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주제 사라마구]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일루젼 2012. 9. 8.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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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 6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해냄

양장본 | 300쪽 | 196*133mm | ISBN(13) : 9788973379422

2008-02-20

 

주제 사라마구.  

포르투갈이라는 다소 생소하다면 생소한 나라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의, 동명의 원작 소설가로써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그리고 '죽음의 중지.;

 

이제 그 세번째로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까지 읽고난 감상은.

삶의 연륜이 주는 통찰력은 젊은이의 그것보다 훨씬 노회하고, 그러면서도 절망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섣불리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뭐랄까 체념이라 하기엔 보다 밝은, 해탈에 가까운 느낌이 묻어난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듯한, 절망도 아니요 비탄도 아닌 덤덤한 눈길이 말이다.

 

언론인으로서의 사라마구가 있었기에 '눈뜬'이 있었을 것이다.

'이름 없는'은 어쩌면 그가 은퇴한 후 소설을 쓰던 기간의 그 자신이 주인공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의 이름 역시 '주제'이다.

 

이 작품 하나만을 놓고 말하자면 그리 높은 점수는 주지 못하겠다.

 

하지만 연작의 일련선상에서 접근하자면, 작품 너머에 있는 '주제 사라마구'라는 한 작가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인간'의 속성 그 한 단면 단면을 각 소설에서 풀어내고 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방금 날림으로 쓴 다른 리뷰와도 연결이 되는 부분인데,

 

한 인간이 죽었다.

그는 그를 알고 있는 주변인들에게는 큰 상실이고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어떠한가.

 

버스를 기다리는 내 앞으로 스쳐지나간 이가 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가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 나는 아마 평생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기억이 난다면) 그 이는 언제까지나 내 앞을 잠시 스쳐갔던 그 순간의 그 모습일 뿐이며, 그의 죽음은 내게 미지의 개념이 될 것이다.

 

반대로 낯선 한 무덤 앞에 서있다고 하자.

나는 결코 그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심지어 지금 저 묘비에 적힌 이름이 저 아래 누워있을 이의 이름인지조차도.

 

사망 신고.

그를 통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가적인 기록은 없을 것이라는 단절의 낙인이 찍히지 않는 한, 한 인간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 이와 실질적인 접촉이 있었던 최측근 몇을 제외한다면, 그는 더이상의 추가적인 기록이 없을 뿐 죽지 않은 채 (활자로서일지언정) 영생의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말이 지나치게 겉도는데, 결국 현 시대에 와서는 내 눈 앞에 갓 태어나 울고 있는 아이가 있더라도 출생신고를 거치지 않은 저 아이는 이 도시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망 신고를 통해 그 끝을 마감하지 않은 이는 관에 누워 묻혀서라도 계속 살아가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실제로 만나지 않은 그 도시의 모든 이들에게는.

 

그러한 이야기가, 50대의 홀로 늙어가는 '주제'의 독특한 취미에 의해 풀어져나가는 이야기이다.

아주 덤덤한, 그래서 더 매력적인.

 

 

 

 

[발췌]

 

# 왜냐하면 모든 새 종이의 운명은, 공장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낡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이고, ....

 

 

# 해와 달은 이 세상의 중심인 중앙등기소 주위를 쉼없이 돌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나 시작할 때 항상 아침을 기준으로 말하지만 하루는 밤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밤은 낮의 조건이다. 밤이 없다면 그 밤은 영원이리라.

 

 

# 그 모든 곳에서 분필 냄새를 느낄 수 있었고, 진흙으로 반죽하여, 하느님이 첫번째 밤에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던, 예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먼지로 변할 우리의 몸만큼이나 오래된 분위기였다. 어떤 곳은 마치 검정 천을 씌워놓은 것처럼 너무나 깜깜했고, 어떤 곳은 거리의 가로등 불빛으로는 도저히 그 효과를 낼 수 없는, 마치 수족관에서나 볼 수 있는 푸른 빛이 가득 비추고 있었다.

 

 

# 단 한 마디의, 조심하게, 관대하면서도 명령적인 어조였다. 훌륭한 소장만이 할 수 있는, 전혀 다른 두 의미의 말을 하나로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그런 말투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급자는 상관을 존경하는 것이다.

 

 

#  이봐, 겁내지 마,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어둠은 너의 몸속에 존재하는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냐, 어둠이란 인간의 살이란 것을 경계로 두 개로 분리되어 있지, 아마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걸, 항상 너는 어둠을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겨놓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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