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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사바삼사라 서 1-2 (완)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5. 8.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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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출판 : 디플롯
출간 : 2024.09.24


   

 

<사바삼사라 서>는 1, 2권을 다른 형식으로 읽었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어려웠다. 

 

김보영 작가가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고자 카카오페이지의 웹소설로 연재했던 작품을, 종이책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 <사바삼사라 서> 1, 2권. 필명도 'J. 김보영'으로 분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경우, 1권은 종이책으로 읽었지만 798p. 책을 휴대하는 건 독서보다는 운동에 가까운 활동이었기 때문에-

2권은 고민 없이 웹소설로 읽었다. 

 

전자책이 아닌 웹소설 연재분으로 읽었던 이유는,

첫째로는 판매가 차이가 컸다. -지금 나는 <괴담출근>을 정주행 중이기 때문에- 카카오페이지에는 이미 충전된 금액이 충분했지만, 전자책으로 구매하려면 새롭게 충전을 해야 하는 상황.

둘째로는 호흡이 달랐다. 휴대성을 위해 전자책을 선택한 만큼, 잠깐씩 틈이 날 때 끊어 읽기에는 여러 화로 나뉜 연재분 쪽이 부담 없었다. 

셋째로는 궁금했다. 한 권의 책이 아닌, 한 화씩 '김보영'을 만나는 느낌은 어떨지.

 

그리고 완독한 지금, 내가 느낀 J. 김보영은 김보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은 존경스럽다. 변화해 가는 플랫폼과 시대 흐름을 이전 세대의 위치에서 '평가'하지 않고, 직접 '경험'해 보고 시험해 본다는 건 기성세대일수록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바삼사라 서>에는 짧은 호흡, 즉 매 화마다 그 안에서 나름의 완결성과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하는 웹소설 특유의 빠르고 경쾌한 흐름은 없었다. 딱딱 끊어지는 장면 전환이나 챕터 구분이라고 보기도 애매했고, 소제목과 본문 사이의 연결감도 약했다. 오히려 정해진 분량에 맞춰 나눈 듯한 느낌. 웹소설은 영화보다는 시리즈에 가까운 호흡으로, 각 화마다 하이라이트와 절단신공이 필요한데- 플랫폼만 바뀐 '웹소설 연재'보다는 예전의 연재 개념에 가까운 '주기적인 분량 공개'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또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그 안타까움이 내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이전 세대의 느낌이 너무 진했다는 점이다. 무게감, 메세지, 올바름, 가르침, 교훈 같은. 

 

<사바삼사라 서>는 웹소설이라기엔 김보영 특유의 '메세지'가 너무 강하지 않았나 싶었다.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완결성 있게 발표되는 경우는 그런 무게감도 괜찮다. 독자는 -중간에 멈출지라도- 그 '책'을 읽을 생각으로 선택한 것이고, 한 권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 무겁더라도 그것을 즐길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몇 화를 읽다가 자유롭게 중도하차가 가능한 웹소설에서는, 어느 한 화라도 '늘어진다'는 평을 받는 건 치명적이다. 작은 조각도 전체를 담을 수 있어야 -어느 화를 끊어 읽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신체적 장애를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담고자 한 점.

사익 추구 -욕망- 와 모멸 같은 사회적 현상을 판타지적 시각에서 새롭게 분석하고자 한 점.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

여러 신화 속에서 모티브를 따온 무기와 계명. 

 

모두 흥미롭긴 했지만... 이전부터 '김보영'을 좋아했던 팬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끝까지 읽은 이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를 중심으로 서사가 풀려가는 건 많은 작품에서 활용하는 방식이지만-

한 인물의 아트만이 그와 닮아 있는 건 당연하지만, -또 이 작품의 경우 특정 시기와 현재가 가장 닮아야 한다는 것도 맞지만- 성별이나 외모가 거의 모든 캐릭터에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점도 아쉬웠다.

 

재미가 없었느냐? 재미있었다.

흥미롭지 않았느냐? 흥미로웠다. 세부적인 설정뿐 아니라 '소원'과 '욕망'에 대한 다차원적인 접근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추천할 수 있느냐?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종이책으로 발간된 책이라면, -조금씩 중복되는 부분을 더 쳐내고 각 4-5백 페이지 정도로 편집한- 기존 팬들이라면 즐거워할 것 같다. 

하지만 웹소설로 본다면, 이 시도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 소설의 일부를 일정에 맞춰 부분 선공개한다.

- 실시간 반응(댓글 등)을 다음 부분 공개 전 확인 가능하다. 

- 주로 읽는 대상층이 10-20대로 젊다. 

 

이렇게 생각하고 접근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주인공들이 10대고, 상처가 있고, 현실에서의 삶은 각박할 수 있지만 나름의 힘과 연대와 역사가 있다고 썼던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싫다, 나쁘다, 별로였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성인이 된 입장에서는 이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건가,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등의 감각 때문에 조금 서글퍼졌을 뿐이다. 

 

J. 김보영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나만 나이 들어가는 느낌을 느끼고 싶다.

김보영이 발표한 모든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고, 연력과 설정을 꿰고 다니는 딥한 팬도 아닌 입장에서 대충 자기 감상만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무가치한 것이 '자신만의 의견'이라는 독설을 남긴 작가도 있는 와중에- 남겨봤을 뿐이다. 

 

부디 보람 있는 결과를 얻었기를 바라며. 

끝. 

 

 


   

 

- '당신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수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를 마주 보았다. 들릴 리는 없겠지만 말할 이유도 없었다. 수호는 눈을 감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 "도움을 청해."
"?"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해."
(아마도 보호자일) 여자에게 애를 떼어내 달라고 부탁하려는 찰나 애가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마구니가 대신 찾아갈 거야."

- 벤치에 웅크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체온이 날아가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얇은 종이상자도 훌륭한 난방시설이 될 수 있다. 집에서 맨몸으로 내쫓겼을 때 가끔 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뭘 하려든 걸어야 했다. 슬리퍼는 안에 두고 나왔다. 땅은 더 얼어 있었다.
수호가 사막에서 길을 잃은 기분으로 서 있는 사이에 아까 그 고교생 무리가 걸어왔다.

- "야, 너 혼자냐? 심심하면 우리랑 놀자?"

 

- 불행에서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맞고 굴종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냄새를 저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사람, 치면 치는 대로 맞을 것이 뻔한 사람,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의 냄새를. 

- 아버지가 주먹을 들기 시작하면서 수호의 주변 사람들도 변했다. 그들은 마치 수호가 '때려도 되는 사람' '뭘 해도 저항하지 못할 사람'이 된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만 같았다.

- 아버지는 자신을 때리는 이유가 맞을 만한 짓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위가 다 변하고 나니, 그 말을 의심하는 것조차 ...

- "별일 아닙니다요."

옆집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 아버지는 현관에서 굽실거리며 말했다. 수호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 숨을 헐떡였다. 경찰은 아버지 너머로 자신을 힐끗거렸다.
"애가 글쎄 도둑질을 해서 말이죠. 좀 혼내던 중입니다. 사내자식 키운다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래도 거 적당히 좀 하세요. 동네에서 항의 들어오잖아요."

- 수호는 늘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늘 아버지와 대화하는 걸까. 왜 내게 말을 붙이지 않을까. 주먹질하는 사람이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걸까.
주먹과 발길질로 강자와 약자가 정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강자에게 말을 붙이는 것 같았다. 아무런 의식도 인식도 없이.
매질에는 마법의 힘이 있어서 한순간에 사람을 사물로 전락시키는 것 같았다. 저기 찌그러져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니까,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걸어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 같았다.

- '가.'

수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온 사람이 누군지 관심도 두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맞는 것은 상관없지만 구경거리까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현관을 열고 들어온 경찰에게 길을 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 아주머니에게, 거리에서 수호의 상처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던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애원했던 것처럼.
 
- 공기가 흐트러졌다.
머릿속에서 경쇠 소리가 들렸다.
아주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절에 갔을 때, 스님이 치던 놋쇠그릇에서 나던 소리. 지평선 저쪽까지 파동을 전하는 듯한 은은한 소리.
동시에 다른 소리는 잦아들었다. 주위를 둘러싼 패거리의 어수선한 소리, 멀리 들리던 취객들의 주정 소리, 규정 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는 총알택시 소리도.

- 위화감은 당혹감으로 변했다. 앉은 자리가 따듯했고 꿀렁거렸다. 큰 생물의 몸 안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괴물이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간신히 살가죽만 듬성듬성 붙은 해골이었다. 눈은 없었고 입은 귀밑까지 벌어졌고 상어처럼 이빨이 잔뜩 돋아난 입에서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샛노란 침이 흘렀다. 뼈만 남은 몸에 배가 자루처럼 바닥까지 늘어져 있는데 방금 뭘 산 채로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뭐지?' 
수호는 뻥 뚫린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이게 뭐야?'

- "애가 심소에 들어왔네?"
"어쩌다 그랬어?"
중저음의 목소리. 마찬가지로 아까의 화상 입은 여자와 닮았지만, 훨씬 더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다.
"사냥 오래 안 하다 보니 일하는 법 다 까먹었나 보네. 왜 애를 휩쓸리게 해."

"내가 데리고 들어온 거 아냐."
소녀의 말투 역시 아까와는 달리 훨씬 진중하고 차분하다.
"스스로 열고 들어왔어."
"으흥, 나이 많은 애라고 했지. 은퇴한 퇴마사가 현역 퇴마사를 만나면 영향을 받아 각성할 때가 있긴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커졌을 때 각성하기도 하고."

- "상처는 칼이 된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경구와도 같은 말을 읊조렸다.

 
- 몸을 휘감은 용의 몸이 딱딱해졌다. 수호는 아,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한발 늦었군."
차갑게 식은 목소리였다. 화났다기보다는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익숙한 좌절인 듯 말투는 침착했다.

- "이 애송이, 우리보다 먼저 마구니를 만났어."
마구니라니.
각오한 와중에도 어리둥절했다.
"아직 카마가 마음과 제대로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금방 형체를 갖출 거야.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 카마.
아까부터 반복해서 듣는 말이었다.

- "어떻게 할 거야? 하는 김에 같이 처치할까?"
수호는 아난타라 불린 용이 몸을 조이는 것을 느끼며 검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퇴마사 마호라가."
용이 재촉하듯 검사의 이름을 불렀다.
'퇴마사 마호라가'라 불린 검사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왠지 슬픔이 느껴졌다. 하루 이틀 사이에 생겨난 슬픔이 아니라... 천 년쯤은 이어져 와서 이제는 파문조차 일으키지 않는 슬픔이.
하지만 이내 얼굴에서 슬픔이 가시며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 아니겠느냐는 듯.
 
- "지금이라면 간단할 테니. 카마를 마음에서 끌어내는 게 문제겠지만."
[건드리지 마.]
수호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아직 인격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을 거고."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 내 몸에 손대지 마."
마호라가가 동작을 멈추며 수호의 눈을 보았지만 이마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수호의 말이 아무런 강제력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눈이었다.
"오해하지 마라, 소년. 널 해치려는 게 아니다. 네 마음에 끼어든 마를 없애려는 거다."

-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웃기고 있네.
코웃음이 났다. 그냥 하는 말이지, 괜히 신고 들어가면 귀찮으니까...
그래도 열연이다. 저렇게 오버할 것까진 없을 텐데. 어지간히 된통 당한 건가. 수호는 도로 의식이 흐트러지는 가운데 생각했다.
'진심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간단히 뉘우칠 것 같으면 애초에 왜 그러고 다녔겠어...'


- 눈을 뜨자 진한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오래된 가스레인지 위에 구릿빛 주전자가 끓고, 주둥이에 얹힌 뚜껑은 증기가 치익 빠져나올 때마다 달그락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했다.
따듯했다. 공기는 온화했고 부드러웠다. 


- 열 평이 넘지 않는 작은 원룸. 천장에 달라붙다시피 난 좁은 창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벽이라고 할 만한 벽은 모두 책장으로 채워져 있고, 책장마다 책이 이중으로 빼곡했다. 책 위로도, 책장 위로도 책이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오래되고, 노랗게 변색되고, 손때가 묻은 책이었다. 세로글씨나 한자로 된 책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 "깨우지 마, 피곤할 테니까."
남자로 착각할 만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서부터 손까지 화상을 입은 키 큰 여자가 모락모락김이 오르는 머그컵을 수호에게 내밀었다. 수호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얼떨떨한 기분으로 잔을 받았다.
 
- "폭력 신고 112, 청소년 상담 1388, 24시간 주야간 관계없이 신고할 수 있고 필요하면 가족과 격리해 주고 보호시설도 제공해 줘. 1644-7077로 전화하면 법률 상담도 해줘."
적어둔 종이를 앞에 두고 읽듯 줄줄 읊는 말에 수호는 어안이 벙벙해져 선혜를 바라보았다.
"쉬운 일이라서 하는 말이 아냐. 힘든 줄 알아. 그래도 해야 해. 해낸다면 난 널 존경할 거고."
수호는 선혜에게 붙들린 손을 내팽개치듯 빼냈다. 하마터면 거의 칠 뻔했다.
"무슨 소리야, 너."

-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일순간 선혜의 눈이 진홍빛으로 보였다.
"마구니가 대신 찾아간다고 했잖아."

- 선혜가 손을 뻗자 책장에 기대 있던 작은 지팡이가 맑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핑그르르 날아와 손에 잡혔다.
작은 지팡이는 일 미터 남짓한 길이로 주욱 늘어났고, 지팡이에 매직펜으로 그린 점은 잘 세공된 피리 구멍으로 변했다. 자신을 바닥에 깔아뭉갠 채 내려다보는 이 사람은 더는 아이가 아니었다. 

 

- "네 말이 맞아. 그런 것은 없어. '악마'라고 말해야 네가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했을 뿐 그들은 악마와는 다르다."

"..."
"말했다시피 마구니는 사람의 욕망을 군대로 쓰는 이계의 종족 같은 것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커지면 그들의 군세는 커지고, 줄어들면 반대로 우리가 유리해지지."
"..."
"그러니 네 직감이 맞아. 나는 너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다. 마구니에게서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야. 그러니 나를 경계해도 좋아.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사며, 내 적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단지 나는 누군가에게는 선이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일 것이고. 하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네게 구원일지 아닐지는 나 역시 모를 일이다."
"네가 뭔데?"
"퇴마사 마호라가."
아직 소개를 안 했던가, 하는 얼굴로 검사가 답했다.

- "같은 사람이야."
여전히 간결한 답이었고, 여전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호라가는 미소를 지었다.
"이 모습은 내 아트만이다."

- "내 진짜 자아. 이번 생애에 만들어진 열 살짜리 어린애의 껍질뿐인 자아가 아니라, 태곳적부터 이어 내려온 진짜 자신. 무수히 다시 태어나고 죽으며, 모든 역사의 현장에서 살고 죽었던 진짜 영혼."

- 들으면 들을수록 모를 말이었다.
"퇴마사가 남의 마음에서 뭘 하는 건데?"
"듣던 중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마호라가가 답했다.
"마구니와 그 대적자의 전쟁터는 유사 이래로 사람의 마음속이었다."
말은 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모를 일이었지만.

- "난 마구니 따위..."
'만난 적 없어' 하고 말하려다가 수호는 멈칫했다. 이 황량한 풍경, 이 추위, 어째서 이토록 익숙한 거지? 내 마음이라서? 아니면?
수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고 답했다.
"... 마구니 따위 만난 적 없어. 사람 잘못 찾아왔어."
"마구니는 카마를 만들고 나면 보통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니까."

- 마호라가가 피리를 눈 덮인 바닥에 푹 꽂았다. 그리고 수호를 향해 걸어오며 피리 안에서 실처럼 가는 검을 뽑아냈다. 도무지 그 안에 어떻게 들어 있었지 모를 검이었다. 피리 안에 검신이 있다기보다는 뽑았을 때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
 
- 나는 소원을 빌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 "하나만 더 묻겠어."
수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내 욕망이라면, 그걸 잃는 것이 왜 구원이라는 거지?"
침묵이 이어졌다.

- "쓸데없이 시간을 끌었군, 마호라가."
아난타의 목이 길게 늘어났다. 저대로 구름까지 치고 올라가는 것 아닌가 싶어졌을 때 다시 휙 하고 도로 내려와 콧김을 뿜으며 수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 "하긴, 이런 멍청한 놈 하나쯤 내버려 둔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누구 졸병도 못 해먹을 시시껄렁한 욕망일 텐데. 아무래도 이놈은 지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라도 빌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마구니가 착해서 그런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할 줄 아나 보지. 욕망에 불타 죽든 말든 내버려 둬." 
마호라가는 아난타의 악담을 사과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수호에게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기억해?"
"무슨 상관이야, 무슨 소원을 빌었든."
마호라가는 아난타가 끼어드는 것을 내버려 두며 수호에게 시선을 꽂았다. 마음 너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걸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게 뭐든 내 소원일 테니까."
수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기가 몸을 파고드는 걸 느끼며 답했다. 지금 이건 내 생각인가? 아니면...?

- "다른 이유는 없어."
빼앗길 수 없다, 잃을 수 없다. 이룰 수 없다 한들 잃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게 내 생각인가? ... 아니면?

 마호라가가 말렸지만 아난타는 계속했다.

- "네 아버지는 가게가 망했을 때 마구니와 만났어.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느냐고? 하! 여기 네 마음 꼬락서니를 보면 알고도 남지. 네 마음에 몰아치는 이 눈보라를 봐."
"네 아버지는 소원을 빌었겠지. 이를테면 돈을 만지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소원의 표면일 뿐, 두억시니가 지배하는 곳에서 모멸의 바닥에 떨어진 인간이 비는 소망은 하나뿐이야. '내가 멸시받은 그대로 남에게 돌려주겠다'는 소원."


- "돈을 달라고 할 땐 그걸로 행복해지려고 비는 것이 아니야. 돈으로 남을 멸시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예뻐지게 해달라고 할 땐 행복해지려고 비는 게 아니야. 그걸로 남을 멸시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 "그들은 정말로 자기를 멸시한 놈들은 쳐다보지도 않아 보통 나쁜 놈들은 센 놈들이고, 센 놈에게 덤볐다간 자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두억시니는 사람의 마음을 바닥까지 쇠약하게 하고, 바닥까지 쇠약해진 사람은 아주 작은 위험도 감당하려 들지 않아. 대신 자신에게 저항할 수 없는 약하고 힘없고 작은 것을 찾아내지."
"..."
"아이는 부모에게 저항하지 못해. 쪼그맣고 약하지. 아무리 내 새끼고 지금까지 사랑해 왔던 아이라도 상관없어. 모멸의 늪에 빠진 사람은 남을 모멸하겠다는 욕망 외엔 남은 것이 없으니까."
아난타의 거대한 옥빛 눈에 수호의 모습이 비쳤다. 창백해져서는 눈을 크게 뜬 채 눈바람을 맞으며, 반쯤 정신을 놓은 모습이.
"그러니 요약해 주지. 꼬마, 네가 빌었을 소원은 단 하나."

"..."
"네 아버지처럼 되는 것뿐이란 말이다."
"아난타!"
마호라가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 엄마가 돌아가신 이래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수호를 비행기 태우며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수호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니 같이 좋아서 춤을 추었다. 얼굴을 비비는 수염도 얼큰한 술 냄새도 기분이 좋았다.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사주셔서 배 터지게 먹고는 밤에 서로 부둥켜안고 자기도 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런 건가 보다 생각했다.

-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불이 다 꺼져 있었고 아버지는 거실에 등을 돌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말을 걸자 괴성을 지르며 방에 들어가라고 했다. 수호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새 아버지가 짐승처럼 우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 지르는 것보다 우는 것이 무서워 밤새 떨었다. 나중에야 동업자였던 친구가 빚만 떠안긴 채 날랐다는 말을 들었다. 

-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수호는 알 수가 없었다. 왜 그 대가를 자신이 치러야 한단 말인가?

-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며 욕을 했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욕을 했고 지하철에서 욕을 했다. 누가 죽으면 시원하다고 했고 누가 괴로워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고함쳤다.
그는 자신이 가엾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가엾은 자신을 가엾어하지 않는 세상 전체에 복수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 '난 이제 죽었어. 아버지가 날 죽일 거야.'
[달라질 게 없어.]
마음의 소리가 말했다.
[뭘 하든 넌 죽었어. 네가 뭘 했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야. 네 아버지가 계속 널 속여왔을 뿐이야. 네가 잘했으면 달랐다고 네가 잘했으면 아버지도 친절했을 거라고.]
"..."
[사람을 괴롭히는 주제에 그 책임마저 제가 괴롭히는 사람에게 떠넘겼어. 하잘것없는 놈이다.]

-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 공간이 주는 이질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저 세상천지에 겁날 것 없다는 듯한 목소리 덕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완전히 말라버린 것 같았다. 평생 쓸 두려움의 총량을 벌써 다 써버린 기분이었다.
수호는 일어나 앉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상대를 불렀다.
"카마."
[...]
"네가 카마지?"
[그런 것 같다.]
마음이 답했다.

- "그런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네가 나를 분리해서 생각했을 무렵에야 너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목소리가 답했다.

- 카마.
마구니의 마력으로 생겨나는, 마음의 욕망이 인격화된 결정체.

- "카마가 말을 할 수 있는 줄 몰랐는데."
[못 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어디에 있는..."
그것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 "그럼 너도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모르겠네."
[그건 아냐.]
낮고 음침한 소리가 답을 했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아는 건 단 하나, 그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뭘 빌었어?"
수호는 기대하며 물었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답이 없어?"
[확신이 없어서.]

- [아직 네가 내 편이란 확신이 없다.]
"뭐?"
[너와 같이 있던 퇴마사들이 계속 나를 없애려 했다.]

 

- 수호는 그제야 아까 마호라가가 카마를 없애겠다고 했을 때 느꼈던 격렬한 저항감을 떠올렸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던 건가.'
수호는 지금까지 제 생각이라고 믿었던 마음의 소리들을 전부 다시 떠올렸다. 마호라가와 아난타의 무기와 전투 방법을 분석하며 저항할 방법을 연구하던 목소리.
'다 이 카마의 속삭임이었던 건가.'

- [네가 만약 그 퇴마사들에게 붙는다면 너도 내 적이 되겠지. 네가 내 목적에 동의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째서? 내 소원인데도?"
[내가 네 마음을 탐색한 바로는, 지금은 아냐. 지금 네가 그 소원을 듣는다면 아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화들짝 놀랄 거다. 절망에 빠져 정신이 나가서 빌었던 소원일지도 모르겠군. 나완 상관없지만.]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나를 해치는 소원이란 뜻이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남에게 해가 되는 거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 [이곳은 진짜가 아니야. 지금 네 몸도 진짜 몸이 아니야. 정확히 설명은 안 되어도,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결정체 같은 것이겠지. 수호라는 인간의 본바탕이 되는 인격... 본 本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
[모양을 바꿀 수 있을 거야.]

-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수호의 반에서 자각몽을 꾸는 법에 대한 토론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지 아는 것.’
그뿐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꿈은 자기 생각대로 변한다.

- 꿈을 조종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꿈을 꾼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꿈인지 모르는 시점에서는 내 생각대로 몸이나 세상이 변할 리가 없다는 믿음에 마음이 지배되고, 꿈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은 언제나 꿈을 조종한다. 조종할 수 없을 때는 조종할 수 없다는 믿음에 꿈이 지배받는 것이다.

- 수호는 칼을 노려보았지만, 칼은 파르르 떨 뿐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칼이 된 이상 생각이 고정되어서 다른 무기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안정적인 형태.'
수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손까지, 아니야. 손목은 꺾인다. 팔꿈치 가까이까지.
눈을 떠보니 이십 센티쯤 튀어나온 검을 감싸고 손등에서부터 손목과 팔까지 뒤덮은 검은 갑주 모양의 보호구가 생겨나 있었다.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손잡이도 생겨났다.  


- 추락하는 사이에 선혜의 몸이 미끈하게 늘어났다.

"트바스트리."
선혜가 이름을 부르자 다리가 없는 자리에 철컹거리며 기계 부품이 날아와 붙었다. 마호라가가 된 선혜는 지팡이를 양손에 쥐고 다시 이름을 불렀다.
"사비트리."

- [움직여.]
소리가 채근했다. 웃음이 났다.
'다음엔 널 죽여버려야겠는데.'
 
- 방에는 조금 전 난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천장에는 마호라가가 뚫고 내려온 벌레 구멍 같은 작은 구멍과 탄 자국이 남았고 벽 한쪽에는 유리컵이 깨져 나뒹굴었다.
"그슨대."
마호라가는 검을 피리 안에 꽂으며 읊었다.
'그슨대?'
수호는 아까 그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은 채 무심히 의문했다.
"그슨대, 나, 퇴마사 마호라가, 범천 梵天이 주신 권능으로 너를 정화하겠다. 네가 온 근원 그대로, 흩어져 마음으로 돌아가라."

- "계명 戒名."
엉덩이 뒤에서 숨찬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돌아보니 여름날 뱀처럼 아난타가 축 늘어져 누워 있었다. 마호라가를 쫓아오다가 기진맥진한 것 같았다. 크기도 강아지만 하게 줄어 있었다.
"계명?"
"원천의 이름.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이 아니라, 태고로부터 받은 근원적인 이름이라고나 할까."

- "그슨대, 처음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커져서 사람을 해치고, 칼로 벨 수도 없고 물리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지."
아난타는 축 늘어진 채로도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그건... 옛날이야기잖아? 신화 같은 거 아냐?"
수호가 묻자 아난타가 답했다.
"신화야말로 인간 무의식의 산물이야.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고 모든 신화가 담겨 있어. 아니, 거꾸로 그 신화와 전설이 카마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 "신화는 실제 있었던 무수한 이야기의 조합이야. 때로는 여러 생을 거쳐 살았던 한 사람의 여러 생을 합한 이야기기도 하지. 카마의 이름을 알면 속성을 알 수 있고, 반대로 속성을 보면 또 이름을 알 수 있어. 그 사람이 빈 소원도 짐작할 수 있지."
"..."
"네 아버지는 마구니에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을 거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했겠지."
아난타는 땅을 짚고 앉은 수호의 팔을 감아 타고 오르며 말했다.
"그래서 인형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지."
"그게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말의 실체인 거야?"
... 결국 마구니의 장난이라는 건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가.

- "닥쳐!"
마호라가가 일갈했다.
"여기 네가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수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모두 태초부터 살아왔어. 태초부터 생명을 이어 왔어! 수천 수백 번을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났어! 모두가 역사의 증인이었고, 주인이었고, 신화였고, 전설이었어! 그런데 네가 감히 그 위대한 존엄을 무시하고 비웃고, 폄하하는 것으로 네 몸집을 불리고, 먹이로 삼았어! 너는 내가!" 
마호라가는 마음에 쏟아지는 모든 모멸을 태워 없애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내가 반드시 없애버리고 말겠어!"
눈에 눈물이 맺혔다. 붉은 눈이 타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죽는다 해도! 다음 생에라도! 그다음이라도!"

- 물안개가 머리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구름 같은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쳐갔다.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난타가 긴 꼬리를 휘저으며 두억시니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길게 찢어진 옥색 눈이 자신을 향했다.
'왜 내려오지 않지?'

- 평상시에는 하지 않던 생각이 수호를 덮쳐왔다.
자괴감에 빠져 쓸데없이 물수건만 가는데 진이 커피잔을 수호의 코앞에 내밀었다.
당연히 제 몫이 아니라 생각했던 수호는 당황했고, 이내 그게 이상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친절.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 진은 컵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올렸다. 칠 거야.
역시 비합리적이었지만 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뺨을 날리겠지. 발로 찰지도 몰라. 난 그래도 싸.
진의 손가락이 수호의 이마에 얹혔다. 화상으로 붙고 불고 얼룩덜룩 일그러진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강하고 따듯했다. 손끝에서 의지가 흘러들어 오는 듯했다.
"바로 그 생각이야."
수호는 눈을 깜박였다.
"사소한 일로 자기가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너는 똑같이 사소한 일로 남을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 아난타는 튀어나온 입을 부우, 하고 더 내밀며 날았다. 구름에 닿을 듯 솟구쳤다가는 수면을 스치듯 고도를 낮추었다.
하염없이 날아도 바다였다. 막연히 이 공간이 지구처럼 원형이거니 싶기는 했지만 넓이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비밀이야."
아난타가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마. 난 마구니나 다른 카마들에겐 진의 아트만인 척하고 있으니까."
"어째서?"
"그러지 않으면 마구니가 수시로 진의 마음에 들어와 나와 계약하려 들 테니까.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소환되어 이런저런 마음의 전쟁터에서 싸우게 되겠지."
"그럼 남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건?"
"마호라가가 불러서 들어가는 거야. 난 마음 못 열어."
"그러면 진씨는?"
"진은 거의 힘을 잃었어."
"왜?"
"내가 진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 마음에는 진이 쓸 만한 영역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퇴마사는 그렇게 세상에서 하나씩 사라지는 거야. 결국 언젠가는 욕망을 갖게 되기 때문에."

- "나름의 이유를 붙여 해석하지. 혹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지금까지 억눌러왔다고 믿곤 해."
아난타는 말을 이었다.
"현재란 거대한 것이라,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만이 실체가 있는 유일무이한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사람이 일생 같은 인성과 성격을 갖고 산다는 건 굉장한 착각이야."

- "그게 내 소원이었을까?"
"더 이상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모르지. 진도 힘이 세어지게 해 달란 소원을 빈 건 아니야."

"..."

"그런 소원이 아니더라도, 네 소원은 '죽음을 감수해야' 이룰 수 있는지도 몰라. 그건 네 소원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뜻이고."

 

- "난 내 카마가 하는 말을 내 마음의 소리라고 착각했어."

호가 말했다.
"그게 다 내 생각이라고 믿었지만 전부 아니었다면..."
"네 마음의 소리야."
아난타의 말에 수호는 고개를 들었다.
"네 아버지와 네 아버지의 카마가 아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렇기도 하지만 정확히 그렇지도 않아. 카마는 사람의 욕망이 순수하게 극대화된 모습일 뿐이야."

- "그럼 진씨는 어디까지가 진씨인 건데? 네가 없으면 어떤 사람인데?"
아난타는 고개를 까닥였다.
"사람은 계속 변해. 나는 진의 인격이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 "

- "나는 잡귀에 불과해. 살아 있는 진의 몸만이 마호라가를 지킬 수 있어. 만약 내가 이 이상 커져서 진의 마음을 해친다면 나는 살 이유가 없어."
아난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니 만약 그때가 오면, 내가 선을 넘으면 마호라가에게 지체 없이 나를 없애달라고 해두었어. 마호라가가 없애지 못하면 진이 해달라고 했지."

- "네 카마도 나처럼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래, 마호라가는 무수히 그런 제안을 들었고 무수히 많은 카마를 놓아주었지. 그러다 결국은 카마에 다 잡아먹혀 돌이킬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봐왔어. 그런데도 마호라가는 매번 카마를 놓아준단 말이야. 제 신변의 위협은 생각지도 않고. 나도 카마지만 나는 카마를 믿지 않아." 
수호는 입을 다물었다. 아난타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수호를 휘감은 몸을 풀고 목을 뒤로 뺐다.
"꼬마, 네가 아버지와 같은 소원을 빌었으리란 말은 취소하지. 사과한다."

- "어떻게 아는데?"
"너를 보면 알지. 너는 남을 모멸하지 않아. 네게 카마가 생긴 이상, 너는 이미 그 카마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야. 그러니 네 소원은 너를 보면 알 수 있어. 적어도 무엇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 '나를 보면 안다.'
수호는 그 말을 되새겼다. 아난타는 혀를 찼다.
"연이 닿았으니 카마를 없애줄 생각이었지만, 연이 닿았으니 내버려 둘 수도 있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인간은 욕망을 갖고 살아. 넌 잃는 게 있겠지만 얻는 것도 있겠지."

- 수호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난타가 날개를 펼쳤다. 바람이 불어와 바다가 크게 출렁였다. 사방에서 색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한 무리 튀어 올랐다가 바닷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꼬마, 카마와는 상담하는 게 아냐. 난 마호라가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못해. 나는 네 카마를 없애버리고 싶지만 널 위해서가 아니야. 그게 마호라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야." 
"..."
"그게 나고, 내가 태어난 이유고, 내 전부야. 카마는 자기 목적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너도, 세상 전체도, 하다 못해 내 생명이나 진의 생명까지도 내 관심사가 아니야."
"..."

"그러니 꼬마, 네 카마를 다스릴 수 있다는 자만은 버려. 녀석은 네 인생이 어디로 굴러가든, 그저 제 목적만을 위해 움직일 거야."
아난타는 몸을 빼어 하늘로 솟구쳤고 수호는 물에 빠지기 직전에 밖으로 튕겨 나갔다.

- 수호는 앞에 선 카마를 마주 보았다.
사람이다. 남자.
어른이고, 스물? 서른?
나이가 있고 인상이 날카로운 것을 제하면 어딘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얼굴.
말을 하는 줄은 알았지만, 괴수도 짐승도 아니고 멀쩡하게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나름대로는 당황스러웠다.
키는 훤칠하게 컸고 긴 검은 코트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있었다. 옷은 얼룩덜룩한 것이, 원래 검은색이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색에 물들어 결국 검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손은 비어있고 무기는 없다. 격투가인가. 아니면 다른 기술을 쓰는 걸까? 
단지 허리춤에 매달린 표주박이 눈에 띄었다. 입구가 마개로 단단히 막힌 것이 수통처럼 보였다. 카마가 딱히 목이 마를 것 같지는 않고, 마호라가의 다리나 자신의 칼처럼, 저것도 몸의 일부라고 보는 게 좋을 듯했다. 

- 이것이 내 카마, 내 욕망.
내가 바란 소원.
하지만 대체 뭘까?
이 장소, 저 모습, 뭘 말하는 거지?

- 카마의 낯빛이 변했다. 제 머리 뒤에서 날아오는 바람을 느꼈고, 그제야 마호라가가 자신의 움직임을 유도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카마는 뒤로 돌며 창을 회전시켰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마호라가의 검이 멀리 튕겨나갔고 카마도 튕겨 나가 굴렀다. 여전히 예상 이상의 타격인 듯, 카마는 한참 몸을 그리고 있다가 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마호라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마가 들고 있던 창이 방패처럼 둥근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창이 잠시 녹아 물이 되었다가 회전하는 형태로 도로 얼어붙은 듯했다. 방패 주위로는 튕겨 나간 물방울과 거품이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 "무기 모양을 바꿀 수 있다는 건가."
""조금 전에 알았다."
카마가 허세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물이 아니야. 물일 수도 없고. 네 다리처럼 내 몸의 일부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겠지."
"맞는 말이다만 정말로 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일 텐데."

마호라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투지를 일깨우는 것이 즐거운 듯했다.
"갓 태어난 망령 주제에 퇴마사들이 몇 생애를 수련해 배우는 요령을 터득했다는 건가."
"퇴마사란 놈들이 별로 똑똑하지 않은 모양이지."

- 수호가 항변할 새도 없이 마호라가는 발을 가볍게 굴렀다. 다리가 은빛으로 빛나며 조각조각 분해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괴상한 다리 쓰는 건 충분히 봤어."
카마가 말했다.
"한 가지 말해두지만, 아가야."
마호라가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함부로 '충분히 봤다'고 하는 게 아니다."

- 다음 순간, 마호라가의 의족이 물레의 실처럼 가늘게 풀려나갔다. 금속성의 은색 실이 진형을 짜듯 마호라가의 주위에 몇 겹의 궤적을 그렸다. 카마의 낯빛이 식었다. 
아난타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더 띄워 천장에 머리를 처박으며, 꼬리를 둥글게 말아 수호를 단단히 감쌌다.
은빛 실은 충분히 풀어지자 홱 방향을 바꿔 카마를 향했다. 카마가 달리며 몸을 피했지만 실은 한없이 풀려나며 뒤를 쫓았다.

- 카마는 주사위 게임에라도 진 아이처럼 속상한 얼굴로 낮은 한숨과 입맛 다시기를 반복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전투를 재생하며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눈치였다. 
문득 수호는 마호라가의 눈에 떠오른 친근한 시선에 어리둥절해졌다. 자기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오랜 인연을 다시 만나는 얼굴.
어째서?

- 갑자기 현실을 깨달은 듯, 마호라가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정화하기 전에 묻고 싶은데." 
마호라가가 입을 떼었다.
"네 목적은 뭐지?"
"알아 뭐 해?"

카마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충분히 비참하니까 빨리 끝내."
"죽음을 겁내지 않는 건 알아."
마호라가가 검을 들어 카마의 어깨에 얹었다. 카마는 검에 시선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지. 죽음을 겁내면 이룰 수 없는 목적. 그건 네 목적이 지금 수호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세계 정복..."
수호가 중얼거렸다.
아난타가 얼핏 들었는지 마호라가를 머리에 얹고 시선을 돌렸다. 뜬금없이 계란을 머리에 얹고 있던 진이 떠올랐다.

- 마호라가가 말을 이었다.
"너는 투사지, 싸움꾼이고. 그렇다면 그건 네겐 '적'이 있다는 뜻이고."
카마가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수호의 아버지는 이미 이겼을 텐데."
"그런 하찮은 인간,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네 목숨을 위협한 건 아버지였을 텐데 왜 다른 사람을 떠올렸지?"
카마가 벼락같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마호라가가 카마에게 "네 목숨"이라고 말한 순간, 수호는 그 검은 옷의 사내와 자신이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이 상황 전체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 공간은 내 마음이야. 지금은 이 몸만 나인 것 같지만... 이 공간도 나고 저 카마도 나라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 거지?
 
- "지금 죽는다고 해도 다시 태어날 거야. 너에게 마음이 먹히고 마구니의 하수인이 되어 내 동료들을 위협하는 꼴을 보느니, 나는 이 인간의 이번 생 전체를 포기하겠다."
자, 잠깐, 진심이야?
수호가 숨이 막히는 가운데에도 난처한 기분으로 마호라가를 보았지만 마호라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수호는 불현듯 깨달았다.
날 위해 싸우는 게 아니야.
다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고, 거기에 내가 끼어있는 거지. 난 무슨 착각을 하는 걸까. 애초에 나를 찾아온 것도 카마 사냥을 위해서였는데.

- 카마는 움직임 하나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 "능력을 보여주지 않고 이길 요량이야 없겠지만."
"놀리는 건가."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물로 이루어진 검, 바루나스트라. 그 무기를 쓰는 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다."
마호라가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신 본인이 아니라, 그 신의 이름을 계명으로 하는 카마일 뿐이지만."
"이름을 알았다는 건 목적도 알았다는 건가."
"이름만으로는 몰라. 더구나 네가 그 이름을 쓴다면 목적은 상상할 수 없어. 거의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 "하지만 그만한 이름이 필요했겠지. 간단한 소원은 아닐 거야."
'세계...'
[그거 아냐.]
카마가 수호의 머릿속에서 살짝 짜증을 냈다.

- "바루나."
마호라가가 이름을 불렀다.

- 이름이 불린 순간 무엇인가가 변했다.
수호는 차가운 물을 한 번에 들이켠 듯한 냉기가 몸에 흘러드는 걸 느꼈다. 속이 다 얼어붙을 것 같아 토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동시에 어둠이 눈앞에 내려앉았다. 심해, 빛도 생명도 닿지 않는 바닷속의 묵직한 어둠이.
수호는 이것이 사실상 자신의 카마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 ... 

- 사람의 겉모습 대신 그 마음의 모습이 보이는 것. 마음에 들어갔다 나오면 흔히 겪는 혼선이라, 선혜는 이상해하지 않고 수호의 등에 몸을 묻었다.
'그러고 나면 내 카마를 없애줘.'
선혜는 수호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선혜는 생각했다.
'그때 가면 너는 지금보다 더 격렬하게 저항할 거야.'

'설사 나와 진을 없애는 한이 있어도 네 카마를 지키려 할 거야...'


- 갖고 있는 동안은 버릴 수 없다. 사라지는 순간의 상실감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에 다를 바 아니다. 하지만 잃고 나면 그것을 왜 바랐는지조차 잊는다. 욕망이란 그런 것이고, 카마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선혜는 그 또한 피할 수 없는 싸움 중 하나라 생각했다. 오늘보다 조금 더 어려울 뿐, 하나의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테니까.
 
- 쌀알이 새어 나오듯이 욕망의 응어리 조각들이 심소로 흘러나온다.
이 감옥의 심소에는 그 욕망의 조각에서 생겨난 카마가 바글거린다. 대개 작은 잡귀들로 크게 위험하지도 않아 어린 퇴마사들이 훈련용으로 사냥하는 편이다.
"전염성과 자가 증식 속성에 적의 기술을 복사하는 조짐도 있었다. 내버려 뒀으면 나라 전체를 집어삼킬 뻔했다."
"카마 하나가요? 망상이 지나치군요."
"사람의 마음의 늪에 촉수를 뻗고 있더구나."

- 마호라가는 광목천이 말한 형태를 상상했다. 본체는 동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지만 수십, 수백 갈래로 뻗은 가느다란 실과 같은 촉수를 주변 사람의 마음에 꽂고 있는 괴물을.
"그 촉수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모멸을 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모멸에서 양분을 받아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내가 제때 없애서 세상을 구했구나."
"그런 꼴을 하고도 허세입니까."
마호라가는 피리를 칼처럼 들어 광목천을 가리켰다.
"답해주십시오, 서의 수호자, 서의 수장, 광목천. 내 스승이시여, 왜 그랬습니까?"
광목천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 "마구니에게 홀렸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세상 퇴마사가 다 타락한다 한들 타락할 사람이 아닌 줄을 내가 압니다. 대체 왜 스스로 마구니를 찾아가 계약을 하고 카마를 만든 겁니까?"
"..."
"서는 당신 때문에 해체될 판입니다. 당신 휘하의 신장과 나한들뿐 아니라, 당신과 친분이 있던 모든 사람이 마구니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서의 신장과 나한들을 구금하고 심문하고 있습니다."
"..."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그래,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이겠구나."

- 광목천은 턱짓으로 제 몸을 가리켰다. 손과 팔과 허벅지와 몸, 다리를 꿰뚫은 창과 활에 시선을 두었다.
"설령 내가 타락했을지언정, 이리할 까닭이 없다. 파문시키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게 하면 그만인 것을."
마호라가는 당황했다.
"설령 내가 타락했을지언정, 내 휘하의 사람들에게 고초를 겪게 할 까닭이 없다. 나와 관련된 사람을 의심할 까닭도 없다. 내가 수호하던 영역을 부수어 아군의 진영을 무너뜨릴 이유도 없다."
"무슨 말을..."
"교단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에게 이리 무도하게 나올 만큼 자신을 굳건히 정의라 믿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나는 배신하고자 한다. 자신이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는 곳에 정의는 남지 않는다. 타락한 것은 내가 아니라 교단이다. 교단이 타락했기에 나는 거기 머물지 않고자 한다."
"고작 그런 이유로...?"
"'한편으로는'이라고 했다."

- "이런 훈련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마음 안에서 쓰는 건 몸이 아니잖아요."
진은 말똥말똥 수호를 보았다.
"그럼 뭘 쓰는데?"
"... 에, 상상?"
"그럼, 내가 봉으로 네 머리를 쳤을 때 방어할 방법을 열 개쯤 상상해 봐."
수호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제 모습만 열 종류로 떠오를 뿐이었다.

 

- "자기 상상을 과신하지 마. 현실에서 할 수 없으면 상상도 막혀. 상상도 지식과 훈련에서 나오는 거야."

- "선혜도 나도, 네가 몸을 쓰기를 기대하지 않아."
진은 봉을 내려놓고, 대신 발밑에 있던 한 뼘 반 정도 길이의 막대기를 발로 쳐올려 손에 받아 쥐었다.
"하지만 훈련받지 못한 평범한 창병이 엘리트 기사를 물리친 일은 역사에도 제법 있어. 네가 약해도 타격 거리가 길면 실력 차를 좁힐 수 있단 말이지." 
진이 공기를 타듯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주춤하는 수호에게 진이 호통쳤다.
"뭐 해, 들어와!"

- "목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도망은커녕 한 걸음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공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치는 시늉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것조차 피하지 못했다.
동시에 검에 실린 무게가 진의 공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진과 했던 것이 훈련이라는 이름의 운동이었다면, 방금 마호라가의 공격에는 무심하기까지 한 냉랭한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내가 네 목숨을 살려두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거둘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 "마음속 전투라도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마호라가가 수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검을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공격이 날아오면 피한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거나 몸이 굳어버리지."
마호라가는 말을 마치자마자 검집을 그대로 수호의 코끝을 향해 날렸다. 히익, 하며 수호는 왼손으로 마호라가의 검을 막는 시늉을 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뺐다. 마호라가는 그대로 수호의 왼손을 탁 쳐내고 이마를 툭 밀었다.
"아야."
"본능적으로 약한 눈과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몸짓이지만, 상대가 돌멩이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적인 이상 더 크게 당할 뿐이다. 게다가 지금 네 그 형체는 마음의 형상이야. 실상 몸의 어느 부위라고 더 약하거나 강하지도 않아."

- "본능에 저항해라. 한순간에 방어와 공격, 더해서 다음 움직임까지 같이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수호는 기가 팍 죽어 물었다.
"본능에 어떻게 저항하는데?"
"반복 훈련밖에는 없지."

- 마호라가의 검이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수호의 검... 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쇳덩이가 수박처럼 둘로 쩍 갈라졌다.
"!!"
생살이 잘리는 아픔.
"막아라."
차디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마호라가의 검에 돌풍이 실리며 모래바람이 회오리쳤다. 미끄럼틀을 타던 돌멩이들이 놀라 미끄럼틀 아래로 쪼르르 숨었다.

- 수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감으면 안 돼. 방패, 방패.'
수호가 생각하는 사이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팔에 천금 같은 무게가 실렸다. 수호의 손에서 투박한 방패가 튀어나와 마호라가의 칼을 막았지만, 급히 만든 탓에 고통이 그대로 몸으로 느껴졌다.
"늦어."
말끝에 수호의 방패가 유리 조각처럼 부서졌다. 숨이 턱 막혔다.

- "옛사람들은 공룡의 뼈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내 몸을 만들었지. 내 기원부터 상상이란 말이야. 애초에 난 얼마나 큰지 안 정해져 있어."
'아하.'
알 것 같았다. 여긴 결국 마음의 세계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전부 마음의 조각이다. 모든 것은 뭘 믿는가의 문제.

- "그러니까, 내 카마도 자기 무기를 물이라고 '믿기 때문에' 모양을 바꿀 수 있단 말이지?"
아난타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수호가 바루나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불쾌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난타는 이내 한껏 너그러운 표정을 하며 얼굴을 폈다.
"그 이상이야. 걘 자기 무기가 물이라는 걸 아는 거지."

"차이가 뭔데?"
"믿음에는 반드시 의심이 깃들어 있어. 그건 불안정한 거야. 넌 '알아야' 해. 네 검이 뭔지.”

- "그럼 너, 네 검이 뭘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뼈..."
묘하게 바다가 잔잔해진 기분이었다.
아난타는 뭘 잘못 먹은 얼굴로 오만상을 쓰고 수호를 바라보았다.
"... 그럼 되게 아팠겠는데."
"응."
"자주 부러졌잖아."

- "이번 생의 너에게 너를 한정 짓지 마."
"나에게 한정 짓지 말라고...?"
"너는 과거에 네가 아닌 무엇이었어. 지금과 달랐을 때가 있었어. 무한한 힘을 갖고, 지금 네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했을 때도 있었지."
"..."

"네 유전자는 태고의 바다에서부터 온 거야. 너는 모든 진화를 거치고 모든 생명을 다 거쳤어.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해왔어. 태고의 영혼이 모두 네 몸에 남아 있어. 그때부터 살아온 전체가 다 너야. 자신을 함부로 하찮게 여기지 마."

- 아난타는 턱으로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호는 문득 아난타가 진보다 제멋대로고 다혈질일지언정 진의 마음의 일부라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말, 비슷한 태도.
'세상에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중학교로 향하는 시끌시끌한 통학 버스 안, 수호는 앞 좌석에 앉은 생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무릎에 기관총을 들고 앉은 생물은 사람이 아니라 큰 개였다. 품종은 골든리트리버 같았고, 영단어장을 유심히 보는 개의 얼굴에는 눈이 네 개 붙어 있었다.
'설마 저거 진짜 총은 아니겠지?'

- 수호는 다시 '세계 정복...'을 생각하다가 마음 어딘가에서 또 누군가 짜증을 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 "처음에 바루나는 인드라에게 쫓겨나 죽음의 신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다시 야마에게 지위를 빼앗겼지."
진은 읽던 책을 수호 쪽으로 내밀며 손으로 짚어주었다. '쿠베라'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의 그림 옆에는 '북', '인드라'의 그림 옆에는 '동', '야마'의 그림 옆에는 '남'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바루나'의 옆에는 '서'가 쓰여 있었다. 각 방위를 수호하는 신의 이름.
"말하자면 바루나는 계속 몰락한 신이야. 몰락하면서 거의 모든 영역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자리를 거쳐 왔어."

- 수호는 마호라가가 바루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만으로는 몰라. 더구나 네가 그 이름을 쓴다면 목적은 상상할 수 없어. 거의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그게 그런 뜻이었나.

- "더해서 불교로 넘어오면서는 그 지위마저 잃고 서방의 방위신이 되지. 애초에 방위신 전체가 불교에서는 역할이 희미해졌어. 4대 천왕이 그 방위신의 자리를 대신했으니까."
진은 책장을 넘겼다. 뒷장에는 불교의 사천왕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북의 다문천 多聞天, 동의 지국천 持國天, 남의 증장천 增長天, 서의 광목천 廣目天.'

- 하나같이 부리부리한 눈에 우락부락한 얼굴.
그중에서도 왠지 한 천왕에게 시선이 갔다.
한 손에는 창을, 다른 손에는 탑을 든 사람. 다른 천왕보다 확연히 젊다. 유달리 눈이 크고 얼굴이 희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 한참 사진을 보던 수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이 사진 좀 이상한데요."
"뭐가?"
수호는 아까 보던 책을 뒤져 지금 보는 책 옆에 펼쳐놓았다.

"여기, 이 책에서는 광목천이라는 사람이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지금 이 책은 창과 탑을 들고 있어요."
"아, 그거."
진이 안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이라는 듯, 책 더미에서 다른 책을 꺼내 팔락 팔락 펼치며 말했다.
"광목천만이 아니라 다른 천왕도 그럴 거야. 여기, 신라 시대 석굴암 사천왕 부조를 보면 원래는 북의 다문천이 탑을 들었거든."
수호는 사진을 눈여겨보았다. 돌에 새겨진 사천왕 부조 사진이었다. 우측 안쪽의 천왕이 탑을 들고 있었고, 다른 천왕은 모두 칼을 들고 있었다.

"다른 천왕이 든 지물은 계속 변했지만, 다문천이 탑을 드는 것만은 늘 명확했지. 그런데 조선 시대부터 새로 비파를 든 천왕이 생겨나."
진이 방금 펼친 책 위로 수호가 보던 책을 덮었다.
"학자들은 당연히 탑을 든 천왕이 계속 다문천이라고 보고 탑을 기준으로 나머지 천왕의 이름을 배치했어. 동의 지국천이 악사의 신 건달파를 부리니까, 새로 생겨난 비파 천왕을 지국천으로 보았지. 그리고 서의 광목천은 용을 부리니까... 용을 든 천왕을 광목천으로 생각했어. 그러면 나머지, 칼을 든 천왕이 남의 증장천이 되지. 각 천왕의 성격에도 맞고 어울리는 상징이지."

- "그러다가 나중에야 비파를 든 천왕이 다문천이라는 기록이 발견되기 시작한 거야."
진이 비파를 든 천왕을 가리켰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얼굴이 푸른 노인 장수였다.

 

- "처음에는 기록이 잘못된 줄 알았지만 발견되는 기록이 너무 많았어."
진이 여러 사찰의 조선 시대 사천왕을 모은 책을 팔락 팔락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자리도 이상했지. 원래 다문천의 자리는 경내를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의 안쪽이나 위쪽, 북동이었어. 그런데 탑을 든 천왕은 왼쪽의 안쪽, 서북에 있어. 거긴 광목천 자리인데 말이지." 
'?'
"내 생각이지만, 다들 지물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

- 바루나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카마가, 한 줌의 물밖에 다룰 줄 모르는 카마가 내 공격을 세 번이나 받아쳤단 말이지. 잘 꽃단장해서 키우면 얼마나 예뻐질지 가늠도 안 되는걸. 아아, 참을 수 없어. 몸이 달아올라 미치겠군. 덮쳐버리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야."
"..."
'이놈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나를...'
하지만 바루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놈은 아직 날 원한다. 그건 날 살려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 "단장하고 기다리고 있으렴. 신랑이 또 찾아올 테니."

"..."
"내 이름을 기억해라. 내 이름은,"
빛의 궤적이 어지러이 날리고 황금빛으로 소멸하는 벌레들의 파편이 낙엽처럼 내려앉는 가운데, 마구니가 속삭였다.
"파순 波旬이다."

- 아난타는 어리둥절했다. 마호라가가 큰 구멍 앞에 서서 위험한 줄도 모르고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멍은 넓고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아래에는 검은 불꽃이 수백 마리의 뱀처럼 넘실거렸다. 하지만 마호라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뿐이었다.

- '이해할 수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마호라가는 생각했다.
'나는 결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퇴마사로서 저주인가, 축복인가.
'... 결코, 마구니의 마음만은.'

- 천오백 년 전.
하늘이 붉게 탄다.
타는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천지가 작열한다. 세계가 불타는 화산 속에 통째로 가라앉은 듯하다. 풍경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나무도, 들판도, 집도, 길도 불길에 휩싸여 뼈대와 잔해만 남았다. 이만한 화재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우고 곤죽으로 만들고도 남을 것을, 세상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끝없이 회복하는 저주에라도 걸린 듯, 형체가 무너지지 않은 채 단지 타고 있다.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인간계에서 흔히 욕계 중 제6천의 지옥이라 부르는 공간.
제정신을 가진 인간은 잠시도 머무를 수 없는 곳. 누구라도 잠시라도 머물면 정신이 날아가버릴 법한 곳.

- 이 극악의 땅에 한 남자가 내려섰다.
순백의 비단 도포를 두르고 긴 창을 손에 든 사내다. 창에는 새하얀 비단 끈이 매여 있다.
나이는 서른이나 그쯤 되었을까. 눈빛은 깊고 표정은 평온하다. 불필요한 몸짓이 없다. 죽은 사람 같지도 않고, 이 지옥에 떨어질 만한 악인 같지도 않다. 
사내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끔찍한 풍경 앞에서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다.

- "놀랍군."
작열하는 불꽃의 소음을 뚫고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린다.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퇴마사가 있다니. 아니, 들어올 의지를 가진 자가 있다니."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아니, 아마도 여자이자 남자인 듯한 목소리.

- 불꽃에 휩싸인 것이 하늘에서 태양처럼 눈부시게 강림한다. 압도적인 기운이 공간을 덮친다. 불타는 대기가 한 겹쯤 더 세상 위에 덮이듯 무거워진다. 불로 이루어진 듯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솟구치며 후광처럼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퇴마사는 상대의 모습 구석구석을 제 마음에 새기고 싶은 얼굴로 면밀히 살핀다.
"서의 수장, 퇴마사 중 가장 욕심 없고 청렴하다고 칭송받던 광목천께서 내 왕국의 문을 열고 들어와 주시다니, 이런 영광이 있나."

- "계약을 하고 싶다."
광목천이라 불린 퇴마사가 말했다. 상대의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진다.
"마음에 카마를 갖고 있으면 윤회할 수도 없고 퇴마사로 살 수도 없는데도?"
"안다."
"카마들을 퇴치할 힘을 가지려면 하나의 생으로는 부족하지 않던가.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그 지식과 정신을 물려받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고작 카마 하나를 얻고자 버릴 만한 것이 아닌 듯한데."
"어쩔 수 없다."
광목천이 평온하게 답했다.
"나는 이미 욕망을 품었으니까."
마구니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 "기대는 하고 있어. 멀쩡한 퇴마사라면 내가 보이지도 않아야 하거늘, 스스로 내 왕국의 문을 열어젖히고 찾아와 그 눈으로 나를 또렷이 보게 만든 욕망이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말이야. 세계 멸망쯤 빌어도 놀라지 않을 생각이야."
광목천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듯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래, 소원이 무엇이지, 광목천?"

- 눈을 뜨자 광목천은 푸른 숲 한가운데 놓인 큰 호수 앞에서 있었다.
호수 위에는 검푸른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부유하고 있다.
광목천은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을 꼭 닮은, 하지만 열 살 쯤은 어려 보이는 청년. 자신보다 훨씬 더 도발적이고 거칠고 거침없는 표정. 광목천이 그간 갖고 있었던 마음의 ...

- "나는 나로서 온전하다."
마호라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귀에 울렸다.

"너는 검을 만드는 것이 아니야. 그 검이 너다. 네 무기는 바로 너다."
마호라가가 수호의 어깨를 뜨겁게 쥐었다.

"그건 처음부터 너였다."

- 바루나의 팔이 진동했다.
진동한 자리에서 샛노란 금가루가 흘러나왔다. 바루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바루나는 몸을 낮추고 한순간에 긴나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손을 뻗어 긴나라의 지팡이 샹카의 새 머리를 꾹 쥐었다. 다음 순간 진동이 바루나의 팔을 폭발시켰다. 날아간 팔꿈치에서 눈부신 황금빛 알갱이가 솟아올랐다.
바루나는 슬쩍 한쪽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샹카의 머리는 멀쩡히 빙그르르 회전하고 있었다.

- "미안하군, 카마."
긴나라의 기계눈이 카메라 렌즈처럼 찰칵거렸다.
"내게는 네 전략이 다 보여서 말이지. 뭘 할지 네온사인처럼 번쩍거린다고."
"..."
"안타깝게 됐네. 팔 하나를 버리면서까지 야심 차게 일을 꾸몄는데."
'생각이 읽힌다...'
바루나는 생각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싸울 방법이 있는가?'

- "그건 처음부터 너였다."

마호라가는 반복했다.

"이름을 생각해라, 네 검의 이름."

마호라가가 수호의 팔을 꽉 쥐며 말했다.

"간디바, 하늘을 꿰뚫는 검이다."

- '그건 처음부터 너였다.'
마호라가의 말이 반짝이는 듯했다. 마치 카마에게 이름을 부여하듯이. 그 말로써 수호의 검에 실체를 만든 것만 같았다.

- 수호는 팔을 들었다.
"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수호는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잊었다. 하늘을 꿰뚫을 듯이 거대하게 뻗어 나간 검, 하나뿐이었다.

- "나는,"
바루나가 팔꿈치만 남아 황금빛을 뿌리는 팔을 긴나라를 향해 뻗으며 말했다.
긴나라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 "상온에서 모든 형태의 상태 변화가 가능하고 모든 생명... 의 근원입니다.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가장 변화무쌍한 무기입니다."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퇴마사들은 비웃음이나 짜증 없이 인내심 있게 들었다. 스칸다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말을 더듬을 뿐, 마음 안에서는 신장급의 위력을 발휘하는 나한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이론일 뿐이잖아."
비사사가 물었다.
"마음 안에서는 모든 이론이 적용된다."
금강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 이론이 믿는 마음에 도움만 된다면, 과학이든 신앙이든 관계없다."

- 수다나가 한순간만 늦게 불렀더라도 그의 아트만은 둘로 쪼개졌을 것이다.
'퇴마사의 아트만을 죽이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한 주제에, 진심으로 내 아트만을 노렸다.'
금강은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오던 마호라가의 검과 타는 듯이 붉게 빛나는 마호라가의 눈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것이 상대의 죽음이라고 말하면서도 검에 망설임이 없었다. 확실히, 파계승인가. 마호라가.'

- 천오백 년 전.
작열하는 아비초열의 공간이 어쩐지 피시시 식는 듯했다. 광목천의 앞에 서 있던 불꽃으로 이루어진 마구니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흥미가 동한 얼굴을 했다. 광목천은 여전히 초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흥미롭군, 광목천. 하지만 퇴마사라면 너도 알고 있겠지? 마구니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안다."
광목천이 답했다.
"단지 소원에 집착하게 하지. 알고 있다."
"마구니는 인간의 소원에 마력을 불어넣고 이를 카마로 바꾸어 인격과 생명을 갖고 사람의 마음에 살게 한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야."
"..."

"종류도 속성도 지정하지 않아 생명을 얻은 카마는 살고자 하지. 또한 몸이 없는 카마는 주인의 육신을 빌려서 목적을 이루어야 하니, 끝없이 마음의 주인을 채근한다. 그게 사람이 제 소원을 이루는 원리다."
"안다."

- 마구니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세계 멸망이나 세계 정복 따위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고 들어줄 수도 없다. 카마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오직 카마가 살고 있는 마음의 주인뿐이니까. 그러므로 실상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소원은 하나뿐."
"... 모두 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달라는 것.' 혹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해달라는 것.'"
광목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그 진리를 모르고 신도 악마도 도와줄 수 없는 소원을 빈다. 재력을 달라든가 권력을 달라든가 하지. 물론 그걸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없지. 전장에서는 어떤 카마든 나름의 역할을 하고, 모든 카마는 나름대로 사랑스러우니. 하지만 너는 퇴마사다. 그것도 퇴마사의 수장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카마로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텐데."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그런 소원을 비는가, 광목천?"
광목천은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떴다. 자신의 인생 전체, 살아온 나날 전체, 혹은 이후의 후생마저 하나 하잘것없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다.
"물론이다."
광목천이 답했다.
마구니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붉은 입술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명화에 그려진 여신의 입술처럼 아름답다.

- "카마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퇴마사 한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나 보네?"
"내 욕망의 크기를 믿어보겠다."

광목천은 가볍게 숨을 쉬었다.

 

- "타락한 퇴마사를 멸할 힘을 갖는다."
마구니가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눈동자가 잘 세공한 보석처럼 황금빛으로 빛난다.
"이것이 내가 생애를 통틀어 품은 최초의 욕망이며 또한 단 하나의 욕망이다."
마구니의 웃음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즐겁군, 광목천. 그 마음에 한 점의 욕망도 없다고 알려진 퇴마사."
마구니가 광목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내 카마들의 목적에 일일이 관심을 두지 않지만, ... 네 소원은 내가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군. 흥분을 참을 수가 없다."
그의 불타는 손이 광목천의 뺨에 와 닿았다. 광목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육욕천 중 제6천 타화자재천의 왕, 마구니 중의 마구니, 파순의 권능으로 이르노니."
마구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말한다.
"내 제1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다. 제3군대는 ... "

- "만약에 그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고."
진은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와 카마 중 어느 쪽도 서로를 제압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어느 쪽도 굴복하지 않고, 서로 동등한 관계가 된다면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룬다면."
진은 로봇과 사자 인형을 나란히 들어 수호를 보게 했다.

"너희 둘은 중도에 이를 거야."

- "중도?"
"그건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
"..."
"중도에 이르면 너와 카마의 다툼은 멈출 거야. 누구도 서로를 이기려 들지 않고, 내쫓거나 차지하려 들지 않게 되고."

- "음, 사실 나도 거기에 제대로 도달한 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거의 가깝게 이른다면..."
진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더라,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생 전체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고나 할까."

'의도하지 않는?'
"부자가 되겠다든가 하는 방향성이요?"

"아니, 그건 카마지."

-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갖겠다는 생각 없이, 그에 대해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진이 말을 이었다.
"네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너의 삶을 이끄는 끌림. 의도하지 않아도 이끌리는 너의 지남철."
"..."

"중도에 이르도록 해봐, 수호, 어렵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퇴마사의 교리인가요?"
"아니."
진은 선혜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혹여 누가 들을까 봐 걱정하는 얼굴로 수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고는 귀에 속삭였다.
"아주 옛날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 내게 가르쳐준 거야."

- "실은 내가 전생에서 기억하는 건 그것뿐이야. 신기하게도 그 장면만 생생하게 남아 있거든. 아주 어릴 때부터 꾸었던 꿈이야. ... 음, 물론 나는 여러 번 윤회가 끊어졌으니, 그때의 나를 정말 나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애매하지만." 

- 광목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퇴마사들에게 들었을 땐 상황이 상황인지라 귀 기울여 듣지 못했던 이름.
"퇴마사 중에서 가장 먼저 타락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그 사람은 스스로 마구니를 찾아가서 마음에 카마를 만들고 파문당했다고 해. 아직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 천오백 년 전.
광목천의 마음 안.
마호라가는 바루나와 수합을 겨루고는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바루나, 광목천의 카마.
비록 지금은 지위를 잃었다지만 퇴마사 중 최고위, 단 네 명뿐인 천왕의 마음에서 태어난 것.

갓 태어났다지만 얕볼 상대가 아니다. 광목천을 빼다 닮은 외모와 성격, 꼭 닮은 무예와 기술.
이만큼 본체를 닮은 카마라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고도 뚜렷한 의지와 소망이었다는 뜻. 이미 마음 전체가 그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뜻.
아마 이 카마를 없애버린다면 광목천의 인격 일부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광목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 그러나 없애야만 한다.
제 욕망에 진 이상 이미 내가 알던 광목천은 없다. 저걸 물리치지 못하면 나는 파문당하고 퇴마사로서의 삶은 끝난다. 퇴마사로서의 삶이 끝날 바에야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저걸 없애고 죽는다면 다음 생이 있다. 다음 생에서 얼마든지 퇴마사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일격에 모든 걸 건다.'
마호라가는 사비트리를 쥐고 바루나를 향해 돌진했다. 검에 뚫린 구멍에 바람이 깃들며 신비한 음색이 혜성의 꼬리처럼 울려 퍼졌다.
같이 죽을지언정, 승리에만 집중한다.

- 단지, 기세를 줄이지만 않는다면, 최소한 같이 꿰뚫을 수 있다.
순간,
바루나는 바루나스트라가 마호라가의 이마에 막 닿기 직전 검을 치웠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가슴을 검 앞에 들이댔다.
마호라가는 헉, 하고 숨을 쉬며 멈춰 섰다.
하지만 달려드는 기세를 멈추지 못해 검이 바루나의 가슴을 찌른 채로 멈추고 말았다. 바루나의 가슴에서 황금색 빛의 알갱이가 쏟아져 나왔다.
"왜 멈췄지?"
바루나가 물었다.
"너야말로 왜 멈췄지?"
마호라가의 질문에 바루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너는 내 목적이 아냐."
마호라가는 당황했다.
"넌 타락하지 않았으니까."

- 눈앞의 풍경이 변했다. 덩치 좋은 아저씨가 입맛을 다시더니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났다.

"뭐, 오늘은 이만 가마. 너도 낯선 사람이 갑자기 와서 놀랐을 테니."
남자는 뚜벅뚜벅 다가와 수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빛나는 어금니를 드러냈다.
'나티의 말을 듣고 반응한 거야.'
수호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자기 안에 카마가 있다는 것을 모르겠지. 카마가 마음에 있는 줄 몰랐을 때의 나처럼, 카마가 하는 말을 자기 마음의 목소리로 착각하겠지. 마음에 카마가 있는 줄 모르니, 훨씬 더 카마의 말대로 행동하겠지.

- "카마는 제가 사는 마음의 안전 외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그래서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고?"
"왜 없을까. 카마를 그 사람이 만든 것을."
'마구니는 그저 욕망에 생명을 줄 뿐이다...'라던 아난타의 말이 떠올랐다. 에덴동산에 무작위로 생명을 풀어 넣는 무정한 창조주처럼.

-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몸을 지킬 수도 없는 약한 이들을 괴롭히고, 학대하고, 종내에는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들이 세상을 망칠 거대한 적과 싸우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지... 제 잔인성과 야만을 대놓고 전시하며,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 떼를 물리치는 정의의 전사인 양 으스대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선혜의 작은 눈에 슬픔이 들어섰다.
"... 아니, 그런 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좋아. 어떤 심소는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나아."
수호는 문득 선혜가 자신이 모르는 수십 년쯤 전의 먼 옛날의 일을 떠올린다고 느꼈다.
어쩌면 마호라가가 두억시니를 없애기로 맹세했던 그 시절로.

- "자신이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은 무수한 퇴마사들이 마구니에게 홀려 마음에 카마를 갖고 사라져 갔어."
"글쎄."
"왜?"
선혜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만약 내가 정의라면 나와 다른 사람은 불의가 된다. 세상에 그만한 불의가 어디 있을까."
"...?!"
"만약 내가 옳다면 나와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 된다. 세상에 그만큼 틀린 일이 어디 있을까."
"... 뭐?"
"내 옳음을 확신하는 만큼 타인의 틀림을 확신하게 되니, 모든 훌륭한 사람이 망가질 때가 그때더라."
수호는 할 말을 잃었다.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싸워?"

"싸우는 데에 뭐가 그리 많이 필요해. 살아 있으면 싸우게 돼."
선혜는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은 결국 싸우지 못하게 되었지만."
"누구?"
"그 말을 내게 한 사람."

- "그 사람이 내게 말했어."
풍경을 울리는 듯한 선혜의 맑은 목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때 선혜의 모습이 한순간 마호라가로 보였다.
마호라가가 진홍빛 눈으로 수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왜냐하면 네가 정의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타인을 불의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의가 된다."

-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의가 된다... 타인을 악이라 비난하는 것만으로, 그 유혹은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너는 언젠가 그 욕망에 빠지고야 만다. 네가 더는 싸울 수 없게 된 어느 날에, 더는 영민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된 지치고 힘든 어느 날에, ... 만약 네가 너를 정의라 믿고자 한다면."
수호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네 갈망이 비틀리고, 자신을 정의라 부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러니까, 누가 그런 말을..."
늘 답을 듣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호는 재차 물었다.

- '그거,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지.'
넓고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진의 마음속에서, 아난타는 에메랄드빛 눈을 크게 뜨며 무슨 그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다하느냐는 얼굴로 수호를 보며 물었다.
"에에에에?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응? 그렇게 이상한 생각이야?"
"말도 안 되지! 그게 어떻게 가능해? 카마와 아트만은 달라! 완전 다르다고!"

- 하지만 수호는 마호라가와 아난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 만약에, 만약에 말야.

정말 카마가 사람의 마음을 다 차지해서 빈자리가 없어진다면, 
마음에 그 단 하나의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면. 진씨의 바다와 같은, 마음의 빈 공간이 다 없어져버린다면.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본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마저 사라지고, 마음에 카마 하나만 남아 사람의 마음을 다 지배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남은 것이 단 하나, 카마 뿐이라면.

- "그 카마와 아트만을 무슨 수로 구분해?"

 

 

"그 카마와 아트만을 무슨 수로 구분해?"



 

 

- "그냥 차라니까. 어른에게 먹을 것도 받아본 적 없니?"

"..."

수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잔을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에 밴 습관, 의식하지 않아도 체취처럼 풍기는 내 삶.

아무리 숨기려 애를 써도 내 습관이 체취처럼 내가 살아온 날을 고자질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수호는 거리 한복판에서 발가벗은 기분이 되었다.

 

- "뭐 어쨌든, 이건 내가 카마고,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해서 그럴 거야. 너희 퇴마사들이라면 더 좋은 방법을 알지도..."

"아니."

뒤에서 마호라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법의 기본이다."

 

- "천왕이라면 마음을 떠났다 해도 마구니를 만날 수 없었어야 했어."

 

- "내가 신장(神將), 나를 보좌하는 진이 나한(羅漢)이다. 특별히, 신장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나한은 협시(夾侍) 나한이라고 부르지."

선혜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가리키고, 이어서 저쪽 식탁에서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진을 가리켰다.

"신장은 모두 평등하고 위계는 없지. 그 신장의 수장이 천왕. 천왕은 퇴마사 중 가장 높은 자리며, 한 분파의 지위관이야. 교단에는 각 방위를 상징하는 이름을 가진 네 분파가 있으니, 그 수장을 통틀어 사천왕(四天王)으로 불러."

 

- "그 광목천이라는 사람은 천왕이었던 거고?"

"... 그래. '서(西)'의 천왕이었지."

"그런데, 그 사람이 마구니를 만날 수 없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공기가 아까보다 더 식었다.

 

- "<천왕의 눈에는 마구니가 보이지 않으니까.>"

선혜가 창에 눈을 고정한 채 조용히 말했다.

"응?"

수호가 되물었다.

"천왕은 마구니의 그 어떤 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 응?"

"마구니도 천왕을 볼 수 없어. 천왕의 그 어떤 면도 마구니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 "욕망의 화신은 욕망이 없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마찬가지로, 욕망이 없는 사람은 욕망의 화신을 이해할 수 없고."

선혜는 말을 이었다.

"그 어떤 면도, 터럭 하나마저도, 온전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자들끼리는 마음 안에서 서로를 찾을 수 없는 거야."

 

- "하지만?"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만큼 온전한 몰이해 또한 불가능한 일."

선혜는 턱을 괴고 먼 곳을 보며 말했다. 

"..."

"설령 상대가 악의 결정체이자 욕망의 화신일지라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어. 그래서 천왕이 될 퇴마사는 일종의 정신적인 시술을 받아."

"시술?"

"물리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술이야... 다른 신장들이 천왕이 될 퇴마사의 마음에 들어가서, 어느 부분을 파괴하지. 재생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 "설령 본인이 원한다 해도... 혹여 이해할 만한 상황이 닥쳐도 결코 이해할 수 없도록. ... 절대로, 마구니의 마음만은."

 

- "그렇지 않아. 네 목숨이 내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

"응?"

"나는 죽어도 이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나. 하지만 넌 마음에 카마가 있는 사람이야. 죽으면 그만이라고."

수호는 멈칫했다.

"너는 다시 태어나도, 나도, 진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면 네가 가진 마음의 무기도 같이 사라질 거야. 다시 생겨난다는 보장이 없어."

"..."

"나는 죽어도 변함없이 싸울 수 있지만 네가 죽으면 난 두억시니와 대적할 무기를 잃게 된단 뜻이야."

"..."

"전략적으로도, 네 목숨이 내 것보다 중요해. 그러니 만약 싸우다 상황이 위험해지면..."

선혜는 수호를 똑바로 보았다.

"너는 나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네 목숨을 지켜야 해."  

 

- "하기 싫어서 못 한다는 말이 아니야. 내가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뭐가!"

"난 너처럼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 아냐."

수호가 말했다.

"상황이 위험해지면 난 정신이 나가서 판단을 못 할 거야. 그리고 판단을 못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널 구하고 날 희생하려 들 거고."

 

- 수호는 진지했다. 선혜나 마호라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수호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미숙하니까. 너를 구하려다가 너도 못 구하고 나도 같이 다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정말로 내 안전이 중요하다면, 너는 최선을 다해서 너 자신을 지켜야 해."

"..."

"전략적으로 그게 맞아."

 

- "왜 날 떠났어?"

"뭐?"

"그때, 왜 날 떠난 거야? 왜 우리를 버리고 갔어?"

 

- "이 전장에서, 내 지휘를 신뢰하고 따라줄 수 있겠어, 수호?"

연이어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에 금강과 긴나라와 싸웠을 때, 전장에 들어선 바루나는 일말의 지체도 없이 마호라가의 지휘에 따랐다. 바루나는 마호라가를 싫어하는데도. 그것이 전사의 판단.

싫든 좋든 관계없이, 더 경험이 많은 자를 신뢰하는 것. 아니, 그게 누구든 자신보다 먼저 현장에 있었던 자의 지휘를 따르는 것.

 

- 진이 훈련 중에 말한 적이 있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때는 둘이라고. 등을 젖힐 때와 멈칫할 때라고.

... 그리고 움직임은 바람과 같이, 공격은 벼락과 같이.

수호는 이 모든 체험과 말이 다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 마호라가는 수호의 옆얼굴을 보며, 그날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심소에 앉아 꿀술을 맛보던 광목천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번 맛보는 것만으로 권력욕에 휘감겨 허덕일 독주를.

마치 불멸의 인간이 호기심 삼아 죽음을 건드려보듯이.

그 어떤 유혹도 자신의 망므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확신하는 태도로.

 

- '광목천, 왜...'

스스로 카마를 갖고 윤회의 길을 벗어난 것도 혹여 같은 맥락에서였을까.

'... 나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수호, 너라면 답을 해 줄 것인가.

하지만 너는 이미 다른 육신을 입은 다른 사람이고, 광목천으로서의 모든 기억을 잃었는데,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광목천이라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건만. 그 사람 스스로 그 길을 택했건만.

 

- "우리의 눈은 세상을 다 보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맹점이다."

"..."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아."

"..."

"수호, 그러니 만약 네가 네 마음에서 어둠을 보았다면,"

마호가라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 어둠은 네가 아니다>."

 

- 수호는 입을 다물고 마호라가의 붉은 눈을 보았다.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 태양에 물든 노을처럼, 새빨갛게 빛을 발한다.

격렬하게 타는 마음의 불길이 눈동자라는 이름의 창을 비춰주고 있는 듯하다.

 

- "너는 마구니가 아니다."

"..."

"네가 마음에서 얼마나 나쁜 것을 보았든, 어떤 비루하고 지저분한 것을 보았든, 그것을 보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아, 내 눈에는 이것이 보이는구나.'"

"..."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아니구나.>"

 

- "네가 어떤 판단을 했든 전부 내 책임이다. 미안하다."

수호는 당황했다. 

하지만 어쩐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휘관의 자세.

판단을 하는 자의 책임. 전장에서 동료에게 지시를 내리기로 정한 자의 책임.

그것이 남에게 지시하는 권한을 쓴 대가. 

 

-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전부 책임질 자만이, 남을 한때나마 통제하고 지휘하는 무례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거꾸로다. 그것이 그 무례를 범한 대가로 져야 할 짐.

'지휘관이란 그런 자리인가.'

 

- 애초에 이처럼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상 어느 쪽도 기습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그 카마와 아트만을 무슨 수로 구분하는가?"

 

- "<카마루파>."

마호라가가 한참 만에 말했다.

"뭐지, 그게?"

바루나가 물었다.

"계속 자라나고 커지고, 인간의 마음을 잡아먹다 못해 그 마음을 다 차지한 카마를 이르는 말이다."

 

- "너로 치면, 바루나, 네가 수호의 인격을 잠식하다 못해 전부 잡아먹고, 수호의 몸을 빼앗아 차지한 모습인 셈이다."

 

- "저것은 존재한다. 네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과 상관없이 저것은 존재한다."

마호라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네 말이 옳다."

"물리쳐야 할 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되었다."

바루나가 말했고 마호라가는 바루나를 힐끗 보았다.

 

-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마, 아난타."

마호라가가 답했다.

"카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밖에 움직이지 않아."

바루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 "바루나."

마호라가가 광검으로 긴나라를 겨누며 말했다. 검 끝이 찬연하게 빛났다.

"전략과 전술에 한정된 이해라지만, 네 이해력이 높은 줄은 안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할 줄 안다."

"말해라."

"내게 협력하라."

바루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목적을 위해]."

 

- 흙바람이 한줄기 몰아쳐 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 전장에서,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내 지휘를 따르라."

"..."

"대신, 나는 결코 네 목적을 침해하지 않겠다."

바루나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눈가에 가벼운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해했다]." 
   

- 수호는 이를 악물며 눈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차가운 눈을 쥔 손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너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내가 필요하다."

"아니야!"

수호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이제야 알겠다, 수호."

바루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

"인간은 제 바람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네게는 내가 필요하다, 수호. 너는 네 마음을 모른다. 너는 결코 그 심소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수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 "너는 승리하기를 원했고 살아남기를 원했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너는 너 이외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기를 원했다. 설사 그 퇴마사들이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 아니야!"

"너는 살기를 원했다. 수호, 그것이 네 마음이었고 나는 그 마음에 응답했다. 나는 감사를 받아도 모자라고, 이렇게 네 비난을 들을 이유가 없다."

수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주먹을 꾹 쥐었지만 손등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새빨갛게 얼어붙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이제야... 이제야... 알겠어."

수호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왜 카마를 가지면 안 되는지."

바루나가 발걸음을 멈췄다.

 

- "카마를 가지면... 자기 소원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야..."

"...."

"다른 사람의 소원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소원만..."

 

- "인간은 자신의 카마를 이기지 못한다."

수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결코."

수호는 고개를 들어 바루나를 보았다.

시커먼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고, 그 검은 하늘을 뒤로한 채 바루나가 귀신처럼 서 있었다.

"내가 바로 네 욕망이기 때문이다."

 

- "내가 네 욕망이므로,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도, 내쫓을 수도 없다. 내가 바로 네가 바라는 전부이므로."

바루나의 안광이 눈보라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

"너는 결코, 나를 지워내겠다는 마음을, 나를 갖고 싶다는 마음 이상으로 가질 수 없다. 또한 네가 나 이외의 다른 것을 바랐다면 그 카마가 나 대신 네 마음에 있었을 것이다."

"..."

"내가 네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이 나라는 뜻이다."

"..."

"아니, 명확히 말하면, 네가 바라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바루나의 무자비한 목소리가 피에 스며들어 몸을 얼어붙게 했다. 

 

- "그러니 우리 대결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너를 죽일 수 있든 없든 나는 내 목숨을 걸 거야. 그리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

"[그러니 내가 이겨]."

 

- "내가 진의 마음을 부숴 놓았으니..."

수호는 바루나를 노려보았다.

"내 마음도 유지될 자격이 없어."

"내 모든 것을 걸고,"

바루나의 안광이 활활 불탔다.

"동의하지 않는다."

바루나가 창을 움켜쥐었다. 수호가 눈앞을 박차고 뛰었다.

 

- 바루나는 다시 돌아서서 파순을 향해 바위처럼 섰다.

그때 생생한 환영이 수호를 덮쳤다.

아득한 옛날.

바루나라는 이름을 가진 카마가 마구니 앞에 서 있었다.

퇴마사 마호라가가 바루나를 퇴마 하려다 포기하고 돌아간 뒤, 무너진 광목천의 마음의 구멍으로 다른 마구니가 들어와 유혹했다.

 

- '내 집주인 광목천의 소원.'

과거의 환영 속에서 광목천의 바루나가 말했다. 내 바루나와 같은 카마가.

'타락할 퇴마사를 멸할 힘을 갖는다.'

'그래,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네 것이다!'

마구니가 흥분해서 말했다.

'타락한 퇴마사가 내 적이다.'

'그래, 그렇지!'

'그러므로 나는 결코 이 퇴마사가 타락하게 둘 수 없다.'

광목천의 바루나가 투기를 불태우며 말한다.

마구니가 멈칫한다. 

 

- '나는 결코, 스스로 내가 멸할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마구니와도 계약할 수 없다.'

 

- '같은 소원.'

수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광목천과 나는 같은 소원을 빌었다.'

같은 소원을 빌었기에 같은 카마가 태어났다.

 

- 광목천이 천오백 년 전에 마음에 품은 소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이 품었던 단 하나의 소원.

가진 것을 다 버리고, 퇴마사로서의 삶과 이어질 다음 생과, 자신의 진영을 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갖기를 소망했던 단 하나의 카마.

 

- '광목천은.'

수호는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타락하지 않을 카마를 원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 그제야 떠올랐다.

수호 자신이 그날 빌었던 소원이 전부 다 생각이 났다. 전부 다 떠올랐다.

[너를 죽이겠어. 그리고 너와 같은 것을 다, 남김없이, 이 세상에서.]

 

- 그리고 덧붙인 말이 있었다. 

그 덧붙인 말이 내 진짜 내 소원이었다. 그것이 나의 맹세였다.

말 너머의 의지, 그것이 내 소원.

 

- 나는 지금까지 그 소원을 위해 달려왔다. 바루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루나와 내 생각은 어긋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목적이 달랐던 적이 없다. 다른 길을 걸었던 적이 없다. 

우리 둘은 같은 방향을 보며 달려왔다.

 

- 나는 그날 소원을 빌었다.

심장을 짓누르는 모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소망했다.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것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곳 없다는 고독보다도 더 깊은 좌절에 휩싸여서, 두억시니가 내 몸에 흘려보내는 처참한 모멸에 빠져.

이처럼 비참한 사람을 찾아와 이용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순간에.

지독하게도 아픈 나머지, 고통에 삼켜진 나머지, 죽을 것처럼 힘들어서, 마음이 다 부서지도록 괴로운 나머지 앞뒤 재지 않고 빌었다.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도 않고, 절망과 분노 속에서 빌었다.

 

- 그것은 소원이라기보다는 맹세.

내 생명과 존재 전체를 걸고 한 맹세.

 

- 그 맹세에서 바루나가 태어났다. 내 바루나가. 내 카마가.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 고요함이 모두의 머리에 얹혔다.

파순은 적막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씁쓸한 눈으로 바루나를 내려다보았다.

"바루나, 이 망할 자식아. 내가 너를 얼마나 애모했는지 아느냐?"

"알지만,"

바루나가 말했다.

"그건 내 목적과 관계없는 일이다."

 

- "떠나라, 어린 광목천. 여기는 너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다. 다시는 오지 마라."

파순의 몸을 아름다운 화염이 휘감았다.

"그래도 우리는 결국은 만나리라. 너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순이 말했다.

"세상의 귀결은 결국 나이니. 먼 훗날, 어쩌면 가까운 날,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존재가 소멸하고, 모든 것의 수명이 끝나면 세상은 결국 나의 것이 된다. 모든 퇴마사도 마구니도 소멸하고 오직 나만이 남으면, 세상은 결국 나와 조우한다. 내 왕국은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 그 자체가 나이니. 그것이 우주의 운명이니."

"그것도 마찬가지로,"

바루나가 말했다.

"내 목적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 파순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파순의 몸을 휘감은 불꽃이 타올랐다.

"사랑하는 이여, 나와 함께 내 왕국을 지배했었을 이여. 수호, 위대한 카마를 가진 이여. 가라."

세상 전체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너희의 목적을 위해."

 

- 남을 모멸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했던 광목천이 바랐던 단 하나의 소원.

그리고 내가 빌었던 소원.

 

- '아무도, 다시는 내가 겪은 이 모멸을 겪지 않기를.'

이것은 누구도 겪을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미 겪었으니, 이제 누구도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한다.

 

- 더는 필요하지 않다.

바라고, 소망하고.

갈망하고 기원한다.

누구도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내 생명을 다 걸고 소망한다.

 

- 내 지난 생 전체에 걸쳐 소망했으며, 내 이번 생과 다음 생 전체를 다 바쳐 소망한다.

 

- 길은 분명했다.

그리고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그 옛날 광목천이 짜 두었던 전략.

 

-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그저 확인하고 점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생각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아렸다.

 

- "아직 우리가 마음이 다 이어지지는 않았나 보군. 네가 슬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수호의 눈이 젖어들었다. 바루나가 크게 웃었다.

"수호. 나는 지금 최고로 기분이 좋다. 나는 이제 바라마지 않았던 전장으로 간다. 카마에게 이 이상의 희열은 없다. 가슴이 떨려 어쩔 줄을 모르겠다."

 

- 수호는 말없이 바루나를 바라보았다. 짙푸른 눈이 자신을 향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마음에 카마를 품는다. 세상에 이토록 카마가 많건만,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빌지 않는다. 그나마 그 소원마저 마구니의 유혹에 홀려 변질되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도 잊고, 그것을 이루지도 못한다. 바란 적도 없는 욕망에 매여 생을 마감한다."

"바루나."

"세상에 나처럼 운 좋은 카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 "사실 네가 걱정할 쪽은 내가 아닐 텐데. 너는 괜찮은 거냐."

수호는 무슨 말인가 했다가, 바루나의 마음에서 답을 읽었다.

수호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 문제야말로 조금도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런가.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인가.

 

- 바루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내게는 오직 목적뿐이다. 다른 마음은 없다. 너와 마찬가지로.

 

- "그러면 가자, 바루나."

수호는 왼손을 높이 들었다. 바루나도 따라 손을 들었다.

"가라."

바루나가 신처럼 소환한다.

"<무한의 바루나스트라>."

바루나의 손끝에서 얼음 창이 물보라를 뿌리며 자라났다.

 

- 진이 선혜가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다른 소원의 언어에서 태어난 같은 카마."

선혜가 답했다.

"바루나의 진짜 목적은..."

 

- "내 카마의 진짜 목적은,"

수호가 두억시니를 향해 말했다.

 

- "누구도 모멸받지 않는 거야."

 

- 그것이 천오백 년 전, 광목천이 바랐던 소원.

 

- 광목천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친구와 자신의 진영과 퇴마사로서의 살모가 남은 생과 다음 생을 다 버려가면서까지 바라마지 않았다.

불멸의 너를 물리치기를.

네가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카마의 힘을 복사하게 하는 것으로.

또한 그것이 나의 소원.

나의 맹세.

 

- "그대에게도 이 생에 주어진 속명이 있겠으나, 지금은 그대를 누구든 납득할 만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하오."

풍천이라는 사람이 부르려는 이름을 예감한 수호의 마음에 거부감이 치솟았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 수호는 저 사람이 누구든,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과거의 망령에게 결코 내 실재하는 생을 부정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천(天)은 그 힘을 가진 자 중에 가장 드높은 자에게 주어지는 이름. 수천은 물을 다스리는 퇴마사 중 최고위를 뜻하오.

"풍천은 덧붙였다.

"카마 바루나, 한때 세상 전체의 신이었고 모든 영역을 거치며 마지막에는 물의 군주의 자리에 서기로 한 신의 이름을 딴 카마, 그 바루나의 마음과 함께 하는 분. 현 북서의 천왕 풍천이 새 신장, 수천을 뵙습니다."  

 

- "전장에서 소환하기 전에는 계속 이 상태예요. 소환수와 비슷해졌네요."

"..."

"아난타의 선택이에요. 아난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자기 자신보다도."

진은 아난타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당신을 지키려는 내 마음을 지키면서 자신이 사라질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겠지요."

 

- "... 생각해 봤는데."

마호라가가 망설이다 말했다.

"... 수호가 바루나와 한 방식 있잖아. 그야, 간단하지 않겠지만, 혹시 진 너와 아난타도..."

진은 마호라가의 입에 손가락을 대었다. 선혜에게 하던 몸짓이었다.

"욕망."

"... 욕망인가?"

 

- "무엇이 '욕망'이지?"

마호라가는 진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한 번도 그 질문의 답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물었다.

"선혜, 이것만은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이것만은 내가 선생이야. 당신은 1500년간 한 번도 카마를 가져 본 적이 없잖아요."

"..."

"그거 못해요. 아마 수호 말고는 다른 누구도 못 할 거예요."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하면서도 찔러봤어요?"

진이 다정하게 핀잔했다.

 

 - "그때 수호는 바루나와 마음이 같았어요. 목적 이외의 마음이 없었어요. 사람이 본능적으로나마 가진 생존 욕구를 포함해서 정말로 다른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카마나 다름없었어요."

"..."

"일순간이었든 어쨌든 수호와 바루나가 같은 존재였던 거예요. 더해서 바루나의 목적이 워낙 넓은 의미여서 가능했던 기적이었을 거예요. 같은 존재였으니 합쳐졌다고 볼 수도 없어요."

 

 - "카마가 자라나서 본체의 마음을 잡아먹어 없애버리는 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일체였지요. 다시 일어날 법하지도 않은 일이에요. 나는 수호와 달라요. 선혜 마호라가."

진이 말을 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다른 욕구도 많아요. 내 마음엔 당신 이외에도 이것저것 많다고요. 그러니까, 아난타와 하나가 되는 일 같은 건 죽어도 안 해요."

마호라가는 작게 웃었다.

 

- 풍천은 다른 퇴마사들이 수호를 '광목천'으로 부르기 전에 서둘러 이름을 내려주어 분란을 사전에 차단했다.

더해서 '신장(神將)'의 지위.

그 또한 수호가 두억시니와 싸울 때 보여준 힘의 수준을 생각했을 때 넘치고도 남지만.

풍천은 수호에게 명확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행여 수호를 위험인물로 간주해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했다. 또 한편으로 '천왕'으로 불릴 위험마저도 재빨리 막았다. 

천왕 중 한 명이 제 이름을 걸고, 여러 신장 앞에서 직접 승격의식을 치렀다. 그러니 북, 동, 남의 진영과 다문천왕, 증장천왕, 지국천왕이 함부로 입을 댈 수 없게 되었다.

 

- 퇴마사가 카마를 마음에 전부 받아들이는 것으로 아트만을 찾았다는 전대미문의 사건마저도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적이 수호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한편, 잠재적인 추종자들은 어느 이상을 넘보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 '과연, 패퇴한 진영의 천왕이라는 분란의 자리를 1500년이나 지켜온 분이라.'

 

- 이것은 유예. 

수호가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의 유예.

성장한 수호가 천왕의 지위를 위협하거나 이전의 광목천에 필적하는 인물이 되면, 그때 가서 지위를 걸고 맞대결을 해주겠다는 뜻.

공정하게, 하지만 가차 없이.

 

- 물론, 수호가 그때 가서 어떤 판단을 할지는 또한 수호의 몫이었다.

 

- 하지만 그것은 아직 훗날의 일.

아이의 의무는 자라는 것뿐, 그리고 어른은 그 자라남을 지켜줄 의무가 있으니.

'다 클 때까지는,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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