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일상다반사

라일락 향기가 흐르는 늦봄의 밤

일루젼 2012. 4. 30. 23:31
728x90
반응형

오늘 아침,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벼르고 있던 은교를 보았다.

영화 은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으로 많지만, 아직은 조금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잠시 미뤄두고 싶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익숙한 길을 걸어오르는데 문득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쏟아져내리는, 이제는 부쩍 뜨거워진 햇살에서 묻어나는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나는 몇 번이고 걸었던 익숙한 집 앞에서 길을 잃고 향기 속에 잠겼다.

 

그 순간 내가 떠올렸던 문장들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훨씬 가볍고, 맑고, 어찌보면 나답지 않아서 이건 꼭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그 향기가 잉태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쏟아져내리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고,

일어난 머리 속에는 그윽했던 향기만이 흐릿하게 남았다.

 

 

그래도 무언가가 쓰고 싶다.

되지 않는 글이라도 끄적이고 싶다.

 

흘러내린 향이 나를 채우고 돋아난 그리움을 휘감고

 

겨우 떠오른 것들은 그런 간지러운 조각들뿐이었다.

 

 

은교를 본 친우와 서로의 다른 생각에 대해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열렬히 떠들었다.

나는 그의 생각에 사실 동의한다. 이미 전날 열렬히 동의했던 바 있다.

하지만 영화 은교의 대한 평가는 조금 더 후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 차이다.

 

요즘의 나는, 일부러 마음을 먹고서도 누군가에 대해 모질고 독하게 말하는 것이 꺼려진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독한 말을 톡 내뱉어 버리고 싶다가도 울컥 치미는 것을 꾹 눌러 삼킨다.

그 말로 바뀔 것들이었으면 그 세월이 흐르도록 그리 있지 않았겠지.

이해할 것 같았으면 이쯤해도 이미 알아들었겠지.

내가 무어라고 나를 이해받고자 설명을 해야하며 그가 무어라고 힘들여 알아듣도록 말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말이고 글이고 표정이고 기류고 어떻게든 표현해도 오해는 피할 수 없는데, 결국은 저 좋은대로 멋대로 해석할 텐데

왜 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마음에 들지도 않는 왜곡을 보아야 하는가.

차라리 입을 닫고 내 말하지 않아 제 저러지 하고 말지.

그렇게 점차 조용히 힘없이 웃는 일이 늘었다.

 

 

아니,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최근 치미는 것들을 삭이지 못해 내뱉어내던 뾰족한 감정의 조각들을 또다시 흩뿌리고 싶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몸을 씻고 가볍게 걸치고 밤길을 나섰다.

차가울 줄 알았던 공기는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선선함과 따스함으로 밤산책을 부추겼다.

발걸음이 닿는대로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의 물기가 사라질 때까지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환한 가로등도,

모든 것이 행복해서 살아있음이 감사했다.

 

조금도 춥지 않아서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문득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그리운 이로 화해 내 옆으로 다가섰다.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시 걸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충만한 밤이었다.

 

문득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멀리 온 덕에 미처 생긴 것을 몰랐던 타코야키 집을 발견하고 오늘은 맥주라도 한 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내 서 있던 자리에 대신 남겨놓고 따끈한 꾸러미를 들고 다시 걸었다.

 

무심결에 출발했던 길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어,

나는 아침에 지났던 향기의 길을 다시 걸었다.

 

햇살이 사라진 곳에 홀로 남겨진 향은 

내 잠든 동안 더 짙게 농익어

결국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담장 너머에 피어있을 보랏빛 등걸에는 손길이 가닿지 않았지만

대신 긴 눈길로 그 잔등을 쓰다듬고 다시 돌아서는 내 앞으로

 

이번에는 그가 앞장을 섰다.

 

그래, 이런 것도 좋겠구나.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잡히지 않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 소리내어 웃었다.

 

이런 것이 사는 기쁨인 걸까.

그만 함께 해준다면, 하고 아쉬워하자

바로 그 순간 먼 곳의 그를 대신해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내 그림자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은 충만했다.

 

아,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순간 생각했던 것들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밖으로 꺼내는 순간 변질된다. 어떻게 다듬고 표현해도 그 순간의 그 향을, 그를, 그리고 나를 그려낼 수는 없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정말로 행복했고

늦봄의 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을 것이라는 것

 

나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는 것

 

그런 것들 뿐이다.

 

반응형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들아  (0) 2012.05.14
한 주의 기다림  (0) 2012.05.13
주절주절  (0) 2012.05.11
부디  (0) 2012.04.30
아파  (0) 2012.04.23
풀무원 녹즙 시음  (0) 2012.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