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영욱
출판 : 교보문고
출간 : 2024.02.28
과학 기술의 발전이 전쟁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 책이다.
교보문고가 직접 출판하는 책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출간작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대중 교양서 포지션이라고 보기에는 투자, 교육, 소설 등 다양한 영역을 모두 다루고 있어서 -분야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 책은 출간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들면 자체 출간을 하는 것 같다.
즐겁게 읽었지만, 조금 모호하다.
우선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직은 법관과 의사, 그리고 종교인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은 뒤로 집중도가 낮아졌다. 학자였다면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자가 의도한 건 연금술 등을 다루던 연구자로서의 의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경우에도 외과적 의사의 경우에도 종교인과 같은 의미로서의 '전문직'으로 인식되는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 외에 책 속의 사례들도 특별하고 흥미로운 경우보다는, 대체로 이미 알려져 있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분산된 사건들을 하나의 주제로 모아서 살펴보고 그 사이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쭉 훑어 읽어보기 좋았다.
- 과학 연구는 그야말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죠. 근대 초입의 과학자들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교양을 쌓기 위해서, 또는 고상한 정신활동이나 일생을 걸 정도의 진지한 취미활동으로서 과학을 연구했고, 그 연구는 물려받은 유산이거나 부유한 가문과 왕실의 후원으로 가능했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부터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던 과학 연구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점차 '전문직업인'으로 대접받는 과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무렵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왕정 체제가 막을 내리고, 시민 혁명과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이자, 근대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틀이 확립되던 시점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전문 직업인이란 단순히 그 일을 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체계적인 전문 교육과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을 의미하죠.
-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직은 법관과 의사, 그리고 종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은 권력과 왕권을 유지해 주는 법을 집행하고 민중의 보건을 책임지며, 정신적으로 대중을 지배하는 신권을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다 근대 국가 시스템이 정비되면서 국가 경영과 통치에 필수적인 전문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했죠. 가장 먼저는 전문 관료들이 등장했습니다.
(리뷰자 주 : 의사가 전문직으로 인정받게 된 건 현대에 들어서다. 그보다는 학자가 적절할 것 같은데...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가 살짝 흔들린다.)
- 정부가 과학자들에게 독립된 연구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가 경영과 군사적 목적의 연구를 맡긴 초기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라부아지에는 과학자가 전문 직업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도기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근대 국가 성립기에 국가의 군사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과학자가 전문 직업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개인적 취미가 아니라 국가경영과 군사 영역에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게 됐고, 국가 권력도 과학자들을 체계적·제도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국가 운영과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시스템을 만들게 됐다. 그러나 라부아지에가 당시 그의 산소 이론을 위시한 화학적 연구 결과와 지식을 그대로 적용해 화약 품질과 무기 개량의 성과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학과 물리학 이론을 군수품 개발과 개량에 바로 적용했다기보다는 과학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체득한 계량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실험 방법이나 사고방식, 과학적 태도가 바탕이 된 결과였다. 즉, 당시 무기체계의 수준은 과학 기술적 연구 개발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많은 시도와 경험, 그리고 시험과 실험의 반복에 의해 누적적으로 발전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 또한 라부아지에의 과학적 업적은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실험과 기록, 집필에 이르기까지 평생 모든 연구를 함께했던 아내 마리안 폴즈 Marie-Anne Paulze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문 편이다. 그래서 그동안 마리안 폴즈는 라부아지에의 동료 과학자가 아니라 주로 남편의 충실한 조수로서 기술됐다. 그러나 최근 라부아지에의 실험과 연구 성과는 부인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이며 분석적인 지원과 협업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녀 또한 스스로 살롱을 운영하면서 당시 계몽철학자를 포함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수학자들의 학문적 교류의 중심이 됐던 훌륭한 과학자이자 계몽사상가였다.
- 한편 라부아지에는 일찍이 종합징수인 조합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상당한 돈을 벌고 있었다. 종합징수인이란 국가와 계약을 맺어 평민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대신 걷고 일정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40여 명으로 제한돼 있던 종합징수인들은 실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과학과 문화 예술 진흥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라부아지에 또한 이 수익을 주로 기부 재원이나 연구 자금으로 활용했다. 하지만이 일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라부아지에에게 큰 화가 돼 돌아왔다. 왕정은 기울어 가는 국고를 메우기 위해 평민에게 소금세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세금을 물렸는데 그 과정에서 과도한 이익을 챙긴 종합징수인들이 구체제 왕정을 대리해 민중을 핍박하는 반혁명 집단으로 몰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라부아지에는 일생 민중을 사랑하고 혁명을 지지했던 계몽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 막시밀리앙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Robespierre 등 급진파에 의해 ...
- 오늘날 도량형 표준이라 할 수 있는 MKS 단위계의 기본 단위인 미터 meter, 킬로그램 kilogram, 초 second가 정리된 건 근대 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 과학자들에 의해서였다. 도량형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과학계의 가장 큰 이슈는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뉴턴의 과학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상황이었는데 이를 적용했을 때 예상되는 지구의 모습과 둘레에 관해 과학자들 간 논쟁이 벌어졌다. 뉴턴 이론의 반대파들은 지구의 모습을 '원형' 또는 '위아래로 길쭉한 타원'이라고 주장한 반면, 찬성파들은 자전에 의한 구심력 때문에 적도 부분이 불룩 튀어나온, '옆으로 길쭉한 타원'이라고 주장하며 대치한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국가의 재정 지원을 풍부하게 받던 왕립 과학 아카데미였다.
-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해외 여러 곳에 지구 모양과 둘레를 재는 측량대를 파견했다. 1735년 수학자 라 콩다민 La Condamine이 페루 원정대를, 1740년 천문학자 피에르 모페르튀 Pierre Maupertuis가 스웨덴 라플란드 조사대를 이끌었다. 최종 측량 결과, 지구는 럭비공처럼 옆으로 길쭉한 타원형으로 밝혀졌다. '뉴턴의 법칙'이 명실상부하게 '참'으로 판명된 순간이었다. 이로 인해 뉴턴의 법칙에 대한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 "돛대가 버틸 수 있는 한 돛을 더 펼쳐라!"
유럽 대륙을 거의 제패한 나폴레옹은 끝으로 영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1805년 영국의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영국 해군 대 프랑스-스페인 연합해군의 결전이 벌어졌다. 당시 영국 함대는 함선 스물일곱 척,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함선 서른세 척으로 영국 해군이 수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영국 함대를 이끈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의 탁월한 전략으로 단 한 척의 함선도 격침되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 넬슨은 깃발 신호로 각 함선들에 명령을 내렸는데 그때 내린 지침 중 하나가 "돛대가 버틸 수 있는 한 돛을 더 펼쳐라!"였다. 연합 함대의 진형 중앙을 최대한 가까이 돌파하는 넬슨의 획기적인 전술에 상대는 당황했고, 그 틈을 이용해 승리를 이뤄 냈다.
-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독가스를 개발했던 건 아니었다. 그는 1909년 공기 중에 무한히 섞여있는 질소로부터 고온고압과 촉매를 넣어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리고 카를 보슈 Cart Bosch가 이를 제품화하면서 하버-보슈 Haber-Bosch공정이 완성됐다. 암모니아를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유기 비료의 핵심 원료인질산염(암모니아를 질산화해 만든다)을 쉽고 값싸게 얻을 수 있었고, 이렇게 화학비료가 농업에 사용되면서 인류의 식량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한 현대 물질문명 발달의 결과 중 하나는 급속한 인구 증가였다. 그렇다 보니 세계적으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됐고, 인류는 급속히 농업 생산성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토머스 맬서스 Thomas Malthus의 인구론도 이런 배경에서 출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버가 전 지구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유기 질소 ...
- 그는 단열 총열의 자동 제어와 자동 연사 모델을 고안해 냈고, 여기에 무연 화약을 결합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기를 탄생시켰다. 이후 맥심은 미국보다 큰 유럽의 군수 시장을 겨냥하며 영국으로 귀화했고 자신의 회사를 비커스에 합병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런 맥심의 결정은 탁월했다. 짧은 시간에 유럽 강대국들의 군대가 이 회사의 열성 고객이 됐기 때문이다.
-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가성비 최고의 대량 살상 무기인 기관총이 대량 생산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줬다. 물론 기관총은 이전부터 아프리카 식민지를 쟁탈하려는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전투원들의 고통을 줄여 주고 싶다는 인류애와 도덕적인 믿음에서 탄생한 기관총이 결국 아프리카 식민지의 원주민을 공격하고 살상하는 데 사용된 셈이다.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제국주의 분위기 속에서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 굵직한 총기 개발의 역사는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획기적인 발전에서만큼은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개틀링뿐 아니라 남북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미국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술자들이 등장해 이름을 날렸다. 새뮤얼 콜트 Samuel Colt가 설립한 회사 콜트 Colt(현재 콜트 파이어암스)의 리볼버 권총은 서부 개척사의 중요한 아이콘이었으며, 미국 육군에 납품을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 불멸의 기록을 이어오고 있다. 혁신적인 개발은 주로 미국 발명가들의 몫이었고, 유럽은 이를 계속해서 개량해 발전시켰다.
- 개틀링, 콜트와 같은 몇몇 혁신적인 발명가들의 역할도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한 총기 개발 시장에는 그보다 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후발 주자였던 미국이 근현대 산업 전반에 걸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흔히 '미국식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대량 생산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된 현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던 이 시스템은 18세기 말면 방직 공업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미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 엘리 휘트니 Eli Whitney다. 휘트니는 이전까지 주로 노예에 의존하던 목화씨 제거를 기계적으로 해결해 주는 재래식 조면기를 개량해 1793년 특허를 취득했다. 단순한 구조의 이 조면기는 약 1,500배 가까이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면방직 산업 분야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휘트니가 오늘날까지도 근대 '대량 생산과 표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미국식 생산 시스템으로 인해 산업 현장은 비숙련 노동력을 대거 투입해도 품질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단순화·효율화한 생산 라인에는 숙련장인들 대신 노동자들로 대체돼 단순 노동을 했고, 그에 맞는 임금을 받았다. 이런 공장형 생산 방식은 현대적인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자본주의 산업화를 완성시키는 치트키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의 수많은 '공방'이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 이 시스템이 정착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기계공학자 프레더릭 테일러 Frederick Taylor다. 공장의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던 테일러는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지켜보면서 왜 업무 숙련도가 높아져도 생산 속도가 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대한 적게 일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향상돼야 노동자들의 이익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테일러는 태업과 비효율을 없애기 위해 노동자의 작업을 기본 동작으로 분해한 뒤 생산과 무관한 일상적 행동을 모두 제거하도록 했다. 또한 스톱워치로 측정 가능한 초 단위로 생산에 필요한 최소 동작과 공정을 표준화해 노동자가 해야 하는 과업을 하나의 공정으로 만들었다. 노동에 객관적 수치를 도입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과학적 관리론', '테일러주의 Taylorism'라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노동 작업의 모든 요소는 경험에 의존하기보다 과학적으로 판단할 것"이었다.
- 전쟁 기간에 근접 신관이나 유도탄, 로켓 등 매우 다양한 군사기술과 무기들을 성공적으로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마이크로 파와 레이저 연구를 위한 MIT의 방사 연구소나 반자동식 방공 관제 지상 시설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SAGE 체계를 개발한 링컨 연구소, 그리고 원자탄 개발의 맨해튼 프로젝트 예산도 NDRC의 활동을 통해 마련, 지원됐다.
- 부시는 전후에도 국가가 기초과학을 지원해야 한다는 근거와 이론을 담아 1945년 <과학, 끝없는 프런티어>라는 제목의 과학 정책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정부는 기초 과학을 지원해야 합니다."라고 누차 강조했다. 그래야 응용 기술의 성공과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고, 이러한 응용 지식이 결국 공공복지와 국가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는 과학 정책 모델과 논리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국방 과학 기술 중심의 국가 연구 개발 체제의 이론적 근거는 바로 부시의 이 보고서에서 비롯됐으며 이 보고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과학 기술 정책의 교과서이자 원칙으로 통용되고 있다.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통상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 B.C.와 기원후 A.D.로 구분한다. 하지만 국방 전문가들은 원자폭탄 이전인 B.A. Before Atomic Bomb와 이후인 A. A. After Atomic Bomb로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원자폭탄이 갖는 인류사적 영향력과 의미는 막대하다. 미국의 과학기술계는 기초과학부터 무기체계 개발 목적의 응용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조직적 계획과 지원이 없으면 생존과 성장이 어려울 정도로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현대 과학의 거대과학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이와 함께 군부와 산업계, 대학의 연구 기반이 어우러진 강력한 군·산·학 ...
- 바로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추가적인 과학 기술 연구 개발과 함께, 제조 공정에서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해결해 낼 다수의 현장 경험과 인력이 필요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핵분열 등의 결정적 연구 성과들은 독일 과학자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이용해 먼저 무기를 만들어 버리면 결국 그의 호전성에 의해 전 인류가 파멸되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컸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영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보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과학자들 사이에도 있었다.
-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은 1940년부터 원자폭탄 개발을 논의하는 모드위원회 MAUD를 만들어 개발을 검토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대전의 격전지인 유럽을 피해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으면서 미국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이자 핵분열 연쇄 반응을 발견한 레오 실라르드 Leo Szilard는 1939년 여름,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폭탄 개발을 서둘러 줄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써서 전달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분서주한 끝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레이더를 비롯한 전쟁 무기 개발을 총괄하고 있던 NDRC 아래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우라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조치했지만 정작 관련 예산은 겨우 6,000달러(한화 약 800만 원) 남짓 배정했을 정도로 매우 소극적이었다.
- 그러던 중 미국이 국가 차원의 원자폭탄 개발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이제 더 이상 세계대전의 방관자로 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위정자들의 이런 각성은 곧 맨해튼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적 세계를 부정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죽기 1년 전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인생에서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한 것이다."라고 적었을 만큼 핵무기 탄생을 크게 우려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일인이 먼저 만들었다면 더 큰 재앙이 닥쳤을지 모른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이제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1941년 NDRC 주관으로 원자폭탄 개발 연구승인이 떨어지고, 1942년 9월 이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공식 출범했다. 암호명 '프로젝트 Y'로 명명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컨트롤타워는 뉴멕시코 주 사막 한가운데 로스앨러모스에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시 프로젝트의 총괄 업무를 맡은 미국 공병부가 맨해튼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1942년 9월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무장한 육군 공병 대령 레슬리 그로브스 Leslie Groves였다. 군사책임자 OM Operational Manager으로 임명돼 핵무기 개발을 책임지게 된 그로브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연구를 이끌어 줄 과학자를 물색하면서 로버트 오펜하이머 Robert Oppenheimer를 찾아갔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양자물리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버클리 대학교 부교수가 된 서른여덟의 젊은 물리학자였던 오펜하이머는 그때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그의 능력을 믿었고, 결국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의 기술 총책임자 TM Technology Manager을 맡았다. 그로브스가 군을 대표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일인자였다면 오펜하이머는 연구 개발을 책임지는 과학 보좌관이었다. 둘은 프로젝트 기간 내내 갈등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를 꽤 신뢰하고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펜하이머를 시작으로 닐스 보어 Niels Bohr, 존폰 노이만 Johann von Neumann,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 등 당대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함께했다.
-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약 4년 동안 수행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투입 예산 20억 달러(현재가치 한화 약 45조 원), 총 고용인원 13만 명으로 단일 규모 최대의 초거대 사업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연구지였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는 연구소라기보다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입구에 "여기서 본 것, 한 것, 들은 것은 나갈 때 모두 여기에 두고 가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을 만큼 보안이 생명인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이 연구소에는 과학자들과 그의 가족까지 6,000여 명이 프로젝트 기간 내내 함께 기거했다. 심지어 전체 프로젝트 목표와 규모는 대통령 외 몇몇 지휘부 군인과 과학자들만의 철저한 비밀 속에 있어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고 1945년 4월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 Harry Truman이 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처음 보고받고는 기절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고 한다.
- 그렇다 보니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밖에서는 연구 진행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대학교를 포함해 미국 전역의 여러 대학교와 기업 연구소 등에 있는 각 분야 최고의 과학자들이 비밀리에 이 연구에 참여했다. 원자의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증명해 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핵분열 연쇄 반응을 발견한 실라르드 등 대부분이 노벨상 수상자 반열에 오를 수준의 과학자들이었다.
- 이미 원자폭탄 개발의 중요한 이론적 결과들이 나와 있긴 했지만 이론만큼 위력을 가진 폭탄을 실제로 완성시키기까지는 단기간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는 우라늄 동위원소 U235를 어떻게 단기간에 대량 추출할지, 또한 우라늄보다 성능은 좋지만 제어하기 어려운 플루토늄 Pu239를 어떻게 재처리하고 추출해서 투하 전까지 터지지 않는 원자폭탄으로 생산할 수 있을지 등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업 총예산 중 약 90퍼센트가 우라늄과 플루토늄 원료 추출 공장과 원자로 건설 등 제조 공정에 투입됐고, 실제 개발과 조립에는 10퍼센트 정도의 예산만 쓰였을 정도로 실제 제조를 위해 해결해야 할 기술적·공학적 난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 먼저 U235를 추출하기 위해 테네시 프로젝트 댐 건설로 전력이 풍부했던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 거대 공장이 세워졌다. 초대형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도 설치됐다. 입자가속기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핵심 부품인 전자기석을 감는 금속 코일이 대거 필요했는데 군수 물자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구리를 확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대한 대체재로 생각해 낸 게 순은이었다. 무려 1만 3,000여 톤의 순은이 여기에 사용됐다.
- 폭탄제조와 생산에는 기업들도 함께했다. 15장에서 소개했듯 특히 듀폰은 워싱턴 주 리치랜드 핸포드에 플루토늄 추출 원자로 공장을 건설하고 수만 명을 고용해 폭탄 생산에 일조했다. 나일론이라는 희대의 성공작을 만들어 냈던 듀폰은 그때 활용해 정착시킨 산업 연구 개발 관리 모델을 플루토늄 폭탄 제조 생산 공정에도 적용하며 이후 보다 거대한 군수 기업이 됐다.
- 이런 다방면의 노력 덕분에 공식 출범 후 채 3년이 되지 않았을 때 우라늄 폭탄 Little Boy 한 기와 플루토늄 폭탄 Fat Man 두 기가 완성됐다. 이중 플루토늄 폭탄 한기는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사막에서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 상태로 진행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트리니티 시험에 사용됐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노력의 결실을 본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놀랄 만한 파괴력을 막상 눈앞에서 확인하고 나니 일부과학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뒤에 오펜하이머도 "나는 이제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뒤늦게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멈추기 위해 정치인들을 만나러 쫓아다녔지만 계획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학자들은 무기개발을 앞당길 수는 있었지만 무기 사용에 관한 결정권은 없었다. 실제 연구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이후에도 이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더 이상의 인명 손실을 막고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였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미국 위정자들의 원자폭탄 투하 결정은 현재까지도 미국 역사상 최대 오점으로 남아 있다. 투하 사진을 선명하게 얻기 좋으면서 그동안 전쟁 피해가 거의 없던 일본의 주요 도시 중심부만 투하 목표로 삼았기에 희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점도 비판받는 부분 중 하나다. 원자폭탄 투하 후 1년 내 민간인 20여 만 명이 죽었고, 이후에도 100만 명 정도가 지속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전후 핵무기 독점과 그에 따른 군사 패권국 지위 독점을 위한 위정자들의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 원자폭탄 투하 이후 국방과 군사 전략은 새로 쓰였다. 상대보다 더 강력한 핵전력을 개발하고 보유함으로써 압도적인 군사 억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미국의 1차 상쇄 안보 전략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 강대 패권국 간 핵무기 경쟁과 냉전 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핵 보유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치 지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 자군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던 공군에게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낭보에 가까웠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수소폭탄 개발은 급물살을 탔고 미·소 냉전 시대의 핵 경쟁은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핵 개발을 둘러싼 군별 경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해군은 새로운 타개책을 찾기로 했다. 원자로를 민수용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이를 장착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에 눈을 돌림으로써 핵무기 개발 역사의 주역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해군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건 '핵 잠수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이먼 리코버 Hyman Rickover 대령이었다.
- 러시아 제국 마코프에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해 온 리코버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상당한 기술적 전문성도 갖추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소 중 하나였던 오크리지 연구소에 파견돼 일하며 일찌감치 원자력의 잠재력을 깨달았던 그는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해군 전력에 원자력을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런 그가 생각해 낸 게 핵에너지를 추진력으로 활용하는 핵 추진 잠수함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당시 원자력 통제권을 갖고 있던 AEC와 해군 지휘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리코버는 핵 추진 잠수함 개발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됐다.
- 당시의 잠수함은 디젤 엔진과 납축전지를 쓰고 있었다. 이런 잠수함 모델은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작전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잠항시간이 한정돼 있어 부상 시 공중 전력에 의해 손실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원자로를 잠수함에 실을 수만 있다면 잠항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 은닉성을 최대로 높일 수 있는 전략 자산을 새롭게 갖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원자로 기술은 신흥 기술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원자로의 잠수함 탑재와 안정적 운영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떤 방식의 원자로가 적합할지, 또 성공 가능성이 높을지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와 실험들이 축적되기 전이었다. 리코버는 마치 원자폭탄개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던 그로브스와 같은 상황이었고,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 리코버는 먼저 탑재 원자로의 냉각제와 제어봉 물질을 무엇으로 선택할지, 어떤 방식의 원자로를 개발할지에 대해 개발자들과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리고 일단 결심한 사안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밀어붙였다. 원자로 탑재에 대해서도 구축함에 먼저 탑재해 보자는 간부들의 제안에도 "안 돼! 무조건 잠수함 먼저!"라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주간지 <타임>은 그에 대해 "끊임없는 독설로 부하들의 혼을 빼놓는다. 관료주의를 산산 조각낸다. 군납 업체들을 돌아 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일 하나는 똑소리 나게 잘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리코버는 탑재 원자로는 감속재와 냉각재로 경수를 사용하는 경수로 형을 선택했다. 그리고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가압경수로를 만들도록 지시한 것도 그의 안목과 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 외에도 그는 핵연료 보관 및 차폐 설비, 열 교환기와 제어 장치 등 수많은 부품과 장비 개발 과정에서의 난제들을 직접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인류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인 노틸러스 USS Nautilus 호시험 항해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 리코버의 성공은 비단 미국 해군의 자존심 회복뿐 아니라 미 · 소간의 전략자산 경쟁과 이후 해군 전력의 역사를 바꾸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됐다.
원자력의 평화적 활용을 목적으로 시작된 원자로가 최고의 군사 전략자산으로 탈바꿈됐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이렇게 해서 단기간에 미국의 각 군은 육군 원자폭탄, 공군 수소폭탄, 해군 핵 잠수함으로 핵을 이용한 전략무기를 모두 갖추게 됐다.
- 또한 핵무기와 전략 폭격기를 결합해 전략 자산으로 전개하려는 최초의 작전이자, 소련이 철의 장막을 치도록 촉발한 냉전 격화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미 공군은 베를린 봉쇄가 끝나기 전 전략 공군사령부 Strategic Air Command, SAC를 창설해 그때까지 육군이 독점하고 있던 핵전략자산의 법적인 관리를 책임지게 됐다.
-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이후 미국의 핵 독점이 깨지고 본격적인 핵 경쟁이 시작되면서 핵폭탄과 핵탄두 소형화했고, 비축량도 급격히 늘었다. 1950년 300기였던 핵폭탄과 핵탄두가 3년 뒤인 1953년에는 1,300기를 돌파했다. 핵을 투하할 수 있는 전략 폭격기의 등장과 함께 핵을 탄두로 해 타격 지점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로켓 미사일 기술도 진화하고 있었다. 현대 로켓 기술은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고더드 Robert Goddard로부터 출발했다.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았던 고더드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특히 수학·천문학·공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며 "우리는 무엇이 불가능한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지 않다."라고 했을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1919년에 벌써 달의 비행 가능성에 관한 책을 썼다. 그리고 1926년에는 추진 연료, 연료 펌프, 구동장치에 관한 이론적·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액체 연료를 이용한 최초의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너무 앞서 나간 탓인지 그는 비록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는 1960년대 N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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