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크리스토퍼 M. 베이치 / 김우종
원제 : Lifecycles : reincarnation and the web of life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14.03.05
10월에는 손닿는 대로 읽기로 했다. 구매해서 쌓아둔 책들과 대출한 책들, 그리고 파일들이 폭발하고 있다.
끝은 없겠지만 일단 '정리'를 목표로 세웠으니 책탑들을 줄여보는 쪽으로 노력 중이다.
'전생의 기억'.
이는 많은 작품들에서 다뤄지는 모티프다. '아쉬움을 풀어내기 위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기억'이란 설정은 현재에 완벽히 만족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생은 글렀다'라거나 '다음 생에는 꼭' 같은 우스갯소리도 다음 기회가 있었으면- 현재가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일정 농도 이상 들어가 있다.
<윤회의 본질>의 저자는 현재까지 연구된 사례들 중 객관성이 입증되었다고 평가받는 예들을 모아 윤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설명한다. 그 원리와 내세의 형태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며 연구조차 어렵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종교의 비교적 교의들을 통해 대략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저자가 설명하는 사후 세계와 윤회의 법칙은 매우 흥미롭지만,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은 홀로그램적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적이겠지만, 3차원에 존재하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 하에서는 '바로 지금' 내가 옳은 한 수를 놓는 것이 전체적인 그림의 완성에 기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꿈 속의 나와 꿈을 깬 나 모두가 하나이듯 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모두'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옳음'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저자의 주장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연구이기에 종교적인 접근을 피할 수 없었던 때문인지, 혹은 종교가 가진 것이 답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흔한 말처럼 들린다고 해서 옳은 말이 아닌 것은 아니고- 적어도 나쁠 것은 없는 말 아닌가 한다.
과거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며, 언젠가 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친절을 돌려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찾아오는 선행. 그런 내용들을 여기저기에서 접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내가 행하는 작은 친절이 반드시 나에게- 그리고 미래에- 돌아올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보내는 선물이라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더 수월할 것 같다. '그때 나는 이런 도움이 참 필요했었는데.'
- 신을 향한, 초월을 향한 탐구는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든 대중적 측면과 비교적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는 단순한 가르침에 만족하는 일반 신도들과 기어코 경험적 앞을 추구하는 소수의 전승자를 다 같이 아우른다.
- 반면 종교의 비밀스러운, 즉 비교적 측면을 찾고자 한다면 조금 노력이 필요하다. 소위 '신비전통 (mystical tradition)은, 단순한 신앙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교리가 가리키는 진리를 직접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좀 더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며, 영적 수행에 평생을 투자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준다. 그런 이유로 신비전 통에 심취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서 영적 수행이 덜 방해받는 산 속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곤 한다.
-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미처 못 끝낸 배움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적합한 계획을 세우도록 돕는다. 설령 그들이 많은 부분에 개입했더라도 그 계획은 여전히 우리의 책임이다. 왜냐면 우리는 언제든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채널링 현상들은 워낙 자기기만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없는 수준의 정보를 내놓는 채널러들이 있다.
- 시대를 막론하고, 전생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바르도가 다차원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상위 차원일수록 좀 더 신성에 가까우며 지복에 차 있고, 하위 차원일수록 그 정도가 열하다. 바르도에서 각 영혼은 자신의 영적 단계에 따라 서로 다른 차원에서 머문다.
- 서양철학자들은 신을 언어로 설명해낼 수 없는 이유가 그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수행 전통들은 그 이유가 언어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조차도 감히 그것을 담아낼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언어를 진리의 안내자로서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언어와 경험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 '포괄적인 의식 속으로 내 경험들이 통합될 때, 대령은 현재의 내 정체성도 함께 보전해주는가?' 즉 우리의 현생은 이 통합과정 속에서 그저 정보의 조각들로 흩어지는가, 아니면 계속 한 덩어리로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이 '새로운 정보를 모으는 수단'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냐면 계속 지속된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상위 의식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내 정체성을 순순히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오래된 차를 바꾸길 좋아한다. 하지만 오래된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 이런 문제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숙고할 때마다 나 자신이 '언어'에 갇혀 있다고, 그래서 내가 진정 알고자 하는 그것'을 얄팍하게 전해줄 뿐인 단어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느낀다. 앞선 질문도 둘 중 하나의 답 -'그렇다' 또는 '아니다'- 을 요구한다.
- 만약 이런 '유예' 상태가 실재라면, 내 생각에, 이것은 그들의 생이 끝난 후에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나아갈 방법을 모르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제 발목을 잡고 있거나 미지로 나아가길 겁낸다. 그들의 상처, 경직성, 기대, 신념체계 등등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 비교 전통들은 사물의 선악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알아차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는 '내적인 앎'을 통해서, 이성적 판단 체계를 작동시키지 않고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동양의 가르침은 많은 서양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서양인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덕적 선택을 하게 해주는 보편적인 행동양식과 견고한 윤리체계를 크게 신뢰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체계들은, 비록 겉보기엔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영혼의 나이에 따라 그 배움의 주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 신에 대한 굶주림, 초월을 향한 갈증은 보편적인 것이다. 모든 문화권 속에는 진리를 찾는 움직임이 있었고, 신성의 자각은 전 세계에서 꽃을 피웠다. 장소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영적 세계를 보았고, 영적 귀환을 돕는 호혜의 법칙을 발견했다.
- 세 번째 비유에서, 각각의 종교들은 똑같은 산을 서로 다른 길로 오르고 있는 등반팀들로 그려진다. 출발 전날, 각 팀은 각자 선택한 등반로 입구 근처의 마을에 모여 그 지역의 풍습에 맞게 전야제를 연다. 등반을 시작하고 언덕으로 접어들 때, 그들은 방금 떠나온 마을의 지형을 내려다본다. 높이 올라갈수록 발아래에는 한결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 등반팀은 점점 더 비숫한 풍경을 본다. 높으면 높을수록 시야가 겹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라야 그들 모두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전한 지평선을 똑같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 거기서야 그들은 저 아래의 다양한 언덕들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 이 비유는 특정 종교의 근본 진리를 깊게 (또는 높게) 경험할수록 타 종교와의 공통분모가 더욱 명확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꼭대기까지 오른 등반가들은 진보된 영적 경험을 통해 일반 신도들보다 높은 시야를 갖게 된 각 종교의 신비가들에 해당한다. 다양한 문화에 속한 신비체험들에 관한 심리학적 해석은 이처럼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신비가가 처음 물질세계를 넘어 영적 세계로 발을 내디딜 때, 그 경험은 아직 그들의 문화가 심어놓은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경험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점차 개인적, 문화적 프로그램의 제약을 벗어난다. 전 세계의 신비전통들은 한 목소리로, 신이라 불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것에 관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카를 융은 내담자들이 소위 원형적 (archetypal) 의식 차원에 접근할 때 실제 삶 속에서 동시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동시성 현상을, "물리적 인과관계는 없지만 '의미상으로는' 서로 엮여 있는 사건들"로 정의했다. (나였다면 "'비물질적' 인과관계에 의해 조율된 사건들"로 정의했을 것이다.) 융의 내담자들이 의식의 심층에 도달하여 자신을 치유하는 순간, 마치 마법처럼 그들의 외부 세상도 변화했다. 의미심장한 '우연'들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우주가 공모하여 그들의 내적 탐구를 힘껏 돕는 듯했다. 융은 심 충적 자각이 물리적 사건들까지 통제할 수 있는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에너지를 해방하거나 촉발한다고 추정했다.
-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할 무렵, 놀랍게도 마치 이 여성의 경험을 해설해주는 듯한 조셉 캠벨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가 '당신을 위한 모험이 준비되어 있다'는 내면의 부름(the Calling)을 듣고도 안전과 안정을 좇느라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곧 활기를 잃기 시작한다. 그는 나이가 더 들어서 똑같은 상황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지만, 그 사다리가 다른 벽에 걸쳐져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라는 직감을 따른다면, 삶은 그 길을 탄탄대로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영적 마법(Spiritual magic)은 믿는다. 나는 자기 자신의 지복(bliss) - 당신을 사로잡고 깊숙한 곳에서 확신케 해주는 것- 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문이 열린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렇다! 내 삶에서도,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이것은 진실이다."
- 나는 종교철학자로서 특히 종교의 비교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왔다. 나는 오랜 연구를 통해서 전 세계의 비교전통들이 '공통의' 철학적 맥락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들이 대중적 측면에서는 각각 달라 보이지만 비교적 측면에서는 일관된 공통분모가 있다고 말하는 프리초프 슈온 Frithjof Schuon이나 휴스턴 스미스 Huston Smith 같은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타원의 비유로 되돌아가자면, 우리는 다양한 전 세계 종교들의 상호관계를 타원들이 일부분 겹쳐진 모습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그림) 바깥의 영역은 각 종교의 대중적 측면을 가리키지만, 교집합으로 이뤄진 안쪽의 동심원은 비교적 측면을 가리킨다.
- '생명망 (the web of life)'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카르마와 환생이라는 개념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현재 삶의 패턴을 자각하고 이해하고 변화시킬 능력을 얻게 된다. 9장에서는 생명망 개념을 여러 방향으로 더욱 펼쳐놓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경험할 것들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가설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설을 통해 아주 특별한 현상 한 가지를 설명해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장 효과' (field effect)라고 부른다. 요컨대 누군가가 정신요법을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내면 실제로 그의 외부적 조건들이 즉각적이고 극적으로 변하곤 한다. 인위적인 노력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 같은 종의 생명체들은 모종의 정보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루퍼트 셀드레이크 박사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각 개체의 변화가 모여 동종 집단 전체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가는 현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정 비율 이상의 개체가 특정한 재능 또는 통찰을 얻게 되면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도 그것을 좀 더 쉽게 획득하게 된다.
- 이번 장에서 나는 카르마를 논의하기 위해 두 덩어리의 지식을 수집했다. 배경이 되는 시대와 문화는 각기 다르지만, 카르마에 대한 그 둘의 인식은 상당히 일치하면서도 또 보완적이다. 카르마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전 세계의 비교전통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동양 종교들의 비중의 훨씬 크겠지만 서양 종교들도 똑같이 다루었다. 하시디즘, 수피즘, 영지주의는 윤회와 카르마를 설했다. 또한 지난 2백 년간 타국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발전시켜온 미국의 신지학 운동도 빼놓을 수없다. 두 번째 설명은 정신요법들이 촉발한 사례들의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사례들은 윤회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과 생을 가로질러 작동하는 인과관계의 원리를 조금이나마 알아보기 위해 소개되었다. 비교 전통들이 카르마를 광대한 이론적 문맥에서 살펴보게 해 준다면. 사례 연구는 구체적인 몇몇 패턴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조엘 휘튼과 조 피셔의 놀라운 책 <생과 생 사이>(Life Between Life)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이 책은 죽음 이후부터 환생 이전까지의 단계, 즉 한 생의 카르마가 다음 생의 조건들로 옮겨가는 과정을 파헤친 선구적인 책이다.
- <티베트 사자의 서>에 묘사된 사후세계와 휘튼이 연구한 초의식 사례들은 그 내용이 대단히 비슷하다. 사후세계에 관해, 이국의 고대 문헌이 기록한 내용과 현대의 의식연구가들이 발견한 내용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현대의 연구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거나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 "전생의 죽음 이후에 나는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느꼈다. 내 몸이 커지고 부풀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곧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극도의 희열이 흘러넘쳤다. 또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뭔지, 또 내 자리는 어디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자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명쾌했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 바르도 속에서. 영혼은 윤회의 참된 목적이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정화하여 신께 되돌리기 위함임을 깨닫게 된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그러므로 신께로 돌아가려면 신과 같아져야 한다. 신이 계신 곳까지는 많은 상위 차원들이 있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씩 옷을 벗어 마침내 참된 자유를 얻어야 한다. 이런 배움의 과정엔 끝이 없다. 때로 우리는 상위 차원을 잠깐 엿볼 기회를 얻는다. 상위 차원들은 그 이전 차원들보다 가볍고 밝다."
- "지난 생에 대한 회한, 후회, 자책감이 뜨겁게 솟아오르고 그 고통과 슬픔 탓에 차마 계속 바라보기가 버거워진다. ...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상처가 온전히 나 자신을 향했던 것인 양 매섭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진실은, 마음을 바꾸고 실수를 바로잡을 시간이 이미 끝나버렸다는 점이다. 지난 생은 이미 문이 닫히고 봉인되었다.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샅샅이 까발리는 '심사위원회'에서 나는 내가 한 짓과 회피한 것들의 결과를 직면해야 한다."
- 다음 생에 대한 결정권에 관해서는 영적 전통마다 사뭇 다른 관점을 취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역할은 극히 적으며 대부분이 안내자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휘튼 박사의 견해도 그러했다. 우리가 그 일을 떠맡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와 변수가 너무나 많지 않느냐는 것이다. 깔루 Kalu 린포체도 The Dharma라는 책에서 티베트 불교를 논하며 같은 입장을 보였다. 그는 카르마의 힘이 워낙 강력하기에 우리에겐 별로 선택권이 없다고 보았다. 반대로 Far Journey에서 우리 스스로 다음 생의 시기, 장소, 내용을 선택할 수 있다고 설명한 로버트 먼로 같은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이견은 영혼의 '나이(age)' 에 따라 그 영혼의 경험도 달라지기 때문인 듯하다. 경험량에 따라 운신의 폭도 달라질 거라는 말이다.
-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전생의 악업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생각이다. 지금 누군가가 또는 자기 자신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전생에 저지른 끔찍한 범죄 또는 악행 때문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첫째로, 앞서 말했듯이, 그 고통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준비 과정일 수 있다. 둘째로, 지상에서 윤회하는 단계를 거의 끝마쳐가는 영혼들은 좀더 큰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마무리 짓는 속도를 최대한 높이길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더 가혹한 삶을 자처한다. 심지어 휘튼은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할수록 삶의 내용은 더 가혹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내용이 가혹해질수록 그만큼 영적 성장을 촉진할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도를 높이기 위해, 그간의 전생들에서 미해결 된 카르마 조각들을 한 번의 생에 몰아넣는 것이다.
- 이처럼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실은 지상의 윤회 과정을 끝마치려 서두르고 있는 영혼일지 모른다. 우리는 삶 속의 불행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를 절대 알 수 없으며, 그러니 최선의 선택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휘튼의 내담자 중 일부는 카르마 계획에 따라 현생에서 겪을 일들을 바르도에서 미리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중엔 구체적인 가르침을 받은 경우도 있었고, 그저 일반적인 지침만을 얻은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의식은 최면에서 깼을 때 그 사전경험의 기억을 유지할지 말지를 철저히 통제했다는 점이다. 스스로 미래의 특정 사건들을 예견해서는 안 되는 경우에, 그들은 최면에서 깨는 순간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심지어는 최면에서 깨기 전에 미리 휘튼 박사에게 입조심을 -자신의 카르마가 방해받지 않도록- 당부하기까지 했다. 휘튼이 이후에 실제 현실과 이 예견들 가운데 시기가 가까웠던 일들을 확인해본 결과, 그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 먼로가 언급했듯이, 대령은 우리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때만 도움을 준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일반 원칙인 듯하다. 도움 요청이 없는 한, 상위 차원의 의식은 하위 차원의 의식을 돕지 못한다. 즉, 기본적으로 우리는 홀로 최선을 다해서 과제를 해나가게끔 되어 있다. 그래야 우리의 한계치를 벗어난 시련들을 마주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번 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우리 자신의 더 큰 정체성과 그것과의 유대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사다리의 끝에 올라가야만 대령의 비범한 지혜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상황뿐 아니라 긍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대령의 도움 속에서, 삶을 위기의 연속이 아니라 편안하고 균형 잡힌 상태로도 완벽히 영위할 수 있다.
- 전생 기억이 저장된 심층의식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의 '현재 의식(에고)'이다. 심층 의식을 탐구할 때도 우리는 현재의 식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재 의식이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심층 의식이 사뭇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만약 확실하게 정리된 의문을 갖고 심층 의식에 접근한다면, 당신은 확실하게 정리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현재의 삶 속에 두루 배어 있는 문제를 갖고 접근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한 좀 더 복합적인 분석을 돌려받을 것이다.
- 한 발 더 나아가서, 당신이 특정한 문젯거리에 매이지 않고 그저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심층의식에 접근한다면, 현생의 제반 조건들을 만들어낸 전생의 기억들을 온전히 다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마주할 결과도 달라진다. 즉 의식을 탐구하는 것은 씨앗을 싹 틔우는 것과 같다. 씨앗의 종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그 내적 경험이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에 의한 투사물이란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소통창구가 결정되는 것에 가깝다. 산꼭대기에서 현자를 만났어도,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면 바보 같은 답밖에 얻지 못한다.
- <바르도 퇴돌>은 우리가 몸을 떠나고 흰빛을 만난 후에 '초에니 바르도 Choynid Bardo' (실재를 경험하는 바르도)라는 차원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의식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무의식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에고는 힘을 잃고 뒤로 물러난다. 여기서의 주요 법칙 중 하나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 '생각한 대로 경험한다'이다. 무얼 생각하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정확히 경험하게 된다. 생각과 기억뿐 아니라 무의식 속에 짓눌려 있던 상상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것들이 이 바르도의 에너지장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존재들, 상황들, 조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천국과 지옥을 창조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부정적 생각과 긍정적 생각이 함께 들어있으므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여러 강도로 번갈아 경험하게 된다.
- 따라서 이런 종교적 배경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윤회론에 대해 적잖은 거부감과 불안감을 내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새로운 연구결과들에 설득되더라도, 그로 인해 조만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수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이런 시련에 처한 나의 학생들을 수백 명 관찰해왔다. 대부분은 윤회론을 서양의 신학과 당연히 불화할 수밖에 없는 동양의 관념 중 하나로 치부해버린다. 개중엔 환생의 증거들을 살펴보는 일조차, 마치 구원받을 자격을 잃게 하는 이단 행위인양 여기기도 한다. 동시에 그들은 대학생으로서 증거를 토대로 한 모든 가설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인 호기심도 느낀다. 아이러니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학생들이야말로 신앙생활이라는 배경 덕분에 영적 문제들에 대해 빼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경우가 많다.
-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깨닫게 된 어떤 이유로 그것을 불러들였다. 지금은 전혀 이해되지 않겠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우리에게 유용한 경험이다. 우리는 그 모든 의미를 명쾌하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제대로' 반응하면 된다. 그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 경험에 담긴 선물을 발견하고, 그 경험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우리 앞에 그 경험들을 가져다 놓았다. 거기에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그 열쇠를 찾아 돌린다면 아마도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외부 상황이 변하는 경우이다. 어둡고 불길한 징조들이 흩어지고, 삶의 조건들이 개선된다. 이제 그것들은 제 역할을 다해 쓸모가 없어졌다. 다른 하나는, 외부 상황은 변함없이 그대로지만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경우이다.
- 성장의 기회를 한 번 거부하면 삶을 변화시킬 원동력이 약간 줄어든다. 두 번 거부하면, 더 많이 줄어든다. 계속 거부한다면, 아예 성장의 기회 자체가 등장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런 삶은 날마다 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이어서 무척이나 단조로울 것이다. 새로운 일도 없고, 재밌는 일도 없고, 딱히 고민도 없다. 삶이 속도를 늦춰 가장 질 낮은 진화 궤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모든 선택은 특정한 '감정 에너지'를 담은 경험을 창조해냄다. 우리는 이전의 경험으로부터 수집한 에너지에다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보태며 살아간다. 그것이 소위 우리의 '에너지 총합'이다. 이 에너지 총합에 의해 우리 삶의 주제가 결정된다.
- 생명망은 우리가 살면서 끌어모은 에너지에 응답한다. 따라서 우리 내면의 에너지가 바뀌면 머지않아 우리 삶의 외부적 조건도 바뀐다. 우리의 내면과 외부의 에너지는 쉼 없이 상호작용한다.
- 1945년에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쉰두 개의 문헌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학자들이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부르는 이 신앙은 일레인 페이절스 Elaine Pagels의 저서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the Gnostic Gospels)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페이절스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각자가 내면에 계신 신을 직접 경험하는 일을 중요시하는 신비주의 성향의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영지주의는 널리 공인된 교리는 아니었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장식하며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에 영향을 미쳤다. 영지주의는 성사를 통한 구원보다는 그노시스 gnosis, 즉 내적 깨달음에 의한 변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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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어스 필로스] 미카엘 대천사의 메시지와 예언 (0) | 2021.10.02 |
[마이클 A. 싱어] 될 일은 된다 - 내맡기기 실험이 불러온 엄청난 성공과 깨달음 (0) | 2021.09.27 |
[엘레인 제임스] 우리는 너무나 복잡하게 산다 (0) | 2021.09.19 |