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레비 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일루젼 2021. 3. 18.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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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류재화)
출판 :  문예출판사
출간 : 2018.02.20


 

같음과 다름의 접근 방식을 버리고 '닮은 차이'의 관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글.

일본에서의 세 강연을 정리한 글이라 구어체이며,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읽기 난이도는 수월하다. 청자를 확실히 고정해두고 말하는 느낌이 들어 조금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1986년에 정리된 글임을 감안하면 놀랍다.

 

진보의 방향성과 획일화된 유토피아의 환상을 벗어나 

깨트릴 수 없는 껍질 안에서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투명하게 보라.

 

내가 마빈 해리스를 재독 하고 있어서 닿은 것인지, 

내 관점 안으로 매몰되고 있어서 닿은 것인지, 

보편에 대한 보다 깊은 생각이 필요해서 닿은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신화학은 곧 3권이 출간될 예정이던데, 1권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

 

 

- 처음에 인류학은 독특하고 이상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이 찌꺼기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 이유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와는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면 우선은 놀라겠지만, 막상 달라서 놀랐던 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고고학자, 철학자, 모랄리스트. 문학가 들은 최근 발견하게 된 민족을 보면서, 그들이 인류의 과거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위대한 발견이 이뤄지고 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최초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신세계에서 발견한 것보다 지나간 고대로부터 재발견했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주민의 생활을 보면서 성서와 그리스어, 라틴어 작가들이 묘사했던 에덴의 정원이나 황금시대, 청춘의 샘, 아틀란티스 또는 '복 받은 자들의 섬' 같은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차이를 보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합니다만, 인간을 연구할 때는 이런 차이들이 중요합니다. 장-자크 루소가 말했듯이, "고유한 속성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차이를 관찰해야 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이런 독특하고 이상한 것들이 더 큰 관심을 받는 다른 중요한 현상들보다 훨씬 일관된 방식으로 정렬된다는 것입니다. 

 

- 이른바 '원시' 사회는 우리가 어떤 단계의 과거를 거쳐왔는지 조명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의 공통분모라 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양과 동양의 고도 문명이 오히려 예외성을 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인류학의 발전으로 더 많은 조사가 이뤄지면서, 소위 '반품'처럼 취급되고 주변부 지역으로 밀려나면서 소멸될 운명이라 여겨졌던 뒤쳐지고 소외된 사회들이 도리어 본연적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 한, 완벽한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그런 원시사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준선을 더 잘 설정해야 합니다.

 수십 내지 수백 명 정도 되는 작은 집단들이고, 며칠을 걸어서 가야 할 정도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인구밀도 면에서는 1제곱킬로미터에 0.1명 정도 살아야 합니다. 인구 증가율은 1퍼센트가 안 될 정도로 낮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늘어나는 수와 줄어드는 수가 거의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 인원이 거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인구의 항상성은 다양한 과정을 통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보장되어야 합니다. 출산 이후 성관계의 금기와 수유 기간의 연장으로 여성의 생리적 리듬은 늦게 회복됩니다. 이렇게 관찰된 모든 사례를 보면, 인구 성장을 해도 새로운 토대 위에 재조직된 사회집단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집단의 구성원 수가 많아지면 집단은 분할되고, 이전과 같은 크기와 질서 체계를 갖춘 두 개의 작은 집단이 만들어집니다. 

 

- 덧붙이자면 가령 우리가 미신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종교와 의례를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복잡한 생태의 자연환경에서는 천연자원이 더욱 잘 보존되고 식물과 동물 종이 매우 다양합니다. 열대 적도 지방에서는 단위면적당 인구수가 적으므로 전염성 세균이나 기생충 역시 적습니다. 전염이 될 수는 있으나 임상적 수준으로 보아서는 매우 미약합니다. 

 

-  인류학의 첫 번째 야망은 '객관성 objectivité'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객관성은 자기 믿음이나 선호, 일종의 편견을 추상화할 때 쓰는 객관성이 아닙니다. 이런 객관성은 모든 사회과학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게 없으면 과학이자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학이 주장하는 객관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관찰 대상인 어떤 사회의 고유한 가치들을 객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방식도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관찰자들에게도 유효한 도식에 이르러야 한다는 겁니다. 인류학자는 자기의 감정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심성의 범주를 만들고, 공간과 시간, 반대와 모순 등에도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합니다. 오늘날 물리과학과 자연과학에서 파생한 다른 분과 학문들에서 만나는 전통적 사유와는 전혀 다른 낯선 개념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학과에서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이를 인상적으로 포착한 바 있습니다. 보어는 1919년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들 간에는 전통적인 차이들이 있는데, ...... [이것도] 물리학적 실험의 결과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들에 상응해 묘사할 수 있다."

 

- 인류학의 두 번째 야망은 '전체성 totalité'입니다. 사회생활의 모든 양상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를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 현상들이 갖는 유형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법률가, 경제학자, 인구학자, 정치학 전문가가 하듯 하나의 전체를 조각으로 분해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류학자가 주로 탐색하는 것은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회생활 이면에서 드러나는 공통의 형태, 즉 불변하는 속성입니다.

 

- 요컨대 인류학자가 추구하는 종합적인 객관성이란 현상들을 보면서 각자 어떤 의식을 할 수 있을 만큼 그 현상들이 의미를 가지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회과학이 만족하는 객관성과 인류학이 희망하는 객관성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경제학이나 인구학이 다루는 현실은 객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주관적이지만, 주체가 체험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까지는 묻지 않습니다. 가치, 수익성, 한계 생산력 혹은 최대 인구 같은 것을 다뤄도,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까지는 자세히 다루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들의 사적 관계, 그러니까 개인 간의 구체적인 관계 바깥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지만, 인류학자들은 이런 것에도 관심을 갖고 그들이 연구하는 사회의 표지로 파악합니다. 

 

- 우리 근현대사회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우연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방식이 우선은 주체들끼리 서로를 파악하게 하는 전체적이고 총괄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대개 글로 쓰인 문서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간접적 재구축의 결과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사람들과 직접 접촉해야 하는 구두 전승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득 쌓여 있는 책이나 다른 문서들을 통한다는 것입니다. 비평가는 이런 문서들을 통해 그들 저자의 얼굴을 재구성하곤 합니다. 현재는 기록된 문서나 행정기구 같은 온갖 종류의 중간 매체를 통해 같은 시대를 사는 대다수와 소통합니다. 이런 매체 덕분에 우리의 접촉과 소통은 대단히 늘어나지만, 매체라는 것은 중간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통성, 더 나아가 진정성이 결여된 것일 수 있습니다. 

 

- 1948년부터 대수학자 노버트 위너 Norberr Wiener, 인공두뇌학의 창시자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정보이론의 클로드 섀넌 Claude Shannon의 글에서도 이를 지적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와는 전혀 다른 근거에 바탕해서, 위너는 그의 주저인 <인공지능학 : 동물과 기계의 통제와 소통 Cybernetics :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Machine>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촘촘히 이어져 있는 작은 공동체에는 상당한 항상성이 있다. 이것은 문명화된 나라의 매우 개발된 공동체에도 해당하고, 원시의 야생 마을의 공동체에도 해당한다." 계속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향을 받아 교란될 위험이 높은 대도시 집단이 원시 마을의 작은 집단보다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덜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모든 공동체가 인간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우리가 사는 방식과 믿고 있는 가치가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류학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삶의 유형과 다른 가치 체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류학은 우리로 하여금 허영심을 자제하고, 다른 삶의 방식들을 존중할 것을 권유합니다. 놀라고 충격을 받거나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을 다른 관습과 관례를 알게 됨으로써,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겁니다. 

 

- 아마도 인간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게 되었을 겁니다. 특히 그들이 사는 환경에서 특별한 성격들이 생겨납니다. 다른 유형의 사회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러나 격리로 인한 차이점이 아니라 인접성에 기인한 차이점도 있는데, 그것은 상반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자신을 타자로부터 구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많은 인습들은 내적 필요성이나 이로운 사건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 집단과 가만히 대면한 채로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로부터도 생겨납니다. 자기만의 규칙을 세우기를 바라거나, 사고나 활동에 있어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인류학자는 문화의 차이점에 관심을 갖고 이를 존중하는데, 인류학 연구의 핵심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제가 보기에 인류학적 연구가 사고 전환의 차원에서 현대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시 부족의 이런저런 이국적 풍습을 받아들이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여는 훨씬 소박한 것으로서, 두 방향에서 진행됩니다.

 첫째, 인류학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간주하는 것이 사실은 사물의 질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 문화에 고유하게 있는 제약이나 습관적 편견 등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가리개를 벗기고, 우리 사회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혐오스러운 추문으로까지 여겨지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른 사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토록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상한 일을 행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인류학은 인간의 실제 경험들을 아주 방대하게 수집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실제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고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수천 개의 사회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서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끌어낼 수 있고, 인류학은 아직 불확실하지만 이런 것들이 어떤 틀 안에서 전개될 것인지 제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틀을 벗어난 비정상적이고 도착적인 것이라 미리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별자리 형상도 뒤집어 위처럼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겉을 보거나 안을 보거나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화를 처음부터 보거나 끝에서부터 보는 것의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 이런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신화가 이제는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점점 가까워지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특별한 '의미작용 signification' 없이 다수로 있던 '이야기들 récites'이 이제 그 수는 점점 적어지지만 의미를 띠는 '대상들 objets'이 됩니다. 신화의 의미는 각각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게 서로 연계될 때에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 그럼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제가 <신화학>에서 여러 예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신화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요소들이 다르게 배치되어 있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달리 우리는 단 하나의 역사가 있다고 기꺼이 믿습니다. 사실 각 정당, 각 사회단체, 각 개인은 서로 다른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이유를 대기 위해 역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과거가 반복된 것이고 미래는 현재가 영속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현재와 다르고 마찬가지로 현재 자체도 과거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인류학은 우리 자신의 사회나 다른 원시사회나 하나로 귀결될 만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과거에 대한 절대적인 해석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결론을 짓기 위해 좀 더 대담한 성찰을 해보겠습니다. 세계의 우주적 질서와 관련해서조차, 오늘날 과학은 비 시간성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성의 전망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Cosmos는 더 이상 뉴턴의 시대처럼 중력과 같은 영원한 법칙에 따라 나타나지 않습니다. 근대 천체물리학에서는 코스모스도 하나의 이야기를 갖습니다. 150억 년에서 200억 년 전 우주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시작되어 팽창했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습니다. 가설에 따르면 팽창이 같은 방향으로 무한히 계속되거나, 팽창과 수축의 주기가 번갈아가며 계속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진보하는 동시에, 시공간적으로 차원이 달라 우리의 정신 능력을 벗어난 현상들은 더 이상 우리의 사고로 소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코스모스의 역사는 죽게 마련인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위대한 신화가 되었습니다. 그 역사는 유일무이한 사건들의 전개 속에서 진행됩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그 실재를 증명할 수 없지요. 

 

- 아무튼 저는 역사적 지식도 신화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학 자체는 생명의 역사, 세계의 역사가 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 오랫동안 여러 갈래 길을 따라오다 보니, 과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가 언젠가는 서로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배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설 속에서 인류학이 신화적 사고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더욱이 인류학이 정신의 기능에 내재하는, 지금도 항상 현존하는 속박의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해명을 해준다면, 그것은 더욱 정당화될 것입니다. 

 

-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족과 사회적 지인들을 얻게 되고, 가치 판단이나 동기, 주요 관심사, 우리 문명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주입된 관념 등으로 이루어진 어떤 복잡한 참조 체계를 우리 정신 속에 새겨 넣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런 참조 체계와 함께 이동합니다. 그리고 다른 문화와 다른 사회 체계 들은 우리의 고유 체계 탓에 불가피하게 왜곡된 변형 상태로 인지되거나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문화를 무기력하거나 정체되어 있다고 규정할 때, 우리는 이 명백해 보이는 부동성이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는 그 문화의 이해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있는 그 문화를 우리 측면에서만 보면서 우리 환상의 희생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서로에게 어떤 흥미나 이익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서로가 비슷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 제가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소묘한 학설에 이름을 붙인다면 문화상대주의 정도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진보라는 현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양상을 띤 문화들을 비교해 정렬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화상대주의는 제한적이나마 어떤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첫째, 인류의 진보를 원근법, 그러니까 가령 1점 투시도법처럼 파악해보면 진보는 실제로 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사실상 진보는 특별한 분야에서만 나타나며, 게다가 국부적 침체와 퇴행을 배제하지 않는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인류학자는 산업사회 이전의 사회들을 연구하며 특히 그 사회의 세부적인 요소들을 조사하고 비교하지만, 그 모든 사회들을 공통된 하나의 척도 위에 정렬하기 위한 기준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류학자는 이러저러한 종교 체계 혹은 사회 조직 형태에서 각각의 상대적 가치를 끌어내어 그 위에서 다시 지적인 혹은 도덕적인 판결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인류학자가 볼 때 사실상 도덕성이라는 기준은 하나의 가정으로서, 그 기준을 채택한 사회의 기능일 뿐입니다. 

 다른 문화와 비교하여 가치를 따지고, 판단을 부여해 도식화하는 것은 인류학자 스스로 반드시 금해야 합니다. 인류학자는 연구하는 민족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각 문화는 다른 문화에 대해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평가를 해도 상대주의의 포로가 되며, 이를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 (옮긴이의 말) 요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유년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년시절 상상하곤 했던 어떤 사고와 유사한 패턴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로운 출구를 찾아 비상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다기보다, 내게 가장 익숙한 세계로 다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진보도 없는 제자리 선회일 수도 있지만, 내 안에서는 감성과 이성의 혼합물에 취한 채 일종의 초이성적인 쾌감을 맛보기도 한다. 지식은 연산적으로 더해지거나 빼지지만, 지식의 쾌감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온다. 다르지만 같은 것이 불쑥 환기됐을 때 지르는 유레카!

 

- 레비-스트로스는 <오늘날의 토테미즘>이나 <야생의 사고>, <신화학> 시리즈 등에서 언어 체계 및 친족 체계, 또한 자연현상을 인식하는 사유 체계 등 여러 사례를 분석하면서 "유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단지 유사성은 차이성의 또 다른 특수한 경우이며 차이성이 '영(0)'이 될 경우 유사성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닮아 있지만 변별 종에 속하고 다르지만 내적 상동성이 있다"고도 말한다. '차이'가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달라서가 아니라 갈라지는 경계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기운과 원리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 레비-스트로스는 특히나 이 책에서 현대사회 문명이 다양성을 얼마나 단일한 획일성으로 표준화하며 세상을 균질한 것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그것을 진보라고 믿는지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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