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장용민] 궁극의 아이 1-2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5. 8. 22. 22:30

본문

반응형

저자 : 장용민
출판 : 재담미디어
출간 : 2024.10.04


       

 

2013년에 엘릭시르에서 출간된 <궁극의 아이>를 읽었었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나는 이 책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다. 

 

이번에 <궁극의 아이>가 1, 2권으로 새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자주 다니던 도서관의 예약도서 서가에서 눈에 띄는 색깔의 책등을 발견하면서-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두꺼운 두께를 보아하니 2권이 이번에 새로 나오는 신간이고, 1권은 이전 책을 개정해서 내놓는 개정판일 것 같았다. 그럼 2권만 읽어도 되겠다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나의 기억력은 당시에 연이어 읽었던 <불로의 인형>과 <궁극의 아이>를 뒤섞어 기억하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1, 2권 다 대출 예약을 걸어두고 몇 주 뒤.

 

... 왜 나는 1, 2권을 모두 읽었던 것 같을까...?  

 

처음에는 구판을 전체적으로 개정하며 손봐 2권 분량으로 늘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판 실물을 찾을 수가 없어 비교대조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목차를 보면 2권은 완전히 신간인 것 같다. 신라가 가야의 기억에 접속해 그의 과거를 함께 추체험하는 부분은 1권과 겹치지만 그 외 부분은 미셸을 주인공으로 한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들지...?

 

추억에 잠겨 즐겁게 읽었지만, 끝맛이 영 찝찝하다. 완결이 아닌 3부가 있다는 점도 미진함을 남긴다.

이전에 <궁극의 아이>를 재미있게 읽었던 분들이라면 도전해 보셔도 좋겠지만,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라면 추천은 좀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12년 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었던 만큼 지금 감성에는 조금 맞지 않는 -당시에도 약간- 순애적, 신파적 사랑 이야기가 간지러울 수 있다.

그 부분만 잘 넘길 수 있다면 소설보다는 영화에 가까운 장면 전환과 복선을 느끼실 듯. 

단, 할리우드보다는 외국인들을 캐스팅한 충무로적 감성이라는 걸 잊지 마실 것. 

 

약간 뇌를 빼놓고 빠져들고 싶은 로맨스물이나,

이런저런 의미심장한 상징과 그림자 정부와 약간의 신비주의 설정을 좋아하신다면

도전을 말리지 않겠습니다.

 

사족 : "'신가야'는 오너캐 일까 아닐까"가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호(대부분에게 호가 아닐까)지만 아무래도 좀 간지럽다.   

 


   

 

 

- 다람살라는 유독 안개가 자주 끼는 곳이다. 햇살이 온전히 힘을 못 쓰는 새벽이면 고즈넉한 안개가 해발 천팔백 미터 도시를 감쌌다. 아마도 콧대 높은 히말라야의 드센 정기 때문이리라.

- 14대 달라이 라마인 으뜬 갸초는 밤새 뒤척이게 만든 잡스러운 꿈을 떨쳐 내려는 듯 가슴 깊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궁 너머로 펼쳐진 장관은 고향 티베트와 다름없이 아름다웠지만 늘 낯설기만 했다. 그가 서른일곱 명의 캄파와 노새를 이끌고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운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지만 고국 티베트의 독립은 묘연하기만 했다. 으뜸은 인도로 망명하던 날 밤을 떠올렸다. 

- 1959년 봄. 으뜸은 국경 근처의 조그만 마을에서 사흘을 머물러야 했다.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고국을 떠나야 했기에 그의 몸과 마음은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변변한 약조차 없던 터라 열병은 곧 이질로 발전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위태로운 숨을 몰아쉬던 으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 칠흑 같은 밤, 새하얀 연꽃을 피우게 될 겁니다, 라마."
고열로 몽롱해진 의식 저편에서 누군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실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영혼의 정중앙을 꿰뚫는 듯한 기묘한 힘을 지닌 목소리는 단숨에 으뜸을 죽음에서 끌어냈다. 기운을 차린 으뜸은 국경을 넘는 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지만 결국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흔들릴 때면 불현듯 그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선대 라마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으뜸은 방으로 돌아가 법의를 갖춰 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라다크의 이슬람학교에서 법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는 법의를 입고 머리에는 닝마파의 전통 모자를 썼다. 오늘 법회에는 티베트 불교 중 닝마파 신자들이 많이 올 예정이었다. 그들은 으뜸의 설법을 듣고자 중국의 감시를 피해 험준한 산맥을 넘어오는 소중한 동포들이었다. 한때 그 수가 몇만에 달했지만 중국 정부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 찍힌 우체국 소인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십 년 전 미국의 애틀랜타에서 오늘을 착신일로 지정하여 보낸 편지였다. 으뜸은 호기심의 꼬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자 기억의 터널 끝에서 실낱같은 햇살을 등지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를 만난 건 십년 전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교에서였다. 

- 강연장 입구에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보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경찰이 경찰 통제선을 치고 으뜸에게 길을 터 주고 있었다. 그가 준비된 승용차에 막 오르려던 순간, 경찰 통제선을 뚫고 한 동양 청년이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과 경호원이 총을 겨누며 제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을 법한 청년은 손대면 깨질듯 여리고 아름다웠다. 숯처럼 검은 머리에 목화처럼 새하얀 피부.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청년의 눈이었다. 그의 눈은 오드아이였다. 오른쪽 눈은 초록빛 바다를 연상시키는 에메랄드빛이었고 반대편 눈은 블랙홀처럼 깊고 짙은 검은색이었다. 그것이 청년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청년은 공손히 두 번 절을 한 후 꼿꼿이 일어나 으뜸을 바라봤다. 재배(再拜)는 죽은 자에게 바치는 절이었다. 

- "내 아직 입적하지 않았거늘 왜 재배를 하셨는가?"

"라마의 입적에 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보시게."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앞으로 정확히 십 년 후 오늘, 라마께선 초승달 아래에서 암살을 당하실 겁니다. 삶과 죽음은 라마 손에 달렸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그 말은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기억에 묻혀 희미해졌고 이제껏 한 번도 다시 고개를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오늘, 그가 다시 경고하고 있었다. 

 

- 으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야. 늦겠네. 출발하지."

- 청동 돔으로 된 지붕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인 적신월(赤新月)이 일식처럼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으뜸은 청년이 망상에 사로잡힌 병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칠십 년간 수행을 하면서 그가 깨달은 건 과거와 미래, 인연과 운명이 모두 거대한 우주의 섭리로 연결된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조금 엿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조금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 자신 역시 전대 라마에게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던가. 

- 그리고 드디어 으뜬이 마이크로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맨 앞줄에서 흰색 카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까규빠종파 신도 한 명이 은밀하게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가 꺼낸 것은 치명적인 쇳덩이였다. 십년 전 청년의 예언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으뜸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으뜸의 선택이었다. 그는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듯 암살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명심해라. 관용을 연습하는 데 있어 네 원수는 최상의 스승이다."
곧이어 천둥 같은 총성이 울려 퍼졌다.

- 갈색 머리카락, 심지어 몸무게마저도 사진 속 아기와 똑같았다. 엘리스는 다시 한번 사진 속의 아기와 인형을 비교하곤 녹초가 된 몸을 소파에 기댔다. 이것으로 서른네 번째 아기가 탄생한 것이다. 엘리스는 인터넷으로 주문받아 실제 아기와 똑같은 인형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병이나 사고로 아기를 잃은 부모들이 고객이었다. 그녀가 이 일로 유명해진 데는 생김새뿐 아니라 아기의 성격, 사연까지 담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노력이 인형에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번 아기는 태어난 지육개월도 안 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여자아이였다.
"다음 세상에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해, 수잔."

- 기도를 마치자 피곤이 몰려왔다. 엘리스는 버릇처럼 냉장고로 향했다. 몇 미터 되지 않았지만 엘리스에게는 대서양만큼이나 먼 거리였다. 그녀는 보행기 없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초고도비만이었다. 삼 년 전 마지막으로 쟀을 때의 몸무게가 168킬로그램이었다. 아마도 지금은 그 이상 나갈 것이다. 그녀에게 음식은 유일한 낙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신문은 물론 TV도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은 설치되어 있었지만 일 외에는 일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난 십 년간 단 한 발자국도 집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 그녀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사실 그 증상을 병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생명을 위협하거나 고통이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증상 때문에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과 담쌓고 살게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십 년 전 만났던 한 남자. 그리고 그와 지냈던 치명적인 닷새.


- 엘리스는 미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미셸이 들고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공 때문이었다.
미셸은 곰 인형 대신 그 공을 안고 잤는데 안에는 초콜릿 포장지를 접어서 만든 붉은색 종이 개구리가 들어 있었다. 녀석이 엘리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 학년이 올라갈수록 별명도 진화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미셸의 별명은 '돼지 마녀의 딸'이었다. 어디로 보나 미셸은 정상적인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별명이 생기는 이유는 모두 엘리스 때문이었다.

- 방문객이 목소리를 따라 소파 뒤로 다가왔다.
"엘리스 로자 양?"
그는 회색 정장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30대 남자였는데 외판원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가냘픈 얼굴은 며칠 밤을 설친 듯 야위어 있었고 트렌치코트 속의 어깨는 세상 고민을 몽땅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칠흑 같은 밤을 밝히는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요."
남자는 그제야 엘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때맞춰 잘 오긴 했는데 누구시죠?"
자세히 보니 남자는 어딘지 슬퍼 보였다. 그 슬픔은 마치 지울 수 없는 오래된 흠집처럼 남자의 눈가에 들러붙어 있었는데 제아무리 미소를 지어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는 FBI 요원 사이먼 켄이라고 합니다."

- "혹시 신가야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이름을 듣는 순간 엘리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십년 전 있었던 닷새 동안의 치명적인 사랑이자 미셸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엘리스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 "어젯밤 9시경 워싱턴의 제퍼슨 호텔 정문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어요. 나다니엘 밀스타인이라는 사업가가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죠. 범인은 아직 못 잡았어요."
"그게 신가야랑 무슨 상관이죠?"
"사건이 발생하기 한 시간 전 저한테 이 편지가 배달됐거든요."

- "왜냐면 신가야는 십 년 전 죽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엘리스의 분노에 찬 목소리는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를 가로막은 건 바로 평생을 쫓아다니던 그 병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발작과도 같았는데 어둠 속 괴한이 은밀히 나타나 뒤통수를 내려치듯 엘리스의 감각을 점령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십년전 늪속으로 끌고 갔다.

- 그날 밤. 하늘에선 마치 세상을 끝장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엘리스는 잠옷 차림으로 뉴욕 뒷골목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불길한 직감과 절박함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늦은 시각 음침한 뒷골목을 헤매던 이유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심장을 온전히 내준 남자. 그가 한 장의 메모를 남긴 채 사라진 것이다. 메모를 읽는 순간 엘리스는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행간에는 비장함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엘리스는 직관이 이끄는 데로 달렸다. 그것 외에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직관의 날카로운 창끝에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발길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 그렇게 얼마나 정처 없이 달렸을까. 그의 실루엣이 골목 저편에 나타났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파일럿 점퍼에 낡은 보스턴백을 둘러메고 있었다. 엘리스는 엉망으로 달리며 목청껏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엘리스의 입을 틀어막더니 골목 한편에 쌓여 있던 상자 더미 뒤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엿같겠지만 세상엔 때라는 게 있어. 보내야 할 걸 잡으려다간 경을 치고 말지."
밑바닥 냄새를 물씬 풍기는 거친 목소리.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그 남자는 온통 누더기를 뒤집어쓴 걸인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왜 나를 막는 거지? 그때 골목 안으로 수많은 불빛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소중한 그 사람을 에워쌌다. 그는 반항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십여 명의 남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마치 사나운 맹수를 포위하듯. 이제 그가 정체불명의 남자들에게 제압당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엘리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명확히 빛을 발하던 그의 눈은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고마움, 애틋함, 회한, 그리고 슬픔. 찰나의 순간 수많은 감정을 뿜고 나자 그는 수순처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총이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겨눴다. 

- 약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항우울제였다. 약을 삼킨 엘리스는 먼 길을 돌아온 여행자처럼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사이 사이먼은 집 안을 살폈다. 엘리스의 집은 지나치리만큼 무미건조했다. 벽지는 전부 무채색이었으며 가구들은 간단한 장식조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흔한 복제 그림은 물론이고 가족사가 담긴 사진첩도 없었다. 한마디로 식사만 할 수 있는 거대한 관 같았다.
"여긴 전쟁터군요. 소리가 없지만 치열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리스가 눈을 떴다.
"우리에겐 기억을 소환하는 것들이 있죠. 장소, 음악, 사소한 물건 등등. 그중 소환력이 가장 낮은 게 색이에요. 가장 흔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집에는 색이 없어요. 어디를 둘러봐도. 그건 여기가 전쟁터란 뜻이에요. 그것도 아주 치열한."

- "나한텐 병이 있어요."
"어떤 병이죠?"
"과잉기억증후군."


- 사이먼의 미간이 좁아졌다. 언젠가 그 증상에 관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몇 백만 명 중 한 명도 안 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희귀한 증세로 망각 능력이 상실되어 기억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증후군이었다. 학계에 보고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막 연구가 진행 중이었지만 과잉기억증후군에는 한 가지 명확히 공통된 증상이 있었다.
"모든 걸 기억하는군요."

- "방금도 신가야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거군요."
엘리스는 대꾸 없이 허공을 떠도는 먼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신가야와는 어떤 사이였죠?"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건 닷새가 전부예요."
"하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닷새였군요. 아직도 전쟁을 치러야 할 만큼."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거라고요."

 

- "설마 나한테 사과를 하려던 건 아니지? 그럴 리 없지.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삼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아내는 아직도 신비로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그중에도 가장 의문스러운 건 왜 자신처럼 초라한 남자를 선택했냐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물으려 했지만 끝내 묻지 못했고 이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고 말았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도시에서 더 이상 낭만적인 추억에 빠져들지 말라고 경고하듯 냉정하고 전기적인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이먼은 받지 않았다. 그날 아침처럼. 

-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자 사이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면대로 가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를 닦았다. 이어 샤워하고 아침 뉴스를 들으며 단출한 식사를 했다. 메뉴는 스크램블드에그와 토스트, 오렌지 주스였다. 사이먼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식탁에는 아내를 위해 준비한 생일 케이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늘은 아내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건 이전에도 라마를 암살하려 했던 중국이었다. 때문에 사건 직후 티베트 자치구는 전 자치구민이 봉기하여 중국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폐쇄되고 시위에 참가한 티베트 시민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흑룡강성과 길림성 공안까지 투입됐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중국 정부는 마지막 칼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흥분한 시위대가 폭도로 변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군이 투입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1959년도에 있었던 대학살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여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워낙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사건인지라 이틀 전 있었던 나다니엘 밀스타인 총격 사건은 일면 구석에 작게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 비행기를 기다리던 로비의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듯 신문 일면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주저 않고 만화가 실린 페이지로 넘어갔다. FBI에서 일한다는 건 지독하게 암울한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하루종일 보는 것과 흡사했다. 특히 그가 소속된 강력범죄 수사반은 지옥 문 앞에 책상을 갖다 놓고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귀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과 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인다는 건 매일 영혼의 일부가 닳아 없어지는 일이었다. 때문에 요원들은 정기적으로 심리상담을 받았고 일부는 정신적인 문제로 일을 그만뒀다. 사이먼 역시 힘든 일과가 끝날 때면 남아 있는 영혼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머릿속으로 재 보곤 했다. 정확한 무게는 알 수 없었지만 십 년 전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건 분명했다.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인 송로버섯 양식 성공, 대중화 시대 열리나]
사회면 헤드라인은 버섯 이야기였다. 기사 한쪽에는 50대 남자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얼굴로 굳은 말똥 모양의 버섯을 들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세바스티앙 브에미라는 프랑스계 농부였는데 코네티컷에 있는 떡갈나무 숲에 틀어박혀 십 년간 연구한 끝에 양식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옆에는 송로버섯 양식 성공이 요식 업계에 미칠 경제적인 파급 효과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버섯 1파운드에 만 달러라고, 헤로인보다 끝내주나 보지."
사이먼은 5달러짜리 머핀을 씹으며 다음 기사로 넘어갔다. 테니스 경기장에 나체로 뛰어든 게이 연인, 밤에 거대 파도를 점령하는 서핑 방법, 전직 스파이였던 러시아 미녀가 TV 앵커가 됐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소식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신문을 뒤적이던 ...

- "둘째 날 우리는 극장에 갔어요. 브로드웨이에 있는 고전 영화 상영관이었죠.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었고요. 비엔나로 간 삼류 소설가가 음모에 빠지는 내용의 흑백영화였는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가야가 물었어요. 기억에 남는 대사 없냐고.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지루한 영화는 처음이라고 했죠. 하지만 가야는 아니었어요. 그는 거리 한복판에서 극 중 인물이 된 듯 감정을 잡더니 대사를 읊었어요. '보르지아 가문이 권력을 잡고 있던 삼십 년간 이탈리아에서는 전쟁과 테러, 살인, 유혈참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르네상스를 창조했다. 반면, 스위스 사람들은 끈끈한 동포애로 뭉쳐 오백 년 동안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렸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무엇을 만들었는가? 뻐꾸기 시계다.' 이게 가야가 좋아했던 대사예요. 그런데 그 대사를 했던 극 중 인물의 이름이 해리 라임이었어요."

 

- 엘리스는 단어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먼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잘 들어요, 엘리스, 오늘 사고가 난 비행기는 평범한 여객기가 아니에요. 보잉사에서 특별히 제작한 747 SB4C기예요. 대통령이 타는 에어포스원과 같은 기종으로 공중급유 기능까지 갖춘 최고 기밀급 기체라고요. 게다가 국적으로 등록된 나라가 무려 17개국이에요.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심지어 러시아까지. 그 비행기가 JFK 국제공항 이전 마지막으로 착륙한 곳이 팔일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이었어요. 아직 누구 소유인지 안 밝혀졌지만 하늘에서만 생활하고 전 세계를 국경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누군가 죽였어요. 비록 신가야가 벌이는 일은 아니더라도 분명 연관된 건 틀림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 줘야 해요."

- 그 그림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열정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 후 엘리스는 모아 둔 600달러와 어머니가 보태 준 1,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왔다. 일단 그녀의 목표는 미술대학에 가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궁극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녀는 뉴욕의 예술가들과 만나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공유하길 원했고 그들로부터 예술혼을 배울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인부들은 썰물이 빠지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엘리스의 일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인부들이 먹은 식기를 모두 닦아야 했다.

- "그림이라. 좋지. 근데 말이야. 이건 같은 일에 종사하는 선배로서 하는 충고인데 말이지. 꿈은 적당히 꾸는 게 좋아. 결국 꿈은 꿈으로 끝난다구. 특히 우리처럼 개뿔도 없는 사람은 말이야. 나도 네 나이 때 여기 왔어. 그땐 나도 조금만 열심히 하면 금세 안젤리나 졸리가 될 줄 알았거든. 근데 날 봐. 내년이면 서른인데 아직도 다음 달 집세 걱정이나 하고 있잖아. 이젠 애 딸린 중년들이나 찝쩍댄다고. 한창 주가 날릴 때 괜찮은 남자 잡아서 눌러앉는게 좋을 거다." 

- "비밀이에요."
엘리스가 활짝 웃으며 식당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라디오에서 엘리스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신가야 씨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셨네요. 브롱크스에 계신 엘리스 로자 양. 오늘 스무 번째 생일이시라고요. 화가의 꿈을 꼭 이루시길 바란다고 신가야 씨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 엘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오늘은 엘리스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생일인 걸 알지 못했다. 오늘 아침 걸려 온 어머니의 축하 인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누군가가, 그것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엘리스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 말고 이 동네 엘리스 로자가 또 있나?"
엘리스는 반신반의하며 식당 문을 나섰다. 그녀와 동명이인이 있다 하더라도 꿈도, 생일도 같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지금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바돌로매 드 피코 레스토랑으로 오세요.]
메모를 읽자마자 엘리스는 반대편 전시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메모를 전해 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금 라디오 멘트도 메모의 주인이 보낸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발이 바닥에서 10센티 가량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운명적인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일 년을 보냈지만 뉴욕에 백마 탄 왕자는 없었다. 그런데 스무 번째 생일날 누군가 나타난 것이다. 대체 누굴까? 

 

- 한 가지 분명한 건 엘리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마빈 아저씨가 점심을 먹을 때마다 듣는 라디오 방송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엘리스가 모네와 점심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마 매일 치근덕대는 공사판 인부 중 한 명?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생일을 축하하고 메모를 통해 고급 레스토랑으로 초대할 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보아도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엘리스는 미술관을 나섰다. 이 식사 초대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 "오늘 내가 직접 모델이 된 건 인체를 그리는 목적이 단순히 근육이 가미된 아름다운 피부를 그리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다. 인간의 몸은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좌절로 인한 폭식 덕분에 튀어나온 뱃살, 슬픔이 배어 있는 눈가의 주름, 욕망으로 가득 찬 거시기 등등. 우린 그걸 찾아내 캔버스에 옮기는 거다. 내 몸에서 뭘 느끼지? 로자 양."
포즈를 잡으면서도 구스타프는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제 태만을 경멸하는 날카로운 질책이 느껴집니다."
엘리스의 대답에 모두 미소를 지었다.
"좋은 대답이다, 로자 양. 오늘 그림은 기대해도 좋겠군."

- 수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다. 엘리스의 그림도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가장 어려운 손이었다. 손은 가장 복잡하고 섬세한 부분이다. 그만큼 제대로 그려 내기 힘든 부분이기도 했다. 엘리스는 연필로 비율을 재며 구스타프의 손을 관찰했다. 그런데 구스타프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앳된 얼굴을 한 20대 청년이었다. 그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와 수묵화 같은 심플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도 서로 다른 색깔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엘리스를 향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신가야..."
엘리스는 목탄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남자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엘리스도 이 거리를 지날 때면 마음이 아팠다. 테러 당시 그녀도 현장에 있었다. 그날 뉴욕은 삼백 년 역사 중 지옥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세계로부터 추앙받던 도시는 한순간에 폐허로 변했고 사람들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구조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엘리스 역시 그들 사이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모두 평온하길."
엘리스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기도를 했다. 그 순간이었다. 추모 인파 중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그는 서로 다른 빛깔의 눈으로 그라운드 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아저씨, 여기서 내려요!"
버스가 멈추자마자 엘리스는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는 경찰 통제선 바로 앞에서 국화 한 송이를 든 채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는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누군가에게 빌린 듯한 낡은 파일럿 점퍼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허름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태에선 묘한 기품이 풍겼다. 그것은 언젠가 봤던 일본 영화에서 적의 칼 앞에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던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 "사랑하는 분을 잃었군요."
엘리스는 그의 신비로운 눈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은 날 찾지 말았어야 해요, 엘리스."
외모만큼이나 섬세한 목소리였다.

- "사람이 말을 할 땐 쳐다보는 게 예의 아닌가요?"
그러자 남자가 돌아봤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은 더욱 아름다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세상에 일어난 나쁜 일들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 양 스스로를 자책하는, 무겁고도 어두운 눈이었다. 그것이 엘리스를 더욱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 "왜 나한테 선물을 보낸 거죠? 난 당신을 처음 봐요."
"당신은 운명을 믿나요?"
"차라리 우연을 믿어요."
사실 엘리스는 누구보다 운명을 믿고 있었다. 모네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곳 뉴욕에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저 멀리 동양에서 온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모두 가느다랗지만 끊어지지 않는 운명의 실로 연결된 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남자의 진심을 알아야만 했다. 

- "당신은 누구죠?"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요."
"철학적으로 따지면 우리 모두 누군지 모르죠.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남자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솜털처럼 가볍지만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

- "왜 날 찾아온 거죠?"
"왜냐면 당신을 한 번이라도 봐야만 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왜요?"
"당신이 아름다워서요."
엘리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내 감정을 숨기고 냉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남자가 한 발 다가왔다. 그의 숨결에서 솔잎향이 났다.

- "엘리스, 당신 마음 이해해요.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서 갑자기 선물을 주고 이상한 말만 늘어놓으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중 하나예요."
"날 사랑한다고요?"
"그래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건 엘리스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사랑 고백이었다. 저 멀리콜로라도에서 그라운드 제로까지 날아와 생면부지의 동양 남자로부터 받은 사랑 고백. 엘리스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 "당신을 처음 본 건 한 달 전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어요."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을 법한 청년이 세상을 다 산 듯한 말투를 썼다.

-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우린... 하지만 당신이 선택해야만 해요."
가야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간단한 이니셜이 새겨진 은팔찌였다.
"엘리스, 이건 선물이 아니에요. 신호기예요. 잘 들어요. 만약 나를 다시 보고 싶다면 이걸 차고 있어 줘요. 만약 당신이 이걸 안차고 있으면 난 두 번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이 말을 남기고 남자는 자리를 떴다. 그가 멀어져 가는 동안 엘리스는 팔찌를 든 채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뉴욕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사이먼은 엘리스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겉으로 보기엔 흔한 러브스토리였지만 그에게는 핵무기 제조 공식이 들어 있는 암호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바돌로매 드 피코..."
그것은 이탈리아어로 '바돌로매의 무화과나무'라는 뜻이었다. 바돌로매는 도마와 함께 아시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던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고 무화과나무는 바돌로매가 예수를 처음 만난 장소였다. 

- 사이먼은 가야가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 식당을 선택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건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가야는 이미 747기 테러를 예견했고 충돌한 세스나기의 조종사 이름을 십 년 전에 언급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퍼즐의 모서리가 너무도 정확히 들어맞고 있었다. 사이먼을 태운 쉐보레 타호는 뉴저지 턴파이크를 지나 베이브리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핸드폰 속 인터넷 창의 스크롤바를 연신 내리며 검색을 계속하던 사이먼은 한 블로그에서 멈췄다. 


- 돌로매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돌로매는 부칭(父稱)이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그를 바돌로매라고 부르는 반면 사도 요한은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정보력과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매점매석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때문에 모든 NGO들의 첫 번째 표적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 개인에 관해서는 세상에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그는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인물로 백악관 만찬 때도 외부와 철저히 봉쇄된 상태에서 밀담을 나누는 것으로 유명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사진은 1941년 군 당국과 보급 식량 납품 계약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아이젠하워와 찍었던 것이 유일했다. 그런 그가 이틀 전 제퍼슨 호텔 정문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당시 그는 자회사 CEO들과 회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다니엘은 본사가 있는 애리조나 저택에서 모든 회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위성을 통한 영상회의가 대부분이었고 특별한 경우를 위해 그의 저택에는 전용 비행기는 물론 활주로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워싱턴의 제퍼슨 호텔에서 회의를 한 걸까.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가 올 때 사용했던 헬기를 놔두고 굳이 자가용 리무진을 이용했다는 점이었다. 보고서에 적힌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 이틀 전 새벽 4시 35분. 제퍼슨 호텔 입구에서 여섯 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여 대기 중이던 리무진으로 이동하던 나다니엘을 향해 두 발의 총격이 가해졌다. 한 발은 머리에, 다른 한 발은 심장에 정확히 명중했다. 대기 중이던 리무진은 대전차지뢰에도 견딜 수 있는 방탄 차량이었으며 입구에서 리무진까지 거리는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범인은 정확히 급소를 명중시킨 것이었다. 시신에서 나온 총알로 볼 때 사용된 총은 러시아제 드라구노프 반자동 소총이었다. 러시아와 동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주로 사용되는 저격용 소총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도로를 모두 봉쇄하고 인근 건물을 수색했지만 범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범인은 제3세계 특수부대 출신으로 누군가로부터 사주를 받은 전문 킬러가 틀림없었다. 문제는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NGO들의 블랙리스트 1순위였고 개발도상국 농부들의 공동의 적이었다. 과장하면 인류의 5분의 1이 용의자였다.

- "나다니엘 밀스타인은 여러 분신 중 하나일 뿐이야. 그 사람, 각 나라마다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제임스 오타드, 자크 루이스 모로, 허버트 코프만, 다니엘 월레스 등 무려 일곱 개나 돼. 국적도 가지가지야. 영국, 프랑스, 심지어 남아프리카도 있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이중국적도 아니고 무려 일곱 개 나라?"
"가능한지 안 한지는 들어 봐. 우선 남아프리카 국적인 다니엘 월레스에 대해 얘기해 보면 세계 최대 보석 회사인 더 디바인의 최대 주주야. 잘 알겠지만 더 디바인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루비 등 세계 3대 보석의 원석 시장 점유율 중 무려 70퍼센트나 차지해. 그중 다이아몬드 원석의 경우 점유율이 90퍼센트에 육박하지.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석탄 및 철광 회사 OTC 센트럴 서플라이의 주식도 38퍼센트를 가지고 있어. 다음으로 자크 루이스 모로를 보면 세계 7대 메이저 석유 회사 중 엑슨 모빌, 텍사코, 브리티시 국영 석유 회사를 제외한 4대 기업의 대주주이고 러시아 국영 회사인 로스네프트와 합작으로 러시아 대륙붕 원유 시추까지하고 있어."
"한마디로 세계 곡물과 광물을 쥐락펴락하는 사람이군."

"한 나라를 굶겨 죽일 수도, 먹여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이지."

 

- 사이먼은 아직 편지 내용을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었다. 상부에 보고하기엔 정황상 허위 경고장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가야는 제대로 된 자료조차 없는 한국의 이민자였다. 그는 열아홉 살 때 홀로 취업 이민을 했는데 고등학교 중퇴 학력에 변변한 자격증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를 초청한 어느 단체 덕분이었다. 그 단체의 이름은 '카이헨동 연구소'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서 가야를 특별 연구원 자격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연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야는 급료로 매달 3,700달러를 받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냈다. 연구소에서 제공한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이민 온 다음해에는 운전면허증도 취득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오 년을 보내던 어느 날 브루클린 뒷골목에서 스스로 머리를 쏴서 자살한 것이다. 

- 온통 새하얀 기체의 꼬리날개에는 붉은 악마 개구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수화물 칸에 군인들이 보급품을 싣고 있었다. 하지만 군용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급품들이었다. 돔페리뇽 샴페인, 알마스 캐비아, 고베산 훈제 소고기 등 최고의 식재료들이었다.

- 노인이 탑승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임은 얼떨결에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의 내부는 훨씬 감탄스러웠다. 그곳은 최고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했는데 벽면은 온통 여러 종류의 가죽과 고급스러운 나무 마감재로 뒤덮여 있었고 방금 유럽의 왕궁에서 가져온 듯한 바로크식 소파들이 페르시안 카펫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별을 모아 놓은 듯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이쪽입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불투명 유리문이 있었다. 일본 민속화우키요에에 나오는 커다란 파도가 양각으로 그려진 유리문에 다가서자 자동으로 열렸다. 그러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은 로비와는 달리 동양의 향취가 물씬 났는데 비행기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장관이었다. 대나무와 난을 빙 둘러 이루어진 작은 숲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 고운 모래와 돌로 된 일본식 정원이 있었다. 정원 중앙에는 작은 차 테이블이 놓인 다다미 마루가 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의 고풍스러운 다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 글이 나타났다.
[오늘 우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연한 녹색의 글씨는 신기루처럼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어떻게 한 거죠?"
"이건 돌외초와 자귀풀이에요. 즙을 짜서 종이에 쓰면 뜨거운 물 속에서 글자가 나타나요."

- "내 말을 믿어요, 엘리스, 우린 오늘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고요. 뭐 하는진 저도 잘 몰라요."
"이 시간에 여기서 죽 때리고 있는 거 보면 텄네. 귀엽게 생겼으니까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차. 그냥 버리긴 아깝잖아."

- "봐요. 저 코란, 어렸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한테 받은 것일테죠. 낡아서 페이지가 모두 뜯어졌는데도 소중하게 보관하잖아요.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펼치면 날아갈 게 뻔하죠. 북동풍이 부니 여자 쪽으로 날아갈 거고 주인이 소중한 코란을 잡으려다가 얼떨결에 여자 가슴을 잡은 거예요. 영어가 서툴 테니 횡설수설할테고 신사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죠. 그리고 저 정도 외모와 매너면 점심 식사 정도는 나라도 같이 하겠어요." 
엘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 점쟁이군요?"
"난 그저 예측을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럼 예측해 봐요. 이제 우린 뭘 하게 되죠?"
그러자 가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아주 지루한 영화를 보게 될 거예요."

- "결국 뭘 하는지 모른다는 거군요."

"더 이상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냥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날 정말 좋아하는구나. 스무 살이란 나이엔 그 거면 충분해요."
사이먼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반지를 바라봤다.

- "나한테는 병이 있어요. 나는 일곱 살 이후에 일어난 모든 걸 기억해요. 그래서 두려워요. 왜냐면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만약 당신이 배신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난..."
가야가 살며시 엘리스의 입을 막았다.
"엘리스.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에요."
엘리스는 조금의 거짓도 용서 못 하겠다는 듯 가야의 동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눈곱만큼의 티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 "사랑해요, 엘리스."

가야의 목소리는 진심을 넘어 신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 엘리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의 배에 기대고 있는 이 남자를 영원히 못 잊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생명력으로 넘쳐 나고 있었으며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을 하듯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거기에는 누가 묻혀 있죠?"

엘리스가 가야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디요?"
"... 그라운드 제로요. 누구에게 꽃을 바쳤어요?"

가야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만난 생명수가 대서양을 건너온 노르데나우어였다. 그 후로 고가였지만 그것만 마시고 있었다.
"이 물 찾아요?"
가야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노르데나우어였다. 엘리스는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 "당신이 알려 줬어요. 잘 기억해 봐요."
가야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정말 신기한 남자였다. 어떻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모든 걸 준비하는 걸까.

 

- "못생겼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버섯이에요."
"얼만데요?"
"쓸 만한 건 10만 달러가 넘는 것도 있죠. 이 정도면 만 달러는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팔면 어제 빌린 돈부터 갚아야겠죠."
"대체 맛이 어떻기에 10만 달러나 하는 거죠? 먹으면 천국이라도 가나요?"
 
- "지난번에 말했던 줄기세포 법안은 어떻게 됐나?"
"이봐, 자네도 알다시피 바티칸에서 반대를 하고 있어. 그게 이 나라에선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는 자네도 잘 알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디디에 너 지금 뭘 하고 있나? 뻔하지. 잠옷 차림에 슬리퍼도 안 신고 푸아그라를 잔뜩 쑤셔 넣은 필레미뇽을 처먹고 있겠지. 전채로는 캐비아를 뿌린 따빠를 먹었을 테고. 물론 올리브며 레몬을 잔뜩 뿌려서 말이야. 필레미뇽에 싸구려 소스를 뿌려 먹는 건 이해할 수 있어. 낭트 빈민가에서 뒹굴 때 늘 꿈꾸던 메뉴였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 못 참겠는 건 네놈이 캐비아에 레몬을 뿌려 먹는 거야. 캐비아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가 제맛인데 말이지. 그런 널 볼 때마다 역겨웠지만 지금까지 참은 건 네놈이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바티칸은 조만간 내가 언론 플레이를 할 거야. 내용은 간단해 앞장서서 줄기세포 법안을 반대하던 드망즈 주교가 파킨슨병 치료를 위해 이번 주 은밀히 미국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을거야. 바티칸에는 비밀리에 말이지. 물론 내가 밑밥을 뿌려 뒀어. 그때 준비한 기사를 언론에 흘릴 거야. 르몽드고 피가로고 전부 말이지. 그러면 바티칸도 대놓고 반격할 순 없을 거야. 그때 통과시키면 돼. 알아들었나?" 
"알겠네. 시키는 대로 하지."

- 위성전화기가 울렸다. 그것은 체임벌린이 늘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울리지 않는 전화기였다. 체임벌린은 포크를 내려놓고 전화기를 들었다.

 

- "내 정보에 의하면 나다니엘은 짐바브웨의 무싸가 다이아몬드 광산 사건 때문에 벌인 거고 안톤 역시 차기 미사일 방어 계획에서 제외된 한 사업가가 가미카제식으로 죽인 거야."
"설마 그걸 믿을 정도로 진부해진 건 아니겠지?"

 

- 상대방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금언을 발설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그 아이 짓인 거 같아."
그 말에 체임벌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아이는 십 년 전에 죽었어. 우리 모두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
"하지만 만약에 그 실험이 성공했다면?"
"실험은 실패했어. 이미 끝난 얘기야."

- 무심코 점들을 지나던 론의 손가락이 한 점에서 멈췄다. 역시 녹색 점이었지만 여느 배와는 다른 게 있었다. 바로 옆에 붉은색 점이 있는 것이었다. 
"군함 옆에 왜 민간인 배가 바짝 붙어 있는 거지?"
론은 붉은색 점을 클릭했다. 그러자 모니터에 배의 정보가 나타났다.
[제5항모 타격전단 소속 USS Ramage, 알레이버크급 구축함]
뭔가 이상했다. 항모 타격전단 소속 구축함은 언제나 기함인 항공모함과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주변 어디에도 항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 아빠는 어딨니?"
론은 제5항모 타격전단의 현 위치를 찾아보았다. 그들은 항모 USS 해리트루먼호와 함께 얼마 전 페르시아만에서 임무를 마치고 모항인 버지니아 노퍽에 정박 중이었다. 
"전단에서 떨어져 나와서 혼자 놀고 있는 구축함이라. 게다가 상대가 민간 요트라 이거지."
위성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 스티브가 몇 개의 키보드를 누르자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아 확대된 사진이 전송됐다. 그러자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개의 프로펠러 블레이드, 두 개의 배기구가 양쪽으로 뻗은 트윈 엔진, 그리고 두 개의 꼬리날개까지 틀림없는 AW139기였다. 


- 사이먼은 연구원 지미와 함께 브에미가 가리킨 떡갈나무로 갔다. 나무는 장정 셋이 둘러싸야 할 만큼 크고 웅장했다. 뿌리 주위에는 이끼가 잔디처럼 끼여 있었고 그 위에 이파리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일렁이고 있었다.
"잘 살펴봐. 분명 뭔가 있어." 
"난 연구원이란 말이야.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네."
지미가 투덜대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버섯 연구를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죠?"
"어디 보자. 재배지 찾는답시고 마운트 숲을 헤매던 게 마흔여섯이었으니까, 정확히 십 년 됐구먼."
십 년 전이면 신가야가 계획을 시작했던 해였다.

- 사이먼이 다가가자 지미가 떡갈나무 주변 가득 자라고 있는 특이한 식물을 가리켰다. 그것은 무릎까지 오는 키에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를 가진 식물이었는데 꽃망울이 특이했다. 네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둥그런 와인 잔 모양으로 땅을 향하고 있었는데 검은 잉크에 담갔던 것처럼 새까맸다. 
"이건 요강나물이라는 거야."
"처음 들어 보는데."
"아주 희귀한 식물로 옥살산칼슘을 함유하고 있는 독초야."
"그럼 이 식물이 버섯에 옥살산칼슘을 주입했다는 거야?"

"만약 요강나물의 뿌리가 버섯에 닿았다면 가능성이 있지.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식물이 왜 여기 서식하고 있느냐야. 이 녀석이 사는 곳은 지구상에 딱 한 곳뿐이거든."
"그게 어딘데?”
"한국."

- 단체의 초청장 한 장으로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단체의 이름은 '카이헨동 인간행동연구소'였다.


- 카이헨동 연구소는 1924년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치가 윌리엄 카이헨동이 세운 곳으로 본래는 런던의 서식스대학교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이헨동이 주목을 받게 된 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부터였다.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전쟁 양상이 벌어지면서 진흙투성이 전장에 고립된 병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버티지 못하고 자살과 탈영을 했고 전쟁 수행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 이에 영국 정부는 참호 속 병사들의 심리 상태를 개선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카이헨동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로젝트를 따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 개월 후 최초의 전쟁 심리 보고서 '늪 이론(Swamp Theory)'을 발표한다. 그 후 영국 정부와 밀착하게 된 카이헨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더욱 영향력을 키우게 되는데 심리전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영국 국방부 직속 연구소로 발전한다. 전쟁이 끝나자 아이젠하워의 요청에 의해 워싱턴에도 연구소가 건립된다. 이후 이들이 어떤 연구를 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여러 전쟁에 관계하면서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정부들의 정치적인 자문을 맡았다는 것이다. 현재 카이헨동 연구소가 자문을 맡고 있는 국가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와 남아프리카, 일본, 인도 등 전 세계 ... 

- 워싱턴 DC 북쪽에 위치한 카이헨동 연구소는 거창한 배경과는 달리 아담했다. 삼엄한 경비 시스템만 제외하면 일반 기업의 연구소보다도 작고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사이먼은 출발하기 전 정확히 어떤 연구를 하는 곳인지 알기 위해 FBI 자료실을 뒤져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모든 파일은 일급기밀에 부쳐져 있어서 일반 요원은 열람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수많은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 대부분은 정부나 특정 단체의 의도대로 대중을 조종하기 위해 세뇌, 마인드 컨트롤, 집단 최면, 언론 조종 등을 연구한다는 음모론이었다. 그중에도 가장 흔한 건 911테러에 관한 음모였다. 이라크전쟁에서 등장한 용어인 '충격과 공포'가 카이헨동 연구소에서 오래전 만들어 낸 개념으로, 911테러는 미국의 자작극이며 사람들을 심리적 공황 상태에 몰아넣음으로써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대중을 조종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닉슨 대통령의 하야가 이들의 시나리오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 엘리스는 재밌다는 듯 점쟁이의 말대로 따랐다. 하지만 가야는 70달러가 아까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말뚝 같은 총각. 내가 이 점술까지 쓰는 건 전부 자네 때문이니까 고마운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해."
가야도 어쩔 수 없이 잡동사니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찰이 끝나자 점쟁이가 물건들을 도로 상자 속에 넣었다.
"자, 이제 봤던 것 중에 하나를 떠올려. 명심해. 딱 하나야."

두 사람은 눈을 감고 각자 맘에 드는 물건을 떠올렸다.

"골랐으면 이번에는 상자 안에서 떠올린 물건을 찾아봐.”

- 먼저 엘리스가 상자 안에서 자신의 물건을 꺼냈다. 그녀가 선택한 건 흰색 종이학이었다. 뒤를 이어 가야가 물건을 꺼냈다. 푸른 구슬이었다. 점쟁이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물건을 건네받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엘리스는 점괘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점쟁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점쟁이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 생각했던 물건을 고른 거야?"
가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리스는 머뭇거렸다.
"아가씨는 다른 걸 고른 모양이군. 처음에 생각한 건 뭐였지?"

"저 구슬이요."
엘리스가 가야의 구슬을 가리켰다.
"그런데 왜 바꿨지?"
“종이학을 잡는 순간 이걸 꺼내야 될 거 같았어요."
엘리스의 대답을 들은 점쟁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 "잘 들어. 처음 두 사람이 쌀을 뿌렸을 때 나온 점괘는 상극이었어. 태극으로 치면 아가씨는 파랑, 자네는 빨강이야. 화염과 파도가 부딪친 거지. 결국 불도 사그라지고 물도 없어지고 말아. 절대 만나선 안 되는 인연인 거지. 그런데 이게 가운데에 있었어."
점쟁이가 중앙에 모여 있는 쌀들을 가리켰다.
"초승달 같은데요?"
엘리스 말대로 쌀들은 초승달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점술에서 달은 흙이야. 흙은 불에도 안 타고 물을 빨아들이지. 바로 중개자야. 두 사람 사이에 중개자가 있으면 행복할 수 있어."

 

- "자식이지 뭐야. 바보 같긴. 그런데 문제는 이거야. 여길 봐."
점쟁이가 또 다른 쌀을 가리켰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붉게 채색이 된 쌀이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오른쪽 구석에 모여 특이한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木(목) 자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사람의 이목구비처럼 보였다.
"이건 내가 색을 칠해서 섞어 둔 쌀인데 특별한 기운을 뜻해. 그런데 금발 아가씨가 고른 쌀에는 이 녀석이 하나도 없는데 자네가 고른 쌀에는 이게 들어 있었어. 게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단 말이야."

 

- "이건 전생을 의미하는 나무야. 이 친구한테는 전생의 기운이 현생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리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 특별한 능력이 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친구는 보통 사람들한테는 없는 뭔가를 갖고 태어난 거야. 그것도 상당히 센 기운이야."

- "먼저 자네가 뽑은 이 구슬은 신비로운 삶을 뜻해. 아가씨도 원래 이걸 뽑으려고 했다는 건 자네 역시 신비로운 삶을 살 운명이라는 거야. 하지만 마지막 순간 종이학을 뽑은 건 자네 스스로 신비로운 삶보다는 평범한 삶을 원한다는 거지." 
"신비로운 삶이라는 게 어떤 삶이죠?" 
엘리스가 물었다.
"말 그대로 신비로운 삶이야.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는 특별한 삶. 그 삶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별개 문제고 평범한 인간들은 생각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

 

- "당신, 범죄자죠? 그렇죠?"
그 말에 가야가 화가 난 듯 바라봤다.
"범죄자는 내가 아니라 저들을 보낸 사람들이에요."
"당신 정말 이해 못 할 사람이군요. 대체 정체가 뭐예요?"
엘리스가 두려운 듯 물러서며 물었다.
"날 믿는다고 했잖아요, 엘리스."
가야의 눈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 엘리스는 가야의 눈동자 속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속은 서로 다른 빛깔의 가스가 뒤엉키며 알 수 없는 혼돈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시간을 줘요. 생각할 시간을..."
엘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당신과 시간을 갖고 천천히 조금씩,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요. 하지만..."
가야가 말끝을 흐렸다.
"모두 내 잘못이에요.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어요."
가야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폐허에 홀로 남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엘리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단 이틀이었지만 당신과 있었던 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엘리스, 당신이 행복하길 빌겠어요. 언제 어디서나." 
가야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소금 사막을 향해 걸어갔다. 엘리스는 그를 잡지 못한 채 멀어져가는 걸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그랬구나. 그 행운아가 너였어."
엘리스의 양 볼이 붉어졌다.
"이번에 찾으면 두 번 다시 놓치지 마. 그런 사랑은 흔하게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네.”
"일단 차 한잔하면서 숨부터 좀 돌려."
아저씨는 의자 옆에 놓여 있던 보온병을 열고 일회용 컵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 친구가 처음 온 건 아마 한 달 전쯤일 거야. 매일 아침 미술관이 오픈하기 전부터 와서 기다렸어. 문이 열리면 곧장 이젤을 들고 모네의 '수련'으로 갔지. 그리고 묵묵히 그림을 그렸어. 굉장히 열심히 했지. 몇 시간을 꼼짝도 않고 그림만 그렸으니까. 미술관에는 모사를 하려고 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야. 어떤 사람은 십 년째 세잔의 '생트 빅투와르 산'만 그리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그 친구는 처음부터 풍기는 느낌이 달랐어. 뭐랄까.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리는 그림처럼 비장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아주 열심히 하더군. 그러다가 오후 12시 땡 하면 도구를 챙겨서 미술관을 나서는 거야. 신데렐라처럼 말이지. 그렇게 꼬박 한 달 동안을 하루도 안 빠지고 왔어."

- 엘리스는 쓰레기통에 있던 생수병을 집었다. 노르데나우어 워터였다. 상표는 색이 바랬고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다. 한 달 전 테러 현장에서 엘리스가 건네준 그 병이 틀림없었다. 가야는 그 병을 엘리스의 일부라도 되는 양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있었어!"
간발의 차이로 놓친 것이다. 온몸에 다시 힘이 솟았다. 엘리스는 생수병을 움켜쥔 채 전시실을 달려 나갔다. 그때였다. 전시실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두 사람은 부딪힐 듯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가야였다. 그토록 찾던 가야가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엘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 따르릉. 전화벨이 정적을 깨며 울리고 있었지만 엘리스는 과거에 잠겨 듣지 못했다.
"그때 알았어요. 이 사람은 운명이구나. 이 사람 때문에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해도 이 사람 없이는 못 살겠구나."
엘리스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엘리스, 전화 왔어요."
사이먼이 수화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엘리스가 수화기를 들었다.
 
- "우리 아빠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던 미셸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직은 몰라."
"그 말은 잘못한 게 있을 수도 있단 얘기네요?"
사이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가야가 용의자이긴 했지만 어린아이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 "우리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어떻게 알지? 만난 적도 없잖아."
"난 알 수 있어요."
미셸은 돌처럼 확고했다. 사이먼은 생각했다. 과연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나이 또래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명료했다. 악당은 언제나 음침한 복장에 사악한 웃음을 날리며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 반면 정의의 용사는 화려한 원색 유니폼을 입고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여주인공을 구하고 악당을 해치운다. 그것이 열 살의 선과 악이다. 그러나 서른을 훌쩍 넘긴 FBI 십 년차 사이먼에게 선과 악은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 덩어리였다. 심지어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 "아저씨는 아빠 없이 살아가는게 어떤 건지 알아요?"
사이먼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비록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 이혼을 했고 일 년에 고작 몇 번 얼굴을 볼 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떠올리면 미소를 지을 만큼 좋은 추억거리도 몇 개 있었다. 아빠 이름조차 모르는 미셸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평생 우산 없이 사는 거랑 비슷해요."

- "네 아빠 이름은 신가야야. 너처럼 부드러운 검은 머리에 피부가 새하얀 미남이었지. 특히 멋진 눈을 갖고 있었어. 네 엄마를 무척 사랑했고 살아 있었다면 분명 좋은 아빠가 됐을 거야. 나머지는 엄마한테 묻는 게 좋겠구나." 
"아빠는 죽었나요?" 

- "이봐, 그건 내 개인 수첩이야."
"사건에 관련된 내용을 모두 복사한 후 분명히 돌려 드리겠소."

남자가 수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수첩을 든 남자의 손등을 본 사이먼이 멈칫했다. 문신이었다. 세월에 바래긴 했지만 분명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고 주위를 빙 둘러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사이먼은 십 년 전 가야와 엘리스를 뒤쫓았다던 남자를 떠올렸다.

 

- Vouloir, c'est pouvoir
이것이 문신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었다.
"원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프랑스 속담을 새긴 걸 보면 프랑스 출신인가?"
사이먼이 슬쩍 떠보았지만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료들을 ...

- 사이먼은 그녀의 유품을 모두 불태웠지만 어쩐지 이 핸드백만은 태울 수 없었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던 '망자의 유품엔 그 사람의 향취가 영원히 남는다'는 말대로 핸드백에는 십 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향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사이먼은 경찰서에서 가져온 후 한 번도 핸드백을 연 적이 없었다. 백을 여는 순간 정부와 있었던 적나라한 진실이 쏟아져 나올까 봐 두려워서였다. 어느새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이 넘치고 있었다.
 
- 사이먼은 아내를 에스코트해서 호텔로 들어가던 정부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희끗한 은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잘 어울리는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후반의 남자. 언뜻 보기에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자신과는 격이 다른 인간이었다. 아직도 그 얼굴이 떠오를 때면 분노와 자괴감이 동시에 가슴을 메웠다. 어쩌면 그 모습에 짓눌려 지난 십 년간을 비참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의 편지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빌어먹을 자식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사이먼은 편지 봉투를 뜯었다. 놀랍게도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살가운 연애편지가 아니었다. 텅 빈 백지였다. 앞뒤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순간 사이먼은 자신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사이먼은 다시 편지 봉투를 살폈다. 
[모니카 켄에게]
뭔가 이상했다. 정부가 보낸 편지라면 풀 네임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몸을 섞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보낸 편지란 말인가. 필체가 눈에 익었다. 유치원생처럼 서툴지만 또박또박 쓴 소문자 알파벳, 사이먼은 황급히 점퍼 안주머니에서 가야의 편지를 꺼내 비교해 보았다.

- 순간 사이먼의 뇌리에 십 년 전 가야가 쓴 메모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돌외초와 자귀풀 즙으로 냅킨 위에 쓴 메모. 사이먼은 편지를 들고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물이 가득한 욕조에 편지를 담갔다. 뜨거운 물을 빨아들인 편지지가 천천히 유선을 그리며 욕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빈 편지지에 녹색 글씨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든 게 아니었다. 저승에서 돌아온 후 세상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죽음의 문은 생의 정반대 편에 막다른 골목처럼 확고히 존재했고 문턱에 발을 디뎌 본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모든 걸 바꿔 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물리법칙을 시작으로 육십팔 년간 수행하며 느꼈던 삶의 가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것이었다. 으뜸은 이 순간 중용과 평등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지구상 어떤 생명도 더 귀하거나 못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추한 것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력과 비슷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탑에서 실시했던 자유낙하 실험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부피와 질량의 물체가 중력 앞에 평등하듯 세상의 모든 것은 삶과 죽음 앞에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세월의 수행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었다. 그것이 죽음을 대면하고 돌아온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낯선 인도까지 와서 투쟁했고 중국 정부는 그를 막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도수행과 더불어 평생을 해 온 일이었다. 그런데 저승의 삼도천(三途川)에 발을 담그고 돌아와 다시 이승의 빛을 본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어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인간이 이승 땅에 금을 긋고 자신의 소유를 주장했던 걸까. 수많은 제후와 자칭 황제들이 국가를 건립하고 국경을 만들었지만 황제들과 그들의 왕국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과연 저승에서도 금을 긋고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을까.  

- 더욱 놀라운 건 맨해튼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단 두 명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곳이 감옥이었다면 악명 높은 알카트라즈 교도소를 능가하기에 충분했지만 그곳은 감옥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천재적으로 설계된, 한 사람만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었다.

- 그곳의 주인은 오귀스트 벨몽이었다. 그는 악마 개구리들의 우두머리이자 전 세계 부의 3분의 1을 전화 한 통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혹자는 그가 현대적인 금융 기법을 만든 장본인으로 선물시장에서부터 모기지론까지 과거에는 없던 시스템을 만들어 금융시장을 과거에 비해 수백 배로 키웠다고 주장했고, 엄청난 자금력을 이용해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치 후원 단체를 만들어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증명된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외계로부터 순간이동을 해 온 것처럼 어느 순간 나타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다. 지구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은 모두 그의 영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런 그가 이런 기괴한 공간에 십 년 동안이나 은둔해서 살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2001년에 있었던 암살기도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벨몽은 전미 기업가협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턱시도를 차려입고 객석에 앉아있던 남자 한 명이 그를 향해 다섯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네 발은 빗나갔지만 한 발이 그의 오른쪽 다리를 관통했다. 범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는데 놀랍게도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미 재무성 부국장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테일러 하퍼라는 이름의 범인은 체포된 직후 벨몽이 미국의 경제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며 그가 사라져야 국민을 위해 자유로이 정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어느 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테일러의 사망을 두고 사람들은 벨몽이 사주했다고 떠들어 댔지만 얼마 못 가 시간 속에 묻히고 말았다.

킨데마이어의 초조함이 전화선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벨몽은 오랜만에 소일거리가 생겼다는 듯 씩 웃었다.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
벨몽이 중국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고사성어를 말했다.

"지금 중국 고사성어 놀이나 할 때가 아니야."
"호랑이를 잡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호랑이 굴에 또 다른 호랑이를 집어넣는 거야. 그리고 지칠 때까지 싸우게 만드는 거지. 그럼 두 마리 모두 손쉽게 잡을 수 있단 뜻이야."
"그 말은..."
"다음 궁극의 아이를 이용해서 가야의 계획을 막는 거야."

 

- "넌 가야가 왜 하필 죽은 지 십년이 지난 지금 복수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다섯 번째 아이가 능력을 발현한 게 몇 살이었지?"
"제 기억으로 열 살입니다."
"그럼 가야가 능력을 발현한 건?"
"열 살입니다. 그럼 설마?!"

- 틀림없는 '아담의 유치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대체 왜 지문 검색 프로그램의 이름을 모니카의 핸드백에 남겨 놓은 것일까. 아론은 제니퍼 알즈웍을 살해한 용의자의 지문을 검색하고 있었다. 눈으로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수많은 지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옮겨 담은 지도 위를 무작위로 찍으며 날아가는 인공위성처럼 느껴졌다. 사이먼은 지도에서 약속된 장소라도 찾듯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신가야의 지문을 찾아봐."
 
- "지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건 동양인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공작 문형이야. 중심의 융선과 골의 형태가 공작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지. 그런데 공작 문형 대부분이 공작의 머리 모양만을 그리는 게 일반적인데 이 사람은 공작의 날개 모양까지 들어 있어. 한마디로 엄지에 온전한 공작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셈이지. 그리고..."

"그리고?"
"테오도어 로셔라는 지문 연구가의 이론에 따르면 지문의 형태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지능을 알 수 있어. 마디의 형태가 촘촘하고 파형을 많이 이룰수록 지능이 높지. 그런데 이 친군 거의 천재에 가까울 정도로 지능이 좋아. 범죄자라면 거의 잭 더 리퍼 수준인걸."
사이먼은 아론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가야는 십 년 전 모든 걸 예상하고 사건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 "지문이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을까?"
"그건 불가능해. 확률로 따지면 640억 분의 1이야.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인류의 지문을 모두 입력해도 한 명 있을까 말까라고."
"밑져야 본전이야."
아론은 마지못해 가야의 지문과 같은 지문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아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색창에 가야의 지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문이 뜬 것이다.

- 프로그램이 제시한 지문 일치 확률은 무려 98.6퍼센트였다. 그 정도면 오차 범위를 계산해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지문의 임자는 존 마이어스라는 남자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한 백인이었는데 파란 눈에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금발을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문만이 아니라 생김새도 가야와 빼다 박은 듯 똑같았다. 비록 가야에 비해 살이 쪘지만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는 1963년에 출생해서 1973년에 실종됐던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인종의 두 사람이 생김새뿐만 아니라 지문까지 똑같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이먼이 가야와 존 마이어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내가 클레오파트라랑 결혼할 확률 정도 되지 않을까?"
사건은 새로 등장한 다른 인종의 쌍둥이와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넷째 날 이야기를 해 줘요. 엘리스."

그러자 엘리스가 문득 떠오른 듯 가야의 물건 중 하나를 집었다. 투명 아크릴로 코팅한 데이지 꽃이었다. 엘리스가 바라보자 오래전 고사한 꽃이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빛깔을 띠었다.
"매일 무덤에 꽃을 바치는 남자가 있었어요."

- 재회한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다. 이제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도 필요 없었고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신이 내일 새로운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귀띔해 준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안고 또 안았다. 그리고 지치면 잠을 잤다. 그렇게 몇 번을 깨어나며 서로에게 매달렸다.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는 두 사람의 사랑만큼이나 찐득해진 시간이 덫에 걸린 것처럼 느리게 지나고 있었다. 시계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야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난 커다란 치즈버거랑 감자튀김이요. 어니언링도 많이."
엘리스가 이불을 둘둘 말며 말했다.
"미안해요, 엘리스.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어요. 난 오늘 늦게 돌아올 거예요."
"어딜 가는데요?"
엘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나를 이 나라로 부른 사람을 만나러 가요."

-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벤치 주위를 맴돌던 엘리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엘리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남자는 말을 멈췄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40대 초반의 백인이었는데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적당히 기른 수염과 총기 넘치는 갈색 눈은 가뜩이나 핸섬한 얼굴을 이지적으로 만들었고 넓은 어깨 위에 걸친 코트와 양복은 본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한마디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서 아이비리그를 두루 거친 학자풍이었다.

- "반가워요. 난 요르겐 짐머만이라고 해요. 가야의 오랜 친구죠."
 
- "이 집값의 절반은 발코니 너머에 있어요. 날씨가 좋으면 수평선에서 윌리엄 터너의 그림 같은 멋진 해가 뜨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집이 아니에요. 연구소에서 빌려준 집이죠."
귀엣말이 들렸는지 짐머만이 대답했다.
"편히 있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
짐머만이 방으로 간 사이 엘리스는 집 안을 둘러봤다. 짐머만은 1950년대 팝아트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베이지색 카펫이 깔려있던 거실에는 비틀즈의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원색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 '행복한 눈물'이었다. 
 
- "외상은 아닌 것 같은데."
경찰관이 조심스럽게 거즈로 피를 닦아 냈다. 그러자 뽑힐 것처럼 고통스럽던 눈이 순식간에 멀쩡해지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쌓인 독이 빠져나간 듯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피도 더는 흐르지 않았다. 미셸은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미셸의 눈에 본인도 눈치 못 챈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꼬마야, 네 눈..." 
여자 경찰관이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본 미셸은 혼란스러웠다. 미셸의 오른쪽 눈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었다. 흑요석처럼 짙은 흑색 눈동자는 허물을 벗고 한여름 낮의 숲속같이 에메랄드 빛깔로 변해 있었다.

 

- 미셸의 오른쪽 눈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번쩍번쩍 낯선 모습이 스쳐 가는 것이었다. 장면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석고에 찍힌 발자국처럼 선명했다. 그것은 무작위로 편집된 영화 장면과 흡사했는데 모두 네 개의 장면이었다. 첫 번째 장면은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 남자들이 미셸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건장한 체격에 감정 따윈 없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는데 구름이 잔뜩 낀 잿빛 하늘에서 새하얀 천사들이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세 번째는 움직이는 그림을 배경으로 앉아 있던 노인이 머그잔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머그잔에는 금박으로 된 개구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휠체어에 탄 괴물이 웃고 있었다. 괴물은 어렴풋이 윤곽만 보였는데 구부정한 등에 얼굴 여기저기가 곰보처럼 얽어 있었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흉측한 웃음소리를 냈다. 놀라운 것은 이 장면들이 스치는 와중에도 왼쪽 눈에는 여전히 현실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미셸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이렇게 두렵고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미셸은 낯선 도시에서 홀로였고 주변은 온통 생소한 얼굴뿐이었다. 게다가 몸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가야는 '궁극의 아이'요."
"궁극의 아이?"
"그들은 그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소.”
"그들은 누구고 궁극의 아이는 뭐요?"
"궁극의 아이는 미래를 기억하는 아이들이오."
짐머만은 기억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 "왜냐면 말 그대로 기억하기 때문이오. 그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기억을 갖고 태어나오. 인생 전체를 뇌 속에 저장한 채 세상에 나오는 거지."
사이먼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요?"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소. 그 아이들을 보기 전까진."

"아이들이라면 가야 외에...  설마 존 마이어스?"

- "모니카는 한순간도 당신을 떠난 적이 없소."
이 말을 남기고 짐머만은 떠났다. 구름이 낀 밤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점점 커지던 눈송이는 탐스러운 솜이 되어 모니카의 무덤을 포근하게 덮었다. 텅 빈 묘지에는 이제 사이먼만 남아 있었다. 그는 묘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미동도 않고 모니카의 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아이가 틀림없군. 빼다 박은 것처럼 똑같아."
"유전자 검사 결과도 일치합니다. 친자가 분명해요."
"가야한테 자식이 있으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가 궁극의 아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니, 이 아이가 확실해. 본시 궁극의 아이는 자식을 가질 수 없어. 모두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고 생식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지. 그런데 딱 한 번 자식을 낳은 아이가 있었어. 세번째 궁극의 아이였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가 낳은 아이 역시 궁극의 아이였어. 바로 네 번째 궁극의 아이였지." 
"그 말씀은 궁극의 아이의 피를 이어받으면 그 아이도 궁극의 아이가 된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은 충분해. 어쨌건 이 아이를 서둘러 테스트해야해. 시간이 없으니까."

- "여기가 어디예요? 왜 날 이런 데로 데려온 거예요?"
"익숙해져야 할 거다. 죽는 날까지 있어야 할 테니까."
휠체어를 탄 벨몽이었다. 그는 어둠을 가면처럼 쓰고 미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기시감에서 봤던 네 번째 장면과 정확히 일치했다. 어둠 속의 괴물은 바로 벨몽이었던 것이다.
 
- 그것은 신경 억제제인 스코폴라민과 환각제의 일종인 실로사이빈이었다. 질문에 거짓 없이 자백하도록 만드는 약물이었다. 약이 정맥을 타고 퍼지자 미셸은 온몸에 힘이 빠지며 의식이 몽롱해졌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다. 주변 사물들은 여전히 또렷했지만 어딘지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었다. 마치 육체를 버려둔 채 정신만 이탈하여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난 너의 뇌다. 너의 입이고 너의 손이다. 파란 불이 보이면 고개를 끄덕여라."
약효가 나타나자 짐머만의 목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온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후 어둠 한가운데서 천국의 길처럼 푸른빛이 나타났다. 미셸은 고개를 끄덕였다. 

- 칩은 이름처럼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첫 번째 기능은 뉴런의 접합 부위인 시냅스에서 발생되는 전기적·화학적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다. 시냅스에는 뇌세포와 신경계에서 발생되는 4,000여 종의 정보 전달 물질이 이동하는데 야누스는 그중 기억에 관련된 신호와 물질을 80퍼센트 이상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놀라운 부분은 감지한 내용을 완벽하게 조합하고 분석해 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야누스가 감지한 내용은 곧바로 '골지의 뇌(Golgi's brain)'라 불리는 슈퍼컴퓨터로 전달된다. 신경 말단 구조를 밝혀내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카밀로 골지(Camillo Golgi)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컴퓨터는 신경 전달 물질을 판독할 수 있는 최초의 컴퓨터였다. 한마디로 인간의 뇌 속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것은 은하계의 지도를 완성하는 것과 비견될 만큼 엄청난 과학적 성과였다. 야누스의 또 다른 기능은 기억 저장 세포 속으로 전류를 흘려보내 잠들어 있는 기억을 깨우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력을 두 배 이상 증폭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기능이었다. 과거 냉전 시대 CIA가 이와 흡사한 실험을 한 적은 있지만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짐머만이 성공한 것이다. 그 배후에는 벨몽이 있었다. 그는 이십 여년전 이 시스템에 관한 짐머만의 논문을 읽은 후 지금까지 수억 달러를 투자했고 결국 성공한 것이다. 

- "잘 들어라. 이제 네 앞에 과거이자 현재이고, 현재이자 미래인 장면들이 지나갈 거다. 어떤 장면은 아름다울 거고 어떤 장면은 역겨우리만치 잔인할 거야. 하지만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돼. 모두 네 기억이니 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알겠니?"
짐머만의 목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 미셸이 대답하자 짐머만은 기계장치의 전원을 올렸다. 그러자 잠자던 용이 눈을 뜬 것처럼 정면에 두 개의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정확히 미셸의 오른쪽 눈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무의식을 건드리는 복잡한 영상이 들어 있었다. 농부가 양털을 깎는 모습, 잘린 손가락이 세면대에 빠지며 피가 번지는 장면,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제비를 줍는 스님, 사형수가 울부짖으며 전기의자에서 발버둥 치는 장면 등 평범하지만 기괴한 현실들이 1.5초 간격으로 나열됐다. 그 속에는 무의식을 자극하도록 계산된 고도의 심리학이 숨어 있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미셸의 뇌를 자극하여 미래에 대한 기억을 찾아내는 것이다. 칩이 규칙적으로 전류를 흘려보낼 때마다 미셸은 미세하게 몸부림쳤다. 

- "뭔지 아느냐? 바로 태도야. 쓰레기들은 하나같이 과학을 순수한 탐구라고 생각하지. 지들이 인류의 진보에 기여라도 하는 것처럼 거들먹대면서 말이야. 그런 것들은 그냥 쓰레기통에 처넣으면 돼. 그렇다면 쓸 만한 것들은 뭐가 다를까? 바로 결과물이야.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어야 한다는 건전한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다. 나는 지난 이십 년간 네놈의 저 빌어먹을 기계에 수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외계인이 보내는 신호나 기다리라고? 내 말 잘 들어, 이 염병할 독일 놈아. 앞으로 정확히 한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저 아이를 완전한 궁극의 아이로 만들어 놔. 아님 네놈을 6등분 해서 각 대륙마다 하나씩 던져놓을 테니. 알아듣겠느냐?"

- 그런데 모니카의 기사는 엉뚱하게도 유럽의 한 가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 [이제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기사는 심심풀이로 읽었던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됐다. <불패의 가문>이라는 제목의 책은 독일의 작은 은행에서 시작해 전 세계의 부를 거머쥔 '호크실드(Hochschild)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사실 호크실드라는 이름은 종종 음모론자의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들의 실체는 실로 엄청났다. 내용은 이러했다. 18세기 후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업을 시작한 조셉 호크실드는 뛰어난 금융 감각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지점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영세했던 당시 금융시스템과 금융업을 천시하는 풍토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 [그러던 중 19세기 초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워털루 전투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국운을 놓고 한판 벌였던 이 전쟁은 각국의 국채를 놓고 투자자들이 벌이는 엄청난 도박이기도 했다. 워털루전투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승리할 게 뻔한 전투였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 주축의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에 밀려 패배한다. 그런데 여기서 호크실드의 뛰어난 수완이 발휘된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고 있던 조셉 호크실드는 영국 정보부보다도 먼저 전쟁 결과를 알아내 영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한다. 다음 날 영국의 승전보가 전해지자 영국 국채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호크실드는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호크실드는 영국의 국채 가격과 통화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 [뿐만 아니라 호크실드는 투자하는 모든 사업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19세기 중반 증기기관차가 발명됐지만 사람들은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철도 사업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셉의 아들 에브라임 호크실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철도가 세상을 바꿀 것이며 엄청난 부를 창출할 거라 확신했다. 결국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고 철도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이들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859년 프랑스가 이집트와 함께 수에즈운하를 건설하자 해상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영국은 이집트 소유의 운하 운영권을 사들이려 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영권 매입이 여의치 않았다. 이때 호크실드 가문이 싼 이자에 수에즈운하 운영권을 살 자금을 빌려준다. 이 일을 계기로 호크실드는 광물 개발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고 그 유명한 '더 디바인(The divine)'을 세워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오팔 등 보석 산업을 독식하기 시작한다. 이 일을 계기로 호크실드의 영향력은 유럽을 넘어서게 된다.]

 

- [1775년 미국이 영국과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 호크실드는 은밀히 프랑스 정부를 움직여 미국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미국 지도층과 관계를 맺게 된 호크실드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경제를 지배할 준비를 한다. 그들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통화량을 손에 쥘 계획을 세우는데, 바로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미국 대통령과 정부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러자 경제공황을 일으켜 미 정부를 길들이기 시작한다. 돈줄을 틀어막음으로써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1837년, 1857년, 1907년에 걸친 세 차례의 경제공황 앞에 결국 미 정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연방준비은행이 드디어 문을 열게 된다. 호크실드 가문이 세계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20세기는 호크실드와 이들을 추종하는 금융가들의 독무대였다. 한마디로 전 세계의 돈과 정부를 호크실드 가문이 배후에서 지배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 책에서 제시했던 실례에 따르면 호크실드 가문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정확히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 역사 속 중요한 모멘텀은 물론이고 투자 종목과 시기도 예언자처럼 정확했다. 그것은 제아무리 뛰어난 리스크 관리자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성장의 발판이 된 워털루전투만 해도 그렇다. 당시 영국은 당대 최고의 정보력을 갖고 있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도 연락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은행가가 영국 정보부보다도 먼저 영국의 승리를 알 수 있었을까. 뿐만이 아니라 철도사업 역시 의문투성이다. 당시 증기차를 만든 발명가가 스티븐슨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니콜라 조제프 퀴뇨를 비롯해 많은 발명가가 증기자동차를 이미 발명한 상태였다. 증기자동차는 증기기관차에 비해 개발이 빨랐을 뿐 아니라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철도를 깔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 호크실드가 증기기관차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동차가 아닌 철도가 당시 세계를 지배할 운송 수단이 될 줄 알았던 걸까? 이것 외에도 호크실드 가문의 행적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몇 달 동안 이들의 자료를 찾아 직접 확인했다. 놀랍게도 이 책에서 제시했던 예들은 실제 자료와 일치했다.]  

- "당신만이 도와줄 수 있어요."
"그게 뭐죠?"
"지금으로부터 십년 후 오늘, 당신 앞으로 한 장의 편지가 도착할 거예요. 그 편지를 당신 상관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돼요."
청년의 요구는 의외였다.
"십 년 후 오늘?”
"그래요. 그 편지를 받고 당신은 잠시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때 이 말을 꼭 기억해 줘요. 이 일은 얼마 전 있었던 테러 사건 때 희생된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가 벌을 내리는 거예요. 절대 선량한 사람들은 다치지 않아요."

- "린다, 지금 내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해 봐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첫 번째는 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에 현혹되어 폭탄이 잔뜩 실린 자동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는 사람이에요. 두 번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지한 부하들에게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폭탄이 든 차를 몰고 건물로 돌진하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에게 폭탄을, 반대편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찾아 없앨 수 있는 미사일을 팔아요. 뿐만 아니라 무기를 팔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요. 그리고 그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샴페인을 마셔요. 자, 이 세 종류의 사람 중 누가 최고의 악당일까요?" 
린다는 대답할 수 없었다.

-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신이 주장한 대로 벨몽이 정부 정책마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하다면 이른바 그림자 정부라는 건데, 그러려면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고 정부 요직을 장악해야 해요. 그걸 입증할 자료나 증거가 있나요?"
"없소."
"그렇다면 당신이 보장된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죽이려고 한 진짜 이유를 말해 봐요."
"그건 내가 말한 내용이 전부요. 난 이 나라, 아니 세계가 인간 몇몇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진심이오."
"지금 몇 명의 인간이라고 했는데 설마 그게 음모론자들이 말하는 300인 위원회니 로마클럽 같은 비밀 단체를 말하는 건가요?"
"당신은 세상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현실이 영화보다도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군."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시오."
모니카가 바짝 다가앉았다.
"아담 호크실드, 아담의 유치원, 그리고 궁극의 아이. 이 안에 당신이 찾는 모든 답이 들어 있소."
말을 마치자 하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장 먼저 손댄 건 아담 호크실드였다. 호크실드 가문을 굴지의 가문으로 키운 조셉 호크실드와 그의 외아들 에브라임 호크실드에 관한 자료는 넘쳐 날 정도로 많았지만 아담 호크실드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업적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1911년 런던에서 출생한 아담 호크실드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보냈고 학교 공부 역시 가정교사로 대신했다. 하지만 영특했던 아담은 열다섯 살이 되기 전 고등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열여섯 살에 옥스퍼드 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도 아담은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만 채 일 년을 다니지 못하고 중퇴하고 만다. 아담에게 가문의 사업을 물려주려던 에브라임은 아담을 스위스로 보내 요양을 시킨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를 마신 아담은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에브라임의 오른팔이자 보석 산업계의 대부인 필립 크롬웰로부터 사업 노하우를 전수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스물여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둔 1937년 어느 날 의문의 돌연사를 하게 된다. 아담의 죽음을 두고 지금까지도 많은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아담 호크실드에 관해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에브라임은 아담이 죽은 후 상실감에 빠져 칩거를 한다. 아담 이외에도 첩에게서 얻은 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그는 누구도 자신의 성을 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에브라임은 자신이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자 에브라임은 고민 끝에 가문을 이어 갈 후계자 선출 계획을 필립 크롬웰에게 전달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의 유치원'이다.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계획은 전 세계에 있는 인재 중 최고의 인재를 뽑아 경쟁시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를 후계자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민주적인 이 계획은 사실 피로 물든 싸움이었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후보들은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벌이게 된다. 후보들은 호크실드 가문이 지정한 계열사에 입사해 경쟁적으로 성과를 내야만 했다. 문제는 이들이 입사한 기업이 일반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군수 업체의 아프리카 반군 전담 로비스트로 보내졌고 어떤 이는 마약 밀매상의 자금을 세탁하는 금융사로 보내졌다. 독재자와 거래를 해야 하는 석유 회사 중동 지부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 후보들은 그중에도 최전선에 던져졌고 아무런 지식 없이 마피아와 독재자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납치되어 몇 달간 억류되기도 하고 반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경쟁자 간의 암투로 상대방을 암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다섯 명의 후보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들은 에브라임의 유언에 따라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악마 개구리'라고 불리며 현재 세계 산업을 지배하는 다섯 명의 거물, 나다니엘 밀스타인, 안톤 쉬프, 조셉 체임벌린, 조나단 킨데마이어, 그리고 오귀스트 벨몽인 것이다. 이들은 권력을 쥐자 곧바로 다양한 단체와 연구소를 결성하여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중에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바로 카이헨동 연구소이다. 카이헨동 연구소는 일 년에 두 번 세계 각국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해 인류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들이 바로 악마 개구리들을 추종하는 세력이자 실질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손과 발이다. 이들이 바로 하퍼가 말했던 모임이다. 이들 중에는 세계 유수의 기업 총수, 노벨상 수상 학자, 각국 장관과 의원, 심지어 왕족과 전현직 대통령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확한 명단은 파악할 수 없다. 이들은 매년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모여 구체적인 정책 시나리오를 만들고 각자 돌아가 각국 정부에 이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면 실행할 정책으로 채택되어 세상을 움직인다. 그중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비롯해 의료보험 개혁안, 총기류 불법화 법안 등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건 이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실행된다. 대다수의 가난한 국민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의료보험 개혁안은 제약 회사와 의료 기구 회사, 그리고 보험사의 이익에 부합되는 법안으로 대체되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총기류 불법화 법안은 무기 회사들의 로비로 폐기되는 것이다. 이 모든 배경에는 언제나 악마 개구리가 있다. 하퍼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라고 믿었던 그림자 정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내게 커다란 혼란으로 다가왔다. 나는 세상이 이기주의와 탐욕 같은 악과 대항할 수 있을 만큼의 선이 저울 반대편에서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를 하면서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하퍼의 말처럼 몇 명의 인간들을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불공정이었다.] 

 

- "사흘 전 재심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걸 주면서 부탁을 하더라고. 만약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자네한테 주라더라고, 원칙상 안 되는 일이지만 일단 맡아 뒀지. 시계는 요긴하게 쓰겠네."
간수는 시계를 들고 사라졌다. 모니카는 서둘러 휴지를 펼쳤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들어 있었다.
[빅토르 로레의 어린 신관]
이것이 하퍼가 남긴 다잉 메시지였다. 모니카는 메모를 읽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이제껏 추적해 온 호크실드 가문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고대 이집트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엉뚱한 단서가 호크실드 가문의 숨겨진 비밀로 이끌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빅토르 로레는 이집트 고대 문명 최고의 발견 중 하나로 꼽히는 '왕가의 계곡'을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자였다. 그중에도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투트모세 3세의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했다. 투트모세 3세는 전 생애에 걸쳐 적어도 17회 넘게 원정을 했고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위대한 파라오였다. 하지만 무덤을 발견할 당시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상태여서 파라오의 미라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텅 빈 무덤 안에 투트모세 3세의 관 외에 또 다른 관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관은 투트모세 3세의관 아래 묻혀 있어 도굴을 면할 수 있었는데 안에는 15세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 남자의 흉상이 들어 있었다. 투트모세 3세의 신관(神官)이라고 알려진 이 소년의 흉상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관의 눈이었는데 서로 다른 빛깔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른쪽 눈에는 검정색 사파이어가, 왼쪽 눈에는 녹색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흉상 받침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진리의 빛은 미래의 기억 속에 있으니 세상을 뒤져 아문-라의 사자(使者)를 찾아라. 사자는 모두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를 찾아 신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하면 세게트 이아르의 문이 열리리라.'

- 한눈에 이 흉상의 가치를 알아본 로레는 석고를 발라 위장한 후 프랑스로 밀반입한다. 당시 많은 재산을 투입해 발굴을 진행했던 로레는 이 흉상을 박물관이 아닌 개인에게 거금을 받고 넘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셉 호크실드였다. 조셉은 사업 수완뿐만 아니라 고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특히 고대 이집트와 로마, 중국 유물에 관심이 많아서 엄청난 양의 유물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빅토르 로레의 어린 신관'을 매입한 것이다.  

- 창밖을 바라보다가 모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청년을 보는 순간 모니카는 번개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청년은 빅토르 로레의 어린 신관이 되살아난 것처럼 닮아 있었다. 그중에도 두 눈은 흉상에서 검정색 사파이어와 녹색에메랄드를 빼내 박아 넣은 것처럼 똑같았다. 모니카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청년을 찍었다. 찰칵. 이윽고 리무진은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야 모니카는 정신을 차리고 사진을 확인했다.
"궁극의 아이..."


- 편집장의 인맥까지 동원해 간신히 알아낸 청년의 신원은 지극히 평범했다. 그는 삼천 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파라오의 신관이 아니라 카이헨동 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온 신가야라는 청년이었다. 과거 행적도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가난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고 말썽을 일으켜서 소년원을 들락날락했던 문제아에 불과했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청년을 카이헨동 연구소에서 영주권까지 지원하며 초청한 것이다. 더욱 이상한 건 연구소에서 청년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는 점이다. 역시 뭔가 있었다. 


- 짐머만은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매일 밤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 바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러시안 레드를 바른 건 결혼 후 처음이었다. 이제 서른을 앞둔 나이였지만 거울에 비친 모니카는 십년 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슴까지 파인 흰색 시폰 미니 원피스는 걸을 때마다 멋진 몸매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냈고 강렬한 러시안 레드 빛깔의 입술은 지나는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 "미안해, 사이먼, 비즈니스 때문이니까 이해해 줘."
모니카는 반지를 핸드백에 넣고 화장실을 나섰다.
 
- 짐머만이 쓴웃음을 짓고는 맥주를 땄다. 그가 맥주를 비우는 사이 몇 명의 여자가 다가왔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니카는 자신이 짐머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짐머만은 멋진 외모를 갖고 있었다. 19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훤칠한 키에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옷 입는 취향도 세련됐다. 독일어 악센트가 남아 있는 그의 발음도 이국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얻을 수 있는 남자였다. 짐머만도 그런 외모를 이용해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지 주위 여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모니카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 짐머만은 우산을 쥐여 주고는 다시 바로 돌아갔다. 우산을 받은 모니카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부드러운 짐머만의 갈색 눈과 마주치자 온몸에서 알 수 없는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대학 시절에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 짐머만은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당신에게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이 비밀을 듣게 되는 순간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거예요. 그래도 알고 싶어요?"
짐머만이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기자라는 직업이 그런 거예요."
"그런 게 아니야. 이건 절대 피할 수 없는 거라고.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처럼."
 
- "당신이 찾는 그 아이는 미래를 기억하는 아이예요."
"미래를 기억한다고요?!"
"평생 자신한테 일어날 모든 일을 기억해요."
"그 말은 자신의 미래는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미래는 보지 못한다는 거군요?"
"그래요. 자신이 겪게 될 미래만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군요. 누군가의 엄청난 힘과 만나면."

- "그렇다면 빅토르 로레의 어린 신관은 뭐죠?"
짐머만은 다시 위스키 한 모금을 물었다.
"이 아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어요.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건 기원전 26세기경 고대 이집트 쿠푸왕의 무덤이에요. 그 유명한 기자의 피라미드죠. 왕과 왕비의 방이 연결된 통로 중앙에 또 다른 비밀의 방이 있었어요. 미국의 고고학자 조지 라이즈너에 의해 발견된 이 방에는 17세 정도의 남자아이 미라와 다섯 개의 석판이 있었고, 석판에는 아이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아누비스의 사자'라고 불리는 이 아이는 금빛 옷을 입고 한 손에 황금 망치를 들고 죽음의 신 아누비스의 신전에서 어느 날 나타났다고 전해지는데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대사제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런데 석판에 적힌 기록에 의하면 이 아이한테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어요. 바로 미래를 보는 능력이에요. 쿠푸는 영토를 확장해 남쪽 엘레판티네까지 지배하게 되는데 원정을 갈 때마다 이 어린 사제의 신탁이 있었다고 해요. 쿠푸는 이 아이의 능력 덕분에 고대 이집트 왕조 중 최고의 황금기를 건설해요. 그런데 쿠푸의 대사제는 스무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돼요. 그 후로 쿠푸왕의 치세도 쇄락하죠. 그의 후계자였던 아들 카와프가 암살되고 왕국에는 내란이 끊이지 않아요. 그로부터 천년 후 또 다른 왕이 이 아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투트모세 3세예요. 그는 이집트 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아누비스의 사자에 관한 전설을 들으며 성장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히타이트를 정복하던 중 석상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발견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한테 똑같은 능력이 있었던 거예요. 덕분에 투트모세 3세는 쇠퇴했던 왕권을 회복해요. 원정을 실시해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죠." 

- "잠깐. 그러니까 궁극의 아이는 전 세대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후 똑같은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는 건가요?"
모니카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지문, 심지어 치열까지도 똑같아요. 놀라운 일이죠. 그때부터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들은 이 아이들을 찾기 시작해요. 그들에게 이 아이들은 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들은 이집트에서만 출생하는 게 아니었어요. 모든 인종, 모든 국가에서 무작위로 태어나요. 때문에 이 아이들의 존재는 이집트 왕국과 함께 모래 속에 묻히게 돼요. 그 후 역사적으로 이 아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몇 명 있긴 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그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에요. 그의 궁정화가 아펠레스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아누비스의 사자가 부활한 것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연승을 거둬요. 그라니코스전투, 이수스전투, 가우가멜라전투 등에서 보여 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워요. 심지어 최대의 적인 다리우스 3세가 박트리아의 총독인 베소스에게 살해당할 것까지 예견했다고 해요. 그 후 이집트까지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시찰하던 중 자신과 똑같은 석상이 이집트 신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요. 그래서 이집트의 모든 신전을 둘러보기 시작하죠. 아픈 몸을 이끌고 비하리야 사막을 건너 가장 거대한 아누비스의 사자 석상이 있던 카르낙 신전까지 방문했다가 서른세 살의 나이에 사망해요. 유일하게 서른을 넘긴 궁극의 아이라고 할 수 있죠. 그 후로 궁극의 아이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요. 이들이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빛을 보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 아이들을 정신병자라고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에요. 미래와 현실을 혼동해 세상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던 거죠. 존 마이어스처럼. 그래서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버림당하거나 평생 정신병자 취급받으며 살다가 죽어요." 

- "그래요. 고대 이집트 유물에 관심이 많던 조셉 호크실드는 어느날 런던의 암시장에 나온 아누비스의 사자 석상을 발견해요. 쿠푸 왕의 무덤에서 도굴된 유물이었죠. 석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조셉은 석상을 구매해요. 그런데 얼마 후 빅토르 로레로부터 또 다른 구매 제안이 들어와요. 투트모세 3세의 무덤에서 발견한 홍상이었죠. 엄청난 시간차를 두고 똑같은 인물을 조각한 것에 의문을 가진 조셉은 어린 신관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해요. 그러던 중 아누비스 사자의 석판에서 해답을 얻게 돼요. 바로 이집트 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미래를 보는 아이에 관한 전설이었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저 전설이라고만 여겼어요. 그러던 1815년 프랑스 낭트 지방을 여행하던 조셉은 어느 날 집시촌을 지나게 돼요. 그리고 거기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되죠."
"전설에 나오던 궁극의 아이였군요."
"그래요. 아이는 아누비스의 사자가 되살아난 것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서로 다른 빛깔의 두 눈과 동서양을 정교하게 섞어 놓은 듯한 생김새까지. 조셉은 귀신에 홀린 듯 그 아이에게 다가가요. 그런데 그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거예요. 당신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부호가 될 거라고. 그러자 조셉이 물어요. 어떻게 하면 대부호가 되겠냐고. 그러자 아이가 말해요. 이제 곧 프랑스와 영국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하게 될 거라고. 그 전쟁의 승자는 영국이 될 거고 당신은 영국의 국채를 사서 엄청난 부를 얻게 될 거라고. 얼마 후 아이의 예언대로 워털루전투가 벌어지자 조셉은 주저 없이 영국 국채를 사들여요. 그리고 놀랍게도아이의 예언은 적중해요. 조셉은 곧바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아이를 데려와요. 그때부터 호크실드가의 신화가 시작된 거예요. 영국 철도에서부터 수에즈 운하까지. 아이의 능력을 등에 업은 호크실드 가문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죠."

"그리고 호크실드가의 부를 물려받은 악마 개구리들도 아이의 능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군요."

- "혹시 신가야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순간 모니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사람 어딨죠?"
"조금 전에 소란을 피워서 건물 밖으로 쫓아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마지막 소원이라며 이 편지를 당신한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말도요." 
경비원은 편지봉투 한 장을 건넸다.

- "당신을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경비원이 자리를 뜨자 모니카는 서둘러 편지를 개봉했다.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빈 편지지일 뿐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온몸에 불길한 예감이 퍼져 나갔다. 모니카는 편지를 핸드백에 넣고 로비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저만치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거대한 비행기였다. 비행기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모니카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모니카는 담담하게 비행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
모니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다음 장은 없었다. 이로써 아내의 죽음에 관한 모든 비밀이 풀린 것이다. 하지만 십 년간 짊어지고 있던 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모니카가 넘긴 공은 이제 사이먼의 손에 넘어와 있었다. 용의자였던 신가야는 어느새 피해자로 변해 있었고 희생자였던 악마 개구리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악당이 되어 있었다. 사이먼은 노트를 봉투에 넣고 생각에 잠겼다. 사이먼은 스스로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지난 십 년간 수많은 사건을 맡았지만 한 번도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모니카가 등장하면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사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변해 있었다. 사이먼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가 못 가진 이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는 게 세상의 룰이었다. 그러나 이건 도를 지나쳤다. 사이먼은 이제껏 접하지 못한 분노를 느꼈다. 배후를 알게 된 순간 불이 붙어버린 유정(油井)처럼 쉽사리 진화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하찮게 대한 인간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 주고 싶었다. 그들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물론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놈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 정리가 필요했다. 미셸이 일곱 번째 궁극의 아이라면 이야기는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나흘 전 시작된 가야의 암살, 십 년 전 엘리스와의 사랑, 다섯 명의 악마 개구리, 미셸의 납치, 그리고 일곱 번째 궁극의 아이.

사이먼은 비로소 가야가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지금 악마 개구리와 전쟁을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야는 미셸이 놈들 손아귀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십 년을 기다린 거야."

-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소. 당신이 말한 궁극의 아이는 자신의 미래만을 기억한다고 했소. 그런데 십 년 전 죽은 가야가 어떻게 지금 벌어질 일을 알 수 있지?"
"왜냐면 가야는 진정한 궁극의 아이이기 때문이오."
"진정한 궁극의 아이?"
"그렇소. 궁극의 아이 중에는 몇백 년에 한 번 굉장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오. 그 아이는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미래도 볼 수 있소. 진정한 예언자지 가야가 바로 진정한 궁극의 아이요. 가야는 엘리스와 모니카, 악마 개구리들의 미래를 모두 간파하고 있었던 거요. 그렇지 않고는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없지." 
사이먼은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엄청난 능력이었다.

- "당신 말대로 가야는 스스로 놈들과 계약을 했소."
"왜? 평생을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가야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소. 빈민 중에도 최하층이었지. 어머니가 파출부를 해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소.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쓰러진 거요. 췌장암이었지.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소. 가야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소. 유일한 혈육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고등학생인 가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소. 결국 가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오. 현금인출기를 부수고 돈을 훔친 거요. 그런데 그 사건이 악마 개구리를 깨웠지. 한국 경찰은 가야를 체포하자마자 지문을 채취했소. 가야의 지문은 아담의 유치원을 통해 곧장 악마 개구리에게 전송됐고, 그로부터 며칠 후 구치소로 변호사를 대동한 한 남자가 방문하오. 벨몽의 집사 로드니였지. 가야를 만난 로드니는 제안을 하오. '널 여기서 빼내 주고네 어머니를 살려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를 평생 돈 걱정없이 편히 살게 해 주겠다. 대신 우리와 일을 하지 않겠느냐.' 가야는 그 자리에서 제안을 수락하오. 하지만 그 제안에 치명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소.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연락도 할 수 없었지. 하지만 이미 사인을 한 후였소. 어머니는 수술을 받고 완쾌됐소. 훌륭한 집에 좋은 개인 간호사도 생겼소. 그 사실을 안 가야는 만족했소. 그 후로 향수병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나름 잘 버텼소.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터진 거요." 

- 가야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 7시에 기상해서 간단한 체조를 하고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스터디룸'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24시간 뉴스가 방영되는 열두 대의 TV와 세계 각국에서 방금 도착한 신문들이 놓여 있다. 프랑스의 <르 몽드>, 이탈리아의 <라 레푸블리카>, 일본의 <요미우리> 등을 번역한 것이다. 주요 기사에 밑줄이 쳐져 있고 어려운 용어에는 각주가 붙어 있다. TV는 현재 방송되고 있는 최신 뉴스들이다. CNN, 블룸버그 통신, BBC, FR3, 한국의 YTN도 있다. 오전 10시부터 점심시간까지 신문을 읽고 뉴스를 시청한다. 이것은 모두 미래의 기억을 저장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지금 읽는 기사는 과거를 위한 기사이고 미래의 가야도 같은 시간 현재를 위해 미래의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이다. 오전 일과가 끝나면 점심 식사를 하고 한 시간가량 자유 시간을 갖는다. 그동안 가야는 게임을 하고 음악도 듣는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고 개인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극장에는 백여 개의 좌석이 있지만 언제나 관객은 가야 혼자다. 오후 일과는 2시에 시작된다. 이 시간이 가장 괴로운 시간이다. 가야는 짐머만과 함께 예언을 시작한다. 야누스를 뇌에 삽입하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미래의 기억을 녹화한다. 특히 큰 계획을 앞둔 날에는 벨몽의 요구에 따라 기억을 찾는다. 그것은 지독히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뇌 속으로 전류가 흘러들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타들어 가는 통증이 밀려온다. 진통제를 맞지만 소용없다. 벨몽은 자신이 원하는 기억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계속한다. 어떤 때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실험을 멈추지는 않는다. 의식이 돌아오면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갖고 다시 시작한다. 그날도 가야는 예언의 방에서 야누스를 꽂은 채 실험대에 누워 있었다. 
  
- "이틀 후 미사일 방어 계획이 국회 예산 심사를 통과하는지 떠올려 봐. 되도록 빨리 끝내자. 너를 위해서도, 지켜보는 날 위해서도.”
가야는 정신을 집중해서 기억을 더듬었다. 미래를 기억하는 건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다만 시계를 이틀 후로 돌려놓고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기억의 철에서 내용을 찾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간단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스스로 미래에 있다고 믿을 정도로 완벽하게 자기최면을 걸어야 했다. 

- "당신 말대로라면 악마 개구리들이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당신도 알고 있었군.”
짐머만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일부러 모니카를 그 시간에 그곳으로 부른 거야. 비밀이 새 나가는 걸 막으려고. 이런 개자식!"
  
- "이 총 알아보겠소? 이게 짐머만의 시체가 있던 현장으로부터 30미터 떨어진 풀숲에서 발견됐소."
사이먼의 총이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총을 훔쳐 간 범인이 누군지 깨달았다. 요원이 운전석 헤드레스트를 두드리자 차가 출발했다. 어둡게 선팅이 되어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뉴욕을 벗어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사이먼은 흐릿하게 스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 총에 죽게 될 거라고 했소.'
가야가 짐머만에게 남긴 예언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암살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자명했다. 사이먼은 요원의 손등에 있던 문신을 응시했다.

- 으뜸은 눈을 감고 방금 전 지나온 판공초 호수의 고요하고 푸른 물결을 떠올렸다. 해발 4,000미터에 위치한 수면은 부처의 거울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지금 으뜸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은 평온과 거리가 멀었다. 달라이 라마 으뜬 갸초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인도와 중국의 국경이 접해 있는 창라(Chang La)고개 국경 검문소에 도착해 있었다. 사흘 전 귀향을 결심하고 으뜬은 곧장 중국과 인도 정부로 티베트 방문에 관한 서한을 발송했다. 이에 중국뿐 아니라 인도 정부도 심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으뜬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영원히 입국이 금지된 망명자였다. 입국 허가서 따윈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가 바라는 건 수구초심(心)이었다. 그의 나이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고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지 어언 반세기가 넘었다. 그 무엇도 그의 앞을 막을 순 없었다. 으뜸은 병원을 나온 후 롭상과 주치의 밍마, 그리고 몇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방송국과 신문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인도주재 대사들은 각국의 입장을 발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의 성명서는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일본, 일부 유럽 국가들은 쌍수를 들어 라마의 귀향을 환영했지만 러시아와 여러 아프리카 국가, 네팔 등은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네팔은 라마가 자신들의 국경을 거쳐 중국으로 가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한 경고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다. 반면 UN과 국제 인권 위원회,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 단체와 시민단체 등은 일제히 라마의 행보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과 힙합 가수들까지 합세해 이제 라마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도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건 역시 중국이었다. 라마가 창라로 향하던 도중 중국은 인도 주재 대사를 급파했다. 
"지금처럼 티베트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급격한 행보를 보이시면 라마 자신이나 티베트, 그리고 중국 모두에게 해가 됩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경우 저희 중국은 어떤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리시고 치료를 마저 받으시는 게 어떨지요."

- 그곳은 미국 영토에서 300해리 가량 떨어진 공해상이었다. 사방으로 수평선이 펼쳐진 밤하늘을 세대의 헬기가 날고 있었다. 미해군 로고가 선명한 씨호크에는 모임에 참석할 각국 요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럽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었다. 그들이 이 늦은 시각에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향하던 곳은 한 대의 거대한 배였다. 그 배는 사십 년간 전 세계 전쟁터를 누비다가 얼마 전 퇴역한 재래식 항공모함이었다. 저만치 바다 위에 일렬로 늘어선 불빛이 나타났다. 목적지였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항모의 위용은 대단했다.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 대의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과 두 대의 이지스 구축함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로스엔젤레스급 잠수함만 있으면 항모전단과 흡사한 규모였다. 이들은 모두 항모에 모이는 각국의 인사들을 경호하기 위해 반경 500킬로미터 내의 모든 목표물을 빈틈없이 추적하고 있었다. 헬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항모 갑판 위에 착륙했다. 그와 동시에 갑판 요원들이 인사들을 선체 내로 안내했다. 
 
- "지금껏 우리 모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희생했던 상임위원 동지들의 장례는 차후 일정을 잡아 따로 거행하도록 하겠으니 많은 참석 부탁드리겠소. 그리고 최고 상임위원인 오귀스트 벨몽 경은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화상으로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으니 양해 바라오. 그럼 회의를 시작하기 전 의식을 거행할 테니 모두 기립하시오."
킨데마이어의 말에 따라 모든 회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단상 중앙에서 석상 하나가 올라왔다. 빅토르 로레의 어린 신관이었다. 조명을 받은 신관은 지금이라도 깨어날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석상이 나타나자 회원들이 일제히 다음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진리의 빛은 미래의 기억 속에 있으니 세상을 뒤져 아문-라의 사자를 찾아라. 사자는 모두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를 찾아 신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하면 세게트 이아르의 문이 열리리라."
암송이 끝나자 모두 착석했다.

- "지금과 같이 매년 15퍼센트 이상 증가한다고 가정했을 때 십년 후에는 미국과 대등, 혹은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우리가 준비한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우리는 정체된 시장 확장과 세계 제패라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의 자본화와 시장 개방에 노력을 기울여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수뇌부가 우리 계획의 다음 단계인 민주화, 즉 공산당 일당독재 해체와 자본시장의 완전한 개방에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부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모든 독재 정권의 중기 형태와 흡사하니까요. 그런데 이번 중국의 문제는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중국 정치는 관시(關係) 정치라고 불립니다. 일종의 파벌 정치죠. 현재 중국 공산당을 좌지우지하는 파벌은 모두 세 개입니다. 상해방(上海幇), 태자당(太子黨), 그리고 단파(派派). 문제는 이들 중 권력을 쥐고 있는 상해방과 미래의 권력 집단인 단파 수뇌부가 우리와의 연계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 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 자본을 형성하려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위안화를 세계 기축통화로 만들고 전 세계 화교자본을 하나로 통합해 우리에게 대항하는 독립된 세계 재편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을 좌시할 경우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현재 저희는 이들을 길들일 몇 가지 계획을 실행 중에 있습니다." 

 

- "우린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최고 수뇌부에게 우리의 뜻을 전했소. 우리의 요구는 간단했소.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하고 나아가 미국과 영국처럼 민영 중앙은행시스템을 설립하라는 것이었소. 정치에 관한 조언도 잊지 않았소. 공산당 일당 체제는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반발을 받게 될 것이고 제2의 천안문 사태도 각오해야 할 거라고 했소. 중국 지도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소. 만약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공산당 일당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자비로운 제안을 전면 거부했소.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소. 물리적 압박이오. 우리는 이들을 압박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소. 첫 번째는 소수민족자치구의 독립이었소. 이를 위해 소수민족 중에도 가장 독립 요구가 활발한 티베트를 선택했소. 그리고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소. 바로 달라이 라마 암살이오." 

- "라마의 측근 중 한 명을 포섭했소. 그가 계획을 완수할 것이오.”

- 북위 25도 58분, 동경 123도 27분에 위치한 무인도는 섬이 생긴 이래 최고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우미타카마루(海鷹丸)'라는 이름의 배 한 척 때문이었다. 일본 해양청 소속 3,100톤급 석유탐사선은 일본과 중국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대륙붕에서 지질을 탐사하는 임무를 띠고 도착해 있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강하게 비난하며 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당연한 주권 활동이라며 탐사를 강행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이제껏 있었던 영토 공방과 비교해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한 단체가 끼어들며 사건이 복잡해졌다. 중국의 민간단체에서 파견한 선박이 센카쿠 열도로 접근해 탐사선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러자 일본 해상청 소속 경비함이 출동해 물리적으로 영해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일본 해경이 발사한 고무총에 중국 민간단체 회원이 맞아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일본 해경은 헬기를 동원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중국 민간단체 회원은 열한 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에 분개한 중국은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센카쿠 열도에 침범한 중국 민간단체회원들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결국 중국은 센카쿠 열도로 해군을 출동시킨다. 이에 대항해 일본 역시 해군을 파견했고 두 나라 해군이 작은 탐사선을 가운데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중일 함대 대치였다. 중국은 푸저우 해군기지에 정박 중이던 동해함대 소속 최신예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두 척, 그리고 호위함 세 척을 센카쿠 열도로 출동시켰고 이에 대응해서 일본은 이지스 구축함 두 척과 미사일 구축함 세척, 그리고 대잠헬기구축함 한 척을 파견한 상태였다.   

-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중국의 순양함은 SS-N-22 선번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탑재하고 있었다. 사정거리 250킬로미터에 시속 마하 2.5 이상에 달하는 이 미사일은 단 한발만으로도 일본의 구축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본의 구축함들은 동시에 200여 개의 목표물을 감지하고 SM-2 대공미사일을 이용해 한 번에 열여덟 개의 목표물을 격추시킬 수 있는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ASM-2 공대함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7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이지스함 대공방어 무기 체계가 선번 미사일을 완벽하게 요격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중국 함대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대 간의 거리를 선번의 사정거리인 250킬로미터로 유지하고 있었다.

 

- "적군의 현재 동태는?"
"열두 시간째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습니다."
"꼼짝도 않는다..."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해군 전술의 기본은 기동이었다. 계속적인 기동으로 위치를 변화시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함대를 방어하고 적의 반응을 파악하는 게 전통적인 전술이었다. 그런데 일본함대는 진지를 구축한 것처럼 열두 시간째 요지부동이었다. 
"적 잠수함은 발견됐나?"
"네 대의 대잠헬기가 인근 해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적 잠수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제독이 일본 함대가 위치한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며 중얼댔다.

- "더 큰 전쟁이오."
"이번엔 어디죠? 인도와의 국경 분쟁?"
회원이 집요하게 추궁했다.
"아니, 이번엔 한반도요."
한반도라는 말에 회의장이 크게 술렁였다.

- "얼마 전 우리는 동북아에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한국의 백령도에서 충돌을 일으켰소. 덕분에 한국은 방위 예산을 앞당겨 집행해 아파치 헬기 일개 대대와 수백 기의 헬파이어미사일 등을 구입했고 일본 역시 신형 이지스 구축함 구매 계획을 발표했지. 이는 중국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소. 만약 중국이 이번에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을 일으킬 거요. 한반도를 지목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경제적인 측면과 전쟁 후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있다는 점이오. 일단 한국은 쓸 만한 경제력과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소. 게다가 한국민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대단하오. 이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킬 경우 큰 부담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한국 정치인들은 정권만 보장하면 말을 들을 거요. 어차피 역사 따윈 안중에도 없는 저능아들이니까. 두 번째는 한국과 중국의 영토 문제요. 한국이 승리할 경우 곧바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될 거요. 그런데 문제는 이 국경 지역이 19세기에는 한국의 영토였다는 거요. 간도라고 불리는 이 땅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 만주 이권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1909년 청나라에 넘겼소. 일본의 패전 후 이 협약은 무효화됐지만 중국은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자국 영토로 귀속시키고 있소. 하지만 만약 한반도가 통일되고 국경을 맞닥뜨리게 되면 이 문제를 표면화시켜 또 다른 국경 분쟁을 야기할 수 있소. 그렇게 되면 중국은 국경을 맞댄 대부분의 국가와 국경 분쟁을 겪게 되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될 거요." 
"하지만 이 경우는 우리도 상당한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을 텐데요. 우선 남한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엄청난 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할 거요."
회원이 받아치자 이번엔 카이헨동 연구소의 소장이 나섰다.
"저희 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전쟁이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약 삼 개월에서 길게는 십 개월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 삼 개월 이내에 끝날 경우 희생자는 대략 70만 명에서 150만 명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 개월을 넘길 경우에는 350만에서 많게는 500만 명까지도 희생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소장이 발표하고 나자 킨데마이어가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남북한의 인구가 약 7,000만인 걸 감안할 때 나쁘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되오. 또 한 가지 이점은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를 확고한 우리 영토로 만들 수 있다는 거요.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려면 우리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오."

- 첫 번째 장에는 가야가 직접 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녕. 사랑하는 내 딸 미셸.
너를 직접 보지 못하고 편지를 쓰니 아빠 마음이 아프구나. 이 편지를 쓰려고 며칠을 고민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어. 하지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널 사랑한다. 만난 적도, 본적도 없지만 아빠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널 사랑해. 그걸 꼭 기억해 줘. 그리고 부탁이 있단다.]

- "가야는 당신과 미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거예요. 살아 있었다면 놈들이 뒤를 쫓다가 두 사람의 존재를 더 일찍 알게 됐을 거고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엘리스는 편지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흐느꼈다. 눈물에는 미안함과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 배어 있었다.

- 엘리스는 한참 동안 울었다. 사이먼은 이토록 처절하게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녀의 눈물이 말해 주고 있었다. 평생 사랑했던 단 한 명의 남자. 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겨 둔 채 떠나 버린 남자. 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한 장의 편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잿빛으로 가득했던 엘리스의 집이 색을 띠기 시작했다. 온통 무채색이던 집 안이 그녀의 마음이 열리며 연한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 [추신: 엘리스, 당신만이 미셸을 찾을 수 있어요. 마지막 날을 기억해봐요. 두 번째 장은 벨몽을 위한 거요. 그에게 줘요. 그리고 마지막 장은 미셸의 미래를 위한 거요. 그날을 위해 잘 보관하라고 전해 줘요.] 

- "마지막 날..."
엘리스는 눈을 감고 다시 과거로 넘어갔다.

- 잠결에 무심코 옆자리를 더듬던 엘리스는 눈을 떴다. 그녀가 잠들어 있던 곳은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게스트 룸이었다. 가야와 엘리스는 밤새 와인 세 병을 비우고 짐머만의 집에서 잠이 들었다. 엘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가야를 찾았다. 하지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엘리스는 가운을 입고 방을 나섰다. 새벽의 저택은 파도 소리만이 운치 있게 들릴 뿐 고즈넉했다. 엘리스는 2층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어제 마신 와인 때문에 심하게 갈증이 났다. 부엌문을 열던 엘리스는 발코니에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가야가 담요를 두른 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엘리스가 소리 없이 다가가 곁에 앉자 가야가 덮고 있던 담요를 나눠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온기를 나누며 수평선을 바라봤다. 잠시 후 바다와 하늘 사이가 빛으로 갈라지며 해가 뜨기 시작했다. 태양은 마중 나온 구름을 선홍색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고개를 내밀더니 이윽고 어둠을 완전히 밀어냈다. 
"일출은 처음이에요."

- 가야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열어 봐요."
상자를 열어 보고 엘리스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상자 안에는 티파니 반지가 들어 있었다. 크지는 않지만 작은 다이아가 박힌 웨딩 반지였다. 엘리스는 별을 손에 넣은 듯 멍하니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가야가 반지를 엘리스의 손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엘리스, 나랑 결혼해 줄래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엘리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가야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 진지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당신이 내 아내였으면 좋겠어요."

- "엘리스, 정확히 가야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요."
사이먼이 룸미러에 반사된 엘리스를 보며 물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우리는 여행사를 찾아갔어요."
비행기표의 행선지는 타히티였다. 비슷한 금액으로 호주와 태국도 가능했지만 엘리스는 주저 않고 신혼여행지로 타히티를 골랐다. 그곳을 선택한 데는 엘리스가 좋아하던 화가인 고갱의 영향이 컸다. 비행기표는 편도였다. 돈이 모자란 것도 있었지만 젊음만 양손에 쥐고 미지의 세계를 기약 없이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오늘은 일찍 자야 돼요. 10시 비행기니까 적어도 8시 30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고요."
엘리스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 엘리스를 바라보는 가야의 눈이 어딘지 슬퍼 보였다.
"타히티가 별로구나. 그럼 말하지. 다른 데로 갈까요?"

엘리스가 물었다.
"아니. 타히티가 좋아요. 나도 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기쁘지 않아요?"
"엘리스, 지금 우리는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 가야가 엘리스를 데리고 간 곳은 그리시 스푼(Greasy Spoon)이란 이름의 작은 식당이었다. 길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던 식당은 네온 사인으로 된 메뉴가 창문에서 번쩍이고 기다란 바와 몇 개의 테이블이 늘어선, 미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곳이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가게가 자리 잡은 곳이 번화한 사거리의 모서리여서 저 멀리 뉴욕의 마천루가 한눈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가야는 거리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 "저기를 봐요."
가야가 가리킨 곳은 사거리 너머에 펼쳐져 있던 뉴욕의 마천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정오의 햇살 아래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당당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건물들을 잘 기억해요."
엘리스는 영문도 모른 채 건물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건물은 왜요?"
"십 년 후 엘리스가 아끼는 사람을 누군가 데려갈 거예요."
"그게 누군데요?"
"때가 되면 알게 돼요. 그 사람을 찾으려면 저 건물 중 지금은 없는 건물을 찾아가면 돼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저 고층 건물 중 지금은 없는, 새로 생긴 건물을 찾아가요. 그 건물 꼭대기 층에 그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들어가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분명히. 그 사람 말을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설마 날 두고 떠나는 건 아니죠?"
가야가 엘리스를 꼭 끌어안았다.
"난 절대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 곁에서 당신과 내 가족을 지킬 거예요."

 

- 그 모습이 가야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길어야 이제 열두 시간 정도였다. 그게 가야에게 주어진 삶의 여분이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아서도 안 됐다. 가야는 살며시다가가 등 뒤에서 엘리스를 안았다.
"나 이제 아무 데도 안 가니까 걱정 말아요." 
너무도 듣고 싶은 말이었지만 가슴 저미는 말이었다. 가야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듯 엘리스를 침대로 안고 가서 사랑을 나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신마저도 이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듯 가야는 엘리스의 영혼까지 깊숙이 스며들었고 모든 걸 불태워 버릴 것처럼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몇 번의 사랑을 나눈 후 두 사람은 샴페인을 마시며 살을 맞대고 누워 있었다. 

- 엘리스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누우려 했다. 그의 배게 맡에 뭔가 있었다. 편지였다. 섬뜩한 소름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끝을 맞춰 깔끔하게 접힌 편지는 불길한 기운을 만들고 있었다. 엘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 [사랑하는 엘리스에게
이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심장에 화살을 맞은 것처럼 고통스럽군요. 사람들은 운명에 관해 많은 얘기를 해요. 운명을 믿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개척한다는 사람도 있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물었죠. 운명을 믿느냐고. 그때 당신은 믿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운명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걸. 엘리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의 실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저 멀리 내 고향 한국에서부터 이곳 브루클린까지 이지 않지만 꿈을 수 없는 실로 이어져 있었어요.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우리의 운명을 모두 읽을 수 있었어요. 생에 단 한 번의 사랑. 오직 닷새만 허락된 사랑. 난 우리의 운명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어요. 당신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고 떠나 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발버둥 치면 칠수록 빠져드는 늪처럼 당신은 어느새 내 곁에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요. 당신과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그리고 지난 닷새간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어요. 엘리스, 이제부터 우리는 힘든 길을 걷게 될 거예요. 나는 상관없지만 당신이 겪게 될 힘든 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져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할 수 있어요. 힘든 날들이 지나면 추운 새벽이 걷히고 따뜻한 아침 해가 뜨듯 행복한 날들이 계속될 거예요. 이제 나는 가야 해요. 당신을 두고 떠나려니 너무나 괴로워요.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에요. 사랑해요, 엘리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영원히 날 용서하지 말아요.]

-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 어두워서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어딘지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확히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이 가야가 보낸 사람인가요?"
"날 모르겠어요? 엘리스."
그는 엘리스를 잘 아는 눈치였다. 엘리스는 몸을 굽혀 운전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남자는 환갑을 한참 넘긴 노인이었는데 풍기는 인상만으로도 상당한 재력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와 가지런히 다듬은 턱수염은 갈색 뿔테 안경과 잘 어울렸고 여유로운 눈매는 롱 아일랜드 대저택에서 손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기 위해 맨해튼까지 리무진을 몰고 온 부자 할아버지를 연상시켰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그러자 노인이 안경을 벗고 돌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엿 같겠지만 세상엔 때라는 게 있어. 보내야 할 걸 잡으려다간 경을 치고 말지."
 
- "놈들이 사라지고 나서 난 그가 준 100달러를 들고 술 한잔하러 갔어. 역시 돈이 최고구나 생각하면서 잭 다니엘 한 병을 시켰지.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때 가야가 다시 나타났어. 그러더니 대뜸 이러는 거야. 여기서 돈을 쓰면 제로가 되지만 자기를 따라오면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 거지가 100달러로 부자가 된다니. 나는 헛소리 말라고 하고는 술병을 따려고 했어. 그런데 그가 술병을 뺏으면서 이러는 거야. 지금 이 병을 따면 당신은 인생을 바꿀 기회를 날리는 거라고. 근데 그 눈이 무지하게 진지하더라고. 그래서 공돈 날린다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지. 그와 간 곳은 월스트리트였어. 거기서 그 돈으로 주식을 사더라고. 무슨 제약 회사였던 거 같아. 그런데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갑자기 주가가 뛰기 시작하는 거야. 알고 보니 그 회사에서 만든 발기부전 치료제가 FDA에서 승인을 받았다는 거야. 난 그 자리에서 100달러로 400달러를 벌었어. 그때 알았지. 그가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는 그 자리에서 투자할 리스트를 적어 줬어. 시간과 날짜도 같이 말이야. 그래서 물었지. 왜 나 같은 거지한테 이러냐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거든. 그러자 가야가 말했어. 이틀 후 새벽 4시경에 브루클린 뒷골목을 헤매는 한 여자를 구해 달라고. 자네였지. 그리고 십 년 후 다시 한번 자네를 구해 달라고 했어. 바로 오늘이야." 

- "가야의 부탁을 받고 난 저 괴상한 건물의 설계도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어. 건물은 '아잠 샤로운(Azam Scharoun)'이라는 독일 건축가가 설계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건물이 완성된 직후에 모든 설계도를 파기했어. 덕분에 건물 구조를 파악하는 데 꼬박삼 년이 걸렸지. 그런데 이 건물은 설계 단계부터 이상했어. 우선 외벽이 1미터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로 이루어졌고 한 층당 하중을 지탱하는 철골 기둥이 무려 칠십 개나 돼. 게다가 최상층 펜트하우스 외벽에는 5센티 두께의 철판과 방탄 케블라까지 내장되어 있었어. 쉽게 말하면 융단폭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55층짜리 요새라는 말이지. 더 이상한 건 맨 꼭대기 층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나 계단이 전혀 없다는 거야. 펜트하우스는 입구도 없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어. 애초부터 밖에서는 물론이고 안에 있는 사람도 나갈 수 없게 설계됐단 말이야." 

-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야. 특히 이런 괴상한 걸 좋아하지. 그래서 오랫동안 펜트하우스를 관찰했어. 그런데 희미하긴 해도 분명 인기척이 있었어. 그 얘기는 어딘가 입구가 있다는 얘기였지. 나는 잠복을 하고 펜트하우스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 쥐새끼 한 마리 꼼짝 않는 거야.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지. 입구는 건물 안에 없었던 거야."
"그럼 어딨죠?"
엘리스가 묻자 테드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길 건너편 뒷골목에 위치해 있던 7층짜리 건물로 인적이 없는 폐가였다. 오래전 불이 꺼진 이발소 간판만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여기가 입구야."

- 순간 가야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계산을 치르고 식당을 나서던 엘리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가야에게 물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가야 씨 생일을 모르네. 언제예요? 그날은 내가 풀코스로 살게요."

그러자 가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만간 생길 우리 딸 생일하고 똑같아요."

"뭐예요. 우린 이제 막 결혼했다고요."

엘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가야의 옆구리를 찔렀다.

- 그로부터 열 달 후 미셸은 정말 가야와 같은 날 태어났다.
"5월 14일..."
가야와 미셸의 생일이었다. 가능성이 있었다. 엘리스는 문이 있던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 "말씀하신 맥주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자넨 이제 들어가 봐." 
"알겠습니다."
비서는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 대통령은 맥주를 따서 보기에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 맛도 모르는 인간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려 하나."

빌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묻지. 정말 라마를 죽일 생각인가?"

대통령이 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마도."

- "라마가 사망하면 미국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중국을 소수민족 탄압과 인권유린으로 유엔 상임 위원회에..."

"아까 왜 그렇게 라마 사건에 신경 쓰냐고 했지?"

대통령이 단박에 말을 잘랐다.
"왜냐면 라마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 엘리스가 오르자 사이먼이 한 박자 늦게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50여 층을 통과하더니 문이 열렸다. 그러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실내 농장이었다. 천장에는 태양광과 맞먹는 밝기의 조명이 설치되어 대낮같이 비추고 있었고 그 아래 감자, 토마토, 양파 등의 채소와 바나나, 키위 같은 과일이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알로에와 각종 버섯도 보였다. 작물들은 각각의 환경에 맞춰 온도와 습도 등이 조절되는 설비 안에서 자동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각 구역은 유리벽으로 나뉘어 있었고 스프링클러와 자동 수확기가 스스로 작동하며 작물들을 돌보고 있었다. 로드니는 농장을 가로질러 갔다. 채소 구역을 지나 열대 과일 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을 통과하자 널찍한 바나나 나뭇잎 사이로 또다른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이번 엘리베이터는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 사람이 올라타자 투명 엘리베이터는 농장 풍경을 발아래 펼치며 상승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베르사유 궁전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홀이었다. 홀은 3층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원형의 홀 바닥에는 오색의 대리석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루며 깔려 있었고 홀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중에도 눈에 띈 것은 홀 중앙에 있는 커다란 초상화였다. 그림 속의 인물은 서른쯤의 남자였는데 양손 끝을 피라미드처럼 모으고 태평양 물을 작은 방울로 응축해서 떨어뜨린 것처럼 파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 때문에 코와 입이 가려져 전체적인 생김새는 알 수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세상을 삼킬듯 매서웠다. 전체적으로 왕의 거처처럼 호화로웠지만 어딘지 시간의 영역에서 비껴 나 있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모든 것은 허공에 붕 뜬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새것이지만 오래전에 버려진 물건처럼 생동감이 없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늙은 상태로 태어난 아기 같은 곳이었다. 
  
- "폐가의 집사, 밖을 볼 수 없는 창문. 재밌는 곳이군."
사이먼은 방 안을 살폈다. CCTV나 그밖에 감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책장을 살폈지만 평범한 책장일 뿐이었다. 그런데 눈에 띈 책이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사이먼이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였다. 사이먼은 책을 꺼내 첫 장을 펼쳐 보았다. 1951년에 발행된 초판본이었다. 저자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사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다른 책들을 살펴봤지만 역시 모두 초판본이었다.

- "모든 건 보기 나름이지."
휠체어를 탄 벨몽이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놈은 가진 게 보이고 어떤 놈은 없는 게 보여. 어떤 놈은 10달러를 쥐고도 배가 부른데 어떤 놈은 10억 달러를 갖고도 배가 고프지. 왜 그럴까." 

- "실망한 모양이군. 세상을 지배한다는 인간이 이 모양이라서."

벨몽이 휠체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의 무릎에는 읽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까이서 보자 그의 눈은 기묘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끝없이 변화하는 요지경처럼 처음에는 북극의 빙하 같은 냉소가, 그다음은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그 아래에는 극한의 쾌락과 심연의 슬픔이 겹을 이루며 파란만장한 삶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그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의 끝을 경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네가 가야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로군."
 
- "가야가 선택한 여자가 누군지 보고 싶었다. 일곱 번째 아이의 어미가 누군지 보고 싶었어."
마지막 책의 본래 자리를 못 찾았는지 벨몽은 책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가야 어미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뭐라고 할까. 뭉클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 감정은 오랜만이었어. 피라는 게 유전자만 든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지. 저 아이에게도 그런 게 있는지 궁금했다."
 
- "미래를 본다는 건 강물에 흩어진 책을 모으는 것과 흡사한 일이야. 어떤 부분은 휩쓸려 가고, 어떤 부분은 번져서 읽을 수가 없지. 중요한 건 클라이맥스를 찾았다고 섣불리 결말을 예상했다간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거야. 질량보존의 법칙과 비슷한 거지. 한번 발을 헛디디면 그 아래는 상상 이상의 심연이 있거든." 
"가야 어머니가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내버려 뒀다는 거냐?"

"불행히도 정해진 운명이란 존재한다. 제아무리 뽑아 버리려 해도 뽑을 수 없는 질긴 뿌리 같은 거지."
 
- "우리는 그 운명을 미리 알고 이익이 생기는 곳에 투자하는 것뿐이야. 그것이 우리가 미래를 대하는 룰이고."
벨몽은 자갈처럼 단단했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이 우주가 탄생할 때 결정된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 "그 아이는 궁극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건 누구의 의도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저 아이의 운명인 거야."
“헛소리 마! 그건 네놈들이 만든 운명이야. 너희를 위해 만든 운명이라고!"
엘리스가 울부짖었지만 벨몽은 요지부동이었다.
"받아들여라.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너희는 우리를 괴물이라고 부르겠지만 우리는 너희를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는 지배를 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건 바뀌지 않아."

- 벨몽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의 물건을 떠올리듯 허공을 응시했다.
"사이먼... 자네는 인간의 목숨 값이 얼마라고 생각하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 "나에게 인간의 목숨은 10달러다."
벨몽은 심장이 위치한 자리를 앙상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천 년도 더 된 얘기 같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호크실드의 후계자로 선택됐을 때 일이다. 나는 호크실드 가문이 운영하는 한 무기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어. 한창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절이라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내가 배치받은 부서는 전략기획실이었어. 말은 그럴듯하지만 무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내서 대주는 곳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스와 함께 출장을 가게 됐어. 보스 이름이... 이젠 늙어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이었어. 정확히 말하면 중국과 몽골의 접경 지역이었지. 당시 중국은 한창 일본과 전쟁 중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선과는 한참 떨어진 초원 지역이었지. 우리는 미 정보국 요원 한 명과 동행했는데 거기서 할하족이라는 몽골인을 만났어. 첫인상에 할하족은 양을 키우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었고 군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 정보국 요원은 그들과 협상을 벌였어. 우리의 목적은 단순했지. 할하족을 무장시켜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우리는 밀수꾼들을 이용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무기를 공급했고 할하족은 그 무기로 일본군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기를 싣고 인도 국경을 넘어 할하족의 본거지에 도착한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어. 그건 산더미처럼 쌓인 사람의 코였어. 수천 개의 코가 초원의 풀밭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썩고 있는 거야.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역겨운 냄새를... 나는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하고 말았어. 알고 보니 그 코는 할하족이 모아 온 일본군의 코더군. 할하족은 용병이었어. 일본군을 한 명 죽일 때마다 미화로 10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죽일 때마다 증거가 필요했고 할하족은 죽인 일본군의 코를 베어서 가져온 거야. 어떤 사람은 양가죽으로 된 가방 가득 코를 담아서 정보국 요원 앞에 쏟았지. 그러면 요원은 숫자를 세서 돈으로 바꿔 줬어. 할하족은 그 돈으로 함께 도착한 미군 피엑스 트럭에서 물건을 샀어. 분유, 밀가루, 옥수수, 초콜릿 따위였지. 그걸 들고 천연덕스럽게 자기 천막으로 가서는 가족들과 오붓하게 식사를 했어. 하루종일 양을 치다 온 것처럼 순박한 얼굴로 말이야.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명쾌해졌어. 다이아몬드로 된 총알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지.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던 거야. 사람을 죽인 대가로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음식을 사서 주린 배를 채우는 것. 거기에는 일말의 가책이나 인간에 대한 고뇌 따윈 없었어. 그저 주린 배와 음식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을 뿐이야." 

- "로드니, 뜨거운 물을 가져와라."
벨몽은 편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가르쳐 준 트릭인지도 몰랐다. 로드니가 끓는 물이 든 커피포트를 가져오자 벨몽이 편지에 물을 부었다. 잠시 후 녹색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죽이지 않는다. 너는 네가 가장 하찮게 여겼던 것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 행복에 관한 라마 J.의 생각을 제자들이 정리한 것으로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백악관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오랜만에 첫 장을 펼쳤다.
[불빛을 찾으셨습니까?]
으뜸의 친필 사인과 함께 적혀 있던 구절이었다.

"불빛이라."

- "라마께선 정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후보께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짧은 식견이긴 하지만... 저는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신뢰." 
그러자 라마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정치란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은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으뜸이 그 옆에 앉아 있던 학생에게 물었다.
"욕망의 분배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욕망을 어떻게 공평하게 나누느냐. 그게 정치 아닐까요?"

 

- "저는 라마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으뜸은 쉼표를 찍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란 가장 어두운 밤에 희망의 불빛을 찾는 것입니다. 그 불빛이 제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거기에 빛이 있다면 사람들은 추운 밤이라도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 책을 덮으며 대통령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랜 꿈이던 미국 대통령이 됐고 지지율 4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봉착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 합의를 이끌어 냈고 국방비를 삭감하면서도 민생과 직결되는 복지 예산은 현행대로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악마 개구리와 협상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선거 자금줄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론을 움직이는 많은 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의 제안을 거부하는 건 선거에서의 패배를 의미했다. 이것이 대통령이 된 후 실제로 겪게 된 현실이었다.

- 만약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면 중국의 기세가 꺾일 건분명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미국과 중국의 관계 경색은 불가피했다. 그것은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패배를 용인 못 한 중국이 또 다른 함대를 파견할 경우 미일 군사 협정에 따라 미국이 참전하게 될 수도 있었다. 사태가 악화된다면 악마 개구리들은 다음 단계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동북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전쟁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맥주를 두고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 "하지만 라마, 이놈은 우리를 배신하고 라마를..."
"부탁이다. 밍마를 비난하지 마라." 
롭상은 어쩔 수 없이 멱살을 놓고 물러섰다. 으뜸의 곁을 지킨 지난 세월 동안 한 번도 흔들림이 없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평생 부처의 길을 찾기 위해 수행을 했다. 명상을 하고 가르침을 얻고 삶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면 한없이 부족함을 느꼈단다. 그리고 다음 날에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수행했지만 단 한 번도 마음이 채워진 적이 없었어. 그런데 오늘 네가 부족함을 채워 주었단다. 내 손을 잡아라." 

- "너희는 꼭 너희 자신이 되어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 자신이 되어야 해. 그게 부처의 길이다. 그게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 나는 오늘 밍마 덕분에 비로소 내가 되었다. 나의 말과 나의 고뇌와 나의 행동이 이 자리에서 하나가 되었다." 
 
- 라마의 죽음이 전해지자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통곡의 물결로 넘쳐났다. 라마가 머물던 포탈라궁에서는 전통에 따라 종을 구백구십구 번 울렸고 모든 승려들은 흰색 승복을 입었다. 티베트 전역의 라마교 사찰에서는 라마의 입적을 기리는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신도들은 전통 스카프인 카딱을 머리에 쓰고 사찰을 찾았다. 그러나 엄숙한 애도 행렬이 폭도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라마의 암살 시도 후 폭발했던 시위는 중국 정부가 급파한 군병력과의 몸싸움 도중 대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극에 달했다. 그러나 사지에서 돌아온 라마가 시위 자제 성명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라마가 국경을 넘어 라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순간이나마 환희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줄을 타듯 위태로운 평화였다. 부랑산을 넘던 라마가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정부의 독살설이 순식간에 퍼졌고 슬픔은 또다시 분노로 돌변했다. 포탈라궁과 라싸 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됐고 애도 행렬은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라마의 죽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고 시위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 "로드니, 십년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요?"
미셸이었다. 미셸이 다시 예언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셸의 목소리가 가야를 닮아 있었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날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마치 가야가 무덤에서 살아난 것처럼 미셸이 서로 다른 빛깔의 눈으로 로드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상황에서도 특유의 평온함을 유지하던 로드니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는 십년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꼭 써야만 했어요. 우린 제대로 된 이별 인사도 못 했으니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쓸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 방법을 택했어요. 이건 십년 후 당신과 지금 나와의 대화예요. 세 가지 질문을 받겠어요. 각각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을 거예요. 자, 그럼 시작해요. 엘리스, 첫 번째 질문이 뭐죠?] 
십년 전 가야가 엘리스에게 묻고 있었다. 엘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운명은 정말 바꿀 수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우리들은 뭔가요?"
질문을 하고 엘리스는 두 번째 장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녹색 대답이 나타났다.

- [운명은 바꿀 수 있어요. 벨몽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운명이란 뽑을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박힌 거대한 뿌리라고. 그 뿌리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바뀌면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당신이 바뀌면 돼요.]

- 점점 희미해지던 글씨는 이윽고 사라졌다. 마치 이별 인사를 마친 가야가 멀어지듯, 엘리스는 글씨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편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제껏 그녀를 괴롭히던 과거의 기억이 가야의 글과 함께 사라진 듯이 편안함을 느꼈다. 엘리스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 사람들은 그를 '불길한 백정'이라고 불렀다.
그가 뱉은 기분 나쁜 예언이 예외 없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엔리케가 톱날에 손가락이 잘릴 것도, 이리나의 아들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킬 것도 여지없이 맞혔다. 더욱 불쾌한 점은 그의 예언이 늘 불길한 것뿐이라는 점이다.

- 그의 이름은 '신라'였지만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불길한 백정'으로 통했다. 올해 갓 스무 살이 된 신라는 뉴저지에 있는 정육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도살된 소가 들어오면 부위별로 나누는 부서였다. 취직한 지 석 달밖에 안 됐지만 그는 베테랑 못지않게 능숙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마치 전생부터 억겁을 이어온 천직처럼.

- 그럴 만도 했다. 신라의 눈동자는 일반적인 색깔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오드 아이였다. 오른쪽 눈동자는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이었고 왼쪽은 흑요석 같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양쪽 눈에 천국과 지옥을 하나씩 담고 있는 것 같았다..
 
- 공장 로비에는 지팡이를 든 노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은발의 신사는 고급스러운 회색 더플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에 중산모를 쓰고 있었다. 실루엣만으로는 조금 전 영국에서 도착한 귀족 같은 인상이었다. 신라를 본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짓자 정육 공장 로비가 순식간에 윈저성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정시에 왔군."
신라가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는 노신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역시 제가 올 걸 알고 계셨군요.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로드니라고 합니다."

- "모자 빼곤 봤던 그대로네."
"비전에선 제가 모자를 안 썼나 보죠?"
"검은색이 아니라 갈색이었어."

- "준비는 되셨나요?"
이번엔 신라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평생, 이 순간만 기다렸어."

- "테스트 방식은 간단합니다."
로드니가 지팡이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제거하라."
신라가 선수를 쳤다.

- "최종 생존자는 그분들과 함께 세상을 움직이게 될 겁니다."

신라는 낯선 생물을 대하듯 총을 바라봤다.
"위대한 도시를 만들 때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로드니가 넌지시 물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데미스토클레스가 한 말이야. 세상을 함께 움직일지 이용만 할진 두고 봐야지."
신라가 총을 집으며 말했다. 로드니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당신의 비전이 보여 주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면 상대를 만나게 될 겁니다."

- "첫인사 치고 상당히 과격한데, 형제."
신라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네온사인 빛 속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드러나는 그 얼굴은 놀랍게도 신라와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경을 낀 것과 덥수룩한 헤어스타일만 제외하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생김새였다. 심지어 에메랄드 색과 검은색 오드 아이까지 빼다 박은 듯 같았다.
  
- "난 이 장면을 수도 없이 봤어. 삭막한 콘크리트 옥상, 기름 냄새로 가득한 대기, 그리고 너의 떨리는 총구."
신라가 천천히 주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마치 마지막으로 이승의 공기를 가슴에 품듯.
"너도 이 장면을 꿈속에서 봤겠지?"
"닥쳐! 이 게임은 내가 이겼어!"
상대의 뺨에 한 줄기의 땀이 흐르고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
"네가 본 마지막이 뭔진 모르겠지만..."
신라가 소리 없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본 마지막은 이거야!"

- 한참을 망설이던 붓끝이 이윽고 점을 찍었다. 비록 작은 점이었지만 그림 속 소년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생기가 넘쳤다. 완성이었지만 선한 눈매의 화가는 쉽사리 붓을 뗄 수 없었다. 석 달 넘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에는 여러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노아야. 꼭 살아야 해..."
나지막이 읊조리고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붓을 뗐다. 붓을 내려놓고는 두 발짝 물러나 자기 작품을 바라봤다.
그녀가 방금 끝낸 그림은 한 아이의 초상화였다. 열 살 남짓한 소년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맨발로 잔디밭에 서 있었다. 마치 예수가 갈릴리 호수 위를 걷듯 환희에 찬 얼굴로. 너머에는 소년이 타던 휠체어가 홀로 세월 속에 벌겋게 버려져 있었다. 엘리스는 찬장 깊숙이 숨겨뒀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이것으로 스물일곱 번째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 자기 작품을 만족스럽게 감상하는 엘리스는 더 이상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체형을 지닌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 주목하는 저명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가야의 예언대로.

- 뉴욕에만 전문 초상화가가 백여 명 남짓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엘리스는 특별했다. 미술계에선 그녀를 '신의 붓'이라고 불렀다. 엘리스가 그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독특한 사연이 있었다. 

- 미셸은 서늘한 알몸을 이끌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는 캔맥주 몇 개와 반쯤 남은 생수가 전쟁 통에 버려진 고아처럼 뒹굴고 있었다. 생수통을 부술 듯 비우고 나자 정신이 좀 들었다. 미셸은 그제야 침대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보는 남자는 알몸을 이불로 둘둘 만 채 뒤척이고 있었다. 
"젠장."
미셸은 그제야 지난밤 일이 생각났다.

- 남자는 가족과 함께 휴가를 온 유부남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30대 직장인이었다. 호텔 로비에 있으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남자였다. 그를 유혹한 이유는 단순히 질투심 때문이었다. 남자는 또래의 아내와 다섯 살가량의 딸과 동행했는데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대신 가방을 들어주는 남편을 가진 부인,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 주는 아버지. 그런 일상적인 남편과 자상한 아버지를 둔 부인과 딸이 부수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 늦은 밤, 부인과 아이를 호텔 방에 재운 채 홀로 스카이라운지에 온 남자는 미셸의 유혹에 넘어갔다. 성실하고 정직한 남편이었지만 미셸의 매력을 뿌리칠 순 없었다. 그만큼 미셸은 뇌쇄적이었다. 막 서른이 된 미셸은 수십만 군중 속에서도 독보적으로 빛을 발하는 미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와인 잔보다 작은 얼굴은 동서양의 미를 교묘히 응축해 놓은 인조 보석처럼 아름다웠고 조각 같은 몸매는 남자들의 시선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신비로운 오드 아이까지.

- 미셸은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오드 아이였다. 오른쪽 눈동자는 블랙홀처럼 검은색이었고 왼쪽 눈동자는 한여름 낮의 숲 속같이 에메랄드빛이었다. 단순히 색깔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겐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검은색 오른쪽 눈은 현재를, 에메랄드빛 왼쪽 눈은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를 기억해 내는 것과 흡사했다. 일종의 기시감 같은 것이었는데 기억을 더듬듯 거슬러 올라가면 미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치 뇌 속에 태어날 때부터 인생 전체가 저장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것처럼.

- '징검다리 5..., 징검다리 10..., 징검다리 15...'
그녀만의 주문이었다. 미셸은 마음속으로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의 미래가 나타날 때까지 기억 속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이윽고 미셸이 눈을 떴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해라. 미셸, 이게 네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엘리스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반항심으로 가득한 미셸도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너는 궁극의 아이다."
운명의 강에 발을 내딛듯 힘겹게 뱉은 한마디였다.

- "오래전이고 무의식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기억 못 하겠지만 네가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궁극의 아이이기 때문이야."
엘리스는 잠시 쉼표를 찍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궁극의 아이가 널 죽이고 있어."

- 미셸은 벽면으로 다가갔다. 사진은 모두 다섯 장이었는데 연대순으로 배열했는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실제 인물 사진이 아니었다. 초상화를 찍은 것이었는데 훌륭한 유럽 가문의 자제를 그린 것이었다. 10대 소년으로 실크 블라우스에 금장 단추가 달린 자주색 비로드 재킷을 입고한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지구본을 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훌륭한 화가의 솜씨로 사진처럼 또렷이 인상착의를 알아볼 수 있었다. 

- 두 번째는 실제 사진이었다. 백 년은 된 것처럼 누렇게 변색한 흑백사진이었는데 삭발하고 불교 승려복을 입은 동양인이었다.

- 세 번째는 여권 사진처럼 정장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 상반신 사진이었다. 역시 흑백사진이었는데 새하얀 머리칼에 하얀 눈썹을 한 백인 남자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 마지막으로 미셸의 아버지이자 엘리스의 남편인 신가야와 마셸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 "쌍둥이처럼 똑같지."
엘리스의 말대로였다. 사진 속 인물들은 한 사람이 타임머신을 이용해 여러 시대에 등장한 것처럼 똑같았다. 그리고 그 인물은 미셸과 이어져 있었다.

- "궁극의 아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어. 정확히 언제부턴진 알 수 없지만 최초의 기록은 고대 이집트였지. 기원전 1500년."
엘리스는 스크랩된 기사의 사진을 가리켰다. 고대 이집트 의상을 입은 한 소년의 흉상이었다. 조각상은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두 눈에 각각 다른 색상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하나는 초록색 에메랄드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 사파이어였다. 미셸의 오드 아이처럼. 그리고 사진 아래 다음과 같은 주석이 달려있었다.
[알쿠른산(山) 왕가의 계곡 투트모세 3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소년 흉상]

- "이들은 같은 시간대 지구상에 단 한 명만 존재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하면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지구의 다른 지역, 다른 인종으로 말이야." 
엘리스가 사진 속 인물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때문에 고대부터 권력자들은 궁극의 아이를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이들의 능력을 손에 넣으면 미래를 지배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많은 궁극의 아이가 희생당했단다. 아빠처럼." 사진 속의 가야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 따윈 까맣게 잊은 듯.

- 소라지가 머물렀던 사찰의 이름은 '메바르 라캉 곰빠'였다. 힌디어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뜻으로 히말라야 최고봉 중 하나인 안나푸르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이 위치한 묵티나트는 해발 3,71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교 마을이자 불교 신자들과 힌두교도들이 죽기 전 꼭 방문하고 싶어 하는 성지이다.  

- "당신이 '쿠마리'라고 하는군요."
"쿠마리?"
"이 나라를 지키고 불자들을 보호하는, 살아 있는 신이오."

 

- 그는 샌들을 벗고 등산화를 챙기더니 사찰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셸은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묵묵히 뒤따랐다. 온통 자갈과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산은 삭막하기에 그지없었다. 고지대라 산소가 희박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방탕한 생활을 해 온 덕에 미셸은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반면 백발이 성성한 주지승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웠다. 
"네팔에 '말라'라는 왕조가 있소. 오백 년 넘게 네팔을 지배했던 왕조요. 그런데 말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야 프라카쉬 왕에 관한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소."

- "자야 왕은 평소 주사위 놀이를 즐겼는데 어느 날 밤 붉은 뱀을 동반한 미모의 여성이 왕을 찾아왔소. 여성은 바로 왕실을 보호해 주는 여신 '탈레주(Taleju)'였소. 자야 왕은 여신 탈레주와 이야기하는 게 너무도 즐거웠소. 그래서 왕은 매일 밤 여신과 처소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소. 그런데 탈레주는 왕에게 한 가지 경고를 했소. 자신이 왕과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걸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고 말이오. 왕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소. 그러던 어느 날이었소. 왕이 매일 밤 처소에 들어가면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자 왕비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소. 궁금증은 점차 의심으로 변했고 결국 왕비는 몰래 왕의 처소로 숨어들었지. 그런데 놀랍게도 밤이 되자 남편의 처소에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들어오는 게 아니겠소. 왕은 왕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밤이 새도록 여인과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았소. 질투심에 불탄 왕비는 결국 인기척을 냈고 여신 탈레주와 눈이 마주쳤소. 비밀이 탄로 난 것을 안 탈레주는 노여움이 극에 달해 더 이상 왕과 말라 왕국을 지켜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소. 당황한 왕은 무릎을 꿇고 몇 날 며칠 동안 용서를 구했지. 그러자 탈레주가 말했소. 몇 년 후 자신이 네팔의 민족 중 하나인 네와르족 중에서 샤카(Shaka) 성을 가진 소녀로 태어날 테니 그 아이를 찾아서 분신처럼 곁에 두고 극진히 섬기라고 했소. 그 후 왕은 샤카 성을 가진 소녀 중 탈레주의 분신을 찾아 '쿠마리'라 칭하고 살아 있는 여신으로 받들었소. 이것이 쿠마리에 관한 전설이오."

- "쿠마리 선발 과정은 매우 엄격하오. 샤카 집안에서 초경을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녀로, 병력은 물론 몸에 상처나 반점 하나 없어야 하며, 치아도 가지런해야 하고,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흑단처럼 검어야 하오. 신체는 아름다워야 하며, 태어난 날과 시각이 국왕과의 합이 좋은 시간대여야 하오. 이렇게 몇 명의 소녀가 걸러지면 여러 개가 놓인 물건 중 이전 쿠마리의 물건을 찾아내야 하고, 짐승의 머리를 잘라 놓아둔 어두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오. 그날 밤 무서워서 울거나 소리를 내면 쿠마리가 될 수 없소. 이렇게 엄격한 절차를 거쳐 선발된 쿠마리는 화려한 화장과 옷차림을 하고 전 국민의 추앙을 받지만, 소녀의 삶은 서글프기에 그지없다오. 쿠마리로 지내는 동안 땅을 밟아서도 안 되고, 사제들의 허락 없이 물건을 만져서도 안 되며, 가족일지라도 일반인과 대화를 나눠서도 안 되오. 나쁜 것을 봐도 안 되기 때문에 축제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면 사원 밖으로 나올 수도 없소.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초경을 시작하면 쿠마리는 자격이 박탈되오. 그렇게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온 소녀는 쿠마리와 결혼하면 남편이 단명한다는 미신 때문에 평생을 외로움과 멸시에 시달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오." 

- "종교를 빙자한 아동 학대처럼 들리는군요. 그런데 왜 제가 쿠마리라는 거죠? 초경을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리고 여긴 왜 온 거죠?"
미셸이 무덤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자 주지승이 철없는 아이를 나무라듯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메르바 라캉을 거쳐 간 쿠마리 선조들의 무덤이오. 예의를 갖추시오."
그제야 미셸은 무덤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여기군요. 소라지가 묻힌 곳이."
"그렇소. 스승님은 서른이 넘도록 신좌에 계셨던 쿠마리셨소."

 

- "당신은 죽어 가고 있군요. 미셸 양."
"그걸 어떻게..."

- "스승님은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하며 보냈소."
"명상?"
미셸은 어느새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스승님의 명상법은 독특하셨소."
"어떤 점이요?"
"스승님은 언제나 이 사원의 천년 보물을 보시며 명상했소."

 

- "이 사원에는 천 년 동안 꺼지지 않은 불꽃이 있소. 스승님은 항상 그 불꽃을 보며 명상하셨소."
미셸은 직감적으로 불꽃이 단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법당은 가장 큰 중앙 건물이었는데 두 개의 문을 지나야만 했다. 문과 문 사이는 1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지나기 위해선 엄격한 절차가 필요했다. 우선 신발을 벗어야 했다. 양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주지승은 맨발의 미셸을 데리고 법당 옆을 흐르는 108개의 성수로 향했다. 법당 주위에는 빙 둘러 높이 3미터가량의 돌담이 있었는데 담을 따라 삐죽이 수로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로는 모두 108개로 주둥이에서는 안나푸르나의 계곡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성한 법당에 들어가기 전 당신의 번뇌를 씻는 절차요."
주지승은 맨발로 108개의 수로에서 흘러나오는 물들을 일일이 손으로 받아 머리를 씻었다.

- 두 번째 입구는 오래된 황동 문이었는데 커다란 향로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수십 개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부처께 당신의 입장을 알리는 절차요."
주지승은 경건하게 중 하나를 울리고는 법당 안으로 향했다. 미셸도 종을 울리고는 뒤를 따랐다.
 
- 주지승은 조심스럽게 불당 단상 아래 드리워져 있던 붉은 천을 걷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은 보물이라고 하기엔 작고 보잘것없었다. 단상 아래에는 자연 그대로의 자갈들이 깔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 푸른 불꽃이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아마도 사원 아래에서 천연가스가 자갈 틈으로 흘러나오는 모양이었다. 불꽃은 워낙 작고 위태로워서 불면 그대로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불꽃이 천 년간 살아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미셸은 유심히 불꽃을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불꽃은 어딘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얼핏 봤을 땐 푸른색처럼 보였던 불꽃은 시시각각 빛깔이 바뀌었다. 푸른색에서 보라색으로, 곧이어 일렁이는 주홍색으로 변했다. 마치 빛깔로 신호라도 하듯 뭔가를 말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 법당 안은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여 온 정적으로 가득했고 히말라야가 탄생했을 때부터 존재한 불꽃은 자갈 틈에서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셸은 한 번도 명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불꽃을 보고 있자니 주변과 분리된 듯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호흡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꼭 불꽃을 통해 백 년 전 소라지의 감정과 맞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라도 켜듯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뒤이어 손톱만 하던 불꽃이 서서히 커지더니 모닥불만 해지는 것이 아닌가. 지금 미셸은 넓은 대지 위에 불꽃과 단둘이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심장은 천둥처럼 박동하고 천 년을 이어 온 불꽃은 하늘을 불태울 듯 일렁이고 있었다. 
불꽃은 어느새 미셸의 키만큼 거대해졌다. 그러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인디언의 사냥 의식처럼 원시적이고 격정적인 춤이었다.

- 미셸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빛처럼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문너머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누군가의 생생한 기억 세계가 펼쳐졌다.

- 시종이 소라지의 이마에 세 번째 눈을 그려 넣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 여겨지는 세 번째 눈은 매일 아침 치러지는 쿠마리의 화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마 전체를 감싼 붉은 화장 중앙에 검고 동그란 세 번째 눈동자가 자리를 잡았다.
"이제 신도들을 접견할 시간입니다. 쿠마리."
시종 딜루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쉰 살이 넘은 딜루는 늘 자상하고 친절했다. 소라지는 그녀가 모시는 세 번째 쿠마리였다. 소라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딜루가 소라지를 등에 업었다. 쿠마리는 절대 맨발로 땅을 밟아선 안 된다. 나쁜 것을 봐도 안 되고 불경한 음식을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 본래 쿠마리는 생리가 시작되는 순간 은퇴해야만 했다. 피가 보이면 쿠마리로서 능력이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두 명의 쿠마리만이 생리가 시작된 후에도 쿠마리로 남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삼십 년간 쿠마리로 지내다 은퇴한 128대 쿠마리 '룽타'였다. 그녀는 놀라운 예언 능력 덕분에 서른여섯 살까지 쿠마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예언가로 추앙받으며 풍족하게 살았다. 두 번째가 소라지였다. 그녀는 아홉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쿠마리에 올랐고 열일곱 살이 된 지금까지도 쿠마리로 추앙받고 있었다. 
 
- 도장을 찍듯 카말의 손을 잡았다. 신이 난 카말이 두 잔 가득 위스키를 따랐다.
"쿠마리 님의 새롭고 비밀스러운 미래를 위하여!"
두 사람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드디어 제대로 된 일탈 계약서가 작성되는 순간, 갑자기 소라지가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마치 어둠을 장막 삼아 은밀히 기척을 숨기고 있던 밀정을 솎아내려는 듯. 그러나 좁은 방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 그렇지만 소라지는 벽과 천장이 만나는 모퉁이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어둠의 균열 같은 것이 있었다. 그 균열 너머에는 시공간 저편에서 소라지의 기억을 엿보고 있던 미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백 년의 간극을 뚫고 서로를 응시하였다. 눈이 마주친 미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어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을 비춰 주는 마술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그렇게 기적 같은 만남이 백 년의 시간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라지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뒤를 봐!"

- 오른쪽 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오른쪽 길로 발을 디디려고 할 때 둔탁한 무언가가 신라의 뒤통수를 겨누는 것이었다.
"총 내려놔."
미셸이었다. 그녀가 혼란을 틈타 어느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외통수였다. 신라는 어쩔 수 없이 총을 내려놨다. 

"다른 총도."
미셸은 예비용 권총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신라는 종아리에 숨겨둔 총도 바닥에 던졌다. 미셸은 총을 줍더니 들고 있던 나무 막대를 던져 버리고 대신 겨눴다.
"미래를 바꾼 거야. 그렇지?"
신라가 돌아서려 하자 미셸이 더욱 바짝 총구를 드밀었다.

- "그게 가능하군. 생각보다 쓸 만한데. 금수저."
"넌 누구냐? 왜 날 죽이려는 거지?"
"내가 누구냐... 나도 알고 싶군.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피를 나눈 형제라는 거다."
"난 형제 같은 거 없어.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그러자 신라가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돌아섰다.
"말했을 텐데!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라는 미셸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순간 미셸의 얼굴이 하얗게 무너져 내렸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부활한 아버지 가야가 서 있었다.

"형제라기보단... 쌍둥이가 적절하려나."

- "축복으로 여겼겠지. 특별한 줄 알았을 거야. 도박이며 복권이며 흥청망청 능력을 써 댔겠지. 그게 재앙으로 돌아올 줄 모르고"

"뭐?!"
"나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솔직히 사 본 적도 있어. 상금이 무려 700만 불이었지.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 찢어 버렸어. 왜인지 알아?"
"무슨 헛소리야?"
미셸은 소리쳤지만 신라는 멈추지 않았다.
"더 큰 걸 봐 버렸거든. 그걸 위해 때를 기다려야만 했어. 그리고 그때가 왔다."
순식간에 신라가 총을 가로채고는 미셸을 자빠뜨렸다. 어느새 전세가 역전되어 신라는 미셸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 "난 널 만난 적도 없는데 왜 죽이려는 거지?"
"네가 말했지. 한 세대에 궁극의 아이는 한 명뿐이라고. 그게 우리 운명이야. 그리고 내 이름은 신라다."

- 신라는 아버지 가야가 부활한 것처럼 똑 닮아 있었다. 물론 궁극의 아이들은 모두 쌍둥이처럼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종이나 오드 아이의 색이 다르기도 했으며 환경과 살아온 삶이 달라서 다른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 신라는 가야와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눈동자도 에메랄드빛과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헤어스타일까지 가야와 똑같았다. 그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말로 치닫는 느낌이었다. 미셸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다. 태어나기 전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루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아버지가 마법처럼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는데 오늘 놀랍게도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따뜻한 손을 내밀기는커녕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 그는 악마 개구리로부터 지원을 받는 듯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미셸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총과 탄약을 가방에 넣고 엄마가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엘리스가 패닉룸으로 피신할 때 겨우 챙긴 벽에 붙어 있던 다섯 장의 사진이었다.

 

- 미셸은 다시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첫 번째는 금장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소년의 초상화. 두 번째는 파리야 소라지. 세 번째는 푸른 눈의 히피 남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신가야였다. 사진 속에선 특별한 걸 찾을 수 없었다. 미셸은 무심코 첫 번째 사진의 뒷면을 봤다.
[지구본을 든 소년,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작, 1564년 프랑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그림의 제목이었다. 미셸은 다른 사진들의 뒷면도 살폈다.
[파리야 소라지, 1896년 네팔, 1963년 사망]
[존 마이어스, 1963년 로스앤젤레스, 1973년 실종]
 
-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어요."
직원이 그림에서 소년을 가리켰다.
"소년의 이름은 장 피에르 드 리슐리외. 17세기 프랑스 최고 권력자였던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의 아들이죠."

"이름 한번 기네요."

- "혹시 <삼총사>라는 영화 알아요?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들어본 적 있어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악당이 바로 리슐리외 추기경이에요. 실존 인물이죠."
"그게 이 그림이랑 무슨 상관이죠?"
미셸이 따지듯 묻자 담당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슐리외는 성직자였어요. 고로 결혼을 하지 않았죠. 애인은 있었지만, 평생 자식을 갖지 않았어요. 야사에는 왕비 '안 도트리슈'와 불륜을 저질렀고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증명된 건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리슐리외는 저 소년을 양자로 입양해요. 소년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어요. 이탈리아 여행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죽어 가던 비렁뱅이의 아들을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당시 프랑스를 섭정했던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숨겨진 자식을 입양했다는 설도 있어요. 사실 그런 것보다 더 재밌는 건 저 소년이 리슐리외의 목숨을 구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세 번이나." 

 

- "리슐리외는 향수를 상당히 즐겼는데 그중에도 머스크 향을 병적으로 좋아했다고 해요. 그가 나타나면 100미터 밖에서도 이 향이 날 정도였다니 말 다했죠. 그런데 그날따라 양아들 장 피에르카 향수를 절대 뿌려선 안 된다고 말리는 거예요. 이상했던 리슐리외는 그날만은 향수를 뿌리지 않고 궁으로 향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사무실 복도에 자객이 숨어 있었던 거예요. 자객은 리슐리외의 향수를 단서로 암살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향수를 안 뿌린 덕에 복도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어요. 대체 장 피에르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미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창 피에르는 16세기 궁극의 아이였다. 잠깐이지만 몇백 년의 틈을 뚫고 장 피에르와 교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궁극의 아이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로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인가.

-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거죠?"
의심스러운 눈으로 붙는 미셸을 보며 직원은 기묘한 미소를 지였다.
"제가 이 미술관에서 근무한지 이십오 년이에요. 초상화 전시실에서 십 년을 있었죠. 그런데 그림 속 주인공이 걸어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 그것은 능력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는데 앞으로 벌어지게 될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진 플래시가 터지듯 순식간에 지나가서 모든 걸 정확히 기억할 순 없었다. 미셸은 깨진 파편조각을 모으듯 조심스럽게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현상액 속에서 사진이 모습을 드러내듯 하나씩 수면 위로 올랐다. 

- 두 번째 장면은 복슬복슬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한 소녀가 열쇠를 든 채 미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문지기처럼 놋쇠로 된 열쇠를 들고 말했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이어 벼락처럼 문이 닫혔다.
세 번째는 초상화가 서서히 불타는 장면이었다. 초상화의 주인은 미셸이었다. 연필로 그린 미셸의 얼굴이 타들어 가더니 결국 재로 변했다.
빵빵. 경적 소리에 미셸은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신호는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혼자 도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인내심 없는 자동차들이 연신 경적을 울려 대며 지나갔다.

- 반대편에 도착한 미셸은 아까의 장면을 되뇌었다. 그중 첫 번째 장면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미셸의 기억 속에 들어와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미셸은 단박에 메시지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 1405. 낡은 문 위에 황동으로 적힌 숫자. 미셸은 권총을 꺼내 탄창을 확인했다. 이곳은 신라의 함정이 분명했다. 어떤 부비트랩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미셸은 심호흡하고 열쇠를 꽂았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스튜디오형 집이 나타났다.
40제곱미터 정도 크기의 집에는 가구와 가재도구들이 갖춰져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것처럼 사람의 향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미셸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가재도구로 미루어볼 때 집주인은 여자였다. 그것도 20대의 여성이었다.

- 하지만 모든 게 한 세대 뒤처져 있었다. 마치 오래전 집주인이 모든 걸 버리고 종적을 감춘 듯, 한 세대 전에 시간이 멈춰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유리창 너머로 격리된 현재가 스크린에 투영된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왜 날 여기로 유인한 거냐?"
미셸은 권총을 꼭 쥔 채 방안 여기저기서 단서를 찾다가 창가책상 위에 있던 뭔가를 보았다. 척 보기에도 의도적으로 놓고 간 게 느껴지는 하얀 사각 물체. 초상화였다. 

- 세 번째 미래 기억에서 봤던 바로 그 초상화였다. 연필로 스케치하듯 그린 것이었는데 훌륭한 솜씨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초상화의 모델은 미셸이 아니었다. 모델은 짧은 머리에 장신구 따윈 하나도 달고 있지 않았다. 미셸은 이제껏 한 번도 머리를 짧게 자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입술과 귀에 여러 개의 피어싱 링을 달고 있었다. 그 그림 아래 화가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엘리스

- 그렇다면 그림 속 모델은.
"아빠?!"
신라가 유인한 장소는 젊은 시절의 엄마와 아빠가 살았던 집이었다.
   
- "미래에 끌려다녀선 안 돼, 꼬맹아. 미래는 네 손안에 있어."

소라지의 어깨에선 파릇한 풀 냄새가 났다. 마치 숲 한가운데 누워 있는 것처럼. 미셸은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상상하며 의식을 잃었다.

- 소라지는 사람들에게 '신의 붓'이라 불리고 있었다. 말 대신 글로 예언하기 때문이었다. 모두 신분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신비롭게 느껴졌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날도 카말의 저택에는 '신의 붓'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많은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 비단잉어가 뛰노는 연못을 지나 진귀한 나무들이 장식된 정원을 지나면 커다란 2층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본래 시청으로 사용됐던 건물이었는데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버려진 것을 카말이 매입하여 개조한 것이다. 외형은 네팔 전통 가옥인 가르(Ghar)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내부는 동서양이 적절히 섞인 화려한 인테리어로 장식되어 있었다. 입구에 설치된 중국풍 사자 석상을 지나면 프랑스제 샹들리에가 달린 넓은 거실이 나타났고 그 아래 양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시장과 경찰서장을 비롯해 간다크주 최대 농장주와 은행장 등 네팔의 유력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심지어 영국군 사령관까지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들은 서양 술과 수입 식재료로 조리한 고급 요리를 먹고 아편을 피우며 파티를 즐겼다. 

- 카말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으면 깨진 거울에 사물이 일그러지는 듯 왜곡되는 것 같았다.
"명심할 건, 절대 얼굴을 봐도, 먼저 질문해서도 안 됩니다."

카말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그분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자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 별관 내부는 허름한 겉모습과 달리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맹목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진귀한 물건을 모아 놓은 것처럼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축음기에선 최신 파리 유행 음악이 흘러나왔고 벽에는 버스터 키튼의 무성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여러 개의 오르골이 도미노처럼 탁자에 진열되어 있었고 유럽 각 도시를 대표하는 스노볼이 카펫 위를 뒹굴고 있었다. 파리에서 공수된 최신 원피스와 하이힐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먹다 남은 생일 케이크에 곰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 "이틀이 아니라 두 달이 남았어도 막을 수 없어요. 왜냐면 지금이 나라는 네팔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나라가 네팔인의 것이 아니라니."
"이 나라는 이제 네팔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국인의 것입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놈들이 왕을 갈겠다고 하면 왕은 바뀔 겁니다. 놈들이 왕을 없애겠다고 하면 왕은 죽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미리 알려 준다고 해도 바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 "미래를 보면 뭘 해. 왕 하나 구할 수도 없는데...!"

소라지가 맥없이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처절한 울음소리 너머로 카말의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 "자네는 운명을 믿나?"
갑자기 에곤이 선문답을 시작했다.
"운명을 믿기에 서른은 너무 젊은 거 아닌가요?"
"아버지께선 술을 드실 때면 항상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무릎에 나를 앉히고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 그리고 언제나 이 질문부터 하셨지. 넌 운명을 믿니? 에곤." 
에곤은 추억 속 오솔길을 걷듯 유물 사이를 걷고 있었다.

- "아버지가 소라지를 처음 만난 건 제1차 세계대전 전쟁터 한복판이었어. 그것도 지옥보다 끔찍했다는 베르됭 전투에서였지. 아버지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군 소속으로 독일에 파병되어 작전 중이었어. 소속 부대는 '충격 보병'이라는 특수부대였지. 독일어로 '슈토스트루페(Stoßtruppe)'. 요즘으로 치면 네이비실 같은 거야. 적진 후방 깊숙이 침투해 요원을 암살하거나 탄약고를 폭파하는 특수전 담당 부대였어. 키가 190이 넘던 아버지는 체격이 건장하다는 이유로 뽑히셨지. 문제는 임무가 워낙 위험해서 살아 돌아올 확률이 지극히 낮았다는 거야. 배치받고 석 달을 넘긴 대원이 없었으니까. 당시 열아홉 살이던 아버지의 목숨도 풍전등화 같았지. 그날도 어김없이 임무가 떨어졌어. 프랑스 쪽의 후방 보급로인 '성스러운 길(La Voie sacrée)'에 매복해 있다가 보급부대를 공격하는 것이었지. 문제는 프랑스군이 유일한 보급로인 '성스러운 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는 거야."

- '이렇게 죽느니 프랑스 놈 몇이라도 죽이고 죽자.'
타이머는 마지막 칠 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라크가 눈을 질끈 감고 타이머에 맞춰 프랑스군을 향해 폭탄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Ne dobdel(던지지 마)!!"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작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작은 귀엣말은 고요한 어둠을 타고 정확히 귓가에 전달됐다. 바라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고국 헝가리어였다.
"Ne dobd el! túlélheted(던지지 마. 살 수 있어.)."
또다시 누군가가 말을 했다. 바라크는 목소리가 들린 어둠을 응시했다. 그러자 어둠 저편 수풀 속에 숨은 누군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타이머는 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결정할 순간이었다. 바라크는 폭탄을 고쳐 잡고 던지려던 순간 누군가의 귀엣말이 작은 희망처럼 손을 잡았다. 

-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폭탄이 터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상자 안으로 물이 스며든 것이다. 만약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고 던졌다면 헛되이 목숨만 날릴 뻔했다.
바라크는 누군가가 있던 어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인기척은 사라지고 바람만이 수풀을 스치고 있었다.

-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서서히 시각이 돌아오자, 그 얼굴이 선명해졌다. 놀랍게도 동양 여인이었다. 그녀는 20대 초반이었는데 오랫동안 끼니를 거른 듯 야위어 있었다. 색깔이 다른 독특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헝겊으로 싼 작은 상자를 가보라도 되는 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여인이 장작을 모닥불에 던지자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불꽃이 일었다. 그들이 있던 곳은 허름한 외양간이었다. 포격에 한쪽 지붕이 무너졌지만, 이슬은 피할 수 있었다. 

- "폭탄이 안 터질 걸 어떻게 알았죠?"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기에 답이 있어요."
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동공이 모닥불에 반짝이고 있었다.
"내 고향 말을 하던데 어디서 배웠죠?"
여인은 아까와는 달리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에게서요."

- "당신은 운명을 믿나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다음엔 대답할 수 있을 거예요."
여인이 장작 하나를 집어 모닥불에 던졌다. 불꽃은 수혈을 받은 듯 타올랐다.
"당신은 날 구하기 위해 신이 보내 준 것 같았어요. 왜 날 구해준 거죠?"
그러자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왜냐면 당신이 내 임종을 지켜 줄 사람이니까요."

- "처음엔 전쟁 통에 정신 줄을 놓은 여자구나 생각하셨대. 거지꼴을 한 동양 여자가 전쟁터 한복판에서 운명이며 임종 같은 소리를 하니까. 아버지는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하셨지. 그러자 소라지가 이렇게 말했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살아서 날 다시 만날 테니. 그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요. 이 말을 남기고 소라지는 홀연히 사라졌어. 연기처럼 말이야. 그녀 말대로 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으셨지. 총알을 무려 다섯 발이나 맞고서도 말이야.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미국으로 건너갔어. 설계도 한 장만 들고, 새로운 기관총 설계도였어. 아버지는 뛰어난 기계 설계자였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당시 소총의 문제점을 몸소 깨달은 아버지는 획기적인 총을 설계하셨지. 바로 개인용 기관단총이었어. 그 기관단총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사용하게 되지. 바로 톰슨 기관단총이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200만 정이나 생산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관단총이야. 덕분에 아버지는 큰돈을 버셨고 그 후로도 군수산업에 종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셨어. 새로운 고향 미국에서 승승장구하게 된 거야. 그런데 그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네팔의 여승이었어. 비록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알아봤지. 베르됭에서 아버지를 구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던 거야." 

- "자넨 궁극의 아이의 운명에 관해 알고 있나?"
"죽음에 관한 거라면 알고 있어요."
미셸이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에곤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 관한 운명 말이야."

 

- 에곤은 <지구본을 든 소년>에게 다가갔다.
"장 피에르 리슐리외.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해. 왜냐면 저 소년은 원래 보헤미아 지방을 떠돌던 집시였거든. 그런데 리슐리외 추기경이 왜 그런 소년을 양자로 삼았을까. 바로 전쟁 때문이야. 당시 유럽은 가톨릭교를 지지하는 국가와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 사이에 벌어진 종교 전쟁이 한창이었어. '30년 전쟁'이라고 알려졌지. 리슐리외가 추기경이 되었을 당시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어. 전쟁 초기에는 각국이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싸웠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종교보다 영토나 이권을 챙기기 위해 개입하고 있었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었던 거야.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도 스페인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개신교 편에 서서 전쟁 중이었지. 리슐리외는 피폐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려고 했어. 하지만 워낙 많은 나라가 개입된 터라 휴전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전쟁 중재를 위해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을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지방의 한 여관에 묵게 돼. 그리고 거기서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지." 

- 리슐리외가 편지를 받은 건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이었다. 당시 그는 스페인과 새로운 전투를 구상 중이었다. 프랑스군은 여러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지만, 완전히 몰아낼 순 없었다. 오히려 스페인은 나폴리를 탈환하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리슐리외는 치명타를 먹일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슐리외의 책상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줄의 문장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전투를 구상하게 만든 것이다. 리슐리외는 정체불명 조언자의 말대로 라인란트 지역에서 하카펠리타트라고 불리는 핀란드 기병 부대를 써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리슐리외는 편지의 임자를 수소문했고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 "이걸 왜 나한테 보냈지?"

"추기경님이 절 찾아온 이유와 같겠지요."

"내가 널 찾아온 이유가 뭐지?"

"전쟁의 결과를 알고 싶으니까요."

소년은 닳고 닳은 정치인처럼 능수능란했다.

"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페르디난트 국왕도 널 찾고 있다던데, 왜 날 찾아온 거냐? 돈이라면 페르디난트 국왕이 더 많이 줄 수 있을 텐데." 
소년은 한 발짝 다가갔다.
"왜냐면 이기는 쪽에 승부를 걸기 위해서죠."


- "그러나 승리를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거기엔 추기경님의 생사도 걸려 있죠."
"무슨 말이냐?"
"앞으로 세 번의 암살 시도가 있을 겁니다. 그 암살을 피해 살아남으시면 일 년 후 전쟁이 끝날 겁니다. 물론 승자는 프랑스가 될 거고요. 하지만 만약 살아남지 못하시면 전쟁은 앞으로 십 년간 더 계속될 겁니다."
리슐리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소년이 말했다.
"제가 구해 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 그림 속 장 피에르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속을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신비롭고 어두운.

 

- "그것이 어떤 조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리슐리외는 조건을 받아들였지. 그게 장 피에르를 입양한 이유야. 그런데 재밌는 건 리슐리외가 세 번째 암살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거야. 1642년에 스페인의 르루숑 지방을 제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친정했을 때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했지. 병사라고는 하지만 독살이라는 게 정설이야. 덕분에 전쟁은 그 후로도 칠 년간 지속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일부러 권력가를 찾아가다니. 이용당할 걸 뻔히 알면서." 
미셸이 물었다.
"소라지가 왜 전쟁터 한복판에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해. 영국군이 소라지를 납치해서 데려갔거든. 소라지는 카말의 조언을 무시하고 결국 왕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말했지. 하지만 카말의 말대로 영국은 바하두르 장군을 앞잡이 삼아 국왕을 암살했어. 그리고 소라지를 영국으로 보내지. 영국도 궁극의 아이에 관한 소문을 알고 있었던 거야. 영국으로 끌려간 소라지는 사 년간 혹사당하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간신히 탈출해서 돌아오게 되지. 오는 도중 아버지를 만났고, 고향으로 돌아온 소라지는 외부와 모든 인연을 끊고 승려가 돼." 

- 미셸은 그제야 사진 속 소라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염병할 인간 새끼들!"
미셸이 사진을 보며 소리쳤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자네는 전쟁이 궁극의 아이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하나?"

 

"내 생각은 좀 달라."

"그럼 뭐란 거죠?"
"내 생각엔 궁극의 아이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는 거야. 사내 아버지 신가야를 보자고, 신가야가 없었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제아무리 911테러의 충격이 컸다고는 해도 전면전을 일으킬 만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까? 보나시 베트남전처럼 전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도 있었을 텐데 밤이야. 중요한 건 정치인들이야.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간다면 귀를 잃을 게 뻔한데,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 전면전을 승인할 수 있었을까. 소라지도 마찬가지야. 소라지를 만나기 전 영국을 배후에서 지원만 할 뿐 직접 참전하진 않았어. 그런데 소라지를 얻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들지."

 

- "궁극의 아이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인류를 본성의 극단까지 몰고 가지. 탐욕과 파괴 본능의 끝판왕이 바로 전쟁이야. 궁극의 아이는 그것을 자극한다. 고로 전쟁이 궁극의 아이를 부르는 게 아니라 궁극의 아이가 전쟁을 부르는 거야. 장 피에르, 소라지, 신가야,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미셸이 소리쳤다.

- 바라크는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붕대가 한 움큼 떨어져 나오자 달빛에 소라지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런 세상에."
바라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소라지의 얼굴은 숯처럼 검게 변해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영겁의 시간 동안 암석 속에 갇혀 있다가 공기를 만난 화석처럼.
"당신 말대로군! 당신의 임종을 정말 내가 보게 되다니."
소라지가 바라크의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를 찾아... 그가 비밀을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요?"
갑작스러운 말에 바라크가 물었다. 소라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빙의된 것처럼 허공을 보며 계속 중얼댔다.
"다섯 개의 조각을 모으면 문이 나타날 거야... 미궁의 문..."

의미심장한 말을 읊조리며 소라지가 품에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케이크 상자만 한 크기의 사각 물체였는데 누런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바라크는 영문도 모른 채 물건을 받아 들었다. 
 
- 에곤은 창밖에 펼쳐진 뉴욕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미셸은 몸에 꽂힌 침을 뽑으려 했다.
"잠시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거야."
에곤이 나지막이 말했다.
"도침시술이라고 동양에서 사용하는 치료법이야. 진통제 따위보단 백배 나을 거야."
미셸은 팔을 살폈다. 정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상쾌해진 기분이었다.

 

-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손은 자석에 끌려가듯 금고로 다가가더니 허공에서 손잡이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고 내부에서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뭔가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왼손은 마임을 하듯 가상의 손잡이를 돌리더니 직각으로 꺾어졌다.
철컥! 둔탁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 손은 정확히 손목 부분에서 절단되어 있었는데 검은 물결무늬가 손 전체에 일렁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 "소라지의 손이에요. 스스로 잘랐던."

"어떻게 알지?"
"그냥 알 수 있어요."
미셸은 잠시 소라지의 손을 바라보다가 도로 금고에 넣었다. 그러곤 왼손을 금고에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 "신가야는 어떤 사람이었지?"
신라의 목소리가 온기를 그리워하는 벽을 타고 메아리처럼 울렸다.
"잘은 모릅니다만 궁극의 아이 중 최고의 능력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수프가 식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어떤 사람이었냐고."
"전 그분에 대해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로드니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거짓이 묻어났다. 신라가 수프를 밀치고 일어났다.

- "어딜 가십니까?"
"신가야 만나러."
로드니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분은 삼십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만들었지?"
"..."

"너희들이 신가야를 보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신라가 로드니를 밀치며 현관으로 향했다.

- 남자 4는 잔뜩 신이 나서 건물에서 가장 은밀한 방으로 데려갔다. 방 앞엔 무장한 경비 둘이 지키고 있었다. 경비들은 남자 4가 나타나자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특수한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놀라운 장비가 나타났다. 방에는 수십 대의 슈퍼컴퓨터가 바둑판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선과 지시등이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인공지능의 두뇌였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처럼 굉장한 혁신을 이루었는지 궁금해 해. 나는 매번 혁신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됐을 때 시작된다고 대답했지. 하지만 사실 전부 개소리야. 귀찮아서 대충 둘러대는 거지. 멍청한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는 거야. TV 광고처럼." 

- "진정한 혁신을 이루는 진짜 방법이 뭔지 알아?"
남자 4가 멈춰 서더니 돌아봤다.
"지겨운 거야. 이 세상 모든 게 진부하고 따분한 거야. 필요도 없는 자수를 뜨는 늙은 할머니처럼. 그래서 다 부숴 버리고 싶은 거야. 진부하고 따분한 세상을. 그게 혁신의 시작이야."
남자 4가 우주의 비밀이라도 알려 준 듯 씩 웃었다.

- "여기가 에스겔과 대화하는 곳이야. 일종의 조종석 같은 거지."

'에스겔'은 남자 4가 개발한 인공지능의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개발됐던 수많은 인공지능을 단숨에 제압하고 세계 인공지능 시장을 점령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다. 인간의 지능을 월등히 능가하는 에스겔은 일반 상용 시장뿐만 아니라 미국 국방성과도 군사용 인공지능 개발을 진행 중이었다. 덕분에 독과점 논란과 군사용 개발에 대한 우려를 일으키고 있었다. 

- "뭐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과거든, 미래든 뭐든."

"미래?"
"에스겔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전 세계 뉴스 정보를 전부 러닝 했어. 그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지. 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웃기는 소리군. 역사를 배워서 미래를 예측한다고?"
신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인간의 행동이 예측 불가하다고 생각하는군. 하지만 놀랍게도 아니야. 인간의 행동 양식은 지극히 반복적이고 모듈화 되어 있어.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세포보다 조금 복잡한 수준이지. 만약 한 인간의 생애를 모두 데이터화해서 에스겔의 인간 행동 분석 알고리즘에 넣는다면 그 사람의 남은 생애를 예측할 수 있어. 마지막 죽게 될 시간과 장소, 병명까지. 그런데 에스겔은 인류가 이제껏 남긴 모든 기록과 출판물, 디지털화된 정보를 89퍼센트까지 습득했지. 저 멀리 중국 은나라 갑골 문자에서부터 수메르의 설형문자 기록까지. 그걸 통해 인류의 종류를 분류하고 알고리즘 화했어, 성격, 교육 수준, 태어난 시대와 지역, 그리고 문화적 환경 등등. 그렇게 분류한 인류의 종류가 몇인지 알아? 놀랍게도 칠백여종이야. 인류가 먹는 물고기 종류보다도 적지." 

남자 4는 자신만만했다.

 

- "내가 악마 개구리를 없앨 수 있을까? 한 놈도 빼지 않고."

신라가 남자 4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모니터에 문장이 떴다.
"이 질문을 하는 당신은 누굽니까?"
"내 이름은 신라, 궁극의 아이다."

모니터의 커서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껌뻑였다. 이윽고 문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에스겔은 궁극의 아이에 관한 데이터도 갖고 있었다. 신라는 호기심이 생긴 듯 다시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봐." 

 

- "현재 악마 개구리 회원 제거를 의미한다면 가능합니다.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당신의 능력을 이용한다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악마 개구리는 또다시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 중 탐욕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고로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문현답이군." 
남자 4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신라는 모니터 전원을 꺼버렸다. 단단한 대리석처럼 모니터에 박혀 있던 인공지능의 대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가야는 지금 어딨지?"
"처음 있던 곳에 아직도 누워 있지. 삼십 년째."
"그게 어디냐고."
남자 4가 한숨을 내쉬었다.
"테스트 중 감상에 빠지는 건 좋지 않아."
 
- "그럴 필요 없어. 안 그래도 데려갈 참이었으니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신라는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네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닐 거야."

-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가야의 시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주변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뭘 하시는 겁니까?"
로드니가 물었지만, 신라는 대꾸하지 않고 손전등을 비추며 뭔가를 찾았다. 이윽고 창고 귀퉁이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는 있는 힘껏 유리 덮개를 내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그만두세요!"
로드니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신라는 연신 덮개를 내리쳤다. 쨍그랑. 결국 유리 덮개가 산산조각이 났다. 외부 공기가 유리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덮개 내부는 진공이었다.

- "대단한 분이네요. 원하는 건 반드시 하고야 마는군요."
로드니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악마 개구리에게 보고하려는 것이다. 신라는 상관하지 않고 가야를 살폈다. 덮개가 사라지고 같은 공간 속에 있자 기묘한 감정이 몰려왔다. 환생하기 전,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듯 두렵지만 신비롭고, 블랙홀에 빠진 듯 우주적이면서 미시적인 체험이었다. 

- 신라는 손을 뻗어 가야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때였다. 가야가 번쩍 눈을 뜨더니 신라의 손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신라는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가야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신라의 눈을 처절하게 응시했다. 순간 신라의 회색 눈동자에 한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 그곳은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가야가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걸 포기한 듯 슬픈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위에는 여러 대의 경찰차 경광등이 서치라이트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경찰들이 총을 겨눈 채 가야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야는 마지막 순간을 즐기듯 비를 맞더니 신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시간을 초월해 대화를 나누려는 듯.
"내 심장을 전해 줘..."
이 말을 남기더니 가야는 총구를 머리에 가져갔다. 그리고 신라를 바라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 현실로 돌아온 신라는 가야의 주검을 응시했다. 순간 가야의 몸이 재로 변하더니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삼십 년을 기다린 것처럼. 재로 변하면서도 가야는 신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언을 남긴 유일한 가족을 보듯. 그리고 마침내 신라의 손을 잡고 있던 가야의 손도 재가 되어 사라졌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신가야의 시신은 어디 있어요?"
돌아온 로드니가 소리쳤다. 신라는 아까 겪은 놀라운 경험을 음미하듯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졌어."

- 재로 변한 가야의 육신이 죽은 양귀비 밭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트레이 위에 검붉은 물체가 남아 있었다.
신라는 조심스럽게 물체를 집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돌덩어리였다. 그러나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히 좌심실과 우심실에 대동맥이 연결되면 당장이라도 피를 뿜을 듯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가야의 심장이었다. 

- 문에는 기계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안쪽으로 열리는 것이었다.
"굉장한 귀족인가 봐요. 무덤 주인이."
집시 2가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지?"
두 사람은 천천히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공간은 농밀한 암흑으로 채워져 있었다.

 

- 그러자 칠각의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칠각 상자를 거대하게 부풀린 듯한 방이었는데 장정 열댓 명이 누워도 될 만큼 큼직했다. 중앙에는 가슴 높이의 원통형 석제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정체불명의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바닥에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칠각별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별을 따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쓰여 있었다. 칠각 벽에는 저마다 마법 주문을 형상화한 듯한 특이한 문양들이 있었는데 여러 개의 삼각형이 형이상학적으로 연결된 것부터 처음 보는 문자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문양까지 다양했다. 모두 자주색과 상아색, 그리고 푸른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겨진 문양과 글자도 모두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마치 알려지지 않은 종교의 교주가 마법 주술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남겨 놓은 듯한 기묘한 방이었다.  

 

- 그는 신중히 방 안을 살폈다. 그런데 벽면마다 뭔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나무 상자였는데 벽면에 정교하게 끼어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상자에도 여지없이 정체불명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 반면 집시 1은 필사본 책을 유심히 살폈다. 책에는 라틴어 문장과 삽화가 매 페이지에 그려 있었다. 그림들은 형이상학적 우주의 형상이나 실험 장면 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었다.
"이 방 주인은 연금술사야. 그곳도 상당한 실력의."

 

- [Ego, Christian Rosenkreuz, in mea patria Erend, exactis CXX annis post, renatus ero. Qui me invenerit, accipiat duodecim solidos argenti et vadat ad Erend, ut me inveniat et me recipiat. Tunc deducet te ad abundantiam.]
집시 1은 조심스럽게 내용을 읽어 나갔다.
"나,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는 정확히 120년 후 나의 고향 에렌드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를 찾은 자는 은화 열두 개를 가지고 에렌드로 가서 새로운 나를 찾아라. 그러면 새로운 내가 당신을 풍요로 인도할 것이다." 
문장이 끝나는 위치에 작은 서랍이 설치되어 있었다. 집시 1은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정확히 은화 열두 개가 들어 있었다.
 
- "네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진 모르겠지만 반갑구나. 은화 열두닢아."
집시 1이 아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기가 알아들었다는 듯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자신의 운명을 움켜쥐듯.
놀랍게도 이 아이는 열 살부터 신비로운 능력으로 집시들을 이끌더니 열여섯 살이 되는 해 프랑스 왕실 고문이자 추기경 '리슐리외'의 양자로 들어간다.
 
- 승무원이 곧장 얼음물을 가져다주었다. 미셸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입안에 남아 있던 떨떠름한 꿈의 잔재가 냉수와 함께 흘러내렸다. 동그란 창문 너머에는 하얀 구름 평원이 뻗으면 닿을 듯 펼쳐져 있었다. 미셸을 실은 걸프스트림은 프랑스 리옹 국제공항을 향해 날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리옹의 인근 마을 '클뤼니(Cluny)'였다. 소라지가 임종 직전에 향했던 곳이었다. 

- 그런데 소라지의 손바닥에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뭔가가 있었다.
२० ३१ ०९ १६
네팔의 숫자였다. 생경한 숫자가 검은 물결무늬 사이에 정확히 그려져 있었다. 미셸은 밝은 빛에 숫자를 비춰 보았다.
숫자는 필기구로 적은 것이 아니었다. 특이한 점처럼 피부 아래 단단히 박혀 있었다. 미셸은 번역 앱으로 숫자를 해독해 보았다.

"20, 31, 09, 16..."
암호와도 같은 숫자 배열이었다. 미셸은 잠시 고민해 봤지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삼총사에 등장하는 아르망 리슐리외 대주교도 저희 호텔에 묵으셨답니다."
직원은 자랑스러운 듯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액자에는 나폴레옹과 리슐리외의 것으로 보이는 친서가 들어 있었다. 누런 양피지에는 친필 서명이 적혀 있고 액자 아래 나폴레옹과 리슐리외의 이름이 적힌 금장 명패에 있었다. 그 외에도 호텔에 숙박했던 유명인들의 서명이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리슐리외 주교가 여기 묵었다고요?"
미셸이 되물었다.
"네, 수도원을 들를 때마다 저희 호텔에 묵으셨죠. 식당에 가시면 그분이 사용했던 식기와 냅킨 등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 "그런데... 전에 저희 호텔에 묵으신 적 있으시죠?"
직원이 미셸을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프랑스는 처음이에요."
"아... 굉장히 낯이 익어서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직원이 업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 미셸이 소라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꺼내려했다. 그때였다. 소라지의 손이 움직였다.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거리더니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셸은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벽에 설치된 벽난로였다. 미셸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벽난로 위 선반이었다. 거기에 작은 보석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상자 모양이 익숙했다. 정육면체 상자에는 철제 표면에 작은 리벳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손잡이나 열쇠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소라지의 손이 들어 있던 금고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금고처럼 자물쇠를 열 필요는 없었다.

- 미셸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은화 한 닢이 들어 있었다. 마모된 것으로 보아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은화였다. 앞면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은화를 뒤집어 보니 로마 숫자가 있었다.
XX XXXI IX XVII
"20, 31, 9, 17..." 
미셸은 이와 흡사한 숫자를 본 적 있었다. 소라지의 손에 새겨져 있던 네팔 숫자였다. 미셸은 손에 새겨진 숫자와 은화의 로마 숫자를 비교해 보았다. 앞의 세 숫자는 일치했고 마지막 숫자만 ...

 

- "마지막으로 묻겠다."
리슐리외가 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말했다.
"날 죽이라고 사주한 놈이 누구냐?"
리슐리외가 물었지만, 죄수는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가스통 공작이냐? 마리약 후작이냐? 아니면 마리 드 메디시스 모후?"
리슐리외가 매섭게 추궁했지만, 죄수는 입을 열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보나르가 들어왔다.
"어르신, 저놈 숙소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 리슐리외는 찻잔을 치우고 물건을 살폈다. 작은 단도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도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칼날은 여러 겹의 단조 무늬가 일렁였고 정교하게 주조된 손잡이는 도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동(劍銅) 부위에 보석으로 장식된 문장이 붙어 있었다. 방패 모양 문장은 노란색 바탕에 다섯 개의 붉은 자수정이 쌍을 이뤄 박혀 있었고 맨 위에 푸른색 터키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주위를 백합 모양의 금장이 감싸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었다. 리슐리외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그는 한눈에 검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 "오늘은 무슨 향수를 뿌리시겠습니까? 주인님."
시종이 물었다. 리슐리외는 장식장에 있던 향수병을 유심히 살폈다. 수십 개의 향수가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치명적인 제안'으로 하지."
리슐리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 곧 왕궁으로 가서 숙적인 마리 모후와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 마리 드 메디시스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어린 루이 13세를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 했고 결국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포섭해 사사건건 대립하던 마리 모후를 블루아성에 유폐시켰다. 앙심을 품은 마리 모후는 루이 13세의 친척이던 마리 후작, 가스통 공작과 연계해서 호시탐탐 리슐리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어젯밤 또다시 독살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양아들 장 피에르의 도움으로 불상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확실한 증거가 수중에 있었다. 리슐리외는 오늘 밤 마리 모후를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세 번의 암살을 피하게 해 드리면 주시기로 한 약조 말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 암살이었습니다."
"아, 그 약속 말이냐. 그래. 그랬었지. 기억하고 있다."
"약조를 지켜 주십시오."

- 리슐리외가 마지막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리슐리외가 가방에서 서류첩과 깃펜을 꺼냈다.
서류첩에는 공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그중 '칙령서'라고 쓰인 종이를 꺼내더니 적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서를 완성하자 서명을 하고 봉투에 넣은 후 밀봉했다.
"이거면 네가 원하는 곳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다."
그는 자필 칙령서가 든 봉투를 건넸다. 장은 밀랍에 찍힌 리슐리외의 인장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장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말을 타고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죄수처럼.
리슐리외는 그 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더는 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리슐리외는 보나르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리슐리외가 장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저 아이를 뒤쫓아라. 그리고 파리를 벗어나면 즉시 죽여라. 시체는 조각조각 찢어서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도록 동서남북 사방에 따로 묻어라. 그 누구도 저 아이의 시체를 찾아선 안된다."

- "현재 저 아이를 찾는 나라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놈들이 저 아이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느냐. 저 아이를 손에 넣는 자가 이 전쟁뿐 아니라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어떤 놈은 저 아이가 재림한 예수님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저 아이가 죽은 걸 알게 되면 시체를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놈들이니 시체를 찾는다면 그걸 십자가 이상 가는 신의 가호로 여길 것이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테지. 온갖 불경한 짓을 다 해서 저 아이를 재림한 예수로 만들 것이다. 그럼 아둔한 백성들은 저 아이의 시체 조각 아래 모여들겠지. 그러면 이 전쟁은 오십 년, 아니 백 년간 이어질 것이다. 절대 그런 빌미를 남겨 두어선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당신의 암살 계획은 실패했소. 리슐리외 추기경."

"뭐야?"
"장 피에르는 보나르를 뱅센느 숲에 묻고 지금 클뤼니로 향하고 있소."

 

- "미래를 기억하는 아이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소, 추기경, 잘 알 텐데."
"넌 누구냐?"
남자가 처음으로 그림자에서 나와 얼굴을 보였다. 그는 50대 남자였는데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남자의 얼굴을 한데 섞어 평균을 낸 듯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삭제된 채 나온 것처럼. 
"난 유일하게 그 아이를 지울 수 있는 사람이오."
"네놈 말대로라면 그 아인 미래를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죽인단 말이냐?"
남자가 서릿발 같은 미소를 지었다.
"왜냐면 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 "원하는 게 뭐냐?"
리슐리외가 물었다. 남자는 고민을 하듯 두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장을 지워 주겠소. 대신 내 질문에 답을 해주시오."
"어떤 질문?"
리슐리외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다시 어둠에 기대며 물었다.
"신의 종이라 자처하는 자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요? 그것도 수십만 명이나."
리슐리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남자가 사신처럼 비쳤다.

- 암살을 모면한 장은 집시들이 준비한 배를 타고 루아르(Loire) 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거기서 마차로 옮겨 탄 후 디구앙(Digoin)을 거쳐 목적지인 클뤼니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섰을 땐 이미 어둠이 내린 후였다. 마차에는 장 외에 네 명의 집시가 더 타고 있었다. 그중에는 곰처럼 큰 야보크도 있었다. 그들은 몇 달 전부터 모든 걸 준비했다. 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장은 리슐리외가 자신을 제거할 걸 알고 모든 걸 대비했다.

-  장은 여유롭게 식사했다. 오는 동안 끼니를 때울 여유가 없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주방장의 요리 솜씨는 쓸 만했다. 훈연한 고기는 부드러웠고 정체불명의 소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메추리를 반쯤 먹고 나자 주방장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 "당신이 로젠크로이츠 님이라는 걸 증명해 보시오."
그러자 장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희가 출판한 책을 읽어 보았단다. 제목도 맘에 들더군. 화학적 결혼식, 내가 너희 선조들과 했던 대화들이 많이 등장하더구나. 그렇지만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더군. 특히 나는 연금술을 한 번도 시시하게 생각한 적 없다. 연금술은 세상이 아는 것처럼 수은을 금으로 만드는 천박한 기술이 아니거든. 내가 너희 선조들한테 가르침을 주기 전 항상 하던 말이 있다."
 

- "연금술은 수은을 증발시켜 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은 후 거기에 물질의 가르침을 보태고 고통을 제련하여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 분명 순금 금화였다. 이제껏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남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 선조의 스승이자 예언자 로젠크로이츠이다. 장미십자회 계승자들아."
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들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장의 손에 연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스승님.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 날카로운 오토바이 엔진음이 미셸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지난 며칠간 전생을 오가다 보니 현실 감각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기력증 같은 것이었는데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사백 년 전 수도원의 종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그만큼 전생의 기억은 생생했다. 미셸은 은화에서 손을 뗐다.

- 궁극의 아이는 어느 시대든 권력가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궁극의 아이 능력을 알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이용하려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를 찾아라... 그가 비밀을 알고 있다. 다섯 개의 조각을 모으면 문이 나타날 것이다.
소라지는 이 유언을 남기고 먼지가 되었다. 수수께끼 같은 단서였다. 미셸은 이 메시지를 자신에게 남겼다고 확신했다.

- 미셸은 핸드폰을 꺼내 로젠크로이츠를 검색했다.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Christian Rosenkreuz)는 비밀 조직 '장미십자회'의 창립자로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1978년 독일에서 출생한 로젠크로이츠는 어려서부터 신비주의 지식을 탐닉하였고 16세 때 성지 순례를 떠나 동방을 여행하게 된다. 키프로스를 지나 아라비아의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로젠크로이츠는 그곳에서 만난 현자들로부터 동방의 신비주의 지식을 배우게 된다. 이후 이집트를 거쳐 모로코의 성스러운 도시 '페즈(Fez)'로 여행하며 지식을 쌓는다.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로젠크로이츠는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전파할 포부를 안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의 지식인들은 그를 조롱할 뿐이었다. 다른 유럽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망한 로젠크로이츠는 고향 독일로 돌아간다. 거기서 자신의 이상을 나눌 일곱 명의 수도사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장미십자회'의 시작이다. 그는 일곱 제자에게 동방에서 배운 고대의 지혜를 가르친다. 세월이 흐른 뒤 일곱 제자는 유럽 각지로 흩어졌고 비밀리에 장미십자회의 지식과 교리를 전파한다. 그 후에도 로젠크로이츠는 홀로 은둔해서 연금술과 우주의 지식을 연구한다. 그가 몇 살에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일곱 제자조차 몰랐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지식은 계승자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 [로젠크로이츠가 쓴 세 개의 경전, <장미십자형제의 명성(Fama Fraternitatis)>, <형제의 고해(Confessio Fraternitatis)>, <화학적 결혼식(Chymical Wedding)>]

- 장 피에르가 언급했던 책의 제목이었다. 그 책은 1616년 독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발간되었다. 저자는 '크리스티안 안드레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저자는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라고 알려져 있었다. 자료는 로젠크로이츠가 장미십자회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젠크로이츠는 사망한 지 백이십 년 후 장 피에르로 환생하여 클뤼니 수도원에 숨겨진 뭔가를 찾고 있었다. 
 
- [장 피에르 리슐리외]
관 위에 적힌 망자의 이름이었다. 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의 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인가. 더욱 의문스러운 건 이 남자의 정체였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그러자 남자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는 평민이 입는 남루한 재킷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신발에는 잔뜩 흙이 묻어있었고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그는 강가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자갈 같은 남자였다. 그 자갈이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소. 장 피에르 리슐리외.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올 걸 왜 당신이 알지 못했냐는 거요."
맞는 말이었다. 장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 수십 번도 넘게 시뮬레이션했다. 매번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이 남자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미궁의 문지기?!"

-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 궁극의 아이로부터 저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미궁으로 통하는 문을 찾아야 한다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을 지키는 한 남자가 있다고. 그는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얼굴을 하고 누구도 그의 미래를 볼 수 없다고. 
 
- "그런데 왜 나타난 거지? 난 아직 모든 조각을 모으지 못했는데."
"왜냐면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오."
"때라니?"
남자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듯 장을 바라봤다.
"인류에겐 아직 기회가 남았소. 그러니 아직 문을 열어선 안 된 단 말이오."
 
- 한 권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제목은 [인간 생명 지침서].

이 보고서는 학계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만, 신약 개발까진 많은 난관이 남아 있었다. 인간의 유전자 중 98퍼센트에 달하는 암흑 유전자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은 산타모니카 해변의 모래를 크기별로 분류하여 일렬로 세워 놓는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 그러던 중 놀라운 투자자가 나타난다. 바로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회사의 창업자이자 여러 바이오 회사를 거느린, 남자 4였다. 그는 3억 달러라는 거금의 투자와 함께 암흑 유전자 분석에 자신의 인공지능 '에스겔'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박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인공 지능 에스겔과 암흑 유전자 해독과 변이 유전자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 년 후 불가능에 가까웠던 암흑 유전자 해독을 마친 에스겔은 동시에 진행된 변이 유전자 분석마저도 끝냈다. 박사는 이 유전자 지도를 바탕으로 유전자 치료제 벨레로폰의 개발에 들어갔고 이 년 육 개월 만에 시제품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시제품 벨레로폰의 성공적인 결과가 펼쳐져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박사님. 이 치료제가 완성되면 박사님은 인류를 불치병으로부터 구한 위대한 과학자로 역사에 기록되실 겁니다."

리처드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그런데 안경을 벗자 그의 얼굴은 누군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강가에 있는 자갈처럼.
"고맙네, 리처드 자네가 없었으면 '키마이라(Chimaera)'를 개발할 수 없었을 거야."

 

- "벨레로폰의 가능성은 단지 암 치료에서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여기 사용된 유전자 기법을 이용하면 암뿐만 아니라 당뇨, 알츠하이머, 루게릭병 등 인류가 직면한 대부분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럼 좋은 일 아닌가. 인류가 이백만 년 동안 겪어 왔던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되는 건데." 
박사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리처드는 얼음처럼 냉정했다.
"이 신약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지금까지 제약업계를 지배해 왔던 수많은 공룡 기업이 무너지게 될 겁니다. 그와 동시에 이 신약을 갖게 되는 자는 세상을 지배할 거란 말입니다."
그 말에 박사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박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보낸 문자였다.
  
- 가야만 남아 있었다. 신라는 덮고 있던 재를 털어 냈다. 그러자 삼십 년 전 가야가 나타났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넘긴 가야는 태어나 처음 웃는 듯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신라는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바라봤다. 사방으로 금이 간 거울에는 일그러진 신라의 얼굴이 비쳤다. 비록 일그러져 있지만 사진 속의 얼굴을 빼다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 
"웃기고 있네."
신라는 사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가야는 소용없다는 듯 바닥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라는 사진을 주워 들더니 라이터를 꺼냈다.
"내가 비록 당신에게서 태어났지만 난 당신 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라. 난 너처럼 나약하지도 멍청하지도 않거든. 중요한 건, 너희들처럼 이용당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놈들을 이용해서 세상을 지배할 거야. 보란 듯이."

- '두려워할 거 없다. 내게도 추억은 고통이었으니까.'
목소리는 타들어 가는 사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진은 이제 재가 되어 꺼져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불꽃이 가야의 눈동자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가야의 분노가 응집되어 불이 붙은 것처럼. 신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마지막 불꽃을 응시했다. 순간 불꽃이 사라지며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가야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란 건 순전히 거짓이었다. 악마 개구리들은 가야의 능력을 이용해 거대 자본과 정부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었다. 매달 어머니에게 상당한 양의 돈이 송금되고 있었고 세계 최고의 의사들이 어머니를 치료하고 있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지병은 호전되고 있었다. 

- 악마 개구리들을 살폈다. 그들은 벨몽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뭔가를 은밀히 상의하고 있었다. 순간 불길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직감이 뇌리를 가로질렀다. 
"당신들...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군. 그렇지? 내 어머니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야!"
"뭐 하고 있는 거야. 로드니. 데려가라니까!"
벨몽이 차갑게 소리쳤다.
"가야 님.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곤란합니다."
 
- 가야는 넋을 잃고 화염에 휩싸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졌다. 가야는 피할 생각도 못한 채 떨어지는 콘크리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찰나 누군가가 가야의 손을 잡고 달리는 것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콘크리트 더미가 비껴갔다. 뒤이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먼지 폭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은 무작정 먼지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두 사람은 간신히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누군가가 가야를 부축해 보도블록에 앉혔다. 가야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아직도 뿌연 먼지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생수병을 건네며 말했다. 
"블랙홀 속에도 빛이 있대요. 그러니 기운 내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 가야는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바라봤다. 생명의 은인은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가 가야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여자가 잊어버린 뭔가가 떠오른 듯 아수라장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가야도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미래의 기억 파편을. 
"엘리스..."
가야가 먼지 폭풍 속으로 사라지는 여인을 끝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 신라는 쫓기듯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왔다.
"이딴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 이러면 네 딸을 살려 줄 거 같아서? 네가 아무리 구걸해 봐야 네 딸년은 죽게 돼 있어."

신라가 허공을 향해 고함쳤다.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이 모두 돌아봤다.
'구걸 따윈 하지 않아. 그 아인 내 핏줄이기도 하지만 네 핏줄이기도 하니까.'
  
- "딸내미나 아비나 똑같군."
신라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내용물을 모두 버렸다.
"복에 겨운 줄 몰라."
하얀 알약들이 흙바닥에 눈처럼 쏟아졌다.
"내가 두 번째로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아? 우리 엄마야."
신라는 멍하니 흩어진 알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날도 난 속옷 차림으로 길바닥에서 벌을 섰어. 영하 12도에 말이야. 더 이상 내 편을 들어줄 마리아도 없었어. 남편 새끼가 죽여 버렸거든.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이 날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줬지. 경찰이 가자 엄마가 저녁을 차려 주는 거야. 접시 하나를 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더라고. 그러곤 먹다 버린 음식을 주섬주섬 담더니 내 앞에 놓는 거야. 그리고 이러더라.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아님, 다시 쫓겨날 줄 알아. 나는 마지못해 먹었어. 꾸역꾸역 입에 넣었지. 곰팡이 핀 빵을 먹고 있자니 눈물이 나더라. 그런 날 보고 엄마가 뭐랬는지 알아? 그 음식도 나한텐 과분하다는 거야. 나 같은 건 낳지 말았어야 한다면서 나 때문에 자기가 불행해졌다고. 나 같은 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 순간 내 안에 뭔가가 불끈 일어섰지. 시뻘겋고 뜨거운 게 말이야. 그리고 나도 모르게 포크로 엄마 목을 찔렀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라. 난 그런 엄마를 그냥 보고 있었어. 그런데 엄마가 죽기 전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너 같은 새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신라가 고개를 들어 반대편 골목을 바라봤다. 골목 저편에서 가야가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네 어리광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하니?"
'그게 전부 놈들의 계획인 걸 알고 있잖아. 최상위에서부터 최하위까지 다양한 계급에서 자란 아이들을 관찰한다. 그중 최고의 아이를 선발한다. 넌 불행히도 최하위 계층에 선택된 거야.'  
 
- 신라는 원형 테이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마치 인간이 문명을 이루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원시적이면서 지극히 인공적이었다. 그런 테이블 위에 앉아 있자니 천지창조를 앞둔 조물주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신라는 궁극의 아이의 유물을 확인했다. 보스턴백 안에는 장 피에르의 머리와 신가야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검게 석화된 두 유물은 독특한 기술을 지닌 조각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었다. 

 - "왜 웃는 거지? 신라?"
남자 4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는 에이스 포커를 들고 있어도 낼 수가 없거든." 
신라가 웃음을 멈추며 대답하자 남자 1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날 죽이면 나머지 유물은 영영 물 건너갈 테니까. 유물은 오직 궁극의 아이만 찾을 수 있고, 너희가 가야의 시신을 삼십 년간 보관했지만 발견하지 못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니 너희들은 제아무리 에이스 포커를 들고 있어도 낼 수 없단 말이야."

 

- "우리는 선대부터 너희를 연구했다. 너희가 가진 능력뿐만 아니라 역사와 기원까지.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지. 너희들이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거야."

"누군가가 너희를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었다는 말이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우연이 아니라니?"
"우리는 너희를 만든 존재를 찾고 있다."

-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 신, 혹은 조물주."

기고만장하던 신라가 얼음처럼 굳었다.

"너흰 신을 찾기 위한 미끼인 셈이지."

신을 유혹하기 위한 실험실에는 작은 쥐 한 마리가 길을 잃은 채 떨고 있었고 그 주위를 다섯 명의 유다가 둘러싸고 있었다.
 

- 미셸이 향한 곳은 지하 밀실이었다. 전투를 대비해 탄약과 장비를 챙기려는 생각이었다. 캐비닛에는 칸마다 종류별로 탄약과 총, 단검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미셸은 여분의 총 한 자루와 탄약 상자를 집었다. 그때였다.
'총알은 한 발이면 충분해.'
소라지였다. 그녀가 오랜만에 말을 걸어왔다. 미셸은 익숙하게 눈을 감고 소라지를 만나러 갔다.

- '난 더해줄 말이 없어. 왜냐면 답은 이미 자네 안에 있으니까.'

"하지만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나머지 조각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았죠? 다른 궁극의 아이는 서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간절한 미셸을 보며 소라지가 어깨를 토닥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 꼬맹아. 죽음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게 아니야. 오히려 널 자유롭게 해 줄, 친구 같은 거야.'

미셸이 고개를 들었다.
"난 살 수 없군요..."
실망한 미셸을 소라지가 시공간 저편에서 애처롭게 바라봤다. 

'난 죽음을 두 번 겪었어. 영국에 잡혀갔을 때 한 번, 프랑스에서 한 번. 누구에게나 죽음이 두 번씩이나 찾아가지는 않아.'

- '결국 누구나 죽어.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 말을 믿어. 수십 번도 더 죽어 봤잖아.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다시 살아 있잖아. 미셸이란 이름으로.'

- '그렇다고 전쟁에서 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야. 녀석이 이기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테니까.' 
"하지만 난 놈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아직 깨닫지 못했구나.'
"뭘요?"
'넌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와 대화할 수 있어. 그 말은 과거의 너와도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야.'

- '많은 아이가 그 문을 열려고 했어. 장 피에르, 나 그리고 많은 궁극의 아이들이. 하지만 아무도 그 문을 열지 못했어. 그렇지만 넌 열 수 있을 거야. 진정한 궁극의 아이니까.'
이 말을 남기고 소라지는 탑 속으로 사라졌다.
깜빡이는 전구 아래 홀로 서 있던 미셸의 손에는 한 발의 총알이 들려 있었다.
 
- 그러자 신라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네 기억 속에 묻어 뒀다.'
'내 기억 속?'
'여기서 기다릴게. 찾아와라.'
이 말을 남기고 신라는 사라졌다. 누군가가 현실 속 미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 미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후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기억 속에서 봤던 골목이었다.
골목은 운명의 진자처럼 그 자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36번가에는 수많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지만, 자석에 이끌리듯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하늘을 무작위로 가로지르는 전선, 세월을 못 이기고 부서져 내린 벽과 노안이 온 낡은 보안등. 모든 것이 기억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기억과는 달리 현실감이 구석구석 묻어있었다. 미셸은 권총을 장전하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 "열쇠? 소라지는 그런 말 한적 없어."
"넌 정말 멍청하구나. 금수저, 유물은 문의 위치를 알기 위한 도구야. 일종의 지도 같은 거지. 하지만 문을 열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해. 그리고 그 열쇠는 네 전생의 기억 속에 있어."

"전생의 기억?!"
"그 열쇠가 어떤 형태인지 난 모른다. 암호일 수도 있고, 주문일 수도 있어. 페니키아인의 고대 알파벳 수열일 수도 있고 로마의 카이사르 암호일 수도 있어." 
"왜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거지? 난 네 적인데."
미셸이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왜냐면 오직 너만이 열쇠를 찾을 수 있으니까."
찰나 신라의 눈에 좌절감이 스쳐 갔다.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죠. 마지막 행운을 잡을 준비되셨나요? 손님."

- 딜러가 의미심장하게 미셸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셸은 베팅 판의 숫자를 응시했다. 숫자판 중앙에 16과 17이 나란히 있었다. 이전 베팅 숫자는 16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140만 달러라는 행운을 불러들이는 잭팟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셸이 노리는 숫자는 17이었다. 미셸은 1,000달러짜리 칩 하나를 '17' 위에 내려놓았다.
"17번, 올인!"
미셸이 차분하게 외쳤다. 그러자 주변 모두가 웅성댔다.
"17번, 올인하셨습니다."
딜러가 다시 한번 베팅액을 확인했다. 모두 4만 달러였다. 만약 성공하면 서른다섯 배를 벌게 된다. 무려 140만 달러였다. 그러나 미셸이 노리는 건 돈이 아니었다. 미셸이 고개를 끄덕이자 딜러가 쇠구슬을 룰렛 판을 향해 던졌다. 작은 구슬이 룰렛 판 주위를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구슬과 룰렛 판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운명의 짝을 찾기 위해 숲을 헤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 이윽고 추락하던 구슬은 서른여섯 개의 숫자판 중 하나를 골라 운명처럼 멈췄다. 놀랍게도 쇠구슬이 선택한 숫자는 17이었다. 사백 년 전에 정해진 운명처럼 장중하게 17에 안착했다. 

- 그때였다. 구슬이 홈에 떨어지는 순간 신이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이었다. 딜러가 던진 주사위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잭팟을 터트린 손님이 머리에 붓던 샴페인은 얼음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웨이터가 건네던 술잔은 중력을 무시한 채 떠 있었고 스모선수 같은 손님의 거대한 발이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미셸뿐이었다.
 
-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는 건조한 모래가 섞여 있었다. 미셸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커튼을 열어젖힌 것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 사막이었다. 카지노는 온데간데없고 파도처럼 일렁이는 사구와 물결무늬 모래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미셸은 할 말을 잃은 채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복판이었다. 사방 어디에도 인적은커녕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바늘로 찌르면 푸른 물감이 쏟아질 것처럼 파랬다. 유일하게 흐르는 건 정체불명의 시간뿐이었다.
 
- 미셸은 무작정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사막의 모래는 부드럽고 뜨거웠다. 한참을 걷자 드디어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고대에 지어진 일종의 문이었는데 영겁의 세월을 지나왔는지 온통 풍화되어 있었다. 누런 사암으로 만들어진 문은 룩소르의 신전 입구처럼 크고 웅장했으며 한때는 천장을 지탱했을 거대한 기둥들이 문지기처럼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원형 기둥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이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 너머에 사각으로 된 문이 있었다. 문 옆에는 거대한 파라오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러나 본채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문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미셸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입구로 이어진 계단에 누군가가 있었다.

 

- "이봐요! 기다려요!"
미셸이 소리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돌아봤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었는데 승려처럼 바짝 깎은 머리에 킬트를 두르고 매의 두상이 조각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빛깔의 오드 아이를 하고 있었다. 미셸은 소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라지?!"
미셸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소라지와는 피부색이 달랐다. 그러자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칼리드. 최초의 아이야."

- "저 문이 네가 찾고 있는 문이야."
"그렇지만 저 문은 폐허잖아. 미궁은 어딨어?"
미셸의 말대로 문은 몰락한 왕국의 유적처럼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건 네가 아직 문제를 다 못 풀었기 때문이야."

- "너희 중 살아남은 한 명은 최후의 아이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열쇠가 될 거야."
이 말을 남기고 최초의 아이는 기둥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머지 한 명은 열쇠가 된다니!"
미셸이 쫓아가며 물었지만 최초의 아이는 기둥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다.

- 룰렛 판 위에는 아직도 쇠구슬이 돌고 있었다. 이윽고 하강하던 쇠구슬은 방금과 같이 17에 안착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려던 순간이었다. 구슬이 튕겨 오르더니 바로 옆 16번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환호의 탄성은 아쉬움의 탄식으로 바뀌었다.
"이번 위너는 16번입니다. 다음 기회를 노려 주세요."
 
- "우리 둘 중 한 명은 최후의 아이가 되고 나머지 한 명은 열쇠가 될 거라고 했어."
미셸이 대답하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가 미소를 지었다. 번개보다 날카롭고 천둥보다 의미심장한.
"이제 남은 건 자물쇠의 위치군."
"자물쇠의 위치?"
"잘 들어라. 자물쇠의 위치는 오래전 궁극의 아이가 스스로 희생한 장소다. 같은 장소에서 두 번째 궁극의 아이가 스스로 희생하면 문이 열린다."
이 말을 남기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몸을 빌려주었던 벨라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미셸은 반사적으로 벨라를 붙잡았다. 그 순간 벨라가 들고 있던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보물 상자 열쇠였다. 상자의 열쇠는 두 개였다. 둘을 자물쇠에 넣고 동시에 돌려야만 열렸다. 미셸은 주머니에 있던 자신의 열쇠를 꺼냈다.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다른 열쇠. 미셸은 신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네 기억 속에 묻어 뒀다.' 

- "예상대로 적통이 승리했군요."
남자 3이 승패가 뻔한 경기를 지켜본 듯 말했다.

"애초에 기억의 한계치가 달랐소. 한쪽은 온전한 지도를, 다른 한쪽은 일부만 갖고 시작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남자 2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겠군요, 창조자가."

남자 5가 말했다.

- 그 한가운데 문이 있었다. 카지노에서 봤던 바로 그 문이었다. 신을 찬양하는 이집트 문자가 새겨진 기둥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그 너머에 거대한 사암으로 지어진 사각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대 폐허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방금 지어진 건물처럼 온전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몇 개에 불과했던 기둥은 수십 개로 불어나 있었고 짙은 청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기둥 위에는 붉은색 지붕이 놓여 있었고 처마에는 신을 상징하는 여러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흰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도로가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거대한 파라오 석상이 지키고 있는 문이 있었다. 문은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지혜의 신, 토트(Thoth)가 파라오에게 지식이 담긴 항아리를 건네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었다. 미셸은 기둥을 지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문 위에 조각된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가 나타났다. 
"세상 모든 지식의 보고(寶庫)...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것이 문자의 내용이었다.

- 양옆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나무로 된 서고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서고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파피루스와 양피지 서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중앙에는 십여 명이 동시에 책을 볼 수 있는 커다란 대리석테이블이 중간중간 놓여 있었고 물체의 중량을 잴 수 있는 천칭과 양초 불이 켜진 청동 촛대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는 분수대가 놓여 있어 언제든 물을 마실 수 있었고 천장과 벽에 설치된 유리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고 한복판에 가장 인상적인 장치가 놓여 있었다. 
'혼천의(渾天儀, Armillary Sphere)'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을 대표하는 혼천의는 고대 천문학에서 사용했던 장비로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형상화한 기구였다. 

- 그는 헐렁한 흰색 바지와 셔츠 차림에 맨발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집 정원을 손질하다 온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강가의 자갈처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파릇한 파피루스를 한 움큼 들고 있었다. 그중 한 권의 제목이 얼핏 보였다.
Πλάτωνας Τίμαιος
플라톤의 저서 중 하나인 <티마이오스(Timaeus)>였다. 기원전 4세기경 플라톤이 제자들과 우주의 기원을 주제로 토론한 내용을 옮긴 저서였다. 하지만 미셸은 플라톤 따위 관심 없었다.

- "당신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오. 이용당했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들을 만나면 모든 걸 이해하게 될 거요."
말을 마친 남자는 남은 할 일이 있는 듯 어디론가 향했다.

- "여긴 그냥 도서관이 아니오.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집필한 모든 서책이 보관된 도서관이오."
남자는 또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모든 서책?"
미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고의 책들을 살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누렇고 온전한 점토판 문서였다. 크기는 가로 70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 정도로 수메르인의 쐐기 문자가 음각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 점토판 수천 개가 일렬로 꽂혀 있었다. 미셸은 그중 하나를 꺼내 보았다.
"그건 아마르나 문서(Amarna letters)요. 기원전 1400년경 이집트 아멘호텝 3세와 4세, 투탕카멘 초기까지 약 이십오 년간에 걸친 외교 서신이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그곳 역시 도서관이었는데 지하 감옥에 들어온 것처럼 어둡고 음침했다. 사방은 두터운 화강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천장은 고딕 양식의 둥그런 돔이었다. 열람실은 육각형 형태였는데 모서리마다 다른 열람실로 이어진 계단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서고는 통로와 통로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그 안에 양피지와 종이 서책들이 죄인처럼 갇혀 있었다.
"이곳은 아그몬드 베네딕트 수도원의 지하 도서관이오. 중세시대 금서를 선별하고 보관하던 곳이지. 이곳에서 사라진 서책들이 수백만 권에 달하오. 그중에서도 성경 복음서를 선별했소. 당시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 외에도 스무 개가 넘는 복음서가 존재했소. 베드로, 필립, 마리아, 도마, 심지어 유다 복음서도 필사되어 전해지고 있었지. 하지만 이곳을 비롯한 여러 수도회에서 교회의 입맛에 맞는 복음서를 선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금서로 정해 불태워 버렸소." 
미셸은 철창 안에 갇힌 양피지 필사본 복음서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모두 보관되어 있군요."

-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중국 후한시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부터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e)>까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에서부터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까지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 유명 저서 외에도 이름 모를 사람들의 저술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생각과 감정, 지식을 문자화한 모든 저서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남자는 보관된 책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며 서고를 지나갔다.

 

- "여기 있는 책들은 당신의 시간대엔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오."
남자가 책장에 꽂힌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셸은 한 권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쳤다.
초판 출간 2032년 10월 16일
남자의 말대로였다. 현시점으로부터 일 년 후 출간될 책이었다.

 

- 그러자 남자는 가장 마지막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 건넸다. 누군가의 논문이었다.
<암흑 유전자 이론>
저자는 '피츠 앨런' 박사였다. 

"그런데 왜 이후에는 책이 없죠?"

미셸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남자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냐면 그 책이 인류가 출간하는 마지막 책이기 때문이오.”

- "이건 인류가 공유해야 할 자산이야!"
박사가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요원이 박사의 목에 주사기를 꽂았다. 그와 함께 박사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생명을 다한 태양이 꺼지듯.

- 미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

"마지막 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는 대꾸 없이 미셸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가에 있는 자갈처럼.
"내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 "우리를 만든 이유가 뭔지 알고 싶어요. 궁극의 아이들 말이에요.”
"당신들은 선과 악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오."

- "그걸 판결해서 뭘 하려는 거죠? 선이 우월하면 어떻게 되고 악이 우월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그건 그분들이 결정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인류의 선과 악을 판단하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미셸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무것도 판결할 수 없어요!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고요!"

미셸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마치 석상에 낙서를 한 듯한 미소였는데 지극히 부자연스러웠다.
"당신은 여기 들어오기 전에 이미 판결했소. 이전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그게 최후의 아이의 최후 판결이오."

- 그 말에 미셸은 얼음처럼 굳었다.
"내가 어떤 판결을 했죠?"
남자는 나지막이 말했다. 신의 한 걸음처럼 웅장하고 의미심장하게.
"이제 그분들이 오실 겁니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