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해로
출판 : 네오픽션
출간 : 2019.07.25
박해로 월드 -시대를 넘나드는 섭주와 다흥- 속을 즐겁게 헤매는 중이다.
가능하면 발표 순서대로 읽고 싶었는데, 다음 책을 손에 쥐는 걸 기다리기가 힘들어 일단 구한 순서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살: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가 비밀을 품은 새어머니와 두 남매간의 무속적-사회적 이야기였다면 <신을 받으라>는 전작의 '원대신왕'이 어디에서 기원한 신인가를 찾아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다. 현재의 한국과 선대의 조선을 오가며 교차하는 흐름은 '과거를 현재로 이어 붙여 몸에 싣는' 무속의 중심 개념과도 닮아 있다.
'영적인 일에는 우연이 없다'라던가.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던 갈림길, 그 소소한 분기점들마다 파내려 갈수록 거대해지는 표지석들이 박혀있었던 느낌.
작품들을 읽어나갈수록 각각의 세계가 겹쳐지며 선명해진다.
저자가 작심하고 세공 중인 거대한 세계관에, 기쁘게 사로잡히기로 했다.
놀라운 반전, 끈끈하게 뒤덮인 인과의 고리.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던 전개는 독립된 작품들을 연결하며 이어지는 핍진성으로 수복된다.
<외눈고개 비화>에서는 완전히 별개인 줄 알았던 동저자의 러브크래프트식 호러조차 월드 안으로 품어내는 과감함을 보여주는데-
즐거움은 세계 속의 섬세함에서도 나온다는 걸 잊지 않아 주시길 기대할 뿐이다.
다른 작품들이 기대가 된다.
이번 봄에는, 박해로.
끝.
사족.
중심 가르침을 잃고 기복신앙으로 작동하는 기독교를 토속신앙과 구분할 수 있을까?
"걷지 못하는 나를 걷게 해 준 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명이 자신의 신이라는 노인의 외침은,
"우리 방앗간 하고 읍내 방앗간은 다 같은 방앗간 아냐? 근데 우리가 서로 사이가 좋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모두가 신의 자녀들이지만 저 교회와 우리 교회는 같지 않다는 방앗간 아낙의 질타는.
- 1876년.
장일손이 천주쟁이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자 검은 구름이 몰려와 여름의 푸른 하늘을 회색으로 물들였다. 섭주 현령 김광신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집행 준비에 들어갔다. 사형(死刑)인지 사형(私刑)인지 분간 가지 않는 집행이었다. 김광신은 노기 띤 표정으로 수염을 떨며 망나니 석발을 데려오라 지시했고 명을 받은 군노와 사령들은 지체 없이 도살장으로 달려갔다. 천민 석발은 평소에는 소와 돼지를 잡는 백정이었지만 사람 목을 벨 일이 생기면 수시로 동헌에 불려 갔다.
- 이미 술 냄새를 풍기는 석발에게 또 한 병의 독주가 건네졌다. 석발은 꿀꺽꿀꺽 술을 들이켜다가 입에 머금은 한 모금을 칼에 푸 뱉었다. 그사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먹구름에 지상은 어두워지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오냐, 베어라. 치성이 지극하면 껍질은 죽되 혼백은 죽지 않는다!"
눈에 핏발이 곤두선 장일손이 김광신을 노려보았다.
- "육신이 멈추면 나는 살아 있는 귀신이 될 터이다. 귀신이 되어 내 반드시 네놈의 집안을 찾아가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 있는 것이든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든 것 어린 것, 부녀자와 하인은 물론이며 가축, 애완물조차 남김없이 도륙을 낼 것이야! 네놈 선산을 찾아가 너를 낳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뼈를 흩뜨릴 것이며, 네 후손들에게서 가문의 더러운 피를 뽑아내 개와 닭에게 마시게 할 것이야! 유념해 둬라, 악독한 놈아! 그 개고기 닭고기를 먹는 놈들은 오장육부에서 치솟는 검은 피를 눈 코 입으로 쏟으며 죽어나갈 테니!"
- 장일손의 절규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고문으로 쏟은 피와 뒤섞여 악귀의 얼굴이 되었다. 어느새 마당에는 사형 집행을 위한 거적이 깔렸으나 관원들은 감히 나아가기를 주저했다. 김광신이 호통을 치자 덩치 큰 군노, 사령 네 명이 마지못해 용기를 냈다. 그들은 극도로 흥분한 장일손을 번쩍 들어 올려 거적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도 사형수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는 끊이지 않았다.
- ... 여섯 명의 죄인을 죽였는데 감히 사형 집행관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예외 없었다. 생을 포기한 이들에게 자신은 백정이 아니라 염라대왕이었다. 그저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달라고 소리 없이 애원할 뿐이었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희번덕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장일손이란 놈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의 탈을 쓴 악귀였다. 맑고 온화했던 하늘조차 사형 집행에 맞춰 어두워지자 석발은 와락 겁이 났다.
- "뭣 하느냐! 속히 죄인을 베지 않고!"
김광신이 소리쳤다. 마당이 번쩍번쩍거리더니 하늘 끝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공포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석발은 팔에 힘을 모아 칼을 휘둘렀다. 부대시참(不待時斬)을 당한 장일손의 머리는 한 칼에 떨어져 나가 동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를 잃은 장일손의 몸은 그대로 앉아 있었으나 목으로부터 폭포수 같은 피가 솟구쳤고 어두워지던 하늘은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김광신이 차갑게 말했다.
"놈의 큰 죄를 하늘이 아는구나. 이제 비가 내려 죄인의 피를 씻어낼 것이다."
- 뚝뚝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에 점이 생기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광신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펼쳐진 천주학 서적에 쏟아진 빗물은 붉은색이었다. 장일손의 목처럼 하늘에서도 핏빛 소나기가 내려 동헌 마당은 금세 붉은 바다가 되었다. 사령들이 창을 버리고 달아났다.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석발은 부엌으로 들어가 술을 동이째로 들고 나왔다. 백정의 엄청난 힘은 커다란 독을 밥그릇처럼 들었다 놨다 했다.
"사또한테 일러바쳐라. 석발이가 술 훔쳐 간다고."
주모가 "아이고 아이고" 바닥을 치며 울었지만 남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석발은 소금이 뿌려진 마당에 침을 뱉고는 주막을 나섰다.
- 석발의 거처는 도축장 바로 옆 움막이었다. 무덤 같은 음습한 장소라는 점에서 움막과 도축장은 다를 바가 없었다. 짚단이 이부자리를 대신했고 가재도구 대신 쇠망치와 칼이 벽에 가득 걸려 있었다. 움막 벽의 윗부분에 채광창이 붙어 있다는 점만 도축장과 달랐다. 죽음을 코앞에 둔 가축도 햇빛을 보면 살아갈 이유가 생겨 도망친다는 게 석발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도축장을 컴컴하게 만들었고 겁에 질린 가축들은 어둠 속에서 저항하지 못한 채 백정의 손에 죽어나갔다. 그러나 석발은 자신이 기거하는 움막에는 햇빛이 들어오도록 채광창을 냈다. 안 그랬다면 가축의 원귀들한테 시달려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 무더위로 땀범벅이 된 석발은 달빛이 스며드는 채광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도록 그는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왜 그 장일손이란 놈이 자꾸 생각나는 거지?'
[망나니 네놈을 먼저 데려가겠다!]
그가 퍼붓던 악담이 떠올랐다.
'곱게 죽지 않고 왜 그런 발악을 했지? 사또가 애먼 놈을 죽인 건 아닐까? 소문에 장일손은 천주쟁이가 아니라 무슨 교의 교주인지 뭔지를 했다던데...?'
'젠장, 나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놈이라고.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나는 아무 죄도 없어. 장일손이든 장이손이든 이미 죽은 놈이 뭘 어쩌겠어? 귀신도 이 천하의 백정 석발이는 무서워하는데... 귀신이 있다면 내가 아닌 사또한테 먼저 찾아가야지. 다 그 양반이 시킨 일이 아닌가 말야...'
- 눈뜬 석발은 아침이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잠들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햇빛이 아닌 달빛이었고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직 깊은 밤중이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석발은 의아했다. 폭음한 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신체의 변화가 평소 하던 망나니 업 때문이라고 믿을 정도로 약한 사내는 아니었지만, 잠에서 깬 ...
- "그래, 그렇게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라. 곰보 얼굴 짜증 나니까."
"이러니까 네 엄마가 널 버리고 갔지."
"차라리 머리 깎고 절이나 가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
- 목사도 그 아이를 알고 있었다. 묘화(昴華)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무당인 엄마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갇혀 살다시피 한다는 아이. 어디론가 떠난 엄마는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 다음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가해 소녀들의 야단도 멎었다. 정적 사이로 울음소리는 훨씬 크게 퍼졌다.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묘화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목사는 어린양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교회로 들어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숲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양심의 소리가 그의 내면을 찔렀다. 어쩌면 그건 하나님의 음성인지도 몰랐다. 무당의 딸도 하나님의 자식이요, 주님의 세계로 인도해야 할 어린양이라고.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미룬 지가 벌써 몇 달째다. 언젠가는 때가 오리라 생각하면서 목사는 일단 자리를 피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 정균이 무당(의 딸)을 피하는 데는 남모를 이유가 있었다.
- "이리 주세요. 모이는 제가 주겠습니다."
정균이 안강댁의 모이 그릇을 넘겨받았다. 안강댁은 허리를 펴고 젊은 목사를 바라보았다.
"걔네 부모들은 알고 있겠죠?"
"뭐가요?"
"늦은 시간에 목사님이 집까지 들인 사실을요."
애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자신이라는 어감이 약간 불쾌했지만 정균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허락받고 온 거죠."
- "목사님, 걔네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
"아, 기타를 배우고 싶대서... 어제 많이 시끄러웠지요?"
"기타는 무슨 기타예요? 목사님 보러 왔다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던데."
"그런가요?"
"옷 입은 거 보세요.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겠어요?"
"..."
"걔들은 잘 사는 집 딸들이에요. 가난한 이 동네에서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집안 애들이라고요. 내년이면 고3이고요. 공부에 흥미를 잃고 딴 데 관심 쏟으면 부모들이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겠어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긴 시골이라 서울하고 달라요."
- 정균은 안강댁의 말이 신경 쓰였다. 아이들을 꾀어낸 사람이 당신 아니냐는 듯한 어조였기에.
- "목사님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여기 사람들이 어떤데요?"
"고분고분하다가도 뭐 하나 수틀리면 돌변하는 사람들이 돌아래마을 사람들이죠. 우리 내외도 경주에서 이사 올 때 여기 사람들이 텃세 부리는 통에 진짜 힘들었어요. 모두가 교회로 쉽게 모인 것만큼이나 흩어지는 것도 한순간이 될 수 있다고요. 무슨 이유든지 간에."
- 정균은 안강댁이 애들을 여자로 보았다간 그들 가족에게 화를 입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고 해석했다. 잠시 스스로를 돌아본 그는 안강댁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어제 그는 시골에서 보기 힘든 화사한 여학생 앞에서 기타를 튕기며 스스로를 과시했다. 마지못한 척했지만 사실 그 순간을 즐기지 않았던가. 일요일에도 또 다음에도 같은 기회를 갖자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주님을 향한 구도와 정진을 망각하고 말이다. 그는 세 여학생을 향한 자신의 관심이 특히 애란 쪽으로 쏠렸다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다. 순남과 영자가 눈치채건 말건.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실제로는 속물에 불과한 건 아닐까?'
안강댁의 뼈 있는 충고에 그는 부끄러워졌다. 그러자 잊고 있던 묘화가, 그녀일 것이라 추정되는 어제의 흐느낌이 떠올랐다. 그는 고난에 처한 아이를 못 본 척했고, 가해자로 여겨지는 아이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논 셈이다.
- "무당이 신들리면 이상한 말을 촤라락 쏟아내고 휘파람도 불잖아요. 어제 걔가 그랬어요. 지 어미하고 똑같애. 내가 알아들은 건 '내가 꿈을 꾼 줄 알아요?' 하는 마지막 한 마디였어요. 그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더라고요. 나를 확 쏘아보는데 곰보 얼굴이 얼마나 무섭던지 소름이 다 끼쳤어. 흥, 예수님은 무슨 예수님이야. 이름도 없는 잡귀한테 신이 들리려는 게지. 그 어미에 그 딸 아니랄까 봐."
안강댁은 준엄한 사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묘화 이야기가 나오자 애를 험담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온 신경이 거기에만 쏠린 듯했는데 무당 모녀가 언급되면 마을 사람들 전부가 그랬다. 마치 그렇게 모멸을 주고 비천하게 보아야만 자기들끼리 동류(同類)로 뭉칠 수 있다는 듯이.
- 정균은 어제 들었던 흐느낌과 그전에 물건 집어던지던 소리를 떠올렸다. 세 소녀 중 하나가 묘화의 성경책을 빼앗아 집어던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품에 ...
- 정균은 숲 속에서 들었던 폭력의 소리를 떠올렸다. "네가 이런다고 목사님이 알아줄 것 같아?"라고 했던 말을.
- "목사님, 여자애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요. 특히 묘화는 조심해야 할 애예요. 꿈에서 한복 입은 예수님을 봤다 그랬잖아요. 걔가 어미처럼 신이 들리면 예수님과 귀신을 어떻게 구별하겠어요? 머리도 좀 돈 거 같고 세상 물정에 사리 판단까지 모르는 바보예요. 아예 아는 척도 하지 말아요. 그런 애가 한번 따라붙으면 쉽게 떼어내지도 못해요. 문둥병 환자도 낫게 한 분이 하나님, 예수님이지만 묘화는 성경으로 교화될 애가 아니에요. 그냥 가만히 둬야 해요. 힘도 세고 성격도 못됐어요. 거지라고 돌 던지고 놀리다가 머리채 잡혀 물속에 처박혀 죽을 뻔한 애도 있었죠. 으휴, 목사님도 아까 고것이 날 쏘아보는 눈길을 봤어야 했는데..."
-- 정균은 묘화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정확하게 몰랐다. 그녀가 일정한 거리에 있으면 정균은 몸에서 번지는 이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통증에 가까웠다. 그는 무당을 무서워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 약자로서 묘화를 하나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전도할 수는 없었다. 무당의 딸이니까.
- "묘화가 나를 쏘아보고 돌아가면서 '나 진짜로 예수님을 봤다니까!' 하고 소릴 질렀거든. 근데 저기 있는 장닭이 갑자기 푸드득 날아올라 묘화 머리 위에 턱 앉더라니까. 분명 닭장 문을 잠가놨는데 어떻게 열고 나온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사람 머리 위에서 벗을 부르르 떨고 날개를 쫙 펴는데 심장 멎는 줄 알았다니까."
정균은 닭장 안을 바라보았다. 김 집사가 여름 보양식이라며 자랑해 오던 장닭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장대해 웬만한 아기보다도 더 컸다. 단단히 잠근 닭장 안, 깃털과 부리와 벼슬에 검고 푸르고 붉은 색이 고루 섞인 장닭은 시치미를 떼듯 눈을 부릅뜬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균은 안강댁이 묘사한 광경을 상상했다. 누더기 차림에 성경책을 끌어안은 소녀. 그 머리 위에 날개를 활짝 편 커다란 닭. 기이하게 뒤틀린 십자가의 형태...
- 수요일 저녁이었던 그날, 교회로 나서기 전에 묘화는 어둠에 휩싸인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멀리 큰 굿을 다녀오겠다던 엄마는 돌아오지 않은 지 보름째다. 평소 초를 아껴야 한다는 엄마 말에 그녀는 불을 켜지 않았다. 집의 겉모습도 집 안사정처럼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돌로 쌓은 담장이 스러지고 지붕도 삐딱하게 내려앉은 오두막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두막에는 방이 나란히 셋 있었는데 맨 왼쪽이 부엌, 두 번째가 모녀가 거주하는 사랑방, 맨 오른쪽이 신당(神堂)이었다. 묘화는 밥그릇 위에 우북이 앉은 파리 떼를 손바람으로 날려 보낸 후 물을 부어 말아 먹었다. 반찬은 간장 한 종지뿐이었다.
- 대충 저녁을 때운 묘화는 신당 안으로 들어갔다. 벽마다 눈이 길게 찢어진 여자 무당, 호랑이를 탄 머리 허연 산신, 앵무새와 잉어가 크게 그려진 산천, 칼과 깃발을 포개어 쥔 포도대장처럼 생긴 장수 등 다양한 무신도가 붙어 있었다. 묘화는 그림 속의 인물들이 내려다보는 중간에 앉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다. 한 벌 뿐인 몽두리[巫衣]와 굿에 쓰는 악기는 엄마가 가지고 나가 없다. 무구(巫具)를 넣어두던 오동나무 궤짝만 텅 빈 채 열려 있어 더욱 가슴이 휑했다.
-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묘화의 엄마인 월수(月水) 보살을 보고 신이 들린 게 아니라 잡귀가 들렸다고 수군거렸다. 그녀가 내리는 점괘며 행하는 굿이 날이 갈수록 효험이 떨어진 까닭이었다. 수군거림은 얼마 전 마을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 나간 어떤 사건에 그녀가 연루되었다는 괴소문이 나고부터 떠돌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안 월수가 산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을 욕하고 악담을 퍼붓자 사람들은 모녀와 상종하지 않았다. 일거리를 주지 않았고 굿을 의뢰할 일이 있으면 다른 마을의 무당을 불렀다. 급기야 모녀는 산 입에 거미줄을 쳐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애당초 풍녀보살이라는 토착 무당이 병으로 죽은 후 돌아래마을에는 무녀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아비도 ...
- 떨어진 한 권을 주웠던 것이다. 표지에 '1학년 3반 임달복'이라는 커다란 연필 글씨가 쓰여 있었지만 묘화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따라서 내용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목사의 성경은 엄마의 부적과 동등한 신물(神物)로 다가왔다. 모든 이가 성경을 가지고 다녔고 거기에 쓰인 대로 주문을 외웠고 절을 했다. 모두가 그 책을 편 채 목사의 말을 들었고 똑같은 소리(아멘! 할렐루야!)로 호응했다. 묘화에게 기독교는 교리를 해석하고 깨달음의 희열을 얻는 대상이 아니었다. 신(神)과 연관되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선험적인 영역일 뿐이었다.
- 그러나 묘화는 엄마한테 성경을 숨겼고 엄마가 있을 때는 교회에 나가지 않을 정도의 지혜도 갖추고 있었다. 엄마가 교회에 불을 지르려 했고 사람들을 저주한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무섭기도 했다. 예수라는 강력한 신이 엄마의 행동을 노여워해 못 돌아오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묘화는 열심히 기도했다.
"주 예수그리스도여... 울 엄마 돌아오게 해 주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주 예수그리스도여... 울 엄마 얼른 돌아오게 해 주옵소서..."
눈을 감으면 목사의 잘생긴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묘화는 교회 바깥에서 본 사람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 정성껏 치성을 드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벽화 속 산신들의 굵은 눈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산신들은 그녀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의 계시도 주지 않았다.
- 소반을 꺼내 향과 엽전을 치운 뒤 그 위에 난정호에서 건진 귀한 물건을 올렸다. 소반 위의 십자가가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을 발했다. 작은 면적을 초월해 동서남북으로 멀리 뻗은 십자가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묘화에게 말을 걸었다. 묘화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찼다.
- 이 성물(聖物)은 단 한 사람, 내 딸에게 내린 물건이다. 그러니 너는 다른 이의 훼방을 멀리하고 신의 딸임을 스스로 증거하라.
- 그녀는 소반 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일어선 후 제단 위에 봉안(奉安)했다. 사면 벽에 새긴 산신들은 평소의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이 물건을 지켜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도둑이 오면 이 십자가부터 훔쳐 갈 것 같았다. 그때 묘화의 눈에 무구를 넣어두던 오동나무 궤짝이 들어왔다. 묘화는 가망 없는 심정으로 궤 안에 십자가를 대보았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십자가가 스스로 크기를 줄여 궤 안으로 들어갈 크기가 된 것이다. 묘화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충만했다. 십자가를 안치한 그녀는 보자기로 궤짝을 덮어 가렸다.
'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도둑놈은 죽어 마땅하리. 아니, 내가 죽여버리리라.'
그녀는 궤짝 앞에 무릎을 꿇고 교회에서 본 대로 손을 합장하고 경건히 치성을 드렸다.
- 활짝 열어젖힌 안방에서 오두막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위가 보내줬다는 자개농 앞에 누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노인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는데 으리으리한 자개농은 그녀의 향상된 상황을 돋보여주는 소도구 역할을 했다. 목줄이 묶인 채 옆으로 누워 있던 얼룩무늬 강아지가 일어나 짖어댔다.
"누가 왔나?"
노인이 부채를 놓고 일어났다. 그녀가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일어나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찾아온 손님이 목사님인 걸 알게 된 조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안녕하세요, 할머니. 요즘 교회에 안 나오시길래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더운데 뭐 하러 이런 데까지 오셨어?"
"몸은 좀 어떠세요?"
"똑같지, 뭐."
딴전 피우는 노인의 얼굴에서 정균은 여우의 인상을 받았다. 평소 아들 같은 목사를 상전 모시듯 하던 조 노인이었다. 그녀는 드러나지 않게 목사를 경계하고 있었다.
- "이야, 소문대로 새 청춘을 찾으셨나 봅니다."
미끼 삼아 던진 칭찬에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 정균에게 부채와 방울을 흔들며 펄펄 춤을 추었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비비며 기도했다. 칠곡 아주머니가 술 냄새가 나는 바가지를 들고 왔다.
"여기에 침 뱉어! 세 번 나눠서!"
장군보살이 방울을 놓고 날이 시퍼런 칼을 집어 들었다. 정균은 칠곡 아주머니의 지시대로 막걸리가 가득 담긴 바가지 안에 침을 세 차례 뱉었다. 장군보살이 황동빛 칼로 빗질하듯 정균의 몸을 쓰다듬으며 보이지 않는 노인을 향해 저주스러운 악담을 퍼부어댔다. 정균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잘려나가 바가지 안으로 떨어졌다. 칠곡 아주머니가 바가지를 잡고 산 위로 올랐다. 어둠 속에서, 멀리 떠나 두 번 다시 오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바가지를 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일어나!"
장군보살이 정균을 일으켜 세우더니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쳐다보니 갈치만큼 긴 마른 명태 한 마리였다.
"던져서 머리가 너를 향해 떨어지면 귀신은 안 떨어진 거다. 꼬리가 널 향해야만 귀신은 떠난 것이다. 자, 던져라.”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행하는 순간 전혀 어이없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 정균은 명태 대가리가 자신의 반대쪽을 향하도록 낮게 던졌다. 그러자 마른하늘에 한 줄기 강풍이 불어닥치더니 명태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명태의 머리가 거짓말처럼 정균 쪽을 향해서 떨어졌다.
- 정균 하나만을 노려보는 커다란 눈이었다. 노인은 신속하게 손을 바꿔가면서 거미처럼 민첩하게 접근해 왔다. 겁이 나긴 했으나 장군보살의 칼짓과 욕설에 어느덧 정균도 힘을 얻었다. 꿈속에서도 노인을 죽인 건 그의 의지였다.
"이제 그만 내게서 사라져, 이 잡귀야!"
- 서른세 번째 투척에 모든 것이 끝났다. 머리를 땅에 튀기며 빙글빙글 돌던 노인은 드디어 사라졌다. 현장에 남은 것은 정균이 아닌, 산중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있는 명태 한 마리였다. 명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숲이 사삭거렸고 밤잠을 훼방당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됐다. 귀신이 학생을 영영 떠났다."
어느덧 지옥 같은 몸살이 깨끗이 사라졌다. 장군보살은 칠곡아주머니가 가져온 부적에 불을 붙이고 쌀을 한 줌 뿌렸다. 정균은 재탄 물까지 마셔야 했다. 그래야 다른 귀신들로부터도 안전하다고 했다. 박수를 치던 어머니가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
- 그날 이후 노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정균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로도 이상한 몸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철에 감기만 들어도 깜짝 놀라기 일쑤였지만 다행히 해열진통제는 통증을 정상적으로 가라앉혔다. 장군보살은 귀신보다 신통했다.
- 일을 다 마치고 나서 그녀는 정균을 불렀다.
"그는 약장수이자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피리꾼이었어. 소리꾼이 아니더라. 고향이 장홍인데 돈을 벌러 한 달이나 집을 비웠더니 그새 마누라가 방물장사하는 놈과 눈이 맞아 도망을 쳤어. 아들이 둘 있었는데 여자가 버리고 간 통에 굶어 죽었다네. 그래서 피리 대신 부엌칼을 들고 마누라를 찾아 나섰다가 깊은 산속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죽어버린 거야."
"왜 나한테 들러붙었을까요? 내가 부정 탄 물건에 손을 대기라도 했을까요?"
"귀신들이 원래 그래. 한이 많다고 그 한을 심어준 사람한테 가는 경우는 별로 없어. 그저 학생처럼 신병 앓고 귀신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덥석 등에 올라타는 거지."
듣고 나니 소름이 끼쳤다. 무당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괴롭힘 당했던 시간이 떠올라 정균은 노인이 안 됐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거꾸로 나타난 그의 마지막 모습은 두고두고 정균을 괴롭힐 것이었다.
- "이제 그럴 일은 없겠죠?"
"장담할 수 없어. 이 모든 게 학생이 신기가 드세기 때문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장군보살은 부잣집 마나님처럼 한쪽 다리를 세우더니 그 위에 팔꿈치를 척 얹었다.
"나는 학생에게 신내림 해주고 싶은 심정이라우. 큰 무당이 될 팔자를 타고난 건지도 모르니까."
"싫어요!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겪기 싫어요!"
장군보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동안 정균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뒤로 물렸다.
- "알았어,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테니. 그래도 명심해야 해. 학생 스스로 자신을 억눌러야 하니까. 학생은 귀신을 불러들이기 쉽고 귀신을 알아볼 수도 있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어. 아무리 센 약을 먹어도 또 계절이 돌아오면 감기에 걸리듯 이런 일이 완전히 재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귀신이 좋아할 만한 어떤 일도 하면 안 돼. 귀신 그림을 그린다든지 그런 음악을 가까이한다든지 치성을 드린다든지 하는 건 귀신들이 접근하기 좋은 발판을 마련해 주는 거야. 무조건 거리를 둬. 이런 일에 타고난 학생이니만큼 언제든지 그것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면 안 돼. 그때는 지금 하고는 비교도 안 될 화를 입을 수 있어. 물론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특히 명심해. 무당을 가까이하면 안 돼. 어설프게 귀신 부리는 무당들은 학생한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무당하고 가까운 사람, 무당의 자식들도 피해. 다 귀신하고 선이 닿는 것들이니까. 내일 학생한테 강림이 없게 하기 위한 굿을 하루 더 할 거야. 앞으로 사는 동안 별일은 없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군보살이 정균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야. 귀신은 한번 길을 내준 사람을 잘 알아보니까 지나왔던 그 길을 아예 막아버리란 말이야."
정균은 그러겠다고 했다.
- 다음 날 정균은 그들과 산을 내려왔다. 장군보살은 노한 소리에서 우는 소리까지의 온갖 변성으로 누군가에게 치성을 올렸다. 어머니는 장군보살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아버지는 굿판에 오지 않았지만 일이 끝나자 다급하게 결과를 물었고 잘 풀렸다는 소식을 듣자 안도하는 눈치였다.
- 그날 이후 정균에게 귀신과 관련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봉사활동을 다녔다.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계몽 행사에도 기독교가 결부되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대대로 불교신자였던 부모는 이 같은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정균은 물러서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 활기찬 나날이 젊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보살 역시 소식을 듣고 실망했다고 하지만 정균은 고집스레 기독교의 길을 팠다. 복음을 퍼뜨리는 젊은이의 모습에 감동한 지역 교회 목사는 연줄을 활용해 정균을 미국인 선교사 밑에 보내 심도 있는 공부를 하게 했다. 마침내 신학대학에 들어가면서 정균은 아픈 과거를 잊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새로이 성장한 그가 믿는 유일한 신은 주님이었다. 정균은 모두가 꺼리는 산간벽지 교회에 자청하여 기독교 보급의 역할을 맡았고 교단은 기쁜 마음으로 이를 허락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쳤다.
- "인제 파리 떼도 날아다니는데 그럼 순남이를 저대로 둘 거야?"
순남 엄마가 남편의 가슴을 칠 듯이 주먹을 번쩍 쳐들었다. 순남 아버지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순남 엄마가 목소리를 죽인 채로 악을 썼다.
"김 목사가 동패 목사 셋을 불러들였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잖아! 빨리 묘화를 찾아봐. 못 찾겠거든 당집에 들어앉아 돌아올 때까지 밤이라도 새우란 말이야. 이 시원찮은 흥부 같은 인간아! 묘화가 우리 부탁을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마냥 기다리기만 해?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만나! 만나서 우리 순남이만 살려주면 뭐든지 다 들어준다고 해."
순남 아버지가 모자를 쓴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묘화가 예수님 기적을 보이는데 김 목사도 예수님 편이고 그 세 사람도 목사들이니까 예수님 편일 텐데 그럼 다 같은 편이잖아? 꼭 묘화한테 몰래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가?"
"이 두대바리야! 우리 방앗간 하고 읍내 방앗간은 다 같은 방앗간 아냐? 근데 우리가 서로 사이가 좋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 사람들은 묘화의 눈부신 미모에 압도되어 저절로 손을 모았다. 묘화는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방앗간집 부부의 얼굴이 감격으로 실룩거렸다. 묘화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정된 자리로 걸어갔다. 조필순 노인이, 이어서 파천댁 부부가 무릎을 꿇었다. 순남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릎을 꿇었다. 묘화는 가만히 팔을 내밀어 두 사람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울상이던 부부의 얼굴이 종교적 환희가 넘치는 얼굴로 바뀌었다.
묘화는 거적에 덮인 순남의 시신을 힐끗 바라보더니 준비된 자리로 가서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그림으로 보던 '소녀의 기도'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 무당의 딸이 흉내 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굿판이 벌어지는 일 따위도 없었다. 묘화가 하려는 행위는 분명 기도였다.
- 순남의 집 말고도 촛불이 켜진 장소가 있었다. 남의 시선을 피하고자 이 촛불은 버려진 흉가 안 검은 장막 속에서 켜졌다. 주인이 살았을 당시 이 방은 고방(庫房)인 모양이었다. 가재도구 일부가 거미줄과 먼지로 엉킨 채 원형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문은 나무 창살이 휘어진 채, 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석구석에는 들짐승의 뼈다귀도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 이 방 안에 새로운 상을 펼쳤다.
- 대중은 소리 없는 열기에 휩싸였다.
"저걸 봐요. 묘화의 주변에 광채가 솟아나고 있어요."
이장 천양록이 말했다.
"아니. 빛은 하늘에서 번져오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릴! 저건 묘화에게서 나는 거라니까."
- 보는 이에 따라 시각적인 견해가 달랐다. 각자의 주관적 미학에 마음을 빼앗겨 그들은 그간 묘화 모녀에게 집단 따돌림을 자행했던 과거를 쉽게 잊고 말았다. 달과 묘화와의 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달은 그녀의 뒤편에 우뚝 솟아 알 속의 생명체처럼 그녀를 감쌌다. 묘화의 얼굴도 휘영청 밝았다. 월광(月光)이 그녀를 빛냈는지 묘화가 발한 빛이 달을 더욱 돋보이게 했는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을 뿜는 존재가 묘화라는 의견을 보다 신뢰했다. 늦여름에 걸맞지 않는 은은한 온기가 집을 에워쌌을 때 허름한 거적 아래 숨 쉬지 않는 순남의 몸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을 환각이라 여겼으나 꿈틀거림을 목격한 이는 삽시간에 배로 늘었다. 조필순 노인이 "아!" 하고 외치자 화답하는 목소리들이 커졌다.
- 숨이 끊어지기 전, 묘화의 시야는 빠르게 흐려졌다.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이 돌멩이질에 놀란 물고기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조필순의 아들은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고서 전우를 버리지 않는 군인처럼 어머니를 업고 내달렸다. 파천댁 부부가 손을 모으며 그 뒤를 따랐다. 노인이 다시 앉은뱅이가 된 걸 알았으니 관광버스 기사인 아들이 실직이라도 당할까 봐 겁을 내는 모양이었다. 물고기를 얻어먹었던 사람들도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기적은 탐냈으나 살(煞)은 겁내는 자들이었다. 묘화는 모두에게 실망했지만 생각만큼 통증이 심하지는 않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 오직 목사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목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왜 자기를 피해왔는지 묻고 싶었다. 오늘을 위해서였냐고 묻고도 싶었다. 알려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혀가 굳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그녀는 회상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회상은 주로 엄마의 모습과 함께 전개되었다. 엄마는 자신을 떠나기 전날 밤, 평소와 달리 술을 마시지 않았다. 때리지도 않았다.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묘화의 뺨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묘화야. 그간 우리가 남의 눈을 피해 살아왔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단다. 큰일을 위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했기 때문이야. 아직도 다흥 김씨 문중에는 우리의 정체를 알면 죽이려고 찾아올 자들이 있어. 너는 내 딸이 아니야(그러나 누구에게도 얘기하면 안 돼. 차차 알게 될 날이 올 테니).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분의 피가 네 몸속에 흐르고 있어. 네 증조할머니 이름은 명진보살이라고 해. 이 이름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돼. 그분은 갖은 고난과 박해를 피해 살아오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야. 언젠가 벌어질 '천지개벽의 날'을 위해서지. 그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용한 무녀이기도 했단다. 나는 그분께 계시를 받고 성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어. 그날이 올 때까지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임무지. 다흥 김씨들에게 죽임 당한 그분의 후손들이 내게 너를 맡겼고 나는 너를 해치려는 손길을 피해 일생 동안 도망 다녀야 했어. '천지개벽의 날'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이 어미도 정확히 모른단다. 어마어마한 분들의 생각을 한낱 미물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러나 그분들은 우리가 답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해 놓으셨어."
- "그들은 태양이 두 개가 되어 나타날 때가 바로 천지개벽이 임박했다는 전조이니 미리 준비를 하라 하셨다. 바로 금년 여름 하늘에 해가 두 개였어. 나는 그걸 똑똑히 보았단다. 이제 신비한 일들이 너에게 일어날 거야. 신께서 네게 부름을 주시는 거란다. 위대한 분은 그분과 맥이 닿는 너를 틀림없이 찾게 되어 있어. 그분이 찾아오면 피하지 말거라. 그냥 받아들이면 돼. 그때까지 몸을 정갈히 하고 부정 타는 생각도 하지 마. 왜냐하면 위대한 분을 만나고 나면 더 위대한 분을 만나게 될 것이거든. 그렇게 되면 너는 까마득한 과거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거고 머지않아 네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맞이하게 될 거란다."
- 묘화는 평소와 다른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신이 들려 횡설수설하는 거라 여겼다. 아니면 사람들 말처럼 엄마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도.
그러나 이제 묘화는 엄마의 말을 믿게 되었다. 난정호에서 물살을 가르며 흘러온 물건을 주웠을 때 엄마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았다. 위대한 물건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진실을 가르쳐주었다. 지혜를 주고 신통력을 내렸으며 그녀가 쓰지 않던 언어조차 구사하게 했다. 엄마의 예언은 한 가지가 틀렸는데, 그건 위대한 계시가 십자가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무당과는 관련 없는 교회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를 품에 안은 순간 그녀는 위대한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화는 낯이 익은 그 얼굴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교회 벽에 걸린 그림에 그분은 언제나 존재했었다.
- 진실을 알게 된 묘화는 그분의 능력으로 초월적인 힘을 발휘했고 사람의 병마를 낫게 했으며 어로 행위에도 놀라운 수확을 안겨주었다. 엄마가 사라진 대신, 그녀에게 머리 조아리는 사람들이 늘었고 실제로 묘화는 위대한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엄마는 돌팔이 무당이 아니었고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엄마는 이 날을 위해 일부러 안전하게 위장해 왔을 뿐이었다.
- '오늘 위대한 분을 실제로 만났으니 이제는 더 위대한 분을 만날 차례다. 그분은 과연 누구일까?'
- 후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녀는 엄마의 말을 한 가지 어겼었다. 사적인 복수로 부정 탈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녀는 순남의 목숨을 쉽게 빼앗았고 다음 차례로 영자를 점찍었다. 둘은 평소에 자신을 이유 없이 괴롭혔다. 감히 위대한 분에게 불경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묘화는 그녀들이 꾸는 꿈으로 찾아갔다. 무당의 옷을 입고 나타나 바짝 겁을 주었다.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꼴을 보고 싶었다. 바로 그게 실수였다. 그것들이 입을 놀리자, 동네에서 묘화의 능력을 지지하는 사람 못지않게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악마 혹은 사탄이라고 부르며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목사는 자신을 의혹에 찬 눈으로 보았고 일부러 개를 때려잡아 시험에 처하게 했다.
- 그러나 한번 탄 부정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녀는 역살을 맞았다. 북소리, 징소리, 태평소 소리 사이로 묘화는 저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팔이 뽑혀나가고 다리가 끊어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무력했다. 세상에는 더 강한 자가 많았고 알지 못하는 힘이 넘쳤다. 아직 초짜에 불과한 그녀는 대처법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천지개벽의 날'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 묘화로부터 비롯될 거라고 했는데 스스로 망쳐버리고 말았다.
- 처음 묘화는 위대한 분이 목사이고 더욱 위대한 분이 예수인 줄 알았다. 목사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분이 아니라고 단정해버린 지 오래였다.
오늘 그녀는 오판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난정호에서 만난 예수가 위대한 분이라면 더 위대한 분은 틀림없이 목사였다. 순남을 살리려는 현장에 직접 와서 "너의 몸주는 누구냐” 하고 물어볼 당시 그녀는 머릿속에서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건 목사로부터 날아온 기운이었다. 머릿속에서 우주가 흘러가고 시간이 무한으로 길어졌다(그녀뿐만 아니라 목사 또한 그 기운을 함께 느낀 것 같았다).
- [그는 성정이 포악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기로 소문난 탐관오리였다 하오.
장일손의 수제자 중에는 연암 선생의 학설에 정통하고 손자병법에 능한 김육설이란 청년이 있었소. 그 역시 다흥 김씨로서 빼어난 재주와 너른 인맥을 지녔음에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벼슬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처지였소. 종친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고 모든 집안 대소사에서도 배척당한 불행한 천재였지요. 장일손은 김육설의 비범한 능력을 진작부터 눈여겨보고 그의 정신을 김광신의 육체 안에다 집어넣을 계략을 짰소. 지방 수령인 김광신부터 시작해 더 높은 벼슬아치들의 육체를 심전신술로 강탈한 뒤 역성혁명을 일으켜 사해만민(四海萬民)이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려 했던 거요. 김육설은 스승의 사상에 감동한 나머지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 했소.
조상에 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해 미안하오만 김광신은 여색은 물론 남색가로서도 악명을 떨친 사람이라고 했소. 장일손은 교단에서 부리고 있던 미소년 하나를 보내 김광신의 눈에 들게 한 뒤 결국 그의 침소까지 불려 가게 하는 데 성공했소. 그 소년이 김광신의 머리터럭과 피를 성공적으로 구해 왔지요. 장일손은 그들의 은거지인 마의 동굴에서 피와 머리카락을 묻힌 부적을 태우고 사구취신(捨舊取新)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김육설의 개혁적인 정신을 자기 보신적인 현령 김광신의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데 성공했소. 의식을 치른 후 청년은 숨을 거두었고 ... ]
- "부모님이 조상에 관해 얘기해 준 적이 있었나요?"
"집안에 현령 벼슬아치가 있었다는 얘긴 처음 듣습니다."
"부모님조차 모를 수도 있소. 아니면 숨겼거나. 그런 검은 역사는 서둘러 지우고 소문나지 않게 하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로 미화하는 게 요즘 사람들이오. 언제 어디서든 사람끼리의 대화를 들어보면 조상 중에 양반 아닌 사람이 없소. 우리 집안은 양반 집안이다, 우리 집안은 대단했다, 우리 조상은 삼정승을 지냈다... 조선 시대에 양반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 모두가 양반의 후손들이겠소? 그런 장식이나 치장은 대부분 후손들의 역할이오. 어떤 정신 나간 이가 우리 조상은 탐관오리였다가 망나니에게 살해당했다고 쉽게 말하겠소?"
- "나는 석발의 이야기를 어릴 적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소. 어른들은 언젠가 악독한 일이 재발하리라 확신하고 있었소. 나도 이제야 믿을 수 있게 되었소. 진실을 보는 눈으로 과거를 대할 수 있는 이들만이 무서운 참화를 막을 수 있다는 걸."
"선생님 조상은 그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선녀보살에겐 앵두라는 신딸이 있었소. 김광신의 죽음을 알게 된 추격대가 석발을 잡고 선녀보살도 포획했소. 먼저 석발이 죽고 그다음에 선녀보살이 죽을 위기에 처했죠. 추격대의 대장인 김광신의 조카는 숙부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선녀보살이 보는 앞에서 어린 앵두를 죽이려고 했소. 그때 ... "
- 사람 목숨을 빼앗는 그녀의 지시도 소름 끼치지만 일말의 거부감 없이 맡은 일을 수행한 노인도 몸서리쳐지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엄연히 현실로 밝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이성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 노인은 마귀 들린 자처럼 행동했다. 그 뱀이 겁만 줄 줄 알았다라든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라든가 하는 인간적인 언사는 없었다. 손녀 같은 순남은 노인에게 그저 죽어 마땅한 아이였을 뿐이다.
"걷지 못하는 나를 걷게 해 준 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그렇게나 찬송하고 기도했는데도 네 당집의 예수가 들어줬어? 묘화만이 예수님이야! 네가 모시는 신은 가짜야."
"닥쳐, 이 악마의 사도야!"
정균이 버럭 소리 질렀다. 노인이 뜻밖의 기세에 눌려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듯 입을 닫았다. 먼 거리에서 들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느낀 건 그때였다. 그건 주먹으로 벽을 툭툭 치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정균의 눈이 자개농으로 쏠렸다. 자세히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다. 전율이 등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 "할머니, 혹시 묘화가 난정호에서 칼 같은 걸 주웠다는 얘길 안 했나요?"
"칼은 무슨 놈의 칼! 십자가야!"
"직접 보셨나요?"
"봤어!"
"왜 묘화를 보호하려고 하시죠?"
"내 말이 거짓말 같아?"
"십자가를 지닌 사람이 부적 쓸 일이 없잖아요!"
"왜 그럴 일이 없는데?"
노인이 정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균은 노인의 모습이 갈수록 불쾌해졌다.
"왜 네 마음대로 이건 옳고 저건 틀린데? 대답해 봐, 이놈아.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는데? 하나님 사랑엔 차등이 없다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부적이 무당만 쓰는 거라고 말하는 건 차등이 아니야?"
노인이 팔을 휘두르자 비녀가 날아가고 허연 머리칼이 서리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 '만물을 구제하는 태양의 존재(救援日人)...? 혹은 만물을 구제하는 왜나라 사람? 오직 한 사람만이 구원한다(救援一人)? 맞나? 아닌가? 대답해 주시오, 풍백 어른! 그것이 이 막강한 신의 이름이오?'
풍백이 내는 최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그렇지 않다! 그의 이름은 두 글자다. '구원일인' 네 글자가 아니야!"
- 섬광 같은 충격이 정신을 덮쳤다. 땅바닥을 구른 우사는 풍백이 죽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도망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 저주받은 땅에 더 남아 있다간 개죽음을 당해 혼백조차 수습하지 못할 터였다. 노란 부적들이 그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맴을 돌았다. 우사는 휘파람을 불어 종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는 사제복을 묻어둔 곳으로 달렸다. 부적들이 다시 그를 따라왔다.
- 유일하게 믿는 풍백과 운사는 죽어버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 나무들이 빽빽한 장승 앞까지 당도했다. 지하여장군 장승 뒤 바위 밑에 옷을 숨겨놓았었다. 엄폐물을 들추자 검은 사제복은 그대로 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노란 부적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단내와 피비린내가 섞인 숨을 토해내며 옷을 걸 ...
-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우사의 눈길이 먼저 정균을, 그 뒤의 김동우와 애란과 진태를, 그리고 순남 아버지 패의 사람들을, 그다음 귀면와가 새겨진 지붕을, 마지막으로 어둠에 둘러싸인 섭주의 야산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균에게로 와 멈추었다.
"그것의 기운은 강한 정도가 아니야. 힘을 숨기기도 마음대로고 드러내기도 마음대로야. 지금도 가까이에서 그 기운이 느껴지지만 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어. 하물며 너희 같은 것들이 그것을 상대하겠어? 운사는 귀신들도 겁을 내던 무당이지만 지독한 꼴로 죽었어. 풍백 같은 이름난 법사도 손 한번 못 써보고 그것한테 죽어나갔지. 풍백은 죽기 전에 내게 얘기했어. '구원일인'이라고. 그 말이 뭔지는 나도 몰라. 그런데 네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랬어. '구원'인지 '구일'인지 '일인'인지 그것이 당신들을 죽일 거야. 부탁을 받아 이 일을 하긴 했지만 우린 원래 사람한테 살을 날리는 모진 짓은 하지 않아. 어느 무속인인들 마찬가지지. 단지 영험한 기운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에 일을 맡았던 거야. 과욕을 부린 거란 말이야. 그 기운을 내림받으면 저승과 이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큰 신이 될 수 있거든. 계집아이가 문제가 아니야. 그 계집아이 역시..."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고 지붕으로 홱 고개를 틀었다. 우사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거기 누구냐?"
- 하지만 정균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어처구니없는 야사 따위를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생업에 바쁜 서울 사람들이었고 그런 한가한 이야기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섭주에 와 있는 정균은 빠져들기를 꺼리면서도 자꾸만 미신으로 쏠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귀신을 볼 줄 안다는 그의 비밀은 미신을 받아들이는 수용체 역할을 했다. 그는 절망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 "겨우 전설 따위를 믿고 이런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겁니까? 대체 선생님이 무슨 짓을 하신 줄 아세요?"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피하지 않겠소. 내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겠소."
"대체 왜 그러셨지요?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묘화는 너무나 잔혹하게 죽었어요."
- 정균은 딱 한 번 만나본 묘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영혼의 교감 같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교감이 지속되었더라면 그녀와 그녀의 무한한 비밀에 관해서도 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이미지가 암시한 미지에 관한 비밀을.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묘화가 악마인지 천사인지 판별할 수 없었고 아마 그가 죽을 때까지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단지 무당의 딸이었기에 피해왔던 게 문제였다. 그의 내면은 묘화를 지켜주지 못한 데서 온 죄책감과, 자신 말고 다른 이가 해결해 ...
- 인기척은 없었다. 이곳은 주님의 권능으로 정화해야 할 불모지였다. 모든 비극이 이곳에서 비롯되었고 더욱 깊은 기원은 난정호에서 흘러들어왔으리라.
빛이 시야를 넓혀주었다. 이제 그는 나무 사이에 터져 뭉개진 시신이 두 구 널브러져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건 묘화도, 그녀의 엄마 월수도, 묘화를 괴롭혔던 순남도 아니었다. 풍백과 운사라는 이름을 가진 두 무속인일 뿐이었다. 빛이 그걸 일깨워주었다.
'석발의 칼을 발견한다면 나의 힘으로 그걸 처치하리라.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나리라. 돌아래마을은 처음부터 나와 맞지 않았던 암흑의 영역이다.'
- 문을 연 순간 정균은 그곳이 신당임을 알았다. 사면 벽에 수염을 기른 산신령과 창을 든 장군의 모습, 호랑이와 잉어 따위가 그들만의 공간을 침범한 목사를 에워쌌다. 정균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고 그들 역시 그림에서 튀어나올 수 없었다. 제단 위에는 오동나무 궤짝 하나가 보란 듯이 얹혀 있었다. 석발의 칼이 담겨 있는 궤짝이 틀림없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거기서 빛이 흘러나왔다. 강렬한 힘이 그를 불러들였다. 그 이전에는 묘화를 불러들였었다. 정균은 묘화의 시야를 틔워주고 신비한 힘을 주던 칼이 대상을 바꿔 자신을 유혹하는 걸 알았다. 눈은 어느덧 벽을 관통해 바깥을 볼 수 있었으며 육체는 중력을 초탈해 허공을 디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석발의 칼을 제압할 물건이 필요했으나 아쉽게도 지금 그는 성서를 지니지 않았 ...
- "그 빛은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석발의 칼이 아니에요.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묘화가 난정호에서 발견한 건 칼이 아니라 십자가였어요."
"십자가라고?"
"황금 십자가요! 저 역시 그 빛을 따라 묘화의 당집으로 들어간 겁니다. 처음엔 석발의 칼인 줄 알았어요. 그 흉물만 없애면 마을에 일어나는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십자가였어요! 묘화는 옛 시절의 나쁜 귀신에게 홀린 게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영접한 건지도 몰라요! 조필순의 정체야말로 악독한 무당일 거예요. 그녀가 부적을 써서 나쁜 짓을 벌인 겁니다. 묘화에게서 걷는 능력을 얻었다는데, 천만에요. 오히려 묘화를 이용해서 이 마을에 이간질을 퍼뜨렸어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다면 분명 그 여자가 원흉일 거예요."
"넘겨짚지 말고 사태를 바로 보시오! 그럼 당신이 묘화의 뒤편에서 본 석발은 뭐요?"
이병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침을 튀기는 정균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예수님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오, 나는 질투에 미쳐 묘화를 죽게 내버려 뒀어요. 나만이 이 마을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사도라고 자부했어요."
- 정균이 고개를 들었다. 이병호는 젊은 목사의 얼굴에서 광기를 보았고, 정균은 나이 든 소설가의 얼굴에서 진지함을 가장 한 채 떼는 시치미를 예감했다.
"어딨죠? 그 십자가는?"
"십자가 같은 건 없었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를 품으로 받아들였고 그리고 정신을 잃은 겁니다."
"내가 그걸 숨겼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렇진 않아요. 잠깐만... 저를 어디서 발견하셨다고요?"
- "진정하시오! 당신이 거기서 본 건 십자가도 그 무엇도 아니오. 김 목사가 묘화의 굿판에서 만난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석발이 틀림없소. 하지만 묘화도, 석발조차도 이 사악한 마당극에서 조연에 불과하오. 그것이 이제 행동을 개시한 거요. 내가 왜 난정호를 그렇게나 맴돌았는지 모르겠소? 소설 쓰기가 목적이 아니었소. 마의 동굴을 찾기 위한 거란 말이오. 분명히 위치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감쪽같이 사라졌소! 그것이 알아챈 게 틀림없소! 지금 바깥 동정을 알고는 있소? 사람들이 서로를 그냥 죽이는 게 아니오. 칼로 목을 잘라 죽이고 있소. 석발이 놈의 목을 쳐버린 1876년의 그날이 재현되고 있단 말이오."
"목을 잘라 죽인다고요?"
"거짓이 아니오! 이 마을에 올 때 예상은 한 일이지만, 내가 왜 지하에 숨어 무장까지 했겠소?"
"장일손입니까! 그 교주가 부활한다는 겁니까?"
"장일손은 제사를 지내는 제주(祭主)에 불과하오! 보다 사악한 어둠이 이제 두 개의 태양이 내준 길로 재림하려는 거요!"
- "구원일인(口員一人)은 '구제를 하는 유일한 자'라는 한자가 아니오! '무수히 많은 사람도 결국 한 사람에 불과하다'라는 만민평등의 깨우침과 함께, 인간 우월의 유일신이라는 암시가 동시에 함축된 거요. 그래서 고난에 허덕이던 조선 백성들에게 먹혀들어갈 수 있었던 거요. 구원일인의 앞 두 글자를 합치면 원(圓)이 되고 뒷 글자 둘을 합치면 대(大)가 되오! 원대(圓大), 혹은 원대(圓帶)라고도 불리는 두 글자를 말하는 거요. 금생재륜교가 떠받드는 유일신 원대신왕이 제주 장일손의 힘을 통해 이곳에 강림하려는 거요. 그 존재야말로 심전신술이라는 신비력으로 사람 목숨을 장난치는 위험한 신이오. 그놈이 강림하지 못하게 우린 제주를 찾아 숨통을 끊어야만 해요!"
- "앞을 못 보는 자여, 겨우 성씨 하나를 이 땅에서 없애는 게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해? 시야를 넓게 가져. 넌 온 우주를 초월하는 신의 교주가 된 자야."
"원대신왕께서는 선택받은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하십니다."
월수보살이 말했다.
"없어질 종자는 없어지고 필요한 종자만이 남아요. 한 성씨의 절멸은 다른 성씨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어 그들을 무릎 꿇릴 수 있어요. 오직 그분께 선택받은 자들만이 최고 경지에 들어 모든 진리를 현찰(賢察)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어머니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정균을 끌어안았다.
"천지개벽의 날이 끝나면 우린 성씨를 바꿀 거야. 새로운 성씨의 창시자가 되는 거지. 금생재륜교는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과 번영과 성공을, 아프지 않는 건강함과 대를 잇는 권력을 줄 거야. 네 아버지와 나도 처음에는 믿음에 회의를 가졌어. 하지만 그건 거짓이 아닌 진실이야."
"당연히 회의를 가지셔야죠, 어머니! 저들은 사람의 가죽을 쓰고 나타난 사탄이에요."
"사탄이 아니란다. 우린 이미 기적을 접했어! 이번에 네 형이 법관이 된 것도 그분의 뜻이 작용한 결과야. 원래 내정자는 다른 사람이었지. 그는 지금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잃었어. 그래서 네 형이 된 거야. 알겠니? 다 그분의 힘이란 말야. 이건 시작에 불과해. 곧 의사도 땅 부자도 장관도 나올 거야. 정부요직도 힘 있는 공무 수행자들도 다 우리 사람들 차지가 될 거란다. 네 덕분에 말이야."
"언젠간 이 나라 대통령조차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바로 그분의 힘과 그분을 돕는 너의 힘으로 말이다."
아버지가 정균을 끌어안았다.
부모는 눈물을 쏟았지만 아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아닌 것 같았다. 정균을 닮은 부모의 얼굴에는 광신적인 환희가 넘쳤다. 상준이 정균의 어깨를 다독였다.
- "네가 애시당초 이 마을의 전도를 맡게 된 것은 말야. 그 또한 위대한 분의 뜻이야. 너와 내가 나온 대학의 높은 자리에 계신 분 하나가 실은 금생재륜교의 고승이시거든. 원래부터 너를 이곳에 보내려고 하셨는데 네가 먼저 자원을 했으니 이야말로 섭리 아니겠어? 너도 잠재적인 숙명을 깨닫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
"이런 일에는 도움 주는 신도들의 힘이 절대적이에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묘화는 순교까지 했어요. 그걸 기억해요."
월수보살도 정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묘화를 죽음으로 내몬 건 너야! 어미라는 작자가 딸을 죽게 만들었다고."
"예정되어 있던 거예요. 석발과 선녀보살이 함께 순교하면서 제주의 뜻을 살려냈듯 묘화는 석발의 칼을 안고 선녀보살의 역할을 맡아 당신을 깨우치게 한 거예요."
작가의 말
전작인 <살: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가 예상을 깨고 보여준 호조로 작년 한 해는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장점과 단점에 대한 칭찬과 비판을 성찰하고 연구하고 반성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새 작품 구상에 임했습니다. 무명이었던 기나긴 세월 동안, 하루하루가 요구하는 것들의 압박에 눌려 포기 직전까지 갔던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게 된 요인은 독자님들의 관심 덕이라고 믿습니다. 격려와 질타 모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나름의 특화 사업이라고나 할까요? 알아봐 주고 고대해 주는 분들이 생기니, 하고 싶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꾸준하게 써서 내놓은 이야기가 두 번째 무속 공포소설인 <신을 받으라>입니다. 능력에 한계가 있어 교훈을 줄 소설을 쓰진 못하지만 재미를 주는 소설을 부지런히 써서 독자님들의 여가 시간을 유익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글쓰기는 농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해 동안 부지런히 일구고 비료 주고 풍수해를 막아 추수한 작물로 이제 독자님들의 영농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결과에 따라 풍년인지 흉년인지도 판가름 날 것이고요. 당연히 흉년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정신과 육체, 유전 형질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관대함과 노련함과 인내심으로 출간 작업을 도와주신 김정은·안태운 편집자 선생님들, 수고하셨습니다.
2019년 여름
박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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