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 518쪽 | 200*140mm | ISBN(13) : 9788959750221 2005-12-26 |
상당히 취향인 표지에 이끌려서 구매해놓고 잊고 있던 책.
산뜻하고 은은한 에메랄드색 배경에 북은 입술의 한 여인과 벚꽃이 그려진 표지와 감수성을 건드리는 제목.
나는 당연히 연애소설이나 감성 에세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놀랍게도 상당한 반전을 품은 추리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집을 뒤져 꺼내 읽었다.
우선 나는 추리 소설의 계보와 특성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밝혀둔다.
내 방식대로 분류를 해보자면, -일본 추리소설의 경우-
독자가 맞출 수 있게끔 단서를 다 제공하고 기다리는 글이 있다. 이를 두고 공정하다고도 하는 듯 한데, 다시 말하면 독자가 맞춰주기를 바라며 몰래 몰래 빵조각을 던져놓고 진실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이런 글의 묘미는 독자가 숨겨진 트릭을 간파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았음을 확인하는 단계에서의 카타르시스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에 반해서 애초에 통수를 치기 위해서 입 꾹 다물고 있다가 '서프라이즈! 놀랐지?!'하는 글이 있다. 독자가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하는 글은 애초에 맞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그 뒤통수 맞는 맛이 이 글의 재미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추리소설에 스포일러는 극약이지만, 그래도 부득불 비교하자면 후자 쪽이 조금 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벚꽃 같은 경우는 명백히 후자에 들어서는 글이다.
더군다나 최종적으로 밝혀지기 전 독자들을 한계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작가로, 솔직히, 정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오타가 아닐까하고 특정 구절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참, 맞고 나서도 시원했다.
내 뒤통수를 후려친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내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이었다.
어째서 그리도 쉽게, 모든 세상은 특정 그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플롯이나 캐릭터에 있어서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뛰어난 트릭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 반전은, 뭐랄까 갑자기 눈 앞에 들이밀어진 조커 같은 기분?!?!
그 한 가지로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라 생각하고, 작가 도한 초반부터 그 한 순간을 위해 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만족.
아. 한 가지 걸렸던 점은... 역자가 좀 나이가 있으신지...
'오바이트'와 '삼도내' 라는 두 단어가 좀 눈에 걸렸다
(소토바야 솔도파라고 많이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각각 '구토'와 '삼도천'으로 해주었더라면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 작렬.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부디 스킵하시길 -
모든 것은 젊음, 젊음만을 찬양하며 치닫고 있다.
20대의 축제였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아래로는 10대, 위로는 30대까지 영역을 넓힌 '젊음'은 그 특성처럼 뜨겁고 이기적이다.
마치 영원할 것 같은 찰나, 바로 그 젊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늙음은 더이상 현명함의 상징도 존경의 대상도 아니다.
우타노 쇼고는 바로 그것을 꼬집고 싶었던 것 같다.
젊고 활기 넘치는 이들만이 주인공이 아닐 수 있다고. 어째서 섹스, 운동, 우정, 연애 그 모든 것이 젊음 만의 소유물이냐고 외치는 듯한 글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아직은 젊음에 속해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고-
그랬다. 나이를 먹더라도 여전히 희노애락이 있고 욕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보기 좋게 한 방을 맞고 말았다.
실버 시대. 고연령 시대. 100세 시대가 온다고 한다. 아니 실제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이 '모든 젊은 것은 늙게 마련이고, 불과 2-30년의 젊음 뒤에는 50년 이상 늙음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속도보다 내가 늙어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 소설 안의 모든 설정은 사실 트릭보다는 바로 그 한 순간의 반전을 위해 짜여져 있다. 보험 사기를 위해 타인의 명의로 살아간다는 트릭조차, 특정 인물의 시점과 시간이 교차되며 나타나는 에피소드들에서 잡혔던 젊음과 늙음의 이미지가 강제적으로 합쳐지게 되며 나타나는 혼란, 충격, 놀라움을 한 층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붉은 히비스커스 무늬가 들어간 흰 원피스를 입은, 굵은 컬이 들어간 갈색머리의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하게된 -자식들은 모두 자립한- 독거 노파였던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밀려오는 전율은, 결국 그것이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강렬해진다.
벚꽃지는 계절에, 나는 그대를 그리워할 것이다.
[발췌]
# "그런 거야,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 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
"단풍이요?"
"그래, 다들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걸 모르고 있어."
"빨갛게요?"
"그런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어.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선명하진 않고, 약간 은은한 빛을 띠고 있지.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아, 다들 그냥 지나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꽃구경하던 때를 생각해봐. 전국에 벚나무가 얼마나 많아. 그걸 바라보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어. 그러면서 꽃이 지면 다들 무시하지. 색이 칙칙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야. 대부분은 단풍이 드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 좀 심한 거 아닌가? ..."
# 하지만 회사 업무에 바동바동 매달리는 만큼,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은 점점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차츰 줄어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철이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정열까지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묻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정년을 맞이해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해방된 지금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나는 스무 살 때의 나 자신을 되찾았다. 하고픈 일이 너무 많아 눈이 핑핑 돌 지경이다.
나는 가끔 스무 살의 나와 일흔 살의 내가 뭐가 다른지 생각해본다.
육체적으로는 분명 차이가 있다. 얼굴도 손도 주름투성이이고, 생기도 없고, 피부는 중력을 못 이겨 축 쳐져 있다. 머리칼은 윤기도 없이 푸석하고, 얼룩진 흰머리는 염색을 안 하면 보기가 흉하다. 안경이 없으면 신문도 못 읽고, 텔레비전의 볼륨은 자꾸 높아지고, 건망증도 무척 심해졌다. 매일 몸을 단련하고 있지만, 일전에는 살짝 나뒹굴었는데도 골절되는 등,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도 일흔 살의 나도 자이언트 팀의 승패에 따라 울고 웃는다. 여전히 지기 싫어해 허세를 부리고, 차를 좋아하고, 괴로울 때는 술에 의지한다. .......
정말 벚꽃이 진 걸까? 내 안에는 아직 활짝 피어 있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기와라 히로시] 유랑가족 세이타로 (0) | 2012.09.21 |
---|---|
[아티크 라히미] 인내의 돌 (0) | 2012.09.12 |
[기시 유스케] 검은 집 (0) | 2012.09.12 |
[한홍구] 대한민국사 2 (0) | 2012.09.08 |
[주제 사라마구]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0) | 2012.09.08 |
[후지사키 류/오노 후유미] 시귀 1-11 (0) | 2012.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