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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이] 당신을 그리는 시간 - 색연필로 완성하는 특별한 그림 수업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Drawing Book

by 일루젼 2026. 4.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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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송이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1.10.08


       

 

새어나가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야금야금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미처 청소하지 못한 구석을 신경 써 닦아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에너지가 모이면 뭘 하고 싶은데?'

 

쓸 수 있는 활력부터 모아야 할까, 그것을 활용할 방향성부터 정해야 할까.

닭이냐 달걀이냐 처럼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 한참을 빠져있었다.

 

얼마 전 읽었던 <렛뎀 이론>에서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했었다. '생각'을 멈추고, 5, 4, 3, 2, 1을 센 후 그냥 '행동'하라고.

'정말?'

'잘 모르겠는데.'

나는 내 생각보다 많이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일단 좀 자기로 했다. 맑지 않은 상태로 버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한잠 푹 자는 편이 낫다. 개운하게 일어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확률도 높아지니까.

 

그런 '나름의 치유' 시간을 보낸 뒤 정해본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다.

 

1.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코어를 단련하기.

2. 기분이 잘 정돈되지 않을 때는 그림으로 풀기.

3. 매일 1장 외국어 도서를 읽기.

4. '언젠가 해야지' 했던 것들을 매달 하나씩 정해서 도전하기.

 

봄이 되면 성인 발레나 수영 중 하나를 시작하려 했었는데, 지금 상태에선 등록만 했다가 금방 그만둬버릴 것 같아서 일단은 자세 교정과 스트레칭을 일상화하기로 했다. 또 기분 전환을 위해 갖던 치팅 데이도 식습관 및 컨디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먹는 즐거움보다는 활동하는 즐거움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려 한다. 쟁여둔 미술용품도 사용할 수 있고, 집중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가 되어주었으면.  

 

다음은, 겨우 겨우 시작해 보는 연간 목표 '어학'이다. 거창하게 시작하면 부담스러워질 테니 정말 읽고 싶은 책 한 권만 골라 조금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읽히면 읽히는 대로, 안 읽히면 안 읽히는 대로 꾸준하게만 하는 게 목표다.

 

현대의 삶은 번잡한 게 너무 많아, 전원생활은 고즈넉하고 여유롭지 않을까, 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다가 지금과는 무척 달랐을 당시의 위생 환경에 생각이 닿자 몸이 부르르 떨린다. 목욕이 대중화되어 있었던 고대 로마에서도 화장실 문화만큼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고대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근현대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치아 문제로 고생했음을 떠올려 보라.

 

그러다 문득 어쩌면 미래에서 바라본 현대의 위생 관념도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신체나 환경적인 부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일 몸을 씻고 단장하듯이, 정신에도 위생이 필요하진 않을까?

 

'언젠가 해야지'하고 미뤄두고 쌓아두는 것들-

눈에 보이지 않아 소홀하기 쉬운 그것들도 정신세계에서는 실체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바구니에 담긴 '위시' 품목, 나중에 봐야지 하고 저장만 해둔 '킵' 목록,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가는 '파일'들- 그런 것들이 뇌를 가득 찬 하드 디스크처럼 조각내고 있는 건 아닐까.

 

까지 생각이 흐르고 나면 '어쩌면 매일 이런 상상을 하는 데에 에너지를 다 쓰고 있어서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자기반성에 가닿는다.

어쩔 수 있나. 생각을 줄이려면 몸을 움직여야 하고, 생각이 잘 멈춰지지 않는 나로서는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코딩하는 수밖에.

 

등등의 생각을 했다. 

<당신을 그리는 시간>을 읽는 동안. 

 

이 책은 색연필로 그리는 그림에 관한 책이지만, 오일파스텔이나 다른 재료로 그리는 그림에도 충분히 적용할 만한 책이다.

고정된 색이 아닌, 자신만의 색으로 겹쳐 그려내는 저자 특유의 화풍이 아주 매력적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선이 아닌 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전에 연분홍, 연보라, 연녹색의 삼색으로 인물화를 그려봤던 적이 있는데- 그 세 가지 색만으로도 어떻게 겹치느냐에 따라 피부색부터 음영까지 다 표현이 가능해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경우는 블렌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림이었고, 저자와 비슷한 화풍으로 그려본 적은 없어서 꼭 한 번 그려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내 안에 쌓인 '언젠가'의 조각들로, 내 일상도 이렇게 그려내고 싶어졌다. 

 

매일 매일을 기념일처럼.

전체도 아름답지만, 한 조각 한 조각도 제각각으로 반짝이도록.

 

현재 나의 지향점은 위와 같다.

 


   

 

    

 



 

시작하며

 

 

- 나는 다시, 또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매일같이 같은 일을 시작하고 끝낸다. 그림을 그리는 일로 사람을 만나고, 꽃을 사고,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웃는다. 멋있게 쓰자면 그렇지만 사실은 매일 그림을 생각하고, 그림을 걱정하는 정직한 그림 노동자다. 놀랍도록 단순하고 고요한 삶이다.  

- 어지간히 눈물이 많고, 심오하면서도 담백한 것을 좋아한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접하는 음악과 색,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인사이트를 얻고, 그것을 나의 색 언어로 곧장 되돌려 보내는 일을 한다. 어느 날은 책에서 릴케의 한 문장을 보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소멸될 게 분명했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왔다. 내 삶에서 그림이 빠지면 내가 소멸될 것 같아 스스로를 격려하며 그리는 인간이 된 것이다.

- 간혹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해왔는가에 대해 묻곤 한다. 그 질문에 이어서 자신만의 색을 찾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하소연을 한다. 글쎄, 어떻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나는 천천히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비단 그런 질문들이 그림과 색에 국한된 갈증만은 아니리라. 그 안에 자신만의 색깔이나 목소리, 그리고 세계관을 단단히 만들어나가고 싶은 공통된 의지가 읽힌다.

-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단순히 빈칸을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직관적인 비유를 찾지 못했다. 흰 도화지 위에서 애써 두려움을 이기고 선하나를, 색 하나를 얹다 보면 조금씩 내 안에 무수한 것들이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금의 감정, 불안한 관계, 흔들리는 가치관, 환희와 좌절의 경험 같은 날것의 무엇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면 나는 처음 도화지 앞에 섰을 때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어떤 물음에 미비하지만 근사한 답을 하나 얻는다. 아무쪼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벌써부터 작아질 필요 없다. 결국 해야 한다. 하다 보면 괜찮아진다.

- 나는 이 책이 그림을 멋들어지게 그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찾기 위한 모험 길에 오른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기'로 그 빈칸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지금껏 내가 그렸던 것은 결국은 나였을 테니. 그 그림을 그리게 만든 매 시절의 무수한 영감들이 곧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 테니 작아지지 말고 계속하라고 나를 격려한 끝에 이 책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사람들은 해보지 않은 것을 새롭게 도전할 때 괜히 위축된다. '엉망이겠지, 또 시간낭비하는 거 아냐? 역시 난 특출한 게 없구나.' 이러한 생각들이 수없이 머리를 스칠 것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생각을 그만 멈추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자. 일단 하다 보면 정말 다 괜찮아진다. 어떻게 괜찮아지는지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확실히 대답해달라고 한다면, 이 책에 답이 있다.

- 이 책은 나의 영감이 시작되는 공간, 도구, 자연, 인물, 책, 관계, 감정에서 시작해 마침내는 여러분의 손에 작은 펜(그 어떤 도구라도 아무렴 좋다)이 들리기를 바라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할 내가 가장 먼저 펼쳐볼 기록이자 자극의 일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시작은 나의 이야기였지만 마지막은 여러분의 책으로 남기를 바란다.

- 나 또한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색상으로 세팅을 하고선 그림을 그렸지만 이것저것 종이에 바르다 보니 마음에 꽂히는 색을 파악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추리는 오랜 과정 끝에 내게 가장 잘 들어맞는 색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파스텔 톤이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은 나와의 상호작용 덕분에 만들어진 뜻깊은 결과물이다.

-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신과 긴밀히 상호작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다. 자신의 감정에 반응하여 글과 그림과 같은 형태로 표현하는 일이 당신과는 먼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넓게는 삶의 태도와도 망라되는 필수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내면의 허기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채우는 일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나를 구했듯 누군가의 인생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그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고유한 개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색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다. 그리고 색연필은 모험을 앞두고 있는 당신에게 제격의 재료다. 저렴하고 보편적인 재료지만 뛰어난 발색과 넓은 색상 스펙트럼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색연필의 매력을 역시 나 혼자만 알기에는 아깝다.

- 그래서 그 무궁무진하고 다채로운 세계에 지금 당신을 초대하려고 한다.

 






-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미묘하게 색이 변해온 나의 7년간의 그림들. 친구는 내게 "그림의 색이 묘하게 성숙해졌다."라는 말을 했다.

- 색깔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색상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며, 영혼을 현이 많은 피아노와 같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 건반, 저 건반을 누르며 연주하는 손이다.

-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색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색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확장된다. 도로에 도색된 차선의 색이나 길가에 핀 여린 꽃잎의 색,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윤슬의 색, 반려동물의 눈동자에 담긴 영롱한 색 등이 영감이 된다면 회색빛의 인생에 생동의 빛이 감돌 것이다. 게다가 이토록 변화무쌍한 세상에는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아름다운 색들로 가득하다.

-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베르너 팬톤(1926년 2월 13일~1998년 9월 5일)은 형태보다 색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 입시 미술을 한 사람들은 모두 프리즈마컬러로 첫 색연필을 접한다.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종이에 발리는 느낌이 초보자가 사용하기에도 끊김이 없이 부드럽기 때문인 듯하다. 무엇보다 왁스 베이스라 발색이 진하고 채도가 상당히 높아 완성까지 이르는 시간을 대폭 줄여준다. 제한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처지에는 이보다 완벽한 재료가 없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어떠한 정물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려 할 때, 보다 직관적인 표현을 돕기도 한다. 프리즈마컬러를 오래 사용하면서 느낀 또 다른 특장점은 색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고 낱개 구매가온/오프라인 모두 용이하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내가원하는 구체적인 색을 구비하기에 편리하다. 이 부분은 지속적인 창작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 파버카스텔은 프리즈마컬러와 육안으로도 쉽게 비교된다. 몸통이 훨씬 통통하기 때문에 그립감부터가 다르다. 같은 브랜드 안에서도 동그란 모양부터 보통의 연필처럼 각진 모양까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전부 프리즈마컬러보다 두께감이 있다. 그래서 발색되는 심도 그만큼 두껍고 단단하다. 앞서 프리즈마컬러는 부드럽고 무른 특성이 있다고 했는데, 파버카스텔은 그와 정반대로 생각하면 비교가 쉽다. 단단한 만큼 종이에 발릴 때 덜 묻어 나와 얇고 섬세한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제격이다. 내 그림을 맑고 가볍게 만들고 싶다면 조금 더 값이 나가지만 파버카스텔 제품을 구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값이 꽤나 저렴하고 몸통이 상당히 얇아 연필과 같은 친숙함을 선사하는 스테들러 수채 색연필은 색감 면에서 독보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프리즈마컬러와 파버카스텔에서 찾을 수 없는 오묘한 색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파스텔 톤의 분위기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면 스테들러 제품에서 색을 선택해 보자. 아마도 빠르게 마음에 쏙 드는 색감을 얻을 것이다. 색상은 총 60여 개 정도로 다른 브랜드에 비해 다양하지는 않으나 보편적이지 않은 색상들로 구성되어 있어 색감에 특장점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벤치나 캠핑장과 같은 실외에서만 글을 써서 겨울에는 못 쓴다는 재밌는 이야기였다. 반면 어떤 소설가는 한 카페에서 주로 글을 쓰는데, 그 카페가 이전을 하게 되어 작업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글을 소셜 미디어에 남겨 공감을 얻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안정과 집중을 주는 요소가 다르기 때문에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공간을 준비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해답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나는 창작공간을 꾸밀 때 이러한 요소들을 중요하게 살폈다. 

- • 강렬한 채색 행위에도 책상에 전혀 흔들림이 없어야 함
조명의 전구는 빛의 온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것으로 함(모니터를 이용할 땐 따뜻한 색, 그림을 그릴 땐 차가운 색으로)
 PC로 업무를 볼 때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배치할 것(업무 분리)
시선이 자주 가는 위치에 자연 풍경이 담긴 커다란 포스터를 붙일 것
미술 재료들을 한 손으로도 편하게 꺼내고 다시 넣을 수 있도록 세팅하기

- 위의 목록처럼 그림을 그릴 공간에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써보면 좋다. 이때 나처럼 공간이 주는 무드에서 여러 자극을 얻는 스타일이라면, 좋아하는 색깔과 무늬가 담긴 패브릭을 준비해 책상 위에 깔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니면 드센 형광등을 소등하고 은은한 조명으로 바꿔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조명만큼 확실하게 무드를 전환해 주는 것도 없으니까. 

- 오늘도 나는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착석한 한 평 남짓의 공간에서 나를 휘도는 부드러운 영감에 귀를 섬세하게 기울인다. 그러고는 꽤나 괜찮은 작업을 완성할 수 있겠다는 즐거운 자신감을 얻는다.

- 스케치를 돌아보면 옅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스케치는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자 끄적였던 과거의 기록이자, 완성하지 못한 그림의 뼈대이고, 완성된 그림이 찬란하게 지나온 길이다. 나는 오래전 스케치를 보면서 과거의 나에게 응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마주한다. 그동안 제법 잘해왔으니 모든 순간이 썩 괜찮았다고 내게 응원해주고 싶다. 

- 그림을 그리기 전에 당신이 덮어둔 스케치가 없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우리의 모든 기록은, 다시 그림이 될 수 있다.

- 이 책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내가 사랑하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도저히 빠트릴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 단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영감을 받는 방법은 내게는 현재까지 독서가 제일이기 때문이다.

- 나는 작정하고 게으른 인간이다. 영감을 얻겠다고 어디 전시회나 강연을 들으러 문을 박차고 집을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내 안의 중심과 안정이 오로지 작업실에 못 박혀 있다고 믿게 된 후부터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서점 탐방이 영감을 얻기 위한 거의 유일무이한 외출이다.

 

- 일단 서점은 입구부터 그만의 분위기와 공기를 선물한다. 사람들의 잔잔한 움직임과 수백만 장의 지류가 내뿜는 종이 냄새, 백색소음처럼 들려오는 음악에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 그때부터 내 안에는 여유롭게 영감을 수집해 보자는 홀가분한 의지가 생긴다. 

- 나는 사람들의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을 좋아한다. 단 하나의 인생 책을 꼽자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다. 반 고흐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고,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남긴 수많은 편지에서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의 숭고함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그럼에도 그려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아로새길 수 있었다. 

- 꼭 책이 아니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는 자극에 나를 꾸준히 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영감은 어느 순간 찾아왔다가도 야속하게 달아나고, 차올랐던 에너지는 갑자기 사라진다. 좋은 에너지를 오래 간직하는 방법, 그것은 계속 채우는 것임을 잊지 말자. 

- 오로지 나와 우리 엄마만 아는 이야기인데, 내가 초등학생 때 만든 노래가 있다. 엄마는 내가 그 노래를 한두 번 부를 때는 귀엽고 웃겼는데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통에 슬슬 지겨워졌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당연히 가사에 앞뒤 맥락 같은 것도 없고 멜로디도 수시로 바뀌는 그런 노래였는데, 열창이 끝나고 나면 혼자서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 그때는 제멋대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 그토록 재미있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엉망진창인 것을 만들어선 절대 안 되게 되었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넌 재능 없어', '그림을 그려서 뭐 하려고?', '그림으로 밥 벌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부정적인 이야기가 내 안에 쌓이게 되면서 '완벽하지 않으면 그리지도 말자'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은 자신 안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소리를 걷어내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엉망인 그림은 처음부터 내 손에서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어'라는 생각을 갖게 된 불운한 어른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문장이었다.
 

 

"아티스트로서의 가치란 바로 나 자신과 신, 그리고 내 작품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쓸 수 있는 시가 있다면 팔리든 안 팔리든 간에 그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창조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창조해주어야 한다."


<아티스트 웨이> 중에서



- 우리에겐 반드시 멋진 그림을 완성할 의무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내 안에서 마땅히 창조되어야 하는 것을 끄집어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창조되기를 기다리는 예술적 갈망을 간직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들에게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집에서, 부엌에서, 화장실에서 혼자 은밀히 볼 작품을 그릴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그것을 마주해 보자. 

- 당신 안의 어린 예술가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짓밟지 마세요.

- 다시금 꺼낸 그림 중에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을 골라 뒤늦게 완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어쩐지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내가 구원하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낯선 경험이었다.

- 자신이 없으면 잠시 멈추어도 좋다. 다만 언제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자세, 그것만큼은 잊지 않길 바란다. 미래의 내가 완성해 줄지 또 모르는 일이다.

- 그런 생각들이 쌓여 색을 쓰는 나만의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색을 내가 깨닫고 해석하는 색으로 입히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만 그린 그림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이는 부단히 다르게 보려는 시도에서 얻은 성과다. 이후로 색을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에 중요한 메시지로 인식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의 색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색다른 시선을 갖는 일은 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일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 다짐과 생각만으로 세상을 향한 시선이 바뀌느냐고? 이건 테크닉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가짐이 할 정도를 차지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분명 가능한 일이다.


-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려고 하나요?"
수업에 온 분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 반드시 이유와 목적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때로는 어떤 정의가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의 생일 선물로 그림을 선물하기 위해서', '여행 가서 그림을 그려보기 위해서' 같은 이유로 그림을 그린다면 완성은 예정된 수순이다.

- 나는 이제껏 언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는지 생각해 본다. 많은 날 나 자신을 알아가고 다스리기 위해서 색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린다. 목적을 명확히 해두면 '잘'에서 벗어나 '왜'에 집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유라면 어떨까.

 

 


- [그림을 그리는 이유?]
1. 다른 일들에 지친 나를 달래주려고
2. 내 안의 그리고 싶은 의지를 위해서
3. 요즘 위로가 필요해서
4. 그림을 그리면 왠지 행복해질 것 같아서

5. 그동안 몰랐던 나의 색을 찾기 위해
6. 집에 굴러다니는 재료들이 왠지 아까워서

7.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서
8. 그림을 그릴 여유가 생겨서
9. 어느 작품을 보고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경험 때문에
10. 혼자 있고 싶어서.

- 미술사적 지식이 부족하고 그림을 보는 시야가 좁을 때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를 만드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열일곱의 어느 날, 그런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예술가가 나타났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길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다(스스로 개명한 이름이다).

-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훈데르트바서는 한 살에 아버지를 잃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대인 학살로 친척 69명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고,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거주 지구(게토)로 강제 이주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의 트라우마로 훈데르트바서는 평화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을 담아 개명한 것은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사실 나는 그의 회화 작품보다도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에게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에는 그가 남긴 다수의 건축물이 있다. 삭막한 회색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직선의 건물들 속에서 색다른 질감과 색감으로 덧입혀진 곡선의 건물이 눈에 띈다면 그의 흔적일지 모른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알록달록한 건물 외벽에 나무들이 자라나도록 설계했다. 그렇게 탄생한 로그너 바드 블루마우 리조트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 마을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아마 이 영화를 떠올리면 그의 건축물을 손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작품에 자연을 향한 강한 존중을 담아냈다. '그래, 예술가라는 명찰을 가슴팍에 달았다면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라는 생각에 덜컥 그를 롤 모델로 삼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때 즈음 내 인생 처음으로 건강한 철학을 가진 화가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타인의 인생을 화두로 삼는 일은 꽤나 근사한 경험이었다. 

- 이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함께 그림을 그려볼 계획이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함께 색을 추려볼 것이다. 많은 색연필을 모두 써보겠다고 덤비면 시작부터 채색계획이 서질 않아 더 골치 아플 수 있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개인 팔레트를 제작해 내 그림의 아이덴티티 컬러를 잡아주고, 채색 순서에 있어서 체계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 첫 번째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색연필을 보기 좋게 일렬로 펼쳐둔 후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색을 7~15개 정도 골라낸다. 수량을 기재한 것은 확실한 가이드가 빠른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한 것일 뿐 크게 상관없는 숫자이다. 평균값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 두 번째로는, 선택된 색들을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팔레트를 채운다. 가장 밝은 곳에 쓰일 색, 중간 어둡기의 색, 가장 어두운 곳에 사용할 색으로 이제부터 이 영역들은 줄여서 1군, 2군, 3군이라고 칭할 것이다.

 

 


- 마지막 단계로, 같은 색연필을 진하게 눌러서 한 번, 그리고 힘을 빼고 한 번 기록하여 한 컬러당 두 개의 컬러칩이 기록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색연필의 호수를 컬러칩 아래에 기재한다. 필압을 달리해 두 번 기록하는 것은 손에 힘을 주는 세기에 따른 색과 질감의 변화를 눈으로 익히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수채 물감에 물을 많이 먹이면 색이 옅어지고, 적게 먹이면 발색이 진해지는 원리와 같다.

- 이렇게 만들어진 팔레트 안에는 내 취향에 맞게 추려낸 색과 그 색들의 명도와 채도 정보가 모두 들어 있다. 이것들이 앞으로 그릴 그림에 든든한 가이드이자 뼈대가 되어줄 테니, 더는 방황하지 말길.

- 이때 아주 기발한 팁이 있다. 세 영역을 밝기에 맞게 제대로 분류한 건지 점검하고 싶다면 핸드폰 카메라의 기본 기능 중 '흑백 필터' 모드로 팔레트를 비춰 보자. 그럼 옆의 그림과 같이 알록달록하게 눈을 현혹했던 색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명도값만으로 컬러칩을 비교할 수 있어 잘못 분류한 색을 금방 잡아낼 수 있다. '생각보다 어두운데 1군에 두었네! 2군으로 옮겨야지.' 또는 '꽤나 밝은 색이었는데 3군에 칠했구나. 2군으로 옮겨야겠다.' 하는 식으로 수정이 가능해진다. 흑백모드로 팔레트를 비춰보는 작업은 나의 오프라인 인물화 수업에서 필히 진행하는 단계이다.

- 이제 인물화로 나아갈 차례다. 앞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인물화에는 정말 엄청난 힘이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릴 때 같이 오래 집중해서 바라보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일 테니 얼굴 전체를 그리기 앞서 눈, 코, 입의 구조적 특징과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차근차근 짚어보자. 눈의 경우에는 구조적으로 위아래의 얇은 살이 동그란 눈알을 덮고 있는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야만 눈을 평면이 아닌 구 모양의 입체로 바라볼 수 있다. 이 큼직한 구조를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시키면, 자연스럽게 밝아야 할 부분과 어두워져야 할 부분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 이때 팔레트의 영역에서 색의 명도로 구분한 1군-3군-2군의 순서로 채색할 것이다. 인물화를 그릴 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공식이니 꼭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물론 이렇게 칠해야지만 그림이 성공적으로 완성되는 것도, 모두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프라인 수업 때마다 "선생님, 인물의 구조나 명암 같은 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서 무슨 색연필부터 집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질문에 대한 해결책 정도가 아닐까 싶다.

 

 

 




- 1. 눈은 주름과 굴곡이 많은 인체 부위입니다. 구조적 형태로 인해 생기는 결을 따라 1군의 색을 차분히 칠해 나갑니다. 어느 영역이 가장 밝아야 하는지 그 부분에만 집중해 보세요.

- 2. 면을 서서히 작게 쪼개어가면서 눈(구)과 위아래의 살 부분을 도톰하게 보이도록 만들어갑니다. 우리의 인체는 머리카락이나 속눈썹과 같은 부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절대 선으로 인식하지 말고, 작더라도 면으로 표현해 보세요.

- 3. 이제부터 가장 어두운 영역에 해당하는 3군의 색을 가져와 채색합니다. 어둠을 확실히 잡아서 그림을 선명하게 만드세요.

- 4. 다음으로 2군의 색들을 가져와 1군과 3군 사이의 중간 면들을 채우며 섬세한 묘사를 시작합니다. 구의 형태를 계속해서 인지하며 칠해야 볼록한 양감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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