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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교과서, 야구 아는 여자 등의 입문 도서를 읽은 뒤에도 올해, 햇수로 5년 차가 되도록 나에게 야구는 그냥 심심할 때 보곤 하는 스포츠였다. 쓰리 아웃, 삼진, 홈런 외에는 룰도 제대로 몰랐고 서클 체인지업이니 포심이니 투심이니 하는 건 고사하고 숫자가 마구 찍힌 타율 0.38이니 0.24니 자책점 6.43이니 뭐니 하는 건 그냥 머리 아픈 이야기였다.
(물론 야구 교과서를 읽은 뒤로 대강은 룰과 흐름을 알 수 있었지만 숫자 놀음은 여전히 어려웠었다.)
그러다 작년.
히어로즈에 진심으로 꽂히면서 (히어로즈는, 놀랍게도, 처음으로, 꼴지를 했다. 약체라고 무시당해왔지만 꼴찌만은 하지 않았던 넥센이 결국 8위를 기록하는 것을 보며 울컥했던 것 같다.) 가끔씩 생각나면 보던 것을 벗어나 시범경기부터 팀경기만은 거의 전 경기를 (직관 가지 못했는데 중계를 안해준 두산과의 한 경기는 놓쳤다ㅠ) 보며 지켜보고 있다.
(아, 물론 가끔 봤다고는 해도 준플과 플옵, 한국 시리즈는 08년부터 매해 챙겨봤다. 그래도 크게 관심을 두고 보지 않으면 별로 늘지 않더라, 선수 기록도 안 외워지고. 04 우승 후 모기업을 잃고 스폰서를 찾아 근근히 떠돌던 현대 유니콘스, 우리 히어로즈, KT일 뻔했던 넥센 히어로즈... 올해는 5위를 목표로 달려보자. 가을까지 꿈꾸는 건 죄악... )
그래서, 나처럼 급작스레 관심이 커져 천만관중을 목표로 달려가는 야구 계에서 열심히 출판해 준 야구 도서를 좀 읽어볼까 하고 몇 권을 구입했다. 처음 손에 잡힌 건 김은식 저의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
프로야구 창단부터 야구 역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잘 포착해 시간순으로 잘 설명해주었다. 물론 오랜 팬들이 보기에는 조금 빈 곳이 많을 수 있겠지만 당시 팀 상황이나 감독부터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들까지 아픈 곳부터 자랑스러운 장면까지를 잘 엮은 듯 하다.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는 야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좋게 읽었지만 단언하기가 어렵다.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초심자의 관점이라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다만 최동원에 대해서는 좀 더 할 말이 많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선동렬이나 김시진 또한 그렇겠지. 모든 팀의 팬들이 보기에 조금씩은 아쉬우리라 생각한다. 삼성이나 롯데 같은 굵직한 팀의 팬이라면 훨씬 많은 선수가 등장한 것이 기쁠 수도 있을 테고, 긴 이야기가 간략히 소개된 느낌에 서운할 수도 있겠다.
(2000년대로 와서... 히어로즈는 단 한 줄 나온다... 그것도 다른 팀 선수의 호경기를 설명하려고... 아 우리 히어로즈 한 줄 더 나왔었다... 하지만 돌핀스, 피닉스, 그리고 레이콘스를 거쳐 유니콘스는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잘 몰랐던 점들을 알게 된 것도 있고.)
야구의 기본 룰이나 최근의 명장면들을 나열한 책은 아니었다. 한국 야구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짦았던 역동의 30년 동안, 지금의 팬들이 알았으면 하는 큰 사건들을 당시 상황 설명과 엮어 잘 쓴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감독들을 훑어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그리고, 흠, 이종범의 갑작스러운 은퇴가 더욱 안타깝다.
[발췌]
이미 흘러간 시대의 영웅들이었던 최동원과 선동렬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작지 않은 떨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과 기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 느끼고 상상하는 우리 삶의 눈물겹도록 엄숙한 단면들 때문이다. 한 경기가 아닌 하나의 삶이, 그리고 한 시대가 결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님'을, 그리고 '멋진 끝이 멋진 시작을 낳을 수 있음을'
말이 아닌 몸으로 증명한 한순간 때문이다.
사람을 상대하며 기록과 싸우고 기억과 맞서며 추억과 마주하는 것이 프로야구라서 그렇다.
만남의 기억은 헤어질 때까지 이어지지만, 헤어지는 순간의 기억은 잊혀질 때까지 계속된다. 야구가 계속되는 한 야구 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늘의 야구 팬들이 베이브 루스와 사첼 페이지를 기억하듯 내일의 야구 팬 역시 이종범과 손민한을 이야기할 것이다. 헤어짐의 순간에 좀 더 세심해야 할 이유를 구단들이 좀 더 깊이 새겨주었으면 하는 이유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나마 '실화'를 소재로 한 몇 편을 제외한다면 '전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경기장 안의 '실제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 과거를 상대하는 일은 항상 쉽지 않다. 자르고 잊어야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화해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때를 놓친다면 영원한 미궁으로 흘려보낼 수도 있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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