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조르주 바타유] 종교이론

일루젼 2021. 3. 19.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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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르주 바타유 (조한경)
출판 :  문예출판사
출간 :  2015.11.25


종교이론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성찰.

 

지각이 가능한 주체의 자격으로, 인간은 모든 것을 안으로부터 보는 것과 동시에 바깥에서 보며, 자신과 관련한 연속성으로 함께 인지한다.

사물 질서의 세계에서 내밀성을 회복하려면 파괴와 폭력을 외면할 수 없다. 

이성과 도덕을 가져와 폭력을 제한한다면 절대성 역시 그를 피할 수 없다. 

 

제물의 파괴(제사)를 통한 내밀성과의 연결 및 현실적 질서 하에서의 신성의 해방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한다.

허용된 파괴의 방향성은 제국과 전쟁을 오간다. 결국 사물화와 파괴의 대상이 내적이냐 외적이냐 하는 차이이며, 각 방향에서 한계점에 달하면 새로운 제약이 발생한다.

그리고 고대 사회를 벗어나 내밀 질서와 사물 질서가 완전히 분열하며 우리는 해방된 생산성과 무가치의 노동으로 자본의 축적에 골몰하게 되었다. 

 

사물로서의 객체이며 비사물로서의 주체인 개체가 세계와 신성과의 내밀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 신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목적이 타인의 수단이 되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그가 나의 수단이자 사물이 되는 것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것을 벗어난 상태는 물질 세계에서 유지가 가능한 질서인가?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전혀 다른 목적으로 고른 책들이 어쩌다보니 연결이 되고 말았다.

이번 일독에서는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정 정도의 답은 얻을 수 있었다. 

개체와 합일과 질서, 그리고 삶에 대한 화두. 

 

이런 류가 절망스러울 정도로 안 읽혔던 과거에 비하면 재미를 느낄 정도는 된 것에 감사하며.

그래도 다음 책은 과학 쪽이나 좀 가벼운 걸로 읽고 싶다. 쉬엄 쉬엄. 

 

 

- 바타유는 인간도 동물성, 사물 또는 도구(수단)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이것이 바타유의 화두다. 바타유는 수단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을 종교, 전쟁, 축제, 제사에서 찾는다. 바깥을 향한 폭력과 폭발의 환성으로서의 전쟁, 인간의 잃어버린 내밀성을 찾아가는 종교, 파괴적 열망을 분출시키는 축제,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로서의 제사.

 

- 욕망은 (참된)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사물과는 다른 인식 '주체'로 변환시킨다. 사람은 바로 자신의 욕망 안에서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나 아닌 것' non-Moi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며, 내가 '나'로서의 '나'로 구성되거나, 나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밝혀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대립된 '나'의 욕망을 통해서, 욕망 안에서이며, 더 나아가서는 욕망으로서 이다. (인간적인) '나'는 욕망의 '나'이다.

 

- 한 사상은 다른 한 사상의 근거가 되어준다. 사상이란 벽돌담 위로 쌓아 올린 벽돌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어떤 사람이 성찰을 하는 중에 아직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어떤 벽돌을 발견하고도 그 벽돌이 그에게 제기하는 가치를 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의 사유는 사유가 아니다. 그는 성마른 허영 때문에 그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벽돌과 함께 황무지 또는 쓰레기 더미에 묻히게 될 것이다. 

 

- 벽돌을 쌓아 올리는 벽돌공의 작업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금방 쌓은 벽돌이 전에 쌓은 벽돌과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눈에 지금 보이는 책은 사실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이전의 것들에 새로운 것이 얹어진 총체이다. 책은 단순한 파편들 더미가 아니라 건축물로서의 자아 의식이다.

 

-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무한 조립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차라리 용기와 고집을 가지고 비개성적이고 보편적인 흐름을 떠나 혼자만의 의견을 가지라는 유혹이 손짓한다. 물론 전체의 깊은 곳, 불가능은 외딴 생각이 밝혀 줄 수 있으며, 그 방법이 오히려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 외딴 생각이 심오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으려면 전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 가능의 정점을 정하는 것은 바로 불가능이다. 또는 말을 바꾸면 불가능에 대한 의식은 의식으로 하여금 적어도 어떤 성찰이 가능한 성찰인지 깨닫게 해 준다. 경계를 기웃거릴 뿐 폭력이 난무하는 집단에 머문 채, 일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성찰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차지할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철학이란 완성된 하나의 집이 아니라 일종의 작업장과도 같은 것이다 철학의 미완성은 과학의 미완성과는 다르다. 과학은 많은 완결된 부분들이 있으며 미완의 부분과 함께 전체를 이룬다. 반면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상은 미완성으로 남으며, 사상에는, 그것이 어떤 사상이든,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불가능성이 남는다.

 

- 우리의 정신은 말의 섬광이 아니고는 어떤 환상적인 훈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 물이 물에 있듯이 동물은 세상에 있다. ... 물 안에 물이 있듯이, 우리가 보기에, 동물은 필연적으로 세상 안에 존재한다.

 

- 역시, 맨 위를 차지하는 존재들은 인간들과 "절대적 존재"이지만, 동물들도, 식물들도, 대기현상도 정신적 존재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형세에는 미끄러짐의 물매가 있다. "절대적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인간의 정신은 산 사람의 정신과는 달리 물질적 현실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동식물의 정신과 개체로서의 동식물의 관계는 모호하다. 거기에는 주어진 현실들과는 무관한 신화적 관계가 문제가 된다. 조건들을 이렇게 정해 보면 "절대적 존재"들처럼 육체에 의존하는 인간 정신들과 동물, 죽은 사람들, 자율적 정신들 사이에 근본적인 정신적 차이에 의한 계층화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절대 존재, 동물들, 죽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계층적 차이들이 미미하게 느껴지는 동질의 세계, 신화의 세계를 구성한다. 신들의 신, 하늘의 신으로서의 "절대 존재"는 일반적으로 다른 신들과 성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더 강력한 힘을 가질 뿐이다. 

 간단히 말해 현실적 근거가 없는 신화적 정신들이 곧 신이다. 육체적 현실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은 신이며, 또는 신적이다. 인간은 그래서 정신적인 면으로 보면 신적이지만, 현실적인 면으로 보면 결코 신적일 수 없다. 

 

- 연속성의 테두리 안에서 보면 모든 것은 정신적이며, 정신과 육체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화적인 정령들 세계의 입장과 그 세계가 획득하는 절대적 가치는 자연스럽게 육체와 정신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 현실적 세계는 신적 세계의 잔존물이다. 정신적 진실로부터 분리된 현실적 동, 식물들은 차츰 도구들의 공허한 객관성과 결합하고, 죽을 운명의 인간의 육체는 점차 총체적 사물들과 일체를 이룬다. 인간의 현실은 정신의 정도에 따라 신성한가 하면, 현실의 정도에 따라 속세적이다. 동물들, 식물들, 도구들 그리고 우리가 다루는 사물들은 우리의 육체와 함께 현실 세계를 이루며, 비록 신적 힘이 그곳을 지배하고 관류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락한 신의 힘이다.

 

- 요리는 요리법 연구의 의미보다는 '인간은 사물로 만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일반적으로 사물의 세계는 타락한 세계로 여겨진다. 사물의 세계는 그 세계의 창조자를 벗어난다. 근본 원칙은 이렇다. 어떤 것을 종속시킨다는 것은 종속적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종속시킨 주체의 변형을 의미한다. 도구는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변화시킨다. 도구는 도구를 제작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자연을 종속시키게 해주는 한편, 굴복된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소유가 될 뿐 끝내 인간에게 내재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닫혀 있을 때만 인간의 것일 수 있다.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세계임을 잊을 때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나와 대등한 관계에 있는 모든 것을 그것들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소한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 제사는 대상의 현실적 종속 관계들을 파괴한다. 제사는 유용성의 세계에서 제물을 건져내서 알 수 없는 전횡의 세계로 옮겨놓는다. 제사장이 동물을 제사에 바치면 그 순간 거기에 바쳐진 동물은 사물의 세계...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세계... 에서, 마치 육체적 관계를 맺을 때의 소모로서의 여자가 그렇듯이 내재적인, 내밀한 세계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노동에 종속되었던 제물이 이제는 내밀성에 종속된다는 말이다. 인간과 세계, 주체와 대상 간의 내재성, 내밀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제사장과 사물 세계의 사전 분리는 필수적이다. 사물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면 제사장은 제물이 필요하다. 

 

- 일반적으로 죽음과 제사는 공통점이 있는데, 가치를 버림으로써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제사와 연결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장중한 제사라고 해도 반드시 피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살해가 아니라, 버림이며, 줌이다. 제사는 깊은 의미의 드러냄 자체이다. 중요한 것은 지속의 질서-그곳은 모든 재원이 지속의 필요성에 의해 소모될 뿐이다-에서 무조건적 성취의 폭력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 제사의 정확한 의미를 찾자면 바로 이와 같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치품을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유용한 것을 제사 지낸다. 뿐만 아니라 손상된 제물로 제사를 지낼 수도 없다. 사치품이란 제작을 위한 노동의 유용성을 애초에 제거시켜버린 물건이다. 사치품은 이미 노동을 파괴해버린 셈이며, 헛된 광채를 위해 노동을 뭉개버린 셈이다. 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사치품은 유용성을 잃는다. 사치품을 제사 지낸다면 그것은 같은 대상을 두 번 희생시키는 것이 된다. 

 

- 역설적이게도 내밀성은 폭력이며, 파괴이다. 왜냐하면 내밀성은 분리된 개체의 입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 성찰의 인간도 내밀성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은 있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기억은 인간을 인간의 노스탈지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내몰 뿐이다. 그 세계는 인간의 성찰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이 인간과 철저히 독립적이며,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서로 소통 불능의 개별성에 머무는 세계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초월성은 인간에게 분리의 가치가 아니라 회귀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아마 초월성은 초월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초월성은 작동 중에는 작동자로 하여금 작동의 결과를 내재화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개인이 비록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과 관계를 맺지는 못하지만,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데자뷔를 잠을 깨면서 얼핏 보기에 이른다. 데자뷔는 항상 그 자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마찬가지 이유로 그가 보고 있는 자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데자뷔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그의 내부에 기억을 반추시켜내는 어떤 것이지만, 즉시 모든 면에서의 분리를 새롭게 재확립시키면서 감각적인 조건들의 망 속으로 사라진다. 정확히 말해 그 분리된 어떤 것은 본래의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다. 따라서 데자뷔는 사물이자, 분리이다. 반대로 자아란 아무것과도 분리되지 않은 내밀성이다. (그러나 내밀성으로부터 분리된 것, 예컨대 분리된 존재와 분리된 사물의 세계가 거기에 속한다.)

 

- 반대로 죄악을 선으로 정의하는 절대적 선의 세계는 도덕적 신성의 세계와는 서로 다른 세상에 속한다. 

 

- 아마 인류 전체는 사물의 질서로 환원되는 현상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 환원, 사물화의 완수는 인간의 사물화 문제에 대한 발전된 의식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사물과 동일한 차원의 타협 없는 내밀성은 모든 것이 사물화된 세계, 과거에는 대립적이었던 모든 것이 모호한 입장-불가피한 전환-을 드러내는 세계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 의식이 자아를 드러내는 순간, 즉 의식의 눈에 생산이 소모에 바쳐지는 것으로 비쳐지는 순간과 생산의 세계가 더 이상 생산물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는 순간은 일치한다.

 

- "내밀성은 명료한 의식의 경계이며, 그래서 명료한 의식은 내밀성과 관련된 사물들의 변형에 의지하지 않고는 내밀성의 아무것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불가능한 작동을 내포하지 않는 고뇌를 인식할 수 없다.)

 

- 자아의식이 요구한 것은 사실 사물 질서의 파괴는 아니었다. 내밀한 질서는 솔직히 말해 사물의 질서를 파괴할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여서, 사물 질서 또한 내밀한 질서를 완벽하게 파괴한 적도 없다.)

 

- 그러나 인간의 삶을 최상의 가능성의 체험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보편적 체계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감정의 체계일 수 밖에 없다. 

 

- 절대성은 안으로부터 찢어지는 자유로운 폭력이다. 

 

- 한 번 사는 인생, 이거 한 번 갈 데까지 가보는 것도 좋잖아! 라고 하면서 인생을 끝까지 가볼 필요성이 있는 체험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나는 내 사상을 표현하려고 하기보다는 여러분 자신의 사상을 모호한 데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다. 

여러분의 오른 다리가 왼 다리와 다르지 않듯이 여러분은 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것은 이성의 잠이고, 이성의 잠은 흉물을 배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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