 본떠 만든 삼각형의 찐 과자입니다. 우이로(外郞, 쌀가루, 찹쌀가루, 밀가루 등을 섞어 설탕과 물을 넣고 쪄서 만드는 화과자의 일종) 위에 팥 알갱이를 올려 쪄낸 미나즈키는 탄력이 있고 친숙한 과자라 그런지 이날에 한정하지 않고 만드는 과자점도 많이 있습니다. 흰 천에 상쾌한 물빛의 상서로운 무늬가 새겨진 상자에 담긴 교카도토시야스 京華堂 利保의 미나즈키는 반들반들 윤기가 흐릅니다. 이거야말로 6월 30일을 위한 생과자라는 모양이어서 누가 뭐래도 그 자리에서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요.
- 이처럼 제가 좋아하는 과자는 산처럼 많지만, 결국 지나친 장식으로 승부를 보는 대신 그윽한 풍정을 담아낸 화과자를 동경한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찐 밤, 가루칸, 미나즈키는 모두 쪄내는 과자들입니다. 이들 과자가 어딘가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과자도 분명, 증기로 마무리한 자연의 좋은 맛이 담겨 있다는 얘기일 테지요.
- 매력적인 물건이 눈에 들어와 길을 끝없이 빙글빙글 다닐 때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가끔은 길을 헤맬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 과자 만들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냉정하게 따져보면 하루 식사의 중심은 단것 위주가 아닙니다. 간단하고 마음이 편안한 요리일수록 과자를 먹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 그때부터는 요리를 중심으로 밸런스를 맞춘 음식을 쭉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제게 디저트류의 존재는 생각보다 특별합니다. 그래서 메뉴를 고민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식후에 무엇을 먹을지, 어떤 디저트를 내놓으면 좋을지 등 식사의 마무리를 먼저 떠올린 후에 그에 맞춰 다른 요리를 계획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정도로 제게 과자, 즉 디저트는 처음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소중합니다. 꿈처럼 달콤한 머랭의 보들보들한 식감과 밀가루로 구워내는 과자류의 넓고 깊은 세계, 화과자 특유의 팥소 풍미 등 매력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중심에는 다종다양한 단맛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저는 계절마다 잼을 만드는 습관이 있는데, 탁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과일의 색을 살리기 위해 주로 정제된 백설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설탕과 궁합이 잘 맞는 꿀을 섞거나 색에 영향을 많이 주지 않을 정도의 정제도가 낮은 설탕, 삼온당(三溫糖, 백설탕에 캐러멜색소를 착색시켜 만든 것)이나 브라운슈거를 넣기도 합니다. 거기에 맥아당이나 메이플시럽을 적당히 가미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면 단맛에도 깊이가 생겨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단맛이 향긋하고 깊이 있는 단맛으로 변합니다. 단맛에 음영이 생긴다고 하면 얼추 전달이 되려나요.
- 단순한 단맛만으로는 자칫 설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될 수도 있으니 뭔가 풍미나 잡미, 전혀 다른 재료의 향 등을 첨가하고 싶어집니다. 딸기잼에 바닐라나 시나몬, 아주 약간의 후추를 넣는 것도 방법이지요. 하지만 그런 악센트는 적당히 가미하고, 대신 단맛의 종류와 밸런스를 맞추는 편이 더 깊은 맛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 한 가지 단맛 안에 상반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 캐러멜입니다. 캐러멜은 제가 과자 만들기를 동경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된 맛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도 그럴 게 달콤한데 씁쓸하다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나요! '커스터드푸딩은 분명 디저트인데 어째서 씁쓸한 맛이 감도는 걸까, 그런데 왜 맛있는 거야.' 어릴 때 그것이 너무 신기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도 캐러멜소스 만들기는 꽤 오랫동안 익숙해지지 않았지요. 한때는 화상을 입을 각오로 임한 적도 있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깨달은 것은 우왕좌왕하며 설탕을 끓이던 냄비를 불에서 내렸을 때입니다. 지금도 캐러멜소스 만들기가 어렵다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겁먹지 말고 아무 때나 냄비를 불에서 내려도 된다고 꼭 전하고 싶어요.
- 동북 지방에 '사고하치 三五八'(후쿠시마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의 장아찌, 향토음식 중 하나다)라는 누룩을 이용한 절임이 있습니다. 절임의 원료인 쓰케도코 漬け床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것으로 절인 것을 '사고하치쓰케 三五八漬け'라고 부릅니다. 은근한 단맛이 굉장히 맛있어요. 사고하치쓰케는 아오모리의 시장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돌아올 때 들른 히로사키 교외 길가의 역에서 생生사고하치를 팔고 있었습니다. 기온도 그다지 높지 않은 시기였던 터라 사 가지고 돌아와서 재빨리 채소절임을 만들어봤어요. 오이와 당근, 무, 빨간 피망 등 맛이 강하지 않아 어떤 채소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점점 익숙해져서 최근에는 곱게 간 생강과 한국 고춧가루를 섞어준다든지, 입맛에 맞춰 이렇게 저렇게 조합을 하고 있지요.
- 사고하치는 소금 3, 누룩 5, 찐 쌀 8의 배합으로 섞어서 만듭니다. 이름도 그 배합 비율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사고하치를 최초로 만든 사람의 이름인가 하고 멋대로 상상했는데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레시피가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였어요. 소금 3이라는 점이 조금 많은 것은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예부터 전해져 오는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시판 제품이 나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도 선택지가 다양한 모양입니다. 적당한 크기의 용기에 사고하치와 채소를 교차해 겹겹이 쌓아서 뚜껑을 닫고 그대로 7~8시간 정도 놔뒀더니 풍미가 충분히 배었지요. 기본 방법에서는 벗어난 일이지만, 혹시 누카도코(ぬか床, 쌀겨로 만든 장아찌 원료)와 섞어주면 누카 & 사고하치쓰케가 될 거고,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둥 한참이나 생각이 앞서 나갈 정도로 짠맛과 단맛이 좋은 밸런스를 갖고 있었어요. 이 상태대로라면 차를 마실 때 쌉싸름한 차와 함께 과자 대신 절임을 곁들여 내도 좋을 것 같아요.
- 염분의 배합을 달리하면 쌀과 누룩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마자케(甘酒, 일본의 전통 음료 중 하나로 색이 탁하고 단맛이 난다. 단술의 일종)도 동료라고 할 수 있지요. 아니 그보다는 사이좋은 형제자매라고 말할 만큼 가까운 관계인지도 모르겠네요. 따뜻한 쌀에 누룩을 넣고 보온하는 방식은 같은데, 사고하치는 소금의 양이 많아서 절임이 되고, 아마자케는 누룩의 양이 많아서 영양분이 풍부한 달콤한 음료가 된다니, 지혜와 연구의 산물이라고 깊이 감탄하게 됩니다. 가끔 오해가 있는 듯한데, 아마자케는 지게미(재강에 물을 타서 모주를 짜내고 남은 찌꺼기)를 재료로 만드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게미를 이용한 아마자케도 좋겠지만, 술이 약한 사람에게는 매번 각오가 필요한 것도 곤란합니다. 아마자케는 술과 비슷하지만 술이 아닙니다. 신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음료지요. 옛날에는 여름에 마시는 영양 드링크였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예전에는 아마자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에서 담근 것은 산뜻한 단맛이 나서 어느새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 사고하치는 가스즈케(粕漬け, 생선, 고기, 채소 등을 지게미나 맛술 찌꺼기에 절인 것)처럼 채소 이외의 식재료를 절여도 좋고, 아마자케는 여러 가지 과자나 디저트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따뜻해도, 차가워도 맛있으니 일 년 내내 냉장고에 넣어두고 싶어지는 것들이지요. 양쪽 모두 단순한 단맛이나 신맛만 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발효식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조미료나 술도 포함한다면 일본의 식품은 누룩균 덕분에 성립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점을 조금 더 의식하면서 요리를 한다면 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앞으로 누룩 연구를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 단단한 것도 맛있겠다는 생각에 시험 삼아 만들게 된 데는 멤브리요(membrillo, 마르멜로 과육으로 만든 스페인 과일 조림)라는 젤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멤브리요는 모과의 과육을 끓여서 굳힌 것으로 치즈에 곁들여 먹지요. 스페인의 시장이나 식료품점, 치즈 가게에서 빼놓지 않고 판매하는 젤리입니다. 가끔은 사과로 만든 것도 찾을 수 있지요. 신맛이 조금 강하지만 매실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삼온당이나 브라운슈거를 백설탕과 섞어서 사용하면 단맛에도 깊이가 생겨 멤브리요의 친구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저는 매실주도 자주 만드는데, 최근에는 완숙에 가까운 매실로 만들어봤습니다. 깨지거나 뭉개지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뭐든 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탓에 다양한 단맛을 가미해서 만들어봤어요. 기본적으로는 매실과 얼음사탕, 알코올을 병에 담아 숙성시키기만 하면 완성이지만, 알코올 도수가 낮거나 또는 단맛에 꿀을 추가할 경우에는 온도가 낮은 곳에 보관하지 않으면 매실이 점점 발효해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냉장고에 넣어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아요. 술의 종류와 단맛의 가감에 따라 완성된 매실주의 풍미가 달라지는 것이 또 상당히 재밌습니다. 다음 매실 시기가 오기 직전에 개봉하면 충분히 맛이 들어 있을 게 분명해요.
- 매실주라면 화이트 럼에 담그는 경우가 많은데 알코올 없는 매실 시럽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그럴 때는 설탕절임과 마찬가지로 매실을 반으로 가르거나 십자로 칼집을 내 매실, 레몬, 꿀, 얼음설탕을 차곡차곡 병에 담고 시럽이 만들어질 때까지 절여줍니다. 재료를 넣기 전에 병을 소독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효를 억제하기 위해 소량의 럼을 넣고 뚜껑을 닫은 후, 병을 흔들어 안쪽까지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지요. 빠르면 3주 정도 숙성하면 되지만, 저는 도중에 레몬을 꺼내고 한 달 정도는 그대로 놔두는 편입니다. 이것 역시 냉장고에 보존하는 것이 무난하지만, 술부터 절임까지 다양한 종류의 매실 요리를 만들다 보면 그것만으로 냉장고가 가득 차버리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더 만들고 싶어도 꾹 참고 2킬로그램의 매실을 잼, 시럽으로 나눠 만드는 등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어요. 그러니 매실 음료를 잔뜩 만들어두고 싶은 사람은 냉장고 저장 공간을 고려한 후에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부엌 귀퉁이에 얼음설탕이 녹을 때까지 놔둔 매실 절임에서 거품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효가 진행된다는 증거이니 곧바로 열을 가해 발효를 멈추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어 안심이지만, 신선도는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 그런 점들을 잘 가늠해 가며 만들어보세요.
- 오무타 아카쓰키의 주전자
아카쓰키가마(暁窯)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아마기 1203-190
(福岡県大牟田市甘木 1203-190)
Tel. 0944-58-0274
www.akatsukigama.com
- 네가시마의 칼
이케나미하모노제작소(池浪刃物製作所)
가고시마현 니시노오모테시 이케다 9881
(鹿児島県西表市池田 9881)
Tel. 0997-22-0513
park10.wakwak.com/~ikenamihamono
- 하마차
JA돗토리이나바 게다카지점 영농경제과
돗토리현 돗토리시 게타카초 가쓰미 619
(鳥取県鳥取市気高町勝見 619)
Tel. 0857-82-0411
- Yen Ware 도자기
콜렉스 리빙
도쿄도 메구로구 아오바다이 1-1-4
(東京都目黒区青葉台 1-1-4)
Tel. 03-5784-5612
www.collex.jp
- 잔월
도라야 아카사카 본점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4-9-22
(東京都港区赤坂4-9-22)
Tel. 03-3408-4121
- 쓰키모치야나오마사 구리무시
쓰키모치야나오마사
교토시 나카교구 기야마치도리 산조 아가루가미오사카초 530
(京都市中京区木屋町通三条上ル上大阪町 530)
Tel. 075-231-0175
- 아카시야 가루칸
아카시야 본점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긴세이초 4-16
(鹿児島県鹿児島市金生町 4-16)
Tel. 099-226-0431(대표)
www.akashiya.co.jp
- 교카도토시야스의 미나즈키
교카도토시야스
교토시 사쿄구 산조도리 가와바타 히가시이루 나니와초 226
(京都市左京区二条通川端東入ル難波町226)
Tel. 075-771-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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