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신미경
출판 : 뜻밖
출간 : 24.07.03
자유에도 가격이 있을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내게 이 제목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마도, 개인의 자격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면 그 가격은 제각기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홀가분하게 자연으로 떠나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연인이 있는가 하면, 미래 소비를 계산해 각종 연금과 투자를 차곡차곡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자유의 가격'.
이 표현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필요한 자산' 정도로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
보다 친숙하게는 '은퇴 자금'.
저자와 비슷한 나이대와 관심사 -책이란 것을 읽고 모은다는 점에서- 를 가지고 있어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신미경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었었는데, 책마다 그 시기에 필요한 조언을 얻는 기분이라 매번 고맙다.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법을.
<오늘도 비움>에서는 생활환경을 정리 정돈하고 유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혼자의 가정식>에서는 나 자신을 위해 요리하고 차리는 음식, 그 음식을 통한 자기 사랑을.
그리고 <자유의 가격>에서는 지금 내가 나아가는 방향성에 대한 격려와 칭찬을, 받는 기분이었다.
내 경우 감당 가능한 선에서의 레버리지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쪽이지만, 안정적인 현금 흐름과 성장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은 저자와 일치한다. 젊을 때는 '무료'인 것만 같았던 활력과 자유로운 움직임이 점점 '유료'가 되어간다는 표현이- 너무 슬프면서도 깊게 공감된다.
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보다 자유롭게, 보다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서 '자유'를 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도.
당장의 현실을 살아가기에도 벅찰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과거와 미래의 자신에게 전할 수 있는 선물은 언제나 존재한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조금 더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과거로부터 쌓아온 경험과 미래에 누릴 경험 모두에게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자유의 가격>에서, 이런 나의 생각이 공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았다.
사족.
배당주는 모아갈수록 빛이 난다. 당장 쓸 돈이 아니니 가격이 하락하면 더 사모으고 잊고 있으면 된다.
3년에 하나 정도씩 준전문가가 될 수 있게 공부한다니, 나도 당장 따라 해야지. 나이가 들수록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문학과 예술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미국 주식, 배당, 금융 다큐멘터리? 좋은 선택이지 않나? 첫 숨의 절박함으로 구도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안으로 떠는 것보다 여유와 안정에 집중하는 게 낫다. 그러다 보면 방해거리가 줄어든 삶이 찾아올 테니, 어떤 주제건 더욱 집중할 수 있다.
- [서울에 사는 1인 가구 최소욕구생활비로 45세에 은퇴하기로 결심하다]
- 옛날 옛적 스마트폰 이전 피처폰 시대에 한 시골쥐가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알고 지내는 서울쥐는 한 마리도 없었지만, 텔레비전과 잡지에서 보이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지요. 게다가 마을에는 시골쥐의 야망을 불태울 만한 일거리도 마땅치 않았답니다. 시골쥐는 100권이 훨씬 넘는 책과 잡지, 노트북, 옷 꾸러미를 챙겨 차에 싣고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시작은 단칸방이었어요. 월세는 비쌌고 취업은 어려웠지만 눈에 불을 켜고 돈벌이를 찾았습니다. 오늘 먹을 치즈는 아무도 공짜로 주지 않았으니까요. 하늘도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을까요? 일자리를 찾고 부업도 하며 조금씩 사투리를 고치고, 패션 스타일도 다듬자 드디어 서울쥐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옛 시골쥐는 서울 주소에 방 2개짜리 집을 샀고, 차츰 알고 지내는 서울쥐들도 많이 생겼답니다. 쉬는 날에는 치즈맛 팝콘을 먹으며 커다란 극장에서 멋진 영화를 감상하거나 유명한 작품도 미술관에서 가장 빠르게 눈에 담을 수 있었어요. 이토록 멋진 성공 스토리라니!
- 그런데 먹고살려고 너무 무리했던 탓이었을까요... 옛 시골쥐는 곧잘 아프곤 했답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 편히 일을 쉴 만한 돈은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자유를 사겠노라고. 시골쥐는 주머니 속 동전을 한 푼 두 푼 꺼내서 셈해보았어요. '에고, 모자라다.' 그러다 궁리를 했죠. 최소욕구생활비만큼 무근로 자동소득을 만들어 (출퇴근) 은퇴를 하면 어떨까.
- 옛 시골쥐가 정말 자유를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목표 하나가 옛 시골쥐에게는 반짝이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끝.
- 눈치챘겠지만 시골쥐는 이 글을 쓰는 나다. 쓰기 20년, 자립 17년, 월급생활자 경력 14년의 소유자. 최근에 또 한 번 병원 신세를 진 데다 후유증도 심해서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무기한 쉬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불안했다. 다달이 입금되는 돈이 없이 저금을 쪼개서 사는 생활을 또 반복해야 한다니, 삶에 건강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매번 드는 고민이다.
- 내가 번아웃을 겪거나 다시 아파도 나 대신 돈을 벌고, 먹여 살려 줄 사람은 없다. 게다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이 싫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고, 그 끝에 총 6가지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 1. 빚 없는 온전한 내 소유의 작은 집
2. 낭비 없는 생활을 하며 적은 돈으로 살기
3. 노동 없이도 최저생계비는 확보하기
4. 출퇴근은 선택, 흥미로운 부업은 필수
5. 몸이 덜 아프도록 기초 체력 키우기
6. 미리 죽음을 준비해 두기
- 1번부터 3번까지 무려 세 가지가 돈 문제다. 부업에서 벌어들이는 소득까지 돈의 범위에 포함하면 네 가지나 된다. 오늘도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나는 언제쯤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까. 여유롭고 게으르게, 편안한 혹은 내 마음대로 사는 일상의 다른 말은 주택담보대출 없음, 월세나 배당으로 받는 꾸준한 현금 흐름, 소득이 생기는 부업 같은 철저한 어른의 언어로 이뤄져 있다.
- 나는 자립하기 위해 확실한 물질적 안정 외에 2가지를 더 추가했다. 바로 나이 들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병원비를 줄이고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여 줄 기초 체력 올리기, 그리고 삶의 의미를 돈에 전부 맞추며 시간을 쓰지 않도록 존엄하고 깔끔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자 했다. 자립의 시작은 부엌 캐비닛에 보관한 콘푸레이크에 개미가 들끓을 만큼 어설펐지만 이제는 끼니를 손수 만들어 먹을 만큼 똑 부러지게 변했다. 실직과 같이 좌절의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 직업을 가지고 산다.
- 그 사이사이에 자립심만큼은 커다랗게 자랐다.
- "삶의 안전망을 만드는 시작이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처럼 뒤늦게라도 자유를 사겠노라 외치는 분들에게만큼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돈이 가져오는 안정감, 시간적 여유, 선택의 자유와 같은 가치가 소중하기에 잠깐의 기분 전환에 돈을 당분간 쓰지 않아도 내겐 큰 타격이 없다. 이렇게 도파민 자극이 줄어드니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감도가 높아져 정상적인 건강 상태라면 깊은 공허나 가벼운 우울감이 스밀 틈도 없다. 삶의 문제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튼튼해질수록 내 마음보는 점점 넓어져 나와 맞지 않는 타인의 결점까지도 조금씩 포용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횟수도 줄어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지. 않을지? 아직 모르지만, 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변치 않는다.
- 원래 세상사 모든 일에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실행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이가 있고, 계속하는 사람과 그만두는 누군가가 있을 뿐, 끝까지 가보지 않고 멈추면 어떤 결론이 결승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
- 대출 없는 집 한 채와 일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생활비가 있다면 의식주 걱정 없이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텐데, 1882년에 태어난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 500파운드(지금 기준으로 4천~5천만 원)의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142년이 지난 지금도 각자 형편에 따라 집의 수준이나 생활비는 달라지겠지만, 이 두 가지는 살아가는 기본이다.
- 그러나 자립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경제적 채비 이전에 내가 어디에서 살지를 정하는 게 우선이다. 거주비며 생활비, 물가를 따지고자 하는 돈의 문제라기보다 자립을 결심했을 때의 첫 번째 의사결정이라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의지대로 내가 살아갈 곳이 결정되었다. 내 경우 지방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
- '계속해, 그러다 보면 먹고는 살 거야' 같은 태도를 가지려 했다. '실패란 뭐라도 해봤다는 증거이자 내가 이 일을 잘하게 된 귀한 흔적이다' 이렇게 외치며 뛰어난 점 없는 내 삶에 자기 암시를 걸기도 했다. 채찍과 당근으로 나를 다독이다가도 나와 비슷한 분야에서 대성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부러움이나 열등감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속세인이 아닌 수도자이리라.
- 이런 비교에서 자유롭고자 하루라도 빨리 사회의 경쟁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 안온한 내 집에서 교코처럼 빈둥거리고 싶다. 매일 아무 때나 일어나고 동네를 산책하고 밥을 챙겨 먹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성과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즐기면서 하면 좋겠다. 아무래도 번아웃인 모양이다.
- 이런 바람은 지하철을 탈 때면 더욱 강해졌다. 일로 가끔 겪는 좌절감 이전에, 아침부터 기 빨리는 교통지옥을 경험할수록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지 슬퍼졌다.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몸이 힘든 날만.
- 나는 표면적으로 보면 물질적 부족함은 전혀 없다. 그러나 수시로 심리적 가난에 시달린다. 지금 당장 월급이 없어지면 유지하지 못할 생활임을 알아서다.
- 다니는 회사의 성장이 꺾여서 정리 해고 바람이 불면, 근심으로 가득 차 서로를 바라보는 직장 동료들의 표정이 어둡다. 게다가 내 시간이 온통 계약에 묶여 있음을 깨달을 때면 부자유함을 느낀다. 연봉근로계약, 마감일이 명시된 집필계약, 소소한 청탁 원고에 대한 메일 전송일도. 일에 붙은 기한은 짧거나 길게 내 시간을 돈으로 바꾸고 있다는 의미다.
- 사람마다 시간의 값이 다른 능력주의 시대는 위아래가 열려 있는 사회라서 실력에 따라 시간을 파는 값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채찍질한다. 그러니 엄마 친구딸보다 내가 가난한 이유는 능력이 부족한 내 탓이다. 그게 지나온 절망감의 이유이며, 경쟁을 피해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심리적 가난의 원인을 타인보다 못난 내 탓이라 여겼는데, 최근 두 번째 수술을 받은 나는 그저 내게 남은 시간이 가장 소중해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가 잡지 <GQ 코리아>와 했던 인터뷰 중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답변을 발견했다. 인세 덕분에 부자가 됐냐고 묻는 질문에, 돈은 많이 벌었으나 자신은 돈에 욕심이 없다는 것. 그 많은 돈으로 무얼 하느냐는 추가 질문에 가장 값비싼 시간, 달리 말하면 자유를 산다는 완벽한 답이 이어진다.
- 소설가 하루키의 말처럼 나 역시 돈으로 사고 싶은 것은 시간이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자유. 내 것임에도 내 것이 아닌 듯한 시간은 도대체 얼마를 주고 살 수 있는 걸까? 사회에서의 계약이 아닌 자신이 매기는 시간의 가치는 주관적이다. 나는 노동으로 내 시간을 바꾸지 않았을 때, 생활비 측면에서 나의 24시간을 최소욕구 기준으로 하루 4만 원, 30일은 월 120만 원, 1년은 1440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예일대학교 신입생 중 자신의 목표를 구체적인 글로 작성한 학생은 3%였는데, 20년 후에 이들의 재산이 나머지 학생들의 재산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 막연히 엄청난 부자, 적당히 편안한 생활을 꿈꾸기보다 그게 내게 얼마짜리인지 확실한 가격표를 정하면 도달할 확률이 높아진다. 스스로 자신의 자유에 붙인 가격은 가장 현실적인 계산기로 두들겨 본 시간의 값이어야 한다.
- 내 시간의 시장 가격이 정확히 얼마인지 궁금했을 때 '일일 소득 노트'를 기록해 본 적이 있다.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쓰는 회사에서 받는 세후 월급을 진짜 일한 날로 나눠 하루 일급으로 계산했고, 비정기 소득인 금융, 사업, 기타(상품권처럼 별도로 납부할 세금이 없는 수입)로 나눠 매일 수입의 현금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나의 시간은 매일 그 가격이 달랐다. 주말은 회사원으로서 수입이 없으니 대체적으로 CMA 계좌에 붙은 조그마한 금융소득 정도밖엔 없었다. 월급을 일급으로 전환하면 내가 회사원으로 쓰는 하루 11시간(근무 시간 외 출퇴근과 점심시간까지 포함)의 가격이 보인다. 자다 깬 새벽에도 업무에 대한 고민을 곧잘 할 정도니 감정 노동까지 포함하면 11시간 이상 회사에 쓰고 있기에, 여기까지 포함해 시급으로 나누면 그 가격은 더 적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니 무가치한 흥미성 소비는 주저하게 되며, 동시에 내가 월급 없이도 살려면 어디에서 ...
- 내가 늘 바라왔던 출퇴근 은퇴를 사전 체험하고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차를 마신다. 식사를 마치면 꼭 이곳에서 바깥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기도 한다. 비 내리는 북부의 시골은 5월 초 무렵임에도 한기가 스밀 만큼 다소 서늘한 탓에 전기 히터로 공기를 덥히고, 바닥에 깐 작은 온열 패드로 엉덩이와 다리를 따듯하게 해주고 있다. 태양광 주택이라서 전기료 부담이 없군, 하는 마음으로 에너지 절약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다.
테이블에는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과 박완서의 에세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나의 빵 굽는 타자기 맥북이 상시 켜져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무릎을 덮고 있는 담요를 배까지 끌어당기기도 한다. 수술 테이프가 붙은 배는 여전히 경미한 통증이 있다. 침대에 누우면 어지럽기도 하지만, 오늘부터 먹을 약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기분이 한결 좋다. 내일이면 시골의 별장 같은 친오빠 부부네에서 동가서가했던 생활과 안녕하고, 서울 내 집으로 돌아간다.
- 벌써 기억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지만, 불과 7일 전의 나는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였다. 입원실 침대 이름표에는 병원 나이로 만 39세라 적혀 있었다. 나는 30대에 벌써 두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했구나 싶었다. 이미 수술해 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수술방에 들어갈 때 떨리지는 않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며 '아직 살아 있네'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첫 번째와 달라지지 않았다. 몸에는 질병과 치른 두 번째의 흔적이 새겨진다.,
- 첫 번째는 비교적 큰 병이어서 혼자 살자는 결심을 굳건히 했다면, 두 번째는 노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안겨줬다. 단순히 '시간을 내 맘대로 쓸래, 출퇴근에서 은퇴하자'라며 울부짖었던 내가 얼마나 근시안적이었는지 몸소 알게 되었다.
- 나는 수술 전 약물 치료 때문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기간 한정 갱년기를 겪어야 했다. 그때 노년을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게나마 겪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노동으로 먹고사는 것은 신체 건강한 소수의 사람만 가능할 뿐, 나처럼 기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노동 없이 먹고 살 계획을 세워야 한다.
- 젊을 때는 분명 공짜였던 것들이 있다. 반짝이는 피부, 풍성한 머리카락, 오래 걸어도 부드러운 무릎 관절과 가끔 밤을 새도 크게 축 나지 않는 체력과 올곧은 체형까지도. 무료 체험 기간도 오래여서 30여 년 이상을 조금씩 기능은 떨어지지만 아직은 괜찮아, 하는 수준으로 누리며 산다.
그런데 가지고 태어난 내 몸이 이 모든 것의 내구성이 떨어졌다며 돈을 쓰라고 할 때가 온다. 오랫동안 당연히 누렸던 몸의 이점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은 예상보다 더 크다. 몸이 순식간에 더워져 사무실에서 손부채를 부쳐대는 나를 바라보는 58세 회사 상사에게 "내가 그랬지, 갱년기 오면 캐시미어 니트는 못 입는다니까?"라는 말을 들으며 좋아하는 니트를 벗는 심정이란.
- 오래 입을 좋은 옷을 알아보는 눈은 분명 생겼다. 그때의 내 쇼핑법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면 된다. 과소비로 기본 아이템을 사는 법을 배우다니... 갑자기 눈가가 왜 촉촉한 걸까. 아무튼 그랬다.
- 구두쇠일지언정 누구나 아낌없이 돈을 쓰는 영역이 하나쯤은 있는데, 나에겐 '꾸밈'이다. 패션에 집착했고, 인테리어도 일정 부분 그랬다. 가구는 '어나더 레벨'의 사치인지라 적정한 면적의 부동산이 필요하기에 한계를 모르는 소비는 없었다. 이런 꾸밈 비용은 사치재에 가깝고, 자유를 사는 날을 늦추는 소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 역시 최소욕구생활비 시스템을 마련한 후 여윳돈이 생기면, 예쁜 걸 좋아하기에 다시 꾸밈에 일정 부분 마음을 주며 살 거 같다. 하지만 지금 세운 작은 목표로 인해 꾸밈에 대한 관심은 컴퓨터에 모으는 사진이나 자료 수집으로 대체한다. 사치재란 원래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고 더 좋은 것이 나오기에, 미래로 미룬다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 우리가 필요 이상의 물건을 사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다.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들고, 뭘 입어도 이상해 보일 때는 옷을 사면 안 된다. 대신 자신의 생활 습관을 돌아보고, 1만 보 걷기 등 운동량을 늘리고, 잠을 충분히 잔다. 컨디션 문제이지 옷의 문제가 아니다. 되는 일이 없고, 짜증 나는 상황이 이어져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도 옷을 사면 안 된다. 새 옷은 많아야 두 번 정도 설렌다. 대부분 1회성 기분전환이다. 갚아야 할 청구서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쁨이다. 이때에는 현실에서 벗어나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여행도 좋지만 돈을 아끼는 예비자유인이라면 옆동네로 산책을 간다.
- 진짜 옷이 필요한 순간은 옷이 낡고 해져서 누가 봐도 "버려!"라고 말할 때다. 심지어 그 옷은 헌옷수거함에 넣을 수 없을 정도일 때다. 그 정도는 폐기물이니까. 조금 더 독하게 굴자면 헌옷수거함에도 넣지 못하게 낡은 옷이 생겼을 때, 수선할 수 있는지 재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오래 입어야 더 근사한 옷이 분명 있다.
- 더 구체적으로 예비 자유인이 살 만한 옷은 몸의 변화에 무관한 고무줄 밴드의 하의, 매년 브랜드에서 꾸준히 출시하는 셔츠, 피케 셔츠 스웨터 같은 기본 아이템, BWGN(블랙, 화이트, 그레이, 네이비) 컬러다. 개인적으로 컬러는 그레이가 최고다. 스님이나 수녀님의 옷이 회색인 이유는 블랙은 색이 바래면 희끗희끗해 보이고, 먼지가 잘 묻는다. 흰색은 때가 타고 얼룩이 생긴다. 그러나 회색지대라는 말이 있듯이, 회색은 이 같은 결점이 잘 보이지 않는 애매하게 깔끔한 색이다.
- 소재는 옷의 품질을 가르는 핵심이긴 하지만, 주로 면이나 폴리에스테르(겉옷이나 운동복에 한함)를 선택하면 드라이클리닝 제품이 드물기에 세탁비도 많이 나가지 않는다. 옷은 자주 세탁하면 금방 낡으니 깔끔은 적당히 떨기로 한다.
- 멋진 옷은 한때 내게 최우선의 욕구였지만 지금은 최하위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소비 메커니즘의 핵심. 이를 바꾸지 않으면 감정적 과소비는 멈출 수 없다.
- 디자이너의 킬힐(세일 정보를 입수해 싸게 샀고, 그 후 중고거래로 나쁘지 않은 값에 되팔았다)까지 수입 대부분을 쇼핑에 쓰는 와중에도 하이힐이라는 맥락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러 종류의 신발을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디자이너, 편집숍 주인 같은 비즈니스의 경로로 가지 못했고, 내가 알게 된 바를 글로 나누고 싶었기에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웃고 울고 성취감을 맛보고 때로 공허했으며, 패션 잡지에 취향의 플랫 슈즈에 대한 코멘트를 쓰고 방송에 출연하는 등 곧잘 미디어에 소개되었지만 특별한 성공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경험도 있다.
- 나는 한 분야에 집중한 소비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하나의 방법임을 이미 겪어 보았다. 취향은 구체적일수록 좋고, 이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쌓아야 하니 학구적일 필요가 있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연결시키면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산을 갖게 된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이 살아오며 겪은 경험을 돈으로 살 수 없기에.
- 물건을 매개로 나의 취향을 찾았던 시절, 이를 버리고 미니멀라이프란 필터를 거치고 나서야 필요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싶다는 큰 욕구 없이 예전보다 무난하게 절약 생활을 한다. 내 절약에 대한 타인의 순수한 의문, "왜 그렇게 살아?"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했다.
"소지품이 간소하고, 늘 단정한 사람이면 좋겠어. 물건에 대한 낭비는 없되 타인에게 인색하진 않고 싶어. 그런데 이보다 더 원하는 바가 있다면 집중하는 삶이야. 나를 갉아먹는 불안을 줄여 나간 다음에 남는 단 하나에 온전히 몰입하길 원해. 거기까지 다가가기 위해 절약하는 거지."
- 그러니 나는 절약해야 한다. 소비를 해야 한다가 팽팽하게 맞서는 줄다리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둘 다 해본 바 모두 배우고 얻는 부분이 있고, 어떤 삶을 살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 된다는 쪽이다.
- 주머니 사정은 잘 모른다. 엄마가 보기엔 내가 책도 자꾸 내고, 직장도 계속 다니는 데다, 혼자 살아서 특별히 돈 쓸 일도 없어 여유롭게 보이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객관적인 잣대에 비추어 보아도 또래에 비해 많이 벌지 못한다. 고액 연봉 회사원이 아니고, 그 밖의 나의 노동은 21세기에 거의 무료로 제공되는 '글'이라는 콘텐츠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튜브로 정보를 얻는 시대에 호흡이 긴 책은 일부 스타 작가를 제외하곤 많이 팔리지 않으니, 내가 새벽부터 일어나 글을 쓴다 해도 생계를 해결할 돈벌이가 될 리 없다. 글이란 내가 타고난 기질을 거스를 수 없어서 읽지 않으면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어렵고, 쓰지 않으면 너무 고독해지기에 행하는 생존방식으로 남게 되었다.
- 일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 데 쓰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감상에 빠져 아니 에르노, 에릭 와이너 같은 저자 사이를 배회하다가 <배당주 투자 무작정 따라하기> 같은 책이 껴들면 정신이 번쩍 든다. 몽상가가 현실주의자로 바뀐 중간 값이 이런 내 모습과 같지 않을까.
- 나의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는 무의식적 열망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독서 목록은 점점 돈 주제의 책이 많아진다. 대부분의 책은 결국 하나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끝난다. '매달 현금 흐름을 만들어라'. 근로자의 월급을 대신할 일종의 불로소득인데, 대표적으로 수익형 부동산으로 받는 월세, 배당주 투자, 유튜브 콘텐츠에 붙는 광고처럼 시스템으로 벌어들이는 사업(부업) 소득이 있다.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기보다 이 세상 필부들이 경제적 안정감을 가지고 살기 위한 조언에 가깝다.
- 어떻게 돈을 투자하면 좋을지 오래 고민하며 여러 책을 살펴본 후로 내게 맞는 방식을 찾았다. 나에겐 매일매일 두 발 뻗고 자는 투자가 조금 더 벌 수 있는 돈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마음 편안하면서도 최소욕구생활비를 보장해 줄 듯한 배당주를 산다. 그 과정에서 빚은 내지 않는다. 그리고 필요보다 많은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 이 두 가지가 나의 투자 원칙. 앞으로도 나는 검소하게 살아갈 테지만, 그건 가난의 다른 말이 아니다. 앞으로의 내겐 지금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삶을 사유하고, ...
-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리볼빙이라고? 그가 물건 사기를 즐기던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당시 나도 뒤지지 않는 쇼퍼홀릭이었지만 나는 선을 넘지 않았다. 월급을 모두 다 쓰며, 무이자 할부 결제는 했을지언정 리볼빙이라는 폭탄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리볼빙까지 해가며 물건을 사는 사람의 끝은 높은 확률로 파산 및 개인회생이라 의심치 않는다. 신용카드 회사 입장에서는 원금은 적게 갚고 이자를 많이 내며, 계속 이자만 내고 원금은 거의 줄지 않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고객은 반갑겠지만, 이건 소비를 위해 낸 빚이라서 소위 말하는 악성 부채다.
-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멘터리 <돈, 돈, 돈을 아십니까?>에서는 과거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큐는 여러 경제적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이 자산관리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담는다. 학자금 대출과 끊임없는 쇼핑으로 신용카드 빚에 시달리는 인물은 자신의 발이 되어 주는 낡은 자동차가 고장 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160만 달러(약 23억 원)의 계약금을 받은 럭비 선수는 28만 달러(약 4억 원)만 남을 때까지 돈을 썼다고 말한다.
- 짧은 선수 생활이 끝나면 주변에 파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그는 미래가 불안하다. 럭비 선수는 컨설팅을 받고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에 적립식 투자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많이 망설인다. '돈을 잃으면 어떡하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주저하게 한다. 돈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또 다른 사례로 조기 은퇴를 꿈꾸며 생활비를 줄이고, 보다 작은 집으로 이사 가는 부부도 나온다.
-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돈 문제로 허덕이는 여러 유형 중에 유독 공감이 가는 사례가 바로 내가 지금 품고 있는 돈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쇼핑으로 돈을 탕진하는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서, 다큐에 등장한 소비 중독자를 보며 '신용카드를 당장 잘라 버려!'라고 속으로 소리 지른 것을 제외하면, 생활 규모를 줄이고 조기 은퇴를 준비하는 젊은 부부의 사례에 눈길이 갔다. 지금 나의 고민도 동일했기에.
- 내가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확고한 원칙 하나를 꼽자면 부채 없이, 순자산으로만 자동 소득 만들기다. 투자를 잘해 노동 없이 수입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이나 포트폴리오를 담은 여러 책을 참고해 보니, 많은 저자들이 절약으로 돈을 모으고, 월세가 나오는 수익형 부동산을 레버리지(은행권 대출이나 세입자의 보증금을 끼고 투자하는 형태)를 사용해 투자하라고 했으나, 나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자산을 사기 위한 대출은 영리한 빚이라고 했지만, 내겐 좋은 부채 역시 각종 변수를 계산하느라 불면의 밤을 선사할 게 분명하다.
- 모든 투자는 손실 위험이 있으나 순수한 내 돈으로 투자한다면 쫓기는 기분 없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나도 안다. 평범한 사람이 덩치 큰 자산을 백 퍼센트 현금으로 사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애초에 내가 사고 싶은 자유란 안정감의 다른 이름인데, 그걸 사기 위해 지금이 흔들린다면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 매입 문의를 해보니, "저희 엄마도 이 모델 쓰셨어요"라며 환하게 웃는 젊은 직원이 보상 없는 수거만 가능하다고 했다. 엄마..? 그렇게 오래되었나. 어쨌든 애플에게는 0원의 가치도 없겠지만, 나의 10년 된 아이패드는 정말 멀쩡하고 배터리도 오래갔다. 나는 오랜만에 중고 거래를 하기로 했다. 당근마켓에 처음 가입하고 시세를 찾아보니 5만 원 정도에 거래되길래 나도 그렇게 올렸다. 올린 날 바로 구매하고 싶다는 분이 있어 일주일 후 거래하기로 했다. "16 기가바이트면 넷플릭스나 유튜브 보는 데 문제없나요?" 또는 배터리 수명 등 세세하게 질문이 많아서 다소 꼼꼼한 분인가 보다 했다. 워낙 정중하게 물어보고, 문장도 완성형이고, 맞춤법도 정확했다. 상대방 프로필에 들어가 보니 텔레비전 안 보는 나도 아는 아이돌 가수의 굿즈 같은 것을 거래하길래 아무 의심 없이 20~30대 여성분이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 비가 퍼붓던 거래 당일, 사람 많은 지하철 역에서 젊은 여자분을 애타게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채팅창에는 '입금했습니다' 하니, '도대체 어디시란 말인가' 하며 나는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어떤 아기(?)가 '혹시 당근?' 이래서 '엇... 뭐지?' 하며 나는 속으로 황당한 웃음이 났으나, 결국 한 어린이와 거래하게 되었다.
- 나는 어린이의 보호자가 연락해 와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결국 내가 좋은 물건을 싸게 팔았고, 시간도 잘 지켰고, 응답도 빨랐다는 후기를 선택해 보내 준, 그냥 매너 있는 거래로 끝났다.
- 아들뻘인 어린이에게 입금받은 5만 원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을 남겼지만, 나는 자유자금으로 쓰기로 했다. 가격도 내가 받은 돈과 거의 비슷한 49,800원인 배당주 1주를 사기로 했는데, 그 주식 1주는 나에게 분기별 830원씩, 1년이면 3,320원을 입금해 준다.
- 문득 이런 가정을 했다. 만약 그 어린이가 나이고 내가 경제적으로 깨인 어린이였다면, 용돈으로 아이패드 대신 이 주식을 사겠노라고. 그럼 내 나이 25살 무렵이면 원금과 동일한 돈을 갖게 된다. 단순 계산으로 하자면 그 사이 주가는 올랐을 확률이 높고, 배당도 더 높아졌을 것이다. 배당금을 쓰지 않고 새로운 용돈을 더해 재투자했다면 더 빠른 시간 안에 원금의 두 배가 될 테고. 내게 부족한 시간이 어린이에게는 더 많이 있으므로 25살의 10만 원이 15만 원이 되는 때는 지나온 날의 절반밖에 걸리지 않는다. 작은 눈뭉치가 구르고 굴러 엄청난 눈덩이가 되는 것을 목도하는 기적.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것이 복리라는 말도 있듯이, 돈이 돈을 벌어 오는 구조를 빨리 만들수록 경제적으로 더 빨리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자동 소득으로 살아가는 삶 역시 꿈이 아니다.
- 그나저나 나는 왜 어릴 때 경제교육을 받지 못했을까.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 같은 상식을 위한 배움 말고 보다 실질적인 생활 금융 같은 것. 사기당하지 않게 부동산 계약하는 법, 금융 상품 같은 것을 알고 어른이 되면 좋았을 텐데. 나는 너무 늦게 자본주의에 눈을 떠서 지금 은퇴도 최소 비용으로 구상하고 있지 않은가! 돈이 불어날 시간까지 부족하니 조바심이 난다. 과거의 후회가 가장 부질없는 짓이라서,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쉽지 않다. 사실 가끔씩 후회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뇌의 되새김질이라고 본다.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또 한 번 일깨워 주는 순간 같은 거라고.
- 배당주를 사면 스프레드시트에 투자 기록을 남긴다. 냉정해 보이는 숫자로 가득한 표에 이제부터 돈에 얽힌 사연을 간략하게 써두기로 했다. 당근 거래 이후로 돈의 출처에 얽힌 사연을 같이 써두자 흥미로워 보였다. 메모에 어린이와 당근 거래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적거나, 나의 은퇴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라는 느낌으로, 모모 회사에서 무슨 프로젝트로 받은 돈으로 구매함과 같은 사연을 담기도 한다. 나중에 노트를 볼 때 단순한 숫자로 정리한 기록보다는 훨씬 따뜻하게 느껴질 거 같다. 돈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이 실질적인 돈으로 얼마나 불어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테고.
- 추억도 복리 같은 거라서 내가 비교적 젊은 날, 올해보다 작년이 더 젊었던 것처럼 그때 그 시절에 겪었던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밋밋하지만은 않았던 기억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 돈이 늘어난 만큼 추억도 각색되어 더 풍요롭게 남아 있을 테다. '그때 원고를 힘들게 썼었지, 정말 안 풀렸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고.
- 추억도 복리로, 내 은퇴 자금도 복리로 남아 있기를. 그러니까 추억 역시 가격표를 붙일 수 있다면 그건 그때 얽혀 있던 돈의 가치를 보존할 때가 아닐까. 이미 써버린 돈은 기억과 함께 혹은 물건의 퇴색과 함께 희미해지지만, 계좌에 살아 있으며 성장하는 돈이 주는 감상이란 분명 다르다.
- 10년 전쯤, 남산에 있는 한 5성급 호텔에 호캉스를 갔다. 느긋하게 수영을 마치고 사우나에 들어간 나에게는 꿀 같은 휴가였지만, 거기에는 일상을 즐기는 할머니 두 분이 탕에 몸을 담근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H자동차가 올랐더라고."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들이 대화 주제 하나로 갑자기 여의도 출신 투자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 나는 당시 욜로였기에 열심히 번 돈으로 1박 2일, 한 번의 즐거움을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카드 대금을 갚기 위해 또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였고 노동을 멈추면 돈이 들어올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지만, 일단 지금의 재미가 중요했다. 투자는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모두 관심 없었다. 늘 소비하느라 돈이 없었으니 투자는 관심은 있어도 관심을 실행할 수 없는 세계였다. 또 지나치게 머리 아팠다. 내 머릿속은 보통 예술로 가득 차 문학이나 미술 같은 영역의 관심사로만 가득했고, 돈이란 숫자로 이루어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적 불행과 허기, 이루지 못한 욕구의 면면이 돈 때문에 벌어졌음에도 나는 장기전에 임하기보다 오늘의 쾌락을 택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때 호텔 사우나에서 들려온 주식 투자 대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그분들처럼 노년에 호텔로 목욕 다닐 정도의 재력을 갖추려면 투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마음까지 와닿았다.
- 그렇게 심어진 작은 씨앗은 오래도록 싹을 틔우지 못하다가, 작은 집을 온전한 내 소유로 만든 1단계 자립 목표를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움트기 시작했다. 자립 2단계로 금융 자산에 관심이 갔고 책에서 답을 구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는 듣기 어려웠다. 보통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대개 거주 목적의 자기 소유 집 한 채와 노동소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서 머니 토크를 하면 집 값이 올랐네, 떨어졌네가 대화 주제로 자주 오를 뿐, 금융 자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보통 연금은 4개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주택연금.
- 퇴직연금은 일정 규모의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DB와 DC형이 있다. DC형은 내가 직접 퇴직금을 운용할 상품을 설정할 수 있어서 투자 자율성이 어느 정도는 있다. 개인연금은 절세 혜택이 있는 계좌로 세액 공제가 되는데, 이 또한 IRP 연금저축, 연금보험이 있다. 선택지가 있는 만큼 내 상황에 맞춰 장단점을 비교해서 가입한다. 투자금은 IRP의 경우 55세부터 연금 형태로 돈을 받는다. 단점으로 당장 목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인 운용이 힘들며, 오랫동안 목돈을 묶어 놓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개인연금은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이벤트가 많은 너무 젊은 나이부터 돈을 최대치로 넣으면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고 한다. 나도 집 문제를 해결한 후 38세에 세제혜택과 복리 효과를 위해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 흠, 금융의 세계는 실로 복잡해서 무엇이든 곧잘 읽어내는 나 역시 '더는 읽고 싶지 않아' 할 만큼 머리 아프다. 그래도 연금은 국가적으로 세제 혜택을 주는 금융상품인 걸 꼭 알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택연금은 노년에 살고 있는 자기 소유의 집을 담보로 일정 금액을 ...
- 주식을 자랑하던 중이었다. C는 핸드폰으로 중권사 앱을 열어 여러 종목의 현재가를 확인하던 중이었는데, 옛날에 거래처가 추천했던 주식이 지금 나 홀로 상승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래서 지금 그 주식은 몇 퍼센트 수익인데요?"라고 되물었고, C의 대답은 "이미 팔아서 없어"라고. 여기 또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네. 큰 폭으로 하락한 주식은 손절하기 전까지는 팔지 못하니 들고 있고, 수익권인 주식은 이미 없다니.
- 개인투자자 중 성공한 사람이 드문 경우는 이런 이들이 태반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손실난 주식은 원금이 생각나 아까워 팔지 못한 채 계좌에 박제하고, 수익이 나면 팔고 싶기에 장기투자는 어렵다. 이런 심리를 경험하고 나니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끈기 있게 돈을 불려 나가는 투자가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늘 일정 현금이 들어오는 데다 하락장이 오히려 좋은 배당주가 나의 수익 자동화의 꿈을 일부 실현시켜 줄 거라 생각했다.
- 시장 지수 추종 ETF 역시 분기별로 분배금(배당금과 같은 개념)을 준다. 그러나 펀드 운용 수수료가 있고, 내가 가장 원하는 매월 현금이 들어오는 생활과는 다소 다르 ...
- 회사 업무에 참조 바랍니다, 가 되는 선순환이 이뤄지다니! 회계 관련 책을 읽고 요점 정리를 하고, 실제로 다트(dart.fss.or.kr)에 가서 내가 투자하는 회사의 재무제표를 다운로드하여 해석해 보는 일련의 과정 덕분에 조금씩 회사 보는 눈이 생긴다. 각종 투자서를 읽고 알려 주는 팁을 노트 정리하고, 생소한 용어의 개념 정리를 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투자는 실전이기에 수험공부처럼 하는 것은 지양하고 있다.
- 미국 주식에 투자하니 꾸준히 영어 자료를 접하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팟캐스트를 듣고, 기업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창업하는지 등 관련 인사이트를 알아가고 경제 트렌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투자 공부를 하며 트렌드 파악까지 되어 회사 업무를 할 때도 기획 파트에서 꽤 도움이 된다. 역시 일단 시도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또 다른 눈이 생기는구나.
- 자유인이 되는 날까지 노동과 투자를 병행하면서 돈 공부에 진지하게 임하자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3년을 한 분야에 몰입해 준전문가가 되는 시작을 금융 공부로 해야지. 취미는 그다음의 문제다. 힘내자고 응원을 불어넣으며 도서관을 나선다. 주말 이용객이 적은 일반열람실을 나오면서 갑자기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좋은 작품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스민다. 변덕스러운 마음이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필요하다고 속삭이고 있다.
- 책 <돈의 심리학>에서는 장기적인 재무 계획은 필수이나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한다고 말한다. 주변 세상도, 목표도, 욕망도 변한다고.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또 미래의 내가 무엇을 원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마음이 변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내가 지금 배당투자를 하다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보여 다른 투자처로 바꿀 수도 있고, 그곳에서 실망하고 또다시 지금의 투자 방식으로 돌아올 수도 있듯이. 취미생활도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 새로운 취미에 흠뻑 빠질 수도 있듯이. 그러니까 언제든 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매사 유연하게, 그러나 끝맺음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 역시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이나 경험에 소비하지 않고 금융 상품으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모두 투자 자산만 사는 건 아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을 위한 통장에도 일정 비율로 돈을 남겨둔다.
크지 않은 돈이라도 조금씩 비상용 현금을 모아 두어야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한 생활비, 고액의 병원비 등에도 당황하지 않고 생활이 유지된다. 이 모두는 과거에서 배운 것으로 이를 대비하니 안정감이 하나 획득된다. 그다음이 무근로 자동소득발생을 위한 투자로 두 번째 안정감이 생긴다. 이 안정감을 모두 자립이라는 말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 누군가 돈을 좇으면 돈이 붙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돈을 위해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겠지. 돈이 나를 따라오게 하라는 말은 돈에 연연하지 말고 재미있게 일하다 보면 자연스레 돈이 벌린다는 의미일 테고. 그런데 요즘 나는 돈을 좇고 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일과 소비에서 일과 현금 흐름으로 생각의 구조가 완전히 바뀐 채, 나 대신 돈이 어떻게 일하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 나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카프카처럼 하고 싶은 일과 생계를 양립하는 인생 설계였다.
어제 퇴근하고 바로 나의 역할을 회사원에서 작가로 갈아입고 출장 짐을 싸는 것처럼, 새로운 업무 자아로 나를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은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익숙하다. 대신 이렇게 잡음 없이 두 가지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나는 각각의 직업을 삶에서 철저히 분리한다. 회사에 가면 작가로서의 나의 자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작가로 일할 때면 회사원인 나를 잊는다. 이 모든 일이 나 자신이라고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라고 생각하는 오묘한 중심 잡기도 마찬가지다.
- 직장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내가 작업하는 원고는 출간과 함께 내 관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내 역할과 프로젝트가 바뀌거나 사라진다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애정을 쏟았든 아니든 몰두했던 일이 사라지는 경험은 상실감과 공허함을 가져온다.
- 그토록 무섭고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상사가 퇴사 후에는 아는 사람이 되고, 업의 무대에서 내려오면 죽이 잘 맞았던 동료는 친구로 남고 싫어했던 동료는 타인일 뿐이다.
작가로서의 일도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호평이 있으면 혹평도 있고, 한 권의 책이 끝나면 언제나 다음 책이 기다린다. 그러니 오늘도 공과금을 낼 돈을 벌면서 재미도 있으면 좋지, 하는 마음이 최선이 되어 힘든 날은 버티고 좋은 날은 즐기고 있다.
- 웰니스 리조트에서 요가 수련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조용한 숙소의 책상에 앉아 이 원고를 쓰다 책을 읽는다. 출퇴근 회사원으로서의 나는 그토록 워라밸 집착했음에도, 작가로서의 나는 일과 생활을 분리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일한다. 일과 생활의 분리가 없는 삶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였나. 남이 시켜서 하지 않고,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을 할 때 맛보는 시간관념이 깨지는 자율성.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사람은 시간도 잊고 내가 누구인지도 잊고 순수한 몰입을 경험한다. 그때부터는 돈벌이가 아닌, 돈을 받는 취미 생활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일이 시작된다. 백팩을 메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든 일하는 프리워커로 살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밤이다.
- "즐겁지 않을 수 있어요"라는 말이 유독 맴돌았는데, 이후 나는 편집자로서 다른 사람의 책을 만들어 보면서 읽기를 절반쯤은 직업으로 삼아도 봤다. 타인이 쓴 문장을 뜯어고치고, 틀린 내용을 잡아내는 과정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지만,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과정 전체를 경험한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다. 출판 편집자의 업무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작가의 든든한 파트너인 편집자들의 고충을 작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 어느 날 세탁소를 지나다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며 동화 스토리 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가 중단한 그림 그리기 독학, 그리다 만 너구리 카페의 그림 파일이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니며, 앞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삽화가 역시 못할 일도 아니라는 자신감이 샘솟기도 했다. 내게 이름을 부여하고, 아주 작은 야심을 가지고 일단 시작, 그리고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과거의 내가 원했던 엇비슷한 꿈을 실제 이루게 된다는 것. 직업을 스스로 창조해 냈던 지난날의 내가 알려 준 귀중한 삶의 교훈이다.
- ... 업으로 삼은 사람이 팟캐스터가 되어, 정해진 원고료 대신 자신이 책정하는 광고료가 수입이 되는 비즈니스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멋진 사례였다.
- 꼭 작가뿐 아니라 주변의 종이 잡지나 책을 만드는 편집자들이 자신이 마지막 문을 닫겠다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쇄물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종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떠나 여러 형태의 콘텐츠 사업을 시도하는 이도 있다. 아레나 편집장 출신인 박지호 대표는 영감의 서재를 운영하며 이솝, 펭귄북스와 같은 여러 브랜드와 협력해 공간에서 책을 큐레이션 하는 등의 일을 해나간다. 말로도, 공간으로도 확장해서 비즈니스를 만드는 이들은 모두 쓰기라는 틀에서 벗어나 기획자로 자신을 정의 내렸기에 가능한 부분이 아니었을지.
- 정해 놓은 프레임 안에서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 익숙함이 생기는데, 거기에서 만족하면 답보 상태가 된다. 수준을 높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능수능란하게 업을 다루게 되지만, 보통 관성이 우리를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 이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
- 회사에 남든 창업을 하든 결국 내 일을 하고 싶은 때. 대화 내내 지금의 즐거움과 과거의 슬픔과 분노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미래를 상상하며 쓰는 시간의 지분이 훨씬 많았다.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10년 뒤, 20년 뒤의 나는? 보통 마음속에 뚜렷하게 연상되는 모습이 있어야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어 그 말이 진짜임을 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아직 내 미래가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게 단순히 특정한 일 없이 살기에 돈이 충분치 않다는 문제인지, 모든 자극에 무뎌진 후 편안함이라는 외양을 뒤집어쓴 안일함이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혹은 둘 다이거나.
- 가끔 현실의 답답함을 덜어내 보고자 집 주소지와 회사 사무실 주소지의 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새 소식을 뒤지며, 참여할 만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가볍게 훑어보곤 한다. '자전거 교실 수강생 모집'. 이거다 이거! 눈을 빛내며 내용을 다시 보는데, 초급과 중급 각각 5일 코스로 먼저 경찰서 안전계에서 이론 수업으로 자전거 관련 교통법규와 안전 수칙을 배운 다음, 자전거의 구조와 기능, 안전 주행법을 실습하는 커리큘럼이다.
-자기 관리를 멈추면 자기 혐오가 시작된다.
- 가장 큰 우아함은 단련된 몸에 있다. 말하지 않아도 몸에 밴 기품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며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 타고난 것, 배워 온 것, 한 사람이 가진 생각마저 모두 몸의 언어가 말해 준다. 그건 너무나도 정직해서 어떤 사람을 단번에 파악하게 만든다. 쉽게는 첫인상이라고도 부르고, 누군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눈길이 갈 때는 존재감 있다고도 말한다.
- 반면 나는 겉모습이 내뿜는 기품이나 우아함을 갈망하기란 커다란 사치고, 절실한 생존 문제에 처했다. '죽지 못해 산다'라는 말이 늘 떠오르던 나날, 기간 한정 갱년기라고 이름 붙였지만, 처음 경험하는 쾌속노화로 삶의 질이 매우 매우 떨어졌다. 매일 아침, 불면의 밤에 시달린 끝에 일어나 푸석한 얼굴로 마지못해 선크림만 겨우 ...
- 갱년기의 충격에서 막 벗어난 후에도 나는 회춘에 감사하기보다 나보다 10년 안팎으로 나이 차가 나는 이들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나의 예정된 미래처럼 눈여겨보게 되었다. 병원 투어가 일상이고 노안으로 안경을 쓰기 시작하거나, 아는 단어도 자꾸 까먹는다며 인상을 찌푸리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낱말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이 든 몸의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찾질 못했지만. 그뿐만 아니라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쓸데없이 고집만 세진다거나, 자꾸 '요즘 애들은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말로 세대를 비판하거나, 새로움을 거부하고 자신의 전성기 때 기술만 구사하려는 구태의연도 있다. 나라고 그런 태도가 전혀 없겠는가! 그런 이유로 타인을 거울삼아 나의 싫은 점을 발견하면 흠칫 놀란다. 반성의 시간이다.
- 이 세상에 노후를 대비한 돈과 건강에 대한 조언은 넘친다. 내가 지금까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세운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여기에 연금과 실버보험 등이 추가된다.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인지 능력 저하로 지금처럼 내가 현금 흐름을 관리하지 못할 때의 대비나, 간병인과 같은 돌봄 서비스에 대한 고민으로 그 줄기가 뻗어 나간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은행과 보험 회사 등에서 '돈만 내면 모든 것을 관리해 드립니다' 하는 자본주의적 미소로 나를 맞이하기 때문에 해결 가능해 보인다.
- 돈 문제를 짚어 본 다음에는 나이 들어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면 나를 돌봐 줄 곳이 어디인가 미리 고민해 볼 법도 싶다. 그렇게 정보를 찾다가 실버아파트라는 개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주로 장례식장을 포함한 대형병원 옆에 입지 해 있는 노년을 위한 맞춤형 주거지로 식사가 제공되며 아파트라는 말처럼 매매가 가능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분들의 평균 나이는 80세 정도라는데, 여러 서비스 항목 때문에 관리비는 무척 비싸다고 한다. 도심에 있는 실버아파트는 10억 가까이 되는 보증금과 100만 원대의 관리비로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어 보였다. 최소생활비로 출퇴근 은퇴를 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나에게 그런 편안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 그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확실한 의사 표시를 알게 되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어난 김 할머니 사건으로 촉발되었는데, 김 할머니는 병원에서 기관지 내시경 시술을 받다가 완전한 뇌사가 아닌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당시 병원은 연명치료를 이어 나갔다. 할머니의 가족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며 병원에 소송하면서 존엄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법원은 김 할머니의 존엄사를 인정하여 의학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고 결론 내렸다.
- 나는 존엄사를 위해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하 의향서)를 써서 의사 표시를 하기로 했다. 이 문서는 손글씨로 적은 유언장의 한 마디보다 훨씬 분명하다. 전산에 등록되어 상급 의료기관에서 조회되는데, 가족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 때문에 혹은 죄책감으로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할 때 나의 큰 뜻이 짜잔, 하고 데우스 엑스마키나처럼 전산에 떠서 문제가 해결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보통 보건소, 국민건강보험공단, 제휴를 맺은 의료기관 등에서 상담사에게 설명을 듣고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 나는 집에서 가까운 의료조합을 찾아 1시간 여의 교육을 받고 의향서를 썼는데, 총 10명 정도의 참석자 중 내가 가장 어렸고, 나보다 나이 든 중년과 노인 몇 분이 서로 돌아가면서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나눠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들 남겨진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의향서를 쓰기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했고.
- 내 경우 한 달여 전 신청한 의향서 교육을 받기 약 일주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슬픔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린 죽음에 대한 대화에 감정이입이 더 크기도 했다. 사실 무엇이든 대비하길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이성적 판단으로 시작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준비가 나를 위함이 아닌, 남은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한 배려였음을... 삶이 실시간으로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의 연속이라면 죽음은 끝맺음, 종결을 의미한다.
- 그 마지막을 떠올리면, 오직 내가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들과 잘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만 남는다.
- 늘어나는 현재진행형의 만족감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더 내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겨우 혼자 살아갈 만큼의 돈밖에 없다! 별로 많지도 않은 재산을 두고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이런 내가 죽은 후의 돈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단지 어떤 채무도 남기고 싶지 않다. 마지막 공과금, 관리비, 통신비 등을 모조리 정산하기 위해 계약 맺은 곳들을 나의 엔딩 노트에 남긴다. 뒷정리를 맡아 줄 사람이 처리해 주길 바라며... 어떤 부채도 남기지 않고, 돈만큼은 깔끔한 죽음을 목표로 한다.
- 디지털 시대에는 다른 형태의 유산이 있다. '디지털 유산 관리자는 귀하가 사망한 후에도 귀하의 계정에 있는 데이터에 액세스 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Legacy contacts can access and download the data in your account after yourdeath.' 아이폰의 새로운 기능으로 디지털 자산 상속자를 지정하는 것이 생겼다. 나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냉큼 친오빠의 연락처를 등록해 두었다. 사실 오빠는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내 마음대로 정했다. 내게 처음 컴퓨터를 선물한 가족이기에 마땅히 훗날을 맡길 만하다. 사실 오빠가 원가족 중 가장 디지털 친화적인 편이라서 그렇게 설정했을 뿐이다. 엔딩 노트에 디지털 유산 관리자에 대한 안내가 적힌 종이를 인쇄해 메모와 함께 둔다. 다만 돈 될 만한 정보가 아닌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차원이라서 조금 미안하다.
- 폰은 그렇게 정리한다 치지만, 웹에 떠도는 나의 정보 등은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이것이야말로 정말 골치 아프다.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이야 폐기물 처리장에서 하드디스크를 파괴하면 끝날 테고, 그 안에 속한 업무파일, 가계부나 건강 기록 같은 개인적인 파일들은 내가 죽어도 남에게 문제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웹 서버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은! 사이트에 가입된 내 정보들은! 한때 "우리 할아버지는 인터넷 세계에서 아직 살아계셔"라며, 누군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개인정보를 쓰는 경우도 봤다. 명의도용으로 범죄에 악용될 수도 있는 문제라 흠칫 놀랐는데, 지금 방지할 만한 행동강령으로는 '개인정보 포털'이라는 정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안 쓰는 사이트들에서 탈퇴해 주는 정도랄까. 하지만 앱에서 가입한 경우는 목록에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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