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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조금 안타까웠다.
뭐라할까, 자신의 분야에만 파고든 순수한 과학자를 보는 기분이라서 신이 나면서도 약간, 주제넘게도 안쓰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생물학과 경제학에 관련한 주장에서 눈썹을 꿈틀하게 된 것이 주 원인이다)
그의 이론 자체는 무척 놀라운 것이고, 각 과정에 대해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의문을 제기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간 것도 각 챕터를 '링크'로 정한 것과 잘 어우러지며 유쾌했다.
함께 연구한 한국인 정하웅 박사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에게서 얻은 듯한 한국에 대한 예시는 솔직히 꽤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왜 덮으면서 약간 입맛이 씁쓸한 건지.
음. 나는 학자들 특유의 홀로 신나서 질주하는 듯한 말하기도 싫어하지 않지만, 잘 모르겠다.
그의 주장과 이론, 그걸 뒷받침하는 사례와 자료들은 무척 흥미로웠고 즐거웠지만 아마도 그가 사회현상 전반에 적용한 예시들이 좀 마음에 안든 모양이다. 후반부의 링크 (그러니까 챕터)를 읽는데 전반부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든 걸 보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현상들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조금 껄끄러웠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직 스스로의 사상과 가치관을 가다듬어 정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취향이나 입맛에 맞는 글만 찾아 읽는 것은 독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실 이 경우에는 반대되는 주장이 아니라... 든 예시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내가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지만;)
더불어 정보나 주장을 접했을 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지적 기반은 필요하다. 물론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적 자세 역시 문제이지만, 최선을 다해 접하고 판단하되 그 주장이 명료하게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거나 더 찾아보는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일종의 상식이고 힘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저것이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혹은 제안을 들었을 때 자신에게 득인지 실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판단력'을 기르자, 는 말이고, 그 판단의 필요조건은 기초지식이 되겠다.)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카이스트의 추천 목록은 밸런스가 좋은 것 같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리기도 하고 (내가 선택한 순서는 뒤죽박죽이었음에도) 주장에 있어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스스로 조금 더 찾아보고 입장을 정리하라는 의도로 본다면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놀라울 정도로 균형적이다.
그래서, 총평을 하자면, 충분히 신선하고 재미있는 주장이었다.
인터넷이 친숙하게 사용되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용어가 조금 낯설 수도 있지만 잘 통일되어 있어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한국도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더 흥미로울 것이다.
결론은 인터넷은 '무작위 네트워크'가 아닌, 멱함수를 따르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scale-free model)'이며, 이것은 인터넷 뿐만 아닌 세포, 질병, 또 경제학을 위시한 사회 현상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네트워크'이고, 허브를 주축으로 하는 이 네트워크의 취약점을 잘 파악해 '거미줄 네트워크', 즉 '복잡계'를 지향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 21세기에 필요한 자세이다 라는 다소 간단하다면 간단한 주장이다. 이 결론을 도출해나가는 동안 독자를 이 방향으로 몰았다가, 다시 앗 하고 저 방향으로 몰아가는 저자의 드리블 실력은 일품이다.
다만 저자의 이론 외의 사례적 증거들을 100% 받아들이는 것은 살짝 말리고 싶고, 흠, 생각해볼 여지가 좀 있다.
[발췌]
# 호루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
# 혹시 아이가 아끼는 장난감을 분해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는 조각들을 다시 원래대로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실은 여기에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지나치는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는 세계를 분해해 놓고 그것을 어떻게 결합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 파레토 ...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의 결실인 세 권짜리 [트라타토(Trattato)]는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 모두에게 끝없는 영감과 해석의 원천이 되고 있다.
# 웹페이지들이 갖고 있는 링크의 분포는 멱함수 법칙 (power law)라고 불리는 수식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 파레토는 한번도 "80/20"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것은 이후의 경제학자들이 파레토의 경험적 저작들을 연구하면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말에 파레토는 자연과 경제 영역 내에서 일부 소수의 양은 흔한 종형 곡선을 거부하고 멱함수 법칙에 따른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의 발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소득의 분포가 멱함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돈을 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적은 돈만 번다는 것이다. 그의 발결은 전체 돈의 약 80%는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벌어간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불평등 현상은 파레토의 발견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주변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 액체가 어는 것이나 자석이 생기는 것은 모두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전이이다. 결정체를 이루고 있는 얼음의 완벽한 질서에 비해 액체 상태의 물은 상대적으로 무질서하다. 빙점에서 물은 이 무질서 상태를 포기하고 고도의 대칭성과 질서 잡힌 상태를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강자성의 금속에서 스핀이 무작위적인 방향을 갖고 있는 상태는 혼돈적 무질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임계온도 이하로 냉각되면 마술과도 같이 일제히 똑같은 방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돌연한 전이는 자연의 움직임에 관한 뿌리 깊은 문제, 즉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공히 관심을 갖고 있는 한 문제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어떻게 하여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나는가?"
# 이 수학적 대응의 결과로 나오는 가장 중요한 예측은 다음과 같다. 어떤 네트워크는 보즈-아인슈타인 응축(Bose-Einstein condensation)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예측의 결과는 양자역학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승자가 독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터넷의 위상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빠른 속도의 신뢰할 수 있는 통신 기반을 제공하는 다양한 도구와 서비스를 설계하는 데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인터넷은 몇 사람 또는 몇몇 국가를 중심으로 설게된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인터넷은 스위스 시계보다는 오히려 생태계에 더욱 가깝다. ... 인터넷에는 갖가지 아이디어들이 수렴되는 한편 상충된 입장들이 대립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인터넷은 역사학자나 컴퓨터 과학자들이 규명해야 할 복잡한 지식의 뭉치들을 가득 담고 있다.
# 척도 없는 네트워크냐 무작위 네트워크냐에 관계 없이, 항상 링크는 방향이 있는 것과 방향이 없는 것으로 나뉜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들이 대부분 방향 없는 링크에 대해서만 다루어왔을 뿐이다.
# 이러한 문자들은 DNA를 구성하는 분자를 나타낸다. 이 문자들의 순서에 따라 각 개인의 유전적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50세에 대머리가 된다든지 70세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건강 상태는 이러한 유전자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 저자가 인문학자였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하아... 그 친하다는 생물학자에게 검수를 받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 유전자로 인한 질병이나 현상은 틀림없이 있지만, 그건 저렇게 몇 세에 발현되는 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나타나는 심장 기형이라던가 다운, 터너 증후군 등등 확실히 유전자로 인한 경우의 질병도 있다.) 하지만 저런 경우는 그저 유전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을 뿐. 심지어, 영양 상태와 심리 상태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 같은 경우는 유전적 요인보다는 외부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고 보는 편이고...)
# 두 분자 사이에 평균거리가 3단게 떨어져 있다는 사실만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더욱 우리를 놀랍게 한 것은 43개의 유기체들의 평균거리가 43개 유기체들의 신진대사 네트워크의 구성 분자 수에 무관하게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인터넷에 참여하는 노드의 수가 증가할수록 평균거리는 증가한다. 이와는 다르게 신진대사 네트워크는 아주 작은 원시 기생 박테리아에서부터 꽃과 같이 아주 진화된 생명체까지 평균거리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 가장 큰 허브 역할을 하는 분자는 ATP이며 ADP와 물이 그 뒤를 이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허브임이 밝혀졌다.
# 초기의 세포들은 오직 하나의 헤모글로빈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약 5억 년 전에 고등 어류의 진화과정에서 연속적인 유전자 복제가 발생하였고, 그 결과 4개의 헤모글로빈 유전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 4개의 유전자가 하나의 헤모글로빈 단백질 복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문장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물론 헤모글로빈이 4개의 헴이 결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헤모글로빈'이라는 단어는 4개의 heme, 헴과 각 2개의 α β chain인 globin, 글로빈이 결합한 것을 통칭하는 단어로, 아마도 하나의 헴에서 네 개의 헴이 중합되어 '헤모글로빈'이 되게 된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4개의 헤모글로빈 유전자가 아니라 4개의 헴을 만드는 유전자가 생겼고, 그를 통해 하나의 헤모글로빈 단백질 복합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번역 오류라고 보기엔 전반적인 번역이 깔끔했다. 흠.. 뭐 진화쪽과 분자생물학 등등을 좀 더 찾아볼 문제긴 한데, 나는 눈에 걸렸다. 이 글이 문학이었다면, 나는 저자가 비전공자임을 감안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학자로써 쓴 글이고, 스스로 한 주장의 논거로 챕터를 할애해가며 쓴 글은 좀 더 명료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저자는 생물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학자로써 (그것도 단어와 정의에 민감해야 할 물리학 전공의 과학자란 말이다) 그의 이런 안일함은 다소 거슬린다.)
# 이런 경우 의사는 다른 약을 처방하게 되고, 이 약이 효과가 없으면, 또 다시 약을 바꾸게 되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환자에게 적합한 약을 찾아내게 되는데, 이는 우울증에 원인이 되는 유전자의 네트워크가 잘못 작동되는 것을 일시적으로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약을 복용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화학적인 비평형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어 다시 우울증의 증상도 나타난다.
(.... 음... 길게 말하기 시작하면 폭주하겠지.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은, 우울증이라는 것이 변화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과 약을 중단한 뒤 다시 악화되는 경우는 틀림없이 있지만 그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며, 굳이 안 좋은 예까지 들자면 약을 복용하다가도 습관성에 의해 악화될 수도 있다는, 그런 예도 말을 해야겠다. 발췌가 아닌 전문을 읽어보면 이는 절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는 좀 더 적합하고 반발이 없을 법한 사례를 들었어야 했다. 내가 조금은 아는 분야의 사례를 보고 그가 저지른 오류(자신의 이론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류가 포함된 표현을 쓴다거나, 혹은 잘못 일반화한 사례를 쓰는 것을 보면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 (물리나 경제적, 또는 사회적 사례) 에서도 같은 오류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의심하게 되고, 즐겁게 읽어온 전반부를 의혹에 찬 눈으로 돌아보게 된다.)
#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합병들은 합리적인가? 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하고 세계화에 반대하며 일상 생활용품으로부터 국가 정책에까지 간여하는 일부 운동가들은 절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 현상을 복잡계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합병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저자의 생각와 독자의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일부 운동가에 속하는 성향을 갖고 있으며, 기업간의 합병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의 대등한 병합보다는 오히려 생존이 걸린 다툼에 가깝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주장하는 이 기업의 생태와 그것이 증명하는 그의 네트워크 이론을 읽는 것이 다소 고역스러웠다. 물론 그는 약 60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여 자신의 주장의 근거는 이것이라는 사이트의 주소나 논문을 실어두었지만, 한 가지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주장의 논문이 각 입장 별로 수십 수백가지가 나올 수 있음을 상기한다면, 논문을 근거로 든다고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나, 저자가 사회학자가 아닐 경우, 그의 주장의 시발점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 연구와 혁신, 생산 개발, 그리고 마케팅이 점점 더 특성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상호 간의 전략적인 협조 체제와 파트너 관계가 생존의 수단이 되고 있다. 즉, 각각의 회사들이 서로 협조 관계를 갖는 네트워크 구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공급사와 하청업자들의 협력 체게는 독일의 남서부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 잘 발달되었다. ... 한국에서도 재벌 체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업종의 기업 간에 협력 체계가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기업 간의 협력 체계는 시장의 변화와 소비자의 관심 변화에 따라 정기적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세계적인 기업 환경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의 이 주장은 그의 파트너였던 한국인 정하웅 박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통한 것이겠지만.... 이미 낙수 효과는 실패로 보고 있지 않나. 물론 그는 외국인이고,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을 생각하면 이해는 되지만, 내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한국인 정하운 박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1998년 가을, 나는 한국에서 온 정하웅 박사를 연구원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한국에서 명성이 있는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우리 팀에 합류한 사람으로 컴퓨터에 대한 놀라운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컴퓨터에 대해서는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반갑고 기뻤지만, 그만큼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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