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2 - 320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84310971 2003-06-26 |
왜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가?
누구나 자신의 자랑스러운 면만을 보고 싶어하겠지만, 내키지 않더라도 부끄러운 부분을 돌이켜 보고 새겨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으리라.
일본이 일제강점기 시절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분개하는 우리가 어째서 반중국인 유혈참극과 베트남에 대해서는 외면한단 말인가? 기준은 동일해야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는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서는 안된다.
그는 엄정한 시각에서 볼 때 엄연한 '역사 왜곡'이다.
교과서에서는 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씌여진 이 글은 내게 마치 '기서'를 접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지만, '한홍구'라는 노학자의 이름에는 오점이 없다. (물론 '장하준'을 얼치기로 표현하는 언론도 있으니 미래까지 장담키는 어려우나)
'대한민국사'는 불편할 지언정 왜곡이나 치우침은 없다는 것이 정치의 좌우를 떠난 공통 평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국방부 지정 불온 도서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조부에 관한 언급에서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다소 변명조로 서술하긴 했지만.ㅋ)
[발췌]
# 이들 2만명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증가한 외국인 노동자와는 구별되는 우리 사회 안에 오랜 기간 정착해온 소수민족 집단이다. 이들 화교에게 가해진 압박과 차별과 불관용의 역사는 단일미족사회를 표방하는 배타적인 한국민족주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의 화교들과 달리 이 땅의 화교들이 기껏해야 자장면 저도밖에 팔 수 없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가 있다. 이 땅의 화교들의 고달픈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그리고 우리의인종주의가 낳은 가장 부끄러운 사건은 1931년 7월의 반 중국인 폭동이다.
이 폭동의 계기가 된 만보산 사건은 교과서에도 나오고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이에 뒤이은 반중국인 폭동은 일반인은 물론 한국사 전공자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만보산 사건이란 1931년 5월 하순부터 창춘 근교의 만보산 삼성보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분규이다.
# 1931년 7월의 불행하고도 부끄러운 반중국인 유혈참극은 우리 민족의 순진한 동포애와 출구를 잘못 찾은 민족주의가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자주 분노한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분노하고,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만행에 분노하고, 또 재일동포들에 대해 가해지는 차별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고 뼈를 묻어도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화교들의 처지를 보면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에 분노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 그러면 박정희는 왜 동일계급을 비교할 때 필리핀군이나 타이군의 30~40%에 불과한 싼값에 우리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배냈을까? 미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정치적 이유 이외에도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당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외환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할 무렵 한-일국교정상화를 졸속으로 마무리했다. 박정희는 36년 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인 청구권 문제를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은 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창 제기될 무렵, 저는 한 방송사 TV토론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김 상사님의 옛 전우들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 전화의 대부분은 거친 전화였지만, 한 분의 전화만큼은 달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머나먼 남쪽 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는데, 돈 있고 백 있는 놈은 다 빠지고 자기 같은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런 자신이 용병이고 학살자냐고, 울음 섞인 전화에 저의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김 상사님.
지난 3년 간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 상사님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말에는 부르르 떨며 분노하셨지만, 김 상사님을 비롯한 파월장병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아픔을 주었다는 점은 동의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베트남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베트남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박정희의 정략적인 파병으로 한국사회에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이 되었다는 거창한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우리 남편이 월남 1년 갔다 오더니 영 딴사람이 되었다는 친구분 사모님의 말씀이나, 월남 갔다 온 뒤에는 내 눈에 너무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동안 가족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는 김 상사님의 말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 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 곡절이 많다지만 박정희만큼 변신을 자주한 이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 한국판 게이트의 원조, 코리아게이트 - 최근 공개된 자료들은 청와대 내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보면 정조의 화성행차 당시의 수라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반찬의 종류와 재료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기록문화의 왕국이었다. 그러던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귀중한 사료들을 먼지만 쌓이게 두다가 '발견'해야 하는가? 그리고 연구자들은 언제까지 우리도 틀림없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보기 위해 미국의 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를 기웃거려야 하는가?
# 중세의 감옥과 뚜렷이 구별되는 근대의 감옥이 보여주는 특징은 감옥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반 대중의 복종을 끌어내고, 규율을 부여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는 점이다. 이른바 '비생산적인 집단'을 통제하고 복종을 잘하면서도 생산적인 노동력을 키워내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핵심적 과제로 등장했다.
# 1975년에 제정되어 1989년에 폐지된 사회안전법은 영어로 한다면 'Social Security Law'가 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보장 내용을 담는 것인 반면, 우리는 재범의 우려가 있는 '적색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남규 선생의 경우 1973년에 만기출옥하여 고물상 등으로 연명하던 중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자 '주민등록까지 기피할 뿐 아니라 재북가족을 동경하며 독신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
# 분단 이후 일제잔재를 더욱 악랄하게 발전시킨 강제전향제도를 이겨낸 비전향 장기수들에서 출소 이후 사망자를 포함한 총94명이 산 징역 햇수를 합하면 모두 2,854년, 한 사람당 평균으로는 31년이다. 27년간 징역을 살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이 땅의 비전향 장기수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반 평균을 깎아먹는' 처지가 된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이들은 0.7평 독방에서 보냈다.
# 님 웨일스가 절묘하게 표현한 것처럼 당시의 동아시아는 한 세대 동안에 역사가 천년이나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김산이라는 33살의 청년은 자기가 자신의 젊음을 어디선가 잃어버린 젊은이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어디선지도 모르게 청춘을 잃어버린 청년,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청년이 이미 내노라하는 중국혁명가 25명의 삶을 인터뷰한 님 웨일스를 매료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김산의 폭넓은 체험, 특히 중국혁명에 투신하셨으면서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국외자로서의 위치에서 얻은 성찰과 고통이었다.
# 김산은 자신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지만, 자신은 단 하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승리하였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또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이런 귀중한 깨달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하는 것은 물론 허황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허황된 이야기라고 배척해버릴 경우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을 닫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전설과 같은 구전자료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이 구비문학게의 공인된 주장이다. 따라서 식민지 시기 말기의 대중의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서 김일성 전설은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줄 영웅을 기다린다. 19세기 말엽 이래 영웅대망론이나 영웅예찬론은 한국의 일반 민중뿐 아니라 지식인, 민족운동가에게도 널리 퍼진 중요한 화두였다.
# 영웅설화의 특성상 군사활동과 결부되지 않고서는 영웅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조직, 선전활동에 치중해온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나 외교활동에 주력해온 국외의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의 일정한 기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영웅설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 이는 앞으로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근대교육이 일제의 노예교육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교육의 세례를 좀더 많이 받은 층일수록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에 오랜 기간 포섭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가 가진 근대적인 군사경제력의 힘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압도되어 독립의 꿈을 포기하는 경향이 좀더 큰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런 카리스마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김일성 주변의 유격대원들이 이북의 국가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시기 저항민족주의의 가장 견결한 담당층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의 주역이 된 인물들이 문화적으로는 매우 낙후한 집단에 속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로서 이북의 정치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 전쟁 중 불과 100여 일 사이에 적군 5만 명 이상을 섬멸하고 수십만 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반대로 불과 100여 일 사이에 아군 5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치명적인 심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런 손실이 총 한 방 쏘지 않고, 그것도 아군 내부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의해 발생했다면? 국민방위군 사건은 불과 100여 일 사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징집한 일종의 예비군인 국민방위군 50여 만 명 중 5만 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전쟁이 나면 사람 목숨이 개값이라지만, 국민방위군은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정말 개만도 못한 죽임을 당해야 했다.
# '희대의 코미디 "젤리공장을 짓겠다"'
엄동설한에 길을 나선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의복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장정들은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된 이상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니, 어차피 벗어버릴 민간복을 껴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가족들에게 벗어주고 소집에 응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추우와 굶주림을 쓰러져갔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피복비를 전혜 계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 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둘러싸고 논의가 거듭되자 김윤근은 1월 20일 다시 성명을 발표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이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금번 국가방위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남하시켜 철저히 확보했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고 않을 수 없다'고 자찬했다.
# 서구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실현돼온 역사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01년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제기됐을 때 국방부보다 더 열심히 쌍지팡이를 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 땅의 주류 기독교였다. 한국전쟁이 한구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던 탓일까. 우리의 기독교인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무기를 들 수 없다고 죽음을 택한 막시밀리아누스 등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후예라기보다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쟁기를 벼려 칼을 만드는 십자군의 후예들이다.
# 조서 초기에만 하더라도 건국의 주체들은 모든 민을 교육시킨다는 포부를 갖고 관학교육 진흥정책을 폈다. 그러나 향교를 통해 교육받은 평민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내줄 사회적 지윈 대우는 준비되지 않았다. 하층계급이나 신분으로부터 재주 있는 사람들을 적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신분제도의 골간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편이지만, 평민층을 대대적으로 교육시킨다면 이는 또한 신분제 자체를 동요시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향교교육을 내실화하는 데에 극히 소극적이 되었고, 향교의 교슈나 교관의 파견도 점차 흐지부지되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 우리나라의 지배 엘리트들은 유난히 뼈대를 중시했다. 신라의 골품제도란 말에서 보듯 우리의 지배 엘리트에 혈통의 상징은 곧 뼈대였다. 지금도 뼈대 있는 집안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심지어 멸치가 문어에게 자기네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큰솔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골품제란 뼈대, 즉 출생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반면, 과거제는 이 뼈대 대신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제도이다. .
과거제도의 기본적인 전제는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이라는 공개경쟁의 시험절차를 통해 사회계층적 신분이나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인재를 구한다는 것이다. 과거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려가면서 지배 엘리트 내에서도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서제도보다는 공개적인 경쟁인 과거제를 통해 자신의 교양과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벼슬을 구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기는 현상이 생겨났다.
# 필자의 생각에 한국에서의 대학입시는 학생선발 기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단지 극단적인 학벌주의 아래서 한 차례 시험으로 결정되는 운명이 평생을 신분처럼 따라다니게 된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입시제도는 능력본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개개인들이 같은 기간 연마한 실력을 똑같은 문제를 풀어 시험받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이한 대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한다. 즉 이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불평등해질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신화에 기초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 입시제도만큼 우리 사회의 기성질서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제도도 없을 것이다.
# 세대교체는 때로 필요하지만 너무 급격한 세대교체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너무 젋은 사람들, 그것도 나이만 젊었지 마음은 젋지 않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그대로 뭉개고 앉아 건강을 뽐내면 대책이 없다. 그들의 건강과 장수야 본인과 그 가족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겠으나 전체 사회를 위햇는 대체로 큰 불행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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